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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조선은 ‘동방소송지국’

    조선의 일상, 법정에 서다/한국고문서학회 지음/역사비평사/360쪽/1만 8000원 우리나라엔 소송이 넘쳐 난다. 2009년 고소된 인원은 이웃 일본의 67배, 인구 10만명당 비율은 171배이다. 이런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조선 초기와 후기에도 그랬다. 조선 초기 실록을 보면 태종 14년인 1414년에는 소송 건수가 1만 2797건이나 됐다. 당시 인구가 600만~700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이 같은 소송 건수는 엄청난 것으로 ‘소송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전라도 영광의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은 1870~1872년과 1897년 4년 동안 7291건의 민소(民訴)를 정리해 수록했다. 조선 말 개화기에는 일본인 법관들이 거의 모든 권리 분쟁들이 소송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 조선인의 권리의식이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공자와 유교 사상을 받들었던 동방예의지국 조선의 위정자들이 소송이 적은 사회를 지향했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흘러 동방소송지국(東方訴訟之國)이라 할 만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소송은 노비 소송, 전답 소송, 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인 산송(山訟)이었다. 명종 15년인 1560년 경주 양좌동의 양동 손씨가에 시집갔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요절한 최씨 부인의 재산을 친정으로 돌려 달라며 화순 최씨 측에서 양동 손씨 측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무자녀 망녀의 재산 귀속을 둘러싼 처가와 시가의 분쟁이다. 재판 결과 요절한 부인의 제사를 손씨 측에서 지낸다는 점이 참작돼 그녀가 시집갈 때 데리고 갔던 30명의 노비를 원고와 피고가 반반씩 나눠 갖게 됐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윤선도의 증손자로,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 화가로 잘 알려진 윤두서 부부의 묘를 손자 윤굉이 1782년 경기도 파주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산송이 발생했다. 새 이장처가 역장(逆葬·후손의 묘가 조상의 묘 위쪽에 위치하는 형태)의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문중 내 일가가 강진현에 소장을 제출, 묘를 파내 줄 것을 요구했다. 재판을 맡은 강진 현감은 새로 이장한 묘가 혈맥을 누르지도 않고 또한 앉거나 서거나 모두 보이지 않는 위치라고 판단해 피고인 윤굉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도 변호사라는 존재가 있었을까. 조선은 소송이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기에 소송을 확대하는 데 일조하는 변호사와 같은 존재를 당연히 부정했지만, 당시는 쟁송위업자(爭訟爲業者)나 외지부(外知部)가 변호사 업무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706년 편찬된 법전인 전록통고(典錄通考)에 따르면 쟁송위업자는 쟁송(분쟁)을 교사(敎唆)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자로 법지식을 팔아 대가를 챙기는 사람이었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외지부는 법률을 암송하고 문권(소유권 등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을 위조하여 소송을 교사한 뒤 이기면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무뢰배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최고위직 재판관은 누구였을까. 국왕이었다. 직접 참여해 재판과정을 지휘하기도 했고 전국에서 벌어진 사형죄에 관한 재판의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왕의 권한이었다. 유상덕 선임기자 youni@seoul.co.kr 오늘날 가업을 잇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디지털 혁명으로 전 세계는 일일생활권으로 들어섰고 성장 속도 또한 가파르다. 과다경쟁 체제는 청년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던져 놓았다. 이런 시대에 ‘가업’이란 구시대의 유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일본이나 유럽 등에서는 수백년 동안 가업을 이어온 작은 가게와 그들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 국내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가끔 소개되며 한편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는 오랫동안 가업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통영으로 함께 내려온 젊은 부부는 지역의 건강한 먹거리를 찾다가 전남 구례군 지리산 농부 홍순영이 재배한 쌀을 찾아냈다. 직접 산지로 찾아가 구입하면서 한 가족의 삶을 만났다.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땅을 가꾸고, 햇살과 바람에 가슴을 펴고,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을 봤다. 젊은 부부는 이 아가씨처럼 작지만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이 또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신간 ‘가업을 잇는 청년들’은 이렇게 시작됐다. 언론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가업을 잇는 청년들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2년 반 만에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서울, 충주, 대구, 부산, 구례를 오가며 3대에 걸쳐 70여년 가업을 잇는 대장장이, 우리나라에서 6명뿐인 시계명장의 한집안 내력, 여러 5일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장돌림, 농부, 떡 기능인, 그리고 각종 가구에 덧대는 금속장식을 만드는 두석장 등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청년들의 일은 비록 인기 직업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자긍심과 가업을 잇는다는 확신은 누구보다 단단하다. 일을 배우는 어려움도 있지만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점에서 감동이 느껴진다.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과 진정한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청년들의 삶이 오늘날 실업문제 등으로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올해 처음 시행한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에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개화산 정상에 자리한 강서 주민들의 새 쉼표

    개화산 정상에 자리한 강서 주민들의 새 쉼표

    강서구 개화산이 마침내 낡은 군복을 벗고 주민 쉼터로 변신했다. 11개월 동안 군부대 설득과 주변 공사를 벌인 끝에 일군 성과다. 구는 개화산 정상 2만 3000㎡ 부지에 ‘개화산 해맞이 공원’ 공사를 끝내고 4일부터 주민들에게 개방한다고 3일 밝혔다. 6·25 전쟁 때 개화산 전투 전적지로, 육군과 공군 3개 부대가 군사훈련장으로 쓰던 지역이다. 따라서 흩어진 군사시설로 활용이 어렵고, 능선을 따라 폐타이어 방공호, 묘지 등이 길게 분포하고 있어 사람 발길이 뜸했다. 이에 구는 폐타이어 350t, 폐드럼통 80t 등 낡은 군사시설을 걷어내고 생태복원과 친환경적 정비를 거쳐 누구나 편하게 쉴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공원 입구 진입로는 조경석과 산철쭉을 식재하여 아름다운 꽃길로 조성했다. 타이어 벽으로 둘러싸였던 낡은 포진지와 개인 방호진지 10여곳은 목재 축대벽을 쌓아 안전성을 높였다. 전망데크의 편의시설도 대폭 확충했다. 여유로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야외 테이블과 등의자 등을 마련, 등산객들과 지역 주민들의 만족감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또 전망데크 양쪽에 그늘막을 설치,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편이 없도록 했다. 조선시대 봉수대가 위치했던 개화산의 역사적 의미를 담아 높이 2m, 둘레 4m의 봉수대를 새롭게 설치하고, 이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안내판도 세웠다. 구 관계자는 “개화산 정상은 아름다운 일출은 물론, 방화대교와 한강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조망이 뛰어난 곳”이라면서 “앞으로 이곳을 강서구의 명소로 가꿔 가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귀에서 민들레꽃이 활짝?!’ 中16개월 영아 충격

    ‘귀에서 민들레꽃이 활짝?!’ 中16개월 영아 충격

    귀에서 민들레꽃이 자라는 중국 소녀가 의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신화망, 인민망 등 현지 언론이 지난 달 30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4개월 전, 생후 16개월 된 여자아이의 귀에 민들레 종자가 들어간 뒤 최근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영아의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귀에서 실제로 민들레 꽃이 개화한 것을 보고 급히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영아의 귀 속에서 자라는 민들레꽃은 약 2㎝에 달하며, 생장발육상태도 매우 양호했다. 엄마인 왕(王)씨는 “아이가 자꾸 귀를 잡아당겨서 안을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 보이긴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다”면서 “위치가 너무 깊고 아이가 아파할 까봐 잡아당기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고 말했다. 이어 “한달 정도 지났을 무렵에도 아이의 증상이 계속됐고, 병원에 가기 이틀 전부터는 쉴 새 없이 울어 그제서야 의사를 찾게 됐다”면서 “귀 속에서 민들레꽃이 자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해당 주치의는 바람에 날린 민들레꽃 종자가 아이의 귀에 들어간 뒤 특정한 환경 탓에 개화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치의는 “사람의 귀 안쪽은 습기가 있고 따뜻한데다 약간의 분비물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민들레 종자에게 생장이 가능한 환경과 영양분이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영아는 지난 달 29일 병원에서 민들레꽃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우뉴스부 nowenws@seoul.co.kr
  • 귀에서 민들레꽃 자라는 16개월 아기 ‘충격’

    귀에서 민들레꽃 자라는 16개월 아기 ‘충격’

    귀에서 민들레꽃이 자라는 중국 소녀가 의학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고 신화망, 인민망 등 현지 언론이 지난 달 30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4개월 전, 생후 16개월 된 여자아이의 귀에 민들레 종자가 들어간 뒤 최근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영아의 부모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귀에서 실제로 민들레 꽃이 개화한 것을 보고 급히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영아의 귀 속에서 자라는 민들레꽃은 약 2㎝에 달하며, 생장발육상태도 매우 양호했다. 엄마인 왕(王)씨는 “아이가 자꾸 귀를 잡아당겨서 안을 자세히 보니 무엇인가 보이긴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었다”면서 “위치가 너무 깊고 아이가 아파할 까봐 잡아당기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고 말했다. 이어 “한달 정도 지났을 무렵에도 아이의 증상이 계속됐고, 병원에 가기 이틀 전부터는 쉴 새 없이 울어 그제서야 의사를 찾게 됐다”면서 “귀 속에서 민들레꽃이 자란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해당 주치의는 바람에 날린 민들레꽃 종자가 아이의 귀에 들어간 뒤 특정한 환경 탓에 개화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주치의는 “사람의 귀 안쪽은 습기가 있고 따뜻한데다 약간의 분비물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민들레 종자에게 생장이 가능한 환경과 영양분이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영아는 지난 달 29일 병원에서 민들레꽃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우뉴스부 nowenws@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주말 하이라이트

    정체불명의 숫자 수수께끼를 풀어라 ■런닝맨(SBS 일요일 오후 6시 10분) 모든 비밀은 숫자로 예고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숫자들. 그들 앞에 놓인 수수께끼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간다. 하지만 이미 카운트다운은 시작됐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도심 속에서 헤매는 처절한 몸부림과 전투,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새로운 사랑과 대반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그릇 공양에서 나를 찾다(KBS1 토요일 오후 3시) 강원도 오대산의 천년 고찰 월정사. 저마다 사연을 안고 남녀 쉰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양한 연령대의 이들은 올해로 10년째를 맞이한 월정사 ‘단기출가학교’에서 한 달간 행자의 삶을 자처한다. ■추적 60분(KBS2 토요일 밤 10시 25분) ‘방사능 공포의 진실 1편 현지르포, 도쿄에서 홋카이도까지’를 방송한다. 취재진은 도쿄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5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시위 현장을 목격한다. 아베 총리를 비난하는 팻말과 구호로 가득한 현장은 그야말로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하다. 후쿠시마 인근 폐허를 심층 취재했다. ■희망풍경(EBS 토요일 오전 6시 30분)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로 뮤지션 이기현씨는 시각장애 1급을 가진 장애인이다. 소리에만 의존해 작업하는 기현씨. 이미 음악계에선 뛰어난 실력가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그의 열렬한 팬인 어머니 이서실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아들의 재능을 물질적으로 지원해주지 못 한게 늘 미안하다. ■특집 창업 서바이벌-탄생, 창업의 신(OBS 토요일 밤 8시 15분) 본선에 진출한 예비 창업자들의 경영능력과 위기관리 능력 테스트를 통해 최종 우승자가 선정된다. 분야별 스타 출신 창업자 10명이 특별 출연해 성공적인 창업비법과 노하우를 설명한다. ■한국 한국인(KBS1 일요일 오전 7시 10분) 김민환 교수는 개화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언론의 역사를 집대성한 한국의 대표 언론학자다. 본인 스스로 ‘언론학에 갇혀 산 사람’이라 말할 정도로 그는 외길 인생을 달려왔다. 정년퇴직 이후 완도군 보길도에서 소설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김민환 교수의 특별한 여정을 따라가 본다. ■황금무지개(MBC 일요일 밤 9시 55분) 영혜는 점점 조여오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아이들에게 금괴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 백원은 갑작스러운 영혜의 행동에 의심을 품던 중 그녀가 금괴밀수 사건에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경악한다. 한편 재판을 받게 된 한주는 모든 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 [씨줄날줄] 안중근 논란/문소영 논설위원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자.” 갈등이 생기면 이런 설득을 적잖이 듣는다. 하지만 사실 남의 입장이 돼 그 처지를 이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려서는 이런 타이름을 들으면, 내가 모자랐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가르침을 따르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불혹을 넘긴 뒤로 맹자의 가르침은 대중이 그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사람들은 제논에 물 대는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행동하기 십상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지천명 부근에서야 더 깨달았다. 즉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역지사지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소한 일로 갈등하는 개인들도 어려운데, 국가 간에 역지사지하라는 주문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안중근 의사를 두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격렬하게 입씨름을 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일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최근 “안중근은 범죄자”라고 발언했다. 하루 지나고서 세코 히로시게 부장관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이라고 했다. 한국인의 영웅을 향해 일본 장·차관이 막말을 쏟아내는 것은 한국과 중국 정부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의거 장소에 안중근 의사 표지석을 세울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 일본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안중근이 식민지 한국의 영웅이었듯, 이토 히로부미는 제국 일본의 영웅이다. 하급 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개항기에 ‘개천에서 난 용’의 대명사였다. 외세배척의 목소리를 높이던 그는 20살 무렵 영국 유학길에 올라 놀라운 서양의 산업 발전상을 지켜본 뒤 개화론자로 돌아서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켰다. 이후 그는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해 총리에 오르고, 일본 최초의 근대 헌법도 제정하는 등 일본 근대의 초석을 쌓았다. 히로부미에 대한 일본인의 사랑이 클수록 1909년 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감정이 안좋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역지사지가 안된다 해도 일본의 태도는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 등을 내세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한국을 포함해 중국, 필리핀, 타이완 등 아시아를 침략하고 수탈한 역사를 잊어선 안된다. 당시 일본의 영웅 대부분은 전범이다. 안중근 의사가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악인을 제거했다는 발언은 그래서 설득력을 갖는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세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환기시켰다. 일본이 반성하도록 압박하려면 아시아 침략 행위와 위안부 문제 등에 국제적 공감을 일으킬 섬세한 감각의 영화 등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병력 증원·신무기 배치… ‘한반도의 화약고’

    병력 증원·신무기 배치… ‘한반도의 화약고’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남과 북은 서북도서 전력 증강에 매진했다. 병력 증원은 물론 사거리와 파괴력을 더한 신무기와 각종 정찰장비가 촘촘하게 배치된 서북도서 지역은 한반도에서 국지전 발발 가능성이 가장 큰 ‘화약고’가 됐다. 우리 군 당국의 서북도서 전력보강 사업은 마무리 단계다. 2011년 6월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가 창설됐고, 예하에 해병대 6여단과 연평부대 등 병력 1200여명이 추가 배치됐다. 3년 전 우리 군의 유일한 공격수단으로 북한의 무도와 옹진군 개머리 포진지에 대응사격을 했던 K9 자주포(사거리 40㎞)는 당시 6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2~3배 증강됐다. 군은 또 북한 해안포를 정밀 타격하기 위해 300여억원을 들여 이스라엘제 스파이크 미사일(사거리 25㎞)을 도입했다. 지난 5월 연평부대 등에 배치된 스파이크 미사일은 갱도 속 해안포를 정밀 타격할 수 있다. 한 발 가격이 2억~3억원에 이른다. 3년 전 도발 당시 제 기능을 못 했던 레이더도 보강됐다. 지난해 540억여원을 들여 포격 도발 시 위치를 탐지하는 대포병탐지레이더(ARTHUR)를 배치했다. 수㎞ 상공에 지상과 연결된 비행체를 띄워 북한군 동향을 24시간 감시하는 전술비행선 도입 사업도 새달 혹은 내년 초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지난 5월 도입된 이후 검사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해 전력화가 불투명했지만, 주계약 업체가 SK텔레콤으로 바뀌면서 사업이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북측의 전력 증강도 만만치 않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의 무도와 장재도·월내도 등을 올 들어 세 차례 시찰할 만큼 각별한 관심을 쏟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올 초부터 서해 최전방 부대를 중심으로 사거리가 65~70㎞에 이르는 개량형 240㎜ 방사포를 배치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이 지역을 관장하는 4군단 예하 포병부대에 기존 76.2㎜ 해안포(사거리 12㎞)보다 정확도가 높은 122㎜(사거리 20㎞) 방사포 50~60여문을 새로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령도와 연평도 북쪽의 월내도와 무도·대수압도 등에서는 육상 포병부대 병력이 이동하는 교통로(막사의 병력이 포진지로 이동하는 통로)와 포진지를 콘크리트나 흙더미로 덮는 ‘유개화’ 작업도 이뤄졌다. NLL에 인접한 태탄 비행장에는 특수부대 병력을 태우고 저고도 침투가 가능한 MI2 헬기 수십 대를 전개해 놓고 있다. 군의 한 관계자는 “3년 전에는 서북도서의 대응전력이 K9 자주포뿐이었지만 지금은 다연장 로켓과 스파이크 미사일, 코브라 공격 헬기 등으로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반면 또 다른 군 관계자는 “대응사격을 할 수 있는 화기는 충분하지만, (섬이라는) 지역적인 특성이 있는 만큼 극복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면서 “숫자를 늘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인천 중구 ‘근대역사문화의 거리’

    [명인·명물을 찾아서] 인천 중구 ‘근대역사문화의 거리’

    우리나라에서 근대 개화기 유물이 가장 많은 곳은 어디일까?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서울’이라고 답할 것이다. 오래된 수도인 데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기 전부터 일본인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개항의 관문이었던 ‘인천’이다. 인천 중구에는 제물포가 개항된 1883년부터 한일합병이 이뤄진 1910년대에 이르는 개화기 시대의 건물 50여채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용도의 건물인 은행·호텔·교회·기상대 등이 일본, 중국, 유럽 등 외국 양식에 따라 세워졌다. 중구는 지난달 3일 자유공원 등에서 ‘근대개항 거리문화제’를 열었다. 구는 이 일대가 우리나라 개항기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임을 강조하기 위해 3년째 거리문화제를 열고 있다. 실제로 중구는 개항기 건축물이 밀집한 데다 국내 최초의 도시계획구역이어서 ‘개항장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로 불린다. 어찌 보면 치욕의 역사가 담겼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도시학적 측면에서 보면 다양한 형태의 각국 건물이 자리 잡고 있어 개항도시 인천의 포용성이 느껴진다. 중구청 앞 골목(중앙동2가)에 있는 옛 ‘일본58은행 인천지점’은 1892년 지어진 2층 석판 마감 건물로 발코니, 도머창, 맨사드지붕 등은 프랑스풍 르네상스 양식이다. 인천전환국에서 만든 신구 화폐를 교환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바로 옆에 있는 ‘일본18은행 인천지점’은 2006년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바뀌어 근대 건축문화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18은행에서 50m쯤 떨어진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1899년 건립돼 일본영사관 금고 역할을 했으나, 2010년 ‘인천개항박물관’으로 변신, 인천항을 통해 처음 소개된 근대문물 중 대표적인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대불호텔’ 복원 방안도 추진된다. 이 호텔은 외국인들에게 최초로 커피를 팔아 인기를 끌었다. 경인 철도가 놓이기 전 인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인천에서 하루 묵어야만 했고, 이런 수요 때문에 1888년 중앙동1가에 세워진 이 호텔은 서양식으로 설계된 3층 목재 건물이었다. 경인선 개통으로 수요가 감소하자 경영난에 직면한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음식점인 ‘중화루’로 간판을 바꿨다가 1978년 건물이 헐렸다. 부지 소유주인 김모씨가 지난 9월 386㎡를 중구에 기부채납함에 따라 구는 다음 달 인근 부지까지 매입해 대불호텔 복원·활용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원형보존’ 조치가 내려진 지 2년 만이다. 중구청 앞 큰 길가에 있는 ‘아트플랫폼’은 본래 인천항 개항 후 물류운송 업무가 증가하면서 지어진 10여동의 적벽돌 창고였다. 구는 이곳을 지역 예술인들이 다양한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지난 9월 한 창고 건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한국근대문학관’에서는 한국 근대문학을 체험할 수 있다. 중구청 뒤편에 있는 자유공원은 1888년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공원이다. 개항 이후 서구 열강들이 인천을 거류지로 삼고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완충 역할을 한 공간으로 처음에는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인천기상대는 개항 뒤 선박 입출항이 빈번해진 인천항의 기상관측이 중요해지자 1905년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기상대다. 1923년 항동6가에 지어진 인천우체국(현재 인천중동우체국)은 90년간 동일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특이한 존재다. 이 외에도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선린동), 인천 거주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구락부’(송학동1가), 대한성공회 ‘내동교회’(답동), ‘청국영사관’(북성동3가, 현재 화교학교) 등이 한국 근대사에서 인천이 지니는 역사성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황은경(53)씨는 “인천에 오래 살면서도 근대 역사와 관련된 문화재가 이처럼 많은 줄 몰랐다”면서 “근대역사문화의 거리를 찾은 뒤 인천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소설 속 얼굴로 한국인 정체성을 읽다

    소설 속 얼굴로 한국인 정체성을 읽다

    한국인의 탄생/최정운 지음/미지북스/580쪽/2만원 두 가지 반전이 있는 책이다. 하나는, 묵직한 제목만 봐선 딱딱한 역사서 또는 사상철학서일 거라 짐작되지만 실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근대 문학을 주 재료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저자는 문학 전공자가 아닌 정치학자란 사실이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담론을 집대성한 ‘오월의 사회과학’(1999)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주목받은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1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정치학자인 저자는 왜 한국인의 정체성의 근원과 진화 과정을 근대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탐색하려는 시도를 했을까. 저자는 우리의 근현대 사상사가 정통적인 방법론으로는 접근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는 책 도입부에서 “우리의 근현대 역사에는 서구의 경우와 같이 사상사로 읽고 분석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저서들, 텍스트가 거의 없다”면서 “사상사적 자료가 그나마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분야가 있다면 문학, 특히 소설일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이 보여주는 내용은 사실과 이상과 고민을 포함한 역사적인 현실이며 그러한 역사적 현실의 재구성이 이 책의 목표”라고 썼다. 책은 구한말 망국과 국권 상실의 지옥 같은 불구덩이에서 태어난 근대 한국인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는 혼돈의 시기를 헤쳐나오면서 어떻게 새로운 한국인상을 모색하며 정체성을 확립해왔는지를 근대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설명한다. 저자는 먼저 20세기 초반 신소설이라 불리는 최초의 근대 소설문학 작품 중 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구마검’ 등을 분석하면서 구한말의 ‘홉스적 자연상태’, 즉 보호 기제가 모두 허물어져 생존만을 유일한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한일병합 직전에 이르면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종류의 한국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혐오의 대상이자 무의미한 존재인 대한제국의 ‘국민’ 대신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은 ‘민족’의 개념이 비로소 실체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즈음, 민족주의자들은 개화 민족주의와 저항 민족주의로 갈라진다. 춘원 이광수가 1917년 발표한 ‘무정’의 ‘이형식’이 초기 개화 민족주의자라면 단재 신채호의 1916년작 ‘꿈하늘’의 주인공 ‘한놈’은 저항 민족주의자였다. 저자는, 개화 민족주의자들은 서구의 사상으로 새로운 지도자가 되길 열망했지만 정체성의 기반이 부족했으며, 저항 민족주의자들은 내면의 각성 없이 투쟁 본능만을 갖추고 있어 역사를 추동할 동력이 없었다고 분석한다. 상실감의 시대였던 1920년대, 지식인들은 강한 한국인을 길러내야 한다는 명제에 대체로 합의했다. 김동인은 초기작 ‘약한 자의 슬픔’‘목숨’ 등을 통해 강한 한국인의 모델을 찾아 헤맸지만 이런 노력이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되지는 못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서울을 배경으로 기이한 생태의 대도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이상의 ‘날개’는 현실과 이상의 간극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파리한 지식인들의 초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편에선 강한 한국인을 창조하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저자는 춘원의 ‘유정’속 주인공 최석이 집요함을 핵심적 특징으로 하는 근대 한국인의 최신 모델이며, 이러한 춘원의 작업은 심훈의 ‘상록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한다. 같은 시대에 벽초 홍명희는 ‘임꺽정’이라는 새로운 민중영웅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춘원은 우파의 입장에서, 벽초는 좌파의 입장에서 유사하면서도 상이한 두 인물을 창시했고, 이 두 영웅의 모델은 현대 한국인에게도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책은 벽초가 임꺽정을 통해 이성의 자리에 저항 정신을 심었으며, 원한과 증오에 기반한 순수한 저항 정신이 반지성주의를 확산시켰다고 주장한다. 기실 반지성주의는 일제 시대를 거치는 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풍토였다. 일제에 빌붙어 민족을 배신하고, 서구의 지식을 무작정 들여와 계몽하려는 근대 지식인들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생긴 반감이 1930년대 반지성주의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렇게 형성된 반지성주의가 또 하나의 역사적 저주인 ‘교육만능주의’와 짝을 이뤄 오늘날 우리 사회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해방된 한국인들이 강한 유전자를 확립하기 위해 과도하게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도덕성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우리의 근현대 역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 그런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간 엄청나게 먼 길을 왔고, 우리는 자부심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한강(상)

    >>한강 왜, 어떻게 달라졌나 옛 한강은 오늘의 한강과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달라졌을까. 한강은 한성 백제가 위례(풍납·몽촌토성)에 터 잡은 이후 2000년 동안 한민족의 젖줄이었다. 조선의 500년 도읍지 한양(한성부)의 식수원이자 하수구였으며 명승지였다. 한성부를 도읍지로 정하게 한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큰 축이었으며 어느 한 곳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풍광을 뽐냈다. 조선시대 한강의 이름은 경강(京江)이었다. 서울의 중심부인 삼전도(송파)에서 양화진(합정) 구간을 경강이라고 했다. 그중 남산 기슭을 흐르는 강을 한수(漢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한강이 됐다. 한(큰) 가람(강)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설득력 있다. 그런 한강이 불과 100년 만에 천지개벽을 했다. 근대기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인식과 쓰임새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난리를 막아 보겠다는 치수(治水)에 대한 집착과 인구의 광적인 서울 집중에 따른 택지 제공, 교통로의 필요성이 개발을 불렀다. 게다가 휴전선이라는 인공 장애물이 한강의 서해 출구를 가로막으면서 안보적 측면도 겹쳤다. 아라뱃길을 새로 뚫은 까닭이다. 한강의 변화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시대적 요청이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섬(河中島)이 사라지면서 모래톱과 습지도 더불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강이 마치 활주로 같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의 중세도시를 흐르는 크고 작은 자연하천과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19세기 초만 해도 매년 1만 척을 헤아리는 황포 돛배가 사람과 물자를 싣고 광나루(광진), 삼밭나루(삼전도), 뚝섬나루, 한강나루, 동작나루, 마포나루, 노들나루(노량진), 양화나루를 오갔지만 흥청거리던 뱃노래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29개의 다리가 덩그러니 놓였고 나루는 다리 이름으로 남았다. 골재 채취용으로 폭파했으나 20년 만에 되살아난 밤섬(율도)을 제외하고 강폭이 최대 900m에 이르는 넓디넓은 강이 텅 비었다. 여울과 소(沼)마저 사라져 생명력과 자정력을 잃었다. 강변에 60㎞에 이르는 콘크리트 호안이 일사불란하게 펼쳐진 곳이 오늘의 한강이다. 한강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한강이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는 2000년 전 백제의 하남 위례성 시대와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시기에서 출발한다. 또 1392년 조선 건국,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과 이후도 의미 있다. 서울 숭례문 입구까지 물에 잠기게 한 을축년 대홍수는 땅밑에 숨었던 암사동 신석기 유적지를 드러나게 했지만, 제방 구축용 골재로 쓰려고 선유봉(선유도)을 폭파하는 빌미가 됐다. 결정적인 변화는 1967년 제1차 한강개발과 1982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몰고 왔다. 1차 한강개발은 여의도를 육속화하면서 서울의 경계를 사대문 안에서 남산 성곽을 넘어 한강변까지 확장했다. 여의도개발은 한강개발의 출발점이자 강남개발의 전초기지였다. 아파트공화국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여의도 제방을 쌓으려고 밤섬과 선유봉을 폭파한 원죄가 있지만 한강 상류에 팔당댐을 만들어 한강 수량을 조절했고, 한강 제방을 완성해 서울 시민들을 물난리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했다. 여의도, 동부이촌동과 반포지구에 대단위 아파트 택지를 제공했으며 서울은 이때부터 사대문 중심 일핵도시에서 다핵도시로 나아갔다. 한강 제방은 워커힐호텔~김포공항을 잇는 강변북로를 부산물로 남겼다. 동호대교 아래 저자도는 압구정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데 온몸을 바치고 사라졌다. 제2차 한강개발 이후 오늘의 모습이 갖춰졌다. 홍수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시기 맨살을 드러낸 채 가늘게 흐르던 한강이 365일 물로 가득 찬 사실상의 호수가 된 것이다. 두 개의 수중보가 한강을 수심 2.5m의 인공호수로 만들었다. 잠실대교 아래 잠실수중보와 김포대교 아래 신곡수중보가 물을 가두고 있다. 상전(桑田) 잠실섬을 강남 쪽으로 인위적으로 붙이면서 한강의 본류를 바꿔 놓았다. 이때 삼전도 나루 앞을 흐르던 한강 물길은 석촌호수가 됐다. 강남 쪽 한강 제방에는 올림픽대로가 개설됐다. 2007년 한강 복원을 외쳤지만 바뀐 물길과 사라진 섬, 습지와 백사장 그리고 파괴된 봉우리와 누정은 되찾을 수 없었다. >>한강의 옛 모습은 어땠나 옛 사람들은 한강을 강이 아니라 호수로 여겼다. 동호(東湖), 서호(西湖), 남호(南湖) 등 3개의 호수로 나눠 부르면서 풍류를 즐겼다. 강물이 하중도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굽이치는 장면이 그들의 눈에는 호수처럼 보였으리라. 동호에는 저자도와 독서당, 입석포(선돌개), 두모포(두뭇개), 제천정과 천일정(한남동의 정자), 압구정 같은 명승지가 즐비했다. 동호대교라는 지명이 동호에서 유래했다. 서호는 용산으로부터 마포와 선유봉, 양화진 잠두봉(절두산)을 아우르는 지역을 일렀는데 서강(西江)이라는 지명도 널리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신도팔경도(新都八景圖)에 ‘서강조박’(西江漕泊)이 포함될 정도였다. 남호는 용산강의 다른 이름이다. 여의도와 밤섬을 품고 멀리 관악산과 청계산을 조망할 수 있는 동작진과 노량진 구간이다. 옛 한강은 산수화와 지도를 통해 상상할 도리밖에 없다. 그림이라고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사진 뺨치게 정밀한 진경(眞景) 산수화여서다. 실경(實景) 산수화라고도 한다.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굽이치는 곳에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하중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와 바람에 나부끼는 수양버들, 갈대가 지천인 그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개화기 이후 선교사들이 남긴 낡은 사진과 개발기의 각종 사진을 통해 20세기 이후 한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강수욕을 즐기던 백사장, 나룻배와 나루터, 얼음 캐는 채빙(採?)과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 같은 한강의 풍광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청계천이나 광화문 광장에 인파가 붐비겠는가. 중국이나 일본 사신들에게 한강 유람은 필수 코스였다. 대개 동호변 제천정에서 시작해 저자도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고 서호쪽 양화진으로 내려오면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제천정은 왕실 소유의 정자로 서울에서 경치 좋은 열 곳(京都十詠) 중 한 곳으로 꼽혔다. 달 구경의 으뜸 명소였다. 사신들은 다녀간 흔적을 글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한강승경 그림을 요청해 선물로 받아 가기도 했다. 한강은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문화공간이자 교류의 장이었다. 18세기 진경 산수화의 대표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은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에 한강 풍광 수십 점을 남겼다. 저자도는 잃어버린 섬이다. 닥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여졌으며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삼각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관을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저자도 서북단의 독서당을 그린 ‘독서당계회도’와 저자도 남단의 압구정을 그린 ‘압구정도’, 저자도 북단의 살곶이다리를 그린 ‘진헌마정색도’를 통해 윤곽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1922년에 인쇄된 실측지도 ‘경성도’에 등고선과 초지 및 모래벌판이 표시돼 있다. 시인들은 저자도를 한강 유람의 백미로 여겼다.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 물굽이 언덕을 두르고 있으니 흰 모래 갈대 숲 그 경치가 매우 좋다”(15세기 정인지가 살곶이다리 인근 낙천정에서 내려다본 저자도의 풍경), “봄꽃이 만발하여 온 언덕과 산을 뒤엎었네”(15세기 강희맹의 저자도도(楮子島圖)의 발문), “봉은사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16세기 심수경이 독서당에 머물던 중 봉은사를 다녀오면서 남긴 글)는 글들이 남아 있다. 조선 개국 초 저자도는 왕들의 휴식처였다. 태종이 상왕이자 형님인 정종과 낙천정에서 술잔을 나눴고, 세종이 대마도 정벌을 떠나는 이종무를 격려하고 환송한 장소였다. 고종 등 왕이 집전하는 기우제 장소 중 한 곳 이었다. 왕실 재산으로 조선의 마지막 부마(철종의 사위) 박영효 소유였다. 동서 2000m, 남북 885m 길이에 넓이가 118만㎡에 이르는 모래벌판이었다. ‘신선이 노닐던’ 선유도는 섬이 아니라 산이었다. 선유봉은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잠두봉)을 마주 보는 높이 40m의 작은 봉우리였다. 두 산은 나란히 서 있었다. 선유봉은 홍수가 나면 봉우리만 물 위에 떠 있었다. ‘예조낭관계획도’ 등 잠두봉을 그린 16세기 후반의 실경 산수화 10여 점이 빼어난 경관을 보여 준다. 정선은 ‘선유봉’ ‘양화환도’ ‘소악후월’ ‘금성평사’ 등 4점의 그림을 통해 선유봉을 묘사했다. T S 엘리엇은 “역사란 언제나 동떨어진 원인에서 기묘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파했다. 옛 선비들은 한강을 호수로 미화해 풍류를 즐겼으나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한강은 사실상 인공호수로 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joo@seoul.co.kr
  • 미래를 응시하기 위해 과거에 주목하라

    미래를 응시하기 위해 과거에 주목하라

    역사를 진지하게 배웠던 세대라면 누구나 우리의 근대사를 통한의 눈물로 지켜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파란과 오욕으로 점철된 시간들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이내 뜨거운 격정이 솟구치게 되고,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왜곡된 인식과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에까지 맞닥뜨리는 상황에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마저 피어 오른다. 가끔은 과거로 직접 뛰어 들어가 역사를 재구성하고 싶다는 상상도 할 법하다. 출판사 천지간의 신작 <가장 찬란했던 제국>은 이러한 상상을 소설 속에서나마 실현한 작가의 기지가 진지하게 묻어 나오는 작품이다. 저자 권태승은 치욕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바꿔 놓을 수 있는 단초를 갑신정변 전후로 해석하고, 우리가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타임머신에 주인공을 태워 구한말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이제는 사라진 제국의 희망을 복원하기 위해 주인공은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현장, 우정국으로 뛰어 들어간다. 의회 정치를 수용해야 한다는 요지의 상소를 고종에 올리지만 주인공 간의 이념과 견해차이로 인해 그 이전시기 인물인 개화론자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에게 그 임무가 맡겨진다. 그후 명성황후를 만나 대한제국의 민주화를 모색하고 대한제국과 미국과의 전쟁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등 절망적인 근대사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과정에서 발생하는 주인공들의 갈등구도는 또다른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역사란 정의(定義)할 수도 없고 정의(正義)도 없다’는 극 중 주인공의 주장처럼 이 소설은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을 우리 역사의 성공과 연결 짓는 섣부른 판단을 경계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결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 근대사의 커다란 쟁점이었던 보수파와 개화파,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단호한 입장이다. 중앙대 경영학부 김동순 교수는 “<가장 찬란했던 제국>의 주인공들이 타임머신이라는 초과학적 기계를 이용해 역사를 바꾸려는 노력이 내겐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기보다 진지하고 심각하게만 느껴진다”며 “젊은 세대들이 이 책을 일독함으로써 한반도 옆에는 교과서를 왜곡하면서까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이 있음을 잊지 말고 본인의 역사관을 다시 한번 정비하는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장 찬란했던 제국 권태승 지음 | 천지간 펴냄 | 281쪽 | 12,000원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강릉 경포 저류지 완공… “생태관광 오세요”

    강릉 경포 저류지 완공… “생태관광 오세요”

    강원 강릉 ‘경포 저류지’가 완공되면서 경포 일대가 바다·호수·습지·소나무와 각종 문화재가 어우러진 생태·문화·휴양관광지로 새롭게 단장된다. 29일 강릉시에 따르면 2009년부터 국비 120억원과 지방비 80억원 등 모두 200억원을 들여 경포호 상류 죽헌동 지역 25만 3000㎡에 조성한 ‘경포 저류지’가 30일 준공식을 갖고 개방된다. 경포 저류지 준공으로 오죽헌~선교장~해운정~경포대~경포호수를 잇는 문화관광지가 생태와 휴양을 더한 관광지로 기능을 더했다. 하류 농경지 침수 등 상습 재해 방지를 목적으로 조성된 경포 저류지는 주변에 대단위 코스모스 단지를 만들었다. 저류지 제방 2.2㎞에는 자전거도로도 만들었다. 시는 오죽헌∼선교장∼저류지~경포습지∼경포호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망 연결사업을 조기에 마무리해 시민·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수변 레저·레저 휴식 공간으로 활성화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이와 함께 지난 4월 준공된 경포호 주변에 멸종위기 2급 식물인 ‘가시연꽃’이 곳곳에 군락을 이루며 개화해 장관이다.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이 피고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리를 잡으면서 경포습지에는 생태학습관광을 즐기려는 탐방객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녹색 에너지문화 체험교육장으로 활용될 ‘강릉 녹색도시체험센터’도 최근 경포호 남측에 건축공사를 마치고 시험가동에 들어갔다. 시가 저탄소 녹색시범도시 조성 선도사업으로 추진해온 녹색도시 체험센터는 전국 처음으로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을 적용, 낮에 생산된 태양광 에너지를 대용량 리튬이온 배터리에 저장해 밤에 체험센터 연수시설에 공급하는 등 화석연료 제로화시스템을 완비하고 있다. 최명희 강릉시장은 “경포호 일대에 속속 조성된 저류지와 습지 등 녹색 생태자원들이 주변의 각종 문화재와 함께 새로운 휴식장소 및 관광상품으로 각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릉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World 특파원 블로그] 나비도 피한다는 악취 ‘시체꽃’ 냄새 맡아 보니…

    [World 특파원 블로그] 나비도 피한다는 악취 ‘시체꽃’ 냄새 맡아 보니…

    “냄새가 나나요?” “글쎄요.” 23일 오후 2시쯤(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연방식물원’ 온실. 어른 키 두 배만 한 특이한 모양의 식물에 수십명의 관람객이 몰려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향기는커녕 시체 썩는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시체꽃’이라고 불리는 ‘타이탄 아룸’이었다. 가지에서 열리지 않는 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인 시체꽃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고유종으로 전 세계에 100여 송이만 있는 희귀종이다. 매년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길게는 수십년 만에 꽃을 피우며, 지독한 냄새 때문에 나비가 아닌 송장벌레나 쇠똥구리가 수분(受粉)을 한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이 식물원의 시체꽃이 씨를 뿌린 지 6년 만인 지난 21일 저녁 꽃을 피워 악취가 진동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식물원 큐레이터 빌 맥로린은 “구역질이 나서 21일 밤 11시까지 저녁식사를 할 수 없었다”면서 “냄새를 형언하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이날 기자가 구토를 각오하고 직접 코를 들이대 봤는데, 웬걸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옆에서 함께 킁킁거리던 관람객들의 반응은 “냄새가 안 나 아쉽다”와 “냄새가 안 나 다행이다”로 갈렸다. 시체꽃은 개화 후 24~48시간 만에 급속히 시들고 냄새도 잦아든다고는 하지만, 그토록 지독하다는 냄새가 그렇게 말끔히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핏 식물원 측의 과장된 ‘홍보’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실제 식물원 측은 입구에서 관람객에게 이번에 꽃을 피운 시체꽃을 상세히 소개하는 팸플릿을 그새 만들어 무료로 나눠 주고 있었다. 또 식물원 홈페이지는 시체꽃의 모습을 동영상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식물원의 문 닫는 시간도 평소보다 3시간 연장했다. 입장료가 무료이긴 하지만 한 명이라도 많은 손님을 끌어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공공기관의 노력 내지 서비스 정신으로 볼 수 있을까.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사설] 선거 압승 아베 총리, 이제 주변국 돌아볼 때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 여당이 예상대로 승리했다. 참의원 의석의 절반을 교체한 그제 선거 결과 연립 여당이 자민당 115석과 공명당 20석을 합쳐 전체 242석의 과반인 135석을 차지한 것이다. 종전 86석으로 참의원의 다수당이었던 민주당이 59석에 그치며 제2당으로 내려앉은 만큼 명실상부한 압승이다. 지난해 12월 총선에서도 연립 여당은 중의원 의석의 3분의2를 확보했다. 경쟁 상대의 몰락과 함께 여대야소(與大野小) 구도를 이루었으니 아베 정권은 독주할 수 있는 기반을 굳건하게 다진 셈이다. 더불어 다양한 성향을 가진 유권자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선거의 부담을 떨쳐낸 아베에게도 비로소 주변국을 비롯한 국제적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는 전기가 됐을 것으로 본다. 이번 참의원 선거는 일본의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전세계적인 관심을 집중시켰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인 만큼 돈을 풀어 경제를 살리는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전개 양상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관심사는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헌법의 개정을 앞세워 아베 총리와 자민당이 추진하는 우경화의 향방에 온통 쏠렸다. 선거가 끝난 지금 아베는 일본 여당의 승리를 반가워하면서 진심으로 축하하는 목소리가 어느 한 나라에서라도 나오는지 살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자신이 그동안 표출한 그릇된 역사 인식의 직접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의 실망스러워하는 분위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 언론이 한결같이 아베가 이미 길을 잘못 들어선 과거사를 ‘더 적게 반성하는 관점’으로 기술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주변국과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를 심사숙고해 봐야 한다. 아베 총리는 공존(共存)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개화의 빗장을 먼저 풀면서 일본이 앞서간 시기도 있지만 중국은 이미 미국에 이어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올랐고, 한국 역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한때의 영화를 되살리고 싶은 욕심도 지나치지만, 동북아의 균형은 이제 상생을 위한 노력이 아니면 이루기 어렵다. 아베 정권은 선거 승리로 최소한 3년 동안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차제에 국수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로 세계를 보기 바란다. 과거사로 국민을 오도하는 아베가 아니라 과거사 해결을 위해 국민을 설득하는 그를 보고 싶다.
  • 美 ‘시체꽃’ 6년 만에 개화…시체썩는 악취 진동

    美 ‘시체꽃’ 6년 만에 개화…시체썩는 악취 진동

    활짝 개화하면 세계적인 뉴스가 되는 꽃이 있다. 지난 2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US 보타닉 가든에 있는 시체꽃이 활짝 꽃을 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시체썩는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일명 ‘시체꽃’(corpse flower)으로 알려져 있는 이 꽃의 이름은 ‘타이탄 아룸’(Titan Arum)으로 전세계에 100여 그루가 남아있을 만큼 희귀종이다. 특히 이 꽃은 높이가 최대 3m까지 자라 세계에서 가장 큰 꽃으로도 유명하며 수년 만에 한번 필 만큼 좀처럼 개화 모습을 보기 힘들다. US 보타닉 가든 관계자는 “이 시체꽃이 마지막으로 핀 것은 지난 2007년 이었다” 면서 “개화 시간은 최대 1주일로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시간은 이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한편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고유 종인 시체꽃이 특유의 냄새를 내는 것도 이유가 있다. 최대 800m까지 맡을 수 있는 시체썩는 냄새에 많은 파리떼가 꼬이기 때문이다. 이 파리떼는 마치 벌처럼 시체꽃의 꽃가루를 옮기는 역할을 한다. 사진=자료사진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근대적 ‘화장장 의식’ 일제가 강제로 만든 것 아시나요

    사라진 전통 일생의례 가운데 ‘꽁밥’ 풍속이란 게 있다. 꽁밥은 공밥(公食)을 뜻하는 것으로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행하던 일종의 성인식이다. 음력 칠월 백중 무렵에 마을 수령이 “아무개가 오늘부터 꽁밥을 먹게 되었소”라고 공표하는 의식을 통해 어린 농부는 어른 농부로 인정받았다. 꽁밥 의례는 백중날이 약화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이처럼 전통 일생의례는 생업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자연스레 사라진 경우도 있지만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근대화 사고의 영향과 식민지배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 강제적으로 소멸된 것들도 적지 않다. 가령 상여를 매던 일반 역군들에게 나눠 주던 떡 문화를 폐풍악습으로 규정하고, 조혼 풍습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것 등이 그런 예이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이 펴낸 ‘일생의례로 보는 근대 한국인의 삶’(채륜)은 격변과 굴욕의 시기이자 근대화의 시기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전통 일생의례, 즉 출산과 관·혼·상·제례가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정리한 책이다. 11명의 저자들은 분야별로 나눠 각 일생의례의 지속과 변용 과정을 알아보고, 이것이 근대 한국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본격적으로 전통의례를 말살하고자 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1912년 총독부령으로 공포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이다. 일제는 국민건강과 위생, 근대화 등을 이유로 매장 풍습을 탄압하면서 근대적 화장장 의식을 강제적으로 주입했다. 1934년에는 상복 간소화와 상여소리금지, 혼인 연령(남자 20세, 여자 17세) 등을 규정한 의례준칙을 제정했다. 겉으로는 근대화를 ‘위한 의례형식의 합리적 변화를 내세웠지만 이면에는 피식민국에 대한 동화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서종원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는 “근대적 사고의 하나인 합리적 사고가 대두되면서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생의례의 허례의식을 줄이고, 의례를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일생의례가 변화했다”면서 “이는 합리적 사고에서 볼 때 전통의 일생의례를 악습 혹은 악풍으로 보는 사고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정책적인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여수산 애플망고 첫 수확

    전남 여수에서 열대 과일 ‘망고’가 수확된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육지의 농가에서는 첫 결실이다. 4일 여수시에 따르면 전남도와 공동으로 온난화 등 기후변화에 따른 소득작목으로 육성하기 위해 2011년 5월부터 재배한 애플망고를 2년여 만인 이달 하순쯤 270㎏을 수확할 예정이다. 여수시 여천동에 0.1㏊로 조성된 애플망고 재배농가 하우스에는 180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농가는 올해 1500여만원의 판매고를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 보통 심은 지 4년이 지나면 한 나무에 25~30개가 열리기 때문에 앞으로 2년 후에는 연간 8000만~9000만원의 판매고가 예상된다. 특히 여수는 애플망고의 개화기인 12~3월 일조량이 높아 최적의 재배지로 평가받고 있어 농가 수익창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수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강서구 개화 어린이공원 친환경 선언! 몰라 보겠네

    강서구 개화 어린이공원 친환경 선언! 몰라 보겠네

    강서구 개화 어린이공원이 각종 편의시설과 나무들이 우거진 친환경 공원으로 탈바꿈했다.강서구는 방화3동 818 일대 1512㎡ 부지에 조합놀이대와 회전놀이대 등 놀이시설과 주민들을 위한 운동·편의시설을 갖춘 공원을 마련했다고 2일 밝혔다. 덩굴장미와 회양목, 산철쭉, 백철쭉 등의 꽃과 나무들로 공원을 꾸몄다. 구는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기존 놀이터 시설과 바닥을 철거하고 각종 편의시설과 부대시설을 설치했다. 특히 공원 조성 전반에 대해 어린이 설문과 주민 간담회, 디자인 설명회 등을 거치며 주민 참여를 강화해 특색 있게 리모델링을 마쳤다. 이번 사업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사회 공헌 활동인 ‘친환경 놀이터 리모델링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공모를 통해 개화 어린이공원을 포함, 세 곳을 선정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여친보다 종잡을 수 없는 너, 날씨

    여친보다 종잡을 수 없는 너, 날씨

    올여름 전력수급 비상대책의 성패, 박근혜 정부의 연평균 2%대 물가상승률 목표, 한겨울 강원도 홍천 산천어 축제의 흥행, 해외 원정 스키여행자 증감에 따른 항공사 수익, 2014 인천아시안게임과 2018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개최…. 이 많은 일의 결과를 좌우하는 관건 중 하나는 날씨, 즉 기후라고 할 수 있다. 기상 전문가들은 2008년 이후 국내 기후변화 양태가 바뀌었다고 분석한다. ‘지구 온난화’라는 말 그대로 기온이 상승하는 기후변화가 그 동안 부각됐다면, 2008년부터는 과거와 극명하게 다른 기상패턴이 보편화됐고 각종 정책에 직접 타격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점진적인 강우량 변화는 신선식품 물가관리를 방해하는 최대 복병이다. 지난 10여년간 한반도 강우량 변화 등을 조사한 이덕배 농업과학원 팀장은 1일 “6월 장마 뒤 무더위, 이후 9월쯤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던 ‘쌍봉 형태’의 장마패턴이 2008년 이후 변해 6월에 비가 안 오는 ‘마른장마’가 이어지거나 7~8월에 잦은 강우가 나타나는 불규칙한 패턴이 이어져 저수지 물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존 강우패턴에 맞춘 물 관리 정책을 고수하는 한 강원도 태백과 경상도 낙동강 상류 지역에서 반복되는 가뭄에 대응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팀장은 “여름에 가을장마를 계산해 보의 물을 빼놓았다가 비가 안 오면 가뭄이고, 반대로 물을 빼지 않았는데 폭우가 오면 홍수”라면서 “이상기후는 2009년 고랭지 배추값 폭등, 최근 과일값 폭등 같은 농산물 물가 폭등으로 직결된다”고 설명했다. 전력수급을 관리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전력거래소도 매일 날씨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2011년 말 기준 전력소비 실태를 보면 산업용이 절반 정도이고 상업용이 30%, 가정용이 20% 정도를 차지하는데 날씨가 더우면 상업용 전력소비가 급증해 산업용 전기 수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완수 전력거래소 수요예측실 차장은 “2030년까지 장기 시나리오가 있어야 발전량 등을 조정할 수 있지만, 변동성이 너무 커 예측이 어렵다”고 털어놨다. 최근 기후변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국지성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앙정부 방침에만 따르며 소극적이었던 지방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이유다. 특히 올봄 각종 벚꽃 축제가 일조량 변화에 따른 개화시기 이상으로 ‘참패’했듯이 지자체 행사는 기후변화의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들게 됐다. 이상신 기후변화대응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주변 최저기온이 1980년대에 비해 2000년대 들어 1도 정도 상승했고, 강수량은 1980년대에 비해 1990년대 들어 17% 증가했다”면서 “지금 추세로 올림픽을 맞는다면 장애인올림픽 기간 중 눈이 녹아 경기운영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화천 산천어 축제와 같은 지역특화 축제도 이번 세기 말쯤에는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일수 기상청장은 지난달 제주도에서 열린 한국기후변화학회 학술대회에서 “지난 10년 동안 우리나라 기온이 1.8도 올랐는데, 앞으로 40년 안에 2배인 3.2도 가까이 상승해 대부분 지역이 아열대화가 될 전망”이라면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국정운영, 기업의 경영관리, 국민생활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후예측 정보를 활용해 가뭄지수, 식물성장 기간 등을 분석하는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풍경1> 흐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고갯길·골목길들 육조대로·운종가 조선시대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길 현대를 도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만약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는 인간의 걸작품이다. 사대문 안 ‘원(原)서울’은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만든 무위(無爲)의 도시 같다. 풍수지리와 도교 사상이 저변에 깔렸다. 도성 앞뒤에 산이 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지형이다. 모든 인공건조물은 구릉과 물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갯길과 골목길이 자연 생성됐다. 서울 지명에 황토마루(세종로 사거리), 구리개(을지로입구), 운현(운현궁), 진고개(충무로), 박석고개(명륜동), 배고개(종로4가), 맹현(삼청동), 안현(안국동), 야주개(당주동), 무학재 등 고개(현)가 유독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종로가 생성됐고,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 홍제천과 정릉천을 따라 내부순환도로가 지어진 것도 물길에 순응한 결과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은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에 만들어졌다.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그렇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되 인위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크기나 위치에 따라 오솔길, 한 길, 두렁길, 골목길, 고갯길, 샛길이 됐다. 상태에 따라 흙길, 황톳길, 진창길, 박석길(포장길)이 됐으며 쓰임새에 따라 피맛길, 순라길이 됐다. 조선시대 서울의 숱한 길 중 정사(正史)에 지명이 등장하는 길은 단 두 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길은 육조대로(세종로)와 운종가(종로)뿐이다. 태조실록에 운종가라는 기록이 나오고, 인조실록과 영조 당시 승정원일기에 육조대로가 나온다. 그 밖에는 관도(官道), 어가(御街)라는 불특정 길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과천로, 시흥로, 강화로, 고양로 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간선도로명이 기록됐다. 대한제국 시기 들어 정동을 공사관거리라고 부르거나, 황토현이나 신작로라는 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풍경2> 좁고 불결, 그리고 황량 : 개항기 외국인 눈에 비친 도성 길 먼지·진흙 뒤범벅… ‘눈 돌리면 매혹적인 풍경’ 애정 어린 눈길도 개항 이후 길에 관한 기록의 칠팔 할은 소설이나 외국인의 여행기, 수기와 함께 전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트인 길, 트인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다”는 인상기를 남겼다. 당시 대표 길인 육조거리와 운종가는 폭이 각각 60m, 20m로 큰길이었다. 이 길을 본 외국인의 입이 벌어졌다. 16세기 중세 도시로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운 마치 광장 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길은 대체로 좁고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한 실학자들이 저서를 통해 도로의 확장과 정비를 지적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시중의 주민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만나면 다닐 수 없는 때도 있다”면서 가로 정비를 촉구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는 무슨 말인가. 수레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도로가 나빠서 그렇고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실학자들과 개화파 주도로 도로의 정비 개선이 실제 이뤄졌다. 외국인들은 길이 좁고,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렸다. 1883년 미국인 천문학자 로웰은 “제물포와 서울 간의 풍경은 황량하다”고 썼고, 1894년 영국인 여행가 비숍은 “네 사람의 가마꾼이 멘 가마 한 채가 지나는데도 양쪽 인가의 처마에 걸려 애를 먹기 일쑤였다”고 전했다. 1882년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는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1908년 펴낸 ‘서울견문기’에서 “당나귀, 마차, 전차 그리고 사람들이 먼지와 진흙 속에 뒤범벅되어 있다”라고 혹평했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도 “좁고 불결하며 늘 오물이 널려 있다”, 미국 해군장교 보스트윅은 “하이에나의 소굴보다 더한 지독한 악취로 진동하고 있다”고 악평했다.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특유의 풍광에 반한 외국인의 칭송도 있었다. 1892년 ‘서울풍물지’를 발간한 미국인 신학자 길모어는 “한국인들은 누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결하지 않으며 서울 근교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눈을 매혹할 전경을 발견하게 된다”고 감탄했다. 비숍도 1897년이 되자 “인구가 25만명에 이르는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이며, 이만큼 좋은 입지를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처음 한국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은 이제 거의 애정 수준의 관심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풍경3> 모든 길은 한양으로 :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 상경·낙향… ‘어떻게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광적인 인구집중 증보문헌비고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서울 밖으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주요 국도라고 보면 될 터다. 제1로는 중국 가는 길인 의주로였다.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로 이어졌다. 제4로는 남대문~한강진~판교~용인~부산의 부산 가는 길이다. 이 밖에 평해 가는 길, 고성 가는 길, 상주와 통영 가는 길, 정읍을 거쳐 제주 가는 길, 강화 가는 길 등이 있다. 고전소설 ‘이춘풍전’에는 “무악재 넘어 홍제원(홍제동)에 다다르니…”라면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춘향전’에서 “역졸을 거느리고 숭례문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 동작강 얼른 건너”라는 구절은 한강을 건너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이다. 오늘의 숭례문~이문동~청파동~노량진 구간을 이른다. 또 ‘홍길동전’에서는 “양천 강변을 지나 서울 서강으로 대령하라” 하였는데 숭례문~약현(만리동)~노고산(신촌 뒷산)~양화~서강(서강대교 북단)에 이르는 길을 이른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라고 읊은 구절은 동쪽 방면의 동대문~왕십리~살곶이다리~송파로 가는 길의 하나다. 조선시대는 한양이 곧 나라였다.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가 판쳤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향(落鄕)이라고 할 정도였다. 문외송출(門外送出)이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성문 밖으로 내쳤다. 사대부가 서울 밖에 사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유배 살던 정약용은 “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라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낼 정도였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 집중은 예고된 ‘참사’였다. <풍경4> 청계천 따라 북촌-남촌 : 계층 생활권 나뉜 이중도시 오늘날엔 한강을 경계로 강북 -강남으로… ‘스타일’ 차이 뚜렷 오늘의 서울에 강북과 강남의 문화 차이가 있듯이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북쪽 5대 궁궐 주변 일대에는 사대부 지배층과 궁 관련 아전들이 주로 살았다. 청계천 아랫동네는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와 상민들의 거처였다. 청계천 변에는 하층민과 거지들이 살았다. 엄연한 계층 차이가 존재했다. 남산 기슭의 남촌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됐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묘사된 것처럼 끼니가 없으면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고서 갓을 고쳐 쓰고 앉아 헛기침하며 글을 읽는 ‘남산골샌님’이 그들이다. 진흙탕 길에 나막신을 신어야 했기에 ‘딸깍발이’로 불렸다. 북촌과 남촌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1935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수가 서울 총인구의 30%에 육박하는 11만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인 거주 지역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남산 아래 필동, 회현동을 비롯해 후암동, 청파동 등 용산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변했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이 사는 곳으로 양극화됐다. 일본인 거주지를 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남대문통(남대문로)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전기와 전차, 상하수도가 갖춰졌다. 조선인 중심지인 종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소설가 박태원은 ‘천변풍경’에서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이어서 달리느냐. 어디 장이 선 듯도 싶지 않건만, 사람은 또 웬 사람이 그리 거리에 넘치게 들끓느냐”라고 남촌의 휘황찬란한 풍경을 비아냥댔다. 북촌과 남촌 간 민족적 갈등이 밤거리의 주먹 세계에서 격렬하게 분출된 시절도 있었다. 서울은 일찍부터 민족적·계층적으로 분리되거나, 생활권과 상권 그리고 문화가 갈리는 ‘이중도시’(Dual City)의 양상을 보였다. <풍경5> 일제의 길 확장 : 서울다움을 잃다 전차 궤도 부설 핑계로 도읍 상징 성곽 허물어 깊은 생채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시행한 길 확장이 서울의 서울다움을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인력거 및 자전거의 도입과 마차를 대체한 달구지, 자동차, 전차의 도입은 한양도읍의 상징인 성곽을 철거하는 구실이 됐다. 전차 궤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1899년부터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성곽 일부가 차례차례 헐렸다. 일제는 1907년 성곽처리위원회를 구성해 동대문 북쪽 성곽과 남대문 남쪽 성곽을 뜯어냈다. 성곽의 철거는 서울의 공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곧게 뻗은 포장도로와 전차 궤도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홍보됐다. 일제는 성곽 철거를 통해 ‘낡은 도시구조’와 ‘왕조의 잔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역사가 살아 있는 구시가지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전쟁과 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서울은 600년 된 전통 도시의 향기를 잃었다.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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