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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깔깔깔]

    ●아내의 바가지 한 교도소에서 대낮에 죄수가 탈옥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교도소에서는 난리가 났고 주변 지역에까지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바로 그날 저녁이 되자 탈옥수가 제발로 다시 교도소로 돌아왔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교도소 정문으로 들어와서는 다시 잡아가라고 손까지 내밀었다. 교도소 앞으로 몰려든 취재진은 탈옥수에게 다시 감옥으로 돌아온 동기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탈옥수는 하늘을 한번 쳐다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저는 아내를 보려고 어렵게 탈옥을 한 뒤 집으로 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다짜고짜 탈옥한 지 여덟 시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고 따지더군요. 그 순간 차라리 감옥이 낫겠다 싶어 다시 왔습니다.”
  • [공직이 변해야 나라도 변한다] (13)정해룡 법무부 소년1과장

    [공직이 변해야 나라도 변한다] (13)정해룡 법무부 소년1과장

    2004년 11월 광주의 어느 정보산업고등학교 강당에선 예수의 생애를 그린 록뮤지컬 ‘가스펠’이 공연되고 있었다. 배우는 얼마 전까지 ‘안산 소년원’으로 불렸던 안산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다. 무대에 오르자 자신을 에워쌌던 어두운 그림자를 씻어내기라도 하듯 혼신을 다해 극에 빠져들어갔다. 연기자와 관객이 함께된 공연은 그들에게 전문배우로 도약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단초가 되기에 충분했다. 무대 뒤편에서 공연 내내 손에 땀을 쥐고 있던 정해룡(55)법무부 보호국 소년 제1과장은 막이 내리자 그제서야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비행 청소년들의 ‘대부’ 정 과장은 1979년 7급 공채 소년보호직의 길에 들어섰다. 지난 25년간 안양소년원장, 법무부 보호국 소년제2과장과 기획서기관을 거치면서 교화제도 혁신의 기반을 닦았다. 반세기 이상 어른들의 감옥과 다름없던 소년원을 학교로 탈바꿈시킨 주역이다. 소년원생들은 1990년부터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학업에 흥미를 갖지 못했다. 일방적인 교육이 문제라고 진단한 그는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높일 방안을 생각했다. 체육, 연예 등 특기교육을 강화한 것이다. 영어와 컴퓨터과목도 개설했다.3000여명의 교육 자원봉사원도 모집, 교육의 질을 높였다. 정 과장의 노력은 2004년 소년원을 맞춤식 특성화 학교로 바꾸는 소년원법 개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현재 서울지역 5개교를 포함해 전국 16개 특성화 중·고등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그는 “소년원의 폐쇄적 체계와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교정과 재범방지에 한계가 있었다.”면서 “학교로 바뀌면서 이들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바탕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문제아’에게 특혜를 베푸는 것 아니냐.”,“예산 낭비다.”라는 지적도 있었다. 야심찬 계획이 실패할 것이란 우려도 많았다. 운동과목을 개설하자 ‘문제아들에게 싸움질마저 가르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럴수록 그는 보다 많은 아이들을 더 자주 사회로 내보냈다. 가족과 사회와 접촉하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 교정의 출발점이라 믿어서이다. 가족관계를 회복시키고자 가정관을 만들어 청소년들이 보호자들과 숙식을 함께하도록 했다. 덕분에 모든 학생들이 영어말하기 대회, 스키캠프, 문화 공연장 등 외부활동에 참여했다.2003년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집을 지어 무주택 서민에게 제공하는 해비탯 운동에는 용접 등 관련 자격을 취득한 청소년 45명이 나섰다.“아이들은 ‘밖으로 내돌려도’ 우려하는 것처럼 도망가지 않더군요.”정 과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각종 기술 교육과 창업지원제도도 강화했다. 그가 특성화 교육혁신을 지휘하면서 2818명이 취업하고 7166명이 컴퓨터 관련 전문 자격증을 획득했다. 컴퓨터 전문가가 된 청소년들이 설립한 벤처기업도 4개나 된다. 정 과장이 키운 아이들은 자신감을 얻고 사회와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6개월 이내 다시 비행을 저지르는 비율은 18.5%에서 9.9%로 1년 이내 재비행률은 33.2%에서 19.5%로 낮아졌다. 일본 NHK, 영국 BBC, 독일 ZDF 등에서도 다도예절, 악대반 등 학생 특별활동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일들로 그는 2000년 공공기관 혁신대회 3위 입상,2001년 제1회 법조봉사대상 수상이라는 영예도 안았다. 정 과장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를 짊어지고 있다.“가장 큰 장벽은 ‘전과자’란 낙인과 선입견입니다. 우리 사회가 한 순간의 실수를 ‘내 자식’의 일처럼 너그럽게 이해할 때까지 할 일이 많습니다.”그의 노력은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문화마당] 시인과 제국주의/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제국주의는 다른 나라를 정복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을 일컫는 용어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폭력을 가장 우선시한다. 이 제국주의의 폭력에 시인 윤동주가 희생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1945.2.16)한 지 올해로 60년이 된다. 시인은 옥중에서 잔혹한 생체실험을 당했고, 이 사실에 대한 기록과 함께 옥중에서 쓴 시작품을 담은 노트를 남겼는데, 일제는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노트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그토록 잔혹한 일을 저지른 일본은,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침략적 성향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몇 년 전 모 대학 문예창작학과에서 본고사 문제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 중 부랑노동자 두 명과 술집 여자 한 명이 헤어지는 끝부분을 제시하고, 이들이 삼년 뒤 다시 만나는 장면을 소설로 쓰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그런데 답안을 보니, 술집여자가 성폭행을 당해 상대방을 살해해서 감옥에 갔다든가, 부랑노동자가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든가 하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살인, 폭력, 성폭행이라는 단어가 빠진 답안은 극히 드물었다. 아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는 데 아버지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다. 일반적으로, 아버지가 폭력적이면 아이도 그렇게 되고, 아버지가 순결한 심성의 소유자이면 아이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자라나는 아이가 어떤 문화적 성향을 띠는가는 아버지가 만들어가고 즐기는 문화의 색깔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 세대의 문화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 학생들의 답안은 아버지가 만든 문화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학생들의 답안처럼 폭력, 살인, 성폭행, 불륜이라는 단어로부터 자유로운 아버지의 문화가 과연 얼마나 될까. 더욱 심각한 것은 국가와 민족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구촌 시대가 도래하면서, 일본의 대중문화가 아무런 제재 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문화를 무조건 배척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본문화 중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을 창조적으로 수용해야 함은 물론이다. 문제는 잔인하면서도 엽기적인 폭력을 앞세운 일본의 사무라이식 문화가 우리 문화를 강력하게 침탈해 들어 오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런 제국주의적 일본 문화의 마수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할 아버지들이 앞 다투어 그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입해서 돈 벌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심지어 어떤 아버지는 일본이야말로 우리의 구세주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퇴폐적이고 선정적이면서 폭력적인 일본문화를 숭배하고 선전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가 무엇을 배울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자라나는 세대가 침략적인 제국주의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시인과 같은 이가 될 것인지는 순전히 오늘 우리 시대의 아버지가 어떤 문화를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폭력적인 일본문화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윤동주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옥중 노트를 돌려 받는 일은 이 땅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숙명이 아닐 수 없다. 더 이상 서정시인이 제국주의적 폭력에 희생되어 구천을 떠도는 일이 없도록, 현 단계 우리 문화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뼈아픈 반성이 요청된다. 문흥술 서울여대 교수·문학평론가
  • ‘이근안 가석방 탄원서’ 金복지 인터뷰

    ‘이근안 가석방 탄원서’ 金복지 인터뷰

    “이근안씨의 가석방을 위해 도와주겠다.” 김근태(58) 보건복지부 장관은 7일 과천 복지부 장관실에서 만난 기자에게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는 지난달 7일 여주교도소에 수감된 이근안씨를 만난 사실이 보도된 11일 이후 기자들과 이씨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피했던 태도와는 사뭇 달라졌다. 김 장관은 “85년 가을 남영동 대공분실 5동 15호실에서 각각 10차례의 물고문·전기고문으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돼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면서 항복한다고, 차라리 곱게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했던 ‘38살의 김근태’를 이제 과거의 시간 속으로 떠나보낼 때가 됐다.”고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근안에 대한 용서’는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도 참모들과 기자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압박받았지만,“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우물쭈물 피해오던 일이었다. 지난해 9월 김 장관의 팬클럽이 고문당하던 시절의 기록인 책 ‘남영동’을 300부 한정판으로 찍어 나눠가졌을 때도 책 내용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용서는 힘있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실은 나는 그를 계속 무서워했고 겁을 먹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3선의 국회의원이자 보건복지부 장관, 여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불리는 그이지만 ‘이근안’은 그에게 극복되지 않는 ‘외눈박이 거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씨를 만났을 때 김 장관의 첫 자각은 “눈높이가 나와 엇비슷한 것이 키도 비슷해. 맘먹고 싸우면 대거리할 만하겠군.”이었단다. 김 장관이 이씨를 만난 것은 설 이틀 전. 여주 교도소에 수감된 이상락 전 의원과 후배인 전 도봉구청장을 만나러 간 길에 이씨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절을 앞두고 감옥살이가 얼마나 어려운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나서 이씨에게 “용서한다.”고 폼나게 말하지 못했다. 간신히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왔다.”고 찜찜한 마음을 표현했다. 30분의 면담 내내 이씨는 ‘눈 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했고,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만 김 장관에겐 탐탁지가 않았다. 김 장관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 과연 참회가 되는 것일까. 고문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자수한 저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혹시 가석방을 받고 싶어서 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식으로 의구심이 솟아났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속좁게도 “‘가석방’을 언급하지 않은 채 “도울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만 하고 일어섰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이씨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고통받던 김 장관은 2월21일 ‘해방’을 맞았다. 한 목사가 그에게 “훌륭하다.”고 대뜸 칭찬을 한 것이다. 김 장관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목사에게 복잡한 심사를 다 털어놓았다. 조용히 고백을 들은 그 목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줬다. 사회적으로 꽤 유명한 어떤 목사가 수십년 전에 ‘교회 지을 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해 집을 저당잡혀 자금을 마련해줬는데 아직도 한마디 말이 없어 용서가 잘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대화 이후 김 장관은 ‘임금님은 당나귀 귀’라고 외친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고 한다. 그날 이후 김 장관은 “이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죄를 하느냐보다, 그가 현재 ‘사죄’하고 있는 현실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면서 “이씨의 가석방에 내 탄원서가 필요하다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이어 김 장관은 “‘김근태의 용서’가 사회적으로 크게 취급된 것은 참여정부가 과거사 청산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뒤 “인권이 유린된 과거사에 대한 국민적 용서가 가능하려면, 이근안씨가 나에게 사죄했듯이, 당시의 가해자들이 국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줬던 것을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일 과거사에 대해선 “일본도 가해자로서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영화속 수능잡기] 모던타임스

    [영화속 수능잡기] 모던타임스

    이것저것 시키고 간섭하니 아이는 울화가 치민다. 아이는 엄마에게 대든다. 나 간섭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도 이에 질세라 대꾸한다. 그래, 어디 네가 알아서 혼자 잘 해봐. 아이는 무엇을 할지 막연하다. 시간은 남아 돌아가는데 무엇을 해야 하나. 남들은 학원도 다니고 태권도 도장에도 다니는데 나는 이렇게 놀아도 되나. 자꾸 불안해진다. 자유가 없었을 때는 불안하지 않았는데 자유가 생기니 불안한 것이다. 아이는 엄마에게 다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다시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말 잘 들을 게요.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물론 구속이 나쁘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유는 엄청난 불안을 야기한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에게 자유는 곧 불안이다.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스스로의 현명한 판단력이다. 아무리 몸집이 크고 힘과 담력이 세더라도 판단의 힘이 없으면 누구나 불안한 것이다. 영화 ‘모던타임스’, 컨베이어 벨트에서 단순 작업을 하던 찰리는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한다. 병원을 빠져나와 얼떨결에 시위 주동자로 몰린 찰리는 감옥에 가지만, 탈옥수를 막는 공로로 부족할 것 없는 감옥 생활을 보낸다. 모범수로 석방된 찰리는 각박한 현실보다 감옥소 생활이 더 낫다고 생각해 일부러 사과를 훔치려 한다. 감옥은 자유가 없는 구속의 공간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동물처럼 생활하겠다고 생각하면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는 감옥만큼 편한 공간도 없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겠다, 내 스스로 먹이를 구하겠다, 내 스스로 나의 앞날을 결정하고 판단하겠다고 결의하는 순간 우리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자유가 불안이라면 인간은 자유를 반납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자 이 자유를 누구에게 반납할까. 많은 사람들은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에 자신의 자유를 반납한다. 무한한 권능을 소유한 신의 말씀에 따름으로써 신의 보호를 받고, 사후의 세계에도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은 그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준다. 어떤 이는 권력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기도 한다. 히틀러와 같은 권력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침으로써 그는 마음의 평온을 누리기도 한다.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는 스스로 자유를 행사할 수 없는 자들 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자유(自由)는 말 그대로 ‘스스로(自)’에게서 ‘말미암음(由)’이다. 나의 판단과 행동이 내 스스로에게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어떤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력에 의존함이다. 우리가 사색하고 반성하고 부단히 공부하는 것은 바로 자율적인 판단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다. 나의 자유를 어떤 권력자에게도 양보하지 않기 위함이다. 찰리 채플린 감독, 찰리 채플린, 폴레트 고다르, 헨리 버그만 출연.1936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지구촌 ‘양심수의 벗’ 피터 베넨슨 타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AI)의 창설자인 인권운동가 피터 베넨슨이 25일 사망했다.83세. 브렌던 패디 AI 대변인은 26일 베넨슨이 런던 서부 옥스퍼드의 존 래드클리프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AI측은 “평생 불의를 비전과 용기로 맞서온 베넨슨의 행동은 전세계 감옥과 고문실, 죽음의 수용소에 빛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고 애도했다. 영국의 변호사였던 베넨슨은 40세이던 1961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카페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투옥된 2명의 포르투갈 학생의 석방운동을 계기로 AI를 창설했다. 당초 1년간의 한시적인 조직으로 발족됐던 AI는 지지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전세계 180만여명의 회원과 160여국에 지부를 둔 세계 최대 인권단체로 성장했다. 이튼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그는 1950년대초 노동당과 노동변호사협회에 가입, 스페인 노동운동가들의 재판 감시인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그 뒤 10여년 동안 남아프리카, 헝가리 등에서 법률 구조활동을 폈다. 또 남아공 보안기관의 인권유린행위를 폭로했으며, 서방국가들의 공평하고도 독립적인 인권유린행위 방지 정책 확립에도 기여했다. AI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종교상의 신념이나 견해 때문에 체포, 투옥되거나 부당행위를 받고 있는 양심범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 옥중 처우개선 등을 위해 전세계적인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AI는 그동안 2만여명의 양심수를 석방시켰으며 이 공로로 1977년에 노벨평화상,1978년에 유엔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무장日軍 학교 난입… 무차별 고문…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이 당초 출병목적은 외면한 채 한인의 독립운동을 짓밟는 데 혈안이 됐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군의 정보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군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의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출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최근 입수한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정보장교 문서’를 27일 공개했다. 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한인 항일독립운동을 일제가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담고 있다. ‘일본이 시베리아의 한국인들에게 가한 야만적 가혹행위’라는 부제를 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1918년 10월부터 1919년 8월까지 에브게네프카, 하바로프스크, 니코리스크, 베리노 등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체포해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으며, 한인 학교에 무장한 채로 들어가 교과서를 불태우거나 책상 등의 집기를 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19년 3월15일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미군 병사들에게 영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한인 2명을 체포해 사슬로 묶은 뒤 감옥에 2주 동안 감금하며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또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인을 매수해 동료들을 고발케 하거나 러시아 경찰에게 금품을 대가로 조선인 탄압에 앞장서도록 하기도 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이상일 박사는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러시아나 일본의 기록에 의존하던 3·1운동 전후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경각심과 독립 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서울광장] 정권 재창출 계획 없어야 성공한다/이목희 논설위원

    [서울광장] 정권 재창출 계획 없어야 성공한다/이목희 논설위원

    노무현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는 4번째 집권자다. 전임 3명의 정치 궤적을 보면 섬뜩하리만치 유사점이 많다. 앞선 대통령이 잘못 간 길을 뻔히 보았으면서 또다시 그 길을 가곤했다. 한두번만 더 되풀이된다면 세계사에서 찾기 힘든 정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취임 초기에는 나름대로 국민적 인기를 업고 변화와 개혁을 추진한다.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후계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퇴임 이후를 보장받기 위해 후계자 교통정리, 정권 재창출에 집중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개헌을 추진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막판에는 대선자금 논란과 측근 및 친인척 비리로 인기가 떨어져 여당에서도 배척받는 존재가 되었다. 결국 당총재직을 내놓고, 이어 탈당하는 수순을 밟는다. 마지못해 중립내각을 구성, 대통령선거에서의 영향력은 어디서도 없었다. 노 대통령이 어제 취임 두돌을 맞았다. 지난 2년에 대한 비난이 만만치 않다. 비판은 경제·남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 일정을 떼어 생각한다면 어느 정권보다 희망이 있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집권 후반기에나 있음직한, 험한 양상이 이미 벌어졌다. 대선자금 수사, 측근 비리, 바닥 인기에다가 탄핵소추까지 경험했다. 당정분리를 내세워 여당 총재직도 맡지 않았다. 이전 정권에서 5년 동안 이뤄진 정치과정의 80%가 2년만에 압축적으로, 또 앞당겨 진행된 셈이다. 과거 예에 비춰 이제 남은 과정은 후계창출 계획과 실패, 당적 이탈, 중립내각이다. 이것까지 채워 전임자의 정치궤적을 그대로 따르느냐, 아니면 신세계를 개척하느냐를 선택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판단이다. 정당은 정권창출이 목표인 조직이다. 단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청와대는 다르다. 청와대가 임기 이후를 염두에 두기 시작하면 정국이 하염없이 꼬인다. 대통령은 특정 정파의 수장이라기보다는 국가 전체를 아우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과거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돌아보자. 정권이 재창출됐다고 해서 본인과 측근들이 편하게 지냈는가. 재임때의 행적이 옳으면 평가받고, 잘못이 있으면 법의 재단을 받는 것이다. 어떤 후임자도 전임자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후계구도 정리문제도 그렇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대선후보로 지원한 것은 퇴임 후를 고려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감옥까지 갔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임기중에는 후계자를 만들 듯하더니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제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검찰·국정원 등 권력기관을 자유롭게 하고, 불법 정치자금을 줄인 정도로는 한국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임기중에 정권 재창출, 후계구도에 연연하지 않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현되면 정국 양상은 완전히 바뀐다.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어려워하는 리더십이 생길 수 있다. 집권 3년차 정치행보를 열린우리당 당적을 이탈하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떻겠는가. 정권 말기에 밀려서 당을 떠나는 모양과는 180도 다르다. 파격적 정치카드를 능동적으로 던진다면 정국을 어떤 모양으로든 만들어갈 이니셔티브를 쥐게 된다. 여기에 더해 야당 성향의 인사들을 몇명이라도 장관에 기용하면 거국내각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과거 정권 5년의 정치일정이 일거에 소화되고, 이후는 그야말로 정치 신천지가 전개된다. 명분은 경제매진도 있고, 북핵 등 한반도 안보정세도 있다. 대통령이 특정 정당의 대표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고히 준다면 이번에는 개헌이 가능하다고 본다.4월 재·보궐선거 이후 여당이 과반수를 유지하기 위한 전술적 연정 차원을 넘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정치판의 재정리를 선도할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다시 교단에 서는 양성우 시인 7시간 격정 토로

    ‘내일일까, 모레일까, 눈물 맺힌 30년 세월∼’. 누군가 말했다, 기다림은 차라리 고통이라고. 그렇게 30년을 지냈다. 이제 돌아가려 한다. 그곳은 어머니의 품이다. 태어나 뒹굴었다. 함께 울고 웃었다.‘품’을 떠난 뒤 강산이 세번 변했다. 파란과 곡절, 무수한 격동의 그림자를 관통했다. 돌이켜봐도 손바닥만한 가슴으로 꽁꽁 부둥켜안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75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광주중앙여고 파면 2월 초였다.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한 시인이 학교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게 덮인 눈, 서산대사가 걸어갔듯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그렸다. 시계바늘을 30년 전으로 돌렸다. 농성하던 3학년 학생들이 거울처럼 투영됐다.‘겨울공화국’이 뇌리에 생생하게 스친다.‘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영화 ‘일 포스티노’의 마지막 대사.‘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며 읊었다. 시인 양성우(62). 요즘처럼 설렌 적이 있을까.30년만에 찾아온 ‘아주 특별한 귀향’을 맞이하고 있다.1975년 2월12일 ‘겨울공화국’이란 저항시를 낭독, 광주중앙여고에서 파면당했다. 이후 온몸으로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고문·도피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광주중앙여고측에 양씨에 대한 복직권고 결정을 통보했다. 학교 측도 복직 절차에 들어갔다. 늦어도 한달 이내에 다시 교단에 설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에 위치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양씨를 만나 7시간 동안 ‘격정’의 인터뷰를 했다. 그는 먼저 1월말 학교측에서 연락이 와서 2월초 광주에 내려가 재단(금호·아시아나)이사장과 교장, 그리고 행정실무자 등을 만났다고 했다. 다들 흔쾌하게 양씨의 복직의사를 받아들였다고 귀띔했다. 특히 30년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 교사들이 아직도 있어 무척 반가웠다고 부연했다. 또 이같은 사실이 언론 등에 보도되자 당시 제자들로부터 많은 축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광주중앙여고의 ‘총각 시인 선생님’이었던 그는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오빠’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남이 해직기자였던 당시 교장은 양씨를 파면할 때 “(아들 생각으로)내가 차라리 감옥에 가고싶은 심정.”이라며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학생·학부모 선동 이유 사찰로 유폐 양씨는 그해 4월15일 학교측으로부터 파면통고를 받자마자 중앙정보부(중정) 광주지부로 연행됐다. 중정 요원들은 학생들과 학부모를 선동했다는 이유를 들이댔다. 장시간 조사를 받은 양씨는 구례군 지리산 ‘천은사’로 유폐된다. 경찰 2명이 보초를 세워 출입을 통제했다. 이같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면회객들이 줄을 이었다. 광주중앙여고 학생은 물론 서울의 대학생들까지 단체로 면회를 왔다. 양씨는 그해 연말 시인 고은씨한테 ‘사람 많은 곳에서 숨어 지내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고은씨는 곧장 천은사로 내려와 한밤중에 양씨와 함께 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에 온 양씨는 흑석동 중앙대 정문 입구에 2평짜리 쪽방을 얻었다. 쪽방 벽면 너머는 다방이었다. 때문에 날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들어야만 했다. 또 다방은 동료문인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황석영·이문구·고은·이시영씨 등이 찾아와 문학을 얘기하고 군사독재를 비판했다. 중앙대 문창과 학생들도 단골로 찾아왔다. 그러던 하루는 한양대 이영희 교수가 불렀다. 중국문제연구소에서 촉탁직원으로 일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춥고 배고팠던 양씨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연구소 소속 교수들의 논문을 모아 책을 발간하는 일이었다. 양씨는 이 무렵 장편시집인 ‘노예수첩’을 썼다. 이는 당시 재야권 인사들에게 수천부씩 복사되어 언더그라운드 페이퍼로 읽혀졌다. 얼마후인 1976년 남산(중정)의 4국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재야권에 음성적으로 떠돌던 ‘노예수첩’이 일본의 ‘세계(世界)지’에 게재된 것. ●한달간 고문 국제 간첩단으로 몰려 한달간 고문 끝에 양씨는 ‘양성우 국제간첩단 사건’의 장본인으로 발표된다. 양씨와 만났던 미국인 캐서린 엘리자베스(여성민권운동가)와 폴 슈나이스(독일인 목사), 일본의 다카사키 소지 교수 등이 입국금지됐다. 양씨는 곧 재판에 회부됐다. 죄목은 ‘국가모독죄’와 ‘긴급조치9호 위반’이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6개월간 재판을 받는다. 이때 옥중에서 박정희 정권타도에 앞장섰다는 죄목이 더 추가됐다. 결국 5년형을 선고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면회는 절대금지였다. 때문에 변호를 맡은 홍성우 변호사와 고은씨 등 지인들은 옥중결혼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마침 양씨는 수감되기 전 정정순(현재의 부인)씨와 사귀고 있었다. 반대할 것으로 예상됐던 정씨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혼인신고서를 작성했고 유일하게 면회를 할 수 있는 직계 가족이 됐다. 양씨는 농섞인 말로 “결혼 얘기만 나오면 지금도 ‘깨갱’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집사람은 그 일로 고향인 광주집에서 쫓겨났다.”면서 (부인이)처녀의 몸으로 옥바라지한 경험담을 ‘때가 오면 그대여’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출간했다고 귀띔했다. 결혼식은 출소 후 이문구씨의 사회와 박형규 목사의 주례로 올렸다. 양씨는 수감 중 찬 감옥방에서 지내느라 하반신에 악성종양을 얻어 영등포시립병원에서 수술대에 누웠다. 이때 이문구·조태일·박태순씨 등 문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저항시인 양성우를 석방하라.”며 연일 데모를 벌였다. 탄원도 계속됐다. 양씨는 2년6개월 만에 출소했다. 수감생활 중 성경책의 여백에 못으로 꾹꾹 눌러 옥중시집 ‘북치는 앉은뱅이’를 썼다. 5·18 때에는 지명 수배돼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시인 신경림씨의 도움으로 가끔 서울에 올라와 세종문화회관 뒤쪽 ‘항아리집’에서 동료들과 비밀리에 만났다. 모이는 사람은 주로 염무웅·백낙청·이호철씨 등이었다. 항아리집 여종업원들은 프랑스의 물랭루즈처럼 운동권 인사들에게 음성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고 양씨는 회고했다. “고은·조태일씨, 그리고 이영희 교수 등도 저를 돕다가 옥살이를 했지요.5·18후에는 문단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또한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는 등 민주화 운동에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지요.” ●87년 잠시 정치권 외도 그는 6월항쟁 때 이한열군이 사망하자 ‘꽃상여 타고 그대 잘가라’는 추모시를 써 민주화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후 87년 대선 때 “법과 제도를 민주적으로 고치기 위해선 현실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주위의 끈질긴 권유로 정치무대로 잠시 외도한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철길’이라는 소설로 ‘학원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때 4·19시위를 주도하는 등 일찍부터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파란많은 인생역정의 길을 걸었다. 요즘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있다는 그는 “정년이 1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역사에 떠밀려간 30년의 세월을 매듭짓고 싶다.”면서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좋은 보약이 되는 얘기를 많이 해주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올 하반기에 신작 시집을 출간한다. 그의 시 가운데 ‘혼자 떠나는 새’ 등 10여편은 이미 가곡으로 불려지고 있다. ■ 그가 걸어온 길 ▲1943년 전남 함평 출생. ▲60년 조선대부속고등학교 2학년 재학중 4·19시위 주도 ▲61년 민통련 호남지역 고등학생 총연맹 회장으로 활동.5·16 직후 광주교도소 수감 ▲62년 학다리고등학교 편입. 학원문학상 소설당선 ▲63년 전남대 국문과 입학 ▲70년 ‘시인’에 ‘발상법’과 ‘증언’으로 등단. ▲71년 전남대 국문과 졸업 ▲71∼72년 학다리고 교사 ▲72∼75년 광주중앙여고 교사.‘겨울공화국’ 사건으로 교사직 파면 ▲76년 대한성서공회 문장위원 ▲77년 ‘노예수첩’으로 투옥 ▲79년 8월 가석방 ▲84년 자유실천문학인협의회 대표 ▲85년 서울민통련 중앙위원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대변인 ▲88년 제13대 국회의원(평민·서울 양천구) ▲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 시집 발상법, 신하여 신하여, 겨울공화국, 북치는 앉은뱅이,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넋이라도 있고 없고, 노예수첩 등 km@seoul.co.kr
  • 네루 자서전/자와하를랄 네루 지음

    사람들은 흔히 인도 국민의 영웅 네루를 간디에 견줘 이야기하곤 한다. 간디가 종교적 이상주의자였다면, 네루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직시한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런 만큼 네루는 종교적 교의나 이상에 치우치지 않았고, 스탈린식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의 탐욕에도 물들지 않았다. 네루는 간디의 실천력과 대중투쟁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평생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간디의 노선엔 항상 비판적이었다. 간디가 투쟁에 있어서 종교·정신적인 면을 끊임없이 강조한 것과 달리 네루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이끌렸다. 인도가 안고 있는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주의적인 강령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근 출간된 ‘네루 자서전’(자와하를랄 네루 지음, 정민걸ㆍ김정수 옮김, 간디서원 펴냄)은 인도 초대 총리 네루의 개인적 삶과 함께 1930년대 격변하는 인도의 정치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북인도 카슈미르 출신의 부유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난 네루는 1916년 간디를 만나 비폭력불복종운동에 뛰어들어 인도국민회의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네루는 반영독립투쟁으로 아홉 차례나 체포돼 9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책은 네루가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감옥에서 쓴 것이다. 네루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는 온갖 사이비 교설이 난무하는 국제관계 속에서도 ‘정당한’ 수단을 고집했다. 국제정치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네루는 인도를 동서 양 진영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여겼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통일주의, 비종교주의라고 하는 네루의 4대 정책기조는 인도 정치의 근간이 됐다. 독립국가 인도의 이미지는 곧 네루의 이미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도는 우리와 다른 무엇으로 어떻게 독립을 일궈냈을까. 이 책은 자주적으로 독립을 이룩하지 못한 우리에게 묵직한 교훈을 안겨준다.2만 95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음악 통해 문신 합법화 외칠래요”

    “음악 통해 문신 합법화 외칠래요”

    “3년째 바늘을 잡지도 못하고 있어요. 말이 집행유예죠. 예술의 자유도 없는 한국 사회가 감옥이 아니겠어요.” 서울 대림동의 한 카페에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던 문신 작가(타투이스트·Tattoist) 김건원씨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김건원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타투이스트. 중학교 때 좋아하던 록 음악 뮤지션이 새긴 문신을 보고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갔다. 성신여대 서양미술학과에 재학 중이던 98년에는 ‘예술로서의 문신’을 위해 ‘전업’을 선언했다. 김씨는 이후 ‘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 등 각종 영화에서 문신 분장을 맡았다. 프랑스와 일본 등에서 열린 타투 컨벤션에 초대되는 등 외국까지 이름을 알렸다. 시련이 시작된 것은 지난 2003년 6월. 무면허 의료시술 혐의로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한 청년이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문신을 받았다가 적발된 게 화근이 됐다. 결국 그해 8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수원지법과 대법원에 항소와 상고를 했지만 모두 기각당했다. 문신만 알던 김씨는 이후 문신 합법화 ‘운동가’로 변모했다. 김씨가 느끼는 가장 큰 벽은 ‘문신은 조폭만 하는 것’이라는 일반의 오해다. 오랜 유교 문화도 걸림돌이고, 정체성의 혼돈에 따른 일탈이 문신으로 반영된다는 편견도 문제다. “연예인과 학생은 물론 교수, 스포츠선수, 은행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제게 문신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모습을 결정하고, 몸을 통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강한 매력을 느끼죠. 자기 피부에 영혼을 새기는(Soul on Your Skin) 게 문신인 만큼, 판단력과 의지가 없으면 할 수 없습니다.” 김씨의 앞으로의 계획은 음악 등을 통해 문신의 합법화를 역설하는 것이다. 법적인 해결이 안될 경우 예술을 통해 여론을 우호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오는 5월에는 자작곡을 들고 가수 이상은씨, 전인권씨 등과 함께 타투 뮤직 페스티벌을 열기로 했다. 김씨는 “랩 뮤직을 통해 ‘타투는 타투이스트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메시지를 직접 전할 것”이라면서 “언젠가는 문신도 찢어진 청바지나 피어싱처럼 하나의 문화적 양식으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법정모독” 실형 논란

    “범죄 수사에 협조하기 위해 취재원을 공개해야 하는가, 아니면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덤까지 비밀을 안고 가야 하는가.”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의 신분누설과 관련, 미국에서 취재원 보호를 둘러싼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감옥행을 택할지언정 취재원을 밝히지 않는 게 미 언론의 오래된 관행이지만 익명이 판치는 ‘인터넷 세상’에 언론의 자유를 무한정 보장하는 게 과연 타당하느냐는 비판도 없지 않다. 워싱턴 순회 연방 고등법원은 15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여기자 주디스 밀러와 시사주간지 타임의 매튜 쿠퍼에게 1심에서와 같은 ‘법정모독죄’를 적용했다. 두 기자가 비밀요원의 신분 누설자를 공개하지 않자 사건을 수사중인 패트릭 피츠제럴드 특별검사가 지난해 이들을 기소했다. ●범법행위는 취재원 보호대상 아니다 앞서 피츠제럴드 검사는 두 기자가 대배심 앞에서 증언할 것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한 ‘언론의 자유’를 들어 거부했다. 지난해 10월 1심에서 두 기자에게 1년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면서 사건은 ‘사법 대 언론’의 싸움으로 비화했다. 1심을 재확인한 3인 합의부는 “수정헌법이 범죄의 원천을 비밀에 부치는 언론의 관행까지 수용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특히 데이비드 타텔 판사는 진실을 추구하는 대배심과 언론이 정면 충돌할 때에는 뉴스의 해악을 따지는 ‘관습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밀요원의 공개는 국가안보에 해가 된다며 두 기자의 패소를 당연시했다. 이는 마약을 만드는 장면을 목격한 기자는 범죄 해결을 위해 취재원을 밝혀야 한다는 1972년 대법원의 ‘브랜즈버그’ 판결에 근거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고등법원 전원재판부에 항소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시 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간다는 계획이다. ●발단은 이라크-니제르 커넥션 2003년 1월 조지 부시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이라크가 아프리카에서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라크를 침공한 결정적 요인이었으나 나중에 근거없는 ‘조작된 정보’로 드러났다. 국무부 존 볼턴 군축담당 차관이 제기한 이라크와 니제르의 우라늄 거래설을 바탕으로 했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니제르에서 진상을 조사한 외교관 출신의 조지프 윌슨이 그 해 7월 초 부시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라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면서부터다.8일 뒤 뉴욕타임스에는 윌슨의 부인인 밸러리 플레임이 CIA 비밀요원이라는 칼럼니스트 로버트 노박의 글이 실렸다. 그는 고위관리 2명을 인용했다. CIA 비밀요원의 신분 누설은 연방법 위반인 데다 ‘내부 고발자’에 위협을 가하는 파렴치한 행위로 인식돼 여론은 들끓었다. 백악관은 마지못해 수사를 지시했으나 미 정가에서는 딕 체니 부통령의 집무실에서 ‘윌슨 제거하기’가 진행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피츠제럴드 검사는 체니의 비서실장인 스쿠터 리비가 누설했다는 단서를 얻었지만 밀러와 쿠퍼 두 기자가 다른 관리로부터 비밀요원의 신분을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밀러는 기사화하지 않았고 쿠퍼는 다른 기자들과 보충 취재해 크게 보도했다. 하지만 법원은 보도 여부와 관계없이 범죄와 관련된 취재원의 공개는 불가피하는 시각이다. ●인터넷 시대, 언론자유의 범위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워터게이트 사건의 취재기자인 워싱턴포스트의 봅 우드워드는 취재원인 ‘딥 스로트(deep throat)’가 죽은 뒤에나 그의 신분을 공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취재원이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로 인해 취재원을 공개하라는 압박이 거세지는 않다. 뉴욕타임스는 인터넷의 1인 미디어인 ‘블로거’들이 언론 자유의 보호대상인지는 의문이라고 전했다. 기존의 언론과는 달리 익명성에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이같은 글들에도 취재원 보호의 명분이 적용되는냐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인터넷의 발달로 비전통적 언론이 증가할수록 언론자유의 책임성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1961년 이후 취재원 공개를 거부해 수감된 미국 기자는 25명에 이른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美 성폭행신부 12~15년형

    성직자로서 어린 소년을 성폭행, 미국 사회와 가톨릭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폴 샌리(74) 전 신부가 15일(현지시간) 아동강간 혐의로 12∼1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보스턴 교외 케임브리지 법원의 스티븐 닐 판사는 이날 “믿음과 권리를 이보다 더 오용한 사례는 상상할 수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피해자와 다른 희생자 가족들은 수갑을 차고 법정을 빠져나가는 샌리의 등에다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 한때 불우한 어린이들과 동성애자들을 극진히 보살펴 ‘거리의 신부’로도 불렸던 샌리는 1983년 당시 6살이던 피해자를 사제관이나 고해성사실 등으로 불러 6년간이나 성폭행했다. 올해 27살인 피해자는 검사가 대신 읽은 성명에서 “나는 그가 감옥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검사측은 종신형을 구형했으나 변호인측은 그의 나이 등을 감안하면 사형에 가까운 형량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보호관찰 10년도 포함시켜 가석방은 8년이 지난 뒤에나 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성폭행 성직자가 교도소에서 목졸려 죽은 것을 감안하면 샌리 역시 교도소에서 다른 죄수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크다. 샌리는 2건의 아동강간 등으로 지난주 배심원들로부터 유죄 평결을 받았다. 그에게 성추행을 당한 아동은 20여명에 이른다. 백문일기자 mip@seoul.co.kr
  • [영화속 수능잡기] 아마데우스

    사촌이 땅을 사면 기뻐하기보다는 배가 먼저 아픈 것이 평범한 사람의 심리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가 별로 노력도 안 하고 큰 성공을 거둘 때 우리의 시기심은 최고조에 이른다. 가령 나는 밤새 공부해도 성적이 거기서 거기인데 어떤 친구는 한두 시간 공부하면서도 성적이 최상위권이라면,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우리는 곧잘 신을 타박한다. 신이시여, 대체 왜 이렇게 불공평하십니까? 롤프 하우블의 저서 ‘시기심’에서는 인간이 시기심을 느낄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네 가지 양태를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먼저 낙담이다. 저건 내가 도저히 가질 수도 없으니 꿈도 꾸지 말자. 일찌감치 포기해버리는 방식이다. 과히 나쁜 방식은 아니지만 자칫 패배자의 생존 방식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 둘째, 야심이다.‘저 친구가 해냈다면 나도 해낼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경쟁심을 키우는 방식이다. 금메달을 꿈꾸며 땀 흘리는 운동선수들이 취하는 방식으로 권해볼 만하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함부로 도전하면 코가 깨진다. 셋째, 분노다. 분노는 상대가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유물을 가졌다고 믿을 때 발동한다. 저 친구는 아버지가 잘 살아서 수백만원짜리 과외를 하기에 공부를 잘 하는 거야, 나도 저 정도의 가정에 태어났다면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을 거야.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쌓아가는 것이다. 넷째, 공격성 즉 타인을 해치려는 마음이다.‘왜 나는 저 친구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지 못한 것일까. 부모와 세상을 잘 못 만나서 그래. 이 더러운 세상을 확 불질러 버리고 싶어.’하는 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이다. 감옥에는 이런 방식으로 시기심을 표출한 사람들로 북적댄다. 경계해야 할 방식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음악단장 살리에리, 그는 모차르트의 그늘에 가려 명성이 잊혀져 버린 불운의 음악가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살리에리는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무식한 그의 부친은 그의 꿈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음악적 재능을 활짝 꽃피운다.‘신은 왜 모차르트에게는 재능을 주셨고, 나에게는 그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귀를 주셨을까.’살리에리의 시기심은 불같이 타오른다. 세상에는 음악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있을 수 있고, 화가나 만화가가 되고 싶은 욕망도 있을 수 있고, 사업가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도 있을 수 있다. 욕망이 다양한 사회는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돈과 물질에 대한 집착과 시기심만이 지나치게 강한 사회는 아닐까. 왜 저 나라는 깨끗한 물과 산과 공기를 갖고 있는데 왜 우리는 갖지 못한 것일까. 왜 우리는 유럽의 어떤 도시처럼 훌륭한 건축문화를 갖지 못한 것일까. 이런 시기심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좀더 밝아지지 않을까. 밀로스포먼 감독, 톰헐스,F 머레이애이브러험 출연,1984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인 최초 대학 수장 오른 박범훈 중앙대 신임총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악인 최초 대학 수장 오른 박범훈 중앙대 신임총장

    ‘태고의 용트름이/빚어놓은 선율이여…풀려마라 갚으려마라/네가슴의 눈물방울/이땅에서 살자꾸나/피리소리 뿌려가며/북망산 가는 길에도/듣고 싶은 네가락.’ 도올 김용옥 교수가 산사(山寺)에서 산보하던 중, 문득 한 음악인이 생각나 즉시(卽詩)를 써서 보냈다. 그러자 그 음악인은 곡(曲)을 붙여 화답했고 송창식이 노래를 처음 불렀다. 제목은 ‘이땅에서 살자꾸나’였다. ●국악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 그의 음악은 불혹의 경지를 넘어섰다. 풍진에도 흔들림 없다. 청아한 혼의 소리로 휘휘 감겨 있다. 때로는 백두대간을 관통한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지휘한다.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2002년 한·일월드컵 때에는 세계를 충격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의 소리는 태고의 한을 풀어낸다. 또 동서양을 오가며 인류의 미래문명을 화음(和音)해낸다. 그랬다. 고집스럽게 우리 소리를 찾아다녔다. 소리가 곧 인생이요, 삶의 은인이다. 지난해에는 우리시대 국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뽑혔다. 맞다. 그는 분명 우리 국악계의 거목으로 자리해 있다. 작곡가·지휘자·교육자·연주자로 숨가쁜 전방위 활동을 펼쳐 왔다. 이제는 교육행정가의 길을 하나 더 쌓고 있다. 박범훈(58) 중앙대 신임 총장. 국악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총장에 올라 화제가 됐다. 총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취임식(2월3일) 직후여서 그런지 축하 화환이 입구에 쭉 늘어서 있었다. 우선 국악인이 대학총장에 선출된 것은 국악계의 큰 경사요, 대학행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겠느냐고 인사말을 건넸다. 그는 “어제 취임식 때 이어령 교수가 축하인사차 참석해 ‘대학이 살아나려면 개혁과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데 중앙대가 먼저 앞서나가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면서 “(총장에 선출된 된 것과 관련해)중앙대 교수들의 사고가 열려 있다. 열리지 않으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미있는 대답을 했다. 또한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려면 화합이 가장 중요하며 전공처럼 화합과 창조를 화두로 삼아 변화를 추구해갈 것”이라면서 “특히 많은 해외 유학생들이 중앙대에서 맘껏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 조성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우리나라 대학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대학은 큰 가르침의 전당인데 과연 이에 걸맞은 역할을 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반대로 고급인력이 과잉공급되는 기현상, 즉 일을 부리는 사람만 양성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결국 놀아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풍조가 만연했고 이러한 풍조는 곧 그동안 많은 대학들이 덕을 본 셈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구조조정이라는 현실 앞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 대학교육의 현주소라고 강조했다. ●예술가의 손으로 세계적 대학 키울 것 “그동안 지휘봉을 잡고 세계를 누빈 저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술가의 창조적 머리와 화합의 손으로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울 작정입니다.” 그의 행보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19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민간 국악관현악단인 ‘중앙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다.8년간의 악단 경험과 그의 역량은 국립국악관현악단 창단으로 이어졌다.94년에는 세계 최초의 ‘한·중·일 아시아민족악단’을 창단했다.99년에는 서울국악유치원을 설립했으며 국악중학교를 신설, 중등 국악교육의 장을 새로 마련했다. 특히 중앙대 김희수 이사장에게 부탁해 우리나라 유일의 중앙대 국악대학과 국악교육대학원을 설립했다. 다들 소리의 종자를 키우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닌 결과물이었다. 그는 1948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디서든 소리만 들리면 몽유병 환자처럼 소리를 찾아다녔다. 초등학교 음악시간에 처음 들어본 풍금소리에 반해 밤마다 교무실을 무단침입했다. 풍금건반을 더듬어 자작곡 ‘생쥐 소나타’를 치다가 숙직 선생에게 걸려 혼쭐이 났다. 인근 동네에 풍물패가 왔다는 소문을 듣는 대로 달려가 해산할 때까지 풍물패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에는 양평읍내를 행진하는 브라스 밴드부가 너무 멋있게 보여 그날로 밴드부에 가입,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16살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남사당패거리를 만났다. 이들은 양평 동네에 우연히 들렀다가 그의 사랑채에 기거하게 됐다. 사랑채에는 하루 종일 장구소리가 났으며 항상 동네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때 소년 박범훈은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남운용 선생의 권유로 한국국악예술학교(현 서울국악예고)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는 가정형편상 서울 유학은 엄두를 못낼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해질 무렵이면 이집저집 쌀을 꾸러 다녔고 아버지는 술에 의지한 채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6·25때 8사단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로 붙잡혀 6년 동안 감옥생활하다가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귀환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일을 거의 포기한 채 술만 마셔댔다. 결국 남운용 선생의 끈질긴 설득으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국악예술학교 재학 시절 그는 박봉헌 교장의 권유로 피리를 배우게 됐고 지영희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 지 선생은 당시 예술부장으로서 국악관현악 지휘와 피리·해금 등을 가르쳤다. 지 선생 외에도 당시 내로라하는 명인들로부터 공부를 하게된다. 판소리 김동진 선생한테 새로 작곡한 가곡을 배우는 즐거움이 그만이었다. 또 김희조 선생한테는 음악이론을 배웠다. 박귀희 선생은 학생을 보는 대로 잡아다가 병창을 가르쳤고, 성금련·김윤덕 선생은 가야금, 신쾌동 선생은 거문고, 한범수·김광식 선생은 대금, 한영숙 선생은 무용, 전사종·전사습 선생은 농악을 배우라고 권유했다. ●유학시절 전두환대통령 취임식 곡 만들어 1968년 국악예고를 졸업하던 해 그는 멕시코올림픽에 파견되는 민속예술단에서 음악을 담당하게 됐다. 이때 가슴에 태극기를 단 유니폼을 입고 양평 고향을 방문하자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이제는 박씨네 집 고생 끝났다.”며 환영을 해주었다. 이후 육군 기갑부대에서 40주 동안 훈련만 받다가 의가사제대를 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에 진학, 본격적인 음악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맨처음에는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우리 것과 서양의 것을 접목시키자는 소명의식으로 서양음악의 작곡공부를 선택했다. 이때 학과장은 ‘자장가’로 유명한 김대현 교수가 맡고 있었다. 그는 중앙대에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국악예고에 전임강사로 나갔다. 또 국립극장 개관공연 무용극 ‘별의 전설’을 비롯해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대학생치고는 돈도 꽤 벌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어 편곡 아르바이트 일도 했다. 이때 바니걸스의 노래 ‘님아’도 작곡했다. 대학4학년 때 일본 학습원 대학원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간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의 민족악기들이 서양악기와 어우러져 연주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사시노음악대학에 학부 1학년으로 입학해 현대음악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유학 3학년때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에 연주할 곡을 작곡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유학을 다 마치고 돌아온 그는 도올 김용옥 교수를 만나면서 불교음악에 빠지게 된다. 특히 국사암의 석상훈 스님과 만나 20년 넘는 형제의 인연을 맺었고 ‘달마의 소리’를 깨닫게 됐다. 이후 동국대에서 5년간 고행을 거쳐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 불교음악사연구’를 만들어냈다. 그의 음악은 장르를 넘나드는 오묘함이 있다.‘사의 승무’(73년 송범 안무) 등 대형춤곡만 23편을 작곡했다. 또 윤문식과 김성녀씨를 만나면서 ‘허생전’‘별주부전’ 등 마당놀이극을 위한 작곡도 11편에 이른다. 국악관현악 12곡, 아시아민족악기를 위한 9개의 곡, 그리고 ‘교성곡’‘찬불가’ 등 불교곡도 수십편에 이른다. 이밖에 86아시안게임 개막식곡 ‘청실홍실’,88올림픽 개막식곡 ‘해맞이’,2002년 월드컵 개막식곡, 부산아시안게임 개·폐막식곡 등 ‘대∼한민국의 소리’를 만들었다. “오늘날 중앙대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대학행정을 책임지게 된 것도 음악을 사랑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아직도 잃어버린 소리를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 소리엔 조상이 있고 대한민국이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4월 경기 양평 출생 ▲68년 서울국악예술고 졸업 ▲76년 중앙대 음악학과 졸업 ▲83년 일본 무사시노 음악대학원 석사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음악담당 ▲87년 중앙관현악단 창단 ▲93년 아시아민족악단 창단 ▲95년 국립국악관현악단 초대단장 겸 예술감독 ▲2001년 중앙대 제2캠퍼스 부총장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음악감독 ▲2003년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장 ▲2005년 2월 중앙대 총장 ● 저서 한국불교음악사연구, 박범훈의 예술세계, 내가 만난 소리 내가 만든 소리
  • 김근태 복지 “이근안 다 용서했다”

    김근태 복지 “이근안 다 용서했다”

    “다 용서했다.”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20년전 자신을 고문했던 이른바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이 속죄하자 용서와 화해의 말을 던졌다. 김 장관은 지난 7일 이상락 전 의원을 면회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 교도소를 방문하던 중 한참 고심하다가 수감중인 이 전 경감을 30분 정도 면회했다고 측근이 10일 밝혔다. ‘가해자’ 이 전 경감은 이날 면회에서 과거 자신의 고문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피해자’ 김 장관은 이미 이 전 경감을 “다 용서했다.”고용서의 뜻을 밝혔다. 김 장관은 “감옥에 들어간 지 5년정도 됐고 인간적으로 안된 측면도 있어 면회를 했다.”면서 “본인이 무릎을 끊고 용서를 빌면서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99년 도피했던 이 전 경감이 자수하자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모욕적인 상황이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던 김 장관이 이 전 경감을 면회하고, 용서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이라는 시대적 화두를 던졌다. 여권의 대선 주자인 점과 맞물리는 대목이다. 가혹했던 고문으로 인해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김 장관은 당초 면회 사실이 밝혀지는 것조차도 꺼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전 경감은 지난 85년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민추위 사건과 관련, 사를 받던 김 장관에게 10여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가하는 등 인권 유린행위로 지난 2000년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김준석기자 hermes@seoul.co.kr
  • 美 메이저리그판 ‘X파일’ 파문

    80∼90년대 초를 풍미한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슬러거 호세 칸세코(41)의 자서전 ‘약물에 젖어(Juiced)’가 야구계는 물론 미국사회 전체를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있다. 칸세코가 마크 맥과이어와 이반 로드리게스(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라파엘 팔메이로(볼티모어 오리올스) 등 스타들의 스테로이드 복용은 물론,90년대 초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를 맡았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약물복용을 알고도 모른 체 했다고 주장, 메가톤급 파문을 일으킨 것. 하퍼콜린스 출판사 측은 세간의 관심이 쏟아지자 예정보다 1주일 앞당긴 15일 서점가에 책을 뿌리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칸세코의 ‘제2의 폭탄선언’ 여부로 관심을 모은 CBS TV의 시사프로그램 ‘60분’도 출판을 하루 앞둔 14일로 앞당겨 전파를 탈 예정이다. 쿠바 출신의 강타자 칸세코는 지난 88년 사상 최초로 40홈런-40도루의 대기록을 작성하는 등 통산 462홈런을 기록했지만, 약물복용은 물론 아내를 폭행해 감옥신세까지 지는 등 ‘빅리그의 이단아’로 알려졌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넌 누구냐” 감금생활 15년의 의문

    “넌 누구냐” 감금생활 15년의 의문

    ●올드 보이(MBC 9일 오후 9시55분) 박찬욱 감독의 2003년작.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영문도 모른 채 무려 15년간 사설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남자와 그를 가둔 남자 사이의 대결, 그리고 이런 비밀에 대한 반전을 다룬 미스터리 액션 드라마.2004년 제5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주연. 술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오대수. 본인의 이름풀이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라고 이죽거리는 이 남자는 아내와 어린 딸아이를 가진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어느날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존재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납치, 사설 감금방에 갇히게 된다. 언뜻 보면 싸구려 호텔방을 연상케 하는 감금방. 중국집 군만두만을 먹으며 8평짜리 공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텔레비전 보는 것뿐.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뉴스를 통해 나오는 아내의 살해소식. 게다가 아내의 살인범으로 자신이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된 오대수는 자살을 감행하지만 죽는 것조차 그에겐 용납되지 않는다. 오대수는 복수를 위해 체력단련을 비롯, 자신을 가둘 만한 사람들, 사건들을 모조리 기억 속에서 꺼내 ‘악행의 자서전’을 기록한다. 한편, 탈출을 위해 감금방 한쪽 구석을 쇠젓가락으로 파기도 한다. 감금 15년을 맞이하는 해, 마침내 사람 몸 하나 빠져나갈 만큼의 탈출구가 생겼을 때, 어이없게도 15년 전 납치됐던 바로 그 장소로 풀려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연히 들른 일식집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어버린 오대수는 보조 요리사 미도 집으로 가게 되고, 미도는 오대수에게 연민에서 시작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게 된다. 한편 그는 감금방에서 먹던 군만두에서 나온 ‘청룡’이란 전표 하나를 단서로 감금방의 정체를 찾아내는데….120분.
  • [논술이 술술] 시민의 불복종/헨리 데이비드 소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불복종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미 1980년대 후반 정부의 편파적인 방송정책에 항의하여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으며, 최근에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나타나며 불복종 운동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올해 이루어진 저작권법 개정과 관련해서도 네티즌들의 불복종 운동을 주장하는 글들을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불복종’이 시민의 권리 가운데 하나로서 인식되는 변화가 시작된 듯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시민의 불복종’은 이러한 ‘불복종 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저작이다. 특히 톨스토이와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로(1817∼1862)는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필가로서, 두 가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1845년 여름부터 1847년 가을까지 2년 동안 월든 호반의 숲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일과 1846년 7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의 납부를 거절한 죄로 투옥 당했던 일이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 미국 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월든’이라는 작품과 바로 이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글이다.‘숲속의 생활’이라고도 불리는 ‘월든’은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자연과 깊은 교감을 나누는 생태주의적 사고의 방향을 제시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시민의 불복종’은 옳지 못한 권력의 강제에 대한 시민의 ‘불족종’의 권리를 제기하며, 사회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자유주의 사상의 가장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유산을 남기고 있다. 그러고 보면 소로는 거대화된 산업과 사회 권력에 대항하는 21세기 시민운동의 두 흐름에 모두 큰 영향을 남긴 선구적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생활하던 1846년 7월, 경관이자 세금징수원인 샘 스테이플스는 소로가 인두세의 납부를 거절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곧바로 풀려났지만 2년 뒤 콩코드 문화회관에서 그 사건에 대해 강연을 했고, 그 다음해에 우리에게 ‘큰바위 얼굴’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손의 처제인 엘리자베스 피바디의 요청으로 강연문을 수정해 그녀가 창간한 잡지 ‘미학’에 실었다. 당시에는 ‘시민 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이었지만, 소로가 죽은 뒤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은 처음에는 소로의 다른 저서들처럼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19세기 말 톨스토이에게 발견되어 그의 정치, 사회 사상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이 정작 세계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것은 간디를 통해서였다. 간디는 이 책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자신의 이념을 정리해 준 하나의 교과서로 여겼다. 간디는 “나는 소로에게서 한 분의 위대한 스승을 발견했으며,‘시민의 불복종’에서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땄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그 밖에도 나치 점령 하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나 1950∼1970년대의 미국 흑인 인권운동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소로가 외롭게 제기한 ‘불복종’의 권리는 이제는 국제법에서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www.unidream.co.kr) ●독서 지도시 참고사항 -대상 학년:고1∼고3 -관련 교과:고등 사회, 윤리와 사상, 정치, 법과 사회 -함께 읽어 볼 책과 고전:바보 이반(톨스토이), 간디 자서전(간디), 월든(소로), 사회계약론(루소), 권리를 위한 투쟁(예링) -기출논제:2001학년도 연세대 인문계 정시 논술,2003학년도 한국외국어대 정시 논술,2004학년도 경희대 정시 논술 ●생각해보기 -우리의 삶에서 국가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가. -국가와 개인의 바람직한 관계는 무엇일까. -시민의 저항권과 불복종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생각해 보자. -‘악법도 법인가?’에 대한 생각을 써 보자.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 [아하 그렇구나]‘나쁜놈’ 잡는 형사물 붐

    [아하 그렇구나]‘나쁜놈’ 잡는 형사물 붐

    형사 기질이 다분한 검사가 ‘진짜 나쁜 놈’을 잡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죽기살기로 덤벼드는 영화 ‘공공의적2’.“관객이 함께 분노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강우석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경제사정이 어려워 허덕이고 있을 보통 사람들의 분노를 한 경제사범에게 투영시켜 대리만족을 얻게 한다. 짜증나는 현실 탓일까.‘나쁜 놈’을 잡으며 관객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형사물과 복수극이 ‘공공의적2’를 시작으로 최근 잇따라 제작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마지막 늑대’ ‘주홍글씨’등에서 형사가 등장하긴 했지만, 본격 형사물로는 ‘썸’밖에 없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나쁜 놈’ 잡는 형사물 줄줄이 늘어난 형사물의 수만큼이나 ‘나쁜 놈’이나 ‘악’의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증인보호를 위해 학교에 위장잠입해 학생 행세를 하는 여형사의 활약상을 코믹하게 그린 3월 개봉 예정작 ‘잠복근무’(박광춘 감독, 김선아 주연)에서는 범죄조직이 악의 대상이다. 거친 남자들의 이야기와 강한 액션이 주를 이룰 누아르물 ‘야수’(김성수 감독, 권상우·유지태 주연)도 형사, 검사, 조직폭력배와의 대결을 그려 올 하반기에 개봉한다. 현재 촬영 중인 ‘형사:Duelist’(이명세 감독, 하지원·강동원 주연)에서는 조선시대의 여형사가 경제범죄를 수사한다. 열혈 여형사가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의문의 여인을 추적하는 ‘12월의 일기’(임경수 감독, 김윤진·에릭 주연)는 살인사건을 주무대로 해 곧 크랭크인한다. 반대로 ‘투캅스’이래 전통을 이어온 ‘비리 형사’ 역시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 개봉 예정작 ‘이대로, 죽을 순 없다’(이영은 감독, 이범수·최성국 주연)에서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뺀질거리기만 하던 형사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딸에게 보험금 10억원을 타주기 위해 강력범죄 현장에 뛰어든다.160억원을 들고 잠적한 한 여자를 찾아 지도에도 없는 섬인 마파도에 들어간 두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마파도’(추창민 감독, 이정진·이문식·여운계 주연)에서 배우 이문식은 비리 형사로 출연해 좌충우돌한다. ●‘나쁜 놈’ 찾아 나서는 복수극도 ‘나쁜 놈’을 잡는 형사물뿐만 아니라 ‘나쁜 놈’을 찾아 복수하는 내용의 영화들도 눈에 띈다. 공권력이 풀어주지 못하는 분노를 스스로 발벗고 나서 해결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을 녹여냈다. 13년간 감옥에 갇힌 착한 여자가 출옥한 뒤 벌이는 치밀한 복수극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감독, 이영애·최민식 주연). 착하게만 보이던 배우 이영애가 선글라스를 벗고 분노가 담긴 심한 욕설을 뱉는 충격적인 장면은 6월쯤 만날 수 있다. 한강에 사는 괴생명체의 난폭한 습격으로 딸을 잃는다는 내용의 ‘괴물’(봉준호 감독, 송강호 주연)에서도 평범한 시민인 주인공은 괴물이 있다는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현실에서 자신만의 적과 사투를 벌인다. ‘나쁜 놈’을 잡는 형사들과 ‘나쁜 놈’에게 복수하는 보통 사람들이 유독 많이 등장하는 올해의 한국영화계. 이들과 함께 되는 일이 도통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조금이나마 털어보는 것은 어떨지….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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