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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활명수’/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활명수’/손성진 논설고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가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부채표 ‘활명수’를 제조했다. 국내 최초의 양약(洋藥)이자 한·양방을 합한 퓨전 신약이었다. 같은 해 민병호의 아들 민강은 동화약방을 차려 활명수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활명수는 ‘목숨을 살리는 신통한 물’이라는 뜻으로 국내 최초의 상표이며 최장수 의약품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구한말에 화평당이나 제생당은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약을 제조하던 약방으로서 큰 광고주였고 동화약방도 대한매일신보에 부채표를 로고로 내세워 광고를 해 왔다. 동화약방은 경술국치 이후 대한매일신보가 매일신보로 바뀐 뒤 1912년 1월 1일자에 신년 축하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매일신보는 이날 녹색과 붉은색을 섞은 컬러로 평소 지면의 네 배인 16면을 발행했는데 이 광고는 8면에 실렸다. 이날 광고는 대부분 ‘恭賀新年’(공하신년), ‘謹賀新年’(근하신년)의 제목을 써 넣은 새해 축하광고였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라는 이유 때문에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할 수는 없다. 광고는 광고일 뿐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기업이 광고할 매체가 매일신보밖에 없었다. 오히려 동화약방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업이었다. 초대 사장 민강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단 사건에도 관여했다. 이 사건은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동화약방은 서울 중구 순화동에서 출범했는데 민강은 동화약방을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거점인 서울연통부로 이용했다. 순화동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서울연통부가 서울시청의 역할을 하며 임정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내 정보를 임정에 보고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했다고 씌어 있다. 민강은 활명수를 판매한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고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가들은 돈 대신 활명수를 중국에 가져가서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약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과 가격이 비슷할 만큼 비쌌다. 1923년 감옥에서 순국한 민강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동화약방의 독립운동 참여는 민강에서 중단되지 않았고 유지를 받들어 동화약방의 역대 사장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까스활명수’의 아버지 윤광렬 동화약품 명예회장은 광복군 5중대장 출신이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동화약방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sonsj@seoul.co.kr
  •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뛰어넘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이다.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찔렀고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조선의 유지 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 장군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김경천은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친필 수기를 남겼다. 늦게서야 발견된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시영이 보고 싶다. 신동천이 보고 싶다. 신용걸이 보고 싶다. 안무가 보고 싶다.…” 독립군 전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우는 구한말 군기창장 등으로 일한 고위인사였다. 1900년 10월 김경천 가족은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했고 김경천은 190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점 주인이 건네준 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905년 9월 김경천은 도쿄 육군유년학교 예과 학년에 입학했다. 65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3기생으로 들어가 191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에 나라는 일본으로 넘어갔고 김경천은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다. 김경천은 그래도 실력 양성을 위해 기병학교까지 마친 뒤 1919년 2월 귀국했다. 2·8 독립선언이 선포되던 때였다. 귀국하자마자 3·1운동이 일어났고 시위 현장을 보면서 김경천은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 우리 청년 4~5명이 실려 있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다. 그 근방에 나이가 40가량 되는 부인이… 그 뚫어지고 더러워진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는 것이 보인다. 아, 나도 가슴이 막히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함남 북청서 태어나 서울 사직동 이주 김경천은 더는 일본 군인으로 살 수 없었다. 일본 육사 후배 이응준, 지대형(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중간에서 길을 달리했다.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수원으로 내려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이 망명하자 일제는 충격에 빠져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부인 유정화를 체포해 고문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일단 중국 안동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하루 20㎞ 넘게 보름 동안 걸어 봉천성 유하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 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동천(東天) 신팔균, 청천(靑天) 지석규 세 사람은 남만주 삼천(三天)이라 불렸다. 1919년 9월 중순 김경천은 길림 서간도 군정서에서 무기구입 위원으로 선정돼 연해주로 출발,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달 12일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빨치산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있었다. 일본 시베리아 주둔군은 보복으로 4월 4일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 한국인 빨치산과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이때 살해됐다. 김경천은 간신히 피신했다가 한인 빨치산 근거지인 내수청 대우지미로 이동했다. 당시 간도나 연해주에는 중국 마적이 날뛰었다. 마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일제는 마적단에 무기를 대주고 한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김경천은 마적을 일본군과 동일시하고 대우지미에서 마적토벌대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4월 8일 마적 380여명이 침입하자 김경천의 토벌대 45명은 소비에트 적군 600명과 연합해 36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어 창해청년단을 조직, 총지휘관을 맡아 1920년 5월 다우지미 전투에서 마적 300여명 중 60명만 살려 보냈다. 1921년 1월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독립을 하자는데 너무도 희생이 없다. 너무도 정치에만 눈이 팔리고 실천력이 적다. 너무도 자칭 영웅이 많다. 너무도 당파가 많다”고 한탄했다. 군인인 그에게는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었고 자리다툼만 하는 임정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1년 4월 트레치푸진에서 혈성단 강국모의 요청으로 한인 빨치산부대 사령관이 됐다. 더불어 ‘수청의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모인 한인 빨치산 병력이 800여명이었고 소총과 군마로 무장했다. 김경천은 트레치푸진에 설립된 사관학교 교장도 맡아 사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시베리아 내전서 가장 위대한 ‘이만 전투’ 그해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적군(赤軍·혁명군)과 연합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연합해 의병대와 적군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혁명 이후 극동 지역이 혼돈에 빠지자 시베리아를 차지할 기회라고 판단해 17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와 적군은 일본군과 백군에 포위돼 퇴각했고 카르톤 마을에서 적군 대대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김경천은 적군 패잔병과 의병대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이만(달레네친스크) 지역의 백군을 공격했다. 200여명의 혼성부대는 700여명의 백군과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이만을 정복했다. 이 전투는 시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는 극찬을 받는다. 김경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다”고 썼다. 1922년 여름 이후 김경천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육사에서 교관을 초청해 급여를 주며 교육시켰다. 김경천의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러시아인들과 협력했고 적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로 진공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빨치산부대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김경천은 이후 1932년부터는 하바롭스크 합동국가보안국 통역으로 일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스탈린의 강압정치가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돼 1936년 9월 3년형을 받았다. 1939년 2월 일단 석방됐다. 그 사이 가족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재회도 잠시 그해 12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김경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이 이유가 됐을 것이다.●광복 못 보고 유배지서 심장질환 사망 김경천은 2년 동안 철도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코미자치공화국으로 유배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김경천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후 복권됐다. 김경천은 수용소 근처에 집단으로 묻혀 별도의 묘소가 없다. 김경천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밀항선을 타고 연해주로 가 같이 살았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주는 더욱더 큰 고난을 주었다. 가족들은 국영농장에서 힘든 노동에 동원됐고 인민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998년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막내아들 김기범(1932년생)씨와 막내딸 김지희(1928년생)씨는 정부의 초청으로 아버지 사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5년 8월 정부는 모스크바에 사는 의학박사인 김경천의 손녀 옐레나 필랸스카야 등 후손 7명의 특별귀화를 허가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고종의 조칙(詔勅)으로 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을미사변 직후인 김홍집 내각 때였다.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자르자 상투가 없는 머리에 얹을 모자가 외국에서 들어와 인기를 끌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4일자에 중산모자, 중절모자, 운동모자, 학생모자, 부인모자, 예복모자, 상복모자 등 모자를 종류별로 소개한 광고가 실렸다. 이 모자들은 보통 모자가 아니라 말총으로 만든 말총모자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을 뜻하는데 질기고 촉감이 좋아 예전부터 갓, 망건, 탕건, 관모, 허리띠 등을 만드는 데 쓰고 있었다. 광고 위쪽에는 등록상표인 비둘기 문양이 있다. 그 아래에 남성이 모자를 물로 씻는 모습이 있듯이 말총모자의 장점은 심하게 구겨져도 물에 담그면 잘 펴지고 세척이 쉽다는 점이었다. 땀으로 더러워진 부분과 먼지, 때를 비누와 솔로 문질러 씻으면 새것처럼 쓸 수 있다고 광고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전통 갓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을 이용해 만든 서양식 모자는 광고에 써 놓은 대로 발명특허를 받은 제품이었다. 광고를 내기 5일 전인 1909년 통감부 특허국에 특허 제133호로 등록됐으며 한국인 특허로는 1호였다. 말총모자를 만들어 특허를 받은 인물은 정인호(1869~1945) 선생이다. 그런데 광고에 보면 좌우에 서양식 복장을 하고 모자를 쓴 남녀가 ‘옥호서림광고’(玉虎書林廣告)라고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어 의아하게 한다. 정인호는 궁내부 감중관이라는 관직과 청도군수 등을 지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사직하고 1906년 고향 양주에 동흥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또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구세의원이라는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1908년 선생은 ‘초등대한역사’, ‘최신초등소학’ 등의 교과서를 저술, 이 교과서들을 옥호서림에서 펴냈는데 옥호서림의 주인이 바로 정인호였다. 모자를 책과 함께 옥호서림에서 판매한 것이다. 선생은 말총으로 모자뿐만 아니라 핸드백, 토시, 셔츠 등의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 중국 등에 수출도 하며 민족기업으로 키웠다. 그렇게 번 돈은 구국활동에 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 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상하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특히 부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1920년 12월(음력) 충남의 부호 임병철에게 군자금 납입을 요구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sonsj@seoul.co.kr
  • 독립운동 외증조부처럼, 어머니 리더십 따라… 육사 266명 소위 임관

    독립운동 외증조부처럼, 어머니 리더십 따라… 육사 266명 소위 임관

    “외증조부님과 외조부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조국을 위한 헌신을 본받고자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이제 야전에서 나라 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겠습니다.” 5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진행된 ‘육군사관학교 제76기 졸업 및 임관식’에서 신임 장교가 된 신윤혁(왼쪽·23) 소위는 임관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 소위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부근 선생의 외증손자다. 이 선생은 1919년 4월 3일 경남 창원 웅동면 마천리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 선생은 거사 당일 면사무소 앞에 모인 600여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던 중 동료들과 함께 일제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 선생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신 소위의 외조부도 6·25전쟁 참전 유공자다. 신 소위는 “외증조부와 외조부의 뒤를 이어 장교의 길을 걸으며 애국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졸업 및 임관식에서는 여생도인 나호선(오른쪽·22) 소위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나 소위는 생도 생활에서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하며 인정을 받았다. 나 소위는 “육사에서 리더십학을 전공하면서 많은 리더십에 대해 배웠지만 ‘어머니 같은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평소 제가 존경하는 어머니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임관식에서 소위 계급장을 단 신임 육군 장교는 266명이고 이 중 여군은 25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초교 만세시위’ 박망아 선생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27일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경북 의성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늦깎이 초등생’ 박망아 선생 등 10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박 선생은 18살이었던 1919년 의성 비안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하던 중 150명의 전교생을 교정에 집결시켜 3월 11일 비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경계를 강화해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무산됐다. 박 선생은 굴하지 않고 이튿날인 12일 동료 학생들을 학교 뒷산에 집결시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박 선생은 징역 8개월이 선고돼 옥고를 치른 뒤 22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박 선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은 현재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항쟁으로 의미가 크다. 을사늑약 후 의병활동을 벌이다 순국한 이강복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이 선생은 1905년 일사늑약이 체결되자 1907년 전남 담양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해 일본군과의 전투 중 전사했다. 이 선생은 전주 이씨 가문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적극적 의병활동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실천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포상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3명(애국장 9, 애족장 14), 건국포장 14명, 대통령표창 69명이다. 포상자 중 여성은 5명이고, 생존 애국지사는 없다.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자는 총 1만 5931명이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2·8독립선언서 국내 반입, 3·1만세 시위… 평생 독립 위해 싸운 ‘열사’

    “너희들은 왜 죄 없는 사람을 핍박하느냐.” 취조관의 질문에 김마리아는 되받아쳤다. 왜경은 가죽 채찍과 대나무봉을 휘두르고, 양팔을 엇갈리게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놓고 팽이처럼 돌리며 때렸다. 옷을 벗기고 쇠갈퀴로 가슴을 찌르고 불로 지졌다. 살이 터지고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허리띠에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고향 황해도로 자금을 모으러 갔다가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여학생들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황에스터, 나혜석 등 11명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3월 5일 서울역광장 등에서 대규모 만세 시위가 벌어졌고 마리아와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도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다음날 학교에 왜경이 들이닥쳐 마리아를 포승줄로 묶어 끌고 갔다. “선생님!” 학생들은 울부짖었다. 마리아는 고문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고이는 등 만신창이가 됐다. 지옥 같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가 그해 7월 24일 증거 부족으로 석방됐다.김마리아는 1892년 7월 11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마리아는 1906년 6월 서울로 가 서울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로 개명)에 입학했다. 마리아의 작은언니 미렴과 오현관·오현주 자매 등은 누룽지를 함께 먹으며 공부했다고 해서 ‘누룽지방 형제’라고 불렸다. 1910년 6월 졸업한 마리아는 모교 교단에 섰다. 정신적 지주였던 교장 루이스는 마리아에게 유학을 권했다. 1915년 5월 마리아는 일본 도쿄여자학원에 입학했다. 졸업이 다가올 즈음 민족자결론이 무르익었다. 1919년 1월 모임에서 황에스터는 “국가의 대사를 남자들만이 하겠다는 것인가”라고 열변을 토했다.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은 남학생 11명이었지만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는 마리아와 황에스터 등 여학생들도 참석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는 열혈을 유(流)할지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일본 경찰이 습격해 회관은 아수라장이 됐다. 마리아도 끌려갔다가 풀려났다. ●애국부인회 결사부 만들어 직접 독립운동 3·1만세 시위 주도로 악랄한 고문을 받은 몸에서는 고름이 흘렀다. 그사이 숙부 필순이 이역만리에서 일본인 의사가 준 우유를 마시고 숨졌다. 틀림없는 독살이었다. 마리아는 분루를 삼키며 또 다른 길을 모색했다. 몸도 성치 않은 마리아의 의지는 놀라웠다. 석방된 지 석 달도 안 된 1919년 10월 19일 뜻을 같이하는 여성 16명이 모여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했다. “부녀들도 남자들처럼 혁혁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마리아는 말했다. 마리아는 회장이 되고 시도 지부장을 뽑는 한편 결사부를 만들어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하고자 했다. 한 달 만에 회원이 2000여명으로 늘어나고 현재 가치로 수억원인 6000원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누룽지방 형제’ 오현주가 불쑥 찾아왔다. 오의 안내로 임정 밀사를 자칭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부인회의 활동을 캐묻는 것이었다. 10여일 후 마리아가 수업을 하고 있을 때 종로경찰서 왜경들이 들이닥쳤다. 마리아는 수갑이 채워져 연행됐다. 오현주의 배신이었다. 마리아는 붙잡힌 동지들에게 “어떤 고통을 당해도 비밀을 알려 주지 말자”고 당부했다. 간부들은 포승줄에 묶여 서울역으로 끌려갔다. 그 밀사는 대구경찰서 소속 경찰이었다. 군중은 “여성독립단이여, 용기를 내시오. 대한독립 만세!”라고 외쳤다. 대구로 붙잡혀 간 간부는 52명이었다.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고 회장인 마리아에게 더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장작개비를 두 무릎 사이에, 쪼개진 대나무를 두 팔 사이에 끼우고 몸을 빨래 짜듯이 비틀어 댔다. 마리아는 신음도 내지 않고 고통을 견뎌 냈다. 그러자 고무 호수를 코에 끼우고 물을 넣었다. 마리아의 얼굴과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대구 검사국에 송치된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만세 시위 때 심문한 가와무라 검사가 자진 전근을 해온 것이었다. 가와무라가 생년월일을 묻자 마리아는 “서력 1892년…”이라고 했다. “어째서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는가”라고 하자 마리아는 “일본 연호를 배운 적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고문에 고문이 더해져 마리아는 몸이 퉁퉁 부었고 정신 이상 증세도 보였다. 일제는 마지못해 병보석을 허가했다. 가와무라는 ‘일본의 국적(國賊)’이라며 징역 5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됐다.●임시의정원 의원 임명… 中서도 항일운동 마리아는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몰래 병원에서 빠져나와 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1921년 7월 21일 중국 땅을 밟았다. 고문 후유증은 여전해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마리아는 1922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에 임명됐고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창조·개조·옹호파로 분열돼 있었다. 1년에 가까운 통합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마리아는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 1923년 7월 1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건강은 계속 나빠 병석에 눕는 날이 많았다. 힘들게 미주리주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연구학생을 거쳐 뉴욕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에 진학, 1929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리아는 뉴욕에서 황에스터 등 옛 동지를 만나 근화회를 조직했다. 혈혈단신 마리아의 유학 생활은 몹시 고달펐다. 점원, 행상, 보모 등을 전전하며 학비를 벌었다. 연민과 애정을 느끼고 혼인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미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며 거절했다.1932년 7월 마리아는 11년의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땅을 밟았다. 일제는 감시와 협박을 계속하면서 거주지와 직업을 제한했다. 마리아는 다음해 함남 원산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탄압을 받았고 신학원도 폐교당했다.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은 전신을 짓눌렀다. 마리아는 쓰러졌고 1944년 3월 13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와 맞섰던 52년 인생을 마감했다. 언니 미렴은 유골을 대동강에 뿌렸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열사의 모교 정신여학교는 정신여중고로 바뀌어 1978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전했다. 종로구 연지동에는 옛 교사(校舍)와 수령 550여년의 교목(校木) 회화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정 한쪽에는 서울보증보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서울보증보험과 종로구청의 노력으로 지난해 회화나무 옆에 열사의 흉상을 건립하고 탐방로를 조성했다.●유품은 치마저고리·수저 한 벌이 전부 잠실종합운동장 옆 정신여중고 교정에 들어서면 또 다른 흉상과 ‘김마리아관’(대강당)이 눈에 들어온다. 교장실에서 만난 최성이 정신여고 교장은 “열사는 평생 독립운동을 했고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원”이라면서 “사단법인 김마리아기념사업회 주도로 추모 사업을 펴고 있는데 업적에 비해 낮은 훈격을 높이려는 노력이 무산돼 아쉽다”고 말했다. 한평생 외롭게 살다 간 열사의 유품은 치마저고리와 수저 한 벌이 전부다. 그런데 치마저고리를 자세히 보면 오른쪽 섶 길이가 짧다고 한다. 최 교장은 “고문으로 열사의 한쪽 가슴이 없어져 양녀 배학복이 한쪽 섶을 짧게 해서 손수 만들어 드린 한복”이라고 설명했다. 몇 안 되는 유품은 강당 1층의 작은 공간과 동창회 사무실에 전시돼 있다. 숙원 사업인 기념관 건립은 진척이 없다. 그래도 올해 두세 교과서에 열사의 이야기가 실린 것은 성과라면 성과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마리아 선생의 가계와 정신여학교김마리아의 본관은 광산이다. 18세기 말 현조부 김창주가 조정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낙향, 버려진 땅을 개간해 대지주 집안이 됐다고 한다. 김마리아 가계에는 부유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몸바쳐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큰숙부인 김용순(김윤오)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서울로 이주해 서우학회라는 애국계몽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동생 김필순과 김형제상회를 경영하며 국권회복 운동의 본거지로 내놓았다. 김윤오의 외딸인 세라의 딸이 서울여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이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안창호와는 의형제 사이였고 구한말 독립지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구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소위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한인들의 진료에 헌신하고 몽골 치치하얼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김필순의 셋째 아들인 김덕린은 김염이라는 예명으로 20세기 초 상하이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영화 황제였다. 김염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고모 김순애(건국훈장 독립장)는 중국으로 망명,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로도 일한 독립운동가다. 그의 남편은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고모 김필례는 김마리아가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하고 광주 수피아여고 교감과 교장으로 근무하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아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모교인 정신여고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도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김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가출해 무작정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배학복을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또 1937년 어느 날 누군가 문밖에 버리고 간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아 태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키웠다. 그러나 마리아가 죽고 태국이도 어느 목사에게 맡겨졌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배학복은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과 결혼했으며, 수년 전 사망했다. 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출신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보낸 선교사 애니 앨러스가 고종이 하사한 주택에서 문을 연 정동여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5년 연지동으로 학교를 옮겨 연동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1903년 연동중학교로,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했다. ‘정신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항일 구국활동에 참여한 정신여학교 출신이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190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22년 14회까지 졸업한 학생이 169명인데 당시 졸업생의 거의 60%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던 셈이다. 김마리아 외에 유각경, 박순희, 이정숙, 김순애 등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많다. 특히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많다고 한다. 졸업생 이정숙, 이아주 등이 간호사양성소를 나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독립운동을 했다. 정신여고 최성이 교장은 “배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는 학교의 가르침과 건학 이념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sonsj@seoul.co.kr
  • ‘중국인 독립유공자’ 쑤징허 별세…文대통령 조화·위로 메시지 전달

    ‘중국인 독립유공자’ 쑤징허 별세…文대통령 조화·위로 메시지 전달

    일본강점기 중국에서 한국 광복군의 지하 공작원으로 활동한 중국인 독립유공자 쑤징허가 별세했다. 102세. 11일 유족에 따르면 그는 지난 9일 상하이시의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졌다. 외국 국적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1918년 중국 허베이성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 명문대로 손꼽히던 난징중앙대학에 입학해 한인 청년들과 인연을 맺었다.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해 항일 활동을 펼치던 조일문(2016년 작고)과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후 쑤징허는 난징 내 일본군 동향 수집과 광복군 모병 활동, 광복군 입대 청년 호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44년을 전후해 세 차례에 걸쳐 한인 청년들을 난징에서 탈출시켜 시안의 광복군 부대까지 호송하는 일을 완수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시안으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한인 청년이 100여명에 달한다. 우리 정부로부터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지만 외국 국적자여서 경제적 지원은 누리지 못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유족들에게도 별도의 위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일제 심장부 도쿄서 일왕에 수류탄… 이봉창 의사 의거 88주년 오늘 기념식

    일제 심장부 도쿄서 일왕에 수류탄… 이봉창 의사 의거 88주년 오늘 기념식

    일제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 거행된다. 국가보훈처는 7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8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8일 진행된다”고 밝혔다.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회장 정수용) 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기념식은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시민, 학생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이 의사 약사 보고, 기념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1901년 서울에서 출생한 이 의사는 1931년 1월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만나 일왕 폭살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거사를 준비했다. 1년여의 준비를 마친 이 의사는 1931년 12월 말 도쿄에 도착했다. 히로히토 일왕이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날을 거사일로 결정했다. 이 의사는 당일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나타나자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서 폭발해 일장기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만을 거꾸러뜨리는 데 그쳐 이 의사의 계획은 안타깝게 실패로 끝났다.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 이 의사는 같은 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 의사의 유해는 1946년 김구 선생에 의해 국내로 봉환돼 효창공원 내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 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 ●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 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악덕 친일 부호 장승원 사살… 세금 수송 마차 털어 독립운동 자금 조달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친구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생부(生父)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앞부분이다. 고헌(固軒) 박상진은 1884년 12월 6일(음력) 울산 북구 송정동에서 태어나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3세 때 경북 경주 녹동으로 가 성장했다. 의사의 집안은 조부와 생부, 양부가 모두 급제했고 재산이 7000석이나 됐던 명문가였다. 종형을 따라 경북 청송 진보에 갔다가 그곳에서 왕산 허위를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은 것이 운명을 바꾸게 됐다. 왕산은 구한말 평리원장(대법원장 격)에 올랐다가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의병 투쟁을 벌인 혁신유림이었다.스승을 따라 상경한 의사는 21세에 양정의숙에 들어가 안희제 등 동지를 만나 국권 회복의 열망을 키웠다. 양정의숙을 졸업한 해인 1908년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로 들어가 버려진 스승의 시신을 포대기로 감아 안고 나오면서 의사는 무력투쟁을 다짐했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에 가입하고 의사는 투쟁 계획을 세워 나갔다.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1년 의사는 스승과 가까웠던 안동 유림 이상룡, 김동삼이 설립한 만주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방문해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중국 단둥에 안동여관을 설치했는데 독립운동 연락기관이었고 나중에 광복회의 거점이 됐다. 이듬해 귀국한 의사는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회사를 차렸다. 곡물 거래는 해외를 드나들고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데 감시를 덜 받는 이점이 있었다. 국내외에 연락 거점을 마련한 의사는 1915년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다. 7개 강령의 첫째는 친일 부호의 의연금을 받아 내고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한다는 것이었다. 일제 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내용도 있다. 겉으로는 회(會)였지만 사령관, 사령부, 지휘장 등 군대식 조직과 전국 각지에 지부를 갖춘 무장투쟁 단체였고 박 의사는 총사령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거사에 나섰다. 박 의사의 명령을 받은 우재룡은 1915년 12월 24일 엄동설한에 경주 광명동 효현교(나무다리) 일부를 파괴한 뒤 풀숲에 숨어 기다렸다. 일제가 악랄하게 징수한 세금 수송 마차가 대구로 가려면 효현교를 건너야 했다. 전날 권영만은 마부를 찾아가 대구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며 애걸복걸해 짐칸에 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마침내 효현교에 이른 마차가 부서진 다리를 보고 속도를 늦추자 그 틈을 타 권영만은 당시로선 거액인 8700원이 든 세금 행낭을 들고 유유히 빠져나왔다.1917년 11월 10일 밤 경북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경북 구미 집에서 권총탄 소리가 터졌다. 7만 5000석을 수확하는 당시 최고의 부자이면서 악명이 높았던 장을 처단하는 총소리였다. 그는 왕산의 추천으로 관찰사가 됐는데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어겼을뿐더러 밀고까지 해 광복회원 채기중과 강순필이 사살한 것이다. “조국 광복을 하자는 것은 하늘과 사람의 같은 뜻이니 이 큰 죄를 성토하노라.” 거사 후 두 사람은 담벼락에 이런 격문을 붙여 놓았다. 장은 광복 후 미군정 수도경찰청장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다. 장택상은 아버지 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노덕술 등 친일 경찰을 군정 경찰로 받아들였다. “우리 2000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 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생각하면 피눈물이 샘솟는다. 각 동포는 능력에 따라 이를 도와….” 광복회원들은 친일 행각, 재산 규모에 따라 부호들에게 이런 포고문을 보내고 모금액을 통고했다. 불응하는 친일 인사는 사살했다. 악질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벌교 부호 서도현, 보성의 양재성 등이다. 조선총독 암살, 직산과 상동 광산 습격도 시도했다. 박 의사도 대구 부호 서우순 처단에 직접 가담했다가 발각돼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는데 이른바 ‘대구 권총 사건’이다. 장승원 처단 후인 1917년 겨울부터 박 의사와 광복회 조직원들은 일제의 추적을 받았고 1918년 1월 충남 천안 헌병대에 주요 회원들이 체포돼 광복회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의사는 망국(亡國)에 분개해 단식으로 순국한 이만도의 아들인 경북 안동 이중업의 집에 은신했다. 의사를 보살펴 준 사람은 이중업의 부인이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체포돼 고문으로 실명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이다.숨어 있던 의사는 뜻밖에도 생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도리가 아니겠는가”라며 만류도 뿌리치고 경주 집으로 갔다. 의사가 도착했을 때 생모는 눈을 감은 뒤였다. 1918년 2월 1일 장례를 치르는 중에 일경 수백명이 출동, 의사를 포박하려 했다. 의사는 “나는 내 할 일을 정당하게 했다. 너희에게 포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고 꾸짖으며 백마를 타고 유유히 일경에 앞서 나아갔다. 물고문, 불고문과 3년이 넘는 재판 끝에 의사에게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사형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가족에게 의사는 “울 까닭이 없다”며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의사는 순국했다. “어머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님 원수도 갚지 못했네. 빼앗긴 국토마저 되찾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저승길을 갈까.” 이 유시(遺詩)와 전해지지 않는 4장의 유서, 사진 1장을 남기고 간 36년 8개월의 짧은 삶이었다. 시신이 옮겨지던 청천역(경북 경산)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통곡했다. 일제는 새벽부터 기마대를 보내 길가에 줄지어 오는 조문객들을 휘몰아 쫓는 등 조문을 방해했다. 의사 집안은 195만평이나 되던 광대한 땅을 모두 날리고 풍비박산이 났다.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의사의 처사촌)이 농간을 부려 재산을 빼앗아 갔다며 송사를 벌였지만 패소하고 말았다. 의사의 생부는 “일곱 집안 100여 식구가 갑자기 모두 거지가 되어 사방으로 떠돌아다니고, 나도 혼자서 이 옛집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동안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썼다. 의사의 묘소는 경주 내남면 노곡리 등운산 기슭에 있다. 농로를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고 산길을 따라가다 오른쪽의 가파른 경사지를 100m 남짓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숲속에 묘소가 나타났다. 잠시 묵념을 올렸다. 정부는 1963년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생가도 복원되고 동상이 세워졌으니 조금이나마 원혼을 달래 줄 것이다. 송정동 생가는 증손자 박중훈(65)씨가 돌보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생가에서 박씨는 의사의 일생과 여태 끝나지 않은 장승원가와의 악연,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들려주었다. 박씨는 의사의 일대기이자 평전인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펴냈다. 평생 고통을 겪은 증조할머니, 할머니, 어머니의 일생도 정리해 따로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박씨는 최현배 선생을 비롯한 울산 지역 독립운동가를 함께 기리는 기념관이 건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국가보훈처, 김희식 선생 등 독립유공자 136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김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 안성 원곡면사무소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보훈처는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중형을 받은 사례”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이번에 재평가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최영보 선생은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로 꼽힌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송계월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세 차례나 투옥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 등이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95) 선생뿐이며, 여성 포상자는 28명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항일 결사대 애국지사 방경한 선생 별세

    항일 결사대 애국지사 방경한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만주 일대에서 항일 결사대로 활약했던 애국지사 방경한 선생이 27일 별세했다. 97세. 충남 홍성 출신인 방 선생은 1940년 중국 지린성에서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으로부터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활동했다. 1945년 일본군 수송대를 기습해 전원을 살해하는 전과를 거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과 1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9일,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그분을 상면하니 저런 분이 어찌 왜놈의 군인과 맞서 선두 지휘를 하시며 혈전을 하셨나 할 정도로 외모가 잘생기셨고 그 풍채가 관후 유덕하시며 인자한 풍기가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주실 뿐 아니라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분이 무기형을 받고 마포로 수감된 후 왜놈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나 불허하므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처음 15일간은 물도 한 잔 안 먹었다. 소장이 병동에다 수감하고 왜놈 간수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매일 변기를 검사하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먹었으니 소변인들 나올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은 회고록에서 서울 마포형무소(경성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오동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가받는 오동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건국훈장 다섯 가지 가운데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0명인데 오동진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에 필적할 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없다. 옥중에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여러 번 단식투쟁을 했다. 마포형무소에서 한 단식 기간은 무려 48일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악랄한 일본인 형무소장도 그런 선생에게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으며 ‘가미사마’(神)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태어난 선생은 생후 반년 만에 생모를 잃고 후모(後母) 백씨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감이 남다르게 강했던 선생은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19세에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 일신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3월 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평생 온몸을 내던진 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선생은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이탁을 파견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됐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에서 장총 240여정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상원의원 일행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파괴 공작을 펴 이목을 끌기로 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과 친일 조선인 경찰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다.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했고 선천경찰서도 파괴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됐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그러나 무장 항쟁을 이끌던 선생은 밀정의 덫에 걸려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독립군 부하들의 양식 조달을 위해 지린에 농업공사를 만들었는데 운영난으로 그와 부하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를 본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믿은 선생은 1927년 12월 16일 창춘 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일제가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김에게 유인당한 선생은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취조에 자신이 지휘한 무장 투쟁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 선생의 활동만큼 일제가 붙인 죄목은 방대했고 수사·재판 기록은 쌓아두었을 때 높이가 5m가 넘어 3·1운동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와 같았다. 선생은 광인(狂人) 행세를 하고 1929년 11월부터 33일이나 단식을 하는 등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한번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 개인의 집안일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할 수는 없다”며 아내는 물론 어떤 면회도 거절했다. 부인과 아들은 옥 밖에서 통곡을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1928년 4월에는 부하 2명이 선생을 구하려고 경찰서로 잠입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재판이 열린 신의주 지방법원 법정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려는 방청객들이 쇄도했다. 선생은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라고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또 “하느님의 명령”이라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선생의 광적인 행동은 일부러 미친 척함으로써 일제와 일인(日人)의 재판에 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 의사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는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기에 징역살이를 하며 또한 설혹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희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2년 3월 9일 선생은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도 무기징역이었다. 선생은 상고를 포기했으며 장기수를 수감하던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주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한 달이 넘는 단식도 이겨냈던 선생은 17년이 넘는 세월의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광복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그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선생을 체포하고 옥사하게 한 김덕기는 노덕술, 하판락과 함께 조선인 3대 악질 형사였다. 김은 16년 동안 일제 경찰로 일했고 평북경찰부 고등형사과장 자리에 올라 수많은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가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그중 20%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김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 해체로 감형된 뒤 6·25전쟁 중에 횡사한 것으로 전해진다.오동진이 숨을 거둔 땅 충남 공주의 공산성 주차장 한쪽에 선생의 추모비가 덩그렇게 서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순국선열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30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데 선생의 위패도 있다. 선생의 묘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인의 행적도 알 길이 없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미스터 션샤인’ 황기환 선생 96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다

    ‘미스터 션샤인’ 황기환 선생 96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다

    일제강점기 유럽과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애국지사 황기환 선생의 유해가 9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뉴욕총영사관은 27일(현지시간) 최근 국가보훈처와의 협의를 거쳐 미국 뉴욕 퀸즈 플러싱의 마운트 올리베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는 황 지사의 유해를 국립현충원으로 봉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23년 마흔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황 지사의 묘지는 2008년 뉴욕한인교회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뉴욕 현지 법원이 파묘와 이장을 결정하는 대로 보훈처의 실무대표단이 파견돼 구체적인 봉환 시기를 결정할 예정이다. 평안남도 순천 출신인 황 지사는 10대 후반이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지원병으로 입대해 유럽 전선에서 중상자 구호를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김규식 선생의 제안에 따라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에 합류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았다. 그해 러시아와 북해를 거쳐 영국까지 오게 된 한인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황 지사가 영국 정부를 설득해 이들 중 35명을 프랑스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황 지사는 지난해 인기리에 종영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이병헌)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역사 바로세우기’ 앞장서는 용산...유관순 서훈등급 격상 기념 공연 열어

    ‘역사 바로세우기’ 앞장서는 용산...유관순 서훈등급 격상 기념 공연 열어

    서울 용산구가 유관순 열사 순국 99주기 추모제와 서훈 등급 격상(1등급 추가 서훈)을 기념하는 공연을 잇따라 연다.오는 27일 오후 2시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에서 진행되는 추모제에서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추념사를 낭독한다. 행사에는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 유족 대표, 주민, 학생 등 300여명이 자리할 예정이다. 같은 날 오후 5시에는 용산아트홀에서 유 열사의 서훈 등급 격상을 기념하는 공연을 펼친다. 판소리, 시나위, 아쟁 산조, 남도 민요, 진도 씻김굿 등 전통음악과 사자의례 공연으로 짜여진 무대는 300명까지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정부는 지난 2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기로 결정했다. 성 구청장은 “유관순 열사의 서훈등급 격상을 환영한다”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열사의 높을 뜻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용산구는 지난 201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이태원부군당 역사공원에 유 열사 추모비를 건립해 매년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역사공원 앞 도로에는 ‘유관순길’이라는 명예도로명을 부여하기도 했다. 지난 2016년 식목일에는 열사의 고향인 천안 매봉산에서 소나무, 흙을 가져와 추모식수 행사도 진행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은숙 여사는 극한 상황 견디고 산 영특하고 의식 있는 분이셨다”

    “이은숙 여사는 극한 상황 견디고 산 영특하고 의식 있는 분이셨다”

    “우당상·영석상 제정해 올 11월 시상 임정기념관 김원봉 기록도 남길 것”11~14대 국회의원, 국가정보원 원장을 지낸 이종찬 우당기념관장은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이회영·이은숙의 손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도 맡고 있다. 우당기념관이 있는 서울 종로구 신교동은 우당의 선조 이항복이 살았던 서울 배화여고 뒤 필운대와 지척에 있다. 이 전 의원은 “‘우당상’과 ‘영석상’을 새로 제정해 독립운동 연구에 매진하고 사회공헌에 공로가 많은 인물에게 오는 11월에 시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석(潁石)은 독립운동 자금의 대부분을 댄 우당의 형 이석영의 호다. -우당은 어떤 인물인가. “우당의 삶 자체가 기성에 대한 저항이었다. 성리학에 저항해서 양명학을 했고 과거시험을 안 보고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독립운동을 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했다. 시대 조류와 타협하는 법이 없었다.” -이은숙 할머니는 어떻게 기억하는가. “영특하고 의식이 있는 분이셨다. 갓 낳은 젖먹이 고모(이규숙)를 안고 망명을 가 극한 상황을 견디고 살았다. 마적 떼에 습격당하는 등의 변을 겪으면서도 남편이 하는 모든 것을 뒷바라지했다. 북경에서 ‘새우젓 보내라’, ‘어리굴젓 보내라’는 등의 암호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그대로 다 해냈다.” -6형제의 삶은 어땠는가. “넷째 우당은 만주 망명 후 국내에 다시 들어와 종로구 통인동 제자 윤복영(교육부 장관과 서울신문 사장을 지낸 윤형섭의 부친)의 집에서 숨어 지내며 고종 망명 사건을 모의했다. 그 정보가 새서 고종이 독살당한 것으로 믿고 있다. 둘째 석영은 영의정 이유원에게 양자로 가 재산을 다 물려받았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유원은 경기 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올 수 있을 정도로 땅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 상하이에 있던 석영은 윤봉길 사건 이후 고립돼 있다 굶어 죽었다. 어머니(조계진) 말씀이 당시 아버지(우당의 전처 소생 이규학)는 전차매표원으로 근근이 살며 40원을 받으면 10원씩 석영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그것이 끊겨 죽은 것이다. 첫째 건영은 맏형으로서 선영을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1924년 귀국했다. 신흥무관학교장을 지낸 철영은 병사했고 호영은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마적 떼의 짓 아니면 배후가 일제일 것이다.” -아버지 이규학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인데. “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김달하를 처단한 다물단원이었다. 어머니는 대원군의 외손녀로 외가는 중국에 가서도 남은 재산으로 우당 뒷바라지를 했다(이 전 의원의 외조부 조정구는 일제의 자작 수여를 거부하고 베이징으로 망명해 있었다). 외숙이 우당과 가까운 동지적 관계였다. 딸 둘을 병으로 잃는 등 어머니의 고생이 극심해 국내로 들어왔다가 다시 상하이로 가서 아버지와 살았다. 나도 거기서 태어났다. 일제에 붙잡혀 고문을 몹시 당해 청력을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했다. 어머니 삶을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처럼 정리할 생각을 하고 있다.” -고모 이규숙과 숙부 이규창은. “숙부 이규창(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은 친일 앞잡이 이용로를 사살하고 13년 형을 받아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같이 복역하던 정이형씨에게 면회 오던 그의 딸과 광복 후에 결혼하고 반민특위 검찰관으로 일했다. 고모도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훈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기념관 건립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나. “서대문 독립공원 옆에 2021년에 완공할 계획이다.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임정에 참여한 분들의 역사를 다 담으려 한다. 김원봉도 월북했지만, 임정에 참여한 분이니 기록을 남겨둬야 한다. 역사를 묻어버리면 안 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남편을 스승처럼’… 빈곤과 싸우며 독립운동 헌신한 사대부 집 여인

    1920년대 초 심산(心山) 김창숙이 중국 베이징 우당(友堂) 이회영 집에 찾아갔더니 그의 얼굴이 매우 초췌해 보였다. 심산이 “공원에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고 했더니 우당은 거절했다. 우당의 아들 규학이 말했다. “이틀 동안 밥을 짓지 못하였고 의복도 모두 전당포에 잡혔습니다. 아버지께서 문밖에 나서지 않으려는 것은 입고 나갈 옷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치로 600억원대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은 죽는 날까지 빈곤과 싸우며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런 우당을 평생 뒷바라지한 사람이 부인 이은숙 여사다.이은숙은 1889년 8월 8일 충남 공주에서 고려 말 충신 이색의 후손인 한산 이씨 진규공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달성 서씨와 사별한 우당과 1908년 10월 상동예배당에서 혼례를 치렀다. 백사(白沙) 이항복의 10대손인 우당은 노비를 풀어주고 과부가 된 여동생들을 개가시키며 마흔 넘은 나이의 결혼식도 신식으로 치를 만큼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이관직, ‘우당 이회영 실기’)우당 6형제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그해 1910년 12월 30일 모든 재산을 처분해 압록강을 건넜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선택한 고행의 시작이었다. 이은숙과 출가한 딸까지 일족이 마차 10여 대를 타고 만주 벌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유하현 추지가였다. 우당 형제들은 먼저 동포들의 정착과 농업을 지도하기 위한 경학사를 조직했다. 1911년 5월에는 광복군 양성의 본산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몇 해 만에 그 많은 재산도 바닥이 드러났고 곤궁한 생활이 시작됐다. “농사는 강냉이와 좁쌀, 두태(콩팥)고 쌀은 2,3백 리나 나가 사오는데 제사에나 진미를 짓는다. 어찌 쌀이 귀한지 아이들이 이름 짓기를 ‘좋다밥’이라고 하더라.”(이은숙, ‘서간도 시종기’)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져 놓은 다음 우당은 1913년 조선으로 잠입했다. 자금 마련 말고도 우당은 고종 망명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주에 남은 식구는 열셋이나 되었는데 양식은 강냉이밖에 없었다. “강냉이를 따서 3주가 되면 그걸 연자에 갈면 겨 나가고 쌀이 두 말도 못 되니 며칠이나 먹으리오.” 설상가상 마적 떼의 습격을 받았다. 이은숙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남았다. 우당이 조선에서 체포된 소식이 전해졌다. 이은숙은 전전긍긍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서 혼자 몸으로 대식구의 생계를 보살피는 고난의 세월을 이어갔다. 와중에 홍역으로 우당의 형 이석영의 큰아들이 사망하고 이은숙까지 같은 병으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이중고, 삼중고를 당했다. 우당이 돌아오지 않자 1917년 이은숙은 아들, 딸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고종이 승하하자 우당은 중국 베이징으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이은숙도 곧이어 아이들을 데리고 따라갔다. 고난의 베이징 생활이 시작됐다. 우당의 집은 독립운동 본부이자 사랑방이었다. 우국 지사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좁은 집에 함께 지냈다. 어려운 살림의 책임은 이은숙에게 있었다. 적게는 10명 많게는 40여 명이 우당 집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집세가 싼 집을 찾아 이사한 것도 1년에 수십 번이었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 남편을 스승처럼 극진히 섬겼다. 1~2년은 동지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그럭저럭 견뎠지만, 그 후 지원이 끊겨 먹을 양식이 없었다. 신분을 숨기고 지내야 하는 처지였기에 돈을 벌 수도 없었다. “하루 잘해야 일중식(日中食)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絶火·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로다.” 만석꾼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기아를 겪게 된 것이다. 이은숙은 굶주리는 남편을 보고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 마음이 아팠다.우당은 그즈음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이을규 형제, 백정기, 정화암 등과 먹으며 굶으며 함께 생활했다. 단재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도 여전히 드나들었다. “짜도미라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 파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가장 하층민이나 사다 먹는 것으로…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것으로 연명하니…” 사정을 잘 아는 정화암 등은 약간의 돈을 주면서 “선생님 진지는 쌀을 사다 해 드리고 우리는 짜도미 밥도 좋으니 그것을 먹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에 김달하 사건이 터졌다. 김달하는 겉으로는 애국지사인 양 행동했지만, 사실은 밀정이었다. 그런데 김창숙이 우당을 김달하와 한패인 것으로 잘못 알고 절교 편지를 보냈다. 이은숙은 칼을 품고 찾아가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남편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리겠다는 결기였다. 오해는 풀렸고 김달하는 항일 테러단체 다물단이 처단했다. 우당의 딸 규숙도 처단에 연루돼 근 1년 동안 중국 공안국에 구금당했다. 와중에 아들 규학의 딸 둘과 우당의 아들이 성홍열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언제나 굶는 극한의 빈곤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당과 아들, 딸을 베이징에 남겨두고 이은숙은 궁여지책으로 돈을 마련하고자 귀국했다. 1925년 여름이었고 임신한 몸이었다. 그 길이 우당과 영영 이별하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은숙은 귀국하자마자 다소간의 돈을 변통해 우당에게 보내주었다. 출산한 작은아들 규동을 품에 안고 친척집을 떠돌며 베이징 가족의 생계부터 먼저 생각했다.우당은 만주에 재만조선민주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또 톈진으로 가 아나키스트들과 파괴공작을 도모했다. 1926년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제의 추적이 심해지자 우당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상하이로 갔다. 환갑이 지난 나이였다. 두 딸은 빈민구제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도적을 만나 행장을 다 잃는 변을 당해 다시 톈진으로 돌아왔다. 우당은 딸 규숙의 옷까지 팔아 연명했지만, 끼니를 거르기는 다반사였다. 국내에 있던 이은숙도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고무공장에 취직해 다니고 삯바느질과, 심지어 사대부 집안 딸의 몸으로 유곽집 삯 빨래를 하며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돈을 버는 대로 우당에게 보냈다. 굶으면서도 우당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상하이로 가 남화한인연맹을 결성하고 남화통신을 발행하는 한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이어서 만주로 다시 가서 지하공작망을 조직하고자 했다. 여러 사람이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다롄에서 배를 타고 가려다 해상에서 일경에게 붙잡혔다.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우당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했다. 65세 노인의 몸이었다. 일제는 자살이라고 했지만 12일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의 명백한 고문사였다. 딸 규숙이 우당의 신체를 봤는데 눈을 뜨고 있었고 안면에 선혈이 낭자했으며 중국식 의복에도 피가 많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 “일생의 몸을 광복운동에 바치시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만고풍상을 무릅쓰고 다만 일편단심으로 ‘우리 조국, 우리 민족’ 하시고 지내시다가 반도 강산의 무궁화꽃 속에서 새 나라를 건설치 못하시고 중도에서 원통 억색히 운명이 되시니 슬프도다.” 비통한 심정을 이은숙은 축문에서 이렇게 썼다. 이은숙은 남편이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보고 1979년 12월 11일 90세에 서울에서 작고했다. 정부는 우당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은숙에게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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