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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이데올로기의 칼을 맞다

    책, 이데올로기의 칼을 맞다

    2008년 7월 한국 사회는 ‘국방부 불온서적’ 문제로 잠시 떠들썩했다.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의 저서를 비롯, 23종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하고 “군부대 내에 무단 반입된 불온서적을 적극 수거하라.”고 지시했다. 불온서적이 “장병의 정신전력에 저해요소가 된다.”는 이유였다. ●나치, 도서관 책도 대량학살 이 사건은 불온서적들이 오히려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희극적인 결말로 끝이 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진 책에 대한 탄압이라는 점에서 결코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신간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알마 펴냄)를 펴낸 레베카 크누스 하와이대학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봤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21세기 책학살”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크누스 교수는 책에 대한 탄압이 “한 집단의 역사적 연속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말대로라면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은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북한찬양 정서 등을 가진 집단의 정체성을 국가적으로 말살”하려는 섬뜩한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은 크누스 교수가 ‘… 책을 학살하다’에서 보여주는 20세기 역사 속 책 학살에 견주면 ‘귀엽게 봐줄 만한 해프닝’이다. “책을 파괴해 정체성을 말살하자.”는 야만적인 기획은 똑같지만, 크누스 교수가 소개하는 책학살은 그 규모가 훨씬 크고 결과 역시 더 비참하다. 오죽하면 집단학살(genocide), 문화학살(ethnocide)과 비슷한 맥락으로 ‘책학살(libiricide)’이라는 조어를 썼겠는가. 거기다 크누스 교수가 소개하는 책학살들은 대부분 집단학살이나 문화학살이 함께 자행된 것들이라 서글픈 느낌을 더한다. 대표적인 예가 나치의 책학살. 집단학살이란 대범죄를 저지른 독일 나치는 책학살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1930년대 정권을 잡은 나치는 독일 내 도서관에서 없애야 할 책의 ‘블랙리스트’와 갖춰야 할 책의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체검열을 통해 전체 도서의 76%를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 또 전쟁 중에는 영국 내 50여개 도서관을 폭격해 2000만권의 책을 없앴고, 폴란드에서는 학교와 공공도서관 장서 90%가량을 파괴했다. ●독재보다 잔인한 이데올로기 이유는 간단했다. 적국의 경제 생산을 마비시키기 위해 공장을 폭격하듯, 문화 생산을 중지시키기 위해 책을 파괴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치는 끔찍한 인종말살의 전초전 또는 후환을 말끔히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파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는 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거나 독재자의 힘의 표현에 그쳤다면, 20세기 책학살은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합법성과 사회적 승인으로 치장하고 있어 더 잔인하다고 크누스 교수는 봤다. 책은 나치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발칸반도에서, 이라크가 아랍지역에서, 중국 문화혁명기 홍위병들이 국내와 티베트에서 저지른 잔인한 책학살들을 다룬다. 역사학, 정치학, 심리학, 윤리학, 통신학, 문헌정보학, 국제관계학 등 다양한 분야들을 교차 비교해 자료를 해석했다. 2만 6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늦깎이 시인의 발랄한 시선과 사유

    ‘발상의 경쾌함과 신선함’은 갓 등단한 신인의 기본 덕목이다. 하지만 일종의 클리세(Cliche·진부한 표현)와 같은 이런 찬사의 대상이 오십줄에 들어선 늦깎이 신인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005년 쉰살 나이에 ‘시인세계’로 등단한 시인 한우진(55)에게 발상의 경쾌함과 신선함이란 흔한 찬사는 진부함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에게 있어 그 진부한 덕목은 숨길 수 없는 연륜의 중후함과 뒤섞이며 젊은 신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시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첫 시집 ‘까마귀의 껍질’(문학세계사 펴냄)은 그러한 신선함과 중후함이 길항하며 만들어 낸 독특한 결과물이다. 수록작 60여편에는 신인의 발랄한 시선과 중로(中)의 오래 삭은 사유, 또 이 둘이 뒤엉킨 색다른 맛의 표현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섞여 나온다. ‘오프너가 콜라병뚜껑을 지나가듯이- / 바람이 목련의 모가지를 따고 있다’(‘아우구리움’ 중) 같은 연상을 내놓는 한우진에게는 신인다운 신선한 감각이 있다. 그 감각 안에서 개울물은 ‘밀감 냄새’를 풍기며 흐르고, 밤에 남은 흉터는 ‘우유빛깔’을 띤다. 거기다 ‘침묵의 달을 훔친/ 꽃들의 혀는 날름거린다’처럼 낯선 비유들은 발칙하다는 인상까지 남긴다. 그렇지만 한우진은 이런 표현들을 난삽하고 멸렬한 문맥 속에 억지로 구겨넣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흐름 안에 위치시킨다. 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도 새·나무 같은 일상의 것들로, 일상 속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메시지들을 그는 찾아 낸다. ‘새의 노래를 끌어올려 높은 데로 보내려고 나무는 서서 버티는 것인데 (중략) 새는 옆으로 나는 것이다. 나무의 고통을 전하러 멀리멀리 수평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처럼 자연을 관조할 때 그는 여타 농익은 중견 시인들처럼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경지까지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구름 때문에 바지가 흘러내렸다/ 문장 하나가 완성되자/ 꿀에 가까워지는 여자들,/ 늑골 사이로 저녁놀이 삐죽거린 (중략) 모자를 벗고 모자에/ 유두만 골라 따 담았다’같이 에로틱하고 능청스러운 중년의 유머도 잃지 않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괴팍한 나로 인한 상처들 강물에 흘려주오

    괴팍한 나로 인한 상처들 강물에 흘려주오

    ■법정스님 ‘절판 유언’ 확인 유언장 2개 공개… 출판사들 “뜻 따르겠지만 시간 필요” 법정 스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더 이상 내지 말라고 유언한 사실이 확인됐다. 출판사들은 일단 “따르겠다.”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반응이다. 법정 스님의 유언 집행인인 김금선씨는 17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법정 스님이 남긴 두 가지 유언장을 공개했다. 공증절차를 거친 유언장들은 각각 ‘남기는 말’, ‘상좌들 보아라’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법정 스님은 ‘남기는 말’ 유언장에서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맏상좌 덕조 스님에게는 10년간 선원과 불일암에서 수행할 것을 지시했다. 유언장은 ‘2010년 2월24일’ 자로 작성됐으며 끝에는 법명 ‘법정’과 속명 ‘박재철’을 쓴 뒤 서명했다. ●계약기간 남았다면 출판권 있어 스님의 대표 저서인 ‘무소유’를 펴낸 범우사 윤형두 대표는 “스님의 유언을 존중해 당분간 절판을 하고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불타 석가모니’ 등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문학의숲 고세규 대표는 “(유언장 등을) 계속 언론을 통해서만 접하게 돼 유감이고 다소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공식 유지라면 따르는 게 맞다.”고 말했다. ‘맑고향기롭게’ 등을 낸 조화로운삶의 최연순 편집장은 “스님의 뜻을 따라야 하지만 출판사로서도 처리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맏상좌에 10년간 수행전념 당부 출판사들이 법정 스님의 절판 유언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님이 생전에 계약한 출판사들에 해당 저서를 출간할 권리(출판권)가 있기 때문이다. 출판권 계약기간이 남아 있다면 저작권을 승계받는 사람이라도 일방적으로 그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법정 스님의 책은 상당수가 계약이 새로 연장된 상태여서 아직 계약기간이 많이 남아 있다. 윤청광 ‘맑고향기롭게’ 본부장은 “스님의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든지 스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유언장 공개에 앞서 길상사에서는 수백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법정 스님의 49재 초재(初齋)가 치러졌다. 박록삼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법정스님 유언장 전문 <첫 번째 유언장> 남기는 말 1.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2.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은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아 주십시오. 3.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두 번째 유언장> 상좌들 보아라 1.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 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 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 내가 떠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길 바란다. 2. 덕조는 맏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 주기 바란다. 3.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과 덕일은 덕조가 맏사형으로서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수행을 마칠 때까지는 물론 그 후에도 신의와 예의로 서로 존중하고 합심하여 맑고 향기로운 도량을 이루고 수행하기 바란다. 4.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 5.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에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길 바란다.
  • [한ㆍ일 100년 대기획] 日 “한일협정때 끝난 얘기”… 환수율 10%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문서’는 해외 반출 문화재 환수의 상징 유물이다. 그렇지만 프랑스에는 외규장각 문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올해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발표한 조사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에만 한국 문화재가 총 2093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별 분포 순위로는 7위다. 그럼 1위는 어디일까. ●“공식적 6만점… 실제는 60만점” 바로 일본이다. 일본에는 공식적으로만 6만 1409점의 우리 문화재가 반출돼 있다. 이는 전체 해외 소재 문화재 10만 7857건의 57%에 이르는 양이다. 2위 미국(2만 7726점), 3위 중국(3981점)과는 순위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격차가 크다. 게다가 지난 1월 말 일본 궁내청이 기존에 알려진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 외에도 조선왕실 도서인 ‘제실(帝室)도서’ 38종 375책, 왕의 학습에 쓰인 ‘경연(經筵)자료’ 3종 17책을 더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일본 내 우리 문화재의 정확한 반출 규모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대부분 불법 반출됐다는 데 있다. 의궤나 제실도서는 물론 안견의 ‘몽유도원도’(덴리대학 소장), ‘고려대장경 재조대장경’(오타니대학 소장)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모두 일제강점기에 불법 약탈돼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그럼에도 일본 소재 문화재 환수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지금껏 개인 또는 단체가 기증하는 방식으로 5100여건이 돌아왔을 뿐이다. 정부 차원에서는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돌려받은 1431점을 포함해 1728점 환수에 그쳤다. ●경제 원조에 밀려 환수 양보 일본 소재 문화재 환수가 이토록 지지부진한 것은 한일 협정 당시 부속 협정으로 체결한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근거를 찾는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 자금을 빌미로 문화재 환수에 대해 많은 부분을 양보했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이를 근거로 문화재 반환에 소극적이다. 조동주 문화재청 국제교류과 사무관은 “일본은 문화재 반환이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이미 정부 간에 끝난 이야기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정부 협상에 늘상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조선왕실의궤 등 반환 협의 나서 정부는 외교통상부를 단일 창구로 환수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올해는 한일병탄 100년을 맞아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환수를 정부 차원에서 적극 협의할 계획이다. 지난달 11일 열린 한·일 외무장관 회의에서도 이 문제를 비공식 안건으로 언급했다. 국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정현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일본 소장 조선왕조의궤 반환촉구 결의안’이 지난달 23일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향후 국회 차원의 후속 움직임이 기대된다. 시민단체에서는 문화연대 등이 민간 차원의 환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일본 소재 문화재는 지금까지 파악된 게 6만여건이지만 실상은 60만건도 넘을 것”이라면서 “정부 협상, 남북 공동 운동, 민간 운동 지원 등 다양한 방법으로 환수 운동을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포스트 법정스님 누가 文僧 이을까

    포스트 법정스님 누가 文僧 이을까

    불교에서는 교학(敎學)에 힘쓴 스님을 학승(學僧), 참선 수행에 힘쓴 스님을 선승(禪僧)이라 한다. 그럼 법정 스님은 어느 쪽일까.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사유를 현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글로 전했다는 점에서 ‘문승(文僧)’이라 불리기도 한다. 스님은 불교계는 물론 출판계에서도 거물이었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이 떠나고 난 지금, 스님의 뒤를 이을 문승은 누가 있을까. 불교계는 맨 먼저 조계종 불학연구소장인 원철 스님을 꼽는다. 스님은 종종 ‘제2의 법정’이라는 수식이 붙는 불교계의 이름난 ‘글쟁이’다. 각종 불교 매체에서 칼럼니스트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스님의 글은 불교, 특히 선종(禪宗)의 가르침을 해학적이고 시원시원한 문체로 풀어낸다는 평을 받는다. 선사, 수행승들의 생활을 이야기한 스님의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뜰 펴냄)는 1년여 만에 3만부 가까이 나갔다. 일반 문학서적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초쇄 2000부도 팔기 힘든 종교에세이 분야에서는 베스트셀러 급이다. 최근 출간된 ‘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호미 펴냄)도 벌써 1만부가량 나갔다. 불교계 ‘라디오 스타’로 유명한 성전 스님(남해 용주사 주지)과 월호 스님(하동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도 손꼽히는 글쟁이들이다. 불교방송 ‘행복한 미소’를 진행하는 성전 스님은 지난달 기도시집 ‘이 세상에 당신과 함께 있어 기쁩니다’(마음의숲 펴냄)를 내고 팬들과 함께 북콘서트도 열었다. 지난해 낸 ‘삼천년의 생을 지나 당신과 내가 만났습니다’(마음의숲 펴냄)는 2만부 이상 팔렸다. 스님은 교보문고가 선정한 ‘스타작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월호 스님이 인연을 주제로 쓴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마음의숲 펴냄)는 5만부 이상 판매됐고, 금강경을 쉽게 풀어 쓴 ‘행복도 내 작품입니다’(마음의숲 펴냄)도 2만부가량 팔렸다. ‘나도 때론 울고 싶다’(불광출판사 펴냄), ‘지혜의길’(불교방송 펴냄) 등을 쓴 서산 부석사 주지 주경 스님이나,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불광출판사 펴냄)을 쓴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도 빼놓을 수 없는 문필가 스님이다. 김연희 도서출판 뜰 대표는 “스님들의 에세이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나 처세서와 달리 인생 자체를 달리 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병상구술 글 2편 공개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마지막 병상에서 구술한 글 2편이 15일 공개됐다. 출판사 문학의숲 고세규 대표는 “법정 스님이 이달 말 ‘불타 석가모니’와 ‘수심결’을 재출간할 계획이었다.”며 “두 책의 서문을 와병 중에 간병인에게 구술해 썼으며 직접 교정까지 봤다.”고 밝혔다. 불타 석가모니는 일본 불교학자가 쓴 부처 전기로 1년 전 절판됐다. 수심결은 법정스님이 젊은 시절 번역한 경전으로 25년 전 절판됐다. ●길상사 “절판 곧 발표…유서 공개안해” 고 대표는 그러나 “법정 스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어 유지가 확인되는 대로 두 책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상좌이자 길상사 주지스님인 덕현 스님은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스님 저서들을 곧 절판할 것”이라며 “조만간 공식발표가 있을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서울신문 3월15일자 14면> 이어 “당신의 사후에 저작권과 관련해 이해관계에 얽힐 것을 우려한 때문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21일 추모법회 취소 법정스님이 남긴 법적 유서와 관련해서는 “길상사를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도들은 서로 화합하고 도우라는 취지의 짧은 당부였다.”면서 “유산이나 저작권 등의 내용은 일절 포함돼 있지 않아 유서를 따로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상사는 오는 21일 열기로 한 추모법회도 스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취소했다. ‘불타’ 등의 출간 여부와 관계 없이 두 편의 서문은 출가 수행자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려 애썼던 법정 스님의 평소 마음가짐이 잘 담겨 있다. 서문 끝에는 모두 ‘2010년 봄 법정’이라고 썼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불타 석가모니-나 자신 부처님 제자로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1계로서 살생금지를 받들며 살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계율을 몰랐다면 얼마나 많은 허물을 지었겠는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거듭 형성되고 재결속될 수 있다. 출가해서 반세기 넘게 지금까지 부처님의 제자로서 살아온 것이 고마울 뿐이다.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지닌 감화력으로 불타 사후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삶의 기준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이다. 불타 석가모니는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기준이며 지향점이다. 여기 불타 전기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를 새삼 재출간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2010년 봄 법정 수심결-인간의 업이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한번 깨달았다고 해서 수백 생의 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깨달음은 수행으로 완성된다. 설령 이치로는 알았다 해도 실제 현상에서는 실천하지 못한다. 수행이란 ‘행行’이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 역대 조사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깨달음과 함께 끝없는 수행으로 그 모범을 보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한소식했다고 해서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한 예가 없다. 인과가 역연因果亦然한데, 한소식했다고 해서 놀아나서는 안 된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행할 수 있으며, 바른 행을 통해서 사람은 거듭 형성되어 나간다. 그 가르침에 있어서 깊은 호소력과 진실성을 담고 있는 보조 스님의 <수심결>은 불교 수행자들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될 뿐 아니라 우리 불교가 탄생시킨 뛰어난 경전이다. 2010년 봄 법정
  • 봉은사 조계종 직영 반발… 불교계 내홍

    봉은사 조계종 직영 반발… 불교계 내홍

    법정 스님 추모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불교계가 내분에 휩싸였다. 서울 삼성동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겠다는 조계종 총무원의 결정에 봉은사와 신자들이 공개 반발하고 나섰다. 봉은사 측은 1000만 서명운동까지 벌이겠다며 강경하다. 15일 불교계에 따르면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전날 열린 일요법회에서 “신도들과 소통되지 않은 (총무원 직영사찰 전환)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스님은 “직영 전환 이유를 사찰의 주인인 신도들이 납득할 수 있게 총무원에서 설명해야 할 것”이라며 “다음 주까지 답변이 없으면 전국 사찰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봉은사 직영 폐지를 위한 1000만인 불자 서명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못박았다. 발단은 지난 4일 총무원이 임시중앙종회에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안건을 상정하면서 불거졌다. 직영사찰은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를 맡는 사찰을 말한다. 재정·인사권이 총무원에 귀속되며, 기존 주지는 ‘재산관리인’ 역할만 맡는다. 총무원이 내세운 직영 전환 명분은 ‘수도권 포교 강화’. 하지만 봉은사 측은 “명진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이래 재정공개와 1000일 기도를 통해 포교가 강화되고 투명한 경영 풍토가 확립됐다.”며 “자율성 침해”라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이 안건은 11일 법정 스님 입적으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통과됐다. 봉은사는 ‘결사 항전’ 분위기다. 명진 스님은 “봉은사를 나간다면 뼈가 돼 나갈 것”이라며 결기에 찬 각오를 밝혔다. 신도들은 홈페이지(www.bongeunsa.org) 등에 총무원의 일방적 결정을 규탄하고 명진 스님 지지 글을 잇따라 올리고 있다. 신도 박기원씨는 “법정 스님 열반으로 심적으로 힘든 와중에 이렇게 눈뜨고 도적질 당하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고 기가 찬다.”고 썼다. 총무원은 공식 대응을 피하고 있다. 총무원 관계자는 “봉은사 측에서 공개 질의서를 보내오면 그때 공식적인 입장을 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강남의 중심 사찰인 봉은사를 두고 때마다 벌어지는 다툼에 불교계 안에서는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참여불교재가연대 교단자정센터 측은 “직영사찰 지정이 불가피하다면 총무원이 이에 대한 공론의 장을 먼저 만들었어야 옳다.”면서 “그것이 소통을 종책 기조로 삼은 현 총무원 기조에도 부합한다.”고 꼬집었다. 김종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이런 논란이 생긴다는 것은 조계종에서 주지를 중심으로 한 개별 사찰 포교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면서 “전체 조직 사업과 지역 포교 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적절한 합의점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법정스님 다비식]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법정 스님과 30년 넘는 인연의 끈을 이어온 윤형두(75) 범우사 대표는 14일 관악산에 올랐다. 스님에게 “잘 가시라.”란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울컥하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을 치며 올라왔지만 애써 눈물을 꾹꾹 눌렀다. 스님의 성품을 워낙 잘 알기 때문이다. ●“책 내기 어렵던 깐깐한 저자” 윤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평소 스님은 ‘사람이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사람이 죽는 것은 그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 말처럼 그렇게 가셨다.”며 말끝을 흐렸다. 윤 대표와 법정 스님의 인연은 잘 알려진 대로 산문집 ‘무소유’가 맺어줬다. ‘범우 에세이 문고’ 시리즈를 내고 있던 윤 대표는 1976년, 당시 서서히 문명(文名)을 알려가던 스님을 처음 만났다. ‘무소유’ 출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첫 인상은 상당히 깐깐한 모습이셨습니다. 선천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로 솔직하셨고, 쉽게 타협하지도 않았고, 실없는 우스개를 하지도 않으셨죠.” 윤 대표는 “책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던 저자”라고 스님과의 첫 대면을 회고했다. “책 제목을 정하기 위해 출판회의를 처음 가졌는데 당신이 미리 생각해 온 ‘무소유’라는 제목을 꺼내놓으시더라고요. 편집자가 (조금 어렵다며) 다른 제목도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스님은 끝까지 ‘무소유’를 굽히지 않으셨지요.” ●인세로 어려운 학생 장학금 지원 인세(印稅) 문제만 해도 그랬다. 원고료를 한꺼번에 주기로 하고 책을 만들었던 터라, 출판사로서는 따로 스님에게 인세를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느닷없이 “좋은 데 쓰려 한다.”며 인세를 요구했다. “무슨 스님이 돈을 밝히나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10% 인세를 드리기로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인세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셨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을 단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 생색낸 적이 없다는 윤 대표는 스님의 이런 ‘숨은 나눔’이 불교계뿐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끌어낸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경허 스님 등 위대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민중을 위해 불심을 심고 대중적 사랑을 받은 스님은 만해 한용운, 성철 큰스님, 법정 스님 정도였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비식에 모여든 것만 봐도 법정 스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 한 편에 자신의 평생 삶을 건 게 아닌가 싶어요. 무소유에서 말씀하신 삶을 살아오셨고, 돌아갈 때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추모객 3만 ‘마지막 길 배웅’

    ‘무소유’ 가르침으로 세상을 가득 채웠던 법정 스님이 끝내 한 줌 재로 화했다. 정부는 법정 스님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하려 했으나 문도들은 “주변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언에 맞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24시간 다비된 스님의 법구는 불길이 사그라든 14일 오전 10시쯤 1차로 큰 유골이 수습됐다. 이어 불이 완전히 꺼진 뒤 습골 의식이 치러졌다. “사리를 찾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遺志)대로 재를 뒤적이는 과정 없이 재빨리 뼈만 수습했다. 유골은 바로 분쇄돼 송광사 지장전에서 하루를 머문 뒤 15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다시 옮겨진다. 새달 28일 49재 전까지 이곳에 안치된다. 이후 유골은 상좌들에게 전해져 스님이 머물던 강원도 오두막, 길상사 뒤뜰 풀밭 등에 비공개로 뿌려진다. 6재까지는 길상사에서 치르고, 막재인 49재는 송광사에서 지낸다. 오는 21일 길상사 일요법회 때는 추모 법회도 함께 열린다. 108타의 범종 소리와 함께 13일 시작된 다비식에는 이른 새벽부터 전국 각지의 추모객들과 스님 3만여명이 몰려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던 학봉(전남 화순 달마사) 스님은 “철저히 계율을 지켰던 스님의 모습은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했다. 스님의 병상을 끝까지 지켰던 가수 노영심은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효봉 스님 밑에서 법정과 함께 동문수학했던 법흥(法興·동당 수좌) 스님은 “평소 ‘중이 법명 하나면 되지 무슨 호가 필요하냐’고 질색하더니 성정 그대로 ‘비구 법정’ 딱 4글자로 돌아왔더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비구 법정 대선사 강녕’이라고 몇 자 더 붙여 분향소에 올렸다고 한다. 한편 ‘주님 발언’으로 불교계의 반발을 샀던 SBS 스피드 스케이팅 해설위원 제갈성렬씨는 지난 12일 길상사 분향소를 찾았다. 순천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법정 서적 절판될 듯

    법정 스님의 책이 그의 유지대로 절판될 것으로 보인다. 변택주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 이사는 14일 “스님의 말씀은 널리 퍼져야 하지만 스님이 절판을 원하셨기에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며 절판 의지를 분명히 했다. 출판계는 “설사 유지가 그렇더라도 스님의 말씀을 좀 더 널리 알리기 위해 계속 책을 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여왔다. ‘일기일회’ 등을 출간한 고세규 문학의숲 대표는 “스님의 유지를 대변하는 ‘맑고향기롭게’ 측이 절판을 강행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다.”면서 “다만, (절판까지는) 시간이 다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소유’를 내고 있는 범우사 측도 “맑고향기롭게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면서도 “절판되면 오히려 무단 복제판이 판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운구] 오열·염불 속 작은 평상에 모셔

    [법정스님 운구] 오열·염불 속 작은 평상에 모셔

    화려한 상여도, 거창한 의식도 없었다. 길상사를 떠나는 스님을 보내 주는 것은 수만 신자들이 만들어 내는 울음소리와 부처님을 부르는 염불 소리뿐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소박했다. 세간(世間·속세)과 출세간(出世間·수행 세계)을 떠나 존경받았던 스님에게 주어진 건 단지 법구(法軀)를 가린 한 벌 가사와 대나무 평상뿐이었다. 12일 법정 스님의 법구가 다비를 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졌다. 정오쯤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떠난 법구는 오후 5시쯤 송광사에 도착해 문수전(文殊殿)에 모셔졌다. 운구 절차는 스님의 생전 모습처럼 담백했다.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남아 있는 흑백 영정 뒤로는 어떤 수식도 붙이지 않고 ‘비구(比丘) 법정’이라고만 쓴 유패가 따랐다. 스님의 법구는 한 몸을 겨우 눕힐 정도의 작은 평상에 모셔졌고, 이를 10명의 제자들이 받쳐 들었다. 이 평상은 평소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사용하던 것을 본떠 만들었다. 운구행렬은 행지실 앞 비탈길을 곧장 내려와 길상사 본당인 극락전(極殿)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아미타불을 향해 삼배만을 드린 행렬은 곧장 설법전 앞 마당에 준비돼 있던 운구차로 이동했고, 스님의 법구를 실은 행렬은 참배객들의 오열을 뒤로하고 그대로 일주문을 빠져나갔다. 30~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행렬이 지체된 것은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는 참배객들 때문이었다. 수많은 참배객들은 행지실에서부터 행렬을 따라 산길을 내려왔고, 운구행렬이 길상사를 떠난 뒤에는 버스를 타고 이를 따랐다. 신자 박옥희(68·여·서울 돈암동)씨는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길상사를 찾았으나 와병으로 스님의 법회가 중단된 상태였다.”면서 “결국 한 번도 스님을 뵙지 못하고 보냈다.”고 눈가를 적셨다. 황토색 가사를 입은 이국적 차림의 스님들도 눈에 띄었다.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타이완 불광협회 소속 비구니들이었다. 다비식이 치러지는 송광사는 다비식 당일에 외지 신도와 추모객이 대거 몰릴 것으로 보고 순천경찰서와 진입로 일대 교통 소통 대책을 협의했다. 송광사 3거리에 주차를 하면 사찰 측이 마련한 셔틀버스를 타고 다비장 입구로 진입할 수 있다. 전국 각지에는 스님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가 자발적으로 설치됐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길상사 분원, 미국 뉴욕 사암연합회 등 해외에도 분향소가 마련됐다. 순천 최치봉·서울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 손바닥 위에 쓴 가와바타의 삶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俳句)는 한 줄 문장 안에 우주를 담아낸다고 한다. 극히 짧은 형식으로 커다란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시에 하이쿠가 있다면 소설에는 콩트가 있다. 콩트는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이야기로 한 손바닥에 써질 정도의 분량이란 뜻에서 ‘장편(掌篇)소설’로도 불린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며 ‘설국’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는 일생동안 콩트를 썼다. 그가 40여년 동안 남긴 175편의 콩트는 여러 평론가, 연구자들에게 ‘가와바타 문학의 고향’, ‘가와바타 문학을 여는 열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가 남긴 짧은 소설들이 ‘손바닥소설’(문학과지성사 펴냄)이란 재치있는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다. 가려뽑은 68편의 손바닥소설들은 보통 원고지 15장 내외, 적게는 2장, 길어도 30장을 넘지 않는 짧은 분량다. 하지만 짧은 호흡 안에서도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특징들은 고스란히 살아난다. 서정적인 문체도 그대로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신 손바닥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의 손바닥소설에는 시와 같은 아늑함이 있다. 가와바타는 보통 콩트에서 기대하는 기발한 반전이나 재치·풍자보다는, 차분하고 애수에 젖은 분위기를 통해 삶의 비의(秘意)를 포착해 낸다. 이야기는 사랑과 이별, 그리움 등 남녀 간의 심리나 애정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주로 그가 20대 초반에 쓴 것들로, 서정적 문체와 맞물리며 여리고 감성적인 장면들을 많이 만들어 낸다. 부모, 부부, 아이 3대째 폐병을 앓지만 “당신과의 결혼 덕분에 행복하다.”고 병상에서 서로 말하는 부부, 보름 동안 임시 아내로 함께 했던 항구의 남자들에게 편지를 쓰는 여인 등이 그런 예다. 가와바타의 삶과 서로 통하는 자전적 내용의 작품들도 많이 보인다. ‘어머니’라는 작품에서는 부모의 죽음을 처연한 어조로 전한다. 또 첫사랑 소녀 이야기를 그린 ‘양지’에서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남의 집 신세를 지게 되면서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음을 고백하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의 ‘마지막 소유’를 만나다

    법정스님의 ‘마지막 소유’를 만나다

    11일 세상과 인연을 다하고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은 수필집 ‘무소유’에 수록돼 있는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이런 유언을 남긴 적이 있다. “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들을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러 오는 사람에게 주어라.”라고. 그말은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 책들만은 내 머리맡에 두어라.”는 의미와 같다.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무소유’의 가르침을 설파한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유하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책이었다. 법회에서 빠지지 않은 주제 중 하나가 책이었고, ‘맑고 향기롭게’ 회보를 통해서 매달 읽을 책을 선정해 주기도 했다. 스님은 깊은 사유를 가진 문필가이자 폭넓은 독서가였고, 무엇보다 지독한 애서가였다. ●현대문명 사고방식 비판 책 많아 그런 그가 강원도 오두막에서 밤을 새우며 읽었던 책들은 무엇이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책은 어떤 것일까. 또 그토록 맑고 향기로웠던 스님의 사유를 키워낸 책들은 뭘까. 스님의 입적 직전에 나온 책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 펴냄)은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스님이 평소 법문이나 수필집을 통해서 언급했던 책 중 50권을 가려 뽑아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다 스님이 언급 또는 인용한 대목들도 자세하게 전하며, 이를 통해 법정 스님의 독서편력를 전하고, 그것이 그의 지성과 가치관을 어떻게 구성해 놓았는가에 대한 지도를 그려준다. ‘무소유’를 통해 물질문명에 치우친 사람들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스님은 배타적·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책을 많이 읽어왔다. 특히 격월간지인 ‘녹색평론’은 스님이 창간호부터 빠짐 없이 읽은 책이라고 한다. 소비적인 현대 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사람과 자연의 공생적 문화 재건을 목표로 간행되는 이 책을 두고 스님은 “이런 잡지가 널리 읽힌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스님은 ‘성장을 멈춰라’, ‘슬로 라이프’,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나무를 심은 사람’, ‘육식의 종말’ 등 문명 비판적인 책을 자주 언급했다. 이런 비판 정신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룬 책들로 스님의 손이 가게 했다. 대표적으로 자연주의 운동가 스콧 니어링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그렇고,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위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펀드혼 농장 이야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등도 모두 새로운 삶과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다룬 것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꼼꼼히 문장 수정 스님은 또 ‘월든’ ‘여기에 사는 즐거움’ ‘걷기 예찬’ ‘그리스인 조르바’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을 읽으며 본질적인 삶에 대해 고민했고,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행복의 정복’ ‘풍요로운 가난’ 등에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타진했다. 소유에 대한 개념은 ‘톨스토이 민화집’에서 배우고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는 직접 현장까지 찾기도 했다고 한다. 책은 부록으로 스님이 언급한 책 300여권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스님이 한 법문에서 “늘 곁에 두고 읽으며 의지하는 스승”이라고 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눈에 띄고, 스님이 직접 번역까지 했던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鑑)’이나 초기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로게’ ‘정법안장’ 등도 자리하고 있다. 이들 경전 외에도 ‘어린 왕자’ ‘꽃씨와 태양’ ‘구멍가겟집 세 남매’ 같은 동화들도 목록에 포함돼 있다. 스님은 ‘나의 과외 독서’라는 글에서 ‘어린 왕자’를 두고 “누워서 부담 없이 읽히는 동화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앞뒤가 툭 트이는 그런 책”이라면서 “내 나날의 생활에서 시들지 않은 싱싱한 초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책은 문장가로서의 스님의 손길이 묻어 있는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출판사 측은 처음에 스님이 언급한 책 300권 목록을 뽑았고, 이를 다시 2년여에 걸친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50권으로 추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법정 스님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문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1만 85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운구] 다비식 어떻게…조사·만장도 없이 입던 승복 그대로

    “일절 형식적인 장례를 준비하지 말라.” 법정 스님의 유지는 준엄했다. 스님의 장례 절차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생략된 채 진행됐다. 길상사에는 불교식 장례에 흔히 보이는 흰색 연꽃 한 송이조차 볼 수가 없었다. 조화는 물론이요, 심지어 공식적인 부고(訃告)조차 띄우지 않았다. 다비식도 조촐하게 치러진다. 다비준비위원회에 따르면 13일 오전 11시 치러지는 다비식에는 조사(弔辭)가 일절 읊어지지 않으며, 만장(輓章) 하나 나부끼지 않는다. 스님은 따로 수의도 갖춰 입지 않은 채 평소 입었던 승복 그대로 화장된다.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화장은 송광사 구석진 곳에 마련돼 있는 다비장에 장작더미를 쌓고, 그 위 평상에 가사를 덮고 누운 모습 그대로 올려 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스님은 관도 없이 작은 대나무 평상에 누워 하루가량 불길에 휩싸인 뒤, 마침내 한 줌 재로 남게 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마라… ‘무소유’ 가르침

    [법정스님 입적] 사리도 찾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마라… ‘무소유’ 가르침

    “사리를 찾으려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도 행하지 말라. 내가 죽을 때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오래전 써놓은 ‘미리 쓰는 유서’의 한 토막이다. 그가 평생 지녀온 무소유 행보는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은 스스로 깨친 가르침을 평생 어기지 않으려 했던 단정한 구도자의 표본이자 그 정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대학 때 삶의 본질 의문에 출가 결심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스님은 전남대 상과대를 다니던 1954년 홀연히 출가를 결심한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몸소 경험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경남 통영 미래사로 입산, 다음해인 1956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스님 문하로 출가한다. 28세에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구족계(具足戒·정식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송광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안거 수행을 한다. 1960년부터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 동국역경원 초대원장인 운허(1892~1980) 스님과 더불어 ‘불교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한다. 이후 ‘한글대장경’ 역경(譯經)위원,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신문 역경국장을 거치며 경전 한글화 분야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가 번역한 서산대사의 불교개론인 ‘선가귀감(禪家鑑)’(‘깨달음의 거울’로 번역)을 비롯, ‘숫타니파타‘, ‘불타 석가모니’, ‘진리의 말씀(법구경)’, ‘신역 화엄경’ 등은 지금도 국내 역경 사업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스님들이 뽑은 ‘닮고 싶은 생존스님’ 1위 스님이 본격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 1970년대 당시 민주화 인사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스님은 이들과 함께 잡지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1975년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이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를 짓고 홀연히 수행승의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 세상에 허명(虛名)이 너무 많이 알려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후 스님은 글쓰기에 매진하는 한편 조금씩 써왔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게 된다.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1976년)도 이때 출간됐으며, 이후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며 문명(文名)을 떨치게 된다. 한동안 스님의 보금자리 및 대중들과 만나는 광장이 됐던 서울 성북동 길상사와의 인연은 1996년부터다. 스님은 서울 도심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이곳에 길상사를 창건하고 회주(會主) 자리를 맡았다. 그 뒤 해마다 개원일(12월14일)에 가까운 일요일이 되면 기념법회를 열어 대중 법문을 해왔다. ●환경보호·생명사랑 운동 실천도 2003년 스님은 “내 스스로가 말이 너무 많았다.”면서 길상사 회주 자리마저도 내놓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들어가 스스로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짓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나 최근 건강이 악화돼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도 길상사 대중법문만은 멈추지 않으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수행자의 길’을 꿋꿋이 걸었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그런 모습에 일반 대중들뿐 아니라 수행자들도 존경심을 나타냈다. 지난해 10월 조계종 불학연구소가 실시한 설문에서 스님은 원효, 성철, 달라이 라마 등에 이어 ‘스님들이 가장 닮고 싶은 스님’ 6위에 뽑혔다. 설문조사 당시 생존해 있던 스님 중에는 1위였다. 그렇다고 스님의 삶이 무소유의 실천과 법문, 글쓰기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그는 1994년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를 발족, 환경보호와 생명사랑 운동도 꾸준히 실천했다. 세상을 향한 쓴소리는 입적 직전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은 물론 최근 대운하 사업을 두고는 “생명을 파괴하는 대재앙이자 국토에 대한 무례”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필요한 것들의 소유’를 거부했다. 형식적인 장례 절차를 일절 마련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스님이 숨을 거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11일 조촐한 분향소만 마련됐다. ●길상사 추모·조의 발길 이어져 스님의 투병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지긴 했으나, 최근 안정을 찾았다는 소식이 나왔던 터라 스님의 입적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입적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길상사에는 각지에서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불자들은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의 안내에 따라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설법전(說法殿)에서 삼배를 올리며 조의를 표했다. 스님의 법구가 모셔져 있는 행지실(行持室)에는 일부 스님들을 제외하고 접근이 제한됐다. 길상사에는 산문 밖으로까지 이어진 조문객들의 줄이 밤늦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신도들은 더러 통곡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묵언’ 안내에 따라 침묵 속에 조의를 표했다. 분향소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도올 김용옥씨 등 각계 인사들과 불자들이 찾아왔다. 생전에 길상사에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었다는 진여정(50·여·서울 도곡동)씨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야 하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분향소는 길상사 외에도 스님의 출가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도 마련됐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한편 법정 스님은 종교 간의 담을 허물었을 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 문화 예술계의 많은 인사와 교류했다. 2000년 법정 스님의 부탁으로 길상사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을 조각해 큰 화제를 낳았던 원로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는 “스님은 글재주가 특별나 말보다는 글로 선교를 하시고 신선한 스님의 향기를 만천하에 전파했다.”면서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때는 ‘세상을 향한 원이 있는데 몸이 이렇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녀 ‘봉순이’ 그림을 그린 박항률 화백은 ‘봉순이’ 그림에 얽힌 일화를 전했다. 그는 “스님께 작은 소년을 그려 드렸더니 스님이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소녀가 더 좋아.’라고 하셔서 소녀 그림을 다시 그려 드렸다.”고 회상했다. ●MB 조전… “비우는 삶 소중함 보여주셔” 이명박 대통령은 11일 법정 스님 입적과 관련, 조전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대통령은 조전에서 “법정 큰스님은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오셨다.”면서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 주셨다.”고 추모했다. 이 대통령은 “큰스님께서는 원적에 드셨지만, 수많은 저서와 설법을 통해 남겨진 맑고 향기로운 지혜와 마음은 우리 가슴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면서 “부디 서방정토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김성수 윤창수 강병철기자 geo@seoul.co.kr
  • 봉은사, 총무원 직영사찰로

    서울 삼성동 도심에 서 있는 사찰 봉은사가 조계종 총무원의 직영사찰로 운영된다. 조계종은 11일 열린 임시중앙종회(임시국회 격)에서 이와 같은 내용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애초 이에 대해 ‘총무원의 일방적 결정’이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탓에 이후에도 진통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안건이 통과됨에 따라 총무원 직영사찰은 총무원이 위치한 조계사와 강화도 보문사, 봉은사 3곳이 됐다. 직영사찰이었던 ‘팔공산 갓바위’ 선본사는 이날 종회에서 특별분담금사찰로 지위가 전환됐다. 직영사찰은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를 맡는 사찰로 재정 역시 총무원에 귀속된다. 관리 주지를 따로 두지만 이는 말 그대로 관리인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특별분담금사찰은 지역 교구에 소속돼 있고 단지 일반 사찰보다 총무원으로 내는 분담금의 요율이 높을 뿐이다. 이들은 주로 재정수입이 큰 사찰을 중심으로 지정한다. 이 때문에 봉은사에서는 반발이 크다. 봉은사는 2006년 현 주지인 명진 스님이 취임 이후 괄목할 만한 변화와 성장을 보였다. 산문 출입을 끊고 하루 1000배를 하는 스님의 1000일 정진, 신도에 의한 재정 관리 등 재정 투명화 등으로 봉은사는 불교계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 예산 규모도 취임 첫해 86억원에서 올해 136억원으로 늘었다. 총무원 한 해 예산이 300억원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다. 이렇다 보니 봉은사 신도들 사이에는 “봉은사가 총무원의 돈줄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편 총무원은 이 결정이 ‘거점사찰 육성방안’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총무원 기획실장 원담 스님은 “강북의 조계사, 강남의 봉은사를 거점으로 해서 수도권 포교를 체계화하겠다는 것”이라면서 “명진 스님의 운영 원칙을 바꾸지는 않겠다.”고 설명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깨달음의 향기’ 글로 퍼뜨린 법정스님

    법정 스님은 한 법회에서 “깨달았다고 해서 혼자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가야 한다.”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 중생을 구한다는 대승불교 사상)의 가르침을 펼쳤다. 그 말대로 스님은 평생동안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깨달음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자 했다. 법정 스님의 글을 두고 대중을 위한 ‘산문(에세이)’과 수행자를 위한 ‘법문’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깊은 사유의 결과물을 진솔하고도 쉬운 문장으로 전한 그의 글들은 종교는 물론, 산문·법문이란 장르조차 따지지 않고 동시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스님의 대표작은 두말할 나위없이 수필 ‘무소유’다. 1976년 같은 제목의 수필집(범우사 펴냄)에 실린 이 글은 개발독재 시대 물질문명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내던지는 따끔한 죽비와 같았다. “가진 만큼 얽매인다.”는 메시지를 통해 청빈한 삶의 즐거움을 전한 이 작품은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수록되면서 스님을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 자리에 올려놨다. 이 책은 출간 이래 지금까지 약 290만부가 판매된 종교분야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이후 나온 책들도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스님은 에세이계의 흥행 보증 수표로 자리잡았다. 수필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조화로운삶 펴냄) 65만부, ‘홀로 사는 즐거움’(샘터 펴냄) 29만부, ‘아름다운 마무리’(문학의숲 펴냄) 30만부 등이 그런 예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최근 스님의 입적을 앞두고 차례로 출간된 2권의 법문집도 마찬가지다. 스님이 병상에서 펴낸 법문집 ‘일기일회’(문학의숲 펴냄)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문학의숲 펴냄)은 동안거 결제·해제 법회, 초파일 법회 등 수행대중을 대상으로 한 법문을 모은 것임에도 최근까지 각각 15만부, 8만부가 팔리는 등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스님은 와병 중에도 이 두 권 법문집과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냈다. 최근에는 스님이 법회나 글 등에서 언급한 책을 모은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이 출간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은 ‘법정론’에서 “법정의 글은 심산유곡의 불심, 고색창연한 불교신앙을 오늘의 이 현실,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이 세계로 끌어 내온 것”이라고 평했다. 그 평가처럼 법정의 에세이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현대인들의 메마른 영혼을 적셔주는 감로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법정스님의 명문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뜻이다. (‘무소유’ 중)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에 묶여있지 말라.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그렇게 지나가라. (‘일기일회’ 중) ●나 자신의 인간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홀로 사는 즐거움’ 중)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내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오두막 편지’ 중)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있는 것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중)
  • ‘무소유의 삶’ 법정스님 입적

    ‘무소유의 삶’ 법정스님 입적

    평생 ‘무소유’를 설파하고 온몸으로 이를 실천한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이 결국 육신마저 훌훌 버리고 열반에 들었다. 스님은 11일 오후 1시51분 자신이 창건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世壽) 78세. 법랍(法) 55세. 법정스님다비준비위원회 대변인 진화(봉은사 부주지) 스님 등에 따르면 스님은 이날 오후 1시쯤 입원 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서 길상사로 자리를 옮긴 뒤 1시51분에 입적했다. 법정 스님의 법구는 12일 낮 12시 전남 순천 송광사로 운구되며, 다비식은 13일 오전 11시 송광사에서 치러진다. 스님은 입적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울러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며 ‘무소유’를 포함, 그동안 스님 이름으로 나온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는 뜻도 전했다. 3년 전 폐암 수술을 받은 스님은 이때부터 자신이 회주로 있던 길상사의 일요법회 참여 횟수를 줄여 왔다. 그러다 지난해 말 병세가 깊어져 제주 서귀포의 처소에서 요양을 하며 일요법회에마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올해 1월 중순 병세가 악화된 스님은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최근까지 투병생활을 했다. 의료진이 스님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체크하며 비상대기를 했으나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스님은 마지막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고통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조계종은 법정스님에게 조계종 비구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大宗師)를 추서키로 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예술위, 시위불참 확인서 철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시위 불참 확인서’ 제출 요구를 공식 철회했다. 하지만 문인들의 공분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저항적 글쓰기’를 계속 한다는 입장이다. 10일 작가회의에 따르면 예술위는 오광수 위원장 명의의 8일자 공문에서 “확인서 형식과 일부 내용이 오해와 우려를 불러일으킨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확인서 요청을 철회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어 “확인서는 불법시위에 참여한 단체에 대해 보조금 지원을 제한해야 한다는 정부의 2010년도 예산집행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작가회의는 예술위의 철회와 무관하게 정부 지원금을 거부하는 한편 지난달 20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한 ‘문학적 행동’을 이어간다는 입장이다. 도종환 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장은 “이번 사태는 궁극적으로 비판적 사유와 창조적 역량을 위축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일”이라면서 “현 정권의 시대착오적 문화정책이 폐지되거나 개선될 때까지 저항의 글쓰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총회에서 소속 문인 156명이 서명한 ‘저항의 글쓰기 운동’은 각 분야별 정부 정책의 잘못을 지적·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이를 블로그 ‘좋은 언어로 세상을 채우자’(blog.daum.net/writers1974)에 모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난 1월 예술위는 문예진흥기금 집행을 앞두고 작가회의에 촛불시위 참여와 관련, “불법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향후 가담 사실이 확인되면 보조금을 반환하고 일체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확인서 제출을 요구해 논란을 일으켰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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