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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中 우호관계 차원 높은 발전 기대/현지언론 반응

    ◎金 대통령 인생역정까지 연일 보도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인민일보(人民日報), 북경일보(北京日報), 신화(新華)통신,CC­TV 등 중국 언론들은 金大中 대통령 내외가 베이징에 도착한 11일부터 연일 주요 뉴스로 보도하고 있다. ‘대문짝만한’ 사진도 곁들이고 있는데 다양하다.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는 金대통령의 가족사진과 대선 홍보자료에 실린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한 사진을 게재했고,일부 신문은 지난 대선때 투표하는 장면을 싣기도 했다. 이들 신문들은 대부분 金대통령의 국빈방문에 따라 ‘한·중 우호관계’가 한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했다. 중국청년보는 金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나의 삶,나의 길­金大中자서전’ 중문판이 출간되면서 독자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주석을 달았다. 특히 북경일보는 ‘金大中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아시아 인물’ 상자기사를 실었다. 金대통령 내외의 상반신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는 金대통령의 민주화투쟁 등 지난 역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5번의 죽을 고비와 5차례 183일의 연금,6년의 감옥생활,16년간의 정치활동 금지,두 차례의 망명 사실을 전하면서 “역대 한국 정부는 그를 국민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쓰고 있다. 또 ‘그가 생각하는 정치인이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감옥생활의 사색탓”이라며 꽃과 나무를 사랑하게 된 일화도 담았다. 경제일보(經濟日報) 등 경제지들은 ‘한국은 곧 회복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한국 부패근절 법규개혁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기업구조조정 등 경제개혁 조치,규제개혁 등을 특집으로 다뤘다.
  • 金大中 대통령 訪中­이모저모

    ◎김 대통령 부부 ‘도라지’ 열창/강 주석도 중 민요 ‘夕歌’ 불러/격의없는 대화… 회담 1시간 길어져/이 여사,여성교류 확대 기대 【베이징 梁承賢 특파원】 중국 국빈방문 이틀째인 金大中 대통령은 12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분주한 일정을 보냈다. ▷정상회담◁ ●金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이날 오전 인민대회당동대청에서 가진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공식수행원이 모두 참석하는 확대회담으로 나눠 진행됐다. 정상회담은 당초 45분으로 예정됐으나 양국 정상이 흉금을 털어놓고 개인신상에 관한 말까지 주고 받는 바람에 무려 1시간 가까이 늦어지는 ‘마라톤회담’으로 진행됐다. 장주석은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金대통령은 연세가 나와 동갑내기인데도 훨씬 젊어보인다”고 金대통령의 건강미를 찬상했다고 林東源 외교안보수석이 전했다.이를 받아 金대통령은 “나는 감옥생활이 6년이고 연금 및 해외망명이 10여년이어서 인생의 단절이 있었다고 볼 때 그 기간만큼은 늙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답,장주석의 웃음을 유도.장주석은 “金대통령은 재야시절 세차례 중국을 방문하는 등 중국사람들의 오랜 벗”이라고 친근감을 표시. ○강 주석 안내 의장대 사열 ▷공식 환영식◁ ●이에 앞서 金대통령은 부인 李姬鎬 여사와 함께 인민대회당 북대청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장쩌민 국가주석의 영접을 받았다. 金대통령이 인민대회당에 도착하자 예포 21발이 발사됐으며 장주석은 현관까지 나와 金대통령을 반가운 표정으로 맞았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의 안내로 사열대에 올라 의장대의 경례를 받으며 애국가와 중국국가 연주를 들었다. 국가연주가 끝난뒤 金대통령은 중국 의장대장의 우렁찬 사열준비 보고를 듣고 장주석과 함께 붉은 카펫을 따라 이동해 의장대를 사열하는 등 환영식은 약 10분간 진행. ▷친분인사 오찬◁ ●金대통령은 이날 오후 정상회담을 마친뒤 부인 李여사와 함께 숙소인 댜오위타이 18호각으로 중국내 친분인사 13명을 초청,과거 야당시절을 회고하며 오찬을 함께 했다. 金대통령은 인사말에서 “야당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걱정하고 도와준 좋은 친구들을 대통령이 돼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고 과거의 ‘은혜’에 감사의 뜻을 표시. 이날 오찬에는 우리측에서 徐錫宰 한중의원외교협회장,李榮一 한·중문화협회장,朴晟容 한·중우호협회장이 배석. ○강 주석 제의 받아 이중창 ▷국빈만찬◁ ●金대통령은 부인 李여사와 함께 이날 저녁 인민대회당 서대청에서 열린 장주석 내외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장주석과 흥에 겨워 서로 노래를 주고받는 등 보기드문 광경이 연출됐다. 만찬도중 金대통령과 장주석은 포도주를 곁들이며 많은 얘기를 나눴고,때로 호쾌하게 웃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고.그러다 한즈핑(韓芝萍)의 노래로 7번째 중국의 민요인 ‘저녁노래(夕歌)’가 연주되자 장주석이 식사를 하다말고 즉석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만찬뒤 종업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저녁노래의 마지막 소절은 음이 높아 따라 부르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는 것. 그러자 金대통령은 “여기서 다시 하라”고 청했고,장주석은 즉석에서 노래반주를 요구한뒤 ‘직업가수 수준’에 가깝게 저녁노래를 열창. 이어 장주석은 金대통령에게도 노래를 청하자 부인 李여사와 함께 마이크를 잡고 지휘자에게 “무슨 노래를 할까요”라고 묻고는 지휘자가 청한 도라지를 李여사와 함께 역시 즉석에서 ‘이중창’을 했다. 노래를 끝낸 金대통령은 영어로 작별인사를 한뒤 헤어졌다.金대통령은 “장주석은 훌륭한 분으로 인간적으로도 모든 것을 얘기할 수 있는 관계가 정립됐다”고 평가했다. ▷정상회담 양국 평가◁ ●우리측은 정상회담이 끝난 뒤 중국의 외교적 형식이나 수사를 감안할 때 ‘상당한 성공작’이라고 평가. 金대통령과 장쩌민 주석간 회담도 자세히 뜯어보면 ‘총론’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정상은 큰 원칙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관계부처나 기관끼리 협의토록 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베이징에서 정상외교 말고 별도의 장관회담이 연쇄적으로 열리고 있는 것도 이같은 외교적 스타일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한·중정상회담이 끝나자 주장자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발표문을 내고 “양국관계와 공동관심사에 대해 심도있는 의견교환을 통해 광범위한 공동인식에 도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 그는 ‘협력적 동반자관계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양국관계에 진일보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해석.그는 그러나 “이것이 동맹관계는 뜻하는 것은 아니다”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대통령 부인 동정◁ ●李여사는 이날 오전 중국의전국 부녀연합회를 방문,펑 페이윈(彭佩云) 주석 등 연합회 간부들과 환담. 李여사는 이 자리에서 “이번 중국방문을 계기로 양국 여성단체와 여성지도자들이 서로 교류를 좀더 활발히 해 우의를 증진하고 공동의 가치를 확대시켜 나가자”고 당부.
  • 申榮福 교수 本社에 축하 휘호

    申榮福 성공회대 교수는 ‘처음처럼’이라는 휘호로 대한매일의 새 출발을 축하했다.그의 휘호에는 공익 정론지로서 다시 탄생한 대한매일이 언제까지나 처음과 같은 뜻을 간직하고 언론의 바른 길을 가기 바란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처음처럼’은 오랜 감옥생활을 했으면서도 처음과 변함없는 고매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철학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申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나무야 나무야’,‘더불어 숲’ 등 역저를 냈으며 모두 스테디 셀러로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그는 또 서예와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 민주열사 열전:15/前 서울대생 朴鍾哲(정직한 역사 되찾기)

    ◎5공 정권연장 야욕 꺾은 ‘民主불씨’/‘체육관선거’ 잡음 없애려 시국사범 검거령/‘남영동’으로 연행당해 물고문 도중 질식사/6·10항쟁 도화선… 4개월후 전모 밝혀져 1987년 1월14일 만 21세의 대학생 朴鍾哲이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5공 독재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고문살인이었다. 철권통치로 국민을 억압해온 5공은 여느 때처럼 국민을 속이려 했으나 1987년 역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정권의 안위와 관련된 시국사건에서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 군사정권에게도 박종철의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층 더 예기치 않았던 것은 박종철의 죽음이 일으킨 역사적 파장이었다. 내각제 및 직선제 개헌론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가운데 5공은 87년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체육관’ 선거로 치뤄 정권을 연장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86년 말 경찰 수뇌들은 운동권 수배자들을 전원 검거하라고 강력 지시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는 87년 1월초 서울대 언어학과 3년생인 박종철이 서울대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朴鍾雲을 은닉하고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박종철을 연행 수사하여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중앙조직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운다. 1월14일 아침 7시20분경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 대공 소속 경찰들은 신림동 하숙집을 급습해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 5층 조사실로 연행,신문했다. 10시40분경 신문장소를 옮겨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박종철을 닥달하였으나 모른다고 하자 조한경 등은 박종철의 가슴과 다리를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뒤 물이 가득 채워진 조사실 안의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갔다. 이들은 조사실 안의 수건으로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반금곤 황정웅이 각각 겨드랑이를 잡고 등을 누른 상태에서 강진규가 욕조안에 들어가 양손으로 박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집어넣고 한참 후에 끌어내는 물고문을 반복했다. 이때도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더 혼내주라는 조한경의 지시에 이정호가 가세,결박된 박종철의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고문을 가했다. 이때 박종철은 목부분이 욕조의 턱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어 11시20분경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30,40분 만에 저질러진 이 물고문 살인으로 결국 5공의 정권연장 야욕은 물건너가게 된다. 박종철의 물고문 질식사는 4개월 후에야 그 잔혹한 진상 전반이 파악되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로선 극히 이례적으로 처음부터 일반에 알려졌다. 그간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시국사건으로 죽어갔으나 의문사란 말만 남기고 그대로 묻혀 버렸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경찰과 정권이 몇겹으로 세운 두꺼운 벽을 뚫고나와 ‘양지’로 향하는 묘한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정통성없는 5공 정권의 취약한 근저를 흔들었다. 2월7일의 박종철 열사 국민추도회와 3월3일의 고문추방 대행진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공은 각각 3만명,6만명의 전경들을 동원해야 했다. 결국 박종철의 죽음은 6·10 민주항쟁을 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군사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밖에없었다. ‘제2의 김주열’로 불리기도 하는 박종철은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는 남달리 강했다. 그는 결코 다른 사람 때문에 재수없게 경찰에 불려가 조사받다가 고문사함으로써 우연히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인물이 아니다. 대공 3부의 고문경찰들이 연행 직전 작성한 수사계획서는 박종철을 민민투의 중요 지도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검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산에서 말단 공무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박종철은 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들어온 직후부터 동아리 가입과 농촌활동참여 등을 통해 현실 인식을 깊게 했다. 2학년 때 미국 문화원농성 지원 가두시위로 구류 5일을 살았으며 여름방학에는 안양공단 근처의 ‘닭장집’에 살면서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다. 86년 3학년때 언어학과 과회장에 뽑힌 박종철은 4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가두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과거 전과 때문에 구속됐다. 그는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7월15일 출소했다. 86년11월23일 81학번 사회학과의 동아리 선배로 민추위 사건에 지명수배된 박종운이 박종철의 하숙방에 찾아와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난다. 87년 1월8일 박종운이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다시 박종철 하숙방을 찾았다. 6일 뒤 박종철은 발가벗기고 손발이 묶인 채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하는 경찰들에게 물고문당하다 죽었다. □朴鍾哲 연보 1965년 4월:부산 출생 83년 2월:혜광고 졸업 84년 3월:서울대 언어학과 입학 86년 4월: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참가,구속 86년 7월:징역 10월·집행유예 2년으로 출소 87년 1월: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사 ◎구속 경찰관·유족들 지금은/5명 실형선고… 형기 마치고 출소/경찰청 산하단체 근무하다 해임도/유족들 배상금 2억여원 수령 고문 경찰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박종철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된 경찰관 5명은 징역 3∼10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기에서 최고 7년3개월의 수형 후 가석방 등으로 현재 모두 출소했다. 올 6월 이들 중 3명이 규정을 어기고 경찰청 산하 단체에 근무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곧 해임됐다. 이정호씨와 강진규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경찰공제회에 들어가 일반직 4급으로,조한경씨는 총포화약안전기술협회 과장으로 근무했다. 이들과는 달리 범인도피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박처원 전 치안감 등 4명은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유죄취지 파기환송,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한편 박종철의 유족은 89년 9명의 경찰관과 국가를 상대로 1억2,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95년 11월 “국가와 조씨 등 고문 경찰관 5명은 연대해 1억4,700만원을 배상하고 강씨 등 경찰수뇌 4명은 직무유기 및 범인도피의 책임을 지고 2,4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유족은 국가로부터 이자를 포함한 손해배상금 2억4,000만원을 수령했다. 국가가 배상금 전액을 지급한 만큼 검찰은 직접적 책임이 있는 조씨 등에게 구상금청구 소송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받아내야 하나 최근 이들에 대한 재산 자력조사 결과 배상금 지급 능력이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꾸리거나 노점상으로 생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고문 밝혀지기까지/모든 수단 동원해 은폐 시도/3차 수사후 고문치사 확인/치안총수 등 경차 9명 구속/‘탁치니 억 쓰러져’ 유행어로 경찰과 5공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지만 결국 3차의 수사 끝에 치안총수를 포함 9명의 경찰이 구속됐다. 1월14일 물고문하던 경찰들은 박종철의 상태가 이상하자 즉시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씨를 불러 응급처치를 간청했으나 이미 박종철은 숨진 뒤였다. 다급해진 경찰은 이날 오후 보호자와 이미 합의를 했다며 서울지검에 시신의 화장을 요청한다. 증거인멸을 위한 경찰의 이 요청은 거부됐다. 15일 석간신문에 조사받던 학생이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나간다. 오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변사사실을 공식 시인했으나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발표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고 부연설명했다. 이날 밤 9시 안상수 검사 입회하에 행해진 부검에서 황적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1과장은 물고문 도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것 같다는 부검소견을 피력한다. 강 치안본부장 등은 황 과장에게 심장마비사로 부검감정서를 써줄 것을 협박 회유하기 시작한다. 16일 가족들이 벽제에서 화장한 유골을 임진강에 뿌렸다. 이때 아버지 박정기씨는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해 국민들을 울렸다.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됐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이 사실을 폭로하자 5월20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등이 즉시 구속된다. 5월29일에는 범인 축소조작에 나선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3명이 범인도피죄로 구속됐다. 88년 1월15일 황적준 국과수 과장의 경찰 회유 메모가 보도되면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된다.
  • 얼굴없는 노동자시인 박노해:하(금지문화금지인생이제야말한다:13)

    ◎암울한 ‘불의 시대’ 지나 이제는 감싸고 흐르는 ‘물의 시대’ 같은 느낌/약한자들 고통과 슬픔 외면못해 뛰어든 노동운동/이념에 갇혔던 ‘사노맹’ 합리적 진보운동 밑거름 기대/정직한 성찰과 반성만이 희망의 미래 열어갈것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 핵심간부로 활동하다 9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지난 8·15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시골출신의 노동자로 시작해 급진 이데올로기의 핵으로 활약하다 사형구형까지 받아 7년간 격리된 뒤 준법서약서를 쓰고 다시 햇빛을 보게 된 인물이다.출감직후부터 줄곧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강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노해씨를 만나 보았다. ­91년 구속될 때와 요즘 분위기의 차이는. ▲당시가 어두운 시절 불덩어리처럼 자기 몸을 던지는 ‘불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열정을 내면화시켜 물처럼 흘러가는 ‘물의 시대’같은 느낌이 든다. ­처녀시집 ‘노동의 새벽’에 실린 글들은 언제 쓴 것인가. ▲선린상고 야간 시절 체험한 공장의 불쌍한 삶과 군제대 후 함께 부대끼던 공장과 버스회사 동료들의 짓눌린 모습들을 가식없이 담은 것들이다.작업장과 기숙사 구석에서 작업장 일지 등에 적어놓은 것들이었다. ­시집 ‘노동의 새벽’을 자평한다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본다.사회의 모순들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현장 분위기를 솔직하게 담았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었다는데 노동운동에 뛰어든 결정적 계기는. ▲어렸을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서울에 온 후 공장에 다니면서 계속되는 특근·철야잔업에서 동료들이 손을 잘리는 급박한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다.이때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기로 했다.노동운동 아닌 노동운동부터 시작한 셈이다. -얼굴없는 시인으로 집필활동에 어려움이 많았을텐데… ▲나만의 책상,나만의 펜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단 한순간도 편안히 앉아서 글을 써본 적이 없다.원고 전달때도 항상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85년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가입한뒤엔 급진 노동운동가로 바뀌고 노동해방문학에선 정치적인 색채까지 보이는데…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하는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사회적 실천으로 나타날 때였다.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지면서 분신과 구속 시위 등 항쟁의 기운이 고조되고 사람이 불에타 죽는 상황에서 시만 쓴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을 부인하다 신동아 90년 12월호에 자전수기를 보내 신원을 밝힌 이유는. ▲86년 5·3인천사태로 구속된 金모씨가 조사과정에서 내 본명을 실토했다.수사기관에서 전담반까지 구성해 추적하는 상황에서 동료 노동자들이 박노해로 몰려 희생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수사기관에서 이미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판단,이름을 밝혔다. ­사노맹의 핵심사상은 무엇이었나. ▲사노맹은 80년 당시 군사독재하에서 민주주의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노동해방을 온몸을 다바쳐서 밀고 나갔던 80년대 시대 정신의 절정이었고 시대의 최전선에서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사노맹의 실패 원인은. ▲시대변화에 너무 늦었고 실천과정에서 너무 조급한 게 한계였다.급진 사회주의에 갖혀 당시 정권을 여전히 군사독재로 규정한 채 변화를 보지 못했다. ­지금 사노맹에 대한 생각은. ▲사노맹 사건은 500명이 구속되고 형량도 2,000년이 넘는 가혹한 희생을 치렀다.그동안 침묵 절필 삭발정진을 통해 책임을 지려했다.사노맹 관련자들 이 삶의 모범을 통해 극좌이념에 치우친 후배들을 진정하고 합리적인 진보운동으로 이끌어 가는 훌륭한 일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3년 옥중시집 ‘참된 시작’은 어떻게 나왔나. ▲91년도 대법원 상고 이유서를 쓸때 이미 창비(창작과비평사)에 원고가 넘어가 있었다.진보운동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늦춘 것이다. 극우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모두 돌멩이를 맞았다.합리적 진보쪽에선 올바른 변화라는 평을 얻었다. ­‘참된 시작’에서 사상 갈등과 자기반성이 두드러지는데 그 배경은. ▲분단과 군사독재라는 절대폭압의 조건 속에선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서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했다.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붙든 게 사회주의였다.70∼80년대 짐승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살려내기 위해 야수처럼 싸웠다.그러나 사회주의 붕괴를 정직하게 받아들였고 그 결과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93년 6월호 ‘사회평론’지에 낸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평에선 진보진영의 반성을 주장했는데… ▲철저하고 정직한 자기성찰과 책임 없이는 미래의 민주개혁과 진보적 운동이 불가능하다.새로운 진보이념과 비전,운동이 필요하다고 보고 목숨걸고 참구(參究)해 나가자고 한 것이다. ­계획된 작품은. ▲내년 여름쯤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생각을 담은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올 겨울엔 6년만에 세번째 시집을 발간할 예정이다.자본주의와 사회주의,동양사상과 서구사상,사회적 실천과 내적 영성(靈性) 등 양극대립을 모두 담을 생각이다. ◎격별의 글들/“그래 결국은 사람만이 희망이다”/처절한 노동현장 ‘시다의 꿈’/강렬한 저항·분노 ‘노동의 새벽’/격랑뒤의 깨달음 ‘사람만이…’ ‘시다의 꿈’(83년 시동인지 ‘시와경제’에 발표)에서 ‘사람만이 살길이다’(97년 해냄刊)까지­. ‘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으로 활동하다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박노해씨의 글들은 험난했던 역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언들이다. 박노해란 이름을 처음 알린 ‘시다의 꿈’은 노동현장의 비극성을 그나마 우회적으로 들이민 처녀시였다.“…/떨려오는 온몸을 소름치며/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아직은 시다/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하나로 연결하고 싶은/시다의 꿈으로/…”. 박노해를 ‘한국문학을 관통하는 80년대 최고의 문제작가’로 자리매김한 시집 ‘노동의 새벽’은 훨씬 거칠어진다.“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기어코 깨뜨려 솟구칠/거칠은 땀방울 피눈물속에/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새벽쓰린 가슴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붓는다/노동자의 햇새벽이/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올 어린이날만은/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어린이대공원이라도 가야겠다며/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손목이 날아갔다”모두 열악한 작업조건과 억눌린 사람들의 직설적인 고발이다. 그러나 옥중시 ‘참된 시작’과 지난해 발표한 옥중 에세이집 ‘사람만이 살길이다’에선 사상의 갈등과 반성,그리고 새 생활에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마저 갖게 된다.“뜻과 주장은 좋으나 나타나는건 앙상하고/노동해방 계급투쟁 당파성 혁명적 관점…/거 제껴두자니 아깝고 먹자니 뼈만 걸리는/꼭 닭갈비와 같은 존재/지금 우리 마치 닭갈비 같은 처지는 아닌가/…”(참된시작중 닭갈비)“희망찬 사람은 그자신이 희망이다/길찾는 사람은 그자신이 새길이다/참좋은 사람은 그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사람속에 들어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사람만이 희망이다중 다시) 감옥에서 500여편의 작품을 구상했다는 박씨.얼굴없는 노동자 시인에서 이젠 만날수 있는 시인으로 바뀌어 새 작품을 구상중이다.80년대 노동계와 시단을 뒤흔들었던 박씨의 새 작품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개관(사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5일 개관했다.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수난과 민족의 한이 서린 현장이 역사의 배움터로 단장하고 문을 연 것이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서대문형무소는 대한제국 말기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경성감옥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뒤 일제 강점기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어 광복을 맞기까지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투옥돼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처형되거나 옥사했던 곳이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 등으로 이름을 달리해 수형시설로 사용되다가 지난 87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간 후 88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92년 독립공원으로 꾸며졌다. 일제는 이곳에 의병장에서부터 독립운동가·항일투사를 무수히 투옥하여 한민족의 혼을 짓밟았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파란곡절의 현대사와 함께 수많은 반독재 민주인사·학생·통일운동가들이 고난의 세월을 보낸 곳이었다. 물론 흉악범·경제사범·보안사범 등도 거쳐갔으나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민족수난의 현장이자 민족정기의 발원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백범 金九 선생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다 이곳에 수감돼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柳寬順 열사는 이곳 지하감방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숨졌다. 사이토(齊藤) 일본총독을 사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姜宇奎 의사도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일제때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감옥과 사형장,망루 등과 역사전시관으로 이루어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우리 애국선열들의 민족정신과 꿋꿋한 기상을 느끼게 해준다. 일제때 고문과 취조장소로 악명을 떨쳤던 옛 보안과 건물을 최근 보수한 역사전시관은 서대문형무소의 설립배경과 변천과정,일제때 전국 형무소 현황,항일저항사,옥중시설,고문실 등을 영상과 밀랍인형 및 각종 모형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애국선열의 넋을 후손들이 기리는 한편 우리 역사의 암울했던 시절을 되새겨 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산 교육장이다. 국민 모두 순례의 발걸음을 디디고 애국심을 다지는 성지로 계속 가꾸어 가야 겠다. 나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웅변으로 증언하는 역사 유적으로 전세계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주고 있듯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일제의 만행을 우리 민족은 물론 전세계에 증언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
  • 지면 구성(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4)

    ◎면별 특화 등 근대신문 편집틀 개척/국한문·국문·영문판 1만3,256부 발행/논설­투고란 등 특색있게 꾸며/雜報기사엔 ‘4字 한문제목’ 달아 창간 이후 영문,국한문,국문 등 발간 판형을 다양화해온 대한매일신보는 지면 구성에서도 날로 근대적 면모를 갖춰갔다. 대한매일은 기사 싣는 단수를 착실하게 늘려간 뒤 마침내는 신문지 크기자체를 키운다. 영문과 한글판을 합쇄한 초창기 때는 단수가 4단이었으나 1905년 8월 국한문판을 분리해 발간한 중간(重刊) 때 6단으로 늘렸다. 2년이 채 못 되는 1907년 4월부터 7단이 되었는데 이때 타블로이드 판인 신문이 1.4배 가량 큰 대판(大版) 크기로 확장됐다. 대한매일은 국내 독자와 관련하여 한글과 한문 중 ‘독립신문’처럼 한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국한문판 발행과 함께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영·국문 합쇄의 한계를 깨닫고 분리 발행을 심각하게 고려한 중간 때 한글 아닌 한자 위주의 국한문을 선택했다. 언듯 후퇴처럼 보이는 이 결정은대한매일을 크게 전진시킨다. 대한매일은 1907년 4월 국한문 신문이 4,000여 독자를 확보해 국내 ‘最占多數’임을 알렸으며 며칠 뒤 국문판 추가 발간을 선언했다. 국한문판의 성공이 한글판을 부활시킨 셈이다. 이미 확고해진 명성은 판 추가 발행을 독자 및 사세 확장의 좋은 계기로 만들어 대한매일의 국한문판,국문판은 경쟁적으로 급성장했다. 1년 뒤인 1908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은 대한매일신보가 현재 1만3,256부 발행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국한문판이 8,200여부,국문판이 4,600여부,영문판이 400여부였다. 당시 국내 신문들의 판매부수가 1,000∼3,000부였던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중흥시킨 국한문판은 지면 구성 등과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고답적인 한문투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문발달사에서 편집체재에 근대적인 틀을 엮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매일은 제1면 제호 바로 밑에 매일 논설을 실었다.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의 주장을 담는 자리로서 대한매일의 배일,반침략,애국계몽 논조가 확연히드러나는 곳이었다. 대한매일 논설에는 익명의 필자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는 “本記者”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영국인인 본기자”란 구절로 배설의 의견임을 명확히 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가끔 국내외의 다른 신문에 난 한국관련 논설을 전재했으며 특히 보통 3면에 게재하는 ‘寄書’를 이 자리로 옮겨 논설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독자들이 신문사에 보내는 편지를 뜻하는 기서는 말이 현재의 독자 투고이지 논설 못지않게 중량감있는 내용이었다. 기서를 보낼 때 성명과 주소를 요구한 대한매일은 신문에 게재할 때는 필자의 호나 유학생이라는 등 비실명으로 내보내 보다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논설 다음에 관리의 서임과 사령에 관한 관보를 실었고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 신문 등에서 번역 소개하는 외보가 이어졌다. 2면은 관청 동정과 시정잡사에 관한 단신보도인 잡보 차지였다. 지금의 사회면 성격이 강한 잡보는 모든 기사가 “하였다더라” “說이 있다더라”로 끝맺음되고 있으며 단신이지만 글을 잇대어 써 꽤 상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통감부의 움직임과 의병활동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대한매일의 잡보는 특히 모든 기사를 4자의 한문제목으로 압축한 뒤 소개한다. 잡보는 1면 하단과 3면 상단까지 펼쳐지곤 하지만 황실에 관한 기사는 언제나 2면 맨 첫 자리에 올라있다. 반면 신랄한 풍자의 시사만평이 2면 잡보란을 마감한다. 이 풍자만평은 칼처럼 날카로운 내용을 운문체로 경쾌하게 소화하고 있어 최고의 애독란이었다. ◎인기 있었던 2면 잡보란/친일파 행각 등 신랄하게 풍자/“日人고문 초빙후 형벌 혹독 이것이 개명국의 형벌” 대한매일의 2면 잡보란 하단은 시사만평란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부정,부패,만행 등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인기를 모았다. 풍자의 주대상은 친일파와 한국에 온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풍자 기사를 몇개 골라본다. ▲어제 오후 서울 북서 누각동 뒷산 기슭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하기로 일 순사가 순검 십여인을 데리고 쫓아가 탐문한즉 모두 피서하는 사람이라 하니 요새는 일인이 무슨까닭으로 한층 의구하는지 한국 인민은 피서도 못하겠소. ▲관립 일어학교 한인 학도가 일인 교사 백정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퇴학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하니 원래 학도가 교사에게 학술만 수업함이 아니라 교사에 품행을 모방하나니 백정 같은 교사에게 무슨 품행을 본받을 것이오 퇴학하는 것이 좋지. ▲근래 일본 인민이 미국 지방에 가서 백인의 구타나 능욕을 받은 것이 날로 심하다 하니 이는 일본 인민이 한국 지방에서 한인을 압제박해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늘의 뜻은 무심치 않소. ▲경무청과 감옥서에서 일인 고문과 경부 경시를 초빙고용한 후로 죄인에게 형벌이 혹독하고 구금이 엄중하야 전일의 한국 형률보다 몇배 심하다 하니 이것이 개명국의 형률인지. ▲의주 등지에 일본군용지 내의 가옥과 분묘를 월내로 철거하라는 독촉이 심해 지역 인민이 서로 모여 호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다고 하니 인민은 어느 곳으로 이거하며 백골은 어느 곳에 옮겨 묻을 것이오 하늘의 땅에 오르는 수밖에 백계가 무책이로다. ▲일본 박람회장에 한인 남녀 2명을 2개 동물로 꾸며 넣어놓고 일반 유람자에게 완상케 하니 미주의 흑인은 노예로 팔리고 한국의 황인은 동물로 팔렸은즉 한인의 가격은 흑인 지위보다 한층 추락하였거니와 일인은 이웃나라의 동종인을 금수로 대하는구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7·끝(공직 탐험)

    ◎구축함 함장은 해군대령 선망의 대상/작전시 입법·사법·행정권 보유/제독도 배의 진로는 간섭못해/매년 평균 6개월 바다서 근무 육군과 공군 대령은 영어로 ‘colonel’이다. 그러나 해군 대령은 ‘captain’이라 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우두머리,조장,선장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해군 대령은 함장이다. 구축함,호위함,잠수함 함장도 대령이고 항공모함 함장도 대령이다. 아무리 배가 커도 함장은 대령이다. 해상작전 때 전함 3∼5척이 모이면 단대,10여척이 되면 전대가 구성된다. 이럴 때 각대에는 사령관이 함께 배를 탄다. 물론 사령관은 함장보다 상위 계급자가 된다. 단대 전대사령관은 함장을 거친 고참 대령이고 24척 이상 지휘하는 전단사령관은 준장이다. 그러나 이때도 사령관이 탄 배의 ‘우두머리’는 어디까지나 함장이다. 제독(提督)인 사령관은 자기가 탄 배가 어디로 갈지에 대해 대령인 함장한테 간섭하지 못한다. ‘사공이 둘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군함이 영해를 벗어나 작전할 때는 독립된 ‘영토’로 대우받는다. 그래서 국기도 달고 치외법권지대가 된다. 작전시 함장은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갖는다. 사법권의 경우 상부에 보고해 처리하는게 관례지만 전시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이런 막강한 권한 탓에 함장 대령은 그야말로 ‘바다의 최고 계급’이다. 한해 해군사관하교 졸업생의 대령진급율은 40%미만. 해사를 나와도 대령을 달면 성공했다고 간주된다. 육군 연대장같이 함장은 해군대령이 거치는 필수보직이다. 항공모함이 없는 우리 해군에서 군함의 꽃은 구축함. 3,000t급 한국형구축함은 함장들이 가장 타보고 싶어하는 ‘꽃중의 꽃’이다. 경쟁도 치열하고 구축함장을 거치면 장군 진급이 그만큼 유리하다. 해군장교들은 스스로를 ‘신사’라고 부른다. 해군창설일도 ‘士(사)’자를 분리해 나온 숫자 11에서 따 11월11일로 정했다고 한다. 정복도 넥타이 맨 신사복이고 계급장은 다른 군 장교복과 달리 어깨의 견장 대신 신사복 소매에 금줄을 넣어 표시한다. 이렇듯 겉으로 멋있어 보이는 함장이지만 이들의 생활 이야기를 듣고나면 ‘자식을 해군에 보낼 마음이사라진다’고 입을 모은다. 74년 임관해 함장근무를 마치고 합참에 근무하는 J대령의 이야기. “중위때 결혼 첫날밤 새벽 5시에 비상출동해 바다로 떠나 63일만에 돌아왔다. 솔직히 아내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더라. 이후 매년 평균 180일을 바다에서 보냈다. 235일 배를 탄 적도 있다. 오랫만에 집으로 돌아오면 애들이 조금씩 자라있더라. 내손으로 애들 키워본 기억이 없다. 한번 돌아오면 1개월 정도 있다 다시 떠나는 생활의 반복이다. 거기다 지금까지 전출다닌 게 17번…” J대령은 함장생활을 ‘움직이는 감옥’이라고 표현했다. 2∼3평 남짓한 함장 방에 갇혀 온갖 결단을 시시각각 혼자 내려야하기 때문이다. J대령은 “우측 5도라고 함장이 명령을 내렸는데 대원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장애물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함장으로서의 업무능력뿐아니라 대원들이 믿고 따르는 인품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해군대령은 1등 항해사 자격증이 있기 때문에 제대 후 대부분 민간선박의 선장으로 취직해 다시 배를 탄다. 현재 대령 정년은56세. 그래서 다른 군과 마찬가지로 제대 후 일거리 찾는게 해군 대령의 큰 고민중 하나다.
  •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상(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2)

    ◎‘암흑속 노동’ 고발 ‘암흑속 수감’ 7년/야간고시절 어두운 현실 눈떠/‘노동의 새벽’ 민중문화 기폭제로/85년 본격 노동운동가 변신/수배·은둔·고초… 91년 끝내 구속/지난 8월 광복특사로 ‘햇빛’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을 통해 노동현장의 어두운 실상을 고발했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7년간의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새로운 인생의 새벽을 열고 있다.지난 8월15일 상오 10시 경주교도소.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박노해씨(40·본명 朴基平)가 상기된 얼굴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지난 91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꼬박 7년을 감옥에서 지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박씨가 모습을 나타내자 부인 金眞珠씨(43)와 여동생,그리고 장인 장모,친척 등 10여명이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가족들과 뜨거운 인사를 마친뒤 모여 있는 기자들 앞에서 “이 시대의 변화에 주목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또박또박 읽어내리곤 교도소를 떠났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옆에 앉은 부인의 얼굴을 자꾸만 쳐다보았다.결혼후 수배로 인한 은둔생활과 구속·수감 탓에 밝은 세상을 함께 살아본 적이 거의 없는 부부였다.이화여대 약학대 재학중이던 부인 김씨를 알게 된 것은 선린상고 야간시절.야학 여교사와 학생 신분으로 만났다.이들은 사노맹 사건으로 수배중이던 82년 결혼했다.신분노출을 염려해 서울 명동성당에서 아주 가까운 몇 사람만 초대해 숨죽이며 결혼식을 올렸다.그러나 91년 부인 김씨가 구속됐다.10일후 박씨도 구속됐다.김씨는 95년 먼저 석방된 후 남편의 옥바라지를 해주며 뒷치닥거리를 해왔다. 어린시절 작가가 꿈이던 그에게 고교시절 야학은 그의 인생의 물꼬를 새롭게 터주었다.중학교 다닐땐 신부가 꿈이었다.그전엔 한때 정치가가 되고 싶기도 했다.하지만 선린상고 야간시절 낮에 공장에 다니면서 체험한 현실 앞에서 신부는 낭만적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그래서 본격적으로 야학에 열중했다.창작과 비평(創作과 批評),사상계(思想界) 등을 탐독(探讀)하면서 명동성당 기도회와 반정부집회 투쟁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고교졸업후 최전방의 기술병을 자원해 군생활을 마친 뒤 곧바로 안양의 시내버스 정비공으로 입사했다.운전기사와 안내원들에게 의식화 학습을 시키는 등 노동운동을 벌이던중 노동조합 위원장에 출마한다.여기에서 내건 구호들이 당시엔 불온(不溫)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사측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회사는 학력위조란 핑계로 그를 해고시켰다. 84년 발표한 ‘노동의 새벽’(풀빛출판사刊)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이 때 쓰인 것들이다.작업장 한 귀퉁이에서,혹은 기숙사의 한 켠에서 구부린 채 작업일지 등에 끄적거린 것들이다.세상 사람들의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됐던 시집 ‘노동의 새벽’은 이렇게 태어났다.‘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도 따라붙기 시작했다. ‘노동의 새벽’이 나오자 문단에선 무성한 평들이 쏟아졌다.“이 땅의 조악한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근로자들의 절망과 슬픔,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히 담고 있다”“인간다운 삶을 향해 몸부림치는 서민들,못가진 자들,억압받는 자들의 정서를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이른바 박노해문학의 등장은 80년대에 확산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문화적 자기표현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계간 문예중앙이 지난 88년 40명의 중견 평론가들에게 지난 10년간 최고의 작품 한 편을 선정해 달라고 의뢰한 결과 ‘노동의 새벽’이 뽑혔을 정도였다.또 같은해 실천문학사가 선정한 ‘제1회 노동문학상’을 받았으며 91년 구속때까지 ‘노동의 새벽’은 7만여부가 팔려나가는 인기를 얻었다. ‘노동의 새벽’은 물론 철저하게 신분을 숨긴채 낸 시집이다.형 기호씨가 가톨릭대학 학보에 한 면에 걸쳐 ‘노동의 새벽’에 대한 평론을 게재하면서도 동생의 작품이란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다.기호씨는 나중에 사실을 알곤 몹시 섭섭해했다고 한다.“여러 사람을 거쳐 시와 평론들을 출판사에 보내거나 공중전화 박스 등 특정 장소를 지정해 원고를 갖다놓는 방법으로 신분을 은폐했습니다.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동료 노동자들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덕분에 문단과 노동계에서 ‘얼굴없는 시인’이란 별명이 붙게 됐지요” 본격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한 것은 85년 8월 창립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면서부터.서노련 기관지인 서노련신문에 노동해방투쟁을 선동하는 방대한 분량의 시·산문·정치평론을 잇따라 발표했다.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나선 것이다.초기시절 ‘노동의 새벽’식의 문학과는 엄청난 변화가 느껴지는 글들이었다.곧 평론가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노동의 새벽’을 통해 시대적 서정과 비전이 문학적 형태로 충분히 제시됐다고 판단했습니다.다음은 행동의 시기라는 생각을 갖게 됐지요.분신과 고문,의문사가 계속되는 시점에서 시에 천착하는게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 분위기에서 행동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중심에 서게 됐다고나 할까요” 86년 5·3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지목돼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수배자 명단에 올랐고 점차 ‘급진적인 노동운동가’‘사회주의적 혁명가’로 변신해 갔다.그리고 89년 11월 마침내 사노맹 출범을선언한 후 공개수배를 받다 91년 영어의 몸이 됐다.암울한 노동현장,경찰수배,구속 등 어둠의 세상에서 탄압받았던 그의 삶과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어두운 이면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사연들/박노해와 박기평/80년대초 폭압의 시절 탄압우려 필명 사용/‘공동단체명’ 등 온갖 추측/90년 사노맹사건 뒤에야 ‘박기평’ 본명 알려져 흔히 ‘얼굴없는 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의 본명이 朴基平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은 지난 90년 안기부가 사노맹 사건 전말을 발표한뒤 그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진행되면서부터다. ‘노동의 새벽’이후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처럼 왕성하게 발표해온 시와 평론들로 인해 한때 박노해가 특정인이 아닌 공동 창작단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다.그러나 朴씨가 검거되면서 결국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는 朴基平이란 전남 함평 출신의 노동자 시인임이 밝혀졌다. 그러면 박노해란 이름은 언제부터 쓰여졌고 왜 박노해인가. 박노해란 필명이 처음 쓰여진 것은 83년 가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을 발표할 때였다.당시만 해도 ‘노동자’라는 말만으로도 ‘빨갱이’ 취급을 받는 폭압의 시절이었다.근로기준법을 내세워 노동현장에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들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을 줄인 말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성씨 박을 그대로 땄고 어감도 좋고 해서 노해란 이름을 썼던 것입니다.물론 노동자 해방의 의미도 어느정도는 담고 있었지요” 닥쳐올 탄압을 우려해 필명을 쓸 수 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본명으로 시작(詩作)을 계속할 경우 탄압은 물론 노동운동도 지속하지 못할 것 같아 노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로 했다는 게 朴씨의 설명이다. 이후 ‘노동의 새벽’은 물론 서노련 기관지 ‘서노련신문’에 지속적으로 발표한 모든 글과 평론에도 이 이름을 썼고 91년 구속때까지 ‘얼굴없는 시인’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그러면 실체가 밝혀진 이상 박노해라는 이름은 살아있을 수 있을까.朴씨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감옥에서 나올 때 ‘상처 투성이’의 이름 박노해를 벗어 버리고기평이란 이름의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하지만 언제 일자리를 빼앗길 지도 모른 채 살아야만 하는 불안한 시대임을 피부로 느낀다.이 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평온한 생활을 찾을 때까지 상처많은 이름 박노해를 운명처럼 계속 써야만 할 것 같다” □그의 길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77년 선린상고 야간부 졸업 ▲82년 金眞珠씨와 결혼 ▲84년 안양 버스회사 정비공으로 입사 ▲83년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시다의 꿈’ 발표 ▲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85년 서노련 가입 ▲86년 5·3 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수배 ▲89년 사노맹 결성 선언문 발표. ▲91년 구속·수감 ▲98년 출감
  • 또 색깔론 인가(사설)

    최근 발간된 ‘월간 조선’ 11월호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崔章集 교수의 해방전후 인식과 6·25전쟁관을 문제삼고 나와 논란이 일고 있다.월간 조선은 ‘崔章集 위원장의 충격적 한국전쟁관’이라는 기사에서,崔교수가 ‘좌파는 혁명적,우파는 반혁명적’ ‘6·25 최대희생자는 북한민중’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며 그의 사상에 의혹을 제기했다.崔교수는 이에 대해 “논문의 어휘와 문장을 의도적으로 문맥과 분리하여 인용함으로써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모해(謀害)하고 있다”고 반박했다.월간 조선측이 ‘제2의 건국’에 대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면서도 정작 질문은 崔교수 저작물의 논점을 집요하게 문제삼았다는 것이다. ‘논평은 자유로되,사실은 신성하다’는 게 언론의 대원칙이다.그래서 우리는 월간 조선의 보도태도에서 언론활동을 넘어선 정치공세의 느낌을 받는다.어떤 목적을 갖고 몇개의 단어를 추려내어 ‘끼워 맞추기식’으로 왜곡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은 ‘사실 입각’이라는 언론의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이다.월간 조선의주장들이 사실이라면 崔교수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가도 몇번은 갔을 것이다.따라서 문제를 삼은 일부 표현도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해석을 해야지 극우 냉전적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 한나라당도 즉각 崔교수를 공격하고 나섰다.安商守 대변인은 “崔교수의 6·25관은 우리의 이념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면서 위원장직의 해임을 요구했다.한나라당은 또 崔교수 저서의 요지가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부인하고 있어 ‘제2건국’을 위한 정지작업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고,당 부설 연구소에서 崔교수의 각종 저술을 정밀검토하도록 했다.정부가 崔교수의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이끌려 간다면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려대 崔章集 교수는 이론과 실천면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학자다.그럼에도 그에게 집중되는 색깔론 공세를 보며 우리는 金泳三정부 초기 극우 보수세력이 韓完相 당시 통일부총리와 金正男 교문수석을 공격했던 일을 떠올리게 된다.보수세력의 일제공격에 밀려 두 사람이 퇴진한뒤부터 金泳三정부의 개혁정책이 좌초하기 시작했으며,특히 대북정책에서 갈팡질팡하는 계기가 됐다.이번에도 극우 보수 반개혁세력은 崔교수를 표적삼아 공격함으로써 金大中정부의 정체성에 ‘색깔’을 덧씌우려 하고 있다.그러므로 정부는 반개혁세력의 공세에 밀리지 말고 소신있게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개혁에 실패하면 우리나라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 윤대녕씨 장편 ‘달의 지평선’/감옥간 친구의 애인과 결혼­이혼…

    ◎세기말적 사랑과 시대의 상처 그려 90년대 감수성의 상징적 작가로 꼽히는 윤대녕씨(36)가 ‘추억의 아주 먼 곳’에 이어 2년 6개월만에 새 장편소설 ‘달의 지평선’(전2권,해냄)을 내놓았다.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살아온 불특정 다수에 해당하는 한 개인의 세기말적인 사랑과 시대의 상처를 그린 작품. 10년의 기간을 시간배경으로 한 이소설은 한편의 긴 여행기록으로,시대의 경계에 선 인간들의 불안한 존재의식을 더듬는다. 이를 위해 작가는 80년대 상처에 대한 90년대식 문답풀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동원한다. 주인공은 80년대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남창우. 그는 87년 6·29선언뒤 감옥에 간 친구의 애인과 결혼하나 이내 이혼한다.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 역시 곁을 떠난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원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차라리 상처 투성이의 80년대로 돌아가 순결한 사랑과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당부한다. 기울고 차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달의 영휴(盈虧)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바뀌는 사랑의 양상에 관한 은유. 소설 제목 ‘달의 지평선’은 바로 이를 시사하는 것이다.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자민련,경제청문회 ‘남다른 애착’

    ◎21개 부처에 자료 169건 요청/“초점 희석” 북풍청문회 일축/YS정권과 ‘악연’… 묘한 시선 자민련이 경제청문회에 공을 들이고 있다.반드시 경제위기 원인을 캐내겠다고 벼르고 있다.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운다.정책정당으로서의 차별화는 또다른 차원의 목표다.남달리 애착을 갖는 인상이다. 15일 간부회의에서는 강공을 재확인했다.‘북풍(北風)청문회’와 병행하자는 한나라당 주장을 일축했다.李完九 대변인은 “오늘 경제 위기를 내일 교훈으로 삼기 위해 경제청문회를 하는 만큼 초점을 흐려서는 안된다는 게 당론”이라고 반대 이유를 밝혔다. 자민련이 행정부에 요청한 자료는 모두 169건.21개 부처에 보냈다.이번 주말이 시한이다.외환위기 원인,금융정책,과잉중복투자 등과 관련된 부분들이다.현재 70여건이 접수됐다. 실무지원반은 두달 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초작업을 벌이고 있다.朴泰俊 총재는 수시로 ‘철저한 준비’를 당부하고 있다.마포 개인사무실까지 내주었다.좀더 조심스러운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자민련은 이날 대책회의를 가졌다.청문회 위원들과 전문위원들이 모두 참석했다.네번째다.청문회 질문 방식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하지만 청문회는 여전히 불투명하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은 11월19일∼12월 초라는 시기를 제시하고 있다.한나라당은 12월 초 예산안을 처리한 뒤 하자는 입장이다.정기국회가 12월18일 끝나면 열흘 정도 임시국회를 더 갖자는 주장이다. 자민련은 묘한 시선도 받고 있다.金泳三정권과의 악연(惡緣) 때문이다.金鍾泌 총리는 민자당 대표에서 쫓겨났다.朴泰俊 총재는 해외유랑을 해야 했다. 朴浚圭 의장도 마찬가지다.朴哲彦 부총재,李健介 의원 등은 한때 감옥에서 지냈다.
  • 민주열사 열전:11/‘녹화사업’ 의문사:상(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제순화·프락치 강요에 ‘비극적 저항’/정 烈士 시위현장서 곧바로 징집… 의문의 죽음/5공 군당국 부모에 ‘이의제기 포기’ 각서 간청 광주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 5공화국의 全斗煥정권은 80년대 초 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면서 독재정권의 기반을 다졌다.공포의 경찰국가 같은 상황이었지만 대학의 ‘반독재 반군사정권’ 시위와 함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5공 정권은 대학 시위를 막기 위한 특별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른다.그중 하나가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綠化)사업’이다. ○대학생 477명 강제징집 녹화사업은 강제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밝혔으나 그 과정에서 여섯명의 의문사(死)가 나왔다.본래 군대갈 나이가 됐더라도 대학에 다니고 있으면 퇴학·휴학 등의 학적변동이 없는 한 신체검사와 입영이 연기된다.아울러 신검과 입영은 각각 20일,30일 전에 통지서와 영장이 송달된 뒤에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그러나 5공정권은 81년 11월부터 시위저지책의 하나로 학생들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버젓이 대학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됐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와 구타와 함께 조사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곧바로 군부대로 끌고 갔다.병역법상의 사전통지 조항을 정면으로 무시했고 대학생 입영의 필수요건인 학적변동도 대부분 사후에 이뤄졌다. 6공이 들어선 88년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5공정권은 83년 말까지 2년 동안 이같은 강제징집으로 447명의 대학생을 억지로 군대에 보냈다.자진 휴학 등 정상적으로 학적이 변동되어 입대하는 경우와는 다른 이 ‘특수 학적변동’ 입대자들 가운데는 정상적인 신검을 받았을 경우 입대할 수 없는 신체상 결격사유나 가정환경의 학생들이 상당수 포함됐다.연령 미달자도 있었고 소아마비로 신체가 불편한 사람과 3대독자도 끌려갔다. ○장애자·3대 독자도 끌어가 강제징집은 강제징집으로 끝나지 않았다.당시 군 보안사령부가 입안한 ‘녹화사업’이 기다리고 있었다.‘녹화사업은 병역법에 의거,학원소요 관련 학사징계로 83년 11월까지 입대조치된 자 447명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에서 밝혔다.문제학생들의 급격한 입대 증가 추세로 좌경의식의 군내 유입이 우려돼 보안사에서 이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많은 의식화 오염자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갖게 했다고 이때 국방부는 덧붙였다. 그러나 강제징집되어 군에서 녹화사업에 동원된 학생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그들은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빼내고 이를 탄압하기 위해 보안사가 펼친 강제순화 및 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라고 주장해 왔다.녹화사업은 정신적인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 작성으로 시작된다.의식 상태를 면밀히 심사하고 체제를 긍정하도록 하는 의식 개조작업이 뒤따른다.소속 군부대 및 서울 보안사 분실에서 행해진 운동권학생들의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은 보름에서 두달간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녹화사업은 그러나 ‘순화됐다’는 맹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순화’된 학생에게 이를 입증할 관제프락치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대개 휴가 형식으로 사회에 내보낸 뒤 대학 선후배 등을 만나 활동상황,특이 동향의 정보를 수집,보안대에 보고하도록 강요한다.갑자기 군에 끌려온 학생들은 이같은 녹화사업으로 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84년 초 강제징집된 6명의 대학생이 보안사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학원가에 돌았고 곧 정치·사회문제화됐다.84년 6월 당시 尹誠敏 국방장관은 국회에 나와 ‘학적 변경과 관련한 입대자 중 81년이후 군에서 사망한 인원은 자살 4명(정성희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군기사고 1명(최온순) 등 5명이며 자진휴학 지원입대해 자살한 1명(한희철)을 포함하면 모두 6명’이라고 밝혔다. ○선후배 활동상황 보고 강요 尹관은 이같은 인명 손실은 학원사태 관련 군입영자에 대한 차별대우로 야기된 결과가 아니라고 강조했다.물론 ‘강제징집’ ‘녹화사업’이란 말도 쓰지 않았다. 녹화사업이 82년 9월부터 84년 11월까지 265명에 실시됐다고 밝힌 88년 국감 때도 국방부는 의문사에 대해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다만 녹화사업이 정치문제화함에 따라 84년도에 녹화사업 업무를 중단하고 보안사 전담부서를 폐지했다고 밝혔다.관련 자료도 3년 보존기간이 지나 폐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단체와 가족이 제기하는 녹화사업 의문사는 심증만 있을 뿐 진상을 알기가 극히 난망한 실정이다.여섯명의 의문사 중 ‘강제징집 사망1호’인 정성희씨의 경우를 먼저 살펴본다.(나머지 5명은 다음 회에서 보도할 예정이다) 81년 연세대 영독불문학 계열에 입학했던 정성희는 대학생활 8개월 만인 11월25일 교내시위 현장에서 20여명의 교우와 함께 연행됐다.이중 15명이 강제징집당했다.연행 3일 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군에 강제로 입대한 그는 82년 6월8일 첫 휴가를 나와 친구,가족들에게 보안대의 감시 등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귀대한 지 달포 후인 7월23일 아침 갑자기 사망통보가와 가족이 전방으로 달려가자 이날 새벽 0시10분 철책근무 중 목에 M16소총 4발을 발사해 자살했다는 설명이었다. ○사망현장 답사요구 묵살 군당국은사고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의 최전방이므로 현지답사가 불가능하다며 간단한 도면설명과 함께 자살임을 믿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부모로부터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그리고 사망사인에 이의없고 이후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사체를 처리했다.유서는 없고 ‘백양로를 한번 더 걸어보고 싶다.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등 8줄 정도의 낙서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84년 국방부가 국회에 보고한 사망원인에 따르면 입대해 평소 사회제도에 불만을 토로했으며 사고 당일 전방교육 실습차 입소한 대학생 1명과 복초근무를 하면서 “순수한 철학도의 소원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는 것이다.88년 국감자료는 보안사 정훈교육 이전 사망자로 염세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정성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정성희와 다른 5명의 의문사는 민주화를 열망했던 학생들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극적 저항이었다. □정성희 열사 연보 ▲1962년 인천 출생 ▲81년 부평고 졸업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81년 11월25일 학생시위로 연행 ▲81년 11월28일 강제징집 ▲82년 7월23일 사망 ◎당시 고려대생 양창욱씨 ‘녹화사업’ 회고/1주일간 심한 구타뒤 ‘감옥’‘군입대’ 택일 강요/보안대 조사땐 ‘감쪽같이 죽을수도’ 공포 엄습 현재 부천에서 ‘어린이 과학실험교실’을 내고 있는 양창욱(38)씨는 고려대 4학년 때인 83년 3월 문과대 시위주동자로서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다음은 그의 녹화사업 회고. 경찰서에서 1주일간 심하게 두들겨맞은 뒤인 3월7일 갑자기 부모를 불러오더니 ‘감옥에 보내겠느냐,군대에 보내겠느냐’며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부모들이 군입대 각서에 서명한 직후 춘천 보충대로 가서 요식적인 신검을 치렀다.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서류작성에 불과했다. 동해에 있는 훈련단에 보내져 6주 훈련에 들어갔다.보름 만에 부친상을 당해 휴가를 나왔는데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슬픔도 슬픔이지만 해방감에 당황할 정도였다. 3개월쯤 지난 뒤인 6월 초 배치된 철책 초소에서 강릉 사단사령부 보안부대로 소환됐다.하룻밤을 묵으면서 행정고시 출신이라는 모 중위로부터 친구,학내 동향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다.구타는 없었다.얼마 후 같이 강제징집된 친구 김두황의 죽음을 우연히 전해들었다. 10월 사단 보안대의 그 중위와 함께 서울 세운상가 뒤 아파트로 이동,녹화사업을 받았다.아파트 안은 오직 책상 하나와 백열등뿐이었고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조사가 진행됐다.1주일간 이곳에 혼자 갇혀 있으면서 16절지 300장에 달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다.옆 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구타나 고문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순화교육이 끝났다는 표시로 태극기 아래서 사진을 찍더니 8일간의 휴가를 주면서 학교,서클과 관련해 몇몇 정보를 얻어 아파트로 다시 라는 프락치 임무가 주어졌다.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보 몇개를 가지고 갔더니 미진하다며 3일간의 추가 ‘프락치 휴가’를 주었다. 사흘 후 다시 가자 정보를 더 물어오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있었던 일을 일절 입밖에 내지 않겠으며 이후 보안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이같은 조사는 제대할 때까지 두번 다시 없었으나 사단의 중위가 3개월마다 직접 부대에 와 점검했다.
  • DJ 요즘도 영어 공부/매일 경제용어·문장 등 10개 정도 익혀

    ◎외국인사 면담·해외순방때 실전 활용 金大中 대통령은 요즘도 통역관이나 해외언론담당비서관실로부터 받은 외국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뽑은 시사영어를 외운다고 한다.미국 방문을 앞둔 지난 5월 매일 10개 정도씩 새로운 영어 단어와 문장을 메모해 전달하도록 지시했다.그 뒤 5개월 동안 ‘늦은 영어공부’가 계속되고 있다.그러나 청와대 관계자들은 金대통령 이미지를 고려,그동안 ‘쉬쉬’해왔다. 金대통령이 영어공부를 하는 시간은 대개 잠자리에 들기 전으로 알려진다. 金대통령이 주로 익히는 단어는 새로운 경제 흐름을 반영한 경제용어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金대통령은 그렇게 익힌 영어를 반드시 활용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예컨대 외국인사 면담이나 해외 순방때 적절히 구사한다는 것이다. 金대통령의 영어 수준은 지난 4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와 미국 방문을 통해 익히 알려진 상태다.영어를 잘할 때 외국인들이 쓰는 최상의 표현인 “영어를 어디서 배웠느냐”는 질문은 듣지 못했지만 “잘한다”는 평가를받았다. 실제로 金대통령은 영어 연설보다는 대화에 더욱 능한 것으로 전해진다.40이 넘어 감옥에서 독학으로 배운 탓인 것 같다.어쨌든 金대통령은 ‘배움엔 끝이 없다’는 ‘학습의 왕도(王道)’를 실천하고 있다.
  • 안중근 이토 총살(秘錄 南柯夢:27)

    ◎탕! 하얼빈 1번플랫폼 충성… 일제원흉 즉사/이토 러시아 가던길서 사망/명치천황으로선 두손 잃은셈/“삼천리강토 원수 갚았을뿐” 安의사 죽음앞서도 당당/여순감옥서 순국땐 구슬비마저 기차 30분 넘도록 안화 낙심하며 돌아서는데 그때 도착하는 모습이 그래서 막 뛰어가…(安의사 회고中)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이 나라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강탈한 이토는 특별열차로 중국 만주의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그때 원수 이토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안중근의사는 뒷날 회고하기를 “이토 그놈을 가딱하면 놓칠뻔 했네. 그놈의 기차가 아침 9시 도착인데 9시30분이 되어도 오지 않아서 그만 걸어서 돌아서는데 다리있는데 오니까 아! 그때 기차가 오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막 뛰어가 그놈을 쏘아 죽였네 그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해서 일제침략의 거물 이토를 하얼빈역 1번 플랫홈에서 쏘아 죽였다. 이것을 우리는 안의사의 이토 총살이라 부르고 있다. 전 통감 이토(伊藤)는 저희 나라의 일로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하얼빈역에 잠시 내렸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더니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아! 동양의 패권을 쥐었다는 자가 끝난 것이라. 이토가 끝났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끝났다는 이야기이다. 이토는 한국민에 대해 원수일뿐 아니라 일본인에 대해서도 원수인 것이다. 금년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 79주년이 되는 해인데 안의사가 외쳤던 ‘동양평화’는 과연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뒤 조용히 잡혀가면서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으니 충의는 당당하고 의리는 빛났으며 위엄있는 풍도는 늠늠하니 뉘 감히 그를 꺾을 사람이 있겠는가. 안중군 의사는 당년 32세의 젊고 젊은 나이에 의거를 결심했는데 그의 참뜻은 아직도 후손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지은 ‘장부처세가(丈夫處世歌)’는 이렇게 외친다. 동포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만세 만세 대한독립이로다. 안중근,그는 누구인가. 아무도 그 당시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얼빈에서 총을 쏜 소년은 뉘 집의 아들이었던가. 칼을 집고 바다를 건너갔다고 하는데 그의 선대는 알지못하겠으나 성은 안씨요 이름은 중근(重根)이라 하였다. 아이시절부터 칼 쓰기와 공차기를 좋아 했고 장성해서는 비분강개하고 활협(闊狹)의 의지가 강하여 남을 잘 도왔다. 또 나라일을 걱정하고 그 지략이 커서 사소한 일은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 이토가 러시아땅에 들어가는 기회가 있음을 미리 알고 그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이토의 얼굴이며 신장의 처수까지 알아두기 위해 이토의 사진 한장을 얻어 오래 익힌 뒤 즉시 단총(육혈포)으로 방포(放砲)해 그자의 가슴을 바로 맞추어 즉사케 하였으니 아! 위대하고 장하도다 안중근 의사의 공판투쟁은 참으로 용감하고 씩씩하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법률에 따라 조선사령부에 호송되어 며칠동안 심문을 받았다. 안중근은 청천백일과 같아서 한결같이 정정당당했고 끝내 굴하지 않고 말하기를 “대장부 사내가 되어 한번 죽음은 당연한 것이거늘 어찌 이처럼 고달프게 문초하는가. 원래 조선에서는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해서는 죽음으로 갚게 되어있다. 어찌 한치라도 사심이 있겠는가” 하였다.심문관이 또 묻기를 “너와 같이 공모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하였다. 안중근이 대답하기를 “조선의 이천만 동포가 모두 같이 공모자다”고 했다. 또 묻기를 “누가 너에게 이런 불법적인 일을 가르쳤는가” 하자 “하늘이 가르쳤다. 누가 가르쳤겠는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법대로 하라. 이토로 말하면 우리 삼천리 강토를 늑탈하고 오백년 종사(宗社)를 멸망케 하였으니 내가 그 원수를 갚은 것이다. 나는 귀국의 원로를 죽여 조선의 수치를 씻었다. 그러나 귀국은 나를 살인죄로 죽이려 들 것이니 구차스럽게 문답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조용히 죽음에 임했다. 이토는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제일가는 위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만엔짜리 일본 지폐에 그 얼굴이 찍혀 나왔다. 이토의 이력에 대해선 벌써 온 세계 역사책에 기록이 돼있으니 더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열방(列邦)과 교섭하는데 있어 이토같은 거물이 어디 있겠는가. 그같은 인물이 죽었으니 명치천황으로서는 두 손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 이토의 지략은 독일의 비스마르크나 미국의 워싱톤 보다 못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명치 천황의 혁명이 아니었다면 어찌 동서양 패권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옛날 제나라때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제후에게 패도(覇道)를 써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이토의 경우는 달랐다. 예로부터 영웅은 시대를 잘만나 공을 이루는 법인데 이토는 명치천황의 악정(惡政)을 혼자 자기 사업으로 전용(專用)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 공로가 많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역사에 안의사와 같은 이가 또 있으니 바로 창해역사(滄海力士)다. 그는 조선인이었는데 박랑사중(博郞沙中)에서 철퇴를 던져 진시황을 저격했으나 다음 수레를 잘못 맞춰 온누리의 영웅으로 불려왔으며 진(秦)나라가 마침내 망하고 말았다. 지금 안중근도 한번 단총을 쏘아 패권을 쥐고 있던 주인공을 꺼꾸러져 죽게 했다.그러나 일본은 점점 강해지고 조선은 반대로 멸망하니 이것이야 말로 일은 사람이 꾸미고 성패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안의사는 죽음에 임하여 태연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먼저 일본이 정략을 고쳐야 한다. 시간이 지나서 기회를 잃으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고 했으니 이 얼마나 앞 날을 꿰뚫어본 탁견인가. 안중근의사는 마침내 1910년 3월26일 10시 구슬비가 나리는 가운데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푸른 하늘은 답답한 듯 하고 백일(白日)이 침침하며 숙숙(肅肅)한 기운이 육대주에 충만하였으니 두공부(杜工部 즉,杜甫)가 지은 시에 “영웅의 가슴에 눈물이 가득하다”고 한 것은 안중근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시가 아니었던가. 그 친척들이 시체를 거두어 고향산천에 반장하였으나 그 뒤에는 적적하여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이토는 안의사를 만나 잘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 또한 빛을 잃었을 것이다. 이토의 만장(挽章) 영웅을 쏘아 죽이자 만국이 놀랐다/하늘이 그로 하여금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함일세/이로써 열강의 교섭은 끝나고/명치는 울어서 눈물이 쏟아지겠지 그러나 안의사의 죽음만큼귀중한 일은 없었다. 안중근의 만장 하얼빈의 총소리가 오대주를 진동하였으니/안중근의 기개가 천추에 관통하였네/지난해에 충의를 다한 자 누가 있었던가/자기 한몸 죽여가며 나라근심 보답했네.
  • 컨테이너 속에서 일구는 大役事

    ◎신공항건설공단 임직원 242명 고생을 낙으로… 창살없는 감옥.신공항건설공단 사람들이 바깥세상과 유리된 채 단국 이래의 최대 역사인 신공항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공단 직원들은 공항 남쪽인 운서동에 설치된 컨테이너 임시가옥에 거주하면서 건설공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본래 공단 사무실은 서울 여의도에 있었으나 공항건설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현장지휘를 위해 지난해 7월 영종도로 옮겨왔다. 그러나 바다를 매립해 만든 황량한 벌판만 끝없이 이어지는 현지에 마땅한 거주지가 있을 리 없어 건설사 공장들이 밀집된 지역에 컨테이너 가옥을 마련하고 터를 잡았다. 이곳에는 외국인기술자 25명을 포함,공단 직원 242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건축·설비·전자·통신 등 기술분야 직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컨테이너 생활은 간부들에게도 예외가 없다.임원 9명은 컨테이너 속에서 부하직원들과 함께 뒹굴며 끈끈한 동료애를 다지고 있다. 姜東錫 이사장은 한술 더떠 직원들보다 1년 먼저인 지난 96년 영종도로 이사와 ‘신공항 1호 토박이’임을선언했다. 공사가 끝난 뒤 재활용을 염두에 두고 컨테이너 가옥을 고집해 ‘컨테이너 이사장’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1인당 3평의 작은 공간만이 허용된 컨테이너 주택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뿐 아니라 세면장과 간이헬스장 외에는 편의시설이 전혀 없어 직원들은 2.3㎞ 떨어진 공단 내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공단 본부에도 식당·슈퍼·은행 등 극히 기본적인 편의시설만 있을 뿐이다. “어떤 때는 마치 감옥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朴文洙 홍보실장은 “직원 대부분이 총각 아닌 총각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주말에 가족을 찾아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말했다. 직원들은 2001년 공항 개항과 함께 배후지원단지가 건설되면 이주할 방침이지만 민자유치로 건설되는 지원단지가 IMF의 여파로 계획보다 훨씬 늦어져 직원들의 컨테이너 생활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 직원은 “공항만 제대로 건설된다면 컨테이너 생활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 한가위 보름달을 그리며/임수경 통일운동가(굄돌)

    달이 하루하루 차오를수록 그리움과 외로움에 사무치던 때가 있었다. 창살에 가린 달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뺨을 스쳐가는 찬바람이 슬퍼서 눈물을 떨구기도 하였다.수년 전,2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의 모든 것과 처음으로 떨어져 감옥살이할 때의 일이다. 꿈 속에서만이라도 바깥세상에 있기를 소망한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었다. 대낮엔 담장 안에,잠든 후엔 담장 밖에 있다면 감옥살이가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은 부질없는 것이었지만, 매일 가져보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하지만 그 희망은 차오르는 달 앞에서는 슬픔이었고 그리움이 되었다. 달이 주는 의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이제 팔월 한가위를 며칠 앞두고 있다.꽉 찬 보름달을 보며 희망이 부스러져내린 조각을 허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겠다는 생각을 한다.고향을 두고도 갈 수 없는 이산가족,직업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가장·노숙자들,감옥에 있는 양심수,이들 모두가 견디기 힘든 현실을 꿈에서나마벗어나 보고파 하며 살아가리라.북녘 땅에서도 추석은 큰 명절이다.솔잎을 얹어 쪄낸 송편 한 접시도 제대로 먹기 힘든 식량위기의 북한 사람들도,달을 맞는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민족 고유의 명절을 보내며 민족 최대의 위기를 말하는 요즈음,이 절망의 시대에 귀가 번쩍 뜨이는 뉴스가 있으면 좋겠다.50년 넘게 고향가는 길을 잃고 살아온 이산가족에게 고향길 차편이 마련되는 일,남북간의 대치 상태가 사라져 평화구역이 선포되고 양쪽 군인이 모두 추석휴가를 가는 일,양심수가 전원석방된다는 정부 발표문에 박수를 보내는 일 등이 실현되기는 진정 어렵고 허황할까. 이번 한가위에는 달을 보며 슬픔이 아닌 희망이 담긴 소원을 꼭 빌어보고 싶다.
  • ‘대한국인 안중근’ 그날의 거사 다시본다

    ◎서울시립극단 10월30일부터 공연/건국 50돌 기념 특별기획/역사적 사실 충실히 묘사/호화배역 중후한 연기 주목 안중근 의사가 천주교 신자이고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평화론자였다는 사실은 과연 몇이나 알까? IMF 이후 국산품애용 열풍과 함께 눈에 자주 띄는 자동차 뒤에 붙이는 ‘손도장의 주인공’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울시립극단이 진정한 애국심이 어느때보다 절실한 시기를 맞춰 항일 민족영웅 안중근(1879∼1910년)일대기를 다룬 ‘대한국인 안중근’을 건국50주년기념 특별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 올린다.10월30일∼11월4일. 안의사의 히로부미 저격을 1막으로 짧게 끝내고 6개월동안의 감옥생활과재판과정에 초점을 맞출 이번 무대는 작품의 무게만큼 호화 연출진과 배역으로 주목받는다.안중근은 연극·영화를 오가며 지적인 이미지를 보여온 김갑수가,히로부미는 원로배우 장민호가 맡았다.또 이낙훈 박정자 전무송 등 중 견배우들이 기꺼이 단역을 자청했다.연출은 표재순,음악은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김영동 단장. ‘대한국인 안중근’은 과장이나 미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 묘사에 비중을 두고 제작됐다.극본을 쓴 김의경씨(서울시립극단 단장)는 “안의사가 천주교도였다는 사실확인을 90년대 들어서야 했을만치 우리 모두 역사적 사실규명에 소홀했다”면서 좋든 나쁘든 사실과 다른 내용은 배재했다고 밝혔다.독립운동사와 공판자료 등을 최대한 활용하고 일본에서 국제한국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일명 ‘안중근 박사’ 최서면선생의 도움도 빌렸다고 강조했다. 안중근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함으로써 일제침략을 응징했다는 점외에 편협한 민족사관에서 무분별한 과장,미화로 사실과 달리 꾸며진 부분이 많았다.해방직후 ‘검사와 여선생’을 썼던 김춘광이 신파극 ‘안중근사기’를 공연했고 60년대에 김진규 제작영화 ‘안중근’이 고작으로 그나마 왜곡된 내용이 많았다. 사실에 충실하다보면 극적인 재미가 반감돼 관객 흡인력은 약화되기 쉽다. 이에 대해 김씨는 “연극은 재미도 중요하지만 때론 역사적 진실을 전달하는, 교육적 측면도 무시할 수없다”고 전제하고,하지만 안중근의 거사자체가 극적인 면이 많아 일반인의 흥미를 유발하는데 손색이 없다고 자신했다. 특히 이번 작품은 당시 파격적인 세계관으로 동양평화론을 주장하는 등 선각자적 태도를 지닌 안중근을 통해 21세기 한국인상을 심는 계기가 될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또 “내년에 일본에서 ‘이등방문과 안중근 두개의 조국’이란 제목으로 쿠스 게이스케 극본의 안중근 영화가 나올 예정이고 안중근역엔 한국배우를 기용할것”이라면서 우리 연극계의 이번 시도는 비록 늦기는 했지만 그 어느 분야보다 일반인에게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고 덧붙였다(02)399­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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