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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각제 공동추진위 2與,8월안에 발족

    여권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임기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기로 가닥을 잡았으며,이를 위해 빠르면 8월 안에 공동여당 내에 ‘내각제개헌공동추진위’(가칭)를 두기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내각제개헌공동추진위’는 김 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총리의 대선 전 합의인 내각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발족되는 기구로 내각제 실시일정을 포함한개헌안을 완성,두 사람에게 건의하는 형식을 띨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20일 “김 대통령이 지난 18일 내각제문제를 8월에 해결한다고 한 것은 진전된 얘기이며 김 대통령과 김 총리 두 사람은 ‘내각제는 약속대로 실시하되 IMF체제 등 돌발상황 때문에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내각제문제는 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임을 전제,“두 분은 서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느 한 사람이 ‘2년반만 하라’‘2년반만 하겠다’고 할 성질이 되지 않는다”면서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책임의식을 갖고 8월 안에 매듭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이어 “두 분은 내각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만큼 지난 대선때 후보단일화추진위를 만들어 단일화안을 마련했던 것처럼 공동여당에 내각제추진기구를 만들어 여기서 개헌안을 마련,건의하면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여권 고위 관계자의 이 발언은 김 대통령이 지난 18일 충남도청에서 지방행정개혁보고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8월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협의,납득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 것’이라고 말한 데 이어 나온 것으로 ‘공동여당내 기구를 통한 해결’을 처음 밝힌 것이어서 주목된다. 유민기자 rm0609@
  • 두與 내각제발언 ‘묘수 풀이’

    최근 내각제 기류가 미묘하다.DJP간에 ‘내각제 묘수’를 찾은 듯한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 18일 ‘오는 8월 내각제 해결’을 언급했다. 무엇보다 자민련 텃밭인 대전에서 ‘납득할 수 있는 방안’을 천명했다.그방안은 내각제 강경세력들의 수용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게다가 오는 8월까지 내각제 논의 중단 약속을 해놓고 이런 언급을 했다.김종필(金鍾泌)총리와의 개헌 논의가 급진전된 게 아니냐는 관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각제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시기문제다.김 대통령 쪽은 ‘연기’를 바라고 있다.반면 김 총리 쪽은 ‘연내 개헌’이다. 그 편차 때문에 서로 언급을 꺼려왔다.부담스럽기는 김 대통령 쪽이 더 할수밖에 없다.그런데도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진전을 뒷받침한다. 김 총리 쪽도 묘한 변화가 엿보인다.한 고위 관계자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그는 “JP가 DJ에게 ‘2년반만 하고 그만 하시오’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또 “DJ는 JP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JP도 DJ 입장을고려하지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양측은 해석이 다르다.국민회의측은 ‘개헌 연기 합의’로 해석했다.DJP간에 김 대통령의 임기 말 개헌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물론 자민련측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김 대통령의 ‘8월 묘수’는 ‘내각제개헌공동추진위’가 될 것같다.이 점에서는 양쪽 기류가 비슷하다.김 총리측 한 관계자는 “내각제문제는 DJP간밀실합의로 해결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공식기구를 통한 공개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공론화 형식을 갖추게 되는 만큼 국민에게도 설득력이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방식은 DJP 양쪽에 이점이 있다.김 대통령은 ‘개헌 기피’ 부담을 해소하게 된다.김 총리는 ‘시기’에 따른 고민을 덜 수가 있다. 하지만 합의 도출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논의기간부터 줄다리기가 예상된다.결국 DJP 두 사람의 몫이 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박대출기자 dcpark@
  • [제2공화국과 張勉](29)-金대통령 특별회고(下)/사료적 가치

    28회에 이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회고 증언 가운데 장면(張勉)박사를 만나 가톨릭 영세를 받은 과정 등 5가지 질의에 대한 답변을 싣는다. 장 박사를 만나기 전에도 성당에 나간 것으로 압니다.영세를 받은 과정을들려주십시오. 제 전처의 처가가 가톨릭 집안이기 때문에 자주 성당에 나갔지만 정식으로영세를 받은 것은 1957년이었습니다.그때 저는 유명한 신학자이기도 한 윤형중(尹亨重)신부로부터 교리강독을 받았고 노기남(盧基南)대주교의 방에서 김철규(金哲奎)신부라고,그때 우리 민주당과 매우 가까운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최서면(崔書勉)씨라고,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장 박사를 대부로 소개해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장 박사하고 영적으로 대부·대자의 관계가 되었고,그 인연으로 저는 신파의 총수인 장 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히 장 박사 가족하고도 잘 알게 되었는데 특별히 인연이 깊어진 것은 장 박사가 5·16을 겪고 잡혀갔다가 돌아와서 명륜동 자택에 칩거할 때였습니다.과거에 교류가 있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장 박사를 외면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6대 국회의원이던 저는 장 박사를 찾아뵈면서 관계를 유지했고,그 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한번은 장 박사 추도식을 동성고등학교에서 대대적으로 했는데 그것을 제가 전부 주선한 일이있습니다.이런 일들로 해서 장 박사님 가족하고는 더욱 절친하게 되었습니다.제가 1980년 사형 언도를 받아 있을 때 장 박사 사모님께서 제 사형 언도가 풀릴 때까지 매일 그 추운 겨울에 성당에 나가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경제전문가이기도 합니다.장면정부가 내세운 경제제일주의와 구체적으로 추진한 ‘국토건설사업’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현가능성을 어떻게 보셨는지요. 저는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당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중심이 되어서 입안했습니다. 그리고 국토건설단은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던 장준하(張俊河)씨가 맡아줌으로써 큰 활기를 불어넣게 되었습니다.국토건설단에 젊은 청년들이 정말로 나라를 한번 다시 세운다는 의욕으로 적극적으로참여하는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국토건설5개년계획이 얼마나 좋은 안(案)이었나 하는 것은 그후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토대가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경제제일주의는 장면정권의 양대 모토였는데 여기에 대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며 예산의 절대적 액수를 원조해주던 미국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한 바 있습니다.미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도록합의가 돼 장면총리가 미국을 방문하고자 출발하려는 찰나에 군사쿠데타가일어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민주당 신파 계열을 지켜온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표현을 가끔 하십니다.신파의 특성,또는 장점을 설명해 주십시오. 일제시대 관료 출신들이나 은행가들이 해방 후 2대 국회를 중심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했습니다.자유당에 의한 사사오입개헌이 일어난 후 이들이 민주국민당과 손을 잡고 민주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민주국민당 계열이 구파를 이루게 되었고 과거의 관료계층이신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과거 관료 대부분은 이승만(李承晩)정권에 협력을 했지만 신파에 참여한 관료 출신들은 양심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자유경제,그리고 남북간의 평화적 교류,이런 것을 생각하는 세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당시 신파는 구파에 비해 개혁적이었고 민주주의에 대해서도더 철저한 면이 있었습니다.실제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에 대해서 신파는매우 강하게 투쟁했고,이 점에 있어서 구파하고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4·19가 일어날 무렵 구파는 대거 자유당에 입당했고 신파는 자유당정권으로부터더욱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신파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정신을 이어받았고 그리고 시장경제라고 할까,자유경제에 대한 정신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저는 그 후로 일생의 정치생활을 통해서 일관되게 그때 받은 영향을 그대로 견지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5·16쿠데타 발생 후 장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피했고,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쿠데타를 추인했습니다.두 분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 박사와 윤보선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 제가 여기에서 말할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2공화국 당시의 내각책임제를 어떻게 보십니까.제2공화국,그리고 장 박사에 대해 종합적인 평가를 해주십시오. 정국을 책임지고 잘 장악해 안정을 유지해서,그런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총리였던 장 박사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그러나 거기에는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장 박사가 제대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괴롭힌 면이 있었습니다.저는 과거에 내각책임제를 열렬히 지지한 바 있지만 5·16을 겪고 나서 내각책임제에 대해 큰 회의를 갖게 되었습니다.그 이유는,당시 경험으로 정당과 국회의원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내각책임제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5·16 당시 나라가 공산화 직전에 있었다든가,장정권이 지나치게 부패했다는 쿠데타 명분에 대해서 상당 부분 공정한 주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5·16 직전 정국은 아주 안정이 되었고 오히려 매일같이 일어나던 시위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정치 역시 안정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패 역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5·16 후에 장정권의 부패를 대대적으로 조사를 해가지고 신문 양면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서 발표를 했지만 재판결과 부패로서 처벌받은 것은 김영선재무장관이 출장 중 중고품 냉장고 하나를 어느 공무원에게서 선물받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나머지는 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처럼 학생들이 피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정치인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사분오열해서 가뜩이나 약한 정권을 잡고 흔드는 일을 한 데다 언론까지 가세해 결국 장정권이 유지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저 역시 장면정권의 간부였던 한 사람으로서 그 책임을 통감하지만 역시 정치가 안정되고 정권이 성공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특히 정치인은 스스로가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그런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 3·15부정선거 규탄시위 증언 통설 뒤집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증언은 현직 대통령이 신문 연재물에 직접 참여했다는 의미말고도 증언 자체가 갖는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김 대통령은 먼저 장 박사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를 “장 박사가 1956년 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무소속인 제가 장 박사 지지를 선언한 것이 신문에 보도돼서”(28회에 게재)라고 공개했다.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에 쉽지 않다.김 대통령은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므로 56년 당시에는 일개 정치 지망생에 불과했다.그런 그가 장 박사를 지지했다고 해서 신문에 보도되기란 어려웠으리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그때 이미 주목받는 논객이었다.55년 9∼10월에만 동아일보에 다섯 차례 ‘시론’을 실었고,당시 지식인 사회를 대변하는 월간지‘사상계’ 55년 10월호에도 장문의 논설을 발표했다.제목은 ‘노총(勞總)분규와 우리의 관심’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 ‘노조는 유해한가’ 등으로모두 노동운동을 주제로 했다.따라서 ‘장면 부통령후보 지지 선언’이 보도될 만한 여건은 충분했던 셈이다. 60년 4월6일 민주당이 주도한 서울 중심가 시위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밝힌 것(28회 게재)도 상당히 소중한 역사적 증언이다.그날 시위의 전개와 이후‘4·19혁명’에 끼친 영향 등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흔히들 제2공화국의 민주당정부를 4월혁명에 ‘무임승차한’정권이라고 하지만 민주당 인사들의 주장은 다르다.민주당이 4월혁명을 일정 부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3·15부정선거’ 당일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지만 막상 서울에서는 3월17일 성남고생 400여명이 거리에 나섰을 뿐 학생·시민의집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이처럼 잠복한 민심을 민주당이 촉발했다는 주장이다.그런데도 그 증거로 ‘4·6민주당 시위’를 내세우고 이 시위를 생생하게 되살린 증인은 여태껏 없었다. 김 대통령의 증언을 보면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하는 과정,일단 시위대에 끼자 경무대를 목표로 삼으려고 한 사실들이 명백하게 밝혀진다.학계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해볼 만한 부분이다. 당 대변인이 된 과정(28회 게재)도 그 무렵 김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60년 ‘7·29총선’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172석을 차지했다.그야말로 제제다사(濟濟多士)라 할 만큼 인재가 넘치는 상태였는데 김 대통령은 선거에서 떨어지고도 대변인이라는 중책을 맡았다.유망한 청년 정치인에게 거는 민주당 지도부의 기대와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통령은 장면 박사와 제2공화국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에서 “정치인은스스로 책임 있는 자세로서 도와줄 것은 도와주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건전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시 뼈저리게 느꼈다”고 결론내렸다.지금의정치권에도 적용되는 주문일 것이다. 이용원기자
  • YS 좌충우돌

    - YS ‘내각제 봉창’ 왜 두드리나 기타큐슈 최광숙특파원 3일 김포공항에서 페인트 봉변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4일에도 정부의 실정을 꼬집는가 하면‘내각제 문제’를 거론하는 등 김대중(金大中)대통령 흔들기를 계속했다. 김전대통령은 이날 기타큐슈 국제대학에서 ‘21세기 아시아의 미래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강연이 끝난 뒤 기자회견을 갖고 ‘올해 안에 내각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또 “내각제 약속으로 당선된 DJ의 정치적 임기는 올해 말로 끝난다”고 주장했다. YS는 강연에서 “국민에게 체념과 좌절을 안겨준다면 가장 큰 불행”이라며 “독재자 자신의 불행도 기다리고 있다”고 DJ를 맹비난했다.이어 “당시야당 총재이던 DJ의 노동법 개정과 기아자동차 처리 반대로 IMF사태가 초래됐다”고 DJ의 책임론을 폈다. 그는 이와 함께 “(내각제는) 어제 오늘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다”고 덧붙였다.내각제 추진을 위한 정치세력화 등에 대해서는 “지금은 아니지만 때가 되면 곧 말할것”이라고 밝혀 정치재개를 강력히 시사했다. 그의 이같은 ‘내각제 발언’은 내각제 개헌 논쟁에 불을 지펴,정국을 뒤흔들면서 자신의 존재도 부각시키려는 ‘노림수’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김대통령과 정부에 맹공을 퍼부을 경우 최소한 텃밭인 부산·경남지역에서는그만큼의 반사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김전대통령은 이밖에 페인트 사건과 관련,“양심적인 변호사나 수사 경험이 많은 전문가로 하여금 수사에 착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 좌충우돌 ‘訪日 행보’빈축 일본을 방문중인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이 3·4일 연내 내각제 개헌을 잇따라 촉구,빈축을 사고 있다.무엇보다 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합의 약속을 깬 ‘당사자’가 약속 이행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정국이던 90년 1월 22일 당시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 민주당 총재,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총재는 ‘내각제’를 전제로 3당 합당을 선언했다.5월에는 각서도 썼다. 그럼에도 내각제 문제는 민자당 합당 이후 계속 논란거리가 됐다.각 계파가내각제를 하느냐,마느냐로 ‘분당’의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여기에 YS가 ‘쐐기’를 박고 나섰다.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그해 10월 31일 독자적인 기자회견을 갖고 내각제 개헌 반대와 합의각서의 사실상 백지화를 선언했다.YS도 당시 “국민 다수와 야당이 반대하는 것이 확실한데도 내각제 개헌을 끌고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이유를 댔다.올 8월까지 내각제 논의 유보를 결정한 상황과 엇비슷하다.그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부친이살고 있는 마산으로 내려가 당무 복귀를 거부했었다. 이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정치권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국민회의는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으며,내각제 지지정당인 자민련으로부터도 ‘박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발언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없어 뭐라고 얘기할 수 없다”고 난감을 표정을 지었다.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하는 YS의 언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오풍연기자 poongynn@
  • [사설] 김영삼씨의 봉변·망발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의 페인트 세례 봉변은 전직대통령 등 요인 경호에 있어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했다.재미동포 박의정(朴義鼎)씨가 던진 것이 달걀이 아니고 흉기였다면 어떻게 됐겠는가.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는 퇴임후 7년간은 대통령 경호실이 맡게 돼 있으며 전직 대통령쪽의 요청이 있을 경우 경찰이 별도로 경호를 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날 김전대통령쪽에서는 별도의 경호요청을 하지 않아 공항경찰은평상근무를 했다고 한다.달걀을 던진 박씨는 현장에 뿌린 유인물에서 “나라를 망친 김씨는 오늘 당한 봉변을 국민이 내리는 응징으로 알고 깊이 반성하고 자숙하기 바란다”고 주장했다고 한다.문제는 우리 전직 대통령들이 국민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데도 정치적 언동으로 국민들의 격분을 사고 있다는데 있다.그렇기 때문에 경호당국은 더욱더 전직들에 대한 경호에 만전을 기함으로써 불측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박씨는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겠지만,달걀 속에 페인트까지 넣어서 던진 것은 국민정서상 너무 지나쳤다는 느낌이다.김전대통령은 이 사건을 배후가 있는 정치 테러라고 주장,“김대중(金大中)정부가 자기 무덤을 깊이 판것”이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이 사건에 배후가 있는지 없는지는 경찰조사에서 밝혀지겠지만,모든 것을 김대통령과의 대결구도에서 해석하는 김영삼씨의 발상이 신기할 지경이다.김씨는 일본에 가서도 “김대중 정권은 살인정권”이라는 등 막말을 해댔다.한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지도자의 언동치고는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전대통령의 망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는 올 말로 정치적으로 끝나야 하며,올해 안에 반드시 내각제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0년 3당합당 때 ‘내각제 각서’를 휴지로 만들고 대통령제를 고수했던 김씨로서는 엉뚱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그러면서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을 뿐이라며 정치 재개의 뜻을 분명히 했다.내각제 아래 부산·경남지역의 정치적 지분을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읽혀진다.그러나 그것은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는 짓이다.국민들은 지난 30여년간 우리를 옭죄어온지역할거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마당이다.김씨가 특정지역을 볼모로 정치를 재개하려는 것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김씨는 그같은망상을 버리기 바란다.
  • 국민의 정부 국정 진단(4)-공동여당 불협화음

    “마녀사냥식은 안된다”“도덕적으로 가볍게 넘겨서는 안된다”.전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옷파문’해법이다.김태정(金泰政)법무장관의 유임으로 이어졌다.후자는 김종필(金鍾泌)총리의 인식이다.유임 반대 표시로 이해됐다. 두 사람은 이처럼 옷파문을 놓고 견해가 다르다.눈에 띄는 변화다.그렇지만 주목할 대목은 따로 있다.김총리가 김대통령를 겨냥해 이례적으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는 점이 그것이다.다시 말해 두 사람이 정면으로 시각차이를 드러낸 모습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콘크리트 연대’가 줄곧 유지돼 왔음을 반증한다.상호 신뢰가 받침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여당간 불협화음은 적잖이 노출됐다.‘하부구조’에서 ‘DJP’를 충실히 받쳐주지 못했다는 지적이다.‘한지붕 두가족’은 적잖이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양당간 대화채널은 기능발휘에 미흡했고,국정혼선은 필연으로 귀결됐다. 그 핵심에는 연내 내각제 개헌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국민회의나 청와대측은 연기를 바란다.몇몇 관계자들은 심심찮게 연기론들을 쏟아내고있다.심지어 8월까지 논의중단 합의 이후에도 연기론이 나왔다.정계개편론도 곁들인다.이는 자민련측의 반발을 가져왔다.갈등의 불씨는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2차 정부조직 개편과정에서의 신경전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양측은 중앙인사위 등 몇몇 자리를 대통령 직속이냐,총리 직속이냐 하면서 맞섰다. 잇따른 정책혼선 역시 공동여당의 구조적 문제에서 출발했다.양측은 서로못마땅하다.국민회의측은 자민련이 발목을 붙잡는 것으로 이해한다.‘내각제 몽니’라는 해석도 곁들인다.반면 자민련측은 국민회의측이 독주하고 있다고 불만이다.이런 신경전은 정책조율 과정에 잡음을 일으키고는 했다. 공동여당의 ‘위력’은 국회 본회의에서 입증됐다.지난달 4일 정부조직개편안은 공동정권 출범 이후 네번째로 강행처리됐다.두 여당이 뭉친 결과였다. 그러나 그 한달 전에는 한나라당 서상목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때 내부반란이 나왔다.둘이 합쳐도 ‘영원한 과반수’가 아님이 입증된 셈이다. 결국 공조혼란의 본질은 ‘불신’에 있다.‘DJP’간에 구축된 신뢰가 하부구조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최대 현안인 내각제 문제가 풀려야 자연스럽게 해결될 전망이다.DJP로서는 쉽지 않은 과제다.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주목할 만한 ‘지침’이 나왔다.‘당정간·공동여당간 정책 이견이 있을 경우 김총리가 결정한다’는 게 요체다.국민연금 혼선은결국 김총리 주도로 가닥을 잡게 됐다.여여간 갈등을 빚던 중대선거구제 전환도 김총리의 수용으로 해결됐다. 이는 운영의 조화로 문제점을 극복해가는 한 과정이다.견제보다는 보완으로 엮어 나가는 정치실험이다.이와 관련해 대화채널을 보다 폭넓게 구축해야한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동국대 백경남(白京男)교수는 “국정협의회,8인협의회 등 여권내 협의체가어떻게 돌아가는지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를 정례화,논의구조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백교수는 또 “권력구도나 정당적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21세기에걸맞은 중·장기적 비전을 설정하고,국민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은 뒤 그 기준에 따라 국정운영 기조를 맞춰 나가면 여여 갈등 해소는 물론 정책혼선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출기자 dcpark@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26) 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中)

    초대 주미대사로서 큰 공을 세운 장면(張勉)은 1951년 1월28일 귀국해 2월3일 국무총리에 취임한다.이 무렵 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국회는 상극이라할 만큼 알력이 심해 장면 총리는 양쪽을 융화·조정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아울러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학살 사건’ 해결에 앞장섰고,그해 11월에는 파리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장면이 이승만 아래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는 동안 권한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그렇지만 정치적 위상은 한층 높아져,이승만을 몰아내고 그를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50년 6월19일 개원한 2대 국회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됐다.자유당 창당 전이라 공인된 여당이 없었고 친(親)이승만 계열 의원은 대한국민당 24명을 비롯해 57명에 불과했다.반면 야당의원은 27명,무소속은 의원 정수의 60%인 126명에 달했다. 2대 국회는 개원 엿새 만에 6·25를 맞아 사망·납치·행방불명된 의원이 35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의원 대다수가 이승만의 ‘서울 사수(死守)’ 발언을 믿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데다 이승만의 독재 성향이 이미두드러져 의회에서는 반(反)이승만 기류가 주를 이뤘다. 당시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고 이승만의 임기는 52년 7월23일까지였다.국회에서 재선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자 이승만은 51년 말두 가지 방안을 추진한다.하나는 여당을 만드는 것이고,또 하나는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이었다. 여당 창당작업은 그러나 두 갈래로 나눠졌다.무소속 의원 중심의 원내자유당과 5개 사회단체를 뼈대로 한 원외자유당이 별도의 정당으로 등록했다.이가운데 원내자유당은 이승만의 뜻과는 달리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은밀히추진하면서 대통령으로 장면을 추대하기로 야당과 합의한다. 당시 원내자유당을 이끈 오위영(吳緯泳)은 회고록에서 “일부 정치인들이이박사의 영구집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한 실정에서 재야의원들은 대부분강력한 야당을 조직해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적인 지도자를 추대하자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었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승만정부가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52년 1월18일 찬성 19,반대 14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했다.이어 개헌 정족수에 맞춰의원 123명의 서명을 받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4월 이 무렵 장면도 총리를 사임했다. 국회는 6월2일 제2대 대통령을 뽑기로 계획을 세웠다.그 날이 되면 장면은새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내각책임제 개헌도 순조롭게 이루어질 터였다. 하지만 반격이 시작됐다.‘부산정치파동’이 발생한 것이다.이승만이 경남과 전남북에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25일 계엄군은 버스로 등원하는의원들을 연행했다.그리고는 경찰이 국회를 포위한 상태에서 대통령직선제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이때 개정한 헌법이 ‘발췌개헌’이다. 부산정치파동후 장면은 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의 고문으로 들어앉아 정치에는 일절 간여하지 않을 듯이 보였다.그러다 55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오위영을 비롯해 김영선(金永善)·홍익표(洪翼杓)·이상철(李相喆) 등 신파의 핵심세력이 52년 그를 대통령으로추대하려던 원내자유당계였다. 장면은 56년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됐다.국민의 투표로 검증받은 권력서열 2위가 된 것이다.더구나 이승만이 81세의 고령이어서 유고시 대통령 자리를 승계하는 부통령이란 위치는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부통령 재직 4년은 장면이 회고록에서 ‘죄없는 죄인’이라고 표현할 만큼 험난한 세월이었다.이승만은 강력한 정적으로 떠오른 그를 견제하느라 상식 밖의 행동을 예사로 했다.가령 56년 8월15일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만은 내외 귀빈을 전부 소개하면서 정작 그 자리의 공동 주인공인 장면을 무시했다.남산 국회의사당 기공식에서는 다른 초청객의 자리는 준비하고도 부통령 좌석은 마련하지 않아 장면이 그냥 돌아갈 정도였다. 이 시기 장면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그에대한 암살 기도와 외국 원수와의 만남을 방해한 사례다. 부통령 취임 한달여 만인 9월29일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은 김상붕(金相鵬)이 쏜 총에왼손을 맞았다.이 저격사건의 배후는 김종원(金宗元)치안국장이라는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지만 훗날 장면정부 아래서 속개된 재판에서도 관련자는 김상붕,그에게 총을 준비해 준 이덕신(李德信·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준 최훈(崔勳) 등 세 사람으로 한정됐다.장면은 사건의 배후를 철저히 파헤치는 대신이들을 감형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고 딘 디엠 베트남대통령이 공식 방한한 날은 57년 9월18일이었다.디엠의맏형은 가톨릭 사이공교구 대주교였고 본인도 독실한 신자였다.게다가 장면과는 미국에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은 사이였다. 디엠은 장면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승만정권은 그의 방한 사실조차 장면에게 알리지 않았다.디엠은 개인적으로 노기남(盧基南)대주교에게 전화해 일요일 첫 미사때 명동성당에 들르겠다며 장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장면과 디엠은 결국 주교관 2층 노대주교 방에서 몰래 만나 우정을 재확인할수 있었다. 외국원수에 대한 의전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 이승만의 폭거는 4월혁명으로 쫓겨날 때까지 계속됐다. 장면이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던 그 무렵을 이철승(李哲承)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민주 염원의 상징으로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회상하면서 “장박사가 사실은 남달리 외유내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장면은 총리·부통령을 거치면서 국가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했다. 그런 까닭에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물러나자 민심은 당연히 장면에게로쏠리게 됐다. 이용원기자 ywyi@**前비서관 李聖模·李泓烈씨가 본 장면 장면(張勉)에게는 10여년 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한 비서관이 두 사람 있다. 이제는 70대가 된 이성모(李聖模·72)씨와 이홍렬(李泓烈·77·미국 거주)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장면이 주미대사로 활동한 50년대 초부터 66년 타계하기까지 때로는 함께,때로는 엇갈리며 그의 곁을 지켰다.이들이야말로 가족이나 정계의 동료보다도 장면의 모든 것을 더 가깝게,더 오랫동안 지켜본 증인들이다.그들이 밝힌,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몇 토막을 소개한다. 이성모씨는 1951년 초 피난지 부산에서 장총리를 만난다.경찰관으로 경호업무를 맡은 그는 인품에 감화해 곧 경찰복을 벗고 비서로 들어간다.그가 직접 본 부산 피난 시절 장면과 어머니 사이의 에피소드다. “장총리는 꼭 집에서 점심을 들었다.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왔다가 모친(黃누시아)이 등 찢어진 삼베옷을 입은 것을 보고 흉하니 갈아입으라고 말씀드렸다.그랬더니 모친이 불같이 화를 내며 ‘자네가 이 나라 총리 맞는가. 지금 피난민이 곳곳에 우글거리는데 잘먹고 편히 있는 내 걱정할 땐가.’장총리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이나 빌었다.모친 지시대로 범일동 고아원에 가아이들을 돌본 다음에야 용서받았다.장총리 부모도 매우 훌륭한 인격자였고,그는 부모 말씀에 절대 복종했다.” 이홍렬씨는 50년 4월 로스앤젤레스총영사관 부영사 때 장면 주미대사를 알게 된다.51년 총리로 내정된 장면의 부름으로 함께 귀국해 총리실 파견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비서관이 된다. “장총리를 10여년 모셨는데 화내는 모습을 딱 한번보았다.60년 12월이었다.청와대로 전화하라고 해서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비서실장인 이재항(李載沆)씨를 바꿔주었다.장총리가 통화를 몇분 하더니 화난 표정에 목소리가높아졌다.대통령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이재항씨가 자꾸 핑계를 대며 안바꿔주는 모양이었다.전화를 끊은 장총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이로군’하고혼잣말을 했다.그것이 그분이 할 줄 아는 가장 험한 욕이었다.” 이홍렬씨는 장면이 돈 문제에도 담백했다고 밝혔다. “51년 총리 시절 파리에서 열린 제6차 유엔총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가게돼 있었다.떠나기 열흘 전쯤 한국은행 총재가 나를 불렀다.‘외교활동을 하려면 가외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면서 돈가방을 주었다.얼핏 봐도 100달러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일단 거절하고 돌아와 말했더니 ‘잘했다’는 한마디뿐 더는 말이 없었다.돈을 챙기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어 쿠데타후 명륜동자택으로 돌아가서는 생활비가 없을 정도였다.” 이성모·이홍렬 두 비서관은 군사정권 아래서 고된 삶을 살았다.이성모씨는 장면 집안일을 돌보는한편 정치에도 뛰어들었다.민주당 재건에 참여,섭외부장·조사부장을 역임했고 경북 영주·봉화 지구당위원장으로서 6·7대 총선에 출마하지만 거듭 실패했다.이후 사업을 하면서 장면 추모모임인 ‘운석회’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해왔다. 이홍렬씨도 5·16쿠데타후 장면을 곁에서 모시다가 그의 타계후 정치에는일절 발을 끊고 생활인으로 돌아갔다.지난 88년 도미해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은 그는 본지에 ‘제2공화국과 장면’ 연재가 시작되자 일부러 두 차례 귀국해 증언하고 자료를 제공하는 열성을 보였다. 이용
  • 총리실 정치색 강화…金비서실장 기용 관심

    자민련의 김용채(金鎔采)부총재가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의 비서실장에 임명됨에 따라 총리실의 ‘정치색’이 한층 강해졌다. 김 실장에게는 두가지 가교(架橋)의 역할이 부여돼 있다. 우선 총리실과 자민련간의 의사소통이 활성화 될 것 같다.자민련에서는 그동안 조건호(趙健鎬)전실장이 관료 출신이어서 양측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가져왔다.김실장이 총리비서실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자민련 인사들을 얼마나 영입하는가도 관심거리다. 김실장은 또 청와대와 총리실간의 ‘핫라인’ 역할도 맡아야 한다.과거 민자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중권(金重權) 대통령 비서실장과 내각제 개헌등 주요 정치현안을 협의하는 메신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66세인 김실장의 임명을 두고 ‘60에 능참봉’이란 평도 나온다.그러나 김실장은 4선의원에 정무장관 경력을 갖고도 96년 노원구청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 직위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 처신을 보여왔다.김총리는 지난 22일 골프를 치는 자리에서 “같이 일해보지”라고 말을 건넸고 김실장은 “저야 어떤 자리에서든 총리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도운기자 dawn@
  • 개각 뒷얘기

    ‘5·24 개각’은 미리 예고되는 바람에 시기와 폭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관계자들의 예상이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어 한때 혼선으로 비쳐지기까지 했을 정도다. 김중권(金重權)청와대비서실장은 개각내용을 발표한 뒤 “어제 밤에 바뀐인물은 없으나 3∼4명은 늦게 결정돼 어제 밤 11시까지 통보했다”고 밝혀천용택(千容宅)국방·신낙균(申樂均)문화·최재욱(崔在旭)환경부장관 등의교체를 놓고 막판 진통을 겪었음을 시인했다.김대통령은 애착을 갖고 있었으나,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가 대폭 개각을 강력히 건의하면서 이들의 운명이 갈렸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던 강봉균(康奉均)재경부장관과 박지원(朴智元)문화부장관은 지난 21일 김대통령을 독대한 자리에서 각료 인선을 통보받았다고전했다.임동원(林東源)외교안보수석에게도 같은 날 통보된 것으로 알려져 김대통령의 배려를 읽게 했다. 국무총리실에서는 이번 개각에 앞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지분을 따지지않고 전문가를 발탁하겠다는 원칙이 발표됐기 때문에 김총리의 득실이나 영향력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반응이다.김총리의 한 측근은 “집권 2년차를 맞아 강도 높은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는 지난 22일 DJP의 청와대 조찬회동 결과가 그대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3명이나 발탁된 데 비해 총리실에서는 한명도입각하지 못한 점을 들어 “김총리가 자기 몫을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은 것아니냐”는 말도 나온다.입각 후보였던 정해주 국무조정실장이나 국정홍보처장 후보였던 오효진(吳效鎭)공보실장이 모두 발탁되지 않았다. 총리실 관계자는 “이번 내각은 어차피 내년 4월까지의 한시 내각”이라고말했다.또 내각제 개헌 논의 등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가급적 내각에서는 정치색을 배제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도운기자
  • 金令培대행“내각제추진 현단계선 부적절”

    국민회의 김영배(金令培)총재권한대행은 21일 경제회복과 개혁이 진행되는지금 단계에서 내각제 개헌 추진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대행은 인천방송(iTV)의 ‘손숙의 일요일에 만난 사람’프로그램 녹화에서 “이 시대는 개혁이 과제이며 개혁은 아직 시작단계”라면서 “이 단계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 경제회복과 개혁이 주저 앉을 우려가 있다”고밝혔다.그는 “내각제 개헌은 약속대로 지켜져야 하지만 이 시기만큼은 넘어가야 한다는 국민의 뜻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대행은 8월 전당대회의 연기가능성에 대해 “현재로서는 변함이 없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그때 가봐서 사정이 불가피하면 그럴 지도 모른다”고말했다. 추승호 기자 chu@
  • 속도 안붙는 2與 정치개혁 협상

    공동여당의 정치개혁 협상이 난기류에 싸일 조짐이다.18일로 예정됐던 국민회의 자민련 양당 4인소위는 무산됐다. 선거구제에 대한 자민련의 당론 조율이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양당은19일 8인회의에서 다시 절충에 나선다.하지만 접점을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자민련 김종호(金宗鎬)부총재가 ‘내각제’를 들고 나왔다.평소 조심스런 편이어서 이례적이다.그는 당 정치개혁특위위원장이다.국민회의와의 정치개혁 8인회의를 이끌고 있다.협상 난기류와 맞물려 관심을 끈다. 김 부총재는 ‘공동정부 위기론’을 폈다.자민련 청년조직인 ‘21세기 청년포럼’초청 특강에서 제기했다.먼저 “연내 내각제 개헌이 안되면 김종필(金鍾泌)총리는 공동정부에서 떠날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김 부총재는 “이 경우 심각한 정치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또 “김 총리는 항간에서 거론되고 있는 내각제를 담보로 한 어떠한 타협도하지 않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사실상 ‘와해론’ 내지 ‘이탈론’이다.그것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왔다. 발언강도가 지금까지 주장과 다르다.정치개혁 협상의 막바지에서 국민회의를 압박하는 인상이 짙다. 김 부총재는 최근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다.선거구제 문제때문에 중간에 끼여 있다.청와대와 국민회의측은 이번주를 협상시한으로 잡고 계속 재촉중이다.그러나 자민련 내부 사정은 복잡하다.전날은 김 총리,박태준(朴泰俊)총재,김용환(金龍煥)수석부총재를 번갈아 만났다.삼각조율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소선구제 당론을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해도 좋다는 합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김 총리는 “당에서 알아서 하라”고 여전히 중립이다.김 수석부총재는 소선거구 주장을 철회하지 않은 채 이날 미국으로 출국했다.내홍(內訌)으로 비친다. 김 부총재는 “단일안은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사실상 복수안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양쪽 수뇌부의 ‘4자회동’에 맡기는 쪽으로 굳어지는 것같다.
  • [제2공화국과 張勉]-실패한 내각책임제(24)

    “4·19의거의 영웅인 학생과 전국민은 단순히 정권교체만을 요구하지 않고…정치 자유의 전면적 회복과 사회복지 향상을 위한 정치의 전면적 개혁을절실히 요구하고 있다.…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언제든지국민에게 책임지며 국민의 진정한 다수 의사를 현실적으로 국정에 반영할 수 있는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는 수밖에 없다.”4월혁명 후 구성된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기초위원회’(위원장 鄭憲柱)는 1960년 5월11일 국회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면서 개헌의 필요성을이처럼 밝혔다. 당시 개헌을 하려면 재적 222명의 3분의 1(74명) 이상이 동의해 상정한 다음 3분의 2(148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다.‘개헌위원회’는 즉시 서명받기에 들어갔다.시작한 지 1시간 만에 175명이 서명해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를 훌쩍 넘어섰다.개헌안 통과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게다가 이날 개헌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기명(記名)으로 하도록 국회법을 고침으로써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조직적인 반란표를 사전에 차단했다. 공고기간을거친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15일 오전 국회 표결에 올라 참가의원 211명 가운데 찬성 208표,반대 3표로 통과됐다.허정(許政)과도정부도오후에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이날자로 새 헌법을 공포했다. 내각책임제 헌법이 확정되자 장면(張勉)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개헌이 독재를 배격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앞으로 이 제도를 운영하는 데도 철저한 민주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지자 여론은 대통령중심제를 폐지하고 내각책임제를 시행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됐다.“권력은 권력을 낳고 권력은 권력에 집중돼 드디어 12년에 걸친 1인독재가 출현했다”는 ‘개헌 제안이유서’의 한 구절처럼 이승만독재가 대통령책임제라는 제도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내각책임제 개헌에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가 적극 나섰다.자유당은 내각책임제가 되어야 그나마 살아남을 구석이 생긴다는 생각이었다.조병옥(趙炳玉)을 잃어 뚜렷한 대통령 후보를 갖지 못한 구파도 대통령중심제를 원하지 않았다. 민주당 신파는 달랐다.국민이 뽑은 부통령을 지냈고 당 대표최고위원이기도한 장면이라는 걸출한 대통령감이 있었다.대통령중심제를 고수하자는 욕심을 낼 만했다. 따라서 신파는 ‘4월혁명의 구호가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다시 하라는 것이니 재선거를 해 대통령부터 뽑자’고 요구했다.4월혁명때 타도의 대상으로지목된 자유당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독점한 현행 국회에서 개헌을 다룰수는 없다는 논리도 내세웠다. 민주당 신파의 핵심인 주요한(朱耀翰)의원은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비상입법위원회를 구성,혁명 주체세력인 학생과 변호사,공명선거위원회,교수단,민주당 등이 주축이 돼 헌정질서를 개편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의 요구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서두르라는 것이었고 정치권에서는 자유당과 민주당 구파가 뜻을 맞춰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사태가 이쯤 되자 장면 민주당 대표는 4월28일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나의 지상목표이며 철칙이 독재를 막기 위한 내각책임제 개헌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둔다”고 밝혔다.이어 “개헌을 현 국회가 하느냐,새 국회가 하느냐에 관해서는 제론(諸論)이 있으나 나로서는 현 국회가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장면이 ‘현 국회에서의 내각책임제 개헌’ 지지를 밝힘으로써 개헌 추진은급류를 탔다.과정상 다소의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4·19에서 두달이 채 안된6월15일 내각책임제 헌법은 발효됐다.또 이 헌법에 따라 7·29총선을 치러제2공화국이 탄생한다. 장면정부가 내각제를 제대로 운용(運用)하려고 애쓴 흔적은 역력하다.먼저내각 운영의 핵심인 국무회의를 오전,오후 매일 두 차례씩 열었다.당일 올라온 안건을 다음날로 미루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따라서 장면총리는 “새벽 2시 전에 취침해본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회고록에서)일에 몰두했고,다른 각료들도 새벽에 나와 밤 늦게 들어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장면은 국회에도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오전에는 민의원,오후에는 참의원’하는 식이었다.송원영(宋元英) 당시 공보비서관은 “사소한 것까지 총리에게 물어대는 것은 난처하기도 했다.더구나 같은 안건이 민의원에서 논의될때와 2∼3일 후 참의원에서 논의될 때는 완전히 다른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장 총리와 내각의 노력은 그러나 쉽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내각책임제 하에서의 필수적 요소인 ‘의회에서의 안정세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민주당 구파가 권력다툼에 패하자 분당(分黨)해 사사건건 시비를 벌인 것은 물론이고,신파 내에서도 소장파는 야당 행세를 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장면정부는 8개월23일간 집권하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해야 했다.하나의 내각이 존립한 기간이 평균적으로 두 달을 조금 넘을 뿐이었으니 일관된 행정을 펴기 어려웠음은 당연했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의 월권도 정국안정에 걸림돌이었다.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라는 내각책임제하 대통령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장면정부에 간섭했다.그리고 그 간섭의 바탕에는 ‘구파의 영수’라는 파당적 시각이 깔려 있었다. 장면을 비롯한 신파 수뇌부의 지도력이 부족한 점도 내각책임제가 제기능을발휘하지 못한 책임의 하나로 꼽혀야 할 것이다. 제2공화국의 내각책임제는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는지도 모른다.1960년대 초 한국 사회라는 역사적 토대에서 어떤 정부제도가 알맞는지를깊이 있게 따지기에 앞서 국민은 이승만독재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내각책임제를 열망한 면이 없지 않다. 더욱이 자유당의 ‘생존 욕구’와 민주당 구파의 ‘대통령감 부재’라는 정파적 이해가 결탁해 서둘러 추진된 점은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 만하다. 이용원기자 ywyi@-내각제 운영과 폐해 민·참의원 역할구분 없어 비효율적 제2공화국은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정부다.비록 8개월여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각책임제를 실제로 운용했기 때문에 그 제도가 갖는 장·단점을 두루 살펴볼 기회를 제공했다.먼저 제도적인 특성부터살펴본다. 내각책임제에서는 대통령이 상징적인 존재로서 국가원수 지위만을 부여받는다.구체적으로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지명하는 권리를 비롯해 선전포고 및 외교사절의 신임장 접수,명목상의 국군통수권,사면권 및 계엄선포,훈장·영예의 수여 등을 권한으로 가졌다. 행정권은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국무원(國務院) 곧 내각이 맡았다.행정수반인 총리는 국무위원을 임면하고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국무원령(지금의 대통령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국무원은 총리를 포함해 15명 이내로 구성하되과반수를 국회의원으로 채우도록 규정했다. 아울러 제2공화국에서는 입법부 기능도 크게 강화돼 민의원과 참의원의 양원제로 구성됐다.무게중심은 민의원에 두었다.민의원은 총리선출권을 보유해대통령이 지명한 총리후보를 거부할 수 있었다.대통령의 지명이 두 차례 거부되면 민의원 스스로가 총리를 선출하도록 했다.또 국무원을 불신임할 수있었는데 이에 맞서 국무원도 민의원해산권을 가졌다. 상원격인 참의원은 그 정원이 민의원의 4분의 1 이내로 제한됐다.민의원에서 통과시킨 법률을 재심해 수정할 수 있었다.다만 참의원에서 고친 법안의 원안을,민의원이 재표결에서 과반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가결하면 그대로 확정됐다. 이밖에 제2공화국 특유의 제도로는 차관을 정무차관·사무차관으로 나눈 것을 들 수 있다.정무차관은 내각과 의회를 원활하게 연계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며 정책수립과 기획에 간여했다.장관대신 국무회의에도 참석했다. 장면(張勉)정부는 정무차관을 주로 의원으로 임명했다.조각(組閣)때는 장면총리가 장관의 추천을 거치지 않고 재선 이상의 의원 중에서 직접 뽑았다.법무의 김영환(金榮煥),국방의 박병배(朴炳培) 등 두 정무차관이 무소속이었다. ‘정무차관이 사무차관과 알력만 빚는다’는 이유로 신민당(민주당 구파)의서범석(徐範錫)의원이 1961년 1월 폐지법률안을 낼 만큼 부작용도 있었던 듯하다.정무차관으로 시작해 장관이 된 이로는 윤택중(尹宅重)문교와 태완선(太完善)부흥이 있다.사무차관은 지금의 차관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내각책임제·양원제·정무차관제 등 제2공화국 특유의 제도에 대해 당시 현장에서 활동한 인사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고려대 법학과교수 출신인 김영구(金永求)내무부 정무차관(이하 당시 직책)은 “60년대 초 한국 사회는 이같은 제도를 수용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파벌이 많은 데다 이해관계에 따라 이슈별로도 의견이 엇갈리는 정치 수준에서는 내각책임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장면정부 지도부의 역량이 부족했다고도 지적했다. 김 차관은 의회가 민의원·참의원으로 나뉘었지만 똑같은 법률을 이중으로다루었을 뿐 참의원 고유의 업무는 따로 없었다고 밝혔다.국회의원 수가 너무 많아지고,원로원격인 참의원이 권리주장만 하려 한 점도 양원제의 폐단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김업(金業)국방부 사무차관은 “정무차관이란 자리가 국회만 들락거릴뿐이지 부내에서는 결재 한번 하는 일이 없었다”고 기억하면서 “일본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우리 실정에는 필요없었다”고 강조했다. 이용원기자
  • 새로운 5·16 감회에 젖은 JP

    - “朴전대통령 기념사업 잘된일”, 민족사 정체성확립 계기 기대 16일 오전 11시45분.국립현충원의 고(故)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묘소에 묵념하는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는 이전의 어떤 5·16때보다 깊은 감회를 느낀 것 같다.국민의 정부에서 김총리가 생각하는 방향의 ‘역사 바로세우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신념과,또 그렇게 이뤄지고 있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듯했다. 김총리는 박대통령 묘소에 참배하기 앞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에서 열린제34회 5·16민족상 시상식에서 감회의 일단을 표현했다. 김총리는 “이 땅에 누천년의 빈곤을 몰아내고 조국을 근대화한 어른의 위업을 부인하고는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께서 대구 방문길에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을 정부차원에서 적극지원하겠다고 한 것은 만시지탄이 있지만 매우 잘된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총리는 특히 “정치적으로 계속 반대입장에 서 있었던 김대통령이 박전대통령 기념사업을 공식 제기하게 돼서 더욱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 “범민족적인 호응속에 기념사업이 진행돼 우리 민족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김총리는 기(起)-승(承)-전(轉)-결(結)의 역사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김총리에게 5·16은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기’의 의미를갖는다는 것.그리고 김총리 본인이 ‘결’을 맺고자 소망하는 것으로 알려진다.내각제 개헌 추진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고 한다. 5·16은 박전대통령 통치기간에는 ‘혁명’으로 불렸다.그러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은 5·16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그저 5·16으로 호칭됐다.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은 “5·16은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시대에 따라 평가도 달라진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5·16의 성격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그러나김대통령의 박전대통령 평가에 5·16에 대한 평가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김총리측은 이해하고 있다. 이도운기자 dawn@
  • [제2공화국과 張勉](23)-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下)

    장면(張勉)정부에게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사건 처리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국민감정을 만족시키려면 ‘부정축재’범위를 넓혀 주요 기업인들을 대부분 구속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경제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가뜩이나 어려운 국민생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은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더욱이 국정지표의 으뜸으로 ‘경제제일주의’를 내건 장면정부로서는 민간경제를 파국으로 몰고갈 수도 있는 정책을 섣불리 시행하기가 어려웠다. ‘국민감정을 따른다’는 명분과 ‘경제건설의 토대를 망칠 수 없다’는 당위 사이에서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가 장면정부의 고민이었다.그고민은,장면이 총리로 등극해 처음 민의원에서 밝힌 시정방침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장면은 우선 “구정권 하에서 부정·불법 축재한 자를 처단할 것은 물론이나 사업과 경제를 마비시키지 아니하는 적절한 한도는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이어 과도정부가 조세범처벌법에 따라 적발한 46개사,23명을 계속 수사하는 한편 추가조사도 벌이겠다면서 “증거를 포착하기 곤란한 만큼 국민의 협조가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정치비리 관련자에 대한 것 못지않았다.이승만(李承晩)이 하야한 지 10여일만인 1960년 5월10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하라”는 데모가 일어날 정도였다. 반면 부정축재의 범위를 정하고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는 정치사건에 비해 훨씬 힘들었다.게다가 허정(許政)과도정부가 부정축재자 처리를 ▲징역형보다는 재산형(財産刑)으로 ▲그것도 현금이 아니라 주식으로 헌납하도록 테두리를 정한 터여서 운신의 폭은 좁았다. 장면정부가 출범한 나흘 뒤인 8월27일 참의원(상원)은 ‘부정축재자 조사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31일에는 정부가 부정축재한 46개 업체에 벌과금 87억환,추징금 109억환을 통고했다. 장면정부는 정부대로,국회는 국회대로 추진하던 부정축재자 처벌은 정치비리 관련자 처리와 맞물려 소급입법 대상으로 넘어간다.개정헌법을 바탕으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청조직법은 60년 말에 속속 제정되지만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은 해를 넘긴다. ‘부정축재처벌법’제정이 늦어진 까닭은 장면정부의 경제진흥책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61년 봄 국토건설사업을 시작해야 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을 거의 성안(成案)한 입장에서 민간경제계를 ‘죽일지도 모르는’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었다.더욱이 장면정부는 60년 12월5일부터 닷새동안 ‘종합경제회의’를 열어 경제개발을 해나가는 데 민간경제계와 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부정축재처벌법’안은 61년 2월9일 민의원을 통과한다.60년 4월26일을 기준으로 그 5∼8년전까지를 조사대상 기간으로 정해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자 ▲‘3·15부정선거’에 1천만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 ▲지난 5년간 연 1천만환 이상 탈세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삼았다.경쟁입찰에서 담합했거나 재산을 해외도피한 자,뇌물수수로 연 600만환 이상 이득을 취한 공무원도 부정축재자에 포함시켰다.경제계는 예상을 뛰어넘는 엄격한 기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법안대로라면 처벌받을 사람이 5만7,00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61년 초 결성된 한국경제협의회(전경련의 전신)는 대한상의·무역협회·방직협회·건설협회와 뜻을 모아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3월4일 몇몇 일간지에 발표한 경제 5단체 성명서의 뼈대는 다음과 같다.“이 법안이 그대로 참의원을 통과하면 사회에 일대 혼란을 불러들여 기업인의손발을 묶을 것이다.기업활동을 가로막고 민족자본을 흐트러뜨리며 나아가분열을 조장하는 이 법안을 제정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진언한다.”이 성명서는 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그 안에 “북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남한의 경제 번영이라면,이 법안은 북괴에게 일석이조의 효과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의원이 곧바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경제협의회 대표를 출석시키는 등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성명서 해프닝’은 경제5단체가 해명서를 신문에 싣는 것으로 결말짓지만 그 과정에서 정치권은 “중소상공인 5만여명이 피의자로 묶인다면 경제진흥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경제계 주장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그 결과는 참의원에서의 법안 심의에 반영됐다.민의원에서 통과된 법안 내용을 참의원이 대폭 완화한 것이다.수정안은 처벌대상을 ▲3·15선거에서 자유당에 자진해서 3,000만환 이상을 제공한 자 ▲공무원 및 정당인으로서 부정하게 재산상 이득을 취한 자로 제한했다.피의자는 5만7,00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크게 줄었다. 참의원의 수정안은 4월12일 민의원에서 그대로 통과됐다.재석 163석 가운데찬성 138표,반대 25표였다.장면총리는 각료를 모두 대동하고 표결 현장에 참석해 재계를 지원했다. 국민감정을 만족시키느냐,아니면 경제진흥을 위해 정치에 연루된 경제인들을 용서하느냐 라는 갈림길에서 장면정부는 후자를 택했다.경제발전이야말로시대적인 사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법에 따른 부정축재처리위원회(위원장 沈宗錫 참의원 의원)는 5월4일 가동됐다.위원회는 처벌 대상자에게 5월16일까지 자진신고하라고 공표했는데 그 마감일에 쿠데타가 터졌다. 군사정권은 61년 12월20일 기업체 30개사에 494억여환,공무원 32명에 75억환의 부정축재분을 환수한다고 최종 통보했다.이어 62년 1월23일 백인엽(白仁燁)예비역 육군중장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부정축재자 12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張총리“소급입법 위헌”첫 지적 장경순(張慶淳·73)씨는 민주당 신파 출신으로 5대 국회에 진출,재경분과위원회에서 활약했다.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의 추천으로 중앙정계에 데뷔한그는 장면(張勉)정부의 경제관련 정책을 가까이서,두루 지켜보았다. “부정축재자 처리를 민의원에서는 재경분과위에서 맡았습니다.민주당 신파건 구파건 구분없이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데는 뜻이 같았지요.하지만 장면총리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장 전의원은,민의원이 ‘부정축재자 처벌법’제정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어느날 밤 장총리가 신파 간부 15명을 중앙청으로 불러 회의를 열었다고 했다.한명씩 돌아가며 발언한 뒤 장총리는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좋다.그러나 제정 후에 위헌 판정을 받으면 어쩌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소급입법은 위헌이므로 개헌을 거쳐야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못했기 때문에 장총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그는 “장총리는 특별법 제정에 끝까지 신중을 기했지만,여론의 압력이 거센데다 윤보선(尹潽善)대통령마저 10월10일 특별담화를 발표해 독촉하는 바람에 소급법을추진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장 전의원은 부정축재자 처벌과 관련해 민주당이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말들이 나돌았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만약 정치자금을 불법으로 챙겼다면 5·16쿠데타 후에 무사했겠느냐는 설명이다. 다만 몇몇 의원이 개인적으로 욕심을 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가령 민주당 이(李)모 의원이 나서 기업인들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면 주위에서 “또낙전지변(落錢之辯=돈 달라는 말)이군”하며 혀를 차곤 했다고 기억했다.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가 몇년만 계속했어도 우리 경제가 훨씬 빨리,그리고 정경유착·빈부격차와 같은 부작용 없이 발전했을 것”이라며여러가지 근거를 들었다. 먼저 장총리를 비롯해 경제각료들이 모두 열의에 차 있었음을 꼽았다.“김영선장관 집으로 전화할 때는 새벽 5시 전에 해야 했다.그 시각이 지나면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참 부지런하고 청빈한 분들이었다”고 아쉬워했다. 국회 분위기도 마찬가지여서,의원 대부분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각오 아래 소장층은 건설복을 입고다니며 새생활운동을 실천했다고 회고했다.또 국정감사를 앞두고는 의원들이 “일체의 향응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도 했다는 것. “서민생활 안정에 주력해 세법도 많이 개정했다”고 밝힌 장 전의원은 자신이 발의해 근로소득세 면세점을 1만6,500환에서 3만환으로 높였다고 공개했다.“하루벌이가 1달러(당시 달러당 1,300환)도 안되는 근로자에게서 소득세를 받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해 통과시켰다고 한다. 그는 5·16쿠데타후 민주당 재건에 참여,6대 국회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이후에도 “당복(黨福)이 없어(당을 잘못 선택했다는 뜻)” 낙선을 거듭하다“가족을 먹여살리려고” 정치를 포기하고 사업가로 돌아섰다.지금은 여권전직의원들의 모임인 ‘일오회(一五會)’회장으로 있다. “장면정부를 무능·부패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악선전일 뿐”이라고 잘라말한 장 전의원은 “장면정부때 데모하다가 죽거나 다친 사람 있느냐”“그때경제비리가 무엇이 있었냐”고 거듭 반문하면서 “데모가 전투처럼 변한 거나 대형 경제사건이 터진 것도 모두 박정희(朴正熙)정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용원 기자
  • 한나라 장외집회…여·야 공방

    여야는 12일 한나라당 여의도 장외집회를 놓고 공방을 벌였다.한나라당은‘야당의 생존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불가피한 투쟁’이라고 주장했고 여당은 불법 사전선거운동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이날 오후 여의도 둔치에서 열린 ‘김대중(金大中)정권 국정파탄대회’에서 “현정권은 독재화와 국정파탄의 길로 가고 있다”며 제2의 민주화투쟁을 선언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연설에서 “정부조직법을 날치기한 현정권은 앞으로권력구조 개헌문제 등에 대해서도 날치기를 강행할지 모른다”며 현정권은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정파탄으로 가고 있다고 여권을 공격했다. 김덕룡(金德龍)부총재도 “이 정권은 포장만 민주주의지 알맹이는 독재정권,날치기 정권”이라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함께나서자”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18일 부산에서 열기로 한 장외집회는 6·3재선거 이후로 연기하기로 했다. 한편 국민회의 정동영(鄭東泳)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장외집회는 사회불안을 부추겨 경제회생의 발목잡기가 될것”이라고 비난했고 자민련 이양희(李良熙)대변인도 “이번 집회는 사전선거운동 성격 때문에 선거법 위반 소지가있다”고 주장했다. 최광숙기자
  • 黨政추진 ‘민주화 관련법’ 골자

    정부와 여당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는 인정하지 않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 했던 것처럼 일시 보상금을 주면서 명예회복과 보상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렇게 된 것은 상이군경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등 보훈단체들이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을 국가유공자로 하는 것을 적극 반대하기 때문이다.유공자 문제로 갈등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보훈처 및 한나라당,공동여당인 자민련도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방안에 반대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민회의가 지난해 말 당론으로 발의해 국회 정무위에 제출한 ‘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법률안’에 관한 심의가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게 이런 배경 탓이다.그래서 정부와 국민회의는 처리방향을 변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됐다. 광주민주화 운동 관련자에게는 보통 3,000만∼1억5,000만원을 일시 보상금으로 지급했으며 부상자에게는 의료보험카드도 발급해줬다.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도 비슷한 지원을 할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유공자로는 하지 않기로 가닥을 잡았지만 적용대상은유동적이다.지난해 말 국민회의가 제출한 안에는 69년 8월 7일 3선개헌 발의일부터 현정부 출범 직전인 98년 2월 24일까지로 돼 있다.국민회의의 안에는 김영삼(金泳三) 전정권시절이 포함돼 있어 한나라당,특히 민주계의 반발이거세다.그렇지 않아도 김전대통령이 요즘 현정부를 비난하는 상황이라 적용대상은 더 미묘하다.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의원 등 30명의 의원들이 지난해 7월 국회에 낸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법률안’에는 적용대상기간이 민주헌정이 유신으로 파괴된 72년 10월 17일부터 6월항쟁에 의해 민주화가 선언된 87년 6월 29일까지로 돼 있다.따라서 최종 적용대상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중간선에서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곽태헌기자 tiger@
  • 자민련, 내각제 헌법안 마련-독일식 순수내각제 골격

    자민련 내각제개헌추진위(위원장 金龍煥 수석부총재)는 독일식 순수내각제를 골격으로 135개 조항과 부칙 5개항으로 구성된 내각제 헌법안을 마련한것으로 11일 알려졌다. 추진위의 한 관계자는 이날 “지난 2월 총재단회의에서 통과된 자체 헌법 요강을 토대로 이같은 내용의 내각제 헌법안에 대한 조문화작업을 완료했다”고 말했다. 헌법안은 전문과 총강,국민의 권리와 의무,국회,대통령,정부,법원,헌법재판소의 선거관리,지방자치,경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헌법안은 총리를 수상(首相)으로 바꾸고 국무회의는 ‘내각회의’로 이름을 바꿨으며 현행 헌법의 ‘대통령절’인 제4장 1절은 ‘수상절’로 대체하는등 수상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부칙에는 개헌안 통과 후 구성된 국회가 첫 소집된 10일 이내에 대통령과 수상을 뽑도록 규정했으며,현 15대 국회는 임기 말까지 존속토록 했다. 부칙은 또 대통령은 개정 헌법에 따라 차기 대통령을 선출할 때까지 직무를수행토록 했다. 박대출기자 dcpark@
  • 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길 열린다

    정부와 여당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지는 않고 일시 보상금과 함께 의료 및 생활지원금을 주도록 하는 내용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키로 했다.다음달 열릴 204회 임시국회에 이러한 법률안을 제출해 통과시키기로 했다. 국민회의의 고위 관계자는 11일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한 ‘민주화운동 관련 유공자 명예회복 및 예우 등에 관한 법률안’은 철회하거나 심의를 보류하는 대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을제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게 했던 것처럼특별법 형식으로 일시 보상금을 주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정부와 국민회의가 당초의 입장을 바꾼 것은 상이군경회 등 보훈단체와 자민련,한나라당이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방안에 반대하기 때문이다.국민회의 고위관계자는 “여권 내부,또 여야간 논란이 되는 부분을빨리 정리해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의 명예를 시급히 회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타협안’ 마련의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와 국민회의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의 적용을 받는 대상을 ‘지난 69년 8월 7일 3선개헌 발의일부터 지난해 2월 24일까지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사망자,상이자,그 후유증으로 질병을 앓거나사망한 자 및 유족’으로 잡았다. 곽태헌 추승호기자 tiger@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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