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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해 8월말까지 내각제논의 중단

    국민회의총재인 金大中대통령은 9일 청와대에서 자민련 명예총재인 金鍾泌국무총리와 단독회동을 갖고 내각제 개헌 논의를 오는 8월 말까지 전면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金대통령은 단독회동에 이어 곧바로 金총리를 포함해 국민회의 金令培총재권한대행과 자민련 朴泰俊총재 등 여권 수뇌부와 조찬을 겸한 회동에서 이같이 밝혔다고 朴智元청와대대변인이 발표했다. 金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내각제에 대해선 양당이 자제해야 하며 말할 때말해야지 미리 나오는 것은 양당간 공조를 저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뒤 “최대 급선무는 정치개혁이므로 양당이 정치개혁에 대한 단일안을 마련,국민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金총리는 이에 “(내각제에 관한) 양당간 합의사항은 살아 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무엇보다 급선무는 정치개혁이므로 8월 말까지 일절 내각제를논의하지 말기 바란다”고 밝혔다.또 “朴총재가 자민련 의원들과 자리를 마련해주면 내각제 문제에 관해 확실히 얘기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金총리는 빠르면 다음주 초 소집될 자민련 의원총회에서 내각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金대통령은 또 “양당은 강력한 공조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며 “정치개혁안에 대한 양당의 협의가 잘 되지 않으면 우리 네사람이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이어 “양당은 젊은세대를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며 “이는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노·장·청 모두의 승리를 위한 노·장·청의 조화”라고 역설했다. 金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金총리와의 단독회동에서 국회 ‘부결파동’의근본적인 처방을 위해 16대 총선에서의 인재수혈 문제를 논의했다는 것을 시사한 대목으로 주목된다.이 자리에서 국민회의 金대행은 자신의 합당 발언에 대해 사과했으며,金총리는 “어떤 경우에도 서로 공조에 금이 가는 언행을일절 말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金대통령과 여권수뇌부는 회동이 끝난뒤 ▒체포동의안 부결은 국회의 사명과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처사이며,▒양당의 공조를 더욱 강화하고 ▒돈 안들고 깨끗한 선거풍토 정착 등 정치개혁을 위해 양당이 조속히 단일안을 만들며 ▒송파갑과 계양·강화갑 재선거는 모범적인 선거가 되도록 솔선수범하고 ▒추경예산안·정부조직법 등 국민생활과 직결된 안건을 조기처리한다는등의 5개항의 발표문을 냈다. 한편 회동에서는 자민련 朴총재가 사의를 표명했으나 金총리가 이를 만류했다고 朴대변인이 전했다.
  • 여권수뇌부 내각제논의 중단 결정 안팎/여권수뇌부 대화록/발표문

    金大中대통령이 9일 金鍾泌총리와의 만남에서 내각제 논의를 8월 말까지 전면 중단하기로 한 것은 정치적으로 여러 의미를 갖는다.朴泰俊자민련총재,金令培국민회의총재대행도 함께한 자리에서 이뤄진 합의라는 점도 상징성을 갖는다. 정치개혁 논의가 권력구조개편 논란에 앞서야 한다는 여권 수뇌부의 공동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徐相穆파동’은 역설적으로 위기 국면때 여·여 공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날 청와대 4자모임에서 金총리는 내각제 논의 중단과 관련,“2∼3개월 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金대통령의 발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8월 말까지 논의 중단’을 직접 제의했다.이 합의는 현실적으로 내각제 개헌이 올해안에 추진되기 어렵다는 ‘묵시적인 동의’로 여겨진다.9월부터 내각제 논의에 들어가면 정기국회가 겹쳐 연내 개헌은 물리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내각제가 사실상 물건너갈 공산이 있지 않느냐는 해석도 성급하게 나오고 있는실정이다. 金대통령은 앞으로 정치개혁에 힘을 실으면서 여·여공조강화와 정국주도권 확보를 위한 여러 구상을 가다듬을 것으로 보인다.설익은 문제제기 단계인 합당이라든가 16대 연합공천,공천지분 배분 등 여러 가능성이 점쳐진다. JP로서도 ‘내각제 논의 유보’를 담보로 자신의 정치적 운신이나 16대 총선에서의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내각제의 묘미는 캐스팅 보트에 있다”고 여기는 金총리가 합당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지금처럼 50여석만 확보하고 있으면 어떤 세력과도 연합해 정권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권의 공동운영자라는 위치를 버리고 통합당의 유력인사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필요가 없다는 게 주위의 설명이다. 여러 차례 부인에도 불구,국민회의 金令培총재대행이 내각제 돌파를 위해 합당추진을 실행에 옮길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이런 정치적 계산 속에서 양당은 성숙된 공조관계를 다시 세워 정치개혁에매진할 채비다.자민련 朴泰俊총재가 이날 전격 당직개편을 단행한 것도 ‘4·7파동’ 후유증을 조기에 차단,국민회의와 새 공조의 틀을 닦으려는의지의 일단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선거구 선호 등 정치개혁에 대한 여권 수뇌부 의견이 다르고 시각차가 큰 야당과의 협상이 남아 있어 정치개혁의 진전은 불투명한 상황이다.이경우 金대통령은 노도(怒濤)와 같은 시민단체의 압력을 무기로 ‘위로부터의개혁’을 전격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 여권수뇌부 대화록 金大中대통령과 金鍾泌국무총리,국민회의 金令培총재권한대행,자민련 朴泰俊총재가 9일 청와대 조찬회동에서 나눈 주요 대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朴총재 이번 국회 표결처리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국민회의 趙世衡총재권한대행이 사의를 표명,교체됐는데 자민련총재인 나도 가만 있을 수 없다.총재직 사의를 표명한다. 金총리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사의를 철회하고 더욱더 책임을 가지고 잘 하자. 金대행 막중한 임무를 부여해주셔서 감사하다.분골쇄신해서 열심히 일하겠다.보도된 합당론은 대행 지명 이전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이런 것이 보도돼 물의를 빚어 대단히 죄송하다. 金총리 양당은 어떤 경우에도 공조에 금이 가는 언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 金대통령 첫째,강력한 양당의 공조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비온 뒤에 땅이더 굳어지듯 양당은 공조를 강화함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둘째,내각제문제에 대해서는 양당이 자제해야 하고 이것을 말할 때 말해야지미리 나오는 것은 양당의 공조에 저해된다.셋째,무엇보다 최급선무는 정치개혁이므로 양당이 정치개혁 단일안을 마련해서 국민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넷째,정치개혁안을 양당이 협의하면서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 네 사람이 모여서 정치개혁안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다섯째,양당은 젊은 세대를 과감히 영입해야 한다.이것은 세대교체의 의미가 아니다.양당이 메워야 할 자리에 젊은 세력을 영입하면 노장청의 조화를 이뤄 노·장과 청,모두가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朴총재 내각제에 대해서는 두 분이 확실한 말씀을 해주어야만 양당 내에잡음이 해소될 것 같다. 金총리 지금 양당간 합의사항은 살아 있다.그러나 8월 말까지 일절 양당에서 논의하지 말기를 바란다.양당은 무엇보다 급선무가 정치개혁이므로정치개혁에 역점을 두고 나가야 한다.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다녀간 뒤 朴총재가 자민련 의원들을 모아 자리를 마련해주면 내가 나가서 내각제에 대해확실한 이야기를 하겠다. 金대행 8월 말까지 내각제를 논의하지 말자는 총리의 말씀을 대외적으로발표해도 좋은가. 金총리 좋다. 金대행 표결결과에 대해 공동여당간에 어느 쪽이 이탈이 있었느냐는 언동은 일절 없도록 해야겠다. - 여권수뇌부 회동 발표문 1.지난 4·7 국회의원 체포동의안이 부결된 것은 국회의 사명과 국민의 여망을 저버린 처사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 2.공동여당이 이번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데 대해 깊이 자성하면서 이를 계기로 양당간 공조를 더욱 강화하고 모든 현안을 더욱 긴밀히 조율해 나감으로써 국정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기로 했다. 3.지난 3·30 재·보궐선거와 4·7 체포동의안 처리는 정치개혁의 절박성과 시급성을 재확인한 것으로서 돈 안들고 깨끗한 선거풍토의 정착,정치자금의 투명성 강화,정당운영의 획기적 쇄신 등 정치 전반의 개혁을 위해 양당이조속히 단일안을 만들어 야당과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4.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추경예산안·정부조직법·규제개혁 입법 등은 국정운영과 국민생활에 직결된 안건인 만큼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양당이 적극 노력하기로 했다. 5.앞으로 있을 송파갑,계양·강화갑 재선거가 모범적이고 깨끗한 선거가 되도록 공동여당이 솔선수범하기로 했다.
  • ’부결파동’후 與與공조

    金大中대통령이 국회 체포동의안 부결파동에 따라 국민회의 지도부를 인책하고 곧바로 ‘DJP 단독회동’을 갖기로 하는 등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수습에 나선 것은 공동정권에 대한 국민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또 당내 안정을 꾀하지 않고서는 정치개혁입법 등 산적한 정치현안과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깊은 불신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나아가 공동정권의 결속력을 다잡지 않으면 대야관계를 포함,원활한 국정운영을 보장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金대통령의 이같은 수순은 책임정치에 기초하고 있다.집권 2차연도인 올해초부터 보이기 시작한 인사스타일의 변화에서도 읽혀진다. 金正吉정무수석도 “이런 일이 있고도 책임을 묻지 않으면 앞으로 어렵다고생각한 것 같다”고 말해 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金대통령의 현 수습책은 단기적인 처방의 성격이 강하다.당장 공동정권의 기본 틀이 무너질 경우,안정적인 정국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태생적·현실적 한계를 인정한 결과로 분석된다.다시 말해 우선은 당을 안정시키고,동요하는 공동정권의 틈새를 막는 것이 시급하다는 상황인식의 발로인 셈이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의 한 관계자도 “대통령이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공동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이번 파동으로 느낀 金대통령의 장기구상은 무엇일까에관심을 쏠릴 수밖에 없다.아직 ‘20표의 반란표’가 조직적인 반발인지,아니면 개인차원의 불만표시인지 파악되지 않았으나 이대로는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정국운영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국회가 앞으로 남은 임기동안 사사건건개혁의 발목을 잡지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더욱이 내년 4월 총선 이후 정치권은 ‘3金 이후의 정국구도’로 급격히 변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없는 상황이다. 청와대와 당내 일각에서 내각제에 대한 조기 담판론이 제기되고,정치개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특히 국민회의 金令培총재권한대행 지명자는 대표적인 국민회의·자민련 합당론자로 그의 지명배경과 맞물려 향후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내각제 개헌’이 공동정권의 기초를 흔드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까닭이다. 따라서 내각제 문제에 대한 金대통령의 구상이 정리되면 정치개혁입법 추진과 국민회의 전당대회,그리고 대규모 당정개편 등도 덩달아 앞당겨질 공산이 크다.朴智元대변인이 “이번 파동은 국회의 사명과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불신을 가중시키는 것”이라면서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위해 적극적이고 강력한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쨌든 金대통령이 조기봉합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정국구상을 근본적으로재검토하는 계기로도 작용할 게 틀림없다.
  • [특별기고]’徐相穆의원 체포안 부결’을 보고

    우리 헌정사 50년을 통해서 국회가 국민의 뜻에 반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반(反)역사적 결정들을 더러 해왔었다.예를 들면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부산에서 李承晩정권의 연장을 위한 이른바 발췌개헌안 통과,역시 李承晩정권과 朴正熙정권 연장을 위한 3선개헌,이른바 유신헌법 통과,한·일협정 비준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국회의 이같은 반역사적 결정은 헌정사 위에 영원히 남을 것이요,찬반을 막론하고 이들 결정에 참가한 국회의원들의 이름도 따라 남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때문에 한·일협정 비준때는 반대해도 통과될 것을 안 일부 의원들이 기어이 국회를 떠나기도 했다.국정을 다루는 사람들은 결국 역사적 심판을 받게 마련이며 역사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인동시에 비할데 없이 무겁고 엄숙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국회는 이번에 국세청을 통해서 대통령선거자금을 거둔 장본인 국회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부결하는,또 한번의 엄청난 결정을 했다.체포동의안이 부결된 사실에 대해서는 두가지 측면에서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 하나는 국세청을 통해서 대선자금을 거둔 사실을 국회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 할수 있고,둘째는 국세청을 통해서 대선자금을 거둔 사실 자체를 국회가범죄행위로 볼 수 없다는 말이 될 수 있겠다. 국세청을 통해서 대선자금을 거두었는가,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검찰이 밝히고 또 법원이 판정할 일이다.검찰이 몇달을 두고 꾸준히 체포·조사를 기도한 것을 보면 사실을 충분히 확인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지만,만약사실이 아니라면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이므로 일단 검찰에 맡길 일이다.그럴리 없다고 믿고 싶지만 국회가 국세청을 통해 대선자금을 거둔 사실 자체를범죄행위가 아니라고 보아 부결시켰다면 좀 심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국회가 자폭을 하거나 국민들이 국회해산운동이라도 일으켜야 할 것이다. 문제의 중요성은 정부와 여권이 이 체포동의안을 가결시키려 했는데도 부결되었다는 점에 있다.金大中 국민정부가 단독으로 성립되지 못하고 일부 보수세력과 연합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우리 국민적·역사적 한계성이라고 할수밖에 없다.金大中정부의 개혁정책이 도처에서 막히는 것이 안타깝고 실망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지만 민주성과 개혁성이 강한 金大中정부가 단독으로 성립되지 못한 국민적 책임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적 상황이 아니고 개혁세력 단독으로 정권이 성립될 상황이 못된다면일부 보수세력과의 연합정부가 성립될 수 있으며,같은 여권이면서도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사이에 정견이나 정책의 차이도 있게 마련이다.그러나 국세청을 통해 선거자금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개혁이니 보수니 하는 문제 이전의그야말로 국기를 흔드는 범죄문제다.정치적 성향이나 정책적 차이를 꼬투리로 범죄사실을 비호할 수 있는 정도라면 국정을 다루는 위치에 오를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대통령이니 장관이니 국회의원이니 하는 사람들은 사회구성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역사앞에 발가벗고 나선 사람들이다.개인이나 당파적 이익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되거나 반역사적 노선에 서게 된다면,법률의 심판보다 훨씬 엄격하고 또 오래 가는 역사적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한나라당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이 국회 제출 7개월만인 7일 본회의에서 여야 표결에 붙여 졌으나 부결됐다. 여야 의원 292명 가운데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 156명이 참여한 이날 표결에서 가(可)표는 과반수에 못미치는 136표에 그쳐 공동여당 내에서 최소한 20명 이상이 반란표를 던졌으며 자민련측이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이와 관련,공조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으나 내각제 연내 개헌문제 등을 놓고 향후 공동여당 운영과정이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특히 국회가 ‘세풍(稅風)’이라는 위법 사건 처리를 정치적으로 막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으며 정치개혁의 차질 가능성도 지적된다. 국민회의 韓和甲총무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는 등 공동여당 지도체제 개편여부가 주목된다. 朴相千법무부장관 해임건의안,金泰政검찰총장 탄핵소추안 등 2건도 부결됐으며 ‘IMF 환란원인 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를 위한 국정조사결과보고서채택의 건’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퇴장속에 통과됐다. 한편 한나라당은 ‘3·30 재·보선’과 관련,부정선거조사특위 1차 회의를갖고 장외집회 개최 등 향후 투쟁방향을 논의하는 등 대여공세를 강화할 움직임이어서 여야 경색정국이 심화될 조짐이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오는 9일부터 단독소집한 제203회 임시국회에서 실업대책 및 어민지원을 위한 2조6,5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안과 민생법안 심의에는 응하기로 해 국회가 부분적으로는 정상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 2與공조 大尾는 합당인가

    한동안 잠잠하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정치개혁,내각제 문제,16대 총선 대비 등 공동여당의 현안을 일거에 해결하기위해서는 ‘합당’외에는 묘책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국민회의가 보다 적극적이다.합당론자인 金令培부총재는 “정치제도개혁,내각제개헌,16대 총선 등 현안들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두 당이 하나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그는 또 “자민련 안에도 충청권 일부 의원을 제외한 절반 이상이 합당론에 동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安東善지도위의장도“金大中대통령과 金鍾泌총리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겠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합당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청와대의 움직임과 두 당의 공조에서도 이같은 기류가 읽혀진다.내각제 문제와 관련,金대통령은 ‘2∼3개월 후 기약’을,金正吉 청와대 정무수석은 ‘8월까지 가닥’을 예상했다.‘내각제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합당이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합당론은 金대통령이 3·30 재보선 당선자 면담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공조하면 이기고,그렇지 않으면 진다는 것을 보여 줬다”고 밝히면서 더욱 탄력을 받는 느낌이다.이 자리에 합당론자인 金令培부총재가 함께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두 당이 공고한 공조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합당의 전조로 보는 시각도 있다.
  • 與, ‘총리·장관 사퇴않고 의원출마’ 선거법 개정 검토

    여권은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이 현직을 유지한 채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1일 알려졌다.이같은 방안은 金鍾泌국무총리가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도 계속 총리직을 수행한다는 여권핵심부의 합의에 따라 추진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金大中대통령과 金총리가 오는 8월쯤 내각제 개헌과 관련한 합의에이르더라도 그 구체적인 추진시기는 내년 총선 이후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여권은 이를 위해 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 규정된 입후보공무원의 선거일 60일전 사퇴 대상에서 총리와 국무위원은 제외하는 방안을검토중이다.金총리는 내년 전국구의원으로 출마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李度運
  • ‘선거제도 개혁’ 밑그림 한창

    ‘3·30 재보선’이 끝남에 따라 정치개혁 협상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여야가 ‘결전’을 앞두고 세미나를 여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가운데 정치개혁의 핵심이랄 수 있는 선거제도에 관한 ‘가닥’이 조만간 잡힐 것 같다. ●여당-국민회의와 자민련은 ‘8인 정치개혁특위’를 조속히 가동,단일안을마련한다는 계획이다.국민회의가 그리고 있는 개혁안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와 소선거구제이다.그러나 여야 협상 과정에서 중·대선거구제의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거나 합의가 도출되면 일부 수정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자민련은 의외로 사정이 복잡하다.‘내각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1일 오전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당 정치개혁특위위원장인 金宗鎬부총재 주재로 특위를열고 빠른 시일 안에 실무안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험로(險路)’가 예상된다. 선거구제에 관한 당론 결집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텃밭’인 충청권 의원대부분이 소선거구제를 선호하는 반면 비충청권과 다선(多選) 의원들은 중·대선거구제를 선호하고 있는 실정이다.국민회의가 내건 정당명부제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해왔으나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다소 신축적인 자세도 엿보인다. ●한나라당-선거구제에 대해 서서히 ‘공론화’를 시도하고 있다.정치구조개혁특위(위원장 邊精一)가 이날 국회에서 李會昌총재와 당 소속 원내외 위원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선을 위한 토론회’를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여기서 나온 의견을 종합,당론을 확정한다는 계획이다. 숭실대 姜京根교수와 영남대 成樂寅교수의 주제발표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열띤 토론을 벌였다.재선으로 서울시지부장인 朴明煥의원은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주의 완화,정치의 정체성 해소,사표(死票) 최소화 등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찬성했다.반면 부산 출신의 초선인 鄭義和의원은 “소선거제도하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국정운영을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면서 “여당이 ‘동진정책’ ‘전국정당화’ 등을 표방하면서 갑자기 선거구제도를들고나오는 것은 정략적 술수”라고 꼬집었다. 吳豊淵 朴峻奭
  • 金正吉수석, 내각제 8월까지 가닥

    金正吉 청와대 정무수석은 31일 “오는 8월까지는 내각제 문제의 가닥이 잡혀 올해안에 매듭될 것”이라고 말했다. 金수석은 국무총리실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앞으로정국을 풀어나가는 핵심은 여야관계보다 金大中대통령과 金鍾泌총리간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金수석은 이어 “내각제보다는 정치개혁이 더 쉬운 문제이며,정치개혁부터먼저 하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정치개혁은 8월이전에 끝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수석은 金대통령이 최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내각제 문제는 2,3개월 지켜보자’고 말한 것과 관련,“상반기중에는 내각제 논의를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조한 말”이라고 설명했다. 金수석은 ‘3·30 재·보선이 끝남에 따라 자민련측의 내각제 공세가 강화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충청권 의원 가운데 그런 주장을 하는 강경론자들도 나오겠지만 세를 몰아갈 정도는 아닐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金수석의 이날 발언을 종합하면 7월부터 내각제 논의를 시작해 늦어도 8월까지는 ‘내각제 개헌연기’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 재·보선 이후 정국-청와대의 구상

    ‘3·30 재·보선결과’에 대한 청와대의 시각은 황금분할이다.그래서인지결과에 대한 정치적 분석은 없다.대신 선거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어떻게 정치개혁입법으로 연결시키느냐에 관심이 쏠려 있다.金大中대통령도 “재·보선에 중앙당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국민회의 趙世衡총재권한대행이 기자회견에서 서울 송파갑과 인천 계양·강화 재선거때는 중앙당이 일체 개입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이의 연장이다. 이처럼 청와대는 낮은 투표율을 고리로 정치개혁입법을 서두를 태세다.국민의 무관심을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실망의 반증으로 읽고 있다.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도 “정치개혁입법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명령”이라고 해석했다. 이는 金대통령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정치개혁의 강도와 속도를 더할것으로 관측된다.큰정치를 위한 여야 총재회담의 합의사항이기도 하지만,먼저 공동여당의 단일안 마련을 독려할 것으로 보인다. 선거에 임박해 개혁입법을 서두를 경우 의원들의 이해관계로 표류할 공산이큰데다,또 전례를 보면 합의가 이뤄져도 시간에 쫓겨 ‘누더기’가 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한 관계자는 “정기국회 이전에 합의돼야 국민회의 전당대회 등을 치를 수 있고,예산국회 역시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金대통령 구상의 다른 하나는 젊은층 수혈론의 시험 여부다.시흥 보선과 안양시장 재선에서 보여줬듯이 ‘새로운 인물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드러났다고 봐야 한다.집권여당의 총재로서 이를 송파갑과 인천 계양·강화 재선에 어떻게 접목시킬 것인지가 주요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이미 실무진에서 구체적인 인선작업에 착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이 내각제 개헌문제다.대선 당시 협상창구였던 韓光玉부총재가 구로을 재선을 통해 국회에 복귀함으로써 자민련과의 물밑대화에 힘이 실릴 것으로 관측된다. 韓부총재 역시 ‘역할 중시론자’로 대타협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하려 들 게 분명하다.이는 8월 국민회의 전당대회와 얽혀 중진들의 향후 당내 위상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 내친김에 합당을

    자민련은 31일 잔칫집 분위기다.시흥 보선에서 승리를 따내자 고무됐다.정권교체 이후 수도권에서 거둔 첫 승리다.불모지에서 ‘금배지’를 일궈냈다며 흥분했다.특히 여여(與與)공조에 만족해 했다.선거운동 과정에 국민회의측 지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민련은 자축행사를 가졌다.朴泰俊총재는 “공조를 철저히 하면 어떤 황무지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몇차례나 말했다.당선된金義在후보는 국민회의 당사를 찾아 인사했다.국민회의 鄭均桓사무총장은 “여여가 뜻만 맞으면 어떤 사안이든지 해낼 수 있음을 확인했다”고 화답했다. 이번 승리는 자민련내 두 기류를 더욱 선명하게 해놓았다.무엇보다 수도권에서 여여공조의 위력을 확인했다.영남권에서도 힘을 합치면 손해는 안된다. 비충청권 세력들은 국민회의와의 연합공천이 더 절실해졌다.양당 합당론 동조분위기로 확산될 기류가 엿보인다. 주류인 충청권은 다르다.내각제를 위한 전열이 흐트러질까 우려하고 있다. 국민회의를 적(敵)으로까지 본다.내각제 개헌론에 관한 한 그렇다.비주류인비충청권은 동지관계를 원한다.내각제 추진력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된다. 반면 비주류측에는 차선의 선택도 가능하다는 기류가 있다.여여 공존이 더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를 둘러싼 내홍(內訌)은 더 깊어질 조짐이다.6월 전당대회,국민회의와의 정치개혁 협상 등은 그 촉매들이 될 전망이다.
  • [제2공화국과 張勉](10)신구파 대립과 分黨(中)

    1960년 민주당은 좌절 속에서 출발한다.대통령후보인 趙炳玉이 신병치료차미국에 갔다가 2월 15일 현지에서 별세한 것이다.선거법상 후보를 교체할 수 없었으므로 민주당은 4년 전 申翼熙의 서거에 이어 또다시 대통령후보 없는 선거를 치르게 됐다. 홀로 남은 張勉부통령후보는 ‘3·15 부정선거’에서 자유당 李起鵬후보에게 패한다.득표 결과가 ‘李起鵬 833만표,張勉 184만표’라는,자유당 사람들 스스로도 너무 심했다고 인정한 부정선거였다. 분노한 국민은 ‘3·15 마산시위-4·11 제2차 마산시위-4·19 전국시위-4·25 대학교수단시위’로 이어진 4월혁명을 이룩해냈다.4월 27일 李承晩이 국회에 낸 대통령직 사임서가 수리돼 許政 외무장관을 수반으로 한 과도정부가 들어선다. 이 무렵 민주당 신·구파는 또다시 미묘한 갈등에 부딪친다.내각책임제로의 개헌문제였다.내각책임제는 원래 민주당이 창당때부터 내세운 주요 목표였다.그런데도 이를 채택하는 일이 새삼 논란이 된 까닭은 정파간 이해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사실 내각책임제 개헌은 59년 초한 차례 추진된 적이 있었다.추진세력은자유당 내 온건파와 민주당 구파였다.59년 2월 자유당 온건파를 대표하는 李在鶴국회부의장이 柳珍山민주당원내총무를 방문해 내각책임제 개헌을 제의한다.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여야의 격심한 대립을 그냥둔 채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치르다가는 끝내 국민이 피를 흘리는 사태를 초래할 것 같아서”였다. 柳珍山은 물론 흔쾌히 받아들였다.이후 李在鶴과 柳珍山은 李起鵬·趙炳玉의 승인을 얻어 극비리에 개헌을 추진한다.그러다가 趙淳(자유당)·金義澤(민주당)·梁一東(무소속) 세 사람이 4월 6일 수안보에서 만나 개헌을 논의한 사실이 보도되는 바람에 만천하에 공개된다. 추진 사실을 몰랐던 민주당 신파는 큰 충격을 받고 반발한다.신파는 자유당과 구파가 손잡은 개헌 논의를 ‘張勉부통령의 대통령 승계권을 박탈하려는음모’로 보았다.개헌 추진은 자유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해 흐지부지된다. 그러나 1년 후인 60년 4월의 내각제 개헌은 전혀 양상이 달랐다.먼저 4월혁명을 이룩한 국민의 여론이 독재를 방지하려면 내각책임제를 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민주당 구파와 자유당도 개헌을 당연하게 여겼다. 문제는 민주당 신파에 있었다.일각에서 “4월혁명의 원인이 3·15 부정선거에 있는 만큼 정·부통령선거를 먼저 하고 개헌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는주장을 들고 나왔다.이른바 ‘선(先)선거 후(後)개헌’론이었다.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면 張勉이 대통령에 당선되리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파 쪽의 이같은 주장은 곧 무너진다.李承晩의 하야 성명이 나온 4월 26일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국회 해산-즉시 총선거’라는 일정을 담은 시국수습결의안을 채택한다.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 15일 국회 투표에서 찬성 208표,반대 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된다. 신·구파 대립은 뒤이은 7·29 총선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됐다.내각책임제로 개헌한 이상 정권은 민의원을 많이 낸 쪽으로 가게 돼 있었다.총선일이 확정되자 신파는 중앙당에,구파는 삼각동 전업회관에 지휘본부를 차려 치열한경쟁에 들어간다.공식적인 당 후보는 공천심사위원회에서 선정했지만 사실은 신파 따로,구파 따로 공천했다. 심지어 張勉이 출마한 용산갑구,尹潽善의 종로갑구,金度演의 서대문갑구에도 자파 후보를 내세웠다.이들이 다른 후보의 지원유세에 나서지 못하도록발목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이와 함께 분당론(分黨論)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구파의 중진인 蘇宣奎가 전주에서 “우리는 보수양당제를 실현하기 위해 총선거 후 분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柳珍山·徐範錫 등 구파 중진들의 지지발언이 이어졌다.총선 결과 민주당은 민의원 219석(재선거 대상 제외)가운데 17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신·구파는 소속의원의 수를 계산하며 각각 자파가 승리했다고 공언했다. 구파는 실제로 신파를 앞섰다고 자신한 듯하다.지난해 작고한 高興門은 회고록에서 “대충 표계산을 끝내니 구파 우세가 분명해 보였다.진산 등의 계산으론 구파의 3∼4표 우세였다”고 기술했다. 8월 3일 민의원 부의장 선출을 놓고 신·구파는 처음으로 표대결을 벌인다. 신·구파는 민의원 의장에 신파의 郭尙勳,부의장 한 석에 구파의 李榮俊을추대했다.무소속 몫으로 남긴 부의장 한 자리가 표대결의 대상이었다.투표결과 구파가 지지한 徐珉濠(무소속)가 신파에서 민 李載灐(무소속)을 114 대 99의 15표차로 눌렀다.구파의 우세가 숫자상으로 확인된 셈이다. 이에 고무된 구파는 8월 4일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이어 6일에는 비슷한 시각에 신·구파가 당선자대회를 따로 가졌다.신파 모임에 민의원 75명,구파 모임에 83명이 참석했다. 尹潽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구파는 내친 김에 총리까지 독점할 양으로 金度演을 지명하지만 실패한다.총리 자리는 여론의 지지와 무소속 일부의 동조에 힘입은 張勉에게 돌아갔다.張勉이 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 구파는 민·참의원 총회를 열어 국회에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할 것을 결의한다. 한편 張勉총리는 8월 21일 청와대에서 4자회담을 갖고 신·구파를 아우르는 조각(組閣)을 논의한다.이 자리에는 張총리와 尹潽善대통령,郭尙勳민의원의장,柳珍山이 모여 신파에서 5명,구파에서 5명,무소속 2명으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구파는 이튿날 총회를 열고 7시간의 격론 끝에 張勉내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신·구파 연립내각은 끝내 성립되지 않았다.구파 모임을 마친 金度演과 柳珍山이 자정 가까운 시각에 구파 각료 명단을 들고 張총리를 찾았을때 張총리의 입장은 그새 바뀌어 있었다.“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포기해야 받아들이겠다”는 새로운 조건을 내건 것이다. 신·구파 연립내각 구상은 깨졌다.張총리는 8월 23일 신파 10명,구파 1명(鄭憲柱교통),무소속 2명(朴濟煥농림,吳天錫문교)으로 구성된 각료 명단을 발표한다.조각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신·구파는 더이상 화합할 수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 ‘分黨' 세력은 역사의 죄인 10대 국회 부의장으로서 국회의장 직무대행을 지낸 閔寬植씨(81)는 1954년12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뛰쳐나온 ‘자유당 탈당파’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무소속으로 남아 58년 5월 선거에서 재선 의원이 된 그는 그해 9월 1일 민주당에 들어가 趙炳玉의 참모로 구파에서 맹활약했다.그런데도 구파가총리로 金度演을 지명했을 때와 분당(分黨)을 추진할 때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끝까지 반대했다. “내가 상산(金度演의 아호) 총리 지명을 반대하자 상산이 창신동 집으로세 차례나 찾아왔습니다.‘유석(趙炳玉의 아호) 생전에는 열심이더니 왜 그러느냐’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閔전의장은 그때마다 金度演을 오히려 설득했다고 한다.민주당에는 엄연히신·구파가 있으니 대통령과 총리 자리를 하나씩 나눠가져야 할 것 아니냐,그런데 구파가 힘이 약해 대통령을 맡았으면 총리는 당연히 신파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는 것.閔씨는 “하지만 상산의 귀에는 내 얘기가 전혀 들리지않는 모양이었다”고 회고했다. 張勉이 총리가 되고 나서 농림장관으로 입각하라는 교섭을 받지만 거절한다.“개인적으로 나이 50이 되기 전에는 당에서건,행정부에서건 큰 감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데다,어쨌든 구파의 결정을 무시하고 개인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張勉내각 명단이 발표되니까 제외된 사람들이 일제히 ‘도각(倒閣)운운’하며 공격에 나서더라”면서 “그때는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정말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들어 서글펐다”고 말했다.구파에서 분당 움직임이 확연해지자 閔전의장은 뜻을 같이하는 동료의원들을 이끌고 분당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선다.‘합작파’라고 불린 이들은 한때 그 숫자가 30명쯤에 이를 정도로 세를 모았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閔전의장은 “분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은 합작파가 張총리에게서 공작금을타다 쓴다느니,장관 자리를 약속받았다느니 온갖 중상모략을 해댔다”면서“신파는 신파대로 합작파를 냉대했다”고 술회했다. 합작파 의원 가운데 20여명이 민주당 교섭단체에 가입하고 일부는 구파의신민당에 들어가 사실상 해체된 뒤 그는 61년 2월 신민당에 합세한다.“유석(趙炳玉)선생을 따르던 대부분의 동지들이 이미 신민당에 들어가 있어 다수에 복종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제2공화국이 내각책임제였다고는 하지만 몇달 가지 못했고 게다가 신·구파 싸움으로 제대로 운영해볼 기회조차 없었다”고 말하는 閔전의장은 “지금 국민이 내각책임제에 관해 좋다,싫다를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는 “신·구파가 힘을 합쳐 내각책임제를 잘 운영해 민주주의를 멋지게 꽃피우고 경제건설도 완성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아쉬워하면서 “분당에 앞장선 정치인들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단정했다.張勉총리와 尹潽善대통령의 공과를 평가해 달라고 하자 閔전의장은 “제2공화국이 무너지는 데 두 분 다 책임이 크다”고 운을 뗀 뒤 “더이상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싶지않다”고 말문을 닫았다.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주한 외국대사에 듣는다]쟝-뽈 레오 佛대사

    쟝-뽈 레오 주한 프랑스 대사는 19일 대한매일과의 특별인터뷰에서 올 상반기에 있을 金大中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에 대해 많은 프랑스인들이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밝힌 뒤 한국정부의 현 대북정책 기조에 전적인 지지를 표했다.그러나 레오 대사는 양국간 주요 현안의 하나인 외규장각 고서 반환문제에 대해서는 곧 시작될 새 협상의 한국측 대표가 공식 지명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노 코멘트’ 의사를 밝혔다. ▒올해 한국 김대중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렇다.구체적인 날짜는 아직 조정중이다.프랑스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의 방문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프랑스인들이 ‘한국의 대표적 인물’로 꼽는 김대통령의 방문은 프랑스에서 큰 행사가 될 것이며 한·불 관계 뿐 아니라 한·유럽 관계에서도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프랑스는 한국정부의 포용정책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반도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을 높이 평가한다.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가포용정책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프랑스는 한국전에 군대를 파견했 듯 오래전부터 한반도 안정에 큰 관심을 가져왔다.평화유지와 남북관계 개선을 축으로한 현 안보정책은 북한문제를 적절히 다루고 있다. ▒최근 주한 프랑스대사관 외교관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새로운 소식이라도있는가. 알다시피 북한은 워낙 접근이 제한된 통제사회라 세계 언론에 알려진 내용외에 특별히 덧붙힐 것은 없다.다만 북한 전문가들마저도 ‘놀랄 정도로’ 10년 전에 비해 상황이 나빠졌다.북한은 한때 경제,외교적으로 겁을 줬으나지금은 완전 고립되어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점에서 겁을주고 있다. ▒프랑스가 테제베를 공급하는 입장에서 한국 고속전철 사업에 대한 견해는. 고속 전철사업이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공사 지연 등 말이 많았으나 지난 1년 동안엔 좋은 이야기만 들었다.프랑스는 테제베만 공급할 뿐 토목공사엔전혀 관여하지 않는다.테제베는 1차분 인도 완료에 이어 시험구간 운행과 기술이전 등 일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6월프랑스 투자사절단이 한국을 다녀갔는데.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세계적인 시멘트회사인 라 파즈가 석고보드 생산에투자하기로 했고 화학회사 로디아가 뒤를 이었다.유통업체 까르푸도 좋은 예다.그러나 현재 4,500여명의 프랑스인을 고용중인 한국의 최대 대 프랑스 투자업체인 대우전자의 빅딜로 인한 고용 불안으로 프랑스 정부가 주목하고 있다. ▒한국과의 통상관계는. 97년까진 프랑스는 한국에 무역흑자를 보았으나 한국의 수출이 급신장한 지난해 적자로 반전됐다.한국의 식품시장 등 많은 시장이 더한층 개방돼야 한다고 본다.프랑스도 유럽연합 단일시장으로 통합되기 전에 시장규제가 복잡하고 보호주의적 이었으나 지내놓고 보니 그것은 프랑스 자체를 위해서도 좋지 않았다.또 한국의 지나친 국산품애용 시민운동도 좋지 않다고 본다. ▒이라크,이란,러시아문제 등 많은 국제사안에서 프랑스는 종종 미국의 입장을 트집잡는 인상을 주는데. 미국과 프랑스는 가장 오래된 우방국으로서 민주주의 등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가끔 다르긴 했지만 심각한 국제 상황에선 거의 항상 미국편이었다.냉전이후 유일한 하이퍼(슈퍼)파워인 미국과 관련,시락 대통령은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책임지고 어느 한나라의 독단 행동을 배제하는 등의 7원칙을 천명했다. ▒프랑스는 좌우파 동거정부로 유명하다.내각제 개헌,이원집정제 등이 거론되는 한국 정치상황과 관련해 이를 살펴본다면. 프랑스는 50년대말 5공화국 헌법제정을 통해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절충했으며 다행히 기대대로 정권안정 효과를 거두었다.대통령과 총리의 당파가 다르는 동거정부는 현재가 3번째로 대체로 성공적인 행정부 역할을 했다.민주정부는 강한 행정부가 필요하다.그래야 통치도 하고 개혁도 할 수 있다.민주주의는 다수파와 반대파 간의 변증법적 상호관계에서 발전하는 것이지 일률적통합을 지상목표로 하지 않는다.
  • 내각제 2-3개월뒤 결론…정치권 젊은이 많이 수혈

    金大中대통령은 19일 내각제 개헌문제와 관련,“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나 상대가 있어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金鍾泌국무총리와도 어느 정도 이심전심 생각을 나눈 바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2∼3개월 후에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1시간 동안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계개편에 관한 질문에 “야당의원을 영입할 생각이 없다”면서 “내가 관심을 가진 정계개편은 각 정당이 전국정당화를 이루는 것과 정치권 밖에 있는 뜻있는 사람,특히 젊은 사람들을 정치권으로 많이 수혈하는 것”이라고 말해 정치권 물갈이를 예고했다. ▶관련기사 4·5면 이어 중·대선거구제 도입 여부에 대해 “소선거구제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라는 국민회의 당론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 뒤 “그러나 전국정당화를 위해 좋은 안이 있으면 당연히 함께 논의할 생각”이라고 말해 협상대상임을 시사했다. 실업대책과 관련,金대통령은 “7조7,000억원의 실업대책비를 10조원으로 늘릴 것이며,국영기업체 등의 실업대책성 사업비도 5조∼6조원이될 것 같다”고 전하고 “현재 180만명인 실업자 수를 하반기엔 150만명,내년엔 130만명으로 줄여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대북문제에 대해 金대통령은 “미국과 일본이 서울을 거칠 필요없이 곧바로 평양과 왕래하고 교류,협력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아울러 金慕妊보건복지장관 교체 여부에 대해 “현재 해임할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梁承賢 yangbak@
  • [오늘의 눈]정치개혁 쉬운 것부터

    늘 그래왔지만 ‘정치개혁’은 시대의 요청이다.온갖 비난과 지탄을 받아온 정치권이 최근 정치개혁에 한 목소리를 내 기대를 부풀리고 있다.정치에 ‘염증’을 느껴온 국민들로서는 일단 환영할만한 일이다. 金大中대통령과 한나라당 李會昌총재도 지난 17일 총재회담에서 “정치개혁 입법을 본격 추진해 조속히 합의처리한다”고 대(對)국민 약속을 했다.정치개혁의 마지막 키를 쥐고 있는 여야 총재가 머리를 맞대 합의도출한 ‘총론’이다. 하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사정이 복잡해진다.자민련은 내각제개헌문제와 정치개혁입법 논의를 연계하는 ‘포괄협상론’을 들고 나왔다.내각제 밀어붙이기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기세다.야당인 한나라당의 ‘발목잡기’징후도 엿보인다.공동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틈새’를 노려 ‘잇속’을챙기려는 속내인듯하다. 李총재가 총재회담에서 정치개혁에 앞서 ‘내각제’ 개헌여부를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헌법상 권력구조 문제는 국회·정당·선거제도 등 정치관계법보다 상위개념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법리(法理)논쟁이라도 벌일 기세다. 李총재의 지적이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순서는 그 것이 옳다.그러나 선후를 따지는 이 방법만이 능사(能事)일까.지난해 12월 거창하게 발족한 ‘국회정치구조개혁특위’만 해도 그렇다.정당법 및 선거법과 달리 ‘이해관계’가 크게 갈리지 않았던 국회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고 활동시한을 3월말에서5월말로 2개월 연장했다. 앞으로 ‘정치개혁’이 순탄하지 않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권력구조(내각제)문제에만 너무 집착하다 정치개혁은 입 언저리에서 맴돌다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여야 모두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흑백논리(黑白論理)를 고집하면 그 길은 더더욱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해진다.우선 ‘쉬운 것’,‘가능한 것’부터 하나하나 해결하면 된다.金대통령도 “선거법과 정당법은 현재의 권력체계내에서 개정가능하다”고 방법을 예시했다.정치개혁이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해서는 안된다. 오풍연 정치팀 차장
  • DJP ‘임기말 개헌’ 합의 봤나

    金大中대통령이 19일 청와대 출입기자단 간담회에서 밝힌 ‘내각제논란 매듭시기’가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2∼3개월 후인 오는 6월쯤이면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 金鍾泌총리와 매듭을 지을 것이라고 시사한 대목이다. 金대통령의 발언은 다양한 해석과 추측을 낳고 있다.우선 두 사람이 경제회생 매진을 위해 ‘임기말 또는 임기후반 내각제 개헌보장’쪽으로 이미 가닥을 잡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도 이같은 기조로 분석하는 기류가 강하다.金대통령이 ‘2∼3개월’이라는 시한을 내비친 것은 우선 개헌문제에 대해 상당한 가닥을잡아가고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라는 것이다.또 시기를 ‘못박으며’ 자신감을 보인 것은 두 사람간 어떤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金대통령이 이날 “나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金총리와도 이심전심 생각한 바 있다”고 한 대목도 이같은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金대통령의 발언을 ‘진전’으로 볼 경우,국민회의측은 ‘진전’내용을 두갈래로 보고 있는듯하다.국민회의의 한 핵심당직자는 이날 “정치개혁과 정치안정에 대해 두 분간 ‘최종결심’이 남은 것이 아니냐”며 여운을 남겼다. 이 당직자는 두 사람이 ‘임기후반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정치개혁의 조속한 매듭을 제기하지 않았느냐는 분석이다.국민회의측이 지도부 개편을 위한5월 전당대회를 ‘2∼3개월’ 늦춘 것도 이같은 변수를 고려한 결정이라는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金대통령이 金총리에게 경제위기 탈출이라는 우선순위를 들어‘임기말 내각제 개헌 보장’을 제안했으며 JP로부터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이 경우 ‘2∼3개월’이라는 시간은 金총리가 자민련 내부를 다독이고 설득시키는 데 필요한 시간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자민련은 이번 발언을 ‘金대통령과의 약속’선상에서 받아들이면서도 발언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웠다.李完九대변인은 “지난해 12월 18일 대통령께서‘약속은 살아있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인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金龍煥수석부총재 등은 내각제 향배를 둘러싼 JP의 오랜 침묵속에그의 속내를 몰라 애태우는 분위기다. 柳敏 rm0609@
  • 61년 ‘교원노조’사건“명예회복” 재심청구 준비

    5·16 직후 현직교사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교단에서 추방한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해 당시 교원노조총연합회 대표였던 姜基哲씨(74)가 최근 姜信玉 변호사를 통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이다. “40년 가까이가 지난 사건으로 법률적 시효는 이미 지났습니다.그러나 새 세기를 앞두고 지난 역사의 ‘매듭’을 짓기 위해서는 ‘교원노조사건’의 진상규명과 그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1960년 5월 결성된 한국교원노동조합은 최근 합법화된 전교조의 원조격으로 ‘4·19때 희생된 학생들의 피에 보답’한다는 취지로 결성됐다.“자유당시절 교사들이 3·4인씩 조를 짜서 부정선거에 가담한 사례도 있었습니다.학생들의 피로 4·19혁명이 성공하자 교사들은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심정이었죠.그래서 교사들이 다시는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지 말자는 취지로 결성한 것이 교원노조입니다.” 60년 7월 전국조직을 갗춘 한국교원노조는 한 때 조합원 수가 4만 명에 달했다.당시 초·중·고 교사와 대학교수 등 전체교원 수가 10만명이 채 안됐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였다. 한편 5·16 직후 쿠데타 세력은 교원노조 조합원 1,500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체포,교단에서 추방하였다.이들중 간부급 54명은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됐는데 이 숫자는 당시 정당·사회단체의 피체자 가운데 가장 많은숫자였다.이들은 혁명재판에 회부돼 모두 징역15∼10년을 선고받았는데 강씨는 이들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15을 선고받고 7년 넘게 복역했다.민주당 정권을 전복한 장본인인 쿠데타세력들이 이들에게 갖다 붙인 죄목은 놀랍게도 ‘민주당 정부전복음모’.그러나 조사결과 혐의사실이 발견되지 않자 다시 ‘간첩사건’으로 몰아 붙였다. “당시는 통일문제를 언급하거나 한미경제협정·2대악법 반대투쟁에 나서면 모두 용공단체로 규정했습니다.당시 교원노조는 강령에서 ‘반공’을 명시했었고 한미경협문제는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2대악법은 노동탄압과 직결된 것이어서 다른 사회·언론단체들과 함께반대운동을 했지요.그런데 그게 ‘이적행위’로 둔갑하더군요” 68년 7년만에 출옥한 그는 정치정화법으로 6년간 묶여 있다가 10월유신 이후에는 보안처분대상자로 분류돼 이후 20년 가까이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하였다.3공시절 3선개헌반대 33인준비위원,민주수호국민협의회 기획운영위원,엠네스티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지낸 강씨는 그동안 ‘토인비와 문명’등 역사·문명사 관련 저술과 연구에 몰두해 왔다. 강신옥 변호사는 “상식적으로는 재심의 사유가 충분하나 법 논리상 제한점이 많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 사건은 역사적·정치적 차원에서 꼭 해결돼야할 역사적 문제”라고 밝혔다.
  • 이후 정치 개혁

    17일 여야 총재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정치개혁과 정계개편 등정국해법의 ‘밑그림’이 도출된 만큼 정치권의 후속조치에 관심이 쏠리고있다. 한치 진전도 보지 못했던 ‘정치개혁 협상’이 최대 관건이다.이번 회담으로 협상의 물꼬는 터졌지만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여야 3당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 문제까지 겹쳤다.결코 만만치 않은 ‘복합 방정식’으로 진행될 조짐이다.이날 합의문 작성 과정에서 정치개혁 입법시한이 당초 ‘상반기’란 문구가 ‘조속히’로 바뀐 것도 여야의 시각차를 반증하는 대목이다. 특히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둘러싼 선거법 협상은 여전히 ‘예측불허’다.공동여당인 자민련도 내각제 채택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한나라당은 ‘민주주의 후퇴’라는 이유로 반대의사를 분명히했다.이 때문에 金大中대통령은 자민련과 한나라당이 내심 선호하는 중대선거구제를 중심으로 ‘돌파구’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회법 협상은 이번 회기내에 가닥이 잡힐 전망이다.인사청문회 대상 등 쟁점이 남아있지만 여야 모두 ‘일괄타결’ 형식으로 총재회담의 가시적 성과를 뒷받침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회생과 실업대책 등 경제현안에 대한 초당적 대처도 가시화될 전망이다.시금석은 지난해 출범했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여야협의체(3당 경제협의회)’의 정상가동이다.기업구조조정 특별법 제정과 실업대책을 중심으로민생·경제개혁 관련법의 여야 단일안 마련에 적지않은 기여가 예상된다. 이날 합의한 ‘미래지향적인 큰 정치실현’ 여부는 여전히 ‘불씨’가 남아있다.바로 徐相穆의원 체포동의안 처리다.한나라당 李會昌총재는 회담 후 ‘해결’쪽에 무게를 둔 반면 국민회의는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여야 총무-총장 회담에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이지만 국가 기강 확립과 법적용의형평성 문제가 남아있다.미국에 도피중인 李碩熙 전 국세청 차장의 귀국 여부가 시금석이 될 듯하다. 이외에 이날 합의한 대북문제에 대한 초당적 대처나 생산적인 정책경쟁 등은 여야 관계 복원에 따라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종속변수’라는 것이대체적인 시각이다.
  • 발언 요지

    국민회의 총재인 金大中대통령과 한나라당 李會昌총재의 17일 총재회담 발언록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치분야]▒李총재 대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사정(司正)이 정치보복으로 되어서는안된다.과거와의 화해와 화합을 위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다.집권자가 야당이나 전(前) 정권에 과거 캐기식 사정을 압박수단으로 사용한 게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다. ▒金대통령 동감이다.그러나 사정은 정치보복으로 한 일이 아니다.그 대상에는 여야 의원이 모두 포함됐다.나는 누구를 정해서 사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李총재 인위적 정계개편을 중단해야 한다.야당을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대화정치를 해야 하며 날치기 등이 있어선 안된다. ▒金대통령 내가 대통령이 되고난 뒤 1년간만 도와달라고 했는데 야당이 도와주지 않았다.그런 과정에서 인위적 정계개편을 했다면 여당도 반성해야 하겠지만 야당도 반성해야 한다.앞으로 인위적 정계개편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대화정치가 복원돼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李총재 정치개혁은 여당 단독으로 처리해선 안된다.현재 권력구조와 관련,내각제 개헌 여부가 거론되는데 헌법상 권력구조는 정치관계법의 상위 개념이다.정치개혁 입법에 앞서 내각제 개헌 여부에 대한 대통령과 여권의 뜻이표명돼야 한다. ▒金대통령 정치개혁은 하루속히 이뤄져야 한다.여야 모두 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다.정당법,선거법 등은 권력체계와 관계없이 개정이 가능하다고 본다.상반기 중 정치개혁법안을 합의 처리하자. ▒李총재 ‘상반기’라는 표현은 곤란하다.합의문을 ‘조속히’라고 고쳤으면 한다.불법도청과 정치사찰,고문 등 권력기관의 반민주적 인권침해 관행이 근절돼야 한다. ▒金대통령 고문과 도청,정치사찰은 용납하지 않겠다.야당을 민주주의의 동반자로 존중할 테니 건전 야당이 되어주길 바란다.국회 529호실은 국회의장에게 요청해 폐쇄토록 하겠다. ▒李총재 현 검찰총장과 국정원장은 국민에게 불신임을 받고 있는 만큼 경질돼야 한다.특별검사제와 국정원장,검찰총장 등 고위공직자의 인사청문회를시행해야 한다. ▒金대통령 권력기관의 정치적중립은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특검제문제는국회에서 논의해 달라.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 등에 대해 인사청문회를 여는 것은 위헌이라는 의견이 있다. [경제분야]▒李총재 여야 구분 없이 국민생활 안정과 올바른 국정운영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야당도 실업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겠다. ▒金대통령 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가장 큰 문제는 실업문제다.야당의 초당적 협조를 바란다. [민생분야]▒李총재 국민연금 확대 시행은 국민 형편과 공정한 소득신고 등 충분한 사전 준비를 위해 1년간 유보해야 한다. ▒金대통령 미비한 것은 보완해가면서 시행하려 한다.국민의 동의를 얻어가며 실시하겠다. ▒李총재 신 한·일어업협정은 협상대표의 무지와 불성실로 막대한 손실을입혔다.마땅히 재협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어민 손해를 보상해줘야 한다. ▒金대통령 쌍끌이문제 등은 개탄스럽게 생각한다.어민배상 등으로 피해를없게 하겠다. [대북문제]▒李총재 정부의 햇볕정책이 상호주의를 지키는 것인지,미국과 아무런 견해차이가없는 것인지 국민이 불안해 한다. ▒金대통령 대북정책의 큰 테두리는 상호주의원칙이다.한·미간 대북 포용정책에 의견 차이가 없다.대북 협상 실패시에도 바로 전쟁으로 보복하는 것이아니라 계속 설득하되 그래도 안됐을 때의 조치에 대해서는 그때 가서 논의하기로 했다. 박찬구 朴峻奭 ck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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