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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을 읽고] 광주군 市승격 맞춰 개명했으면

    경기도 광주군의 도·농 복합시 승격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경기도 의회는 이미 도농 복합시 승격에 관한 광주군의 요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상태이며 후속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으면 확정되는 것이다(대한매일 7월24일자 24면). 현행 도농 복합시 승격요건은 재정자립도가 전국 군지역 평균치(23.4%)이상,인구 5만명이상 등 기준을 정해놓고 있는데 광주군의 경우 거의 모든 면에서 승격요인을 갖추고 있어 시승격은 시간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시승격의 경우 광주광역시와 동음이다.일상에서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다든지 하면 경기도 광주인지,전라도 광주인지 되묻는 경우가 많아 혼란스럽다.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지명을 바꾼다는 것은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승격시 주민들의 의견을 물어 개명해보는 것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박동현[모니터]
  • 제2 6·10만세의거 기념비 제막

    ‘제2 6·10만세의거’를 아십니까’ 당시 의거 모의장소였던 피어선성경학원(皮漁善聖經學院)의 후신인 평택대(총장 趙基興)는 23일 ‘제2 6·10의거’ 73주년을 맞아 교내 피어선기념관(皮漁善紀念館) 앞에서 기념행사와 기념비 제막식을 갖는다. 1926년 6월10일 순종 인산일을 계기로 전국의 학생들이 주동이 돼 일으킨것이 ‘6·10만세의거’다.그러나 ‘6·10의거’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하루 뒤인 11일 배재고보 5학년 문창모(文昌模·92·원주 문이비인후과의원 원장·얼굴 사진) 등이 주동이 돼 다시 만세의거를 도모한 것이 바로 ‘제2 6·10만세의거’다. 당시 문창모 등이 만세의거를 모의한 곳은 신문로(新門路) 2가 소재(현 경향신문 사옥 인근) 피어선성경학원 지하실.이들은 재차 대대적인 만세의거를 추진하기 위해 격문(檄文) 수 만장을 인쇄하는 등 만세의거 준비도중 밀고로 관련자 10여명이 모두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됐다.문옹은 전화인터뷰에서“당시 배재고보 졸업반으로 학생회장이던 나는 6·10만세의거가 생각보다시원치 않아 서울시내 기독교학생회 7∼8개를 중심으로 재차 만세의거를 준비했다”며 “누군가의 밀고로 동지들이 모두 체포된 후 나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자수,3개월 정도 감방생활을 한 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고 밝혔다.의거 모의장소였던 피어선성경학원은 1980년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피어선신학교·피어선대학(90년)을 거쳐 96년 평택대학교로 개명했다.
  • 휴대폰·삐삐없는 20대는 간첩?

    ‘무선호출기나 휴대폰이 없는 20∼30대는 간첩?’ 국가정보원이 인터넷 홈페이지(www.nis.go.kr)에 올려놓은 ‘간첩 식별 요령’이 진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네티즌들은 국정원이 ‘국민의 정부’이후 개명과 함께 다양한 정보를 갖춘 인터넷 홈페이지 서비스로 국민에게 바짝 다가서고 있으나 ‘간첩과 좌익사범 구분항목’에서는 실소를 하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간첩 식별 요령’은 여인숙시리즈와 현대문화시리즈,좌익사범으로 의심되는 사람 등으로 구분돼 있다. 여인숙시리즈에는 여관,여인숙 등에 장기투숙하면서 매춘부를 찾지 않거나 직업도 없이 장기투숙하면서 수시로 들락날락하지만 찾는 전화가 없는사람 단풍철도 아닌데 내장산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빈둥거리는 사람 등이‘간첩’으로 분류돼 있다. 또 현대문화시리즈에는 집,직장의 전화번호가 없다고 하거나 더듬거리면서 말하고 20∼30대 청년으로 무선호출기나 휴대폰등이 없고 사용할 줄 모르는 인물 한꺼번에 100달러짜리 고액권으로 수천,수만달러를 암달러상에게 환전하는 인물 등이 올라와 있다. 이와함께 폭력투쟁 선동등 사회혼란을 조장하고 불법 폭력적 노사분규를 배후조종하면 좌익사범으로 의심된다고 국정원측은 밝히고 있다. 서정아기자 seoa@
  • 재경부 10여개課 문패 바뀔듯

    - 직제개편으로 개명 봇물…비용 만만찮아 직제개편으로 정부의 국·과 이름이 상당수 바뀔 예정이다.각 부처는 업무와 기능 조정의 결과 이름을 바꾼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실무부서의 이름이 바뀔 경우 이에 따른 문서양식 등의 변경으로 상당액의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는데다 국민들의 혼란도 가중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일반 기업들도 CI(기업이미지 통합)작업을 할때 보통 1억∼2억원이 들어가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래서 국·과의 이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정부 일각에서도 나오고있다. 경제부처의 현황을 보면 재정경제부는 직제개편으로 모두 10여개 과의 이름을 바꿀 예정이다.경제정책국의 인력개발과와 지역경제과를 각각 ‘조정 1과,‘조정 2과’로,국고국의 재정융자과를 ‘재정자금과’로 간판을 바꾼다. 산업자원부는 2국 6과가 줄어들면서 절반에 가까운 조직의 이름이 바뀌었다.3개 실(室) 가운데에는 기획관리실을 빼고 무역정책실이 무역투자실로,자원정책실이 자원에너지실로 간판을 갈았다. 농림부는 2개 국과 7개 과가 새 이름을 달았다.직제개편으로 ‘공중분해’된 농산원예국의 기능을 나눠 가진 식량정책국과 유통정책국이 각각 식량생산국,농산물유통국으로 바뀌었다. 건설교통부도 이번 직제개편으로 국토정책국·건설경제국·기술안전국 등3개 국이 새 이름으로 출범했다. 경제팀
  • 97세로 타계 사라센은 누구

    그린의 영웅이 사라졌다.지난 20∼30년대 남자 프로골프계를 주름잡았던 진 사라센(97)이 13일 밤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것. 사라센은 바이런 넬슨,샘 스니드와 함께 한 지난 4월의 99마스터스대회 개막 시타에서 고령에도 130m의 드라이브 샷을 날려 주위를 놀라게 했으나 끝내 그린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캐디생활 3년째인 1913년 프란시스 위메트가 US오픈에서 우승하는 모습을보면서 프로골퍼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사라센은 9년후 US오픈에서 첫 우승,꿈을 실현시켰다.이 당시 신문에 실린 자신의 본명(유지니오 사라세니)이 골프선수같지 않고 바이얼리니스트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진 사라센으로 개명,지금까지 불리어졌다. 그는 PGA선수권대회 3승(22,23,33년),US오픈 2승(22,32년),마스터스(35년),브리티시오픈(32년)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최초의 선수다.전·현역 선수를 망라해 남자 프로골프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그외에벤 호건,잭 니클로스,게리 플레이어 등 4명뿐. 그가 진짜 위대한 골퍼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35년 마스터스대회 마지막라운드 15번홀(파5)에서 더블이글(앨버트로스)을 성공시켜 3타 앞섰던 선두 크레이그 우드와 동률을 이룬 뒤 연장전 끝에 우승하면서부터.당시 그가 친 더블이글은 골프역사상 가장 위대한 샷의 하나로 꼽힌다.그러나 그 자신은 32년 US오픈과 브리티시오픈을 동시석권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사라센은 32년 브리티시오픈 우승 때 자신이 개발한 ‘샌드웨지’를처음 선보이는 등 골프채의 진보에도 기여했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74년 골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96년 PGA가 생애업적상을 제정했을 때 최초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 여성수도자 북한어린이돕기 ‘합창’

    종교간의 울타리를 넘어 북녘 어린이를 돕자는 여성수도자들의 합창이 울려퍼진다.불교 비구니와 천주교 수녀,원불교 정녀(貞女)들로 이루어진 삼소회(三笑會)는 오는 5월 8일 오후 3시,7시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북녘어린이돕기 삼소음악회’를 연다. ‘은혜·사랑·자비’란 주제 아래 펼쳐질 제1부에서는 120여명의 합창단이 ‘목숨들 꽃처럼 어울려’라는 삼소회 노래를 시작으로 ‘예불가’ ‘사은님,사은님’ ‘아베마리아’등을 들려주고 이해인 수녀가 자작시 ‘새롭게하나되는 기쁨으로’를 낭송한다. 2부에서는 범패 예능보유자 동회스님(자인사)의 무대,수녀로 구성된 ‘사랑의 이삭줄기’의 대중가요 및 팝송공연,정녀들의 국악 한마당,삼소회 중창단의 동요 메들리,정을스님의 독창 등이 펼쳐지고 남성 수도자들의 찬조출연도 곁들여진다. 삼소회가 이처럼 대규모 공연을 벌이는 것은 88년 10월 3일 호암아트홀에서 서울장애자올림픽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한데 이어 이번이 두번째.그뒤 각 종교인이 참석하는 연합행사에 초청돼 찬송가,찬불가,원불교 성가를번갈아 불렀다. 원불교와 천주교,불교의 여성 수도자들이 모임을 결성한 것은 88년 3월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6명이 ‘원(圓)·천(天)·불(佛)’이란 이름으로 등산 및 대화모임을 가져오다가 장애인올림픽 기금마련 공연을 계기로 삼소회로개명했다. 삼소회 회원은 대부분 출가한지 20년이 넘는 중견들로 소임이 무거워 좀처럼 틈내기 어렵지만 매달 셋째주 화요일에 정기모임을 갖고 봄가을로 정기총회를 연다.또 수시로 봉사활동에 나서는데 지난 91년엔 합동시화전을 열어뇌성마비 장애자들과 제3세계 굶주린 어린이를 도왔고 96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박찬기자
  • 고은著 ‘화가 이중섭’

    천재적인 화가 이중섭의 삶은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처럼 철저하게 비극적이었다.유럽은 고흐의 예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가난과 절망에 몰아넣어던 ‘죄의식’에서 ‘고흐 신화’를 만들었다.우리나라에도 가장 한국적인 화가중의 한 사람인 비운의 화가 ‘이중섭 신화’가 있다. 그 신화 속에 이중섭은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다.지난 1월21일부터 3월9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이중섭 유작전’에 9만명이나 몰려,그의 작품이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이중섭 열풍 속에 그의 삶과 예술을 담은 책 ‘화가 이중섭’이 민음사에서 나왔다.어느 비극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삶을 살다 40세에 요절한 이중섭의 삶과 예술이 시인 고은의 탁월한 필치로 애절하게 그려져 있다.이 책은 지난 1973년 이중섭의 조카 이영진씨 등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고은씨가 쓴 최초의 이중섭 평전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를 일부 보완,다시출판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였던 1916년 평남 평원군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순수하고따듯한 영혼의 소유자였다.어린이 같은 그의 순수함은 현실의 삶을살아가는데 어떤 힘도 되지 못했지만 가난과 병마 속에 고달프게 살았던 삶의 흔적들과 화가로서의 열정과 좌절은 ‘신화’가 되어 남아 있다. 그는 한국전쟁을 피해 일본에 가 있던 일본인 부인 마사코(결혼후 이남덕으로 개명)와 아이들이 그리워 밤이면 아내와 아이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혼자 대화를 했다.첫아들을 잃었을 때에는 한밤중에 일어나 아들이 먹을 천도를 그려 놓았다.수도육군병원에서 그의 거식증을 정신질환이라고 하자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입원환자의 모습을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렸다.그러나 한밤중에 일어나 자기 작품은 가짜라며 불태우고 예술을한답시고 세상을 속였다고 자학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9월6일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그의 시신은 무연고자로 분류되어 병원 영안실에서 3일간 방치됐다.침대에는 그동안 밀렸던 18만원의 입원비 계산서가 붙어 있었다. 그의 잔인하게 찢겨진 생애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 곳은 1951년에 살았던서귀포였다.그는 그 곳에서 대표작 ‘황소’를 비롯 ‘서귀포가 보이는 풍경‘ 등을 남겼다.그러나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그나마 본격적인 작품보다는 우편엽서나 담배갑 속의 은박지 등에 그린 작품이 많다.서귀포에는 그가 머물렀던 초가가 단장되고 ‘이중섭거리’가 만들어져 있다. 이창순 기자 c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반론문-바른역사가 밝혀지길 고대하며

    본보 3월1일자 13면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연재물 26회는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편을 “先애국 後변절 … 日帝 고급밀정 활동의혹”제목으로 다뤘다.이에 대해 유족대표 李在賢씨는 반론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삼일운동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옹의 후손인 우리들은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가족 전체가 노이로제에 걸린다.‘선애국,후변절’,‘일제 고급밀정의혹’이라는 특별 기획물이 어느 언론 매체에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그 내용은 항상 창씨개명,상해 망명시 밀정행위,중국 신경에서 일본회사에취직,총독부 고위관리의 촉탁을 했다는 것이다.먼저 이러한 주장이 모두 터무니 없는 이야기임을 밝힌다. 이갑성옹의 상해에서의 활동은 관련 인사 대부분이 이미 작고하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인을 세울 수가 없다.그러나 세상이 다 알다시피 상해 임정의주요 인물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신익희선생이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이옹과 함께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익희선생이 상해에서일제 밀정으로 널리알려진 사람과 해방직후 손잡고 일을 했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신익희선생께도 큰 누가 되는 이야기다. 다음,이옹이 거주한 적이 전혀 없는 신경에서의 일본회사 취직,평생 일어를 안하고 사신 이옹이 한국말을 못하는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1922∼23서울근무)의 촉탁으로 취직(이옹은 이 당시에도 일제감옥에서 수형 생활 중이었음)했다는 주장도 사실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 우리 후손들은 가슴을 칠일이다. 이중 그래도 인정할수 있는 것은 창씨개명이 되어있다는 사실뿐이다.우리가 이옹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는 이옹은 자신이 창씨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이러한 사실을 이옹 자신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바도 있다(대한일보67년5월12일자). 이옹에 대한 이러한 음해성 험담의 연원은 1960년대 초부터다.독립운동 유공자 모임인‘광복회’설립과정에서 튀어나온 이 문제는 이옹이 그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급기야는 경쟁자간의 성명서 전쟁으로까지 비약되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광복회 회장으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는 일제밀정문제 등을 상대측에서 조작 유포시킨 것이었다.그후 1967년에 2대 회장으로 재 선임되자 상대측에서 이 문제를 재 제기하여 결국은법정까지 비화했었다.당시 서울지검에서 조사한 결과,그러한 혐의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종료했다. 이옹 때문에 일제 35년을 힘들게 살아야했던 우리 후손들은 터무니없는 음해 때문에 해방된 내 나라에서 다시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다.수차 보훈처에 조치를 요구하고 항의도 해 보았다.보훈처에서는 이갑성옹의 독립운동족적에 어떠한 흠결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수여한 훈장이나 대우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30여년간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이옹은 물론 그 가족 누구도 어떠한 친일 행적도 수혜 사실도 발견되지 않았다.단순히 해방후 단체장 선거 때 상대측이 선거용으로 주장한 혐의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아닌 것도 혐의라는 명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크게 보도되면 사실처럼 된다.사실이 아닌 이갑성옹에 대한 흠결을 혐의라는 제목으로 재탕하고삼탕,사탕할 것이 아니라 그리한 혐의가 사실인지 누명인지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족대표(장손)이재현
  • ‘部處간판’ 자주바꿔 혼란 가중…비용도 만만찮아

    정부 조직개편으로 상당수 부처와 각종 위원회가 간판을 바꿔달 전망이다. 부처 이름의 변경은 부처간 통폐합과 기능조정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조직의 대폭적인 재편없이 이름만 바꿔달 예정인 사례도 적지 않아 국민들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의 조직개편 공청회 시안을 보면 기획예산위원회의 경우 3가지 안 모두 이름을 변경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즉 기획예산위원회를 ▒‘기획예산부’나 ▒‘정부혁신위원회’로 바꾸는 안 또는 ▒예산청을 ‘예산부’로 격상시키면서 정부개혁기능은 ‘정부혁신위원회’로 개편하는 안이 그것이다. 기획예산위는 새정부 들어 출범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제대책조정회의는 ‘경제정책조정회의’로 개명,재정경제부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단일안이 제시됐다. 산업자원부는 과학기술부나 정보통신부 등과 합쳐 ‘산업기술부’로 개명할 것이 검토되고 있다.산자부는 상공부,통산부등 흘러간 이름도 적지 않다. 과학기술부는 종전 과학기술처에서 새정부 들어 현재 조직으로 바뀐 지 1년만에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사무국으로 바꾸는 안이 나왔다. 농림부는 해양수산부와 합쳐 ‘농림수산부’로 간판을 바꾸는 안이 공청회에 부쳐진다. 정보통신부의 경우 3가지 대안 중 2가지안에서 ‘지식정보위원회’로 개편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비상기획위원회는 병무청과 합쳐 ‘비상병무관리처’또는 ‘안전관리처’로 새출발하는 안이 검토되고 있다. 공보실을 ‘문화관광부’로 조정하는 안도 나왔다. 경제부처의 한 공무원은 “새정부 출범 후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재경부’를 ‘재경원(재경부의 전신)’으로 부르고 행정자치부를 ‘내무부’로부르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고 전하고 “또다시 부처 이름을 대폭 바꿀 경우 개명에 따른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다 국민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는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가운데 포함됐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는 왜 재심대상에 오른 것일까. 임시정부시절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일제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오히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사람이다.일찌기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없다.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이종욱은 1920년 6월29일 청년외교단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돼있다.무슨 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얘기는 역전된다.이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중 하나였다.이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7대 조선총독으로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종회(宗會) 의장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이듬해 37년에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당대 불교계의최고권력자로 부상했는데 그 뒷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발발 1주일만인 7월15일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이틀 뒤 그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며칠뒤 조선내 각 절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또 8월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다음날에는 경성 부민관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했다.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으로 창씨한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종욱은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총본산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현 曹溪寺)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단의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41.8.18)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 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1941.12월호)며 총독부의‘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 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또 조선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000원을 갹출,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내 1,500여 사찰에 12월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이종욱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당국에 헌납했다.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하달하기도 했다. 43년 8월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학병권유 대열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종욱은 8월17일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고 이어 9월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승권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의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됐으며 51년 동국대 재단 이사장,52년 7월에는 제4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해방후7년만에 이종욱은 일제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고 사후에는 건국훈장과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이제는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鄭雲鉉 jwh59@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 몸집줄이기 한파속 “축소 일변도” 논란

    ‘국민의 정부’가 25일 출범 1년을 맞았다.그 동안 체육인들은 어느 정부보다 체육이 홀대를 받았다고 느끼고 있다.신정부 출범 초기부터 유독 체육인들의 정서를 자극하는 문제들이 끊이질 않았다. 새 정부의 기구개편 과정에서 ‘문화체육부’가 ‘문화관광부’로 개명됐다.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체육정책국과 국제체육국이 체육국으로 통합되는 등정책기구가 축소될 때부터 체육인들이 느낀 박탈감은 국방부의 국군체육부대(상무) 폐지 의도가 전해지면서 극에 달했다.상무 폐지문제는 체육인들의 강한 반발과 문화부의 중재 노력 등에 힘입어 존속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지만 체육인들의 서운함은 여전하다.지난 한해 동안 90여개에 이르는각종 실업팀이 해체된 것도 체육계를 구조조정의 우선 대상으로 삼은 ‘국민의 정부’의 정책 방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체육인들의 인식이다. 일부 체육인들은 “정부조직에서 ‘체육’이라는 이름마저 지워버린 후 기업체들의 지원이 끊겨 엘리트체육이 고사위기를 맞고 있다”며 “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독립된체육청이 신설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체육계의 불만에 대해 정부는 단지 엘리트체육을 후원해 온 기업들이 IMF파고를 넘는 과정에서 지원을 끊거나 지원액이 줄어 체감온도가 낮아졌을 뿐 실제로 체육 행정을 소홀히 하거나 체육계에 대한 지원이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실제로 체육계에 대한 지원액만 하더라도 ‘국민의 정부’ 첫해인 지난해모두 2,967억원으로 97년의 2,007억에 비해 크게 늘어났으며 올해 역시 2,161억원을 지원키로 돼 있어 큰 폭의 변화는 없다는 주장이다.지난해에 비해 800여억원이 줄어든 것은 전반적인 예산 감소에다 지난해 대부분 지출한 부산아시안게임 시설 관련 지원액이 적어진 탓이라는 설명이다. 정부는 오히려 각종목 체육단체의 재정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법인화를 유도,재정자립금 10억원씩을 지급하는 등 엘리트체육 지원이 강화됐다며 체육계의 정서가 과장돼 표출되고 있다는 인식이다. 이에 대해서는 엘리트체육의 총괄처인 대한체육회 관계자들도 “물론 실제로 경상비나 인건비에 대한일부 긴축 요청이 있기는 하지만 민간부분이 일정부분 담당하던 후원이 끊긴데 대한 화살이 정부로 돌려지고 있는 측면이크다”며 일부 수긍한다. 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그렇더라도 체육인들이 느끼는 한파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며 “체육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느껴질 수 있는 정책이아쉽다”고 말했다.
  • 경제프리즘-정부부처 명칭 또 바꾸나

    정부조직 개편작업이 진행되면서 또다시 정부부처 이름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재정경제부에서 일부 기능을 떼어내고 붙여서 ‘재정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다.지난 94년 재무부에 기획원을 합쳐 ‘재정경제원’으로 만들었다가 작년에 ‘재정경제부’로 개명한 지 1년만이다. 기획예산위는 ‘기획예산처’나 ‘기획원’또는 ‘경제자문위원회’로 달리부른다는 말도 있다. 얼마전 정부는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바꾸었다.새 정부들어 ‘외무부’는 ‘외교통상부’로 개명했다. 재벌 회사가 간단한 로고를 하나 바꾸면 수억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고 한다.정부 부처가 이름을 바꾸면 주차장의 팻말부터 각 과장급이상의 명패,기안용지까지 바꿔야 한다.적어도 부처별로 수억원의 개명 비용이 들 것이다. 국민들은 사실 ‘안기부’와 ‘국가정보원’간,‘재경원’,‘재정경제부’와 ‘재정부’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며 오히려 헷갈리기만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태조부터 갑신정변때까지 400여년간 이조(내무)와 호조(재무)라는 이름을 지켰다.고려시대 등 그 전에도 왕조가 바뀌기 전에는정부 부서 이름을 그대로 고수했다.일본의 대장성이나 통산성은 일부 기능의 조정에도 불구 1900년대 이후 이름을 바꾸지 않고 있다.미국은 정권교체에도 불구 그대로 ‘재무부’이고 ‘국무부’이다. 기업들은 이미지를 대폭 혁신하거나 통폐합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상호를바꾼다. 정부가 실체의 큰 변화도 없이 일부 기능조정을 이유로 부처 이름을 바꾸려는 것은 전시행정과 행정편의주의적인 냄새가 짙다.개명보다는 기능위주의개편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백범·단재 장손 정부기관에 특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후손 두 명이 당국의 배려로 정부기관에 특채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제다.주인공은 백범 김구선생의 장손金振씨(50)와 단재 신채호선생의 장손 申尙原씨(28).金씨는 지난해 11월초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申씨는 이달 18일 국가정보원 8급 직원으로 각각 특임(特任)된 것으로 확인됐다. 金씨의 경우 金大中대통령의 특별한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金대통령은 백범가(家)와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다.7대 총선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대통령은 선거직전 상대후보가 백범암살사건 관련자라는 사실을 폭로,선거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다.이를 계기로 金대통령은 해마다 백범 묘소를 참배해 왔으며 한동안 백범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다.14대 국회때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자 위원회 사무실 운영비를 수차례 지원하기도 했다.특히 8대 총선때는 金대통령측에서 백범의 아들 金信씨(77·전교통부장관)를 야당후보로 영입하려 한 적도 있다.현정권 출범초기 여권 일각에서는 백범가에 대한 ‘배려’가 논의됐던 것으로 알려졌다.金振씨는 미국 남가주대학·대학원 졸업 후 귀국,국제종합건설 감사실장·부속실장과 외국인회사 국내지사장을 역임하고 최근까지 개인사업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단재의 손자 申尙原씨는 李鍾贊 국정원장이 특별히 배려한 케이스.李원장은 작년 8월 안기부의 개명작업을 추진하면서 집무실내에 백범과 단재선생의 사진을 내걸었다.이는 국정원의 연원을 단재의 의혈단,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찾겠다는 취지였다.작년말 李원장은 사석에서 단재의 손자가 국정원에 원서를 냈다는 얘기를 듣고 申씨의 채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는 것.李원장의 조부인 우당 李會榮선생과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같은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로 각별한 사이였다.지난해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申씨는 국정원 산하 국가정보연수원에 배치돼 국가관교육프로그램 제작 분야에 근무하고 있다.
  • 박은경씨 박사학위 논문‘일제하‘책으로

    일제하 조선인 관료들의 임용정책과 실태,사회적 배경 등을 분석한 연구서가 출간됐다.94년 이화여대 정외과에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 조선인관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박은경(40·광운대 강사)씨가 학위논문을수정·보완,‘일제하 조선인관료 연구’(학민사)를 단행본으로 펴냈다. 박씨에 따르면 1909년 ‘한국직원록’에 수록된 조선인 관료 3,624명중 67.6%에 해당하는 2,449명이 조선총독부 관료로 유임된 것으로 나타났다.이들가운데 절반 이상은 근대교육을 받은 자들로 일본유학이나 일어학교 출신자가 43%에 이른다.이는 일제가 병합전 유학생이나 교육기관을 통해 친일파를육성해 왔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박씨는 분석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통치초창기 조선을 파악할 목적으로 부득이 대한제국 관료를 재임용하였으나 그들에 대한 대우는 보잘 것 없었다.우선 일제는 이들의 대부분을 하급 지방관에 임명하였으며 총독부 본부에는 서기나 통역생·속(屬) 정도에 불과하였다는 것.특히 경제부처에는 단 한 명의 조선인도 채용하지 않았으며 경찰분야에서도 조선인들은 순사보·헌병보조원 자리가 고작이었다고 박씨는 주장했다. 한편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고등고시를 통해 조선인 관료를 직접 충원하였다.이들중 더러 도지사나 도 참여관 등 고위직에 이른 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대개 도쿄제국대학 출신자들로 일제로부터 업무능력과 친일성을 인정받은자들이다.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조선인 관료중 상당수는 해방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권력엘리트로 재등장하였는데 우리가 식민잔재 청산에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에 대한 인적청산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박씨는지적했다.이 책은 조사대상 기간을 1910∼39년까지로 한정하고 있어 1940∼45년 사이해당자들의 행적확인이 곤란한 제한점을 갖고 있다.저자는 “19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실시한 이후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기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21회)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의 제1절이다.노랫말이 담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장중한선율,게다가 가사 구절마다 배어있는 조국 광복의 웅지가 어우러져 부르는이,듣는 이 모두를 숙연케 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가히 ‘국민가곡’이라 부를 만하다.일송정(一松亭)에 오르면 멀리 서쪽으로 용정(龍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발아래 북쪽으로는 해란강(海蘭江)이 서에서 동으로 유유히 흐른다.이곳이바로 ‘선구자’의 고향이다.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말 달리던 선구자도,활을 쏘던 선구자도….‘선구자’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오직 그들이 부르던 노래만 남아 입으로,가슴으로 전해오고 있다. ■시인·작사가 尹海榮‘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가곡 ‘선구자’의 제1절이다.노랫말이 담고 있는 비극적 서사성과 장중한선율,게다가 가사 구절마다 배어있는 조국 광복의 웅지가 어우러져 부르는이,듣는 이 모두를 숙연케 하는 노래가 바로 이 노래다.가히 ‘국민가곡’이라 부를 만하다.일송정(一松亭)에 오르면 멀리 서쪽으로 용정(龍井)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발아래 북쪽으로는 해란강(海蘭江)이 서에서 동으로 유유히 흐른다.이곳이바로 ‘선구자’의 고향이다.그러나 유구한 세월 속에서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말 달리던 선구자도,활을 쏘던 선구자도….‘선구자’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오직 그들이 부르던 노래만 남아 입으로,가슴으로 전해오고 있다. 1932년 10월 어느 날 저녁.만주 하얼빈에 살고 있던 청년작곡가 趙斗南(1912∼1984)에게 낯 모르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키가 작고 마른 체격의 청년은조두남에게 시 한편을 내놓으며 곡을 붙여달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조두남은작곡을 해놓고 그 청년을 기다렸으나 그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조두남은 그가 주고간 시의 내용으로 봐 그를 독립군 정도로 여겼다.이 내용은 조두남이 ‘선구자’ 작곡에 얽힌 비화를 소개하면서 작사가 윤해영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尹海榮의 일제시대 행적이 밝혀진 것은 90년대 초반.한동안 윤해영은 ‘신비의 인물’로 여겨져 왔다.지난 90년 한국을 방문한 연변대학의 權哲교수는 “윤해영은 독립군이 아니라 시인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권교수에 따르면 윤해영은 1909년 함경도에서 출생,소학교 교사를 하다가 시인이 됐다는 것.초창기 그의 시는 ‘선구자’에서 엿보이듯 민족적 색채가 강했다.그러나 그는 식민지 시대를 겪으면서 훼절,친일로 전향하였고 해방후에는 공산주의를찬양하는 시를 썼다고 권교수는 주장하고 있다.권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윤해영은 결국 만주 친일파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셈이다. 친일파들 가운데 행적입증이 가장 쉬운 부류는 단연 문사(文士)들이다.곳곳에 친일의 흔적(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윤해영 역시 예외가 아니다.일제하 만주에서 간행된 ‘만주시인집(滿洲詩人集)’(1943년 간행)과 ‘반도사화 낙토만주(半島史話 樂土滿洲)’에 남아있는 그의 친일시 몇 편을 우선 살펴보자. ‘오색기 너울너울 낙토만주 부른다/백만의 척사들이 너도나도 모였네/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낙토만주’ 제1절) 운율과 형식이 가곡 ‘선구자’를 본뜬듯이 꼭 같다.그러나 속생각은 정반대다.우선 ‘오색기(五色旗)’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의 국기(國旗)를 말한다.만주국은 만주족·몽고족·한족·일본족·조선족 등 오족(五族)으로 구성돼 있었다.만주국 국기의 다섯 가지 색깔은 각 민족을 상징한다.만주국의 통치이념인 ‘오족협화(五族協和)’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이 무렵 윤해영은 태극기 대신 오색기를 들고 있었다.바로 ‘낙토만주’는반민족 정서의 정수라 할 만하다.당시 만주에는 조선땅에서 건너간 유랑민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의 가족들이 숨어서 은거하던,말 그대로 ‘고난의 땅’이었다.이를 두고 그가 ‘낙토’ 운운한 것은이미 민족의 반대편에 서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 흐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평화롭다.‘말달리던 선구자’를 외치던 정신은 온데 간데 없고 선구자들이 말달리던 만주국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미화하고 있다.‘유사품’ 한 편을 더 소개하자. ‘흥안령(興安嶺) 마루에 서설(瑞雪)이 핀다/4천만 오족(五族)의 새로운 낙토(樂土)/얼럴럴 상사야 우리는 척사(拓士)/아리랑 만주(滿洲)가 이 땅이라네…’(‘아리랑 滿洲’,‘만선일보’ 1941.1.1) 이 시는 윤해영이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滿鮮日報)’ 신춘문예 민요부문에서 일석(一席:1등)을 차지한 작품이다.심사평에서 평자(評者)는 이 시의 3연 2행 ‘기러기 환고향(還故鄕) 님 소식(消息)가네’를 두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귀에 익은 ‘아리랑’에다 전통타령조까지 가미한 것이 흥겨운 민요 한 편을 만난 기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이 나온 시기와 장소이다.1939년 10월 조선에는 ‘국민징용령’이 내려졌고 2개월 뒤인 12월에는 ‘창씨개명령’이 공포되었다.그 무렵 만주에서는 ‘선만일여(鮮滿一如)’,즉 ‘만주와 조선은 하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대륙침략에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하고 있었다.이같은 형국에 척사(拓士·개간꾼)들 앞에서 ‘얼럴럴’ ‘낙토’ 운운한 것이 당시 윤해영의 시(詩) 정신이요,민족관이었다.이름이 ‘아리랑’이지우리 전통민요 ‘아리랑’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1940년대 그는 만주국 친일조직인 협화회(協和會)의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친일의식이 행동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한편 윤해영이 1941년에 쓴 시 가운데 ‘발해고지(古址)’라는 시가 있다.이 작품은 윤해영이 발해유적을 답사하면서 민족의 비극을 돌아보는 내용을담고 있다.‘변절자’ 윤해영이 정신적 방황을 거듭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윤해영의 시세계를 연구해온 인천대 오양호교수(국문학)는 “일제말기 우리 지식인들이 운명적으로 겪어야 했던 비극의 편린을 보는 느낌”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지난해 가을에도 해묵은 논쟁으로 나라가 시끄러웠다.바그너 곡(曲) 연주를 둘러싼 찬반론이었다.이스라엘은 아직도 공식 석상에서 바그너 작품 연주를 금하고 있다.바그너가 제공한 반(反) 유태정신이 나치즘의 이론적인 기틀을 제공,민족감정에 배치된다는 것이 ‘연주금지’의 이유다.바그너는 1883년에 사망했다.그러므로 금세기에 자행됐던 유태인 탄압과는사실상 직접적 관계는 없다.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도 바그너의 작품 연주 금지를 풀지 않고 있다.이스라엘 민족이 편협해서일까. 예술작품의 참 가치는 기교가 아니라 정신이다.鄭雲鉉 jwh59@
  • OB베어스 ‘두산베어스’로 개명

    프로야구 OB베어스는 올 시즌부터 야구단 이름앞에 ‘OB’를 그룹명인 ‘두 산’으로 바꿔 ‘두산베어스’로 개칭한다고 5일 밝혔다. 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부터 사용해 온 ‘OB’가 그룹 이미지를 대표하지 못하는 맥주 상품명이기 때문에 바꾸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OB는 지난해 12월 로고 제작에 착수,9일 첫 선을 보이며 이달 말까지 새 유 니폼을 지급한다고 덧붙였다.
  • 유개공,한국석유공사로 개명

    한국석유개발공사가 1일부터 명칭을 ‘한국석유공사’로 바꿨다.이에 따라공사의 약칭도 ‘유개공’에서 ‘석유공사’로,영문약칭은 ‘Pedco’에서 ‘KNOC’로 바뀌었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7회)-일본문학보국회원 장혁주

    한국 문학사전보다는 일본 현대문학사전에 더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작가 장혁주는 식민지 시대 때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문명을 떨 쳤던 인기작가였다.1932년 ‘아귀도’(餓鬼道)란 사회성 짙은 작품이 일본의 유명한 ‘개조’(改造)지 제5회 현상공모에 당선된 후 그는 일·한 두 나라 에서 두 언어로 민족의식이 짙은 작품활동을 하여 금서 조처를 받는 등 아나 키즘적 경향이 짙은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1905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장은중(恩重)이고,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일본인으로의 귀화명은 노구치 미노루(稔)이다.그가 쓴 단편 ‘다른 풍속의 남편’은 일인칭 소설로 ‘나’는 작가이다.모국(한국) 에서 간통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피신,본처와 헤어지고 일녀 게이코와 결 혼하여 겪게 되는 서로 다른 풍속의 부부생활 중 아내로부터 온갖 수모와 학 대를 견디면서도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각오를 다지는,말하자면 단순한 ‘친일’의 차원이 아니라 혈연적인 일본인화의 표상이다.자전적 요소가 짙 은 이작품처럼 그는 일본문단으로 등단한 이후 일녀 노구치 게이코(野口桂 子)와 결혼,아내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에서는 ‘무지개’ 등의 작가에다 문단 페스트균의 논쟁 유발자로 여전히 장혁주란 이름으로 남아있는 노구치의 친일행적은 임종국이 ‘친일문학사’에서 간략히 밝혔고,광복 이전 일본에서의 활동은 하야시 고 지(林浩治)의 ‘재일 조선인 일본어 문학론’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숱한 친일문인을 제치고 새삼 장혁주를 거론하는 까닭인 즉 그가 친일을 위하여 조선문인보국회가 아닌 일본문학보국회 회원으로 맹활약했었기 때문이다. 두 저서가 다 광복 이전의 ‘친일’행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해방 후의 활동은 묻혀 있었는데,장혁주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1952년 전후에 취했던 그의 태도는 가히 충격적이다.그는 구태여 해방된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한 이유를 “한국 조야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역자 취급 을 하고 있기 때문”(조선일보 1952.10.14)이라고 밝혔다. 귀화 직후인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일본 잡지 ‘부인구락부’ (婦人俱樂部)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전쟁을 취재한 그의 행위를 ‘서울신문’ 은 ‘민족반역자 장혁주 변장가명으로 불법입국’(1952.11.2)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수난의 조국을 배반하고 일신의 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스스로 일본국에 귀화한 민족의 반역자 장혁주가 .....그 더러운 발자국을 유엔 종군기자라는 복장에 감추어 극비리에 이 땅에 들여 놓고 다시 돌아갔다는 사실이 일본의 신문보도로써 이제 밝혀졌다.....그는 10일간이란 체류 기간에 서울을 비롯 하여 그의 더러운 눈으로 본 한국의 그릇된 일편을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에 게재케 하여 결국 일본에 귀화함으로써 왕도낙토(王道樂土)를 얻었다고 술회하였다......그는 이번 여행을 극비밀리에 계획하여 유엔군 병사의 복장 을 빌려 입고 심지어는 변장을 위하여 검은 안경에 안대까지 하여 유엔종군 기자의 패스포트로써 이 땅의 눈을 속여 가면서 온갖 곳을 돌아 다녔다는 것 이다.” 이어 ‘서울신문’은다음날 ‘장혁주 등의 비국민 행위를 규탄’이란 기 사에서 “친일작가 장혁주가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아 그 잘못을 회개하지 못 하고 아직도 8.15 해방 전과 꼭 같은 죄과를 범하고 있다”고 서두를 쓴 뒤 “조국에의 반역을 감행하고 조국을 팔아 외국인의 안목을 현혹하게 하며 민 족의 위신을 떨어뜨리게 하는 일은 우리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다.위정당국 은 하루 빨리 이 자를 체포해 오게 하여 국민의 엄정한 심판을 받게 해야 된 다”고 역설한다.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행동했던 재능있는 이 작가의 초상은 역사와 문학을 다시 진지하게 생각토록 만들기에 충분한 자료가 될 것이다. 任軒永(문학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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