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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이세기의 인물탐구:74)

    ◎독주회·협연 한해 15회꼴… 쉬지않는 연주자/9세때 이대실내악단 연주에 매료 입문/“남다른 정열·힘있는 음악” 평… 고정땐 많아/소중한 악기 「과다니니」 제자에게 흔쾌히 빌려주기도 사랑을 하게 되거나 혹은 참혹한 현실에 부딪칠때 사람은 울부짖거나 통곡하거나 희열과 유열에 몸부림치게 된다.니체는 이런 종류의 광기를 「디오니소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술가가 만약 디오니소스적 광기에 몰입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가.『디오니소스적 광기에 도취하여 자기라는 이성과 관습과 틀과 형식을 박차고 훨훨 창공을 날아오르는 이가 바로 김남윤』이다.이는 지휘자 김만복씨의 말이다.그는 과연 고뇌와 좌절의 여러 파란을 지나 참으로 조용히 예술의 정점을 응시하려는 예술가다.더 더욱 최근들어 영감에 가득찬 흐르는 듯한 연주는 「모든 음악에는 컬러가 있고 분위기가 있다」는 시게티의 방식을 실천시킨다.특히 그가 들려주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은 절후의 명작다운 심오한 감정과 고고한 기품,바흐의 풍부한 환상을 유연한 선율로 이끌어낸다.경쾌한 쿠랑트(주)와 장중한 폴리포니(복음락),저음테마와 고음이 교차되는 5악장 샤콘은 마치 「꽃잎이 피어나는 넋의 개화」로 평받고 있다.그는 과연 음악을 캐내기 위해 까마득한 터널을 달려가는 고독한 자의 비애와 고뇌를 절창으로 성취해 낸 것이다. ○악보에 생명력 불어넣어 「그의 레퍼토리는 모든 작곡가를 두루 꿰고 있지만 악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음악을 살아 숨쉬게 하는 매력이 특징이다.특히 그의 모차르트는 이따금 너무나 격정적이며 비브라토의 처절성이 모차르트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해도 그의 백열하는 열정 때문에 청중은 온통 열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유신씨는 평한바 있다. 김남윤의 연주회에 가보면 당장 느낄수 있는 것이 그에겐 고정팬이 확보돼 있다는 점이다.그러니까 알만한 사람들이 인사치레로 온다든가 학교 인맥등으로 동원된 관객과는 전혀 그 유가 다르다.그의 미국 매니저인 테어 디스페커는 일반관객이 김남윤의 연주회 입장권을 구매하는 것을 여간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다.예를 들어지난 85년 일본 도쿄의 사보회관과 무사시노 문화시민회관 독주회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자 도쿄 인터내셔널 뮤직코퍼레이션은 다음해 앙코르연주를 요청해왔고 이미 정해진 스케줄로 인해 2년후로 계약을 미룬 일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78년 미국서 귀국후 지금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독주회를 여는가하면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협연등 연평균 15회 이상의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연주가로 유명하다.그래서 국내의 비중있는 평론가인 유신 이상만 서우석 한상우들로부터 「그해의 음악인」으로거듭 선정되는등 음악과 관련된 모든 상을 혼자서 휩쓸다시피 했다. 그는 부친 김희룡씨와 음악을 좋아하는 정경선 여사 사이의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은행지점장이던 부친의 임지를 따라 전주 대전등지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처음은 피아노를 치다가 9살되던해 이대 실내악단의 순회연주를 보고 섬세한 선율에 이끌려 바이올린으로 악기를 바꿨다.바이올린을 시작한지 3년만에 이화·경향음악 콩쿠르 특상,이화여중 3학년때 동아음악콩쿠르 1등에 입상하면서 스승과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순탄한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 줄리아드 음악원시절에는 김영욱 정경화를 길러낸 저명한 이반 갈라미언교수를 사사,또하나의 스승인 펠릭스 갈리미어교수는 「남윤의 남다른 정열과 힘있는 음악」을 유독 편애하여 그가 스위스 티보바가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자 줄리아드 오케스트라의 솔리스트로 발탁했었다.이후 정상의 연주가,서울대 교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학이면 미국의 지도교수들에게 자신의 음악의 진취를 확인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한시도 쉬지않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연주회에 가고 친구들을 만난다.실제로 연습이나 강의가 없을땐 그의 손에는 라디게나 랭보나 이문열이 들려있다.원만한 대인관계로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종합예술학교 음악원장인 이경숙과의 그림자같은 우정은 음악계에서 널리 부러움을 사고 있다.일상생활에서는 학생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즐기고 아끼는 제자가 연주를 앞두고 악기 때문에 걱정하면 자신의 소중한 과다니니를 선뜻빌려주기도 한다. ○요즘도 새벽녘에 연습 요즘도 연주 교섭이 들어오면 아무리 스케줄이 빡빡해도 일단 「하겠다」고 승낙해 버린다.이를테면 자선음악회는 자선음악이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으며 지방연주는 지방인들을 위해서 당연히 외면할 수 없다는 식이다.유학시절에는 1시간의 독주회를 위해 1년동안 꼬박 하루 10시간의 연습을 지켰고 요즘은 새벽 1시이후 2∼3시간씩 바이올린을 잡는다. 그로선 빗발치는 박수갈채와 타인들의 시선속에서 어텐션을 받는 입장이다.사람들은 곧잘 그를 향해 「액티브하다」느니 또는 「슈퍼 우먼」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의 음악성이 「강하고 적극적이며 곡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간혹 엉뚱한 오해와 매도의 그물에 걸려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에도 그는 상대방의 언어의 자유와 판단에 맡길뿐 「시간의 해결」을 믿고 동요하지 않는다.강한 정신력과 책임감,음악에 대한 사랑과 집념이 강인한 음악인으로 자신을 완성시켰고 그래서 정상에 우뚝 선 자의 자랑스러움이나 오만이 한낱 부질없음을 터득한바 오래다. 겉으로는 밝고 명랑하고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지만 그와 오래 사귄 사람은 그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실낱같은 섬세함을 알고 있다.실제로 이런 면은 연주에서도 자주 노출되어 악보의 한소절에도 한치 소홀함이 없다.각 소절이 갖는 의미와 정감을 세밀하게 따져본 다음 자신이 느낀 것을 청중이 그대로 느낄수 있도록 농현(농현)의 현란을 멈출줄 모른다. 『세상물정 모르던 어린시절엔 어머니가 시켜서 음악을 공부했고 음악을 하다보니 걷잡을 수 없이 음악에 빠져들었으며 이제는 「운명」처럼 음악없인 한시도 살수 없을 것이다.음악은 나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나 자신이 음악자체라해도 과언일 수 없다』고 말할수 있게 되었다. ○“세속의 희열 초월” 극찬 그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어릴때부터 끝없이 그의 음악을 뒷바라지해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딸의 연주회장에 모습을 나타내는 80노모와 외아들(윤주영·17·미국유학중)과 함께 음악 못지않게 사랑과 정성으로 가족을 지키며 단란하게 살고 있다.여전히 의욕적인 연주활동을 늦추지 않아 올 상반기에 벌써 「이야기와 영상음악」청소년소녀 교향악단등 3차례의 연주,오는 6월4일 예술의 전당 독주회를 비롯,8차례의 연주 스케줄을 잡아놓고 있다. 언젠가 뉴욕타임스가 평했듯이 「그의 음악은 일체의 세속의 희열을 초월하여 자신의 생애를 보석타래로 엮어내듯」 악절마다에서 향기로운 화현마저 흘러나온다.더이상 정열에 넘치거나 솟구치는 법없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흐르는 지하수처럼 방울방울 맺힌 영롱한 리듬은 듣는 이의 가슴속에 진한 각성을 던진다. 그가 친애해 마지않는 모차르트는 더 더욱 눈부시고 베토벤 프랑크는 장엄미가 두드러지면서 「시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언어」이듯이 그의 음악은 「음악자체로서 존재하는 언어」로서 날이 갈수록 성숙한 차원을 성립하고 있다.이제 그는 멀고 긴 아득한 터널을 지나 햇빛 찬란한 푸른 벌판에 나선듯 예술가로서의 최상의 절정기를 지금 맞고 있는 그 순간이다. □연보 ▲1949년 전주 출생 ▲59년 이화·경향콩쿠르 특상,백운창 김용윤 양해엽 사사 ▲64년 동아음악콩쿠르 1등 ▲67년 서울예고 졸업,미 줄리아드 음악원 입학 ▲69년 워싱컨 메리워더 포스트 컴피티션 입상 ▲70년 워싱턴 내쇼널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 데뷔 ▲71년 줄리아드 차이코프스키 콘체르토 컴피티션 우승,줄리아드 오케스트라 협연 ▲72년 LA 영뮤지션스 파운데이션 컴피티션 캐리어그란트상 ▲73년 허드슨밸리 영아티스트·스위스 티보바가 국제음악콩쿠르 1등 ▲77년 줄리아드음악원 졸업 ▲78년 귀국,제1회 독주회(서울시민회관)이후 해마다 독주회,경희대 음대조교수 ▲80년대 싱가포르 심포너 오케스트라,자그레브방송 교향악단 협연 ▲82년 서울대 음대교수 ▲83년 서울쳄버 오케스트라 창단 ▲85년 일본 독주회 ▲미국 시카고및 뉴욕 독주회,테어디스페커 매니지먼트사 소속계약,전주및 지방 6개도시 순회연주 ▲87년 미국 독주회(카네기홀) ▲90년 제1회 대만 국제콩쿠르및 싱가포르 롤렉스콩쿠르 심사위원 ▲92년 미국 보드윈 서머페스티벌 객원교수,도쿄 국제콩쿠르 심사위원,영국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라카르도 사이)협연 ▲9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협연 ▲94년 상하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협연(서울·중국) 등 5백여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한국음악페클럽상 난파음악상 올해의 음악가상 월간음악상 채동선 음악상 한국음악평론가상 예음상
  • 광주비엔날레/한국 근대화가의 대작 한눈에

    ◎9월20일부터 두달간 중외공원 문화벨트서 특별전/김환기·박수근·이쾌대 등의 60점 모아/격동기의 서구예술 주체적 수용 조명/「시상경력」조양규 그림·천재 김관호의 3점 첫 공개 구한말 개화기부터 일제시대까지 한국미술의 여명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대표적 근대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대대적인 전시회가 처음으로 마련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오는 9월20일부터 11월20일까지 광주 중외공원 문화벨트 일원에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의 특별전으로 마련된 「한국근대미술 속의 한국성」이 화제의 전시회.천부적 재질과 선각자적인 삶으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 17명의 작품 60여점을 통해 물밀듯 밀려오는 서구사조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시대상황을 수용하고 한국성을 지켜나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이번 전시회의 취지다. 이 시대 작가들의 작품은 일제시대와 6·25라는 엄청난 재난을 겪으면서 상당부분 파괴되거나 유실됐고,험난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사상적 이유 때문에 평가가 유보된 것도 많아이같은 전시회를 마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었다.그러나 지난 88년 10월 납·월북 화가들의 복권을 계기로 근대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연구가 활발해져 역사의 그늘에 가려있던 이 시대 화가들에 대한 자료가 속속 발굴되면서 재조명작업이 가능하게 된 것. 이번에 소개되는 화가는 한국미술의 여명기에 서양회화를 도입한 김환기(1913∼1974),오지호(1905∼1982),나혜석(1896∼1946),박수근(1914∼1965),이중섭(1916∼19 56),이인성(1912∼1950),이쾌대(1913∼1970) 등.또 외래문화에 맞서 우리 전통회화의 맥을 이어온 구한말 초상화가 채용신(1850∼1941),산수화가 변관식(1899∼1976)과 채색한국화 개척자 박생광(1904∼1985),한국화에 현대적 기법을 가미해 독창적 화풍을 일군 이응노 화백(1904∼1989) 등의 작품들이 소개된다.특히 이번 전시회에서는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서양화가 김관호(1890∼?)와 조양규(1928∼?) 등 두 천재화가의 작품이 최초로 공개돼 관심을 모은다. 평양 태생으로 도쿄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관호는 서양화의 본격적인 도입기였던 1910년대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화가였다.도쿄미술학교를 수석졸업(1916년)했고 졸업작품 「해질녘」으로 같은 해 10월 일본 문부성이 주최하는 문전에서 특선을 차지하는 등 그의 활약은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눈부셨다.그러나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은 도쿄미술대학에 소장된 「해질녘」과 「자화상」 단 2점이 전부였다.그러다 이번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평론가 윤범모 교수(경원대)에 의해 도쿄미술대 동창생인 한 일본인이 그의 작품 3점을 소장하고 있음이 확인됐고 이번에 국내에 선보이게 됐다. 조양규는 사상경력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전후 50년대 일본화단을 주름잡았던 한국인 화가.제주4·3사건에 연루돼 48년 밀항했던 그는 60년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인간소외를 강렬한 필치로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우리 근대미술사에서 최초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힌다.
  • 신봉승씨,서울신문 연재 「찬란한 비석」 3권의 책으로 펴내

    ◎“널리 읽히는 「국민소설」 전형 제시”/치밀한 고증 바탕 근대화 여명기 조명/유홍기·이동인 등 선각자의 꿈·고뇌 그려 국내 최고의 사극작가로 꼽히는 신봉승(62)씨가 근대사의 격동기를 다룬 대하역사소설 「찬란한 여명」1,2,3권(갑인출판사)을 묶어냈다. 『역사를 잘못 읽으면 민족의 자긍심을 손상시키게 됩니다.우리의 근대사가 흥선대원군의 유아독존적인 아집 때문에 「실패의 역사」로 기록됐다든가 흥선대원군과 중전 민씨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이 정치부재의 현상을 빚어냈다는 등의 이야기는 「근거없는 미신」일 따름입니다』 지난 93년 5월부터 2년 가까이 서울신문에 「찬란한 비명」이란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는 이 작품은 18 66년 7월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불타면서 비롯된 병인양요로부터 19 05년 한일신협약(을사보호조약)이 강제조인되기까지의 39년간을 시대배경으로 삼고있다.그런 만큼 이 소설공간엔 임오군란,명성황후 시해사건,갑신정변,아관파천,청일전쟁,노일전쟁 등 민족수난과 질곡의 파노라마가 숨돌릴 틈없이 펼쳐진다. 『우리 근대사는 유홍기 오경석 이동인 등 개화 1세대의 선각자적인 꿈과 고독,그리고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등 개화 2세대의 불같은 결기와 참혹한 희생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고난의 역정이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안이한 식민사관에만 의지하려는 무지를 오히려 자랑으로 삼는 경향이 있어요』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하기 위해 51세에 대학원(경희대 국문과)에 진학할 정도로 역사에의 관심이 남다른 신씨가 이 지점에서 우리 개항사의 진실을 소설의 그릇에 담으려 했던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에 속한다.더욱이 올해가 명성황후 시해 1백주년이 되는 해임을 감안하면 치밀한 역사 고증을 바탕으로 근대화의 여명기를 비추고 있는 그의 이번 소설 출간은 한층 시의성을 얻고있다.유홍기(의원),오경석(역관),이동인(승려) 등 다양한 부류의 민족선각자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것도 역사소설의 실감을 더해준다.특히 작가는 당초 연재됐던 소설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생몰연대조차 모호했던 유홍기의 족보를 입수,그의 가족사를 보다 생생하게 그렸으며 개화승 이동인의 일본내 활약상도 크게 보강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청소년들에겐 내일에의 꿈을 심어주고 지식층엔 삶의 성찰을 자극하면서 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국민소설」의 전형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현재 「한국역사문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사료 수집·정리에 몰두하고 있는 신씨는 『역사는 허구보다 더 아릅답다』는 말로 자신의 역사관을 압축한다.「찬란한 비명」은 오는 6월까지 모두 5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 근대 재판 첫 판결은 “동학”/대법원,판결문원본 첫 공개

    ◎농민 2명 “안녕침해 증빙없어 무죄”/일간섭 벗어난 독자 판결에 의의도 우리나라에 근대적 사법제도가 도입된 뒤 우리 법관이 내린 첫 법원판결은 1895년 음력 4월10일(양력 5월4일)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동학군에 참가했던 두 농민에 대한 형사무죄판결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은 근대 사법제도 도입 1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7일 펴낸 「법원사」에서 이같은 사실을 밝혔으며 이 판결선고서 원본도 부산시 사직동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언론에 공개됐다. 이 판결선고서는 『피고들이 동학당에 들어가 지방안녕을 해치는가 의심하여 본부 재판소에 잡아들여 심문을 한 결과 범죄한 증빙이 정확하지 않은지라 피고들을 무죄방송 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제1호 법원은 이 판결을 내린 법부 소속 고등재판소이며 제1호 판사도 이 판결을 선고한 장박 당시 법부 참의(현재의 차관보 혹은 국장)로 자리매김됐다. 최초의 피고인은 충청도 청풍읍 중리동에 살던 김용렴(당시 39)씨와 황거복(38)씨 등 2명으로 공식 기록됐다. 대법원이 이 판결선고서를 근대사법사상 첫 판결로 보는 이유는 1895년 4월1일 우리나라 법률 제1호인 「재판소구성법」이 시행된 뒤 처음으로 열린 근대적 의미의 재판이자 당시 조선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일본의 영향을 벗어난 독자적인 재판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에앞서 「재판소」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법부아문권설재판소(의금부의 후신)는 1894년 12월에 설치됐으나 여기서 내린 1∼41호 판결서에는 일본인 영사의 수결이 있어 일본의 내정간섭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독자적인 재판으로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대사법사상 첫판결이 동학군에 관련된 형사재판인데다 그 결과가 「증거불충분에 의한 무죄」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법원사편찬에 참가한 규장각 한영우 관장은 『당시는 정치적으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극심했기 때문에 민심수습 차원에서 종래의 「원님재판」과는 다른 「법에 따른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성이 컸으며 이 점이 양형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한편 대법원이 발간한 「법원사」는 본문 1천3백34쪽,자료집 7백91쪽 등 총 2천1백25쪽의 2권1질로 짜여 있으며 근대사법제도가 도입된 1895년부터 올해까지 1백년을 역사적 과정 및 제도와 재판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있다.
  • 조선시대 커뮤니케이션 연구/김복수 등 지음(화제의 책)

    ◎교서·윤음 등 언론매체 통해 대민언로 특징 밝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회·민속연구실 교수 6명이 한국언론의 토착이론과 사상을 조명해보는 연구의 하나로 조선시대의 커뮤니케이션 현상과 사회적 관계를 고찰한 연구논문집. 김복수교수는 조선시대의 고문서를 국왕과 관료·백성간에 이루어진 전형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보고 조선사회의 문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망과 그 형태를 제시했다.박정규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체계는 국왕을 중심으로 문서와 서적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가장 대표적인 하향적 언론매체인 교서·윤음의 내용과 변화를 도출해 당시의 대민 커뮤니케이션내용과 시대적 특징을 밝혔다.조맹기교수는 언관의 구조와 언로의 실천양태를 분석해 당시 커뮤니케이션개념은 오직 권력을 나누는 과정으로 묘사됐다고 주장했다.김광옥 교수는 민중커뮤니케이션형태인 참요의 내용변화를 고찰했으며 윤병철교수는 조선사회가 다원화하는 과정을 커뮤니케이션체계속에서 재해석했다.정대철 교수는 개화기의 개혁운동과 개화기 신문의 언론관을분석해 개화기언론의 사상과 운동이 본질적으로 개혁운동방향과 동일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혔다.정신문화연구원 6천5백원.
  • 연3백만t 하역능력 북항 개발/인천 올 업무보고 내용

    ◎항만·공항·신도시 연계 건설… 세계화 관문역/97년까지 지하철 1호선·순환도로망 구축 인천시는 세계화의 관문으로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시정의 최역점을 두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시는 항만(sea port)공항(air port) 신도시(tele port)등 소위 3­포트의 건설로 중국 대련·천진과 일본 기타큐슈(북구주)등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도시들과의 경쟁에서 지역적 우위를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이영래 )인천시장은 11일 인천시를 연두순시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같이 보고하고 인천을 「개화의 성지」에 이은 「세계화의 성지」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세계화 전략=영종신국제공항 건설과 더불어 인천항의 만성적인 화물적체를 해소하기 위해 연 3백만t 하역능력의 북항을 개발하고 민자유치로 연 20만명을 수용할수 있는 국제여객터미널을 건립한다.국제적인 정보·무역·금융의 중심지로 건설이 추진되는 송도신도시의 조성기간을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 신공항 1단계 공기와 맞춤으로써 상호연계해 세계화를 추진한다. ◇교통체계의 확충=도심 교통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오는 97년까지 지하철 1호선과 64.3㎞의 도시순환도로망을 구축한다.또 오는 99년까지 수인선 복선전철을 건설하고 경인전철 복복선화와 경인고속도로 확장을 추진한다. ◇환경보전=공해도시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그린인천 21」의 본격적인 추진을 통해 대기·해양오염을 방지하고 지속적인 하천정비와 도시녹화로 깨끗한 인천 만들기에 박차를 가한다.도심에는 폭 1백m 길이 3.3㎞의 도심공원벨트를 만들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한다. ◇지역정체성 확보=개화의 도시 인천의 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해 개화박물관을 건립하고 3곳에 상징문화거리를 조성한다.이와함께 도시개성창조사업(CIP)을 본격적으로 벌여 나간다.오는 99년 까지를 문화예술진흥 5개년 기간으로 정해 지역 문화예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꾀한다.
  • 추상화가 유영국(이세기의 인물탐구:72)

    ◎간결한 선­강렬한 색채 “산의 화가”/데생을 하지않은 성품… 비례로 화면 골격잡아/자신의 그림 천여점 보좌,12일부터 공개 전시/고교2년때 화가 결심… 도일후 대학3학년때 일 미술전 대상 수상 그의 산은 항상 젊다.거센 불길로 타오르거나 짙푸른 숨결로 우거져 있다.화면 여기저기서 문득문득 솟구치는 빛의 반사는 비바람과 일출,일몰을 함축한다.단순하게 선 하나를 그었을 뿐인데도 원근의 면과 지평선의 무한공간,원과 삼각형이 절묘하게 조화된다.잡다한 수사학을 떨친채 그의 산은 높고 꿋꿋한 기상으로 피안을 우러르고 「강렬하고 명쾌한 색채의 변부」는 급류처럼 화면에 휘몰아친다. 그가 산을 그리게 된 것은 「산이 높아 골이 깊다.(산고곡심)」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친 속에서 산만을 바라보며 성장했다.울진의 중첩된 산들은 습곡단층을 이루면서 항상 무엇으론가 꽉차 있었고 그때부터 산은 무한한 신비감과 감동으로 그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산의 작가」이자 「원색의 연마사」로 대변되는 화가 유영국은 『화가의 눈은 항상 먼곳을 바라볼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먼곳으로 눈을 돌릴때 산과 바다와 자신의 세계가 도저(도저)하게 펼쳐진다.일부러 산을 그리지 않아도 자연에 눈을 돌리고 있으며 그곳에서 절로 『산과 바다가 대어나온다』고 도했다. ○“항상 먼곳을 보라” 강조 「근대한국미술논총」을 보면 평론가 김영나는 「1930년대 동경 유학생들」이란 글에서 『유영국의 경우 19 48년부터 계속 산을 주제로한 그림을 그려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본제국미술학교출신이며 판화가인 정규는 『1930년대 자유전을 대표한 추상주의 화가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지만 그중에서도 철저한 우리나라의 추상주의 화가는 유영국』이라고 단정하고 있다.그만큼 보이지 않는 변화속에서 산에 대한 그의 사고와 사상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틀속 갇혀 안주하는 형은 아니다.구성과 묘사가 완성되는 타블로와는 달리 초기엔 크고 작은 나무판을 콜라주한 릴리프(부조)적인 방법으로 앵포르멜 경향을보이고 있다가 차츰 기하학적 구성에서 벗어나 넓은 면과 밝은 색채,직선을 선회한 곡선의 이미지로 장식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색채 감정에 대해 『매우 투명한 원색이 주류를 이루면서 화사한 색채의 구성은 경쾌한 사유를 동반한다』고 말한다.모든 것을 극도로 걸러낸 생략과 절제는 이미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극치로서 색채언어를 완결했다는 의미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것은 서울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졸업반때 부터다.일본 유학 안내팸플릴을 보고나서 화가가 될것을 결심했으나 그는 도무지 데생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망설이던 끝에 데생시험이 까다로운 동경(동경)제국미술학교 대신 데생시험이 없는 동경(동경)문화학원을 지망하게 되었고 혼자서 데생을 공부하는 모색과 탐구의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지금도 그는 그림을 그릴때 데생을 하지 않는다.화면에 자리와 크기만 정하고 공간관계 비례관계로 골격을 잡아 나간다.야외에서 스케치를 하는 일도 없고 미대 시절외엔 대상을 놓고 그림을 그린 적도 없다. 당시동경(동경)분위기는 일본 문부성이 주도하는 문전(문전)과 이과전(이과전)이 대립되어 일년 내내 전시회가 열릴 만큼 회화운동이 열기를 띠고 있었다.그는 대학 3학년때인 38년 자유미술가협회 창립전에서 영예의 최고상을 차지 했다. ○한때는 고기잡이 생활 그러나 전쟁말기의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선 면 색」의 삼요소로 형태의 절대화를 추구하게 되었고 설화성과 감정이 배제된 단순한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그가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의 작가 몬드리안을 좋아하는 이유는 「몬드리안의 그림은 말없는 시이고 말하는 회화」이기 때문이며 그림은 그래야 된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화가로서의 활동에 제동이 걸리자 그는 43년에 귀국하여 일단 고향에 잠적했다.한동안 고기잡이 배를 타는 엉뚱한 생활을 하다가 해방과 함께 김환기 장욱진 이규상과 신사실파전을 창립,「절제된 율동미로 신비스런 평면세계를 전개」하기도 했으나 또다시 6·25가 터져 귀향,이번엔 죽변에 정착하여 그림을 멈추고 부인 김기순여사와 함께 양조장 경영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새벽부터 밤늦도록 술을 거르기도 하고 마차로 손수 술배달에 나서기도 했다.그러다가 『이만하면 생계에 급급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수 있다』고 생각되자 다시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고향에 두고온 양조장은 그가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될만큼 얼마동안은 생활의 근거가 되어 주었다. 처음엔 난로를 피워도 손이 시려운 약수동의 적산가옥에서 몇시간씩 선채로 그림을 그린 것이 화근이 되어 뒷날 골절을 앓게 되었고 79년부터는 화곡동에 거주 7년전부터 건축가인 차남(건)이 지어준 지금의 신방배동으로 이사해 왔다.자녀는 2남2녀.다리가 불편 해서 주로 휠체어를 타고 그림을 그린다. 최근의 그는 산의 형상성을 존중하여 자연으로 귀의하려는 또다른 변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동양적인 또는 한국적인 자연관을 지닌 때문」이며 근작들에 이르러「더욱 불타는 색채의 대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산은 모든 자연풍경의 시초이자 종말」이라는 러스킨의 말을 절감시킨다.처음은 즐겁고 다음은 깊은 사색을 던지며 상서로운 관유(관유)와 유열의 진동이 화면전체에 창만해 있다. ○휘체어 타고 그림 그려 언제나 시대의 첨단에 서서 선도적 구실을 했다는 자부심을 감추고 갈채를 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까.그는 최초의 추상작가니 선구자니 하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자신이 좋아서 했을뿐」선구자가 되겠다는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다.회화의 개화를 주도한 이후 혼란과 무분별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언제나 의연하게 자신의 세계를 지켜왔고 현재도 그는 시대적인 경향으로 자신만의 회화간을 고수하는 자세다. 큰 키에 희끗한 머리.은근하게 멋이 풍기는 옷차림에 꾸밈없는 경상도 억양이 그럴수 없이 정답다.직업화가로서 고집스럽게 평생을 버텨온 그로서는 실은 커다란 우여곡절을 겪었다곤 할수 없다.그의 절친했던 화우인 장욱진같은 기인기질도 천재적 광기도 신화도 없어 보인다.다만 싫은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모슴을 쉽사리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자 한다.아침마다 동네를 산책하고 한달에 한번 예술원 회의,병째 마시던 폭주습관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렸다. 그가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은 천여점,드물게 거의가 보관되어 있고 그래서 그것은 한 화가의 위대한 투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직장에 나가듯 하루 8시간의 작업을 지켰으나 요즘은 아침 저녁 한시간씩 그린다. 그의 화실에는 근작 소품들의 손질이 끝나가고 있다.12일부터 갤러리 현대 초대로 실로 10여년만에 60년대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한지리에 펼치기 위해서다. 그의 산하는 여전히 푸르르고 보석더미처럼 번쩍이는 화면은 이제 「차가운 추상」을 지난 중첩되는 산주름이 격정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 경이롭다. 만일 현대의 고전이란 말이 가능하다면 형태와 색채에 있어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미술사를 말할때 그를 빼고는 말할수 없다는 차원에서라도 그의 존재는 눈부신 그의 화면만큼이나 「빛나는 고전」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연보 ▲1916년 경북 울진출생 ▲1935년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졸업후 동경문화학원 유화과 진학 ▲1937년 일본 독립미술전 출품,제1회 자유미술전 출품(42년까지),N·B·G(NeoBeaux­ArtsGroup)출품(41년까지) ▲1938년 동경문화학원졸업,제2회 자유미술전 회고상 수상 ▲1947년 신사실파 창립회원(유영국 김환기 이규상),서울대 강사 ▲1957년 모던아트 창립전 ▲1958∼61년 현대작가초대전 및 국제자유전 ▲1962년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신상회 창립전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1964년 제1회 개인전(서울신문회관 화랑),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1966년 제2회 개인전(중앙공보관)한국현대회화 10인전 ▲1967년 동경국제 미술전 ▲1969년 제3회 개인전(신세계화랑) ▲1971년 제4회 개인전(신세계화랑),한국회화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제5회 개인전(현대화랑) ▲1976년 제6회 개인전(신세계) ▲1977년 제7회 개인전(진화랑),예술원상 수상 ▲1978년 살롱 드메초대전(파리시립현대 미술관) ▲1979년 국립현대 미술관초대 유영국 회고전(1백20점 전시) ▲1982년 제8회 개인전(현대화랑) ▲1985년 서울미술대전출품 ▲1988년 88올림픽 기념 세계현대미술제출품 ▲1995년 갤러리 현대초대전 「1965∼1990」 예술원회원,화집 「유영국」(79년 국립현대미술관 출간)
  • 원주민 한티족/원추형 움막「춤」서 수렵생활(시베리아 대탐방:5)

    ◎북부 시베리아에 1백 75가구 8백93명 거주/순록 몰고 다니며 물고기·곰·북극여우 등 사냥 상오 10시. 튜멘주 수르구트시에서 북쪽으로 1백30㎞ 떨어진 루스킨스카야마을 중심가.어른키가 1백50㎝쯤 되고 이마가 불쑥 튀어나온 한티족 원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중심가에는 이웃 유전개발에 힘입은 탓인지 러시아의 현대식 주택들이 한참 건설중이었다. 취재팀은 이 마을 행정책임자 프로살로브 블라디미르로비치씨(36·동장격)와 함께 원주민 거주지역들을 방문하기 위해 그의 사무실에 도착했다.사무실 테이블위에는 행정전화와 가정전화등 모두 4대의 전화가 가설돼 있었고 러시아연방기가 꽂혀 있었다.비디오를 겸한 텔레비전도 눈에 들어왔다.그가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30분쯤 뒤 헬리콥터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무실 이웃 공터에 도착했다.20명이 족히 탈 수 있는 화물운송용 헬기(MI­8)였다.루스킨스카야 중심가에서 2백㎞까지 떨어진 원주민마을(1백75가구 8백93명)에 생필품을 전달해주는 수단이었다.원주민가옥들은 서로 수십㎞씩 떨어져 있어 이웃간 교통수단은 한달에 두번 뜨는 헬리콥터에 의존하고 있었다.한달에 두번이라는 것은 시정부가 헬기를 지원,원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생필품을 공급하는 날이라는 것이 동장의 설명이었다. ○취재팀에 헬기제공 그는 『당신들의 취재를 위해 예정 배급일을 사흘 앞당겨 헬기를 불렀다』며 으쓱거렸다.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취재진은 모터썰매를 타고 수십㎞씩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아야만 원주민 취재가 가능했을 터였다. 헬기가 도착하자 헬기장쪽으로 30대와 50대쯤으로 보이는 한티족여인 두사람이 모였다.원주민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주기 위한 간호원이라는 설명이었다.결핵예방약등 각종 약품가방을 들고 그녀들이 헬기에 올랐다.동장과 취재진들도 함께 탑승했다.곧 헬기는 북쪽으로 1백50㎞쯤 떨어진 첫 「춤」(한티족이 사는 움막이름)을 향해 이륙했다.공중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하얀색의 눈과 검은 갈색의 숲뿐이었다.이따금씩 강으로 보이는 S자형의 굴곡만이 나타날 뿐,말로만 듣던 시베리아벌판이 계속 이어졌다. 40분쯤 비행하자 「춤」 두채가 나타났다.헬기는 이곳 첫마을 상공에서 착륙하지 않고 밀가루 13부대를 던져 떨어뜨렸다.약 70㎏ 정도 되는 빵 제조용이었다.블라디미르로비치씨는 『이곳에 떨어뜨려 놓으면 며칠안에 주위에서 원주민이 모여들어 서로 나눠 가질 것』이라고 설명했다.헬기가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그는 『헬기의 연료때문에 원주민 마을을 일일이 방문할 수 없다』면서 『전체 1백75가구를 일곱지역으로 나눠 헬기가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직경 5m 넓은 공간 다시 15분쯤이 지난 낮 12시 40분.헬기는 두번째 마을에 완전 착륙했다.마을이라야 원추형 「춤」 두채가 고작이다.헬기에서 내려 그곳 주인 포카초브 니콜라예비치씨(20)의 안내를 받아 움막에 도착했다.헬기가 착륙한 곳에서 움막까지 거리는 2백m 정도.눈 깊이는 1.5m 이상 됐다.바깥기온 영하38도.바람만 조금 불면 면돗날 조각이 얼굴에 와 박히는 것 같았다.취재팀은 거의 나아가지 못했다.하지만 니콜라예비치씨는 눈을 가슴에 안고 기는 자세로 잘도 빠져나갔다.그를 따라 비슷한 자세를 취하니 의외로 움직이기가 쉬웠다.움막안은 무척 따뜻했다.장작을 피우고 있었는데 온도계의 온도는 2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바깥기온과의 차가 무려 63도나 되는 셈이었다. 여러가지 짐승가죽을 이어 만든 천막은 원추형이었고 직경은 약 5m.실내는 무척 넓어보였다.이런 움막에서 4∼10명의 가족들이 함께 지낸다는 것이다.니콜라예비치씨 가족은 모두 5명.할머니(50)와 부인,아이 둘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움막안의 현대식시설은 연통이 달린 페치카와 재봉틀이 전부였다.천장에는 사슴등 짐승가죽이 걸려있었고 침실로 보이는 나무바닥도 여러가지 짐승가죽을 꿰매놓은 것이 깔려 있었다.차 대접을 받고 선물로 보드카 한상자와 초콜릿등을 놓고 나왔다.가족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간호원들이 2살,5살쯤 돼 보이는 아이들을 붙잡아 결핵예방주사를 놓았다.아이들은 주사를 맞지않으려고 도망다녔고 할머니가 아이들을 붙잡아 주자 간호원들은 간신히 주사를 마쳤다.얘기를 더 하려하자 조종사들이 『시간이 없다』고 갈길을 재촉했다. 니콜라예비치씨가 움막 주위에 세워져 있던 현대식 모터썰매로 헬기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줬다. ○생필품과 가죽 교환 낮 12시 55분.첫번째 마을에서 40㎞쯤 떨어진 두번째 「춤」에 도착했다.역시 두 채가 있었다.헬기에서 내려 움막으로 들어갔다.집주인 포카초브 알렉세예비치씨(70)는 보드카에 취해 있었다.그는 『아들이 순록을 몰고 사냥하러 나갔다』며 가족들을 소개했다.그의 말에 의하면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고 살며 여름철인 6∼9월까지는 곰·북극여우·족제비·고슴도치·거위등을 잡는다고 했다.수렵생활이 전부였다.이들은 짐승가죽을 루스킨스카야 중심가에 가지고 가 생필품과 교환하거나 판매를 한다는 것이 알렉세예비치씨의 설명이었다.알렉세예비치씨는 『귀한 손님이 왔다』며 「라바스」로 불리는 창고쪽에서 사슴고기를 꺼내 요리했다.그는 그릇을 들고 천막 밖으로 나가 주위의 눈을 담아 들어왔다.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양념없이 끓는 물에 푹 삶아낸 사슴고기는 쇠고기처럼 맛있고 연했다.별미였다.간호원들은 이곳에서 역시 아이들을 붙잡아 예방주사를 놓았다.할아버지는 『사는 것이 재미있느냐』고 묻자 『만족한다.우리는 물과 먹을 음식만 있으면 살 수 있다』며 흡족해했다.자신은 보드카에 연일 취해 있다고 했고 우리들의 보드카선물에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순록 수를 묻자 『우리는 그 수를 세지 않는다.수를 세면 순록수가 줄어든다』며 대강 1백70마리정도 된다고 했다.알렉세예비치씨가 다시 음식창고 옆의 또다른 창고로 갔다.연장창고였는데 거기서 칼집에 들어있는 사냥칼을 갖고 움막으로 들어왔다.취재진이 깜짝 놀라자 『선물로 칼집을 주겠다』며 칼을 빼들었다.그리고는 가죽으로 된 칼집만 손에 쥐어주었다.사냥용 칼을 줄 수 없느냐며 웃어보이자 『생활수단…』이라며 멈칫거렸다.차대접까지 받고 다음 「춤」으로 향했다. 이런식으로 7개마을을 방문하고 난 시간이 하오 4시.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티족/서시베리아 북북 우고르­핀계 종족/성인 키 150㎝정도… 고집 센 소수민족 청동기시대부터 러시아 서시베리아 북부 이루튀시 강변에 거주하던 우고르­핀계의 종족.어른 키가 1백50㎝정도.검거나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으며 머리카락은 회색이 대부분이다.일부는 한티­만시스크시 등에서 개화된 도시생활을 하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시베리아 북극 근처에서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비율은 8:2정도.수줍음을 잘 타고 고집이 센 소수민족이다. 16 37년 이반 3세가 당시 한티족 공작이던 「사마라」가 살고 있는 지역을 평정,동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마차역을 세운 곳이 지금의 한티­만시스크시다.마차역은 모피상인들이 오가면서 부유한 상인마을 「사마로보」를 탄생시켰고 이 마을은 19 30년부터 「한티­만시스크 자치구」로 개칭돼 인구 30만명의 도시로 발전했다.
  • 여수 오동도/“봄의 전령” 동백꽃이 손짓

    ◎이달 중순 온섬 물들여 “환상적 풍광”/전망대 오르면 그림같은 다도해가 한눈에/박제수족관엔 3천여종의 바다생물 전시 올해도 어김없이 「계절의 전령」동백꽃이 남녘 곳곳을 점점이 물들이며 새 봄을 안고 북상 중이다. 요즘 남부 해안이나 섬지방으로 나서면 봄기운을 머금은 동백나무 꽃망울이 붉게 피어올라 봄의 생동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동백꽃은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꽃망울을 맺기 시작,4월 중순까지 붉은 자태를 뽐내는데 긴 겨울 끝에 처음 대하는 꽃이라 보는 이들의 감동을 더해준다. 전국의 동백꽃 명소들 가운데 남도의 미항 여수 오동도가 벌써부터 동백맞이 나들이객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오동도관리사무소 직원 명주완씨(35)는 『현재 동백꽃이 30% 정도 개화된 상태이나 최근 성급한 봄나들이객들이 몰려 전국에서 하루 평균 1천여명씩 찾고 있다』면서『올해 오동도의 동백꽃은 3월 중순쯤 만개해 온 섬을 붉게 뒤덮을 것』으로 내다봤다. 오동도는 광주에서 2시간,여수시내에서 10여분 거리의 신항에 위치하고 있으며 승용차로 접근이 쉬워 오고가는길이 편리하다.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바라다 보이는 푸른바다와 그곳에 정박해 있는 수많은 배들은 남해의 싱그러운 바람과 어우러져 도시인들의 답답했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며 항구의 따듯한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오동도에는 1백93종의 수종이 펼쳐져 있는데 그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이 봄의 소리로 전해져 온다.동백꽃은 등대를 중심으로 섬 전체에 번지고 있다.특히 소라·병풍·지붕바위 등의 기암괴석 주변에서 자생하는 동백나무는 바다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또 등대 옆 박제수족관에는 어류·패류 등 3천여종 바다생물이 전시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모터보트나 유람선을 이용해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다.구항 주변에는 횟집이 즐비하게 늘어서 저렴하고 싱싱한 회맛을 즐길 수 있다.입장료는 2월1일부터 어른 8백원,어린이 2백원으로 인상됐다. 이용시간은 상오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이와함께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사도 미당 서정주의 시에등장할 정도로 동백꽃의 명소로 꼽히는 곳.동백꽃의 북방 한계선인 이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아쉽게 발길을 돌리는 관광객들이 많다.그러나 3월 말부터는 그 아름다움의 절정을 즐길 수 있다. 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부터 대웅전 뒤쪽까지 약 30m에 걸친 동백나무숲이 천연기념물(184호)로 지정될 정도로 절경을 이룬다.선운사가 창건된 백제 위덕왕 24년(577)이후 심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숲 주변에 별다른 나무가 자라지 않아 순림에 가깝다.선운사 입구에는 풍천장어로 유명한 민물장어집들이 들어서 별미를 제공한다. 이밖에 천연기념물 223호로 지정된 거제도 동부면 몽돌밭 해변 일대와 해남 대흥사 주변 등도 동백꽃 명소로 이름나 있다.
  • 화신 2∼6일 빨리 온다/개나리 새달15일 제주서 첫 개화

    기상청은 24일 봄꽃의 개화시기가 예년보다 2∼6일정도 빨라져 개나리는 다음달 15일쯤 제주 서귀포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진달래는 18일쯤 부산에서 가장 먼저 개화돼 북상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개나리의 경우 3월15일쯤 서귀포에서 가장 먼저 개화해 3월16∼25일 남부 및 영동지방,3월26일∼4월5일 중부지방,4월10일전후 중부산간지방으로 북상이 예상되며 지난해와 비교해서는 지역에 따라 2∼9일정도나 빠른 곳도 있겠다. 또 진달래는 3월18일 부산에서 첫 꽃을 피운 뒤 19일쯤 제주 서귀포와 여수를 거쳐 남부 및 영동지방에는 3월20∼25일,중부지방에는 3월26일∼4월10일,중부산간지방에는 4월 중순쯤 다다르겠다.
  • “민자당 새출발에 마음 든든”/김대통령/1년만의 당사방문 이모저모

    ◎「행정구역」 언급안해 당·국회 일임 시사/「열린 정당」 향해 이 대표중심 단합 당부 김영삼 대통령이 22일 민자당사를 방문한 것은 지난해 1월31일 당업무보고를 받기 위해 방문한 뒤 두번째이다. ○…김 대통령은 이날 하오3시55분쯤 당사에 도착,이춘구대표와 김덕용사무총장 등 당6역의 영접을 받으며 5층 당무회의실로 직행. 이대표는 회의에 앞서 인사말을 통해 『총재께서 대통령취임 2주년과 유럽순방 일정 등 바쁜 국정에도 불구하고 당을 찾아주어 큰 기쁨이자 영광』이라고 환영.이대표는 이어 『지난 2년동안 나라의 도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총재의 세계일류국가 건설이라는 목표가 힘차게 펼쳐지는 취임3차년도가 되길 바란다』고 부연. ○…당무회의에서 김 사무총장은 95년 당무운영계획 보고를 통해 『시·도지사후보 선거인단 선출및 각급 후보 공모,영입설명회,후보경선,공천자대회 등으로 선거흐름을 장악하고 유권자의 70%에 이르는 청년층과 여성층의 관심을 이끌 생활정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겠다』고 보고.그러나 정작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행정개편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이 전무. ○…이승윤 정책위의장은 정책보고에서 『국가경쟁력에 역행하는 법과 제도를 조속히 정비하고 사후대책위주의 정책개발이 아니라 사전대비 위주의 정책개발을 강화하겠다』고 다짐. 현경대 원내총무는 『국익을 위한 국회를 주도하기 위해 합리적인 야당의 주장은 과감히 수용하고 지방자치제가 진정한 주민자치·생활자치 실현에 부합되도록 관련 제도를 검토·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보고. ○…김 대통령은 이날 인사말에서 『오랜만에 당사를 방문,감회가 크다』면서 『당이 지난 전당대회를 계기로 새출발하고 있어 총재로서 마음 든든하다』고 새 당직자들의 업무추진에 만족감을 피력. 김 대통령은 이어 「역사를 창조하는 정당」의 첫째 조건으로 국가 발전의 장기비전을 제시한 뒤 『민자당이 앞장서야 세계화는 성공하며 국민들이 세계화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당원들이 선봉장이 되어 달라』고 주문. 김 대통령은 국가발전의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정책개발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여의도 연구소」의 설립을 예로 든 뒤 『합리적 논리와 정책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연구하는 정당만이 승리할 것』이라고 언급. 김 대통령은 19세기말 근대화의 문턱에서 지도층이 수구파와 개화파로 분열돼 나라를 잃었던 교훈을 상기시킨 뒤리춘구대표를 중심으로 한 당의 단합을 당부. ○…김 대통령은 그러나 정치권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된 지방행정 구역및 구조개편 문제에 관련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당론화 단계에 접어든 개편 논의를 당과 국회에 맡겼음을 시사. ○…김 대통령은 당무회의가 끝나자 회의장을 돌며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김 대통령은 지난번 대통령선거 전까지 집무실이었던 당사 6층 대표실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감회어린 표정. 김 대통령은 이어 3층 대회의실에 마련된 다과회장으로 이동. 김 대통령은 인사말에서 『오늘은 전당대회 뒤 새로 취임한 이춘구대표가 국회에서 첫 연설을 한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뒤 『새로운 결심으로 승리를 다짐하자』고 강조. 김대통령은 다과회장을 나와 예정에 없던 기자실에들러 기자들과 악수로 인사.
  • 「세계화」 주창(민주화에서 세계화로:4)

    ◎“지구촌 중심국가로” 한민족비전 제시/21세기초 통일·G7수준의 국부 목표/개혁성과 바탕,국가경쟁력 강화 박차/“「개화 실패」 반복 않는다” 의지… 국민 실천력 뒷받침돼야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해 11월17일 호주의 시드니에서 「세계화 구상」을 밝혔다.이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물론 공직자나 정치지도자들까지 「세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그러나 김 대통령이 귀국한 뒤 「세계화」는 곧 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김 대통령은 「세계화」를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고 나아가 세계를 경영해 나가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김대통령의 「세계화 구상」은 하루 아침에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서 나온 사려 깊은 결론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김대통령은 11월22일 확대국무회의에서 국정지표로 「세계화」를 제시하면서 뼈아픈 우리의 역사를 되새겼다.『지난 19세기말 우리민족은 그때 가장 큰 시대적 과제이자 도전이었던 개화에 실패하여 그뒤 수십년을 가난하고 낙후된 약소국의 고통 속에서 보낸 역사적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다.잘못은 두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된다.지금 우리가 바로 그 한세기 전과 마찬가지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김대통령의 판단으로 여겨진다.세계화를 천명하면서 굳이 아팠던 역사를 되새긴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는 경제대국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고 있는 일본에도 뼈아픈 역사는 있다.1853년 개방을 거부하던 일본을 미국의 페리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포격했다.일본의 사무라이들은 혼비백산했다.그러나 이들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고 곧 이어 1868년 메이지(명치)유신을 단행했다.서구처럼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가의 모든 체제와 국민의식을 개혁한 것이다.심지어는 서양인과 같은 체격을 갖추기 위해 국민들의 식생활까지 개조하는 노력을 기울였다.「천황폐하 우유를 드시다」라는 신문의 머리기사도 이러한 분위기를 잘 나타낸 것이었다. 일본은 17세기에도 그때 세계를 주름잡던 네덜란드의 해군력과 진취적인 경제활동을 배우자는 「난학」(네덜란드를 배우자)이란 움직임이 있었다.그때만 해도 파격적인 서양인과의 결혼을 장려하자는 주장도 나올 정도였다. 일본은 1945년 전쟁으로 패망한 뒤 또 한번 난관을 극복했다.한국의 6·25사변을 틈타 경제를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일본경제는 세계수준으로 떠오른다.엑스포를 비롯해 각종 세계대회를 유치해 국민의식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영국도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경제를 따라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때가 있다.19세기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적 성공을 모방하는데 바빴다.그러나 역사는 반전했고 그 주역은 노력하는 자의 몫이 됐다. 「세계화」를 향한 우리의 여건은 성숙해 가고 있다.박정희정권이 심혈을 기울인 고도의 경제성장과 서울올림픽으로 드높아진 우리국민들의 자신감은 이땅에 민주주의의 터전을 다진 문민정부 2년동안의 개혁작업으로 가속도를 더하고 있다.대통령도 직접 대규모의 경제인들을 이끌고 동남아로,유럽으로 국가 차원의 세일즈에 나선다.김대통령의 3월초 유럽순방에는 경제인이 60여명이나 수행한다.경제인 가운데는 대기업의 총수를 비롯,금융계 중소기업 패션계 인사까지 망라돼 있다.의류업체 대표인 프랑수아즈의 진태옥사장과 사라의 안희정 사장이 수행하는 것은 파리의 패션업계를 겨냥한 것이다.대통령을 수행하는 경제인은 청와대에서 선정한 것이 아니라 통상산업부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희망기업을 신청받아 선정했다는 점도 지난날과는 다른 변화다. 유엔 안보리의 이사국 진출노력,월드컵축구대회의 서울 유치운동,김철수대사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출마등 세계의 중심에 한발 더 다가서려는 밖으로 향한 노력도 숨가쁘다.정부가 마련한 「세계화 지표」에 따르면 우리는 오는 2000년까지 동북아의 중심국가가 된다.2010년이면 환태평양의 중심국가로 부상하고 2020년이 되면 통일공화국으로 선진 7개국 수준에 진입한다.참으로 가슴 뿌듯한 세계화의 설계도가 아닐 수 없다. 바깥에서도 한국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다.세계적으로 정평있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최근 펴낸 「21세기 미래예측」이라는 책에는 싱가포르의 이광요전총리,홍콩의 크리스토프 패튼총독,하버드대학의 헨리 루이스 게이츠교수등이 미래전망을 제시하고 있다.이들은 대부분 한국을 언급했고 한국의 미래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워싱턴DC국제경제연구소 소장인 프레드 벅스틴은 22세기의 승자들이 될 가능성이 큰 여덟개 지역들 가운데 하나로 「독일의 선례를 통해 단숨이 아닌,20년이상 비용을 절약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이룬 한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를 꼽았다.이광요전총리도 한반도에 대해 『김정일정권은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붕괴되고 남한이 북한을 관리하게 된다.통일된 한국은 2025년 중간규모의 강대국이 된다』고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전망도 국민들의 의식개혁과 실천이 없이는 장미빛 청사진에 불과하다.정부나 기업이 혼자서만 세계화를 이끌수는 없다.대통령 정부 기업인 국민 모두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프랑스회사의 한국지점에 근무하는 프레데릭 메이어씨(30)는 지난해 한국여인과 결혼했다.이들 부부는 『파리에서는 모두 자유로움을 느꼈으나 서울에서는 이방인을 대하는심상치 않은 눈길이 섭섭하다』고 말한다.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이 제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곳도 우리나라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해외에 나가기만 하면 현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한국은 4천년이 넘는 역사의 자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배타성이 강하고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한 외국특파원의 지적도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이제 「세계화」의 과제는 작은 일부터라도 세계일류가 되겠다는 온 국민의 자각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화 추진 「실천강령」 제시/김대통령 「6대과제」 천명의 함축

    ◎“논쟁 벗고 행동을” 공직사회에 강한 주문/언론도 대상지목… 제구실 찾기 개입 시사 김영삼대통령이 25일 세계화구상에 대한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새로이 제시했다. 지난해 11월 호주의 시드니에서 밝힌 뒤 이미 여러차례 개념을 풀이해보고 방향도 제시했던 것들이다.그럼에도 이날 세계화추진위원들을 만나 세계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입체적인 내용을 다시 한번 밝힌 것은 세계화에 관한 논쟁국면을 실천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로 볼 수 있다.특히 새마을운동이나 근대화운동처럼 세계화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끌고가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명의로 된 「국민교범」이 필요했고 그동안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쳐 집대성한 일종의 「세계화사전」을 내게 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잇단 세계화추진 의지의 천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공직자 사이에 세계화에 대한 사명의식이 미흡하다고 판단,공직사회에 세계화에 관한 강한 소명의식을 불어넣을 필요성을 느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한 최근 정쟁바람을 타고 국가의 생존전략으로 제시된 세계화전략의 의미가 퇴색조짐을 보인데서도 이런 재정리 작업을 통한 분위기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던게 아닌가 싶다.이같은 세계화구상의 구체화는 결국 나라전체의 분위기를 생산적이고 일하는 쪽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을 담당했던 박세일정책기획수석이 이날 『이제 세계화가 더이상 논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세계화에 대한 추상적 논의를 끝내고 행동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고 강조한 사실이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박수석은 특히 『김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시드니에 이어 연두회견에서 세계화구상을 밝혔음에도 불구,아직 세계화개념에 대한 견해의 불일치가 있는 것처럼 비치고 있음을 중시,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그는 『과거 1백년이 근대화 공업화 시대라면 향후 1백년은 세계화시대로 현재는 문명기적 전환기라 할수 있다』면서 『공직자는 물론 국민 모두가 이같은 시대사적 현실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국가발전이라는 목표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세계화구상을 거듭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대통령이 이날 오늘의 시대를 혁명적 변화의 시대로 정의하면서 과거 1백년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으나 실패했음을 지적한 것은 그의 시대인식과 세계화전략에 대한 집념을 읽게 해주는 대목이다.1백1년전의 갑오경장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싸움으로 3년만에 끝났고 결국 우리는 개방과 공업화를 통한 「근대국가」를 세우는 작업에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21세기로 넘어가는 현재를 갑오경장이 있었던 시대와 비유함으로서 국민,특히 정치권에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이를 테면 현재의 민자당내 김종필전대표를 둘러싼 보수파의 움직임이나 정책대안 없이 소모전을 되풀이 하는 야당이 갑오경장을 실패로 만든 수구파의 움직임과 같은 역사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 이의 개선을 정치권에 촉구한 것이다.김대통령이 정치와 언론을 3번째로 세계화가 필요한 분야로 지적하면서 여러가지 발전방향을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김대통령은 야당에는 정책으로 경쟁할 것을,이른바 「3김구도」에 대해서는 차세대 정치인의 양성과 당내 민주화를 들어 이같은 구도가 청산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언론에 대해서도 「정론을 펴는 공기」가 되어야 한다고 요청함으로써 권력투쟁에 천착하는 언론의 보도태도를 간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정부의 공정거래위원회가 언론,특히 신문의 불공정거래(내부 불공정거래 포함)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조사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김대통령이 직접 언론을 세계화의 대상으로 거론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대통령으로서 단순히 세계화를 촉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부가 가진 합법적 방법으로 언론의 공기화를 유도할 것이란 점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지난해말 박수석에게 세계화에 대한 구상과 견해를 피력한 뒤 이를 정리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박수석과 전성철정책1비서관등이 중심이 돼 마련한 이 교범은 앞으로 남은 김대통령의 임기동안 국정운영의 중심지표이자 이념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김대통령이 교육의 세계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율과 경쟁을 촉구하고,교육부가 고교입시 부활문제등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표한 것에서 이러한 세계화구상과 구체적 정부정책 사이의 상관관계가 입증되고 있다. 앞으로 구체적 정책을 일관할 단어는 김대통령이 밝힌대로 「생산성」과 「유연성」이 될 것이다.
  • 「약속 또약속」「심수일…」「그리스록큰롤」…/대형뮤지컬 신출무대장식

    ◎막대한 제작비·외국 유명 안무가 초빙/극단들 완성도 높은 무대 만들기 최선 춤과 음악,연극이 어우러진 뮤지컬들이 한 겨울 공연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민중극단이 7일 J아트 예술극장에서 「약속,또 약속」 공연을 시작한데 이어 극단신시 뮤지컬컴퍼니가 12일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그리스 록큰롤」의 막을 올렸다.그런가하면 에이콤의 「심수일과 이순애」(27일∼3월12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환퍼포먼스의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2월7일∼19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한국배우협회와 민중극단의 「나도 출세할 수 있다」(21일∼2월1일 문예회관 대극장) 등이 개막을 앞두고 한창 마무리 연습 중이다. 올초 공연되는 뮤지컬들은 과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하고 브로드웨이 등 뮤지컬 본고장으로부터 안무가를 초빙하는 등 무대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기대를 모은다. 「약속,또 약속」(연출 박봉서)은 영화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를 미국의 희극작가 닐 사이먼이 뮤지컬로 각색,브로드웨이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국내에 뮤지컬 붐을 일으킨 민중극단이 1년간의 장기공연을 목표로 무대에 올렸다.『탤런트들을 앞세워 떠들썩한 홍보로 기대를 모으게 한 뒤 설익은 무대로 실망감만 안겨준 종전의 뮤지컬 공연 패턴을 깨뜨리는 것』을 목표로 2백석이 채 안되는 소극장에서 알찬 공연을 시도하는 것이 이채롭다. 「그리스 록큰롤」(김상열 각색·배해일 연출)은 영화 「그리스」를 우리 감각에 맞도록 각색한 작품.록큰롤 개화기인 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10대들이 기성세대와 부딪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스스로 찾아간다는 주제를 담고있다.올리비아 뉴튼존과 존 트래볼타가 주연했던 영화 「그리스」를 통해 우리 귀에 익은 「섬머 나이트」등 15곡이 전속 그룹사운드 「보스」의 반주로 선보인다.남경주 이경미 등이 출연하며 미국 플로리다에서 활동중인 안무가 엘리 파츠가 무용지도를 맡았다. 「불좀 꺼주세요」의 강영걸이 연출을 맡은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는 환퍼포먼스의 첫 뮤지컬.브로드웨이 정통코미디를 송승환이 뮤지컬로 각색했다.음악은 대중가요 뿐 아니라 영화음악,무용음악 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김수철이 맡았고 중견 연기자 김성옥외에 최수종,엄정화,양희경,이정섭 등이 출연한다. 「심수일과 이순애」(이상우 연출)는 순수 창작뮤지컬이라는 점에서 다른 뮤지컬과 구분된다.기존 「이수일과 심순애」의 현대판으로 무명 코미디언과 가수가 우여곡절 끝에 스타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요즘 부각되고 있는 연예계 뒷얘기를 소재로 하는 이 뮤지컬의 타이틀롤은 가수 이상우와 탤런트 나현희가 맡았다. 「나도 출세할 수 있다」는 「아가씨와 건달들」을 쓴 에이브 버러우스의 작품으로 유리창닦이를 하다 대기업 말단 사원으로 취직한 주인공이 처세술 책에 따라 술수를 발휘,그 회사의 사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브로드웨이의 일급 안무가인 에디 코완이 내한해 출연진에게 탭댄스 워크숍을 실시중이다.서인석,배종옥,허윤정외에 원로배우 고설봉,강계식과 장민호 이순재 김성원 박웅 등 중진연기자들이 출연해 중량감있는 무대를 꾸민다.
  • 민족문화 복원이 광복의 완성/그 50년역사의 교훈/한영우

    ◎이젠 교육·문화의 가치 윗자리에 둘때 역사는 오늘을 위해서 존재한다.광복 50년은 오늘을 위해서 무엇을 말해주는가. 돌이켜 보면 지난 반세기처럼 빛과 그늘이 극단적으로 양립된 시대도 없을 것이다.빛은 경제성장이요,그늘은 인간성·도덕성의 타락이다. 반세기 안에 경제 규모가 1백배 정도 성장한 나라는 동서고금에 없을 것이다.지금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세계 15위권에 들었다고 한다.그래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생겼다.그러나 저 성수대교의 붕괴를 비롯한 대형사고의 빈발과 끔찍한 살인사건들,그리고 환경오염 등은 이 사회가 구석구석 마다 크게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어쩌면 하루도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인재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야 좋은 세상이다.그런데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운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잘 살면서도 품위 없는 나라,아마도 이것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비록 가난했지만 예의와 품위를 지키고 살아왔던 조상,그래서 동방예의지국의 칭송을 들었던 우리가 왜 이런 품위없는 졸부로 변했는가. 근대화철학이 잘못된 탓이다. 전통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서구문명을 접합시켜 법고창신 동도서기의 근대화를 했어야 옳았다.그러나 구한말의 극단적 개화주의자들은 그런 노선을 수구로 몰아버리고 잘 사는 나라를 너무 부러워한 나머지 나라를 일본에 내주었다.그리고 그 맥락에서 해방 후의 근대화정책이 추진되어온 것이다. 옛 사람들은 왕도와 패도를 놓고 수천년간 고민하면서 결국 왕도를 윗자리에 놓고 살아왔다.요즘 말로 하자면 도덕이 더 중요하냐 힘이 더 중요하냐의 갈림길에서 도덕 쪽을 선택한 것이다. 일제에의 패망은 도덕이 힘에 굴복한 것인데 일본의 힘은 더 큰 힘에 의해서 결국 망하고 말았다.20세기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비정한 철학이 지배하여 강자의 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경제제일주의가 표방되고 힘이 정의라는 사고가 팽배하였다. 그래도 구미 열강은 강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건전한 시민윤리를 세워나갔다.그러나 우리처럼 약자의 위치에 선 나라는 도덕이니 명분이니 인권이니 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제쳐두고 오직 힘을 기르는 데만 피땀을 흘려온 것이다.그 결과가 오늘의 품위없는 졸부의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조선왕조를 매도하고 유교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저주하는 경향이 많지만 해방 후의 경제성장도 실은 교육을 중요시해온 유교문화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제시대의 고난은 가난이 전부가 아니다.그 보다는 사람 구실을 못했다는 것이 더 아픈 상처였다.품위를 잃고 살았다는 뜻이다.그렇다면 해방 후 경제건설 못지 않게 품위를 가꾸는 일에도 신경을 썼어야 마땅하다. 해방이 남북분단으로 이어진 데서부터 품위를 잃었다.6·25는 더욱이나 우리 민족 전체의 품위를 떨구었다.부모·형제·친구·이웃을 지상최대의 적으로 삼아 서로 죽이고 비방하고 살아오면서 어찌 사람 구실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일제의 잔재를 청소하지 못하고,민족문화를 당당하게 복원하지 못한 것도 우리가 도덕성을 회복하지 못한 주요이유의 하나이다.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 나라의 최고 가치는 민족정기의 확립이요,이것을 기둥으로 하여 경제건설과 문화창달을 병행했어야 옳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 다음 단추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처음부터 다시 끼워야 한다.큰 명분이 반듯하게 서지 않으면 작은 명분들이 서지 않는다.큰 기강이 무너지면 작은 기강이 흩어진다. 그동안 우리의 근대화정책은 큰 명분과 큰 기강을 세우지 않고 작은 기강과 작은 명분을 요리조리 기술적으로 뜯어 고치면서 임기응변으로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는 가운데 7천만 동포가 남북으로 갈리고,남쪽 동포가 또 동서로 갈리고,동서가 또 다시 계층으로 갈리고,학벌로 갈리고,혈연으로 갈리고,군민으로 갈리고,성으로 갈리고,끝없는 핵분열을 일으켜 온 것이다. 사회는 다양성이 있어야 하지만,그 다양성이 하나로 모아지는 귀일성이 있어야 한다.큰 공동체의 응집력이 있어야 다양성이 활력으로 작용한다.응집력이 없는 다양성은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올 뿐이다.해방 후 우리 사회가 그런 병증을 지니고 살아왔다. 구심력과 귀일성을 가져올 통치철학이 준비되지 않고 공동체적 응집력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효과적 대응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국제화나 세계화는 국가 목표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는 정당하지만 국가 목표 자체가 될 수는 없다.무엇을 위해서 세계화가 필요한 것인지 국민이 확실히 알아야 한다. 경제의 국경이 없어지는 시대일수록 국가 혹은 민족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고 보아야 한다.이제 과거와 같은 저항적 민족주의 시대는 갔다.그러나 남북문제가 여전히 민족문제에 속하고 개방화시대의 치열한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으려면 문화적 민족주의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의 상품은 문화상품이 중심이 될 것으로 예견하는 이가 많다.관광·디자인·홍보 등이 문화와 연관된다.우리의 혼을 담은 상품개발은 경제를 위해서도 좋고 교육적 효과도 적지 않다. 이제 교육과 문화가 윗자리에 서는 시대가 와야 한다.나라의 큰 기강과 명분이 교육과 문화의 중심에 자리잡고공동체의 응집력과 귀일성을 높여야 한다.그것이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지름길이다. 21세기의 국가목표는 품위있는 나라의 건설에 두어져야 한다.그것을 위해서 전통과 세계를 조화시키는 법고창신의 새 기운을 진작시켜야 한다.잘못된 단추는 더 늦기 전에 다시 끼워야 한다.15세기의 세종시대,18세기의 정조시대에 이어 제3의 문화중흥시대를 열어야 한다. 광복 50년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자신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다.
  • 한국의 발전이끈 50인

    1945년 광복 이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어떤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왔는가.서울신문이 광복 50년을 이끌어온 각계인사 50인을 선정,소개한다.북한사람과 외국국적을 가진 사람은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승만◁ 1875.3.26∼1965.7.19.황해도 평산출신.배재학당졸업·미국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초대∼3대 대통령,독립협회등의 간부로 개화운동.일제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는등 광복때까지 해외에서 독립운동.해방직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진영 최고지도자로서 건국준비에 매진.48년 제헌의회의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장기집권을 위해 불법적 개헌을 감행한끝에 60년 4·19혁명으로 하야 한뒤 하와이로 망명했다. ▷김구◁ 1876.8.29∼1949.6.26.황해도 해주출신.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국무령 주석·한국독립당 집행위원·민주의원 총리·국민의회 부주석.일제때 신민회 황해도총감을 시작으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민족주의자.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의사 등으로 하여금 일본왕등에게 폭탄을 던지게 했다.임시정부 주석으로 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뒤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김병로◁ 1887∼1964.전남순창출신.1913년 일본메이지대졸업.일제시절 경성법전·보성전문교수 거쳐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6·10만세운동,원산파업사건 등 민족운동관련사건 무료변론.항일단체인 신간회중앙집행위원장역임.46년 남조선과도정부사법부장을 맡았고 건국후 초대·2대 대법원장을 거치며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조병옥◁ 1894.3.21∼1960.2.15.충남 천안출신·미국 콜럼비아대 대학원 수료·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3년 복역·조선일보 전무·37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복역.해방뒤 우익의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아래서 경무부장을 역임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주에 반발,52년 반독재구국선언을 주도.54년 보수야당을 묶은 민주당을 창당,60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입후보했으나 신병으로 선거 한달전에 미국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신익희◁ 1894.6.9∼1956.5.5.경기도 광주출신.한성공립외국어학교졸·1919년 상해 망명·임정 내무총장·법무총장·48년 초대 국회의원·국회의장·대한국민당 위원장을 역임.54년 자유당정권이 4사5입 개헌등 횡포를 부리자 야당세력을 묶어 민주당을 창당.56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강 백사장유세에 수십만 인파를 모으는등 지지를 받았으나 이틀뒤 전주유세장으로 가던 야간열차에서 사망했다. ▷최현배◁ 1894.10.19∼1970.3.23.호 외솔.경남 울산출신.일신학교·한성고등학교·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경도제국대학졸업.연희전문 교수·문교부 편수국장·한글학회 이사장·학술원 회원역임.국어학 연구·국어정책의 수립·국어운동 추진에 공헌.「우리말본」으로 20세기 전반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글전용을 주창해 각종 교과서에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했다. ▷백낙준◁ 1895∼1985.평북 정주출신.22년 미국 파크대졸.27년 연희전문교수.46∼60년 연세대총장을 역임한 것을 비롯,대한소년단총재·문교부장관·국사편찬위원·국토통일자문회의장·외솔회이사장과 학술원 명예회원 역임.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 헌신하면서 한국기독교 발전을 위해 「한국개신교사」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일한◁ 1895∼1971.평양출신.19년 미미시건대 졸업.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 창설.42년 미육군성고문.44년 로스앤젤레스·뉴욕한미상공회의소회장을 역임.해방 이후에는 대한상공회의소회장을 맡아 우리나라의 산업부흥에 기여했다.또 전재산을 털어 한국고등기술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유한학원을 설립,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본보기가 됐다. ▷윤보선◁ 1897.8.26∼1990.7.18.충남 아산출신.영국 에딘버러대 졸업.대한임시의정원 의원·대한적십자사 총재·제4대 대통령·신민당 총재.이승만대통령 시절 비서실장·서울시장과 상공장관을 지냈으며 「4·19」로 60년 대통령에 취임.그러나 1년만에 「5·16」에 성공한 박정희에 의해 하야당했다.3대국회 이후 야당에 몸담으며 반독재·반군정투쟁을 벌였다. ▷최규남◁ 1898.1.26∼1992.4.27.황해 개성출신.연희전문 수물과·미웨슬리안대·미시건대학원졸.서울대교수·서울대총장·문교부장관·민의원·학술원회원 등 역임.국내 물리학계의태두이자 교육행정가로 큰 업적을 남김.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시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취득.서구의 신물리학을 국내에 도입,한국 물리학계의 초석을 다졌고 원자력발전과 과학기술교육의 기초를 다졌다. ▷우장춘◁ 1898.4.8∼1959.8.10.일본 도쿄태생.동경제대 농학과졸(1919).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채소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을 개발하는 등 해방후 국내 농업발전에 기여.대학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서 18년간 근무하면서 육종학연구.36년 종의 합성설로 동경제대에서 박사학위 취득.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농업연구소장·학술원회원 등을 역임했다. ▷장면◁ 1899.8.28∼1966.5.14.인천출신.미국 맨해튼 가톨릭대 졸.제헌의원·초대 주미대사·60년 부통령입후보 낙선·60년 4·19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60년 당시 민주당 신파의 영수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결과로 촉발된 「4·19」로 총리에 취임.그러나 구파출신 윤보선대통령과 권력암투를 벌인데다가 불안정한 정치로 5·16정권에 쫓겨났다. ▷김활란◁ 1899∼1970.인천출신.이화여전·미웨슬리언대학졸.25년 이화여전교수로 임용돼 해방직후부터 61년까지 이화여대총장을 역임.대학을 운영하면서도 한국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재단이사장·공보처장·대한적십자사부총재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개화기와 해방이후 신여성 교육에 헌신하고 기독교를 통한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함석헌◁ 1901.3.13∼1989.2.4.평북 용천출신.동경고등사범졸.28∼38년 오산학교교사.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교육자·종교인·언론인등으로 활발하게 사회참여를 하며 성서와 노장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저항운동을 편 사상가.자유당 및 군사정권시대에는 반독재자유민권투쟁에 앞장.「뜻으로 본 한국역사」등 저서와 「씨알의 소리」등을 발간했고 민권운동에도 헌신했다. ▷한경직◁ 1902.12.29.평남 평원출신.숭실대·미국 프린스턴대졸.영락교회 목사·숭실대학장·기독교1백주년 기념사업협의회총재·대한예수교 잘로회 총회장 역임.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한국 개신교 부흥에 불을 당긴 성직자.평생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없이 청빈한 삶으로 일관하면서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해왔다. ▷이상백◁ 1904∼1966.서울출신.일본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 졸업.서울 대학교 문과대교수(47).한국사회학회장(57).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서울신문사 체육공로상 수상.일제시대에 일본 농구협회를 창립하고 제11회 올림픽 때는 일본선수단 총무로 참가.광복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결성해 대한체육회 발족에 디딤돌을 놓았으며 64년 대한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64년 한국의 제2대 IOC위원으로 한국체육의 근대화를 이루었다. ▷유진산◁ 1905.10.18∼1974.4.28.충남금산 출신.보성고보졸.일본와세다대학 정경학부중퇴.만주에서 중경임정 연락원활동.46년 대한청년단 창립·자유당정권의 사사오입개헌파동뒤 민주당 창당에 참여.신파로 출발했으나 뒤에 구파로 변신,민주당 원내총무를 거쳐 분당뒤 신민당 간사장·대표위원을 지내는등 정통야당의 맥을 이었다.너무 타협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현실을 감안한 정치력의 달인이었다는 평가가 높다. ▷이병철◁ 1910.2.12∼1987.11.19.경남 의령출신.중동 중학 4년 수료.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과 2년 수료.38년 삼성상회 서립.삼성물산·제일제당·제일모직 설립.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초대 회장.삼성그룹의 창업주로 해방 이후 궁핍했던 시절 소비재산업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일으킨 경제계의 선구자다. ▷이범석◁ 1900.10.20∼1972.5.11.서울 출신.운남육군강무학교기병과졸.만주 청산리전투사령관·한국광복군참모장·초대국무총리·주중국대사·원외자유당부당수·내무부장관·참의원·국민의당 최고위원.항일독립투사로서 해방이후에도 활발한 정치활동을 했다.초대 국무총리로서 국방부장관을 겸임하면서 건국과 건군에 큰공.52년에는 이승만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윤석중◁ 1911.5.25∼.서울 출신.일본 상지대졸.새싹회 회장·난파기념사업회 이사장·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방송윤리위원회 회장·한국방송협회 회장 역임.예술원회원.일제하 소학교시절 일본말 노래가 싫어 우리말 동요에관심을 가진후 평생을 어린이 운동에 몸바친 아동문학가.「초생달」「굴렁쇠」「바람과 연」등 20여권의 동요·동시·동화집을 냈다. ▷성철스님◁ 1912.4.10∼1993.11.4.속명 이영주.경남 산청출신.진주중학 졸업.35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수행.68년 해인사 초대방장,81년 조계종 종정 취임.수행의 깊이와 경전의 섭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로 한국 불교계의 정신적 사표가 됨.16년간의 생식과 8년간의 눕지않는 수행자세,「중답게 산다」는 생활철학등으로 원효 이래 한국불교의 최대 거목이라고 칭송받고 있다. ▷김용기◁ 1912∼1988.경기도 양주출신.농촌계몽등을 통한 민족운동을 위해 40년 양주군에 봉안이상촌 건립.52년 광주군에 가나안 농장을 설립한데 이어 62년 가나안농군학교 설립.73년 강원도 원성군에 신림 가나안 농군학교설립,82년 가나안 농군사관학교설립 등을 통해 농촌의 젊은 일꾼을 양성하고 농촌발전에 큰 업적을 세웠다. ▷김동리◁ 1913.11.24∼.경북 경주출신.경신중 중퇴.청년문학가협회회장·예술원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서라벌예술대학장·국정자문위원 역임.예술원회원.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화랑의 후예」당선으로 등단.단편소설「무녀도」「바위」「황토기」「밀다원시대」「등신불」과 장편 「사반의 십자가」「을화」등 발표.신·인간·자연을 주제로 삼아 특유의 순수문학 세계를 가꾸어 온 한국문단의 대부(대부)이다. ▷김기창◁ 1914.2.18∼.호 운보·서울출신.1930년 승동보통학교 졸업 및 김은호 문하입문.31∼36년 선전 연입선.37∼40년 선전 연4회 특선.69년 국전 심사위원 부위원장.71년 3·1문화상.예술원 회원.근대 한국화의 추상화작업 선도,전통수묵산수를 뛰어 넘어 특유의 바보산수와 청록산수로 한국화의 새로운 미술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정주◁ 1915.5.18∼.호 미당.전북 고창 출신.고창 고보 중퇴·중앙불교전문학교 명예졸업.동아일보 사회부장·문교부 예술과 초대과장·한국문학가협회 시분과위원장·동국대 부교수 역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귀촉도」「신라초」등 시집 14권,「서정주 문학전집」「서정주 시선집」등에 시8백수 수록.「동천」을 비롯,수많은 절창을 통해 민족어를 연마하고 민족심성을 계발한 한국 서정시의 대가이다. ▷정주영◁ 1915.11.25∼.강원도 통천 출신.송전소전학교 졸업.현대그룹 회장·명예회장·대한체육회장·전국경제인연합회장·명예회장·국회의원·국민당 대표.47년 맨손으로 출발,기발한 아이디어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현대를 국내 최대의 기업군으로 키운 「현대신화」의 주역.92년 국민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 나섰다 실패하고 그룹경영에서도 손을 뗐다. ▷장기영◁ 1916.5.2∼1977.4.11.서울출신.선린상고졸.한국은행 부총재·한국일보 사장·IOC위원·한국일보 회장·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대리·국회의원.금융계 언론계 정계등 여러방면에서 활약,「불도저」로 불리기도 했다.54년 한국일보를 창간했으며 초창기 한국체육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경제기획원장관으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고도 경제성장의 기반을 구축했다. ▷박정희◁ 1917.11.14∼1979.10.26.경북 구미 출신.대구사범·육사졸.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제5∼9대 대통령.61년 「5·16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을 종식시키고 군사통치.64년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72년 10월 유신을 거쳐 79년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18년동안 장기집권.몇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한국경제의 기적」을 창출하고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일권◁ 1917.11.21∼1994.1.18.연해주 추풍출신.만주국 군관학교·일본 육사졸업.육군총참모장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해방직후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경비대가 국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군요직을 두루 역임했다.박정희대통령 시절 국무총리·국회의장으로 장기재직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얼굴마담」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김소희◁ 1917.12.1∼.본명 김순옥.전북고창출신.전남여고보 2년 수료.송만갑 정정렬 신호렬로부터 창악 가야금 서예 배움.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역임.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감성에만 치우치지 않는 품위있는 소리로 판소리의 격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살아있는 최고의 명창.전통 국악의 맥을 오늘에 잇고 많은 해외공연으로 전통예술이 국제적으로평가받는데도 기여했다. ▷김승호◁ 1918.7.13∼1968.12.1.서울출신.보성고등보통학교졸.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영화배우 생활 시작.59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63년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시집가는 날」「박서방」「역마」「혈맥」등 2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중년의 서민적 아버지상을 탁월하게 연기,한국영화 붐을 조성하는데 공헌했다. ▷장준하◁ 1918.8.27∼1975.8.17.평북 의주출신.44년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에서 탈영한뒤 광복군에 가담.45년 김구 비서로 귀국.53년 「사상계」창간.67년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제7대 국회의원에 옥중당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사상계」가 폐간된 뒤 75년 등산중 의문의 실족사.6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언론부문)을 받았다. ▷김수환◁ 1922.5.8∼.대구출신.일본 상지대 철학과·성신대학 신학부졸.51년 천주교 신부서품,69년 47세로 최연소 추기경에 서임.아시아주교회의 상임위원장·서강대 재단이사장 역임.천주교 서울대교구장·70년대 유신독재체제하에서는 민주화와 인권운동,80년대에는 인간성회복과 제도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양심의 대변자 역할을 맡아 명동성당을 「한국민주화의 성지」로 만듦.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조남철◁ 1923.11.30∼.전북 부안출신.국수 9연패·패왕 4연패·최고위 7연패등 50∼60년대 각종 기전 석권.83년 9단·37년 도일,바둑수업을 받은 뒤 43년 귀국해 걸음마단계의 현대바둑 보급에 힘쓴 한국바둑의 선구자.84년 일본 대창상,89년 은관문화훈장수상.현재 한국기원 명예이사장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남덕우◁ 1924.10.10∼.경기 광주출신.국민대 정치학과.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경제학박사)졸.서강대 교수·재무장관·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국무총리·무역협회 회장.69년부터 10년간 경제각료로 일하며 부가가치세를 신설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의 기틀을 다짐.71년의 외환위기와 74년의 오일쇼크를 극복,연10%의 고도성장을 이룬 주역이다. ▷김대중◁ 1925.12.3∼.전남 신안출신.목포상고졸업.6선 의원.신민당 대통령후보.80년 내란혐의로 사형선고.87·92년 야당 대통령후보.아시아 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70년대와 80년대 20년동안 낙선과 투옥을 거듭한 강력한 반정부운동 지도자.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뒤 정계를 은퇴.아태재단을 통해 평화·통일을 연구하며 「야당의 후견인」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필◁ 1926.1·7∼.충남 부여출신.육사 졸.초대 중앙정보부장·6대 국회의원·공화당 의장·국무총리·공화당 총재·민자당 대표최고위원.「5·16」의 막후 실력자로 중앙정보부및 공화당의 산파역할과 한·일 회담의 주역을 맡았다.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3선개헌에 반대해 공직을 사퇴하고 외유에 나서면서 「자의반·타의반」이란 말을 남겼으며 반대세력에 밀려 실각도 했지만 결국 박정희의 18년 장기집권을 도왔다. ▷김준◁ 1926.4.25∼.전남 영광출신.49년 서울대농대졸.전남대 농대교수를 역임,62년 재건국민운동 경북지부장,64년 농협대교수 등을 맡으며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활약.입법회의의원·새마을운동중앙본부회장·명예회장 등을 역임.건국이래 최대의 국민운동을 이끌며 「잘살아 보자」는 기치아래 피폐된 농촌 부흥과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박경리◁ 1926.10.28∼.경남 충무출신.진주고등여학교 졸.56년 현대문학에 단편 「흑흑백백」이 추천완료돼 등단.작품집 「불신시대」「환상의 시기」,장편 「시장과 전장」「김약국의 딸들」등.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5부16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26년만인 지난해 완결.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격동기 우리민족의 삶을 다양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이 작품으로 한국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박태준◁ 1927.9.29∼.경남 양산 출신.일본 와세다대.육사졸.최고회의 비서실장.대한중석 사장.포항제철 사장·회장·명예회장.민정당 대표위원.민자당 최고위원.황량한 모래벌판이었던 포항에 세계 2위의 조강능력을 지닌 포항제철을 건설한 「포철 신화」의 주인공으로 「철의 사나이」로 불린다.민자당의 민정계 관리자로 정계에 나섰다가 실패,포철에서도 손을 뗐다. ▷김영삼◁ 1927.12.20∼.경남 거제출신.서울대 철학과 졸.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뒤 9선·신민당 원내총무·신민당 총재·제14대 대통령.최연소·최다선 의원이며 최연소 제1야당 총재.93년 31년만의 문민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한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84년 전두환대통령시절 4주일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며 단식투쟁.대통령취임후 특유의 결단력과 정면돌파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전두환◁ 1931.1.18∼.경남 합천출신.육사졸.예비역 육군대장.국보위상임위원장.제12대 대통령.79년 국군 보안사령관으로 「12·12 사태」를 주도.박정희대통령 서거이후 공백상태이던 권력의 중심부를 장악.80년 「5·18」로 권력의 정상으로 등장한 뒤 그해말 대통령에 취임.재임 7년동안 엄격한 물가관리로 경제안정성장 주도.1인당 국민소득 2배이상 상승.평화적 정권교체 실현. ▷김운용◁ 1931.3.19∼.서울출신.미국 텍사스웨스턴대·연세대 정치외교과 졸.미국 메리빌대 법학박사.주미대사관 참사관(63),IOC부위원장·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세계태권도연맹 총재·국제경기연맹 총연합회 회장.국제 스포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세계 스포츠계의 제2인자.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막후 조정해 한국 스포츠의 이미지를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렸다.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임후보로 꼽히고 있다. ▷노태우◁ 1932.12.4∼.대구출신.육사졸.예비역육군대장.제13대 대통령.「12·12」를 주도.권력핵심부에 진입.제5공화국 때 체육·내무부장관 역임.87년 「6·29선언」으로 민주화의 물줄기를 텄고 그해말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북방외교」로 공산권국가들과 국교수립.지방자치제 일부 실현.90년 여소야대 국면에서 3당통합으로 안정기반 구축. ▷임권택◁ 1936.5.2∼.전남 장성출신.광주 숭일고 중퇴.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 데뷔.「만다라」「씨받이」「길소뜸」등 90여편 연출.8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93년 「서편제」로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감독상.94년 「태백산맥」을 베를린 영화제 본선에 진출시킴.우리영화의 세계화와 한국영화 중흥에 크게 공헌했다. ▷김우중◁ 1936.12.19∼.서울출신.연세대졸.축구협회 회장·한국기원총재·대우그룹 회장·전경련 부회장.샐러리맨(한성실업)에서 연간 매출 35조원의 재벌 총수로 성장.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 기업인상(84년)수상.발로 뛰는 비즈니스로 아프리카등 수출 사각지대를 개척.기업 인수와 부실기업 재건의 명수로 알려져 있다. ▷김지하◁ 1941.2.4∼.전남 목포출신.서울대졸.64년 「서울대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일원으로 학생운동에 참여.6·3사태 관련 첫구속자가 됨.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질곡에 맞서 「오적」「타는 목마름으로」등 문제 시를 잇따라 발표하며 투사 시인으로 활동.최근엔 생명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함께 생명왜곡 현상을 염려하며 「생명사상」에 몰두하고 있다. ▷이미자◁ 1941.10.30∼.서울출신.문성여고졸.67년 무궁화훈장 받음.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59년 데뷔이래 1천6백여곡을 부르고 이 가운데 4백여곡을 히트시켜 「엘레지의 여왕」으로불림.왜색시비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30년 가까이 대중의 정서를 트로트 노래로 대변하며 한국 가요계를 대표해 왔다. ▷김수현◁ 1943.3.10∼.본명 김순옥.충북 청주출신.고려대 국문과졸.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87년∼).67년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한 이후 「새엄마」「사랑과 야망」「배반의 장미」「사랑이 뭐길래」「작별」등 수많은 TV드라마 집필.솔직담백한 표현과 인간심리를 꿰뚫는 듯한 대사처리로 안방극장을 휘어잡은 「언어의 마술사」이자 대중문화시대의 선두주자였다. ▷황영조◁ 1970.3.22∼.강원도 삼척출신.삼척 근덕중·강릉 명륜고·고려대.91유니버시아드(쉐필드).92바르셀로나 올림픽대회.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 1위.한국 마라톤을 세계 정상으로 끌어올린 주인공.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씨의 우승 이후 56년만인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우리 국민들에게 큰 자긍심을 심어주고 마라톤 재건의 계기를 만들었다.
  • 「세계화 원년」 미래로 달리자/김 대통령 신년사

    ◎21세기 신질서 적극 대비/지방선거 가장 깨끗하고 공명하게/남북화해로 통일역양 결집 친애하는 7천만 내외 동포 여러분! 희망의 새해,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국가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는 보람찬 한 해가 되리라는 믿음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세계에는 지금 새로운 질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새해와 더불어 WTO체제가 출범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지역과 지역 사이에 치열한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 우리의 앞날을 개척해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화의 용단을 내리고 「작지만 강력한 정부」로 개편하여 새로운 출발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화는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의 중심에 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 더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경쟁에서 한발 뒤떨어지면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서는 10년,100년 뒤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정부는 물론,모든 국민이 세계화를 본격 추진하는 해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올해는 또한 지방시대가 활짝 열리는 해입니다. 지역주민이 주인이 되어 자율과 창의를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이해 먼저,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로 치러야 합니다. 지방화 없이 세계화가 있을 수 없으며,선거혁명 없이 세계화 또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95년을 우리 모두 「세계화의 원년」으로 만듭시다. 내외 동포 여러분! 올해는 「광복 반세기」를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우리는 숱한 역경 속에서도 민주화와 근대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제 못다이룬 꿈과 더 큰 목표를 향해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비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폐허 위에서 민주와 번영을 이룩했듯이,내실을 다지고 역량을 키워우리의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반드시 성취해야 합니다. 동족간의 불신과 대립이라는 비극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합니다. 세계사의 흐름에 맞게 남과 북은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0세기를 마감하는 또 한해를 여는 이 아침에,저는 지난 세기말 선열들이 가슴에 품었던 「개화」의 열정을 생각합니다. 역사를 바꾸려던 그 큰 뜻은 불행히도 소수 선각자들의 것이었을 뿐,뭉치지 못한 민족 앞에 찾아온 것은 나라 잃은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화」는 결코 일부만의 것,모아지지 않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정부와 국민,중앙과 지방,사회 각계,… 온 국민이 주역이 되는 「참여」의 정신이자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계층과 지역,정파와 세대를 뛰어넘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하는 「단합」의 정신이자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새해 새아침을 맞아 우리 모두 「참여와 단합」의 결의를 새로이 하여 세계로,미래로 함께 달려 나갑시다. 저 역시 취임 당시의 심정과 각오로신한국 창조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하여 1995년이 나라의 선진과 번영,민족의 통일과 영광을 앞당긴 「참다운 광복의 시대」를 열어 나간 해로 기록되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 “기생은 훌륭한 시조시인”

    ◎순천향대 박을수교수 「시화­사랑」서 기생문학 정리/재색 두루 겸비… 연애감정 자유롭게 표현/“우리 문학의 예술성 한단계 높였다” 평가 『평생에 기생된 몸이 부끄러워서/달빛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세인은 내 마음을 알지못하고/오가는 손길마다 추근거리네』 「시화­사랑 그 그리움의 샘」(아세아문화사 간행)에 나오는 계랑이라는 기생의 시다.임을 향한 한마음과 구차한 현실사이에 선 고민이 잘 드러나 있다. 시조연구가 박을수 교수(순천향대)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생들의 시조와 잡문만을 따로 모은 이 책은 양반들과 음풍농월이나 일삼은 것처럼 생각되는 기생이 사실은 얼마나 훌륭한 시조 작가였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지은이는 지난 92년 고려말기부터 개화기까지의 우리 시조를 총정리한 「한국시조대사전」을 엮으면서 기생들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기녀들은 미색과 재주를 두루 갖췄으면서도 미천한 신분때문에 사대부집 규수들한테 열등감을 느끼며 살아가야 했지요.그렇지만 한편으론 양반을 옥죄었던 유교윤리로부터 자유로웠기에 거침없이 남자를 사모하고 그 절절한 심정을 시로 남길 수 있었어요.시조사를 훑어보면서 이 시들이 양반문학에 없는 솔직한 표현으로 우리문학의 예술성을 한단계 높였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기생 시조의 또다른 특징은 책상앞에서 짜낸 것이 아니라 탁 트인 산수를 앞에 두고 양반들과 화창하는 가운데 나왔다는 점.「동인시화」「시화총림」등 옛 문헌을 뒤져 11편의 시화를 실은 이 책은 명시의 현장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재미가 있다. 여러 목석들을 녹여낸 황진이,임금을 사랑한 소춘풍,시를 통해 마음을 주고 받았던 연인 정철과 진옥,늙은 감사대신 젊은 사또의 품에 안기려고 죽음도 감수했던 매화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이들의 절창과 이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시문을 샅샅이 훑어 싣고 30여 페이지에 달하는 각주를 덧붙인 이책은 여류문학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일반독자라면 한편의 연가집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김정일 찬양시 창작 붐(북한 이모저모)

    ○3년새 3백편 쏟아져 ○…북한이 최근 김정일을 찬양하는 시작품 창작에 주력하고 있다고. 김정일 찬양시는 지난 91년 12월 군최고사령관으로 추대한 이후 대대적으로 창작되고 있으며 김정일을 「문무를 겸비한 영장」으로 묘사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지난 3년동안 시인들이 3백여편의 장시,서정서사시,서정시,가사들을 창작,발표했다고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대외국인 서비스 강조 ○…북한은 최근들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외국인들의 방북에 때맞춰 호텔이나 식당 등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소양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를 위해 호텔 종업원이나 관광 안내원들에게 외국인들에 대한 친절과 봉사의 자세를 강조하고 있으며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외국인들에 대한 조국의 인상을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을 실천에 옮기도록 독려하고 있다는 것. ○겨울철 꽃가꾸기 독려 ○…북한은 겨울철을 맞아 각 가정을 대상으로 김일성 추모행사나 김정일 생일에 필요한 꽃을 직접 기르도록 권장하고 있는 것으로 당기관지 노동신문 최근호가 보도. 이 신문에 따르면 북한은 김일성동상 참배시에는 물론 내년 2월 김정일의 생일과 4월 김일성의 생일행사에 필요한 꽃을 각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토록 한다는 취지로 겨울철 꽃가꾸기 요령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는 것. 특히 김일성화와 김정일화의 경우에는 성장조건과 함께 물주기 방법,거름주기 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김일성·김정일의 생일에 맞춰 개화시기를 조절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을 정도.
  • 기업인 유일한(외언내언)

    1971년 3월11일 제약회사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씨가 76세로 타계했을 때 국내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빠짐없이 그의 공적을 대서특필 했다.「육영 사업에도 헌신한 기업가」「맏아들에 한푼없이 자립하라는 유언장을 남긴 고인」「기업이익 사회환원을 신조로 삼아온 창업주」등의 제목으로 유씨의 발자취를 소개했다. 기업인으로서 그만큼 언론의 찬사를 받아본 인사는 없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지금도 기업인의 사표로서 나무랄데가 없다는게 경제계의 중론이다. 일찍이 개화된 부친의 엄명에 의해 귀국하는 선교사를 따라 10세때 도미했던 유씨는 고학으로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했고 학창시절 미식축구선수이기도 했다.동양인으론 처음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업했으며 식품회사로 큰 돈을 번 그는 26년 귀국,유한양행을 세워서 당시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던 일반서민을 위해 약효가 높은 제품을 싼값에 공급했다.네오톤제품의 경우 6·25동란 이후까지 영양실조 상태의 많은 서민들에게 귀한 영양제로 쓰인 사실을 기억하는 중년이후 사람들이 적잖을 듯하다. 유씨는 한때 정치적인 이유때문에 한달동안 세무사찰을 받았으나 한푼의 탈세사실도 드러나지 않아 조사관들을 탄복케 한 일화가 있다.또 직원들이 창의적인 업무를 시도하다가 회사에 피해를 끼쳤을 때 징벌함이 없이 오히려 격려하고 보너스를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발전과 개선의 잠재성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요즘 말로 복지부동을 매우 혐오했다는 얘기다. 처음으로 컴퓨터를 들여오고 기업공개에 앞장서는 등 자본주의사회의 참된 기업인으로 살았던 그는 전재산을 유한공고 연세대보건장학회 YWCA등에 기증했다.유일한박사 탄신1백주년 기념사업회와 경영사학회가 내년 1월15일 그의 출생 1백돌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인다고 12일 발표했다. 우리기업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었음을 되뇌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하는 것이 오늘의 재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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