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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유정의 영화 in] ‘페넬로피’

    [강유정의 영화 in] ‘페넬로피’

    ‘페넬로피’는 오드리 토투가 주연을 맡았던 ‘아멜리아’의 질감을 연상시킨다. 동화적이면서, 두꺼운 유화 같은 느낌 그리고 비약하듯 연결되는 편집방식 말이다. 한 가문에 저주가 내린다. 이 저주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정도 되는 남자가 저지른 실수의 대가이다. 대가는 바로 집안에 여자가 태어나면 돼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 약 10분간 지나가는 이 집안의 간략사는 영화의 매력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이를테면 다행히도 대를 거치면서 아들만 태어나 돼지 얼굴을 볼 일이 없다가 드디어 딸이 태어났을 때의 순간 말이다. 딸이 태어났는데 돼지 얼굴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주가 효력이 없었던 걸까? 도리도리. 단지 숙모가 남편 윌헌의 아이가 아니라 운전기사의 아이를 가졌을 뿐이다. 선조가 저지른 잘못으로 돼지의 형상으로 태어난 아이? 맞다.‘페넬로피’의 이야기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닮아 있다. 불륜과 오해로 빚어진 사생아들이라는 설정도 비슷하다. 영화 시작 부분의 매력은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이 영화적으로 실현된 듯한 기시감을 준다. 고층빌딩과 영국의 고아한 저택이 섞인 거리, 그림으로 덧칠된 유리창을 덮는 또 다른 블라인드 같은 미술도 그렇다. ‘페넬로피’는 미국과 영국의 합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양국간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이해가 묘하게 충돌하고 융합한다. 영화는 저주를 받은 여자와 가난한 남자의 러브스토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페넬로피가 받은 저주를 푸는 현대적 방식도 그렇다.‘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받는다면, 그때 저주가 풀리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영화는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항목을 귀족과의 결혼으로 이해한 페넬로피 집안의 저주 풀기 해프닝으로 진행된다. 유명한 귀족 가문의 아들들을 수소문해 거액의 지참금으로 유혹하지만 페넬로피의 얼굴 앞에 모두 기겁을 하고 도망간다. 게다가 엄마는 여러 가지 이유로 페넬로피를 집안의 공주로 가둬 키운다. 페넬로피는 엄마로부터,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남자를 만나 진정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전래동화의 문법을 페넬로피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결국 저주를 풀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해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현대적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진부해진 클리셰에 가깝다. 결혼이 자아 정체성의 출구는 아니라는 설정 말이다. 저주를 푸는 방식만큼은 현대적 윤리에 봉사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조화 혹은 대칭이 묘하게도 영화 ‘페넬로피’의 분위기와 어울린다는 것일 테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마법이 풀린 페넬로피가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페넬로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듣고 있던 아이들은 들은 이야기에 대한 평가를 남긴다.“이건 딸에게 집착하는 엄마 이야기야.” “아니야, 이건 진정한 사랑 이야기야.”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건 그저 동화일 뿐이라는, 감독의 귀여운 센스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쇼킹 패밀리’

    [강유정의 영화 in] ‘쇼킹 패밀리’

    경순 감독의 ‘쇼킹 패밀리’는 가족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가정의 달에, 가족 영화라, 별다른 소회가 없을 듯싶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익숙한 단어 앞에 붙은 불온한 수식어를 주목해야 한다. 쇼킹이라니, 수상하다. 제목이 주는 예감은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사실로 확인된다. 알고 보니 쇼킹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그 가족을 정답이라도 되는 양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우리들이다. ‘쇼킹 패밀리’는 우리가 비정상 가족, 이단 가정이라고 부르는 가정에 대한 다른 시선을 요구한다. 경순 감독이 요구하는 바는 간단하다.‘제발 개인주의를 좀 인정하자.’라는 것 말이다. 경순이 말하는 개인주의란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이다. 한국에만 해도 오천만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성격, 이름, 직장, 외모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 누군가는 결혼을 늦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으며, 결혼을 했다 해도 아이를 12명 낳을 수도 있고 아예 한 명도 낳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이상하다.’라고 표현한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해볼까? ‘비정상이다.’라고 못박는다. 경순 감독은 정상의 범주에 포함되기 위해 수많은 개인의 다양성을 사상하는 것 자체가 쇼킹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쇼킹함을 반추하기 위해 다양한 개인들의 삶을 제시한다. 영화에 출연하는 네 인물들, 감독의 딸 수림, 친구 경은, 스태프 세영은 특별한 인물들이 아니다. 이혼녀라고 부를 때 이상하게 보였던 인물들이 말하고 이야기를 들려주자 우리 곁의 친구 중 한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녀가 가정 혹은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들은 말도 안 되는 집착으로 재조명된다. 그렇다고 경순이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들이 비정상이며 그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각기 자신의 삶에 진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때로 ‘쇼킹 패밀리’의 어법은 거칠고 도발적이다. 부러 그렇다. 경순 감독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을 대적할 선언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남편이 벌어온 월급 봉투를 손에 쥐는 것이 곧 여권 신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이 곧 대한민국의 평범한 상식이다. 게다가 그 상식은 고루하고 편협할 뿐만 아니라 상식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점에서 ‘쇼킹 패밀리’는 김태용 감독이 ‘가족의 탄생’에서 했던 이야기를 좀 더 사실적으로 들려준다고도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양식을 통해 관객들은 현실의 육성을 체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태용 감독의 제안에 동의했던 많은 사람들조차도 그 제안이 이미 우리 현실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는 불편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가족’이란 미풍양속으로 환기되기에, 그 가족을 바꾸자는 것 자체가 이단으로 호도된다. 하지만 가족이란 서로를 얽어 매는 구속은 아니지 않을까? ‘가족’에 대한 아름다운 동화가 넘쳐나는 오월,‘쇼킹 패밀리’는 그야말로 주목할 만한 쇼킹 보고서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in] ‘너를 보내는 숲’

    [강유정의 영화in] ‘너를 보내는 숲’

    만해 한용운은 말했다.“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세속의 삶은 정반대다. 만날 때는 그 사람이 떠날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가 갑작스러운 이별에 고통스러워한다. 떠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부재를 호소하며 가슴 아파할 뿐 다시 만날 기약조차 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렇게 바로 눈앞의 것만을 보고, 당장의 순간에 아파한다. 장삼이사의 삶이라는 게 그렇다. ‘너를 보내는 숲’.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그들은 각각 붙잡아두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났을 때, 당신은 그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일본의 여감독 가와세 나오미는 이 질문에 대해 따뜻하고도 사려 깊은 답을 들려준다. 여주인공 마치코는 아이를 잃었다. 남편은 꽃대로 아내의 목 언저리를 후려치며 왜 아이를 지키지 못했느냐며 다그친다. 사실, 그 질문은 그녀가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했던 것이다. 여자는 고통을 감내하며 그렇게 덩그러니 앉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마치코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지워 ‘마코’라 불리는 고집쟁이 치매 환자다. 칠십이 넘었지만 시게키상은 삼십삼년 전 세상을 떠난 마코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고통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에는 모가리라는 전통 의식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은 자를 잊고 보내주는 의식, 결국 사라져 버린 사람을 기다리는 상실에 빠진 자들의 의식이다.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은 이별의 고통에서 놓여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이 놓여나는 법은 자신을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내는 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떠난 그 사람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일이기도 하다. 헤어짐을 인정하고, 떠남을 긍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너를 보내는 숲’이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나오미 감독은 죽은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는 시게키의 어려움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너를 보내는 숲’에는 대사가 거의 없다. 대사 대신 매미의 울음소리, 바람소리, 숲을 가로지르는 계곡 물소리가 가득 찬다. 이 가운데서 주인공들은 소리죽여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고통스럽다거나 아프다고 말하지 않지만, 공기와 소리들은 감정을 잔뜩 안고 있다.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이 부재와 비움에 있다.2007년 칸 영화제가 이 영화에 심사위원대상을 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당신도, 나도, 신이 아닌 사람이기에 부재에 아파하고 결핍에 슬퍼한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누군가 소중한 이가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죽은 지 33년이 되면 죽은 이가 완전히 이승을 떠난다고 한다. 이 떠남은 죽은 이에게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죽음은 우리의 것이 되고 사랑은 완성될 것이다. 어렵지만, 보내는 것. 결국 그게 더 큰 삶의 윤리일 것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애프터 웨딩’

    [강유정의 영화 in] ‘애프터 웨딩’

    결혼은 인륜지대사라고 한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서인지 결혼식은 여러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기도 하다. 격조했던 친구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먼 친척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참여한다. 재미있는 것은 결혼식은 분명 축하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이나 다툼이 가장 자주 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얀 드레스와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행복한 경사의 날, 그 배후에는 시끄러운 이전투구가 한창이다. 17일 개봉한 수잔느 비어 감독의 ‘애프터 웨딩’(Efter Brylluppet)은 결혼식의 이러한 뒤풍경을 주목하고 있는 영화이다. 우리에게는 낯설고 신선한 북유럽 영화인 ‘애프터 웨딩’은 결혼식이야말로 비밀이 탄로나기 좋은 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신부는 결혼식을 올리며 아버지에게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그 인사가 좀 독특하다. 그녀는 말한다.“아버지, 아버진 제가 18살이 되었을 때 당신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셨어야 해요. 처음에는 원망했지만 이젠 당신이 친아버지건 아니건 상관 없어요. 아버지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고맙고 또 고마워요.”라고 말이다. 그런데 결혼식장에는 낯선 하객이 자리 잡고 있다. 신부의 어머니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전한다. 일생을 인도의 부랑 아동을 돕는데 헌신한 이 남자는 엄마의 옛 연인이다. 먼 옛날 그는 연인을 떠나 인도에서의 고된 삶을 선택한다. 짐작했겠지만 오늘 주인공인 신부는 바로 제이콥의 딸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의 친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소중히 키워온 요르겐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제이콥이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주기를 바란다. 얼핏 보기에는 친아버지와 딸간의 상봉기 같지만 ‘애프터 웨딩’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내용을 건드리고 있다. 우선 이 영화는 가족의 관계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DNA를 나눈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요르겐과 딸의 신뢰는 ‘가족’이란 혈통적 연대가 아닌 기능적 의존 관계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르고 있던 친자식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고아원에 대한 책임을 지키는 제이콥의 선택이다.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입지를 선택한 제이콥은 친 딸의 아버지라는 소박한 행복 이상의 것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윤리적인 것이긴 하지만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애프터 웨딩’은, 결혼은 곧 비밀의 창고라는 공감대에서 시작하지만 우리의 관습과는 전혀 다른 결말에 도착한다. 비밀이 새로운 시작이 되는 영화, 바로 ‘애프터 웨딩’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버킷 리스트’

    [강유정의 영화 in] ‘버킷 리스트’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9일 개봉)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이다. 스무 살이었던 한 남자는 멋진 자동차 사기,100명의 하나 꼴로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하기, 부자되기와 같은 목록을 적는다. 이제 그 남자가 육십이 넘어, 말기암이라는 선고를 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은 흥미롭게도 추상적이면서 낯선 것들로 교체된다. 장엄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기와 같은 문구로 말이다. 같은 방에 입원한 남자가 묻는다.“대체 장엄한 것을 직접 본다는 게 뭐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이라면 스카이 다이빙하기, 최고급 머스탱으로 질주해 보기 뭐 이런 게 되어야 하는 거 아니오.”라고 말이다. 영화 ‘버킷 리스트’는 초로에 접어든 남자들의 로망이 담긴 작품이다. 어느 새 아이들도 다 크고, 아내가 이성이 아닌 친구처럼 가까워져 있을 때, 아이들을 위해 평생 자동차 밑바닥에서 수리를 했건만 남은 건 견뎌야 하는 쓸쓸한 오후뿐일 때, 그때쯤이면 남자는 혹은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나온 날을 후회할까. 아니면 아이나 아내가 없었더라면 누릴 수 있었던 자유에 대해 아쉬워할까.‘버킷 리스트’는 이 아쉬움을 영화적 대리만족으로 달래 준다. 개인용 비행기로 스카이 다이빙을 하고 이집트 여행을 다녀 오는 동안 그들이 놓쳤던 삶의 일부가 실현되는 것이다. ‘버킷 리스트’는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가족’하나를 결여한 남자(잭 니콜슨)와 가족 하나를 건졌지만 젊은 시절의 버킷 리스트를 폐기처분해야 했던 남자(모건 프리먼)를 통해 두 가지 판본을 제시한다. 다른 판본인 서로의 삶은 ‘가지 않은 길’의 결과처럼 보인다. 부자에게는 엄청난 규모의 병원이 남지만 대수술 이후 돌봐 줄 지인 하나가 없고, 평범한 남자는 여전히 가족들의 복잡다단한 사연에서 놓여 날 수는 없지만 따뜻한 저녁 식사가 남는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두 환자가 병원을 탈출해 즐거운 일탈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닮아 있다. 다르다면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주인공들이 이른 죽음을 선고받은 젊은이이었던데 비해 ‘버킷 리스트’의 그들은 이미 노년이라는 사실이다. 젊은이들이 너무 빨리 자신을 호출한 신에게 질문을 던졌다면 그들은 조금 일찍 다가온 친구처럼 죽음을 바라본다. 낯선 사람 도와 주기, 눈물 날 때까지 웃기, 최고의 미녀와 키스하기, 영구문신 새기기와 같은 것들로 채워진 리스트들은 어쩌면 남자의 두꺼운 피부 밑에 숨어 있는 소년을 느끼게 한다. 결국 이 목록들은 아버지나 사장이 원하는 삶이 결국 남자 아이의 꿈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 준다. 소년으로 살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일지도 모른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인생의 일회성과 죽음의 필연성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버킷 리스트’가 따뜻한 위로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고야의 유령’

    [강유정의 영화 in] ‘고야의 유령’

    신의 권능이 인간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권력이자 도착이 된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의 권력은 신의 잔혹함만을 강조한다. 자비도, 사려도 없이 금지로 이루어진 율법들은 인간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곤 한다.‘고야의 유령’(Goya‘s Ghosts·새달 3일 개봉)에 등장하는 신부처럼 말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사라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흉내낸다. 때론 신부로, 때론 정치가로 말이다. ‘고야의 유령’은 ‘카프리초스 연작’ ‘거인’과 같은 작품을 남긴 화가 고야의 시선을 따라간다. 제목은 고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이 영화는 고야가 살았던 스페인의 격동기를 한 여자와 신부의 삶을 통해 입체화한다. 고야는 척박한 시대를 온 몸으로 버티며 살아야 했던 여인과 시대의 급물살을 아슬아슬하게 이용했던 한 남자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고야의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 감독 밀로스 포먼의 것에 가깝다. 천재 모차르트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살리에르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모차르트 평론가였듯이 밀로스 포먼은 뛰어난 고야 해석가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태도는 고야가 스페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배어 있다. 스페인 하면, 가우디 성당과 벨라스케즈, 피카소 등의 이름으로 환기되지만 ‘고야의 유령’에서는 역사의 수난지로 그려진다. 영화는 신의 이름으로 처녀를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도움을 핑계로 겁탈하는 신부 로렌조를 통해 스페인 왕조 말기의 부패한 가톨릭 권력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종교심판에 보낸 아버지는 당시의 권력자 로렌조 신부를 불러 거액의 성당 보수비용을 조건으로 청탁한다. 탐욕스러운 신부는 돈은 받되 신의 심판은 있을 것이라며 외면한다. 로렌조 신부는 “신앙심만 있다면 그 어떤 ‘심문’에도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죄가 없다면 풀려날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말하는 심문은 질문이지만 사실상 고문이다. 세월이 훌쩍 지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종교재판을 주관하던 신부들이 형장에 끌려나온다. 부패한 권력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군은 스페인 성당에 진입해 재산을 갈취하고 스페인 여자들을 강간한다. 종교의 이름을 한 구정권도 잔혹하지만 외국어를 쓰는 군인들의 행동은 잔인무도하기 그지없다. 가톨릭, 프랑스, 영국으로 이어지는 스페인 수난사는 ‘아네스’라는 희생양과 ‘로렌조’라는 기회주의자를 통해 그려진다. 가톨릭이 최고의 권력이던 시절 신부였던 로렌조는 프랑스군과 함께 그가 비난했던 자유주의 사상을 탑재하고는 관리로 돌아온다. 그는 앞장서서 스페인을 탄압하고 문화재를 빼돌리며 사리사욕을 채운다. 로렌조의 아이를 낳은 ‘아네스’에 대한 핍박은 곧 역사의 거친 흐름에 유린당한 스페인을 상징한다. 아네스는 곧 순결한 스페인의 영혼인 셈이다. 밀로스 포먼의 ‘고야의 유령’은 전작에 비해 거칠지만 여전히 힘이 넘친다. 고야의 시선은 밀로스 포먼의 해석 덕분에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증언으로 자리잡는다. 로렌조 신부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 역시 일품이다. 기억은 언제나 상처를 강박적으로 되풀이한다. 치욕스러운 과거의 상처를 통해서야, 어쩌면 ‘진실’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인터뷰’

    [강유정의 영화 in] ‘인터뷰’

    때론 산다는 것 자체가 ‘연기’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집에 와서는 착한 딸 혹은 현명한 아내 역할을 하고 직장에 나가서는 충실한 부하 혹은 자애로운 상사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시시때때로 입장에 따라서 달라진다.15분 전 상사 앞에서 믿을 만한 심복을 자청하고는 15분 후 권력에 당당한 선배를 연기한다. 아, 복잡다단한 인생 연출이여! 인생의 고수들은 알고 보면 진짜 속마음을 숨기는 ‘명연기자’들이다. 스티븐 부세미의 감독 데뷔작 ‘인터뷰’는 독설과 협잡이 난무하는 삶에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과 어떤 연출이 필요한지 짐작케 한다.83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 동안 이 영화는 흡사 체스 게임과 같은 무혈의 전투를 보여 준다. 영화가 시작될 때, 화면 정중앙에 놓여 있는 간이 체스판이 우연은 아니라는 뜻이다. 비숍으로 밀고 나이츠(기사)로 도망가는 체스 게임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덜미를 잡고 책잡느라 열심이다. 인터뷰어(interviewer)와 인터뷰이(interviewee), 그러니까 인터뷰를 ‘하느냐 당하느냐.’가 문제인 셈이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영화에 문외한인 정치부 기자와 유명 스타가 인터뷰를 한다.” 이 한 줄로 요약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정치부 기자가 이 유명 스타를 저급한 딴따라 정도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스타 역시 버릇없고 무례하기는 다를 바 없다. 인터뷰를 하러 오면서 미리 준 스크리너를 보지도 않은 기자나 스타랍시고 인터뷰 장소에 한 시간씩이나 늦은 스타나 누가 더 낫고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를 무시하며 돌아섰던 두 사람은 우연한 사고로 인해 조금 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인터뷰다. 기자는 소위 ‘고급정보’를 알아내고자 전전긍긍하고,‘스타’는 저 오만한 기자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탐색한다. 과연 누가 이 게임의 승자일까? 게임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 놓아 가장 가까워지는 듯한 순간 절정에 이른다. 여배우는 자신의 비밀을 고백할 테니 당신도 뭔가 중요한 사실을 꺼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특종에 눈이 먼 기자는 결국 자신의 비밀을 드러낸다. 기는 놈 위에 걷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둘의 형국이 딱 그렇다. 진심이라고 믿어 주는 순간 두 사람은 기대를 배반하고 각자 이익의 영역으로 되돌아 간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진실을 ‘연출’했느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 기자에게, 여배우는 말한다.“우리의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인간관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죠.”라고. 사람을 믿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순진하다.”고 말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주어진 역할을 잘 연기하는 사람을 고수라고 또는 프로라고 부른다. 기준은 자신에게도 통용된다. 절대, 진짜 속내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 수긍이 조금은 씁쓸해지는 것일까. 진심이 오가는 인터뷰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실적인 영화,‘인터뷰’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미스 언더스탠드’

    [강유정의 영화 in] ‘미스 언더스탠드’

    ‘미스 언더스탠드’(원제 The Upside Of Anger·27일 개봉)는 조금 늦게 도착한 영화다.2005년에 제작된 영화가 2008년 한국에서 개봉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늦은 도착이 ‘미스 언더스탠드’에는 잘 어울린다.‘미스 언더스탠드’ 자체가 조금 늦게 안 진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리고는 연락조차 없다.”엄마는 딸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아버지가 떠나기 3일 전 비서도 스웨덴으로 떠났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쿵하면 떨어진 것’이라는 식으로, 비서가 사라지고 아버지도 사라졌으니 둘이 함께 스웨덴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제, 그녀는 갑작스럽게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되고 만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말도 없이 떠나고 나니, 그녀는 자기가 살아온 생애 자체가 우스워진다.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던 일들이 모두 허망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이 갈 만한 곳에 전화를 걸지 않는다.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듯, 끝내 그녀는 그곳에 전화를 해 보지 않는다. ‘미스 언더스탠드’는 갑자기 혼자가 된 여자의 좌충우돌 스트레스 해소기라고 할 수 있다. 운 좋게도 옆집에는 왕년의 야구스타 대니(케빈 코스트너)가 살고 있고 게다가 그는 이 불행한 중년 여성에게 관심이 있다. 대니는 테리(조안 앨런)에게 접근하고 그를 무조건 외면하던 테리는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그런 점에서,‘미스 언더스탠드’는 중년 여성의 판타지와 닮아 있다. 남편이 떠난 뒤 찾아온 친구 같은 애인이라니, 만일 이런 조건이 상시 제시되기만 한다면 남편이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지 않을까. 테리는 남편이 없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복닥거리며 지낸다. 어느덧, 해가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첫째 딸은 결혼을 하고 둘째는 연애를 한다. 졸업도 하기 전에 임신을 하는 첫째나, 대학을 가랬더니 취직을 해서 늙수그레한 남자와 연애를 하는 둘째나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다. 엄마의 눈으로 보면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선택이 없으니 말이다. 둘째딸 앤디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는 라디오 PD를 향한 테리의 분노는 모든 엄마들의 공통된 심사에 가깝다. 소리를 내며 수프를 빨아먹는 그를 노려보며 테리는 그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리는 상상을 한다. 이 상상은 과격하지만 정감있는 데다 그럴 듯하다. 엄마를 연기한 조안 앨런은 히스테리컬하면서도 다정다감한 테리를 자신만의 문법으로 그려낸다.‘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에 등장했던 ‘파멜라’를 떠올린다면 그럴 듯함은 놀라움으로 바뀐다. 결국, 버림받았던 테리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는다. 밝혀진 비밀 속에 무심했던 것은 남편이 아니라 테리였고, 연락을 하지 않았던 자존심이 스스로를 힘들게 했음도 드러난다.‘미스 언더스탠드’는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드라마이다. 전원에 지어진 집이나 ‘작은 아씨들’을 연상케 하는 네 명의 딸도 그렇다. 그럼에도 조금 늦게 도착한 이 영화가 우리의 공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라는 존재의 보편성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전원주택 속 그곳의 ‘엄마’는 28평 아파트 이곳의 ‘엄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그 바람 때문에 또 가족은 경건하다. 복잡한 소란 속에서 상처가 치유되니 말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잘 나가는 그녀에게… ’

    격세지감이 느껴지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수 크레이머 감독의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 같은 영화들 말이다.‘Gray Matters’라는 간단한 원제가 제법 복잡하게 번역된 이 영화는 말 그대로 ‘그레이(Gray)’라는 여자에게 닥친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그레이’는 오빠에게 이렇게 말한다.“말할 게 있어. 음, 나 말야. 뭔가 좀 다른 건데. 아! 내 이름에서 ‘R’만 빼면 돼. 그러니까, 게이(Gay:동성애자)라고.” 헤더 그레이엄이 주연을 맡은 이 여주인공은 예쁜 외모에 날씬한 몸매, 게다가 좋은 직장까지 가진 말그대로 ‘잘 나가는 그녀’이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오빠뿐, 도무지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녀 스스로도 뭔가 연애 문제가 잘 안 풀린다고 믿는다. 그러던 중 오빠와 함께 각자 이성 애인을 찾아보자고 나서고 너무나 완벽한 올케감을 만난다. 문제는 그녀에게 오빠뿐만 아니라 그레이도 반했다는 사실.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게이, 동성애자들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상당히 진지하게 그 문제에 접근해 간다. 동성애자 문제를 대중 영화의 문법에서 정면에서 다룬 작품은 1993년작 ‘필라델피아’를 들 수 있다.‘필라델피아’에서 동성애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둔중한 무게감 속에서 다뤄진다. 그런데 ‘잘 나가는 그녀에게 왜 애인이 없을까’는 ‘게이’,‘동성애’와 같은 문제를 진지하지만 또한 가볍게 다룬다. 한 가족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갑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들은 ‘척 앤 래리’에서 보았던 과장법이나 ‘프리실라’에서 보았던 절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줄어든 데는 ‘퀴어 애즈 포크‘나 ‘L워드’같은 드라마들의 역할이 컸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미국 드라마들이 동성애자들을 재미있는 볼거리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섹시한 게이, 바람둥이 게이, 늙어서 인기가 없는 게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인간 군상들은 실상 이성애에 빠진 우리들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영화 속 그레이는 수줍게 “저 오늘 처음 커밍아웃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국드라마에서 상세하게 보여주었던 러브신이 아닌 동성과 첫날밤을 보낸 후 뛸 듯이 기뻐하는 그레이를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어쩌면 우리는 ‘게이들은 어떻게 섹스할까.´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에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그런 호기심을 편견의 완화로 오해하면서 말이다. 15세 관람가.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데어 윌 비 블러드’

    [강유정의 영화 in] ‘데어 윌 비 블러드’

    가끔 괴물 같은 영화들이 있다. 혹은 ‘그 분’이 오셔서 만든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작품들이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그렇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남자가 황량한 대지에 앉아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남자는 수직으로 깊이 파 놓은 굴 속에 들어가고 무엇인가 찾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우물 속을 빠져 나와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려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다. 순식간에 사고는 발생하고 남자는 한 쪽 다리를 절게 된다.5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혼자 있던 남자는 여럿과 함께 있다. 사내들은 열심히 무엇인가를 길어 낸다. 그리고 드디어 찾았다며, 환호한다. 다음 순간, 기구가 떨어지고 한 사내의 목을 관통한다. 이것은 잔혹극이다. 잔혹함은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15분간 단 한 사람의 ‘대사’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놀라움으로 바뀐다. 이 잔인한 장면들을 채우는 것은 쇼스타코비치를 연상케하는 신경질적인 현악 오케스트라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은 잔혹함은 냉정한 시선을 통해 증폭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이 끔찍한 장면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메라의 시선에 옮겨 담는다. 슬프다, 라고 말하지 않고 바라 보는 순간 생은 끔찍해진다. ‘데어 윌비 블러드’는 이상하고 잔혹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남자, 아마도 ‘악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바로 그런 모습일 테다. 이 남자에게는 ‘마음’이 없다. 그러니 동정심도, 후회도 미련도 없다.‘마음’ 대신 그의 가슴 속에는 계획과 논리, 계산이 들어찬다. 그의 행동은 어느 것 하나 가슴 어디께 있을 심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이 남자를 보고 ‘온화한 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수이자 착각이다. 그는 ‘온화함’을 각색해 연기하는 훌륭한 배우일 뿐, 그에겐 마음이 없어 따뜻함도 없다. 이 철저한 냉정함은 두 가지 사건에서 분명히 제시된다. 하나는 아들이다. 대니얼 플레인뷰는 사고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아들로 키운다. 그는 어딜 가나 ‘가족정신’을 내세우며 자신의 석유사업을 확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아들은 자신은 아버지 곁을 떠나 멕시코에 가겠노라고 말한다. 대니얼은 격분한다. “넌 내 경쟁자가 되려는구나.” 두번째는 석유로 떼돈을 벌게 해준 황무지의 주인, 목사, 엘라이와의 숙원이다. 대니얼은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게 했던 목사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의 입에서 신에 대한 배반을 얻어내고 그의 무릎을 꿇린다. 그런데, 이쯤되면 혼동된다. 그래도 한때, 대니얼은 아들을 아끼고 사람들을 배려했다. 누군가 믿고 싶노라고, 간절히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 성처럼 거대한 집을 차지하고 있는 그는 악마에 불과하다. 마음이 없는 이 남자는 전 생애를 ‘돈’으로 채운다. 악마, 마음이 없는 돈의 화신, 대니얼 플레인뷰.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해보자.“There will be blood.”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피란 무엇일까? 언젠가 그곳에는 피가 흥건할 것이라면, 과연 석유는, 돈은, 욕망은 ‘피’를 부르는 재앙일까? 잔혹하고도 뛰어난 영화,‘데어 윌 비 블러드’이다. 영화평론가
  • 영화 ‘추격자’ 흥행질주 비결은?

    영화 ‘추격자’ 흥행질주 비결은?

    연초 극장가에 영화 ‘추격자’의 돌풍이 거세다.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와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의 추격전을 그린 이 영화는 개봉 13일만인 지난달 26일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는 400만 관객을 동원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속도 보다 빠르고 ‘살인의 추억’이 갖고 있던 한국 스릴러영화 최단기간 흥행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이 같은 ‘추격자’의 흥행 비결은 무엇일까. ●‘장르 영화´ 쾌감 살린 연출력의 승리 비수기 개봉, 스타시스템 부재,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추격자’는 이런 여러가지 악재를 지닌 영화다.‘어둡고 칙칙하다’는 이유로 투자와 배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변변한 TV홍보 한번 못했다. 평론가들은 이같은 ‘추격자’의 흥행 요인을 완성도 높은 장르영화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그동안 재미는 있지만 완성도면은 미흡한 한국 상업영화들이 많았다면,‘추격자’는 긴장감과 빠른 전개 등 스릴러 장르의 쾌감을 잘 살리면서도 완성도가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6년동안 기획하고 3년동안 집필한 신인감독이 연출한 만큼 관객들이 스릴러물에 갖고 있는 욕구에 잘 부합했다.”면서 “특히 첫장면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극을 풀어간 역발상은 관객들의 흥미를 더욱 자극했다.“고 말했다. ●불합리한 공권력에 대한 통렬한 풍자 영화 ‘추격자’가 제2의 ‘살인의 추억’에 비교되는 것은 바로 공권력과 사회 구조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추격자’는 ‘살인의 추억’보다 직접적인 사회적 메시지로 관객들과 소통을 시도했다. 범인이 실종된 출장마사지 아가씨가 살아있다고 자백했음에도 확인은 커녕 대충 얼버무리려 하거나, 자신의 자리보존에 급급해 눈앞에서 연쇄살인범을 순순히 풀어주는 경찰의 모습은 관객들의 공분을 샀다. ‘추격자’의 제작사인 ‘비단길’ 김수진 대표는 “이 영화는 단순히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쫓는 것이 아니라 대충주의와 안일주의 등 사회 시스템적 문제로 연쇄살인범이 생겨나고, 이 때문에 우리모두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남성 ‘투톱 영화’ 특유의 긴장감 이 영화의 또하나의 흥행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남성 투톱 캐릭터가 주는 긴장감과 매력이다. 제작진은 중호(김윤석)를 사회적으로 결핍되었지만 인간적인 구석이 있는 인물로, 지영민은 연쇄살인의 동기는 배제된 채 묘한 궁금증만 안기는 인물로 설정해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특히 이 같은 ‘추격자’의 흥행 돌풍으로 남성 투톱을 내세운 이른바 ‘버디 무비’들이 봇물을 이룰 전망이어서 관심을 모은다. 안성기·조한선 주연의 ‘마이 뉴 파트너’(6일 개봉), 송승헌·권상우 주연의 ‘숙명’(20일 개봉), 한석규·차승원 주연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3월 개봉예정)’를 우선 꼽을 수 있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추격자’의 경우는 두 캐릭터를 따로 떼어 놓고 보아도 충분히 개성있는 인물들이 각각 흡인력을 발휘한다.”면서 “투톱 주연의 영화들은 긴장감과 집중도가 있어 한국영화의 흥행 코드이기도 하지만, 요즘 관객들이 스토리보다 캐릭터와 스타일에 치중하기 때문에 더욱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강유정의 영화 in] ‘잠수종과 나비’

    [강유정의 영화 in] ‘잠수종과 나비’

    화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꺼운 막을 거둬 내듯 시야가 밝아지면 두서없는 시각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시계, 천장, 링거액, 햇빛. 당혹스럽다. 그리고 어지럽다. 목소리가 틈입한다. 목소리는 이 순간의 당혹감을 호소한다.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가위 눌리듯 관객의 고막을 때릴 뿐 스크린 속 그들은 전혀 듣지 못한다. 목소리는 바로 ‘몸’ 속에 갇혀 버린 한 남자의 절규, 두꺼운 막은 결국 목소리를 내는 주인의 눈꺼풀로 규명된다. 사태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한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한 쪽 눈꺼풀 말고는 움직일 수 있는 근육이 단 하나도 없다. 그 남자의 영혼은 영영 육체에 감금되고 말았다. 이제 그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이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잠수종과 나비’(Diving Bell and Butterfly)는 실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 잘나가는 패션잡지 에디터였던 보비는 갑작스럽게 온몸이 마비되는 상황에 빠진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결과는 두렵고 끔찍하다. 하루를 일분처럼 바쁘게 살아가던 그의 일상에 여백의 시간들이 들어찬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자에게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하루하루, 일분 일초를 견뎌야만 하는 그, 이제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결론부터 말해 보자면,‘잠수종과 나비’는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영화가 주는 감동은 두 가지에 압축되어 있다. 하나는 눈꺼풀 하나로 의사소통을 해 책을 완성한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의 감동 스토리이고 다른 하나는 책이 제본되어 출시되기 직전에 필자가 사망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사고로 인해 전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은 비극적이지만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가 이 인생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은 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유머러스하면서 로맨틱하게 다룬다. 보비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애인과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는 눈꺼풀 하나 움직이면서 간호사의 미모에 대해 평가하고 성욕의 곤란함을 고백한다. 보비의 이러한 행동들은 일상적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인지 깨닫게 해준다. 마티유 아맬릭의 연기는 이 낙천적 비관론의 훌륭한 알리바이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로테스크한 눈꺼풀의 신호로 의사표현을 하는 그는 ‘오아시스’에서 문소리가 보여주었던 것 이상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가족, 애인 사이에서 환상으로 처리한 보비의 욕망 역시 볼 만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참혹한 사태를 대하는 목소리의 유연함이다. 그 유머는 격한 과장보다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결국 내 삶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바닷가에 아이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나간 남자의 독백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잠수종과 나비’는 쉼표 없이 살았던 인생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마침표에 대한 훌륭한 묘사들로 가득하다. 인생의 일회성과 죽음의 필연성. 때론 사고로 인해 인생이 소중해지기도 한다.
  • [강유정의 영화 in] ‘어톤먼트’ 리뷰

    아이는 순수할까. 아니 순수한 것은 곧 선한 것일까. 사람은 착하게 태어나 악을 배우는 것일까, 아니면 본능처럼 타고난 악을 세련화하고 억압하며 ‘인간’이 되는 것일까. 속죄를 뜻하는 영화 ‘어톤먼트’(Atonement·21일 개봉)는 과연 아이의 영혼이란 순수한 것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제목처럼 영화는 어린 시절 저질렀던 실수를 속죄하고자 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여자는 말한다. 어린 시절의 ‘무지’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평생을 짓눌렀노라고 말이다. 열한 살의 소녀 브라이오니는 지금 한창 최초의 희곡을 써냈다. 희곡을 쓰는 소녀는 이야기를 꾸며 내는 재주를 타고 났다. 그런 소녀 앞에 자신이 알고 있는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진다. 자신의 언니와 저택 가정부의 아들 로비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소녀는 로비가 변태 성욕자가 틀림없다고 소문을 내고, 경찰에게 거짓 정보를 증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로비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이 실은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소녀는 로비를 좋아하고 그에게서 최초의 남성을 느낀다. 자신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고는 당돌하게도 물에 빠져 그를 시험한다. 목숨을 걸고 게임을 하는 소녀를 보며 로비는 화를 낸다. 로비가 화를 내며 돌아서자, 소녀는 그 순간 로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거뒀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실상, 소녀의 잔망스러운 행위는 그의 사랑을 확인하려는 욕망에 가깝다. 자신에게 화를 냈던 로비가 언니와 얽혀 있는 것을 본 순간, 소녀는 그를 변태 성욕자로 몰아간다. 어른이 된 소녀는 친구에게 말한다.11살 때 난 그 장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과 허구를 잘 지어내는 이야기꾼 소녀는 그 장면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소설가가 된 그녀가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이 시절을 다루는 순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야기의 마지막 그러니까 소설의 마지막이자 영화의 마지막 부분, 할머니가 된 브라이오니는 말한다.“나는 소설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그들에게서 속죄받고 구원받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써넣었다. 하지만, 실상 이 모든 것들 역시 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로비는 전쟁 중에 패혈증으로 사망했고 언니 역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로 죽었다.” 결국 브라이오니는 누구로부터도 속죄받지 못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어톤먼트’는 관객의 가슴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듯한 통증을 전해준다. 아마 마음이 있다면 거기쯤 있지 않을까싶을 정도로 가슴 속 어느 한 부분을 둔중하게 누른다. 삶은 몇몇 우연한 장면들에 의해 다른 미래로 이어진다. 장래가 촉망되던 두 연인은 소녀의 당돌한 거짓말 때문에 참혹한 결말을 맞게 된다. 한 번 쯤, 우연한 선택에 의해 인생의 유턴 지점을 놓쳐본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아한 비관론, 때론 비극이야말로 삶의 비밀이기도 하다.
  • [강유정의 영화in] ‘라듸오 데이즈’ 리뷰

    [강유정의 영화in] ‘라듸오 데이즈’ 리뷰

    하기호 감독의 ‘라듸오 데이즈´는 그때 그 시절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하는 작품이다. 때는 1930년, 이준 열사, 안중근 의사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위업도 있었지만 아방가르드 예술인 이해경(이상)이 다방 제비를 열어 기생 금홍과 밤낮없이 허무에 빠져들던 시기이기도 하고, 모던 보이 박태원이 하릴없이 종일 종로를 거닐며 시간을 탕진하던 때이기도 하다. 어쩌면 당시, 번화가인 종로나 화신 백화점을 걷는 시민들에게는 ‘모던 껄´과 ‘모던 뽀이´의 행색이나 풍속도가 더 흥미로운 ‘현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1930년대는 바다 건너에서 들어온 새로운 문물과 문명이 이 땅에 자리잡기 시작했던 과도기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 세련된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던 걸이 6폭 한복 치마를 곱게 다려 입은 여성과 함께 길을 걸어가던 시기. 일본을 거쳐 수입된 재즈와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함께 울려 퍼지던 경성 거리.‘라듸오 데이즈´의 시작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라듸오 데이즈´는 전통과 신문물의 혼합과정보다는 ‘라디오´라는 신기한 문명의 도입에 주목한다. 닭울음을 전파에 싣기 위해 진짜 닭을 울리는 첫 장면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영화는 어떻게 하면 라디오 방송의 묘미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연출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출연자들의 돌발 상황에 대처하고, 불가능한 인연으로 맺어진 멜로드라마로 최루성 인기를 얻어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라듸오 데이즈´는 1930년대 경성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방송의 심리와 구조를 패러디한 작품에 가까워 보인다. ‘라듸오 데이즈´는 1930년대 풍경보다는 방송의 생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청자 게시판 역할을 대신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나 ‘다시 보기´나 ‘불법 다운 로드´를 연상케 하는 재방송 상인들의 풍경이 그렇다. 드라마의 맥락과 무관하게 조미료 광고를 넣는 PPL 장면도 1930년대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더 잘 보여준다. 문제는 ‘라디오 데이즈´의 한계 역시 이 감각 속에 있다는 점이다. ‘라듸오 데이즈´는 최초의 방송이 이랬을 것 같다는 추측 위에서 시작한다. 알려진 자료가 없는 만큼 2000년대 우리가 듣고 경험하는 라디오 방송으로부터 상상은 연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1930년대다운 질감은 사라지고 없다. 방송의 생리는 입체적인데 1930년대 풍경은 사진관에 놓인 인공 세트처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1930년대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주말 아침 TV에서 볼 수 있는 재현 프로그램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넘고 있다.‘웰컴 투 동막골´과 유사한 마지막 불꽃 놀이 장면이 따뜻한 감동보다는 어색한 봉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에 이어 두번째로 선보인 ‘라듸오 데이즈´의 경성, 하지만 이 삐걱거림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심리적 거리감과 무게를 덜고 다시 보는 일제 강점기, 그 시도만으로도 격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1930년대를 조명하는 새로운 각주로서 이미, 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강유정의 영화in]매뉴얼 오브 러브

    ‘매뉴얼 오브 러브’는 섹시한 영화이다. 실상 이 영화에는 섹스신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영화의 에피소드들은 서로의 속살을 만져보지 못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던지는 눈빛과 같은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영화가 시작할 즈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고백처럼, 이 작품은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나를 들뜨게 해요.”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실감하게 한다. 에로스와 포르노, 섹스와 음란 사이에 놓인 비밀한 사랑의 방식, 행복하고 난감한 욕망의 아이러니가 ‘매뉴얼 오브 러브’인 셈이다. ‘매뉴얼 어브 러브’는 ‘러브 액추얼리’처럼 옴니버스식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느새 로맨틱 코미디의 관습으로 인증된 구성방식이 아니다.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옴니버스식 영화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간 사랑의 비밀한 내면인 에로스를 들여다보는 태도이다. 영화 전반을 이끄는 주제인 사랑은 ‘에로스’로 압축된다. 하반신 마비가 된 환자의 성기마저 부풀어 오르게 하는 뜨거운 격정, 그것이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인 에로스라고 말이다. 영화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하반신 마비 환자의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다. 니콜라는 사고로 인해 하반신의 감각을 잃게 된다. 마비가 영원히 지속될까 두려워 하던 니콜라에게 루시아(모니카 벨루치)라는 물리치료사가 나타난다. 그녀는 방금 스크린을 찢고 나온 배우처럼 육감적인 몸매와 촉촉한 입술을 지니고 있다. 니콜라는 그녀의 치료가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와 몸매에 온통 정신이 팔린다. 하반신이 마비된 니콜라의 성욕은 뇌수를 가득 채워 공상으로 뻗어나간다. 그의 정신은 이미 한껏 발기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에로스가 결국 그를 일어서게 한다는 사실이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 니콜라와 루시아가 나누는 정사가 섹스가 아님에도 에로틱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에로스란 늘 마술적인 기적을 일으키는 것일까. 마지막 에피소드는 에로스의 서글픈 양가성을 느끼게 한다.50대 레스토랑 지배인인 어네스토에게 자신은 나이든 남자에게 끌린다며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20대 여자, 세실리아가 나타난다. 세실리아는 어네스토에게 담을 넘어 남의 집 온천에 들어가자고 유혹하고 화장실에서 은밀한 섹스를 나누자고 재촉한다. 어네스토에게 그녀의 제안은 심장이 멎을 만큼 짜릿하고 강렬하다. 문제는 일탈을 하기에는 어네스토가 너무 늙었다는 데에 있다. 섹스는 약으로 해결되지만 20대 여성 세실리아를 감당할 에너지는 약으로 충당되지 않는다. ‘매뉴얼 오브 러브’는 섹스와 에로스에 관련된 네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은밀히 꿈꿔왔던 욕망과 판타지를 입체화해준다. 지오바니 베로네시 감독은 섹스와 에로스의 환상 뒤편에 놓인 부담과 책임, 위험을 가볍지만 진중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불임부부, 동성애인 등을 통해 조형해낸 그의 세계는 둘만 잘되면 만사형통식의 로맨틱 코미디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에로스로 환원되는 사랑의 비밀, 그 매력적 양가성이 이 영화 ‘매뉴얼 오브 러브’에는 녹아 있다.
  • [강유정의 영화in]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생명이란 무엇일까, 간혹,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는 너무도 무거우면서도 가벼운 문제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여자가 돼지들을 안고 뒹군다. 돼지들은 마치 그녀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처럼 몸을 맡긴다. 돼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는 그녀, 그런데 돼지를 안고 있는 왼팔 옆 다른 손에는 칼자루가 쥐어져 있다.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돼지의 목에 칼을 들이미는 그녀, 그녀가 바로 엠마이다.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는 독일 영화이다. 췌장암 말기를 선언받은 남자와 농장이 헐값에 매도되기 일보 직전인 여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남자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서는 동업자와 불법으로 모아둔 돈을 들고 떠날 작정을 한다. 최고급 승용차까지 빼돌려 전속력으로 돌진하던 남자는 한순간 핸들을 놓고 생에 작별을 고한다. 고통만 남은 생애라면 차라리 스스로 정리하겠노라고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자동차가 엠마의 농장에 떨어진다. 엠마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남자를 보자마자 반하고 만다. 그를 잡기 위해, 그리고 그의 돈으로 빚을 갚기 위해 엠마는 남자의 차에 불을 지른다.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는 독일식 유머라고 할 수 있을, 시시하지만 정감있는 유머이다. 제목에는 행복이 두 번이나 겹쳐져 있지만 실상 이 영화에는 행복의 조건이 없다. 파산 직전인 여자와 말기암 환자라니, 여기에 어디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이 불안한 삶 속에서 찾아내는 행복이다. 엠마와 막스는 행복하다기보다 남아 있는 행복의 여분을 찾아낸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위해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장면도 그렇다. 시한부 인생을 그리는 영화는 많지만 남은 행복을 즐긴다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독특하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과 함께 눈물과 고통이 넘쳐나는 여느 멜로드라마들과 작별하는 것이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따뜻한 시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남편 막스가 죽고 난 후 엠마를 쫓아다니던 남자는 말한다. 언제든 필요하면 부르라고,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이다.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백미는 남편 막스를 죽음으로 이끄는 엠마의 손길이다. 점차 증세가 심각해지던 어느 날 막스는 엠마의 귀에 속삭인다.“나 하느님과 거래를 했어. 남은 여생 며칠을 당신과의 섹스와 바꾸기로.” 둘은 그렇게 사랑을 나눈다. 다음 장면, 엠마는 막스를 안아서 나무 밑으로 데려간다. 누구도 그 나무 밑 풀밭이 어떤 장소인지 환기하지 못하는 순간, 엠마는 오른 손에 칼을 쥔다. 그 때, 엠마가 돼지들을 죽이며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말 말이다. 엠마는 막스의 두려움을 거둬준다. 고통스럽지 않게, 단숨에 목숨을 빼앗아주는 것, 그것이 바로 엠마의 사랑방식이다. 시종일관 고요한 서정시처럼 펼쳐지던 영화 속 풍경들은 한순간의 정적으로 가득찬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 고통을 견디는 것도 삶이라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무엇을 가르쳐주는 것일까? 조용하지만 파괴력 있는 작품,‘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이다. 영화평론가
  • [강유정의 영화 in] ‘무방비도시’

    [강유정의 영화 in] ‘무방비도시’

    영화는 누구의 힘으로 매력을 발산할까? 영화라고 하면 우선 배우를 떠올린다. 김명민, 손예진. 김명민이야 2007년 드라마 ‘하얀거탑’을 통해 탄탄한 마니아층을 마련한 배우라고 할 수 있다. 손예진은 어떨까? ‘클래식’‘연애소설’‘내 머리 속 지우개’에서 청순함을 발산했던 여배우 아니었던가. 그리고 우리는 그가 ‘작업의 정석’에서 청순가련 여학생에서 내숭 9단의 여자로 변신하는 순간을 목격했었다. 그리고 2007년 그는 ‘무방비도시’에서 기존의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탈피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명민이라는 파트너도 든든한 후광이 돼 준 듯 싶었다. 문제는,“싶었다.”라는 기대감이 컸다는 데에 있다. 손예진의 노출신, 천수관음상 문신이라는 등의 화젯거리가 영화보다 먼저 관객들을 찾아 왔다.‘국내 최초 기업형 소매치기’라는 문구도 따라 다녔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무방비도시’는 괜찮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지만 어딘가 어색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첫번째 어색함은 무엇보다 중요한 소매치기 장면이다. 여러 면에서 ‘무방비도시’는 최동훈 감독의 ‘타짜’를 연상케 한다. 전문적 범법자들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한 번 빠지면 정상적 삶으로 되돌아 오기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마약이나 술처럼 도박도 범죄도 중독성이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이 지독한 중독성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지독한 중독적 범죄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필요악이다. 사람들이 주머니에 자기 돈을 지니고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소매치기는 존재했고 도박도 존재했다.‘타짜’가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요인 중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두려운 세계에 대한 노출이었다. 화려한 손기술과 처음 듣는 ‘전문 용어’들 그리고 험악한 그들만의 법칙들, 최동훈 감독은 그 ‘다른 세계’를 현란하게 보여 준다. ‘무방비도시’의 무방비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보여 주는 몇몇 기술들은 슬로 모션으로 신비화되어 있다. 눈보다 손이 더 빨라야 한다지만 영화 속의 기술들은 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두번째 한계라고 한다면 여배우 손예진의 매력의 초점이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표독한 두목인지 아니면 섹시한 팜므파탈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문적 소매치기인지 카메라의 시선은 갈피 잡지 못한 채 손예진의 매력을 탕진한다. ‘기업형 소매치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하지만 영화는 회칼이 난무하는 기존 느와르 영화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무방비도시’가 전문범죄를 다룬 영화에 뛰어든 후발주자였다면 조금 더 다른 것을 보여 줬어야 하지 않을까. 기대만큼 생각도 많아지는 작품이다.
  • [강유정의 영화in] 미스트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다 보면 사람이라는 것, 그 자체가 괴물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미스트’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괴물들이 몰려온다. 사람들이 공포에 떤다. 대개 비슷한 상황들이다. 괴물의 모습이 달라진다. 때론 좀비이기도 하고, 때론 살인마이기도 하며 때론 유전자가 변형된 동물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안개다. 안개의 공포는 그것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영화 ‘미스트’의 전반을 감싸는 공포감 역시 여기서 비롯된다. 안개가 우리를 포위했다. 그런데 그 안개에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숨어 있다. 그것은 생명체일까 아닐까, 아니 지구상의 것일까 아니면 외계의 것일까. 그런데, 이 영화 ‘미스트’, 만만치 않다. 그 만만치 않음은 영화의 공포가 실은 외재적인 데 있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불온한 안개와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겁을 먹는다. 누군가가 괴생물체를 목격했노라고 말하지만 쉽게 믿어주지 않는다. 대도시에서 온 똑똑한 변호사에게 사람들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바보로 만든다며 외려 자신의 조직을 구성한다. 바보들을 따돌리고 밖에 나가보자고 말이다. 이 틈을 타서 종교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는 광신도 주부가 종말론을 외친다. 이 모든 것이 신의 징벌이라고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희생양’을 바쳐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생물체라고 믿기 어려운 희한한 괴물들이 그들을 습격한다. 그런데 더 공포스러운 것은 이 미지의 괴물 앞에 선 ‘인간’이라는, 나약하고 간교한 생물체들이다. 그들은 그 작은 공간 안에서 편을 가르고 획책한다. 의견은 사람의 수만큼 갈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성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광신도로 돌변해 살인을 저지른다. 먹을 것이 해결된 ‘마트’라는 공간, 하지만 갇혀 있다는 불안이 준비된 식량으로 달래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공포 그 자체 때문에 공포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결국 선택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죽더라도 도망쳐 보는 것, 두 번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마지막은 사이비 종교와 같은 미망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 카메라는 죽더라도 도망쳐 보자는 낙관적 행동주의자들을 따라간다. 그렇다면 그들은 탈출에 성공할까? 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다. 괴물이 나타나는 순간 이미 결말이 준비 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당신이 선택하는 것, 바로 그것이 답이 되리라는 것. 따지고 보면, 미국의 스릴러 영화들은 외계 혹은 미지에서 온 가상의 적들을 많이 그려낸다. 좀비, 외계인, 괴생물체 등등. 가상의 적들로부터의 침공이라는 설정 덕분에 SF라는 장르가, 그리고 특수 효과가 발전되어 왔겠지만 때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미국은 진짜 미국을 침범할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침범당한 역사도, 유린당한 기억도 없는 그들에게 적은 늘 외재적인 것은 아닐까? 스릴러와 미스터리 속에서도 억압당했던 여성과 침략 당한 역사를 재구하는 우리 영화와 달리, 미국의 영화들은 자유롭다. 안개와 함께 안온한 일상에 틈입해 온 괴생물체, 억압이 없는 자들은 미지의 것이 두려운가 보다.
  • 한국영화가 1930년대로 간 까닭은

    한국영화가 1930년대로 간 까닭은

    2008년 한국영화의 시계는 1930년대에 맞춰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JODK 경성방송국에서 펼쳐지는 코미디(라듸오 데이즈)부터 37년 당시 신문물의 유입 속에 탄생한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이야기(모던보이), 해방기 전후 경성 최고의 사기꾼과 도둑이 벌이는 코믹 액션(원스어폰어타임)까지. 장르와 메시지는 제각각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1930년대 ‘경성’이라는 옷을 걸치고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난다. 스크린 뿐만이 아니다. 연극, 문학 등 문화계 곳곳에서 새삼 1930년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 1930년대인가? 무엇보다 영화계의 ‘30년대 돌아보기’는 소재 빈곤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창작력 부재와 이야기 힘의 약화는 올해 내내 한국영화 부진의 이유로 꼽혀왔다. 그런 배경에서 동양과 서양이 교차하고 봉건과 현대가 공존하는 1930년대가 충무로에 새롭게 다가왔다.CJ엔터테인먼트 이상무 부장은 “최근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들을 보면 그동안 나올만한 이야기는 다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며 “영화 ‘왕의 남자’ 흥행 이후 시대극에 대한 거부감이 줄었고,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한국영화가 1930년대를 돌파구로 삼게 한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광복 전후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인물들의 갈등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대해 금기시하고 어둡게만 바라보던 시각에서 탈피한 것도 한 요인이다. 영화평론가 강유정씨는 “1930년대 하면 그간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라는 부채 의식이 있었는데, 최근 소설과 드라마 등을 보면 신문물이 들어오며 자유연애가 이루어지는 등 다양한 모습을 띠는 시대를 다루는 데 어떤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듯하다.”고 말했다.‘라듸오데이즈’(내년 1월31일 개봉)를 제작하는 싸이더스 FNH의 박주석 팀장도 “이 영화는 1930년대를 무조건 어둡고 우울하게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자는 시각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라듸오데이즈’만 해도 음악적으로는 당대 가요는 물론 스윙재즈, 탱고민요 등이 혼재돼 있고, 의상에서도 기모노, 한복, 양복이 섞여 있어 1930년대는 다양함 그 자체라는 것이다. ●문화적 점이(漸移)지대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표현을 중시하는 제작자들에겐 더없이 매력적이다. 문화적으로 다양한 시기인 만큼 이국적인 배경을 활용할 수 있고 캐릭터를 그려낼 때 운신의 폭이 넓고 새로운 영감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원스어폰어타임’(내년 1월31일 개봉)의 연출을 맡은 정용기 감독은 “1930년대는 시대 배경에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할 수 있는 문화적 점이지대로 표현의 폭이 넓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현대물에서는 중절모를 쓰거나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 의상이 등장하면 사실감이 떨어지지만,30년대 영화에서는 시각적으로 멋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 시대는 총을 소품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현란한 누아르풍의 영상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모던보이’(4월 개봉예정)를 제작하는 KnJ엔터테인먼트의 곽신애 프로듀서는 “1930년대는 현대적인 캐릭터가 시작된 시기로, 고증에 한발을 딛고 창조성을 더하는 작업은 무척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한번도 영화화되지 않은 흑백사진 같은 당시 상황을 제대로 재현해낸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양날의 칼과 같다는 것이다. ●문학쪽도 1930년대 주목 문학에서도 지난 몇년간 1930년대의 시대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경성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다수 등장했다.2002년 출간된 김진송의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는 최근의 ‘경성영화’나 드라마에 영감을 준 작품으로 꼽힌다.2∼3년 전부터는 TV드라마에도 그 기세가 번졌다.‘경성스캔들’ ‘서울 1945’ 등이 그것이다. 작년에는 연극에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조선형사 홍윤식’‘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이 재기 넘치는 상황극으로 관객의 입소문을 탔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1930년대에는 우국지사의 사랑, 스파이, 게이샤, 모던보이, 모던걸, 첩으로 취급받는 신여성 등 매력적인 소재들이 많아 관객이 스스로 질투, 애증, 복수, 스릴을 함께 이끌어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스타일로 관객을 끄는 전략이라는 얘기다. 최근 영화계가 1930년에 주목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이은주 정서린기자 erin@seoul.co.kr
  • [강유정의 영화in] 미스터, 후아유

    장례식도 사람 사는 일 중 하나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추모하는 행사이고 그래서 고인이 주인공인 자리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죽은 사람, 다른 말로 하자면, 시체 한 구 주위로 산 사람들이 몰려든다. 평상시라면 얼굴도 마주할 일 없는 먼 친척들이 모여들고, 고인과 특별한 사연을 지닌 친구들도 온다. 그래서 장례식은 죽은 사람을 둘러싼 산 사람들의 ‘행사’가 된다. 그런데 때로 이 다종다양한 사람들은 ‘행사’를 사고로 만들기도 한다. 영국 코미디 영화 ‘미스터, 후아유’(Death At A Funeral·1월3일 개봉)의 장례식이 그렇다. 장례식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시체가 잘못 운구되어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착오는 시작에 불과하다. 영화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하는 친척들을 하나씩 보여준다. 집안의 대소사를 다 맡아 하는 조금은 멍청한 사촌이 등장하고, 약대를 다니는 고인의 조카가 순도 높은 환각제를 제조했다며 좋아한다. 동생의 집에 들른 누나는 약혼자에게 약간의 안정제를 주는데, 그 안정제는 알고 보니 환각제. 이제 사태는 점점 복잡하게 꼬여간다. 환각제를 복용한 변호사 약혼자는 조증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미스터 후아유’는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해프닝들을 설득력 있는 웃음으로 전개해간다. 약간의 소동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은 몇 개의 계기를 맞아 폭발하고 만다. 그 계기 중 하나가 환각제라면 다른 하나는 바로 낯선 시선, 난쟁이 남자이다. 남자는 장례식을 주관하는 둘째 아들을 불러 뭔가 긴밀히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한다. 그는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그 사진 속에는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와 낯선 남자와의 낯 뜨거운 장면들이 있다. 연인이었던 난쟁이 남자는 약간의 유산을 요구하고, 작가인 형 로버트와 다니엘은 이 일을 수습하기에 전전긍긍한다. 이쯤 되면 마약을 안정제로 착각해서 복용한 사이먼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옥상에 올라간 사이먼, 난쟁이를 숨기려다가 거의 죽게 만든 형제들, 이제 사건들은 웃음의 연결고리가 되어 폭소를 빚어낸다. 마약과 난쟁이 남자의 시너지가 폭발했을 때 영화의 웃음 수치는 최고조로 올라간다. 이제, 이 장례식에서 아무도 죽은 이를 추모하는 자는 없다. 모두들 남아 있는 자신들을 걱정할 뿐. 장례식엔 눈물과 슬픔만 있을 것 같지만 실상 그곳만큼 치졸한 싸움이나 소문이 많은 곳도 드물다. 장례비 때문에 다투고 때로는 부조금 때문에 형제간에 영영 원수가 되기도 한다.‘미스터 후아유’에 그려진 영국 장례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인과 그 가족을 위로하려 왔다고는 하지만 다들 제각각 자기 일들에 더 분주하다. 영국 코미디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욕설이나 몸개그, 폭력적 장면이 아닌, 약간의 엇박자와 상황의 연쇄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련된 웃음을 준다. ‘미스터 후아유’역시 장례식과 친척들이라는 소재 안에서 무리 없는 해프닝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웃음의 고리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는 점도 장점일테다. 말장난과 몸개그가 한국식 코미디이기도 할테지만 때론 이런 세련된 능청이 더 반가울 때도 있다. 실소와 폭소 사이, 거기에 영국식 코미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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