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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6)

    ◎지상의 생지옥:라/함경도 월광령 99고개 넘어 수용소에/멀미하는 9·6살 철부지 밤새 운송/살아선 못건넌다는 「마의 입석천」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온다.수용소로 끌려가던 날,「죽음의 고개」를 넘던 날의 황당했던 경험은 지금까지 아픈 기억으로 가슴에 못박혀 있다.우리 앞에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철부지는 훗날 얼마나 가혹한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던가. 처음 보는 산과 나무들은 9살밖에 안된 어린애에겐 가슴설레게 하는 것들이었다.울창한 숲,맑은 내,신기한 나무와 꽃들은 한여름의 정취를 흠뻑 담고 있었다.북한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평양.그곳 중심지에 있는 「교통소아파트」에서 살아온 나에겐 그런 모든 풍경들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이삿짐을 실은 소련제 트럭도 그랬다.간단한 짐 속에 끼어 한없이 산길을 달리는 기분은 어린 나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그땐 차도 흔하지 않았을 뿐더러 소련제 트럭을 한번 타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평양을 떠나 꼬불꼬불한함경도 산길을 달릴때만 해도 철모르던 나와 동생은 이러한 기분에 휩싸여있었다.『야,저런데서 고기잡고 놀면 재미있겠다』 우리에겐 그때가 여름방학이었다. 그렇게 6∼7시간을 달리다 보니 해가 지고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들었다.울퉁불퉁한 황톳길을 마냥 달린 탓인지 「좋아라」하던 동생은 언제부터인지 심한 차멀미에 시달려 얼굴이 창백했다.나도 견디지 못해 토하기 시작했다.소련제 트럭은 이에 아랑곳않고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채 한없이 산속을 향해 달려만 갔다.『우리 집에 다시 가자』 6살박이 동생이 기어코 울음을 떠뜨렸고 엄마를 찾았다.엄마는 우리가 끌려오기 달포전 『출장을 간다』며 집을 떠나 우리와 동행하지 않았다.뒤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혁명열사의 딸로 분류된 어머니는 반동인 아버지와 이미 강제이혼 당해 우리 곁을 떠난지 오래였다.그것도 모르고 나와 동생은 그 엄마를 찾은 것이다. 소련제 트럭은 아무 것도 보이지않은 산길는 계속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가기만 했다.인가의 불빛은 물론 지나치는 차조차 없었다.그저 어둠뿐이었고 소련제 트럭이 내는 굉음이 전부였다.참다못한 할머니와 아버지가 『애들이 다 죽는다』며 앞좌석에 탄 책임자같은 사람에게 조금만 쉬어갈 것을 간청했다. 깡마른 체구의 책임자는 인상이 참 험상궂고 나이는 3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허리에 권총을 찬 그는 『거의 다왔다』고 톡 쏘아붙인뒤 더이상 말이 없었다.할머니는 우리를 껴안으며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말도 제대로 못이었다.그저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만을 훔치고 있었다.그때서야 나는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어 가는 구나」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언제부턴지 차의 속도는 눈에 띄게 떨어져 걷는 것보다 조금 빨라보였다.길도 겨우 트럭이 지나갈만 만큼 좁았고 거기다 가파른 경사였다.수도 없는 모퉁이를 따라 도느라 트럭의 뒤뚱거림은 한결 심해졌다.움푹 패인 웅덩이로 이어진 듯한 길옆을 자세히 보니 깎아지른듯한 벼랑이었다.자칫 굴렸다하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았다. 아흔 아홉고개,북에선 「죽음의 길」로 통하는 정치범수용소로 통하는 월광령 고개에 다달은 것이다.산등성이 너머로 방향을 바꿔가며 이쪽 저쪽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이 아스라히 보였다.그 서치라이트 속에서 내가 10년을 갇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꿈에나 알았겠는가. 어렵사리 고개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길고 두꺼운 나무 차단기가 설치된 초소에서 보위원들이 우리 가족을 검문했다.소련제 트럭운전사는 아버지가 준 일제시계를 뇌물로 받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우리는 3개의 초소를 더 거쳤다.그때마다 보위부원들이 물건을 빼앗아가는 바람에 이삿짐은 한결 가벼워졌다. 길솟은 풀숲 사이를 헤치고 나서니 그림책 속에서 본것과 비슷하게 생긴 「귀틀집마을」이 나타났다.사방은 숲으로 우거진 칼날같은 산이 에워싸고 있고 곳곳에 깊은 소가 있는 폭 10여m쯤의 강이 마을을 에워싸듯이 흐르고 있었다.살아선 건널수 없다는 「마의 입석천」이었다.마을 앞에 난 가느다란 둑이 이 강을 건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배정받은 흙벽집에 짐을 풀어놓으니 어느새 먼동이 떠 올랐다. 수용소 생활에서 죽음같은 고통이 뒤따를 때마다 나는 월광령 너머,입석천 건너의 세상을 언제나 꿈꾸었다.그리고 끌려오던 날이 꿈속에 나타나는 가위눌림에 몸부림쳤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5)

    ◎지상의 생지옥:다/어린이도 통나무 운반 등 땔감사역/너무 힘에 부쳐 몇차례 쓰러지기도/일 서투르면 소달구지끌기 등 형벌 정치범 수용소내에서 하는 작업이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험한 일은 모두 망라돼 있다. 수용소 설치목적 자체가 죽어도 무방한 사람을 가두어 놓기 위해 만든 곳이니 어떤 험한 작업이 자행되는지는 충분히 짐잘할 수 있으리라. 더욱이 어른들은 물론 인민학교 아이들까지도 갖가지 노역에 가혹하게 동원되었다. 처음 이곳에서 내가 한 일은 학교에서 시키는 땔나무 작업이다. 땔나무 작업이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이곳에서의 나무하기란 어린 나이에는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남한으로 치면 국민학교 2학년 또래인 내가 첩첩산중에 들어가 아름드리 통나무를 잘라 끌어내리는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보위부원인 선생이 주는 톱과 도끼 등을 들고 학교에서 3㎞ 떨어진 병풍골과 돈사골까지 걸어 이동한뒤 그곳에서 다시 산중턱까지 올라가야만 했다. 조금 나이든 아이는 톱과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우리 또래는 여럿이서 자른 나무를 나르도록 돼있었다. 어린애들이 커다란 통나무를 자르기도 힘들거니와 그것을 나르기란 정말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는 「죽을 일」이었다. 처음 내가 동원된 날 애들이 내게 통나무 한덩이를 메어주고 나르라고 했다.통나무를 어깨에 맨 것까지는 했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몇발자국 옮기지도 못한채 나는 나무를 어깨에 멘채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때 넘어진 나를 보며 애들은 『새로온 새끼』라고 놀렸다. 학교에서 한 또 한가지 작업은 농사돕기였다.말이 좋아 「돕기」이지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강냉이를 키워내는 일이다. 춥고 어두운 겨울끝에 봄기운이 돌면 수업은 아예 집어치우고 강냉이농사 사역에 동원되었다. 하루에 어른은 1백50평,우리는 50평크기의 묘판에 강냉이를 뿌리는 것이다.그냥 강냉이만 뿌리는 것이 아니고 부식토를 날라와 뿌린뒤 흙을 덮고 곡괭이로 22㎝씩을 파고 강냉이 씨를 심고 나면 그 위에 물과 비료를 주는 작업이다. 가뜩이나 먹을 것 없는 이른 봄에 힘든 일을 하다보면 하늘이 노랗게보이면서 현기증으로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이 절반은 넘었다. 또 중학 1학년 때부터 5학년 졸업때까지는 토끼먹이주기·개밥먹이기 등을 계속했다. 이런 일을 하다 보위부원들의 눈밖에 나거나 잘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가혹한 형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드리나 되는 돌을 양쪽에 쌓아놓고 벌줄 사람을 양쪽에 정열시킨 뒤 자기들 앞에 있는 돌들을 마주보는 쪽으로 날라다 놓는 일을 하루종일 반복해 시키는 것이다. 이런 벌을 받다보면 돌덩이에 발등을 찧는 어린이부터 손가락이 으스러지는 사람,손톱이 빠지는 사람 등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보다는 덜 힘드는 사역으로는 소달구지끌기·똥푸기 등이 있다. 소달구지끌기란 소나 말 대신에 사람이 멍에를 메고 잔뜩 짐을 실은 달구지를 끌고 목적지까지 가는 것이다. 똥푸기는 수용소내 인분을 퍼다 버리거나 농토에 뿌리는 일인데 조금이라도 요령을 부리면 자루가 길게 달린 똥바가지를 빼앗고 자루없는 깡통으로 퍼 나르게 했다. 오물에 옷이 더럽혀지는 것은 물론 얼굴과 손에 냄새가 배어들어 집안식구들이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겨울철의 경우는 고약한 냄새를 지우려고 얼음을 깨고 냇물에 들어가 목욕을 해야만 했다.그러나 비누는 물론 세제가 전혀 없는 수용소에서는 악취가 저절로 없어질 때까지 참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기자) 양승현(정치부기자) 최철호(사회1부기자)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4)

    ◎지상의 생지옥:나/“주체농법” 내세워 강제노역 강화/학생까지 “모심기전투” 등 한달 동원/영양부족 겹쳐 현기증… “노란 봄철”로 봄이 머지 않은 듯하다.어느새 남한에서 세번째의 계절을 맞게 됐다. 봄을 맞는 남쪽 사람들은 옷차림에서 부터 표정까지 모두 들뜨고 밝기만 한 것 같다. 하지만 수용소 사람들에게 봄철은 오히려 고통스럽고 가장 견디기 힘든 시절이다.겨우내 추위와 허기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몸서리쳐지는 갖가지 강제노역에 동원되는 시절인 까닭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농촌지원전투활동이라는 이름아래 실시되는 이른바 「주체농법」이다. 전투활동이라고 해서 무슨 유격훈련등의 군사활동을 하는게 아니다.한달에 한번씩 배급받을 강냉이농사에 수용소 사람들이 매달리는 것이다. 학생이라고 열외가 될 수는 없다.원래 배우는 것이라고는 별로 없지만 농촌지원전투활동철이 시작되면 아예 학교에 들르지도 않고 곧장 지정된 작업장으로 나가야 한다. 하는 일은 이른바 주체농법에 따라 부식토와 흙을 섞어 만든 「영양단지」라는모판에 강냉이씨를 뿌린뒤 모가 나면 밭에다 옮겨 심고 물과 비료를 주는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는 손쉬운 작업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고역도 그만한 고역이 없다.아무렇게나 강냉이모를 옮겨 심어서 될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농법에 따라 모와 모 사이의 간격을 한치 어김없이 22㎝로 유지하면서 지그재그식으로 심어 나가야만 한다. 그렇게 심는다고 강냉이 수확량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도 아닌 만큼 주체농법이라는 허울아래 교묘히 자행되는 또다른 정신적 육체적 통제수단일 뿐이다. 어떻든 학생들에게는 하루 50평의 주체농법과제가 할당된다.어른들은 1백40∼1백50평의 과업을 마쳐야 한다. 하루 온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모를 옮겨 심다보면 허리며 팔다리며 쑤시지 않는 곳이 없다.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 질 수가 없다. 작업장에 나와 있는 관리책임자의 눈이 무서워 도중에 허리도 제대로 펴기 힘들다.요령을 피우다가 들키는 날에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두어차례 휴식시간을 주기도 한다.정말 천금같은 시간이다.결린 팔다리도 두드리고 일어서서 기지개도 켠다.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다가 장시간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한 탓에 하늘이라도 한번 올려다 보면 푸르던 하늘색이 금방 노랗게 변하고 만다.지천에서 피어올라오는 아지랑이 속에 사방이 온통 노랗게 보이고 현기증이 나기 일쑤다.그래서 수용소 사람들은 봄철을 「노란 봄철」이라고 부른다. 어지러워서 쓰러지는 사람도 많이 생긴다.그러면 또 어느 틈엔가 관리책임자가 예외없이 나타나 『반동새끼,꾀병 부리지 말라』는 등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매질도 서슴지 않는다. 관리책임자들의 횡포만 있는게 아니다.이따금씩 보위원들이 직접 작업장으로 나와 내키는대로 심어 놓은 강냉이모의 간격을 일일이 자로 재가며 검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이때 「주체농법」에 따라 정확히 22㎝ 간격으로 모를 심지 않은 사람이 적발되면 그자리에서 죽도록 얻어 맞은뒤 모를 파내고 다시 간격을 맞춰 심어야만 한다.때문에 보위원이 나타나는 날은 두려움과 긴장으로 작업장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 주체농법을 위반한 사람이 적발될 경우에는 하루 작업을 끝낸뒤 다시 학교에 학급별로 집합해 생활총화시간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위반자는 앞으로 끌려나가 『옳지 않은 행동이다』『아직도 주체사상이 결여돼 있다』는 식의 자아비판을 해야하며 그래도 관리책임자의 마음에 안들면 주먹과 발길질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해가며 한달 남짓의 주체농법의 시간은 끝난다.그러나 수용소 사람들에게는 이 한달간의 「노란 봄철」이야말로 가장 견디기 힘든 때이며 지긋지긋한 고역의 순간이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3)

    ◎지상의 생지옥:가/잘못 없어도 「죄」 고백해야 매질 모면/중노동 끝낸뒤 한밤까지 자아비판/김 부자 찬양노래 소리 작으면 혼쭐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곳 북한에서 정치범수용소에 갇힌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이미 혹독한 통제의 사슬에 얽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주민들을 잠시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북한 위정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통치방법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요덕수용소에서의 수용자들에 대한 통제도 혹독하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통제가운데 「생활총화」라는 것이 있다.쉽게 말하자면 수용소내에서 행해지는 자아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총화는 일과가 끝난뒤 매일 열린다.또 당에서 지시한 「주체농법」을 위반했다든지 국가보위부원의 눈밖에 났다든지 아주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개최된다.생활총화는 수용소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다.하루일과는 생활총화가 지나가야 비로소 끝난다. 수용소의 일과는 새벽5시30분에 시작된다.구획별로 모여 식사와 작업준비를 마친뒤 국가보위부원과 작업반장의점검을 받고 나무를 하러 가거나 농사를 지으러 간다. 낮12시부터 1시까지는 점심시간.그리고 어둑어둑해져 작업이 불가능한 하오8∼9시까지 일한다. 공식적인 일과는 이로써 끝나지만 이후에도 파김치가 된 심신을 괴롭히는 일은 또 남아있다.일과후의 사상학습이 생활총화시간이다.생활총화시간에는 혁명열사의 덕담을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이야기하고 그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마치 노래 반주인양 쉴새없이 나오지만 노래소리가 작아서는 큰일난다. 「북조선 방방곡곡 새바람이 일고…」 김정일이 직접 작사·작곡했다는 이 노래를 비롯해 갖가지 노래를 젖먹던 힘까지 다해 불러야 한다.「귀국자」라 불리는 재일북송교포가 제일 애를 먹는 게 바로 이 노래부르기이다.또 「귀국자」가 노래를 부를 차례가 돌아오면 사람들은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일본식발음때문에 무슨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불러 「위대한 지도자」가 만든 혁명가를 망치게 되어 반동으로 몰린다. 생활총화시간에는 차마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가끔 생긴다.이가운데 「방귀지도원」사건이라는 게 있다.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방귀가 나올지 만무하지만 방귀라는 놈은 사람의 심리구조상 반드시 나오게 돼있나 보다. 한번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혁명열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사람들의 시선은 소리가 난 곳으로 쏠렸고 혁명열사의 덕담도 중단됐다.국가보위부원들의 성난 얼굴이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냄새도 심하게 났다.국가보위부원은 『누구야』하고 버럭 소리를 질러댔지만 이내 공포분위기를 직감한 장본인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잠자코 앉아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국가보위부원은 몇차례의 고함에도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한사람씩 돌아가며 다그쳤으나 역시 자수하는 사람이 없었다.보위부원들은 자정이 다되어도 돌려보내주지 않고 범인을 가리라고 윽박 질렀다.결국 견디다 못한 옆사람이 「범인」을 손가락질하여 20대 처녀가 적발됐다. 이 사건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수용소에서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희귀한 경우인데다 당시사람들을 다그치던 국가보위부원이었던 사로청 부위원장 이영봉에게 「방귀지도원」이란 별명이 붙었기 때문이다. 생활총화는 밤 10시30분에서 11시 사이에 끝나지만 앞서 말한 「방귀지도원」사건처럼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경우 자정을 넘기는 경우도 흔히 있다.또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 사람은 따로 남아 밤새도록 노래를 불러야 한다.김정일이 지었다는 노래의 가사처럼 북조선 방방곡곡에 울려퍼질만큼 큰 소리로 부르라는 것이 국가보위부원들의 주문이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생활총화는 지긋지긋하기만 하다.예를 들어 토끼사육장의 토끼가 한마리라도 없어지는 날에는 선생의 (수용소 인민학교 선생은 모두 국가보위부원이다)매를 맞아가며 자기의 잘못을 지어내서라도 낱낱이 고백해야 하고 며칠동안 토끼사육장 옆에서 밤을 새워야 한다.나도 견디다 못해 다른 학급의 토끼를 훔쳤다가 토끼 숫자를 채워놓고야 비로소 십여일에 걸친 벌을 면한 경우도 있다. 눈에 핏발이 서고 배가 고파 정신이 혼미한 지경에서도,고래고래 악을 쓰고 연신 매를 맞느라 등이 뜨끔뜨끔한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수령님」께 자신의 잘못아닌 잘못을 고백해야 하는 생활총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2)

    ◎생과 사의 경계선:사/눈쌓인 병풍산서 죽음의 벌목사역/굴러내리는 원목에 압사·골절 일쑤/작업성과 나쁘면 하루한끼 주는 구류장 형벌 정치범 수용소에서 실시하는 강제노역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1년동안 줄곧 계속하는 돼지기르기·소기르기·식품공장 사역등이 있는가하면 계절에따라 풀베기·강냉이 심기·무배추재배·산나물채취등 갖가지 노역이 기다리고 있다.또한 폭우·폭설이 내려 길이 훼손되거나 시설물이 부서지면 수시로 임시작업반이 편성돼 사역을 해야한다. 노역대상자는 7살 어린이에서부터 8순노인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다.각자 나이와 체력에 맞춰 빠짐없이 일해야 한다.노역자체가 형벌이므로 이를 게을리하거나 작업성과가 좋지않으면 강냉이쌀 배급량이 절반으로 줄어든다.한 달에 3번이상 지적을 받으면 그 무서운 수용소안의 구류장에 1주일정도 벌을 받게된다.반 평밖에 안되는 구류장에서 한 끼씩만 먹고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 있으면 나중에는 오금이 펴지지 않아 풀려나서도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나오게 된다.이때문에 나이 든 사람들은 특히 구류장 형벌을 가장 무서워한다.꾀병을 부리거나 작업중 요령을 피우거나 건성으로 일을 하다가는 영락없이 적발되어 구류장 형벌을 받게된다. 폐병에 걸려 각혈을 하면서도,치질이 심해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면서도,또 늑막염에 걸려 옆구리에서 고름을 흘리더라도 죽기전까지는 반드시 작업장에 나가야 한다. 강제 노역 가운데 가장 어렵고 고달픈 일이 벌목작업이다.사람들이 벌목작업을 무서워하는 것은 물론 힘들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작업중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당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벌목작업은 수용소에서 4㎞쯤 떨어진 병풍산 일대에서 행해진다.작업 기간은 12월부터 3월까지이다.숲이 우거지고 나무잎이 무성한때를 피해 겨울철에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다.벌목작업에는 20대에서 50대까지의 「힘좋은 남자」들만 동원된다. 매일 새벽 6시에 수용소 앞마당에 집합,5명씩으로 된 1백여개의 작업조를 편성한뒤 작업장까지 걸어간다. 아직도 사방이 어둑어둑한 눈쌓인 추운 겨울 새벽.담요 조각으로 온통얼굴을 감싼채 넝마같은 옷을 겹겹이 껴입고 발에는 헝겊으로 감발한 사람들이 톱과 갈쿠리를 둘러메고 소리없이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유령들의 행진처럼 소름끼친다. 5명으로 구성된 각 작업조는 눈이 무릎까지 쌓인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계곡 양쪽켠 산등성이로 다시 기어 오른다. 병풍산은 크고 험하고 가파른 산이다.좁은 계곡 양켠의 V자형 산등성이를 올라가면 이미 사람들은 기운이 빠져 비실거린다.그곳에는 이미 붉은 페인트로 베어야 할 나무 밑둥에 표시가 되어 있다.벌목 대상은 주로 소나무와 전나무이며 지름이 30㎝ 이상 1m까지 되며 길이는 10∼20m의 거목이 대부분이다.우선 5명이 한 그루씩 달라붙어 톱질을 한다.30여분쯤이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무가 쓰러지고 이어 곁가지를 모두 잘라낸뒤 5m 길이로 2∼3토막의 통나무를 만든다. 벌목작업때 나무를 베고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손쉬운 일이다.가장 위험하고 힘든 일은 토막낸 나무를 계곡 아래쪽으로 옮기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보통 계곡 양쪽의 산등성이는 60도정도로 가파르다.때문에 나무토막을 5명이 한꺼번에 아래쪽으로 밀쳐버리면 저절로 굴러내려간다.그러나 이때가 위험하다.나무 숲에 가려 아래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굴러내린 원목에 사람들이 부딪혀 현장에서 즉사하거나 허리·다리·팔이 부러지는 사고가 잇따른다.1t에 가까운 원목이 굴러내리는 탄력은 대단해 굴러내리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변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워낙 사방에서 우릉꽝꽝하며 원목이 구르는 소리 때문에 분간을 못하기 일쑤이다.작업하는 사람들은 원목을 굴릴때 『어이 간다』하며 함성을 지르지만 메아리 탓에 별 효과가 없다.보위부원들은 『죽거나 다치면 너희들만 손해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할 뿐 아무런 안전대책도 없다.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차장) 양승현(정치부기자) 최철호(사회1부〃)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1)

    ◎생과 사의 경계선:바/“당성 희박하다” 토끼사육에 내몰아/꼬챙이로 토굴파 손톱까지 갈라져/추운 겨울 내장분리작업 생각만해도 “끔찍” 교단 앞에 서서 찔끔 찔끔 울며 「자아 비판」을 했다.게으르고,꾀병을 부렸으며,당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해 어버이 수령에게 누를 끼쳤고….자아비판이 끝나자 다른 아이들도 돌아가며 나를 「나쁜아이」로 몰아세웠다.정말 몸이 허약하고 아팠기 때문이었는데….끝내 용서받지 못했다. 나의 학교 토끼사육장 사역은 이렇게 시작됐다.동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뒤 혼자만 남아 캄캄할 때까지 사역을 했다.토끼사는 학교 뒷면 언덕빼기에 20여곳이 설치되어 있었다.한 사육장에 1백마리정도를 길렀으며 우리 뒤켠 언덕에 굴을 뚫어 잠자도록 했기 때문에 너비 30㎝,깊이 1m정도의 토굴을 만드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또 토굴을 만든 뒤에는 토끼가 다치지 않도록 옆면에 진흙을 발라 매끈하게 만들었다.굴을 하나 파는데 마땅한 연장이 없어 주로 나무꼬챙이를 사용해야만 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손에 물집이 생기고 손톱이 갈라져 피가 났으나 또다시 자아비판을 받을까 두려워 열심히 했다.일주일쯤 토끼굴을 파고나자 나를 토끼당번으로 돌렸다.아이들의 세계지만 토끼당번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다.별로 궂은 일도 아닌데다 매일 다른 아이들이 뜯어오는 20㎏씩의 풀이 정양인지 여부만을 검사하는 것이 임무였다.미운 녀석은 정확히 ㎏을 재고 예쁜 교포 여학생은 조금 부족해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교포여학생들 사이에 나의 인기는 날로 올라갔다.이곳에서 「눈도장」이란 재미있는 말을 들었지만 아침 등교길이면 야단이었다.어쩌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오늘도 잘 봐달라는 듯」미소작전을 펴는 여학생이 있는가하면 일부러 곁으로 접근,슬쩍 몸을 맞대거나 손을 만져주기도 했다. 그렇다고 매양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5∼6명이 한조가 되어 2백∼3백마리의 토끼를 키우는 일은 무척 힘들었다.토끼가 족제비에게 채이거나 우리밖으로 달아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병들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그런 일이 있을 때는 난리가 난다.보위원이 이틀이나 사흘에 한번씩 토끼 머리수를 점검하기 때문이다.만약 한마리라도 부족하면 『너희들이 먹어치웠다』며 사정없이 발길질을 하거나 주먹을 휘둘렀다.죽는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너희들은 당성이 부족하고 관리 능력이 없다』면서 호된 기합을 주었다.또한 토끼가 죽거나 없어지면 반드시 그 숫자만큼 보충시켜야 했다. 그래서 토끼를 잃으면 죽기 살기로 덤빈다.죽은 토끼는 밤에 몰래 남아 다른 사의 토끼와 바꿔치기를 하거나 도둑질을 했다. 그러면 다음날에는 저쪽 사의 당번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모른척 시침을 떼긴하지만 움직임이 심상치않음을 곧 알수 있다.이런 일은 겨을철이 돼 토끼를 도살할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토끼를 잡는 작업은 2∼3일 동안 계속된다.껍질을 벗겨 말리고 고기는 따로 저장한다.처음엔 힘들었으나 곧바로 요령이 생겨 어렵지않게 일을 처리했다.토끼고기는 내장과 머리,몸통을 분리하는 일도 함께 한다.이일은 정말 역겨웠다.지금은 천만금을 준대도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작업이 모두 끝난 사흘뒤 보위원이 지프를 타고 고기와 토끼털을 싣기위해 왔다. 다 싣고난뒤 우리는 보위원의 처분만 기다렸다.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아이들은 모두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날 밤 우리조는 재수가 좋았던지 던져주고간 5개의 토끼대가리를 양동이에 푹 삶아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먹었다.나는 수용소에 들어온지 7년만에 고기를 처음 맛볼수 있었다.
  • 핀란드지,탈출 안혁·강철환씨 인터뷰 게재

    ◎“북한 강제수용소 비하면 영화 「파피용」 감옥은 낙원” 핀란드의 타나안신문은 핀란드의 정보기관인 IS측이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뒤 최근 한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안육씨(24)와 강철환씨(24)를 서울에서 인터뷰했다고 밝히고 함흥에서 약60㎞ 떨어진 여덕의 제15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각각 3년과 15개월동안 공포의 생활을 했던 이들의 경험과 목격담을 2일자 지상에 보도했다. 이 신문은 약20만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들이 대부분 구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만들어진 「굴라그」체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북한에서는 두번째로 큰 여덕 수용소의 수감자 약5만명은 사형선고를 받은 경우와 석방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의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했다. 타나안지가 북한 강제노동수용소의 경험자로서는 처음으로 서방으로 망명한 북한인임을 강조한 안씨와 강씨가 전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여덕의 제15 수용소의 기상시간은 새벽 5시이다.하루 식사는 밥 한 그릇과 약간의 옥수수 그리고소금이 전부다.우리는 매일 13시간씩 돌과 나무를 나르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김일성의 교시를 학습해야 하며 쉬는 날이라고는 1년에 한번인 김정일의 생일 때 뿐이다. 수감자들은 높이가 낮은 감방에 구부리고 앉아 있어야 하며 날마다 간수들로 부터 구타를 당한다.심지어 몸에 붙은 벼룩을 떨쳐내려고만 해도 때린다. 간수들이 칼로 임신 8개월 된 여인의 낙태수술을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여인이 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수감자들의 출신배경은 학생·노동자·학자 등 다양하다.우리가 있던 수용소에는 전직 리비아 주재 대사,전해군사령관,비밀정보기관의 경제담당 책임자가 끼어있었고 국제회의장에서 외국인들과 너무 오래 대화했다는 이유로 들어온 몇몇 기자들도 있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전부 집합하는 것은 공개처형이 있을 때 뿐이다.이 처형은 탈출을 기도했거나 간수들에 대한 태도가 불량한 수감자가 대상이며 그 방법은 총살 또는 교수형이다. 처형이 끝나면 다른 수감자들은 시체를 향해 돌을 던져야 하며 보통 가장 큰돌을 던지는 자는 간수들로부터 한동안 특혜를 받는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어느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설령 담을 넘어 수용소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깊은 도랑이 기다리고 있고 굶거나 얼어 죽기가 십상일 것이다. 결국,우리 모두가 짐승이었다.수감자들은 모두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동료 수감자들은 간수들과 똑같이 위험한 존재이다. 서울에 온 후 본 영화 파피용(남미의 한 프랑스감옥에서 탈출하려는 두 죄수의 이야기가 주제)에 나오는 감옥은 우리가 있던 강제노동수용소와 비교할 때 낙원과 같다.단 한가지 공통점은 우리 역시 살아남기 위해 바퀴벌레를 잡아 먹었다는 것 뿐이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10)

    ◎생과 사의 경계선:마/“사랑도 죄” 임신 발각되면 사형/감시피해 돼지우리 등서 「부화행위」/생지옥에서 싹튼 애정/동료는 밖에서 망보고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은 아마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가 싶다. 굶주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죽지못해 사는 이곳 수용소내에서도 남녀간에 싹트는 애틋한 감정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지옥같은 소굴속에서 피어난 몇가지 애정행각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남녀사랑이란 누구에게라도 들킬세라 숨죽인 눈짓으로 끝나기 일쑤이고 간혹은 굶주린 욕정을 일순간에 해소하는 행위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이것을 부화라고 불렀다. 어디에서나 남녀가 있는 곳에서는 이런 「사건」이 있게 마련인지라 수용소내에서도 이를 단속하기 위한 감시의 눈길이 강했다. 그래도 한창인 나이에 있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감시를 피해가며 「부화」사건을 일으키곤 했다. 독신중대에 수용된 사람중 95%는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이었다. 때문에 살아서 나갈 기약은 없어도 이곳 여성동무들에게이들은 일견 진흙탕 속에 빠진 진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곳에서의 「부화」사건은 남자들 보다도 여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한상길이란 친구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하루는 그가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섰을 때였다.평소부터 상길이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느껴졌던 한 배식담당 여자가 『오늘 밤 자정에 돼지우리에서 만나자』고 살짝 귀엣말을 하는 것을 내가 들은 것이다. 그녀는 식당에서 일하며 배식을 하는 아가씨로 이전부터 상길이에게 강냉이 누릉지를 몰래 챙겨주기도 해 심상치 않다고 느끼던 터였다. 남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만 해도 한달간 독방구류장 행인데 야밤에 만나자는 요구를 받은 상길이로서는 생사를 건 모험을 해야 할 판이다. 그런데 상길이는 「부화」가 좋고 나쁜것은 고사하고 목숨이 달린 이 요구를 들어 줘야만 할 것이란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먹을 것이 절대부족한 이곳에서 그에게 몰래 주어지는 누릉지는 그러한 「사랑」을대가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력하게 말리긴 했지만 나는 결국 그들을 위해 돼지우리앞에서 망을 봐주기로 했다. 그날은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었다.상길이와 난 숙소에서 좀 떨어진 돼지우리에 그녀보다 조금 일찍 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잠시후 그녀가 나타났다.그녀는 이곳까지 오느라 숨이 가쁜 것인지 벌써부터 심호흡을 해댔다. 『빨리 오라요』그녀는 내가 있는 것을 힐끗 본뒤 아랑곳 하지않고 먼저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상길이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배고프지 않으려면 할 수 없어』라며 뒤따라 들어갔다. 고요한 적막속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만 이어 심호흡소리와 가는 신음소리도 섞여 들렸다. 그뒤에도 몇번 더 이런 경우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며 상길이는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가 수용돼 있는 동안 이런 부화를 했다가 나중에 임신이 된 것이 발각돼 처참히 죽은 사람도 보았다. 또 어떤 여자는 임신 4개월만에 고문과 체벌을 견디지 못하고 유산한 경우도 봤다.한번은 노역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채 『사회에서 X질한 년이 여기서도 그래』라는 욕설을 받으며 구류장으로 끌려가는 여자도 보았다. 사랑도 죄가 되는 수용소에서 젊은 남녀 수용인들의 사랑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짓밟히거나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차장) 양승현(정치부기자) 최철호(사회1부기자)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 15만 정치범 신음… “인권 사각지대”(오늘의 북한)

    ◎억압받는 북녘동포들의 실태를 알아보면/주민성분 51개로 나눠 식량까지 차별/종교자유는 물론,주거·직업 선택권 없고/유명무실 재판에 구금·처벌도 「즉심」으로 김영삼차기 대통령이 지난 8일 이북5도민 중앙연합회간부들과 가진 오찬에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힘으로써 지금 이 시간에도 부당하게 억압받고 고통받는 북한동포의 인권문제가 다시 우리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이같은 김영삼차기 대통령의 발언이 앞으로의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예상키 어려우나 어떤 형태로든 북을 자극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김차기 대통령의 언급을 계기로 북한의 인권 현주소와 유린실태를 알아본다. 북한에서의 인권은 「인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침해 정도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한 인권유린사태는 스탈린치하의 소련을 방불케 할 정도로 세계최악이라는 사실이 미국무부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이와함께 국제사면위원회 미네소타 국제위원회 등의 보고서도 수차례에 걸쳐 적어도 15만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이 특별독재대상구역 등에 강제로 수감돼 있다고 지적,북한의 가혹한 인권유린 실상을 거듭 확인해 주고 있다. 지난해 함남 오덕지역 수용소에서 탈출,귀순한 안혁 강철환씨 등이 폭로한 수용소의 생활상은 생지옥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당과 정부의 전직 간부와 그 가족들,인텔리계층의 학생 그리고 일본에서 북한으로 송환된 교포등 수용자 5만명은 하루 14시간의 중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질병과 굶주림으로 매년 40∼50명이 죽어 나간다는게 그들이 밝힌 오덕지역 수용소의 실태였다. 일상생활에서 북한주민이 겪는 인권침해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계급주의적인 차별을 들 수 있다.이는 성분분류를 말하는데 북한은 크게는 3가지,세분해서는 무려 51개 등급으로 주민의 성분을 구분,교육·물자공급·오락시설이용 등에 차등을 두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대상은 과거의 지주 또는 자본가,종교지도자,월남가족들이 망라된 「적대계급」으로 이들은 전체 북한인구의 50%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배급·직장배치 등 모든 면에서 차별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 두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거주지 선택의 자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북한이 인간의 가장 초보적인 권리인 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불안요소 제거 ▲노동력 최대확보 등의 여러 목적에서 비롯된 것인 바 평양거주자의 자격요건을 공식적으로 까다롭게 규정한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식량배급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일반주민들은 쌀과 잡곡의 비율이 3:7정도인데 당·정간부들은 거꾸로 7:3의 비율로 배급을 받는다.또 평양시민과 지방주민들간에도 차이가 커 평양시민은 5:5의 비율로 배급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병원을 이용하는데도 일반주민들은 거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신분과 계급에 따라 일반주민들은 각지 이단위나 읍 또는 각 구역 및 군단위의 낙후된 인민병원을 겨우 이용할 수 있는데 비해 일부 특권층들은 각도의 중앙병원이나 평양의 남산병원등 비교적 시설이 좋은 병원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범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범죄자들에 대한 재판과정을 보면 북한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가가 한눈에 들어온다.북한의 사회주의 신헌법 제159조에는 『재판소는 재판에서 독자적이며 재판활동을 법에 의거하여 수행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무죄로 간주되는 권리라든지 기본적인 권리가 침해당했을 경우 효율적인 구제조치가 강구돼야 한다는 사실을 명시해 놓지 않고 있다.따라서 북한에서의 재판은 거의가 유명무실한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인데 국가보위부의 「즉각심판제도」가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당초 이 제도는 정치범들을 신속히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최근에는 강간 등 일반 강력사범에 대해서도 구금·체포·처벌 등의 독점적 권한을 가지면서 형사재판제도 밖에서 운용되고 있다. 이밖에 종교를 가질 권리 역시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북한은 지난 88년말에 평양에 장충성당과 봉수교회를 세워 외국인들의 방문 대상지에 포함시켰으나 실제로는 그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다.다시 말해 장충성당과 봉수·칠골교회를 열게하고 주일예배를 허용한 것은 북한이 종교를 탄압하고 있다는 세계여론의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취한 「선전 차원」의 제스처일뿐 참된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9)

    ◎생과 사의 경계선:라/들끓는 이… 독방수용땐 차라리 고문/사시사철 가려움에 잠설치기 일쑤/잡다가 간수에 들키면 “말썽핀다” 몽둥이 찜질 수용소안에는 수용된 사람들 말고도 반갑지 않은 식구(?)들이 참 많다.가족세대숙소 독신자숙소 식당 구류장,심지어 병동까지 병균을 옮기는 벌레와 짐승들이 득실거린다.그나마 쥐는 고기에 굶주린 수용소 사람들의 좋은 먹이가 된다. 그러나 이는 겨울철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일년내내 수용소 사람들을 괴롭힌다. 숙소나 식당같은 곳에서는 그래도 참을만 하다.숙소에서는 하루종일의 중노동탓에 피로에 젖어 가려움같은 것은 미처 느낄 틈이 없고 식당에서는 주린배를 채우느라 식탁 주위에 이가 기어다녀도 음식에 섞여 있지만 않으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만한 공간밖에 안되는 구류장에서는 이를 잡기 위해 옷을 벗어 털어낼 수도 없기 때문에 가려움과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길이 2m,가로 세로 각각 1.5m 가량의 구류장은 수용소안의 수용소라 불리는 곳이다.뚜렷한잘못이 있어서 가는 것은 아니고 일과후 혁명학습을 하다가 방귀를 뀌었다든지 작업중 보위부원과 눈길이 마주쳤다든지 하여튼 재수가 없으면 끌려가는 곳이다.수용소에 수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최악의 형벌이자 수용소내의 구류장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차단된 세계에서 또다시 외부와 격리된다는 것은 참기 어렵다. 구류장에는 햇빛이 들지 않아 이가 특히 많다.또 구류장에 들어갈 때는 허리띠와 지퍼,단추까지 다 떼기 때문에 이가 몸속으로 기어들기 쉽다. 처음에는 이를 잡으려고 옷을 다 벗고 구류장안에서 몸부림치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내 지쳐 잠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이가 새까맣게 붙어 있다. 이를 잡는 일도 계호원(구류장을 지키는 간수) 몰래해야 한다.구류장 안에서 이를 잡다 계호원에게 들키는 날에는 영락없이 끌려나와 매를 맞게 된다. 나는 수용소내에서 입바른 소리나 행동을 많이 하는 바람에 구류장에 수시로 끌려간 편이다.대여섯번 끌려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유를 분명히 알고 끌려간적은 한번도 없다. 언젠가 한겨울에 구류장에서 1주일을 보낸 적이 있다.독신자숙소에서처럼 제일 먼저 풍기는 것은 역시 불결한 냄새였다.벽면 아래쪽이 유난히 까만 것이 눈에 들어왔지만 전에 수용된 사람들에게서 묻은 땟자국일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라는 것을 발견하곤 도저히 몸을 접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이들은 한동안 굶주렸던지 사람 냄새를 맡고는 일제히 내 몸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해 순식간에 발목을 덮어버렸다. 이를 잡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을 것같아 털어내고 이가 모여있는 곳을 발로 짓뭉개고 온갖 발버둥을 쳐봤지만 그래도 별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계호원은 『구류장에 들어와서도 말썽을 핀다』며 쇠막대에 코를 걸고 끌어낸 다음 족쇄를 채워 구류장문에 매달아놓고 쇠파이프로 온몸을 때렸다. 이는 수용소안에서 아무 거칠 것이 없는 보위부원들조차 두려워하는 존재이다.보위부원들은 자신들에게까지 이가 옮을까봐 전전긍긍한다.그래서 틈만 나면사람들을 밖에 끌어내 이잡이를 시킨다. 학교에서도 생활총화라고 불리는 정신교육시간에 학생들에게 이사냥을 시킨다. 아이들이라 비교적 창피함은 덜하지만 남녀학생들이 서로 알몸을 내보이는 일은 부끄럽기짝이 없었다.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차장) 양승현(정치부기자) 최철호(사회1부〃)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8)

    ◎생과 사의 경계선:다/배급 「강냉이쌀」엔 쌀한톨 없어/옥수수알 빻은것… 하루 3백50g씩/입자 굵어 설사병 일쑤/부식은 시커먼 소금뿐 우리들이 남한에 귀순하여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일은 끼니마다 「흰쌀밥」을 실컷 머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북한주민들의 최대 소원이 「이팝(흰쌀밥」에 고깃국 먹으며 좋은 옷 입고 기와집에 한 번 살아 보는 것」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고 언제나 굶주려야 하는 곳.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흰쌀밥과 고기는 물론 갖가지 음식을 마음껏 골라먹을 수 있는 남한의 생활상을 보고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바깥의 주민들의 생활이 그렇다면 「정치범 수용소」의 실정은 어떠하겠는가. 귀순한뒤 여러번 국내외 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그때마다 우리들은 답답했다.기자선생들이 북한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용소의 「강냉이 쌀」 이야기만해도 그렇다.어떤 기자는 『강냉이 가루와 쌀의 혼합비율이 얼마 쯤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그 질문을 받았을때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몰라어리둥절했다. 「강냉이쌀」이란 옥수수 가루와 쌀을 섞은 것이 아니라 강냉이 알맹이만을 굵게 빻은 것을 말한다.「쌀」에 대한 그리움탓에 북한주민들은 밥을 지어먹는 어떤 곡식에도 「∼쌀」이라고 이름 붙인다.남한서 말하는 쌀은 「입쌀」이라고 구분 지어부른다. 요덕 정치범수용소측이 죄수들에게 주는 주식은 하루 1인당 3백50g의 강냉이쌀이 전부이다.부식은 시커먼 천일염과 밀기울로 만든 된장 뿐이다. 이 강냉이 쌀은 입자가 굵은데다 겉부분에 있는 딱딱하고 끈매끈한 멜라민 성분때문에 잘 익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된다.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 거의 모두 목숨까지 잃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설사병을 피하고 소화를 돕기위해 쑥·씀바귀·두릅·가죽나무잎을 비롯한 먹을 수 있는 풀잎은 모두 뜯어와 강냉이 쌀과 함께 섞어 죽을 쑤어 먹는다.그러나 봄부터 가을까지는 풀을 뜯어 먹을 수 있지만 겨울철 5개월여동안은 그나마 구할 수 없다.수용소 사람들은 가을철 무·배추밭 노역을 서로 맡으려고 혈안이 된다.무·배추를다듬을 때 버리는 잎파리를 확보,시래기로 말려 겨울철에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미처 시래기를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남의 집 처마에 걸린 시래기를 밤에 훔쳐다 먹는다.들키는 날엔 주인 가족들로부터 뭇매를 맞거나 보위원에게 넘겨져 심한 구타를 당하거나 강냉이쌀 급식량이 한 달씩 절반으로 줄어드는 벌을 받는다. 일년 열 두 달 풀잎을 넣고 끓인 시퍼런 강냉이쌀 죽을 짠 된장 반찬과 함께 먹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끼친다. 수용소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도룡용·개구리·개구리알·뱀·쥐등을 닥치는대로 잡아먹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일년 내내 고기 한점 목먹는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에 걸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있을 뿐이다. 독신자세대들에게 제일 난감한 일은 강냉이 알곡이 통째로 삶아져 나오는 때였다.특히 애벌로 적당히 삶은 설익은 강냉이 알이란 정말 먹기 힘들었다.때문에 독신자세대는 식사하러 갈때 손수건같은 헝겊을 반드시 갖고 갔다.강냉이 알이나 갱냉이쌀밥을 이헝겊에 싼뒤 바닥에 놓고 발로 짓눌러 으깨어 먹기위해서였다. 남한에서는 우리가 먹던 종류의 강냉이를 사료로만 쓰고 식용 강냉이는 따로 있다고 한다.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차장) 양승현(정치부) 최철호(사회1부)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 정치범수용소:7)

    ◎생과 사의 경계선:나/“옷 차지하자” 사람 죽으면 쟁탈전/빼돌린 마대로 누더기 옷을 기워/신발은 나무에 쑥깔창 깔아 대용 수용소안에서 날짜 가는게 무슨 상관이랴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추위를 막아줄 옷 걱정이 앞서기에 언제쯤 추위가 올지는 항상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처음 평양에서 이곳에 끌려올 때 정신이 없어 간단한 옷가지만 챙겨왔기 때문에 갈아 입을 옷이없어 4∼5개월이 지나자 모두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수용소의 의복사정은 말그대로 원시 자급자족 상태라서 자기가 입을 옷은 자기가 해결해야만 한다. 제아무리 누더기를 걸치고 있고 날씨가 춥더라도 수용소에서는 의복이 지급되는 법이없다.옷을 주기는 커녕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도 「당과 수령님의 은총」인 것이다. 때문에 내가 입고있는 옷도 이미 누더기가 다 되었건만 달리 구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 갈아 입을 것은 고사하고 다가올 추위에 더 입을 것조차 없어 덜덜 떨며 사역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북한에서 옷이래봐야 기껏 테토론으로 만든 껄끄러운 질감의 옷이 대부분인데 이것으로 겨울을 난다는 것은 정말 여간 고통이 아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양 팔꿈치는 물론 양무릎과 엉덩이 부분이 이미 다 해져 누덕누덕 기웠으며 그나마 기울 천조각도 못 구해 군데군데는 구멍이나 있었다. 구멍난 곳을 기우는 천이라고는 이곳에서 사역할 때 몰래 빼돌린 마대자루 천이다. 이 마대자루는 오히려 다른 천보다 질겨 안성마춤이지만 너도나도 서로 차지하려는 바람에 쉽게 구할 수도 없었다. 이곳 남한에 와보니 청소년들이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어찌나 그 옷이 부러웠던지 얼른 한벌을 사 입었다.옷 촉감도 좋고 질겨 세상에서 이런 좋은 옷도 있었는가하며 감탄했다. 수용소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갈 때 죽은이가 입고있던 옷을 차지 하는 것 또한 중요한 생존경쟁의 한 부분이다.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눈물 흘릴 겨를도 없이 서로 시체를 매장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죽은 사람의 옷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다.물론 그 옷이라야 누더기일 뿐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옷감은 수용소에도착한 뒤 단 한번 지급한 담요이다.매일 지치고 더러운 몸을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감싸고 자던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이 담요도 급할 때 구멍난 곳을 깁는데는 아주 긴요하다. 수용소 사람 치고 담요로 옷을 깁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겉옷조차 이 모양인데 속옷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지칭하는 속옷이란 물론 러닝셔츠와 팬티를 말한다.그러나 그곳에서의 속옷은 팬티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위에는 아무거나 끼워입고 걸치면 그만이지만 팬티의 경우 입을 지 말지가 항상 고민거리인 것이다. 어떤 이는 아예 마대자루를 칼로 대강 잘라 만든 팬티를 입은 이도 있으며 그나마 안 입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갈아입을 것이 없으니 깨끗하게 빨아 입는 다는 것은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다. 그곳에서 팬티를 입는 일은 일종의 사치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목욕도 제대로 못하는데 속옷조차 못빨아 입어 많은 이들이 고환염에 걸리거나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니 여자들은 오죽했으랴. 덧붙여서 옷은 또 마대니 담요조각등으로 겨우겨우 때워 간다 하더라도 신발만은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나는 기나긴 수용소 생활에서 나무로 신발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배웠다.이름하여 「지화족」이란 것인데 가루나무와 느릅나무를 도끼로 쪼갠뒤 그것을 불에 잠시 대면 터져서 편편하게 돼 이를 밑창으로해서 쑥을 깔창으로 댄뒤 칡으로 감으면 신발 한켤레가 되는 것이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 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6)

    ◎생과 사의 경계선:가/쥐까지 잡아먹는 「빠삐용인생」/봄엔 도롱뇽·뱀사냥으로 허기 채워/강냉이배급 절대 부족/생존위한 몸부림 처절 「바퀴벌레 한마리가 독방의 어둠을 뚫고 기어 나온다.도망다니는 벌레를 손으로 덮치길 여러번,어렵사리 잡은뒤 멀건 물뿐인 밥그릇에 담는다.그 속엔 토막난 지네 한마리가 떠있다.그걸 마시듯 먹는다…그로부터 며칠뒤,굶주려 축 늘어진 방주인의 몸주위를 바퀴벌레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닌다.어둠 속에서 방주인은 미동도 않고 길게 누워있다…」 언제 보아도 뭉클한 프랑스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다.이 영화는 굶주림과 억압이라는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빠삐용의 처절한 인생역정을 담고 있다. 안혁 강철환 두사람은 최근 이 영화를 봤다고 했다.『북한의 수용소생활은 그 이상이야요.훨씬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아요』 주저함없이 털어놓은 두사람의 한결같은 감상 소감이었다. 해괴한 먹이사냥에 대한 이들의 기억은 정말 그랬다. 이곳에선 특식에 속하는 도롱뇽에대한 강씨의 설명은 오히려 더욱 실감나는 얘기였다­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깰때쯤인 수용소에서의 첫해 봄 어느날,옥수수를 심기위해 밭에 나갔다.한창 일을 하고있는데 비교적 오래된 친구 서너명이 밭에서 잡은 도롱뇽을 보여주며 휴식시간에 몰래 나눠 먹자고 했다.『죽으면 죽었지 그딴걸 어떻게 먹나』 하며 거절했다. 그런데 휴식시간이 되자 보위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보초를 세워놓고 돌아가며 구워 먹었다.무척 맛있어 보였다.머뭇거리며 다가갔더니 한 친구가 멋적은 표정으로 어른스럽게 『살려면 별수없어』라며 주머니속에서 한마리를 꺼내 주었다. 머뭇거리다 가르쳐준대로 직접 만든 나무칼로 껍질을 벗기고 나니 너무 작아 잘라낼 곳도 없었다.질끈 눈을 감고 통째로 씹었다.갑자기 쓰디 쓴물이 입안에 가득했다.『욱』하며 넘어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삼켜버렸다. 두 세번까지는 같은 맛이었다.그 뒤 도롱뇽 사냥에 선수가 됐고,가장 앞장서는 사냥꾼이었다. 봄에는 도롱뇽과 함께 개구리알도 좋은 먹이감이다.틈만나면 개울가를 찾는 게일이며 개구리나 뱀은 봤다하면 끝까지 쫓아 그 자리에서 구워 먹는다. 무엇보다도 요긴한 고깃감은 겨울철의 쥐이다.쥐고기를 먹는 날은 더할나위 없이 기쁜날 이라는 것이 이들의 얘기였다.첫 겨울엔 잘몰라 나뭇가지 끝을 뾰족하게 깎아 「쥐창」을 만들어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쥐창으로 잡으면 피가 튀어 요리하기가 어렵다.어느정도 적응이 된 뒤에는 그래서 가는 철사나 헝겊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잡게 된다. 시간이 좀더 흐르게 되면 강냉이 밥보다 훨씬 「고급음식」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굶어 가면서 쥐를 사육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쥐가 잘 다니는 곳에 강냉이 알을 뿌려놓는가 하면 쥐를 봐도 애써 외면하거나 놀래 달아날까봐 조심스럽게 행동한다.어쩌다 찾은 귀한 손님 대하듯 한다는 것이다. 안씨는 『그러다 보면 사람을 봐도 달아나지 않게 돼 수월한 사냥감이 된다』며 『약간 찌린내가 나서 그렇지 고기는 쫄깃한 게 아주 고급』이라고 말한다. 너나 할것없이 이렇게 겨울을 견디다 보면 봄철에는 아예 쥐의 씨가 말라버린다.『빠삐용보다 더 했다』는 말을 이들은 또다시 되풀이 했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5)

    ◎죽어가는 사람들:라/살아서 나올수 없는 병원/영양실조·폐결핵·동상 등 질병 만연/의사없이 간호원 1명뿐… 약도 없어 요덕 정치범수용소는 그 자체가 거대한 죽음의 병동(병동)이다. 극단적인 굶주림과 영양결핍,불결하기 짝이 없는 주거환경등 최악의 조건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수용소 사람들은 갖가지 질병속에서도 무방비 상태로 버려져 있다. 이곳에서 병에 걸린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뜻한다.치료시설은 물론 의약품 한톨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수용소 정책은 일정기간 벌을 준뒤 다시 사회에 복귀시키자는 것이 아니다.수용소 안에서 살다가 죽어달라는 것이다. 수용소 사람들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질병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주는 질병실험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펠라그라(pellagra)병·폐결핵·위장병·장염·기관지염·괴혈병·치질·동상·늑막염·피부병등 병의 종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만연되어 있는 질병이 펠라그라병.이 병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극심한영양실조때문에 걸리는 병이다.하루 1인당 3백g의 강냉이 알을 먹는 것이 전부인 수용소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병때문에 신음하며 1년에 20여명이 죽어간다.극심한 설사로 인한 탈수현상과 위장장애및 신경장애를 일으켜 폐인이 되고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죽게된다.수용소 사람들이 개구리나 도룡뇽 심지어 쥐까지 잡아먹는 것은 이 병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죽음과의 싸움인 것이다. 나도 수용된지 3주일만에 영락없이 이 병에 걸려 6개월정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할머니는 두 달만에 머리카락이 백발이 되어버렸고 얼굴과 손발이 심하게 부어 오르면서 이빨도 하나씩 빠져버렸다. 다음으로 많은 질병이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역시 영양결핍에서 온다.또한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악화되는 일이 허다했다.착하고 예뻣던 교포마을의 수라도 독감에 걸린뒤 폐렴으로 발전돼 죽었었다. 수용소 안에는 이른바 「병원」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는 곳이 있다.그러나 이곳은 병든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병의 정도를 판정해주는 곳일 뿐이다.간호원 출신의 신아주머니가 이곳에서 환자들의 경·중을 판정,평풍골에 있는 「요양소」로 보낼지 여부를 결정 지었다.말이 요양소일 뿐 죽을때까지 격리시켜 방치하는 무서운 곳이다.이곳에 수용되면 거의 살아돌아오지못했다.이때문에 수용소사람들은 진단을 기피하고 집안에서 신음하다 가족들 옆에서 죽기를 더 원했다. 중국에 유학중 외국 처녀와 사귄 혐의로 수용된 독신자세대의 전승일은 결핵성 늑막염으로 29살의 아까운 나이에 죽었다.늑막염 악화로 왼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꼼짝도 못하던 전승일은 어느날 대꼬챙이로 자신의 옆구리를 찔러 고름을 한 바가지나 빼냈다.그리고 대나무 대롱을 꼽고 기어다니다시피 했으나 고름이 창자에까지 번지는 바람에 결국 숨졌다.죽던 날 새벽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을 참지못해 발악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우리들은 그를 침상에 묶어 고통을 덜어 주었고 그는 눈쌓인 어느 겨울 새벽에 숨졌다. 수용소 사람들,특히 남자들은 고환염과 치질때문에 고통받고 있다.어떤 사람은 고환이 송구공만큼부어 올라 한손으로 고환을 움켜쥐고 허리를 구부린채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걸어 다닌다. 또 치질에 걸린 사람들도 한 손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뒤뚱거리며 다닌다. 이같은 병에 걸려도 작업장에는 꼭 나가야 하므로 그 고통은 이루 상상 할 수 없다. 수용소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다.영하 20도 안팎의 강추위가 겨울내내 계속되고 한번 눈이 쌓이면 봄이 되어서야 녹는다.겨울철에 주로 하는 작업은 평풍산 골짜기나 엄나무골에서 하는 벌목작업이다.장갑은 물론 신발조차 지급되지 않는다.사람들은 수위에 못이겨 모포조각이나 옷가지를 잘라 얼굴·손발을 감발하고 다니지만 맹추위에는 역부족이다.때문에 거의 모두 동상에 걸려 신음한다.작업을 끝내고 돌아오면 손발이 벌겋게 부어오르면서 아리기 시작한다.나중에는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려 제대로 잠을 이룰수 없다.이같은 일이 겨우내 반복되면서 동상이 악화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시꺼멓게 썩어들어간다. 수용소 사람들은 손·발가락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에 따라 서로 몇해동안이나 살고 있는지를금방 분간한다. □특별취재반 김 만 오(정치부차장) 양 승 현(정 치 부) 최 철 호(사회1부) 문 호 영(정 치 부) 송 태 섭(사회1부)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 15호 북한정치범수용소:4)

    ◎죽어가는 사람들:다/붙잡힌 탈출자 처형전 이미 초주검/총살·교수형뒤 시신에 돌팔매 강요/돌 안던진 북송교포 뭇매… 선혈 낭자 3일동안 학생 9백여명을 비롯한 수용소내 전 인원이 총 동원됐다.수용소주변의 모든 산봉우리와 골짜기들을 몽땅 뒤져야 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도망친 3명을 찾기위해서였다.동원된 사람들은 수십명씩 조를 짜 골짜기에서 봉우리로 일렬로 수색해 올라가는 일을 반복했다. 보위부원들은 눈에 불을켜고 어린 우리들까지 닥달했다.만일 도주자들을 찾지 못할 경우 그들은 일시에 감시자에서 수감자로 전락할 처지였던 것이다 보위부원들은 『도주자를 찾는 사람은 수용소에서 석방시켜 준다』고 했기에 같은 수감자 처지임에도 모두 기를쓰고 이들을 찾아 나섰다. 3일이 지났다.평풍산골짜기 덤불속에 숨어 있던 도주자 3명이 붙잡혔다.눈덮힌 산자락을 꼬챙이로 쑤시고 다니던 우리들의 수색도 끝이 났으나 경험은 이제부터 시작됐다. 도주자들의 처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그도 그럴 것이 이미 북한사회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이들에 대한 처형은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붙잡힌 다음날 수용소내 모든 사람들이 다시 소집됐다.넓은 공터에 모인 우리들은 눈이 한곳에 집중됐다.총을 든 9명이 한쪽을 향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처형은 총살형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소장이하 수용소내 감시원들이 한쪽옆에 도열해 있다가 이윽고 소장이 뭐라고 일장 연설을 했다.나는 소장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오직 눈앞에 펼쳐질 「총살형」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되도록 잘 보기위해 많은 사람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갔다. 보위원들이 세사람을 끌고 나왔다.나는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진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이미 모든것은 포기한듯 그들은 힘없이 이끌려왔다. 모두들 긴장했다.처형자들의 목과 가슴 다리 3부분이 처형대에 묶일 때에는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총이 겨누어졌다. 『조준』 『…』 『발사』 귀가 찢어질듯한 총성이 3번 반복됐다.총소리가 터질 때마다 나는 경련을 일으켰다. 첫번째 총성에 얼굴을 묶은 밧줄이 끊어지면서세사람의 머리가 앞으로 꺽어졌다.두번째 총성에는 그들의 가슴에서 피가 튀면서 앞으로 꼬꾸라졌다.순간 나는 총을 더 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총성은 또 들렸고 이들은 나무토막 처럼 땅에 쓰러졌다. 그들의 주검 주변으로 선혈이 흘러 있었다.이것으로 처형은 끝난 줄 알았다.그러나 보위부원 한명이 시체앞으로 다가갔다.그는 권총을 꺼내더니 죽은이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순간 소름이 끼쳤다.그것이 생사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음은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그뒤 시체는 어떻게 됐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내가 격은 첫번째 수용소내 처형이었다.지난1978년4월의 일이었다. 내가 본 두번째 처형은 그로부터 7년뒤인 지난85년8월의 일이다. 그때도 역시 2사람이 수용소를 탈출했다.이 두사람은 현역군인으로 있다가 말을 잘못해 이곳으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그런데 이번은 지난번보다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보통군인도 아닌 특수훈련을 받은 이들은 수용소 사상 처음으로 요덕군 수용소구역을 완전히 벗어나 탈출한 것이다.벌집을 쑤신듯 난리가 났다. 한달여동안 계속된 수색작업도 허사였다.이미 밖으로 도망간 이들이 눈에 띌 리 없었다.수용소 사람들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구역에서 탈출한 이들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철저히 통제된 사회속에서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한명은 함경남도 금양군까지 도주했다 붙잡혔고 다른 한명은 국경을 넘어 중국 단동까지 갔다 중국공안원들에 의해 잡혀 신병이 인도됐다. 1주일 먼저 잡힌 한 사람은 그동안 너무 얻어맞아 이미 몰골이 흉악했다. 이들에 대한 처형은 『총알이 아깝다』는 것과 시각적 효과를 높힌다는 이유에서 처음으로 교수형으로 정해졌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 날 수용소내 강변 어귀 자갈밭 공터에 ㄱ자형 교수대2개가 설치됐다.하늘높이 치솟은 교수대는 죽음의 갈고리처럼 보였다. 먼저 잡힌사람은 이미 반죽음 상태였고 나중에 잡힌 사람은 지친듯 보였어도 워낙 체격이 건장해 아직 힘은 남아 있어보였다. 둘은 소장앞에 꿇어 앉혀졌다.소장은 『공화국 형법 ○○조에 따라…』라며 난데없이법조문을 들먹이며 재판흉내를 내더니 이윽고 『사형』이라고 외쳤다. 교수대에 올려진 두사람은 머리에 두건이 씌어졌고 이내 올가미에 목이 감겨졌다.그야말로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릴듯 조용했다. 침묵속에 몇분이 지났을까.『일렬로 정렬하라』는 소리가 들렸다.소장이 우리들에게 하는 소리였다.멍하고 있던 사람들이 제정신을 차려 움직였다.소장은 우리들에게 『모두 돌을 들어 죽은 놈들에게 던지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돌을 주워 힘차게 던지는 것이아닌가.잘보여야 편한 일을 할 수 있다는 필사적인 생존의식이 이처럼 인간성을 완전히 말살시킨 것이다. 매달린 시체는 언제부턴가 살점이 너덜너덜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난 부위도 있었다.시체아래로 돌이 수북이 쌓였다. 그러나 사건은 또 이어졌다.일본에서 20세까지 살다 이곳에 온 교포가족세대의 성신휘라는 청년이 돌 던지기를 무시하고 교수대 앞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보위부원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보위부원들은 돌을 던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행렬 옆에서 성신휘를 구둣발로 짖이겼고 사람들은 이미 혼이 나간듯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찢어지면서 흘러내리는 선혈을 보고도 무표정했다.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북한정치범수용소:3)

    ◎죽어가는 사람들:나/남편 귀순한뒤 끌려온 신아주머니/오길남씨 부인,두딸과 생지옥 생활/수차례 자살기도 실패… 눈물의 나날 87년 11월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부인과 어린 두 딸이 독신자숙소 바로 앞에 있는 가족세대숙소에 수용됐다. 남한에 귀순한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난 4월 독일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거물간첩 오길남씨의 부인 신숙자씨(45)와 어린두 딸 혜원(11)규원(8)이었다.수용소 사람들은 그녀를 신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신아주머니는 수용 첫날밤부터 목놓아 울었다. 『어린 딸들과 이곳에서 짐승같은 생활을 하다 죽게 되다니…』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나…』 신아주머니의 구슬픈 하소연과 울음소리는 밤새 몰아치는 삭풍속에서도 또렷하게 귓전을 때렸다.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온종일 작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독신자숙소의 사람들은 아무도 울음소리에 신경쓸 처지가 못됐다.나는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뒤척이다 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튿날 새벽녘 간밤의 울음소리와는 다른 여자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에 놀라 눈을 떴다. 심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나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판자출입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울음소리는 신아주머니 집에서 들려왔다.20여m를 단숨에 달려갔다.방문을 열어 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에 신아주머니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어린 두딸이 어머니의 다리를 붙들고 어쩔줄 몰라 울부짖고 있었다. 재빨리 끈을 풀었다.다행히 신아주머니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이불위에 눕힌뒤 팔다리를 열심히 주무르자 신아주머니는 30분쯤 지나 의식을 되찾았다.신아주머니는 자살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아 차리곤 또 다시 발버둥치며 울었다.밤새 울어 퉁퉁부은 눈으로 독신자숙소에서 달려온 남자들을 원망스럽게 둘러보기도 했다. 자살극이 보위부원들에게 알려져 그녀는 1개월동안 특별감시대상으로 지목받아 수용소내 특별 감옥에 격리 수용되는 고초를 겪었다.그러나 그녀는 진짜로 죽기를 작정한 듯 그 후에도 몇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주위에서 『어린 딸들만 두고 혼자 죽어버리면 어쩌느냐』며 말리는 바람에 마음을 고쳐먹는듯했다.서울태생인 그녀는 서독에 간호원으로 취업했다가 한국 유학생인 오씨와 결혼,두 딸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고 한다.그러나 남편이 간첩으로 입북,평양에서 살게되었고 또 다시 북한체제에 염증을 느낀 남편 오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할 결심으로 독일근무를 원했으나 북한당국은 신씨와 두 딸을 잡아두고 오씨만 독일로 보냈고 남편이 귀순해버려 수용소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작은 체구인 신아주머니는 마음이 무척 착하고 인정이 넘쳤다.그후 신아주머니는 간호원경력을 인정받아 수용소안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간호원 일을 했으나 수용소 안에서는 약 한 톨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도중 다친 사람들이나 병자들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일이 그녀가 주로 하는 임무였다.신아주머니는 가족세대든 독신자들이든 병들고 부상입은 사람이 있으면 밤새워 돌보는등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수용자들에게 정을 쏟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으려는 듯 열심이었다.그러나 때때로 『서울에가면 부모님과 삼촌·고모·이모·친구등 누구누구가 있는데…』라며 간호하던 환자를 붙들고 오열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병자나 부상자들을 위해 거짓으로 「작업불가능」판정을 내렸다가 나중에 보위원들에게 들통나 1주일씩 강냉이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벌을 받고 어린딸들과 함께 굶주리기로 했다. 신아주머니가 수용소에 들어온지 석달째쯤이었다.새벽녘 『불났다』하는 외침에 잠이 깼다.신아주머니 집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판자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차 있었다.불붙은 나뭇가지를 정신없이 방밖으로 꺼냈다.신아주머니는 두딸을 양쪽 겨드랑이에 꼭 껴안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이미 머리카락과 얼굴·손발은 연기와 불길에 그을린채 실신상태였다.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이 방안에 물을 퍼붓고 나와함께 그들을 밖으로 끌어냈다.그녀는 발버둥치며 울부짖었다.『죽는 것이 행복한데 왜 말리느냐』며 몰부림쳤다.2월말이었지만 새벽 기온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려 마치 고추가루를 마신듯 매서웠다. 그 이후 신아주머니는 실성한듯 싱글싱글 웃어가며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니 할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되뇌는게 버릇이 되었다. 내가 「김정일지도자」의 생일특사로 수용소에서 나오던 날 『안혁이 이제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말고 잘 살아요』라며 눈물흘리던 신아주머니. 그녀와 귀엽던 두 딸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
  • 죽어가는 사람들(요덕 15호 북한 정치범수용소:2)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폐렴걸린 「수라」 약없어 “허무한 죽음”/담요로 시신말아 언땅 파고 매장/딸잃은 어머니 눈밭 뒹굴며 통곡 □특별취재반 김만오(정치부부장) 양승현(정치부) 최철호(사회1부) 문호영(정치부) 송태섭(사회1부) 방안에 켜놓은 관솔불의 마지막 불꽃이 막 사위려했다.흙으로 덕지덕지한 판자벽 틈새로 밤사이 내려 쌓인 눈이 희미하게 보였다. 『오늘도 부토작업이 있는데…또 죽었구나』 강냉이 주먹밥 하나를 먹고 하루종일 눈속에서 일할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매일 이 모양이지만 눈오는 날은 더욱 힘들다. 아침 식당에서 강냉이밥 한그릇을 먹고 곧장 평풍골 계곡으로 이동하면 하루 종일 허기와 추위속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눈밑에 쌓인 부엽토를 지게에 담아 3㎞가 넘는 눈덮인 계곡길을 어두워질 때까지 오르내리는 일은 정말 힘들다. 점심때가 되면 이미 꽁꽁 얼어붙어버린 강냉이 주먹밥을 겨드랑이 밑에 넣어 녹여 먹는다.일하는 틈틈이 감시보위원의 눈을 피해 도토리와 마른 머루를 주워 먹는 게 유일한 낙이다. 새벽녘 울음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여인의 울부짖는 소리는 이내 통곡소리로 바뀌었다.수라네 집쪽이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를 박차고 수라네 집으로 뛰쳐 올라갔다. 수라는 달포전부터 감기를 앓아왔다.못먹고 쉬질 못해서인지 최근 폐렴으로 악화됐다.작업장에서 보면 핼쓱한 얼굴에 각혈까지 하는 것을 여러차례 목격했다. 이곳엔 약이 없다.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그뿐이다.죽을 죄를 지었는데 살려둔 것만도 당의 은총이며 배려인 것이다. 수라의 어머니가 자는듯이 누워있는 수라를 붙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수라야,니가 가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누가 우리 불쌍한 수라 좀 살려주소』 밤새 죽어가는 딸을 껴안고 몸부림 친듯 수라의 어머니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잠겨가는 목소리로 이름만을 부를 뿐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싸늘한 냉기뿐인 방 한 구석엔 4명의 남동생이 웅크리고 앉아 누이의 주검과 어머니의 몸부림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수용소에는 장례식은 물론 관이나 수의가 없다.먼동이 트자마자 보위원으로부터 매장명령이 떨어졌고 나는 매장조로 편성됐다.한나절은 부엽토작업을 않게 된 것이다. 헌 담요조각으로 시신을 둘둘 말아 묻는게 예사였으나 왠지 수라만은 그렇게 묻을 수가 없었다.여기 저기서 판자쪽을 주워모아 관을 만들었다.관에 내 몫으로 배급받은 강냉이밥알을 한주먹 싸서 넣었다.아무리 배가 고파도 수라를 묻은뒤 도저히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였다. 관을 메고 나오는데 수라의 어머니가 몸부림치며 다시 매달렸다.『불쌍한 수라야,수라야』미친 사람처럼 산발한채 맨발로 우리 뒤를 따라왔다.넘어지면 일어서고 딸이름을,이름을 부르며 목놓아 울고… 다시 눈밭을 뒹굴고… 마치 자신도 죽으려는 사람처럼. 병풍산을 향해 관을 메고 가면서 모두 울고 있었다. 겨울내내 얼어붙은 땅은 여간 단단하지 않았다.괭이로 한나절을 팠는데도 겨우 40㎝ 정도였다.가까스로 묻고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수라는 14살 때인 76년 이 곳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0년만에 죽었다.수라아버지는 북송교포였고 어머니는 북한 처녀였다.수라아버지는 자신때문에 가족들이 이 지경이 되었다며 늘 괴로워 했다.그래서일까.얼마전 정신착란을 일으켜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산속의 외딴 정신병자격리 「요양소」로 끌려가 버렸다.남자없는 수용소안의 가족세대는 더욱 비참하다.땔감이나 배급강냉이와 섞어먹을 풀들을 구하기가 힘들다.죽기직전까지 수라가 그 일을 다했다. 아프기전 풀을 뜯다 들판에 엎드려 흐느껴 우는 수라를 먼 발치에서 여러번 봤다.우리들은 작업도중 땅을 팔때 동면중인 개구리나 뱀을 발견하면 잡아다 수라에게 먹였다.전혀 약을 구할 수 없는 수용소에서는 스스로 영양보충을 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다.착하고 아름답던 24살의 처녀수라의 죽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 “굶주림…절망…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요덕15호 정치범수용소:1)

    ◎북한탈출 안혁·강철환씨 수기연재 앞서 회견/5만명 가족·독신자동 나눠서 감시/탈출하다 적발되면 돌팔매질 사형/강냉이죽 연명… 사람 죽으면 옷차지 아귀다툼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죽음자체보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는 죄없는 북녘 동포들이 절망과 공포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 함경남도 요덕군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에 있는 12곳의 수용소 가운데 가장 크고 처참한 곳이다. 북한 주민들은 「조선인민경비대 2915부대」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이 곳을 「15호 관리소」또는 「15호」라고 부른다. 15호는 구읍리·입석리·용평리·평전리·대숙리등 5개 리(이)가 있는 요덕군전체 지역에 설치된 거대한 「수용소군도」이다. 이 수용소에는 이른바 반동분자·사상불순자라는 누명을 쓴 북한 주민과 북송교포등 5만여명이 가족세대와 독신자세대로 나뉘어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에 수용되어 있다. 이곳에 9년6개월동안 가족과 함께 수용되었던 강철환씨(24·북송교포 2세)와 1년3개월간 혼자 갇혔던 안혁씨(24·전탁구선수). 강씨는 조총련 교토(경도)본부 상공회장을 지내다 지난 61년 일가족과 함께 북송된 할아버지 강태휴씨(92·생사불명)의 손자로 북한에서 결혼한 아버지 강리명씨(89년 병사)와 어머니 신도옥씨(90년 병사)사이에서 68년 출생했다.강씨 가족들은 소문난 부자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아파트에서 자가용차와 냉장고까지 갖추고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77년 7월 강씨의 할아버지가 영문없이 행방불명된지 한달만에 할머니·삼촌·아버지·남동생등 일가족 4명은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강씨는 당시 10살이었고 성분좋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강제로 이혼 당해 헤어졌다. 한편 안씨는 중학생 대표 탁구선수로 중앙체육학교에 다니던 중 호기심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의 연길등지에서 놀다 돌아온뒤 간첩으로 몰려 87년 11월부터 1년3개월간 수용되었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사지에서 풀려난뒤 지난 3월 북한을 탈출,중국을 거쳐 남한에 귀순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눈에 선한 수용소의참상을 상세히 폭로하고 싶어한다.그들은 인간다운 삶을 되찾게 된 만큼이나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 강씨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인간에게 온갖 잔인한 고통을 주어 죽어가는 과정을 처참하게 체험토록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말했다. 1인당 하루 5백g의 강냉이알맹이가 주식의 전부이며 반찬은 굵은 소금.이때문에 수용소 사람들은 풀을 뜯어다 강냉이를 삶아 으깬뒤 죽을 쑤어 먹거나 풀범벅을 만들어 먹고 있다는 것이다. 강씨는 또 『흙벽돌과 나무판자로 지은 낡은 집은 흙방바닥이며 1년에 한번 지급되는 마대로 짠 겉옷이 의복의 전부여서 사람이 죽으면 서로 헌옷을 차지하려고 다투며 신발은 아예 지급되지 않아 나무껍질과 헝겊으로 감발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이들은 『수용소안의 모든 사람들이 극심한 노역과 영양실조로 펠라그라병(단백질 결핍증으로 심한 피부병·설사증세와 정신이상을 일으켜 곤충등을 잡아 먹는 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수용소에서는 약을 구경할 수도 없어 병에 걸리면 곧바로 죽을 수 밖에 없다』면서 『폐렴·결핵등에 걸리면 치료는 커녕 산속에 있는 격리수용건물에 넣어 죽을때까지 방치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또 가족세대인 경우에는 드물게 출산을 하는 여자들도 있으나 아이들은 모두 태어난 직후 죽거나 살아도 기형아가 된다고 말했다. 수용소 생활을 견디다 못해 가끔 작업장에 나간 틈을 이용,탈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모두 곧바로 붙잡히고 만다는 것이 이들의 이야기다. 안씨는 『탈출하다 붙잡히면 수용자들이 모두 모인 공터에서 처음에는 총살을 시켰으나 얼마전부터는 총알이 아깝다며 목을 매단뒤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으며 부녀자들은 이같은 끔찍한 광경에충격을 받고 까무러치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수용소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 이듬해 새풀이 돋는 3∼4월까지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 북한 강제수용 정치범/매년 수백명 처형당해/워싱턴타임스 보도

    【워싱턴=이경형특파원】 수백명의 정치범이 매년 북한 강제 수용소에서 처형되고 있으며 구타나 영양실조로 숨지는 정치범도 수백명에 이른다고 미국 워싱턴 타임스가 16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북한을 탈출,지난 4월 서울에 도착한 안혁·강철환 두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보도하고 수용소내에서 음식을 훔치거나 정부를 비판하고 간수를 공격하는 정치범들은 공개적인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강씨는 자신이 수용됐던 함흥에서 서쪽으로 40마일 떨어진 대석리 제15 수용소의 경우 매년 평균 15명이 처형됐으며 40명정도가 구타나 질병으로,아니면 굶어 죽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정치범들의 처형시 모든 수감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그 숫자가 약1만명 정도였다고 말했으며 다른 수용소 수감자들의 증언등을 종합할 때 북한 전역의 강제수용소 수감자는 전체 인구의 1%에 육박하는 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 “김현희가족 정치범수용소에”

    ◎귀순 안혁씨,“함께 수용 여성이 귀띔”/외교관아버지 등 요덕군 산속서 노동 북한 강제 수용소 출신으로 최근 중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망명한 강철환씨 (24)와 안혁씨(24)는 21일 대한 항공기폭파범 김현희씨의 가족이 그들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현재 함남 요덕군의 산속에 있는 「2951정치범 수용소」에 강제 수용돼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날 서울에서 일본 특파원들과 가진 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김현희씨 가족이 정치범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은 2951정치범 수용소내의 「안전 통제 구역」으로부터 「혁명화 구역」으로 옮겨진 한 여성 수용자가 안씨에게 들려 줌으로써 알게된 것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자신이 수용소에 있을때 『여성 수용자가 안전 통제 구역에 남한의 비행기를 폭파한 마유미의 가족이 수용돼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현희씨에게는 대한항공 폭파 사건 당시 앙골라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동생·누이를 비롯 할머니 등이 있었으나 김씨가 붙잡힌 이후 지금까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한편 강씨는 『일본으로부터 북송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비서에 고정자라는 30대의 일본 북송자 애인이 생긴 지난 89년부터 북송자의 처우가 조금 나아졌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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