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개신교
    2026-03-25
    검색기록 지우기
  • 자이언츠
    2026-03-25
    검색기록 지우기
  • 우여곡절
    2026-03-25
    검색기록 지우기
  • 안동의료원
    2026-03-25
    검색기록 지우기
  • 전력 확충
    2026-03-2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83
  • [강유정의 영화 in] 칸 경쟁작 트렌드

    막바지로 향해 가는 칸은 황금종려상의 행방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 가능성 있는 작품으로는 루마니아 신예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4months,3weeks and 2Days)’, 그리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가 유력하다. 비교적 뒤늦게 시사를 마친 쥘리앙 쉬나벨 감독의 ‘더 다이빙 벨 앤 더 버터플라이’의 반응 역시 평점 2.9로 나쁘지 않다. 매일 경쟁 부문 영화에 평점을 주는 스크린 인터내셔널과 르 필름 프랑세즈는 이 두 작품에 대해 각각 3점 이상의 평점을 부여했다. 프랑스 영화 ‘사랑의 노래’에 스크린 인터내셔널이 1.1을 그리고 르 필름 프랑세즈는 3점 이상의 평점을 준 불균형을 생각해보면 주목은 당연한 듯싶다. 기대를 모았던 김기덕 감독의 ‘숨’은 1.7점 정도의 평점을 획득했다. 양쪽의 평점을 모두 3점 이상 받은 영화는 이 두 작품이 유일하다. 경쟁작 스물 두 편 중 세 편의 상영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이 두 작품을 중심으로 수상 가능성에 대한 조심스러운 예측이 힘을 얻어 가고 있다. 영화제 8일째,23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7시·10시에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언론 시사를 마쳤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현지 관객들은 송강호의 연기나 개신교도들의 과도한 열정에 영화가 의도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설교 도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가 나왔을 때는 웃음이,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 교회에 나가야 한다며 설득하는 집사의 말에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사 후 반응은 아직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1000여명이 넘게 수용되는 드뷔쉬 극장은 관객들로 가득 찼지만 기립 박수나 환호성은 나오지 않았다. 신과 인간의 문제라는 보편적 주제로 볼 때 보편성은 있지만 한국 상황에 토착화된 개신교 형태라는 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는 추측이 엇갈리고 있다. 영화를 본 몇몇 해외 관객들은 좋았다는 평가와 함께 시종일관 심각한 분위기가 가슴을 답답하게 눌렀다는 평가를 주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24일에 열린 콘퍼런스에도 지속되었다. 외신 기자들은 “왜 신에 대한 문제를 그렸느냐?”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이창동 감독은 인간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창동 감독은 신과 인간의 문제라기보다 신을 믿는 인간의 문제라는 데에 방점을 찍었다. 올해 칸 경쟁작은 형식적 위력과 드라마의 설득력을 지닌 작품들로 대별되어 포진해 있다. 벨 타르 감독의 ‘영국에서 온 사나이’나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침묵의 빛’은 형식적 실험의 한 끝에 놓여 있다. 한편 ‘4개월, 3주 그리고 2일’,‘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이빙 벨 앤 버터플라이’와 같은 작품들은 드라마로 충격과 감동을 전달한다.‘밀양’은 드라마에 주력한 경향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거장의 반열에 오른 몇몇 기존 감독들의 작품들에 대한 반응은 미온적이다. 구스 반 산트의 ‘파라노이드 파크’나 왕가위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스 프루프’ 같은 작품들은 훌륭하지만 새롭지 않다는 평가가 대세다. 60주년을 맞은 칸 영화제는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여러가지 새로운 변화들을 시도하고 있다. 황금 종려상의 행방은 칸의 전통과 정치적 안배에 따라 판가름날 듯싶다. 우리 영화 ‘숨’ ‘밀양’과 관련된 희소식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평론가/칸에서
  • [지방시대] 5·18정신의 진정한 의미/김준태 시인·조선대 교수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을 예증하듯이 5·18은 엄청난 상처였으나 마침내 민주주의의 승리로 이어졌다.12·12와 5·17 쿠데타에 이어 광주학살을 자행한 신군부 세력이 민족과 민주주의에 준거한 역사적 단죄를 피할 수 없었음이 그것이다. 이른바 전직 두 대통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세기적 재판’을 받기 위해 ‘나란히’ 법정에 서야 했다. 1996년, 대법원은 피고들을 판결하면서 “우리나라는 제헌헌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주권주의,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의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하는 헌법질서를 수립한 이래….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명백한 선언을 했다. 1980년 5월 이후 계속되어온 ‘5월싸움’은 어김없이 모든 시민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먼저 5·18은 시인 김정환이 노래했듯이 ‘끝까지 우리들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던’ 나눔과 베풂의 문화를 창출한 공동선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계엄군이 투입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시민들끼리는 살인·강도·절도사건 하나 없이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를 아름답게 재현했는데 그것이 이후 한국사회 시민운동의 도덕적 모델이 되었다. 둘째로 분단국가에서는 여차하면 군부세력이 출몰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5·18의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 시민대중은 국토와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외세에 의존하는 단순한 환상에서 벗어나 ‘주권국가’로 일어서자는 의지가 확실한 목소리로 표출되었다는 것이고 넷째는 서로 다른 성격의 부문 운동이 종국엔 하나로 만나는 연대운동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다섯째로는 1948년의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의 재조명과 역사재평가운동 등이 그것이다. 여섯째로는 불교·천주교·개신교 등이 각 종파를 초월하여 ‘함께하는 나라사랑운동’이 우선 큰 족적을 남겼다. 그렇다. 이 땅의 민주주의운동과 통일운동에 온몸을 바친 젊은 영혼들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는 경구가 말해주고 있듯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만큼이라도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한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이다. 5·18의 연장선상에서 촉발된 1987년 ‘6월항쟁’에 동참한 대다수 국민들의 결집된 역량이 마침내 나라발전에 커다란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사실 또한 역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5·18은 우리나라 전체구성원과 해외 700만 동포,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의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읽혀지면서 자유와 평화, 인권운동으로 보편성과 영원성을 부여받고 있다. 해마다 5월 그날이 돌아오면 노래처럼 입술에 올리고 싶은 슬로건이 있다.‘5월에서 민주주의로,5월에서 통일로’가 그것이다. 결국 이 말에서 찾아지는 5·18의 진정한 의미는 갈라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됨’ 속에서만이 완성될 수 있다는 얘기다. ‘서로 손잡고 서로를 위로하며 어루만져주는 세상’그것이 5월정신이기 때문이다. 김준태 시인·조선대 교수
  • 교황 브라질 가자마자 ‘낙태 반대’ 화두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9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에 도착,4박5일간의 일정에 들어갔다. 취임 2년 만에 이뤄진 교황의 이번 방문은 전통적인 가톨릭 강국 중남미에서 신자 감소와 낙태 허용 논란 등 가톨릭 위기론이 심화되는 시점에 이뤄진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날 오후 상파울루시 국제공항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 수천명의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교황은 도착 성명에서 “이번 중남미·카리브 주교회의가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 중남미 순방의 최대 화두인 낙태 문제를 강조한 발언이다. 보수주의자인 교황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가톨릭 국가들의 낙태 합법화 움직임에 강한 불만을 보이고 있다. 교황은 브라질행 비행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멕시코 가톨릭계가 낙태합법화 법안에 찬성한 의원들의 교적을 박탈하기로 한 결정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룰라 대통령은 앞서 가톨릭라디오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개인적으로 낙태를 반대하지만 불법 낙태로 숨지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에 의료안전이라는 차원에서 정부가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낙태 문제와 더불어 가톨릭 인구의 감소도 교황에게는 힘든 과제다. 브라질의 경우 1991년 81%였던 가톨릭 인구 비율은 2000년대 64%로 떨어졌다. 교황은 로마를 떠나기 전 “개신교로의 탈출이 우리의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망은 밝지 않다. 교황은 10일 오전 룰라 대통령과의 면담에 이어 30여만명이 열리는 청소년 미사를 주관하는 등 12일까지 다양한 일정을 소화한다.13일 이번 방문의 주 목적인 중남미·카리브 주교회의 개막식을 주관하는 것을 끝으로 중남미 순방을 마무리할 예정이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교단창립 100주년 성결교회 다짐

    ‘몸은 나뉘었지만 마음은 하나로´ 교단 창립 100주년을 맞은 성결교회가 이 교회 초기의 신앙 정체성 찾기를 선언하고 나섰다. 대대적인 100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초심을 회복하고 교회 본연의 ‘빛과 소금’을 되찾아 대사회적인 운동에 적극 나서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성결교회는 지금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총회장 이정익 목사)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총회장 신화석 목사)) 등 두 개의 교단으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한 지붕 아래 살았었다.1907년 당시 경성부 종로 염곡(무교동)에서 시작한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 그 모태다. 일본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 귀국해 셋방을 얻어 개설한 복음전도관에서 5월30일 창립집회를 연 것이었다. 도쿄성서학원은 미국인 코만과 길버른이 ‘요한 웨슬레’의 성경적 복음신앙을 이어받아 동양 모든 나라에 ‘성결의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 아래 ‘동양선교회’를 조직하고,1901년 일본 도쿄에 설립한 전도자 양성기관. 성결교회의 창립자 김상준과 정빈은 동양선교회의 정신을 한국에 전한 최초의 전도자인 셈이다. 국내 개신교의 거대 교단이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져 성장한 공통점을 갖는 것과는 달리 성결교회는 이처럼 한국인에 의해 창립돼 복음을 전해온 최초의 자생교단으로 주목받아왔다. 그런 때문인지 이 교회의 신도와 목회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은 아주 크다. 현재 기성에 소속된 교회는 2740여개, 신자 수는 72만 4000여명에 달한다. 예성은 이에 비해 조금 규모가 작아 1100여개 교회에 50만명의 신도가 적을 두고 있다. 복음전도관에서 성결교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1년. 이후 자생교단의 특성을 내세워 교세를 키워왔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국내 개신교계에 몰아친 폭풍에 휘말려 분열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교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 빠졌으며, 성결교회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NCC)와 복음동지회(NAE) 가입을 놓고 의견이 갈려 1961년 두 집살이를 시작했다. 교단이 다른 만큼 100주년 행사도 따로따로 치를 예정. 우선 기념행사를 예성은 20일 오후 경기도 안양 성결대학교 대운동장에서, 기성은 27일 오후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각각 갖는다. 행사는 따로따로 열지만 목표는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기성은 이날 감사예배와 함께 교회의 사회봉사활동 확대에 초점을 맞춘 100주년 비전과 대사회 사명 선포, 장기기증 및 헌혈 서약서 전달식을 마련한다. 목회자 2000명, 교인 30만명을 목표로 장기기증의 생명나눔운동을 펼치고, 노숙자와 생활보호대상자를 위한 사랑나눔운동도 벌여나간다. 예성의 기념대회에선 전세계 36개국에 파견되어 있는 선교사와 평신도 2만여명이 참석해 감사예배와 100주년 선언문 낭독을 하게 된다. 전국교회에서 서약한 장기기증서 전달, 일본군 위안부와 북한 어린이를 위한 성금 전달도 있을 예정이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문화마당] 라이시테/김다은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숟가락을 막 들었는데, 식탁 앞 친구가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숟가락을 도로 놓을 수도, 밥을 퍼먹을 수도 없다. 그 짧은 순간, 허공에 매달린 숟가락은 민망하다. 한국인 식탁에서 한번쯤은 경험해 본 장면일 것이다. 그런데 1000여년의 가톨릭 전통을 가진,4명 중 3명의 종교가 가톨릭이라고 대답하는 프랑스(2002년 자료)에서는 식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톨레랑스(관용)와 함께 프랑스 문화의 기본정신을 이루는 라이시테(laicite) 때문이다. 번역하면 ‘비종교성’ 정도 된다. 비종교성은 종교를 부정하는 반종교성은 아니다. 비종교성은 ‘정치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정신이다. 그런데 밥상 앞에 무슨 정치성이 있을까? 최초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왕권과 교권이 연합하여 국민들의 정신과 생활전반을 지도했다. 하지만 왕권과 교권은 수시로 충돌했고, 더구나 프랑스 대혁명 때는 왕권과 교권 모두 타도 대상이었다. 좌파에 해당하는 혁명 주동자들이 신부들을 처형함으로써 교회는 정치적 우파와 동일시되었고, 프랑스 전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을 심고자 하는 ‘적색파’와 전통적인 정치와 가치를 보존코자 하는 사제 중심의 ‘백색파’로 나누어졌다. 점점 전 국민이 적색과 백색의 피 말리는 색깔 논쟁에 휘말렸고, 한 집안의 밥상 앞에서도 기도를 하자 말자로 식사를 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라이시테는 19세기 내내 지속된 공화주의적 반교권주의와 가톨리시즘의 처절한 싸움 뒤에 형성된 개념이다.1905년 프랑스 정부는 정교 분리법을 통과시켰고, 이로써 밥상뿐만 아니라 책상 앞에서 교사가, 연설 단상 앞에서 정치가가, 공식석상에서 국가가 특별한 종교를 표방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대통령 당선자가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선서를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프랑스는 2004년에도 우파와 좌파의 합의하에 ‘과시적인’ 종교적 표지를 드러내는 복장을 공교육기관에서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프랑스의 라이시테가 떠오른 것은 최근 대권 주자들이나 종교 원로들의 ‘과시적인’ 언행 때문이다. 마음속으로야 대한민국을 통째로 하나님께 바쳐도 좋지만, 수도 서울은 국민의 것이니 이명박 전 시장이 공식석상에서 제 마음대로 바치면 반칙이다. 가톨릭 신자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이 절 저 절 옮겨 다니며 탈당을 결심하는 과정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박근혜 전 대표의 ‘기불릭(기독교+불교+가톨릭)’적 종교 태도도 정치적 함의로 오염된 면이 없지 않다. ‘교육법 재개정’을 위한 개신교의 집단적인 삭발,‘원탁회의’라는 용어를 빌린 진보 종교계의 움직임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들의 ‘과시적인’ 종교적 언행과 종교인들의 ‘과시적인’ 정치적 언행은 종교와 정치가 서로 연합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던 전근대적 문화 마인드를 상기시킨다. 종교인이나 비종교인이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정치인도 어떤 종교나 신을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하지만 ‘가톨릭의 첫째딸’인 프랑스가 밥상에서조차 기도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한번쯤 눈여겨보자. 일용할 양식을 준 신에게 감사드리는 단순한 기도도 상대방을 민망하게 만드는데, 종교와 정치가 뭉쳐 이데올로기적 편가르기를 하면 서로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겠는가. 국민들은 밥상 앞에서, 책상 앞에서, 연설 단상 앞에서, 국가 정체성 앞에서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해야 하고, 결국 끝없는 갈등과 반목의 전쟁판에 뛰어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한 가족이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까 걱정하면, 기우일까? 김다은 소설가 추계예술대 교수
  • [열린세상] 더불어 사는 사회의 종교/정문성 울산대 물리학 교수

    [열린세상] 더불어 사는 사회의 종교/정문성 울산대 물리학 교수

    10년 전쯤 일이다. 모스크바 공항 출국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한 사람을 에워싸면서 감격스러워하고, 둘러싸인 당사자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한 팔을 치켜올리며 승리의 제스처를 취하였다. 마침 옆에 있던 필자는 그들이 우리나라 선교일행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 대학교수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온 종교인들이 취업까지 내걸며 개종을 권유하여, 한국인의 선교활동을 막아달라고 정교회에서 청원했다는 내용이다.3년 전에는 전쟁지역인 중동 이슬람 국가로 기독교를 전도하러 간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보다 타종교를 배려했다면 발생하지 않을 모습일 듯하다. 최근 개신교의 현저한 활동은 경제적 여건과 근본주의 색채와 관련되어 보인다. 어느 교회는 크게 짓다가 외환 경제위기를 맞아 100억원 정도의 빚을 졌다고 한다. 지금 그 빚을 다 갚고, 또 주위의 부동산도 사들였다. 해외선교를 도와주고, 북한도 도와준다고 한다. 행사를 자주 벌이고, 교인들의 활동이 자못 활발하다. 새벽에도 인도에까지 주차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한국의 신앙 활동이 구미 사람들에게는 광신으로 보일 거라는 신학대학 유학생의 말이 생각나게 하는 모습들이다. 사실 교회의 성격은 목회자에 따라 차이가 많이 난다. 가톨릭에 비해서도 훨씬 자유롭고 다양할 수 있는 체제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는 맹목적이고 교리에 더 경직된 듯하다. 역사에 의하면 가장 비참한 일은 종교전쟁이다.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 사이의 반목은 경계수위라고 믿어진다.2005년 통계에 의하면 종교인은 전체 인구의 53%이다. 그 분포는 불교 43%, 개신교 34%, 가톨릭 21%이고, 나머지 2%를 20여개의 군소 종교가 차지한다. 이들 종교간 마찰이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두되는 큰 문제는 오직 근본주의 교리로 배타주의를 내세우는 일부 개신교와의 갈등이다. 그 개신교 성직자들은 정치적 NGO를 만들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며, 보다 강하게 자기의 의견을 주장한다. 분포율이 다소 줄어들고 있다지만, 실제 개신교의 영향은 더 커지고 있어, 갈등이 점점 불거지고 있다고 할까. 현재 개신교와 우리 전통과의 충돌은 정말 걱정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보는 교리 때문에 가족 간에 불화가 빈번하다. 단지 보존하기 위한 전통의식도 우상숭배라 단정한다. 대학 캠퍼스에서 장승들이 세워지던 시절의 일이다. 학생들이 세운 천하대장군을 한밤중에 누가 불태웠다. 그러자 학생들이 불타지 않게 처리한 장승을 다시 세웠다. 범인은 이번에는 톱을 가지고 자르려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착실한 엘리트 신자였다. 누구나 교리에 집착하면 사회의식을 상실함을 보여준다. 일부 목회자들이 신자들을 소설 다빈치코드의 실라와 같이, 타파를 사명으로까지 느끼도록 몰아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과거 유럽처럼, 종교관이 다르다고 끝까지 싸울 것인가. 참 안타깝다. 종교는 자기의 교리의 우월성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사회의 종교라면 남의 기준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사회의 정신으로, 또 바른 신앙을 위해 의문을 품는 아퀴나스와 같은 정신으로, 첨예한 문제인 우상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오래 전에 행해진 우상에 대한 판단은 정확한 근거에 의한 것인가. 십자가가 우상이 아니듯이, 남의 상징물도 우상이 아닐 수는 없을까. 근본적으로 인간이 우상의 가부를 판단할 수 있을까. 어떻든 본래 목적에 충실한 종교라면 교리는 시대에 따라 변할 듯하다. 그렇다면 타종교와 전통문화를 어우르는 변화를 간절히 고대해본다. 사회가 격변하면서 갈등들이 표출하는 시기라, 그에 맞는 참다운 소금의 역할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정문성 울산대 물리학 교수
  • 사학법 재개정에 반대 후보 개신교“총선·대선 낙선운동”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개신교계가 “사학법 재개정에 반대하는 대선ㆍ총선 후보자들에 대해 조직적 낙선운동을 전개하겠다.”고 18일 밝혔다. 기독교사회책임(공동대표 서경석 목사)은 “현행 사학법은 선교의 자유와 사학의 자율을 침해하는 법률”이라며 “사학법 재개정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대해 조직적 낙선운동을 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최근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탈당그룹인 통합신당모임, 민주당 소속 의원들에게 사학법 재개정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질문지를 발송했고, 답변 여부에 따라 낙선운동 대상자를 정할 방침이다. 한국미래포럼(사무총장 김춘규)도 이날 주요 교단 소속 평신도 11만여명의 명의로 성명서를 내고 “정치권이 기독교 사학을 잠재적 범죄집단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4월 임시국회 회기중 사학법이 재개정되지 않을 경우 재개정에 반대한 의원들에 대해 낙선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한기총,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ㆍ총회장 이광선 목사) 등 개신교계 주요단체들은 17일 여의도 모 호텔에서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만나 “이달 말까지 사학법을 재개정해 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유럽 축하행사 다양

    |파리 이종수특파원|16일로 80회 생일을 맞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축하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유럽에서 벌어진다. 로마에서는 전날인 15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대규모 미사가 열린데 이어 이날 저녁에 축하 콘서트가 열린다. 낮에는 12명의 추기경이 베네딕토 16세의 초청으로 점심을 함께 먹으며 베네딕토 16세의 건강을 기원한다. 또 이날 교황 취임 이후 첫 저작인 ‘나사렛 예수’도 출간된다. 특히 교황이 태어난 독일의 열기가 뜨겁다. 라디오 방송 네트자이퉁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교황의 생일 선물로 ‘1시간 라틴어 방송’을 준비했다.”고 발표했다. 교황의 출생지인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 인에서는 전날 ‘베네딕토 16세 기념 박물관’을 개장했다. 이 박물관은 독일의 한 가톨릭 재단이 교황이 태어난 마르크틀 경찰서 건물을 매입해 박물관으로 단장했다. 앞서 13일에는 독일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과 개신교 협의회장이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쾰러 대통령은 메시지에서 “당신의 삶과 생각은 교회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과 감동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고 AP 통신이 전했다. 이어 “당신의 교황 선출은 독일인에게는 특별한 어떤 것을 뜻한다.”며 “독일 대통령으로서 당신이 비길 데 없는 직책을 맡고 있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본명이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인 교황은 1927년 마르크틀 암 인에서 경찰관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2005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베네딕토 16세라는 이름을 받았다.vielee@seoul.co.kr
  • 이어령 전 문화장관 세례받는다

    이어령(73) 전 문화부 장관이 세례를 받고 개신교에 귀의할 뜻을 밝혔다. 이 전 장관은 12일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오래전부터 지성인으로서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 왔지만 이제는 영적 측면에서 다가가고자 한다.”며 “7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이 기독교에 귀의하겠다는 배경에는 딸 민아(47)씨가 겪었던 오랜 시련이 큰 작용을 했다.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가 변호사가 된 민아씨는 1992년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는 오랜 투병 생활을 했다. 이 전 장관은 “딸의 고통 앞에서 아버지가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딸이 오랫동안 믿어온 하나님은 기쁨을 주고 상처를 치유해줬다.”면서 “딸이 믿는 대상에 대해 지성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다가가고 그런 믿음을 딸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연합뉴스
  • [종교건축 이야기] (25) 인사동 승동교회

    [종교건축 이야기] (25) 인사동 승동교회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인사동 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을 들어서면 초입 왼쪽 좁은 골목 끝의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교회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골동품 가게며 크고 작은 현대식 건물들이 어수선하게 엉킨 풍경에선 영 생뚱맞게 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뾰족집 승동교회(종로구 인사동 137·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다. 인사동을 찾는 이는 물론 주민들도 대부분 존재 자체를 잘 알지 못하는 이색 공간. 이처럼 생소하지만 1904년 이후 줄곧 지금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해온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교단의 대표적인 모교회다. 특히 일제 치하 3·1운동의 중심지이자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곳. 통합·합동으로 갈라진 대한예수교장로회 분열의 현장이란 아픔을 함께 담고 있는 개신교계의 또렷한 유산이다. 승동교회의 뿌리는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인 옛 곤당골의 작은 한옥에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새뮤얼 포먼 무어(1860∼1906·한국명 모삼열) 목사가 1893년 시작한 목회. 곤당골이란 청계천 변에 고운 담(곤담)이 둘러쳐져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당시 주변에는 백정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교도소 수감자와 빈·천민 대상 사목으로 널리 알려진 모삼열 목사가 이 곤당골에서 최하층 신분의 백정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시작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초창기 예배에 이 백정들을 중심으로 16명의 교인이 참여했는데 그 때문에 승동교회에는 지금도 ‘백정 교회’라는 이름이 별명처럼 따른다. 곤당골 교회가 인사동에 한옥을 사들여 이사한 것은 2대 당회장인 이눌서(W.D.Reynolds) 목사가 시무하던 1904년 10월. 이듬해부터 새 예배당 건립에 나서 1912년 지금의 본당 골격을 갖췄다. 원래 적벽돌을 쌓아 박공 지붕을 인 정방형의 벽돌조 로마네스크 건물이었는데 1959년 앞 출입문쪽 신자석 공간을 늘린 증축공사로 초기의 모습을 잃었다. 초창기엔 앞쪽에 두 개의 출입문을 따로 내 남녀 신자들의 출입과 예배 공간을 구분했지만, 지금은 증축된 공간 쪽으로 한 개의 통합문을 내어 당시와는 영 딴판이다. 그나마 독경대를 비롯한 중앙의 의식공간은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본당 주변에 흩어져 있던 옛 모습의 한옥들은 전도회 장소로 쓰이고 있다. 지하엔 기도실과 교역자실, 상담실, 유치원, 성가대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그런데 인사동에서 ‘승동’이란 옛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승동의 원 명칭은 인근 절골(寺洞)로 이어지는 마을이란 뜻의 승동(承洞).1907년 이 교회에서 장로교 경기도연합부흥회가 열렸는데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던 길선주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웃 절골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이길 승(勝)자를 쓰기 시작, 그때부터 승동(勝洞)교회가 됐다고 한다. 교회 이름에 얽힌 사연은 썩 내키지 않지만 승동교회는 이후 여러 이유에서 한국 개신교계의 중요한 신앙 터로 거듭 주목받았다.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들이 자의반 타의반 동참했던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반성에 앞장섰던 것도 그중 하나.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38년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를 열어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는데,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승동교회 총회에서 ‘당시의 신사참배는 잘못된 것’이라며 무효선언을 해 세상의 관심을 모았던 것이다. 백정교회 이후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신앙철학을 지킨 역대 목회자들도 교회를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주 요인이다. 특히 김익두(9대·1935∼1938년 담임) 목사와 뒤를 이은 오건용(10대)·이덕흥(11대) 목사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된다. 황해도 안악 태생인 김익두 목사는 원래 불량배 출신이었으나 부흥사가 돼 이 교회를 이끈 인물. 몸이 아픈 신자들을 치료하는 재능이 탁월했는데 그의 설교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전해진다. 구름처럼 몰려든 신자들을 두려워한 일제가 김 목사와 교회를 탄압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결국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맞섰던 김 목사는 강제로 물러난 뒤 6·25전쟁때 새벽기도회를 하던 중 퇴각하던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오건용·이덕흥 목사는 맹인들을 위한 신앙공간이 없던 무렵 맹인 선교에 치중해 대부분의 맹인 신자들이 이 교회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을 놓고 용공성 시비 끝에 의견이 나뉘어 장로교가 갈라진 것은 한국 개신교계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당시 WCC 가입에 반대하던 측은 승동교회에서, 찬성하던 측은 연동교회에서 각각 총회를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합동(승동교회측)과 통합(연동교회측)으로 교파가 나뉘었다. 갈라진 지 43년 만인 지난 2002년 6월 양측 교회가 극적으로 교환예배를 갖긴 했지만 교회의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지금 이 교회에 적을 둔 신자는 3000명. 이 가운데 예배 출석 인원은 1500명 정도로 대를 이어 이 교회를 다닌 신자가 30%를 차지한다고 한다. 신자들이 사는 곳도 분당, 안산, 춘천 등 다양해 그야말로 전국적인 교회인 셈이다. 다른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승동교회만의 특징은 노인 사목. 인근 탑골공원을 찾아 노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세례를 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승동교회를 찾아와 신도가 됐다고 한다. 10년 전부터는 탑골공원을 자주 찾는 노인들을 중심으로 노인 위주의 장년 2부를 운영해 지금은 매주 300여명의 노인이 예배에 참석한다. 세례 받은 노인들은 사후 경기도 백석의 승동동산 묘역에 안치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찾아와 신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상훈(54) 담임목사는 “승동교회는 드물게 도심 복판에 남아 있는 전통적인 교회”라면서 “초기의 ‘백정교회’ 이후 사회 기여 차원에서 일관성 있게 목회와 신앙을 이어온 흔치 않은 공간”이라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3·1운동 유적지’ 지정된 항일역사의 산실 승동교회는 비록 많은 이들에게 ’잊혀진 교회’가 됐지만 일제 강점기 항일 민족운동의 구심점이자 3·1운동의 본산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1900년대 초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예배를 보면서 민족주의의 색채를 띠어간 승동교회는 청년운동의 주축인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를 태동시켰고 한신대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낳은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1919년 3·1운동에 앞서 학생 대표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모의한 학생지도자회의가 열렸던 현장임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승동교회 청년모임인 청년면려회장이었던 김원벽은 연희전문대생으로 학생들의 큰 신망을 얻었던 인물. 김원벽을 주축으로 한 전국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지하실(지금의 기도실)에 모여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문을 나눠 갖고 3월1일 거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조계사 뒤쪽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문은 거사 전날인 2월28일 새벽부터 전국에 전달됐다. 이 가운데 1500여장이 승동교회에 모였던 학생대표와 신자들을 통해 서울 시내 각처로 배포됐다. 학생 대표들은 3·1운동 나흘 뒤인 5일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다시 일으켰는데, 현장에서 일경이 휘두른 칼에 찔려 체포된 김원벽은 3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3·1운동 직후 당시 승동교회 담임이었던 차상진 목사가 주도한 이른바 ‘십이인등의 장서(十二人等의 長書)’ 사건도 유명한 일화다. 차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12명이 연서해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장서를 종로 보신각 앞에서 발표한 뒤 총독부에 제출한 사건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이같은 사연으로 인해 승동교회는 지난 1993년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됐으며 매년 3·1절 주일마다 3·1정신을 기리는 예배가 올려지고 있다.
  • ‘비폭력 평화정신’ 함석헌 사상가 반열에

    ‘한국의 간디’ 함석헌(1901∼1989)의 철학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집 ‘씨알 생명 평화(씨알사상연구회 지음, 한길사 펴냄)’가 발간됐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함석헌의 철학이 다산 정약용에 이은 20세기의 한국철학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의 독실한 개신교 장로교회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16살에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 3·1운동에 가담한 연유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오산학교로 편입한다. 함석헌이 평생동안 진리의 화두로 삼았던 ‘씨알(원래 알의 ㅏ는 아래아 ㆍ다)’사상은 이때 오산학교에서 싹텄다.일본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독창적인 민족사관을 형성하고, 이후 오산학교에서 10년간 역사 교사생활을 하게 된다.1938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탄압이 노골화되면서 학교에서 추방당한 함석헌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 등으로 일제시대에 모두 4번 감옥을 가게 된다. 47년 공산주의자들의 회유 정책을 피해 가족을 뒤로 하고 월남한 함석헌은 이후 수염을 깎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성서 공부 모임을 계속했던 그는 56년 진보 월간지 ‘사상계’에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을 발표하면서 큰 호응을 얻는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적극 참여해 70년 일흔살의 나이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다. 진보적 기독교 지식인과 재야운동을 펼친 그는 76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85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다.87년 암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던 중 89년 일흔여덟의 나이로 소천했다. 함석헌은 신앙과 교육을 비롯해 농사를 생의 지표로 삼았다. 씨알사상은 그가 농사꾼의 한 사람으로서 터득한 지혜 및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김명수 경성대 신학대학장은 판단했다. 스스로 ‘한국의 간디’라 불리는 것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던 함석헌은 24∼25년 로망 롤랭의 간디전을 읽은 이후 평생 간디가 간 길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가 간디를 사랑하고 존경한 이유는 “조직적인 악에는 조직적인 사랑으로 대항할 것과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이기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간디를 씨알 중의 씨알로 삼았던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겉장에 “씨알은 자기 교육의 기구이자 어떤 종교, 어떤 정치 세력과도 관계가 없다.”며 “스스로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을 제 사명으로 안다.”고 천명했다. 종교는 정치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함석헌은 이를 평생 화두로 삼았다. 종교인이면서도 정치악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치는 나에게는 성가신 일입니다. 내가 정치를 털어버릴 수 있다면 기뻐 춤출 것입니다.”라고 간디봉사회 앞에서 연설했다. 일부 기독교는 ‘거대한 이기주의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는 한국의 종교 현실에서 함석헌의 겸손하고 진실을 추구했던 사상은 ‘큰 모순의 바위에 큰 쇠망치를 내린 것’과 같을 것이다.656쪽.2만원.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부활절 연합예배 첫 ‘성찬성례’

    부활절 연합예배 첫 ‘성찬성례’

    한국 개신교 부활절 연합예배 사상 처음 ‘성찬성례’의식이 재현된다. 다음달 8일 오전 5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10만여명이 참여해 열리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참여교회 소속 목회자들이 신도들에게 성찬성례를 직접 집례하는 장관이 연출된다. ‘성찬성례’란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 전날 밤 12명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희생을 기념해 의식을 거행하도록 한 전례. 기독교계에선 초대 교회 때부터 행해진 감사와 기념의 전례이지만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선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이날 성찬성례는 오전 6시10분부터 약 20분간 진행될 예정이다. 의식복인 스톨(영대)을 차려입은 목회자들이 일제히 포도주가 담긴 성찬기를 들고 신도에게 포도주를 묻힌 빵을 나눠주게 된다. 약 4000명의 목회자들이 예배 참석신도 모두에게 일일이 집례한다. 목회자들이 착용할 스톨은 부활의 상징색인 백색 바탕에 꽃·새 그림과 십자가를 새겼으며 하단에는 공동주최측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로고를 함께 넣었다. 포도주가 담길 성찬기 역시 흰색 바탕에 양측 로고를 함께 새겼다. 부활절연합예배 준비위측은 “그동안 각 교단과 한기총·KNCC의 입장이 달라 성찬성례를 하지 않았으나 평양대부흥회 100주년과 부활절 연합예배 60주년을 맞아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됨’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李·朴 ‘종교계 잡기’ 신경전

    한나라당 양대 대선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가 경선 룰과 검증공방에 이어 종교계 우군 만들기 신경전을 펴고 있다. 공세는 박 전 대표가 먼저 취할 태세다. 이 전 시장이 비서실장인 주호영 의원의 불교 인맥을 통해 개신교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노력 중인 것과 달리 박 전 대표는 지난 한 달간 종교행사라고는 사찰 방문밖에 없어 대조적이었다. 박 전 대표 측의 일정담당자는 “그동안 기독교는 이 전 시장의 색채가 강하다는 오해가 있었는데 이제부터 박 전 대표도 본격적으로 기독교와의 접촉을 늘릴 것”이라며 “4월에 기독교 관련 2개의 공식행사에 일정이 잡혀 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관계자와 조용기 목사와도 만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정현 공보특보는 “박 전 대표는 사학법 재개정과 관련해 종교계, 특히 기독교와 공동투쟁을 한 적이 있다.”며 “박 전 대표도 기독교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는 비공개로 기독교 인사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박 전 대표 측은 자신의 종교가 ‘기·불·릭’(기독교·불교·가톨릭)임을 강조할 방침이다. 반면 이 전 시장은 기독교 색채가 뚜렷해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다.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라는 발언으로 불교계로부터 반발을 산 후 불교계와의 화해에 꾸준히 주력해 왔다. 불교계 창구역인 주호영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발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 전 시장 측의 송태영 공보특보는 “지방을 방문할 때 빠지지 않고 그 지역 사찰을 방문한다.”며 불교에 대한 이 전 시장의 각별한 애정을 강조했다. 한편 이 전 시장과 박 전 대표는 27일 대구가 오는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유치한 것과 관련, 앞다퉈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종교건축 이야기] (24) 춘천 죽림동 성당

    강원도 춘천 시내의 언덕 지대인 약사리 고개에 우뚝 선 죽림동 주교좌성당(등록문화재 54호·죽 림동 38)은 춘천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이다. 신도들이 자생적인 신앙의 싹을 틔워 공소·본당에서 주교좌성당까지 이끌어냈고 그 과정에서 숱한 희생이 따랐다. 지난 1990년 후반까지만 해도 4000여명이 미사에 참석할 만큼 교세가 컸던 본당. 개발 바람이 불어 인근 지역에 아파트 단지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신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지금은 ‘주교좌성당’의 명맥만 근근이 이어가는 형편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태동기부터 고난의 신앙 역정을 모두 견뎌내고 묵직하게 선 ‘맏형’격 신앙터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죽림동 성당의 역사는 1920년 본당으로 설립된 곰실 공소로부터 시작된다. 당시만 해도 강원 중심 본당인 횡성 풍수원 성당의 신부가 이 지역의 작은 공소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에서 동쪽으로 5㎞ 떨어진 외딴 곳의 곰실 공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신도가 늘어나면서 본당 설립을 요청했고 마침내 1920년 본당이 설립돼 당시 풍수원 성당의 보좌였던 김유용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모셔왔다. 이후 신도들은 춘천 시내에 성당을 마련하기 위해 밤낮없이 함께 가마니를 짜고 짚신을 삼아 내다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지금의 성당 아래 골롬반의원 터와 아랫마당, 수녀원 터를 사들여 성당을 세운 게 1928년 5월이다. 지금의 성당은 이 부지에 보태 1939년 서울(경성)대목구에서 춘천 지목구가 분할되면서 부임한 구인란(Quinlan) 주임신부와 신도들이 약사리 고개 언덕의 도토리 밭을 추가로 매입해 마련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성당 모양새만 갖췄지 구조며 성물은 변변치 못했던 것 같다. 결국 1941년부터 새 성당을 지을 계획을 세웠는데, 성당 벽의 라틴어 초석이 말해주듯 일제의 살벌한 감시와 박해로 8년 뒤인 1949년 4월5일에야 착공할 수 있었다. 전남 광주의 ‘자’씨 성을 가진 화교 기술자가 설계와 건축을 맡았다. 홍천 발산리 강가에서 석재를 날라다 외벽을 모두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어 내부공사를 하던중 6·25전쟁이 터졌다. 한쪽 벽이 모두 무너지고 사제관이며 부속건물이 대파되었는데 전쟁 중에도 복구작업을 벌여 1956년 6월 마침내 주교좌 성당 축성식을 가질 수 있었다. 이후 교구 설정 60년을 맞은 1998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가회 작가들이 힘을 모아 제대며 내부 성물들을 새롭게 꾸몄는데, 물론 외벽이며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성당은 명동성당의 옛 십자가와 똑같은 모습의 십자가와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이 작은 십자가는 서울대교구에서 갈라져 출발한 교구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성당에 들어서려면 둔중한 청동 문을 지나야 하는데 성당 건립을 관할했던 성골롬반외방선교회를 기리는 한 쌍의 아일랜드풍 십자문양이 새겨져 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주로 강원과 호남 지역을 관할했는데 죽림동성당에서도 1939년부터 30년간 모두 11대에 걸쳐 이 선교회 소속 신부가 주임을 맡았다. 지금도 성당 입구엔 이 선교회 소속 수녀원이 있으며 성당 아래쪽 병원의 이름도 여전히 ‘성골롬반 의원’. 지역 주민들에게 ‘성당 병원’이라 불리는 이색 공간이다. 고풍스러운 외벽과는 달리 내부는 현대식으로 가꿔져 대조를 이룬다. 양쪽 벽을 두른 정감어린 예수 고행 14처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이 성당의 핵심은 역시 감심과 화강암 제대, 독경대, 주례석, 촛대로 구성된 중앙 제대 공간. 한국 천주교계에서 성미술과 전례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것으로 정평난 장익 주교와 가톨릭 미술인들이 뜻과 품을 모은 작품들이다. 요즘 새로 짓는 성당들이 모두 이곳에 와 그야말로 ‘한 수 배워간다’는 바로 그 이름난 전례공간이다. ‘파격의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성당 뒤쪽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이내 낯선 광경을 만나게 된다. 이 성당에 몸을 담았거나 강원 지역에서 희생된 내외국인 성직자 유해 16구를 모신 성직자 묘역이다. 성당 본당에 바로 붙여 묘지를 쓴 흔치 않은 곳이다. 묘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전쟁기 북한으로 끌려가다 순교한 신부들. 전쟁 발발 당시 보좌신부였던 프란치스코 신부와 라바드리시오 신부, 고안당 신부, 진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눈에 띈다. 외국인 신부들 틈에 나란히 누운 한국인 이광재 신부는 원산까지 끌려가 어느 방공호에서 선종했다고 한다. 춘천교구는 해마다 11월 첫 주간을 ‘위령의 달’로 정해 이 ‘죽음의 행진’에서 희생된 사제들의 넋을 위로한다. 이 ‘위령의 달’ 행사에는 춘천 지역 사제와 신도들이 모두 모인다고 한다. 6·25 전쟁 중 주요 인사들이 쇠사슬에 손이 묶인 채 북한으로 끌려간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서 기독교계도 숱한 희생자들을 냈다. 당시 교황 사절을 비롯해 외국인 사제와 수녀, 개신교 목사 수백명이 평안북도 산골에 강제수용돼 34개월간 포로생활을 했는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성당이 건립될 때 주임으로 있었던 구인란 신부도 미사 도중 끌려갔으나 기적적으로 돌아와 주한 교황청 대사를 지낸 뒤 1955년 초대 춘천 대목구장에 부임했다고 한다. 죽림동 성당과는 아주 질긴 인연을 가진 인물인 셈이다. 이 묘역 바로 뒤편에는 기이한 십자가가 나무에 기대어 서있다. 지난 2000년 대희년 6월25일 춘천교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전국대회’를 열면서 제단에 설치했던 십자가다. 동해안 지역을 휩쓴 화마로 불 탄 소나무에 북한의 주목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분단 교구의 아픔과 신도들의 통일 염원이 서려 있다. 지금 죽림동 성당에 적을 둔 신도는 1600명. 대부분 오래도록 이 성당을 다닌 나이 든 세대들이다. 지난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3800명이 성당을 다녔다고 한다.2000년대 들어 춘천 지역엔 17개의 성당이 새로 생겨나 애막골, 퇴계동, 수무숲 성당같은 곳엔 신도 수가 3000명을 넘는다. 지난 2003년부터 주임을 맡고 있는 김현준 신부는 “지금 죽림동 성당은 옛날의 교세와 모습과는 크게 다르지만 신도들의 자생적인 믿음에서 출발해 신앙 공간을 일군 흔치 않은 성당으로 한국 교회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kimus@seoul.co.kr ■ 죽림동 성당·춘천교구 ‘밀알’ 엄주언 죽림동 성당과 천주교 춘천교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 지역에 신앙의 싹을 틔워 성당을 세워놓은 밀알인 엄주언(말딩·1872∼1955)이다. 한국의 천주교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없이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특징을 갖는다고 할 때 춘천 지역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그 한 가운데 바로 엄주언이 있는 것이다. 춘성군 장학리 노루목에서 태어난 엄주언은 19살때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천주교와 연을 맺었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발상지인 광주 천진암을 찾아 움막생활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영세하도록 인도했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천주학쟁이’로 몰려 따돌림과 온갖 수모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화된 주민들이 차츰 모여들었으며 죽림동 성당의 모태인 곰실 공소를 마련해 예절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된 것도 순전히 엄주언의 공이다. 풍수원 성당과 서울의 명동 성당을 오르내리며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실이다. 본당 설립후 신도들의 애련회를 조직해 춘천 시내로 진입하기 위한 자금 마련에 나서 결국 성당 터를 구입했으며 여기에 6대 춘천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구인란 신부가 인근 밭을 매입해 지금의 죽림동 성당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성당 입구의 사제관과 연결된 말딩회관은 바로 춘천교구가 그의 공을 기려 지난 1997년 건립한 곳으로 춘천 지역 천주교계의 핵심 공간으로 통한다.
  • 도올 “한국 교회 예수 말씀 전혀 안따라”

    도올 “한국 교회 예수 말씀 전혀 안따라”

    EBS ‘요한복음 영어 강의’와 관련, 개신교계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는 4일 “한국 기독교계가 초기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따르고 있지 않다.”며 한국 교회를 재차 비판했다. 김 교수는 이날 서울 회기동 은혜공동체교회(담임목사 박민수)에서 열린 초청강연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서기 313년 이전 초대교회들에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경전이 없었고 교회도 권위적이지 않고 자유로웠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특히 “현재 교회들은 항상 새롭게 거듭 태어날 것을 강조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 않은 채 편협한 권위주의에 젖어 있다.”고 한국의 교회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 교수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한 ‘생명의 나무’는 ‘우주적 나무’여서 모든 사람이 동참해 하나가 되는 생명공동체의 모습”이라며 “로마황제가 공인한 성경에만 매달려 있는 지금의 기독교야말로 반기독교적이고 반성령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은혜공동체교회 측은 “김 교수의 ‘요한복음 강해’ 중 개신교가 귀담아 들을 내용이 많아 초청 강연을 마련했다.”면서 “기독교에 대한 김 교수의 비판은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교권주의를 비판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예수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차동엽신부 “도올은 궤변가”

    차동엽신부 “도올은 궤변가”

    천주교 인천교구 미래사목연구소장인 차동엽 신부가 성경 해석을 놓고 개신교계와 논란을 빚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를 ‘궤변가’로 치부했다. 차 신부는 28일 평화방송 ‘열린 세상 오늘, 장성민입니다’(연출 오동선)와의 인터뷰에서 “도올의 주장은 궤변이어서 그의 이야기를 따라다니면서 반박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차 신부의 이같은 발언은 김 교수가 지난 6일 EBS 외국어학습 사이트를 통해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를 시작하면서 구약 폐기론 등 기존 신학과 다른 견해를 밝힌 것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김 교수가 “인간의 원죄를 주장한 것은 부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사상일 뿐 예수는 원죄를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차 신부는 “신학교 시절에 조금 배웠다는 옅은 지식을 가지고 수십년간 공부한 사람들의 연구 결과를 너무 경솔하게 뒤집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교수의 구약 폐기 주장에 대해서는 “구약은 신약으로 도약하는 발판 역할을 했는데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은 배은망덕한 행위”라고 반박했다. 차 신부는 성경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대응하자니 어처구니가 없고 무대응하자니 선의의 신자들이 흔들릴 수 있어서 기독교 일각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라며 “상식이 있는 분들이 건전한 판단을 하리라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미국 할리우드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제작한 ‘예수의 무덤’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에 대해 “스캔들과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돈을 벌어보려는 무책임한 상업주의 발상이어서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김 교수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서는 “상업주의 목적이라기보다 본인의 영지주의적 신앙이나 우주관이 창조론이나 신의 존재 등과 모순·충돌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도올 요한복음 강의 논란] ‘도올 공개토론 제안’ 한기총은 왜 침묵하나

    김용옥 교수는 개신교계를 대표할 만한 신학자와 공개토론을 하겠다는 ‘자신만만’한 입장을 비쳤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일절 논평이나 언급을 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다. 종전 예수나 기독교를 모욕한다며 관련영화나 문학작품에 격렬하게 대항했던 것과는 딴판이다. 한국교회언론회의 주장대로라면 김 교수의 성서해석은 문화예술 작품보다 훨씬 심각한 폄훼일텐데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 이렇듯 묵묵부답일까? 무엇보다 가입 교단의 각기 다른 신학적 해석과 성서관 때문이다. 한기총은 비록 보수교단 연합체로 평가받지만 62개 교단이 성서에 접근하는 시각은 하나의 입장으로 묶기엔 불가능할 만큼 복잡하다. 이같은 신학과 성서의 해석 차이는 지금의 교단 분열을 낳은 직접적인 원인으로까지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이나 신도들 사이에서 번지는 논쟁은 제법 심각한 수준이다. 학문적인 깊이와는 상관 없이 성서 폄훼나 기독교 무시를 둘러싼 반응에선 독설이 난무한다. 이에 대해 한기총 이용규 대표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독교 밖의 비전문가”라며 김용옥 교수의 신학적 지식과 자질을 평가절하했다. 한마디로 공교회가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는 ‘무식한 강의’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그동안 사사건건 민감했던 집단대응이 빈축을 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대승적 차원의 포용성’ 결여에 대한 지적을 의식했다는 것이다. 결국 한기총은 도올의 강의를 ‘개인적 견해에 치우친 철학적 접근’쯤으로 애써(?) 정리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강의 내용을 일일이 체크하고 있으며 신도들의 신앙을 방해할 만한 대목에선 좌시하지 않겠다.”는 한 목회자의 말대로 커다란 폭발음을 낼 여지는 충분하다고 봐야 한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이주노동자의 집 대표 김해성 목사

    [신연숙 대기자의 금요 초대석] 이주노동자의 집 대표 김해성 목사

    김해성(46). 이주노동자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번은 들어보았음직한 이름이다. 끈질긴 집념과 돌파력으로 각종 외국인고용 관련 정책을 이끌어내고 8곳의 쉼터와 외국인노동자 전용병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운동권 목사. 이름 석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런 일화는 어떨까. 어린이들이 쓰는 크레파스와 그림물감에 쓰인 ‘살색’표기를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하여 바꿔낸 인물. 산자부가 색깔 이름을 어려운 ‘연주황색’으로 정하자 어린이 인권이 침해받았다며 진정을 내 ‘살구색’으로 바꾸게 한 초등학교 여자어린이의 아버지. 여수출입국관리소 보호시설 화재사건으로 더욱 바빠진 그를 서울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의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부르는 사람도 없는 현장으로 내려가 대책위원회를 꾸려놓고 서울로 올라온 길이라는 김 목사. 남자들의 각진 턱은 강인함과 책임감을 나타낸다 했던가. 대책위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굵은 목소리로 좔좔 얘기를 쏟아놓는데 그동안의 경험과 고민이 어지간했겠다 싶었다. “대책위는 진상 규명과 희생자 가족들의 입국·보상관계·장례절차 협의,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돕습니다. 진상규명은 1차적으로 수사관 일이지만 우리는 각국의 언어전문가들을 동원하여 의사소통을 도울 수 있습니다. 또한 수사관들이 간과할 수 있는 ‘진상 뒤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하지요. 이를테면 방화라 결론나더라도, 그런 행위에 이르기까지는 또다른 폭력행위, 인권침해가 원인이 됐을 수 있습니다. 이것까지 알아내야 올바른 대책이 나올 수 있어요.” 김 목사는 이번 9명의 희생이 이주노동자 인권개선의 중요한 계기가 돼야한다고 보고 있다. ▶이번 참사의 원인은 뭐라고 보는지요. -“우선, 보호란 이름 아래 쇠창살 감금을 하고 있으면서도 시설은 일반 건물 수준에 머물고 있는 문제와 직원들의 구성, 근무 구조 등을 들 수 있겠지만, 이보다는 근본적 문제를 봐야 합니다. 외국인보호소는 불법체류자 출국 대기장소로 현재 전국에 1000명이 수용돼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불법 체류자 숫자는 20만명 이상 됩니다. 불법 체류자를 양산한 정책실패를 반성하고 처리대책을 세우지 않고는 참사는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다고 봅니다.” 1995년에 불법체류자 자진출국 후 재입국제도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후 불법체류율이 뚝 떨어졌다. 김 목사는 이 정책을 재도입해 불법체류자 해소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한다. 불법체류자들은 500만∼1500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이고 한국에 온다. 이들에게 ‘체포’는 곧 인생파산이다. 강력단속책을 쓰면 투신 등 죽음을 불사하고 응수하는 이유다. 그러니 강압보다는 순리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고용 상황은 외국인 노동자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와중에 불법체류자는 나올 수밖에 없다. 김 목사는 또 단속의 초점이 불법체류자 쪽에만 맞춰지고 사업주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정책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지금까지 구속된 사업주는 단 한 명도 없다. 불법고용이 없으면 불법 취업이 어떻게 있겠는가. 불법 고용주도 처벌하여 한국에서는 취업이든, 고용이든 불법은 발을 붙일 수 없다는 토양이 만들어져야 불법체류자가 줄어들지 않겠냐는 것이다. ▶보호소에서 1∼2년이나 지내는 경우는 왜 나옵니까. -“단속된 사람들은 임금체불, 산업재해, 전세금 회수, 여권 재발급 등 문제가 모두 해소돼야 출국할 수 있습니다. 경찰, 근로복지공사, 법무부, 노동부, 법률구조공단, 해당국가 영사관 등이 협조체제를 만들어 신속 출국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합니다. 부득이한 경우도 보호일시해제제도를 이용하여 나가 있도록 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외국인 보호소에서 감옥생활을 하는 숫자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단속됐다손치더라도 출국권고, 출국명령을 내려 마무리시간을 갖고 나가게 하면 되는데,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겐 이런 조치를 하면서 유색인들은 잠적을 우려하여 차별적 대우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는 유색인 이주 노동자들이 보호소로 잡혀오고, 이들의 목숨을 건 탈주 시도와 의경이나 용역직원 등의 폭력이 충돌하면서 참사를 빚어내는 총체적 악순환 구조를 만든다. 김 목사는 성남 철거민촌의 빈민운동가로 시작하여 노동문제, 이주노동자문제로 영역을 넓히며 열정적 활동을 벌여왔다.2003년도에 낸 책 ‘목사님, 저는 한국이 슬퍼요’에는 운동권 학생시절 학보편집장 해직부터, 위장취업, 공장 해고, 경찰 폭행에 의한 상이, 외국인 노동자 관련 시위 구속 등 치열한 삶의 역정과 가족 얘기, 이주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생생히 담겨 있다. ▶책을 보면 운동권이면서도 언론에 대한 호의가 곳곳에 보이는데요. -“권력도, 돈도 없는 NGO에게는 여론이 큰 힘이 됩니다. 재외동포법 개정 때나, 외국인 노동자 전용병원이 경영난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언론이 난관 돌파에 큰 힘이 돼 줬습니다.3월부터 시작되는 방문취업제는 서울신문의 힘이 컸습니다.” ▶이주노동자 운동을 하는 이들도 여러 입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각과 방법론 등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거대한 명분보다는 노동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쪽입니다. 또한 정책은 노동자의 이익만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쪽 입장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타협주의자라는 비난이 나올 때도 있지만 정책은 아주 없는 것보다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일단 시작해 놓고 관철을 시켜가는 전략전술이 있어야 성과가 돌아오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연수생제도가 있을 때 고용허가제 병행실시를 타협해 줬다고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고용허가제로 단일화됐지요. 방문취업제도 마찬가지예요. 재외동포법이 전면 적용되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우선 가능한 부분부터 풀면서 전체로 확산시키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요.”이주노동자 운동가에서 외국인 전용 무료병원 운영자를 겸하게 된 김 목사는 이제 또다른 ‘사건’을 만들고 있다. 한국에서 돌아간 귀국 노동자들로 하여금 각국에서 봉사와 교육,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세계 각국에 친한(親韓)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벌써 스리랑카, 태국 등 3개국 10곳에 화상치료센터 등이 설립됐다.“이주 노동자들은 그 나라의 최고 엘리트인 경우가 많아요. 이들이 반한(反韓) 인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인권을 침해하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yshin@seoul.co.kr ■ 김해성 그는 196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만 46세). 한신대 신학과 졸업.3대가 장로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겠다며 자랐다. 형인 김거성 국가청렴위원회 위원도 목사. 보수적 교단 출신이면서도 운동권이 된 것은 1980년 절친했던 대학 친구가 광주민중항쟁에서 도청을 사수하다 총탄에 숨진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 전두환 당시 국보위상임위원장을 국정 전면에 부각시킨 개신교의 조찬기도회 모습을 보고 기독교에 절망했다가 성남에서 도시빈민·노동 운동에 뛰어들었다. 위장취업 2년만에 들통나는 공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94년 성남 주민교회 내에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열면서 이주노동자 문제 전문가가 됐다.2000년 1월 중국교포 노동자들이 많은 서울 가리봉 지역으로 진출. 이주노동자들의 체불, 산재, 사망 문제 등을 상담하고 쉼터를 제공하는 외국인 노동자센터가 지금은 안산, 광주, 양주, 발안, 곤지암 덕정 등 8곳. 그동안 그의 손으로 수습해 장례와 본국환송 절차를 거친 외국인 사망자 숫자만 1500명. 내친 김에 무료전용병원 설립을 밀어붙여 2004년 7월 개원했다. 재외동포법, 외국인고용법 등 법률제정 및 개정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악덕 기업주를 찾아가 어렵게 받아 준 돈을 갖고 돌아가 두번째 부인을 얻은 노동자 얘기를 듣고 절망, 선교사업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 지금은 센터 내에 신학대학까지 세우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신학교육을 한다. 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친한 선교활동을 할 것으로 믿는다. 국가인권위원회 제1회 인권공적상(2003년), 아산 복지제단 제 16회 아산상 사회봉사상(2004년) 등 수상.
  • 성경 공개토론 이뤄질까

    EBS 교육방송에서 김용옥 교수가 진행중인 ‘영어로 읽는 도올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첫 회분 강의가 공개된 뒤 처음 문제를 제기했던 한국교회언론회(대표 박봉상 목사)가 두번째 강의(13일) 내용에 대해 재차 반발하고 나선 가운데 EBS홈페이지와 기독교 인터넷 언론 등에서 강의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이와 관련해 김용옥 교수는 자신의 강의 내용을 문제삼는 신학자들과 공개토론을 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져 인터넷 강의의 철학-신학 논쟁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이다. 14일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일단 EBS의 요한복음 강의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있는 눈치. 교단별로 성경과 신학 해석에서 조금씩 달라 섣불리 전체 교단을 아우르는 성명을 내거나 행동을 보이기보다는 강의내용을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언론회는 지난 13일 강의가 끝난 뒤 논평을 통해 우려했던 대로 김용옥 교수가 성경을 신학이 아닌 철학적 측면에서 접근해 정통 신학 교리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며 전문가들에게 강의 내용 분석을 의뢰했다. 한국교회언론회 사무국장 심만섭 목사는 “김용옥 교수는 첫 회에 이어 두번째 강의에서도 성경의 로고스와 천지창조와 관련해 하나님의 존재를 뺀 빅뱅 등 고대 희랍 철학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며 “철학적 강의라 하더라도 기독교 교리와 관련한 부분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정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개신교계가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EBS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EBS 김유열 뉴미디어팀장은 “다양한 의견 개진을 전제로 한 인터넷 미디어는 공중파 방송과는 본질적으로 다른데도 개신교계가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며 “개신교 측에서 요청해올 경우 언제든지 토론을 주선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개신교와 EBS의 커다란 입장 차만큼이나 네티즌들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쏟아내며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EBS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ID tipark의 시청자는 “2000년간 피 흘리며 지켜온 기독교 진리를 왜곡된 성경해석으로 호도하고 있다.”며 “정통 신학적 해석을 하지 않는 강의 방송을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했다.이에 대해 한 신자(ID 거듭나기)는 “예수님도 이른바 정통을 자임하는 유대교 바리새인들과 다르게 성경을 해석했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 아닌가. 결국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는 해석, 그것이 정통 아닌가.”라고 개신교계의 대응을 꼬집었다. 한편 개신교계 일각에서는 한국 개신교계가 과연 성서에 얼마만큼 충실한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아 김 교수와 신학자의 토론이 성사될 경우 또 한 번 큰 파문을 몰고 올 전망이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성경은 설교의 목적 아닌 설교 도구”

    “성경은 설교의 목적 아닌 설교 도구”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가 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린 ‘성경은 설교의 목적이 아닌 도구’라는 요지의 글을 놓고 신도들의 설전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문제의 글은 지난 3일 김 목사가 자신의 설교관을 정리해 홈페이지 사랑방에 올린 ‘내가 생각하는 설교’. 김 목사는 “설교란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즉 설교를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을 성경으로 풀어 전하는 것”이라면서 “성경은 설교의 목적이 아니고, 설교의 도구”라는 소견을 밝혔다. 김 목사는 특히 “성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강의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킬 때 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성경공부와 설교를 구분하고 싶고, 설교 중에 성경을 설명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도들은 김 목사의 글을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측으로 나뉘어 연일 교회 홈페이지에서 댓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먼저 김 목사를 옹호하는 측은 대부분 “성경과 목회, 설교를 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며 진보적인 발언에 힘을 실었다.“개신교의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제임스강)/“성경의 저자만 성경의 저자가 아니라 매일 매일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의 모순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건설해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그 이야기도 성경”(바른꿈예쁜사랑)…. 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목적이든 도구이든 설교가 성경위에 군림하는가?”(복음에 빚진자)/“성경, 말씀, 성령, 하나님,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하겠다는 건 지극히 위험하고 사탄적인 행위“(manofGod)…. 한편 김 목사는 이같은 반응을 미리 의식한 때문인지 글의 말미에 “교회를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 교회에서 선포되어지는 설교를 밥이라고 생각한다.”며 “설교의 반복이 성의 없이 교인들에게 찬밥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닌가를 늘 반성해 보려 한다.”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