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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론] 우리가 역사부정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시론] 우리가 역사부정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독일 국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정부를 상대로 무엇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국민이 자기 나라 전쟁에 협조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식민시기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국민으로서 자국이 일으킨 전쟁을 도운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가지고 친일이라 하는 것은 몰상식하다.” 일본 우익의 발언일까. 이는 2003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친일 진상규명 특별법 공청회에 반대 측으로 출석한 작가 김완섭의 진술이었다. 그는 당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으로 화제를 일으킨 주인공이었고 ‘신친일파’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반일종족주의’가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 집필자인 이영훈 교수는 200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편향된 역사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2003년의 김완섭과 지난해 반일종족주의 집필자들이 가진 대일 역사 인식의 공통점은 식민 지배에 관한 것이다. ‘한일강제병합의 강제성 부정’, 즉 일제의 식민 지배를 합법적 과정의 산물로 인정하고 강제성을 부정하려는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강제동원 피해의 역사 자체와 강제성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들의 주장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일본 국적을 가졌으니 법적으로 평등한 관계라는 주장이다. ‘제국 신민’, ‘내선 일체’라는 언설은 있었으나 법 체계도 제도도 달랐다. 한일병합조약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다는 것만 명기했을 뿐 주민의 국적에 관한 규정은 없었다. 물론 내부 방침은 있었다. 조선인은 “일본 국적을 얻지만 국내적으로는 차별 취급이 가능하며 외국에 대해서만 일본인”인 이중적인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방침이었다. 의무에서는 일본인이지만 권리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인은 당연히 지역에 따라 구별되는 존재였고, 법적 지위와 권리 규정은 없었다. 그러므로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둘째, 일제 말기 동원의 합법성 주장이다. 일본은 스스로 정한 법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일본이 제정한 법에서 규정한 연령 제한은 법조문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법에서 명시한 연령보다 훨씬 어린 아이들을 노무자로 동원했다. 더구나 일본 국내법에서도 불법으로 금지한 ‘여성 약취(掠取)’를 어긴 대표적인 사례가 위안부 동원 아닌가. 설령 법이 있다 해도 각종 동원 관련 법령은 일본 스스로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제29호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1930년)에도 위반된다. 셋째, 강제성은 없었다는 주장이다. 역사부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강제성은 국제 사회의 인식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자는 강제성을 인신적 구속 상태로 본다면 후자는 ‘신체적 구속이나 협박은 물론 황민화 교육에 따른 정신적 구속, 회유, 설득, 본인의 임의 결정, 취업 사기, 법적 강제에 의한 동원’을 의미한다. 본인이 결정했다면 강제성이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이 결정했으나 약속과 다른 상황이라면, 본인이 결정을 자유롭게 철회할 수 있어야 강제가 아니다. 그러나 국가총동원체제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불가능했다. 보편적 구속과 강제성에 대한 인식은 일부 학자들만의 고담준론이 아니다. 2002년 일본변호사협회 조사보고서에도 실린 내용이다. 2007년 3월 일본 아베 총리는 ‘좁은 의미의 강제성’을 내세워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부정했다. ‘좁은 의미의 강제성’이란 ‘유괴범처럼 무단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 방식’의 강제연행이다. 아베 총리가 굳이 좁은 의미의 강제성을 내세운 것은 강제성을 희석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 때문이다. 그런데 국내 역사부정론자도 동일한 의도를 표출하고 있다. 2003년의 역사부정론자가 ‘작가’의 신분이었다면, 2019년의 역사부정론자들은 ‘학자’라는 외피를 쓰고 정치 행위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고언을 제 입맛대로 해석해 세를 키우려는 역사부정론자들이 등장하는 이때 한국 사회가 건강한 역사 인식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건강한 역사 인식은 피해자성을 공유하는 길이며 자유·인권·평화·평등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피해자성이란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공감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인식을 공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우리의 평화로운 일상은 전쟁을 일으킨 권력이 아닌 민중의 시선으로 태평양전쟁을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일 때 지킬 수 있다. 우리가 저들이 주장하는 역사부정을 넘어서야만 가능하다.
  • 코로나 틈타 지지 기반 더 다진 日 극우 정치인들

    코로나 틈타 지지 기반 더 다진 日 극우 정치인들

    자민당보다 우익단체 소속… 물의 잦아코로나19 사태는 여느 나라처럼 일본에서도 주요 정치인의 명암을 극명하게 갈랐다. 아베 신조 총리처럼 무능력·무책임 비난 속에 최악의 상황에 빠진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평판과 인지도 측면에서 수직으로 도약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시무라 히로후미(왼쪽·45) 오사카부 지사와 고이케 유리코(오른쪽·68) 도쿄도 지사다. 두 사람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일본 미디어들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코로나19 대응을 잘한 정치인’ 1위와 2위 자리를 굳게 지켜 왔다. 한국의 질병관리본부와 같은 중앙 사령탑이 없는 일본은 현장 실무대응을 전국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지사들이 전담하는 체제다. 이를테면 ‘긴급사태’ 선언 주체는 아베 총리였지만, 실제 주민들의 외출·이동 자제나 상점 휴업 요청 등은 모두 해당 지역 지사들이 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지사들은 수시로 기자회견을 열어 지역 내 감염 상황이나 대응 방향을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무라 지사와 고이케 지사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 적극적인 대응으로 인지도를 확 높였다. 특히 아베 총리가 ‘아베노마스크’(가구당 천마스크 2장씩 배포) 등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두 사람의 존재감은 상대적으로 더 부각됐다. 그 결과 요시무라 지사는 지난 3월 말 30만명 정도이던 트위터 팔로어가 이달 초 100만명을 넘어섰다. 고이케 지사가 매일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리는 코로나19 관련 영상도 이례적으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이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극우 성향의 정치적 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오사카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변호사 출신의 요시무라 지사는 일본유신회의 부대표를 겸하고 있다. 일본유신회는 집권 자민당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지향하는 정당이다. 그의 성향은 오사카 시장 때인 20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가 설치된 데 반발, 도시 자매결연을 단칼에 파기한 데서 잘 드러난다. 지난 1일에는 트위터에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를 용인했다는 이유로 우익세력이 펼치고 있는 ‘아이치현 지사 탄핵운동’에 “응원합니다”라는 글을 올려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일본 최대 우익단체 ‘일본회의’ 회원인 고이케 지사는 방송 앵커 출신으로 2016년 현직에 당선됐다. 일제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의 부정은 물론이고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도 참배하는 인물이다. ‘혐한 망언 제조기’로 불린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 지사조차 거부하지 못했던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 추도식에 대한 추도문 전달을 2017년부터 중단했다. 두 사람은 각자 중요한 정치적 관문을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 필요 이상의 방송 출연과 광고 제작 등 코로나19 상황을 정략적으로 활용했다는 지적도 많다. 요시무라 지사는 오는 11월 ‘오사카도 구상’에 대한 주민투표를 통과해야 한다.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를 ‘오사카도’로 통합해 도쿄도와 같은 메가시티로 육성한다는 계획으로, 투표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정치 이력에 든든한 날개를 달게 된다. 곧 임기가 끝나는 고이케 지사는 오는 10일쯤 재선 출마를 선언할 계획이다. 다음달 5일 치러질 선거에서의 승리는 확정적이지만, 압도적인 지지율을 원하고 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두 사람이 과연 총리의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설왕설래도 나오고 있다. 다수당의 총재가 총리가 되는 의원내각제의 속성상 당장 현실적으로는 무리다. 그러나 여론 흐름의 변화와 이에 기반한 정계 개편이 교묘하게 맞물릴 경우 상황은 예측불가로 전개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정대협, 이용수 할머니 폭로 전에도 비판하면 피해자 외면했다

    정대협, 이용수 할머니 폭로 전에도 비판하면 피해자 외면했다

    “위안부 문제로 관심 받자 정대협 권력화 돼”‘아시아여성평화기금’ 때도 정대협 극렬 반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92) 할머니가 애끓는 심정으로 두 차례 기자회견에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그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비판했다. 그 중심에 21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이 있다. 정대협은 이 할머니의 폭로 전에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거나 정대협과 다른 의견을 말하면 철저히 외면하고 배제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6일 시민운동계 등에 따르면 1990년 결성된 정대협은 이듬해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피해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 공론화와 일본 정부의 사과·배상을 요구하며 수요시위를 주도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의 맨 앞에 섰다. 그러나 정대협은 자신들의 입장에 동의하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위안부 운동을 벌여 왔고 정대협의 입장이 곧 국내 위안부 피해자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성역화됐다는 문제제기가 꾸준히 있었다.이 할머니는 지난 25일 대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내가 무엇이든지 바른말을 하니까 (정대협이) 전부 감췄다”면서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당시) 10억엔이 왔을 때도, 내가 알았으면 돌려보냈을 것이다. 정대협·나눔의 집에 있는 할머니만 피해자가 아니라 전국의 할머니를 도우라고 했는데 거기 있는 할머니만 도왔다”고 말했다. 이는 정의연과 정대협이 단체 입장에 가까운 피해자만 지원하고, 입장이 다른 피해자들에게는 위안부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협의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취지에서 비판으로 받아들여진다. 심미자 할머니 “정대협, 앵벌이로 배 불린 악당”정대협, 피해자 조형물에서 심 할머니 이름 빼 앞서 2004년 고(故) 심미자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3명은 ‘세계평화무궁화회’ 명의로 낸 성명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며 정대협을 강하게 비판했다.이들은 당시 성명에서 “윤정옥 (당시) 정대협 대표는 ‘아시아여성평화기금을 받으면 자원해 나간 공창(公娼)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면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위로금을 당신들이 뭔데 ‘공창’ 운운하며 우리를 두 번 울리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결성된 단체가 자신들과 의견이 일치하는 피해자들과만 함께하고, 입장이 다른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배제했다는 비판이었다. 최근 심 할머니 등 정대협과 관계가 불편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남산 ‘기억의 터’ 조형물 ‘대지의 눈’에도 빠져 있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고노 담화 후속 조치 피해자 기금‘여성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일부 피해자 수령 후 정대협 균열 평화기금, 정대협 등 비판 끝에 결국 해산1990년대 중반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은 대표적인 갈등이 있었던 사안이었다. 일본은 1993년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한 고노 담화의 후속조치로 1995년 민간 모금 형식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조성해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려 했다. 정대협은 해당 기금이 법적 배상을 피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하다고 규탄하고 국내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금 수령도 반대했다. 그러나 일부 피해자들이 기금을 수령하면서 균열이 발생했다. 아시아여성평화기금은 정대협을 비롯한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비판 끝에 2007년 결국 해산했다. 올해 3월 기준 우리나라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40명(사망 222명, 생존 18명)이다. 이들 가운데 ‘일본 정부에 의한 법적 배상’을 고집하는 정대협의 입장에 동의하는 피해자도 있었지만, 실현 가능성 등을 감안해 위로금 등 보상을 받는 것을 차선책으로 수긍한 피해자도 있었다. 박유하 “정대협이 말하는 피해 당사자, 자기네 생각 따르는 이들에 한정”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2013년에 펴내 논란을 일으킨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에도 정대협의 운동 방식에 관한 비판이 나온다. 박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지원단체(정대협)가 말하는 ‘당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지원단체의 생각에 따르는 이들에 한정될 뿐”이라면서 “‘당사자’는 하나가 아니지만, 지원단체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정대협 활동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심미자 할머니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같은 책에서 “그녀(심미자 할머니)는 일찍부터 정대협과 갈등을 겪었고 세상에 호소하기도 했지만 공론화되는 일은 없었다”면서 “우리 사회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사자와 정대협 간 힘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정대협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비판받는 정도를 넘어 ‘민족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할 정도가 됐다”면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관심을 얻고 그에 따른 힘을 얻으면서 정대협은 권력화된 것”이라고 평가했다.정의연 “심미자 할머니 성명은활동가 사이서 불거진 일 중 하나” 이 할머니 “위안부·정신대 혼용해 해결 지연”에“위안부 잘 안 알려져서 정신대 용어 사용” “일제 때도 용어 혼용 존재했다” 반박 정의연 관계자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정대협과 정의연이 30여년간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운동을 이어오면서 피해자뿐 아니라 운동을 함께 한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여러 차례 견해차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심미자 할머니의 (2004년) 당시 성명도 이러한 과정에서 불거진 일 중 하나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의연은 전날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끝난 이후 “안타깝다. 마음 아프다”면서도 사과의 뜻을 밝히지는 않았다. 정의연은 이 할머니가 “위안부와 정신대 용어를 혼용해 사용해 문제해결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상황상 어쩔 수밖에 없었다고 입장을 내놓았다.정의연은 위안부는 일제에 의해 성노예를 강요당한 피해자를 일컫는 말이고, 정신대는 근로정신대의 줄임말로 소학교 고학년 정도 연령에 일본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군수품 등을 만드는 일을 강제당한 피해자라고 설명했다. 정의연은 “정대협이 1990년대 초 활동을 시작할 당시 (위안부의) 피해 실상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면서 “실제 일제 식민지 하에서도 용어의 혼용이 존재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정의연은 “정신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단체는 별도로 존재하고 활동가들은 이를 혼동하지 않는다”면서 “정대협에 포함된 ‘정신대’는 운동의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대협은 일관되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활동해온 단체”라고 강조했다.윤미향 “의정 활동으로 보여주겠다”“법적 잘못 없어…사퇴 고려 안해” 이해찬, 민주당에 윤미향 함구령 지시민주 “검찰 수사 지켜보고 입장 밝힐 것” 한편 지난 19일 예고 없이 대구에 있는 이 할머니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던 윤미향 당선인은 “기자회견에 오라”는 이 할머니의 당부에도 전날 기자회견에서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윤 당선인은 경기도 안성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 고가 매입 및 반값 매각과 경매 아파트 자금 마련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말이 자주 바뀌면서 오해를 받았다. 윤 당선인은 일각의 사퇴 요구에 대해 “드러난 법적 잘못이 없고 의정 활동 성과로 보여 주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의정 활동으로 평가받겠다는 의미다. 지난 18일에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쉼터 매입 과정 등 의혹과 관련한 정치권 안팎의 사퇴 요구에 대해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데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면서 “사퇴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민주당에 따르면 윤 당선인은 이 할머니의 회견과는 무관하게 21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는 오는 30일 이전에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해명하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해찬 대표는 윤 당선인을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해 “개인 의견을 분출하지 마라”며 함구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강훈식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전날 국회 소통관에서 현안 브리핑을 통해 “윤 당선인에 대해서는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그 결과를 지켜보고 향후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인터뷰]의혹에 입연 윤미향 “딸 유학비 말 바꾼적 없다”

    [인터뷰]의혹에 입연 윤미향 “딸 유학비 말 바꾼적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수요집회를 이끌었던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당선자(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전 이사장)가 자신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입을 열었다. 윤 당선자는 12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카페에서 서울신문과 만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할머니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딸의 유학비와 관련해 한 번도 말을 바꾼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이번 일에 책임지고 비례대표에서 물러나라는 일각의 요구에 대해 “사퇴는 돌아가신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일축했다. 다음은 윤 당선인과의 일문일답. -2015년 한·일 위안부 협상 내용에 대해 야당에선 윤 당선인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 제기했다. ‘당일 아침 알았다’에서 ‘합의 전날 알았다’로 말이 바뀌었다는 의혹도 있다. 이와 관련해 무엇이 사실인지 말씀해달라. 2015 한·일 합의 전체 내용은 2015년 12월 28일 당일에 기자회견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총리로서 사죄, 국고 거출 세 가지가 미리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었다. 그 내용을 그대로 통보받았다. 2015년은 해방 70주년으로 우리에게 굉장히 의미있는 해다. 이 해에 위안부 문제 꼭 해결하자는 중요한 결의를 다졌고, 한국정부에게도 “올해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피해자들도 여러차례 촉구했다. 그래서 그 해에 한일 국장급 협의가 서울과 도쿄에서 여러번 열렸다. 처음에는 외교부에게 주도권이 있었고, 그때 마다 우리가 외교부에 면담을 요청 했다. 일본과 접촉했다고 하는데, 국장급 협의를 열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지, 피해자가 전달했던 요구가 해결됐는지 등을 물어보고 촉구했다. 피해자들이 전달한 이야기는 2014년에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연대회의에서 채택한 ‘일본정부에게 요구하는 제언’이라는 요구서 내용이다. 요구서에는 일본 정부가 해야할 일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첫 번째, 역사적 사실 인정해야 한다. 그 사실 안에는 위안소 운영 등 이것이 범죄라는걸 인정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 인정 위에 공식 사죄하라, 사죄하되 고노가 사과하고 아베가 번복하는 이런 방식이 아니라 다시 번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죄하라고 얘기했다. 사죄 증거로 배상도 하라고 했다. 배상은 한국사회에서 헷갈리는 측면이 있는데 일본정부가 준 10억엔은 배상금이 아니다. 그건 위로금이다. 화해치유재단의 기부금이다. 배상은 법적책임을 인정하고 주는 금전을 말한다. 그 안에는 금전적인 배상도 있지만 비화폐적 배상도 있는 굉장히 포괄적 용어다. 그래서 배상을 요구했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기록해야 한다는 요구도 같이 했다. 한국정부에도 숱하게 전달했고, 일본정부, UN에도 전달하고 미국정부에도 전달했다. 이 문제에 미국정부도 관련 있다고 우리가 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회에서 활동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반영됐는가를 계속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야 했다. 우리를 배제하고 우리 요구 없이 그냥 체결되면 또 다시 역사는 거꾸로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때마다 외교부 담당 국장은 “일본정부가 전혀 변화가 없다”, “피해자의 요구에 진전이 없다”고 계속 답변했다. 그래서 ‘아, 이번에도 힘들구나’라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외교당국자 회의가 열리지 못 했고, 8월 아베담화가 나왔다. 위안부의 ‘위’자도 없고,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배 책임도 언급이 없었다. 오직 서구에 대한 반성과 사죄만 있었다. 그 때 당시 ‘아, 광복 70주년이지만 올해도 그냥 지나가나보다. 우리는 내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할머니들과 함께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실시한 TF팀 조사 결과 보고서를 보면 합의 주도권이 외교부에서 청와대로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일본 총리 관저에서 합의를 긴밀하게 진행하기 시작한 시기다. 그 땐 외교부 당국자 회의가 안 열렸다. 우리는 몰랐다. TF 결과보고서에 나온 내용이다. 2015년 12월 24일 밤에 연내 타결을 목적으로 기시다 외무상이 방한한다는 일본발 뉴스가 떴다. 외교부에게 확인했는데 모른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모를 수밖에 없었다. 외교부가 아니라 청와대가 주도했을테니까. 그 후 뉴스에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이다, 국고 거출 등의 얘기들이 언론에 조금씩 보도가 됐다. 여기에 덧붙여 한일 국장급 협의가 12월 27일 열릴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27일 오후에 한일 국장회의가 열렸다. 그 때 계속해서 언제 끝나는지 물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다 끝난 밤에, 도저히 누군가와 물리적으로 의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밤에 언론에 나온 통보 그대로, 엠바고 상태로 통보받았다. 일본 정부 책임 인정, 사죄, 국고 거출. 기밀유지 조건이었다. 저는 기밀유지 조건에 ‘네’라곤 했지만 그 내용을 기밀유지 할 순 없었다. 그래서 법률가에게 연락하고, 일본에도 연락하고, 내일 이런 내용이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침 일찍부터 법률가들을 모아 놓고 통보받은 내용을 가지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의논했는데 아무도 이것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그 때 제가 이용수 할머니도 대구에서 올라와 달라 요청해서 이용수 할머니도 논의 자리에 같이 있었다. ‘아직 이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기자회견을 보자’해서 다 같이 기자회견을 봤다. 그런데 윤병세 장관이 “이것으로 불가역적인 해결이다. 국제사회에 비난과 비판을 자제하겠다. 소녀상 철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발표했다. 그 때 ‘아, 국민도, 언론도, 우리도 다 속았구나’라고 생각해서 즉각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협의하지 않았다. 11차례 만난 것? 15차례 피해자 접촉? 그건 우리들이 합의에 대해 요구하고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만난거지 그들이 어떻게 하겠다고 설명한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피해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2015 한·일합의가 채택되고 일방적으로 발표됐다. 그 자리는 어떻게 진행되나 확인하는 자리였지, 공유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외교부의 대답은 늘 “진전이 없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어떻게 일본정부가 하고 있다든가 구체적인 건 우리랑 논의하지 않았다. 김복동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한 말이 무엇이냐면 “명절 때 인사 온다고 해서 오라고 했더니, 명절 방문한 것도 15차례에 포함돼 있었어? 그럼 거부했어야 됐네?”였다. 그 정도로 2015 한·일 합의 이후 그들의 변명은 형편이 없었다. 2015 한·일합의는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었고, 피해자들에게도, 관련 단체에도, 인권을 위해 일해온 세계 시민사회에도 문제적인 합의였다. TF 결과에서 이면 합의까지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2015 한·일합의 때문에 화해치유재단 해산된 작년까지 제자리걸음이었다. 늘 일본정부는 “한·일합의로 다 끝났다. 왜 골대를 옮기냐”고 했고, 우리 정부는 합의 때문에 한 마디도 말 못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딜가든 그 합의 때문에 소녀상 철거 움직임들, 위안부는 강제연행 아니다, 독도는 일본땅이라 하는 일본의 맹공격에 대응하지 못 했다. 이런 일들이 그 합의 때문에 있었는데 그걸 사전에 협의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의기억연대 후원금 유용에 대해서도 야당이 몰아붙이고 있다. 호프집(옥토보훼스트) 맥주값 비용으로 3339만원 지출 처리됐는데, 그 호프집에선 430만원만 받았다고 한다. 차이가 많이 난다. 해명이 필요해 보인다. 금액을 입력하는건 회계 담당자가 한다. 제가 추후 확인해보니까 입력하는 칸이 하나밖에 없더라. 그럼 ‘옥토보훼스트 외’라 쓰고 총체적으로 입력하는 거다. 1년에 한번 후원회를 연다. 이건 다른 시민단체도 마찬가지다. 옥토보훼스트는 그날만큼은 자신들의 이익을 만드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맡기지만 모든 시스템은 그대로 옥토보훼스트가 그대로 제공한다. 요리사, 자원봉사자 등을 다 옥토보훼스트 측이 제공한다. 한 해만 한 것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를 내걸었을 때 후원이 어렵다. 보통 이렇게 장소를 잘 안 빌려준다. 그런데 옥토보훼스트가 빌려줘서 그동안 해왔다. 430만원 금액 포함해서 후원회 개최에 사용된 돈이 3339만원이다. 그 날 문화행사 진행비, 감사패와 현수막 제작비, 추가적 물품 구입비, 티켓비 등 행사 하나를 하기 위해 여러 비용이 든다. 그 총비용이 3339만원이다. 그런데 마치 술집에서 하루 밤에 쓴 것처럼 보도가 나갔다. -정의기억연대는 인력부족에 따른 회계 오류를 인정했다. 공격 많이 받는 만큼 더욱 철저히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 남는다. 어떤 한계가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정의기억연대에서는 회계를 한 사람이 하고 있다. 총 인원이 8명밖에 없다. 한 사람이 영수증 발급부터, 기부금 신청하고 정부 보고하고 모든 일을 다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입력을 세밀하게 하지 못했을까 싶다. 대부분 NGO가 그렇지만 사람을 인건비 문제로 사람을 많이 고용하지 못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활동 중점은 운동을 하고, 이슈를 만들고 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런 일들을 계속 해야했기 때문에 회계에 부족함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보완해 나가면 된다. 횡령은 아니라는 것은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몰아가는 것은 의도적이다. 혼자서 하기도 버거운 일을, 그렇게 철저하게 홈택스에 입력하고, 보고하고 홈페이지에도 전체 일년 회계 결산을 보고하고 과정을 거치는데 마치 횡령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란 생각 가질 수밖에 없다. 활동가들에게 어떤 잘하라는 격려는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우려를 하지 않도록 보완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은 좋다. 그런데 활동가들의 활동까지도 폄훼하는 그런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 할머니들에게도, 활동가들에게도 상처를 주지않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정의연 전 이사장 월급이 최저임금보다 높은 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도 있다. 제가 정대협 간사를할 때는 1992년도에 30만원을 받았다. 그 다음 50만원. 몇 년 지나고 80만원을 받고, 2002년도에 150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해서 270만원을 받다가, 300만원을 받았다. 이사회에서 350만원으로 작년에 올려줘서 거부했다. 그래서 300만원을 받았다. 그게 정대협 30년 일했던 제 활동비다. 그 외 교통비를 쓰거나 이런 비용들은 활동비에서 썼다. 교육하거나 연대활동 하러갈 때 그냥 가능하면 내 활동비로, 사비로 썼다. SNS에서 저는 유급활동가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공개했다. 여러분들 후원이기에 저는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공개했고, 그리고 25년 간 수요일 책쓰고 그 돈은 박물관에 기부하기도 하고 나비기금에 기부하기도 했다. 가능하면 제 활동을 활동가로서 살고싶어서, 유급활동가긴 하지만, 그렇게 해왔다. -5년간 소득세 643만원 납부하신 걸로 나온다. 계산하면 부부 각자 연봉이 최대 2500만원대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축소 신고 한 것 아니냐는 비판 있다. 이에 반해 재산은 재산 8억원 신고했다. 시부모, 친정부모의 재산 합쳐 8억이라는데 원래 재산은 2억 정도인 것이 맞나? 맞다면, 일반적으로 이렇게 하지 않는데 왜 그렇게 신고했나. 국회의원 후보를 신청할 때 재산 신고하는 칸에는 부모님들까지 다 쓰게 돼 있었다. 그래서 저희 부보님 아파트, 평생을 해서 산 아파트와 지금 쓰는 차,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승용차, 시어머니가 사는 방 한 칸짜리 빌라가 다 포함된거다. 다 안 써도 되는줄은 몰랐어. 쓰라고 하니까 충실하게 다 쓴 거다. 당에도 어떤 내역인지 설명했다. 신고서를 쓸 때 당에서도, 선거관리위원회도 이 내용들을 안 써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칸이 있어서 쓴 거다. 혹시 잘못될 수 있으니까 다 선관위에서 감수받았다. 소득세는 제가 정확하게 어떻게 산정되는지 모르겠는데, 세무서 가서 떼어온 그대로 제출한거다. 평소 소득세는 정의연에서 활동비 받는 것, 가끔 원고를 쓸 때 받은 것에 대한 세금 포함된 것이니까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소득세를 직접 신고하는 건 아니지 않나. 소득세는 급여를 받을 때 사무실에서 처리한다. 급여를 받으면 세금이 이미 떼진 상태에서 오지 않나. 그렇게 받았지, 그게 어떻게 산정돼서 하는지는 모른다. -딸 UCLA 유학비용을 처음엔 전액 장학금이라 했다가, 나중엔 남편의 배상금으로 해명. 이를 번복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있다. 제가 한 번도 그렇게 번복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말이 됐는지 모르겠다. 제 딸이 처음부터 UCLA에 간 건 아니다. UCLA에 가기 위해 언어도 해야 하고, 피아노 전공이라 그와 관련한 공부도 미리 해야 했다. 그 공부를 시카고에서 일년 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했다. 그래서 그걸 SNS에 올린적이 있다. 자랑하려고. 딸을 칭찬하려고. 딸이 시카고에서 일년 동안 공부하는데 전액 장학금 받게 됐다고 썼다. UCLA 논란 나왔을 때는 언급 필요성도 못 느꼈다. 왜 제 딸아이가 무슨 돈으로 공부하는지를 언급해야 하나. 이미 남편도, 저도 경제생활을 하고 있고, 저희 가족도 탄탄하다. 어제 소명한 것처럼 저희는 2018년에 큰 배상받은 것이 있다. 그 배상금은 제 아이가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태어났고, 그래서 이 배상금은 우리 것이 아니라 너의 것이라고 딸에게 말했다. 그 때 딸이 UCLA에서 공부하고 싶은데 장학금 제도가 어렵다고, 어떻게 할지 물었다. 그 때 이 돈이 있으니까 이 돈으로 공부했으면 좋겠다, 너의 꿈을 키워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대로 학비로 썼다. 딸이 이번 6월에 졸업인데 돈이 충분하다. 향간에 UCLA가 얼마다? 이런 얘기 도는데 그것도 다 소명했다. 기숙사비까지 다 합쳐도 8만 5000불이다. 딸이 2018년 9월부터 했는데 미국은 한국과 학기제가 달라서 올해 6학기를 다 마쳤다. 6학기가 총 석사학위 기간이다. 다 합쳐도 8만 5000불 정도다. UCLA와 시카고는 별도다. 일년 동안 준비하는 과정이 있고, 거기에서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했다. 그 공부 중에 UCLA를 지원했는데 합격했다. 장학금으로 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 장학금은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 돈으로 학비를 하자고 해서 쓰고 있다. -오늘 아침에 페이스북 글을 봤는데 조선일보 기자가 딸 취재 들어 갔다고 썼더라. 조선일보 반박은 그런 기자가 없다고도 하던데 어떤 일이 있었나. 카카오톡 메시지 그대로 친구가 보내왔다. 친구가 보낸 메시지에 조선일보 기자라고 하는 이름 공개 했다. 그 기자가 음대생을 찾고 있다, 그래서 너를 소개를 했다라고 하더라. 그 친구에게 와서 내 딸이 어떤 차를 몰고 다니냐, 어디서 사느냐, 놀면서 다니느냐를 물어봤다고 하더라. 이 친구가 집은 기숙사라 학교 근처고, 차는 없고 걸어다닌다고 얘기했다 하니까 “그냥 그렇게 공부만 하고 다니는 친구군요”하고 끊었다고 하더라. 소개한 친구는 조선 기자라고 소개 했고, 그 메시지에도 그렇게 써있다. -지인통해서 취재가 들어온건가? 조선일보 측에서 딸 친구를 취재하고 다니는 거다. 그리고 채널A 기자는 오늘 세 명이 저희 집을 방문했더라. 문은 안 열렸지만 세 명이 들이닥쳤다. -집에 남편분이 있었나? 딸이 있었다. 딸이 “엄마 집에 오지마”라고 하더라. 친구 취재 사건 터졌을 때 딸이 “나 때문에 엄마에게 무슨 지장있어?”라며 걱정하더라. 굉장히 성실하게 공부하는 아이다. 내가 많이 도와주지 못 했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가 개척해서 하고 있다. -보수진영의 프레임 공격이라고 생각하나. 정의연에서는 왜곡보도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하는데, 당선자 본인도 법적 대응할 계획있나. 정의연에서 하고 있으니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를 처벌하고 그런 것보다는 그렇게 활동가와 NGO를 공격하는,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보도하는 것에 대해서 재발 방지 차원에서 법적인 활동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고 저는 차분하게 어떻게 하면 국회활동을 잘 해나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공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사퇴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던데 그러면 안 된다. 사퇴는 돌아가신 할머니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저를 지지해주는 수많은 세계 각지 동포들, 연대해주신 분들, 그 분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외 동포들은 비례밖에 못 찍지 않나. 어떤 분은 윤미향을 당선되게 하려고 버스를 몇 시간씩 타고 가서 투표했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투표했다. 그 분들의 뜻은 국회 가서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해결해 달라는 취지로 느껴진다. -이용수 할머니와 무슨 오해있었나. 만나서 풀었나. 지금 할머니와 연락이 잘 안 되고 있다. 일요일에 만나려고 할머니가 계신다는 곳으로 갔는데 결국 못 만나고 올라왔다. 지금은 할머니가 왜 그런지 안다. (최용상 가자평화인권당 대표 때문인가?) 저는 누가 뒤에 있고 그런 것보다도, 이용수 할머니 신고 전화를 제가 받았다. 그 때 간사는 저 혼자였고, 수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했다가 그만 두고 떠나는 그런 일을 겪었다. 그런데 끝까지 할머니 곁에서 함께한 사람은 나였다. 그런 내가 국회로 떠난다니까…. 처음에 “국회 가서 할머니랑 같이 할거에요”라고 할 땐 할머니가 굉장히 신나하셨다. 그런데 심경 변화가 생긴 것 같다. “이 문제 해결하고 가라”고 하시더라. 제가 할머니한테 웬만하면 “네, 할머니 알았습니다”라고 하는데 이 문제는 이미 비례도 당선됐고, 또 국회로 가는 것을 저는 떠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는 국회에 가서 이 문제를 계속 함께 한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계속 “이 문제 해결하고 가”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그래서 “할머니 아니에요, 봐주세요”라고 했는데… 할머니 입장에선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문제는 내가 풀어야 하고, 앞으로 활동에서도 지속적으로 할머니랑 만나려고 시도할 것이다. -최용상 가자평화인권당 대표와 관련해서, 수요집회를 중단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펴는데 어떻게 대응하실 것인가. 수요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 왜냐면 그동안 돌아가신 분의 약속도 그렇고, 수요시위 시작할 때 이번 정부에게 우리의 이야기는 “해결될 때까지 수요시위는 계속 된다”였다. 그 약속지키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해왔고, 오히려 이번 일로 수요시위 나오겠다는 분도 많다. 감사한 일이다. 최용상씨 발언은 일본정부가 원하는 발언이다. 왜 그렇게 스피커가 되려고 하는지 가슴이 아프다. -최용상 대표에게 해주고 싶으신 말씀은? 이미 그 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더 이상 피해자와 활동가를 분열하려는 어떤 활동, 언행을 중단하고 태평양 피해자 유족답게 일본정부에 강제동원의 피해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함께 손잡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 장학금이 정의연 이사 자녀에게 지급된 것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이건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평소에 늘 약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다. “해고된 노동자 힘내라. 쨍하고 해뜰날 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라란 이야기를 해고된 노동자에게도 하시고, 세월호 희생자들 앞에서도 힘내라 하시고, 평화운동, 통일운동, 여성운동 늘 지지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재일조선학교 문제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항상 나는 희망을 갖고 살았다고 말씀했기 때문에 희망을 받드는 일을 하자고 했다. 할머니가 남기신 기부금으로 한국의 시민사회 단체 자녀들, 사실 활동가들이 굉장히 어렵다. 그 활동가들 자녀에게 장학금을 주는 사업을 해서 희망을 주자고 생각했다. 김복동이 아이들의 학업 속에 살아 있다는 것,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것 보여주자는 취지로 장학금을 줬다. -국회에서 어떤 활동 할 생각인가. 앞으로 위안부 운동의 방향은 무엇인가. 저는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 지금 한일간에도 분쟁이 있고 갈등이 있지 않나. 이것을 어떻게 해결 할까 고민하고 있다. 30년 동안 활동을 해온 만큼 국회의원 중에서 가장 일본과 일본정부, 일본시민사회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가장이라기엔 어폐가 있지만 그래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지혜로운 방법으로, 부드러운 방법으로 어떻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저는 평화를 만들고 싶다. 국회는 입법기관이지 않나. 법을 활용해서 아직 완료되지 않은 진상규명, 교육 체계와 해외 각지에 이 문제 알리는 역사 인식의 확산, 그리고 일본정부가 계속 일본의 역사 인식을 홍보하는데 우리도 따로 한쪽에서 목소리를 내서 균형감 있게 인식하고 판단해서 알릴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노력 하고 싶다. 그 노력을 위해서 국회로 가겠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이번 일로 인해서 어느 누구도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용수 할머니에게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거나 그런 인식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노력을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국회에 가서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 달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 이영훈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거짓” 또 친일·반한 발언

    이영훈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거짓” 또 친일·반한 발언

    지난해 여름을 달군 친일·반한 발언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11일 오전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 발간 기자회견을 열어 책 내용을 소개하며 “일본인 위안부는 일본 정부, 모집업자, 위안부의 부모 친지 등 3자의 합작품이었다”, “전시동원 노무자는 끌려간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응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책은 지난해 7월 출간해 사회적으로 논란을 부른 ‘반일 종족주의’에 관한 비판을 재반박한다. 이 교장을 비롯한 필자들은 앞선 책 출간 이후 쏟아진 비판에 대해 언론 기고나 인터뷰, 유튜브에서 했던 반론 등을 책으로 엮었다. 다섯 가지 주제에 관한 25편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특별 기고를 더해 모두 28편의 글로 구성했다. 이 교장은 “지난해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한 이후 서점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적지 않은 분노와 매도, 심하게는 저주 같은 공격과 비판이 있었다”며 발간 취지를 밝혔다. 책의 내용은 ‘반일 종족주의’ 당시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강제납치설을 부정하고 “일본 정부, 모집업자, 위안부의 부모 친지 등 3자의 합작품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근거로 취업사유서, 호주 취업동의서, 경찰 확인서 등을 들고 “역사적 관점에서 위안부를 재평가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시동원과 관련 “노예처럼 끌려가 혹사당하다 돌아왔다는 주장은 종족주의의 환상”이라며 “특히 소송을 제기한 노무자 4명은 능동적으로 응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지난 2018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근로정신대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이 교장은 이에 관해 “대법원은 이런 중대한 판결을 하면서 학술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은 주장을 검증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산도를 근거로 우리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실증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다”고 반박하고, 일제의 토지 수탈설도 “날조됐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나라 근대의 출발은 사법제도가 성립한 일제강점기이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근대인으로 개발하는 과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 교장을 비롯해 김낙년 동국대 교수, 김용삼 펜앤마이크 대기자, 주익종 이승만학당 상근이사, 정안기 전 서울대 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등 기존 필진에 차명수 영남대 교수와 박상후 전 MBC 전국부장이 참여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근로정신대시민모임 일본 나고야 ‘금요행동’ 500회 집회 참여

    일제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돕고 있는 일본의 양심적 지원단체의 ‘금요행동’이 17일 500회를 맞은 가운데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등이 나고야에서 열린 이번 집회에 대거 참석, 공식 사과 등을 촉구했다. 17일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따르면 일본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열리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소송지원회) ‘금요행동’ 500회 집회에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 할머니를 비롯해 2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1박2일 일정으로 도쿄 미쓰비시 본사 앞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공식 사과와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배상 이행” 등을 촉구한다. 또 양 할머니 등은 일본 외무성과 미쓰비시를 방문해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나고야소송지원회는 지난 2007년 7월20일부터 도쿄에서 첫 시위를 시작했다. 단체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명이 지난 1999년 3월1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이 1심에 이어 2007년 5월31일 항소심까지 연거푸 패소했지만 법원이 일본정부와 미쓰비시 측에 의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 책임을 인정한 것에 희망을 걸고 문제 해결에 나섰다. 미쓰비시의 등 주요 기업 사장단 회의가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것을 알고 이 시기에 맞춰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2010년부터 8월부터 2012년 7월까지 2년여동안은 미쓰비시 측과 협상이 이뤄져 시위를 중단했지만 최종 결렬돼 다시 투쟁을 시작했다. 이 단체는 “너희가 한국 사람이냐. 한국에 가서 살아라”라는 등의 조롱 섞인 비판도 받았지만 나고야에서 도쿄까지 왕복 700㎞ 거리를 다니며 배상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나고야소송지원회의 투쟁이 힘을 잃어갈 무렵 2009년 3월 광주에서 강제동원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한국과 일본에서 강제동원 문제 해결 목소리가 높아지자 미쓰비시 측은 ‘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협의체’ 구성을 수용했지만 이마저도 결렬됐다. 일본에서의 활동은 한국에서 성과로 나타났다. 나고야소송지원회가 10년 동안 재판을 위해 조사한 피해 입증 자료가 한국 재판에서 유력한 증거로 활용됐으며 결과 지난 2012년 5월24일 대법원이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소송과 관련 기존 판결을 뒤집고 일본 기업에 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또 지난 2018년 11월에도 양 할머니 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도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근로정신대시민모임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은 사과는 커녕 오히려 판결을 악의적으로 트집 잡으며 한국 사법부 판결 명령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며 “이번 500회 집회를 계기로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에 대한 사과 요구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전범들 마음을 움직인…푸순의 기적

    전범들 마음을 움직인…푸순의 기적

    죄인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만천하에 범죄 사실을 털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가 몰아붙이고 감행했던 악행과 사건의 일선에 있던 이들에게서 참회와 개선을 기대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일제 침략전쟁 중 만행을 일삼은 전범들이 참회, 증언하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고 나서는 일이 가능할까. 한겨레 일본 도쿄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낸 김효순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를 통해 실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밝혀 눈길을 끈다. 저자가 당사자며 관계자, 각종 기록을 종합해 풀어낸 핵심은 ‘푸순(撫順)의 기적’이다. 푸순전범관리소에 수감됐던 전범들이 마음을 돌려 일본 정부에 참회와 방향 전환을 촉구하게 나선 과정이 흥미롭다. 푸순전범관리소는 종전 후 옛 만주국과 중국 등에서 소련군에 체포된 일본군 전범들을 수감했던 곳이다. 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다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 중국에 넘겨져 이곳에 수감된 일본군은 1000명 정도였다.그야말로 뼛속까지 황국신민 정신과 군국주의 교육에 물들었던 전범들은 일제정책에 몸 바친 자신들의 행적을 놓고 한 치의 반성과 회의도 없었다. “군벌의 폭정으로 도탄에 빠진 중국 인민을 구원하려 했던 우리를 가둬 두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5족 협화의 낙원을 실현하기 위해 만주국을 세웠다”는 주장으로 일관했지만 자신들을 대하는 전범관리소의 인간적인 대우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수감 첫날부터 전범들은 흰 빵과 쌀밥을 받았고 정월엔 떡과 과자도 배급됐다고 한다. 전범관리소의 중국인 직원들은 겨우 수수밥을 한두 끼 먹을 정도였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중국 인민들의 정성”이라는 말을 전범들에게 늘 전했다. 범죄 행위를 뉘우치라거나 죄상을 자백하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세뇌 작전’이라며 의심하던 전범들이 결국 관리소 직원들의 진정성을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일본 육군 34군 보도반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된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 이즈미 다케가즈가 대표적이다. 수습사관 시절 붙잡혀 온 중국 농민들을 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저하다 결국 부하 하사관이 대신 처리하게 한 일을 마음의 짐으로 여겼다. 그는 고민 끝에 중국인 관리소 직원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부하가 베는 것을 막지 못해 중대한 책임을 느낀다”는 이즈미의 말에 그 직원은 눈물을 흘리면서 “정말로 당신의 양심을 위해 기뻐한다”고 말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1964년 4월 일본으로 귀국한 전 만주국 헌병훈련처장은 수기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중국대륙에서 전쟁범죄를 거듭한 12년 4개월 동안 귀신이었다면 패전 후 복역 기간을 거쳐 마침내 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 전범은 귀국 후 일본 당국이 나눠 준 군복과 군화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살아남아 돌아왔는데 다시 무참한 혈조(血潮·칼날 옆면에 낸 홈)를 생생하게 생각나게 하는 저주스러운 군복과 군화를 받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혐오감에 시달렸는가….” 전범관리소에 수감됐다 귀국한 이들은 ‘남은 인생을 전쟁 반대와 평화를 위해 살겠다’며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를 결성했다. 이들은 책자 발간이나 공개 강연을 통해 중국인 포로와 민간인 학살, 약탈, 방화, 생체해부와 실험, 성폭행, 노무자 강제연행 등의 전쟁범죄를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극우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 정부에 맞서고 있다. 1997년 역사수정주의 움직임이 거세지자 계간지를 창간해 반격에 나섰고 2000년 12월 도쿄에서 군 위안부 문제 심판을 위해 열린 여성국제전범 법정에서 위안소 운영을 폭로한 두 증인도 중귀련 회원이었다. 저자는 “중귀련은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유지가 어려워져 2002년 해체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시민단체, 학자, 언론인, 시민 등이 참여한 ‘푸순의 기적을 이어 가는 모임’이 이어받고 있다”고 마무리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강제징용 피해자 측 “한일 공동 협의체 만들자”

    강제징용 피해자 측 “한일 공동 협의체 만들자”

    “문제 해결 위해 정부 등 관계자 동참 한일청구권협정 ‘수혜 기업’도 포함” 사죄 증거로서의 배상·역사 교육 필요 일본에서도 동일한 기자회견 열려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지원해 온 한일 양국의 변호사와 시민단체가 문제 해결을 위해 ‘공동 협의체’를 창설하자고 6일 제안했다. 일본이 2018년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빌미로 지난해 7월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서면서 한일 외교갈등이 지속되자 양국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동의 해결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소송 대리인단과 지원단 등 ‘강제동원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바라는 한일 관계자 일동’은 이날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내용의 구상안을 발표했다. 일본 도쿄에서도 동일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리인단과 지원단은 “협의체는 강제동원 문제 전체의 해결 구상을 일정 기간 내에 제안하며, 양국 정부는 협의체 활동을 지원하고 협의안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협의체에는 피해자들의 대리인 변호사와 지원자, 양국의 변호사·학자·경제계 관계자·정치계 관계자 등이 포함돼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들은 협의체에서 이뤄질 협의의 바탕에 일본 정부와 가해 기업의 ‘인권침해 사실 인정’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일본 법원이 피해자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도 강제연행·강제노동 등 불법행위를 인정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양국 법원 모두가 인정한 ‘인권침해 사실’을 일본 정부와 기업이 받아들이고 사죄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사죄 증거로서의 배상 ▲사실과 교훈의 다음 세대 계승(역사교육) 등의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강제동원 문제의 본질은 피해자 개인의 인권 문제인 만큼 어떠한 국가 간 합의도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의 역할도 강조했다. 이들은 “정부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그 후에도 피해자의 권리 구제를 소홀히 한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기업엔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른 경제협력으로 기업의 기반을 만들고 발전해 온 ‘수혜 기업’이 있다”면서 자발적으로 문제 해결에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방안은 지금껏 양국 정부가 내놓은 대안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 정부는 ‘한일 기업의 자발적 위자료 지급(1+1)안’을, 문희상 국회의장은 ‘한일 기업과 국민의 자발적 위자료 지급(1+1+α)안’을 제안했지만,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다만 일각에서는 대리인단과 한국 정부가 ‘사전 교감’을 주고받았을 여지가 있는 만큼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임재성 변호사는 “이번 안은 한일 양국의 법률대리인과 시민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낸 안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강제징용 민사소송 절차가 지체되고 있는 데 대해서는 “정치·외교적 논의와는 별개로 사법 절차는 절차대로 응해야 하는데 일본 정부가 송달을 방해하고 피고 일본 기업에는 직접 소송에 참여할 기회조차 박탈해 버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손 잡은 한일법률가 “강제동원은 인권 문제···조속 해결하라”

    손 잡은 한일법률가 “강제동원은 인권 문제···조속 해결하라”

    민변은 서울에서, 일본 법률가들은 도쿄에서이원으로 한일법률가 공동선언 동시 개최해 “강제동원은 정치 외교 아닌 인권 회복 문제”“한일 양국 정부와 일본 기업이 조속 해결해야”한일 법률가 단체들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정치외교의 문제가 아닌 인권회복의 문제라며 한일 양국과 일본 기업이 조속히 해결할 것을 한 목소리로 촉구했다.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주최로 20일 오후 서울 서초동 민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동원에 관한 한일 법률가 공동선언’에서 양국의 법률가 단체들은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은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양국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구축해 진정으로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제2호 1항은 청구권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협정에 의해도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배상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고 아직 해결된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2012년과 지난해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서 이 같은 점이 확인됐을 뿐 아니라 2007년 중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과 일본 정부에서도 개인배상청구권은 인정을 했던 점을 설명한 것이다. 이들은 이어 “한국 대법원 판결은 피해자의 권리를 확인하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적정한 소송절차를 거쳐 도출된 결론으로 존중돼야 한다”면서 “일본 기업은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을 위해 확정판결을 수용하고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의 판결 수용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일의 과거사 해결을 위한 기금재단인 ‘기억·책임·미래’, 중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 사건에서의 일본 기업과 피해자와의 화해에 기초한 기금에 따른 해결 사례 등을 참고해 필요하고 가능한 조치를 신속히 도모할 것을 요구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공동선언에 우리나라에서는 민변과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인권법학회,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등이 참여했고 일본에서는 일본민주법률가협회, 민주법률협회, 사회문화법률센터, 징용공 문제의 해결을 지향하는 일본 법률가 유지 모임 등이 참여했다. 일본 법률가 단체들은 이날 오후 3시 도쿄 니혼바시 공회당에서 공동선언을 가졌다. 김호철 민변 회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냉전체계의 산물이면서 양국 간의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 불구의 협정”이라면서 “강제노동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금전배상을 하는 것은 법의 원칙과 선례에 따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인권법학회 회장인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강제동원 문제는 세계2차대전 이후의 국제인권법에 명확하게 위배된다”면서 “개인청구권은 절대 소멸되거나 청구권 협정에 의해 해소될 수 없다는 게 국내와 일본 법률가들의 시각”이라고 강조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비뚤어진 일제종족주의 어디서 왔나

    비뚤어진 일제종족주의 어디서 왔나

    일제종족주의/황태연 외 지음/넥센미디어/435쪽/2만 1000원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모욕하고,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을 허구라 주장하는 내용의 책 ‘반일종족주의’(미래사)를 반박하는 작업이 최근 활발하다. 오히려 이런 활동이 그 책에 대한 관심을 부른다는 지적도 있지만, 논쟁은 분명 필요하다. 신간 ‘일제종족주의’는 반일종족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을 이렇게 부르면서, 그 책의 내용을 반박한다. ‘민족’이 아닌 ‘종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차용해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일본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자들, 정확히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을 겨냥했다. 황태연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총론을 쓰고, 나머지 5명의 필진이 일본군 위안부, 학도병, 강제징용, 식민지근대화론, 고종, 독도를 담당했다. 이영재 한양대 학술연구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라 주장한 이 전 교수의 주장에 대해 “일본 극우파의 이론적 스승으로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가 주장한 ‘위안부와 전장의 성’(1999)에 대부분 기초했다”고 꼬집는다. 하타의 논리는 당시 공창제가 존재했고, 매춘은 공인됐으며 합법이기 때문에 위안소 역시 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위안부들이 의지에 따라 일했고 고수입을 받았기 때문에 성노예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이를 위안부에 관한 유엔과 국제사회 보고서로 반박한다.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명명한 첫 번째 보고서이자 유엔인권소위원회에서 1996년 채택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가 강압적으로 통제됐고, 국제법 위반에 해당하는 명백한 인권침해가 국제적으로 공인됐다고 주장한다. 또 1998년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배상, 책임자 처벌을 골자로 한 ‘맥두걸 보고서’로 일본의 책임을 묻는다. 이어 위안부 강제연행 실태, 당시 위안소 실태 등을 설명한다. 책은 ‘반일종족주의’를 그저 학술적으로 논박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총론을 쓴 황태연 교수는 “외국의 ‘역사 부정죄 처벌법’ 선례를 따라 ‘일제 식민통치 옹호 행위 및 일본의 역사부정에 대한 내응 행위 처벌 특별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한다. ‘반일종족주의’ 저자들과 같은 이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내세워 자신의 배를 채우고, 이들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가 크다는 이유다. 책에는 다소 과격한 주장도 있고, 학술적 검토가 보충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건전한 역사 논쟁이라는 측면에서는 책의 방향성은 긍정적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외신 “日 달랜 文… 표현 수위 낮췄다”

    해외 주요 매체들이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제74돌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대일 발언 수위가 낮아졌고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NYT)와 AFP 통신, 로이터 통신 등 외신은 문 대통령의 이날 경축사 중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는 부분을 공통으로 인용했다. NYT는 ‘한국 대통령이 일본과의 갈등 속에서 회유 목소리를 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두 아시아 핵심 동맹국 사이에 쓰디쓴 대립이 몇 주간 이어진 후 문 대통령은 일본을 달래는 언급을 내놨다”고 보도했다. 로이터 통신은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에 일본에 대화를 촉구했다’는 제목을 달고 “일제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문 대통령이 최근 일본을 향해 사용한 거친 표현에서 수위를 낮췄다”고 했다. AFP 통신도 “(문 대통령이) 일본을 향해 올리브 가지를 흔들었다”고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일본이 앞서 소재 수출 1건을 승인한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신호’로 평가했다. 반면 북한은 이날 일본을 향해 “죄의식은 꼬물도 없이 시대착오적 망동을 하고 있다”고 맹비난하며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다. 북한 조선인 강제연행 피해자·유가족협회는 이날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 대변인 담화를 내고 “우리 전체 조선의 과거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은 과거 죄악에 대한 죄의식은 꼬물만큼도 없이 대세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조선반도 재침 야망 실현에 피눈이 되어 날뛰는 일본의 오만하고 시대착오적인 망동에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준렬히 단죄규탄한다”고 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시민단체 “‘5·18 망언’ 규탄했는데 구속영장 웬말…철회하라”

    시민단체 “‘5·18 망언’ 규탄했는데 구속영장 웬말…철회하라”

    민노총 간부 2월 한국당 전대서 “자유한국당 해체” 기습 시위검찰,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 청구하자 시민단체 반발지난 2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5·18 망언’ 의원을 규탄하는 기습시위를 한 민주노총 간부 등에게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시민사회단체가 수사당국을 규탄하고 나섰다. 민중공동행동과 5·18 시국회의, 4·16연대 등은 1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경은 민주노총 간부들과 학생에 대한 부당한 구속영장 청구를 즉각 철회하라”고 밝혔다. 앞서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 2월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한국당 전당대회 당시 기습 시위를 벌이고 “5·18 망언 발언 의원의 징계와 공식 사과를 촉구한다”면서 “자유한국당은 해체하라” 등 구호를 외치며 항의했다. 이에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은 지난 13일 업무방해 혐의로 민주노총 부위원장 윤모 씨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공동대표 김모 씨 등 3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단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시 시위는 민주주의 역사를 왜곡하고 5·18 영령을 모독한 자유한국당을 두고 민주시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정당한 행위였다”면서 “한국당은 폭언, 폭력을 행사하며 기자회견을 방해했고, 경찰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대신 집회 참여자를 강제연행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5·18 정신을 계승하자’고 하면서 정작 망언을 일삼은 세력에 대한 처벌, 재발 방지책 조치는 외면한다”면서 “정당하게 항의한 국민에 대해 구속영장을 남발하고 있다”며 영장 철회를 요구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주민 무시한 강정마을 해군기지 결정, 반대측엔 무자비한 과잉진압”

    “주민 무시한 강정마을 해군기지 결정, 반대측엔 무자비한 과잉진압”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29일 발표2007년 강정마을 선정과정서 주민의사 배제해군기지 건설 확정이후 반대측엔 과잉진압경찰이 고의적으로 반대측 주민 얼굴이나 배 가격“경찰 외 국가기관에 대한 진상조사 이뤄져야”2007년 제주 해군기지 부지 유치 사업이 지역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공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진상조사 결과가 나왔다. 또 같은해 6월 강정마을을 최종 부지로 발표한 이후부터는 경찰, 국정원, 해군 등이 반대 농성에 참여한 주민과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과잉진압하면서 다수의 인권침해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조사위)는 이런 내용을 담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사건 조사결과를 29일 발표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유치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사는 철저하게 배제됐다. 정부는 당시 제주에 해군기지 건설을 결정하고, 화순지역과 위미지역을 유력하게 검토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유보됐고, 당시 강정마을회장 등이 찬성측 주민의 제안에 공개적인 토론과 논의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해군기지 유치를 진행했다. 2007년 4월 찬성 측 주민을 모아 연 임시총회는 투표가 아닌 참석자의 박수로 해군기지 유치가 결정됐다. 조사위는 “당시 해군은 찬성 측 주민들의 식사나 모임에 금품을 지원했다”며 “해군기지 유치를 제안한 마을회장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매달 일정한 금액을 지원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제주도는 임시총회가 열린 한 달 뒤인 같은해 5월 강정마을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했으며, 국방부는 같은해 6월 해군기지 건설지역으로 강정마을을 결정했다. 유남영 위원장은 “하자있는 주민 총회날로부터 제주도가 최종후보지 결정까지 15일, 국방부의 결정은 45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대다수 주민들의 의견이 배제된 결정이 내려지자 강정마을에서는 6월 19일 임시총회를 열어 주민투표를 진행하기로 했다. 경찰은 투표 과정에서 불법행위에 대처하고자 340명을 투입해 마을 주변에 배치했다. 조사위는 “해녀들이 투표함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찬반 양측 주민들의 고성과 욕설, 몸싸움이 발생했지만, 이를 제지하는 경찰은 없었다”면서 “현장에 있었던 서귀포시청 직원들이 ‘성공했다’라고 한 점을 비춰볼 때 불법행위에도 시청 공무원이나 경찰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해군기지 건설이 확정된 이후에는 경찰, 해군, 해경, 제주도 등 공권력의 과잉 진압이 수시로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2008년 9월 경찰, 해군, 국정원, 제주도의 유관기관 대책회의에서는 반대농성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 제주도의 고소고발에 이은 경찰 조처, 인신 구속 등의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특히 2011년 8월에는 육지경찰을 대규모로 제주도에 배치하면서 해군기지 반대 활동에 대응하는 기조가 강경해졌다. 반대활동가를 체포·연행하는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주먹으로 배를 때리거나 사복을 입고 접근해 주먹으로 반대측 주민의 얼굴을 때린 경찰도 있었다. 또 출입금지구역이 아님에도 무단침입을 주장하며 반대측 주민들을 체포·연행하기도 했으며, 버스를 포함한 차량 7대를 아무런 근거없이 압수하기도 했다. 조사위는 “경찰은 무분별한 강제연행, 특정 지역 봉쇄 등 이동권 제한,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시위대 해산, 종교행사 방해는 물론 불법적인 인터넷 댓글을 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해군은 해상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을 폭행하거나 보수단체 집회에 사용되는 음향장비와 식수 등을 지원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해경은 해상에서 해군기지 반대측 사람을 폭행하거나 고의적으로 카약을 전복시키기도 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해군기지 건설 반대 활동으로 체포·연행된 사람은 모두 697명에 달한다. 아울러 지난해 10월 국제관함식 개최 당시 정문에서 신고된 집회를 준비하던 반대측 주민과 활동가들이 ‘집회 준비를 해군들이 방해한다’며 현장에 있던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방관한 사실도 확인됐다. 조사위는 정부에 해군기지 유치 및 건설과정에서 주민 의사를 무시하고 물리력을 동원해 강행한 점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다. 이어 경찰청장에게는 해군기지 반대측 주민과 활동가에 대한 폭행, 폭언 등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의견 제시를 요구했다. 아울러 공공정책 추진과정에서 공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경찰력 투입요건과 절차에 대한 제도적 보완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유남영 위원장은 “조사위의 한계로 경찰을 제외한 국가기관에 대한 조사는 진행하지 못했다”며 “인권침해행위에 대한 전반적인 진상조사가 필요하며, 마을공동체가 복원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는 “잘못된 해군기지 추진 과정에 대해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즉각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며 “국가차원의 진상조사단을 꾸려 해군기지 입지선정과 추진과정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위안부 합의 문서 비공개 정당” 항소심서 뒤집힌 판결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는 1심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정보 공개를 통한 국민의 이익보다 정보 공개로 훼손될 수 있는 국익이 더 크다는 판단이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즉각 상고 의사를 밝혔다. 서울고법 행정3부(부장 문용선)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가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낸 정보 비공개 처분 취소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앞서 송 변호사는 2014년 4월부터 이듬해 12월 한일 외교장관 공동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협의 과정에서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 인정 문제’와 관련된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정보에는 한일 양국 간 제기된 구체적 주장 등 외교적 비밀에 관한 사항이 포함돼 있고, 외교 관계에 관한 사항은 특히 전문적 판단을 요한다”면서 “정보공개 여부에 관한 외교부 판단을 최대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일본의 입장이 일본 측 동의 없이 외부에 노출됨으로써 외교적 신뢰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양국 간 이해관계 충돌이나 외교관계 긴장이 초래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 정보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침해되는 국민의 이익이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해칠 우려가 있는 국가의 중대한 이익보다 더 커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12·28 합의로 관련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 정부가 어떤 이유로 사죄·지원을 하는지, 합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1심 판단과는 상반된다. 송 변호사는 “합의 이후에도 일본이 유엔과 국회에서 강제 연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소송이었다”면서 “더이상 정의가 지연되지 않도록 판결문을 잘 분석해 상고하겠다”고 말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한일 위안부 합의 문서 비공개는 정당”…원심 뒤집혀

    “한일 위안부 합의 문서 비공개는 정당”…원심 뒤집혀

    2015년 12월 28일 발표된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과 관련한 협상 문서 일부를 공개하라는 1심 판결이 2심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문서가 공개될 경우 한일 외교관계에 타격을 줄 수 있다면서 비공개 결정을 했다. 서울고법 행정3부(부장 문용선)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송기호 변호사가 외교부를 상대로 협상 문서를 공개하라며 2016년에 제기한 정보공개 소송에서 18일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비공개 처분을 한 외교부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해당 정보가 공개된다면 일본 측 입장에 관한 내용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부에 노출돼 지금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 쌓아온 외교적 신뢰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양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외교관계의 긴장이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비공개로 진행된 협의 내용을 공개하는 건 외교적·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될 우려가 크다”면서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사이에 민감한 사안인 만큼 협의의 일부 내용만이 공개됨으로써 협의의 전체적인 취지가 왜곡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앞서 1심 재판부는 송 변호사가 요구한 정보를 비공개해 보호되는 국가의 이익은 국민의 알 권리와 이를 충족해 얻을 공익보다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피해자 개인들로서는 절대 지워지지 않을 인간의 존엄성 침해, 신체 자유의 박탈이라는 문제였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국민의 일원인 위안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하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데 대한 채무의식 내지 책임감을 가진 문제로 사안의 중요성이 크다”면서 외교부의 비공개 처분이 위법하다고 밝혔다.송 변호사는 항소심에서 원심 판단이 뒤집힌 데 대해 취재진에게 “외교관계라고 해서 모든 문서를 비공개해야 하는 건 아닌 만큼 위안부 피해자들과 상의해 상고할 것”이라면서 “피해자가 한 분이라도 살아계시는 한 일본이 강제연행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일본이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할 때까지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만일 법원의 결정이 협상 문서 일부를 공개하라는 내용으로 최종 확정되면 외교부는 양국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군과 관헌의 강제 연행 인정 문제를 협의한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2014년 4월 한·일 국장급 협의 개시 후 2015년 12월 양국 정부가 합의문을 발표하기 전까지 진행된 제1~12차 협의 전문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속보]한일 위안부 합의문서 공개 소송 항소심서 뒤집혀…‘문서 비공개 적법’ 취지

    [속보]한일 위안부 합의문서 공개 소송 항소심서 뒤집혀…‘문서 비공개 적법’ 취지

    1심 “불가역적 합의라면 국민들도 어떤 배경인지 알아야”항소심 법원은 “외교부 정보 비공개 처분 적법” 판단한듯소송 제기 변호사 “대법원은 정당한 주장 받아줄 것 확신”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는 1심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소송을 제기한 변호사는 즉각 상고 의사를 밝혔다.서울고법 행정3부(부장 문용선)는 18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송기호 변호사가 외교부 장관을 상대로 낸 정보 비공개 처분 취소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외교부의 문서 비공개 처분이 적법하다는 취지다. 송 변호사는 2016년 2월 “12·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와 관련해 ‘군의 관여’, ‘성노예’,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선택하기로 하고 그 사용에 대해 협의한 교섭 문서를 공개하라”는 취지로 외교부에 정보공개를 신청했다. 일본이 위안부 합의에서 강제연행을 인정했는지 여부를 밝힐 목적이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외교 관계 등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정보공개법을 근거로 비공개 통지했다. 송 변호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송 변호사의 손을 들어줬다. “12·28 합의로 관련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면 피해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 정부가 어떤 이유로 사죄·지원을 하는지, 합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이날 항소심 재판부는 1심과 달리 판단하면서 최종 판단은 대법원으로 넘어가게 됐다. 이날 법정에서 선고를 지켜본 송 변호사는 “합의 이후에도 일본이 유엔과 국회에서 강제연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소송이었다”이라면서 “더 이상 정의가 지연되지 않도록 판결문을 잘 분석해 상고하겠다. 대법원에서 정당한 주장을 받아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센징, 꼬레아노 그리고 한국인 -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조센징, 꼬레아노 그리고 한국인 -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

    # 이민의 역사 :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으로 떠나다. “나두야 가련다. / 나의 이 젊은 나이를 / 눈물로야 보낼거냐.”<박용철, 떠나가는 배 中에서, 1930> 시인 박용철(1904-1938)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을 떠나야 되는, 떠날 수 밖에 없는 조선 젊은이들의 눈물을 <떠나가는 배>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해외 이주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었는 데, 재외한인으로서의 첫 해외 이주 공식 기록은 1903년 1월 13일로 남아 있다. 당시 101명의 조선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의 형태가 아니라 ‘계약 노동자’의 신분으로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고 이후 1905년까지 약 7,226명의 조선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물론 1800년대 후반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유랑민의 형태로 만주나 연해주, 러시아 등지로 이주한 비공식적인 기록도 남아있다. 격동하던 20세기 초 조국을 떠나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기억하는 곳, 인천의 한국 이민사 박물관이다.우리나라의 이민의 역사는 크게 4단계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바로 1860년대부터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1910년까지다. 이 시기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민중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 만주, 연해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경제유민(流民)의 형태로 이주하였다. 이중 중남미로의 이주는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난 것이 시작이며, 이들 중에서 300여명이 다시 1921년에 경제난을 피해 쿠바로 재이주한 기록이 남아있다.하지만, 본격적인 재외 한인 이주는 일제 강점기 시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로 본다. 바로 두 번째 시기다. 이 시기에는 일제로부터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난민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일제는 만주 지역에 25만명에 이르는 한인들을 강제로 집단이주시킨다. 또한 일본에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대규모 한국인들이 광산, 전쟁터로 강제 이주를 하였는데, 1945년 8월까지 약 230만 명이 이주하였다. 이후 일본의 패전이후 한인들이 조국으로 귀환하자 급속히 감소하여 1947년에는 598,507명으로 급감하였다. # 나라 잃은 딸들의 절규, 8만 명이 종군위안부의 이름으로 이중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가 등장한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산업을 지탱할 노동력 확보가 필요하게 되자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을 발표한다.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45년까지 조선인 노동자징발과 학도징용이 이루어졌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연행된 조선인 숫자만 724,787명에 이르고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조선인 강제연행자 수는 100만 명을 훨씬 뛰어넘는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이어서 실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들이 강제 이주된 것으로 추정된다.그런데 당시 일제는 ‘여성자원봉사대’라는 명목으로 20만 명의 여성을 전시 준비에 동원하였다. 이 중에서 소위 ‘종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성이 공식 기록으로만 8만 명에 이른다. 따라서 ‘종군위안부’ 이주 기록은 우리 민족에게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될 해외 강제 이주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남아 있다. 재외 한인 이주 세 번 째시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다.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이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미국 또는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1962년부터 현재까지다. 1962년에 한국정부는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로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시작하였는데, 최초의 집단이민은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의 농업 이민자들이 떠난 것이었다. 이후 독일로의 광부, 간호사 이민, IMF 외환위기 시절의 이민, 최근의 취업 이민 등으로 해외 이주의 역사는 계속 이루어져 오고 있다.바로 이러한 재외 한인 이주 역사의 기록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바로 인천에 위치한 이민사박물관이다. 우리나라 첫 공식 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2008년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축면적 4천100㎡ 규모로 만들어진 이민사박물관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100년의 재외 한인들의 고단한 이민 역사를 잘 담아 놓고 있다. <인천 이민사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월미도에 갈 일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 번쯤은 방문해도 좋다. 역사적인 의미가 풍부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 단위 방문. 3. 가는 방법은? - 지하철 인천역 하차→ 버스 45번 승차→ 해사고등학교 앞 하차 4. 감탄하는 점은? - 생각보다 오래된 이민 역사.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강제 동원 역사.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특색있는 박물관으로서 의미가 풍부한 곳인데 비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일제 강점기 시절 강제 이주한 우리 민족의 역사. 우토로의 사진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박물관 바로 앞이 월미도 관광지구다. 많은 식당과 횟집, 카페들이 있어 먹거리 걱정은 없다.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icmuseum.incheon.go.kr/articles/13446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월미도 관광지구, 차이나 타운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금은 재외국민이 해외에 거주하더라도 한국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선거를 할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3·1운동 100년] “3·1독립운동 정신은 아베가 명심해야 할 지향점”

    [3·1운동 100년] “3·1독립운동 정신은 아베가 명심해야 할 지향점”

    “3·1독립운동 정신이야말로 또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의 틀을 개조하려는 아베 신조 총리가 명심해야 할 평화의 이념이자 지향점입니다.” 야노 히데키(68)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 입법을 위한 일한공동행동’ 사무국장은 “3·1운동 100주년은 한국뿐 아니라 오늘날 일본에 있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과거도 현재도 역사에 냉담” ‘강제연행·기업책임 추궁 재판 전국네트워크’, ‘식민지 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등에 몸담으며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 및 배상을 촉구해 온 그는 3·1운동의 뜻과 이상을 기리고 이를 자국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 왔다. 다양한 3·1절 100주년 기념행사 및 집회가 그의 아이디어로 기획됐다. 지난 20일 도쿄 지요다구의 도쿄구정회관 사무실에서 야노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3·1독립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라며 “교육당국이 근현대사 중 한국 식민지배 등 침략에 관련된 부분은 입시문제로 일절 다루지 않는 등 수법을 통해 교육현장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야노 사무국장은 “군사적 대치가 초래한 엄혹한 사회구조를 강요당했던 남북한이 이제 그것을 바로잡아 동아시아에 평화를 실현하려 하고 있는데, 일본은 과거도 현재도 되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에 냉담한 태도를 지속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3·1운동은 잘못된 정부 바로 잡을 희망·의지” ‘3·1운동이 일본에서 반드시 기억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에게 묻자 2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는 잘못된 정부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입니다. 2016~2017년 연인원 2000만명에 가까운 한국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박근혜 정권을 종식시켰습니다. 저도 ‘촛불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았습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1조가 노래가 되고 함성이 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잘못된 위정자에 대한 단죄를 국민들의 힘으로 이뤄 내는 것을 보면서 그것의 원점이 3·1운동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날 일본에 반드시 필요한 가치입니다.” 두 번째는 ‘평화의 이념’이라고 했다.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의 화합을 시작으로 4월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통해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임을 남북이 분명히 했습니다. 아시아 평화 정착의 디딤돌이 놓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북한을 적대시하고 있고, 한국과의 관계도 나쁘게 몰아 가고 있습니다. 중국, 러시아와도 좋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군사력은 계속 강화하고 있습니다. 사실상의 항공모함 보유를 선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3·1선언은 ‘동양평화의 실현’이라는 시대의 요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100년 전 그때와 유사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3·1절 100주년 행사 이후 변화 기대” 그는 “3·1절 100주년 행사를 통해 많은 것이 한 번에 성취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의 양심세력에 대한 우익의 위협이 한층 거세질 것도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변화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니가타의 한 대학에서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 등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학생들로부터 감상문을 받았는데 ‘강제동원 같은 문제를 전혀 몰랐다가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다’, ‘우리가 이웃나라에 이렇게까지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상상도 못했다’, ‘당시 피해자들에게 이제라도 꼭 보상을 해 줘야 한다’, ‘왜 일본의 매스컴은 이런 걸 보도하지 않는가’ 등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들이었습니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색다른 인터뷰] “3·1독립선언, 현대적 관점서도 탁월한 동아시아 평화선언문”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과 일본은 과거보다 더 높고 두터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성난 얼굴로 응시하고 있다. ‘피해’와 ‘가해’라는 역사의 대척점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방향과 관점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두 나라 사이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고 발전적인 미래를 추구한다는 당위론적 명제는 갈등과 대립 속에 좀체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일 연구에 오랜 시간 천착해 온 도노무라 마사루(53) 도쿄대 교수(한국학연구센터장)를 지난 24일 도쿄 메구로구 고마바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100년 전 한국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의미와 발전적인 양국 관계를 위한 제언을 들어 봤다. 도노무라 교수는 지난해 국내 번역된 책 ‘조선인 강제연행’을 비롯해 활발한 저술활동을 펴고 있다.→오랫동안 일제강점기 한반도 연구를 해 오셨는데, 3·1 독립운동의 의미를 요약한다면. -3·1 독립선언은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탁월한 내용이 담긴 동아시아 평화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동양의 전통이 아닌데도,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누르며 그 평화적 전통을 깨고 있음을 지적했다.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에 독립을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3·1 독립선언서를 제대로 읽어 본 일본인은 거의 없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 →3·1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이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특히 강조했는데. -독립선언서는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독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 스스로 자립의 길을 걷겠다는 선언이었다. 관련해서 일본이 한국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본의 통치로 조선이 발전하고 있다는 일본 측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당시 일본은 철도와 도로가 놓이고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농업생산이 늘었음을 통계적으로 보이며 조선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는 그것이 조선인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3·1 독립운동을 보는 일본 내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 언론에서는 ‘천도교라는 미신을 믿는 불온한 사람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한국의 대중을 선동해 만세를 외친 사건’ 정도로 보도했다. 일본은 “천황(일왕) 아래에서는 일본인도 조선인도 평등하다”고 선전했지만, 그렇다면 왜 조선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3·1 운동은 일본에서 어떻게 기억돼 왔나. -식민통치 기간 중에도 3·1 운동을 기념하려는 움직임은 일본 당국의 거센 탄압 속에서도 지속됐다. 특히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을 계급투쟁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3월 1일을 전후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전단지 배포나 집회 개최 등을 시도했다. 일본 경찰들은 이것이 또 다른 민중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경계했고,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에 대한 탄압이 한층 강화돼 거의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1945년 일본의 패전 후에는 어땠는가. -전쟁이 끝나면서 3·1 운동을 기념하는 움직임이 되살아났다. 1947~48년 신문을 보면 재일 조선인들이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 진보진영에는 3·1 운동을 세계혁명을 위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전후로 과거 한국 식민지배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된 일본인이 늘면서 3·1 운동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에 대한 일본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대다수 일본인들은 타국에 대한 식민지배에 찬성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민을 소중히 여기고 국민들의 생활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1894년 청·일 전쟁 이후 제국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대다수 일본 국민들이 침략전쟁을 적극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침략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국을 침략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이 아니며, 소국주의와 평화주의를 견지해야 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식민지배에 반대한 정치인과 언론인도 있었다. 물론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자기 주장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라는 한계는 있었다. 패전 후 조선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 관계를 깨닫고 이를 반성하며 속죄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던 일본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식민자(植民者) 2세’로 불리는 한반도 출생자로 유명 소설가였던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이조잔영’과 같이 식민시대 조선의 아픔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에서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분위기가 이전보다 약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과거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던 때는 물론이고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총리 등 시절만 해도 과거사와 관련해 반성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 소장파가 세력을 얻은 후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수정주의 책들이 많이 나온 가운데, 1990년대 말 이후 보수우파의 현실참여 활동이 부쩍 늘어난 것 등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일 관계 악화의 주된 이슈는 일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배상 판결이다. 강제동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징용’이라는 말은 오해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전시노무동원피해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조선인 노무동원의 피해는 매우 광범위하다. 직접 노동을 했던 당사자만이 아니다. 동원됐던 사람의 가족들, 강제동원을 피해 산골에 은신하느라 인간답게 못 살았던 사람들도 모두 피해자다. 특히 미쓰비시니 신일철이니 장소와 시기를 기억하고 있는 피해자들은 재판이라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인 경우다. 당시 조선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일본어는 물론이고 한글조차 못 배운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렇다 보니 자신이 홋카이도에 있었는지, 규슈에 있었는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강제노동을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일 수 있는 사람들이 재판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피해까지 다 고려해 구제하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한·일 관계 미래에 대해 한 말씀 하신다면. -일본에는 정치인이나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을 통해 일본에 대한 반감과 반일 행동이 강화될 것으로 우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3·1 운동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응원하고 한국인들 스스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벌인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중년 이후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지배했던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한국은 경제적으로 잘사는 민주주의 국가로서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미래 한·일 관계에 희망을 주는 부분이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도노무라 교수는 누구 1966년 일본 홋카이도 출생. 와세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와세다대 사회과학연구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등을 거쳐 2007년부터 도쿄대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일본근대사.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의 역사학적 연구’(2010년 국내번역), ‘식민지 시기에 있어서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 등이 있다.
  • 北 위안부 단체, “日 절대 용납치 않고 남녘의 계층과 연대할 것”

    北 위안부 단체, “日 절대 용납치 않고 남녘의 계층과 연대할 것”

    북한의 위안부 단체가 “과거 범죄행위를 전면 부정하며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고 있는 일본의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 대가를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로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라며 남북의 연대를 강조했다.16일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에 따르면 ‘조선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연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조대위)는 지난 15일 정대협 28주년을 맞아 남북의 굳은 연대를 강조하는 축전을 보내 왔다. 조대위는 이 축전에서 “정대협이 일제의 반인륜적 죄악청산이라는 대의를 위해 정의기억재단과 조직적 통합을 이루고, 대중적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우리 민족이 당한 모든 불행과 고통, 손실의 대가를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걸고 반드시 받아내야 할 것이며, 정대협을 비롯한 남녘의 각 계층과 굳게 연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기 위해 결성됐다. 지난 7월부터는 2015한일합의 무효화를 위해 정의기억재단과 통합 출범해 ‘정의기억연대’로 명칭을 바꿨다. 북한의 조대위와는 그간 국제 사회에서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활동을 이어 왔다. 2000년에 개최한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는 남북공동검사단을 구성하여 남북이 하나의 공동기소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한편, 정의연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서울글로벌 국제회의장에서 ‘북측 생존자들의 기억과 증언,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연대’라는 주제로 창립 28주년 심포지엄을 연다.이 자리에서는 재일동포 2.5세 김영 르포작가가 북측 경흥위안소 답사 내용을 발표한다. 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리경생, 김영실 할머니 등 북한에 남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예정이다. 정의연은 “그동안 남북관계 단절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북측 피해자들과 위안소에 관해 이야기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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