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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포로·납북자 송환 논의

    남북한은 21일 금강산에서 적십자회담 전체회의를 6개월 만에 재개해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문제를 논의했다.남북은 22일에는 장석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과 최성익 조선적십자사 중앙위 부위원장간 대표접촉을 가지며 23일에는 2차 전체회의를 열고 회의를 마칠 예정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 체제가 들어선 뒤 처음 재개되는 남북 공식회담에서 북측이 입장변화를 보일지 주목된다. 이 장관은 올해 업무계획에서 “국군포로·납북자 생사확인과 상봉 등을 위한 대북 설득노력을 강화하고 납북 피해자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는 등 귀환납북자와 납북자 가족에 대한 지원대책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은 지난해 8월 6차 적십자회담에서 전쟁시기 이후 납북자의 생사 및 주소 확인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려 합의문을 도출하는데 실패한 바 있다.남측은 전쟁시기 및 그 이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사람을 논의 대상에 모두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북측은 전쟁시기 행불자만을 논의하자고 맞섰다. 북측이 과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등이 특수이산가족상봉 형태로 만났던 방식을 고수했고, 남측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생사 및 주소 확인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남북 아이스하키대회 열흘 앞으로

    남·북 강원도 아이스하키팀이 다음달 2일부터 5일까지 춘천에서 화합의 경기를 펼칠 전망이다. 강원도는 21일 북강원도를 방문해 아이스하키팀 친선경기를 논의한 결과 다음달 2일부터 남·북 아이스하키대회를 열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측 아이스하키팀은 국가대표급 수준의 선수들로 구성되며 선수단 25명과 임원 10명 등 모두 35명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강원랜드 아이스하키팀을 비롯, 대학·실업선발팀 등과 춘천 빙상장에서 친선경기를 가질 예정이다. 강원도는 앞으로 북측과 조율해 자세한 일정을 추가로 확정할 방침이다. 이번 북측 아이스하키팀 한국 방문은 지난해 9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강원도 민속문화축전에서 양측이 합의한 뒤 본격 추진됐다. 당시 북측은 7개 항에 합의하면서 민속문화축전의 답방 형식으로 아이스하키팀의 방문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북 아이스하키대회가 열리면 2014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효과에도 긍정적인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강원도 남북협력담당관실 관계자는 “북측의 아이스하키팀 방문은 지방간 교류 활성화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면서 “세부적인 일정을 곧 확정해 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러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儒林(54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儒林(54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4) 그러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처음 만난 율곡의 모습은 의기소침하고 염세적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일까, 퇴계는 예리하게 율곡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다. 마침내 퇴계는 율곡의 상심이 한때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불교적 방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마음속의 어둠을 율곡 스스로 털어놓도록 짐짓 유도했던 것이다. 퇴계는 잘 알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은 오직 고백으로 가벼워지고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그뿐인가. 고백이야말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묘약임을. 따라서 율곡이 퇴계를 찾아온 것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의 형량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백할만한 상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음을 비로소 퇴계는 깨달았던 것이다. 과연 율곡은 찾아온 첫날 하루 종일 자신의 사상적 갈등을 고백하고 이를 하소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이에 대해 가타부타 그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주자가 스승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이연평이 ‘그것(주자가 선에 몰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만 짤막하게 대답하고 ‘다만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훈계하였던 것처럼 퇴계도 율곡에게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율곡으로부터 모든 고백을 전해들은 퇴계는 마침내 율곡의 마음을 달래고 격려하기 시작한다. 율곡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퇴계가 선택한 방법은 주자 역시 10년 이상 율곡처럼 불교적 선에 몰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주자 역시 불교적인 사상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학문적 오류에서 벗어나 유가의 종지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한때 율곡의 불교적 방황은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퇴계의 따뜻한 격려내용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율곡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껍질을 찢고 무거운 허물을 벗은 듯 율곡의 표정은 밝아지고 자신감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앞으로 정진해 나가야할 학문의 방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이 머물렀던 2박3일의 짧은 기간은 실로 절묘하게 구성된 전3막의 연극무대와 같은 것이었다. 제1막이 율곡의 고백을 통한 기(起)였다면, 제2막은 주자와 간접적으로 비유함으로써 치유의 승(承)과 그리고 심기일전의 반전(反轉)이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제3막은 마무리의 결(結). 이 모든 드라마를 연출한 사람은 바로 퇴계. 퇴계는 2박3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율곡의 전 일생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마무리로 완성시킨 위대한 연출자이자 참스승이었으니, 율곡이 이처럼 젊은 시절 퇴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율곡은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 사상적 방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포자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 儒林(54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儒林(54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30) ‘무진육조소’에 나오는 불교에 대한 퇴계의 태도는 확고부동하다. 불교는 노자와 장자보다, 심지어 관중과 상앙이 부르짖었던 법가(法家)보다도 더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못박은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대감정은 물론 선왕 명종대에 있었던 문정황후와 보우스님과의 유착관계에 따른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비록 선왕(명종)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릴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있사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아직도 그 후유증이 광범위하게 남아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퇴계는 불교를 이처럼 동방의 가장 심한 폐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일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퇴계도 한때 짧은 기간이었으나 선사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선 공부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47세. 퇴계가 머물렀던 암자는 월란암(月瀾菴)이라고 불리던 작은 선찰이었다. 퇴계는 이 암자에서 주자가 쓴 ‘심경(心經)’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의 심정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 같이 공경하였다.” 퇴계는 노년에도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엄격하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한번씩 읽었다고 하니, 작은 암자에서 깨달았던 ‘심경’의 영향은 실로 퇴계의 전생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월란암의 암자에 은거하였던 것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던 은퇴시기 직전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월란암은 퇴계에 있어 적멸궁(寂滅宮)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째서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한 결심을 불교의 선림(禪林)에서 하였음일까. 율곡처럼 비록 1년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퇴계는 어째서 불교가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선사 속에서 주자를 스승으로 삼기 위한 초발심을 단행하였던 것일까.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다.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더니 서림사 벽에 붙였던 그 시가 감개 깊어라. 천 년 뒤 우리나라 도가 없어 적막하니 여산 비추던 그 달빛 나의 침실 비춰다오(從師學道寓禪林 壁上題詩感慨深 寂寞海東千載後 自燐山月映孤衾).”
  • 儒林(53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儒林(53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8) 그러므로 율곡이 퇴계의 서당에 머물러 있었던 2박3일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는 자연 율곡의 불교행적에 대한 고백과 그에 따른 퇴계의 답변이 주화제였을 것이다. 훗날 퇴계가 쓴 글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서적을 읽고 거기에 깊이 중독되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감히 도에 함께 나갈 만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하고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2박3일의 짧은 만남 중에 율곡은 자신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실상을 감추려하지 않고 충분히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더구나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듬해 봄, 한성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에 응시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있겠느냐.’는 공격의 수모를 당한 후였으므로 율곡은 그때 받았던 마음의 충격을 조심스럽게 퇴계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고백을 들은 퇴계는 어떤 태도를 보였음일까. 물론 퇴계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있었다.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퇴계가 선조를 위해서 바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선조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한양에 올라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직책을 제수 받고,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도리에 대해서 강론하였던 내용을 문장화한 일종의 제왕학(帝王學)이었다. 이듬해 12월에 퇴계가 죽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공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임금위에 오르자마자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한양으로 올라와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칭병을 하고 올라오지 않자 선조는 직접 붓을 들어 친필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내린다. “이공, 어진임금은 어진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짐은 갑자기 임금이 되어 어진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소. 그대가 병중이지만 선왕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중국에서 제갈공명은 유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선이 왕위에 오르자 유비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다 갚지 못했으니 새 황제인 유선에게도 은혜를 갚고자 한다, 하였소이다. 그러니 그대도 선왕을 생각하여 짐을 돌봐주어 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기 바라오.”
  • 儒林(53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儒林(53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그런 의미에서 금강산에서 환속하여 이듬해 봄 한성시에서 장원급제할 때까지의 한겨울은 율곡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이때 지은 율곡의 시 한수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등불 아래서 글을 본다(燈下看書)’라는 제목의 이 짧은 시는 율곡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 어디에 진정한 광거(廣居)가 있단 말인가. 백년의 이 몸, 잠깐 쉬어 갈 뿐이로세. 모처럼 해외의 유산몽(遊山夢)에서 깨어나, 외로운 등불 아래 옛 책(古書)을 보누나(何處人間有廣居 百年身世是廬 初回海外遊山夢 一盞靑燈照古書).” 이 시 속에는 금강산에서의 유산몽에서 깨어나 또다시 미뤄 두었던 옛 책을 꺼내들고 유학에 전념하는 율곡의 심정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율곡이 ‘광거(廣居)’, 즉 ‘광활한 집’에 대해서 운위하였다는 점이다. 이 ‘광거’란 문구는 맹자의 ‘등문공(藤文公)하편’ 제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서 맹자의 핵심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명구 중의 하나이다. 즉 유세가였던 경춘(景春)이 맹자를 찾아와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와 같은 당대의 종횡가(縱橫家)들을 ‘그들이야말로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번 화를 내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조용히 거처하면 천하가 잠잠합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단호하게 ‘그들이 어찌 대장부일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은 데서 비롯된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그대는 예를 배우지 않았는가. 장부가 관례를 행할 때에 아버지가 훈계를 하고, 여자가 시집을 갈 때 어머니가 훈계를 하는데,‘시집을 가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하니 순종함을 정도로 삼는 것이 첩부(妾婦)의 도가 아니겠는가.” 맹자는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가 제후들을 설득하여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변절을 반복하면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게 하는 무도한 행위를 여염집의 여인에 비유하여 질타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진정한 의미의 대장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것을 행하여 부귀가 방탕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위무가 절개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바로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의 시에 나오는 ‘인간 어디에 진정 광거가 있단 말인가(何處人間有廣居).’하는 문장은 바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바른 도리를 행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여 따온 것. 이를 통해 율곡은 완전히 불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옛 고서에서 읽었던 대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유가의 ‘넓은 집(廣居)’에서 바른 자리에 서며, 바른 천하의 도리를 행할 것을 새삼 결심하는 것이다.
  • 儒林(53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6)

    儒林(53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6)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6) 1년 반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도중에 상운정에서 자신의 소회(所懷)를 털어놓은 율곡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에 풍악(금강산)을 떠나,/ 석양 무렵 상운정에 당도하니, 모래 위에는 바위들 늘어섰고,/소나무 사이에는 길이 하나 나 있구나. 파도소리 우르르 바다를 몰아가고,/기러기 떼 듬성듬성 전자모양 형성했네. 말 죽 먹여 급히 길 떠나니,/앞산에 벌써 저녁 안개 어둑어둑(秋風別楓岳 斜日到祥雲 沙上千巖列 松間一路分 殷雷波捲海 疎篆雁成 馬催程發 前山晩霧昏)” 이 무렵 율곡의 고향 임영에는 외할머니 이씨가 눈이 빠져라 율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율곡의 생애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외할머니 이씨. 흔히 율곡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을 율곡의 어머니였던 신사임당 한 사람으로 압축하고 있으나 오히려 율곡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꿰뚫어 본 사람은 외할머니 이씨였다. 이러한 사실은 세살에 불과한 율곡에게 이씨가 석류를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묻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때 율곡은 옛 고시를 인용하여 ‘석류껍질이 부서진 붉은 구슬을 감싸고 있네(紅皮囊裏 碎紅珠)’라고 대답함으로써 주위사람을 탄복시켰는데, 어쨌든 이 ‘석류시’가 율곡이 지은 최초의 절구이고 보면 율곡의 천재성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외할머니 이씨였던 것이다. 이 무렵 외할머니 이씨는 76세의 노인이었고, 특히 4년 전에 사랑하는 딸 신사임당을 여의고 시름에 잠겨있었으므로 간다온다 일체의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살아 돌아오는 율곡을 본 순간 미친 듯이 맨발로 뛰어가 율곡을 맞아들였을 것이다. 율곡은 이곳 강릉에서 한겨울을 지낸다. 이듬해 봄 또다시 강릉을 떠나 한성시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니, 비록 한겨울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강산에서 있었던 불자로서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의미 깊은 전환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울 동안 율곡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목표를 곰곰이 생각한 후 그가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아온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자신을 경책하는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뜻의 자경문은 불교와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글이며, 또한 다시 청산을 버리고 세속으로 환속하여 복귀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방어의 아폴로기(apology)였던 것이다. 한겨울 동안 율곡은 치열하게 외갓집에서 입산하기 전부터 계속해왔던 과거시험공부를 계속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듬해 봄 한성부에서 주관하는 한성시에 응모하기 위해서 율곡은 서둘러 한양으로 귀향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장원에 급제하여 화려하게 입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儒林(53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儒林(53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5) 율곡이 본격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그 내용에 있어서 비판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율곡의 나이 40세 되던 해 9월. 율곡은 선조를 위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서하여 올렸는데, 이 글속에서 율곡은 젊은 시절 자신이 심취하였던 달마의 선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살피건대 부처의 말에는 정밀한 것도 있고, 조잡한 것도 있습니다. 조잡한 것은 다만 윤회나 인과응보의 말로써 죄와 복을 확산케 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양을 바치도록 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정밀한 것에 있어서는 마음(心性)을 지극하게 논하였는데, 이(理)를 마음으로 여겨서 마음을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고 또한 마음을 본성이라 여겨서 본성을 견문(見聞)작용이라 하고, 적멸(寂滅)을 큰 취지로 하여 하늘과 땅, 만물을 헛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세상을 벗어난 것을 도리라 하고 인륜과 도리를 질곡(桎梏)이라 하였습니다. 그 공부의 요점은 ‘문자를 내세우지 않고 곧바로 인심을 가리키며 본성을 보면 부처님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깨달은 뒤에 바로 천천히 닦는 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였고, 만일 뛰어난 사람이면 곧바로 깨닫고 바로 수도한다 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였습니다. 달마가 양나라의 무제(武帝) 때에 중국에 들어와 비로소 그 법을 전하였는데, 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것은 명종 9년(1554년) 봄 3월, 성혼과 도의지교를 맺은 직후였다. 그리고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하였던 것은 이듬해 가을이었으니, 율곡은 금강산에서 1년 반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은둔생활을 보낸 것이었다. 강릉의 외갓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율곡은 두개의 시를 남긴다. 그 첫 번째는 ‘우연히 시를 짓는다(偶成)’는 짧은 시. “취미를 얻어선 저절로 근심을 잊는데, 시를 읊자니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네. 꿈길에 잠깐 고향 산천 돌다 보니, 가을 강 비에 낙엽만 지고 있네.”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곡은 재빨리 불교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도가 깊은 고승처럼 현란한 선시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었던 금강산에서와는 달리 율곡은 ‘시를 읊으려 해도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음(吟詩不成句)’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고향인 강릉의 옛 이름인 임영(臨瀛)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다른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은 ‘임영으로 향하다가 상운정에서 쓰다(向臨瀛祥雲亭)’. 시속에 나오는 상운정(祥雲亭)은 고려 말의 문신 안축(安軸)이 관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노래하였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오고 있는 설악산의 동쪽과 낙산의 서쪽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 일찍이 안축이 ‘자색 봉황타고 붉은 난새를 탄 아름다운 신선 같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현을 뜯고 있다.’고 관동별곡에서 노래할 만큼 관동의 명승지에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인 누각인 것이다.
  • 儒林(53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3)

    儒林(53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3)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3)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율곡의 마음속에는 불교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금강산에서 남긴 20여 편의 시들은 주로 선시(禪詩)로 스님들과 나눈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설의(雪衣) 스님에게 주다’라는 시는 율곡이 남긴 대표적인 선시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과 물이 서로 부딪치니/골짜기마다 맑은 우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묻노니, 설의 스님이여./이것이 물소리인가 돌소리인가. 그대 만약 말 한마디 답변한다면/물아(物我)의 정을 알았다 하리.” 이 선시를 보면 율곡이 얼마나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심취하고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육조혜능은 달마의 직계 제자로 특히 돈오법(頓悟法)의 시조였다. 일찍이 남쪽의 오랑캐 출신이었던 혜능은 오조 홍인(弘忍)을 찾아가 제자가 된다. 그러나 이때 홍인의 수제자는 신수(神秀)로 누구든 육조는 당연히 신수상좌가 물려받으리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처의 바리때와 금관 가사를 물려받은 사람은 무지렁이 육조혜능. 겨우 23세의 어린 나이로 조사위(祖師位)를 물려받은 혜능은 부처로부터 내려온 바리때와 금관 가사를 빼앗으려는 무리에서 도망쳐 남방으로 흘러들어가 사냥꾼 사이에서 숨어 지냈던 것이다. 육조혜능이 법상 위에 올라가 다시 설법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 보림사(寶林寺)란 절에서였다. 그때 절에는 많은 대중들이 모여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한쪽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한쪽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여 일대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육조혜능은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라 바로 그대의 마음’이라고 최초의 설법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율곡이 설의 스님에게 ‘돌과 물이 부딪쳐서 맑은 우레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가 물소리인가 아니면 돌소리인가.’하고 물었던 것은 육조혜능에게 ‘흔들리는 것은 깃발 때문인가 바람 때문인가.’하고 물었던 질문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설의 스님에게 ‘그 소리가 나는 곳(所從來)’을 묻는 율곡은 결국 자신의 목표가 육조혜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율곡은 금강산의 입산 출가를 통해 불세출의 선걸(禪傑) 혜능의 뒤를 이어 칠조(七祖)로 거듭 태어나기를 염원하고 있었으며, 혜능 이후로 행방불명되어 버린 부처의 금관 가사를 물려받음으로써 돈교(頓敎)의 법맥을 물려받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결코 칠조가 될 수 없음이었다. 혜능이 가난하여 나무 장사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무지렁이였다면 율곡은 9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이라고 불릴 만큼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수재. 그러므로 1년 반에 걸친 참선에도 불구하고 결국 율곡이 얻은 것은 앵무새에 불과한 구두선(口頭禪)이었을 뿐. 마침내 20세 되던 해 가을, 율곡은 하산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 儒林(53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儒林(53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2)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에 쓴 20여 편의 시중에서 이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楓岳贈小庵老僧)’라는 시야말로 1년반에 걸친 율곡의 행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고해시(告解詩)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율곡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불자가 아닌 유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며,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젊은 선비, 즉 유생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암자에서 은둔하며 솔잎을 먹으며 참선하고 있던 노승과 한바탕 선문답을 벌여 자신이 노승을 거꾸러트리고 이겼음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한 이 시속에는 노승을 위해 써준 자신의 칠언절구를 마치 진리를 깨닫고 쓴 오도송(悟道頌)으로까지 인용하고 있어 이러한 율곡의 모습을 보면 1년여에 걸친 금강산에서 율곡은 결코 불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진 궁극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율곡의 행색은 ‘의암(義菴)’을 법명으로 하고,‘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는 조주의 화두를 결택함으로써 겉으로는 완전히 불제자가 되었으나 실체는 여전히 유생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곡은 돈오의 불법을 깨우치고는 싶어 하였지만 ‘목숨을 내던질 곳(放身命處)’의 궁극처는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선의검객 마조는 제자 백장(百丈)이 와서 ‘부처의 본뜻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바로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있다.(正是汝放身命處)’고 대답하였다. 또한 마조의 제자 중 출가하지 않았던 방(龐) 거사는 마조의 문하에서 2년간 머물며 깨달아 ‘온전히 깨달은 범부’로 일생을 보냈는데, 어느 날 스승 마조에게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마조는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리면 그때 가르쳐주겠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부처의 본뜻이 있고,‘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린 그곳’에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진인(眞人)이 있다.’는 마조의 대답은 불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면 한마디로 ‘죽으라’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그러나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율곡의 마음속에는 유가의 실리(實理)가 가득 들어있었으므로 율곡은 비록 겉은 불자와 같은 행장을 차리고 있었으나 불법을 향해 목숨을 내던질 수가 없었으며,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은 금강산 입산과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던 하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똑똑한 세속의 선비였던 율곡을 만난 순간 그가 쓴 절구를 소매 자락에 집어넣은 후 자신만의 공간이 젊은 선비에게 노출되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노승이 바로 부처의 현신임을 아마도 율곡은 평생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 감정적인 흑백 사고의 위험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 감정적인 흑백 사고의 위험성

    지난주에 우리는 세상사가 의지적 선과 악으로 그렇게 확연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런 세상사 앞에서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음미했다. 오늘은 흑백적 사고와 감정적 단세포의 위험성을 들여다보자. 인간세상의 온갖 양상을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로서 잘 묘사한 것이 소설 ‘삼국지’가 아닌가 한다.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등 기라성 같은 역사의 실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비는 그 어진 덕성으로, 관우는 불굴의 의리정신으로, 장비는 천하용장으로, 제갈량은 천하제일의 작전 귀재로, 그리고 조조는 지모의 전략가로 다가온다. 이런 가치 때문에 그들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지닌 그 가치의 장점들이 그들을 실패하게 한 단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즉 유비의 어진 덕성이 오히려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고, 관우의 의리정신이 그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게 하는 편협성을 낳게 하고, 장비의 무쌍한 용기가 난폭함으로 변해 그로 하여금 비명횡사케 하고, 제갈량의 명석한 두뇌 역량이 그의 건강을 상하게 하고 자기보다 못한 다른 이들에게 일을 분담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리게 하여 실패의 원인을 만들고, 조조의 재빠른 머리회전이 그로 하여금 자승자박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물론 소설 ‘삼국지’의 원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은 이런 이면의 사실을 밝히지 않고, 독자가 행간에서 그런 가치들의 이면을 읽도록 하였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모든 가치가 그 이면에 반(反)가치의 찌꺼기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치와 반가치가 서로 별개의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이중성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즉 우리를 성공시키는 복스러운 요인이 동시에 우리를 실패케 하는 재앙으로 늘 작용할 수 있으므로, 지혜있는 사람들과 국민은 복(福)과 화(禍)의 양면을 다 고려하여 세상일을 감정적으로, 단세포적인 택일의 심정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택일의 기분은 화끈하게 흑백으로 세상을 양분하여 이것은 전적으로 옳고 좋은 것이고, 저것은 전적으로 그르고 나쁜 것이라고 단정짓는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화여! 복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고, 복이여! 화가 엎드리고 있는 바이다.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사(正邪)가 없다. 바른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 되고, 선이 다시 재앙이 된다.’ 노자의 이 말은 세상의 일을 일정한 고정적 가치로서 교조적으로 봐서는 안되고, 선명하지 않은 중도의 미덕으로 상황을 다 아우르는 것이 중요함을 언명한 것이겠다. 이것은 모든 상관성을 거두절미하고 절대적인 외곬의 가치로서 어떤 것을 단세포적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저것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고, 저것은 이것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나쁜 것으로 주관적 감정을 실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저것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하여도 이것이 없었는데 저것이 혼자 생길 수 없으므로 세상사는 다 서로 얽혀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단세포적일수록 선동가의 흑백적 사고가 설친다. 선동가의 흑백적 사고는 곧 독재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교조적인 흑백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철학과 문학예술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렇게 세상이 단순하면, 세상은 바보들의 행진곡으로 요란하게 된다. 바보들이 일희일비하면, 세상은 한꺼번에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린다. 흑백적 사고는 감정적으로 선악을 심판한다. 감정적인 선악관이 선명할수록, 그는 대중을 쉽게 쥐고 흔든다. 왜냐하면 대중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현대철학자인 하이데거가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서가 ‘남 따라 장에 가는’ 성질로서의 대중성(Offentlichkeit)이라고 말한 것을 유념해야 하겠다. 노자를 다시 말한다. 감정적인 흑백적 사고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길을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했다. 그것은 빛만을 좋아하고 먼지는 더럽다고 버리는 택일이 아니라, 빛과 먼지와 다 함께 친화하고 동거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내 생각이나 세상사를 택일적 선명성으로 갈라놓아 이원적 적대감정으로 채색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나 세상사가 다 이중적이어서 화광동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 구절이 일깨운다. 내 생각이나 세상사에 다 (선/악)과 (흑/백)이 뒤엉켜 있다. 우리나라에 자기가 100% 선과 백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는 지도급의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이런 이들은 불가피하게 사회적인 위선을 짓는다. 흑백적 사고는 마음과 세상의 이중적 사실을 간과하기에 위선을 부른다. 노자는 정의라는 이름아래 위선적으로 심판하는 흑백논리를 피하기 위하여 습명(襲明)이라는 생활태도를 제시한다. 습명은 너무 밝은 것을 약간 감추기 위하여 옷으로 시신을 염하듯이 싸는 것을 일컫는다. 밝기와 어둠의 중간에서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이중적이라는 사람이 훨씬 덜 위선적이고 덜 투쟁적이며, 세상을 위하여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자기가 습명처럼 이중성의 중간에 서있기에 선과 백의 화신보다 덜 독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불선과 흑의 위험성이 자기자신과 사람들에게 있음을 알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식한 감정적 생각으로 복합적인 세상을 쉽게 흑백으로 판단하는 교조적 마음보다 오히려 나의 단순소박한 가치관이 세상에 반가치의 괴로움을 주지 않았는지 세상을 전체로서 보살피려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야 하겠다. 노자가 잘 봤듯이,‘생각이 방정하면 남을 자르게 되고, 청렴하면 남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며, 강직하면 방자해지고, 영광스러우면 휘황찬란해진다.’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라고 한다. 대단히 아름답고 조촐한 시다.‘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스치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맹자’의 ‘진심상’에 나오는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 중에서 두 번째의 즐거움으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음’이라고 한 말이 연상된다. 그토록 일말의 부끄럼도 없는 마음은 지순한 사람의 극치를 상징한다. 지극하도록 순결한 마음이므로 잎새에 스치는 바람에 잎새가 다칠까 괴로워한다. 해맑게 흐르는 계곡의 투명한 물이 떨어지는 낙엽에 오염될까봐 마음 졸이는 사춘기의 순수성을 맛본다.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저 시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깨끗한 심성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본디 물이 맑은 나라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러나 저 순수성의 가치도 반가치의 배설물을 토해낸다. 이것이 세상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 순수의 배설물은 이른바 어떤 혼융을 싫어하고 잡동사니를 배척한다는 점이다. 순수성은 섞임과 혼융을 불순하다고 여겨, 순수를 고집하면서 편협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순수성의 가치는 편협성의 반가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순수의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맹렬한 경우에 그 가치 수호는 쉽게 배타적인 독선으로 나아가면서 타자에 대한 혐오감을 노출하게 된다. 율곡이 금강산에서 불교와 접종한 것은 유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참을 수 없는 이단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래서 율곡은 스스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참회하는 글과 생각을 여러 번 나타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듯 싶다. 조선 인조 때에 유학자였던 장유(張維)가 ‘계곡만필’에서 중국에는 유학이외에 불학과 단학(도가)이 있고, 유학도 정주학과 육왕학이 다 공존하는데, 조선에는 오로지 주자학만 있어서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오로지 입으로 주자만을 봉독하는 편협한 풍토를 개탄한 적이 있었다. 순수성의 반가치가 흑백적 사고로 이어지는 것 같다. 주자학이 편협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학은 다양하게 불교의 심학과 노장의 자연학을 다 아우르면서 유교의 문화를 철학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풍요한 사상이다. 다만 그 주자학을 편협하게 공부한 조선조의 전통적 문화풍토와 그 습기(習氣)가 문제였다. 세상을 흑백적 감정으로만 읽는 사람들은 세상을 본의 아니게 내편과 네편으로 갈라 놓는다. 그런 편가르기는 다 순수와 불순의 대결구도에서 생긴다. 어떻게 올바른 순수가 더러운 불순과 섞일 수 있는가? 이런 흑백적 사고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실은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복합적 전체의 구조인데, 단순한 감정적 흑백심리는 세상을 그 전체에서 이익되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감정상의 흑백심리보다 전체를 이익되게 하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애써야 한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부끄럼이 없는’ 마음은 진토(塵土)의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은 하늘의 빛과 땅의 흙먼지가 서로 공존하는 중간지대다. 그래서 노자가 ‘화광동진’이나 ‘습명’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말함이겠다. 습명은 자기 속에 있는 밝음만 보지 말고 어둠을 보면서 어둠의 반가치가 재앙을 피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겠다. 세상의 균이 소탕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무균자가 아니고 보균자다. 보균자는 병원체를 몸에 늘 지니고 있다. 몸을 늘 보살피는 자가 건강한 사람이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에서 누가 추상적으로 더 순수했던가 하는 기준보다, 누가 우리 모두를 편가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더 잘 보살피려고 했던가를 우리의 영웅으로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복을 짓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려는 복도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이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이 아니겠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儒林(52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儒林(52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원래 화두는 본인 스스로 결택(決擇)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정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갈 때 명종실록의 기록처럼 ‘어떤 중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고’ 또 그 중이 율곡을 데리고 함께 입산하였으므로 율곡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점지해준 사람은 아마도 율곡을 불교에 귀의케 하였던 이름모를 사승(師僧)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율곡은 금강산에서 계정(戒定)에 정진할 무렵 바로 이 난해한 화두를 붙들고 깊은 선정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나무도, 저 구름도, 저 산도, 저 물도 하나로 돌아간다. 태어남도, 죽음도, 애욕도, 번뇌도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꽃도, 저 계곡도, 저 바람도, 저 나비도, 저 새도, 짐승도, 하찮은 미물인 벌레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추위도, 더위도, 향기로운 냄새도, 악취도, 시고 매운맛도,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도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로 돌아간다. 명예도, 인간의 사치도, 칭찬도, 권세도, 임금도, 신하도 하나로 돌아간다.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원한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이 하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금강산을 이곳저곳 탐승(探勝)하면서도 율곡은 자나 깨나 밥을 먹으나 산길을 가나 항상 이 화두에 매어 달리고 있었다. 단발령에 올라 1만 2000봉우리의 기기묘묘한 절경에 심취하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에 집중하고 있었고 마침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르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율곡을 인도해 함께 올라가던 스님이 비로봉이 위험할 것이라고 등정을 만류하였지만 율곡은 하루 낮과 밤을 꼬박 새워 이른 새벽 동틀 무렵에 비로봉 정상에 다다라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취해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동쪽에서는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데, 서쪽바위 위에는 아직 달이 걸려 있는 그 장관을 바라보면서도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놓지 않았던 듯 비로봉에서 지은 시 중에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이고 기가 웅대하면 우주도 좁도다(心虛萬事一 氣大六合窄).’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러 스님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불릴 만큼 선정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율곡의 모습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은 바로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心虛萬事一)’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마음을 비우면 만법이 돌아가는 구경처(究竟處)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율곡의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타파하였음일까. 화두를 타파하여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궁극처(窮極處)를 마침내 견성(見性)하였음일까. 일찍이 달마가 말하였다. “모든 지식을 버려야만 자성(自性:인간의 본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율곡은 달마가 말하였던 대로 지식을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천재. 따라서 율곡의 깨달음은 대오(大悟)가 아닌 해오(解悟)일 가능성이 높다.
  • 儒林(52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儒林(52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금강산으로 입산하는 도중에 지은 율곡의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늙은이 하는 말이, 지나온 세상 햇수조차 기억 못해,/편하고 괴로움과 슬프고 기쁨을 다 맛보았다오. 인정은 얄팍한 매미 날개 무상도 하여라,/ 말하고 웃는 그 속에도 칼날이 감춰 있더군. 나는 이제 옹졸한 생활로 여생을 보전하노니,/본래 칭찬이 없는데 누가 헐뜯을 것인가. 그대 만난 김에 세상 일들 묻고 싶노니,/시국 운수가 몇 번이나 통했다 막혔다 했는고. 부디 이름 갖고 속세에 퍼뜨리지 말기를,/나는 지금 숨어 사는 사람이라오. 그리고는, 닭 잡고 기장밥하여 나를 배불리고,/함께 빈 집에 누워 자면서 성리(性理)를 이야기하였네. 기이한 말과 험한 이야기 가끔 상도에 벗어나,/장자(莊子), 열자(列子)쯤은 개미처럼 내려다 보기도, 이른 아침 잠깨어 보니 사람은 간 데 없고,/단지 빈 뜰에 벗어둔 신만 보이네.” 피의자(被衣子),‘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를 통해 율곡은 자신의 입장을 세상과 인연을 끊은 피의자로 노래하고 있음인 것이다. 금강산에서 율곡은 자신을 ‘의암(義菴)’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의암은 율곡의 불교적 법명이었다. 또한 율곡의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였다.‘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것이 율곡의 화두였던 것이다. 원래 이 화두는 불가에서 최고의 선승이었던 조주(趙洲)의 유명한 선화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학승 하나가 고불(古佛) 조주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러자 조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마의(麻衣)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옷의 무게가 자그마치 7근이나 되었어.” 제자의 질문에 조주가 대답한 청주는 오늘날 산동성에 있는 조주의 고향이었다.7근은 4.2㎏쯤 되는 무게로 옷 한 벌의 무게가 4㎏이 넘는다면 이는 보통 무거운 옷이 아닌 것이다. 이 화두는 1700개가 넘는 화두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난해한 공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화두는 또 다른 조주의 선화와 유사하다. 어떤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그 유명한 남천(南泉)스님을 여러 해 동안 시봉하였다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하였다. “진주에서는 큰 무(蘿富)를 캘 수가 있다.” 조주가 말하였던 진주는 하북성의 정정(正定)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예로부터 큰 무가 나오는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조주가 대답하였던 청주에서 만든 7근이 넘는 베옷이나 진주에서 나는 큰 무와 같은 말은 정답이 아니고 그 어떤 언구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의단(疑團)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 儒林(52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儒林(52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그리하여 율곡은 마침내 금강산에 입산하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때 율곡은 자신의 심정을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작별의 편지에서 대충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학문은 배운다고 능할 수는 없어도 기(氣)는 길러 이룰 수 있네. 이와 기(理氣)는 사람마다 함께 가진 것으로 기를 잘 기르면 마음의 부림을 받지만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면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네. 기가 마음의 부림을 받게 되면 몸에 주재하는 바가 있어 성현도 가히 기약할 수 있으나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면 희·로·애·락·애·오·욕의 7정에 통제가 없어 우매하고 황망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와 옛날 사람으로 기를 잘 기른 이는 맹자일세.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흘러가는 것이나 그 우뚝함 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조용한 가운데에 본체를 배워야 할 것이네. 어진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이 이른바 기를 기르는데 산수를 버리고 도대체 어디서 이를 구하겠는가.” 이 편지에서 율곡이 지적한 ‘기(氣)’란 바로 맹자가 ‘그 기됨이 지극히 크고도 굳세어 길러 해로움이 없다면 하늘과 땅에 가득하게 된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則 塞于天地之間)’고 말하였던 ‘호연지기(浩然之氣)’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직접적인 동기는 맹자가 말하였던 호연지기, 즉 ‘떳떳한 기상’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고 편지를 썼던 것은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모와 큰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불화가 끊이지 않자 ‘끝내 화합하지 못하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낫다.’는 편지를 쓰고 강릉의 외갓집으로 현실을 도피하였던 율곡의 고민에서 엿볼 수 있듯,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이때 율곡은 한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 스님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 스님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유혹하였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비는 데에는 불교를 당할 도가 없습니다.” 천도(遷度).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불교밖에 없다는 스님의 말을 들은 순간 율곡의 마음은 크게 움직인다. ‘명종실록’에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이미 문장으로 나 있었고, 일찍 모친상을 만나 장례를 치르는데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 부친의 첩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 부친은 일찍부터 경전을 좋아하였다. 이이의 나이 16,17세 되던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죽은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복을 정돈하여 그대로 금강산으로 숨어들어갔다.”
  • 儒林(51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7)

    儒林(51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7)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7) 한때 율곡에게 글을 가르쳤던 어숙권(魚叔權)의 목격담이 그 중 하나인데,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튿날 옛 스승이었던 어숙권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어숙권은 율곡이 머리 깎은 중이 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억지로 관을 벗겨 율곡의 머리를 보았다고 한다. 관을 벗기니 길게 늘어진 머리가 몇 척이나 되어 어숙권이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하산한 후 강릉의 외가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때 율곡은 머리가 너무 길어서 선 채로 머리를 빗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의 친지들이나 문인들은 율곡의 금강산행이 일시적으로 불교에 심취하였던 잠행(潛行)이었을 뿐이라고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율곡에 대한 비난을 어떻게 해서든 누그러뜨리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1년 반의 금강산행에서 율곡이 과연 머리를 깎았는지 안 깎았는지는 율곡 자신의 말대로 ‘마음이(불교에) 크게 빠졌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율곡은 자신이 한때 불교에 크게 빠졌던 사실을 크게 뉘우치고 있었다. 율곡이 30세 되던 해 8월 보우를 논척하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란 상소문을 제출한 행동은 자신의 전력을 지워 버리려는 보상심리에서 쓰여진 강경책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벼슬에는 각각으로 그 직책이 있습니다만 정성이 마음에 사무치게 되오면 맡은 바 직분에만 구애될 수 없사오며,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반드시 그 때가 있사오니 해로움이 머리에 절박하게 되면 때만을 기다리고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로 시작되는 상소문에서 율곡은 자신이 예조좌랑으로서 간언의 책임을 맡지는 않았으나 ‘전하께오서 보우를 죄가 없다고 옹호하심으로써’ 많은 중들이 말하기를 ‘전하께오서는 우리 도를 높이시니 유생들이 간하고 다툰다고 해서 이간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이단(異端)의 무리들은 뜻을 얻고, 선비의 기운은 더욱 꺾일 것입니다.’라고 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었던 불교에 심취하였으면서도 이처럼 불교를 ‘이단의 무리들’로 매도한 율곡. 이러한 율곡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또한 상소문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오호라. 국가에 참혹한 화가 오늘날보다도 더욱 심한 시기는 없었으며, 백성들의 여리고 쇠약함이 오늘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중략)…‘시전’에 ‘비유하건대 저 배의 흐름이여, 미칠 바를 알지 못하는 도다. 마음에 근심함이여, 옷을 입은 채로 잘 겨를도 없도다.’하였으니, 신의 근심이 진실로 이와 같사옵니다. 신이 본래 지극히 어리석고 고루한 자질로 외람되게 나라를 구경하고 왕께 손 노릇하는 ‘관국빈왕지렬(觀國賓王之列)’에 채워졌더니 다행히 전하의 버리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어서 뽑아 장원 자리에 두시었으니 주상전하의 은혜가 깊고도 무거워서 갚을 바를 알지 못하다가 눈으로 나라를 병들게 하는 기미를 보고 마음에 감격한 정성이 간절하여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이미 미치고 어두운 말씀을 올렸사오니 직분을 뛰어 넘은 죄를 엎드려 청하옵니다.”
  •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그러나 1년 반 동안의 불교입문 전력은 율곡 일생에 있어 두고두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조선조의 국시(國是)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특히 율곡이 입신양명 중이었던 명종조에는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와 보우와의 유착으로 불교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하던 무렵이었다. 보우(普雨)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를 전후하여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한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다. 그가 처음 금강산에서 수륙대전을 올릴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릴 정도로 법명이 널리 알려진 승려였다. 그는 문정왕후의 비호에 의해서 승과(僧科)를 다시 세워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자신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를 선교양종의 종찰(宗刹)로 삼았다. 이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당과 같은 고승들이 스님이 되는 등 수많은 업적을 거두었으나 보우는 ‘요망한 이물(異物)’로 지탄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로 보우는 ‘요승(妖僧)’으로까지 불리며 배척되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죽자 곧 잡혀서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의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서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으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겨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 제일의 순교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 선비들은 지존(至尊)인 문정왕후 대신 보우에게 반감을 갖게 되어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문이 75계(啓)에 이를 만큼 탄핵의 집중대상이었다. 이러할 때 율곡이 한때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최고의 약점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율곡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알성과에 응시하고자 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廟廷)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유생들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 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느냐.” 과거로 입신하려는 율곡에게 유생들의 이러한 배척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율곡은 시종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의연하게 행동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을 정도이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1년 반 동안 삭발을 하고 정식 비구승이 되었다는 소문과 다만 유발거사로 불교에 심취하였을 뿐이라는 소문도 평생 동안 율곡을 따라다닌 무거운 짐이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금강산에 있을 때 율곡이 삭발을 하였는가, 아니면 유발거사로 지냈을 뿐인가 하고 물었을 때 율곡은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이미 입산하였으니 비록 외향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에 빠졌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1년 반에 걸친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 실제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지는 않았다는 몇 가지의 증거는 있다.
  • [토요일 아침에]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말라/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동료들과 함께 금강산을 찾았습니다. 출발하면서 휴대전화도 안 되고 9시뉴스도 없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전화는 미리 수거를 하더이다. 그 바람에 그 지역 안에서는 일행 중 누군가가 없어져도 연락할 방도가 없어, 발로 직접 찾아 다니거나 나타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9시뉴스까지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숏커트에 관리된 표정의 서울대 연구처장이 중간발표를 읽어내렸고 이어서 황우석 교수가 사퇴성명을 하면서 ‘그 원천기술은 대한민국 것’이라는 말을 비장하게 덧붙였습니다. 이제 최종발표를 앞두고 눈밝은 열혈 누리꾼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기획의도를 읽어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도 또 다른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천년 전쯤의 일이긴 합니다만 당시 율법에는 간음하다가 들킨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조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 간음죄를 범하고서 광장으로 끌려나온 그녀에게 모두의 돌팔매질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지혜로운 선지자는 주변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가 있다면 돌을 던지라.”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의·과학계 투석꾼들에게 ‘남의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나 제대로 보라.’는 말을 이 문외한이 보태주고 싶습니다. 연극배우 같은 천의 얼굴로 합종연횡을 일삼는 춘추전국시대의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을 능가하는 세치 혀를 가지고서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대부분의 언론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부활한 PD수첩은 이제 생명공학계의 메시아(?)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국익보다 진실’ 운운하면서 박수를 칩니다. 또 다른 부류들은 이후 외국 학술지 논문 게재시 한국출신이라는 것이 장애가 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렇다면 국가로 인한 손해보다는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동의했다면 논문은 논문답게 실력과 진실성으로 승부를 겨루면 될 일입니다. 그걸 국가 때문이라면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참으로 비과학적 사고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한국인이라는 비과학적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주려는 해외 학술지가 있다면 설사 실어주겠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거절하는 것이 과학도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일 것입니다. 어느 외래종교의 상징적 원로께서 하신 말씀인 “한국사람이 세계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며… 한국인은 세계무대에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눈총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대갈일성도 이 범주의 사고영역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닙니다. 한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수십년 땀방울의 결과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인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조사를 바탕으로 당사자 역시 승복하는 결과로써 그 공로와 허물을 가려내고, 연구윤리를 재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혹여 감정적, 편파적 내지 정치적 조사위원회였다는 불명예로 역사에 기록될까봐 걱정스러운 마음도 함께 일어납니다. 더불어 황 교수가 가진 능력이 진정 가치있는 것이라면 그 능력이 사장되지 않도록 사회적 지혜를 함께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 격렬한 탁류 속에서도 경기지사의 장기바이오센터 계속 추진과 함께 ‘다시 한번’이라는 그 마음 씀씀이는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인재를 아낄 줄 아는 사람의 청량음으로 들려옵니다. 이제 광기(狂氣)를 멈추고서 모두가 옳다고 하더라도 정말 옳은지 한번 더 생각해보고, 모두가 그르다고 할지라도 정말 그른지 한번 더 숙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차가운 시절에도 흰눈조차 제대로 내리지 않은 금강산에서 온정각 광장 한 쪽에 서있는 정몽헌씨의 추모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정성 다해 두 손을 모읍니다. 온갖 사회적 모순을 혼자서 모두 짊어진 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희생양이 된, 그동안 이 땅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의 고뇌가 함께 읽혀져 옵니다. 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 [사회플러스] 금강산 교통사고 속초지청서 조사

    대검찰청은 지난달 27일 북한 금강산에서 교통사고로 북한 군인을 사망케 한 현대아산 협력업체 직원 정모(22)씨의 신병을 넘겨받아 관할 속초지청과 고성경찰서에서 조사할 계획이라고 2일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현대아산이 지난달 31일 북측에서 정씨의 신병을 인도받았다.”면서 “현재 금강산 출장소에 머물러 있는 정씨가 남쪽에 오는 대로 관할 속초지청과 고성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금강산서 북한군3명 사상

    금강산 관광사업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현대아산 협력업체 직원이 교통사고를 내 북한군인이 사망했다. 29일 현대아산에 따르면 지난 27일 저녁 8시30분쯤 협력업체인 아트홈 INC 직원 정모씨가 금강산 주유소에서 온정리 방향으로 갤로퍼 승용차를 몰고 가다 길 가던 북한 초병 3명을 치어 한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다. 아트홈 INC는 금강산 고성항 부근에 숙소용 건물인 고성빌리지 인테리어 작업을 맡고 있었다. 현대아산측은 “사고 지점은 가로등이 없어 매우 어두운 환경이며 정씨의 음주 여부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면서 “정씨가 억류된 것은 아니며 현재 금강산호텔 별관에서 북측 관계자들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아산은 일단 금강산사업본부장인 김정만 전무를 금강산에 급파해 북측에 조의를 표하고 사고 수습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정씨는 일단 북측의 조사를 받은 뒤 ‘출입·체류 합의서’에 의거해 경고 또는 범칙금 부과, 추방 등의 징계를 받게 될 전망이다. 북한 군인에 대한 보상 절차는 사고자의 과실 정도 등에 따라 추후 결정된다. 국내법 적용도 추가로 받을 수 있다.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선생님과 함께하는 초등논술](4)정독·배경지식으로 논술형평가 대비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있게 정리해 표현해야 하는 논술형 평가에서는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유리하다. 때문에 중학년 수준에 맞는 고사성어나 속담 및 격언·명언, 새롭게 알게 된 낱말의 뜻을 매일 한두 개씩 기억하기 위한 방법을 계획해 꾸준히 실천하고,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의 원전을 구해 읽을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장 체험 학습과 인터넷 자료 검색 등을 통해 직·간접 경험을 확대하는 등 평소 주의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4학년 1학기 셋째마당에서 학습하게 되는 ‘문장부호의 종류와 쓰임’‘국어사전 찾는 방법’ 등도 정확하고 바른 표현과 능숙한 언어 구사력을 위해 꼭 알아야 할 학습 내용이다. 따라서 학교 공부로만 그치지 말고, 따로 시간을 내 틈틈이 반복 적용해 보고 연습하는 노력 역시 필요하다. ●정확한 내용 이해가 먼저 그러면 3학년 학생들에게 제시될 만한 논술·서술형 평가 문제를 실제 예시와 함께 살펴보면서 학습목표와의 관련성과 평가유형에 따른 주안점, 배경 지식의 필요성 등에 대하여 알아보자. 3학년 2학기 읽기 영역의 둘째마당 학습내용 중 ‘개구리 바위’는 금강산 구룡연 골짜기에 있는 개구리 바위 전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선 이 이야기를 통해 학교에서는 (1)일의 원인과 결과 알아보기 (2)일이 일어난 차례를 살펴보며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보기 (3)이어질 이야기를 상상하기 등의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를 자세히 살피면 어떤 내용이 평가될 것인지를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들이 우물 바깥을 궁금하게 생각하게 된 까닭을 쓰시오.’ 라든가 ‘까마귀의 말을 듣고 개구리들은 어떻게 하였는지 쓰시오.’ 또는 ‘맏형 개구리가 바위가 된 까닭은 무엇인지 쓰시오.’라는 문항이 서술형으로 출제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까마귀가 날아와서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맏형 개구리를 대표로 뽑아 금강산을 둘러보도록 하였다.’‘금강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돌아갈 줄 모르고 서 있다가 굳었기 때문이다.’와 같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글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면 쉽게 답을 구할 수 있다. 주어진 글을 천천히 ‘정독’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창의적·논리적 표현 위해 배경지식 필수 하지만 학습 목표의 하나로 제시된 ‘이어질 이야기 상상하기’의 성취 수준을 평가하기 위해 ‘맏형 개구리를 기다리던 동생 개구리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이어질 이야기를 상상하여 쓰시오.’라는 논술형 문제로 출제되면 여기에서 학생들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생각들이 답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 이 때 중요한 평가 기준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나름대로의 논리적인 이유나 근거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생각을 정리해 표현했느냐가 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사전에 금강산 구룡폭포를 실제로 여행하고 왔거나 인터넷 자료 검색 등을 통해 다양한 배경지식(예를 들면, 금강산에 얽힌 다른 이야기와 사람이나 동물이 돌이 된 이야기,‘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의 뜻 알기 등)을 갖추고 있다면,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정리하여 표현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서울교대부설초등학교 교사 안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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