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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강제징용 피해자 일본 기업 보상 길 열리길

    일본 굴지의 대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태평양전쟁 기간 중 강제노역에 동원됐던 조선 근로정신대 할머니 문제에 대해 협상 의사를 표했다고 한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미쓰비시중공업 측이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협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공문을 보내 왔다고 밝혔다. 김칫국부터 마실 필요는 없지만 큰 진전이다. 소송 제기 이후 12년간 외롭게 싸운 한국인 할머니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또 일본인 회원 1100명으로 구성된 나고야 소송 지원모임에도 격려의 뜻을 전한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장장 24년간 할머니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왔다. 문제해결을 촉구한 13만 4162명의 서명도 든든한 울타리가 됐다. 비록 양국 정부가 외면하고 일본 최고재판소에서도 기각됐지만,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시민모임 대표 김희용 목사의 말처럼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는 시발점’의 막이 오른 것이다. 협상은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 민간기업 차원의 사죄와 보상에 관한 첫 단추로 작용할 것이다. 결과에 따라 대상자가 확대될 수도 있다.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당시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개인청구권의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노동자·군인·군무원 등으로 강제동원됐던 한국인 피해자 103만명은 물론 통계에 잡히지 않는 종군 위안부 등 최고 800만명에게 각종 보상의 길이 열린다. 조사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당시 한국인을 강제동원했던 일본 기업은 모두 2679곳이었다. 최대 기업이었던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해 미쓰이, 스미토모 등 전범 기업들이다. 혹여 지난해 일본 정부가 근로정신대 할머니에게 연금탈퇴 수당으로 지급한 ‘99엔 사건’처럼 협상하는 시늉에 그칠지도 모른다. 이를 막으려면 범국민적인 성원과 소비자 차원의 강력한 압박이 필요하다.
  • [사설] 한·일 근현대사 왜곡도 바로잡아야

    역사의 기록은 승자에 치우쳤음을 세계사는 역력히 보여준다. 그런 차원에서 한·일 고대사 왜곡의 상징으로 통했던 임나일본부설의 폐기는 획기적이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최종보고서의 내용이다.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한·일 정상이 약속해, 양국 사학자들이 도출한 공식적 사안인 것이다. 늦게나마 허구의 역사를 바로잡은 역사 교정의 인식은 반기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역사를 고쳐 현실로 옮기겠다는 실천의지는 멀기만 한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 임나일본부설은 4세기 중엽∼6세기 중엽 200년간 일본의 야마토(大和)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한반도 지배설이다. 백제·신라·가야를 정복해 주물렀고 가야에 둔 일본부(임나일본부)가 그 통치의 핵심이란 주장이다. 임진왜란기 중국(明)을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이나, 한·일강제병합의 근저에 임나일본부설을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양식 있는 학자·시민들이 끊임없이 허구임을 주장해 왔으나 일본 정부와 주류 사학계는 줄기차게 밀어붙였던 터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학자들이, 그것도 정상 간 약속에 따라 국가 간 차원에서 정면으로 뒤집은 인식은 환영할 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보편적 통사(通史)에 대한 현실적 거부이다.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인정한 마당에 근·현대사의 잘못은 왜 바로잡지 못하느냐는 의구와 불만이 크다. 양국 학자들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을사늑약과 강제병합조약, 한일협정, 식민지 강제동원과 수탈에서 일본 측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일강제병합조약만 하더라도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이고 한반도 식민지화는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태평양전쟁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을 놓고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해결됐고 지금의 조약 개정 주장은 정치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일본 측 학자들은 참고수준이나마 일본 교과서의 임나일본부 삭제를 권고키로 했다고 한다. 학자만의 협의에 머물 게 아니라 일본 정상의 약속대로 국격에 맞는 실행이 따라야 할 것이다. 도처에서 빗나간 과거사를 들추고 고발하는 증거와 사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말만의 청산은 이제 어디서도 통할 수 없다는 역사의 뼈저린 증언을 일본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한·일100년 대기획] 아물지 않는 전쟁 상흔

    [한·일100년 대기획] 아물지 않는 전쟁 상흔

    한·일 관계에서 원자폭탄 피해자를 비롯해 위안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모두에게 잊혀져 가고 있지만 잊을 수 없는 역사의 과제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는 살아남은 자와 그들의 죄 없는 자녀들 몫이 됐다. 피해자들은 정부의 무관심과 일본의 외면, 사회의 편견등 겹겹의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 광복과 종전 6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피해자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대를 잇는 아픔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짚어 보고, 앞으로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을 살펴본다. ●국내환우 150여명 10세이전 사망 한국원폭2세 환우회장 한정순(52)씨는 넓적다리에 혈액순환 장애로 인해 인공관절 수술을 두 번이나 했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다. 20여년간 섬유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팔 연골에 이상이 생겨 이젠 직업을 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 몸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은 뇌성마비를 갖고 태어난 아들이다. 올해 스물여덟 살인 아들은 1급장애로 간단한 대화정도만 가능한 상태. 그는 “엄마 피를 받아 저렇게 아픈가 싶어 마음이 항상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립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같은 제 몸 하나조차 움직이기가 힘든데 아들까지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병을….”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부모는 생계 때문에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가 각각 19세와 28세가 되던 해에 원폭 피해를 입었다. 이후 태어난 그의 오빠 2명은 심근경색을 앓고 있고, 언니 둘은 피부병과 다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아들과 본인의 병으로 남편과 불화가 잦았던 한씨는 이혼한 뒤 아픈 몸을 이끌고 간병인 일을 하며 근근이 지내고 있다. ●빈혈 발생확률 일반인의 88배 원인 모를 병마에 ‘대 이은 고통’을 겪는 것은 비단 한씨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 정부와의 기나긴 싸움 끝에 어렵게 원호수당을 받고 있는 원폭피해 1세대들과 달리 2, 3세 환우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의 무관심 속에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한국원폭2세 환우회에 따르면 한씨와 같은 원폭 피해자 2~3세는 1만여명(추정)이나 된다. 이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 원폭피해 2세 1226명을 대상으로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남성의 경우 빈혈 발생확률이 일반인의 88배에 달했다. 심근경색·협심증이 81배, 우울증은 65배, 천식은 26배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원폭피해 2세 중 7.3%(300명)는 사망했고, 사망당시 연령이 10세 미만인 경우가 52.2%를 차지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심진태 합천지부장은 “일본 정부는 원폭 피해문제가 1세대에서 끝나기만을 바라고 미국이나 우리나라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상황이기 때문에 유전성 입증은 쉽지 않다. 하지만 발병률이 이렇게 높은 만큼 2세들의 의료비 지원이라도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자신이 원폭2세 환우임을 밝힌 고(故) 김형율씨도 생전의 대부분을 병실에서 보냈다. 그는 태어난 지 20일이 될 때부터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을 앓다 2005년 34세로 숨을 거뒀다. 하지만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정부에 호소해 원폭피해자들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 조사를 이끌어내고 2세 환우들의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김씨의 부친인 김봉대(74)씨는 “아직도 고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데 정부는 피해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국적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다.”고 울먹였다. ●“지원 특별법 조속통과를” 호소 원폭 피해 1세대들에 대한 지원도 민간차원의 수준에 그치고 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한국인은 7만여명. 이 가운데 2만 3000여명이 귀국했는데 3월 현재 2662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의 지원은 거의 없고, 일본이 정부차원이 아니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국내 피폭자들에게 1인당 원호수당 월 45만원가량과 연간 194만원 한도의 진료비 등을 지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1, 2세대 원폭피해자들과 시민단체 등은 ‘특별법’제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조진래 의원이 발의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경숙 한국원폭2세 환우회 사무국장은 “혹시나 누가 알까 싶어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사는 원폭 2, 3세들에게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움”이라며 신속한 법안통과를 호소했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한ㆍ일 100년 대기획] 청산되지 않은 과거

    [한ㆍ일 100년 대기획] 청산되지 않은 과거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건전한 한·일 관계에서 결코 우회할 수 없는, 치명적인 현안이다. 미래의 100년을 위한 동반자적 양국 관계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고, 우호 증진의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광복과 종전 65년이 지났지만 일본은 여전히 이를 두고 도발적인 책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의 극우 보수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반역사적 도발은 한·일 양국의 미래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로 작용한다. 독도는 우리 땅이고, 대한민국은 고조선 이래로 반만년의 역사를 지켜온 자주 국가이다. 이것이 한국인이 갖는 영토 개념이고, 역사 인식이다. 일본의 정권이나 시민단체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무시하며 도발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일제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우리가 이미 갖고 있고 역사 문제는 내정의 측면이 있는 만큼, 한국과 일본을 분쟁지역으로 두드러지게 만드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며 ‘조용한 외교’를 주장한 학자들이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만큼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는 국가적 자존심을 흔드는 문제였다. 그런데 2001년 4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의 왜곡된 역사교과서가 일본 문부성 검정을 통과하고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한 뒤 세월이 흐르면서 두 문제를 푸는 방식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독도 문제는 현대 국가의 근간인 ‘영토’ 개념을 침범한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되지만, 역사교과서 문제는 왜곡행위를 바로잡는 한편으로 양국이 대립이 아닌 화해를 모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양국은 2002년 3월 1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세웠고, 2007년 6월 2기 위원회를 운영했다. 이 위원회는 24일 최종보고서를 낼 계획이지만, 아직까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은 합의를 보지 못했다. 3기 위원회가 설립된다면 궁극적으로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관측된다. 왜곡된 내용을 담은 후소샤와 지유샤 역사교과서를 채택한 비율은 지난해 1.71%로 미미하지만, 2001년 0.039%에서 2005년 0.39% 등으로 증가세다. 새역모 등의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새역모는 지난해 4월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내놓은 데 이어 다음달 초등학교 역사 과목 격인 사회교과서 검정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사회교과서가 시중에 유통되는 즉시 분석작업을 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 안에 관련 팀을 꾸렸다. 일본이 간헐적으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내놓고, 한국은 이에 대해 반박하는 모습은 곧잘 독일의 전후처리 문제와 비교된다. 전후 패전국인 독일은 나서서 사과를 하고, 프랑스나 폴란드 등 주변국가와 공동역사교과서를 내놓았다. 반면 한·일 관계에서 화해의 손짓을 먼저 내미는 쪽은 피해국인 한국이다. 한국은 1998년 일본문화 개방이라는 결단을 내렸고, 최근 양국의 동반자적 관계 설정에 적극적인 것도 우리 측이다. 때때로 한국 측 대일 협상 대상자를 상대로 ‘지일’(知日)이라든지 ‘친일’(親日) 논란이 나올 정도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이명찬 연구위원은 “역사문제는 존재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말했다. 2차세계대전의 전범과 이후의 경제성장을 이룬 원로층이 동일인인 일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이들의 후손인 일본 지도층이 ‘주인공이 되지 못했거나 인륜을 저버린 행위를 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조부를 욕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한 사실을 깨닫고 평생 자기부정을 하며 떠돌게 된 것처럼, 아직도 ‘천황’체제를 유지시키고 있는 일본이 스스로의 죄과를 인정하지 못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런 일본의 집단의식은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무관심에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일본의 가와바타 다쓰오 문부과학상이 “독도는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하는 등 최근까지 일본 관료들의 망언이 이어질 때마다 한국인들이 규탄하는 반면, 일본인들 중에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는 소수이다. 전후 미국 중심의 외교관계에만 치중해 온 일본의 특징이자 한계로 지적되는 현상이다. 지금까지는 한국 정부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망언에 대해 적절한 대응기술을 습득했다는 평가이다.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독도 망언에 대해서는 전 국민적인 반발로 대처하는 모습이 매뉴얼처럼 내면화되어 있다. 그래서 독도는 여전히 우리 땅이고, 우리는 여전히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 대해 한층 더 단호하고 발전적인 대응이 필요한 이유는 이 문제들이 한·일 간에 청산되지 않은 부분 자체일 뿐 아니라 이 문제들로 인해 많은 숙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 일제 강제징용 문제, 원폭 피해자 문제, 일본의 헌법개정과 재무장 문제가 모두 역사왜곡과 독도 문제에서 비롯된다. 홍희경 이민영기자 saloo@seoul.co.kr
  •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日주장과 상반…對日청구권 논란 재점화

    │도쿄 이종락특파원│1965년 6월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의 개인 청구권 범위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협정 제2조에는 ‘체약국 및 국민의 청구권에 관해서는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양국 및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등의 청구권 자금을 받은 것으로 위안부나 징용피해자 등 개인의 권리침해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1990년대까지 청구권 여지 인정 일본 정부의 입장도 수시로 바뀌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에는 ‘개인청구권에 대해 추가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1990년대까지는 ‘한일협정 체결 후에도 개인의 청구권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한국인과 중국인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미국 법원에 낸 소송에선 “한일협정으로 개인청구권까지 포기됐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조선인 근로자들의 미지급 임금과 한일협정 당시 무상 3억달러 지원금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피해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2007년 4월 “국가간 조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실체적 권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재판상 청구권은 소멸됐다.”고 판시했다. 이후 일본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자발적인 보상을 받으려는 취지의 판결들이 늘었다. 이런 와중에 일본 외무성이 1965년 협정 체결 전후에 한일협정과 개인청구권의 관계를 법률적으로 검토했던 결과를 담은 내부 문서가 공개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온 일본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 직전에 내부적으로 법률관계를 검토한 뒤 개인청구권이 협정 체결 후에도 유효하다고 결론을 내린 사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외교전문가 “이미 소멸” 주장도 하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은 일단 부정적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14일 “정부는 1965년 당시 한일청구권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명기된 8개 항목에 대해서는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이어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소멸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당시 회담에서 논의되지 않은 군위안부와 사할린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개인청구권이 유효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사설] 日 한일협정 관련문서 전면 공개하라

    일본 정부가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한일협정) 이후에도 강제 징용자들의 개인 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입장을 협정 당시 정리했음을 보여주는 일본 외무성 내부자료가 확인됐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에 제출된 ‘평화조약에서의 국민재산 및 청구권 포기의 법률적 의미(1965년 4월)’와 ‘일한 청구권조약과 재한 사유재산 등에 관한 국내 보상문제(1965년 9월)’ 등 3건을 통해서다. 이 문건들은 모두 한일청구권협정이 ‘외교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것이지, 개인청구권으로 국가의 채무를 충당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한일협정으로 위안부나 조선인 징용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모두 포기됐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일본 정부가 분명하게 진실을 밝혀야 할 것이다. 이번 문건들은 일본이 한일협정 당시부터 나중에 불거질 강제징용자들의 소송과 배상문제에 미리 대비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 정부와 법원은 소송이 불거질 때마다 ‘청구권 유효’와 ‘소멸시효 종결’의 모호한 입장과 판결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2007년 최고재판소(대법원)의 ‘재판상 청구권소멸’ 판시 이후 희생자들이 자발적으로 알아서 보상받으라는 정부 입장과 법원 판결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내 진보적 정치인과 학자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던 한일협정의 효력과 배상문제에 일본 정부가 이제는 근본적인 입장을 정해 조치에 나서야 한다고 우리는 본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5년 한일협정에 관한 외교문서 전량을 공개했다. 협정을 둘러싸고 지속됐던 잡음과 의혹을 씻기 위한 차원에서다. 과거사 청산을 외쳐온 하토야마 정권이 진정한 의지를 보이려면 우선 음지에 묻히고 가렸던 진실부터 양지로 끌어내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번 자료도 사실상 우리 정부의 협정문서 공개 이후 일본 시민단체가 나선 소송으로 2008년 공개된 자료 중 하나라고 한다. 이것 말고도 진실을 보여주는 회담 문건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최근 과거정권의 ‘미·일 핵반입 허용’ 밀약까지 공개하고 나선 하토야마 정권이다. 형평성 차원에서도 한일협정 문서를 전면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 [사설] 일본 강제징용 한국인이 고작 245명?

    일본 정부가 1959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在日) 조선인 61만명 중 강제징용자는 단 245명에 불과하다고 밝혔단다. 외무성이 자민당 중의원에 제출한 자료를 인용한 산케이신문의 그제 보도 내용이다. 터무니없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수도 그렇거니와 징용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일본에 잔류했다는 억지가 황당하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한반도에서 강제징집된 수만 조선인 희생자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 상황이다.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 앞에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궁색한 변명에 실망감을 금할 수 없다. 일본 외무성의 입장은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반작용이 잇따른 시점에서 나온 것이라 우려스럽다. 외무성 입장 보도가 있던 날 하토야마 총리는 고교 무상화 대상에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포함시키지 않을 뜻을 비쳤다. 똑같은 강제징용의 희생자들인데 굳이 조총련계 학교를 뺀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 재일동포가 대다수인 영주외국인에 대한 지방참정권 부여는 하토야마 정부의 중점 추진 사안이었지만 무산됐다. 금주 초만 하더라도 하토야마 총리가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배상 의사를 밝힌 즉시 일본 정부가 서둘러 부인하고 나섰던 터다. 강제징용의 배상은 청산차원에서 반드시 풀어야 할 사안이다. 징용자들에게 99엔씩의 위로금을 슬그머니 지급하면서 공식적으론 징용·징집을 부인하는 이중성은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무고한 이들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도 모른 체하는 처사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륜의 극치이다. 과거사 청산에 전향적이던 하토야마 정권이 보수·수구의 목소리에 눌려 수세에 몰린 탓이 크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의 청산은 분명 정치적 잣대로 가릴 일이 아닌 것이다. 일본 내에서조차 진실을 바로 보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당장이라도 역사 왜곡을 중단하고 합리적 해결법을 찾기를 촉구한다.
  • [사설] 일본 정부 과거사 배상 공식화하라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가 한·일 과거사 문제를 순차적으로 보상하겠다는 뜻을 비공식적으로 표명했다는 내용이 어제 보도됐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측의 전언에 따르면 하토야마 총리는 올초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한 중진의원과의 극비면담에서 이런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일본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는 지금 그 문제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지만 비공식, 극비면담 등의 전제가 붙어 있어 총리 발언의 진위에 대한 최종 판단은 유보할 필요가 있다. 이 발언이 총리 개인의 소신을 밝힌 것이라 해도 미래를 향한 한·일 관계를 열어가는 전향적인 태도 변화의 단초가 될지 주목할 만하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에 따라 정부 차원에서의 피해 보상 의무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무라야마 전 총리가 1995년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과거사 배상 문제는 법을 앞세워 철저히 외면해 왔다. 독일 정부가 법적인 책임과 별개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2차 대전 피해자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과와 배상을 한 것과는 딴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난해 9월 취임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는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하토야마 총리가 지난해 10월 방한 당시 “역사를 직시하겠다.”고 했던 발언의 무게는 엄중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일각에선 하토야마 총리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후생성 연금탈퇴수당 99엔 지급, 재일교포 지방참정권법안 무산, 조선학교 고교 수업료 무상화 대상 제외 등 일련의 사건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이 시점에서 하토야마 총리의 결단이 중요하다. 그가 강조하는 새로운 한·일관계와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현실화하려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죄와 그에 합당한 피해 보상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이왕 할 거라면 비공식적 루트가 아니라 공식적으로 해야 한다. 과거사 보상에 반대하는 우파와 국민이 두려워 뒤에서 쉬쉬하거나 혹은 여론 무마를 위한 립서비스 차원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
  • [씨줄날줄] 아이고 다리/이순녀 논설위원

    남태평양 팔라우공화국은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 사이 미크로네시아 권역에 속한 인구 2만명의 작은 섬나라다. 천혜의 자연 환경과 다양한 해양 스포츠 덕에 신혼부부를 비롯한 외국 관광객에게 휴양지로 인기가 높다. 수도인 멜레케오크와 코로르, 펠렐리우 등 340개의 섬으로 이뤄진 이 나라는 최근 기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토리비옹 팔라우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부산에서 열린 세계해양포럼에 참석해 팔라우의 위기 상황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팔라우의 옛수도 코로르섬(2006년 수도 이전)에는 ‘아이고 다리’가 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할 때의 우리말 감탄사 ‘아이고’다. 코로르와 인근 섬을 연결하는 1㎞ 길이의 다리에 한글 이름이 붙게 된 배경에는 비참하고 끔찍했던 일제 치하 한인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가 있다. 1919년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미크로네시아 일대 남양군도의 위임통치를 받은 일본은 1922년 코로르에 통치기관인 남양청을 설치하고 식민 지배에 들어갔다. 일본 정부의 지원으로 한때 일본 이민자가 5만명에 이를 정도였으나 조선총독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한국인 노무자들을 억지로 이주시켰다. 강제징용된 한인 노무자들이 코로르 다리 건설 작업을 할 당시 너무나 고된 노동 때문에 저절로 ‘아이고’란 탄식을 내뱉었는데 현지인들이 이 말을 따서 다리 이름에 붙였다고 한다. 일제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예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팔라우를 비롯한 남양군도 일대에 강제징용된 한인들에 관한 자료 수집과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몇년 전 남양군도에서 한국으로 귀환한 1만 1000명의 승선자 명부를 기록한 미국 태평양함대의 자료를 발굴·공개한 정도를 성과로 꼽을 만하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남양군도 한인 강제징용 피해 실태조사는 그런 점에서 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1939~1941년 사이 최소 5000여명의 한국인 노무자들이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 등에 혹사당하다 폭력과 굶주림으로 60%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위원회는 파악했다. 일본의 남양군도 한인 강제징용에 대한 실태 규명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강제동원 피해자 가운데 국내 생존자는 50명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일제땅굴 역사체험관 만든다

    일제땅굴 역사체험관 만든다

    강서구는 25일 가양동에 있는 ‘궁산 일제땅굴’ 70여m를 일본강점기 만행을 청소년에게 알려줄 수 있는 강제징용 관련 체험관으로 꾸미기 위해 착공식을 갖는다고 23일 밝혔다. 강서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2008년 발견된 일제땅굴 안에 꾸며지는 이 체험관은 ▲동굴실 ▲전쟁실 ▲교훈실 ▲기획전시실 등 4개의 테마로 이뤄진다. 동굴실은 전략요지 궁산과 일제땅굴의 역사적 가치 등을 알 수 있도록 했다. 또 땅굴의 입면 절개모형과 궁산 일대 땅굴을 중심으로 한 일본군 부대배치 모형이 전시된다. 전쟁실에는 당시의 공습상황을 체험할 수 있는 방공호 체험존과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관람객이 사진을 찍는 포토존을 설치해 태평양 전쟁시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꾸민다. 교훈실에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고난과 희생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궁산 일제땅굴을 비롯한 징용희생자들을 기려 추모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이곳은 관람 후 ‘평화의 벽’에 관람소감과 평화의 염원을 적어 붙일 수 있게 꾸몄다. 기획전시실은 가변형의 전시패널로 조성해 수시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궁산 일제땅굴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파놓은 것으로 폭 2m, 높이 2m로 당시에는 소형 차량도 진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륙침략의 주요기지이던 김포비행장과 한강하구를 감시하는 일본군부대의 본부 및 탄약고로 쓰이기 위해 비밀리에 건설되다 8·15 해방과 더불어 공사가 중단됐다. 구는 땅굴 인근 겸재정선기념관과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향교인 양천향교, 한성백제시대 성곽인 양천고성지, 2005년 개관이래 관람객 40만명을 돌파한 허준박물관 등과 연계, 가양동 일대를 우리나라 역사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역사문화탐방코스로 개발할 예정이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사설] 일제 강제징용 보상이 고작 99엔이라니

    일본정부가 강제 징용, 사역을 시킨 한인들에게 99엔씩을 지급한 사실이 밝혀졌다. 어제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1944∼45년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에서 강제사역한 8명의 한국인이 요구한 후생연금 탈퇴수당과 관련해 이달 중순 일본 정부가 보상금조의 수당을 은행계좌로 송금했다고 한다. 일본정부가 실정법에 따라 지급한 것인 만큼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한 첫 사례로 고무적이다. 그러나 반세기 전 화폐가치로 매긴 값싼 조처는 ‘눈가리고 아웅’식의 면피로만 비쳐져 우려된다.일 정부의 연금수당 지급은 자국 후생연금보험법에 근거한 조처란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태평양전쟁기에 동원된 근로자들이 연금 수급기간을 채우지 못한 채 탈퇴할 경우 정부가 수당 지급을 보장한 제도가 후생연금보험법이다. 일본 정부가 국가차원의 강제징용을 부인하면서 한국인 징용자를 근로자로 인정, 수당을 지급했으니 강제징용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게 끌려간 징용자들의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우리 돈 1200원으로 무마하겠다는 의도는 아무래도 의심스럽다.독일, 프랑스의 전후처리와 보상에서 보듯 과거사 청산은 사실직시와 온전한 현실 치유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지금 일본에선 양심 있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인 위안부와 강제징용자들의 임금 지급 문제를 풀어내자는 운동이 번지고 있다. 일본 14개 지방의회는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채택했다고 한다. 이번 강제징용 한인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보상은 그래서 불안감을 갖게 한다. 혹여 하토야마 정부 출범 후 도드라지는 과거사 청산노력과 화해무드에 찬물을 끼얹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순간의 어려움만 면하려는, 말뿐인 청산은 더 큰 문제와 갈등을 불러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 [사설] 일제 징용 미불임금 구제방법 찾아야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는 어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가족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위로금 재심의신청에 관한 처분 취소소송을 기각했다. 정부가 지급하는 돈이 지원금인지 보상금인지 심의할 근거가 없다는 게 기각 이유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미불임금 청구소송서 줄줄이 패소한 데 이어 국내서도 좌절하게 된 실정이 안타깝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사정은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 일제 강제징용자들이 임금을 돌려받을 법적 근거의 필요성을 처음 지적한 것이다. 일제 징용자는 전국적으로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되지만 일본정부는 징용 사실조차 부인한다. 한·일 양국서 줄을 잇는 미불임금 청구소송은 최소한의 피해보상 요구이다. 그런데도 일본측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결을 통해 무상 3억달러를 지급한 것을 들어 미불임금이 청산됐다고 밝힌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일본정부가 기업들에 4조원대의 미불임금을 공탁하게 한 것은 모순이다. 미불임금 공탁은 일제의 강제징용과 임금 미지급 사실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미불임금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우리 정부가 1엔당 2000원씩 쳐서 지급하는 위로금 액수가 터무니없고 그 성격도 정당한 보상금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피해자 가족들의 요구는 타당하다. 과거사 청산은 잘못을 인정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국민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피해 보상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에 관한 입법화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서울광장] ‘어른 일본’ 그리고 일왕의 방한/김성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어른 일본’ 그리고 일왕의 방한/김성호 논설위원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마 정권이 엊그제 닻을 올렸다. 새 각료 17명의 진용을 갖춘 ‘하토야마호’는 복지, 탈(脫)관료, 동아시아공동체 실현의 3대 과제를 밀어붙일 태세다. 취임회견에서 하토야마 총리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정치와 행정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첫날”이라는 강한 일성을 남겼다. 54년 만의 정권교체, 보수에서 중도좌파로의 전향에 각국이 긴장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일본의 지각변동을 한국만큼 민감하게 보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토야마가 선거 전부터 양국관계의 개선발언을 잇달아 낸 만큼 정권출범에 거는 기대가 크다. 각료 17명 중 10명이 지한파인 데다 친한 성격의 한·일의원연맹 소속 민주당 의원이 51명이나 되는 점을 감안하면 양국관계를 겨눈 하토야마 발언들에 무게를 싣는 게 괜한 건 아닐 듯싶다. 가뜩이나 하토야마는 한국 중심의 외교를 강조해온 터다. 하토야마 발언들이 관심을 끄는 건 무엇보다 과거사 인식을 통한 청산의 구체적 실천제시에 있을 것이다. 야스쿠니를 대체할 추도시설 건립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재일교포 지방참정권 부여에도 적극적이다. “총리 취임 후에도 야스쿠니에 참배할 생각이 없다.”며 각료들에게 자숙을 촉구하겠다던 하토야마다. 한·일 과거사와 관련, 극우보수 입장으로 일관했던 자민당 정권에 화살을 쏜 하토야마 행보에 시선이 쏠리는 까닭이 분명한 것이다. 우호적 분위기와는 달리 한·일 양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얽히고설킨 앙금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지난달 일본에선 극우색채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제작한 두 종의 중학 교과서 출판을 법원이 모두 인정했다. 국내에선 사할린 징용 피해자들이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족 22명도 국가 상대의 첫 단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그런 점에서 ‘하토야마호’ 출범 전날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방한 제의는 모험적인 돌파구 찾기로 보인다. 한·일 강제합병 100년을 맞는 해에 일왕의 한국 방문은 양국 모두에 큰 의미를 갖는다. ‘일왕’의 상징적 의미를 볼 때 혹여 방한 중 일왕의 신변에 가해질 수 있는 불상사에 대한 일본의 우려가 클 것이다. 국내에서도 ‘과거사 청산 없는 일왕 방한’에 대한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다. 일왕 방한이 자칫 양국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설득력을 갖는다. 이 대통령의 제의에 당분간 일본 정부는 고심할 것이다. 한·일 관계의 전향적 개선을 외치는 민주당 정권은 내년 7월 참의원선거라는 심판대를 거쳐야 한다. 일본인 정서를 감안할 때 하토야마 정권이 과거사 청산과 그를 통한 관계개선에 일방적으로 박차를 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대통령의 제의는 하토야마 정권에 대한 강수의 정치 공세로까지 볼 수 있다. 공을 넘겨받은 일본으로선 중대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왕 방한을 과거사 청산의 정점에 놓을지, 악화시킬지는 양국 정부의 몫이다. 그런 점에서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류의 “일본이 드디어 어른이 됐다.”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인들은 정권교체로 그들의 삶이 향상될 것으로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했다. 우리가 ‘어른 일본’에 대한 장밋빛 기대에만 머물게 아니라 무엇을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일 수 있다. 청산과 망각은 분명히 다르다. 일왕의 한국 방문은 그래서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무거운 화두인 것이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일제징용 피해자 줄소송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전모씨 등 일제강점하유족회 회원 22명이 10일 정부를 상대로 징용피해 손해배상금과 미불임금 등 모두 19억원을 지급하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4일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인 신경분씨가 처음으로 서울 행정법원에 제기한 소송에 뒤이은 것이다.<서울신문 9월5일자 9면> 전씨 등은 소장에서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을 통해 원고들이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하고 일본으로부터 합의금을 받아 원고들로 하여금 일본을 상대로 직접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도록 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최근 정부가 입법을 통해 다소 간의 보상을 실시하고 있으나 보상액이 피해자와 유족이 입은 정신적, 물질적 고통에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씨 등은 사망자 1명당 최소 1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하고, 미불임금은 물가인상분과 환율 변동을 고려해 1엔을 최소 1만원으로 환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앞서 소송을 낸 신씨는 1엔당 2000원으로 환산한 정부의 위로금 지급 처분을 취소하고, 미불임금을 현재 가치대로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한·일 남녀의 비극적 사랑 무대에

    한·일 남녀의 비극적 사랑 무대에

    2004년 3월28일 일본 아사히신문은 한 한국인 노인의 죽음을 전했다. 학도병으로 일제에 강제징집된 후 기억상실증에 걸려 60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낸 김백식 노인이 현금 4만엔과 ‘조선적’이라고 적힌 외국인등록증만을 남긴 채 쓸쓸히 숨을 거뒀다는 사연이었다. ●일제치하 강제징용이 배경 서울시뮤지컬단과 일본 긴가도 극단이 이 실화를 토대로 한·일 합작뮤지컬 ‘침묵의 소리’를 공동제작해 새달 4~20일 세종M씨어터에서 공연한다. 2005년 서울시극단과 긴가도극단이 연극 ‘침묵의 해협’으로 먼저 선보였던 내용을 뮤지컬로 새롭게 각색한 것이다. ‘침묵의 소리’는 일제 치하 강제징용의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통해 결코 잊어선 안 되는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는 한편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테라피(치유) 뮤지컬’이란 낯선 장르를 표방한 이유도 그래서다. 요양원에서 음악과 춤, 연기 등 예술치료로 환자를 돌보는 극중 테라피스트처럼 공연을 통해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의 마음도 일시적이나마 치유되는 경험을 주고자 하려는 시도다. 극은 연인 미와에 대한 사랑으로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견디던 동진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뒤 전쟁의 충격과 사랑의 상처로 피폐해 가는 과거의 이야기와 요양원에서 노년의 동진을 돌보는 일본인 테라피스트의 현재 이야기가 교차되어 흘러간다. ●화해·평화의 메시지 전달 극본과 연출을 비롯한 스태프, 배우 등 뮤지컬 제작의 전 과정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고루 참여했다. 유희성 서울시뮤지컬단장과 요시마사 시나가와 긴가도극단 대표가 공동 연출을 맡았고, 음악도 장소영 작곡가와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우에다 도루가 함께 맡았다. 민영기 박봉진과 기사키 히나노, 나카니시 요스케 등 한·일 배우의 호흡도 기대를 모은다. 유 단장은 “침묵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고, 시나가와 대표는 “아시아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연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국 공연에 이어 10월 일본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갖는다. 3만~5만원. (02)399-1772.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일본제철 등 징용 피해자 위자료 청구 소송…법원 “포스코에 배상책임없다”

    ㈜포스코가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책임이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하지만 재판부는 포스코의 손을 들어주면서도 윤리적으로 피해자와 유족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서울고법 민사5부(부장 황한식)는 12일 ‘일제 강제동원 진상규명 시민연대’ 회원들이 포스코가 한·일협정 이후 일본에서 받은 청구권자금을 사용하는 바람에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며 제기한 위자료 등 청구 소송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제철소 훈련공이었던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제철 등에서 근무하다 강제징용됐고, 미군의 공습으로 제철소 공장이 파괴되면서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국가가 한·일협정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을 포스코 설립에 써버려 청구권 자금이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것을 방해했다.”면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조한 기업과 제휴할 때는 일제 피해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데, 포스코는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과 기술 제휴를 하고 주식까지 교차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1968년 4월 포스코(옛 포항제철) 설립과정에서 청구권자금 5억달러 중 1억 1950만달러가 사용된 것은 맞지만, 이는 관련 법률이 정한 자금사용 기준에 부합하는 데다 청구권자금 전액이 강제징용 등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 불법행위를 저질러 원고들이 받을 돈을 가로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의 역사적 배경과 국제적 동향, 포스코 설립 경위, 기업의 사회윤리적 책임 등을 볼 때 포스코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포스코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일제 징용자 미불임금 4조원 받을길 없나

    일제 징용자 미불임금 4조원 받을길 없나

    내년은 대한제국이 군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진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식민지배 하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들은 해방 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게 많다. 강제징용자의 미불임금 문제도 그 중 하나다. 19일 오후 10시에 방송하는 KBS 1TV 시사기획 쌈 ‘공탁금 2억엔의 비밀’편은 한일합병 100년을 앞두고 일제하 강제징용과 미불임금 문제를 집중 취재해 밝힌다. 취재진은 일본 국립 공문서관에 보관된 강제징용자들의 미불임금 자료를 지역별, 탄광별로 우선 확인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4만명 징용자들에게 퇴직금, 후생연금, 예금 등을 지불하지 않은 채 아직 보관하고 있다. 2008년 7월 기준으로 그 잔고가 2억여엔, 시세를 적용해 따져보면 현재 우리 돈으로 4조원에 이르는 돈이다.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정부는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를 일본에 받는 대신 개인들의 모든 대일 청구권을 포기했다. 이에 강제징용 피해자들도 미불임금을 받을 수 없게 됐고, 일본 정부 역시 지금까지 피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05년에 들어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꾸리고 강제징용자 지원에 나섰다. 작년까지 접수된 피해 사례가 22만건, 그 중 보상 지원은 1만여건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미불임금을 일본에서 돌려받은 경우는 없다. 역사적 사실 공개를 꺼리는 일본이 관련자료를 넘겨주지 않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있었던 일본 상대 미불금 반환 소송도 대부분 기각됐다. 취재진은 실제 관련 소송을 진행했던 징용피해자를 만나 사연을 들어 보고,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끌려갔던 일본 노동현장의 흔적도 따라가 본다. 또 정부차원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본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日 강제징용 조선인 위령대회 참석

    강금실(법무법인 원 변호사) 전 법무부장관은 오는 16일 한·일 우호평화협의회 초청으로 ‘제 26회 태평양전쟁 중 강제징용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을 위한 위령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2박3일 일정으로 일본 오사카를 방문한다.
  • ‘시베리아 삭풍회’ 아물지 않는 상처

    ‘시베리아 삭풍회’ 아물지 않는 상처

    “일본으로, 소련으로 끌려다니며 죽도록 고생만 하다 5년 만에 돌아왔는데…. 양친이 다 돌아가셨더라고.” 백발이 성성한 황희성(85)옹은 65년 전 1944년 1월을 잊지 못한다.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출신인 황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의 농사를 거들던 열여덟살 청년이었다. 그해 강제징집 대상이 됐다는 통지를 받은 황옹은 “이듬해까지 만주와 쿠릴열도에서 철도관리와 섬 경비업무를 하면서 보냈제. 그러다 8월15일 일왕이 항복했다면서 우리를 배에 태우더라고. 귀향길이라 철석같이 믿고 올라탔건만….” 그러나 그를 비롯한 전쟁포로들이 도착한 곳은 고향이 아닌 차디찬 바람이 부는 소련 하바롭스크항이었다. 그후 4년간 시베리아 밀공장에서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49년 옛 소련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고국 땅을 밟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떴고 고향 사람들은 “일본군에 협력한 친일파”, “소련에 머물렀던 빨갱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결국 고향을 떠나 전국을 전전하며 평생을 연탄장수로 보냈다. 황옹은 “일생이 끔찍혀. 그렇다고 국가가 변변하게 보상해 준 것도 없어.”라며 눈물을 삼켰다. 황옹처럼 일본과 옛 소련으로부터 강제징용과 강제노역 등 이중 착취에 시달린 ‘시베리아 억류 조선인’은 1만여명. 60여년이 지난 지금 남한 내 생존자는 고작 18명뿐이다. 당초 남한 생존자 56명은 91년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2003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미지불 임금반환 및 손해배상소송을 냈지만 기각됐다. 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보상이 이뤄졌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일본은 삭풍회 회원들과 동일한 피해를 당한 일본인 시베리아 억류자 지원을 위한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 조치법안’을 마련해 국회에 상정을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같은 전범국인 독일이 2007년 강제노역자 167만명에게 모두 43억 7000만유로(약 5조 4250억원)의 보상을 완료한 것과 대비된다. 우리 정부 역시 냉대로 일관했다. 문민정부 이후 여러 차례 문제제기를 했지만 보상은 없었다. 지난해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생존자들에게 각각 80만원을 지급한 것이 전부다. 삭풍회 이병주(84) 회장은 “보상은커녕 숨진 원혼을 달랠 위령탑 하나 세우지 못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생존자들은 현재 미지불 임금반환 항소 소송을 진행 중이지만 힘이 부친다. 모두 80세를 넘긴 생존자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회장은 “피해자들이 한을 풀고 눈감는 게 간절한 소원”이라고 하소연했다. 삭풍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27일부터 다음달 15일까지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 전시회를 국회도서관 2층에서 연다. 이번 전시회에는 시베리아 억류 당시의 상황을 담은 자료 75여점이 전시된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용어클릭 ●시베리아 삭풍회 일제의 조선인 징병 방침에 따라 1944~45년 강제동원돼 만주(중국의 동북 3성) 북부나 쿠릴열도에 배치됐다가 소련군에 일본군 포로로 잡혀 3~4년씩 억류됐던 사람들의 모임. 1990년 12월 노태우-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거쳐 그해 9월 한국과 소련이 정식수교를 하자 6명이 모임을 결성했다.
  • 여간첩 원정화 계부 공작 밑천 10억 제공

    탈북자로 위장한 여간첩 원정화(34)의 의붓아버지 김동순(63)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일 구속기소됐다. 조선노동당 당원인 김동순은 김영남 북한 인민최고위원회 상임위원장과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 수원지검·경기경찰청·기무사·국가정보원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부는 이날 원정화에게 공작금 명목의 물품을 전달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황장엽씨의 거처를 알아본 김동순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편의제공·잠입·회합통신·탈출·간첩미수) 혐의를 적용, 구속기소했다. ●딸 도와 이중첩보 활동에 무역사업까지 합수부에 따르면 김동순은 2003년 12월부터 3년 뒤 남한에 잠입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북한산 냉동문어와 옻, 고사리 등 10억원어치를 남한에 있는 원정화에게 넘겨 판매차액으로 공작금을 마련하게 했다. 중국산 상황버섯을 북한산으로 위장수입하려는 남한 상인들을 북한 간부와 연결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등 장사꾼 역할도 했다. 그는 또 2005년 2∼3월 남한의 군 정보요원에게 정보를 빼내려던 원정화의 부탁으로 청진 로켓 공장 설계도를 그려줘 환심을 끌게 하고, 그 대가로 군 정보요원에게 남한 사람 윤모씨 명의의 위조여권을 받아 ‘이중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탈북자라고 속이고 입국해서는 원정화의 이모부라며 신분을 위장했고, 반북 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와 북한이탈주민후원회 등을 찾아다니며 황장엽씨의 거처를 물어보고, 탈북자 대표 등의 명함과 사진을 수집하는 등 간첩 활동을 벌였다. 공안당국 관계자는 “김동순이 간첩이 아니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면서 “북한 보위부 소속 공작원인지는 확실한 물증이 없어 일단 반국가단체 구성원의 간첩미수 혐의를 적용했다.”고 말했다. ●원정화 수사 결과 과대포장 지적 반박 이날 합수부는 원정화에 대한 수사 결과가 과대포장됐다는 일부 지적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합수부는 “탈북 공작원 등과의 진술 비교를 통해 원정화의 자백이 모두 일치하는 사실을 확인했고 출입국 조회, 통화내역, 감청자료 등 보강증거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합수부는 다만 “원정화가 훈련을 받았다는 금성정치군사대학은 금성정치대학을 잘못 기재한 것이고,‘사로청 조직국 서기’는 직책이 아니라 임시로 일했었다는 진술을 줄여 쓴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일부에선 원정화가 임신한 채 남파돼 양육까지 한 점, 김동순이 원정화가 체포된 뒤에도 노동당원증 등을 인멸하지 않고 달아나지도 않은 점 등을 들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계속 나오고 있다. ●김동순은 누구 광복 전 인천 용현동에서 태어난 김동순은 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아버지를 따라 청진에 정착했고, 평양미술대학 조각학과를 나와 함북 소재 공기관에서 주로 미술 관련 업무를 맡았다.1974년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김동순은 왕재산대기념비(일명 빨치산 공적비)와 혁명박물관 건설 공사 등으로 공적을 인정받아 국기훈장(2급)을 받기도 했다. 김동순은 2000년 12월 중국으로 건너가 원정화의 대북 무역사업을 돕다가 2006년 12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경유해 탈북자 신분으로 위장 입국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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