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딱딱해진 떡을 썰며/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명절 때쯤이면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빼온다. 방앗간 아저씨에게 떡을 뺀 뒤 썰어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아저씨는 일감이 너무 밀려 정신이 없다고, 말린 뒤에 다시 방앗간으로 가져오면 그때 썰어주겠다고 하셨다. 떡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일 아침쯤 가져가려고 생각했는데, 이런, 떡이 이미 너무 굳어 버린 것이다. 이 상태로 그냥 두었다가는 방앗간에서도 썰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안되겠다, 더 굳기 전에 내가 썰어야겠다.
떡은 잘 썰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 지나니, 요령이 생겼다. 무엇보다 칼을 잘 써야 한다. 떡을 썰어야 하는 위치에 오른손에 든 칼의 가운데쯤 되는 부분을 대고, 왼손에 잘 안배된 힘을 넣어서 아래로 눌러 준다. 중요한 것은, 이미 상당히 딱딱해진 껍질 때문에 칼질의 연속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의 썰기로 일단 딱딱해진 껍질을 하나 마무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원포인트 해결 방식. 하나씩 정리하고 넘어가기.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면?
낑낑대면서 딱딱해진 떡을 썰면서 머릿속으로 많은 상념들이 지나간다. 이 딱딱하게 껍질이 굳어버린 떡은 꼭 우리 사회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원래는 부드러웠던 떡.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거의 비형태에 가깝다. 그 상태로는 떡 자체로 먹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방식으로 조리할 수 없는 것이다. 상수로 작동하는 형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썰어서 저장해 둔 떡은 떡볶이가 될 수도 있고, 떡국이 될 수도 있고, 떡라면이 되어 떡으로서 다른 존재 방식에 하나의 지분을 가진 형태로 참여할 수 있지만, 물렁물렁한 떡은 즉물적 가치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적당히 굳었을 때, 즉, 시간의 공격에 적응하여 어느 정도 현실적 가치가 덧붙여졌을 때, 비로소 다른 가치를 생성시키는 체계에 합류하는 형태가 된다. 그런데 너무 굳은 다음에는?
떡은 그것을 일정한 기호적 형태로 분절시켜 그 효율성을 높여 주려는 나의 시도에 거세게 저항했다. 난 이대로 있을래. 나에게 다른 것이 되라고 요구하지 마. 어떤 개혁도 싫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 저항한 것은 지나치게 굳어버린 껍질일 뿐이다.
썰어놓은 떡살은 충분히 유연했다. 그것은 본래의 유연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껍질만이 죽어라 자신의 딱딱함을 고집했을 뿐이다. 기득권은 모든 개혁에 저항한다. 그 딱딱함을 극복하려면, 원포인트 해결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현실적인 힘을 아직도 막강하게 소유하고 있고, 한 사회의 모든 상징 분배 회로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의 딱딱함에 모든 변화의 시도가 걸려 넘어진다면, 주어진 맥락 안에서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일부터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현실적인 해결책일 수 있다.
이를테면 개헌 문제는 어떨까? 원칙적으로는 지금 현재 우리 헌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모순되는 요소들을 일거에 극복하는 방식으로 고치는 것이 맞다. 영토의 개념 문제, 국토 사용에 관한 철학, 지역감정 악용을 방지하기 위한 선거구제 개편 등. 그런 점에서 원칙적으로는 민노당과 시민단체의 주장이 맞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런 근본적 수준의, 사상적/철학적 논의까지 가야 하는 사안들에 대해 당장 또는 가까운 시일 내에 합의를 이루어낼 능력이 있을까? 그렇다면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사안부터 원포인트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내 손 밑에서 버티다가 원포인트로 예상 가능한 기호 체계에 합류한 딱딱한 껍질의 떡처럼 말이다.
장갑을 끼고 떡을 썰었지만, 그래도 물집이 잡혔다. 그러나 별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야 설날 떡국을 맛있게 먹을 비전에 비하면 얼마든지 감당할 만한 고통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도 그런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