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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촌로→고려대로’, ‘이승로 성북구청장, 항일단체로 부터 감사패 받아’

    ‘인촌로→고려대로’, ‘이승로 성북구청장, 항일단체로 부터 감사패 받아’

    서울 성북구는 이승로 성북구청장이 지난 7일 ‘인촌로’를 ‘고려대로’로 도로명을 개명, 친일청산에 앞장서고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리는 데 기여한 공로로 항일독립지사선양단체연합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고 11일 밝혔다. 민성진 항단연 사무총장은 “인촌로를 고려대로 바꾼 이 구청장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인촌로 주소 사용 주민 9000여명을 일일이 찾아가 도로명 변경 동의 서명을 받은 구청 지적과 직원에게도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이 구청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 심우장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 그를 따르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성북구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만큼 인촌로 도로명 변경은 성북구의 당연한 노력”이라며 “특히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인 만큼 바른 역사 세우기에 적극 동참하신 성북구민과 고된 과정을 묵묵히 이행해 온 성북구 직원 모두에게 그 의미가 남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지난 2월 항일독립지사선양단체, 고려대 총학생회와 인촌로 변경에 대한 법적인 절차들을 확인하면서 실무 논의를 했고, 8월엔 도로명 인촌로 직권변경 추진계획을 수립하고 주민의견을 수렴했다. 11월엔 성북구도로명주소위원회를 개최, 인촌로 명칭을 다수 주민이 선호하는 ‘고려대로’로 변경하는 내용을 의결했다. 이후 12월엔 인촌로 주소 사용자 9118명 중 5302명(58%)을 찾아 인촌로를 고려대로로 바꾸는 데 대해 동의를 받았다. 구 지적과 전 직원과 조사요원들은 주민 동의를 얻기 위해 인촌로 주소 사용자 전 세대를 평균 5회 이상 방문, 도로명 변경 추진 배경과 필요성을 설명했다. 구 관계자는 “광주 서구가 주민 665명 중 460명 동의를 받아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한 사례가 있지만 인촌로의 고려대로 변경은 주민 9000여명의 의사를 확인해야 하는 대도시에서의 첫 사례인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고 전했다. 인촌로는 6호선 보문역-고대병원-안암역-고대앞사거리 구간(약 1.2㎞)으로, 인촌로와 연결도로 27개의 도로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내 시설로는 도로명판 107개와 건물번호판 1519개가 있다. 인촌 김성수는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의 명단에 오른 인물이다. 정부는 훈장을 취소하고 생가와 동상 등 5곳의 현충시설을 해제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경찰청 총경 전보 인사

    ◇총경전보△홍보담당관 김광식 △혁신기획조정〃이화섭 △재정〃이병노 △규제개혁법무〃 최종혁 △자치경찰기획팀장 정병권 △경찰위원회 정창옥 △경찰개혁추진TF팀장 정영오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실무지원〃최인석 △자치경찰법무〃 박대식 △자치경찰운영지원〃 김종길 △감찰담당관 고범석 △감사〃 김주원 △인권보호〃한원횡 △피해자보호〃박기태 △교육정책〃 곽병우 △복지정책〃 홍명곤 △정보화장비기획〃 김도형 △장비〃 김준영 △범죄예방정책과장 김항곤 △여성청소년〃 이재영 △성폭력대책〃고평기 △여성대상 범죄 근절추진부단장 방유진 △수사과장 손제한 △범죄정보〃 송영호 △특수수사〃노규호 △수사구조개혁팀장 이은애 황정인 △범죄분석담당관 이종규 △교통기획과장 황창선 △교통안전〃박종천 △교통운영〃한창훈 △경비〃정태진 △경호〃오부명 △항공〃임종하 △테러대응〃김병기 △위기관리센터장 김용종 △정보1과장 김성재 △정보2〃 유승렬 △정보3과〃 윤시승 △정보4〃오동근 △보안1〃 이대형 △보안3〃양태언 △보안4〃 이길호 △국제협력〃 이경자 △외사수사과 황영선 <경찰대>△ 교무과장 송원영 △기획협력과장 최인규 △학생과장 우지완 △치안정책연구소 기획운영과장 박창지 <경찰인재개발원>△교무과장 이만형 △ 학생과장 서기용<중앙경찰학교>△운영지원과장 김동권 △교무과장 이동섭 △학생과장 이준배<경찰수사연수원> △운영지원과장 조용성 △교무과장 이병우<국립과학수사연구원> △행정지원과장 양승현<서울지방경찰청>△청문감사담당관 이준형 △인사교육과장 이호영 △정보화장비과장 이범규 △경무과(청와대 국정상황실) 최보현 △경무과(국무조정실) 연명흠 △경무과(자치분권위원회) 여개명 △생활안전과장 김홍근 △생활질서과장 이상국 △112종합상황실장 이지춘 △형사과장 최익수 △사이버안전과장 이병귀 △과학수사과장 정채민 △광역수사대장 구재성 △수사과(금융위원회) 오창배 △경비1과장 강언식 △경비과장 엄성규 △정보1과장 임정주 △정보2과장 이용배 △1기동대장 정광복 △2기동대장 박규석 △3기동대장 이을신 △ 4기동대장 박규남 △5기동대장 손동영 △22경찰경호대장 주진우 △202경비대장 심한철 △경찰특공대장 양우철 △중부서장 김성종 △종로서장 박동현 △남대문서장 김원범 △서대문서장 홍석기 △혜화서장 김원태 △용산서장 김호승 △동대문서장 마경석 △마포서장 최현석 △영등포서장 박성민 △성동서장 이승협 △광진서장 이종원 △서부서장 전순홍 △중랑서장 김성구 △ 관악서장 정방원 △강동서장 오승진 △종암서장 양영우 △구로서장 유윤상 △서초서장 김종철 △양천서장 박정보 △노원서장 박동수 △은평서장 김성희 △도봉서장 박수영 △수서서장 김숙진 △경무과 이교동 강상문 김상형 이연형<부산지방경찰청> △청문감사담당관 정규열 △경무과장 김영일 △경비과장 윤영진 △112종합상황실장 소진기 △생활안전과장 정석모 △여성청소년과장 김성수 △형사과장 윤경돈 △보안과장 신영대 △외사과장 정명시 △중부서장 박재천 △동래서장 우승관 △영도서장 류삼영 △서부서장 양영석 △사상서장 김해주 △강서서장 박중희 △북부서장 권창만 △기장서장 방원범<대구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박재석 △청문감사담당관 최석환 △보안과장 김대현 △112종합상황실장 손영진 △여성청소년과장 박희룡 △수사과장 장호식 △사이버안전과장 류영만 △과학수사과장 최용석 △경비교통과장 정식원 △동부서장 양명욱 △북부서장 시진곤 △수성서장 정상진 △달서서장 박종문<인천지방경찰청>△경무과장 강헌수 △112종합상황실장 김대기 △생활안전과장 김성용 △여성청소년과장 라혜자 △수사과장 이재홍 △사이버안전과장 양동재 △정보과장 이선래 △보안과장 정지용 △외사과장 강석현 △논현서장 이상훈 △부평서장 조은수 △ 삼산서장 임실기 △서부서장 서연식 △계양서장 김철우 △연수서장 남경순<광주지방경찰청>△ 홍보담당관 김학남 △ 청문감사담당관 권영만 △ 정보화장비과장 정규열 △ 정보과장 김영근 △보안과장 김재석 △112종합상황실장 박종열 △여성청소년과장 정환수△형사과장 양우천 △경비교통과장 임준영 △동부서장 김영창 △북부서장 김홍균<대전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곽창용 △청문감사담당관 백기동 △ 경무과장 육종명 △정보과장 박종민 △보안과장 한종욱 △112종합상황실장 서정권 △생활안전과장 이동기 △여성청소년과장 최기영 △수사과장 김선영 △경비교통과장 김환권 △청사경비대장 김재훈 △중부서장 이동주 △동부서장 김의옥 △서부서장 이원준 △둔산서장 김종범 △유성서장 심은석<울산지방경찰청>△청문감사담당관 장종근 △경무과장 정진규 △정보화장비과장 김동욱 △보안과장 조중혁 △112종합상황실장 이임걸 △생활안전과장 배기환 △형사과장 조창배 △중부서장 장근호 △남부서장 안현동<경기남부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박정웅 △청문감사담당관 심헌규 △경무과장 김태수 △교통과장 강도희 △경비과장 권기섭 △112종합상황실장 정재남 △사이버안전과장 유제열 △과학수사과장 고창경 △보안과장 박달순 △기동대장 안기남 △과천청사경비대장 권태민 △수원중부서장 송병선 △수원서부서장 정진관 △안양만안서장 이민수 △성남수정서장 최규호 △부천소사서장 김기동 △안산단원서장 이동원 △안산상록서장 모상묘 △평택서장 장한주 △오산서장 박창호 △용인서부서장 황재규 △광주서장 엄명용 △과천서장 박형준 △의왕서장 이건화 △하남서장 임홍기 △이천서장 최정현 △양평서장 강상길<경기북부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박상경 △경무과장 오상택 △정보화장비담당관 김낙동 △112종합상황실장 서민 △생활안전과장 김영진 △수사과장 장병덕 △형사과장 박종식 △사이버안전과장 김상우 △과학수사과장 김선권 △정보과장 곽영진 △ 보안과장 변관수 △의정부서장 김충환 △일산동부서장 전재희 △일산서부서장 이익훈 △남양주서장 이성재 △파주서장 이철민 △양주서장 김종필 △구리서장 김진홍 △포천서장 송호송<강원지방경찰청>△보안과장 이화선 △112종합상황실장 윤휘영 △생활안전과장 최성환 △경비교통과장 한상갑 △삼척서장 정대이 △영월서장 신성철 △인제서장 임성덕 △철원서장 송유철 △화천서장 이규문 △양구서장 강찬구<충북지방경찰청>△정보화장비과장 신현규 △청주청원서장 김원환 △영동서장 김영호 △괴산서장 이유식 △단양서장 김성준 △보은서장 박희동 △옥천서장 이영우 △진천서장 조성호<충남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박진성 △청문감사담당관 고재권 △정보화장비과장 김택준 △보안과장 박세석 △112종합상황실장 김기종 △생활안전과장 김영일 △과학수사과장 김선우 △경비교통과장 최정우 △세종청사경비대장 김정훈 △경무과(세종지방경찰청 개청준비부단장) 안태정 △서산서장 조성복 △논산서장 장창우 △공주서장 전창훈 △당진서장 한상오 △예산서장 김장호 △ 서천서장 홍완선 △청양서장 이관형 △태안서장 장동찬<전북지방경찰청>△경무과장 한도연 △보안과장 최규운 △112종합상황실장 함현배 △여성청소년과장 정재봉 △수사과장 이상주 △형사과장 이후신 △경비교통과장 김태형 △전주덕진서장 남기재 △익산서장 박헌수 △정읍서장 신일섭 △완주서장 송호림 △ 고창서장 박정환 △순창서장 이서영 △진안서장 이연재 △장수서장 박정원<전남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문병훈 △경무과장 양회선 △정보화장비과장 김상철 △정보과장 김현식 △보안과장 이삼호 △ 생활안전과장 정용선 △여성청소년과장 김남희 △여수서장 김근 △순천서장 노재호 △나주서장 정경채 △무안서장 조장섭 △영광서장 정재윤 △함평서장 류미진 △장성서장 이재승 △곡성서장 임태오 △구례서장 이임재<경북지방경찰청>△청문감사담당관 김선섭 △정보화장비과장 김우락 △정보과장 정흥남 △보안과장 이창록 △112종합상황실장 김준식 △생활안전과장 최호열 △수사과장 이갑수 △형사과장 김상문 △교통과장 류창선 △경주서장 이근우 △포항남부서장 김한섭 △구미서장 김영수 △경산서장 김봉식 △김천서장 임경우 △영천서장 김영환 △상주서장 강성모 △칠곡서장 김형률 △청도서장 이승목 △울진서장 손부식 △봉화서장 박종섭 △영양서장 서동수 △군위서장 이용석 △울릉서장 임상우<경남지방경찰청>△경무과장 이병진 △정보화장비과장 정재화 △보안과장 김태경 △외사과장 황철환 △수사과장 김성철 △ 과학수사과장 박준경 △경비교통과장 진영철 △창원서부서장 김상구 △마산중부서장 김균 △양산서장 이정동 △통영서장 하임수 △ 거창서장 김인규 △하동서장 이철수 △함양서장 도원칠 △산청서장 전범욱 △함안서장 한흥수 △의령서장 이선록<제주지방경찰청>△홍보담당관 김형섭 △정보화장비담당관 이연태 △수사과장 변민선 △정보과장 오인구 △외사과장 장원석 △서귀포서장 천범녕<대기>△부산 경무과 김종구 박태길 △대구 경무과 김훈찬 △인천 경무과 류재화 조종림 이기주 김관 △울산 경무과 김성식 △경기남부 경무과 양근원 △강원 경무과 김호영 △충북 경무과 고진태 △전북 경무과 김광호 △경북 경무과 이성호 △경남 경무과 강신홍<치안지도관>△서울 경무과 권혁준 백남익 변종문 오세찬 이광진 이정수 최진태 홍원표 △광주 경무과 이진수 △충남 경무과 맹훈재 △인천 경무과 이두호 △대전 경무과 문흥식 △울산 경무과 김현진 △경기남부 경무과 서동현 △경기북부 경무과 김상희 △충북 경무과 백석현 △전북 경무과 김영록 △전남 경무과 김중호 △경북 경무과 안문기 △경남 경무과 한정우<교육>△서울 경무과 박민영 임현규 박찬우 김찬수 윤정근 임욱성 서상태 최영우 조우종 이동훈 장영철 민윤기 나영민 이승렬 강일구 진점옥 김홍훈 빈중석 신광수 손창권 장정진 유병희 △부산 경무과 박용문 변석우 김병수 △대구 경무과 곽동호 김기대 최미섭 △인천 경무과 이상길 김경환 △광주 경무과 김진천 문병조 △대전 경무과 조정래 △울산 경무과 황덕구 △경기남부 경무과 김원식 이종길 강은석 최복락 김희종 △강원 경무과 최승호 여진용 윤태영 △충북 경무과 정경호 △충남 경무과 조대현 △전북 경무과 권현주 강태호 이인영 △전남 경무과 차복영 김종득 △경북 경무과 변인수 이정섭 △경남 경무과 제옥봉 채경덕 진훈현 △ 제주 경무과 이성균 박현규
  • 인촌 동상 현 상태 유지 여론 높아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된 ‘인촌 김성수’의 고향 전북 고창군 주민들은 동상과 도로명을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1일 고창군에 따르면 최근 3주 동안 주민 1000명을 대상으로 ‘인촌 동상 철거’와 ‘인촌로 개명’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조사 결과 인촌 동상 철거는 현 상태 유지가 51%로 철거해야 한다 39%, 친일행적 안내판 설치 8% 보다 훨씬 높았다. 인촌로 명칭 변경 역시 현 상태 유지가 54%, 바꿔야 한다 33%, 잘 모르겠다 12%로 집계됐다. 이같은 여론조사 결과는 서울시 성북구가 구청장 직권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8%의 찬성을 얻어 ‘인촌로’를 ‘고려대로’로 바꾸기로 한 것과 대조적이다. 고창군은 이번 여론 조사 결과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고 군수 직권으로 도로명을 바꿀 지 여부는 결정하지 않았다. 고창군 관계자는 “앞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해 인촌 선생뿐 아니라 서정주 시인까지 전반적인 친일 인사들의 문제를 다룰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에대해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은 공론화 의미가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해종 항일독립지사선양단체연합 팀장은 “친일 논란은 이미 정부에서부터 대법원까지 결론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공론화까지 될 사항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고창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쇠사슬 묶인 다섯살 소녀가 물 달라고 하자 외면한 독일 여인

    쇠사슬 묶인 다섯살 소녀가 물 달라고 하자 외면한 독일 여인

    2015년 이라크 모술에서 포로로 잡혀온 야지디족 다섯 살 소녀가 땡볕 아래 끌려나와 쇠사슬에 묶인 채로 있었다. 이슬람 국가(IS) 전사인 남편은 집에서 노예로 부리던 소녀가 아프다고 하자 벌을 준다고 이렇게 했다. 목이 마른 소녀가 물과 먹을 걸 달라고 사정하자 독일 출신으로 IS에 합류한 여자는 모른 척했고, 결국 소녀는 사망했다. ‘제니퍼 W’라고만 알려진 27세의 이 여성이 전범 혐의로 독일 뮌헨 법정에 기소됐다. 그녀는 소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 살인죄, 무기 관련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법정에 세워졌다.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종신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영국 BBC가 29일 전했다. 제니퍼 W는 2014년 이라크로 여행을 떠났다가 IS의 자경요원으로 합류했다. 모술과 IS가 점령한 다른 도시 팔루자 시내를 칼라슈니코프 기관총과 권총을 소지하고 폭탄조끼를 입은 채 순찰하곤 했다. 그녀의 임무는 여성들이 IS가 정한 행동 관습이나 의복 규정을 따르는지 단속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소녀가 세상을 떠난 지 몇달 뒤 신분증을 경신하려고 터키 행정수도 앙카라의 독일 대사관을 찾았다가 체포된 뒤 독일로 추방됐다. 처음에는 그녀가 IS에 부역했다는 증거가 부족해 니더작센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 지난 6월 그녀가 다시 시리아로 여행하려 했다는 사실이 들통 나면서 경찰에 검거됐다. 아직 재판 일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모술은 IS에게 3년 동안 점령당한 뒤 지난해 해방됐으며 IS는 이제 이라크와 시리아의 점령지 대부분을 잃다시피 했다.한편 호주 정부는 일급 수배자 명단에 있는 IS 합류자로 IS의 선전 동영상에도 등장했던 닐 프라카시(27)의 호주 시민권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멜버른 태생인 그는 2013년 시리아를 여행하다 IS에 자원해 아부 칼레드 알캄보디로 개명한 뒤 호주에서의 테러 음모에 이런저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3년 전 모술에 가한 미군의 공습 와중에 숨진 것으로 한때 잘못 보도되기도 했다. 지난해 터키가 체포해 구금 중인데 지난 7월 터키 법원은 호주 정부의 송환 요청을 거절하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부친의 혈통 때문에 그는 호주와 피지 복수 국적을 갖고 있었는데 호주 법에 따르면 테러 혐의로 기소되거나 유죄 판결을 받으면 호주 시민권을 빼앗게 돼 있다. 그는 이렇게 호주 시민권을 빼앗긴 12번째 이중 국적자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恨 서린 서대문형무소, 달동네 각박한 삶… 그해 겨울은 스산했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恨 서린 서대문형무소, 달동네 각박한 삶… 그해 겨울은 스산했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3회 서대문(안산 아랫동네)편이 지난 15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영천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대문역 8번 출구에 집결한 참석자들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대문 통술집~석교교회~영천시장을 차례로 둘러봤다. 이어 서대문역사공원에서 서울미래유산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해설을 통해 엄혹했던 경성교도소(서대문형무소) 시절 행해졌던 옥살이와 옥바라지의 고통을 되새겼다. 자락길을 따라 봉수대에 올라 안산 아랫동네의 고즈넉한 겨울 풍경을 내려다봤다.서대문(돈의문)은 행정적으로 한성부 서부 반석방에 속하는 성 밖 십리지역이다. 그러나 서대문은 행정지리학적으로 사대문 안 새문안과 진배없는 특수지역이기도 했다. 서울~개성~평양~의주를 오가는 조선 제1대로인 의주대로와 영은문·모화관 그리고 경기감영의 존재가 조선 수도 한성부 서대문 도시 공간의 핵심 코드이다. 서대문은 1915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궤도 부설로 말미암아 강제 철거될 때까지 종각~남대문 간 남북대로와 함께 동대문~서대문 간 동서대로의 종착점이었다. 의주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조선 초(1393년)부터 수원으로 옮겨간 1896년까지 경기감영이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1번 국도는 중국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연행로(燕行路) 혹은 사행로(使行路)라는 별칭이 따랐다. 조선 제일의 무역로이기도 했다.영천시장 앞 석교교회 앞은 말 그대로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모두 6개의 다리 중 북쪽에서 첫 번째 다리가 석교이다. 다리 아래에는 1967년 복개 이전까지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를 잇는 의주로를 끼고 무악천이 철철 흘렀다. 다리의 남쪽은 교남동, 북쪽은 교북동이었다. 무악천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욱천(旭川)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붙으면서 본명을 잃었고 지금은 만초천이라고 불린다. 기봉·기산·봉우재·봉화뚝·모악산·무악재 같은 다채로운 이름을 가졌던 무악산 또한 길마재의 한자표기인 안산(鞍山)으로 개명됐다. 무악은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움푹하므로 길마(소에 짐을 실을 때 그 등에 얹는 기구)와 같다 해 길마재라고 불렸다. 안산이란 말의 안장같이 생긴 산이란 뜻이다. 무악(毋岳)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는 풍수지리상 서울의 진산(鎭山)인 삼각산(북한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어서 이를 달래려고 ‘어미의 산’이란 뜻에서 모악(母岳)이라고 칭했던 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무악이라는 신령스런 지명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나라를 잃은 탓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돈다. 어쨌거나 안산에 오르려면 지하철 무악재역에서 내려야 하는 게 우리의 지명현실이다.무악과 인왕산은 북방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방어선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사현(무악재)이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녹번현이 있다. 당(唐)나라 장수가 여기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벽제령인데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한 곳이다. 고개 두 곳과 벽제령은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라면서 외침 때마다 지키지도 못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달달 볶는 왕조를 비판했다. 한성부 서부 반송방은 오늘의 인천처럼 서울을 드나드는 제일 관문이었다. 반송방은 고려 남경 때부터 소반처럼 생긴 반송(盤松)이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서지(西池)라는 학교운동장만 한 큰 연못이 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이를 반송지, 반송정, 천연정이라고도 지칭했다. 정조는 국도팔영(國都八詠), 서거정은 한성십경(漢城十景)에 속하는 명소로 꼽았다. 도성대지도, 경조오부도 등 옛 지도에 나타나는 서대문 밖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1407년 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려고 세운 모화관과 영은문이다. 연못 자리에는 개화기 일본 공사관(청수관)과 죽첨공립소학교(동명여중)가 들어섰다. 하필이면 경기감영을 한성부 관할 지역인 반송방에 뒀을까. 경기감영의 설치 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경기도를 다스리는 경기관찰사는 반송방에 본영, 영평(포천)에 신영을 두고 왕래하면서 업무를 봤다. 지금도 수원에 경기도청, 의정부에 경기 제2청(경기북부청)을 따로 두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기도는 수도방위의 중책을 맡고 있으므로 중앙정부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가 필요한 때문이다. 김종서 장군의 집이 서대문 밖 지금의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행이 일흔 살 노장군의 집에서 철퇴를 휘둘러 즉사시킨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죽지 않았다. 왕에게 반역을 고하려고 부인의 가마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기감영과 사대문을 장악한 한명회의 수하들이 서대문과 남대문의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수양은 다음날 새벽 자객을 보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방원에 의해 척살당한 정도전의 수송동 집이 마구간으로 변한 것처럼 김종서의 서대문 집은 여행객에게 말을 대여해 주는 고마청으로 둔갑했다. 역사의 가설은 성립하지 않지만 김종서의 집이 사대문 안에 있었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노릇이다.경기감영 터는 1896년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군부대로 사용되다가 1903년 한성부 청사, 죽첨공립소학교 사택, 고양군청을 거쳐 경성적십자병원(서울적십자병원)이 들어서는 독특한 장소 변화를 겪었다. 또 서부 경찰분서, 경성감옥 분감, 경성측후소(서울기상청) 등도 들어서 이후 변화상을 예감케 한다. 사대주의의 상징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내는 대신 독립관과 독립문이 세워졌다. 일본의 자본과 부추김에 의해 세워진 독립문과 독립관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현저동이란 말 그대로 고개(峴) 아래(底) 동네를 말한다. 인왕산과 무악산이 이어지는 무악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다. 1975년 대통령령에 따라 현저동 절반이 종로구로 편입돼 의주로 동쪽 인왕산 자락은 무악동으로 바뀌었다. 의주로를 중심으로 안산 쪽은 서대문구, 인왕산 쪽은 종로구로 각각 나뉜 것이다. 서대문 밖은 지배세력의 교체에 따른 공간 변화가 두드러진 곳이다. 점유주체가 바뀌면서 공간의 이력도 덩달아 달라졌다. 일제강점기 이후 적산가옥이 많았던 인왕산 아래 대로변 평동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빈민층이 스며들었다. 염상섭은 ‘삼대’에서 “전차에서 내려서 몇 번이나 물어 홍파동에까지 와가지고 수첩을 꺼내보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꼬불꼬불 뺑뺑 돌아야 양의 창자다. 서울서 이십여 년을 자랐건만 이런 동네에는 처음 와 보았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박경리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영천시장엔 한 귀퉁이에 제법 시장까지 선다고 했다. 아무리 공화국의 하늘 아래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인 이상 먹어야 사는 것 다음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사고파는 일…”이라고 한국전쟁 와중에도 열린 영천시장을 그렸다. 현저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현저동 달동네의 각박한 삶이 절절히 펼쳐진다.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한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안에 살아 보자꾸나.”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삼청동(삼청공원의 겨울)●일시: 12월 22일(토) 오전 10시~낮 12시●집결장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신청·안내: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시대 역주행하는 소설 같지만 민족 정체성 되짚어 봤으면…”

    문신 1·2·3 /윤흥길 지음/문학동네/각 408·408·400쪽/각 1만 4800원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 윤흥길 작가의 연재소설 원고를 챙겼다는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듯이 소설을 짊어지고 그 고통스러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최근 1·2·3권이 출간된 장편소설 ‘문신’은 올해 일흔여섯의 작가가 등단 50주년에 독자들을 향해서 힘껏 내미는 손이다. ‘경박단소’(輕薄短小·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음)의 시대. 독자들이 이를 원하고 출판사가 이에 부응하는 시대에 노(老)작가가 내미는 주름진 손. 총 5권인 소설의 4·5권은 내년 상반기에 출간된다. 소설은 황국신민화 정책과 강제 징용이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산서(山西) 마을 천석꾼 최명배 가족의 엇갈린 신념과 욕망, 갈등을 그려 냈다. 아버지 최명배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당시 법의 빈틈을 파고들어 막대한 부를 쌓지만, 둘째 아들 귀용은 아버지를 ‘악덕 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라 부르며 사랑채를 턴다. 여기에 ‘기회주의자’ 아버지와 ‘사회주의자’ 동생 모두에게 거리를 둔 장남 부용도 있다. 혼돈으로 가득한 시대,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시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통과해 나가는 다종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린다.제목 ‘문신’은 전쟁에 나가기 전 몸에 문신을 새기는 풍습 ‘부병자자’에서 비롯됐다.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말했다. “학교 선배이신 이규태 선생님 저서 중에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읽다가 부병자자에 눈이 꽂혔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도 6·25 때 동네 젊은이들이 입영 며칠 전 집 떠나기 전에 가족들이 보는 자리에서 팔뚝에다가 ‘일심’(一心) 같은 걸 새기는 걸 봤거든요.” 죽은 몸뚱이라도 고향에 돌아오겠다는 간절한 비원이 부병자자에, 그리고 ‘문신’에 담겼다. 왜 다시 일제강점기일까. 작가는 “어떤 면에선 이 작품이 역주행 소설 같다”고 했다. 글로벌 시대를 얘기하는 지금이더라도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해 한 번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민족성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일제 말기가 작가의 주제 의식을 구현하는 ‘최적기’였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신’은 대하소설에는 못 미치는 ‘중하소설’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토지’처럼 그 시대를 다룬 호흡 긴 소설들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간상이 등장한다. 지주집에 먹물 아들들, 생각 많고 냉소적인 첫째와 행동파 둘째, 그리고 이들 형제에 자극제가 되는 친척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인물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데 많은 공을 기울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야마니시 아끼라’로 개명한 악덕 지주 최명배는 실은 전통과 조상 신위를 끔찍이 여기는 인물이라는 식으로. “최명배는 놀부 같은 인물인데, 놀부가 사실은 못된 인간이지만 어떤 면에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력적인 인물일 수가 있죠.” 소설은 전반적으로 다지기 잔뜩 들어간 남도 김치같이 풍성한 맛이다(‘다지기’는 ‘다대기’의 바른 말이다). 한평생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다는 작가의 글답게 곳곳에서 출몰하는 다양한 어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또 멈칫할 사위 없이 책장이 막 넘어간다. 문장에 흐르는 유장한 가락 때문이다. ‘둥기당당 쿵덕쿵덕’ 읽으며 뜻을 유추해 보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거나 하면 좋겠다. ‘전두엽이 크지 않아 스스로를 범재라 생각한다’는 작가는 실제 이와 유사하게 소설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야심한 시각 AFKN(주한미군방송)을 소리 죽여 보면서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식으로.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새 옷으로 갈아입은 ‘허블의 법칙’

    [이광식의 천문학+] 새 옷으로 갈아입은 ‘허블의 법칙’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으로 바뀌었다...역사상 가장 놀라운 과학적 발견 1929년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그의 조수 밀턴 휴메이슨과 함께 우리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관측 증거를 발견하여 엄청난 충격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이것은 완전한 상식 파괴로, 우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현기증 나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망해했다. 허블은 우주의 은하들은 우리로부터 후퇴하고 있으며, 먼 은하일수록 후퇴속도는 더 빠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다. 이것이 '허블의 법칙'이다. 훗날 이 상수는 허블 상수로 불리며, H로 표시된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주의 크기와 나이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허블 상수는 '우주의 로제타 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허블은 그 값을 550km/s/Mpc(100만pc만큼 떨어진 천체는 1초에 550km의 속도로 멀어진다는 뜻)이라고 구했다. 그것을 적용하면 우주의 나이가 20억 년밖에 안 되는 것으로 나온다. 지난 70년 동안 과학자들은 허블 상수의 정확한 값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를 두고 '허블 전쟁'이라고까지 했다. 최근 플랑크 우주망원경의 2013년 관측을 기반으로 허블 상수가 67.8(km/s/Mpc) 근처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여기서 Mpc는 약 325만 9000광년이고, 이만한 거리가 늘어날 때마다 지구에서 본 후퇴속도가 초속 67.8km씩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허블 상수의 역수는 약 140억 년으로, 이것이 우주의 나이가 된다. 지금도 허블 상수는 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수로 다뤄지고 있다. 허블의 법칙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V=Hr (V: 은하 후퇴속도 [km/s], r : 은하까지의 거리 [Mpc], H :허블 상수[km/s/Mpc] ) 허블의 법칙은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론의 기초가 되었을 뿐 아니라, 빅뱅의 증거이기도 하다. 허블의 발견에 따르면, 우주 팽창은 나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내가 만약 이웃 안드로메다 은하로 가더라도 마찬가지다. 그곳을 중심으로 모든 은하들은 나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을 것이다. 우주의 모든 은하들은 이처럼 서로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은하들이 스스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팽창은 공간 자체가 팽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하 간 공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은하들은 늘어나는 우주의 카펫을 타고 서로 기약 없이 멀어져가고 있는 셈이다. 허블이 발견한 팽창 우주는 20세기 천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자, 위대한 지식 혁명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허블의 제자인 앨런 샌디지는 우주의 팽창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과학적 발견이라 불렀다. 가톨릭 신부복을 입은 천문학자 이처럼 유명한 '허블의 법칙'이 새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국제천문연맹(IAU)은 지난 8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연례회의와 전자투표에 참석한 회원 11,072명을 대상으로 허블의 법칙을 개명하는 찬반투표를 진행한 결과 78%가 찬성해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실 그 전에도 허블의 법칙을 '허블-휴메이슨의 법칙'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허블의 법칙에서 공동 관측자 휴메이슨이 빠진 것은 당시 그가 정식 과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휴메이슨은 중학을 중퇴한 14세 이후로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윌슨산 천문대 잡역부로 일하다가 천체 관측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고 허블의 조수로 일하게 된 것이다. ​ 그렇다면 한 세기 가까이 이어오던 허블의 독점 체제를 깬 르메트르란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벨기에 출신의 가톨릭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조르주 르메트르는 대학생 때 토목공학을 공부하다가 1차대전에 참전한 후 천문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허블이 법칙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27년, 팽창하는 우주를 나타내는 논문 〈일정한 질량을 갖지만 팽창하는 균등한 우주를 통한 우리은하 밖 성운들의 시선속도에 대한 설명〉을 발표, 매우 높은 에너지를 가진 작은 '원시 원자'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 우주가 되었다는 대폭발 이론을 최초로 내놓았다. 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그의 이론을 '원시 원자에 대한 가설'이라 불렀다. 르메트르는 후일 빅뱅 이론으로 발전된 이 가설에서,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이러한 팽창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의 기원, 즉 ‘어제 없는 오늘'(The Day without Yesterday)이라고 불리는 태초의 시공간에 도달한다는 선구적 이론을 펼쳐냈다. 1927년 브뤼셀에서 열렸던 세계 물리학자들의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을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자신의 팽창우주 모델을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당신의 계산은 옳지만, 당신의 물리는 끔찍합니다"라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 아인슈타인이 거부한다는 것은 곧 전 과학계가 거부한다는 뜻으로, 르메트르는 자신의 이론에 흥미를 잃고 한동안 잊힌 듯이 지냈다. 르메트르가 '솔베이의 절망'을 맛본 지 6년 만인 1933년, 마침내 아인슈타인의 항복을 받아냈다. 우주 팽창을 발견한 허블의 윌슨산 천문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르메트르는 에드윈 허블을 비롯한 쟁쟁한 천문학자와 우주론자들 앞에서 빅뱅 모델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불꽃놀이를 가미하여 현재의 우주 시간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의 최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후에 폭발이 있었고, 그후엔 하늘이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창조된 생일의 장관을 보기엔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의 팽창우주 강의를 듣고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 창조에 대해서 가장 아름답고 만족스러운 설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또한 1965년, 빅뱅의 강력한 증거인 우주배경복사가 발견됨으로써 르메트르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소식은 임종을 앞둔 르메트르에게도 전해졌다. 평생 신과 과학을 함께 믿었던 빅뱅의 아버지 르메트르는 1966년에 우주 속으로 떠나갔다. 향년 72세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지난 뒤 르메트르는 '팽창우주'의 지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아 허블-르메트르’ 법칙으로 수정되면서, 우주팽창론적 사고를 수학적으로 제시한 업적이 늦게나마 빛을 보게 되었다. IAU는 자료를 내고 “법칙의 물리적 설명과 증거는 허블이 제시했지만, 르메트르 역시 관련 연구를 비슷한 시기에 수행했다”며 “우주 팽창론을 수학적으로 유도했던 그의 업적을 다시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로써 전 세계의 천문학 교과서에는 앞으로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이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 IAU는 1919년 설립돼 전 세계 총 107개 국가의 연구자가 참여하고 있는 국제 천문 조직으로, 천문학과 관련한 연구와 소통, 교육 등의 발전을 목표로 국가간 협력을 유도하고 있다. 다음 제31차 국제천문연맹총회(IAUGA)는 2021년 한국 부산에서 열린다. IAUGA는 천문학 분야 최대 국제학술대회로 1922년부터 3년마다 개최되고 있다. ​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청춘식당’ 최창민 “아버지 빚·매니저 횡령, 막노동 하면서 해결”

    ‘청춘식당’ 최창민 “아버지 빚·매니저 횡령, 막노동 하면서 해결”

    ‘청춘식당’에 90년대 최고의 하이틴 스타 최창민이 출연한다. 5일 UMAX(유맥스) 예능프로그램 ‘청춘식당: 그 때 그 메뉴’ 제작진이 최창민(현재는 최제우로 개명, 이하 최창민)의 추억 돋는 토크쇼와 미니콘서트가 펼쳐진 현장 스틸컷을 공개했다. 90년대 후반 배우, 가수, 모델로 활동한 1세대 만능엔터테이너 최창민은 ‘짱’, ‘영웅’, ‘그녀의 뒤엔 항상 내가 있었다’ 등 HOT, 젝스키스와 함께 가요프로그램 톱3를 다툴 정도로 당대 큰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소리없이 연예계에서 자취를 감춰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 가운데 공개된 사진 속 최창민은 데뷔곡 ‘짱’의 깜찍한 브이포즈를 그대로 재현하며 20년 만에 다시 열정 넘치는 무대를 예고해 그를 기억하는 팬들의 기대감을 수직상승시키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 최창민은 그동안 방송에서는 다 말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은퇴 비하인드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밝힐 예정이다. 당시 미성년자 였던 최창민은 한 매니저와 회사를 세우고 최고의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김승현까지 데려왔지만 “인감, 통장까지 다 맡겼다”가 이중 계약에 휘말리게 되면서 큰 액수의 횡령액을 자신이 오롯이 떠안게 된 것. 이후 “밤업소에 나가라”, “몸으로 갚아라”는 새 소속사의 갑질과 횡포에 자신의 팔을 부러뜨린 쇼킹한 사건부터 목발 짚고 팬 싸인회를 나가야만 했던 안타까운 일화까지 꽃미남 최창민의 의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벌써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며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특히 최근 연예계에서 스타들의 ‘빚투’논란이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의 빚과 매니저의 횡령을 자신이 다 끌어안고 막노동을 해가면서까지 해결한 최창민의 남다른 책임감이 재조명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관전포인트는 최창민의 20년 만의 컴백무대다. 그동안 토크쇼 이외에 최창민이 가수로서 무대를 다시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청춘식당’의 전매특허인 팬들과 함께 하는 미니콘서트 코너에서 최창민은 자신의 데뷔곡인 ‘짱’을 열창해 그를 추억하는 팬들에게 오랜만에 반가움과 그리움을 물씬 자극할 예정이다. 한편, 20년만에 가수로 돌아온 최창민의 열정적인 무대와 그에게 힘을 주는 추억의 맛까지 다채롭게 펼쳐질 20세기 레트로 뮤직&푸드 토크쇼 ‘청춘식당: 그때 그 메뉴’ 2회는 5일 오후 8시 UMAX(유맥스)에서 방송된다. 사진제공=UMAX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야간고 신화·100대 명판결 100쪽짜리 영장으로 전락

    3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면서 사법부가 술렁이고 있다. 30년 전 2차 사법파동 당시 ‘사법부 독립’을 외치며 성명에 동참했던 소장파 판사들이 이제 ‘사법농단’ 핵심 피의자로서 구속 기로에 선 것이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연이어 맡은 박·고 전 대법관은 공통적으로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박 전 대법관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공무상비밀누설,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공전자 기록 등 위작·행사 혐의까지 추가 적용됐다. 박·고 전 대법관의 영장청구서 분량만 각각 158쪽, 108쪽에 달한다. 각각 ‘야간고 신화’와 ‘명판결’로 후배 법관들의 존경을 받던 두 전직 대법관은 양승태 사법부 시절 각종 재판거래 및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등에 적극 관여하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장본인으로 전락했다. 박 전 대법관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1972년 야간학교인 서울 균명고(74년 환일고로 개명)에 진학해 아르바이트와 함께 학업을 이어 갔다. 환일고 출신으로선 처음으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한 그는 판사로 임명된 뒤 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사법정책실장, 기획조정실장 등 사법행정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11년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3년 뒤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명으로 법원행정처장직을 맡았다. 퇴임 이후엔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임명됐지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진 이후 강단에 서지 않고 있다. 후임 행정처장인 고 전 대법관 역시 뛰어난 판결로 이름을 알렸다. 1991년 서울고법 근무 때 주심 판사로 관여한 유성환 의원에 대한 국회의원 면책특권 인정 판결은 근대사법 100년사의 100대 판결 중 하나로 선정되고, 많은 헌법교과서에 인용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부장판사로 재직할 때에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재정적 위기에 처한 쌍용차, 신성건설, 현진에버빌 등 수백개 기업에 대한 기업회생절차를 적절하게 지휘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법원행정처 차장, 건설국장, 전주지법원장 등을 거친 고 전 대법관은 2012년부터 지난 8월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이들은 1988년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법원장 선임 문제를 놓고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한 소장파 판사 430여명의 명단에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장 자리에서 저지른 이들의 행위는 끝내 사법부 신뢰를 무너뜨렸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마이크로닷 부모, 뉴질랜드서 개명만 3차례…30억 집 소유”

    “마이크로닷 부모, 뉴질랜드서 개명만 3차례…30억 집 소유”

    친척과 지인 등으로부터 거액을 빌린 뒤 해외로 잠적했다는 의혹을 받는 래퍼 마이크로닷(본명 신재호·25) 부모 신모씨 부부가 뉴질랜드에서 이름을 3차례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29일 디스패치 보도에 따르면 뉴질랜드에서 마이크로닷 아버지 신모씨는 청소용역업체를, 어머니 김모씨는 방송에 소개됐던 한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1998년 5월 뉴질랜드로 출국했던 신씨 부부는 현재 뉴질랜드 시민권자로 법인등기 상에서 3차례나 개명한 사실이 확인됐다. 마이크로닷 아버지는 2011년 8월 ‘XX 신’으로 등록했던 이름을 2017년 12월 ‘YY 신’으로 변경했고, 2018년에는 다시 ‘미스터 Z 신’으로 바꿨다. 어머니 역시 2015년 ‘XX 킴’에서 2017년 ‘X 킴’, 5달 만에 ‘미시즈 Y 킴’으로 개명했다. 아버지 신씨가 2013년 구입한 집의 공시지가는 137만5000 뉴질랜드 달러(NZD)로 약 10억5000만원 정도였고, 어머니 김씨와 큰아들이 소유한 집은 167만5000 NZD(약 11억5000만원)로 현재 20억원 내외로 거래된다고 평가받았다. 마이크로닷 역시 방송에서 “19억 원대 저택을 샀다”고 언급했다. 마이크로닷 부모가 소유한 집을 합치면 3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주지검 제천지청은 이들 부부와 관련해 범죄인 인도 청구 절차를 밟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뉴질랜드 현지 사법당국의 판단 절차가 남아 있어 실제 송환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범죄인 인도는 검찰의 건의를 받은 법무부가 상대국에 요청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범죄인 인도 조약, 형사사법 공조 조약을 맺은 나라로, 앞서 경찰도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에 적색수배 요청 절차를 개시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아비가일 남자친구 최초 공개, 훈훈 비주얼에 ‘시선 집중’

    아비가일 남자친구 최초 공개, 훈훈 비주얼에 ‘시선 집중’

    아비가일이 남자친구를 최초 공개해 화제다. KBS 2TV ‘볼빨간 당신’은 부모님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하는 자식들의 열혈 뒷바라지 관찰기이다. 지난 방송에서 파라과이 출신 방송인 아비가일은 남다른 한국 사랑으로 귀화까지 한 어머니와 함께 출연 중이다. 아비가일은 ‘한국 이름을 갖고 싶다’는 어머니의 꿈을 위해 개명신청을 도왔다. 특별한 아비가일 모녀의 이야기는 첫 방송부터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오늘(13일) 방송되는 ‘볼빨간 당신’에서는 아비가일 가족의 경주여행기가 공개된다. 특히 여행지에서 솔직해진 어머니 덕분에 아비가일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까지 공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이목을 집중시킨다. 꿈에 그리던 경주 여행 첫날 밤. 아비가일은 어머니를 위해 특별히 한옥 숙소를 마련했다. 그 곳에서 가족은 일바지 패밀리룩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솔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비가일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아비가일은 갑작스러운 남자친구 이야기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으나 “솔직히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그 이유를 고백해 순간 아비가일을 당황케 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지, MC 이영자, 홍진경, 오상진 마저 뒤집어지게 한 그 이유가 공개된다. 이와 함께 이날 방송에서는 아비가일의 남자친구가 최초로 공개될 전망이다. 매력적이고 훈훈한 아비가일 남자친구의 모습에 모두들 깜짝 놀란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KBS2 ‘볼빨간 당신’은 13일 오후 11시 10분에 방송된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서울시여성연합합창단, 제4회 정기연주회 개최

    서울시여성연합합창단, 제4회 정기연주회 개최

    서울시여성연합합창단이 안중근의사 의거 109주년 하얼빈동양평화축제 출연 기념 제4회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공연은 11월 12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Peace, Seoul 평화 위의 서울’이란 부제로 개최된다. 서울시여성연합합창단은 전 서울특별시여성합창단 연합회(1995년 창단)가 2012년 해단된 서울시 25개 자치구를 대표하는 구립합창단의 전, 현직 단장으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다. 2013년 2월 새로운 합창단명으로 개명하여 오직 합창을 통해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이웃과의 화합과 소통을 추구하고자 재창단됐다. 지난 8월 10일 5백여명의 하얼빈 시민들이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 문화축제’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이 현재의 남과 북의 평화 무드가 한반도에 사는 우리 모두의 숙원을 이루기를 기원하며 개최되는 음악회이다. ‘평화를 위하여, 동양평화를 바라며, 고향을 그리며’ 란 세 가지의 주제로 개최된다. “평화를 위하여”는 평화를 주제로 한 곡들로 구성되고 “동양평화를 바라며”는 안중근의사가 부른 장부가, 중국과 일본의 민요를 통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그리고 3부에 “고향을 그리며“는 남북이 하나 되는 곡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서울시여성연합합창단은 Peace, Seoul 평화 위의 서울, 세계 속의 서울 등 서울을 문화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나는데 일조하고 있는 단체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난 딴따라가 아니다” 맨발로 50년…투병 중에도 ‘소확행’ 꿈꿔

    ‘맨발의 청춘’ 반항적 캐릭터로 스타 반열 2013년 ‘야관문’까지 총 535편 영화 참여 같은 영화 출연한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 강신성일로 개명 뒤 2000년 총선서 당선 자서전에 외도 고백·뇌물 복역 등 부침도“나는 ‘딴따라’가 아닙니다. 나는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맨발의 청춘’으로 시작해 영화판을 50년 넘게 누빈 배우 신성일은 생애 마지막까지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영원한 영화인’이었다. 1957년 한국배우전문학원에 입학해 김수용, 유현목, 김기영 등 감독들의 강의를 들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 고인은 이후 신상옥 감독이 설립한 신필름 배우 공모에 합격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본명이 강신영인 고인은 신필름 시절 ‘뉴 스타 넘버 원’이라는 영어 뜻을 한자에 담은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얻었다고 한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그는 1962년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청춘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모두 꿰찼는데 당시 한국 영화를 ‘신성일이 나오는 영화’와 ‘신성일이 나오지 않는 영화’로 구분할 정도였다. 부산영화제 등이 지난해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 해에만 그가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렸다. 특히 공전의 히트작인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길거리의 삶을 사는 폭력배를 연기한 그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캐릭터를 대표했다.지난 50여년간 스크린에 등장한 횟수도 단연 독보적이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고인은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500편 넘는 작품에 참여했다. 1970~80년대 무력과 좌절에 빠진 지식인을 연기한 ‘별들의 고향’(1974), ‘겨울여자’(1977), ‘길소뜸’(1985) 등을 비롯해 2013년 ‘야관문:욕망의 꽃’에서 주연으로 활약하는 등 200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현역 배우’였다. 결혼식 역시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그는 1964년 11월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전국민의 관심 속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엄앵란과 웨딩마치를 울렸다. 당시 결혼 초청장이 암거래되고 4000여명의 하객과 구경꾼들이 몰려들 정도로 북새통을 이룬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당대 최고 스타답게 스캔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는 2011년에 펴낸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1970년대 연극배우와 아나운서로 활동한 고 김영애씨와의 사랑 이야기를 공개해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엄앵란씨가 지난 3월 MBC TV에 출연해 “우리는 동지야. 끝까지 멋있게 죽어야 한다”며 마지막까지 신성일을 돌본 사실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치에 눈을 돌린 고인은 예명인 ‘신성일’에 본래 성인 강을 붙여 ‘강신성일’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2000년 제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했다. 하지만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옥외광고물업자 선정과 관련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그는 2005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7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신성일은 지난해 자신의 회고전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년에는 따뜻하고 애정이 넘치는 영화 ‘소확행’(당시 밝힌 제목은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하고 있고, 내후년에는 김홍신 작가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것”이라며 차기 계획을 밝혔었다. ‘소확행’의 연출을 맡기로 했던 이장호 감독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성일이 형이 영화 제목을 ‘행복’이라고 붙이신다길래 제가 허진호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작품이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고심 끝에 ‘소확행’이 좋겠다고 하시더라”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형님께서 예측할 수 없는 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배우 신성일씨 폐암으로 타계…한국 영화사 최고 스타

    ‘은막의 스타’ 신성일씨가 4일 오전 2시 25분 폐암으로 타계했다. 81세. 신성일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이사장이신 영화배우 신성일께서 4일 오전 2시 반 별세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뒤 전남의 한 의료기관에서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전날 오후 한때 고인이 별세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단지 위중한 상태로 전해져 오보인 것으로 정정됐다가 결국 몇 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1960~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국민적 스타 배우였다. 본명은 강신영이지만 고 신상옥 감독이 지어준 예명 ‘신성일’을 주로 썼고, 이후 본명을 표기해야 하는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앞두고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살린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성일씨는 생후 사흘 만에 부모의 이사로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 1966년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 신상옥 감독, 김승호 주연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고인은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별들의 고향’(1974년), ‘겨울 여자’(1977년) 등 숱한 히트작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남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다작이 성행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해도 신성일씨는 출연 작품 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출연 영화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데뷔 이후 500편이 넘는 다작을 남겼다. 1963년 한 해에만 ‘청춘교실’ 등 21편에 출연했으며, 1964년에는 ‘맨발의 청춘’ 등 32편, 1965년 ‘흑맥’ 등 34편, 1966년 ‘초우’ 등 46편 영화에 출연했다. ‘안개’ 등 51편 영화에 출연한 1967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해였으니, 이해 제작된 한국 영화는 총 185편이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기록적 다작 속에서 생명력 있는 행군을 펼친 것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 예를 찾기 불가하다”며 “기록적 출연 편수야말로 그 스타성 증거”라고 평했다. 명성만큼이나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1968년과 1990년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대종상영화제 공로상, 부일영화상 공로상 등 수없이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영화 관련 단체 활동도 적극적이었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1994년에는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 부이사장을 지냈다. 2002년에는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과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언론과정, 1997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2000년 경희대 대학원 사회학과를 수료했다. 대구과학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 계명대 연극예술과 특임교수를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 인터뷰집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고인은 영화계 성공을 발판으로 정계에도 진출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서울 마포·용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으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그러나 삼수 끝에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의정활동을 펼쳤다.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이 그의 조카다. 고인의 생전 마지막 공식 활동은 지난달 초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이었다. 그는 부산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해 이장호 감독, 배우 손숙과 함께 밝은 표정으로 레드 카펫을 밟았다. 전찬일 평론가는 “신성일은 투병 와중에도 그가 아니면 소화해내기 힘들 파격적 의상과 환한 미소로 부산영화제 개막식을 빛냈다”면서 “부산영화제 개막식 주인공을 단 한 명 꼽으라면 단연 신성일이었다”고 평했다. 영화계에서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화인장을 거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화인 단체 대표들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 당대 최고의 여배우 부인 엄앵란 씨와 장남 석현·장녀 경아·차녀 수화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차릴 예정이었으나 23호실로 옮겨졌다. ☎ 02-3010-2000(대표번호)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아일랜드 여가수 시니드 오코너 개종 선언 “무슬림이라 행복”

    아일랜드 여가수 시니드 오코너 개종 선언 “무슬림이라 행복”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지난 2003년 가수 은퇴를 선언한 시니드 오코너(52)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천명했다. 1990년 히트곡 ‘낫싱 컴페어스 2 U’로 잘 알려진 그녀는 지난 20일(이하 현지시간) 트위터에 아드한을 읊고 이슬람식 기도를 올리는 동영상과 함께 글을 올려 “지적인 신학의 여정 끝에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이슬람에 이르렀다. 기쁘기 그지 없다”며 이슬람식 이름 슈하다로 개명했다는 사실도 함께 공개했다고 영국 BBC가 25일 전했다. 아울러 동료 무슬림들이 자신을 응원해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아일랜드의 이맘(영적 지도자) 샤이크 DR 우마르 알카드리는 그녀와 함께 이슬람 신앙 서약을 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올렸다. 그녀가 종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에는 마그다 다빗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밝혔다. 늘 머리를 민 상태로 무대에 올라 솔직하고 과감한 언행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과격한 언동으로 논란을 일으킨 일도 많았다. 어린 시절 학대와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그녀는 학교에서 퇴학 당하고, 물건을 훔치다 소년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친척 결혼식에서 `에버그린’을 부르는 장면을 아일랜드 그룹 투아누아의 드러머 폴 번이 보고 가수 데뷔를 권했다. 커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공연을 하며 돈을 모아 더블린 음대에서 발성과 피아노를 공부하고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 런던으로 옮긴 뒤 두 장의 앨범을 히트시키며 얼터너티브 음악의 선구자로 나섰다. 아일랜드공화국군대(IRA)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U2에 대한 반감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고 공연 때 미국 국가가 연주되면 안된다는 식으로 의사 표현이 거침 없었다.1992년 세 번째 앨범 발매 후 미국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출연해 교황 사진을 찢으며 “진정한 적과의 투쟁을!”이라고 외친 일로 유명하다. 7년 뒤 프랑스 루르드의 작은 성당에서 신부 서품을 받은 일로 또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여성을 신부로 인정하지 않아 서품은 공인 받지 않았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법원이 알려준 피해자 신상… “유서 미리 써놨다”

    법원이 알려준 피해자 신상… “유서 미리 써놨다”

    형사訴와 달리 주소·주민번호까지 노출 “개명하고 전화번호 바꿨지만 불안” 호소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몰라 유서도 미리 써놨습니다. 도대체 왜 피해자가 두려움에 떨어야 할까요.” 성폭력 가해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가 인적사항이 그대로 노출돼 보복범죄의 두려움을 안고 있다는 한 피해자가 민사소송법 개정을 촉구하고 나서며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자신을 23세 여성이라고 소개한 A씨가 지난 4일 ‘성범죄 피해자의 집주소와 주민등록번호 등을 가해자에게 보내는 법원을 막아 주세요’라고 호소하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이 22일 현재 19만명에 육박하는 동의를 받고 있다. A씨는 지난 2015년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라면서 준강간치상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내년 8월 출소하는 가해자에게 보복범죄를 당할까 봐 불안하다고 토로했다.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지만 판결문 등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등의 정보가 그대로 가해자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A씨는 “민사소송은 돈이 오가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피고의 인적사항이 정확해야 한다며 법원에서는 법적으로 문제 될 게 없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서운 마음에 휴대전화 번호도 열 번 넘게 바꾸고 이름도 바꿨다. 그런데 이사를 갈 형편이 안 된다”며 두려움을 토로했다. A씨와 같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정작 손해배상 소송을 내는 데는 주저하게 된다는 지적은 법조계에서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올해 초 활발해진 ‘미투(#Me too) 운동’으로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한 폭로와 고발이 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김재희 변호사는 “고소장을 가명으로 제출하고 재판 과정까지 인적사항을 보호받는 형사재판과 달리 민사소송은 피해자가 소송 당사자(원고)가 되기 때문에 인적사항을 모두 적어야 소장을 접수할 수 있다”면서 “피해자 주소 등의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돼 많은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꺼린다”고 설명했다. 법원에서는 “실무적으로 송달 장소를 소송대리인 사무실로 지정하거나 조서를 가명으로 작성하는 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명확한 규정이 없는 만큼 그야말로 법원과 재판부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 셈이다. 김 변호사는 “형사소송 과정에서 이미 검찰과 법원에서 피해자의 동일성이 확인된 뒤에 가명으로 재판이 진행된 만큼 유죄 판결이 나온 사건에 한해서라도 민사소송 시 원고(피해자)의 신원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법원과 재판부의 재량이 아니라 시스템이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소송기록 열람 및 복사, 송달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가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소관 상임위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검토보고서를 통해 “피고의 방어권을 제약할 우려도 있다”며 부정적 의견을 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광복 73년…서울 한복판 ‘일제 명의 건물들’ 말이 됩니까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올해로 73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일제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일본기관이 소유했던 동산과 부동산을 광복된 이후 사람들은 ‘적산’(敵産)이라고 불렀다. 적산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적산은 미군정법령 제33호에 따라 조선 군정청으로 귀속되기 시작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 귀속 주체가 이관됐다. 한마디로 적산은 모두 국가로 귀속되는 게 대원칙이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친일파의 득세가 이어지면서, 친일파 재산은 물론 적산 환수도 난항을 겪었다. 한국전쟁까지 발발하자 토지대장 상당수가 소실됐고, 일본인 명의의 토지 ‘적산’ 가운데 상당수의 땅은 소유권이 묘연해졌다. 아직도 등기 말소 등 행정절차를 밟지 않아 일본인 이름으로 된 건축물과 토지들이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재산의 소유주를 명확히 바로잡는 것은 일제강점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물론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일제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앞장선 두 명의 공무원을 만났다.●사대문 안 일제 잔재 없애라 김영균(53) 서울시 중구청 지적행정팀장은 건축물대장이나 등기부상에 일본인 명의로 기재돼 있는 건축물에 대해 주인을 찾아 주는 작업을 한다. 1989년 서울시에 입사한 김 팀장은 2015년 중구로 발령이 나자 이 일을 시작했다. 그는 “건물 소유주도 모르게 일본인이 이중 등기되어 있어서 건물을 처분하지 못한다는 사연과 등기말소를 하려고 해도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알고 일본인 재산 등기말소 작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제는 1912년 한반도 지배·수탈을 위해 들여온 기존 등기와 연계해 건축물대장 기초자료를 구축했다. 해방 후 ‘가옥대장’으로 불렸던 건축물대장은 1962년 건축법 시행과 함께 도입됐다. 때문에 건축법 시행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은 소유권 변동, 철거 등의 변화가 있어도 건축물대장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일본강점기 때 자료가 그대로 남았다. 예를 들어 서울 충무로에 있는 한 단층 건물은 1979년에 지어져 공장과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건축물대장에는 1933년 사용 승인이 난 일본인 소유 목조주택과 함께 등재돼 있다. 목조주택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건축물대장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이다. 건축물의 실소유주는 소유권 이전, 금융권 대출, 신축 등의 경우가 아니면 말소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들어 이를 정리하기보다는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사정들 탓에 ‘일본인 소유 건축물’이라는 기록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2015년 이후 소유자 신청에 따라 일본인 명의 건축물대장과 등기를 말소한 것은 101건에 불과했다. 김 팀장은 “특히 중구는 서울 사대문 안에 있기 때문에 이런 사례가 많다”면서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전국 최초로 일제청산 작업을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적행정팀원들과 함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4월부터 건축물대장에 올라 있는 관내 건물 11만 3509곳에서 일본인 명의 건물 627곳을 찾아냈다. 건축물대장 97건과 등기부 530건이다. 이런 건물은 을지로와 충무로에 198곳이 집중돼 있다. 오장동 84곳, 묵정동 41곳으로 뒤를 이었다. 이 밖에도 예관동, 남대문로, 남창동 등 대부분 사대문 안에 모여 있다. 김 팀장은 직원들과 함께 일본인 명의 건물이 있는 627곳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육안 확인을 비롯해 항공사진 판독, 재산세 납부 여부 등으로 건축물 존재 여부를 가려내는 등 청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건물이 없는 경우 직권으로 건축물대장을 정리하고 법원에 등기말소를 의뢰할 예정”이라면서 “등기에만 존재하는 건물은 소유자가 법원에 등기말소 신청을 하도록 안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구는 말소 신청을 한 소유자를 대상으로 촉탁의뢰 등 이후 절차를 무료로 대행할 계획이다. 김 팀장은 “구 방침이 알려지자 민원인 한 분이 26건을 신청하기도 했다”면서 “하나의 지번에 없어져야 할 건물등기가 26건이나 있었던 셈인데 법무사에게 위임했으면 건당 10만원 정도로 최소 260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인 명의의 건축물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면서 “부동산 공적장부 일원화를 통해 일제 흔적을 지우고 행정정보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라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숨겨진 일본인 재산 찾아라 일본인 명의 토지 즉 ‘적산’에 대한 관리와 환수는 1945년 광복 이후 오랜 기간 부실했다. 정부가 적산 청산을 제대로 못 해 여전히 토지대장상 땅 주인이 일본인으로 돼 있거나, 전쟁으로 인해 토지대장이 없어졌거나, 시스템 미비 탓에 소유권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토지 소유권을 정리하고자 3차례에 걸쳐 ‘부동산 소유권 이전 등기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조치법)을 실시했다. 하지만 1·2차 특별조치법 시행 당시 정부는 이·동별로 보증인 3~6명을 위촉한 뒤, 보증인들이 토지 소유주에 대한 보증만 해 주면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는 방식을 취했다. 대부분 현장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정체가 모호한 ‘적산’들이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정체가 불분명한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조달청이 2015년 일본인 명의 은닉재산, 즉 ‘적산 의심 토지’의 환수작업에 착수한 이유다. 주 담당자로 송명근(50) 국유재산기획과 사무관이 뽑혔다. 동국대 전산통계학과 출신인 송 사무관은 정보통신 자격증을 소유한 정보통신 사무관이어서 ‘친일파 재산 환수’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대형국책사업 업무를 맡아 국무조정실에 1년간 파견됐다는 이유로 2016년 조달청에 돌아오자마자 국유재산 환수 작업에 투입됐다. 송 사무관은 업무를 맡자 6개월간 자료 분석에 매달리는 한편 관련 서적 읽기에 몰두했다. ‘친일인명사전’ 3권을 여러 번 숙독한 것을 비롯해 ‘한국근대사 산책’과 ‘친일파와 일제시대 토지’, ‘일제의 한반도측량 침략사’, ‘창씨개명’, ‘창씨개명 법제연구’ 등 일본인 토지와 재산과 관련한 서적 20여권을 탐독했다. 환수 작업을 원활히 하려면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제는 아예 충남대 대학원 북한통일학과에 진학해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학구열을 불태울 정도로 적산 환수작업에 진력하고 있다. 송 사무관은 팀원들과 함께 지난 7월 말까지 귀속재산과 부당하게 사유화된 일제강점기 일본인 명의 재산(은닉재산) 3373필지, 228만 9805㎡(토지 가액 848억원 상당)를 국유화했다. 여의도와 거의 맞먹는 면적이다.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310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26필지), 일본법인(88필지) 및 일본인 개인(1201필지) 소유지 등 일본 정부 및 법인 명의 재산도 포함됐다. 이들 재산 중 특별조치법 시행과정에서 불법으로 취득한 무단 점유자가 자진 반환을 거부하면 소송까지 불사해야 한다. 실제로 70필지가 소송을 통해 국가 소유가 됐다. 현재도 1만 필지에 대해 조사나 소송이 진행 중이다. 환수작업은 쉽지 않았다. 송 사무관은 “일부 적산에 대한 조사와 환수가 광복 이후 70년이나 지나 너무 늦게 진행된 탓이었다”면서 “토지 조사는 매매 계약서 존재 여부, 주변인 진술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닉재산 국가환수는 일본인 명의 재산을 불법으로 취득한 개인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는 과정으로, 재산을 빼앗기는 상대를 조사해야만 한다”면서 “재산소유자가 면담에 불응하거나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힘이 들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조사과정에서 “‘몇십년 동안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땅을 환수하느냐’는 협박에도 시달려야 했다. 송 사무관은 “저를 비롯해 여성 직원들은 ‘밤길 조심하라’거나 ‘앞으로 가족을 제대로 챙겨야 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들었다. 여성 직원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서울’이란 이름의 식물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서울’이란 이름의 식물

    5년여 전 한 식물학자가 울릉도에서 바늘꽃속 신종을 발견했다며 내게 공식적으로 발표할 식물 도해도를 그려 달라고 요청해 왔다. 생체를 보러 가니 그 식물은 2m가량으로 기존 바늘꽃보다 유난히 길었다. 그는 식물을 보며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고민이라 했다. “키가 크니 큰바늘꽃이라 하면 좋은데 이미 큰바늘꽃은 있단 말이에요. 뭐라고 해야 하나.”나는 몇 번의 수정 끝에 그림을 다 완성했고, 그로부터 2년여의 시간이 지나 그 식물은 ‘바늘꽃속 신종’이 아닌 ‘울릉바늘꽃’이라는 이름으로 그림과 함께 발표됐다. 울릉도에서 처음 발견된 바늘꽃이라는 의미였다. 식물의 이름은 식물의 특징을 함축한다. 털고광나무는 고광나무보다 잎에 털이 많다는 것을, 자주받침꽃은 자주색의 꽃받침을 가진 식물임을 이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식물에 이름을 붙이는 건 그 식물을 처음 발견한 식물학자에게 달렸고, 이름에는 대개 식물의 형태적 특징이나 채집지, 원산지 정보가 들어간다.몇 년 전에는 제주 백약이 오름에서 발견된 참나물속 미기록종을 그리기도 했다. 이 식물의 이름은 백약이참나물이 됐다. 우리는 원산지 정보를 통해 식물이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유추할 수 있고, 이를 재배 방법에 대입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외국인들도 식물의 이름으로 그 정보를 알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 우리나라 국명이 아니더라도 식물에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과학적인 이름, 학명이 있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된 식물의 학명에서 종소명 자리에는 대개 식물의 형태적 특징과 원산지 정보가 들어간다. 내가 그렸던 울릉바늘꽃의 종소명엔 ‘울릉엔시스’가 표기됐다. ‘코라이엔시스, 코레아나’가 들어 있다면 우리나라 원산임을, ‘차이넨시스’는 중국, ‘자포니카’는 일본 원산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식물학자들이 우리나라 독도의 식물을 조사하면서 발견한 식물 학명에 ‘다케시마’를 붙인 일이 많아 섬기린초, 섬벚나무, 섬초롱꽃 등의 식물 학명의 종소명 자리에는 ‘독도’가 아닌 ‘다케시마’가 표기된 바 있다. 국명이나 영명은 그 시대에 많이 불리는 이름이 정명이 되지만 학명은 한 번 정해지면 개명이 힘들기 때문에 이는 우리나라 아픈 역사의 주홍 글씨로 남았다.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서울’이란 이름을 가진 식물들도 있다.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둘러싸여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서울에서 새로운 종이 발견된다니 놀랄 만도 하지만 서울개발나무와 서울고광나무, 서울귀룽나무, 서울제비꽃, 서울족도리풀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모두 서울이 원산인 식물들이다. 서울개발나무를 제외하고는 학명에 ‘서울엔시스’가 표기돼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름만 보고도 한국 서울에서 발견된 식물임을 알 수 있다. 양지바른 곳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제비꽃속은 우리나라에서만 50여종이나 분포하는데 환경변이가 커 그 연구가 쉽지 않다고들 이야기한다. 이 중 서울제비꽃은 잎의 중간부가 넓고 잎자루가 유난히 길다는 특징이 있다.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귀한 식물인 서울개발나물은 유독 잎이 선형으로 가느다란데, 청량리에서 처음 발견됐고 1967년 이후로 보이지 않다가 최근 낙동강에서 40여 개체가 발견된 바 있다. 현재 환경부에서는 이들의 멸종 방지를 위해 연구 중이다. 모든 식물들이 그렇지만, 서울이란 이름의 이 식물들 또한 보존을 위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식물을 조사하고 기록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연구지를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서울에 있는 나보다 제주도에 사는 누군가가 제주도의 식물을 더 자주 관찰하고 정확히 기록할 수 있듯이 말이다. 11일 개장하는 서울식물원의 역할이 기대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식물원과 수목원은 늘 도심과 떨어진 곳에 있었고, 식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점에서 서울식물원의 개장을 반기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나는 식물원 개장에 앞서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홍보를 위해 만들어진 굿즈를 미리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서울이란 이름을 가진 식물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도심에 만들어진 식물원인 만큼 연구보다 전시와 교육에 중점을 두겠거니 생각했으나, 굿즈를 봤을 때 서울식물원이 서울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에 대한 연구의 책임감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나무가 자라는 데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듯, 식물 연구 또한 당장 효과가 나타나진 않을 것이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식물과 사람을 이을 서울식물원의 미래를 기대해 본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천재시인 이상의 삶 뒤편, 민족주의자 이상을 만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및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3회 서울의 문학2(이상의 날개) 편이 제25호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를 강타한 지난 6일 빗속에서 진행됐다. 전날 밤새 비가 내린 데다 당일 오전 내내 만만찮은 강수량이 예보된 상태여서 행사 취소 여부를 묻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 와중에 “고&고!”를 외친 데는 세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첫째 서울신문사 측의 과감한 투자로 도입한 고가의 오디오가이드시스템이 효자 역할을 해줄 것이고, 둘째 지난해 25회와 올해 22회까지 47회를 진행했지만 단 한 번도 날씨가 말썽을 피운 적이 없다는 ‘근거 있는’ 믿음이 작용했다. 셋째 만약의 경우에 대비, 통의동 보안여관과 지난달 문을연 공평도시유적전시관 등 실내에서 비를 피한다는 나름대로의 대비책도 세워놨다.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40여명이 궂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모여들었다. ‘가을비 우산 속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흔적과 작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오히려 즐겼다. 이날 오전 10시 사직동 주민센터 정자 앞을 출발한 투어단은 사직동 이상의 출생지~통인동 이상의 집~통의동 보안여관~경복궁 조선총독부 터~이상이 다녔던 수송동 옛 보성고등학교 터~오감도가 실린 옛 조선중앙일보 터~동헌필방~옛 화신백화점 터~소공동 옛 낙랑파라 터~날개에 등장하는 옛 미쓰코시백화점 터를 순례했다. 강영진 해설사의 노련한 해설이 돋보였다. 형형색색의 우산과 비옷차림으로 시작한 답사는 맑게 갠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산뜻하게 마무리됐다. 시인 김지하는 “이상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상을 아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은 허상이다. 이상은 단순한 경성의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난해한 작품과 여성편력, 괴짜 행동을 통해 본색을 감췄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李箱)이라는 이상(異常)한 필명 뒤에 숨은 김해경이 품은 민족의식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이상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은 1910년 8월 29일 서울 사직동 165번지에서 태어나 식민통치가 절정을 이룬 1937년 4월 17일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27살의 짧은 여정을 마감했다. 그의 삶 궤적은 식민지 서막에서 시작돼 한복판에서 끝났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자각이 강했다. 부인 변동림(화가 김환기와 재혼 후 김향안으로 개명)에 따르면 이상은 일제에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했으며,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이상을 중심으로 ‘좌본웅 우태원’이라고 할만한 ‘절친’ 소설가 박태원이 남긴 ‘이상의 편모’라는 회상기에서도 이상은 한복차림으로 나온다. 변동림은 자신과 첫 만남에 이상이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고 회상했다. 혜화동에서 살던 시절 한복을 입으면 일경에 불심검문당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불편해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봉두난발이나 파이프를 입에 문 데카당스한 모습과는 다르다. 기이한 행적이나 극단적 일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1937년 2월 12일 일본 유학 중이던 이상은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구인회 멤버이자 납북시인 김기림에 따르면 이상의 하숙집 책상 위에 불온 책자가 놓여 있었고, 이상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사용했고, 노트에 불온한 내용을 적어놨다는 게 좌익사상범으로 몰린 이유였다. 풀려난 지 한 달여 만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폐결핵 환자에게 감방의 냉기는 결정적 사인이었다.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이상 또한 민족주의자로서 최후를 맞았다. 이상은 단순한 불령선인(불량한 조선인)이 아니라 민족 저항 작가였다. 이상은 건축가였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수석졸업,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 1926년 경성고공에 입학, 1933년 총독부를 그만둘 때까지 7년 동안 촉망받는 건축가로 살았다. ‘이상한 가역반응’, ‘조감도’,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같은 시의 제목이나 내용은 건축가의 삶과 경험이 묻어 있다. 돌연변이의 이단아로 살아가기 전까지 세상이 부러워하는 멀쩡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건축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상의 대안이었다. “난 말야,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어릴 때부터 그림에 미쳐 있었으니까.” 이상의 경성고공 입학기에는 그림에 대한 갈망이 나타나 있다. 보성고등학교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할 당시 미술교사가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었다. 서촌 자락 고희동의 집과 이상의 집은 지척에 있었다. 이상이 남긴 건축물은 없다. 실명이 거의 쓰이지 않는 이상의 대표작 ‘날개’에 등장하는 단 2개의 고유지명은 경성역(서울역)과 미쓰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이다. 이 중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은 날개의 무대로 쓰였다. 연애담이나 퇴폐적인 일상이 아니라 자신을 옥죄는 일제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의 몸부림이 담겼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날개야 다시 돋아라./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썼다. 이상은 표면적으로는 1920~30년대 경성 모더니즘의 절정을 누린 전형적인 ‘아스팔트 키드’였다. 여러 편의 문제작 중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종생기’에서 “나는 벼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건축가 출신답게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 속 건축물을 작품소재로 삼았다. 그가 전성기를 보낸 1920~30년대 경성은 조선총독부, 경성역, 조선은행(한국은행), 경성부청(서울시청) 같은 근대건축의 아성이었다. 철골과 시멘트 화강암으로 이뤄진 현대성의 거대한 상징물이 건축물이었다. 인간 이상을 이야기할 때 화가 구본웅과 소설가 박태원을 빠뜨릴 수 없다. 세 사람의 관계항이 이상의 인생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다. 세 사람은 동행했다. 사직동에서 태어나 통인동에서 자란 이상과 필운동에서 나고 자란 구본웅은 필생의 동반자였다. ‘꼽추 화가’와 ‘폐병쟁이 괴짜 시인’으로 유명했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구본웅이 선물한 그림도구가 든 상자에서 비롯됐다. 이상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아호에 ‘상자 상(箱)’자를 넣겠다고 약속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은 “이(李)씨 성을 붙이면 나름대로 묘한 여운도 있어 좋겠다”라는 두 사람의 의견일치에 따라 탄생했다. 기생 금홍이를 만난 것도, 다방 제비를 연 것도, 이상에게 창문사 직장을 알선한 것도, 파이프를 문 이상의 초상화 ‘우인의 초상’을 그려준 사람도 모두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최후를 지킨 부인 변동림도 구본웅 계모의 동생이었다. 나이 어린 이모를 4살 아래 친구에게 소개한 것이다. 이상이 남긴 ‘차(且)8씨의 출발’은 구본웅에게 바친 헌시였다. “사실 차8씨는 자발적으로 발광하였다.”에서 차8은 구본웅의 성씨 구(具)자를 파자한 것이다. 구보 박태원과도 붙어살다시피 했다. 구보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됐을 때, 이상은 하융이라는 필명으로 삽화를 그렸다. 다방과 술집을 전전하면서 인생과 문학예술을 논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는 이때 완성됐다. 이상은 구보의 결혼피로연 방명록 첫 장에 ‘면회거절 절대반대’라는 호소문을 남겼다.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고 기록했다. 살아생전의 이상을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근대파 시인”이라 평했고, 사후에는 “우리가 가졌던 황홀한 천재”라고 극찬했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한국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아쉬워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일정:강동(광나루길) ●일시:10월 13일(토) 오전 10~12시 ●집결장소: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안창호 조카딸 등 5명…경찰, 독립유공자 추진

    안창호 조카딸 등 5명…경찰, 독립유공자 추진

    경찰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지 못한 경찰관들의 유공자 등재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경찰청은 문형순(1897~1966) 경감 등 독립운동을 한 경찰관 5명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국가보훈처에 요청했다고 3일 밝혔다. 여성 3명이 포함됐다.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문 경감은 1929년 4월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단체 ‘국민부’에서 중앙호위대장을 맡는 등 독립군으로 적극 활동했다.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1949년부터 제주 모슬포, 성산포경찰서장을 잇따라 맡아 제주 4·3사건과 6·25전쟁 당시 약 400명을 학살 위험에서 보호해 훗날 ‘제주판 쉰들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딸인 안맥결(1901~1976) 총경도 심사를 신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담당한 여성 독립운동단체 ‘결백단’ 임원이었던 그는 1937년수양동우회 사건 때문에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1기 여자경찰간부로 임용돼 제3대 서울여자경찰서장 등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 당시 합류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양한나(1893~1976) 경감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상하이와 부산을 오가며 군자금을 모금해 전달했다. 1기 여자경찰간부였던 그는 약 1년간 짧게 경찰에 몸담았으며 이후 사회 복지 분야에 헌신했다. 본명이 양귀념이었으나 안창호 선생이 새로 이름을 지어 줘 개명했다. 제3대 부산여자경찰서장을 지낸 이양전(1911~?) 경감은 1919년 3월 1일 경성여고보 동료들과 비밀단체를 만들어 3·1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밖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복역했으며 해방 직후 경무부 수사국장 등을 맡았던 최능진(1899~1951) 경감도 독립유공자 심사를 요청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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