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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계 복고·인종주의로 틈새시장 공략

    세기말의 불안감을 대변하는 것일까.최근 영화계에는 복고풍이거나,역사적고통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들이 많다.이달초 개봉한 ‘셰익스피어 인 러브’ ‘레미제라블’ 등에 이어 이번주말 ‘엘리자베스’가 관객을 찾아간다.이들은 옛 것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영화.또 이미 상영중인 ‘인생은 아름다워’와 주말개봉하는 ‘아메리칸 히스토리X’는 나치와 백인우월주의 등서양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 ▒엘리자베스 16세기 중반 파란만장한 삶을 지낸 한 독신여왕의 집권전후 이야기.그러나 엄숙한 시대극이 아니라 사랑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엘리자베스는 헨리8세의 두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났으나 질투심많은 언니인메리여왕에 의해 감금된다.미처 엘리자베스의 운명을 결정짓지 못하고 메리여왕이 숨지자 1558년 25세의 처녀로 왕위에 오른다.끝없는 암살의 위협과주변 강대국의 압박,반역 등의 고난을 극복해냈으나 마지막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연인의 배신이 그 것.실망한 그녀는 마침내 ‘조국 잉글랜드와의 결혼’을 선포한다.그녀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황금기를 맞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이 영화는 미국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여우주연상 등 7개부문 후보에 올랐다.제작진은 현대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대부’를 참고삼았다고 밝혔다.시사회를 본 팬들은 국내사극 ‘용의 눈물’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했다. 호주여배우인 여주연 케이트 블랑슈 뿐 아니라 조연인 제프리 러시와 조셉파인즈 등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다.영화는 16세기의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는 잉글랜드의 앨른윅 성,뱀버러 성,칠링엄 성 등에서 촬영했다. 94년 칸영화제에서 ‘밴디트 퀸’으로 이름을 날린 인도감독 세카르 카푸르의 첫 해외연출작이다.그는 70년 잉글랜드로 건너간지 20여년만에 대작을 감독하는 영광을 안았다. ▒아메리칸 히스토리X 일그러진 가치관이 남긴 상처를 그린다.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에드워드 노튼은 혼돈과 상실감,증오와 저항을 화면 가득히 펼친다.그러나 이 영화는 인간이 만든 각종 편견을 가족들이 사랑으로극복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지역감정이 있다면 미국에는 더욱 큰 편견이 있다.인종차별주의. 주인공 데릭은 나치의 백인우월주의에 푹 빠져있다. 어느날 흑인 좀도둑들이 자신의 차를 훔치려 하자 무참하게 이들을 살해한다.감옥에 들어간 그는 그러나 나치주의자인 백인이 아닌 흑인친구에 의해보호받으면서 인간애에 눈을 뜬다.출감한 그를 과거의 친구들은 영웅으로 치켜세운다.그는 그러나 이미 그들의 허상을 간파했다.세상은 증오와 편견이아니라 사랑과 화해가 중요하다고. 에드워드 노튼은 스킨헤드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현자의 눈빛에 이르기까지,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다. 朴宰範
  • 3·30재선거-구로을/”정치 도덕성-명예회복” 공방

    4명의 후보가 나선 구로을 재선거의 선거 초반의 최대 쟁점은 ‘부정선거냐’ ‘표적사정이냐’에 모아지고 있다.부정선거로 재선거가 치러지는 데다국민회의 韓光玉후보의 대항마로 출전한 한나라당 趙恩姬후보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李信行전의원의 아내로 남편의 명예회복을 선거전략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의 韓후보측은 지난 경제청문회에서도 밝혀졌듯 李전의원은 표적사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부정선거로 당선무효가 된 재선거라는 점을 강조하며 기선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비리정치인 사정이 정당했다는 점을 강조,유권자들로부터 심판받겠다며 정면 돌파한다는 전략이다.趙후보측은 정반대 시각이다.李전의원이 ‘표적사정의 희생자’라는 점을집중 제기하며 명예회복을 다짐하고 있다. 본격적인 거리유세에 나선 16일에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됐다. 국민회의 韓후보는 “이번 재선거는 李전의원의 부정선거 결과로 치러지는선거”라고 강조한 뒤 “부정선거를 저지른 한나라당을 심판,다시는 부정선거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다.趙후보는 그러나“李전의원은 ‘여당 올래,감옥 갈래’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하고 “李전의원의 의원직 상실 및 구속은 여당 입당 제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발생한 표적사정”이라고 강조했다. 두 후보는 이와 함께 스스로의 강점을 내세우며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고 있다. 국민회의 韓후보가 강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낙후된 구로를 위해 일할 수있는 힘을 가진 정치인’이라는 점이다.정치 경륜이 전무한 趙후보와의 차별화전략이다.韓후보측은 “비리 남편의 명예회복보다는 후보 본인의 능력이중요하다”면서 “구로에 뿌리를 박고 구로 발전을 위해 일할 사람”이라고거듭 역설했다. 趙후보는 지역 토박이론을 강점으로 내세운다.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전략이다.‘韓후보는 떠날 정치인’이라는 소문을 퍼트리며 상대 후보의 약점을 파고 들고 있다. 후보들의 공약경쟁도 뜨겁다.韓후보는 구로공단을 벤처산업단지로,교통·교육환경이 열악한 구로를 교통·교육환경이 좋은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趙후보는 李전의원의 공약을 이어받아 기산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가리봉시장의 재건축을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서로 내가적임자라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형국이다.
  • 반론문-바른역사가 밝혀지길 고대하며

    본보 3월1일자 13면 “정직한 역사 되찾기;친일의 군상”연재물 26회는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편을 “先애국 後변절 … 日帝 고급밀정 활동의혹”제목으로 다뤘다.이에 대해 유족대표 李在賢씨는 반론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삼일운동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옹의 후손인 우리들은 매년 삼일절이 다가오면 가족 전체가 노이로제에 걸린다.‘선애국,후변절’,‘일제 고급밀정의혹’이라는 특별 기획물이 어느 언론 매체에 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그 내용은 항상 창씨개명,상해 망명시 밀정행위,중국 신경에서 일본회사에취직,총독부 고위관리의 촉탁을 했다는 것이다.먼저 이러한 주장이 모두 터무니 없는 이야기임을 밝힌다. 이갑성옹의 상해에서의 활동은 관련 인사 대부분이 이미 작고하셨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인을 세울 수가 없다.그러나 세상이 다 알다시피 상해 임정의주요 인물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신 신익희선생이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이옹과 함께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익희선생이 상해에서일제 밀정으로 널리알려진 사람과 해방직후 손잡고 일을 했다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된다.신익희선생께도 큰 누가 되는 이야기다. 다음,이옹이 거주한 적이 전혀 없는 신경에서의 일본회사 취직,평생 일어를 안하고 사신 이옹이 한국말을 못하는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1922∼23서울근무)의 촉탁으로 취직(이옹은 이 당시에도 일제감옥에서 수형 생활 중이었음)했다는 주장도 사실처럼 이야기되고 있으니 우리 후손들은 가슴을 칠일이다. 이중 그래도 인정할수 있는 것은 창씨개명이 되어있다는 사실뿐이다.우리가 이옹에게 직접들은 이야기는 이옹은 자신이 창씨 된 것을 전혀 몰랐으며 이러한 사실을 이옹 자신이 생전에 직접 공개한 바도 있다(대한일보67년5월12일자). 이옹에 대한 이러한 음해성 험담의 연원은 1960년대 초부터다.독립운동 유공자 모임인‘광복회’설립과정에서 튀어나온 이 문제는 이옹이 그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급기야는 경쟁자간의 성명서 전쟁으로까지 비약되었다.이러한 와중에서 광복회 회장으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되는 일제밀정문제 등을 상대측에서 조작 유포시킨 것이었다.그후 1967년에 2대 회장으로 재 선임되자 상대측에서 이 문제를 재 제기하여 결국은법정까지 비화했었다.당시 서울지검에서 조사한 결과,그러한 혐의를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종료했다. 이옹 때문에 일제 35년을 힘들게 살아야했던 우리 후손들은 터무니없는 음해 때문에 해방된 내 나라에서 다시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다.수차 보훈처에 조치를 요구하고 항의도 해 보았다.보훈처에서는 이갑성옹의 독립운동족적에 어떠한 흠결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국가에서 수여한 훈장이나 대우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난 30여년간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이옹은 물론 그 가족 누구도 어떠한 친일 행적도 수혜 사실도 발견되지 않았다.단순히 해방후 단체장 선거 때 상대측이 선거용으로 주장한 혐의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아닌 것도 혐의라는 명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크게 보도되면 사실처럼 된다.사실이 아닌 이갑성옹에 대한 흠결을 혐의라는 제목으로 재탕하고삼탕,사탕할 것이 아니라 그리한 혐의가 사실인지 누명인지를 규명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족대표(장손)이재현
  • 임진왜란때 가져간 매화묘목 400년만에 日서 돌아온다

    ┑도쿄 黃性淇 특파원┑ 임진왜란때 왜장이 일본으로 옮겼던 매화나무 묘목이 400년 만에 돌아오게 됐다. 8일 일본 미야기(宮城)현 마쓰시마(松島)의 불교사찰인 즈이간지(瑞巖寺)에선 한국매화 ‘와룡매’(臥龍梅·가류바이) 묘목의 귀국 기념행사가 재일동포 등 두 나라 관계자 3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홍백색 수려한 자태의 이 매화는 임진왜란때인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함께 침략길에 올랐던 초대 센다이(仙台)지역의 번주(藩主)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일본으로 가져가 즈이간지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즈이간지의 히라노 소조(平野宗淨·70) 주지는 와룡매 묘목을 서울로 가져가 安重根의사 기일에 맞춰 오는 26일 남산 安의사 기념관 앞에 심겠다고 밝혔다. 이 매화의 귀국은 安의사가 처형되기 직전 감옥에서 친하게 지냈던 일본인교도관의 위패가 미야기현의 절에 안치,주민들이 매년 安의사와 함께 추도법회를 열고 있는 인연 등으로 해서 히라노 주지가 安의사 기념관측에 제의해이루어졌다.
  • 權魯甲고문 일문일답…“黨 화합-단결에 최선”

    ‘DJ의 그림자’‘동교동계의 맏형’으로 불리는 국민회의 權魯甲고문이 고희(古稀)를 하루 앞둔 4일 정치권을 떠난 지 2년만에 당무에 복귀했다. 그의 70평생을 되돌아 보면 金大中대통령과 함께한 40년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형극의 길이었다.서슬퍼런 유신독재와 군사정권을 거쳐 YS정권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金대통령의 방탄막 역할을 해왔다. 목포상고 4년 후배인 그는 60년 4·19 직후,당시 민주당 대변인인 金대통령을 찾아 첫 정치적 인연을 맺는다.그후 71년 대선부터 4번의 대통령 선거를치르면서 역대정권의 집요한 탄압과 회유를 이겨내며 ‘DJ 분신’으로 자리매김했다는 평이다. 유신과 5공시절 수시로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 끌려가 ‘통닭구이’ 등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金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金대통령의 ‘생애 마지막 승부’였던 97년 대선은 감옥에서 지켜봐야 했다.그해 2월 한보비리에 연루된 탓이다. 權고문은 정권교체 직후 “나에 대한 사면복권이 정치적 부담이 된다면 마지막까지 감옥에남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전달,金대통령의 눈시울을 적셨다는 후문이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당무 복귀한 소감은감개무량하다.책임이 무겁다. ▒당내 역할은. 당의 화합과 단결,金대통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당의 화합을 저해하는 요소는. 국민회의에는 국민신당출신 등 외부사람도 많다.이들이 소외감이나 섭섭함이 없이 똘똘 뭉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李康來전청와대정무수석의 구로을 공천 낙마와 관련,權고문이 흔들었다는설이 있는데. 잘못된 얘기다.李전수석이 후보로 내정됐을 때부터 불러다가 도와 주려고 노력했다.특히 구로을 종교계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노력했다.李전수석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상도동에 갈 계획은. 가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辛相佑국회부의장도 만났고 그런 역할을 하고싶었다.그러나 현재로선 분위기가 아니다. ▒5월 전당대회에서 李壽成평통부의장을 밀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李부의장은 나를 선배로,나는 李부의장을 후배로 대하고 있다.집사람들끼리는 동기동창이다.인간적으로 친하고 가깝게 지내는 것은 사실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 터키 검찰, 오잘란 사형 구형

    ┑이스탄불 DPA연합┑ 터키 검찰은 23일 쿠르드 노동자당(PKK) 지도자 압둘라 오잘란에 대해 반역혐의로 사형을 구형했다고 터키 TV 방송이 보도했다. 지난 16일 체포된 이후 임랄리 섬의 특수보안 감옥에 투옥돼 조사를 받아온 오잘란은 이날 처음으로 교도소에 마련된 법정에 출두해 신문을 받은 뒤반역혐의로 정식 기소됐다. 이날 공판은 구속자가 체포된 지 1주일 이내에 심리를 열어야 한다는 터키법 소송절차에 따른 것으로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오잘란의 변호인들은 참석이 배제됐다. 이에 앞서 오잘란에 대한 고문과 불공정한 재판 가능성을 우려하는 유럽연합(EU)과 인권단체 등 국제사회에 대해 뷜렌트 에제비트 터키 총리는 그가공정한 대우를 받을 것이므로 외부에서는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 北,석방 장기수 송환 요구

    정부는 북한이 23일 미전향장기수의 북송을 요구해 옴에 따라 이를 당국간또는 적십자사간 남북대화의 계기로 삼기 위한 다각적인 대응책을 마련할 방침이다. 정부는 특히 북측 요구와 관련,유관부처 협의를 거쳐 우리측 납북자 및 이산가족 문제 및 대북 지원문제를 함께 다루기 위한 적십자 회담 등을 신중히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청와대,통일부 등을 비롯한 유관부처 협의를 갖고 빠르면 24일 중정부입장을 결정할 예정이다. 북한 적십자회는 23일 오전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중앙위원회 장재언위원장 명의의 편지를 鄭元植 대한적십자사총재 앞으로 보내왔다. 북한은 편지에서 “지난 1월 30일 귀측 법무부는 3·1절 특별사면시에 41년째 감옥살이를 해온 우용각을 포함하여 29년 이상된 비(非)전향장기수 17명을 모두 내놓을 것이라고 했다”며“귀측이 비전향장기수들을 모두 무죄석방함과 동시에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낸다면 얼어붙은 북남관계를 풀고 폭넓은 대화와 접촉의 문을 열어나가는데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具本永 kby7@
  • [사설]특별사면의 특별한 의미

    정부는 새 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특별사면을 단행키로 하고 사면·복권대상자 8,81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이번 특사로 전국 교도소에서 모두 1,508명이 형집행정지·가석방 등으로 25일 풀려나게 된다.이번 특별사면·복권은 온 국민의 참여 속에 경제회생과 국민대화합을 다짐하고 대북(對北) 자신감을 대내외에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본의 아니게 범죄자가 된 중소기업인 1,840명이 형선고 실효 및 복권조치로 경제활동의 제약에서 풀려나고 벌금형을 받고도 실직 등으로 벌금을 완납하지 못한 2,600여명이 미납분을 면제받게 된다.이들은 적어도 신체적 자유를 회복한 가운데 개인적 경제활동을 재개하면서 국가경제회생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본인들은 물론 가족들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정부는 인도주의와 국민대화합의 차원에서 미전향 장기수들과 공안·노동관련 사범에 대해서도 대규모 은전을 베풀었다.이로써 96년 연세대 한청련사건 관련자 17명,노동운동가 24명이 석방됐다.또한 黃晳暎 徐敬元 林秀卿씨 등 밀입북 관련자와 박노해 白泰雄씨 등 사노맹사건 관련자들이 잔형면제와 함께 복권됐다.이들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이로써 우리 사회의 자산이기도 한 이들은 국가를 위해 나름대로 봉사할 수있게 됐다.이같은 사실은 우리 사회내부에 있을 수도 있는 이념적 혼란을 정부가 능히 수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읽혀진다.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26년에서 4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미전향 장기수 17명을 ‘준법서약서’를 받지 않고 석방한 사실이다.정부는 이들 미전향 장기수들이 준법서약서를 거부하는 것은 북쪽에 남아있는 가족들의안위를 우려한 것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들을 석방한다고 밝혔다.이념과 관련해서 세계 최장기수를 갖고 있다는 불명예를 씻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스런 일이다.그동안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준법서약서를 두고 ‘사상전향서’의 변형이라고 비판해왔던 게 사실이다.정부가 국내 우익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같은 결단을 내린 것은대북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북 포용정책을 굳건히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로 평가된다.정부는 석방된 미전향 장기수들을 북한에 억류중인 국군포로나 납북자들과 교환하는 방안을 내비쳤다.이 문제와 관련,93년 이인모 노인을 일방적으로 북송했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참고가 됐으면 한다. 사면·복권을 받은 사람들은 이번 특별사면의 큰 뜻에 걸맞게 경제회복과국민화합에 적극 동참하기 바란다.
  • [외언내언] 丹齋 63주기

    丹齋 申采浩선생 63주기 추도식이 일요일인 21일 서울 종로 선학원에서 유족과 독립운동가,단재 연구가 등 50여명이 모여 조촐하게 거행되었다.선학원은 한때 萬海 韓龍雲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단재와는 연이 닿는 장소이기에이날 추도 모임은 더욱 새로운 의미를 주었다. 단재 선생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8년을 복역하다가 56세인 1936년 뇌일혈로 눈을 감았다.8년째 옥고를 치르다 건강이 악화되자 악독한 일제도 적당한 보호자만 있으면 병보석해주겠다고 했으나 친일파의 신세를 지기싫다며 단연 이 제의를 거절했다.청사에 빛나는 민족적 절개요,의지라 하겠다. 일화 중 세수하는 모습은 일품이다. 그가 추운 겨울에도 세수를 할 때에는꼿꼿이 앉아서 손으로 물을 낯에 바르기 때문에 소매로 물이 흘러들어가 저고리 소매를 적시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한다.까닭을 물으면“동서남북 왜놈 천지인데 어느 쪽으로 머리를 숙이겠느냐”란 대답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단재는 생계비를 위해 ‘중화보’(中華報)에 쓰던 논설을 신문사에서 조사에 불과한‘의(矣)’자 한자를 고쳤다고해서 연재를 거부하여 사장이 찾아와 사과했지만 끝내 뜻을 바꾸지 않았다. 글쓰기에 이처럼 철저했던 분이기에‘조선상고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등 민족사학의 금자탑과 같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단재는 1908년‘대한매일’의 전신‘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재직하면서‘일본의 3대 충노(忠奴)’란 논설에서 宋秉畯 趙重應 申箕善 등 당대의 세도가 3인을 일본의 충노라고 정면에서 비판했다.그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추도식장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李圭昌옹은 단재의 베이징 망명생활을회상하면서 목이 메었다.삼순구식(三旬九食)의 기한에도 굽히지 않고 독립을 위해 애쓰던 단재를 기억하는 노(老)애국지사의 오열에서 선생의 기개를 거듭 살피게 된다. 단재는 베이징 망명 시절‘텬고(天鼓)’란 한문잡지를 발간했다.어렵사리 1·2권을 입수하여 틈틈이 번역하면서 그의 역사관과 애국정신 앞에 가슴 설렌다.6권까지 발행된 이 잡지는 현재 중국 베이징대학도서관에 보관돼 있다.식민사관으로 오염된 우리 역사가 최근 단재사학이 중심이 되는 민족사관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추도식장에서 누군가 일제시대 3인의 ‘고집쟁이’로 단재와 한용운,心山金昌淑선생을 들면서 그들이 있었기에 식민지시대 백성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김삼웅 주필
  • 日동북지방 미야기현-雪上車타고 즐기는 설원의 눈꽃놀이

    ┑미야기현 任泰淳특파원┑일본 미야기(宮城)현이 한국인 관광객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다.일본 동북지방의 중심인 미야기현은 현청이 있는 센다이시 주변에 스키장과 온천을 끼고 있는 종합휴양지.안중근 의사의 사당을 모신 절도 있어 한국과 인연이 깊은 것도 친숙함을 더해준다.▒명승지 미야기현에는 20여곳의 스키장과 43개의 골프장,63곳의 온천이 있다.아키우(秋保)온천은 아리마,도고와 함께 일본 3대온천의 하나로 꼽힌다.온천장마다 정원풍의 자연경관과 목조노천탕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일본 정식인 화식요리가 딸린 1박2식의 온천 상품은 1만8,000엔 정도이다. 에보시 스키장은 곤돌라와 리프트를 갈아타면 정상에서 최하단까지의 슬로프길이가 4㎞에 이른다.스미카와 스키장에는 얼음나무 꽃인 수빙(樹氷)을 감상할 수 있다.설상차(雪上車)를 타고 가면서 수빙을 감상하고 스키를 타고내려오는 것이 묘미이다.센다이시 인근의 시오가마시에는 마쓰시마(松島)해안이 볼거리.일본 3대 절경의 하나로 유람선을 타고 잔잔한 바다위에 떠있는 260여개의섬들을 완상할 수 있다.▒한국과의 인연 와카야나기초(若柳町)의 다이린지(大林寺)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와 간수 치바 도시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치바도시치는 안의사가 여순감옥에 투옥됐을 때 간수였던 사람.안의사의 인격에감복,일본에서 안의사의 영정을 받들었다.안의사로 부터 받은 ‘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의사 탄생 100주년인 지난 79년 한국으로 보내졌고 이 곳에는기념비만 남아 있다.안의사가 태어난 평양,투옥됐던 여순감옥,영정이 모셔진 와카야나기초가 모두 같은 위도상에 위치해 묘한 느낌을 준다.▒월드컵 준비상황 센다이시는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 개최도시의 한 곳.기본 인프라가 상당 부분 구축돼 있기 때문인지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한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5만명 수용규모의 미야기경기장은 70% 정도 공정이 진행된 상태로 내년 3월 완공에 지장이 없다고 한다.월드컵 특수에 따른 호텔신축도 없다.숙박시설은 센다이시에 호텔,여관 등을 포함해 8,000여실이나 된다.오하타 타미오(大畑民夫) 월드컵 준비실장은 외래 관광객 수용에 조금 부족하지만 모리오카,후쿠시마 등 인근 시의 시설을 활용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경기일정,입장권 외국인 판매비율 등 세부적인 문제가 확정돼야 본격적인 관광객 유치책이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stslim@
  • 굄돌-구문회 경기대 호텔경영학과 교수

    지금 국민의 많은 관심은 대전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야기된 법조계 비리사건과 IMF 경제 난국의 원인 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에 쏠려 있다. 이 두사건의 내용 중에 공통적으로 사회문제화 되는 것이 있다.부패한 국가 공직자들 사이의 뇌물성으로 오가거나 일반인들이 비리 공무원들에게 주는‘떡값’이라는 검은 돈 거래다.떡값 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지난 수십년동안 사회의 각종 부정·부패나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떡값 시비는 항상 문제가 됐다.그리고 부패한 공직자들 사이에 오가는 떡값의 규모가 수백만원에서 수억원까지 이른다고 한다. 떡은 본래 우리 고유의 전통 음식이다.한국사람에게 떡이 주는 의미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요즘이야 세상이 좋아지고 모든 음식이 풍요로워져 시도 때도 없이 떡을 먹고 살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떡은 특별한 날이나 먹는 별식 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해먹는 떡은 돌·환갑등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먹는생일떡,경사스런 잔칫날 먹는 잔칫떡,조상님께 제사 지낼 때 먹는 제사떡,추석이나 설날 먹는 명절떡,그리고 이사나 개업을 할 때 먹는 고사떡 등이다.떡을 해먹는 의미에는 축하와 감사 그리고 기원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성스러운 우리 떡의 의미가 변질되어 세상의 온갖부정과 비리 현장에서 오가는 부정한 돈을 미화시키는데 이용당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드디어 떡값 철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이른바 ‘떡값’을 받은 것 때문에 평생 쌓아온 명예를 잃어버리고직장에서 쫓겨나 감옥에까지 가거나 패가 망신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그리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한 떡값 관행이 이 나라와 이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만들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새로 맞이하는 기묘년 설은 이땅에서 부정한 떡값이 사라지는 설날이 되어야 하겠다.
  • ■상도동-측근 반응

    金泳三전대통령은 4일 鄭泰守전한보그룹총회장의 대선자금 수수 발언과 관련,“전혀 사실무근”이라고 강력 부인했다. 金전대통령은 이날 오전 鄭씨의 증언 직후 상도동 자택을 찾은 한나라당 朴鍾雄의원에게서 보고를 받고 “하얏트호텔에서 鄭씨를 만난 사실이 없다”고 일축했다고 朴의원이 전했다.金전대통령은 鄭씨의 증언내용을 朴의원에게서 처음 전해듣고 몹시 격노한것으로 알려졌다. 朴의원은 상도동을 방문한 뒤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鄭씨의 진술내용이나 검찰조사 내용과 전혀 상반된다”며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사견(私見)을 밝혔다.그는 “그동안 청문회에서 여당 의원들이 600억원 제공설,800억원 제공설 등을 제기했지만 사실무근이었다”며 “이번 증언도 허무맹랑한 설(說)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朴의원은 특히 “鄭씨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 심신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 같고 그동안 여권과의 물밑거래설이 꾸준히 나돌았다”며 “여권의 협박과 회유에 의한 거짓진술로서 정치탄압차원에서 감옥에 있는 사람까지 악용하려는 비열한 작태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고 흥분했다. 朴의원은 金전대통령의 청문회 출석이나 증언 가능성에는 “정치보복적 청문회에는 일체 응할 수 없다는 기본방침은 확고하고 변함이 없다”고 분명히 했다. 한나라당 金命潤고문도 “92년 대선 직전 金고문 집에서 50억원을 전달했다”는 鄭씨의 증언을 전해듣고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며 “金전대통령이내 집을 방문한 적도 없으며 돈을 주고 받은 일은 더욱 더 없다”고 해명했다.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낸 한나라당 金榮龜부총재도 “전혀 알지 못하며 보고받은 바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대한광장]동포애로 희망을/조비오 신부.광주가톨릭대 사회교육원장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누리고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 행복과 평화가 깨뜨려지고 불행과 고통속에 인생을 살아 가기도 한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힘있는 자들에게 억눌려 지내고 정치적,경제적 사건으 로 희생되고 상처입고 한맺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포로로 끌려가거나 평생을 감옥살이로 희망과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 그 누구도 행복하게 살 권리를 빼앗거나 자유를 짓밟아서는 안된다.자기 생 계를 위하여 함부로 선량한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빼앗고 남의 행복과 생명 마저 앗아가 버리는 참담한 사건이 세상을 어둡게 한다. 도산과 실직으로 행복한 가정이 깨지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인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국정을 잘못한 사람의 책임이 크다.기업인과 금융인의 책임이 크다.지식인과 언론인의 책임 또한 크다. 그 책임 추궁과 공과는 정의의 법으로 가려져야 한다.그래야 정의가 서고 역 사적 매듭이 지어질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 흥정이나 세력다툼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의 토대위에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사실 그대로가 밝혀져야 한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전가하는 것은 비굴한 짓이다.국가 부도위기로 인한 피 해자와 실직자와 국민을 위로해주고 힘을 북돋워 주며 희망과 신뢰감을 회복 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교회 자선단체와 사회복지 기관에서는 굶주린 자들이 한끼라도 해결할 수있는 사랑의 급식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실직자와 노숙자에게 근본적인 생활대책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우선은 허기 진 배를 채워주기 위해 따뜻한 음식을 제공한다는 것은 사랑과 인정과 자선 의 마음이 없이는 할수 없는 일이다.다행히도 우리국민들은 인정이 많아 자 신도 부족과 결핍 속에서 생활하지만 자기의 한끼를 줄여 불우한 이들과 나 누려는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훈훈하고 아름다운 동포애의 발로인가. 지난해말 ‘1998년,지금 북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라는 KBS 일요스 페셜에서 보여준 부모없는 꽃제비,북한아이들의 처절한 양상을 본 시청자들 은 동포의 연민으로 모두가 마음이 서글프고 분노에 가까운 아픔을 느꼈으리 라 생각된다. 사상과 정치적인 이념과 체제를 떠나 민족의 반쪽 한 세대가 파탄에 이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 은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길거리와 시궁창 땅바닥에 굶주림과 죽음으로 몰고도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북한 위정자들은 이 러한 현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엄동설한에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의 아이들과 굶주리는 남한의 노숙자들.동 포애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고 한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우리가 함께 살아 갈 길이다. 한 끼의 절약이 굶주린 동포를 살린다.참담한 처지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동 포에게 한 끼의 선양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빛처럼,굶주리는 이들에게 희망 의 빛이 되고 위로와 힘과 삶의 의욕을 주는 큰 사랑이 된다.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도 있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자선행위는 최고의 인간다운 자기표현이요,하느님의 명령이다.자선은 상대방을 구원하고 자신을 구원하며 동포를 구원한다.‘네 곳간을 적선으로 채워라.그러면 네가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리 라’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연출가 임진택씨

    삶이 뜻하지 않은 쪽으로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갈 때 ‘팔자’란 단어를 떠올린다.70년대 이후 줄곧 우리 놀이판을 지켜온 광대 임진택의 세상살이도이 ‘운명’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집안의 기대 속에 경기 중·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를 들어갔을 때만해도그저 수업시간에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들거나 오락시간을 주도하던 괴짜 모범생에 불과했다.어디에서도 부당한 정치권력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살이를 하거나 불법·불순(?)공연을 주도할 싹은 보이지 않았다. “인생항로를 바꾼 발단은 낭만과 저항이 함께 녹아있던 문리대 정신이었고 불씨를 지핀 건 유신정권때 반항의 요람이던 연극반이었죠”. 연극반 시절 ‘오적’의 김지하와 ‘빠리의 택시운전사’홍상화 등과 만나면서 임진택의 세계관은 현실로 내려온다.점화된 정치의식은 당국의 감시와싸우며 연극운동으로 이어진다.그러나 합법적인 장에선 대부분 불발되었다.공연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제일교회(박형규·권호경목사가 주도)나 이화여대 큰 마당에서 현실을 풍자했다. “살벌한 분위기였죠.예를 들어 이근삼의 ‘대왕이 죽었다’라는 공연도 내용과는 상관없이 제목이 이상하다며 금지할 정도였으니까요”. 당국과 술래잡기 하듯 벌이던 연극은 마당극의 단초를 발견하면서 더 넓은판으로 도약한다.‘교내공연 X’판정을 받은 김지하의 두 단막극 ‘구리 이순신’‘나폴레옹 꼬냑’을 71년 교련반대시위 도중 밤샘농성장(강의실)에서 시험공연한 것.무대도 없고 설비도 없는 공간에서 관중과 호흡하고 교감하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연습 수준의 공연이었지만 일방적으로 감동을 주는 게 아니라 관객과 주고받으며 상승하는 역동성을 발견했죠.마당극의 단초를 보았습니다”. 얼핏 보인 가능성은 70년대 중반 활기를 띤 탈춤과 접목되면서 맘껏 꽃핀다.옛날 것이란 이유로 당국에서도 권장한 탈춤에서 임진택은 역설적으로 열린 공간과 기동성이란 장점을 보았던 것. “연극의 내용과 탈춤의 형식을 결합한 거죠.날카로운 주제를 무대·대사에 의존하는 연극 형식보다는 관중과 어우러지며 신명을 우려내는 마당판의 역동성이 더 진보적으로 다가왔죠”. 물을 만난 광대는 73년 원주에서 김지하가 추진하던 ‘농촌협업운동’홍보를 위해 탈춤과 판소리가 섞인 ‘진오귀’순회공연을 계획한다.운동의 무산으로 공연은 빛을 보지 못했으나 제일교회에서 ‘청산별곡(哭)’이란 제목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어 탈춤의 재창조에 나선다.74년 소리굿 ‘아구’를 국립극장 소극장에올렸다.‘이종구 신곡 발표회’라는 합법적 이름을 빌렸다.긴급조치1호 위반으로 도피중이던 김지하가 연습장에 몰래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종구 이애주 김민기 김영동 채희완 김석만이 참가했다. “4월 긴급조치 2호 직전의 살벌한 상황에서 합법공간을 빌려 터트린 쾌거였습니다.공연이 시작된 뒤 지하형은 조명실에서 몰래 구경했죠”. 임진택은 가부키 분장으로 ‘마라데쓰’란 노래를 불러 화제를 일으켰다.이 곡은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대학가 탈춤공연의 단골노래로 자리잡았다. 숨가쁜 ‘금지 인생’에도 휴식기간이 있었다.긴급조치로 인한 감옥살이뒤홀어머니를 모신 ‘무능한 가장’은 교수추천으로 대한항공에 들어간 것.반골의 몸짓은 멈추지 않고 ‘유신헌법 찬반투표’에 대한 시민 불복종운동의한 방법으로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공연을 준비했다.공연 3일전 전원이 연행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이 일로 당국의 눈총을 의식한 회사와 마찰을 빚고 6개월만에 사표를 던진다. 이어진 TBC의 PD생활에서도 한직으로 내몰리자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보성소리’ 승계자 정권진선생을 사사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세번째 전환점인 판소리 시대를 열면서 ‘금지’행로는 되살아난다.85년 올린 ‘똥바다’는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는 반대했지만 대학가에선 불티났다. “저지선을 뚫고 두루마기 입고 철조망을 넘어가 공연하면 1,000∼2,000명이 몰렸죠.민중성이란 알맹이를 대중화하는 길을 보았죠.소수의 강경노선 목소리만 크고 다수의 민주운동진영이 소진상태에 있던 터라 대중화가 시급했죠.예술적 흡인력으로 대중성이란 힘을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직생활에서 막혔던 ‘끼’를 본인의 말 그대로 ‘포효’하기 시작한 것이다.판소리의 자진모리 장단이 퍼붓는 통쾌함에 한국의 부패세력을 비꼬는 사설은 5공화국의 질식할듯한 시대상황을 배설해준 활로였다.빨라진 걸음은 90년 ‘5월광주’를 낳는다.광주민주화 항쟁 10주년 기념으로 항쟁의 상징인윤상원에 대한 기념비적 소리를 남기고 싶었다. “상원이완 이전에 두번 만난 적이 있어요.황석영 형의 제의로 광주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상원이가 독학한 저의 ‘소리내력’을 외워서 부르더라구요”.월계동 아파트에 칩거하면서 윤상원에 대한 기억을 보듬으며 연습에 몰두하던 시절을 “상원이가 나오는 마지막 날 밤 얘기를 푸는데 눈물이 줄줄 납디다”라고 회상한다.사회와 예술을 아우르는 행보는 93년 절창 ‘오적’으로이어진다.정권진선생을 찾아가 두루마리에 적힌 담시 ‘오적’을 보여주며‘선생님 이것을 소리로 한번 담고 싶습니다’라고 배움을 청했던 소망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전국민족극협의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97년,98년 ‘과천세계마당극큰잔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임진택의 문화실천이 갖는 미덕은 과거의 공간에서 박제화되지 않고 현재형으로 살아있다는 데 있다.‘금지’와 친화력이 생긴걸까,최근엔 마당극잔치를 주관하려는 과천시의 ‘얼굴을 달리한 금지문화’와 싸우느라 바쁘다.李鍾壽 vielee@
  • 99‘경제 화약고’진단-동남아

    외환위기 수렁에서 구조조정 등 경제개혁을 통해 가까스러운 회복세를 보이던 아시아는 새해초부터 브라질위기로 다시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극심한 혼란상을 보이던 인도네시아는 하비비 대통령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한때 달러당 1만6,000대를 기록하던 루피아화가 최근 7,000대로 급등,빠른 회복세를 보였다.그런데 브라질 위기로 8,950루피아대를 오르내리면서 위기가 재현될 조짐이다.아시아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태국도 브라질 레알화의 평가절하로 수출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져 회복세에 제동이 걸렸다.특히 지난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구조조정 효과가 나타나는 상황에서대형 악재의 출현은 회복세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최악의 98년을 보낸뒤 외환 규제 등을 통해 소생 기미를 보이던 말레이시아는 경제상황이 반전했으나 최근의 브라질 쇼크로 경제상황이 불투명해지고 있다.특히개혁을 요구하는 안와르 전 총리를 감옥에 집어넣으면서 정국이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고 있던 차라 엎친데 덮친격이다. 아시아 경제의 맹주격인 일본도아직 별다른 요동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도쿄 금융시장의 엔화와 닛케이지수는 브라질 쇼크 첫날만 약세를 보였을 뿐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도쿄 증시 관계자도 “증시에 이렇다할 충격을 가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불안의두려움은 아직 짙게 깔려 있다.金奎煥 khkim@
  • 친일의 군상(22회)-독립선언서 기초 崔南善

    육당(六堂) 崔南善을 ‘역사의 저울’에 달면 공(功)으로 기울까,과(過)로기울까? 공과가 교차되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어렵다.견해나 입장에따라 한 쪽으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육당 최남선(1890∼1957)이 바로 그런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육당은 3·1의거 당시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문필가·출판인 등으로 알려진 인물이다.70이 안되는 생애를 살다간 그지만 그가 문화사 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될 수 없다. 육당은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사인 신문관(新文館)을 설립,계몽도서를출판하였다.또 이듬해에는 종합잡지 ‘소년(少年)’을 창간,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게재한 사실은 우리 문화사 첫 페이지에기록돼 있다. 육당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족적 면모는 그가 3·1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실이다.문체를 두고 지나치게 나약하다거나 한문투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지만 그는 이 일로 31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그러나 그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이받은 건국훈장을 받지 못했다.이유는 간단하다.그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친일파 중에는 초창기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일제말기에 가서 친일로 변절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그러나 육당은 사정이 다르다.1921년 10월 가출옥으로 석방된 그는 출옥 직후부터 일제와 ‘교감’을 하고 지냈다. 출옥 이듬해 그는 16년동안 운영해온 신문관을 그만두고 동명사(東明社)를설립,주간지 ‘동명(東明)’을 창간하였는데 창간과정에서부터 일본측 인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구석이 역력하다.출옥후 육당이 일본인 거물인사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잡지는 ‘동명(東明)’이라는 이름으로 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중략).잡지건은 진력한 성과가 가까운 시일안에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금후의처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하여 선생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이 편지는 본지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입수,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임) 특히 이 편지의 첫 부분과 끝 부분을 보면 정말 이 편지를 육당이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다.“지난날 (선생께서) 경성(京城,서울)을 출발하실 때부친과 함께 역까지 달려갔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정각에 늦어 실례가 많았습니다.”우선 보고(報告)를 드리면서 이것으로 붓을 놓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사이토(齋藤實)총독의 정치참모이자 총독부 일어판기관지 ‘경성일보(京城日報)’의 사장을 지낸 아베(阿部充家)였다.‘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애국지사 육당 최남선의 면모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3·1의거가 발생한지 불과 2년 9개월만의 일이다. 육당이 친일대열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것은 1928년 10월 총독부의 역사왜곡기관인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직을 수락하면서부터다.조선사편수회는1911년 총독부가 ‘구습(舊習)제도의 조사와 조선사 편찬계획’을 목표로 발족한 단체.본래 목적은 조선을 영구히 강점하기 위해 조선인을 일본인으로개조한다는 ‘동화주의(同化主義)’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편찬하려는 조선사는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사 왜곡이 주목적이었다.육당은 편수위원으로 위원회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실무자로 직접편찬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28년∼36년).이밖에도 그는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가지 위원직을 수락,일제에 협조했는데 이 공로로 그는 중추원 참의(주임관 대우·1936.6∼38.3)를 지냈다. 육당의 대표적인 친일행적중의 하나는 만주에서 있었다.중추원 참의를 물러난 직후인 1938년 4월 그는 만주행에 올랐다.처음 맡은 직책은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자리였다.원래 이 자리는 秦學文이 있던자리였는데 진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1년뒤그는 다시 만주국의 엘리트 양성기관인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였다.대우는 칙임(勅任)교수에 월급은 400∼500원으로 최상급이었다.(‘삼천리’1938년 5월호). 사학자로 육당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위당(爲堂) 鄭寅普선생이 그의 집 대문앞에 술을 부어놓고 “이제 우리 육당이 죽고야 말았다”며 대성통곡을 한것은 그가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것을 두고 한 것이었다.육당은 이 대학예과에서 만몽(滿蒙)문화사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건국대학 교수 재직중 그는 1940년 10월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다.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선무(宣撫)공작을 지원한 친일단체로 독립군과 항일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이 주임무였다.이 단체의 총무 朴錫胤은 육당과 처남-매부간으로 나중에만주국 외교부 조사처장,‘매일신보’ 부사장 등을 지냈다. 육당의 친일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됐다.4년 7개월간의 만주생활을 청산하고 1942년 11월 귀국한 그는 칩거하면서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그러던중 이듬해말 총독부의 부탁으로 李光洙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훗날 육당은 자신의 학병권유가 마치 조국의 광복을 대비하여 ‘민족 기간요원 양성’을 위한 행위였던 것처럼 변명하고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속으로는 일제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당시 그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면서 대일본제국의성전(聖戰)을 위해 조선청년들이 전쟁터로 나가 죽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그는 학병권유를 한 반면 그의 3남은 그와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경도(京都)상고 출신으로 동경(東京)제대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그의 3남 漢儉(1922∼?)은 학병출진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월북하여 문학대학·김일성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던 그는 부친의 친일행적 때문에 적잖은 곤욕을 치뤘다고 한다(북한 고위직 출신 신모씨 증언). 49년 1월 초부터 반민족행위자 검거에 나선 반민특위는 2월 들어 문화계 인사를 손대기 시작했다.2월 7일 마침내 육당의 우이동 집에 특위 조사관들이들이닥쳤다.자택에서 ‘조선역사사전’의 원고를 집필중이던 그는 “시대적현실을 역행할 수 없다”며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같은 날 세검정에서는 춘원 李光洙가 체포됐다.일제하 문화계의 양대 거물이었던 두 사람이 ‘역사법정’에 끌려나온 것이다. 마포형무소 수감시절 육당은 ‘자열서(自列書)’라는 일종의 ‘반성문’을쓰기도 했다.“내가 변절한 대목,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사정이 지조냐학식이냐의 양자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아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며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 그것이 또한 나를 사랑함에서 나온 것도 내가 잘 안다”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학문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이 선택을 그는 ‘변절’이 아닌 ‘방향전환’이라고 했다.명색이 학자를 자처한 그가 지조와 학식을 별개라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그에게 지조있는 지식인이 되어줄 것을 기대한 자체가 조선동포들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심산 金昌淑선생이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의 일이다.한번은 전옥(典獄,교도소장)이 육당이 쓴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갖고 와서는 읽고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심산은 첫 몇 장을 읽고는책을 전옥에게 던지며 이렇게 호통쳤다.“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않았는가.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그의 죄가 남는다”고.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5회)-문학평론가 金宇鍾씨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기를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이라고 했다.아무리 직관으로 아름다움에 통하는 시라 하더라도 거기서 시인이진정 무엇을 호소하려 했는지 그 개념이 빠져 있다면 그 시는 맹목의 시,동공이 빠져 있는 시,알맹이가 없는 시이다.그러므로 순수문학은 그 작법의 제1장 제1절부터가 진정한 예술정신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金宇鍾씨(70)가 1965년 일본의 교포잡지 ‘한양(漢陽)’지에 발표한 ‘순수의 자기기만’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문학은 현실문제에 어떻게대응할 것인가.60년대 순수-참여논쟁의 중심에는 늘 金씨가 있어 풍요로웠고 든든했다.그에게 순수문학은 “겉볼상만 깨끗한 매춘부의 문학이요 도금(鍍金)문학이요 페인트칠 문학”이었다.그는 “순수의 성벽을 허물고 민중의 광장으로 뛰쳐나오라”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애당초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60년대 순수문학에 대한 비판은 그를 문단의 미운 오리새끼로 만들었다. “순수비판과 참여운동은 60년대 초반에는 ‘현대문학’지를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그뒤 60년대 중후반 ‘창작과 비평’ 등이 나오면서 이 운동은 한층 확산돼 갔지요.초기단계에는 어려움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당시 문단은 순수문학의 독천장이었어요.한번 이단자가 돼 고립되면 발표지면도 얻기 어려웠지요” 金씨는 지난 57년 ‘현대문학’에 ‘은유법논고’와 ‘이상론’이 趙演鉉선생에 의해 추천되면서 등단했다.‘현대문학’은 처음부터 순수문학을 표방했다.그가 비록 ‘현대문학’을 통해 평단에 나왔지만 그 지면을 통해 순수문학 타도를 외치기는 곤란한 일이었다.‘한양’지에 글을 발표하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유신체제를 탄생시킨 朴정권은 문인탄압의 구실을 찾고 있었다.그러던중 문인 몇몇을 ‘한양’지와 연결시켜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을 만들어내게된 것이다.74년 2월 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문인 및 지식인 간첩단’을 적발,李浩哲(43·소설가) 任軒永(34·문학평론가) 金宇鍾(45·경희대교수) 鄭乙炳(40·소설가) 張秉禧씨(필명 張伯逸·41·문학평론가) 등 5명의 문인을 반공법 위반 및 간첩혐의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구속된 5명의 문인은 북한 노동당 재일공작지도원 金基深에 포섭돼 문단·언론계 등의 동태를 보고하고 반정부 활동을 선동하는 작품활동을 해왔다는 게 혐의 내용이다.한편 金基深은 49년 북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62년 민단에위장입적한 뒤 ‘한양사’란 회사를 세워 일본에 오는 문인·학자들을 포섭해왔다는 것이다.‘한양’지는 바로 金基深씨를 발행인으로 한 국문(한글)월간 종합지였다. 金宇鍾씨에 따르면 ‘한양’지는 1973년까지도 주일 한국공보관에 전시돼있었으며 국내에도 정식으로 수입·배포되던 잡지였다.정부기관이나 민단측에서도 이 잡지를 ‘불온’으로 문제삼은 적은 없었다.‘한양’은 구속된 5명의 문인들뿐 아니라 한국의 각계 인사들이 전부터 기고해오던 잡지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은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는 게 金씨의 설명이다. “‘한양’지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했습니다.남한의 사회상과 정부시책을 비판적으로 본 측면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곧 반국가단체의 위장출판물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될 수 없어요.그럼에도 당국이 무리하게 기소를 감행한것은 피고인들이 73년 11월 문인 60여명의 연명으로 된 개헌요구 성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지식인 사이에 그런 개헌운동의 확산을 막아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검찰당국은 ‘한양’지의 자금 출처가 조총련쪽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그렇게 볼만한 증거는 찾기 힘들다.이에 대해 金씨는 金基深씨가 경영하는 ‘한양원’이라는 음식점에서 나오는 수익과민단계의 협찬광고 등이 그 재원이었다고 증언한다. ‘문인간첩단사건’으로 내몰린 5명의 문인들은 결국 검찰 발표에 앞서 73년 12월 투옥됐다.金宇鍾씨의 회고.“감옥에 들어가면서 이브 몽탕이 주연한 프랑스영화 ‘생사의 고백’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주인공은 억울하게스파이 누명을 쓴채 법정에서 진술하는 연습까지 강요당하지요.그는 텔레비전에 생중계되는 공개재판에서 할 수 없이 스파이임을 자백한 뒤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제 경우 영문도 모르고 체포된 뒤 숱한 반증자료들을 제시했지만 무죄언도를 받지는 못했습니다.결국 몇개월의 형을 산 뒤 74년 6월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출옥되자 金씨는 경희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강제휴직됐다.이어 76년 해직됐다.80년 덕성여대 국문과 교수로 취임하기까지 6년동안의 세월은 소태보다쓴 것이었다.그 시절 그는 피폐한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아니 생계를 위해그림 그리는데 몰두했다.“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나가 조개나 잡겠다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외려 깨어진 뱃조각을 주워 모아더 큰 고기를 잡겠다는 오기가 솟더군요.그때 그린 그림들은 모두 분노의 시절 제 마음의 무늬들입니다” 金씨의 삶의 자취는 75년에 나온 에세이집 ‘그래도 살고픈 인생’(학진출판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한낱 수상집에 불과하건만 유신당국은 이 책을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금서목록에 올렸다.“판금조치가 된 이유를 알 수 없어요.살풍경한 감옥의 일상을 그린 글 ‘옥중인생’이 당국의 눈에 거슬렸는지…” 엄혹한 ‘겨울공화국’에서도 金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그를 부축했다.그때의 심경을 그는 글로 남겼다.“비단실을타고 봄의 정액이 땅속으로 스며든다.얼어버린 대지는 어느새 봄을 잉태하고…” 그래서 그에게 인생은 ‘그래도 살고픈’ 것인지 모른다.서슬퍼런 감옥의 한평 쪽창 어둠 속에서도 그는 밝게 타오르는 촛불이었다.
  • YS, 청문회 나올까

    金泳三전대통령은 경제청문회에 등장할까.17일 현재 金전대통령은 “감옥에 가더라도 청문회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여권이 사법대응카드로 압박해도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여권의 대응 수위도 높아가고 있다.金전대통령은 18일부터 시작되는 경제청문회에 경제정책,기아사태,한보사건,PCS 인허가 등 4개 주제에 증인으로 돼있다.이들 주제에 金전대통령이 나오지 않으면 ‘역사정리’가 어렵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여권은 金전대통령의 직접증언외에는 묘수가 없다고 본다.한때 검토한 ‘비디오증언’등 간접증언 방식,사과 혹은 석명(釋明)조건의 증언방식은 “이제는 협상대상이 아니다”라며 배수진까지 쳐 놓았다.다만 전직대통령예우차원에서 특위위원들의 질의를 생략하거나 증언시간 제한은 고려할 수있다는 입장이다. 자민련은 ‘간접 증언 청취’를 내세우고 있다.그러나 어떤 형식이든 金전대통령을 증언대에 세워야한다는데 여여간 입장은 확고한 상황이다.여권은金전대통령이 청문회에 나올 수 밖에 없는 ‘압박카드’를 준비중이다.金전대통령이 해명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폭탄’을 준비했다는 얘기다.청와대한 관계자는 “두고보라.金전대통령은 나온다”며 확신에 찬 어조다.柳敏 rm0609@
  • 대통령 일정조정과 여유

    기묘년(己卯年) 새해들어 金大中대통령의 일정이 줄었다.지난 연말 일정축소의 원인이었던 감기가 완쾌된 뒤끝이긴하지만,하루에 2∼4개가 고작이다.8∼9개에 이르렀던 지난해 ‘전성기’에 비해 출입기자들의 손이 한가롭기 그지없다.특히 외국방문때는 매일 13∼14개의 크고 작은 행사를 가져 수행기자들을 녹초로 만들곤 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면 요즘은 정말 ‘태평성대(?)’다. 金重權비서실장은 “취임 1년동안 국정파악도 이뤄졌고,일정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어 통상적인 장관들의 보고는 줄이기로 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지난 1년동안은 金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예외없이 모든 언론과 창간 및 특별인터뷰를 했지만,현재 줄이는 방안도 검토중이다.감기가 완쾌돼 다시 몸을 추스르고 있다고 하나,어찌됐건 지난해보다 줄어들 게 분명하다. 그러면 金대통령은 요즘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金대통령은 감옥과망명 생활로 여느 정치인과 달리 취미가 다양하거나 화려하지 않다.어린시절 고향인 하의도 바닷가에서 배운 수영과 꽃 가꾸기,그리고 독서,낚시 등이꼽을 수 있는 전부다.여기에 물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근교 한적한 곳에서 아귀찜,홍어회 등과 같은 ‘향토색’짙은 음식을 즐기는 게 유일한 낙이다.주말이나 공휴일이면 가끔 아늑한 곳을 찾아 청와대안에서 접하기 어려운 맛깔스런 토속음식을 맛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대부분 동적(動的)이기보다는정적(靜的)이다. 그외엔 많은 시간을 보고서와 자료를 읽는데 보낸다.독서를 할 틈조차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신문도 무려 3∼4시간 가량 읽는다고 한다.일부조간신문이 최근 가판(지방독자를 위해 제일 먼저 만드는 신문)과 시내판(경인지역 독자를 위해 당일 새벽에 만드는 신문) 사설을 바꾸는 것을 맨먼저꼬집을 정도로 정독한다. 金대통령은 ‘섬세한 정치인’이다.무슨 일이든 여러갈래의 ‘경우의 수’를 상정해 놓고 구상을 짠다.오랜 정치생활에서 큰 실수를 하지않고 지내온것도 그런 품성 때문이다. [정치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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