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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징용피해자·유족 1000억대 손배소 추진

    일제 징용피해자·유족 1000억대 손배소 추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1000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 한국유족회는 2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1000명을 모아 일본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며 “지금까지 접수된 신청서 1400여부 중 법적 요건을 갖춘 사례를 추려 내고 있다”고 밝혔다. 미쓰비시, 미쓰이, 아소, 닛산 등 100여개 일본 기업이 소송 대상이 될 전망이다. 앞서 유족회는 2013년 12월 피해자와 유족 252명을 원고로 해 미쓰비시중공업 등 3개 기업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지만 일본 쪽에 소장이 송달되는 과정이 지연되면서 심리가 늦어지고 있다. 유족회는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가 소멸되는 오는 5월 23일 이전에 748명이 추가로 소송을 제기해 소송단 1000명을 맞출 계획이다. 청구 금액은 1인당 1억원으로 앞선 소송과 합쳐 소송 가액이 1000억원에 이른다. 관련 소송으로는 최대 규모다. 이와 관련, 대법원은 2012년 5월 24일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까지 소멸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민법은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을 경과하면 시효가 소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 소송에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위해 독일 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75억 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아 낸 바 있는 미국의 로버트 스위프트 변호사가 참여한다. 법무법인 동명의 장영기 변호사는 “반인도적 국가 폭력에 한해서는 소멸시효를 없애고, 피해자 일부가 승소하면 전부가 배상받을 수 있는 대표소송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APEC 회원국 간 피의자 체포영장제 도입해야”

    “APEC 회원국 간 피의자 체포영장제 도입해야”

    “현재의 국제형사사법공조 체제는 외교채널로 운영되면서 효율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현대적인 시스템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회원국들 사이에 아·태 체포영장제도의 도입이 필요합니다.” 10일 오후 한국외국어대 법학관에서 열린 ‘이장희 교수 정년기념 학술대회’에서 문규석 외대 법학과 교수가 내놓은 제안이다. 문 교수는 “기존의 쌍방 가벌성의 원칙과 대륙법계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자국민 불인도 원칙은 아·태 체포영장제도의 도입과 함께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쌍방 가벌성의 원칙은 양국 국내법에 모두 위반되는 범죄는 인도 대상으로 한다는 원칙으로, 한·미범죄인인도조약 등에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2013년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여직원 성추행이 미국에서는 범죄에 해당되지만, 한국에서는 당시 친고죄였기 때문에 피해자의 직접 신고가 없는 한 범죄에 해당되지 않았다. 즉, 쌍방 가벌성이 없어 범죄인인도 대상이 되지 않았던 사례 중 하나다. 이날 학술대회는 39년 동안 국제법 연구에 매진한 이장희 외대 법학과 교수의 정년을 맞아 그의 후학들이 최근 한국사회를 둘러싼 국제법적 현안과 국제법적 논리 및 역사성에 대한 연구 결과를 정리, 발표하는 성격의 자리를 가졌다. 국제법은 힘을 기반으로 실효성을 확보한다는 태생적 특징을 갖고 있다. 강대국이 주체가 되는 법체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날 이 교수는 고별 강연에서 “최근 국제법의 주체 개념이 국제기구, 비국가적 실체, 개인 등으로 점차 확대되는 추세”라면서 “우리는 힘의 외교가 아닌 평화의 외교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논리가 국제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정학적으로 안보외교가 절실하고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로서 통상외교가 필요한 만큼 국제법률전쟁에 항상 치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주제 발표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법적 과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국제법적 논리를 바탕으로 모르쇠하는 일본과, 소수의 양심적 일본인, 무관심한 서구, 연대의 대상인 동아시아국가들에 펼쳐온 민간 학문 외교의 집대성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의 역사학자 19명이 집단성명을 내고 일본 아베 정부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며 한국 역사학계의 입장과 함께하겠다고 밝힌 것도 중간 성과물의 하나다. 이 밖에 이날 이동원 외대 법학과 교수는 ‘카이로 선언의 지도 원리와 한국의 영유권 고찰’을 주제로 하는 발표에서 독도 문제 및 각종 영유권 관련 다툼의 국제법리적 부당성을 논증했다. 이는 한국이 짊어지고 있는 중단기적 과제 중 하나다.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선언은 ‘일본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취한 그 밖의 모든 영토로부터 축출될 것’이라는 일반 규정과 함께 ‘위의 3대국(미국, 영국, 중국)은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이 해방되고 독립하게 될 것을 결의했다’는 한국의 해방에 관한 특별 규정을 핵심적으로 담고 있다. 독도의 시마네현 영토 편입 행위가 불법이며 무효임을 입증하는 논리다. 이달 말 퇴임하는 이 교수는 39년 국제법 연구의 결과를 집대성한 ‘국제법과 한반도의 현안 이슈들’을 펴냈다. 한국정전체제 종결과 평화체제 구축 방향, 북방한계선(NLL), 북핵실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19010년 일본의 강제병탄, 일제 강제징용 피해, 독도,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등 한반도 안팎의 각종 국제현안을 분석하고 정리했다. 이 교수는 “이 책은 ‘한반도와 국제법’의 총론이자 서문에 불과하다”면서 “앞으로 전문적 각론서를 제자들과 협력해 계속 펴낼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70년, 한일협정 50년을 맞아 퇴임하는 노 국제법학자의 충심은 이렇듯 현재진행형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日강제징용 피해 유족들의 고통

    [격동의 한·일 70년] 日강제징용 피해 유족들의 고통

    “제 아비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은 아무리 아들 잃은 어미가 내뱉었다고 하더라도 여덟 살 먹은 여자아이가 친할머니한테 듣기엔 너무 가혹한 저주였다. 그 한마디는 60년이 넘은 지금도 예리한 칼날로 이희자(72)씨의 가슴을 후벼 판다. 아버지가 강제징용됐을 때 이씨는 생후 13개월밖에 안된 갓난아기였다. 지금도 이씨는 아버지 얼굴조차 모른다. 1989년이 돼서야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에 참여하면서 바닷가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아버지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그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이자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의 산증인이 됐다. 이 대표는 강화도가 고향이다. 아버지 이사현씨는 23세이던 1944년 강제징용됐다. 편지는 딱 한 번 왔다. 외삼촌이 기억하는 편지 내용은 이랬다. ‘전쟁 중이고 부대가 계속 이동 중이다. 이 편지 발신지로 답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나중에 다시 편지하면 그곳으로 답장을 보내라.’ 발신지는 중국이었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죽었다는 통지서가 없으니 말 그대로 행방불명이었다. 어머니와 이 대표 모두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도 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징용 가던 날 어머니는 친정에 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안고 처가로 가서 어머니를 2년만 보살펴 달라며 맡겼다고 합니다. 시댁살이 고생할까 봐, 딸이라고 구박받을까 봐 그랬다고 해요. 그때부터 외갓집에서 살았습니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랐겠죠. 어머니는 친정에 갈 필요도 없었고 나는 대를 이을 맏이라고 할머니한테 사랑받으며 컸겠죠. 전쟁이 나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는 희망을 버리게 되니까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친가에 가서 돌아와서 살게 해 달라고 하니 할머니가 막 욕을 하더라고요. 아버지와 지내던 방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죠.” 이 대표는 나중에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을 많이 만나면서 자기만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아니란 걸 알았다고 한다. 남편을 잃었으면 ‘제 서방 잡아먹은 년’이란 소릴 듣고, 아버지를 잃었으면 ‘제 아비 잡아먹은 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대표가 나중에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머니를 다시 찾아갔을 때도 할머니는 입학원서에 보호자 도장을 찍어 주길 거부했다. 결국 이 대표는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됐다. 안으로만 삭이던 상처를 이 대표는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치유할 수 있었다. 1989년 7월부터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엔 운동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자식으로서 아버지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넘겨준 사망자명부를 뒤지고 뒤지다 1992년 드디어 아버지 이름과 주소지 기록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이 대표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명부에는 ‘중국 광시성 전현 181부대 101중대 181병동에서 1945년 6월 11일 전병사(戰病死)’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1997년 두 번째 기록을 찾았다. 아버지 위패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온몸의 피가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죠.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들었던 험한 말이 떠올랐어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면서 유족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게 기가 막혔습니다.” 다른 유족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 일은 이 대표가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대표로선 평생 이뤄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오랫동안 일본을 상대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국보다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위한 운동을 하는 일본인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받은 도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 있는 일본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 스스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한다”고 표현했다. 가령 ‘재판지원회’라는 단체 회원들은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할 때 안내와 통역은 물론 숙식까지 도맡아 처리해 주면서도 자신들이 한국에 올 때는 무조건 모든 비용을 자비로 처리한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정부한테 더 화가 납니다.” 이 대표는 “한·일협정 때 받은 돈으로 경제발전했는데, 강제동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이나 이들이 겪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설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아 냈다. 그는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사생활 보호라느니 하면서 핑계만 댄다”며 “강제동원 기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위원회가 기록을 찾아 줬느냐 하면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오는 6월 종합보고서도 없이 활동을 마칠 예정이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미완의 친일청산 논란

    [격동의 한·일 70년] 미완의 친일청산 논란

    을미(乙未)년 새해는 광복 70주년이자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이 몇 차례 바뀌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지만 한국과 일본은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로 남아 있다. 독도와 위안부, 역사 교과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가 ‘강한 일본’을 내세우며 보수 행보를 이어가면서 경색된 두 나라 관계는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동북아에서 미국과의 패권 다툼이 가속화하면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친일 청산 논란을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역사교육, 문화재 반환 문제 등 양국 간 남아 있는 현안들을 짚어보고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두 나라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본다. 2012년 12월 4일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최의 첫 대선후보 TV토론회장.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고 선언했다. 이 후보는 박 후보를 겨냥해 “충성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라며 당시 박 후보 부친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녀는 “뿌리는 속일 수 없다. 친일과 독재의 후예인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날치기 통과해서 경제주권을 팔아먹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또 “유신독재 시대의 퍼스트레이디가 청와대에 가면 여왕이 된다”면서 “여성대통령이 필요하지만 불통·오만·독선의 여왕은 대한민국에 필요없다”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이어갔다. 이 후보의 발언은 진보 진영의 가슴을 시원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보수층의 결집을 도와 결과적으로 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친일 청산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대선 TV토론회에서조차 친일 문제를 부각시켜 표를 얻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선대가 저지른 잘못을 들춰내 후손에게 책임을 묻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경향은 최근 KBS이사장에 임명된 이인호 전 서울대 명예교수의 친일 발언 논란에서도 두드러졌다. 이 같은 친일행적 논란은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광복 후 설립된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는 모두 688건의 친일파 인사 사건을 다뤄 599건을 특별검찰부로 송치했다. 기소는 221건에 불과했고 실제 구형은 41건이었다. 그나마 41건 역시 무죄 또는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실제로 친일파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마녀사냥식 과거사 들추기가 과연 생산적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과거사 진실을 밝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은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장춘’식 해법을 설정해 보자는 의견도 나온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육종학자인 우장춘 박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앞장선 매국노 우범선의 아들이다. 우장춘은 일본인 어머니의 손에서 성장한 뒤 1950년 3월 귀국해 1955년 숨을 거둘 때까지 육종학에 몰두했다. 그는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자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우장춘에게 부친의 매국 행각을 놓고 문제 삼은 사람은 없었다. 부산 동래구가 1999년 우장춘기념관을 건립할 때도 반대 여론은 없다시피 했다. 작곡가 홍난파의 경우도 비슷한 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홍난파의 후학들은 1년 6개월간 격렬한 사실관계 논쟁을 벌여 홍난파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음악적 천재성이 훼손되지 않는 연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친일 청산 문제는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확정하면서도 관용을 이뤄내는지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한국의 과거사 문제는 다른 나라보다 매우 복잡한 상황”이라며 “과거 청산의 중점은 진실 규명과 피해자 구제로 이를 위해선 후속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광복 70년 신년기획] “日에 호감·관심 있다” 13% 불과… 한·일 관계 미래도 부정적

    [광복 70년 신년기획] “日에 호감·관심 있다” 13% 불과… 한·일 관계 미래도 부정적

    올해로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은 지 50주년이 됐지만 한국 국민들은 양국 관계의 과거·현재·미래를 모두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이 이토록 싸늘해진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때문이었다. 서울신문과 에이스리서치는 먼저 광복 이후의 한·일 관계를 평가해 달라고 물었다. 이에 ‘별로 원만하지 않았다’가 24.5%로 가장 많았고, ‘전혀 원만하지 않았다’도 18.1%나 됐다. 반면 ‘매우 원만했다’는 1.9%, ‘대체로 원만했다’는 22.8%에 머물렀다. 부정적 의견이 42.6%로 긍정적 의견 24.7%보다 훨씬 많았다. 그동안의 한·일 관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다 보니 현재 느끼고 있는 일본에 대한 관심과 호감도가 떨어졌다. ‘호감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비율(36.9%)이 ‘호감도 있고 관심도 있다’는 비율(13.0%)보다 3배 가까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비호감 의견(69.5%)이 호감 의견(25.9%)보다 43.6% 포인트 높았고, 무관심 의견(49.8%)이 관심 의견(45.6%)보다 많았다. ‘호감이 있다’는 응답은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35.6%), 연령별로는 50대(30.3%)에서 그나마 많았고, ‘호감이 없다’는 응답은 대전·충남(73.6%)과 30대(70.0%)에서 강하게 형성됐다. 호감이 없는 이유는 ‘일본 사회 일부에서의 우경화 움직임 때문에(46.2%)’가 가장 많았고, ‘과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때문에(33.1%)’가 뒤를 이었다. ‘일본이나 일본 문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는 11.8%였다. 호감을 갖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이웃나라로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라고 답한 이가 30.4%로 많았고, ‘근면성실함, 친절함 등의 미덕을 갖춘 일본인을 좋아하기 때문에(27.2%)’라는 응답이 근소한 차로 뒤를 이었다. ‘음식이나 노래 등 일본 문화가 좋아서’ 호감이 있다는 응답자는 18.4%였다. 일본에 호감을 가진 이가 적은 만큼 앞으로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일본과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앞으로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결과 ‘다른 나라와 똑같이 전략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가 37.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인접국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정도면 충분하다’라는 의견이 37.2%였다. ‘가장 사이가 좋은 우호국이어야 한다’는 의견은 불과 7.4%로 ‘우호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12.7)보다도 적었다.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위안부,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 해결(57.1%)’이었다. 다음으로 ‘국가나 정치 차원의 관계 개선 노력(21.4%)’, ‘민간 교류 활성화(8.1%)’, ‘경제교류 활성화(6.8%)’ 등이 꼽혔다. 과거사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일 관계가 개선되기 힘들며, 일본의 태도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국인도 마음의 문을 열 것이라는 뜻이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日경찰 작성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 명부’ 첫 공개

    일본 경찰이 작성한 사할린 조선인 강제징용자 명부가 최초로 공개됐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올해 러시아 국립사할린문서보관소 등을 방문한 방일권 한국외대 교수로부터 최근 조선인 강제징용자 명단이 담긴 7종의 문서를 입수했다고 21일 밝혔다. ‘행정수사서류철’, ‘요시찰인 명부’, ‘시리토리광산 회사직원 명부’ 등 해당 문서에는 일본 경찰이 직접 작성한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4200여명, 탈출한 조선인 2000여명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 용모와 특징 등 인적사항 등이 담겼다. 위원회는 사할린 현지에서 자료 11만 건을 열람했고, 이 중 조선인과 관련된 자료 1만 건을 복사하거나 필사해 입수했다고 설명했다. 문서에는 한위건 선생 등 독립운동가 1200여명이 사할린에 갔을지도 모르니 소재를 확인해 달라는 일본 경찰의 요청도 포함됐다. 위원회 관계자는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3만여명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일본이 작성한 공식 명부가 공개되는 것은 최초”라며 “지금까지 강제 징용 증거가 없어 지원금을 신청하지 못한 유족들에게 중요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사할린 징용 조선인들이 일반적으로 순응적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이번 기록을 통해 2000여명이나 탈출에 성공하는 등 투쟁했던 사실이 밝혀졌다”고 덧붙였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예술품 1만여점 기증… “미술가 꿈 다른 형태로 발현”

    예술품 1만여점 기증… “미술가 꿈 다른 형태로 발현”

    “저는 우리 미술품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가슴이 뜁니다. 재일교포의 삶과 관련된 수많은 미술품은 역사요, 문화재 아닙니까.” 평생 피와 땀으로 모은 미술품 1만여점을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전국 10여곳의 국공립미술관과 박물관, 대학에 기증한 하정웅(75)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이 첫 자서전 ‘날마다 한 걸음’을 냈다. 재일교포 2세인 하 이사장은 22일 서울 중구의 한 음식점에서 간담회를 열고 국내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메세나 운동가로 살게 된 인연을 공개했다. 1939년 일본 히가사오사카에서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공업 명문인 아키타공고를 졸업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되지 않았다. 이에 무작정 도쿄행 기차에 올라 상경한 뒤 전기 수리와 가전제품 판매 등으로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 하 이사장은 “고 전화황 화백의 ‘미륵보살’에 반해 미술작품을 처음 산 것이 ‘하정웅 컬렉션’이 형성된 계기였다”며 “어린 시절 못다 이룬 미술가에 대한 꿈을 다른 형태로 발현시켰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금도 도쿄의 50년 넘은 허름한 개인 주택에 살며 비행기는 늘 이코노미석만 고집한다. 하지만 그가 모은 미술품은 피카소, 샤갈, 뭉크, 앤디 워홀 등 20세기 거장의 작품을 비롯해 이우환, 전화황, 송영옥, 곽인식 등 주로 일본에서 활동한 우리나라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부산시립미술관, 숙명여대 등 국내 기관에 매년 수십에서 수백점씩 기증됐다. 최근 광주시립미술관은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개관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다. “지금까지 수집한 작품은 단 한 점도 돈을 받고 판 적이 없습니다. 1992년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소식을 듣고 이듬해 212점을 기증한 것이 시작이었죠.” 그는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억울하게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유족 없는 무주고혼을 달래기 위해 아키타현과 사이타마현에 위령탑을 세우기도 했다. 하 이사장은 “내 컬렉션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기도와 위령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서울광장] “가만히 있으라” vs “잊지 않겠다”/문소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가만히 있으라” vs “잊지 않겠다”/문소영 논설위원

    서울 광화문에는 앙상하게 뼈와 가죽만 남은 김영오씨가 광복절인 8·15까지 33일째 단식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를 타고 학교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유민 학생의 아빠다. 그의 가슴에는 ‘세월호 유가족 특별법 제정 단식 33일’이, 등에는 ‘대통령님! 힘없는 아빠 쓰러져 죽거든 사랑하는 유민이 곁에 묻어주세요’라는 글귀가 달렸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4개월이 되는 “8월 16일까지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관을 짜놓고 여기서 쓰러져 죽을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런 소식에 미국 학자 놈 촘스키는 지난 14일 그에게 편지를 보내 “당신의 고귀한 행동이 당연히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수사권·기소권을 가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그가 목숨 걸고 단식하지만, 주요 뉴스로 다뤄지지 않는다. 왜일까. 여야 간 이견도 있지만,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할 여당 의원들이 7·30 재·보선 이후 민심 반영에 관심이 없는 탓으로 본다. 광화문에서 농성과 단식을 하는 유가족에게 “노숙자 같다”거나 “제대로 단식했으면 벌써 탈이 났을 것”이라며 모욕을 줬다. 유족들에게 “당신들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치고,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규정하며 “국가유공자보다 더 많이 보상받으려 한다”는 말도 퍼뜨렸다. 유가족의 단식농성에 박근혜 대통령도 무심해 보였다. “유병언을 잡으라”고 3차례나 검경합동수사본부를 압박했던 박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 제정은 지난 5월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언급한 이후 침묵했다. 3개월 지난 11일에서야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냐”고 호통쳤지만, 유가족의 반발로 여야 간 세월호 특별법 합의가 무산돼 질타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비난도 받는 한국 대통령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유병언 수사 헛발질과 윤 일병 폭행살인치사와 관련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호통친 지 7시간 만에 경찰청장과 육참총장이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나 말이다. 만약 박 대통령이 유가족이 환호할 만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신호를 여당에 보냈더라면, 입법권이 국회의 일이지만 여당은 결코 그 신호를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후 지난 4월 말 방한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그의 관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검은색 양복을 입어 세월호 참사를 위로한다는 인상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화사한 하늘색 상의를 입어 대조를 이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방한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희생자를 기억하고 있다”고 위로했고, 15일 대전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서는 왼쪽 가슴에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배지를 달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 천막 농성장 강제철거가 거론됐을 때 강우일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은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사랑의 시복식을 열 수 없다”고 옹호했고, 농성장 고수를 외치던 강경한 세월호 가족은 2개동을 제외하고 나머지 천막을 모두 철거하겠다고 화답했다. 권력 있는 자가 고통받는 자를 관용하면 그 관용은 소통의 시작이 된다는 것을 알리는 화답이었다. 어제는 69회째 광복절이었다. 일제 때 고통받았던 한국인 위안부와 강제징용자들은 69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사과와 배상은 끝났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한국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인 우리는 그 태도가 몰염치하고 뻔뻔하다고 느낀다. 때문에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도 아베 정부와의 정상회담도 거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측면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정부를 돌아보면, 피해자가 충분히 납득하고 용서할 때까지 정부가 최선을 다해야 ‘화답’이 가능하다. 유가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세월호 유가족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것이 세월호 참사가 교통사고라고 치더라도, 사고 이후 정부가 잘못 대처해 304명의 대형 인명피해로 키운 데 대한 속죄가 될 것이다. symun@seoul.co.kr
  • 정홍원 총리 순국선열 추모… 서대문형무소·독립관 참관

    정홍원 국무총리는 15일 제69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 서대문구 독립공원을 방문해 순국선열의 위패가 봉안된 독립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참관했다. 정 총리는 이날 오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전시실과 옥사를 둘러본 뒤 순국선열 2835명의 위패가 봉안된 위패봉안소에서 헌화와 분향했다. 그는 “많은 애국지사가 고초를 겪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순국선열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애국심을 함양하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 총리는 항일 독립운동에 힘쓴 애국지사 김명수(88) 선생의 서울 잠실 자택도 방문했다. 김 선생은 황해도 옹진 출생으로 1940년대 일본군에 강제징용된 학생들에게 임시정부 방송을 듣게 하고 군가 대신 애국가를 부르게 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다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김 선생의 공을 인정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정 총리는 김 선생 자택에서 “국가유공자 보상금, 참전 및 무공명예수당을 단계적으로 인상하고, 고령의 국가유공자에 대한 맞춤형 의료·요양 체계 구축 등 보훈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며 “국가유공자들의 훌륭한 이야기들을 널리 알리고 그 속에 담긴 고귀한 뜻을 되살려 후손들의 나라 사랑 의식을 확고히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아베 유엔답변서도 위안부 기술 ‘퇴보’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이 올해 유엔에 제출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입장이 과거 정부보다 후퇴했다는 주장이 일본 시민단체에 의해 10일 제기됐다. 일본의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은 오는 2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의 111차 회기를 위해 최근 유엔에 제출한 대체 보고서에서 아베 정부와 2012년 노다 요시히코 민주당 내각이 낸 위안부 관련 기술을 비교해 이같이 밝혔다. 일본이 자국에 대한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의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이행상황 점검에 앞서 지난 3월 제출한 답변서에는 “이전 위안부들을 포함한 개인의 (배상) 청구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양자 조약, 협정 등을 통해 법적으로 해결됐다”고 밝혀 노다 내각의 보고서에는 없던 ‘위안부들을 포함한 개인’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추가됐다. 이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사할린 동포 등에 대한 배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는 우리 입장과 배치된다. 또 노다 내각의 보고서가 “일본은 과거 식민 지배와 침략이 많은 국가의 국민에게 심대한 피해와 고통을 야기한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밝혔지만, 일본의 이번 보고서에는 ‘식민 지배와 침략’이란 표현을 빼고 ‘과거 특정 기간에’라고만 기술됐다고 WAM은 주장했다. 위원회는 앞서 2008년 일본의 5차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 견해를 밝히며 일본의 법적 책임 수용과 사과를 촉구한 바 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법원, 객관적 자료 없는 일제 강제징용 이웃 목격담으로 피해 인정

    이웃 목격담만으로 일제 강제 징용 피해 사실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부장 이승한)는 김모씨 유족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를 상대로 낸 위로금 지급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4일 밝혔다. 유족에 따르면 1904년에 태어난 김씨는 1940년 4월 일본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중노동을 하다 크게 다쳤다. 노동력을 잃은 김씨는 1943년 4월 고향으로 돌려보내졌다. 김씨는 귀국 뒤에도 후유증으로 농사일을 하지 못하고 병치레를 하다가 53세에 사망했다. 유족은 김씨가 강제 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나 위로금 지급이 거부되자 소송을 냈다. 위원회는 김씨가 강제 징용 때 다쳤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고향 이웃들의 목격담을 근거로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웃들이 각자 작성한 보증서에 의하면 고인은 일제에 강제 동원돼 심한 노역을 했고 일본인 감독자들로부터 구타당했으며 귀국 뒤에도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가 패망이 임박하지 않았던 때 고인을 귀국시킨 것은 노동력을 상당 부분 잃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며 “사망 당시 고령이 아니었던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NOSSA! 월드컵] 알제리에 축구란

    아프리카 팀은 조직력이 약하다는 편견이 있다. 여기엔 선수들이 국가대표로서의 책임감보다 개인의 영달을 중요하게 여기리란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일부 국내 팬은 홍명보호와 오는 23일 대회 조별리그 H조 2차전을 벌이는 알제리도 팀 전술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빅클럽 이적의 기회를 노리는 선수들의 이기적인 플레이로 자멸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접는 게 좋겠다. 아프리카 팀 다수가 그렇지만 특히 알제리에 축구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고, 또 이번 대회에 나선 그들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알제리에 축구는 독립전쟁의 일부인 동시에 아픈 역사의 상처를 씻어 낸 소독약이다. 124년의 프랑스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1954년부터 시작된 8년 전쟁으로 무려 150만명의 알제리인이 스러졌다. 이 참혹한 전쟁이 한창이던 1958년, 스웨덴월드컵을 두 달 앞두고 프랑스 대표팀의 알제리계 선수 2명이 탈출해 결성한 것이 현재 알제리축구협회의 전신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축구팀’이다. 세계 각국에 알제리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음은 물론이다. 독립 이후 스스로 프랑스에 부역한 사람뿐 아니라 강제징용됐던 이들까지 15만명을 민족반역죄로 처형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 가운데 일부가 프랑스로 탈출했는데, 알제리계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의 아버지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조국에 배척당하고, 프랑스에서도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1998년 프랑스의 첫 월드컵 우승을 이끈 지단이 프랑스의 영웅이 되고, 알제리는 자신들을 지배했던 프랑스가 떠받드는 지단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불행한 역사가 잉태한 이민자들을 끌어안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알제리 대표팀에는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중국적 선수가 12명에 이른다. 프랑스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카림 벤제마 역시 이민자의 자손이다. 알제리는 월드컵대회에서 조별리그 3차전을 한날한시에 치르게 만든 사건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독립한 지 20년 만인 1982년 스페인에서 처음 월드컵 본선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알제리는 서독을 2-1로 꺾는 이변을 연출한 뒤 오스트리아에 무릎 꿇었지만, 3차전에서 칠레를 3-2로 꺾었다. 마지막 경기에서 서독이 오스트리아를 두 골 차 이상으로 이기면 알제리는 서독과 함께 조별리그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독은 선제골을 넣은 뒤 오스트리아와 공을 돌리며 노닥거린 끝에 1-0으로 끝났다. 이 바람에 알제리는 억울하게 탈락했다. 축구사를 더럽힌 이 사건 때문에 국제축구연맹(FIFA)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부터 조별리그 최종전을 동시간대에 진행하는 규정을 도입했다. 그러나 정작 알제리는 멕시코대회와 2010년 남아공대회에서 조별리그 통과는커녕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다. 32년 동안 쌓인 본선 승리와 16강 진출이란 한을 풀겠다는 것이 이번 대회에 참가한 알제리 전사들의 목표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 길의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상대가 한국이다. 알제리는 분명 그라운드에서 자기들끼리 치고받은 카메룬과 다른 축구를 할 것이다. 알제리와 맞서는 우리 선수들의 투혼을 응원하면서 그들의 한과 눈물, 슬픈 역사도 돌아봤으면 한다. 포스두이구아수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사할린 징용 피해자 후손 60년 만에 조국을 되찾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에 끌려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무국적 상태로 60년을 살아온 여성이 소송을 통해 대한민국 국적을 확인받았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후손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국적 확인 소송에 나서 승소한 것은 처음이다. 앞으로 무국적 동포들의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부장 박연욱)는 김모(60)씨가 “대한민국 국적을 확인해 달라”며 우리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20일 밝혔다. 김씨 부모는 일제강점기 말 국가총동원 명령에 의해 각자 러시아 사할린으로 끌려갔다가 결혼해 김씨를 낳았다. 이들은 광복 이후에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무국적 상태로 현지에서 사망했다. 사할린에서 무국적자로 살아온 김씨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사할린 희망캠페인단’의 조력을 받아 2012년 8월에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김씨의 러시아 신분증명서에 무국적자라는 내용이 분명히 기재돼 있으며, 김씨 부모의 사망증명서에는 양친이 모두 경상남도에서 출생해 사할린에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면서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김씨는 사할린으로 강제 이주된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무국적자로 거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일제 징용 사할린 동포 1세들 희망자 190명 내년 귀국 완료…한·일, 2세 귀국은 재논의해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못한 한인 1세들을 국내로 귀국시키거나 일시 방문하도록 하는 한·일 적십자사의 ‘영주귀국 사업’이 내년에 일단락된다. 대한적십자사는 양국 관계자들이 지난달 26일에 만나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1세 희망자 190명에 대해 논의하고 내년까지 모두 영주귀국시키도록 합의했다고 2일 밝혔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고국에 돌아오고 싶어 하는 1세 한인들은 희망자에 한해 2015년까지 모두 입국하지만 2세들의 영주귀국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면서 “앞으로 이 문제는 양국이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TV 하이라이트]

    ■리얼체험 세상을 품다(KBS1 밤 10시 50분) 배우 조연우가 영하 30도 극한에서 펼쳐지는 찬란한 오로라를 만나기 위해 눈의 나라,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떠났다. 원주민 족장이 사용하던 황금 칼에서 유래했다는 옐로나이프는 세계에서 오로라를 관측하기에 가장 좋은 마을로, 한 해 무려 240차례의 오로라가 나타나는 명실상부한 오로라 명소다. 과연 조연우는 자신의 평생 꿈인 오로라와 마주할 수 있을까. ■개과천선(MBC 밤 10시) 법정 앞에 가득한 기자들 사이로 차를 탄 석주와 변호사 일행이 도착한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민사소송이 벌어지는 법정 안에서 석주는 일본 기업의 편에서 변호를 펼친다. 지윤은 친구 미리의 결혼식장에서 전지원과 마주치고,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미리의 부탁에 따라 석주에게 접근해 그가 결혼식 시작 전에 식장을 빠져나가게 하려 고군분투한다. ■내 마음의 크레파스(SBS 오후 5시 35분) 초등학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110㎏의 체격을 가진 영민이는 현재 씨름을 하고 있다. 영민이는 씨름계에서 스카우트 영순위다. 하지만 천하무적 같은 영민이에게도 남모를 아픔이 있다. 어렸을 적 무릎 성장판 이상으로 다리가 휘어져 수술을 받은 뒤 재활 중이어서 고된 훈련을 받으면 얼굴이 땀범벅이 되기 일쑤다.
  • [日 교과서 도발] 위안부도 강제징용도 “책임없음”… 또 반성없이 궤변만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술을 대폭 늘린 외교청서를 4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고 일본은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해 피해자 구제에 노력해 왔다는 등 일방적인 주장을 되풀이했다. 외교청서는 일본의 외교활동 전망과 국제정세의 추이를 정리한 것으로, 1957년부터 매년 발행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외교청서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은 성의를 갖고 노력해 왔다”면서 1995년 설립한 아시아여성기금 등을 예로 들었다. 이어 “그러나 한국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일본에 추가적인 대처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위안부 문제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일본의 입장과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해 이해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지난해 외교청서에서 “한·일 간 과거에 관한 문제는 위안부 문제, 한반도 출신의 유골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고 일본은 진지하게 노력해 왔다”며 짧은 언급만 한 것에 비해 기술의 양이 상당히 늘어났다. 지난해 2월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위안부 문제의 우선 해결을 내세우며 아베 신조 정권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일본 정부의 입장을 내세운 것으로 풀이된다. 외교총서는 또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의거, 앞으로도 적절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해서도 일본의 책임이 없음을 주장했다. 한편 독도에 대해서도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北 “북일회담서 위안부 배상 거론”

    북한이 일본과 국장급 공식회담에서 일제 강점기 군 위안부 배상 문제를 거론할 계획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서세평 유엔 제네바본부 북한 대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일본에 전쟁 범죄에 대한 배상을 요구한다”면서 “840만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와 20만명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고 밝혔다. 서 대사는 일본 측 의제인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해결됐다고 본다. 납치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기존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서 대사는 “몇몇 이슈에 대해 다른 의견들이 있으며, 일부는 긍정적이고 일부는 부정적이다”면서 “이번 회담이 북한과 일본 양국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길 바란다. 그것이 이런 대화를 하는 이유다”고 말했다. 일본은 자국민 17명을 북한이 납치했다고 규정하고 귀환한 5명을 제외한 12명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13명만 납치했으며, 8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맞서고 있다. 북·일 국장급 공식회담은 2012년 12월 이후 1년 넘게 중단됐으며, 오는 30~3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中 징용 피해자, 日정부 상대 첫 소송

    중국에서 세계 2차대전 중 강제징용 피해 배상과 관련해 자국 내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첫 소송이 제기됐다. 신화통신은 6일 중국의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정부 등을 상대로 중국 법원에 소송을 냈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중국 강제징용 피해자 3명과 유족 9명은 이날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시 인민법원에 일본정부와 일본코크스공업주식회사(전 미쓰이광산), 미쓰비시머티어리얼(전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일본 정부와 이들 기업에 중국 및 일본의 주요 매체를 통한 공개 사과와 함께 총 180만 위안(약 3억 1000만원)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지난달 26일에도 2명의 중국 강제징용 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 37명이 베이징 제1중급 인민법원에 같은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바 있지만 당시에는 일본 기업들만을 상대로 한 소송이었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中 징용 피해자·유가족 37명 日기업 상대 손배 청구소송

    일제에 강제징용된 중국인 피해자와 유가족이 처음으로 자국 법원에 해당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한 손배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모한장(牟漢章)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피해자 유가족 37명은 26일 베이징 제1중급인민법원에 일본코크스공업주식회사(전 미쓰이광산), 미쓰비시 머티어리얼(전 미쓰비시광업주식회사) 등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들은 소장에서 징용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들은 인민일보 등 17개 신문에 중국어와 일본어로 사과문을 게재하고 한 사람당 100만 위안(약 1억 7400만원)씩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중 징용 피해를 당한 중국인은 총 3만 8953명으로 35개 일본 기업에서 일했다. 징용자 중 최연소자는 11세, 최고령자는 78세다. 강제징용 기간 6830명이 사망하고 3만여명이 귀국했지만, 일부는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중국 뉴스 포털인 국제재선(國際在線)은 법원이 7일 이내에 소송을 받아들일지를 결정한다며 “만약 소송을 받아들이면 (원고 측) 승소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분석했다. 한국에서는 이미 한국인 징용 피해와 관련해 일본 대기업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들이 나왔다는 점을 거론하며 향후 한·중 피해자 간의 공조 가능성도 중국 언론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이번 소송과 관련, 1972년 양국의 공동성명으로 중국이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정부 간 교섭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1995년부터 일본 법원을 상대로 14건의 관련 소송을 냈으나 최종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 中, 日기업에 강제징용 집단소송 검토

    중일전쟁(1937~1945년) 당시 일본 기업에 의해 강제 징용된 중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중국 내에서 집단소송을 검토하고 있다고 교도통신이 16일 보도했다. 한국 법원에서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이 잇따라 나온 데 이어 중국에서도 소송이 봇물을 이루면 한국·중국과의 관계에서 일본이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통신은 분석했다. 보도에 따르면 소송은 베이징(北京), 산둥성(山東省), 허베이성(河北省) 등의 법원에 제기될 예정이다. 대상 기업은 미쓰비시 머티리얼(옛 미쓰비시광업)이지만 약 20개 기업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일본 외무성의 보고서 등에 따르면 강제 징용된 중국인은 미쓰비시 머티리얼만 37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고들은 ▲강제 징용 인정과 사죄 ▲모든 피해자에 대한 배상 ▲위령·기념비 일본 내 건립 등을 요청할 방침이다. 이 소송에는 ‘중화 전국 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와 중국 사회과학원, 베이징대 연구자들도 관여하고 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전시 중국인 강제 징용과 관련해 일본에서 열린 재판에서는 피해자들의 패소가 확정된 바 있지만 중국 내에선 본격적인 소송이 제기되지 않았다.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중·일 관계와 경제 발전에 대한 영향을 우려해 소송을 막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에 배상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대립과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중·일 관계가 악화된 것을 계기로 집단 소송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오는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까지 제소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이지만 결국 시진핑(習近平) 지도부의 제소 용인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이번 소송을 법원이 수리할 경우 중국 원고가 승소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시 지도부가 민간의 대일 배상청구를 용인한 것을 의미하며 유사한 소송이 뒤따를 것이라고 통신은 전망했다. 도쿄 김민희 특파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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