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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⑬ 육두품 교회

     “우리 교회는 강남의 육두품 교회입니다” 얼마 전 사랑의교회 담임 오정현 목사가 한 시사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입에 올렸다는 한 대목이다. 신라시대의 신분제인 골품(骨品)에 빗댄 오 목사의 교회 구분에 따르면, 사랑의교회는 왕족이나 귀족 반열에 들지 않은 교회이다. 성골(聖骨), 진골(眞骨) 다음의 평민계층(六頭品) 교회라고 봐야 한다. ‘교회에 무슨 골품제’냐고 의아해 하는 이들이 많을 듯 싶다. 하지만 개신교계에서 ‘골품제’는 일반의 반응과는 달리 공공연하게 통하는 용어이다. •부모가 목사면 성골, 장로-권사면 진골, 일반신자면 육두품 개신교계에서 회자되는 골품제의 정의는 대개 목회자의 구분 짓기로 알려져있다. 이를테면 부모가 목회자인 목사는 성골에 속하고 부모가 장로·권사이거나 장인이 목사인 경우 진골 축에 든다. 일반 신자였을 경우 육두품이란 계급이 매겨지는 것이다. 목회 현장에 몸담을 예비 목사들 사이에서도 이 골품제는 자연스럽게 통용된다고 한다. 물론 ‘진담반 농담반’의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겠지만….  오 목사의 ‘육두품 교회’ 발언은 어찌보면 낮은 곳으로 몸을 굽히는 소신일 수 있다. ‘적어도 우리 교회는 으시대고 군림하는 다른 대형교회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입장의 천명일 게다. 실제로 사랑의교회는 초대 고(故) 옥한흠 목사의 인도아래 ‘가장 대표적이고 건강한 복음주의 교회’라는 수식어를 한동안 달았었다. 그러다가 ‘논란 많은’ 교회로 평가절하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교회는 강남의 대표 교회 격으로 세인들의 관심을 받는 교회임에 틀림없다.  그 교회의 부침에는 초대형 예배당 건축과 담임인 오 목사 자신의 논문표절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묻혀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그런 마당에 몸을 낮춰 ‘성골, 진골은 아니다’라는 교회 자평이 낮춤의 겸손이라기 보다는 저간의 사랑의교회에 쏟아진 뭇 시선을 돌리는 변명 쯤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따져보면 성골, 진골이나 육두품이나 모두 선택받았다는 ‘선민 의식(選民意識)’의 발로가 아닌가. 그리고 그 선민의 의식은 당연히 평신도와는 다른 목회자로서의 위상에서 생겨난다. 길 잃은 양에게 길을 인도하는 목자야 응당 존경받는 빛과 소금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또한 존재의 이유와 가치가 있다는 성경의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선민’의 의식은 별로 존중받지 못하는 헤게모니의 한 축일 뿐이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사제’라며 교회민주주의를 치켜세운 ‘만인사제(萬人司祭)’설도 있지 않은가. 그 옳지 못한 선민의 의식이 군림과 폭력의 시작이 아니었으면 한다. •순종의 강요보다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복음 전파자가 절실  성골, 진골, 육두품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 목사의 구분 짓기를 거꾸로 해석하면 5두품, 4두품, 1두품의 교회는 훨씬 더 소중하고 복음의 가치에 충실한 ‘하느님의 집’일 것이다. ‘우리교회는 육두품 교회이다’ 그 모순의 발언이 더 생뚱맞고 머리를 흔들게 한다는 투의 반응들이 괜한 게 아닐듯 싶다. 가뜩이나 지금 우리 ‘하느님의 집’들에는 군림과 복종이 난무하는 판이다. 순종의 강요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진짜 복음의 전파자가 절실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골품제는 신라를 무너지게 만든 큰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우리 교회는 강남에서 성골이나 진골이 아니라 6두품 교회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이 많이 온다” ‘촉망받는 차세대 목회자’로 이름을 떨쳤던 오 목사는 왜 하필 신라를 뒤흔든 골품제를 입에 올렸을까.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기자의 종교만화경] ⑪작은 교회들의 신선한 반란

    [김성호기자의 종교만화경] ⑪작은 교회들의 신선한 반란

     한국 개신교의 발전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모으는 일이다. 개신교가 전래된 지 100년이지만 그 성장과 확산의 추세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이례적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고의 규모를 자랑한다. 순복음교회 말고도 대형 교회들은 여전히 지교회를 늘려가고 있고 예배도 평일 예배를 확대해나가고 있는 추세다.  한켠에선 한국 개신교의 성장 추세가 꼭지점을 찍고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관측도 적지않다. 1·2세대 목회자들의 전성시대를 딛고 3세대 목회자들이 맹활약중이지만 교회를 떠나는 ‘종교 썰물’의 현상에 대한 우려가 개신교계에 퍼져있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은 포화 상태의 국내 시장(?)을 떠나 앞다투어 해외로 해외로 진출한다. 무리한 해외 선교와 그 후유증이 터져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무리한 전도와 교세 확장은 외국의 교회들마저 고개를 흔들게 만든다. ‘지칠 줄 모르는 선교 열정’과 ‘의심없는 믿음’이란 말로 미화하는 한편으로 부정의 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양적 성장에 치우친 외형의 중시 탓일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기독교 교세가 급속히 쇠태해 교회 건물이 잇따라 사라지고 허물어지는 추세에서 그 의심의 눈초리가 더욱 예리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작은 교회 박람회’가 최근 서울 중구 이화여고에서 열렸다. 올해로 세번째란다. 성서연구와 영성수련, 마을 지역운동 등 13개의 소주제로 나눠 진행된 박람회가 제법 시끌벅적했다고 한다. ‘성장이 아닌 성숙’을 모토로 삼았다는 박람회 주최측의 귀띔이 신선하다. 탈성장, 탈성직, 탈성별의 세 가지 기치도 눈에 쏙 든다.지금 대형 교회들의 지향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사실 국내 개신교계에서 성장 지상주의와 세속화에 대한 반성, 개선의 목소리는 꾸준히 있어왔다. 담임목사 세습이며 매매, 금권선거, 목회자 범법행위, 탈세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성의 몸짓과 개선의 연대운동이 번졌지만 언제나 그 때 뿐이었다. 그리고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10% 정도의 대형 교회 빼곤 대부분의 교회가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교세가 영세하다.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생들의 10%만이 정규직 목회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자립 교회들은 전국에 넘쳐난다. 따져보면 종교인 과세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일반의 따가운 시선이 쏠리는 곳도 10%의 대형 교회일 것이다.  다행히 작은교회 박람회 첫 행사 이후 전국의 작은 교회들이 성장 아닌 성숙의 운동에 속속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미니 박람회가 줄을 잇는단다.권위주의의 교회가 아닌, 신도들과 함께 민주적으로 교회를 지어가자는 새로운 전환의 물결이다. 특히 신학대학원 신대원생들의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니 희망의 싹이 보인다.  교회는 복음이 있는 ‘하느님의 집’이다. 진정한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보자는 작은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기를 기대해본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⑨여성 교정원장 탄생 비밀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⑨여성 교정원장 탄생 비밀

      대부분의 종교에서 평등은 훼손해선 안될 으뜸의 가치이다. 모든 존재가 다 소중하고 고귀한 만큼 똑같이 존중되고 대우받아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상생의 자리이타(自利利他)며, 세상을 향한 보편의 공동선 실천에는 빠짐없이 평등의 사상이라는 높은 가치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높은 평등 가치의 외침과는 달리 종교 내부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차별과 편가름의 질 낮은 실상이 난무한다. 특히 남녀의 차별과 구분짓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양상이다. 종교의 남녀 차별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팔경법(八敬法)은 이제 진부한 사례일 뿐이다. 비구니는 비구를 꾸짖어서도, 비구의 허물을 말해서도 안된다는 비구니의 여덟가지 규범 말이다. 수계(受戒)한 지 100년이 지난 비구니라도 방금 수계한 비구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마지막 규범은 차별과 홀대의 극치로까지 여겨진다. 실제로 한국불교 맏형 격인 조계종에서는 총무원장, 포교원장, 교육원장의 3원장을 비구니가 맡아본 적이 없다. 25개 교구 본사 주지도 비구니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불교 종단도 비구, 비구니의 가름과 차별은 대동소이한 실정이다.  개신교도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예장 합동과 루터교를 뺀 모든 개신교 교단에서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있지만 총회장이나 대표회장같은 교회 내 주요 의결권을 가진 소임에서 여성은 예외없이 배제되어 있다. 주요 교단에서 번듯한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훑어봐도 여성 목사는 전무한 형편이다. 주요 의결권을 가진 직위에 20~30%를 여성 목사에 할당하도록 교회법으로 규정하는 외국의 개신교 교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천주교는 남녀 평등 측면에서 가장 보수적인 종교로 통한다. 주교는 물론, 16개 교구의 교구장은 모두 남성 사제의 몫이다.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12사도의 후계자라는 사제도 여성은 시종일관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불평등의 영역이다. 외국 천주교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민족종교 원불교에서 여성 교정원장이 또 탄생했다. 뉴욕·모스크바 교당 교무와 감찰원장을 지낸 한은숙(사진) 교무. 12년만의 여성 교정원장이자 두번째 여성 교정원장이란다. 교정원장은 행정을 총괄하고 대외적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원불교 수장이다. 조계종으로 치면 총무원장에 해당한다. 원불교 교단 수장의 여성 등극에 이웃 종교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불교 내부적으로도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꾸준히 일고있는 상황에서 여성 교정원장의 탄생은 비상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를테면 여성 교무가 되기 위해 3년마다 열리는 정녀선서식을 둘러싼 여성 교무들의 불만이 적지 않은 터이다.  새 교정원장 선임과 관련해 원불교가 이례적으로 교정원장 선출방식을 공개해 눈길을 끈다. 종법사가 지명하면 최고의결기구인 수위단회에서 추인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수위단의 구성이 흥미롭다. 34명의 수위단원중 남녀가 절반씩 차지한다. 여성 교정원장의 탄생을 가능케 하는 법적 토대인 셈이다. 원불교는 이번 교정원장 선임과 관련해 “남녀 권리가 동일하며 보편적인 평등이 되기 위해선 자력을 키워야 한다”는 창교자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도 친절하게 곁들였다.  평등을 향한 종교의 방향성을 따지자면 어찌 소태산 대종사만이 일갈했을까. “비구니도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불교 율장 ‘비구니건도’며 “불은 모든 장작에서 피어난다”는 최초의 남방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의 구절도 절집에선 늘상 회자되는 경구이다. 내 집의 평등은 뒤로 돌린 채 바깥으로만 평등의 목소리를 높이는 겉다르고 속다른 종교의 모습, 그 불평등이 안타깝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⑧ 자살은 나 만의 죽음일까

     50대 가장이 암 투병중인 아내와 고교생 딸을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경제적 이유로 부부가 가정불화를 겪다 동반의 죽음으로 끝난 비극이 서글프다. 살아내기가 죽을 만큼 힘들었다지만 꼭 그런 처참한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9.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중 가장 자살률이 높다. 벌써 11년째 달갑지 않은 최고의 불명예를 안고있는 셈이다. 정부와 종교계가 이런저런 자살 예방 캠페인과 운동에 나서고 있다지만 자살 소식은 도통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근래 들어 전해지는 자살의 배경엔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크다고 한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목숨까지 버리는 고통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엔 유난히 ‘왜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쏠린다. 그런데 죽음의 이유와 상관없이 종교계에서 자살을 보는 시각은 일반 사회의 인식보다 훨씬 더 나쁘고 결코 저질러선 안될 ‘최고의 악’이다. 불교에서는 자살을 타살과 같은 죄로 보며 자살뿐만 아니라 남에게 죽음을 찬탄하여 자살하도록 하는 것까지 금하고 있다. 생명은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한 방편이므로 수명을 단축하는 일은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자살은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죄악이다. 천부의 귀한 제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일이란 용서받지 못할 극악이다. 그래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자들은 가정에 자살이 발생할 경우 공동체에 쉬쉬하며 숨기기 일쑤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자살이 생명 존엄에 따른 절대불가의 원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종교계에서 자살을 용납할 수 없는 극악으로 여기는 큰 이유중 하나는 나 말고도 남까지 같이 해친다는 점이다. 남은 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지우는 해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자살은 개인적 행동이지만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충고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은 자살 시도자 1300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종교가 없는 사람일수록 자살기도율이 높았다고 한다. 종교가 없는 경우가 무려 65.5%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국내에서 종교를 갖고있는 인구 비율이 53.1%이라고 할 때 신앙인일수록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자살 예방과 관련해 종교계의 역할과 노력은 커 보인다.  실제로 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 등 7대 종단 협의체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는 복지부와 ‘자살예방을 위한 범 종교 협약식’을 가졌다. 각 종단과 교단이 자체적으로 자살 예방 운동을 벌이고 있고 연합의 캠페인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은 우리나라 자살률 증가의 가장 큰 원인을 ‘공동체 삶의 붕괴’로 꼽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계에 쏟는 기대가 큰 것 같다. 평화로운 삶, 화합하는 삶, 나와 남이 더불어 행복해지는 삶…. 종교가 추구하는 많은 공동의 선(善)이 있다지만 ‘공동체 지킴이’로서의 종교 위치가 유난히 커 보인다. “종교계가 제 각각의 교리적인 말보다는 실천적인 자비, 사랑을 실행해야 한다”는 한 목회자의 말이 실감 난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기 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후 재혼 15년새 6배

    “기 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후 재혼 15년새 6배

    순종적인 가장이었던 김모(62)씨가 그녀를 만난 건 2010년 여름 등산 모임에서였다. 괄괄한 성격의 아내와 달리 50대 초반의 그녀는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했다. 김씨는 그녀에게 급속도로 끌렸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년 전 이별한 그녀도 김씨에게 호감을 비쳤다. 그렇게 둘은 위험한 관계를 3년가량 지속했다. ‘밀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남편의 잦은 외출을 수상하게 여긴 아내가 결국 불륜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씨는 외려 잘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김씨는 2013년 가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인생을 찾으라”며 응원했다. 평생 어머니의 기에 눌려 온 아버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황혼 이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김씨는 곧바로 그녀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애할 땐 둘도 없이 참했던 그녀가 이기적으로 변했고,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여왕처럼 떠받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녀의 성격에 김씨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바가지는 긁었어도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던 그때가 그리워 전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재결합을 거절당했다. 동거 2년 만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우울증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황혼 이혼을 결심했지만, 행복이 꼭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통해 불행의 요소를 잘라냈지만, 그건 어쩌면 남은 인생에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잘라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혼 전문가들은 특히 고령 남성은 은퇴 후 사회적 관계가 협소하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고, 아내가 없으면 돌봄을 받기 어려워 이혼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4 노인 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는 확연히 다르다.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우울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43.0%였지만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26.9%에 그쳤다. 영양 상태가 양호한 비율도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60.4%에 달한 반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35.8%에 그쳤다. 김혜경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5일 “고령에 이혼한다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돌봐 줄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라면서 “특히 부부가 다투든 화목하게 지내든 배우자가 없어지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사라지는 것과 같아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의 존재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65세 이상 남녀 노인의 ‘이혼 후 재혼’ 건수가 2000년 457건에서 지난해 2689건으로 5배 이상 증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혼 후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2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농의 꿈’을 이뤄 현재 달콤한 인생 2막을 보내는 최모(55)씨가 그런 경우다. 최씨는 아내와 성격,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내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은 불교 신자였다. 아내는 주말마다 교회에 가기 바빴고 제사 때 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씨가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부부는 2012년 갈라섰다. 최씨는 직장인인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제외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애초에 귀농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이들은 전 아내와 함께 살지만 틈나는 대로 연락해 관계도 회복했다. 최씨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니까 이웃 주민들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반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혼한 50대 여성과 교제를 하면서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수명은 길어지고 자식들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시대에 배우자는 돌봄의 중요한 주체가 된다”며 “노년 이후 자신의 삶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75세 이후엔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신중하게 고려한 후 황혼 이혼 결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기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 후 재혼 15년 새 6배

    “기죽고 구박받느니 차라리 끝내”… 이혼 후 재혼 15년 새 6배

    순종적인 가장이었던 김모(62)씨가 그녀를 만난 건 2010년 여름 등산 모임에서였다. 괄괄한 성격의 아내와 달리 50대 초반의 그녀는 여성스럽고 다정다감했다. 김씨는 그녀에게 급속도로 끌렸고, 가부장적인 남편과 수년 전 이별한 그녀도 김씨에게 호감을 비쳤다. 그렇게 둘은 위험한 관계를 3년가량 지속했다. ‘밀회’는 영원할 수 없었다. 남편의 잦은 외출을 수상하게 여긴 아내가 결국 불륜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김씨는 외려 잘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의 무의미한 결혼생활을 끝내고 더 늦기 전에 사랑을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김씨는 2013년 가을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두 아들도 “아버지의 인생을 찾으라”며 응원했다. 평생 어머니의 기에 눌려 온 아버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고 황혼 이혼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김씨는 곧바로 그녀와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연애할 땐 둘도 없이 참했던 그녀가 이기적으로 변했고,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여왕처럼 떠받들어야만 직성이 풀렸던 그녀의 성격에 김씨는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바가지는 긁었어도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던 그때가 그리워 전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재결합을 거절당했다. 동거 2년 만에 혼자가 된 그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과 우울증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황혼 이혼을 결심했지만, 행복이 꼭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통해 불행의 요소를 잘라냈지만, 그건 어쩌면 남은 인생에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잘라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혼 전문가들은 특히 고령 남성은 은퇴 후 사회적 관계가 협소하기 때문에 우울해지기 쉽고, 아내가 없으면 돌봄을 받기 어려워 이혼에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4 노인 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배우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노인들의 삶의 만족도는 확연히 다르다. 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우울 증상을 보일 가능성이 43.0%였지만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26.9%에 그쳤다. 영양 상태가 양호한 비율도 배우자가 있는 노인은 60.4%에 달한 반면 배우자가 없는 노인은 35.8%에 그쳤다. 김혜경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5일 “고령에 이혼한다는 건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돌봐 줄 대상이 사라진다는 뜻”이라면서 “특히 부부가 다투든 화목하게 지내든 배우자가 없어지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사라지는 것과 같아 나이가 들수록 배우자의 존재는 중요해진다”고 말했다. 이는 65세 이상 남녀 노인의 ‘이혼 후 재혼’ 건수가 2000년 457건에서 지난해 2689건으로 5배 이상 증가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혼 후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2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귀농의 꿈’을 이뤄 현재 달콤한 인생 2막을 보내는 최모(55)씨가 그런 경우다. 최씨는 아내와 성격, 생활습관의 차이 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내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자신은 불교 신자였다. 아내는 주말마다 교회에 가기 바빴고 제사 때 절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씨가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자 부부는 2012년 갈라섰다. 최씨는 직장인인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제외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애초에 귀농하고 싶었지만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아이들은 전 아내와 함께 살지만 틈나는 대로 연락해 관계도 회복했다. 최씨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생각해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혼자 생활하니까 이웃 주민들과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반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난 이혼한 50대 여성과 교제를 하면서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성미애 방송통신대 가정학과 교수는 “수명은 길어지고 자식들이 부모를 봉양하기 어려운 시대에 배우자는 돌봄의 중요한 주체가 된다”며 “노년 이후 자신의 삶을 찾는 것도 중요한데, 75세 이후엔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만큼 신중하게 고려한 후 황혼 이혼 결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⑤ 예배 강요

     학원가에 예배를 강요하는 폭력이 발생해 논란이 되고있다. 유명 입시학원 대표이사가 지점 소속 원장과 강사들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라고 강요해 소송이 접수됐다고 한다. 잊혀질 만 하면 또 터지곤 하는 개신교계의 고질이 또 도진 듯 해 안타깝다.예배 강요가 발생할 때마나 숱한 질타와 자성의 물결이 넘치지만 그 때 뿐이다. 이쯤 되면 심해도 보통 심한 망각의 병이 아닐 수 없다.  왜 종교를 강요하는가. 남의 종교와 믿을 권리를 왜 침해하는 것일까. 원치않는 강요는 엄연한 폭력이다. 문제는 폭력임을 알면서도 거듭하는 맹신과 억지의 반복이다. 국내외에서 일어난 그 무조건의 반복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서울 강남 봉은사 법당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일으킨 이른바 ‘땅 밟기’ 사건이며 인도의 불교 성지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찬송 파티’를 벌여 세계인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 것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없이 믿고 따라야 한다는 한국 개신교의 ‘성경무오설’이며 ‘문자주의’는 세계 기독교계에서도 소문 난 근본주의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 근본의 전형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끝 없는 전도와 강요의 실천으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도 한국인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있는 분당샘물교회 봉사 팀의 아프가니스탄 납치 피살 사건도 따져보면 ‘땅끝 전도’가 부른 희생에 다름 아니다.  내 것이 아무리 좋아도 남이 싫다면 권하지 않는 게 일반의 상식이다. 하물며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린다는 신앙의 차원에서 강요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폭력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은 같은 무슬림끼리도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한다. 그런 무전도의 신앙 지역에서 ‘땅 밟기’며 ‘찬송 파티’를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자비한 일인 지는 이미 여러차례의 참사와 희생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종교는 문화다’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제 이 명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화합과 공존의 공동체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내는 상생 문화로서의 종교 만들기 말이다. 내 믿음과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외곬의 배타성은 이제 설 땅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이 땅에선 ‘땅 밟기’같은 아집과 맹신의 전도며 강요가 계속된다. 이제 그만 멈출 때도 됐는데….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의 들먹임은 이 땅의 많은 개신교인들에겐 욕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함께 평화롭게 어울려 살자’는 인류 보편의 정신인 원융과 화합만은 훼손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물며 인간이 지닌 모든 윤리의 으뜸이라는 종교일진대.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④ 커밍아웃

     대체로 우리 사회에서 성(性) 소수자는 여전히 비정상의 부류로 인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장소에서 애정 표현이나 교감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동성애자들이 적지않게 눈에 띈다. 그 성 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종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듯 하다. 시선의 변화와 함께 대하는 태도도 훨씬 개방적이자 긍정적으로 바뀌어가는 듯하다. ● ‘절대금기’ 동성애자, 미국 개신교선 수용하는 교단 늘어  종교계에서 바라보는 성 소수자, 동성애자는 일반사회의 시선보다 훨씬 더 비정상적이고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사람들인 게 사실이다. 특히 기독교에선 여전히 공공연한 장소나 모임이라면 말도 꺼내지 못할 ‘절대 금기’의 영역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고민을 호소하는 신도들이 교회와 성당에 적지않다고 털어놓는다. 이제 종교의 영역에서도 성 소수자는 입에 담지도 못할 지옥행의 절대 악이 아닌 것이란 성직자들의 귀띔이 새삼스럽지 않다. 오히려 받아들여야 할 것인 지, 말 것인 지를 심각하게 결정해야 할 절박한 현실의 문제이다.  실제로 해외 종교계에선 성 소수자를 대하는 입장의 변화가 눈에 띄게 늘고있다. 미국의 개신교계는 동성애자들을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적극 수용하는가 하면 목사 안수를 주는 교단이 늘고 있다. 신학의 진보와 보수를 떠나 공통적인 경향이라고 한다. 미국 개신교계의 성 소수자, 동성애자 수용은 ‘약하고 소외된 자’를 보듬고 사랑하라는 사랑과 박애의 고귀한 실천으로만 보기는 힘들 것이란 주장이 물론 있다. 늘어가는 성 소수자들을 교회 안으로 흡수한다는 전도와 교세 확장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교세가 크게 줄고 있는 개신교 입장에서 불가피한 현실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성 소수자애 대한 종교계의 인식과 대우는 사회 일반의 흐름과 얼추 비슷하게 바뀌어가는 듯 하다. 물론 그 정도와 속도는 비교할 수준은 못되지만 가시적인 변화는 충분히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이맘때쯤 바티칸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 ‘동성애 커플도 하나의 가족 형태로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낸 게 대표적이다. 개혁적 성향의 프란치스코 교황 행보에 맞춘 로마 가톨릭의 파격적 발표였다.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온 집단의 반발 탓에 보고서 채택은 되지 못했지만 기독교계를 뒤흔든 세기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 교황청 고위 사제 커밍아웃... 세상의 변화 앞에 종교적 사랑의 가치는?  1년이 흐른 뒤 로마 교황청이 또 다시 성 소수자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4일 시작된 시노드에 앞서 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 일하는 고위급 사제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며 커밍아웃했다고 한다. ‘동성애 문제에 뒷걸음질치는 가톨릭 교회의 태도에 맞서고자 사제가 중대 발표를 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고 보면 이번 시노드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노드에선 지난해에 이어 동성애와 이혼·재혼 등 가족문제에 대한 가톨릭의 최종 입장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커밍아웃의 동기야 어쨌든 세계 천주교의 심장인 바티칸의 고위 사제가 커밍아웃하고 교황청이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교회 전체의 입장을 밝히기 직전이다. 한국 교회들도 눈여겨볼 게 많은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악마나 사탄 쯤으로 몰아가는 막무가내식 마녀사냥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의 변화에 먼저 눈떠야 하지 않을까. 물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히 빛나는 으뜸의 가치이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한국 교회들 세계 평화·난민 섬기는 일에 앞장서야”

    “한국 교회들 세계 평화·난민 섬기는 일에 앞장서야”

    “교회는 언제나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제 모든 교회가 함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기독교한국루터회의 준비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1일 방한한 무닙 A 유난(65) 루터교세계연맹(LWF) 의장. 유난 의장은 방한 직후 서울 중구 남대문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세계 기독교계에 큰 자극을 준 한국 교회들이 평화와 인류, 전 세계 난민들을 섬기는 큰 사역에 주저 없이 동참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LWF는 전 세계 98개국에서 145개 교단과 1억명의 교인이 소속된 세계 최대의 개신교 교단이다. 천주교가 대주교-추기경-교황으로 이어지는 세계적 단일 지휘체계를 갖는 것과 달리 루터교회는 각국 총회장이나 감독이 루터교세계연맹과의 협의 지휘체계를 갖고 있다. 한국은 50개 교회에서 5000명의 교인이 소속돼 활동 중이다. “교회와 교인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크든 작든 모두 교회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루터교 세계교회 수장 자격으론 첫 한국 방문인 유난 의장은 특히 한국의 분단과 긴장의 대치 상황을 관심 있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전쟁은 결코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무기 역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우리는 생명을 파괴하는 핵무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 난민 기독교인인 부모를 따라 팔레스타인에서 줄곧 살아왔다는 유난 의장은 “나의 방한이 분단된 한반도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자극과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 그래서 2일 오후 판문점과 비무장지대(DMZ) 방문 행사를 각별하게 여긴단다. “한반도 분단선은 한국 루터교의 아픔이자 한국인의 아픔입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에서 ‘우리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메시지도 한국인들에게 천명한다. “교회는 언제나 개혁해야 하고 개혁적이어야 한다”고 거듭 밝힌 유난 의장은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해 개신교인들이 특히 크게 각성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성령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엽에 멈춘 게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은 한국 루터교를 통해서도 계속돼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고 이제 한국 개신교인들이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교회가 아픔을 함께할 때 예언자적 사명을 수행하는 지름길이 된다”고 밝힌 유난 의장은 2일 오전 밀레니엄서울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교계 지도자 초청 조찬기도회를 한 뒤 판문점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오는 4일 오전 서울 은평구 대조동 루터교회의 주일예배 설교에 이어 5일 기독교한국루터회 45차 정기총회 개회예배에서 설교와 특강을 한 뒤 6일 오후 출국할 예정이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③ 천주교는 이단이다?

     개신교계에 이단 논쟁이 뜨겁다. ‘천주교는 이단’이라는 발언을 둘러싼 갑론을박의 기 싸움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교계 바깥에서야 뜬금없는 싸움에 고갯 짓을 할 만하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춰보자면 웃지못할 사연이 또아리를 칭칭 틀고 있다. ●국내 최대교단 예장 “천주교는 이단” 주장  문제의 이단논쟁이 불거진 건 지난 달 대한예수교장로교(예장) 합동 총회에서의 일이다.일부 총대들이 느닷없이 ’천주교는 이단’이라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가톨릭은 이단이라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명시돼 있다”“가톨릭은 이단이라고 만장일치로 공포해야 한다” 지난 해에도 예장합동 총회는 ‘천주교에서 영세받은 이들을 신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의한 터였다. 예장 합동이라면 자타가 장로교의 ‘장자 교단’으로 인정하는 국내 최대의 교단이다. 신자 수만 하더라도 272만 명을 웃돈다. 그 거대 교단이 느닷없이 천주교 이단과 천주교 영세자 불신을 천명하고 나섰으니 개신교계가 뒤집어질 만 하다.  그런데 한번 따져보자. 먼저 이단의 정의부터가 애매모호하다. 개신교에서 이단이라 함은 원래 나와 다른 무리를 일컫는 개념에 머물렀던 정의였다. 교리와 믿음의 차이에서 생겨난 가름과 배제의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단의 논리는 줄곧 한국 개신교를 나누고 갈라져 싸우게 한 으뜸의 요인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의 분열도 양측이 몇몇 교단을 바라보는 이단의 시각 차에서 비롯됐고 그 균열 봉합은 멀어만 보인다. ●진정한 이단 정죄 이전에 내 안의 악다구이부터 몰아내야  단일 교회로는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만 하더라도 불과 20여 년전엔 이단의 시선을 받았던 교회다. 하지만 지금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개신교인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국 개신교의 신행과 역할 차원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영향력을 행사하며 뭇 교단들의 부러움을 받는 교단이자 교회로 우뚝 섰다.  얼마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개신교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교단들이 앞장서 교황을 환영하며 그의 개혁적 행보를 높이 평가했었다. 그 와중에 ‘천주교는 이단’이라는 국내 개신교계의 뜬금없는 논쟁이 우스꽝스럽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채 남의 티끌을 험잡는 모순의 현주소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진정한 이단 정죄와 척결이라면 내 안의 악다구니부터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 앞서 쿠바를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념이 아닌 사람을 돕는 것이므로 봉사와 헌신은 절대 이념적이지 않습니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김성호 기자의 종교 만화경] ② 종교 ‘썰물’

    각 종교마다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젊은 사람이 모자란다’는 푸념이다. 실제로 출가자가 위태로울 만큼 급속히 줄고있는 불교는 그 어느 때보다 고령화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신교, 천주교는 불교에 비해 고령화가 덜한 편이지만 역시 젊은 층 모시기에 여간 공을 들이는 게 아니다. 일찍부터 심각한 고령화 위기에 처했던 민족종교는 고령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 혈안이 돼있다. ●저출산-종교계 추한 민낯이 ‘썰물’ 원인 종교계에서 사람이 빠져나가는, 아니 젊은 사람들이 종교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저출산 사회의 종교 외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계 자체의 모순과 갈등이다. 우선 사회의 추세를 보자. 저출산의 인구 추이에서 종교계로의 인구유입 감소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총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종교계로 유입되는 인구가 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현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로의 인구 유입 감소는 사회 전반의 인구 감소 추세와는 현격하게 다른 측면을 갖는다. 이를테면 종교를 갖거나 믿음을 지탱할 원인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인 종교 내부의 모순과 갈등은 종교인구 감소, 특히 젊은 층을 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더 심각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속된 말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종교 근처에 얼씬도 하기 싫다는 젊은 층의 고언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그 정나미 떨어지는 모순과 갈등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이다. 목회자 세습이며 성직자의 성 추행, 정치판 못지않은 권력욕과 파벌 싸움, 속인 못지않은 성직자들의 윤택한 삶…. 그야말로 종교에 발을 들이기 어렵게 만드는 추한 얼굴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종교 본연의 가치와 미덕과는 아주 먼 것들 말이다. ●이벤트성 유인대책보다 내부 모순 치유 선행돼야 이가운데 종교계가 ‘종교 썰물’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요즘 부쩍 공을 들이는 건 주로 전자인 것 같다. 젊은 층을 교회나 절, 성당에 불러모으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춤을 춘다. 그런 각고의 노력 때문인 지 일부 교회와 성당에는 젊은 층의 발길이 어느 정도 다시 모이고 있다는 관측도 없지 않다. 문제는 그 반짝의 관심과 답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 가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의 성장을 지속해왔던 이 땅 교회들의 지난 날을 한번 반추해보자. 10∼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이 교회당과 예배당에 넘쳐났었다. 사찰과 성당에도 교회 수준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두터운 신도층을 형성했었다. 20년도 채 안돼 종교가 이렇게 존폐를 걱정할 만큼의 젊은층 이탈을 염려해야만 하는 상황과 이유를 종교계는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종교계 내부의 모순과 갈등 척결이 먼저임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씨줄날줄] 기독교 세금납부 결의/주병철 논설위원

    기독교에서 헌금 제도로 널리 인식되고 있는 십일조(十一租·생산액이나 수입의 10%를 헌납하는 것)는 제사와 정치를 한데 묶은 제정일치 시대에 확립된 세금 제도였다. 종교와 국가 권력이 분리된 이후에도 상당수 국가가 십일조를 이상적인 세금 제도로 여겼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중국의 맹자는 수익의 10%가 가장 훌륭한 세금제도라고 역설했고 공자 또한 십일조를 철법(徹法)이라고 했다. 유교 사상이 강한 우리나라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중엽까지 십일조 세금을 공식화했을 정도다. 제정일치 시대에서 제정분리 시대로 넘어가면서 유럽 중세에는 십일조를 거두는 과세권을 놓고 교황과 국왕의 다툼이 잦았다. 성직자들에 대한 과세권을 누가 갖느냐 하는 것은 성직자들에 대한 임명권을 누가 가지느냐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시대적 추세에 따라 과세권은 국왕 중심으로 넘어갔다가 17세기를 지나면서 국가가 과세권을 행사하게 됐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1688년에, 독일에서는 1807년에 십일조가 각각 폐지되는 등 유럽에서는 모두 없어졌다. 독일은 교회세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가 교회세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헌금이 아닌 세금을 직접 징수한 뒤 교단에 나눠 주고 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거덜난 재정을 메우려고 교회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면서 교회가 다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자 1826년에 교회세를 도입했다. 이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주거비용 비과세를 제외하고 월급 및 사례금에 대한 세금을 걷고 있다. 미국 국세청(IRS)법 417조에는 ‘성직자의 소득’에 관한 정의가 있다. “목회 사역을 담당하는 교역자라면 누구든 월급과 헌금, 그리고 결혼식 주례, 세례, 장례 등의 수행으로 받는 수당 등 모든 소득은 과세 대상이다”라고 돼 있다. 영국은 1년에 8500파운드 이상의 보수를 받는 목사는 현금뿐 아니라 현물에 대해서도 세금을 납부한다. 캐나다와 일본의 성직자도 일반 개인소득자와 같이 세금을 내도록 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종교인 과세를 하지 않고 헌금 성격의 십일조가 남아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신교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그제 교단 총회에서 개신교 장로교단 가운데 처음으로 목회자 납세를 결의했다. 대한성공회를 제외하고 개신교 교단이 납세를 결의한 것은 처음이다. 환영할 일이다. 굳이 조세평등주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절대다수가 종교인 과세에 찬성하고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공감대를 넓혀 가고 있어서 다른 종교에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움직임이 널리 퍼진다면 우리 사회가 종교를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다. 여기에 입법을 책임진 여야의 동참은 물론이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기장, 장로교단 중 첫 납세 결의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국내 개신교 장로교단 중 첫 번째로 목회자 납세를 결의했다. 개신교 교단으로는 2012년 대한성공회가 처음으로 교단 차원의 성직자 납세를 결의한 데 이어 두 번째다. ●개신교 교단으로 성공회 이어 두 번째 기장은 지난 16일 강원도 원주 영강교회에서 제100회 총회 3일차 회의를 열고 종교인 과세와 관련, “근로소득세 납부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기장 교회와사회위원회는 총회에서 “종교인 납세에 대한 신학적·실정법적인 검토 결과와 사회적 여론, 정부의 시행 의지 등을 고려할 때 교단의 입장을 근로소득세 납부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헌의안을 제출했었다. 기장 측에 따르면 전날 헌의안 보고 당시 일부 총대원들이 예장통합 등 다른 교단들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 의견을 개진해 최종 채택에 난항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별 이의 제기 없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소득세법상 종교인 과세를 법제화하는 정부법안의 통과와 관련, 내년 총선에 앞서 교계의 눈치를 봐 온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정치권 법안 통과에 영향 미칠지 주목 기장 총회 측은 “종교인 납세를 관철하려는 정부의 태도나 사회 여론을 생각할 때 더이상 납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교감이 형성됐다”며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교육을 하고 자료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장 측은 이번 결의가 목회자 개개인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게 아닌 만큼 실제 납세가 어느 정도 이뤄질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청년’ 아펜젤러, 실천 중시한 신학교서 ‘도전의 싹’ 틔웠다

    ‘청년’ 아펜젤러, 실천 중시한 신학교서 ‘도전의 싹’ 틔웠다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낯선 한국 땅에서 평생 봉사했던 아펜젤러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더욱 회자되는 초기 선교사다. 44살의 나이에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 실종됐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빈 무덤만 남아 있다. 첫 근대식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연 데 이어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한 아펜젤러.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새에덴교회 주관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에 나선 일행이 미국 뉴저지주 모리스카운티 매디슨시에서 만난 드루신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신학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랭클린&마셜대를 졸업한 그가 감리교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1882년 들어간 학교. 펜실베이니아주의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펜젤러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독일개혁교회에 다녔지만 프랭클린&마셜대 시절 한 부흥 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감리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리교의 뿌리라는 드루신학교는 학문적인 일보다 설교 같은 실천적인 일을 중시했던 학교로 꼽힌다. 학교 관계자들은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고 전한다. 종교다원론자로 이름난 고 변선환 목사가 공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강을 했던 곳이다. 감리교 교인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방문해 남긴 휘호도 걸려 있다. 아펜젤러는 1884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열린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ISMA) 총회에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때 언더우드와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 선교를 꿈꿨지만 친구가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되자 선교지를 바꿨다. 같은 해인 1884년 한국으로 발령받아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결행했다. 한국에 와서도 정동제일교회, 인천내리교회를 개척해 감리교 교회 전통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학교 고문서도서관에는 아펜젤러가 입학할 때 쓴 자필 소개서와 한국 선교 때 쓴 편지를 비롯해 아펜젤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 수북하게 보관돼 있다. 크리스토퍼 앤더스 고문서실장은 “아펜젤러의 글을 통해 한국 문화와 역사가 미국에 알려졌고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해외로 파견됐다”고 귀띔했다. 드루신학교를 떠나 일행이 다다른 곳은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가 독일개혁교단을 떠나 개인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감리교인이 된 뒤 다녔던 교회이다. 드루신학교 입학 전 이 교회에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고 한다. 7년 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들여 그의 선교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채플에 걸려 있다.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한국 교인들의 방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초창기 보고서를 이 교회에 보내왔는데 랭커스터 지역 신문에 그 내용이 실려 지역 주민들도 아펜젤러의 행적을 샅샅이 알았다고 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지프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뜨거운 체험을 전달하면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며 “우리 교회에서 해외 선교에 가장 기여한 분으로 평가받는다”고 전했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미국)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기독교장로회 목회자 “근로소득세 내겠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국내 개신교 장로교단 중 첫 번째로 목회자 납세를 결의했다.개신교 교단으로는 지난 2012년 대한성공회가 처음으로 교단 차원의 성직자 납세를 결의한 데 이어 두번째다. 기장은 지난 16일 강원도 원주 영강교회에서 제100회 총회 3일차 회의를 열고 종교인 과세와 관련, “근로소득세 납부가 타당하다”는 입장을 채택했다. 이에 앞서 기장 교회와사회위원회는 총회에서 “종교인 납세에 대한 신학적·실정법적인 검토 결과와 사회적 여론, 정부의 시행 의지 등을 고려할 때 교단의 입장을 근로소득세 납부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헌의안을 제출했었다. 기장 측에 따르면 전날 헌의안 보고 당시 일부 총대원들이 예장통합 등 다른 교단들이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의견을 개진해 최종 채택에 난항이 예상됐다. 그러나 이날 회의에서는 별 이의 제기없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소득세법상 종교인 과세를 법제화하는 정부법안의 통과와 관련, 내년 총선에 앞서 교계의 눈치를 봐온 정치권에 영향을 미칠 지 주목된다. 기장 총회측은 “종교인 납세를 관철하려는 정부의 태도나 사회 여론을 생각할 때 더이상 납세를 거부할 수 없다는 교감이 형성됐다”며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교육을 하고 자료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장 측은 이번 결의가 목회자 개개인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 게 아닌 만큼 실제 납세가 어느 정도 이뤄질 지는 미지수라고 전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NCCK에 소속된 기장은 종교인 납세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온 교단으로서 총회에서 현실화한 것일 뿐”이라며 개신교계 전체에 미칠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크리스천 코리아’ 꿈꾸며 복음의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필라델피아(미국)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정동제일- 인천내리교회 개척... 바다 빠진 소녀 구하다 실종

    정동제일- 인천내리교회 개척... 바다 빠진 소녀 구하다 실종

    1885년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낯선 한국 땅에서 평생 봉사했던 아펜젤러는 안타까운 죽음으로 더욱 회자되는 초기 선교사다. 44살의 나이에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배 밖으로 떨어진 한 소녀를 구하려다 실종됐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빈 무덤만 남아 있다. 첫 근대식 교육기관 배재학당의 전신인 영어학교를 연 데 이어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한 아펜젤러.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새에덴교회 주관으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에 나선 일행이 미국 뉴저지주 모리스카운티 매디슨시에서 만난 드루신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신학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랭클린&마셜대를 졸업한 그가 감리교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1882년 들어간 학교. 펜실베이니아주의 수더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펜젤러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독일개혁교회에 다녔지만 프랭클린&마셜대 시절 한 부흥 집회에서 영적 회심을 체험한 뒤 감리교로 전향한 것으로 전해진다. 감리교의 뿌리라는 드루신학교는 학문적인 일보다 설교 같은 실천적인 일을 중시했던 학교로 꼽힌다. 학교 관계자들은 아펜젤러의 영향으로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어 오고 있다고 전한다. 종교다원론자로 이름난 고 변선환 목사가 공부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특강을 했던 곳이다. 감리교 교인인 이희호 여사가 2000년 방문해 남긴 휘호도 걸려 있다.  아펜젤러는 1884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열린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ISMA) 총회에 드루신학교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때 언더우드와도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펜젤러는 원래 일본 선교를 꿈꿨지만 친구가 조선에 가지 못하게 되자 선교지를 바꿨다. 같은 해인 1884년 한국으로 발령받아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한국행을 결행했다. 한국에 와서도 정동제일교회, 인천내리교회를 개척해 감리교 교회 전통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 학교 고문서도서관에는 아펜젤러가 입학할 때 쓴 자필 소개서와 한국 선교 때 쓴 편지를 비롯해 아펜젤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 수북하게 보관돼 있다. 크리스토퍼 앤더스 고문서실장은 “아펜젤러의 글을 통해 한국 문화와 역사가 미국에 알려졌고 아펜젤러의 한국 선교 이후 이 학교에서 많은 선교사가 배출돼 해외로 파견됐다”고 귀띔했다. 드루신학교를 떠나 일행이 다다른 곳은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가 독일개혁교단을 떠나 개인 복음 전도를 강조하는 감리교인이 된 뒤 다녔던 교회이다. 드루신학교 입학 전 이 교회에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봉사했다고 한다. 7년 전 개축하면서 아펜젤러 기념 채플을 들여 그의 선교 업적을 기리고 있다.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 기증한 십자가가 채플에 걸려 있다. 아펜젤러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한국 교인들의 방문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펜젤러는 한국 선교 초창기 보고서를 이 교회에 보내왔는데 랭커스터 지역 신문에 그 내용이 실려 지역 주민들도 아펜젤러의 행적을 샅샅이 알았다고 한다. 이 교회 담임목사 조지프 디파올로는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뜨거운 체험을 전달하면서 가슴으로 믿는 신앙을 설교했다”며 “우리 교회에서 해외 선교에 가장 기여한 분으로 평가받는다”고 전했다. 뉴저지·펜실베이니아(미국) 글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코리스천 코리아를 꿈꾸며 복음 씨앗 뿌린 첫 선교사

    1885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개신교는 이날을 개신교 전래의 시초로 새긴다. 미국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와 감리교 소속의 헨리 아펜젤러(1858~1902)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한 날이다. 20대 중반의 두 선교사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땅끝’이었을 척박한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교육, 의료 선교에 온몸을 바쳤다. 그 이후로 한국 개신교는 전례가 없을 만큼 괄목할 성장을 이뤘고, 뻗어 가는 교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신교 전래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담임목사 소강석)가 지난 7∼11일 진행한 답사 행사를 따라 두 선교사의 삶과 기억, 남겨 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봤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땅에 발을 디딘 언더우드가 처음 남긴 기도문. 한국 개신교계가 줄곧 새긴다는 기도문을 뇌며 처음 찾은 곳은 뉴저지주 북부 노스버겐의 그로브 개혁교회.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가 1872년 미국에 정착해 선교사의 꿈을 키웠다는 그 교회다. 한적한 마을 입구에 오뚝 선 자그마한 예배당.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가 다니던 교회치곤 작다 싶은 생각을 하던 무렵 인솔 목사의 설명이 머리를 때린다. 언더우드의 학창 시절 멘토 역할을 했던 이 교회 윌리엄 아우구스트스 캔 마본 목사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진학한 언더우드를 가르쳤던 마본 목사는 실천적이고 복음 전도적 성향의 목회자였다고 한다. 한국으로 떠나기 전 언더우드에게 목사 안수를 준 마본 목사는 분명 언더우드 영성의 뿌리였을 것이다. 교회 뒤편의 공원묘지. 언더우드와 그 가족들이 1999년까지 묻혀 있던 곳이다. 언더우드는 건강 악화로 귀국해 57세 나이에 애틀랜틱시티의 한 병원에서 숨졌고 이곳에 묻혔다가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가족과 함께 안장됐다. 지금은 묘역과 비만이 덜렁 남았다. 언더우드는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었는가 하면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과 YMCA를 설립한 주인공이다. 그 언더우드는 어떻게 한국에 왔고 한국은 그에게 어떤 땅일까. 그 답은 뉴저지주 브런즈윅 신학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언더우드가 신학도의 길을 걷고 해외 선교의 꿈을 다졌던 북미주 최초의 신학교. 설립자인 헨리 리빙스턴 박사는 노예 해방운동에 앞장섰고 해외 선교를 중시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졸업생의 15%가 세계 각국에 선교사로 파견됐고 언더우드는 그중 한 명이었다. 언더우드가 공부했다는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2층에 선 언더우드 흉상이 눈에 쏙 든다. 연세대가 기증해 세웠다는 흉상이고, 이 학교를 졸업한 선교사 중 유일하게 남은 동상이라니 언더우드가 이 신학교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이 신학교는 지난해 개교 230주년을 맞아 한국의 김진홍 교수를 센터장으로 하는 언더우드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를 설립했다. 이번 학기에는 230년 사상 첫 외국어 과정인 신학연구 한국어 과정도 개설된다. “언더우드가 처음부터 한국에 가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진홍 교수와 함께 언더우드의 선교정신 연구와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 존 코글리 교수의 말이 새삼스럽다. “인도에 가려고 의학 공부까지 했던 언더우드는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한 목사의 보고서를 보고 마음을 바꾼 것 같아요. 한국에 보낼 선교사를 찾던 중 ‘네가 가는 게 어떻겠는냐’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선교지를 바꿨다는 고백 문서가 있어요.” 이 땅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 언더우드의 발자취는 미국 곳곳에 남아 있고, 그 흔적은 매우 귀하게 보존되고 있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필라델피아의 미국장로교역사박물관에서도 언더우드는 혁혁하다. 이곳에 보관된 미국장로교사와 선교 관련 자료 3만 4000박스 중 언더우드의 자료가 가장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란 점뿐만이 아니다. 미국 개신교에서도 언더우드의 위상은 명불허전인 것이다. 언더우드가 뿌린 밀알은 지금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커 있을까. 언더우드가 한국행을 결심한 그 회심의 자리인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떠나는 일행에게 김진홍 교수가 던진 한마디가 머릿속에 휘돈다. “언더우드는 복음 전도에 머물지 않았어요. 교회가 사회를 이끄는 크리스천 코리아를 꿈꿨다고 할까요. 기독교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그리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인간이었지요.” 뉴저지· 필라델피아(미국) 글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종교의 파격/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종교는 보수적인 영역으로 인식된다. 현실의 안정과 평화의 공존을 중시하는 속성 탓이다. 하지만 인류사를 보자면 보수보다 진보와 개혁을 추구했던 종교가 더 성했고 높이 평가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고 외쳤던 예수는 지배층과 권력이 아닌, 소외되고 약한 이의 편에 줄곧 서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실천적 개혁가로 평가되곤 한다. ‘성전을 허물라‘며 부패한 종교와 민심에 호통쳤던 파격은 변혁과 파격의 상징이다. 그러나 보편의 인식과 통념을 깨는 변혁의 측면에서 종교는 대체로 더딘 영역에 속한다. 특히 인간 생명과 존엄의 카테고리를 지키려는 의지와 집단의 대응은 확고하다. 종교계에서 ‘이단’의 대부분은 천부의 생명 가치를 저버린 파격에 대한 엄한 단죄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죽음에 이르게 한 안중근(토마스)을 신자로 공식 인정한 건 2010년의 일이다. 오래도록 지우지 않았던 ‘살인자’의 오명을 털고 일제에 대항한 천주교 형제로 받아들인 그 전환에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냈었다. 그런가 하면 ‘순혈’이라는 초기의 원칙에 충실해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국내 개신교계로부터 여전히 이단 취급을 받는다. 불교계가 우리 사회의 모순적 사안들에 대한 발전과 개혁의 실천적 대응에 나선 것도 근래 들어서의 일이다. 종교계에 통념과 보편의 상식처럼 만연한 구각을 깨고 소외되고 약한 이들을 보듬으려는 변혁의 몸짓들이 일어 일반의 시선을 잡아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禧年)’을 맞아 12월 8일부터 ‘그리스도 왕 대축일’인 내년 11월 20일까지 낙태 경험 있는 여성을 용서하는 권능을 사제에 부여하는 교서를 내렸다. 한시적 사면이지만 낙태를 언급조차 하기 어려운 금기로 여긴 천주교로선 엄청난 파격이다. 취임 이후부터 줄곧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던 교황의 또 다른 역사적 전환이 세계인들의 귀와 눈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런 한켠에서 국내 개신교계 진보 교단들로 구성된 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동성애자에게 눈길을 돌려 주목된다. 천부의 성(性)을 거스르고 배반한다며 혐오 대상으로 여겨 왔던 성소수자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자는 배려 운동이다. 우리 개신교의 뿌리인 미국 개신교계에선 많은 교단이 성소수자를 껴안고 있다. 동성애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이고 목사 안수까지 주는 교단이 늘고 있다. 그런 추세 말고도 약자와 소수자 배려와 껴안기가 종교의 큰 가치라고 할 때 우리 사회가 그 파격에 관심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NCCK는 성소수자 보듬기에 나서기 앞서 고민이 많다고 한다. 우선 사회적 통념이 넘어야 할 큰 벽이라는 걱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같은 개신교 보수 교단들의 반대와 견제는 더 넘기 힘든 장애라고 호소한다. 실제로 보수 개신교단들은 크고 작은 집회나 예배에서 ‘동성애자 절대 불가’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 가고 있다. 개신교계가 함께 동성애자를 품어 안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진통과 곡절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kimus@seoul.co.kr
  • [현장 행정] 도시에 스토리 입혀라…관광 새 길 열린다

    [현장 행정] 도시에 스토리 입혀라…관광 새 길 열린다

    “여기가 제중원이 현대식 병원으로 건물을 지어 옮겨간 자리고, 이 뒤편으로 가면 남대문교회가 있어요. 한국 최초로 개신교 주일예배를 드린 곳이 이 남대문교회라고들 하죠. 이렇게 이 길로 쭉 가서 서울역을 지나면 명동성당보다 더 먼저 건축된 약현성당이 있죠.” 1일 서울 중구 서울역에서 만난 최창식 중구청장의 입은 쉬지를 않는다. 그렇게 설명할 게 많다. 중구가 최근 내놓은 책 ‘소설가 구보씨 중구를 거닐다’ 얘기를 들으려고 함께 찾아간 명소였는데, 최 구청장이 더 많이 설명해주니 재미가 한층 커졌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를 걸으면서 최 구청장은 “1967년에 아버지가 여기서 처음 수제화를 사주셨는데 정말 편했다. 요즘도 가끔 여기서 사 신는다”면서 개인사도 들려주었다.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서소문 순교성지를 향할 때는 “이곳(약현성당)부터 당고개성지를 지나 절두산성지까지 걸으면 한국 천주교의 역사를 꿰뚫을 수 있다”며 “이 길을 하나로 연결해 역사순례길을 만드는 것도 구상 중”이라고 복안도 내보였다. “처음 중구청장으로 취임했을 때 답답했던 게 뭐냐면요, 중구에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한데 그냥 방치하고 있는 거예요. 문화예술이라는 건 도시 마케팅의 기본이거든요. 중구는 이미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거였죠.” 중구가 가진 이야기만으로도 관광정책 아이디어가 속속 튀어나온다. 서애 유성룡 고택이 있던 서애길을 중심으로 남산골 한옥마을, 충무로, 동국대를 묶어 문화벨트로 만드는 ‘서애대학문화거리’도 추진하고 있다. 장충체육관부터 신라호텔을 지나 국립중앙극장과 동국대까지 1㎞에 이르는 서울성곽길을 따라서는 ‘성곽 예술문화거리’로 조성할 예정이다. 이곳에 있는 공영주차장을 지하로 옮기고 무허가 건물 등을 이용해 예술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근거지로 변신시킨다. 남산애니메이션센터부터 명동역까지는 ‘만화의 거리’로, 백범광장부터 명동케이블카 승강장까지는 ‘백범과 도마길’로 만드는 역사문화거리 계획도 세웠다. 중구에 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한데 모은 책이 ‘소설가 구보씨’였다. 1930년대 서울 풍경을 담은 ‘구보씨의 일일’을 쓴 소설가 박태원(1909~1986)과 2015년을 사는 소설가 지망생 박태원의 대화 형식으로 중구 이야기를 풀었다. 미쓰코시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을 보며 여가문화를 비교하고, 경성우편국과 서울중앙우체국 포스트타워에서 과거의 삶을 돌아보는 식이다. 정동길을 따라 서양식 유산을 돌이키고, 을지로에서는 ‘황금광 시대’와 배금주의를 떠올리면서 읽을거리와 생각거리를 던진다. “서울 관광이 쇼핑 중심에서 벗어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는 최 구청장은 “이것은 중구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만의 훌륭한 관광자원을 개발한다는 폭넓은 인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그 초석을 다진다는 사명감으로 이 작업을 꾸준히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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