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정치의 시련(대한민국 50년:9)
◎49년 무장경찰대,국회반민 특위 습격 폭거/친일파 대거 구속되자 이승만 “특위활동 중지” 지시/‘프락치사건’국회부의장 등 15명 무더기 구속 사태도
이승만 한사람의 고집으로 하룻밤새 의원내각제가 대통령제로 바뀌기는 했어도 대한민국 의정 50년의 문을 연 제헌국회는 정치의 중심무대였다.1948년 5월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향했다.필요한 권한이 주어졌고 의사진행은 민주적이었다.의원들간에 횟수경쟁이 벌어질 만큼 발언도 자유로웠다.이승만 대통령도 국회의 건의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국회에 출석,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주요법안 심의때는 정부의 입장을 직접 설명하는 등 국회를 존중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초대내각 구성에서 원내 최대정파인 한민당을 배제한 것을 계기로 정부와 국회는 불신과 갈등의 관계로 접어들었다.의정 초기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대부분 국회의 승리로 귀결됐다.
○지방자치법 폐기 일방통고
1948년 8월에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계속된,지방자치제 실시여부를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국회가승리를 거둔 것은 당시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 우위의 정치구도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이때만 해도 정부와 국회의 대결은 권한의 유무나 헌법의 해석 등 입헌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방자치 문제에서의 패배를 고비로 정부는 이 틀을 깨려 들었다.정부는 국회가 폐회하기를 기다려 1948년 5월12일 지방자치법 폐기를 일방통고했다.정부의 재재의 요구가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자치법은 계류중인 상태였으며 따라서 국회의 폐회로 자동폐기됐다는 게 정부측이 내세운 어거지 논리였다.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은 노골적인 국회탄압에 나섰다.갓 싹을 틔운 의회민주주의에 시련이 시작됐다.
제헌국회때 정부와 국회간 대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문제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의 전개와 결말은 이후 대한민국 의정 50년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 잣대로 작용했다.일제하의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벌문제는 농지개혁과 함께 건국이후 떠오른 최대과제중의 하나였다.국회는 헌법제정과 내각구성을 마친 직후인 1948년 8월5일 이를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고 한달만인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이에 따라 국회내에 특위가 설치되고 법원과 검찰에는 특별재판관,특별검찰관으로 구성된 특별재판부가 구성됐다.특위활동은 이듬해 구체화해 49년 1월8일 친일자본가 박흥식을 필두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속속 체포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에 나서자 정부내 친일파세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저항의 선두에는 행정및 정치적 기반을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승만이 섰다.이승만은 특위활동이 활발해지자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는 특별담화 발표(1월10일),체포된 친일경찰 노덕술에 대한 석방요구(1월24일),반민법 개정안 제출(2월15일),반민특위 활동의 중지 및 특경대 해산 지시(4월16일) 등으로 특위를 계속 압박했다.
○“남로당과 연결” 전격 구속
그럼에도 특위가 6월4일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종로서 사찰주임 조응선을 체포하는등 고삐를 늦추지 않자 이틀뒤 무장경찰대가 반민특위를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당시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다.정부와 국회가 극한대결로 치닫던 5월20일 소장파의원 3명이 국가보아법 위반 혐의로 전격 구속됐다.이유는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이어 8월14일 소장파의 좌장격인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의원 12명이 추가구속됐다.
이같은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의활동 및 이후 정부와 국회의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사건의 정치적 배경은,당시 수사총책인 검찰총장 권승렬이 국회에서“이사건에 물적 증거라는 것은 없습니다마는…,다소는 있습니다마는…,대개 물적 증거가 박약한…서로 연락해서 논의한 사건은 사람의 말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밖에 없습니다”(49.5.23 국회속기록)고 한 보고에서 유추해 볼 수있다.그때 미국·영국 등 주요 우방은 반민특위 습격과 국회프락치사건을 ‘이승만의 뜻’으로 보았음이 최근 발굴한 자료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어쨌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입법부 우위를 떠받쳐온 힘의 원천인 소장파의원들은 몰락하고 소장파가 주도한 반민특위 활동도 마찬가지로 힘을 잃게 됐다.또 이 사건은 정부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친공으로 몰아 제거하는길을 트는 출발점이 됐다.국회는 반민족행위의 공소시효를 단축하는 개정안을 7월6일 이승만의 요구대로 통과시켰고 이로써 반민특위 활동은 사실상 전면중지됐다.
소장파가 제거된 이후 국회는 원내 제1세력인 민국당이 중심이 되어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했다.하지만 개헌은 1950년 3월14일 국회에서 부결돼,국회의 패배로 결말나고 이를 고비로 국회우위 시대는 종식을 맞았다.
○“행정부 견제” 내각제 추진
제헌국회 2년새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민주정치의 기반인 국회의 행정부종속을 초래,행정부 만능인 권위주의 통치가 이땅에 뿌리내리는 씨앗이 됐다.그결 과 비상계엄령과 백골단 등에 의한 공포분위기 속에 기립표결로 헌법을 바꾼 2대 국회의 발췌개헌,민의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을 소수점으로 계산한 3대국회의 사사오입개헌 등 파행이 이어지다 끝내 1961년 5·16 군사쿠데타,72년 유신,80년의 군사쿠데타 등 세 차례 헌정중단의 비극으로까지 연결됐다.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시대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다양한 정파로 구성됐지만 친일파와 지방자치 문제의 처리에서 보듯 초정파적 단결력으로 정부를 제압하는 힘을 과시했다.사안에 따라 연합과 대립의 관계를 형성,민의의 대변기구로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와 갈등을 신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었던 셈이다.이런 점에서 제헌국회는 의회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소중한 경험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49년의 일련의 사태는 이러한 가능성을 좌절시킴과 동시에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공간,즉 정치민주화의 폭을 크게 제약했다.반세기 가깝게 우리 정치를 옥죄어온 권위주의 체제는 이때 이미 싹튼 것이다.
◎미 “국회 프락치사건 이승만의 뜻”/미군정 사법부근무 프란켈 보고전문서 확인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된 입법부의 독립에 관해 자기중심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인식을 가졌다.
미군정 당시 사법부와 경제협조처(ECA)에 근무한 에른스트 프란켈은 국회프락치사건을주의깊게 관찰한 결과를 에버렛 드럼라이트 주한미대사관 참사관에게 전달했다.국회프락치사건 재판이 한창 진행중인 1950년 3월22일 드럼라이트는 미 국무부에 프란켈의 보고를 전문으로 보냈다.
이 보고에서 프란켈은 재판의 공정성과 관련해 “검사는 고문에 따른 자백에 의존하고 판사들은 변호사가 신청한 증인채택을 거부하는 등 재판이 편향되게 진행됐다”고 주장했다.이어 “재판장은 기소된 의원들이 비록 ‘좋은’일을 했더라도 남로당 지시에 따른 것이라면 불법”이며 특히 “미군철수를 요청하고 국군의 북진통일을 반대한 것은 범죄”로 보았음을 밝혔다.
프란켈은 또 이승만을 “자신의 권위와 지도력을 보장하는 한 국회를 구성한 정당과 개인들이 어떤 주장을 제기해도 수용한 반면 분단에 관련한 문제나 체제기반을 침식하는 정치적 반대활동은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결국 미국은 애초부터 국회프락치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파악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한편 이보다 앞서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발생한지 나흘뒤인 49년 6월10일 영국의 서울총영사 C. 홀트는 어네스트 베빈 외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 본부 습격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미·영 양국의 주한 외국관들이 본국에 보고한 이같은 내용들은 그동안 일부에서 제기해온 국회프락치사건의 행정부 작위설을 뒷받침하는 귀중한 자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