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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이내창씨 의문사 보도/한겨레기자 1년 구형

    서울지검 공판부(명로승부장검사)는 4일 지난 89년 전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씨(당시 27) 의문사사건 보도와 관련,불구속기소된 당시 한겨레신문 민권사회부 이공순기자(32·경제부)에게 출판물에의한 명예훼손혐의를 적용,징역1년을 구형했다. 이기자는 89년 10월 한겨레신문 11면에 「중앙대생 이내창군이 거문도앞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되기전 안기부직원 2명과 동행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써서 안기부직원 도씨에 의해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고소됐었다.
  • 자주외교의 숨은 동반자들/김영정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일요일아침에)

    요즘 나는 한권의 책이 안겨주는 기쁨과 뿌듯함을 만끽하고 있다.그것은 다름아닌 「외교등」이란 잡지인데 외무부 부인회가 해마다 한번 펴내는 간행물로서 이번에 그 5호가 마련된 것이다. 아마도 이 책자가 갖는 의미중에 가장 뚜렷한 것은 자기자신의 이름 보다 외교관인 남편의 이름과 직위에 따라 일생을 살아야 하는 부인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과 이름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격조 높은 「외교등」 더구나 매우 놀라운 것은 멀리 고국을 떠나 낯선 외지에서 겪는 생활체험과 공통관심사 등을 나누는 동인지 성격의 이 잡지가 해를 거듭할수록 전문지에 버금가는 알차고 격조 높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회원들 스스로가 원고를 모으고 편집에 임할 뿐아니라 책자의 장정과 광고의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작업을 빈틈없는 팀웍으로 해내고 있다.흥미와 흐뭇함에 이끌려 한편 한편의 글을 놓칠세라 모조리 읽으면서 이런 책이야 말로 읽은후 그대로 덮어 놓을수 없는 값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우리 주변에 지금 범람하는 수많은 잡지류와 책자들은 읽을 거리가 아니라 오로지 상업주의 일변도의 현란한 광고물에 지나지 않는 경우와 큰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외교등」에 담긴 글들은 단순히 외교관 부인들의 생활수기라든가 여행기가 아니다.여러번 임지를 옮겨 다니면서 견디기 어려운 자연환경과 생소한 문화·풍습에 적응해 나간 것이 바로 그들이다.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외교관의 내조자,혹은 남편을 통한 대리만족의 추구자,혹은 안일과 허영,특권의식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오히려 그들은 겸허하고 진지한 자세위에 예리한 지성과 깊은 통찰력,그리고 풍부한 감성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님으로써 능히 새로운 도전에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의 전달자로서 외교의 동반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것이다. ○문화 전달자 역할 여기에서 우리의 외교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구한말 열강의 개항 압력에 못이겨 어쩔수 없이 수교를 맺을 때의 정황이다.우리는 외국과의 협상 경험이나 준비가 전혀 없는 가운데 통역관은 중국인 마건충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그것 보다 더 딱했던 것은 외국사신과 협상하기 위해 나온 우리 조정의 대표가 긴 담뱃대를 문채 졸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수교 2년후인 1885년에는 러시아와 격돌을 예상한 영국이 그 함대를 거문도에 진주시켰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 중국측의 통보에 의해 겨우 알게 되었다.설상가상으로 이때 우리 조정에서는 거문도의 위치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었으니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다. 오늘의 세계추세와 신한국의 외교기조가 공히 다변화·다원화,그리고 지역협력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옛날처럼 영토점령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이미 모든 나라들은 경제·통상외교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냉전종식후 국제관계의 초점이 경제실리 추구로 집약되고 있다.국력의 자리매김이 경제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세계의 외교무대에서 입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익신장과 떼어 놓을수 없는 것이 국민간의 문화적 접근·친근감·상호이해 등이며 문화외교를 통한 상품의 홍보와 이미지제고는 바로 오늘의 시대적 요청인 것이다.제품을 해외에 진출시켜 외화획득에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1회성 이윤 추구보다는 장기적안목으로 그 지역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깊이 하면서 상대방과 더불어 살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필수적 요건이라 하겠다. ○지혜 공급원으로 오늘의 우리나라 외교의 기본방향과 새로운 접근방법에 도움을 주고 지혜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외교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물론 외교의 심오한 이론과 전문적 기술을 쌓아올리는 일이 도외시 되어서는 안되겠으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인간과 문화를 중시하는 내실있는 외교역량의 축적이라 하겠다.우리가 항상 되뇌이는 바와 같이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우리가 키우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인력) 뿐이다.따라서 정규 직업외교관은 물론 그 부인들과 가족,그리고 국민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총력전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이러한 견지에서 「외교등」을 환영하며 더욱 알찬 결실을 담아 온 누리를 비추어 주기를 기대하여 마지 않는다.
  • 한국전기통신 108년사 한눈에

    ◎「용산전화국내 사료전시관」 7월 개관준비 한창/목제전화기·케이블 등 1,298점 수집/1902년 전화과주사 임명장이 최고/통신발달사 배우고 미래 정보망의 교육장으로 1902년 전화과 주사 임명장·40년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함께 찍은 전송사진등… 한국전기통신 1백8년사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한국통신 사료전시관」이 7월 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다. 서울 용산전화국내 4백30평 규모로 설치되는 이 사료전시관은 지난 1885년 9월28일 서울∼인천간 전신개통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전기통신역사를 재조명하고 흩어져있던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보존함으로써 21세기 고도정보사회로 가는 토대를 마련하는 장이다. 개관을 앞두고 한국통신은 대대적인 사료수집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수집된 사료는 모두 4백76종 1천2백98점으로 50년이상된 희귀사료가 24종 25점,사료가치가 크면서도 30년이상된 중요사료가 1백53종에 1백99점,30년미만이지만 보존가치가 있는 일반사료가 2백99종 1천74점등이 모였다. 가장 특이한 것은 1940년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만나는 장면및 중국사변 모습을 담은 전송사진과 1902년 궁내부 전화과 주사의 임명장(발령통지서)등이 옛역사를 전해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만나는 사진과 중국사변사진은 전화선으로 보내온 전송사진으로,당시 동경동맹통신사에 전송기사로 근무했던 박구병씨가 소장하고 있던 것. 또 임명장은 1902년 궁내부(현 청와대)통신사 전화과 정환덕씨의 것으로 이번에 수집된 사료중 가장 오래된것이다. 조선통신법규개요는 23년 발행된 일본어로 된 한국 최초의 전기통신법이며 전화교환수 견습교과서는 25년 만들어진 전화교환수의 교육지침서이다. 빨갛게 녹슬어 있는 해저케이블은 1904년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일본∼러시아,일본∼중국을 연결,매설한 것으로 울릉도와 거문도해저에서 발굴된 것이다 또 23년 델빌사의 자석식,30년의 목제전화기인 공전식전화기가 오늘날의 날렵한 전화기와 대조를 이룬다.이외에 1909년 캐나다에서 기증받은 자석식교환대와 국내기술로 개발된 86년 TDX­1A상용시험용 국산전자교환기 등이 옛과 오늘을 비교케 한다. 한국통신 홍보실 김수항사료관리부장은 『이 사료전시관이 개관되면 전기통신의 발자취뿐 아니라 현대통신발달사를 배우고 미래를 상상해볼수 있는 산교육장으로 활용될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수집된 사료를 바탕으로 전기통신박물관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힌다.
  • 불법어로 기승… 연근해어장 메말라간다(심층취재)

    ◎고질적 남획 실태와 대책을 알아보면…/저인망 어선 등 3천7백여척 설쳐/3중자망까지 설치… 양식장 망치고/잠수장비 동원,어패류·치어 훑기도/어선,허가제로 바꾸고 어구단속 강화를/불법어획물 위판방지 등 제도개선 시급 전국의 연근해어장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불법어로행위를 뿌리뽑을 방책은 없는 것일까.최근 이같은 만성화된 불법어로로 연안어장에는 어패류는 물론 치어까지 고갈돼 어민들이 만선(만선)의 꿈을 잃은지 오래이다.특히 어패류의 성어기인 요즘 동남해안과 서남해안등 전국의 주요 연근해어장에는 고속엔진에다 어군탐지기·무전기등 첨단장비까지 갖춘 불법어선들이 밤낮없이 설쳐 무법천지를 방불케 하고 있다.이들 가운데 일부는 심지어 총기와 화염병까지 갖고 다니며 영세어민들이 땀흘려 가꾼 어패류 등을 강·절도하는 해적행위까지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본사 지방취재망을 통해 이들 연근해어장의 불법어로 실태와 문제점·대책 등을 알아본다. ▷실태◁ 지난 10월말현재 전국의 연근해어장에서 불법어로를 하고있는 어선은 줄잡아 3천7백여척으로 추정되고 있다.이 가운데는 기선저인망어선이 1천6백여척,형망이 2백70여척,잠수기(스쿠버)가 2백40여척에 이르고 있다. 수산청은 지난 10월 한달동안 전국에 걸쳐 불법어로행위 단속에 나서 총3백78건을 적발했다.이를 내용별로 보면 무허가어업행위가 2백29건,허가사항 위반행위가 1백49건등이며 종류별로는 무허가 기선저인망어업이 32%인 1백32건,대형트롤어선등 중·대형어선이 28건으로 나타났다. ▷동남해안◁ 부산과 경남연안에는 소형기선저인망어선등 1천여척이 불법어로를 하고있는 것을 비롯,일부 중형기선저인망어선(일명 고대구리)은 흉기를 소지하고 잠수부까지 동원,조직적인 어로작업을 하고있다. 이들 선박은 특히 야간을 이용,불법어로작업을 하고 있으나 어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달 18일 화염병등 흉기를 싣고 다니며 가덕도일대 양식장에서 개조개를 강·절도하다 경찰에 붙잡힌 김개곤씨(36)등 일당 7명은 이 일대 연안어장에서 각종 불법어로를 전문적으로 저질러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문에 경남 통영군연안에는 성어기를 맞은 요즘 어족이 멸종되는가 하면 어족회유를 막아 어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특히 한산면 죽림도 지선등 군내 1백40여개의 유·무인도연안에는 일부 영세어민들이 섬주위에 2백∼3백m에 이르는 3중자망을 거미줄처럼 설치해 놓고 어족의 씨를 말리고 있다. 또 인근 굴·우렁쉥이양식장 주위에도 3중자망을 설치,도다리·넙치등을 무분별하게 잡는 바람에 자망의 그물이 양식물수하연에 걸려 수확기를 앞둔 굴·우렁쉥이가 떨어져 수백만∼수천만원까지의 피해를 입히고있다. 이같이 경남일대에서 불법남획된 개조개등 패류와 우렁쉥이·낙지등 수산물은 수협위판장등을 거치지 않고 매매되고 있어 수산물유통체계마저 어지럽히고 있다. 통영을 비롯한 거제·고성등에서도 치어배양장에서 배양하는 어류가 광어등 1∼2종으로 한정돼 있어 어민들이 다른 어종을 충당키위해 자연산 치어를 남획하고 있다. 22척의 어업지도선이 있는 경남은 올해들어 10월말현재 5백93건의 불법어업행위를 단속,3명을 구속하고 1백44건은 어업정지및 허가취소를 했다. ▷서남해안◁ 전남 신안지역 연안어장의 경우 병어·우럭·조기등 어장이 형성돼 있는 흑산면 다물도를 비롯,비금·팔금면등 연안어장에는 경남 삼천포등 외지선박들이 떼지어 몰려와 저인망을 이용,어패류와 치어를 남획하고 있다. 지난 10월초 전남 여천군 삼산면 거문도·나라도연안일대에 경남 충무선적 10t급 소형기선저인망어선 20여척이 몰려와 양식어종인 넙치·우럭·돔·굴·피조개등 어패류를 불법남획해 적발되기도 했다.또 외지무허가 잠수기어선과 무허가형망어선 80여척이 가막만·여자만연안에서 양식굴과 피조개등을 남획하면서 바다밑까지 마구 훑어 고기먹이와 서식처를 파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낮에는 콤프레서등 잠수장비를 이용하고 밤에는 바다밑에 집어등까지 설치,어패류를 몽땅 잡아가고 있다. 최근들어 여수·목포·신안등 전남연안에는 각 지역별로 한달평균 20건이상의 불법어로행위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들이 잡은 어획물은 한해에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제주해역은 부산·경남·전남등 타지방어선들이 몰려들어 불법어로를 자행,무법천지의 수역으로 변하고 있다. 연근해어장의 단속을 피해 이 일대에 몰린 무허가불법어선들은 어군탐지기·무전시설등을 갖추고 조기·낙지등 각종 어류를 닥치는대로 잡고 있다. 더욱이 이들 어선들은 고속엔진을 갖춰 발각되면 시속 20노트이상의 빠른 속도로 도주해 단속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북제주군의 경우 11월말현재 38건의 불법어업행위를 적발,12건을 구속조치했는데 이 가운데 71%인 27건이 타지방어선인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점◁ 불법어업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는 장비와 인력부족으로 단속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민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다 어민들의 어업질서에 대한 의식부족도 이같은 이유중의 하나다. 일부 어민들은 아직까지도 「수산자원은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뿌리깊은 의식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또 연근해오염으로 어자원이 고갈돼 영세소형기선저인망어선 등이 합법적인 어업으로는 수지를 맞출수 없게되자 불법어로를 하고 있다는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시중의 일반횟집에서 불법거래되고 있는 수산물을 즐겨 찾고 있는 것도 불법어로를 부채질하는 원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와함께 현행 어선법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고 불법어구를 단속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책◁ 수산청은 날로 조직화·대형화되고 있는 불법어로를 효율적으로 단속하기 위해 인원과 장비를 늘리는 한편 해경과 보다 긴밀한 공조체제를 갖춰나가기로 했다. 이와함께 어업지도선을 더욱 기동화,현재의 10∼15노트에서 최소한 20노트이상으로 현대화하기로 했다. 수산청은 이를위해 올해 85억원의 예산을 들여 1천5백t급 어업지도선 2척과 시·도지도선 6척을 대체해 전국의 어업지도선을 총58척으로 늘렸다. 수산청은 이밖에 ▲연안 시·군수산과에 부정어로 지도단속을 전담할 단속계설치 ▲불법어구단속에 관한 비상조치법제정 ▲부정어구제작·판매·사용자의 처벌조항 강화 ▲부정어업이 심한 지역에 대한 지도선 상주등 지속적인 단속대책도 세워놓고 있다. 또 전문적으로 불법어로를 하고있는 어선에 대해서는 추적검거와 함께 시·도지사의 관할지역 책임단속체제를 강화키로 했다.수산청관계자는 불법어로행위를 줄이기 위해 『대어민 홍보교육을 강화하고 영세어민들에 대한 저리자금 장기융자 등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국자 의견/어촌계중심 어장개발 등 적극 지원/“남획은 결국 어민피해” 인식 심어야/정창세 수산청생산국장 『고질화되고 있는 연근해 불법어업을 근절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어민자신들이 어패류의 남획이 결국에는 어자원의 파괴를 가져와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수산청 정창세생산국장(59)은 어업질서를 확립하는 데는 불법어로에 대한 당국의 단속도 방법이겠지만 무엇보다 어민과 어민단체등의 자율적인 참여와 협조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정국장은 이를 위해 앞으로 단위수협·어촌계등을 중심으로 공동어장·양식장등을 개발해 어민들이 전업할 수 있도록 세제지원등을 해나겠다고 말했다. 『특히 조직화·대형화돼 상습적으로 불법어로를 일삼는 일부 어선들을 뿌리뽑기 위해 경찰등과 협조,추적을 게을리하지 않을 방침입니다』 정국장은 불법어로를 막기위해 ▲대어민홍보강화 ▲불법어업자에 대한 각종 지원배제 ▲불법어획물의 위판방지대책강구 ▲불합리한 제도개선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어민들의 자율적인 어업질서확립을 유도하기 위해 어민들에 대한 교육을 내실화하는 것을 비롯,수산관계기관및 단체와 언론매체등과의 연계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밖에 어촌계를 중심으로 불법어업조절시범지역을 지정,각종 지원을 확대하고 매분기 마다 1회씩 상습적인 불법어획물 유통지역에 대한 불법어획물 위판여부를 점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국장은 이와함께 전국의 78개 연안시·군에 지도단속계를 설치하고 이 가운데 단속인원이 부족한 24개 시·군에 단속인력을 증원시키는 것을 비롯,내년에 1천5백t급등 수산청지도선 4척과 7척의 시·도관할 지도선을 건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우리 농산물 애용운동 확산/농협,내고향 특산물 주문판매 확대

    ◎취급품목 140개 500종으로 늘려 농협중앙회는 추석선물로 우리 농산물을 이용,농가소득을 올려주고 과소비풍조를 자제하기위한 「우리농산물 애용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에따라 농협은 기존에 벌여왔던 「내고향 특산품 주문판매」의 취급품목을 종전 1백20개품목 4백여개 종류에서 1백40개품목 5백여개종류로 확대하는 한편 안내책자 5만부를 발행,기관및 일반에 배포했다. 주문판매는 소비자가 전국 농협창구에 비치된 안내책자를 참고하여 주문서와 대금을 납부하면 농협에서 산지농협으로 온라인 통보,원하는 장소에다 2∼3일내에 우편배달하는 제도.이와함께 이용자들의 대금결제방법을 돕기위해 올해부터는 비시카드 회원에 한해 통신판매도 실시하고 있다. ◇경기 ▲강화영지버섯(5백g 2만5천원) ▲강화수삼(7백50g 상품6만원) ▲양평밤(1㎏ 8천5백원) ▲기타 10종 ◇강원 ▲홍천산나물세트(8백g 2만5천원) ▲귀래건표고(5백g 4만원) ▲영월칡녹말(1㎏ 1만5천5백원) ▲기타 28종 ◇충북 ▲괴산참기름(3백㎖ 9천5백원) ▲보은대추(8백g 1만1천원)▲영동상촌곶감(1.5㎏ 1만3천원) ▲기타 10여종 ◇충남 ▲보령주포김(3속 1만9천원) ▲연기황금알대추(1㎏ 1만5천원) ▲기타 24종 ◇전북 ▲남원동일토종꿀(3㎏ 4만원) ▲지리산뱀사골호도(1㎏ 9천원) ▲기타 25여종 ◇전남 ▲여천돌산갓김치(3㎏ 1만7천1백원) ▲거문도 건새우(1㎏ 9천원) ▲기타 14종 ◇경북 ▲청송건고추(3㎏ 2만원) ▲봉화토종대추(1㎏ 1만3천원) ▲기타 15종 ◇경남 ▲하동작설차(1백g 2만7천원) ▲함안곶감(1.2㎏ 1만7천원) ▲거제표고버섯(5백g 1만5천원) ▲기타 15종 ◇제주도 ▲제주건도라지(3백g 1만2천5백원) ▲기타 2종이다.
  • 3대 독립운동가문 첫 공인

    ◎4대 임주수씨,광복절에 선친 건국훈장 수상 확정/을사조약후 무장항일운동 주도/1대/부친도와 독립의군부결성 기여/2대/전북지역 군자금모금·운반담당/3대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증손자가 국가로 부터 서훈을 받게 돼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이 탄생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무장독립운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자결한 돈헌(돈헌)임병찬선생의 손자 임수명선생(지난 77년 80세로 사망)이 오는 15일 광복절 47주년을 맞아 건국포장을 받게 됨으로써 3대에 걸친 이 집안의 조국독립 의지가 함께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1대 임병찬선생은 62년 독립장을,2대 임응철선생(지난 31년 60세로 사망)은 90년 애족장을 각각 받았었다. 정부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조국광복을 위해 대를 이어 몸바친 3대가 모두 「공식」인정을 받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임병찬선생은 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인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선생과 함께 향리인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의 한일합방후에는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총장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시·도 대표 3백29명으로 독립의군을 조직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후 무장독립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5월 체포돼 전남 여수군 거문도에 감금당한 뒤 끝내 나라 잃은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2년후 목숨을 끊었다. 구한말 홍문관 학사와 승정원 비서승등을 역임한 2대 임응철선생은 부친을 도와 독립의군부 결성및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협등과 함께 조선독립대동단을 결성했고 그해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다 발각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번에 건국포장을 받게 된 3대 임수명선생도 이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할아버지 임병찬선생이 거문도에 감금돼 있는 동안 뒷바라지를 한 데 이어 아버지 임응철선생을 따라 조선독립대동단에 들어가서는 전북지단 이사를 맡아 김흥순등 수십명을 가입시켰으며 이들로 부터 걷은 군자금을 서울 본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그러나 1·2대가 쉽게 공적을 인정받은데 비해 임수명선생의 「독립유공」은 그동안 공인받지 못했다. 그의 활동이 워낙 비밀스러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4대째인 임주수씨(68·경기도 수원시 고등동 롯데아파트 1동208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 기록을 찾아내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전북향토문화연구회와 그 지역 역사학자들의 도움으로 자료를 입수해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됐다. 그 자신 독립운동에 빠진 아버지가 집안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막일을 하며 어렵게 성장한 임주수씨는 현재도 월세 20만원짜리 20평형 아파트에서 부인 이지순씨(64)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을 위해 헌신해온 독립운동가 집안이란 사실과,선대가 남긴 훈장을 자랑으로 여기며 깨끗이 살아왔다』면서 『다만 광복절을 단지 공휴일로만 생각하고 왜색문화에 무분별하게 물드는 듯한 젊은 세대들을 보면 선조에게 죄를 짓는 느낌』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 철도청/휴가철 「패키지 관광상품」개발/7월부터 두달(단신패트롤)

    ◎여행권 한장으로 숙박·교통 해결 ◇철도청은 여름휴가철을 맞아 오는 7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2개월동안 열차를 이용해 버스·선박등의 교통편과 숙박및 관광을 한장의 여행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 관광상품을 개발,판매키로 했다. 철도청이 올 여름판매하는 관광상품은 다음과 같다.▲홍도·흑산도관광(2박3일·13만원) ▲거문도·백도관광(〃·12만원) ▲한려수도·해금강관광(〃·11만7천원) ▲울릉도·백암관광(〃·13만9천5백원) ▲울릉도·동해관광(3박4일·15만5천원)
  • 연안여객선 운임 인상/새달 5일부터 평균 3.7%/교통부

    오는 6월5일부터 여객선,화물선,유조선 등 연안해운의 운임이 평균 2.9% 오른다. 29일 교통부가 발표한 연안해운 운임인상 내용에 따르면 여객선은 평균 3.7%(일반선 9.8%,고속선 9.0%,쾌속선 2.9%)가 오르며 화물선은 평균 6.1%(2천중량t 미만은 7.9%,2천중량t이상은 5.0%) 인상된다. 이에 따라 일반여객선 요금은 목포∼홍도간이 4천8백50원에서 5천3백30원으로,고속선은 여수∼거문도간이 4천5백80원에서 5천원으로,쾌속선은 부산∼거제간이 4천9백70원에서 5천1백30원으로 각각 오르게 됐다. 유조선은 평균 1.1% 올리되 2천중량t 미만은 3.0% 인상하고 2천중량t 이상은 현 수준에서 동결시키기로 했다.
  • 9명탄 어선 실종/해경,수색작업 나서

    【광주=최치봉기자】 16일 상오3시쯤 전남 여천군 삼산면 거문도 북동쪽 7마일 해상에서 선원9명을 태우고 조업중이던 경남 충무선적 29t급 장어잡이어선 제303행운호(선장 김종생·35·경남 충무시 봉평동 종우아파트 306호)가 『기관실에 물이 들어와 침몰중』이라고 여수해경에 구조요청을 해온뒤 교신이 끊겨 경찰이 수색작업에 나섰다.
  • 천직의 등대지기 39년/안영일씨(이사람)

    ◎“사람 그립다는건 처절한 고통이죠”/두 차례 낙도 탈출끝에 「희생의 의미」 체득/태풍속 칠흑바다 지킬땐 새 보람에 “희열”/“조각에 일가견”… 「고독의 철학」 작품으로 승화/섬마을 전전 떠돌이 생활에 자녀교육애로 안타까워 『외롭고 고된 세월의 연속이었지만 내가 택한 길이기에 후회않고 정년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망망대해 외딴 섬에서 뱃길 잡아주기 39년.강산이 바뀌어도 몇번은 바뀌었을 기나긴 세월 갈매기를 벗삼아 등대를 지키며 고독과 싸워온 외곬등대인 안영일씨(60·여수지방해운항만청 오동도항로표지관리소장·기능6등급)는 남다른데가 있는 사람이다. 파도소리와 흰갈매기로 도시인들에게는 낭만의 대명사로 느껴지는 등대지기는 알고보면 무척이나 힘들고 어려운 직업이다. ○“감방아닌 감방생활” 안씨는 감방아닌 감방에서의 생활을 두번의 좌절끝에 천직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러 이제는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등대의 산증인이 됐다. 안씨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곳은 동경1백27도46.2분 북위34도44.5분 여수 앞바다오동도항로표지(등대)관리소. 지난 89년6월 이 등대관리소장으로 부임해온 안씨는 옛날 낙도에 있을 때보다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어 좋지만 등대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이 해이해질까봐 긴장을 풀지않고 지낸다. 그는 이곳 등대관리소 관사에서 한살아래인 부인 박종례씨,그리고 직원 2명과 함께 살고 있다.오동도등대는 육지와 방파제로 연결될 만큼 가까워 다른 등대에 비하면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등대업무 성격상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시 출퇴근 어려워 이곳의 근무는 하루 3교대가 원칙이나 정시 출퇴근이 아니기 때문에 일이 있으면 지속근무해야 한다. 일상업무외에도 풍속·풍향·파고·강우양·해수온도·염분도등을 하루에 몇번씩 측정해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일손을 거들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10초에 한번씩 빛을 내주는 등명기와 30초마다 나팔소리를 내는 안개(무)신호기를 손질,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태풍예보가 있을 때는 직원 모두가 이것저것을챙기느라 긴장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기가 일쑤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혹시나 뱃길을 잃은 선박이 있지 않을 까 등대의 생명선인 등명기의 불빛을 주시하며 올빼미같은 생활을 마다하지 않는다. 계기고장으로 뱃길을 잃은 선박은 등대불빛과 나팔소리로 거리나 방향을 잡고 운항하기 때문에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교통고등학교 입교 안씨가 그동안 이런 식으로 뱃길을 잡아 구조해준 선박은 어림잡아 1백여척에 달한다. 안씨가 등대와 인연을 맺은 것은 6·25동란중인 52년9월. 서울서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전쟁이 나자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그러나 8식구가 당장 끼니를 때우지 못할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장남인 안씨는 마침 항로표시 공무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합격했다.당시 부산초량 역구내에 있던 6개월 과정의 교통고등학교에 입교해 등대업무와 관련된 통신·전기·설계제도·특별등기및 무신호기작동법을 배웠다. 등대지기로 기본기를 익한 안씨는 이듬해 5월 당시만해도 목포에서 배로 8시간이나걸리는 하조도로 발령받아 등대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한달은 고생되고 가족이 그리웠지만 호기심에 참고지냈다.서울서 자란 안씨는 이때 처음 살아서 펄펄뛰는 물고기를 보았고 미역·파래등 해조류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알게됐다. 이렇게 시작된 생활이 두달쯤 되니 먹는 문제로 차츰 고통스러지기 시작했다.밥을 직접 해 먹어야 했는데 쓸만한 취사도구가 없는데다 연료도 마땅치 않았다. 디젤 폐유를 때서 밥을 짓는데 그을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거기에다 육지에서 공급해주는 된장·간장등 부식이 떨어져 월남미와 통보리가 3대7로 섞인 맨밥을 씹을 때는 눈물이 났다. 안씨는 두달을 버티다 등대지기를 포기하고 하조도를 도망치다시피 빠져 나온다. 부산집으로 돌아왔으나 할만한 일이 없었다.두달을 빈둥대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하조도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도 두달을 견디지 못했다.두번째는 식생활문제가 아니라 고독과의 싸움에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도대체 사람이 그리워서 살 수가 없었다.집에 다시 돌아왔으나 새로운갈등이 시작됐다.젊은 나이에 적응을 못하고 방황한다는 자괴심이 가슴을 짓눌렀다. 독실한 카톨릭집안에서 성장한 안씨는 신앙심으로 모든 역경을 이길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힘들고 외롭지만 누군가 해야하는 일이 아닌가.내몸을 불살라 캄캄한 밤바다의 빛이되자.길잃은 뱃사람들에게 항로를 안내해 주자』 오랜 고민끝에 다시 한번 등대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조도행 배를 탔다.마음이 흔들릴때마다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채찍질했다.「낙오자」란 불명예를 씻기위해 남보다 두세배 더 열심히 일했다. 안씨는 하조도에 근무하면서 결혼해 가정을 꾸몄다.세월이 지나는 동안 외로움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게 되고 낙도의 불편한 생활도 천직이라 여기고 견딜수 있게 됐다.3년 가까이 있다가 56년12월 두번째 임지인 남해의 자개도로 옮겼다. 자개도는 결딜만 했다.그후 바라도·거문도·소리도·돌산도·백야도등 낙도를 전전하며 근무했다.한곳에 두번이상 근무했기 때문에 주민들과는 무척이나 친숙하다. 문명의 혜택이 별로 없는 주민들에게 안씨는 만물박사로 통해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는다.손재주가 뛰어난데다 전기·전자제품에 일가견이 있어 주민들의 고장난 전기·전자제품은 모두 그의 솜씨로 제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60년대초 소리도(남해)등대에 근무할 때는 마을청소년 10여명에게 라디오수리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안씨는 또 미술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시간이 나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나무와 돌로 조각품을 만들어 썰렁한 섬마을과 등대주변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도 했다. 안씨가 본격적으로 등대환경조성작업에 손댄 것은 바로 전임지였던 거문도에서다. 안씨는 거문도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경치가 아름다운 등대주변이 관광명소로 돼가자 5개년계획으로 등대조각공원을 만들기로 했다.오동도로 자리를 옮긴 요즘에도 거문도 공원안에 전시할 작품을 만드느라 시간이 날때마다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그동안 만들어 놓은 작품중 「혼」과 「작품S」는 이미 현지에 전시돼 있다. 안씨의 작품은 대부분 고독한 인간의 굳센의지,자연과 바다와 인간의 조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안씨가인간의 외로운 정신세계를 작품소재로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수십년간 고독속에서 터득한 생명철학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 부부야 그렇다지만 그간 자식들에게 너무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옵니다.그러나 애들이 이제는 다 커서 이 애비의 마음을 알아주니 한결 가슴 뿌듯합니다』 안씨는 슬하에 둔 네자녀(2남2녀)가 낙도를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이 육지에 나가 자취를 해가며 공부할 때 가장 가슴아팠다고 했다. 그렇게 큰 네자녀중 맏아들 호석씨(36)는 어려운 신학공부를 마치고 현재 목포북교동성당에서 신부로 봉직하고 있다. ○명예퇴직 그날 향해… 안씨는 39년간의 등대지기 생활을 하면서 집 한칸도 마련하지 못했다.항상 박봉에 허덕이는 구차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등대인의 생활인 만큼 명예로운 퇴직을 위해 정년이 될때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근무할 생각이란다.
  • 연안해역 수온이 높아진다/수산진흥원 한상복박사 조사결과

    ◎매년 0.5도씩 상승… 세계 평균의 10배/수위도 79년 이후 연 7㎜ 높아져 【부산=장일찬 기자】 지구 온도 상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연안수위가 지난 79년 이후 연평균 7㎜,연안해수온도는 지난 86년 이후 연평균 0.5도씩 상승했다는 연구발표가 나왔다. 이같은 사실은 14일 국립수산진흥원(경남 양산군)이 주최한 「91년 제1회 연구발표회」에서 진흥원 연구위원 한상복 박사가 「한반도 주변해수의 1세기간 수온상승 추세와 최근의 해면상승추세」라는 논문에서 밝혀졌다. 이 논문에 따르면 울릉도 거문도 어청도 격렬비열도 등 한반도 연안 4개 섬지역을 표본 측정한 결과,▲울릉도가 86년 14도에서 90년 16.6도 ▲거문도가 15.9도에서 17.8도 ▲어청도가 11.9도에서 13.9도 ▲격렬비열도가 11.8도에서 13.4도 등으로 연평균 0.5도씩 상승 했다는 것이다. 특히 한 교수는 이같은 수온상승 속도는 세계의 평균수온상승 속도보다 10배나 빠른 것이어서 급속한 수온상승의 원인 및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또 연안수위는 지난79 이후 연평균 7㎜씩 상승,2100년에는 연안수면이 1m 이상 높아질 것으로 예상돼 기존의 해양생물분포가 크게 바뀔 것으로 추정됐다.
  • 제주도·거문도·고르바초프/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에 개국을 강요할 무렵 러시아의 푸티아틴 제독은 1854년 거문도에 함정을 대고 조선정부에 대해 개국교섭을 시도한 적이 있다. 승무원들 중에는 「오블로모프」 「평범한 이야기」 「군함 팔라다호」 등의 명작을 남긴 러시아작가 곤차로프도 끼어 있어 여행기를 남겼다. 조선 정국은 이때부터 러시아의 집요한 남하정책과 이에 맞서는 중·일·영·미 등 각축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던 러시아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하여 공산주의 소련으로 변한 후 다른 형태로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전후 소련은 새로운 열강의 자격으로 남북한 분단에 작용하고 북한을 도와 한국전쟁에 「간여」하더니 이제 또 한 번 세상이 바뀌면서 한국과 근교하는 이웃으로 새롭게 나타났다. 그 소련과 한국의 우호협력증진의 속도는 한마디로 「급속」이요 「과속」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소간 작금년에 걸친 관계개선을 눈비비며 바라보던 서방측의 많은 소련전문가들은 충격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다음과 같은 분석으로 소련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즉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과의 기본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한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실리를 꾀해 왔다. 국내적인 경제개혁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독에 경제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미·일은 냉정했다. 어떻게 보면 소련의 경제적 파탄으로 나라의 존립이 어렵게 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태도였다. 이에 당황한 소련은 동서독의 통일을 지원하여 이로부터 대소 경제지원을 꾀하는 한편 남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경협을 이루려 했다. 또한 한소 수교는 소련의 대일본 북방도서협상 그리고 일본의 자본을 시베리아 극동 연해주로 끌어들이는 데 좋은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소의 급속한 관계개선과 소련의 입장을 해석하는 이러한 시각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소관계의 두 수레바퀴는 이제 쾌속으로 제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노 대통령의 모스크바입성과 그에 이은 고르바초프의 제주기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시점에서 흔들리지 않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대소 시각이다.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을 기조로 해 매우 복잡한 변천과정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전체적인 관계구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은 그들 범세계적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뚜렷한 대상이 아니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다만 소련의 대미·대일·대중국 정책의 부수적 일환으로 한반도가 고려되었을 뿐이다. 둘째 소련은 한반도를 태평양으로 향하는 변방지역의 일환 즉 지정학적 요충지로 간주한 결과 이를 군사안보적 대상지역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이다. 쉽게 얘기 하자면 소련에 있어 한반도는 정치·외교·경제·문화 등의 교류를 위한 주대상국이 아니라 군사전략적 부수대상의 하나라는 것이다. 비록 시대와 지도자에 따라 농도의 차이는 있었다 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지적은 대체로 맞는 편이다. 『소련의 한반도 정책은 없었다』고 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어떤 서구학자는 『소련에게 있어 한반도는하나의 군사적 완충지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스탈린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프 체르넨코 등에 이르는 역대 소련지도자의 한반도 인식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단 한사람 그 같은 고정시각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이번에 한국 최대의,그리고 아름다운 섬 제주를 찾아오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다. 우리의 대소 인식에서 고려할 사항은 또 있다. 정상적인 관계발전 과정으로 본다면 한소관계가 적대관계에서 우호협력관계로 전환하는 기초적 준비과정을 최소한 3∼4년의 3단계로 본 것이 구미 전문가들의 견해였다. 그들에 의하면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1∼2년간의 비정치적 무역대표부로 교역증진을 통한 사전조정기가 첫 단계이다. 둘째 단계가 올림픽 이후 2∼3년째가 되는 영사협정기간이다. 3∼4년째가 되는 기간으로 이 기간에 한소수교가 이뤄질 것으로 본 것이다. 한소관계에 관한 한 전문가들의 이러한 예측과 분석은 빗나갔다. 실제로 두 나라가 국교수립을 선언한 것은 서울올림픽 후 만 2년이 되는 때였다. 그 과정에서 앞을 달린 것은 한국이었고 소련은 그 뒤를 따른 것이다. 너무 앞서 달리다가 뒤를 돌아보니 두 나라간 과거지사로서 미처 처리되지 못한 일,정리했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특히 우리 민족사에 크나큰 비극을 안겨 준 6·25전쟁의 진상과 실상을 함께 규명하고 설명해 보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국가의 무기력과 가슴찢기는 아픔을 남겨놓은 대한항공(KAL)여객기 격추사건에 대한 마무리도 없었다. 지난달 중순 소련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10회에 걸쳐 KAL기 사건의 내막을 취재 게재했고 최근 일본의 TV는 당시의 소련 조종사와 사고현장 잠수부들과의 회견내용을 방영함으로써 국제적인 뉴스거리가 된 바도 있다. 국교가 이뤄졌고 양쪽 정상들이 가고 오는 단계에서 당장 무슨 배상과 양보를 공식 논의하는 데는 현실 여건상 무리가 따를지 모른다. 다만 그것이 실리적이고 장기적인 한소협력의 바람직한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해결돼야 할 공동과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적대관계는 적대관계이고 현재의 친구관계는 그 관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간 관계와 협상은 국익차원의 영원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우리의 대소인식이 보다 냉철해야 하고 그 정책이 의연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소련은 새로운 모습으로 출발하는 세계의 대국으로서 우선 잘 살길을 찾고 있다. 한국은 소련이 갖지 못한 개발의 경험을 나누며 평양으로 가는 길을 모스크바에서 찾고자 한다. 모두들 그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노대통령 방소 계기로 본 두나라 관계사

    ◎극동패권 겨냥,러시아함대 1854년 첫 입항/거문도 상륙뒤 한달동안 동해지역 실측/열강침탈 막으려 1884년 조·로조약/노·일전에 지자 공식관계 끝나… 일제땐 독립운동의 무대로 근대에 들어와서 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정식으로 맺게 되는 것은 1884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관계의 수립에 앞서서 러시아인과 한인들 사이의 교섭관계가 선행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1850년대 초반에 러시아와 미국은 일본의 개항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경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이때에 러시아의 해군중장 푸티야틴은 대일교섭을 위하여 마닐라에서 북상하여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 분산된 함대의 집결장소로 거문도를 지적하였다. 1854년 4월2일 푸티야틴의 기함 팔라다호를 위시로 러시아함대는 5일간 거문도에 상륙하였다. 러시아함대는 계속 북상하여 4월20일부터 5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한반도의 동해지역을 실측하기도 하였다. 푸티야틴은 또한 강원도 봉천군 금난진과 함경도 안변부 화등해진,영흥부 고령사 대암진 등에 상륙하거나 정박하였다. 이러한 사건은당시에 빈번하게 출몰하였던 많은 이양선사건의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 러시아는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 이후의 다른 특별한 관계는 일어나지 않았다. 러시아는 19세기 중엽에 극동으로의 진출을 활발히 하게 되어서 1858년에는 아이훈조약을 통하여 아무르지방을 러시아영토로 편입하였고 1860년에는 이어서 북경조약을 체결하여 우수리지방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하여 연해주를 통하여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러시아와 조선과의 관계가 일어나는 조건을 만들게 되었다. 1863년에는 조선에서의 흉년을 계기로 함경도의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함으로써 재소 한인의 첫 이민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어서 많은 한인들이 연해주로 속속 이주하였고 이들 한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양측간의 교섭도 이루어졌다. ○흉년 못견뎌 국경 넘어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시의 극동의 정세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한반도를 침탈하여자신의 영향권 아래에 두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이나 영국에 기대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해 보려던 계획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선정부는 방향을 바꾸어 적성국이었던 러시아를 끌어 들였다. 청에 대한 견제세력으로,그리고 영국과 일본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때에 또한 러시아측으로서도 코르프가 프리아무트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동아시아정책을 적극화 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한국과의 외교는 급진전되어 1884년 7월7일에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과 러시아의 첫 외교관계는 이같이 열강의 침입을 외교적 균형을 통해 회복하려는 조선의 노력과 그 열강의 일원으로서 동아시아정책을 강화하려던 러시아의 정책이 만남으로써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국교수립 이후의 조선은 아직 자주적인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의 외교적 힘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침략하고 있는 외세에 의존하여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존심만 키워주었고 그것조차도 결국은 만족되지 못하였다. ○1896년 친로내각 러시아는 결국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을 위하여 한국에 진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러시아와의 관계 이후에 친러세력이 조정에서 형성되었으며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삼국간섭을 통하여 일본의 세력을 견제한 러시아의 외교적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여 친러세력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바로 이렇게 강화된 친러세력의 형성으로 인하여 1896년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친런내각까지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친러내각의 성립은 러시아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해 주는 역할 밖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강화되어가는 러시아세력과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기도하던 일본과의 대립은 드디어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폭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기선을 제압하면서 1904년 5월18일에 한로 조약은 폐기되어 공식적으로 한로관계는 차단되고 만다. 한로조약의 폐기 이후 한국은 얼마 안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 상태로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외교적 관계는 없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들과 러시아와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졌다.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은 노령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여 거기에서 독립운동의 꿈과 실질적 힘을 키워나갔다. ○북방정책의 결실 맺어 또 1917년의 러시아의 10월혁명 이후에는 소비에트정부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을 기대하고 민족운동자들로 하여금 러시아와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한인들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므로 이 기대는 종종 기대 수준에 못미쳤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발전에 역행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6월에는 자유시 사변이 일어나고 1925년에는 일로협약에 의하여 한인의 독립운동이 또다시 제약을 받았으며 그외에도 소련은 자주적 민족운동세력이 새로운 한국건설의 주역이 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로써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패권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더불어 남북한을 분단시키고 북한에서도 자주적 성격의 정권이 성립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분단된 한반도에 냉전논리를 강요하면서 소련은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간주하고 일방적으로 지원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소련과 적대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본적으로 1985년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중 냉전논리의 현실적 적용의 결과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피비린내나는 내전이 있었으며 이는 스탈린의 승인에 의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한국과 소련은 서로 적의 상태에서 남남이었다. 이 기간중 1978년 KAL기 무르만스크호수 기착과 같이 외교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소련이 한국에 대하여 인도주의적 일반원리를 따라서 행동한 적도 있었지만 1983년에는 KAL기를 격추하여 2백69명의 승객을 전원 사망케 하는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것이며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소련은 남한의 경제력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으며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바꿀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남한 역시 통일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냉전논리에서 탈피하여 1988년부터 북방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1990년 6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의 정상이 회담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9월에 한소 수교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12월13∼16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이렇게 하여 한로관계의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국교관계를 가지게 되는 한국과 소련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을 가지고 있다. 소련은 더이상 한국에 대해 패권주의를 강요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며 한국은 더이상 저개발국이 아니다. 한국은 경제면에서 소련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한국민이 원하면 한국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평화적 통일정책은 소련의 기본적인 정책과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은 한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며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실질적으로 이루어나가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 10대소녀 유인폭행 다방에 팔아넘겨/한패 4명 영장

    서울 강남경찰서는 9일 조승호씨(36ㆍ관악구 신림1동 1580의17) 등 4명을 미성년자 약취유인 및 부녀매매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조씨 등 3명은 지난달 8일 하오1시쯤 관악구 신림동 S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있던 남모양(19)을 『좋은 곳에 취직을 시켜주겠다』며 이웃여관으로 유인해 폭행한 뒤 전남 여천군 삼일면 거문도로 끌고가 함께 구속된 진다방 주인 김미순씨(38ㆍ여)에게 4백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 여름 관광열차 7월부터 운행

    철도청은 오는 7월1일부터 8월말까지 두달동안 여름철 관광열차를 운행한다. 이 관광열차는 울릉도ㆍ충무 해금강ㆍ한려수도ㆍ거문도ㆍ홍도 등지로 이어지는 5개 코스별로 운행된다.
  • 거문도 해상서 어선 침몰/선원 8명 사망ㆍ실종

    【부산ㆍ제주】 남해와 제주지역 전해상에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가운데 24,25일 이틀동안 이 해상에서 어선2척이 침몰하고 1척이 표류,1척이 좌초돼 선원2명이 숨지고 6명이 실종됐다. 25일 상오0시50분쯤 전남 여천군 거문도 남쪽 40마일 해상에서 부산시 서구 충무동 대광수산소속 선망본선 제101대광호(1백11tㆍ선장 옥치관ㆍ38)가 거문도로 피항 중 파도에 휩쓸려 침몰했다. 이 사고로 이 배에 타고 있던 선원32명 중 박명률씨(56ㆍ경남 거제군 동부면 오송리 501의3) 등 2명이 숨지고 갑판장 김지언씨(34ㆍ부산시 영도구 봉래동4가 249의1) 등 6명이 실종됐다. 선장 옥씨 등 24명은 같은 선단의 제121 대광호 등에 의해 구조됐다. 또 이날 상오8시35분쯤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남서쪽 1백마일 해상에서 선원 4명을 태운 목포선적 꽃게잡이어선 제7선경호(60tㆍ선장 김종배)가 심한 풍랑으로 침몰됐으나 구조요청을 받고 출동한 해군함정에 의해 선원들은 모두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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