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거꾸로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재산 관리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사업장 모집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공동주택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 기득권
    2026-04-1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5,516
  • 고향에 묻혀 ‘제주화풍’ 외길 변시지 화백

    고향에 묻혀 ‘제주화풍’ 외길 변시지 화백

    바다와 산이 온통 황토빛이다. 어찌 색의 구별이 없을까만, 평생 제주 바다를 응시해온 노(老)화가는 파도와 바람, 조랑말이 어우러지는 무채색의 진풍경을 길어올렸다. 30년동안 제주도에 묻혀 살며 한국의 전통미를 추구해온 변시지(79) 화백.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 인간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경지가 담겨 있다. 황토빛 바탕에 먹빛, 두가지 색뿐이다. 여기에 단순한 구도를 통해 깊은 심연에 감춰진 제주도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변시지처럼 색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역설적으로 색감이 느껴지도록 표현한 작가는 많지 않다. 바다도, 산도 누런 색이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바다는 바다색, 산은 산의 색, 자연 그대로의 색으로 다가온다. ●“독창적 작품은 역사·문화 풍토가 밑바탕” 자신만의 예술적 뿌리를 찾기 위해 몸부림 쳤던 변시지 화백을 만나러 제주도를 찾았다. 장마 끝무렵의 빗줄기가 간간이 해안가에 뿌리는가 싶더니 산과 바다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안개가 제주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제주공항에서 서귀포로 향하는 차창 밖으로 마주친 안개 속 풍경들을 통해 첫인상에 다소 낯설게 느껴졌던 강렬한 황토빛의 변시지의 작품세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검푸른 파도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바다, 해안가 벼랑에 쓰러질 듯한 초가집. 안개 낀 들판의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로움을 견디고 있고, 모진 바람에 갈기조차 성치 않아 보이는 조랑말 한 마리가 그 풍경의 일부가 되는 세계’ 변시지가 화폭에 담은 제주도다. “예술에서 풍토는 창작의 모체(母體)다. 독창적인 작품이 나오려면 역사와 문화가 담긴 풍토가 밑바탕이 돼야 한다. 스페인 출신 피카소가 프랑스에서 활동을 해도 그의 작품에는 스페인의 정열이 그대로 담겼듯이.”그에게 제주도는 끝없이 샘솟는 예술의 원천이다.“제주도에 살지 않았으면 이런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제주의 바람이 화폭의 물감을 말리면서 농익은 빛을 우려냈다. 제주의 색으로 황토빛을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아열대 태양빛의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빛으로 보인다.” ●“70년대 해외유학 ‘붐´ 때 나는 귀향” 다른 화가들이 프랑스 등 해외로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70년대 중반. 그는 거꾸로 고향 제주도로 회귀했다. 그러나 제주도는 쉽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처음 제주도에 내려와 화려하고 섬세한 기법으로 그렸는데 겉껍질은 제주의 모습인데 정작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없었어요.” 화폭에 담지 못한 열정을 술잔에 채웠다.“2년동안 술로 지샜어요.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사라져 해안가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하는 일도 허다했지요. 하지만 ‘예술적 패배’가 싫어 캔버스와 싸우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제주화풍’의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처음 2년간은 그림 못 그리고 술로 새워 변시지 하면 떠오르는 황토빛 그림은 한국의 미(美)를 길어올리기 위한 순수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노 화가의 정진이 빚어낸 결정품. 일본에서 얻은 화려한 명성과 찬사를 뒤로 한 채 가족과 떨어져 홀로 귀국할 때부터 그는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 기성 화단의 부와 명예를 벗어던지고 홀연히 중앙 화단을 떠나 제주도로 낙향한 것은 예술을 향한 혹독한 채찍질이었다. 그는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노년을 즐길 나이. 하지만 이 노 화가는 가족과 떨어져 홀로 예술의 길을 걷고 있다. 당초 1년 정도 생각하고 내려왔던 제주도 생활이 어느새 30년을 훌쩍 넘었다. 서울에 있는 부인 이학숙(동양화)씨와 첫째딸 정은씨도 화가다. 변시지의 작품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인 한 사내가 자주 등장한다. 쓸쓸해 보이는 그 사내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작품 ‘귀로’‘기다림’ 등을 보면 변시지의 마음은 저 바다 건너 뭍, 가족이 사는 곳을 향해 있는 듯하다. ●“점만 하나 찍어 제주도 되는 그림 그리고파” 그의 그림이 “조용하게 정지된 것 같지만 역동적인 생명력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그는 “그림 속 사람은 조용하게 서 있지만 내심은 모순, 비리, 부정에 대한 저항심으로 끓어 오르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응답했다. 바다와 산의 색채가 같다는 지적에는 “바다와 산이 누런색이지만 굳이 색을 쓰지 않아도 색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했다.”며 “아무도 이런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고 했다. 변시지의 그림은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니다. 그렇다고 민화도 아니다. 그림에 ‘경계’가 없어진지 오래다. 현란한 ‘색’도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3년 전만 해도 아침 식사 전에 붓을 들면 아침도 점심도 잊고 어두워져 전깃불이 들어올때까지 그렸어요. 앞으로 선 하나, 점 하나로 완성되는 작품, 점만 하나 찍어도 제주도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예술은 완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이지만 “예술에서 깨달음을 얻는 경지까지 이르러 작품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이다.‘제주도 화가’ 변시지가 60년 작품 활동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6일∼11월4일 서귀포 기당미술관에서 연다. 대표작 ‘폭풍의 바다’ 등 80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다. 이 미술관은 변 화백의 친척인 재일교포 강구범씨가 1987년 지어 서귀포시에 기증한 국내 최초의 시립미술관으로 제주도의 관광명소다. 제주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변시지 화백은 제주도 서귀포 출신 변시지 화백은 6세 때 가족이 일본 오사카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대학까지 마쳤다.1948년 23세에 일본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광풍회전’에서 최연소 최고상 수상기록을 세웠다. 이듬해 광풍회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며 화가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당시 40,50대 선배 화가들이 그와 마주치면 자존심의 상징인 베레모를 벗고 인사했을 정도였다. 아들의 수상 소식에 감격한 어머니는 장롱 깊이 넣어 두었던 한복을 꺼내입고 그의 아틀리에에 드나들었다. 그후 일본 화단에서 개인전을 하면 모든 작품이 팔리는 등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지만 마음 한구석 공허함을 느꼈다. 평론가들로부터 ‘일본인의 기질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다.’라는 작품평을 듣고 민족의식이 솟구쳤다고 변 화백은 말했다. 마침 “조국의 미술발전을 위해 서울대 강의를 맡아달라.”는 윤일선 서울대 총장의 제의를 받고 1957년 귀국했다. 그러나 자유당 말기 중앙 화단은 반목과 질시로 어지러웠고, 그는 그런 화단과 타협하지 않았다.‘소신발언’의 여파로 서울대에서도 스스로 나와 마포고 미술교사, 서라벌예대 미술과 교수를 거쳐 제주도에 새로운 예술 세계의 둥지를 틀며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제주대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귀포시 기당미술관 명예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잘하죠

    몸이 튼튼해야 공부도 잘하죠

    우리 청소년들은 덩치만 커졌지 체력은 예전만 못하다. 지난해 말 문화관광부의 국민체력실태조사를 보더라도, 초등학교 6학년 남학생은 2001년에 비해 키는 0.8㎝ 커지고 몸무게는 2.1㎏ 늘었지만 거꾸로 오래달리기(1.2㎞)는 18초 더 걸리고 제자리멀리뛰기는 7.5㎝나 짧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공부에만 집중하고 운동을 멀리한 결과다. 하지만 운동을 해야 즐겁고 학습능률도 오른다. 방학 중에 찾을만한 스포츠교실을 소개한다. “정세윤∼여자 박지성, 힘내라 파이팅.”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효제초등학교 운동장. 리라초등학교 2학년 정세윤양이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 채 운동장에 놓인 5개의 훌라후프 사이로 요리조리 축구공을 굴리며 빠져나간다. 보조코치 김상훈(24)씨의 응원에 힘이 났는지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이날 축구교실에 참가한 학생은 20여명. 효제뿐 아니라 세검정·충무·재동 등 여러 초등학교에서 모인 연합팀이다. 처음에 어색해 하던 학생들은 훈련이 계속되면서 점차 오랜 친구처럼 친해졌다. 드리블 훈련을 마친 학생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핸드볼처럼 손으로 공을 튀기면서 축구골대 앞까지 달려간 뒤 공을 던져 골대 안으로 넣는 연습을 했다. 최재호(34) 코치는 “여기 온 어린이들은 선수가 아니어서 드리블과 슈팅만 연습시키면 싫증을 내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강습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민(10·충무초 3학년)군은 “음악과 미술, 영어 등 하루에 학원에서만 보내면 너무 지루하다.”면서 “축구교실을 시작한 지 사흘밖에 안 되고 형들이 많아 좀 어색하지만 힘껏 뛰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진다.”고 말했다. 축구교실은 수업 마지막의 시합 때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주훈(11·세검정초 4학년)이와 덕곤(11·〃)이는 제일 친한 친구 사이다. 하지만 시합에서는 “친구라고 봐주기는 없다.”며 선을 확실히 그었다. 드리블 감각이 뛰어난 덕곤이는 종횡무진 맹활약을 펼쳤다. 두 사람을 제치고 중앙으로 패스한 공을 용상(10·재동초등학교 3학년)이가 골키퍼 오른쪽으로 살짝 넣었다. 주훈이가 중앙에서 롱슛을 한 볼이 바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1대1로 비긴 이날 세호(12·리라초 5학년)는 사실 아쉬움이 남았다. 지난 이틀 동안 동생 세윤이가 속한 팀에 연거푸 졌기 때문이다. 세호는 “오늘은 골을 넣어 꼭 이기겠다고 아침에 동생과 약속을 했는데 내일은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참관한 학부모들은 스포츠 교실이 체력을 좋게 할 뿐만 아니라 방학 동안 아이들의 생활을 규칙적으로 만들고 학습의욕도 높인다고 했다. 김현준(40·여)씨는 “방학 때에는 아이들이 할 일이 별로 없어 게을러진다.”면서 “과거에는 보통 늦게까지 게임하고 아침 10시에 일어나는데 이번 방학엔 아침에 축구교실에 참가하면서 부지런해졌다.”고 말했다.“생활리듬이 깨지면 게을러져서 공부도 안 한다.”면서 “늘 방학이 끝날때쯤 밀린 방학숙제를 했는데 요즘은 오전에 축구를 하고 오후엔 알아서 공부한다.”고 덧붙였다. 범희숙(41·여)씨는 “방학 때 학원가는 시간을 빼면 집에서 장시간 만화책만 본다.”면서 “같은 시간에 체육활동을 시키면 좋을 것 같았다.”며 참가이유를 말했다. 그는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과 스포츠교실에 보내주는 대신 공부를 많이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면서 “요즘 주훈이의 공부량이 예전 방학에 비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김미형(41)씨는 “아파트에 살면 놀이터에서 뛰어놀지만 주택가는 마땅히 그럴 공간이 없고 방학 동안 매일 아이와 놀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참에 축구교실이 이런 문제를 풀어줬다.”고 말했다. 김성수 고려대 체육교육학과 교수는 “방학 동안 TV보기와 인터넷 등으로 집에서만 보내면 정서도 불안해진다.”면서 “필수적으로 한두가지 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공을 잘못 찬 뒤 발목을 삐는 등의 부상을 막고 체력을 좋게 하려면 기본기를 정확히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심한 운동을 하면 불면증 등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므로 피로를 느끼지 않는 한도에서 운동량을 조절하라.”고 조언했다. 학생의 건강과 성격에 따라 알맞는 운동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규성 한국체육대 건강관리학과 교수는 “지방은 15분 이상 운동해야 타기 때문에 비만학생은 수영과 걷기, 오래달리기, 사이클을 30분 이상 해야 하고 성장발육이 느린 학생은 근육을 늘리는 농구와 배구, 수영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또한 “자세교정이 필요한 학생은 태권도와 육상을 시키고 자세가 좋아질 때마다 사진을 찍어 보여 주면 의욕이 더 강해진다.”고 설명했다. 성격개선과 관련해 “내성적인 학생은 축구와 농구, 럭비 등 단체운동을 하면 사회성과 준법정신을 기를 수 있고 산만한 학생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사격과 양궁을 하면 개선된다.”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오산중학교 이민형군-방학중 사격교실 참여 계기 소년체전등서 동메달 둘 따 올해 서울시 소년체전과 서울시 사격연맹회장기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오산중학교 2학년 이민형(15)군은 스포츠교실에서 사격을 시작했다. 어릴 적 장난감 총으로 물건 맞히는 놀이를 좋아했던 민형군은 선린중학교에 다니던 지난해 인근 오산중학교에서 방학 중 사격교실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했다가 선수가 됐다. 올들어 아예 학교를 오산중학교로 옮겼다. “다른 아이들은 사격을 하면 엉뚱한 데로 날아갔지만 저는 대부분 총알이 가운데에 집중돼 스스로 소질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원래 성격이 차분한데다 사격할 때 특히 집중이 잘 돼 즐겁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사격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상을 거머쥔 비결에 대해 “같이 훈련하는 동료 중 나보다 1년을 먼저 시작한 친구가 있는데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그 친구를 따라잡기 위해 집에서도 가늠자를 그리고 조준 훈련을 했다.”고 말했다. 학기 중 하루 3시간밖에 안됐던 연습량을 방학 들어 8시간으로 크게 늘렸다. 총이 흔들리는 단점을 체력강화를 통해 보완하기 위해 특히 하체단련에 쏟고 있다. 이 군은 “여자인데도 무거운 총을 들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강초현 누나를 좋아하지만 그보다 더 잘해서 꼭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시합할 때 긴장을 하다 보니 연습 때보다 점수가 10점 정도 덜 나오는데 앞으로 경험이 늘면 나아지겠죠. 내년 소년체전에서는 반드시 시상대에 오르겠습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꿈나무 수영교실 가장 인기 거쳐간 200명 선수로 활약 서울시 교육청이 잠실 학생수영장에서 운영하는 ‘꿈나무 수영교실’은 가장 인기있는 청소년 방학 스포츠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이곳을 찾으면 무료로 중급 이상의 수영실력을 쌓을 수 있다. 방학 중 3∼4주 가량 운영되는 꿈나무 수영교실은 ‘경영반’과 ‘다이빙반’으로 나뉜다. 각 반은 수준에 따라 상·중·하 3개 코스로 편성된다. 수강인원에 제한은 없다. 여기에 참가하려면 학교장 추천이 있어야 하며 자유형, 평영, 배영, 접영 등 여러 영법(泳法) 가운데 최소 한가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3개월 정도는 수영강습을 받은 학생들이 무난하다는 게 강사들의 말이다. 경영반에서는 수영법과 수영기술 강습, 지구력 훈련 등을 하고 다이빙반에서는 호흡법과 스프린트 기술을 가르친다. 강사는 선수출신 등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로 짜여져 짧은 기간에 효율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다. 현재 강사는 5명이다. 참가 학생들에게는 매일 교통비 1000원과 간식이 제공된다. 프로그램을 마치면 꿈나무 수영선수 인증서가 지급된다.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 테스트를 하는데, 여기에서 눈에 띄게 발전한 학생은 본인 의사에 따라 수영선수 양성 상설반인 ‘꿈나무 수영반’에 들어갈 수 있다. 2001년 문을 연 이후 모두 1800여명의 학생이 수영교실에 참가, 이 중 200여명이 수영반에 들어가 선수의 길을 선택했다. 지난해 꿈나무 수영반에 입단한 학생 가운데 잠전초등학교 6학년 정보경 양 등 3명이 올해 전국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맹활약했다. 소질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수영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이 우대된다. 통상 방학 열흘쯤 전에 모집을 하지만 중간에라도 학교 체육교사에게 문의하면 수강이 가능하다. 서울시 교육청 관계자는 “당초에는 수영인구의 저변을 넓혀 신인선수를 발굴한다는 게 목표였지만 지금은 전문적인 수영강습을 원하는 일반 학생들이 늘면서 사실상 개방형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54개교 21종목 무료로 운영 운동부 코치가 전문적 지도 서울시내 스포츠교실은 2001년부터 운동부가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달 중 모두 54개 학교에서 종목에 따라 1∼3주씩 운영된다. 학교 운동부 코치가 직접 가르치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종목은 육상과 수영, 축구, 야구, 테니스, 농구, 배구, 탁구, 럭비, 사이클, 복싱, 레슬링, 유도, 양궁, 사격, 기계체조, 리듬체조, 펜싱, 배드민턴, 태권도, 인라인스케이팅 등 21개다. 일반 스포츠센터에서 배우면, 통상 10만원이 넘게 들지만 모든 스포츠교실에서는 무료로 운영된다. 태권도와 수영 등을 넓은 공간에서 아침시간에 또래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희망학생은 학교 체육교사나 담임교사에게 문의하면 된다. 사는 지역에 관계없이 모든 학교에 신청할 수 있다. 이미 프로그램이 시작됐어도 중간에 들어갈 수 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섹스토리(10) 돌아온 사라

    섹스토리(10) 돌아온 사라

    한지섭 교수와의 청평에서의 재회…! 나는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클리토리스를 내 스스로 자극하여 느끼는 자위행위에서처럼, 나는 오르가슴을 몇번이나 느꼈다. 그는 일어선 채로 나의 옷을 하나씩 벗겨나갔고, 벗길 때마다 내 몸 한부분에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그가 내 상의를 벗기면서 나도 그의 상의를 벗기게 하고, 팬티를 벗기면 나도 그의 팬티를 벗기게 하고, 드디어 우리 둘이 다 알몸뚱이가 되자 나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로 옮겼다. 호텔방 내부는 사방은 물론 천장까지 거울로 되어 있었다. 나는 거울에 비치는 우리 두 사람의 알몸뚱이를 보면서 더욱 흥분되었다. 한지섭 교수는 나를 침대로 옮긴 후 나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한 뒤 따라놓은 맥주를 마시더니 그것을 그대로 내 입 안에 옮겨넣어 주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약간의 취기가 감도는 부드러운 분위기(Tender is Night) 속에서 그는 땅콩 몇 알을 내 입에 넣고 같이 씹어먹으며 키스를 계속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내 목에 키스하며 나를 흥분상태에 빠지게 했다. 그러고는 내 귓불에 강하게 키스하여 더이상의 자극에 견딜 수 없는 나로 하여금 몸을 빼게 했다. 그러자 그는 내 몸을 강하게 붙들고 내가 신음소리를 낼 때까지 계속 귓속에서 혀를 휘저어댔다. “아…아…아…그만.”하고 말하며 내가 신음소리를 내다가 지쳐버릴 때까지 키스를 계속하는 그에게, 이번에는 거꾸로 내가 그에게 덤벼들어 그의 몸뚱어리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를 멋지게 정복해보겠다는 잠재심리 때문인지, 나도 처음에는 부드럽디부드럽게 그의 귓가와 겨드랑이, 옆구리, 젖꼭지를 빨며 손으로 그의 몸 여기저기를 어루만졌다. 그런데도 그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자 나는 좀더 강하고 세게 그의 몸을 빨았다. 그리고 내 긴 손톱으로 그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내가 그의 심벌을 빨기 시작해서야 그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성기 끝부분에 맺혀있는 이슬같은 액체를 맛있게 핥아먹다가, 그의 심벌 전체를 바나나 먹듯이 서서히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의 심벌과 고환, 항문 등을 위 아래로 빠른 속도로 핥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는 결국 숨넘어갈 듯한 신음소리를 내며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는 내 젖가슴을 거세게 움켜잡으며 결국에 가서는 내 클리토리스에 입을 갖다 대고 빨기 시작했다.‘69’의 형태로 우리는 서로 거꾸로 포개져 서로를 음미하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는 남자들에게 오럴섹스를 해준 적이 많다. 임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꼭 삽입을 하지 않고서도 남자들의 정액을 분사(分射)시킬 수 있으면 남자들은 대개 만족해한다. 하지만 남자쪽에서 내게 오럴섹스를, 쿤닐링구스를 해준 적은 많지 않다. 아마도 남자의 성기는 밖으로 돌출돼 있어 빨아먹기 쉽지만, 여자의 클리토리스는 안에 숨어들어가 있어 찾아 빨기를 귀찮아하는 듯싶다. 그러나 한교수는 역시 그답게 나의 클리토리스를 혀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느끼지 못하던 기분이었다. 자위행위를 할 때 손가락으로 자극하는것 보다도, 그리고 남성의 페니스를 내 질 안에 집어넣을 때 보다도, 훨씬 더 강한 자극이었다. 혀끝을 뾰족하게 만든 그는 자신의 혓바닥 끝으로 내 클리토리스를 찌르며, 때로는 빨며, 때로는 혀를 빙빙 돌려가며 자극하였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신음소리를 내뱉기 시작했고, 결국은 “그만…그만…”하고 그에게 애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에도 아랑곳 없이 계속해서 혀끝으로 내 클리토리스를 애무하였다. 그래서 나는 거의 기절상태에 이르렀다. 섹스를 하다가 기절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은 바 있으나, 내가 그런 상태에 이를 줄은 정말 몰랐다. 아마 너무 그리워하던 ‘님’과의 재회였기에 나의 쾌감이 상승작용을 해준 것 같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이번에는 정상위(正常位)로 내 안에 들어왔다. 내가 ‘69’ 체위 때와는 다르게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자, 그는 이번에는 후배위(後背位)를 시도하였다. 후배위의 자극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내 목 뒤를 혀로 자극하며 두 손으로는 내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러고는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피스톤 운동이었다. 나는 후배위에서는 내 젖가슴으로 스며드는 그의 손길 덕분에 더 큰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이번에는 여성상위로 하자고 했다. 후배위에서 여자가 수동적이고 남자가 능동적이라면, 여성상위는 완전히 여자의 몫이다. 그는 가만히 누워서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있거나 때로는 나의 가슴을 만졌다. 나는 그의 육체 위에 올라타서 내 스스로 그의 심벌을 내 안에 넣고 주체적으로 피스톤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성기가 빠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나는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상위가 클리토리스에 가장 자극이 가는 것은 내 오르가슴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체위는 여성상위였다. 한참동안 우리는 서로 신음소리를 뒤섞었다. 나는 더욱 속도를 내어 그와 나의 성기를 고무시켰다. 결국 지쳐버린 나는 그의 가슴 위로 쓰러졌고, 그의 심벌을 부드럽게 빨았다. 그는 결국 정액을 내 입 안에 분사시켰다. 나는 그의 정액을 삼킬 때 나의 목젖을 자극하는 ‘꿀꺽’ 소리를 들으며 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남자의 정액을 삼킨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좀 역겨운 일이다. 그런데 보통 여자애들은 남자의 정액을 먹으면 얼굴 피부가 예뻐진다고 말한다. 역시 ‘사랑’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정액은 확실히 피부에 좋은 것 같다. 영화 ‘칼리귤라’를 보면 로마의 귀족 부인이 빙 둘러선 남자 노예들이 배출해내는 정액으로 온 몸을 마사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이상야릇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서 나와 상대한 여러 남자들의 정액을 마시고 나면 그 이튿날 내 얼굴 피부가 한층 더 뽀얘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액은 상대에 따라 맛이 좀 다르다. 남자가 성행위 전에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도 정액의 맛이 좀 쓴 것 같다. 또 남자의 영양상태에 따라 맛과 양이 좀 틀려지는 것은 아닌지. 한지섭 교수와 나의 섹스는 약 5시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이전의 남자들하고는 느낄 수 없었던 극도의 만족감과 오르가슴을 느꼈다. 그와 헤어지던 때의 생각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더이상 그의 여자가 아니며, 그도 나의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깊숙이 박혀와 내 심장을 쿡쿡 찔렀다. 정말 심장이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나는 더이상 그가 있는 꿈 속으로 갈 수가 없었다. 몇 주일을 아무런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았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서도 내릴 정거장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나는 멍한 표정으로 종점까지 갔고, 학교 수업에 들어가서도 아무런 필기를 하지 않고 수업도 듣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정말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리고 먹는 것도 부질없었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은 채, 한시간에 한번씩 혹시라도 하여 그의 휴대전화에 전화를 해봤지만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뿐이었다. 내 몸은 자꾸 말라갔고 그의 부재는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밤마다 그와의 섹스를 회고하며 혼자서 자위행위를 했다. 그러는 내 신세가 너무 청승맞고 가련해 보였다. 그렇게 시간을 때워가다 보면 내가 완전히 삭아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과거의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과연 내 옆에 한지섭 교수가 누워있는지 손으로 확인해보았다. 그는 지친 빛을 보이며 내 곁에 누워있었다.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가 참으로 예뻐보여 그의 입 안에 내 혓바닥을 다시 집어넣었다. 최근에 한 혓바닥고리 피어싱이 그의 푸들푸들한 혓바닥을 자극시키면서 우리 두 사람의 합일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아야지…. 나는 그의 목구멍 깊숙이 내 혀를 밀어넣으며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마광수는1951년 경기 수원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 ▲저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장편소설 ‘권태´ ‘즐거운 사라´ ‘불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사랑의 슬픔´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174死 2生 두 행운의 전차 일대기

    174死 2生 두 행운의 전차 일대기

      이제 서울의 어린이들은「크레용」으로 전차를 그릴 수 없게 됐다. 학교에 가고 집에 돌아올 때 눈에 익던 전차는 70년 영욕(榮辱)을 실은 채 말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고철로 변해버리는 176대의 전차 중 단 2대만은 살아남아 어린이들 틈에서 여생을 즐기게 되었다. 이 행복한 두 칠순 할아버지 전차의 애환어린 일대기를 들어보면. 시민들과 함께 늙어온 몸, 고치고 고쳐 옛모습 잃고 행운의 두 할아버지는 230호와 452호. 문교부의 요청에 따라 230호는 창경원에, 452호는 남산 어린이놀이터에 남겨져 찾아오는 어린이들을 반기며『너희 아버지도 내가 타워다줬지』하고 긴 수염을 내리 쓸게 됐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해머」로 두들겨 부셔지고 철(鐵)은 철대로 동(銅)은 동대로 갈기갈기 찢겨 고철로 팔려나가는 옛 동료들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두 할아버지는 그러나 옛 동료들을 대표해 살아남게 된 행운을 기뻐하며 지금 몸치장에 한창이다. 창경원에 남게 될 230호는 제작된 지 올해로 만 35년. 일제 때 일본서 만들어져 다음해 우리나라로 건너왔다. 운전대 오른쪽 위에 달린 자동전류차단기가 전류가「오버」되면『퍽!』하고 불꽃을 튀기며 꺼지던 모습은 전차를 타본 사람이면 한번쯤 구경했을 것이다. 이 전차는 직접 제어방식으로 되어있어 운전대 밑에 제어장치가 달려 있다. 가장 서울시민들의 눈에 익은 전차다. 당초 이 땅에 첫 선을 보였을 땐 반강제(半綱製)로서 차체는 나무로 되어 있었으나 58년에 철제(鐵製)옷으로 바꿔 입었다. 또 원래는「트롤리·폴」형으로 전차가 달리면 뒷 차장이 연방 줄을 잡아당겨 공중 전선에 맞춰 놓아야 했던 것이 62년부터 폐차 직전까지 우리 눈에 익은「뷰겔」형(거꾸로 매단 3각형형)으로 바뀌어 뒷 차장의 일손을 덜게 됐다. 트롤리·중간문 없어지고 2인용 좌석도 긴 의자로 이와 동시에 종래엔 문이 셋이던 것을 둘로 개조하고 좌석도 양쪽에 다 놓여있던 것을 한쪽으로만 몰아, 100인승으로 개조했다. 동시에 가운데 문을 맡던 차장은 폐문과 함께 퇴직해야 했고-. 어린이놀이터에 남겨질 452호는 미제(美製). 제작된 지도 40년이나 되는 장년.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수복 후인 54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한창 사용하다가 전차철거로 폐차 처분된 것을 ICA원조로 우리나라에 들여왔다. 당시 서울시민들은 차체가 좀 넓고 또 2인승 좌석이 나란히 놓여있는「새것」이라 해서 무척 즐겨 탔던 것. 또 종래의 전차가「롱·시트」였던데 비해 이 형은 소위「로맨스·시트」로 되어 두 사람이 나란히 앉게 되어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올 땐「트롤리」가 붙어 있었으나 62년부터 일제히「뷰겔」로 바뀌었고 시민의 사랑을 받던「로맨스·시트」도「롱·시트」로 바뀌었다. 이 형은 간접제어「시스팀」으로 되어 있어 제어장치가 운전대 아닌 차체 밑에 달려 있는 것이 특색. 새것이라 해체 면한 28대 사갈 만한 임자 없어 골치 멀리「펜실베이니아」의 어느 소읍(小邑)에서 배에 실려 이 땅에 왔다가 이제 같이 온 동료들을 잃고 혼자 남아 이국 어린이들 틈에 끼게 된 벽안(碧眼)의 노옹(老翁)- 그 회포는 어떠할까? 이 두 전차 외에도 해체를 면한 전차는 모두 28대. 이들은 일본「후지」사의 제품으로 63년에 8대, 67년에 20대가 도입되었었다. 이「후지」형은 차체 내의 조명이 모두 형광등으로 되어있으며 선풍기와 자체 난방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최신형. 들여온 지 얼마 안돼 폐차 처분하기가 억울해(?) 남겨두기로 결정을 했으나 사가는 사람이 없어 처리에 골치를 앓고 있다. 외국에선 관광지에 옮겨 숙소·식당으로도 쓰지만 서울시의 계획으론 관광용으로 교외지대에 내보낼 계획이었으나 이 계획이「트램·카」설치 계획으로 바뀌자 궤도문제로 교외운행도 불가능하게 되었다.(「트램·카」는「레일」이 하나뿐) 그래서 서울시 당국은 전차가 없는 대구시, 대전시 등에 구매를 종용했으나 두 도시선 모두 예산부족으로 난색을 보여 갈데올데 없이 동대문 차고에 처박혀 있는 따분한 신세다. 원래 이「후지」형의 도입가격은 8백만원. 서울시측이 각 시·도에 띄운 공문에 따르면 6백만원까지 값을 깎아주겠단다. 그래도 임자가 나서지 않아 주무당국인 서울시 운수사업부는 1억 6800만원짜리 이 전차 처리방안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 전차를 민간인이 사서 관광오락지에 부설, 숙소로 개조하거나 식당, 다방 등으로 바꿔 쓰고 있다.「호텔」아닌 전차속 하룻밤이 보다「로맨틱」한「무드」를 마련해 주기 때문.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이 전차들을 사서「에어컨」과 난방시설을 모두 유효하게 쓰려면 한 대 6백만원의 전차값 말고도 부대시설인 전기·변압시설 등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 상업적으로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어느 약싹빠른 장사아치의 증언. 미국「샌프란시스코」시에선 전차 철거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시민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철거에 실패. 오늘날「샌프란시스코」시의 명물로 전 미국에 알려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선 오히려 땡땡소리를 풍물시(風物詩) 삼아 그래서「러시·아워」가 되면 천천히 달리는 전차에 한 손을 잡고 매달린「샐러리·맨」의 못브이 영화나 우편엽서에 등장하고, 관광차「샌프란시스코」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으레 온가족이 함께 차를 타보곤 한다. 이젠 내년부턴 우리도「샌프란시스코」의 시민들처럼 창경원과 어린이놀이터를 찾아 정들었던 전차와 함께 흐뭇한 시간을 보내게 됐다. 어른들은 하릴없이 서있는 두 전차를 보고『좋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어린이들은『신기한 폐품』속을 마음껏 뛰놀며…. [ 선데이서울 68년 12/15 제1권 제13호 ]
  • 고수익펀드, 대형우량주 ‘집중매입’

    고수익펀드, 대형우량주 ‘집중매입’

    최근 주가상승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이른바 ‘개미(소액 개인투자자)’들이 종합주가지수가 1100선마저 돌파하자 하나둘씩 증시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묻지마 투자’에 휩싸였다가는 또한번 낭패를 겪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고수익을 낸 펀드가 어느 종목을 투자했는지를 잘 따져보고 뒤따라 움직이는 것도 안전한 투자방법이라고 충고했다. ●개인들은 주식을 처분하고 31일 증권선물거래소에 따르면 종합주가지수가 1000선을 넘어선 지난 6월30일(1008.16)부터 7월29일(1111.29)까지 1개월간 지수는 103.13포인트(10.2%) 상승했다. 이 기간에 외국인은 1조 7891억원, 국내 기관은 3489억원어치의 주식을 더 사들였다. 하지만 개인은 거꾸로 2조 1028억원이나 순매도했다.1개월 중 공휴일 등을 제외한 거래일인 22일 가운데 단 이틀만 제외하고 주식을 처분한 게 사들인 것보다 많았다. 이쯤되면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는 투자전략이 아니라 개미들의 ‘증시 이탈’로 해석된다. 개미들은 대체로 그동안 직접투자에서 손해를 봤기 때문에 펀드에 투자하는 간접투자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 객장에는 아기를 안은 30대 여성 등 가정주부 3명이 나타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주식을 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한동안 종목시세판을 살펴보고 여직원에게 이것저것 묻고 돌아갔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이같은 광경은 증권사 직원들이 주로 쓰는 메신저를 통해 ‘△△에 애 업은 아줌마 3명 출현’‘꼭지점(지수 최고점)에 도달’‘급매도 필요시점’ 등으로 빠르게 전파됐다.‘아줌마가 나타나면 주식시장을 떠나라.’는 게 주식시장 격언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아줌마부대’가 주식시장에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은 이르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펀드는 삼성전자, 포스코 등 대형우량주를 선호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설정액 100억원 이상의 주식형 일반성장 펀드 가운데 최근 6개월 수익률이 20% 이상인 상위 15개 펀드의 투자성향을 분석한 결과, 편입 종목은 대체로 우량 대형주였다.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에 무려 9개 펀드가 몰렸다. 또 포스코에 7개, 현대자동차와 KT에 각각 6개씩의 펀드가 투자했다.2개 이상의 펀드가 투자한 11개 종목 대부분이 시가총액 15위권에 포진했다. 이 기간에 삼성전자 주가는 48만 3500원(1월 25일)에서 55만 5000원(7월 25일)으로 뛰어 6개월 만에 7만 1500원(14.8%)이 올랐다. 펀드 3개가 몰린 현대건설은 1만 7950원에서 2만 8250원까지 올라 주가상승률이 57.4%나 됐다. 반면 4개 펀드가 편입된 SK텔레콤은 19만원에서 18만 8500원으로 유일하게 주가가 떨어졌다. 대형우량주라고 모두 오르는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우량주에 분산투자 바람직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한국운용의 ‘부자아빠 거꾸로주식A-1’펀드는 현대자동차, 현대백화점H&S, 포스코, 롯데삼강, 금호전기 등에 골고루 투자했다. 미래에셋투신의 ‘3억만들기 배당주식1’은 삼성전자(우), 한국전력,KT, 포스코, 한솔제지 등에서 26%의 수익률을 올렸다. 국민은행 김재한 재테크팀장은 “올 2월 이후 주요 주식형 펀드의 수익률은 20% 안팎인데 반해 적립식펀드의 수익률은 10% 정도에 그쳤다.”면서 “하지만 적립식은 장기간 안정적인 수익을 원할 때 권할 만하고, 단기적인 주가 흐름에 따라 고수익을 노린다면 주식형이 유리할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 물론 주식형은 적립식보다는 리스크(위험)가 있는 편이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종전60년 수교40년 韓日여론조사] 韓 66.4% “한류 지속”…日 49.8% “곧 식을것”

    [종전60년 수교40년 韓日여론조사] 韓 66.4% “한류 지속”…日 49.8% “곧 식을것”

    ■ 한류 시각차 우리 국민 다수는 일본에서 한류붐이 지속될 것이라는 희망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반면, 일본인들은 열기가 곧 식을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에 더 기울어 있었다. 한류가 일본에서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지 모른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 한국인보다 19.8%포인트나 더 부정적 한국인들은 66.4%가 긍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한류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느냐.’는 설문에 ‘오래 지속될 것’(12%)과 ‘당분간 계속될 것’(54.4%)이라고 응답한 것을 합친 수치다.‘곧 식을 것’이라고 보는 이는 20%,‘모르겠다.’는 응답자는 11.8%였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한 일본인들의 응답은 46.6%에 그쳐 한국인들보다 19.8%포인트나 더 부정적인 태도였다.‘오래 지속될 것’(5%),‘당분간 계속될 것’(41.6%)이란 응답을 합친 것이다. 이에 비해 ‘곧 식을 것’이란 응답자는 49.8%로 한국인(20%)의 곱절을 넘었다.‘모르겠다.’는 답변은 3.6%였다. ●한류에 호의적인 일본의 40대 일본인의 연령대별 답변 상황을 살펴보면 40대(42.2%)가 70대 이상(50.6%)과 60대(45.2%)에 이어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의견에 동조했다.20대는 39.8%,30대는 34.9%로 낮은 편이었다. ‘곧 식을 것’이란 견해에는 30대(60.2%),50대(57.7%),20대(55.4%)순이었다.40대는 50%가 그렇다고 답하는 등 40대가 한류에 가장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일본 남성은 여성보다 더 비관적인 태도 성별로는 일본 남성(59.9%)들이 여성(39.7%)보다 ‘곧 식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평가에 더 기울고 있었다. 거꾸로 일본 남성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의견에 31.3%가 동조한 반면 일본 여성은 51.9%가 동감을 표시했다. 이같은 설문 결과 최근 한류는 일본의 40대 여성을 중심으로 지속되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같은 연령별, 성별 치우침 현상을 극복해야 한류 지속에 유리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한류에 긍정적인 일본인이 한·일 관계에도 긍정적 일본인의 답변 내용을 교차 확인한 결과를 보면 한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일본인은 양국 관계의 전망을 낙관하고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같은 민감한 이슈에 대해서도 한국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즉 ‘한류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답한 일본인 중 ‘양국 관계가 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이는 48%,‘조금 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이는 32%를 차지했다.‘한류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응답한 일본인 중에선 ‘조금 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이는 38.5%,‘좋아질 것’이라고 답한 이는 21.9%였다. 그러나 ‘한류가 곧 식을 것’이라고 응답한 일본인 가운데 ‘양국 관계가 변함없을 것’이라고 답한 이는 35.5%로 가장 많았고 ‘좋아질 것’이라고 응답한 이는 14.1%에 그쳤다. ‘한류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응답한 이들 가운데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 이는 59.4%인 반면,‘이해할 수 없다.’는 38.2%를 차지했다. 한국인들은 40대 이하 연령에서 ‘곧 식을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높게 나타나 눈에 띄었다.20대 23.5%,30대 22.8%,40대 19.7%인 반면,50대 15.4%,60대 5.7%,70대 이상 15.5%로 나타나 오히려 젊은 층에서 한류 지속에 대해 비관적인 판단을 갖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르겠다.’는 판단 유보층은 50대 20.6%,60대 23.5%,70대 이상 35.2%로 연령이 높을수록 전국 평균(11.8%)보다 높게 나타났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양국민 친밀도는 ‘그래도 일본은 싫은데….’(한국인) ‘한국은 세계 여러나라 중 하나일 뿐이다’(일본인) 우리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일본에 친근감을 갖고 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갖고 있지 못한 일본인은 28%에 불과해 대조를 이뤘다. 그러나 ‘상대국의 필요성’에 있어서는 양국 모두 절반 이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일본에 대한 친근감 조사에서 우리국민 66.1%가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44.1%,‘전혀 느끼지 않는다’ 22.0%). 그러나 일본인을 상대로 한 한국 이미지를 묻는 질문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한 사람은 28.0%(‘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18.1%,‘전혀 느끼지 않는다’ 9.9%)로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같은 결과는 최근의 한·일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올해들어 발생한 독도문제, 역사왜곡문제 등으로 반일감정이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 식민지배의 기억이 깔려 있다. 연령대에서도 양국은 차이를 보였다. 우리는 조사대상의 최저연령층인 20대에서 친근감이 가장 높게(36.4%) 나왔다. 이는 젊은층이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일본문화를 많이 접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40대에서 가장 높은 친근감(65.7%)을 보였다. 특히 40대 여성은 71.1%가 호감을 나타내 ‘욘사마’등 한류열풍에 대한 일본 아줌마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 우리는 30대에서 거부감(73.1%)이 가장 높았다. 일본인은 70대 이상이 35.7%로 가장 높게 나왔다.70대 이상의 일본인이 한국에 가장 높은 거부감을 보인 것과 관련, 이정용 전 일본 게이오대 객원교수는 “보수세력이 많고, 이들은 한국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계속 요구하고 있는데 대해 반감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어 “반면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을 일본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나라로 보기보단 세계 여러나라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했다.‘한국(일본)이 일본(한국)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유용성’을 묻는 질문엔 양국 모두 절반 이상이 ‘필요하다’(한국 53.5%, 일본 54.1%)는 답변을 해 느끼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필요성에는 공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필요없다고 답한 비율은 우리국민이 22.9%로 일본인(9.5%)보다 훨씬 높았다. 이 전 교수는 “한국이 경제발전을 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을 다시보기 시작해 필요성이 증가됐다.”고 설명했다. 연령대별로는 우리는 20·30·40대에서 ‘필요하다’는 응답이 평균(53.5%)보다 높은 수치를 나타낸 반면 50대 이상은 평균 이하였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차이 뚜렷한 관심분야 한국인들은 일본의 첨단기술에, 일본인들은 한국의 요리에 가장 흥미가 있었다. 한국 응답자의 26.1%는 일본의 첨단기술에,12.8%는 가전제품에 흥미가 있다고 밝혔다. 다음으로 15.2%는 관광,10.8%는 만화·애니메이션,5.3%는 예능·예술에 흥미를 느꼈다. 반면 일본인들이 가장 큰 흥미를 보인 요리에는 단지 5.0%만이 흥미있다고 답했다. 일본 국민들은 29.5%가 한국의 요리에 흥미있어 했다. 이어 21.7%가 한국 전통·역사에,14.8%는 관광,11.2%는 예능·예술,6.3%는 첨단기술에 흥미를 느꼈다. 연령별로도 차이가 심한데 한국인 20대는 일본의 만화·애니메이션(21.7%)에 가장 큰 흥미를 보였다.30대와 40대는 각각 31.3%와 35.1%가 첨단기술이 흥미있다고 밝혔다.50·60대도 첨단기술에 흥미를 보인 반면 70대 이상은 관광(15.5%)에 흥미를 느꼈다.70대 이상은 44.1%가 일본에 흥미를 느끼는 영역이 없다고 반응했다. 반면,50대는 22.8%,40대는 19.3%,30대는 15.4%,20대는 9.2%순으로 젊을수록 ‘무응답’ 비율이 줄었다. 일본 국민의 경우 20대(40.9%)부터 50대(26.1%)까지는 요리에 가장 흥미를 보였다. 반면,60대(30.7%)와 70대(28.9%)는 전통·역사에 흥미를 보였다.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수록 한국에 흥미가 없거나 모른다고 답한 비율이 늘었으나 그 숫자는 남성 70대 이상이 20.1%로 한국에 비해 적었다. 한국 관광에는 남성(48.6%)보다 여성(51.4%)이 흥미를 보였다.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한국 관광에 관심있어 했고(20대 6.1%,70대 이상 9.5%), 여성은 연령이 높을수록 한국관광에 흥미를 잃어 20대 여성(10.8%)이 가장 큰 흥미를 보였다. 한국요리에는 20대 남성(11.2%)과 30대 여성(12.2%)이 가장 흥미가 높았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한·일 공동 국민여론조사 원본 자료 보기 ■ 도움 주신 분들 ●이남영 교수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소장. 미국 아이오와대학 정치학 박사 ●김형준 교수 국민대 정치대학원 교수(현).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 미국 아이오와대학 정치학 박사 ●이이범 박사 일본학 연구소 연구원. 일본 오사카대학 국제공공정책연구과 박사 ●김재호 박사 일본 게이오대학 일본정치학 박사
  • [일본을 다시본다] (12)꿈틀대는 정치권 세대교체 갈망

    [일본을 다시본다] (12)꿈틀대는 정치권 세대교체 갈망

    |도쿄 특별취재반|1866년 여름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 번과의 전투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다. 결국 이듬해 12월 정권은 조슈와 사쓰마 지역의 젊은 사무라이들에게 넘어가고 구태와 무능으로 일관했던 막부는 공식 폐지된다.‘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이 혁명을 주도한 핵심은 신흥계급이 아니라 기존 엘리트층인 사무라이들이라는 점이 유럽의 근대적 혁명과의 차이다. 일본은 특유의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근대화의 문을 열어젖힌 셈이다.2005년 5월. 일본 정치권에선 또다시 ‘위로부터의 개혁’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는 내년 9월이지만 ‘우정민영화’ 법안으로 다음달 중의원 해산 후 조기 총선이 가시화되고 있는 긴박한 상황과도 맞물려 있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일본 젊은 정치인들의 화두는 ‘세대교체’다. 그들 대부분은 아버지의 대를 이은 2세 정치인. 그러면서도 원로 정객들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이지 혁명’의 메커니즘과 절묘하게 닿아 있다. 젊은 의원들은 향후 정치판도를 기득권층 대 신진세력의 구도로 그리고 있다. 집권 자민당에서 ‘부간사장’이란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고노 다로(43) 중의원은 마치 다른 당을 비판하듯 신랄하게 자민당을 난타했다. 차기 총선의 전망을 묻자 “세대교체에 성공하면 계속 집권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민당은 몰락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고노 요헤이 전 자민당 총재의 아들로 전형적인 2세 정치인에 해당하는 그는 지난 총선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일격을 맞은 데 대해 “연금개혁을 추진한 사람이 원로들과 바보같은 개혁을 했기 때문”이라며 “낡은 의원들이 언제까지 해먹느냐가 문제”라고 일갈했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에 따른 장단점을 설명해달라는 주문에는 “거의 다 단점이다. 자민당의 의사결정 메커니즘과 국회운영 방법은 재앙이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이런 수준의 ‘자아비판’은 당혹스럽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1년 민주당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동교동계를 겨냥해 정풍운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으나, 의원 개인 차원에서 고노 의원과 같은 과격한 비판은 감히 하지 못했었다. 소장파 의원들이 힘을 모아 성명을 발표하는 경우에도 수위를 극도로 조심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핵심 당직자가 원로들을 향해 대놓고 물러나라고 소리치고 있는 격이다. 그의 단호한 눈빛에서 젊은 사무라이의 섬뜩함이 연상됐다. 야마모토 도미오 전 농수산상의 후광으로 정계에 입문한 야마모토 이치다(47) 참의원은 좀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는 “현역 중 나이가 많거나 지지율이 낮은 후보자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젊은 정치인으로 물갈이시켜야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수 있다.”면서 “지금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세대교체, 정당교체가 일어나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야마모토 의원에 따르면, 자민당내 30∼40대 젊은 의원들은 차기 총재 선거를 앞두고 세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20명선에서 출발한 ‘혁명군’이 지금은 70∼80명으로 늘었다는 주장이다. 야마모토 의원은 “이전 세대가 주축이 된 기득권 세력이 차기 총재 경선에서 또다시 승리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다면 자민당엔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만약 그런 사태가 빚어진다면 나는 야당인 민주당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정권 자체를 교체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던졌다. 놀란 기자가 ‘민주당에 입당하겠다는 의미냐.’고 묻자 “실제로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톤을 낮추면서도 “중요한 것은 정권을 잡느냐 못 잡느냐가 아니라, 경제부흥을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의 미카즈키 다이조(34) 의원도 “지금 민주당에는 자민당 출신이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자민당식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며 “지금처럼 민주당이 국민에게 자민당과의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총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정책 한두개로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진정한 세대교체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 공천 과정에서 대규모 세대교체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파벌간 나눠먹기에 의한 하향식 공천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지역구 예산 확보에 대한 기대로 다선(多選) 중진 정치인들을 선호하고 있는 경향도 공천 혁명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우리가 유념할 대목은 젊은 유망 정치인들의 ‘위로부터의 혁명’의 기세가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이들이 일본 정치의 구질서를 혁파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또한번의 ‘기득권층의 변신’으로 기록될 수 있다. 민주당 미카즈키 의원은 “자민당 의원들은 자민당적인 정치방식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세대교체란 화두를 전술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지금껏 일본이 가치를 뒀던 분야가 아니라, 환경과 평화와 같은 미래지향적 가치를 위해 세대교체가 단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치의 진정한 미래는 세대교체 자체가 아니라, 세대교체의 질에 있다는 지적이다. carlos@seoul.co.kr ■ 日국회의원회관 가보니 |도쿄 특별취재반|일본 국회의 의원회관은 ‘본받을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회관의 정문으로 의원들뿐 아니라 일반 민원인들도 ‘버젓이’ 출입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의원회관은 오직 의원들만 햇볕이 잘드는 정문의 커다란 유리 자동문을 통과할 수 있다. 보무도 당당하게 붉은 카펫을 밟으며 출입하는 의원들의 자태에서 ‘민주’(民主)의 이미지를 찾는 일은 허망하다. 의원들을 수행하는 보좌관들도 ‘감히’ 이 자동문은 통과하지 못한다. 양옆에 달린 좁은 회전문이 보좌관과 일반직원의 통로다. 그래서 한국의 의원회관 정문에서는 함께 걸어오던 의원과 보좌관이 각각 다른 문을 통과한 뒤 바로 다시 ‘상봉’하는 웃지못할 촌극이 이어진다. 안타까운 것은 민원인들이다. 국회 지리를 잘 모르는 이들이 어렵게 물어물어 정문까지 왔다가, 경비직원들한테 제지당하고 다시 한참을 돌아 건물 뒤편의 지하 후문으로 가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일본 의원회관의 경우 복도 곳곳에 전광판식으로 본회의 및 상임위원회 일정이 계속 ‘보도’되는 것도 인상적이있다. 의원들이 전광판을 수시로 마주치다 보면 아무래도 회의를 빼먹기가 좀 미안할 듯싶었다. 마침 의원회관 1층에서 입법 관련 공청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좁은 회의실에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었다. 그래도 침 삼키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진지했다. 자꾸 드나들어 주의를 산만하게 하거나 회의장 바깥에서 떠드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carlos@seoul.co.kr ■ 日 젊은 정치인들 솔직·당당 |도쿄 특별취재반|혼네(本音·진짜 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으로 드러내는 마음). 흔히 일본인의 이중적 기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일본의 젊은 정치인들한테는 이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다분히 직설적이었고, 속내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고노 다로 중의원은 직선적인 매너로 기자를 당황스럽게 했다. 사무실 위치가 헷갈려 약속시간에 3분 정도 늦었는데,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 통역이 매끄럽지 않자 마침 곁에 있던 한국 특파원 출신 일본인 기자에게 “당신이 통역하라.”고 해 기자가 데려간 통역사를 무안하게 했다. 야마모토 이치다 참의원은 자화자찬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대화 도중 “유력한 차세대 총리 후보인 나로서는…”이란 말을 수시로 했다. 자신을 차세대 정치인으로 소개한 책자를 ‘선물’로 건네기도 했다. 기자를 가장 놀래킨 사람은 30대의 미카즈키 다이조 중의원이있다. 한참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보좌관이 들어와 귀엣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순간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집어들더니 사무실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하이(예), 하이”하면서 90도로 연신 허리를 숙여가며 통화를 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같은 당 원로 의원의 전화였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혼신을 다하는 자세에서 혼네와 다테마에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였다. carlos@seoul.co.kr
  • [세상에 이런일이] 윗집 여자 아래층 남자 그리고 남편 → 살다

    부부싸움을 하다 아파트 10층에서 뛰어내린 주부가 이웃과 남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23일 오전 10시10분쯤 광주 광산구 월계동 모아파트 10층에서 A(39·여)씨가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베란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다행히 뒤따라간 남편 B(43)씨가 재빨리 몸을 던져 다리를 잡았으나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힘에 부쳐 하는 남편과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A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이 장면을 본 주민들은 하나둘씩 아파트 앞에 모여 들었지만 모두 어쩔 줄 모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기민하게 움직인 사람은 아래층에 사는 C(50)씨였다. 주민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베란다 밖을 내다본 C(50)씨는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 아내를 잡고 있는 남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C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11층을 통해 베란다를 타고 10층으로 내려왔고 결국 기진맥진해 있던 남편 B씨를 도와 A씨를 구해냈다. 경찰 관계자는 “아래층 남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A씨는 결국 20m아래로 곤두박질쳤을 것”이라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윗집 여자의 목숨을 살린 이웃의 정성을 봐서라도 10층 부부가 불행한 일 없이 잘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어제는 한 길 오늘은 딴 길] (2)유시민 vs 심재철

    [어제는 한 길 오늘은 딴 길] (2)유시민 vs 심재철

    “역사는 과거를 보는 현재의 거울이다.”. 폴란드의 저명한 철학자 아담 샤프의 말이다. 이에 따르면 똑같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의 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개인사에도 적용된다.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인 유시민 의원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한때 공유했던 학생운동이라는 ‘한길’에 대한 평가도 두 사람이 비춰 보는 ‘현재의 창’에 따라 정반대로 엇갈릴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다리는 서슬퍼런 군부 독재시절인 78년 서울대 언더서클 ‘농촌법학회’(농법)였다. 당시 2학년이던 심 의원은 유 의원에 대해 “신입생 가운데 도드라졌다.”며 “토론을 하다 보면 논리가 명쾌하고 대화 기술도 뛰어나서 2학기에 서클 핵심멤버로 자리잡았다.”고 기억한다. ‘농법’에서 당시 학생운동의 통과의례였던 치열한 학습과 농촌활동(강원도 문막면) 등을 거쳤다. 이를 바탕으로 다진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을 학생운동에 투사했다. 그러다 80년 심 의원은 학생회 회장, 유 의원은 대의원회 의장을 맡으며 학도호국단체제를 해체하고 학생회를 부활시켰다. 두 사람은 당시의 ‘안개 정국´에서 반독재를 모토로 학생운동에 전념하다 80년 ‘서울의 봄´을 맞았고 10만여 학생의 집회를 이끌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의 주역이었다. 유 의원은 ‘한길’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했다.“그저 같은 시기 같은 대학에 다녔다는 동일한 상황에서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고 행동한 거죠.” 거듭 물었더니 “현재의 모습에 대한 실망 때문에 ‘아름다운 시절’ 기억의 편린을 일그러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심재철 선배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다른 ‘심재철’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의원에게 심 의원은 ‘인식론적 단절’의 대상인 셈이다. 그만큼 심 의원의 ‘딴 길’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하다. 두 사람이 다른 길로 접어드는 계기의 하나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보인다.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군 법정에서 군 검찰의 고문에 자백이라고 진술했지만 심 의원만은 자백 내용을 인정했다. 유 의원은 심 의원에게 “왜 그렇게 진술했냐? 관련자들에게 빌어라.”라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이후의 행보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심 의원은 MBC 기자로 활동하다가 1995년 신한국당(한나라당)에 입당,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된다. 입당 전 독일에 유학하던 유 의원에게 자문하자 유 의원이 “왜 그런 당에 가려느냐?”며 말렸다고 한다. 한편 유 의원은 복학 뒤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 옥살이를 한 뒤 88년 이해찬(현 국무총리) 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갔다. 보좌관 시절 창작과비평사에 중편소설 ‘달’을 발표하고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책들을 출간했다. 유학을 다녀온 뒤 방송 토론프로그램 사회자 등으로 활동하다 개혁당 창당을 주도하며 16대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국회로 들어갔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고비에서 두 사람은 다른 길을 택했다. 현재 두 사람이 서로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판이하다. 심 의원은 유 의원을 상대적으로 넉넉한 눈길로 바라본다.“뻔히 아는 입장이라 정치적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지 않다. 다만 유 의원은 늘 남보다 한 걸음 더 내딛고 있다. 그의 생각이 옳고 주장에 공감도 하지만 정치판에서 아우르고 가려면 개량주의적 접근이 어쩔 수 없기에 지금보다 톤을 낮추고 반걸음만 앞서 갔으면 좋겠다.” 반면 유 의원이 심 의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다.“‘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을 보는 심정은 착잡하고 시쳇말로 꿀꿀하다. 여야 국회의원이 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겠지만 왜 그렇게 사는지, 저렇게까지 살아야 되는지 싶다. 그래서 생의 아름다운 시절 가졌던 ‘심재철’의 모습과 지금 그의 모습은 내 뇌리에 단절돼 남아 있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데스크시각] 시장의 반란/박정현 정치부 차장

    요즘 ‘넌 노미니(non nominee)’란 골프 회원권이 등장했다고 한다. 보통의 골프 회원권은 회원 한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골퍼들에게 회원보다 비싼 일반 그린 피를 물리지만,‘회원이 지명되지 않은 회원권’이란 뜻의 넌 노미니 회원권은 골퍼 모두에게 회원 그린 피를 적용한다. 회원권은 12억원가량으로 일반 회원권보다 훨씬 비싸지만 그린 피는 일인당 6만원으로 일반인의 3분의1 수준이다. 이런 신종 회원권이 등장한 이유는, 카드 접대비 한도 50만원을 넘으면 신고해야 하는 접대비 실명제를 피하기 위해서다. 골프접대에는 한팀에 보통 100만원 안팎의 비용이 들고, 이를 50만원 한도 내에서 두차례로 나눠서 결제하는 카드실명제 기피방법은 기업인들에게는 새삼스럽지 않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2003년 3·4분기의 법인카드 사용규모는 12조 1413억원이었으나, 지난해 카드 실명제가 도입된 뒤 3분기에 12조 9058억원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접대비를 줄여보겠다는 정부의 취지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뛰는 정책 위에서 시장은 날고 있기 때문에, 정부 정책은 언제나 시장을 뒤쫓기 마련인 듯하다. 얼마전 만난 공기업의 간부는 ‘넌 노미니’ 회원권을 사례로 들면서 “정부가 시장을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도 정부의 한계와 시장의 힘을 반영한다. 정부가 시장을 이기기 어렵다는 사례가 어디 이뿐이랴. 최근 사회적으로 뜨거운 논란과 관심을 모으고 있는 교육과 부동산 문제는 분명 ‘시장의 반란’이다. 정부가 강도 높은 부동산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부동산 값은 마치 정부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다.“강남불패가 아닌 대통령 불패의 신화를 만들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부동산 값을 잡겠다.”고 톤을 높여가고 있다.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토지공개념을 들먹이면서 초강경의 대책을 내놓을 태세다. 부동산 값은 가진 자를 살찌우면서, 서민들에게는 상대적 박탈감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이런 사회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부동산 값을 잡아야 한다는 점은 정부의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런던·뉴욕 등에서도 부동산 값이 최근 몇년 사이에 두 배로 뛰었다는 사실에 행여 정부 당국자들은 귀막고 있지는 않는가. 저금리 시대에 갈 곳 없는 돈이 부동산 시장에 몰리는 게 세계적 추세인데, 집값을 잡으려는 정부의 무리한 대책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루 평균 30억달러의 거래규모를 가진 우리 외환당국이 환율방어에 나서 일평균 1조 5000억달러의 거래량을 가진 국제 외환시장과 싸우면 거꾸로 당하게 마련이어서 외환당국은 항상 신중해야 한다. 고교등급제, 본고사 부활, 기여입학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참여정부의 ‘3불 정책’에 정책의 수요자인 대학들은 반기를 들고 있다. 교육부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서울대 총장마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맞서는 모양새는 시장 반란의 극치다. 교육정책의 수요자인 대학의 요구대로 시장논리에 따라 본고사를 부활하고 고교등급제를 시행하면 교육정책의 최종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가 따를지는 미지수다. 일산과 분당에서 시행되던 고교입시제가 몇년전에 사라지고 평준화됐다는 사실은 시장논리가 철저하게 반영된 사례다. 정부는 3불 정책을 밀어붙이기에 앞서 고교평준화 분석 자료를 투명하게 제시하라는 요구를 충족시켜줘야 충돌과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시장과 유착해서도 안되지만 시장논리에 역행해서도 안 된다. 개혁적이면서도 시장친화적인, 이상과 현실을 반영한 정책이 성공한다는 점은 실패한 부동산 정책의 교훈이다. 박정현 정치부 차장 jhpark@seoul.co.kr
  • [기고] 지방분권정책 거꾸로 간다/김희철 서울 관악구청장·행정학박사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면서 개막된 지방자치시대가 10년을 맞았다. 그동안 우리는 지방자치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보다 확고히 하는 동시에, 지방이 국가 발전의 또다른 주역으로 등장하게 됐음을 확인했다. 이제 주민들의 지위를 새롭게 변모시켜 주민들이 비로소 지역의 실질적 주인으로 자리매김했을 뿐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권익을 향유할 수 있는 전환점이 마련됐다. 그러나 지방자치 10년이 우리에게 장밋빛 성과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다. 옥에 티로 치부하기에는 우려할 만한 문제를 안고 왔다는 점도 우리는 공감하고 있다. 특히 지방자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심지어는 그 기본정신마저 훼손하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기초자치단체장에 대한 정당공천제,3기 연임 제한, 후원회 금지 등은 입법재량권의 한계를 일탈해 위헌의 소지가 많은 사안이다. 때문에 전국 시장ㆍ군수ㆍ구청장협의회는 국민적 여론을 바탕으로 이의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중앙정치권에서는 지난 6월 임시 국회에서 대다수 국민의 의사를 외면한 채 정작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기초의회 의원에 대해서도 정당 공천을 하도록 개악해 통과시켰다. 정치개혁을 다짐한 17대 국회 초기에 제시한 야심찬 목표와 의지는 온데간데없고 빛바랜 누더기 개악만 남은 것이다.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 현실과 중앙집중적 정당제 아래에서 기초의회의원 선거에도 정당공천제를 도입한 것은 지방자치를 중앙정치에 예속시킴으로써 지방자치 본래의 목적인 주민자치와 생활자치 실현을 포기하자는 것이다. 또한 이번 법률 개정에는 지방의원 유급화에 따른 지방의원 정수 감축을 빌미로 기초의회의원 선거의 중선거구제 도입을 끼워넣기식으로 처리했다. 우리는 유신정권 아래에서 중선거구제가 신진세력보다는 기득권세력에 유리한 제도라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지역구가 확대됨에 따라 소지역주의가 극성을 부리게 될 것이며, 선거비용이 더 들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새로운 제도가 기존의 제도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다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경쟁지역에서 서로 나눠먹기를 조장하는 중선거구제를 일부 정당에서 선택한 것은 사실상 국민적 합의에 배치되는 일이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들에게 약속한 4대 국정원리 중 하나가 ‘분권과 자율’이며, 국정 12대 의제 중 하나가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방분권의 열쇠는 지방자치단체에 일정수준 이상의 재정재량권을 부여하고, 재정운영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정부는 과세형평과 소득재분배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해 지방재정 악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는 지방자치가 지향하는 재정분권에 역행하는 졸속 입법의 전형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한가지 예는 오는 7월27일 주민투표법 제정 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제주도의 주민투표가 그것이다. 광역자치단체가 기초자치단체를 통폐합하고자 추진하면서 행정자치부와의 협의만을 거쳐 일방적으로 주민투표를 진행하는 것은 지방자치의 핵심인 기초자치단체의 존립과 자치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방자치의 근본인 주민을 배제한 중앙정치권의 일방적인 입법 조치가 초래할 반민주적ㆍ반자치적 비용은 결국 고스란히 주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렵게 부활된 지방자치가 꽃을 피우고 번영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중앙정치권과 중앙정부의 냉철한 자기반성만이 남았다. 이제라도 문제점을 인정하고 해결해 나가려는 적극적인 의지와 실천을 촉구한다. 김희철 서울 관악구청장·행정학박사
  •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빌링 허스트 지음

    ‘여자에게 가는가? 그렇다면 회초리를 잊지 말게.’ 흔히 여성 혐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니체의 책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니체는 아마도 여성이란 남자를 타락시키는 위험한 존재이며, 그렇게 때문에 마땅히 통제되어야 하는 경계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오스트리아의 천재적 사상가 오토 바이닝거는 그의 주저 ‘성(性)과 성격’에서 남성이 여성에게 회초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웅변한다. 완벽한 합리성과 창조성의 구현인 남성상과는 대조적으로 성적인 희열을 갈구하는 충족될 수 없는 음탕한 충동의 화신이 바로 여성이라는 것이다. ●성적 희열 갈구하는 ‘음탕한 충동의 화신´ 비단 이뿐인가. 유대인의 민담에서 아담의 첫번째 여자로 등장하는 릴리트에서부터 영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묘사된 수많은 ‘요부’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과연 신화와 역사, 근대 이후의 대중문화 속에서 그려진 것처럼 남성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개인과 나라를 파멸로 이끈 위험천만한 존재들이었을까? 하지만 인도 출신의 여성 작가 빌링 허스트는 이에 대해 “지극히 왜곡된 시각의 산물”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같은 요부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오히려 남성의 욕망과 시대·정치적 필요성이라고 주장한다. 빌링 허스트의 저서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석기용 옮김, 이마고 펴냄)는 이처럼 모순되는 시대의 가치관 속에서 등장해 아직까지 진행되고 있는 요부의 변천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즉 요부의 이미지가 등장한 것은 바로 남성들의 성적인 욕망과 함께 반대쪽 성을 배제하는 배타적 권력 독점의 의지에서 비롯된 정치적 역학관계에 있다고 분석한다. 정상 체위의 성생활에 권태를 느끼며 좀 더 자극적인 성적 유희를 즐기기 위해 에덴동산과 아담을 떠나는 릴리트. 뱀과 공모하여 금단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인류에게 원죄와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는 이브. 탁월한 정치감각과 국가 관리능력이 있었지만 코의 높이만 강조돼 희대의 요부로만 등장하는 클레오파트라. 남자를 도구로 이용하는 성적 포식자 팜므파탈, 관능적 천진함으로 뭉친 백치미로 남자들을 유혹한 섹스 키튼 등등. ●남성의 권력을 탐내는 잠재적 권력찬탈자 이같은 이미지들 속에서 저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옮기고 다닌 남성 이야기꾼들의 불순한 속내를 읽어낸다. 이들에게 여성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성적 욕망의 대상이다. 동시에 혹시 그같은 남성들의 욕망을 거꾸로 이용하여 남성의 권위를 무너뜨리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잠재적 권력 찬탈자이기도 하다. 이같이 상반된 이중적 이미지의 소유자인 여성 앞에서 남성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그런데 이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마련한 묘수가 바로 여성에게 소위 ‘요사스러운’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었고, 그 결과 탄생된 것이 바로 ‘요부’라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요부는 시대배경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두 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먼저 사회가 남성들에 의해 안정적으로 통제된다고 여겨질 때는 마릴린 먼로, 진 할로 같은 유혹적 섹스심벌이 등장한다. 혹은 영국 넬슨 제독의 여자였던 엠마 해밀턴처럼 아름답고 재기넘치는 정부(情夫)가 강조된다. 이들은 성적 매력을 내세우고 남자를 이용해 부와 안전을 보장받기는 하지만, 남자의 권력을 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회가 격변기에 있고 남성들의 주도권이 위태롭게 느껴질 때면 파괴자로서의 요부 이미지가 번성한다. 무희이자 고급 창부에 첩보원이었던 마타 하리는 남성 특권의 구역에서 무모하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던 모험가였다. 경제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기운으로 시절이 불안했던 시기 필름 누아르에 등장한 팜므파탈은 남자를 도구로 이용하는 성적 포식자로 그려진다. 결국 위험하고 음습하게 그려진 요부라는 이미지는 바로 그같은 남성들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에 다름 아님을 책은 보여주고자 한다.1만 7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오랑캐의 탄생/니콜라 디코스모 지음

    “무릇 천자(天子)란 천하의 머리이니, 왜 그런가 하면 위이기 때문이다. 오랑캐(蠻夷)는 천하의 발이니, 왜 그런가 하면 아래이기 때문이다. 지금 흉노가 거만하게 굴며 지극히 불경한 것은 발이 위에 있고 머리가 아래에 있어 거꾸로 뒤집힌 것과 같다.” 한서(漢書) 48권 ‘가의전’(賈誼傳)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들은 과연 호전적이고 미개한 변방의 야만인인가?그러나 중국과 북아시아 유목민들과의 관계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니콜라 디코스모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수천년간 우리 정신을 지배해온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가차없이 깨뜨린다. 그는 저서 ‘오랑캐의 탄생’(이재정 옮김, 황금가지 펴냄)은 역사상 ‘미개한 야만인’들로 그려진 중국 북방 유목민들의 참 역사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전통적으로 중국의 관계에서만 지위를 부여받아온 북방 유목민들 역사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중화사상의 오랜 전통하에 유목민들은 ‘타자’로서, 곧 문화적으로 동화시켜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저자는 그러나 북방의 유목민들이 실제로는 독자적인 금속기 문화를 발달시킨 예를 들며 중국 북방의 역사를 문화사 수준으로 끌어올리려고 한다. 융적, 호, 흉노로 기록된 유목민들이 뛰어난 기마술과 금속기 문화를 토대로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지배했고, 여러 부족들이 연합해 제국을 형성해서 중국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등 아시아 고대사의 한 축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것이다. 북방 유목민들이 중국 역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전국시대였지만, 중국사의 구성요소로서 본격적으로 서술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흉노열전’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유목민들을 단순히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는데 그쳤으나, 당시 흉노족이 한나라와 치열하게 대적할 만큼 성장하면서 사마천은 그들을 통일된 세계관을 구축하는 데 장애물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 ‘흉노열전’을 쓴 배경에는 이런 흉노를 중국적 세계질서에 종속된 존재로 각인시켜려는 의도가 자리잡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중국과 북방 유목민 역사에서 2000년 이상 존속해온 ‘문명 대 야만’의 역사관은 결국 ‘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진한 전환기 흉노에 대한 정보가 모두 ‘사기’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그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데 저자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에따라 그는 중국문헌에 의존하는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다양한 고고학 발굴 성과들을 토대로 변경 유목민 역사에 대해 재해석을 시도했다. 최근 고구려사 논쟁에서 보듯 우리도 중화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한민족도 유목민과 마찬가지로 변방에 위치한 오랑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국사의 범위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범주로 한다.’는 원칙에따라 고대사를 저술한다. 저자가 중국 문헌에 의존하는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고고학을 동원해 ‘대등한 역사 공동체들 간의 교류’를 동아시아 고대사의 패러다임으로 삼았음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되지 않을까? 2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연가 (1)광화문 거리

    서울연가 (1)광화문 거리

    ‘거리와 추억은 동의어?’고도(古都) 서울은 골목마다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궁의 돌담길 처마 밑에서, 휘황찬란한 강남의 가로등 아래서 시민들은 사랑을 속삭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울인은 22일자부터 ‘서울 연가(戀街·사랑의 거리)’시리즈를 매달 한번꼴(3주에 한번)로 내보낸다. 연인들에게는 놓쳐서는 안 될 데이트 장소이며, 나이든 어른들에게는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시리즈의 첫회로 ‘광화문 거리’를 소개한다. 사랑과 추억의 거리로 들어가 보자. 덕수궁 돌담길 서울 시내에서 가장 유서 깊은 산책 코스이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300m 남짓한 산책로가 나온다.1차선 도로로 차들도 지나지만 행인이 더 많다. 정동교회부터 경향신문사 사옥까지 이어지는 정동길은 누구와 걸어도 좋다. 덕수궁 돌담길은 낮보다는 밤에 더욱 빛난다. 도로 양 옆 산책로의 가로수와 벤치가 가로등 불빛에 제 모습을 드러낼 즈음 연인들의 사랑도 깊어 간다. 수백년 역사를 품은 덕수궁 담장 옆을 거닐며 영겁(永劫)의 사랑을 속삭여 보자. 그러나 덕수궁 돌담길을 거닌 연인들은 헤어진다는 속설도 있다. 서울광장 지난해 5월 개장 이후 명물로 떠올랐다. 서울시청 앞 2000여평의 원형 잔디 광장이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주변 직장인과 연인들은 물론 가족 단위로 나들이 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플라자 호텔 맞은편 분수대도 볼거리. 광장 북쪽으로 매주 토요일 늦은 오후 ‘일상의 여유’ 공연이,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하루 세 차례 왕궁수문장 교대의식도 열린다. 청계광장 광화문 파이낸스빌딩 앞 청계천 시점부 740여평 규모. 청계천 물이 시작되는 광장분수는 촛불과 원형의 두 분수가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폭포 양 옆에는 전국에서 돌을 가져온 ‘8도석’을 깔았다. 반도체발광소자(LED)를 설치, 밤이면 빛과 물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파이낸스빌딩과 서울신문사 화장실을 심야에도 이용할 수 있다. 성곡미술관 광화문 구세군회관 왼쪽 길로 300m 올라가다 보면 만난다. 쌍용그룹 창업주 성곡 김성곤의 옛 저택에 자리잡은 자연친화형 미술관이다.100여종의 나무들이 숲을 이룬 조각공원이 일품이다. 나무와 잔디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조각품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성곡미술관 찻집도 빼놓을 수 없다. 야외 테라스에서 에스프레소에 입술을 적시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추억속으로 빠져든다.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고풍스러운 성당 주변을 거닐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수요일 정오에 열리는 ‘주먹밥 콘서트’는 많은 이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고 있다. 맛난 주먹밥에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정동공원 사실 정동 전체가 ‘공원’이다. 그러나 정동에는 작은 공원 두개가 있다. 배재빌딩 옆 배재공원과 옛 러시아공사관 탑 아래의 정동공원. 둘 다 잘 알려지지 않았다. 모두 규모가 작지만 운치는 여느 공원 못지 않다. 연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실 시청 앞 무교동 골목 입구 금세기빌딩 8층. 인권 관련 단행본 1만여권, 영상자료 700종, 각종 일간지, 인권 특화신문 등을 무료로 볼 수 있다. 고도근시 등 시각 장애인을 위한 독서확대기, 점자프린터 등도 갖추고 있다. 한 달에 100여명이 방문해 비교적 한산하다.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에 이용할 수 있다.2125-9680. 영국문화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흥국생명 2층에 있다. 자투리 시간에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영어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다. 각종 간행물,CD,DVD 등을 통해 영국의 생활방식, 문화, 영국유학에 관한 정보도 접할 수 있다. 하루 이용료는 3000원. 연회비는 3만원이다.3702-0600. 서울역사박물관 경희궁 옆에 자리잡고 있다. 1년 내내 볼만한 기획전시가 끊이지 않는다. 다음달 21일까지는 남북의 고구려 유물을 볼 수 있는 ‘대륙의 꿈 고구려’전이 열린다. 기증품을 중심으로 한 상설전시도 둘러볼 수 있다.724-0114.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같이 마시자 부라보! 밀워키는 광화문 일대에서 손님들에게 신청곡을 받아 곡을 틀어주는 유일한 곳이다.LP판이 3000여장 있는 데다 없는 노래를 신청하면 주인 박용훈(37)씨가 수시로 LP판을 사다놓는다.LP판의 아버지뻘인 SP판을 재생하는 축음기와 비틀스·롤링스톤스 등의 포스터도 있다.774-3886. 프레지던트 호텔 개나리 바에서는 오후 6∼8시 생맥주 500㏄를 1970원이라는 ‘호텔스럽지 않은’ 저렴한 가격에 판다.3705-4221. 패밀리 레스토랑과 맥주집이 결합된 아사히(776-8986)와 타임아웃(3783-0233)도 세련된 인테리어로 여성 손님을 유혹하고 있다. ■ 이두걸 기자 “허름하지만 맛은 최고 점심한끼 제대로 먹자고요” 이남장(광화문점) 설렁탕 육수를 48시간 동안 끓여 내놓는다. 일년에 설과 추석 이틀을 빼고 주방장 가마솥이 끓고 있다. 김치에 설렁탕 육수를 양념으로 넣은 ‘탕국물 숙성김치’가 설렁탕의 담백한 맛을 살려준다. 푸짐한 양의 고기는 주인장 인심을 가늠케 한다.1인분 7000원.3210-3335. 리북손만두 접시만두(6000원)를 주문하면 어른 주먹만 한 만두 3개가 나온다. 투박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사골국물과 멸치액젓을 가미한 시원한 김칫국물에 밥을 넣은 김치말이밥(6000원)은 여름 별미로 꼽힌다.776-7350. 가미 서너평 공간에 20석 남짓한 조그만 식당이지만 양만큼은 푸짐하고 맛 또한 정갈하다. 메밀국수 정식(메밀국수+초밥)이 6000원, 오뎅백반, 우동 등이 5000원.737-1678. 깡장집 된장을 오래 졸여 얼큰하고 걸쭉한 ‘깡장’(일명 강된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환상적이다. 양파·돼지고기·풋고추·오징어를 잘게 다져 걸쭉하게 끓인 된장찌개를 양푼에 비벼 먹는다.4000원.720-6152 터줏골 메뉴가 북어국(5000원) 하나이기 때문에 식당에 들어서면 묻지도 않고 음식을 내온다.1968년 자리잡은 뒤 우유처럼 뽀얀 국물이 술에 괴로워하는 회사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북어는 강원도 진부령 덕장에서, 마늘은 충주에서, 검정콩은 음성산을 사용한다.777-3891. 용금옥 80년대 남북 회담 때 참석한 북한 인사가 ‘용금옥이 아직도 있느냐.’고 물어봤을 정도로 6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추어탕집이다. 통미꾸라지에 양지살·내장·유부·계란 등을 함께 넣고 끓여 칼칼한 국물 맛이 우러난다. 추탕 8000원, 미꾸라지볶음 1만 5000원.777-1689. 광화문집 26년째 김치찌개를 끓여온 이름난 집이라 외국인 관광객까지 찾아온다. 큼직하게 썬 돼지 목살과 신김치, 흰 두부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푸짐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계란말이까지 함께 하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모두 5000원. 공기밥 1000원.739-7737 ■ 김유영 기자 “연인을 위한 데이트 장소 추천합니다 분위기 짱 맛도 짱” 이빠네마 브라질 정통 숯불바비큐인 ‘추라스카리아’ 레스토랑이다. 브라질 주방장이 꼬치에 꽂은 고기를 직접 가져와 썰어준다. 소안창살, 칠면조, 양갈비 등 다양한 고기를 ‘마르카도르’(목각)를 거꾸로 놓을 때까지 무제한 갖다준다. 참숯으로 기름을 빼 노린내를 줄였다. 점심 1만 6000원, 저녁 2만 4500원.779-2757. 우드 앤 브릭(Wood&Brick)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이탈리아 식당이다. 식당 벽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데다 가게 앞에 노천카페를 운영해 광화문거리를 내다보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주방장은 신라호텔 출신인 박현진씨다.735-1157. 스패뉴(Spanew) 도넛가게를 하던 아버지의 가게터를 물려받아 사장인 강근영(35)씨가 주방장을 겸해 피자·파스타 등을 만든다. 수시로 재즈와 와인이 있는 스탠딩파티를 열기도 한다. 넓지 않은 좌석(40석)이 오히려 유럽식 카페를 연상케한다. 사장이 공들여 개발한 샐러드피자(1만 4000원)도 잘 팔린다. 점심 세트 2인기준 2만 2800원.755-4033. 카페 이마(Cafe iMa) 소시지·밥·젓갈을 한접시에 담은 ‘이마 라이스’(8000원)와 빵에 생크림·과일을 얹은 ‘와플 위드 에브리씽’(1만원)이 유명하다. 평일 점심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20·30대 여성들이 많이 찾는다.2020-2088. 에비뉴 원 (AVENEW 1) 커다란 통유리창, 높은 천장, 심플한 인테리어가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매콤한 맛의 해물아마트리치아나(1만 3000원)와 오전 10시부터 파는 샌드위치(테이크 아웃시 10% 할인)도 인기다. 점심 메뉴는 1만 5000원. 주말 아침 브런치를 갖기에도 좋다.738-2563.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8) 토정 이지함과 ‘토정가장결’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굳게 믿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해가 바뀔 때마다 자기 자신의 일년 신수는 물론 가족과 친지들의 새해운수도 일일이 챙겨준다. 실은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엔 그런 이들이 참 많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1517~1578년)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토정은 매월당 김시습, 북창 정렴과 함께 조선의 3대 기인으로 손꼽힌다. 놀랍게도 ‘정감록’가운데는 토정이 지었다는 ‘토정가장결’이 포함돼 있어 관심을 끈다. 더욱이 이 예언서는 여러 대 동안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므로 더욱 호기심이 일어난다. 그런데 ‘토정가장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잘 모르는 토정 이지함의 비극적인 생애를 알아보자, 이 기회에 그가 후세에 남겼다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그리고 ‘정감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겠다. ●토정은 대단한 기인(奇人) ‘조선왕조실록’엔 토정의 풍모를 전해주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지함을 토정이라 불렀다. 이지함이 거처하던 곳이 토정(土亭)이었기 때문이다. 토정은 일찍이 한양의 마포 항구(麻浦港口)에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어 놓고 그 아래 굴을 팠으며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큰물이 졌을 때도 토정이 만든 흙 언덕은 언제나 그대로였다(실록, 선조 수정 11년 7월1일 경술). 토정은 여느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어 보이는 큰 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특히 발이 무척 컸다고 한다. 토정의 얼굴은 둥글고 검은 편이었고 눈빛이 강렬했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맑아 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토정은 보통 선비들과는 차림새도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짚신을 신고 죽립(竹笠)을 쓴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초립(草笠)에 나막신을 신은 구부정한 모습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당연히 조랑말이라도 타고 다녀야 되는 줄로 알았고, 항시 의관을 정제했다. 고급스러운 말총으로 꾸민 큰 갓을 쓰고 가죽신을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토정은 이런 풍습을 도외시했으므로, 그가 길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비웃기 마련이었다. 담화를 나눌 때도 토정은 수수께끼나 농담을 즐겼고, 점잖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도 많았다(실록, 선조 수정 6년 5월1일 경진). 한마디로, 토정은 격식을 초월했다. 혼례를 치른 다음 날에도 의외의 행동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놀라게 했다. 모처럼 새로 지은 도포를 입고 외출한 토정은 어느 다리 밑을 지나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세 명의 거지아이를 만났다. 토정은 입고 있던 새 도포를 벗어 세 폭으로 찢어서 그 아이들에게 입혀주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일 바깥에서 일을 보았다. 토정은 이처럼 호방한 성격이었다. 도인의 면모를 보인 적도 많았다. 그는 열흘 정도는 굶어도 거뜬했다. 무더운 여름철에도 냉수 한 모금 마시는 일이 없었다. 요즘의 건강상식에 크게 어긋난 행동이었다. 토정은 간혹 천리 길을 걸어 어딘가를 바람처럼 다녀오기도 하였다. 배를 타고 방랑하기를 좋아해 제주도를 여러 번 찾았다는데 태풍이 불거나 파도가 거센 날을 용케 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간혹 여행 중에 기생들이 별의별 수단을 다 써 유혹했으나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정은 정욕마저 완전히 끊어버린 이를테면 속세의 신선이었다는 이야기다.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설화도 그래서일까. 토정에겐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 능력이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장인에게 화가 닥칠 것을 미리 알았다 한다. 명종 초년의 일이다. 하루는 토정이 그 부친에게,“아내의 가문에 불길한 기운이 있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라고 아뢴 뒤 식구들을 이끌고 서둘러 한양을 떠났다. 바로 그 다음 날, 토정의 장인은 사화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의문이 없지 않다. 어쨌거나 ‘실록’은 토정의 예언 능력을 무척 칭찬한다. 한 번 사람을 만나보면 그 성품은 물론, 앞날의 길흉까지 환히 알아 맞혔다 한다. 토정은 이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사태를 예언했다는 구비설화가 남아 있다. 만년에 그는 조선 팔도를 두루 유람했다고 한다. 당연히 천하명산 금강산에도 들렀다. 하루는 날이 기울자 토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암벽 위에 서 있는 초라한 암자를 찾아갔다. 워낙 피곤해서 제대로 자리를 펴고 누울 겨를도 없이 방안에 들어가 한 쪽 벽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다. 조금 있다가 꿈속에 스님 두 분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풍과 자리를 깔며 부산을 떨었다. 토정은 스님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더니, 여러 산의 산신령들이 모여 장차 다가올 난리를 의논할 거라는 답변이었다. 과연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의를 열었다. 여러 주장이 난무했다. 그러자 금강산 산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왜놈들이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최선을 다해 놈들을 물리치자고 주장했다. 놀란 토정은 퍼뜩 깨어났다. 조금 전 기대어 잠을 청했던 암자는 오간 데 없었다. 암벽 위엔 한 그루 늙은 소나무만 외롭게 서 있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토정은 왜란이 일어날 줄을 짐작했다. 이것은 한낱 설화다. 토정을 뛰어난 예언가로 간주하게 된 후대의 민중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가 있다. 역사 속에서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이 민중들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그들은 본래 토정이 특이한 선비인 줄 알고 있었으므로, 이런 설화를 덧붙여 민중의 스승으로 이상화했다고 풀이된다. 왜란에 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토정의 문집에 실려 있다. 일찍이 그는 상중(喪中)에 있던 제자 조헌(趙憲)을 조문하였다. 그날 혜성(彗星)이 밤하늘에 뻗쳐 조헌이 그 조짐을 물었고, 토정은 이 혜성이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날 조짐이라며 그때에 대비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실록, 영조 30년 11월27일 임인). 스승의 말을 가슴에 새긴 조헌은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돼 금산에서 북상하던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문집의 기록은 사제간의 문답을 확대 해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토정이란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그는 일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국가의 장래를 염려했던 것이다. 토정은 다분히 도가적(道家的)이었지만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선비였다. ●사화에 얽혀 불우했던 토정 사실 토정은 국가경영에 관심이 컸다. 평상시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내가 일백 리 되는 고을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 가난한 백성을 모두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바꿀 것이다.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나라의 평안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토정은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명종5년(1549년) 토정이 33세 되던 해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토정의 장인이 역모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당했고, 연좌법에 걸린 토정은 벼슬길이 막혔다. 설상가상으로 죽마고우(竹馬故友) 안명세(安名世)마저 필화를 입고 죽었다. 사관(史官)으로 이름이 높았던 안명세는 명종 연간 을사사화(1545년)에 관련해 윤원형과 이기 등 소윤(小尹)이 윤임 등 대윤(大尹)을 모함해 몰살했다고 적었다. 윤원형 일파는 몰래 사초를 들여다보았고, 자기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쓴 안명세를 제거한 것이다. 이후 토정은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기인(奇人)으로 처세하게 됐다. 지지난 호에 소개한 정렴은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의 아들이라 스스로 세상을 피했던 데 비해, 토정은 억울하게도 세상에 용납되지 못해 기벽(奇癖)을 갖게 됐다고 해야 맞다. 어찌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기가 참 쉬웠을 텐데, 토정은 절망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및 의학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였고, 조헌과 이산보를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다. 조정이 토정에게 벼슬길을 열어준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을사사화의 주도세력이 조정에서 물러난 선조 초년이었는데, 그 사이 토정은 이미 늙어버렸다. 그는 60이 가까운 나이에 사실상 초임이나 다름없는 아산군수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평생 닦아온 선비의 웅지를 펼칠 겨를도 없었다. 토정이 남긴 글은 뒷날 ‘토정유고’(2권1책)로 정리됐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토정비결’과 ‘토정가장결’, 주역(周易)에 관한 ‘월영도’, 풍수지리를 다룬 ‘농아집’ 등을 토정의 저술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상 ‘토정유고’에는 위에 언급한 어떤 책자도 거론되지 않고 있다. 만일 실증주의의 입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토정비결’이나 ‘토정가장결’ 등은 토정의 저술이 될 수 없다.‘토정유고’외에는 이지함의 저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모두 후대의 위작으로 볼 것인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매력 물론 어느 쪽도 단언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른 책은 몰라도 ‘토정비결’만은 토정의 붓끝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의학과 점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를 찾아와 운수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반의 그런 요구가 많아지자 토정은 아예 한 권의 책을 지어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해방되기를 도모했을 법도 하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르다. 주역의 기본 괘는 48개인데 비해 ‘토정비결’은 32개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년(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 이지함처럼 기발하고 독창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각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게 돼 있다. 결과적으로,‘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일마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해 처리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토정비결’은 단순히 점을 봐주고 금품을 요구하는 직업적인 점쟁이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 눈엔 그것이 점을 통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점에만 의존하지 않게 유도하는 기능이 숨겨진 반점술서(反占術書)로 보인다. 토정 이지함과 같이 점에 능통하면서도, 본질적으론 유가(儒家)의 철학을 신봉한 큰선비가 남겼을 법한 저술이다. ●그럼 ‘토정가장결’은? 정리하면, 토정은 살아생전에 이미 기인, 도사 그리고 큰선비로 세상에 유명했다. 더욱이 후세에는 ‘토정비결’과 같은 명저의 지은이로 민중에게 더욱 친숙한 이름이 됐다. 그가 만일 무수한 개인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면, 나라의 운수인들 모를 까닭이 있었겠느냐는 의견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맴돌았음이 틀림없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선 토정이 남긴 예언서가 어디선가 발견돼야만 했다. 이것이 조선후기 ‘토정가장결’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이다. 분명한 사실은 ‘토정가장결’에 앞서 ‘정감록’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진인 정씨가 새 나라를 세운다는 ‘정감록’의 예언을 참작해 ‘토정가장결’이 쓰였다.“내 비록 재주 없으되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며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보니 한양이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토정가장결’은 이런 식으로 조선왕조의 멸망을 점쳤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수년 간 별의 숫자로 헤아려” 본 결과, 조선왕조의 운수를 짐작하게 됐다고 했다. 천문에 중점을 두고 예언을 했다는 점이 ‘토정가장결’의 특징이다.‘감결’을 비롯해 다른 예언서들이 풍수지리에 의존해 국운을 점친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참고로, 천문 점의 전문가들은 서북지방에 많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천문지식은 중국 사람들도 감탄할 정도였다. ‘토정가장결’에 보이는 두 번째 특징은 압록강 이북의 요동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잠시 비결을 인용하겠다.“장류수(계사) 운은 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침략한다. 이때 전읍(奠 , 즉 鄭姓 眞人)이 바다 섬의 군사를 이끌고 방성, 두성의 장수와 함께 갑오년 섣달 즉시 금강을 건너면 다시 천운이 커질 것이다.(중략) 곽 장군이 요동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 및 서남 오랑캐를 무찌르며,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편들고 이씨를 공격하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니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계사년에 외침이 있는데 만일 그 때 요동의 곽 장군이 나서서 정씨를 도우면 동아시아의 정치질서가 재편된다고 했다. 곽 장군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인데, 곽 장군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 상정되었다. 늦어도 19세기 후반엔 고구려의 옛 땅이던 만주가 가난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간 상당수 민중들의 손길로 개발되고 있었다.‘토정가장결’에 등장하는 곽 장군은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인물로 해석된다. 달리 말해, 간도에 진출한 빈농들이 이상적인 지도자로 여겼을 법한 가상인물이다. 셋째,‘토정가장결’은 난세의 피란지로 전혀 새로운 장소를 거론했다.“만약 요동 간방으로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라면 반드시 삼척부 대소궁기를 향하여 부지런히 힘을 기울여 곡식을 쌓을 일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정감록’은 주로 삼남 지방에 십승지 또는 길지를 설정해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상도의 풍기, 충청도 공주 및 전라도 운봉이었다.‘토정가장결’은 이를 정면에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요동과 삼척이란 뜻밖의 장소를 최고의 길지로 내세운다. 확실히 새로운 변화였다. 여기서 나는 ‘토정가장결’이 출현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짐작해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간도로의 ‘불법이민’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이 예언서가 창작된 것은 아닐까. 참고로, 삼척이 길지로 대두된 이유를 헤아려 보겠다. 토정에 관한 구전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때 토정은 삼척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데 거기서 스님 행색으로 위장한 왜놈 첩자를 붙들었다. 이 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은 토정이 살던 삼척에는 아예 얼씬도 못했다는 설화가 있다. 신기하게도 구전설화는 예언서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 모양이다. 물론 거꾸로 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토정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우한 재사였다. 그래서 그는 기인이자 도사가 되기도 했고,‘토정비결’ 같은 책을 지어 고난 받는 민중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려 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토정은 민중의 스승으로 자리매김돼 ‘토정가장결’의 저자로도 둔갑됐다.‘토정가장결’은 ‘정감록’의 논리를 존중하면서도 19세기 후반의 변화된 사회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알 자는 알리라.” (푸른역사연구소장)
  • [서울광장] 지역주의 핑계댈 때가 아니다/김경홍 논설위원

    [서울광장] 지역주의 핑계댈 때가 아니다/김경홍 논설위원

    아무리 정치가 ‘말잔치’라지만 요즈음 정치권에서 난무하고 있는 말들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말들인지 헷갈린다. 이 말들의 진원지는 대체로 대통령이거나, 아니면 대통령이 한마디하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거나 확대재생산하는 청와대나 여당이다. 최근의 논쟁을 보자. 열흘 남짓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연정얘기를 꺼냈다. 요점인즉, 여소야대가 되어서 국정이 잘 안되니까 이 구조를 연정이든, 내각제 요소를 가미하든지 해서 극복해 보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우리 정치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대통령의 권력도 내놓겠다.”고까지 했다. 대통령이 권력구조 문제를 거론했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여론이 들끓고, 야당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열린우리당의 문희상 의장은 “정치개혁을 위한 연정구상은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화답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야당은 한목소리로 연정을 반대한다고 외쳤다. 이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아니다. 말이 말을 부르는 ‘흔들기’나 ‘떠보기’에 불과하다. 말은 계속된다. 노 대통령은 또 “국정의 여러가지 과제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정치적인 지역분할구도가 지역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확대해석하자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 내각제를 도입하자는 애드벌룬일 수도 있고, 선거제도를 바꾸자는 희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시 여당은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제안했다. 내각제와 중·대선거구제가 최선의 대안인지는 논외로 치자. 왜 갑자기 지역주의가 국정의 최대 걸림돌로 등장했을까. 지금 지역주의가 확대재생산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역주의로 상징되던 이른바 ‘3김시대’는 끝났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됐다. 경상도 출신인 노 대통령이 전라도가 주축인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가 됐고, 전국적인 고른 지지도 얻었다.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시대가 변화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왜 대통령이 다시금 지역주의를 들고 나오는지 어리둥절하다. 대통령의 권한과 행정력으로 지역균형발전도 추진하고 있고, 일정부분 인사로서도 지역불균형을 해소했고, 또 해소하면 된다. 굳이 지역주의를 들고나와 제도를 뜯어고치자는 것은 다분히 정파적 목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여당은 지역주의나 기득권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지만 핑계일 뿐이다. 거꾸로 여당이 과반을 넘긴 여대야소라면 기득권 얘기가 나왔을까. 또 열린우리당이 헌신짝 버리듯 내던져버린 민주당이 스러져 버렸다면, 열린우리당이 지난 재·보선에서 영남지역에서 한 석이라도 건졌다면 지역주의가 거론됐을까. 지역주의를 거론하는 자체가 지역주의를 부추길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부여당의 여건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원내 제1당의 위치가 여전하고, 단단한 지지세력이 버티고 있고, 대통령과 정부의 의지나 추진력도 다른 정권에 견주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잘 안되는 일은 전부 남의 탓, 제도의 탓, 지역주의로 돌리려는 발상에 있다. 손을 내밀지 않고 양보와 타협을 바라는 것도 문제다. 정치는 물이 흐르듯 해야 한다는 말은 진리다. 그래야 국민들이 안심한다. 자꾸 역류를 만들고 소용돌이치게 해서는 안 된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클릭이슈] 北 전력 무상공급 파장

    [클릭이슈] 北 전력 무상공급 파장

    정부가 북한의 핵폐기를 전제로 전력을 무상 공급하겠다는 ‘중대 제안’에 이은 정부의 18일 발표에 대해 수도권 전력예비율 급락과 막대한 비용부담 등 우려를 나타내는 목소리가 높다. 정부는 핵폐기 합의문 작성과 동시에 송전시설 건설에 착수하고, 핵폐기와 더불어 송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달말 열리는 ‘6자회담’에서 북한의 수용 여부가 미지수이긴 하지만 정부는 ‘대북 송전 추진기획단’을 발족하는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이는 대북 송전의 효율성과 이해득실 논란을 점검한다. ●수도권 전력 안정공급이 가장 쟁점 18일 산업자원부에 따르면 2008년 전국의 전력 예비율은 23.9%(1400만㎾)로 추정되고 있다. 북한에 200만㎾를 공급하더라도 예비율은 19.7%가 되며 이는 적정 예비율인 15%선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2008년 수도권 전력공급 규모는 2848만㎾로 대북 송전이 시작되면 최대수요가 2472만㎾에서 2672만㎾로 늘어나 예비율이 15.2%에서 6.6%로 뚝 떨어지게 된다. 산자부는 “대북 송전이 2008년 상반기부터 이루어질 경우 여름철 전력 예비율이 일시적으로 감소할 수 있으나 영흥화력발전소 4호기 완공시기를 당초 2009년 3월에서 2008년 6월로 앞당기면 문제가 없다.”면서 “대북 전력공급도 2008년 말부터 시작하면 수도권 전력 예비율을 10%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국내 발전소가 경북 월성 등 남부지방에 집중돼 있고 송전망이 한정된 상황에서 수도권에서 북한으로 전력을 공급하면 수도권 전력사정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해소시키지 못하고 있다. 원전 건설 반대 등으로 전력사정에 정통한 녹색연합은 이날 “수도권의 발전설비는 전력수요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대북 송전이 본격화되면 송전망 병목현상이 발생, 전력수급안정을 깨뜨릴 우려가 크다.”며 “정부의 영흥 석탄화력발전 5∼9호기 조기착공 계획은 수도권 대기질보전법에 거꾸로 가는 것이며 당초 1·2호기만 가동하겠다던 지역주민들과의 약속도 저버리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전력예비율은 발전설비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감안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설비고장 등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또 지난해 순간 최대 전력수요는 5126만㎾(예비율 12.2%)로 전년대비 8.2% 증가했다. 올해의 최대 전력수요 전망치도 전년보다 7.4% 증가한 5503만㎾(예비율 12.1%)로 당초 예상(5200만㎾)을 뛰어넘고 있다. 이같은 사정을 감안하면 전력수요 증가세가 꺾이기만을 기대하는 것은 안이한 자세라는 지적이다. ●시설 투자비용 최소 1조 5500억원+α 산자부는 북한에 200만㎾의 전력을 공급할 때 시설투자비용을 1조 5500억∼1조 7200억원으로 추산했다.2가지 방식이 고려된 결과다. 1안은 평양 등 특정지역을 북한 송전계통에서 분리한 뒤 남한 계통의 송전선을 건설, 연계하는 방식으로 건설비는 1조 5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2안은 직류송전방식(HVDC)을 이용해 북한 송전계통과 연계하면서도 북한 송전계통의 불안정 요소를 기술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으로 1조 7200억원이 든다는 것. 경제성과 공사기간 등을 감안하면 1안이 효율적이라는 평이다. 그러나 1안은 송전철탑이 단선방식이어서 사고가 나면 대체선로가 없어 전력 공급이 어려운 반면 2안은 철탑이 복선방식이어서 사고가 나더라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는 것. 녹색연합 관계자는 “송전시설 투자비용은 경기도 양주∼평양간 건설비용만 포함된 것”이라면서 “북한 주민들과 공장에 실제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송전망과 배전시설을 갖춰야 하고, 북한내 낡은 설비도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 예상보다 두배 이상의 시간과 예산이 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북한에 200만의 전기를 공급하면 연간 공급규모만 175억 2000만㎾에 이른다. 현재 ㎾당 순수 발전비용(52원)을 기준으로 연간 9100억원 남짓 필요하다. 또 판매비용을 제외한 송전·변전비용은 ㎾당 7∼8원이지만, 대북 전기공급에서는 비용분산효과가 없는 만큼 비용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연간 전력 공급비용은 최소 1조 1000억원을 넘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중소규모 발전설비 분산배치를” 정부가 시설 투자비용에 공급비용까지 부담키로 해 대북송전과 관련된 부담은 어떤 식으로든 국민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녹색연합 관계자는 “북한 실정에 맞는 전력공급을 위해서는 경수로나 대규모 송전이 아닌 중소규모의 발전설비를 분산형으로 배치해야 한다.”면서 “수력자원이 풍부한 러시아 극동지역과 북한간의 송전망 연계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라고 제안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儒林(39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7)

    儒林(39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7)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7) ‘고여 있는 물’의 비유법으로 ‘선도 불선도 없다.’는 고자의 궤변을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물의 본성을 통해 사람에게는 누구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선한 데로 나아가려는 본성이 있으며, 물론 물이 역류하여 거꾸로 낮은 데에서 높은 데로 올라갈 수는 있지만 이는 물의 본성이 아니니 불선으로 나아가려는 인성은 물이 거꾸로 역류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라고 맹자는 고자의 궤변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인의론을 강조하고 있음인 것이다. 결론적이지만 맹자는 평생을 통해 당대의 제자백가들과 혈투를 벌여 이 모든 싸움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 정곡을 찌르는 비유법과 직관의 검으로 하나씩 하나씩 당대의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는 맹자의 모습은 마치 무협영화에서 강호의 무림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유가의 고수로서 지존(至尊)이 되어가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결국 고자의 ‘먹는 것과 여색을 추구하는 것을 인성’으로 보는 쾌락설, 즉 ‘인생의 목표는 본능이 이끄는 대로 먹고 마시고 여색의 쾌락을 추구하는 데 있으며, 도덕이나 인의는 다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쾌락주의(快樂主義)는 맹자로부터 여지없이 난타당함으로써 무림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사상이 오늘을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은 진리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산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고자의 쾌락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일까. 아니다. 오직 먹고 마시고 현세의 즐거움과 성의 쾌락을 추구하는 찰나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오늘날의 세기말적인 현상은 고자의 재림(再臨) 때문이 아닐 것인가.‘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면서도 오직 선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말의 기술’만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은 오히려 소피스트가 난무하던 고대 그리스의 재현이 아닐 것인가. 이러할 때 고자를 격렬히 비판하고 난 뒤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곰곰이 음미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생선도 내가 먹고 싶은 바이고 곰발바닥도 또한 내가 먹고 싶은 바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먹을 수 없다면 생선을 놓아두고 곰발바닥을 먹을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도 또한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면 사는 것을 놓아두고 의를 가질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원하는 바가 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삶을 구차하게 얻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죽는 것도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싫어하는 바도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걱정거리가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이 있다.’” 맹자의 이 말은 ‘사람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하지만 의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의를 버리고서까지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싫어하지만 불의(不義)를 싫어하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오더라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진리를 향한 자신의 순교정신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맹자는 말한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놓아두고 말미암지 아니하면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아아 슬프다. 사람은 닭과 개가 나간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 儒林(390)-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6)

    儒林(390)-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6)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16) 맹자는 사람이 식욕과 성욕을 가진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인의(仁義)’가 있으므로 ‘사람과 금수를 구분(人禽之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고자의 말에 맹렬히 반격하기 시작한다. “자네는 버드나무의 성질을 따르고서도 나무그릇을 만들 수 있겠는가. 버드나무를 해친 뒤에야 나무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이며, 만일 장차 버드나무를 해쳐서 나무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사람을 해쳐서 인의를 만든다는 것인가.” 맹자의 이 말은 고자의 이름이 ‘불해(不害)’라는 점에서 착안하였던 명언 중의 하나이다. 고자의 이름의 뜻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어찌하여 너는 ‘버드나무를 해쳐서 나무그릇을 만든다면 사람을 해쳐서 인의를 만든다는 것이냐.(如將賊杞柳而以爲 則亦將賊人 以爲仁義與)’라고 반문함으로써 실제로 너는 ‘사람을 해치는 장인(人)’이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맹자는 이렇게 질타한다. “인의를 실천하는 데에 해를 입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말 때문일 것이다.(率天下之人而禍仁義者 必子之言夫)” 사람의 본성 중에는 본능만 있을 뿐 인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강제적인 외부 적의 힘의 지배를 받아야 되며, 인의는 외부에 있기 때문에 굳이 인의에 따를 필요가 없다는 고자의 말에 공자로부터 배워온 ‘인의(仁義)’의 신봉자 맹자가 만만히 물러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자와 맹자의 격렬한 싸움은 ‘맹자(孟子)’에서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질 만큼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불꽃 튀기는 혈전은 상편의 두 번째 장면이다. 평소에 ‘성은 선함도 없고 불선함도 없다.’고 주장한 고자는 ‘고여 소용돌이치는 물(湍水)’의 비유를 통해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性)은 고여서 맴돌고 있는 물과 같다. 이 물은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 인성이 선과 불선으로 나누어짐이 없는 것은 물이 동서로 나누어짐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고자의 말은 실로 교묘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고여 있는 물은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듯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 물 자체하고는 상관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에 속아 넘어갈 맹자가 아니었다. 맹자는 우선 고자가 주장한 ‘고여 소용돌이치는 물(湍水)’의 비유법부터 통타한다. 맹자는 우선 ‘고여 소용돌이치는 물’의 성격을 인정한다. 고여 있는 물은 과연 동서로 나누어짐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물의 본성은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수직적인 것에 있음을’ 맹자는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이 반격한다. “물은 진실로 동서로 나누어짐이 없지만 상하로 나누어짐이 없는 것인가.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은 선으로 나아가지 아니함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이 없다. 지금 물을 쳐서 튀어 오르게 하면 이마보다 높이 올라가게 할 수 있으며, 거꾸로 쳐서 흐르게 하면 산에 오르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불선을 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性)이 이와 같은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