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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표 바꾸려다가 집·차·직장 다 잃은 흑인남성

    수표 바꾸려다가 집·차·직장 다 잃은 흑인남성

    현재 미국내 흑인 인권 문제가 많이 좋아졌다고들 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 아프리카 출신의 한 미국 남성은 자신의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다 위조 혐의로 체포된 뒤 자신의 집과 차량, 그리고 직장까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고 미국 매체 MSNBC가 전했다. 워싱턴주 오번에 사는 아이캐나 음조쿠(28)는 일용직 건설근로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국가에서 시행한 생애 첫 주택 구매자를 위한 세액공제를 받아 내 집 마련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1년여 전 국세청으로부터 들어온 환급금을 찾으려 했지만 은행은 수표가 초과 인출됐다는 이유로 계좌를 폐쇄했다. 또 은행으로부터 이자를 메우기 위해 계좌에서 600달러(약 63만원)를 공제 당한 뒤 우편으로 잔금 8463달러 21센트(약 896만원)에 해당하는 수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직접 잔액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거래 은행인 (JP모건) 체이스 지점을 방문했고 창구에서 한 여직원에게 현금 교환을 요구했다. 그가 흑인이어서일까. 그 여직원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에게 수표의 출처를 물었다. 또 수표가 가짜로 의심된다며 신분증과 신용 카드 제출을 요구 하면서 지원부서에 연락을 했다. 그는 자리에서 30분 가까이 기다리다 잠시 중요한 볼일을 보고 오겠다고 말한 뒤 은행을 비웠다. 하지만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은행은 닫혀 있었다. 그는 은행 고객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해 봤지만 다음날 다시 오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은행에 갔을 때는 돈 대신 경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위조 혐의로 체포돼 구치소에 갖히고 말았다. 다음 날, 검시관들은 문제의 수표가 진짜였음을 알고 해당 경찰 측에 연락을 취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담당 경찰이 비번이어서 음조쿠는 주말까지도 감옥에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나흘 밤을 감옥에서 보낸 사이 은행까지 타고 왔던 차량은 견인된 뒤, 경매되고 말았다. 또한 차가 있어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해고되고 말았다. 음조쿠의 변호사 펠릭스 루나의 말을 따르면 음조쿠는 체이스가 발행한 유효한 ID와 수표 한 장을 가지고 있었고, 정상 업무 시간에 은행을 방문했다. 또한 이 변호인은 은행 측이 금융거래 차별금지법을 위반했으며, 실수를 인정한 뒤에도 즉시 계좌 내 잔액(8000달러)을 지급하지 않고 수표로도 재발행해 주지도 않았다고 음조쿠의 주장을 대변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6월 발생했다. 음조쿠는 지난 1년여 동안 체이스 측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하던 끝에 두 달 전 변호사를 선임했으며, 이 소식은 이번 주 뉴스 보도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 방송 직후 체이스 은행은 대변인을 통해 신속히 해결하겠다는 뜻을 표하는 공식 서면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1년 만에 그가 받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과이다. 음조쿠는 이제 모친의 차량을 이용해 일하고 있으며, 체이스 대신 웰스 파고(은행)의 계좌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단지 체이스 은행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길 원한다.”면서 “수표를 조사하는 데 30분이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MSNBC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국회의원 추첨으로 뽑게 된다면…

    국회의원 추첨으로 뽑게 된다면…

    최근 몇 년 동안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시청 앞 광장이나 청계천 광장은 수 만 개의 촛불로 환히 밝혀지곤 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국제법 위반에, 명분도 없는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국회가 탄핵하는 사태에 분개할 때도 모였다. 살인적인 대학 등록금 인하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도 모였다. 또 졸속적인 외교 협상으로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을 때도 촛불은 소리없는 아우성을 밤하늘에 내질렀다.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 촛불 시민들이 부르던 ‘아침이슬’을 들으며 반성했다지만, 소통 부재의 상징과도 같은 ‘명박산성’이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고 국민의 정당한 요구에 귀를 막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법을 만들고 바꾸는 고유한 역할을 가진 국회 또한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몇 차례 촛불집회를 통해 특정한 정치 이슈에 직접 참여하며 그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지만 국민들 입장에서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결핍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참여는 절실해도 방법은 제한적이다. 흔히 드러나는 방법은 시위다. 아무리 유쾌하고 즐겁게 해도 경찰의 몽둥이와 방패, 물대포 세례는 감수해야 한다. ‘집시법’, 도로교통법 등 갖다 붙이면 되는 실정법 위반으로 경찰서 철창 또는 감옥행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참가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단히 높은 결의를 요구하는 방법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주민투표, 주민소환제, 주민발의제 등이 시행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청원 서명이 조작, 대필 논란을 낳고 있거나 제주도의 주민소환제가 투표율 미달로 부결됐듯, 직접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주민발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주민발의운동이 펼쳐질 때마다 다국적 자본이나 대기업 등의 이익집단이 막대한 돈의 위력을 앞세워 이를 무력화시켰다. 결국 각성된 시민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절반을 간신히 넘기는 투표율을 끌어올려 ‘시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좋은 대표자’를 뽑자는 주장이다. 현행 제도의 틀 안에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몇 년 전 대통령 탄핵사태에서 보았듯 그조차 또 다른 선출자(입법부)에 의해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 선거 때면 막대한 선거운동 자금이 필요하고, 국회에 입성하기 전부터 부패의 고리 안에 엮이게 되고, 재벌이나 특정 이익집단 등에 휘둘리는 국회, 정쟁으로 점철되며 냉소와 무관심을 자초하는 국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추첨 민주주의’(손우정·이지문 옮김, 이매진 펴냄)는 ‘무작위 추첨제’로 국회의원을 뽑자고 제안한다. 직접 민주주의의 현실화다. 대단히 담대하거나 아니면 황당할 정도로 엉뚱한 정치적 상상력을 진지하게 펼쳐 나간다. 책에 따르면 무작위로 추첨해서 국회의원을 선발할 경우 궁극적으로 노동자, 농민, 여성 등 계급·계층별 비례가 반영된다. 추첨 의원들은 진정한 국민 전체의 대표성을 가짐으로써 ‘직접 대의’(direct-representation)가 가능해진다. 지나치게 복잡한 법안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개정되고 제정될 수 있으며, 소수정당의 활동 공간도 넓어질 수 있고, 젊은 의원이 늘어나 획기적인 세대교체가 가능하며, 의정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어 시민사회의 영역이 늘어나는 등 무수한 장점을 갖고 있다. 실제 프랑스의 사상가 샤를 몽테스키외(1689~1755)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의 특성이다. 추첨은 각각의 시민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희망을 준다.”고 얘기한 바 있다. 미국 출신의 세계적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82) 박사 역시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대표자를 통한 간접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바뀌어 갈 것”이라고 일찌감치 내다봤다. 그런데 왜 시행되기는커녕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을까. 책을 함께 쓴 어니스트 칼렌바크는 생태환경운동가이고, 마이클 필립스는 미국 포틀랜드 주립대 명예교수다. 이들은 추첨으로 선발되고 연임이 불가능한 의원들이 경험을 쌓기 어렵다는 문제점, 뛰어난 입법 능력을 갖춘 지도자를 찾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 시민들의 통제를 받을 수 없게 되며 경솔하고 무책임한 의정활동이 벌어질 수 있는 문제, 부정부패에 노출될 위험성 등 여러 반론들을 스스로 던진다. 그리고 꼬박꼬박 반박한다. 임기를 3년으로 하되 매년 3분의 1을 교체할 수 있도록 하며, 배심원제 운영 원리를 의원 추첨제에 준용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가장 큰 걸림돌이야말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팽배한 지배 엘리트주의에 대한 막연한 추종, 시민의식을 가진 시민계층에 대한 비하 의식, 무작위 추출이 갖고 있는 정교하고 체계적인 수학이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음을 들며 논박한다. 또한 흑인이나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고자 할 때 제기된 우려와 반대 논리가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음을 얘기하며 추첨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추첨 민주주의’를 번역한 이지문(43)씨는 1992년 당시 육군 중위 신분으로 군대 부재자투표 부정선거를 양심선언한 인물로 구속, 일병 불명예 제대, 대기업 입사 취소 등 고초를 겪었다. 삶의 관성, 제도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담대한 상상력이자 구체적인 용기다. 1만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파티 맘’ 앤서니 이르면 이달말 석방

    두 살배기 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 평결을 받은 ‘파티 맘’ 케이시 앤서니(25)가 이르면 7월 말 석방될 예정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순회재판소는 7일(현지시간) 2008년 기소된 앤서니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수사 당국에 위증한 혐의로 4년형을 선고했다. 벨빈 페리 판사는 이날 앤서니가 수사 당국에 위증한 네 가지 사안에 대해 한 사안에 최대 징역 1년과 벌금 1000달러씩을 선고했다. USA투데이 등 현지 언론은 앤서니가 수사 당국에 체포된 이후 지금까지 3년 동안 수감된 데다 비교적 착실하게 감옥 생활을 한 점이 참작돼 이르면 7월 말, 늦어도 8월 초에는 석방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앤서니의 1급 살인 혐의에 대해 배심원단이 전날 무죄 평결을 내리자 미국 전역에서는 ‘제2의 OJ 심슨 재판’이라고 항의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이경훈 국민대 교수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이경훈 국민대 교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보세요. 뉴욕을 찬미하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캐리의 아이템이 구두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남자 친구 빅이 청혼하면서도 파란 구두를 건네주죠. 멋진 구두를 신고 화려한 쇼윈도가 즐비한 거리를 폼나게 걷고 또 걷는다는 것, 그게 바로 뉴욕이라는 겁니다. 그게 도시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지금 서울, 걸어다닐 만합니까?”  지난 30일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를 서울 정릉3동 국민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푸른숲 펴냄)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내놔서다. 건축 책은 대개 건물과 컨셉트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 교수는 전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건물, 간판, 가로수, 의자, 보도블록이 디자인적으로 멋진 것이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이고, 먼저 마음 편하게 걸어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다. “도시를 먼저 건드리지 않고서는 독창적인 건축이 나올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책에서 ‘길’과 ‘거리’를 구분했다. 어떤 의미인가.  -목적지를 향해 쭉 나 있는 단선적 경로가 길이라면, 거리는 사람이 활개 치며 걸어다닐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쏘다니며 구경하고 만나고 떠들고 노는 곳이다. 걸어가다 잠깐 단골 가게에 들러 차도 한 잔 마시고, 골목을 꺾어 가다가 아는 사람, 때로는 마주치기 싫은 사람도 만나게 되는 곳이 거리다. 그런 거리를 가져야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런 거리는 어떻게 만들어 내나.  -거리는 공유 공간, 공적인 공간이 아니라 커뮤니티 공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신사동 가로수길을 들 수 있다. 일단 건물이 아니라 거리 자체가 남향이다. 또 인도가 확실히 확보되어 있고, 이런저런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돌아다니면서 기웃기웃 구경하기 좋다. 그게 바로 도시의 거리다. 다른 곳과 비교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도심 건물은 남향을 고집하니 길은 동서로 놓이게 되고, 그러니 늘 햇볕이 안 든다. 또 온갖 차들이 인도 위에 바퀴를 걸친다. 사람들이 재미있게 걸을 수가 없는 거다. 나무 잔뜩 심고 꼬불꼬불 만들어 둔 ‘걷고 싶은 거리’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볼 게 없어 걷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똑같은 명품 거리인데 청담동 길은 한산하다. 청담동 길이 따라하려 한 일본 도쿄의 오모테산도 길은 늘 북적대는데 말이다. 청담동 건물주들이 차를 건물 앞에 대 놓기 때문이다.  도시는 결국 사람인 셈이다.  -우린 너무 착한 것만 고집한다. 가령 광화문광장만 해도 그렇다.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해결책으로 나오는 것은 나무 심고 녹지 만들자는 얘기가 대부분이다. 나 같으면 차라리 주변 건물 1층에다 카페테라스나 상점 같은 것을 의무적으로 들이도록 하겠다. 도시의 광장이라면 그렇게 만들어줘야 한다. 서울시청 앞 광장도 마찬가지다. 늘 잔디를 깔아두는데 그건 광장인가, 공원인가, 녹지인가. 차라리 로터리 때문에 지하로 들어갔던 상점들을 위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상점 같은 것으로 스트리트 월(Street Wall)을 아기자기하게 구성해줘야 사람들이 거닐고 도시적 풍경이 생기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은 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권이 주어진다면 뭐부터 고쳐보고 싶은가.  -일단 인도 주차를 금지시키겠다. 웰컴시티를 봐라. 건물 잘 지어 놓고 인도에다 차를 주차할 수 있도록 해놨다. 청담동 길처럼 걷는 사람을 건물에서 분리해 버리는 것이다.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면 5만원을 물게 한다. 그런데 담배꽁초는 3㎝고, 차는 5m다. 차는 왜 놔두나. 다음으로 합벽을 허용하겠다. 지금은 건물들 사이를 대지경계선에서 1m 이상 띄어 놓도록 되어 있다. 화재 위험 같은 이유에서다. 그런데 벽을 붙여야 그 아래 1층 상점들이 쭉 이어지면서 스트리트 월이 생기고 즐길 거리가 생긴다. 화재 위험은 기술적으로 막을 수 있다. 가령 유럽은 집 사이에 불길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지붕보다 더 높은 방화벽을 끼워넣는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것도 어렵겠다면 4대문 안 밀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고층빌딩이 많다지만 서울 지역 건물의 평균 높이는 1층도 채 안 된다. 계산해보니까 4대문 안에 평균 56층 높이로 건물을 올리면 지금 서울 시내 건물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있다. 4대문 안, 여의도, 강남 3곳으로 분산할 경우 평균 높이는 20층이면 된다. 차라리 이렇게 집적시킨 뒤 그 외 지역은 공원녹지를 만드는 거다.  도시에는 도시만의 맛이 있다는 주장이 신선했다.  -자연을 높게 치다 보니 자꾸 도시를 악으로 몰아간다. 그게 문제다. 도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다. 실컷 만들어놓고 나쁘다고 욕하면 되겠는가. 거꾸로 생각해보면 도시가 그렇게 집적돼 있음으로 해서 그 외 지역이 보전되는 측면도 있다. 최근 유엔 에스캅(UN ESCAP·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위원회)에 참가했더니 거기서도 그런 문제가 주로 논의됐다.  남향 아파트에 대한 비판도 인상적이었다.  -큰 길(불러바드)을 떠올리면 된다. 프랑스는 큰 길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길쭉하니 좁게 짓는다. 아파트가 포기하는 햇볕, 베란다, 광장, 놀이터를 큰 길에 내주는 거다. 개개인의 집보다 함께 쓰는 큰 길에 더 많은 혜택과 기능을 주라는 거다. 그게 바로 공유 공간이자 지역 공동체다. 우리 아파트는 그런 기능과 혜택을 집 안에서만 해결하려 든다. 남향을 고집하니 모든 집이 넓은 사각형이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인데 사실상 따로 사는 셈이다. 요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차장을 지하에 넣고 지상은 녹지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지하주차장을 통해 마트와 일터를 오가게 되고, 서로 접할 일도 별로 없다보니 주변 상권이 다 죽는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인데, 거기서 사는 사람들은 정작 모두 닫아걸고 외롭게 살겠다고 작정한 셈이다. 그건 도시가 아니라 스스로 갇히는 감옥이다.  그래서인지 건축가들은 압도적인 건축물보다 환경에 녹아드는 건축을 높게 평가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다. 건축가들이 압도적인 규모로 온갖 편의시설을 한데 다 몰아넣은 건축물보다 사람과 풍경이 살아날 수 있는 건축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외국인 관광객이 전통문화를 안 보고 쇼핑만 하고 간다는 보도에 우리는 분노한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라. 우리가 전통문화를 보러 가는 곳은 대개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들이다. 그곳에서는 차를 타고 돌아다닌다. 그런데 유럽 같은 선진국에 놀러가면 열심히 걸어다닌다. 도시 그 자체를 느끼는 거다. 그래서 난 시내에서 ‘외국인 관광객 탑승 중’이란 푯말을 내건 봉고차를 보면 부끄럽다. 우리가 후진국이라 실토하는 것 같아서다. 서울은 역사 문화 도시, 디자인 도시 같은 걸 내걸었는데 다 좋다. 다만 역사 문화건 디자인이건 뭐건 간에 가장 기본은 ‘도시’라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녹지를 끌어들인 남향’이란 전제조건이 붙어 있는 한 도시적 풍경과 창조적 건축은 불가능하다.  건축물에 앞서 건축에 대한 시각 교정이 필요해보인다.  -그래서 요즘 고민하는 키워드가 바로 ‘린’(隣)이다. 우린 오랫동안 충과 효만 생각하고 살았다. 충은 느낄 수 없는 거대 공동체인 국가를 향한 것이고, 효는 바로 내 가족들에 대한 얘기다. 국가와 가족 사이에 끼어 있는 공동체적인 무엇이 바로 도시인데, 이것에 대한 고민이 없다. 도시를 도시답게 하는 것은 국가도 가정도 아닌 바로 우리 이웃들이 함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고, 건축은 그 방식을 담아내야 한다. 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美 ‘공천장사’ 철퇴… 前주지사 유죄

    “나는 사실만 들으려고 했어요. 우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배심원 140호)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그 점을 우리가 배심원으로서 해야 할 일과 분리하는 게 쉽지 않았어요.”(배심원 103호)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막후 거래는 있죠. 하지만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그러는 것은 금지선을 넘는 행위예요.”(배심원 146호) 미국 국민은 끝내 부패한 공직자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27일 라드 블라고예비치(54) 전 미 일리노이 주지사에 대한 연방법원 재심(항소심)에서 무작위 추첨된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 12명(여자 11명, 남자 1명)은 20개 혐의 중 수뢰, 금품강요, 갈취, 금융사기 등 17개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했다. 유죄 혐의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으로 공석이 된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직을 돈 받고 판 혐의도 포함됐다. 재판장은 오는 8월 선고공판을 열어 형량을 선고한다. 이 사건은 대법원 재판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실형이 선고되면 블라고예비치는 바로 교도소로 들어가야 한다. 산술적으로는 최대 300년 형까지 선고가 가능하나,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10년 안팎의 형을 예상한다. 지난해 8월 첫 재판(1심)에서 배심원단은 증거 부족과 블라고예비치의 현란한 말솜씨에 밀려 연방수사국(FBI)에 허위진술한 혐의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유·무죄 판단을 내리지 못했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검찰이 블라고예비치의 범죄 발언이 녹음된 기록 등을 제시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변호인은 “녹음된 블라고예비치의 발언은 단지 생각이었을 뿐 이를 현실에 옮긴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으나 이미 FBI에 대한 허위진술 혐의를 스스로 인정한 블라고예비치의 말을 배심원단은 신뢰하지 않았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블라고예비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법정을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집에 가서 두 딸(8살, 14살)에게 이 일을 설명해야겠다.”고 말했다. 패트릭 피저럴드 검사는 “5년 전 전임자가 부패 혐의로 유죄 평결을 받았을 때 배심원단은 더 이상 부패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인데 블라고예비치는 그것을 무시했다.”고 말했다. 블라고예비치의 전임자인 조지 라이언 전 일리노이 주지사는 6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블라고예비치를 포함해 1973년 이후 4명의 주지사가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일리노이는 미국에서 대표적인 ‘복마전’으로 꼽힌다. 현 주지사인 패트 퀸은 “더 이상 주지사가 감옥에 가지 않도록 정부를 개혁하라는 사명으로 새기겠다.”고 했다. 공화당 소속 일리노이주 연방상원의원 마크 커크는 “오늘 평결은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경고”라고 했다. FBI 시카고 지국장 로버트 그랜트는 “미국의 사법 정의는 느리지만 결국 진실을 찾는다.”고 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마약상으로 전락한 24세 천재 박사, 결국…

    24세의 촉망받는 생화학도가 마약중독 및 거래법 위반으로 체포됐으나, 사회에 공헌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죄를 면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24일 보도했다. 에드워드 홀랜드(24)는 20대 초반에 생화학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박사과정에 있으며, 생화학연구에 특출한 성과를 내며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집에서 코카인과 대마초 등이 발견됐고, 마약에 중독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홀랜드의 집에서는 코카인 1.7g, 대마초 6.89g과 마약 거래로 얻은 820파운드가 발견됐다. 그는 4개월 동안 5명에게 주당 100~200파운드를 받고 마약을 공급해왔으며, 공급한 마약은 실험 명목으로 사들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법원은 그에게 12개월 형과 사회봉사 200시간을 명령했지만, 최근 재판에서 “그의 재능을 썩힐 수 없다.”면서 “마약상이 되어 오랜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든지, 뛰어난 과학자가 되어 죄값을 보상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어 “지금까지 과학계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다수를 위한 과학기술에 더욱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웨일스 마약·알코올 상담서비스센터의 자넷 로버트는 “에드워드 홀랜드는 삶을 건 계약을 맺었다.”면서 “그는 흔치 않게 얻은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퇴학 숨기려 ‘성폭행 자작극’ 女법대생 결국…

    영국의 한 법대에 다니던 여학생이 강간을 당했다고 자작극을 벌였다가 감옥행이 결정됐다. 영국 노팅엄셔에 사는 대학생 에이샤 마더(19)는 지난 1월 한 남성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지만, 사실 낙제한 사실을 숨기려 꾸며낸 말로 드러났다. 마더는 최근 열린 공판에서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고 대중지 데일리메일이 보도했다. 마더는 한해 전 노팅엄 트렌트 대학에 입학해 홀로 기숙사에 살았지만 공부보다는 쇼핑과 파티에 중독됐다. 결국 용돈을 다 쓰고 낙제까지 해 쫓겨날 신세가 됐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기가 겁났던 여대생은 ‘성폭행 자작극’이란 철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여대생은 부모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어 “도서관에서 나오던 길에 마주친 한 남성이 집까지 따라와서 겁탈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부모가 경찰에 신고하자 마더는 커튼과 옷을 찢거나 헝클어뜨리고 커피를 테이블에 쏟는 등 강간을 당한 것처럼 감쪽같이 꾸몄다. 마더의 철없는 거짓말에 무고한 남성들이 줄줄이 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마더의 진술과 일치하는 문신을 가진 한 남성은 유치장에서 수일간 고초를 치러야 했다.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면서 마더의 거짓말은 들통이 났다. 마더가 사건 당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고 주장했지만 도서관 측에 따르면 그 책은 이미 창고에 보관돼 열람이 안되는 상태였던 것. 경찰의 추궁 끝에 마더는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했다. 필립파 엘리스 변호사는 “마더가 부모에게 말하기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이런 일을 벌였다.”고 그녀를 감쌌지만, 검찰 측은 “무고한 남성들이 피해를 입었고, 경찰의 수사력이 낭비됐다.”고 맞섰다. 결국 법원은 유죄를 확정했고 2년 징역형을 내렸다. 마더는 “돈도 다 쓰고 학교에서도 잘리자 부모 볼 면목이 없어서 그랬다.”며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영국의 또다른 여대생 역시 숙제할 시간을 벌려고 성폭행 허위신고를 해 무고한 남성에 누명을 씌운 혐의로 18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美항공사 ‘똥싼바지’ 승객 탑승거부 논란

    미국의 한 항공사가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내려 입어 속옷을 드러내는 일명 ‘똥싼바지’(Saggy pants) 패션을 한 승객의 탑승을 거부해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 뉴멕시코에 사는 대학생 풋볼선수 드숀 말먼(20)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서 뉴멕시코 행 US 에어웨이 비행기를 탔다가 부적절한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탑승 제제를 당했다. “바지를 엉덩이 아래로 걸쳐 사각팬티가 드러난다.”며 한 스튜어디스가 말먼에 바지를 끌어올려 입을 것을 요구한 것. 말먼이 이를 거부하자 스튜어디스는 곧바로 샌프란시스코 공항 경찰대에 신고해 비행기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출동한 경찰이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말먼이 거칠게 항의하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그는 무단침입 혐의와 함께 경찰 공무집행 방해와 조사불응 혐의가 추가돼 현장에서 체포된 뒤 샌 마테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검찰에서 곧 기소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말먼의 어머니 도나 도일은 “이날이 친구의 장례식 며칠 뒤라 아들이 굉장히 예민한 상태였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말먼 역시 “비행기에 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자 당황했고 승무원의 태도 역시 부정적이라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복장 때문에 철창신세를 지게된 말먼의 사건을 두고 미국 내에서는 탑승 거부는 항공사의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이라는 주장도 적지 않았다. 이에 항공사 대변인 밸러리 워더는 “다른 승객들을 위해서라도 부적절하거나 노출이 심한 복장의 승객은 태울 수 없다.”고 못박았다. 한편 미국 텍사스 주 교통당국은 ‘똥싼바지’를 입은 승객을 버스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허리띠를 착용하지 않고 속옷을 반쯤 내놓게 입은 이 팬츠차림은 교도소 죄수들의 복장에서 시작돼 자유와 힙합문화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지난 10여 년 간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내 정치를 말한다] (6)조승수 진보신당 의원

    [내 정치를 말한다] (6)조승수 진보신당 의원

    대학에서 군사독재 반대를 외치다 제적당하고,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구속됐던 내가 시의원과 구청장을 거쳐 진보정당 최초의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됐다. 단 한순간도 편한 적 없었던 내 인생 한가운데엔 짠 바다 냄새와 메케한 화약 연기가 뒤섞였던 고향 울산이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메카, 진보 1번지가 된 울산. 이곳에서 나는 사회과학 서점을 차리고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법 파견 철폐를 외치며 분신했던 봄날, 내 손을 잡고 “노동자는 하나.”라며 눈물을 글썽일 때 나는 다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진짜배기 진보 정치인으로 서 있겠다고. 진보정치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렇듯 내 정치의 굳은살이 됐다. 어린 시절 난 평소에는 조용한 편이었지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앞장서 대드는 소년이었다. 그런 탓인지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다.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유인물을 돌렸고 1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뒤이어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한번 징역(징역 10개월, 자격 정지 1년)형을 받게 됐다. 1988년 울산에서 인문사회과학 서점(신새벽)을 열고 당구장을 개업하면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민운동과 환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울산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을 만드는 데도 참가했다. 활동을 할수록 ‘이제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32살의 어린 나이에 기초의원 출마를 결정했다. 1998년 최연소 구청장, 민주노동당 창당, 2004년 총선 당선. 조금씩 조금씩 진보 정치의 희망을 일궜다. 30대와 40대를 선출직 공직자로 살아가면서 한나라당, 민주당의 양당 구도가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80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못했다. 국회에서 에너지복지법, 하도급거래 공정화법, 사회복지세법을 만든 것은 작은 시작이다. 이제 진보정치를 향한 더 큰 꿈이 익어가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진보적 교수 단체 등과 오는 9월까지 새로운 진보 통합 정당을 창당하려 한다. 한국 정치 구도를 보수, 자유, 진보로 나누기 위한 첫 발돋움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아들과 함께 ‘등록금 촛불 집회’에 앉아 있는 이 순간에도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는 정치’, ‘밥 먹여 주는 민주주의를 챙기는 정치’를 꿈꾼다. ● “참여당 한·미 FTA 반성 안하면 공조 못한다” →왜 정치를 하나. -(비정규직 노동자 등 어려운 이웃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다. 진보적 의제를 하나하나 이뤄갈 것이다. →최연소 시의원과 최연소(34세) 구청장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나. -큰 선거에만 희망을 쏟지 말고, 지방선거에도 참여해 진보정치를 확산하자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핵심 지지 기반인 현대차 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는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역 핵심 기반과 정치 핵심 의제가 상충하는 것 아닌가. -현대차 노조의 지지는 노동자 권리와 진보정치를 지킨 데 대한 응원이 아닐까. 현대차 노조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현대차 노조의 산별 전환은 노동운동의 대의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다. 진보 전체의 책임을 개별 기업에 물어서는 안 된다. →진보 대통합 논의와 관련, 지난 11일 전국위원회에서 진통이 심했다. -독자파는 합의문 동의안을 상정한 뒤 기권했고, 통합파는 동의안이 성립 안 된다며 기권했다. 정치적인 의사 표현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가 합의문을 왜곡한다며 조 대표를 비판했다. -결혼식 날짜 잡아 놓고 바람 피우는 것 아니냐는 표현까지 당내에서 나왔다. 부적절한 동맹에 대해 언급한 것은 부적절한 언행이다. →그럼에도 이정희 대표와 유시민 국민 참여당 대표가 거리를 좁히고 있는데. -부부가 재결합하려는데 유랑극단 3류 가수가 추파를 던져 불편하다. 유 대표가 진보정치를 소수파 전략으로 폄하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참여당이 신자유주의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성찰하지 않는 이상 동행하기 어렵다. →진보 대통합이 실패할 경우, 다음 진로는.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실패를 가정하고 싶지 않다. →민주당은 진보정당과 합의할 정책이 많아졌다는데.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엔 샛강이 있지만 진보정당과 민주당 사이엔 한강이 흐른다. 시간 낭비다. →분당 때 선도 탈당파였다. 지금 통합에 앞장서는 이유는. -민주당을 대안 세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국민들이 많다. 진보 정치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다. →정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진보 진영 첫 광역단체장을 만들고 싶다(울산시장이냐고 묻자 부정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보스턴 마라톤에 도전하고, 목수가 돼서 내 집을 짓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노회찬·심상정 상임고문을 평가한다면. -노회찬 상임고문은 모든 사안을 대중적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이 있다. 심상정 상임고문은 당차고 친화력과 추진력이 뛰어나다.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를 꼽는다면. -조국 교수, 노회찬·심상정 상임고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 진보 인사들이 국민경선으로 단일 후보를 결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1962년 울산 출생 ▲동국대 생명자원경제학과, 울산대 정책대학원 행정학 석사,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 수료 ▲울산·인천 등에서 현장 노동자 활동 ▲울산 사회과학서점 ‘신새벽’ 운영 ▲민중당·진보정당추진위원회 활동 ▲울산광역시의원, 울산참여연대(준) 공동대표 ▲울산북구청장 ▲진보정치연구소장·에너지정치센터 대표 ▲17·18대 국회의원 ▲(현) 진보신당 대표
  • 줄잇는 정치권 저축銀 비리 연루 의혹

    민주당 저축은행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인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6일 부산저축은행의 퇴출 저지 로비 의혹 과정에 한나라당의 부산 출신 의원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박 전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부산저축은행이 퇴출 저지 로비를 위해 대책회의를 열어 청와대에 탄원서 두 통을 작성해 제출하기로 결정했었다.”면서 “이 과정에서 역할을 한 분이 한나라당의 부산 출신 의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탄원서 한 통이 (해당 부산 의원 측 인사를 통해) 청와대의 한 분에게 전달된 것은 어느 정도 확인됐으며, 나머지 한 통이 어떻게 됐는지는 계속 파악·추적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당 부산 의원이 누구인지, 대책회의 소집 시점이 언제인지 등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박 전 원내대표는 또 “모모 인사들이 구속기소된 신삼길 삼화저축은행 명예회장을 면담했다는 제보가 있어 서울구치소에 면담 기록을 요청했다.”면서 “신 명예회장은 이미 두 번 감옥에 갔다왔고 140억~150억원의 돈을 미납한 채 삼화저축은행을 인수했는데, 어떻게 이러한 로비가 이뤄졌는지, 정진석 청와대 정무수석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동생인)박지만씨와 그 부인 서향희씨의 행동들이 밝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민주당 우제창 의원이 강원저축은행을 위해 금융감독원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우 의원은 지난 3월 금감원 측에 전화를 걸어 강원저축은행에 대한 적발 내용을 보고하도록 했으며, 금감원 관계자들이 우 의원을 만나 조사 내용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금감원은 강원저축은행 비리에 대해 검찰 수사를 의뢰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금감원이 비리 혐의에 대한 검사 도중 의원에게 보고를 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우 의원이 강원저축은행에 대한 징계수위를 낮추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대해 우 의원은 “금감원 측을 불러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며 “저축은행 측에서 금감원 검사가 강압적으로 이뤄진다는 불만이 제기돼 저축은행 측의 소명 기회를 달라고 전달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강주리·안석기자 jurik@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아나키즘’ 운동가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아나키즘’ 운동가

    1200명이나 되는 농노와 드넓은 소작지를 소유한 러시아 귀족의 아들. 황제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근위학교를 수석 졸업하고도 안락한 궁정 생활 대신 시베리아 장교 지원. 시베리아 지형 탐사를 통해 지리학자로 명성을 얻지만 ‘제국지리학회’ 사무관직 거절. 막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혁명운동에 투신. 반체제 운동 주동자로 지목 돼 투옥. 2년 후 탈옥. 그리고 반세기 동안 이어지는 투옥과 추방.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귀국. 그러나 볼셰비키의 아나키즘 탄압.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사망. 10월 혁명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 이것이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의 간략한 프로필이다. 이 정도면 그를 소재로 드라마 한 편을 찍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고뇌에 찬 지식인의 자의식을 보여준 적도 없고 혁명 투사의 화약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의 삶에는 골방 대신 시베리아의 벌판과 눈 덮인 스위스의 산들이 있다. 값싼 봉투를 붙이며 격론을 벌이는 이론가가 있다. 그는 비밀경찰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유산을 포기할 때도, 되풀이되는 추방과 고된 망명 생활에 관해서도 괴로움을 토로하는 법이 없다. ●지식인 운동가의 교만함이 혁명을 왜곡한다 크로포트킨은 솔직 담백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은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공공연함’, 이것이야말로 크로포트킨이 혁명가로서 보여준 최고의 미덕이었다.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사회주의 지식인 운동가들은 공공연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농민이나 노동자들보다 더 안다는 교만함. 민중들은 무식해서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판단할 수도,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오만함. 그런 운동가들은 현실을 계산하고 전술을 찾았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침묵하고, 해야 할 일을 미뤘다. 심지어 전술을 위해 황제와 귀족 편에 서서 농민과 노동자의 봉기를 탄압하기도 했다. 지식인 운동가들의 계몽적 태도와 이로 인한 지도부와 민중 사이의 괴리. 이 사이에서 혁명은 왜곡되고 비밀주의로 물들었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괴리를 거부한다. 현실이 어려운가? 그럼 공공연히 말하라. 그럼 답은 온다. 해야 하는가? 그럼 공공연히 하라. 그럼 된다. 이 간단한 원칙이 그의 삶 전부다. ●아나키스트, 생각한 대로 행동하라 1878년 경 유럽 전역에서 왕에 대한 암살이 네 차례나 시도되었다. 유럽 정부들은 이 음모의 주동자들을 스위스가 숨겨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스위스는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인 쥐라연합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쥐라연합의 많은 지도자들이 추방당하고 망명 생활에 오르게 됐다. 결국 기관지 편집 일이 크로포트킨에게 맡겨졌다. 이제 막 러시아 감옥에서 탈출한 망명자 크로포트킨,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듀마르트리, 제네바 출신의 내성적인 사나이 헤르치히. 이 세 사람은 1879년 제네바에서 ‘반란자’를 창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인쇄소에 압력을 넣었다. “정부에서 일을 받지 못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반란자’를 인쇄해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매우 실망하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듀마르트리는 오히려 열정과 희망에 불타 있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3개월 동안 신용담보로 인쇄기를 사면 됩니다. 3개월이면 기계 값을 지불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돈이라곤 겨우 200~300프랑밖에 없지 않소?” 나는 반대했다. “돈이란 우스운 겁니다.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우선 기계를 주문해서 다음 호를 내면 돈이 모일 겁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리는 기계를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 호를 우리의 ‘쥐라 인쇄소’에서 찍고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우리 모두가 직접 인쇄했다. 과연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동전과 소액의 은화였지만 어쨌든 돈이 모였다. 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없다. 이것이 크로포트킨이 좌절한 이유였다. 하지만 듀마르트리는 어땠는가. 그는 말한다. 활동을 해야 돈이 생긴다. 그러니 활동을 하자. ‘반란자’는 그렇게 21년간 발행되었다. ‘이론가’ 크로포트킨에게 ‘못 배운 노동자’들은 언제나 배움을 통해 삶의 길을 열어주는 동지였다. 어려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움을 과도한 비장함으로 포장할 뿐아니라 너무도 쉽게 좌절했다. 노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판단했으며, 꾸밈없고 단순하게 문제를 받아들였다. 혁명가를 자청하는 지식인들이 문제를 분석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문제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갔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손 사이에 어떠한 간극도 없음! 크로포트킨은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이 혁명의 출발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길을 간다. 막대한 유산 상속, 위로부터의 개혁을 위한 관료로서의 삶, 학계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얻게 될 명예와 힘.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가진 간극 없는 삶을 배우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을 바꾸려면 자신의 삶부터 바꿔라! 이것이 그가 살아낸 아나키즘이었다. ●레닌에게 물었다 “우리란 누굴 말하는 겁니까?” 러시아 2월 혁명.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온다. 이어진 10월 혁명.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어간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그래도 호랑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법. 레닌은 1919년 크로포트킨을 만난다. 레닌은 크로포트킨의 ‘프랑스혁명사’를 극찬하며, 이 책을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고 싶다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그 책을 정부인쇄소가 아닌 소비조합과 같은 곳에서 출판할 조건을 내건다. 레닌, “희망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우리는 전적으로 편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크로포트킨, “우리란 누굴 말하는 겁니까? 정부 말인가요?” 허를 찔린 레닌은 대답을 얼버무린다. 레닌은 여전히 혁명을 도달해야 할 무엇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혁명의 중간 단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크로포트킨의 생각은 달랐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상호부조·相互扶助)” 이것은 도달해야 할 이념이 아니라 자연 법칙이고,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일구는 현재적 조건이었다. 제도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그 의도가 아무리 민주적일지라도 지배 기구는 모두 악”이다. 국가를 위시한 온갖 사회적 제도들은 만인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둔다.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결국은 하나의 제도로 새로운 노예 상태를 만들어 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로 인해 가려진 인간 본성, 그 상호부조의 본성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혁명의 지점은 여기에 있었다. 혁명의 지도자든 농민이든 노동자든 바로 그 자신의 삶에서 이 본성을 찾아내고 구현해야 한다. 때문에 크로포트킨에게 노동자를 ‘위한’ 활동은 없다. 혁명은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의 주체와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직접 노동자가 ‘되는’ 활동을 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배운 만큼 글로 써 내려갔다. 배움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실천. 이 과정을 통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사상의 이론가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이 최후에 쓰고자 했던 책은 ‘윤리학’이었다. 이것은 혁명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크로포트킨의 질문은 ‘노동자들을 위한 세상이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만이 혁명가였다. 폭약 냄새와 무질서, 혹은 대규모 시위로 혁명을 떠올리는 우리들 앞에, 크로포트킨은 이런 혁명가의 초상으로 우뚝 서 있다. 신근영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아랍의 봄’보다 더딘 ‘여성의 봄’

    ‘아랍의 봄’보다 더딘 ‘여성의 봄’

    ‘아랍의 봄’으로 상징되는 중동 민주화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권리가 미약한 중동 지역에서 ‘여성의 봄’이 찾아오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아랍의 봄’에서 드러난 여성의 피해 사례는 부지기수다. 최근에는 이집트에서 시위 도중 체포된 여성에 대해 처녀성을 검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 CNN 방송은 31일(현지시간) 이집트 장성급 군인의 말을 인용, “군부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 시위대의 주장을 묵살하기 위해 애초부터 처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처녀성 검사’를 했다.”고 밝혔다. 그는 “군에 구금됐던 이들은 타흐리르 광장의 텐트에서 남성 시위대에 뒤섞여 있던 여성들”이라며 여성 시위대의 정조 관념을 문제 삼기도 했다. 리비아에서는 정부군이 조직적으로 반(反)정부군 장악 지역에서 성폭행을 일삼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방송은 “상관이 작전 개시 전에 비아그라와 같은 성 기능 개선제까지 지급하면서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지시했다.”면서 “감옥에 수감된 다른 정부군 투항 병사들도 끔찍한 성폭행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정조 관념이 절대적인 중동 사회에서 이들이 피해 사실을 밝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심지어 성폭행을 당했어도 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살해를 당하는 ‘명예살인’이 한해 5000건 가까이 발생하는 지역이 이곳이다. 정부군은 이런 상황을 교묘히 악용해 처녀성 검사나 성폭행을 여성 시위대를 무력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아랍의 봄’이 찾아와도 아랍 여성들의 고통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아랍의 봄’의 발화점이었던 튀니지에서는 지난 1월 독재자 벤 알리가 축출된 직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의 가두 행진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여자들은 부엌을 지키는 존재”라는 비아냥이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도 대통령 출마 자격을 남성으로 제한한 헌법은 고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여성의 복장에 비교적 관대했던 이집트 일부 지역에서는 (혁명 이후) 급진적 이슬람 세력의 힘이 강해지면서 다시 온몸에 히잡을 두르고 있다.”고 밝혔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중동 반정부 시위도 결국 남성들끼리의 권력 교체일 뿐, 명예살인이나 할례와 같은 여성 인권 문제와는 무관하다.”면서 “이번 시위로 인해 여성 인권이 즉각적으로 향상되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강국진 순회특파원 중동을 가다] (1) ‘재스민혁명 150일’ 이집트 현지 르포

    [강국진 순회특파원 중동을 가다] (1) ‘재스민혁명 150일’ 이집트 현지 르포

    2일은 ‘재스민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중동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지 150일이 되는 날이다. 1월 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야채 행상을 하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자살로 촉발된 중동의 민주 혁명은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예멘, 리비아, 바레인 등으로 이어지면서 삽시간에 2011년을 중동 혁명의 해로 만들었다. 특히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30년 철권통치를 몰아낸 이집트의 민주 혁명은 중동 지역 전체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혁명 150일. 지금 중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집트 민주화의 성지 타흐리르 광장의 모습을 시작으로 민주화의 새 아침을 열고 있는 중동의 다양한 표정을 현지 르포와 전문가 진단 등을 통해 6회에 걸쳐 짚어 본다.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성지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이곳은 지금 두 얼굴이 공존한다. 아니 무슬림의 주일인 금요일과, 금요일이 아닌 나머지 6일의 그것으로 얼굴이 바뀐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철권독재는 사라졌지만, 민주화는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고, 그 자리를 혼돈이 눙치고 앉아 있었다. 지난 30일 기자가 찾은 타흐리르 광장은 불법주차 차량들로 넘쳐났다. 혁명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이다. 경찰 한 명이 차를 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곧바로 그 경찰은 수십명의 군중에 둘러싸여 버렸다. 경찰이 노점상과 불법주차 차량을 단속하려 하자 군중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떠들어도 도저히 안 먹히자 경찰은 결국 지원을 요청했고 곧이어 경찰 서너 명이 더 나타났다. 그러나 경찰과 군중들의 실랑이는 그로부터 한참 더 이어졌다. 옥신각신 끝에 결국 불법주차했던 차 주인이 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노점상이 물건들을 주섬주섬 거둬들이는 것으로 실랑이는 끝이 났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바로 옆에 불법주차돼 있는 수십대의 차량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듯 경찰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석달 전 타흐리르 광장을 뜨겁게 달궜던 민주화의 열기는 이렇게 표정을 바꿔 가고 있었다. 독재자를 몰아낸 이 시민의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타흐리르 광장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독재는 몰아냈지만 그 자리를 메울 민주적 질서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혁명의 발단이 됐던 식품가격 상승도 여전히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관광객이 줄면서 최대 수입원인 관광산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정권퇴진 운동이 정점으로 치닫던 1월 말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치안 역시 불안하다. 관광객들을 다시 불러 모으려면 치안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정작 시민들은 불법주차 단속 같은 정당한 공무집행조차도 경찰 말이라면 일단 반발부터 한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퇴진과 함께 추락한 공권력의 권위는 이처럼 아직도 바닥을 기고 있었다. 지금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의 무질서를 상징한다. 사람들은 뭔가 조급해 한다. 차선과 신호등도 없는 곳이 태반인 카이로 시내 도로에선 과속과 난폭운전이 부쩍 늘었다. ●페이스북으로 집회 참석한 학생들 그러나 이것이 타흐리르 광장의 모든 것은 아니다. 이보다 앞서 지난 27일, 즉 금요기도회가 열린 광장은 전혀 딴판이었다. 평소엔 귀청을 울리는 경적소리와 난폭운전으로 난리법석이지만 금요일만은 해방구로 변신했다. 무바라크 퇴진 운동과 함께 시작된 수십만명의 집회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다. ‘타흐리르’는 아랍어로 ‘해방’이란 뜻이다. 금요일만은 이름값 제대로 하는 광장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광장은 여전히 삼엄했다. 그러나 경비는 경찰이 아닌 시민들이 섰다. 기자가 광장에 들어설 때에도 시민들로 이뤄진 자율대원들의 검문을 받았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하자 환영한다며 길을 내줬다. 10m쯤 더 가자 이번에는 소지품 검사와 몸수색을 한다. 검색이라고 해 봐야 1~2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이를 통해 위험한 물건이나 수상한 사람들이 광장에 섞여드는 걸 막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 주변에 모여 있는 대학생들에게 집회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물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집회에 참가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혁명 당시 광장에서 노숙하며 농성을 했다. 한 학생은 당시 친정부 시위대가 휘두른 각목에 맞아 다리를 다치기도 했다. 이들에게 오늘 집회에 왜 나왔느냐고 물었다. “이집트의 미래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한마디로 이렇다. “무바라크를 감옥에 보내야 한다.” 짧은 검문을 마치자 붓을 든 한 사람이 다가와 왼쪽 팔에 이집트 국기와 숫자 ‘25’를 그려 준다. 검문을 통과했다는 인증인 줄 알고 팔을 내맡기고 그림을 다 그린 뒤 ‘고맙다’고 했더니 “20파운드”라고 했다. 알고 보니 시위대와 무관한 장사꾼이다. 혁명을 상징하는 티셔츠, 국기, 그리고 국기를 팔에 그려 주는 노점상은 타흐리르 광장을 누비며 대목을 한껏 누리고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 중심부에 들어섰다. 플래카드가 여럿 걸려 있었다. “국민들은 무바라크와 부패 정치인을 재판하길 원한다.” “국민들은 혁명과 언론 자유를 원한다.” “국민들은 군사재판을 원하지 않는다.” 광장 곳곳에 무대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주최 단체가 아예 없다.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로 타흐리르 광장은 금요일에는 언제나 붐빈다. 혁명이 낳은 새로운 풍속도다. 정당이나 단체들은 각자 알아서 무대를 설치하고 연설을 하며 청중들에게 호소한다. 그런 연단이 광장 주변에 다섯 곳이 넘는다. 사람들은 각자 광장 주변을 돌아보며 연설도 듣고 이런저런 피켓과 플래카드도 살펴본다. 그러다 정오가 되면 다같이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다시 오전과 똑같은 모습이 저녁까지 이어진다. 연단에서 한 연사가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여전히 원하는 게 많다.”며 열변을 토했다. 연설 뒤에는 구호와 노래가 뒤를 이었다. 2-2-3으로 박자를 맞추는 구호 역시 혁명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무대에서 울려퍼지는 경쾌한 노래 역시 혁명 와중에 나온 ‘민중가요’다. “이집트 사람이라면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라는 노래가사에 맞춰 연단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국기를 흔들며 호응했다. ●여성들 ‘보수’ 벗고 화려한 옷차림 광장엔 온갖 사람들로 넘쳐 났다.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들까지 각양각색이다. 가족단위 참가자도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중동권에서 가장 개방적이라는 말이 실감나듯 다양한 복장을 한 여성 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족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히잡을 멋스럽게 머리에 두른 젊은 여성은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사진 찍는 걸 거부했다. 화장을 안 해 사진이 예쁘게 안 나올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 말고도 광장 곳곳에서는 다양한 색깔을 한 히잡과 화려한 옷차림으로 멋을 낸 젊은 여성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부르카를 입은 여성, 머리를 드러낸 여성도 있다. 사실 이집트는 1960년대 이전까지 카이로 시내에선 히잡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이 넘쳐났던 카이로가 50년 가까운 보수화 뒤에 다시 기지개를 펴는 셈이다. 30년 독재를 이겨낸 혁명은 ‘이집트’를 호출하고 있다. 모두가 이집트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자신들의 손으로 독재자를 몰아냈다는 자부심과 결합하면서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이집트를 사랑한다’거나 ‘1월 25일’이라고 쓴 티셔츠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몇 달 전만 해도 국기는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 응원물품에 불과했다. 국기를 파는 한 노점상은 20이집트파운드에 판매하는 국기가 잘 팔린다며 흡족한 표정이다. 오늘 얼마나 팔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70개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단다. ●혁명 도화선 식품가격은 여전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한 중년 남성이 한 손엔 이집트 국기를 들고 젊은 여성과 어린이와 함께 광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정부에서 일한다는 것 말고는 자세한 자기소개를 거부한 이 공무원은 시골에 사느라 그동안 집회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딸과 외손자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광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집트는 미래가 밝습니다. 우리에겐 우수한 인재도 많고 자원도 많습니다. 잘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광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마흔 살이 넘도록 지금까지 선거에 참여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독재정권을 지지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투표를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랬던 그가 오는 9월 총선과 11월 대선을 손꼽아 기다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선거인데 무척 설렙니다. 이집트를 이끌 지도자를 우리 손으로 뽑는 것이잖아요.” 혁명의 발단이 됐던 식품가격은 여전히 내릴 줄 모른다. 정치 격변 한편에선 극단주의 정당이 활동을 시작했다. 공권력은 무너졌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기자 앞을 스쳐가는 한 승용차의 뒤쪽 유리창에 큼지막하게 써붙여진 문구는 이집트인들이 지금 중동의 새 역사를 직접 써가고 있음을 웅변했다. 뒷유리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난 이집트가 자랑스럽다.” 글 사진 카이로 강국진 순회특파원 betulo@seoul.co.kr
  • [주말 영화]

    ●고질라(OBS 일요일 밤 11시 15분) 프랑스는 남태평양 프렌치 폴리네시아 군도에서 30년간 수차례의 핵실험을 강행했다. 핵폭탄의 눈부신 섬광과 엄청난 위력에 섬에 살고 있던 파충류들과 해안에 살고 있던 각종 생물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다. 시간이 지나 남태평양에서 조업 중인 초대형 일본 원양어선이 침몰되어 자메이카의 해변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되고, 파나마의 숲과 해안에서는 뉴욕으로 향하는 초대형 발자국이 발견된다. 이에 체르노빌에서 핵오염 이후의 지렁이 DNA 돌연변이를 연구하던 핵감시 위원회 소속의 타토폴로스 박사와 미 국무부가 급파한 여류 생물학자 엘시 채프먼이 사건을 조사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미국 해안에 정박된 배들이 일시에 뒤집어지고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재해가 잇따른다. 조사 결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생명체가 뉴욕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마침내 뉴욕에 나타난 이 괴물은 거대한 생명체 ‘고질라’로 뉴욕의 빌딩들은 거대한 괴력에 초토화돼 가고, 닉은 이 괴물이 무성생식으로 알을 품었거나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스토마고(KBS1 토요일 밤 1시) 영화는 브라질의 한 감옥에서 시작된다. 교도소 생활이 진행되는 가운데 플래시백으로 과거 이야기가 전개된다. 노나타는 돈 한푼 없는 무일푼으로 시골에서 대도시로 들어온다. 한 허름한 식당에서 무전취식하다가 주인에게 걸렸고, 그 대가로 부엌 옆의 조그만 골방에서 숙식하며 식당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요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주방을 맡게 된 이후 그가 만든 크로켓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한편 창녀인 일리나는 노나타가 만든 크로켓의 기막힌 맛에 홀려 공짜로 먹는 대신 노나타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사이가 된다. 또 손님 중에 유명한 이태리 식당 보카치오의 주인이 우연히 그 맛을 보고 노나타를 스카우트하게 되는데…. ●훌라 걸스(MBC 일요일 밤 12시 40분) 1965년 일본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탄광마을. ‘하와이안 댄서 모집’ 전단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소녀 사나에. 그녀는 이것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친구 기미코를 설득한다. 폐광의 운명을 맞은 마을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탄광회사가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바로 하와이안 센터를 유치하기 위한 훌라 댄스 쇼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춤 선생 마도카가 도쿄에서 내려오고, 본격적인 훌라 연습은 시작된다. 기미코는 훌라 댄스를 배운다는 사실에 불같이 화를 내는 엄마에 맞서 집을 뛰쳐나와 댄스 교습소에서의 힘든 생활을 시작한다. 한편 겉으론 화려한 댄서이지만 아픈 사연을 간직한 마도카는 이러한 소녀들의 모습에 감동해 시들었던 자신의 꿈이 소중하게 되살아남을 느낀다.
  • 韓·中작가 정지아·한사오궁의 ‘유쾌한 문학 대담’

    韓·中작가 정지아·한사오궁의 ‘유쾌한 문학 대담’

    첫 만남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상대방의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다.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잘 알려진 소설가 정지아(46)의 몇몇 작품은 영문으로 번역됐지만 중국 소설가 한사오궁(韓少功·58)에게는 낯설었고, 국내에 번역 출간된 한사오궁의 수필집 ‘산남수북’(山南水北), 장편소설 ‘마교사전’(馬橋詞典) 등 몇 작품 역시 정지아의 독서 편력에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맞춘 듯 서로 꼭 들어맞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낮고 겸손한 시선이 하나였고, 생명을 경외하는 열정도 마찬가지였다. 상업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작가의 물질적 곤궁함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국과 중국에서 눅진한 흙냄새 풍기는 농사꾼이자 치열하게 원고지 붙잡고 씨름하는 작가라는 사실이 언어의 다름, 경계의 차이를 넘어 둘을 스스럼없이 만나게 했다. 정지아, 한사오궁이 26일 서울 종로1가 대산문화재단 회의실에서 만났다. ‘세계화 속의 삶과 글쓰기’를 주제로 지난 24일 개막한 서울국제문학포럼이 계기가 됐다. 1시간 30분에 걸친 둘의 대화는 유쾌했고, 진지했다. 과학기술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선험적, 지성적, 비판적 통찰이 질문으로, 대답으로 오갔다. 둘은 통역을 제쳐 두고 만나자마자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정지아는 “부모님이 모두 남한 사회가 반대하는 이념을 가진 사회주의자였고, 그런 이야기들은 남한에서는 금기시된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던 이들이 변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신념은 지금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등을 작품에서 주로 다뤘다.”고 말을 건넸다. 한사오궁은 “오오, 그런가. 그러면 당신은 어떤가.”라고 슬쩍 되물었다. 정지아는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아마 내가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눙치더니 이내 “사회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말을 고쳤다. 이쯤에서부터 통역이 끼어들었다. 대화의 속도는 조금 더뎌졌지만, 더욱 깊어지고 묵직해졌다. 한사오궁은 “중국에서도 1980년대 이전 이데올로기 분쟁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을 버는 좌파와 우파, 돈을 벌지 못하는 좌파와 우파로 나뉠 뿐”이라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다 된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이데올로기”라고 말했다. 정지아는 “기존의 이념을 뛰어넘어 세상이 시장과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붙잡혀 있다는 말씀이지요?”라고 말을 받은 뒤 “한 선생님은 돈을 버는 좌파인가요?”라고 한 걸음 더 내쳤다. 그는 “100만~200만권씩 팔리는 베스트셀러 작가야 돈을 벌겠지만 나는 그저 10만~20만권 팔리는 정도”라면서 “그나마 중국 출판 시장이 크니까 겨우 살아가게는 한다.”고 받았다. 엄살에 가깝다. 그는 200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예기사 작위를 받고, 2007년 루쉰문학상을 받은 저명한 작가다. 현재 하이난성작가협회 주석이며 모옌(莫言), 위화(余華) 등과 함께 중국 문단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힌다. 그는 이 대목이 대화에 언급되자 손가락으로 ‘×자’를 만들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믿지 말라. 노벨문학상은 올림픽처럼 계량해서 점수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또한 엄살에 가깝다. ●시골생활 예찬론자끼리 만나다 정지아는 “한 선생님의 포럼 발제문 ‘수요와 욕구’를 읽고 탐욕에 대한 경계 등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면서 “10여 년 전에 시골에 내려가서 사신다고 하는데 저도 최근 시골로 내려갔다.”고 말했다. “어떤 연유로 시골로 내려가셨나. 고향인가.”라는 한사오궁의 질문에 정지아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시골의 풍경이 핏줄기 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도시에서는 여러 욕망들을 버리기 쉽지 않았는데, 시골에서 흙 만지며 야채 키우다 보면 그런 것들이 절로 사라진다. 쾌적하고 평화롭다.”고 답했다. 한사오궁은 “맑은 날 열심히 농사짓고, 비오는 날 책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생활이라고 했다(청경우독·晴耕雨讀). 손과 발, 머리를 모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자본주의, 특히 도시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건강하지 않다.”고 맞장구쳤다. 한사오궁의 수필집 ‘산남수북’은 루쉰문학상 수상 작품이며 ‘중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평까지 얻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배경이 된 후난(湖南)성 바시동(八溪洞)은 문화대혁명 시절 그가 청년 지식인으로 하방을 간 곳으로 11년 전부터 그곳에서 매년 4월부터 11월까지 지내며 농사짓는 곳이다. 한사오궁은 바시동을 ‘제2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작가로서 실존적 고민을 나누다 정지아는 “근대문학의 위기, 시장의 변화 등으로 작가들이 괴로운 시절이다. 이런 시대에 작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 고민스럽다.”고 내밀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한사오궁은 계면쩍은 표정으로 “나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어떡하겠나. 계속 밀고 나가고, 그리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스 신화를 보면 끊임없이 돌을 굴렸다가 떨어진 돌을 다시 굴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시포스가 있지 않나. 사람의 인생도 똑같다. 작가의 인생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말했다. ‘교과서 중심으로 복습 철저’와 같은 식의 모범답안이지만 정지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없이 써야만 하는 것이 작가의 숙명이라는 말씀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고향 인구가 계속 줄어들다가 2년 전부터 미미하지만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해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삶이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희망은 살아있는 것이지요.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고요.” 한사오궁은 “맞다. 나빠도 그 범위 안에서 나빠지고, 좋아도 그 범위 안에서 좋아진다. 욕망도 절망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그 과정은 우리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서로 희망을 나눴다. 정지아는 우직하게 사실주의 기법을 틀어쥐며 작품 활동을 하는, 문단에 몇 남지 않은 작가다. ‘빨치산의 딸’뿐 아니라 ‘행복’, ‘봄빛’, ‘숙자 언니’ 등 자본주의사회에 남은 사회주의자들의 모습과 내면을 핍진하게 풀어가는 작품을 주로 썼다. 리얼리스트 정지아 역시 사회주의자들 못지않게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사오궁은 “정 선생의 작품이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다니 아쉽긴 하지만 영어로 된 책을 찾아 읽어 보겠다.”면서 “다음에 중국 오시면 꼭 연락해 달라. 내가 직접 마중나가고 또 직접 기른 토마토와 야채도 맛보여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정지아가 활짝 웃으며 “혹시 노벨문학상 받은 뒤에도 여전히 유효한 약속인가.”라고 묻자 한사오궁은 “노벨문학상보다 직접 가꾼 토마토가 더 중요하다.”고 맞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한사오궁은 정말 토마토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정지아는 각자 직접 가꾼 고추와 토마토를 나누자고 했다. 땅 일구는 이들은 보통의 도시 사람보다 조금은 더 욕망을 무화하는 능력이 탁월함을 두 작가가 보여 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사오궁은… 한사오궁은 중국 후난사범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대표적 문예지 ‘줘자’(作家)로 등단했다. ‘뿌리 찾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심근문학(尋根文學)의 대표 주자로서 현대 중국문학의 거장이다. 작품 속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을 바탕으로 소재와 형식 등 중국의 전통을 재현하려 한다. ‘아빠, 아빠, 아빠’(爸爸爸), ‘유혹’(誘惑), ‘빈 성’(空城), ‘열렬한 책읽기’ 등의 작품이 있다. 하이난(海南)성 작가협회 주석이지만 후난성 바시동에서 살며 가을걷이가 마무리돼야 하이난다오로 돌아갈 정도로 시골 생활에 흠뻑 빠져 있다. 첫 중국인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200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오싱젠(高興建)은 중국 출신 프랑스인이다. ■ 정지아는… 정지아는 전남 구례가 고향이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 빨치산이었던 부모님의 실제 삶을 그려낸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1990년 실천문학에서 펴내며 등단했다. 소설은 출간 직후 판매금지됐다. 작가 자신도 3년 가까이 수배 생활을 하는 등 혹독한 필화사건을 겪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고욤나무’가 당선돼 안정적으로 ‘제도권’에 진입했다. 가족사적인 배경이 그러하듯 비극적인 현대사의 중심과 주변에서 역사를 직조했던 개인들의 상처와 희망, 불안 등을 주되게 다루고 있다.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소설상 등을 받았다. 올 초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 ‘연세(年貰) 200만원’에 집을 얻고 낮에는 밭 가꾸고 저녁에는 글쓰는 단출하고 정갈한 삶을 시작했다.
  • “북한은 한국 발전상 보면서도 왜 그렇게 군사력 증강하는지…”

    “북한은 한국 발전상 보면서도 왜 그렇게 군사력 증강하는지…”

    “토크쇼의 형식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매체가 아무리 많이 생겨나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對話)이기 때문이지요. 로봇 토크쇼나 전자 토크쇼 같은 것은 앞으로도 안 나올 것 같은데요.” ‘토크쇼의 제왕’ 래리 킹(77)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대화’를 강조했다. 25일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 2011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그는 “디지털 기술이 끊임없이 발전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사람들과 연결을 시도하라.”고 주문했다. ●“넬슨 만델라에게 가장 큰 영감” 1957년부터 53년간 방송인으로 활동한 그는 25년 동안 진행했던 CNN 시사대담 ‘래리 킹 라이브’에서 지난해 12월 하차했다. 그가 인터뷰한 유명인사들은 빌 클린턴·버락 오바마·블라디미르 푸틴 등 각국 정치인부터 경제인,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5만여명에 이른다. “무수한 사람들 중에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입니다. 특히 만델라 대통령의 경우 25년간 감옥에 수감되는 고난을 겪었지만, 백인 사회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대신 평화를 택한 사람이지요. 제가 남아공에 가서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어떤 종교지도자보다도 더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말 자기 프로그램을 그만둔 뒤의 소회에 대해서는 “끔찍하다. 내가 이렇게 그리워할 줄 몰랐다.”면서 웃었다.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만뒀는데, 최근 오사마 빈라덴이 죽고 일본에서 비극적인 사태도 벌어지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하야하는 등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정말 방송을 다시 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는 “디지털 기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방송을 통해 수많은 인간적 연결을 해왔기 때문”이라면서 “위성을 통해 연설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을 직접 찾아온 것은 인간과 인간의 유대감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국인 중 단 한 명을 인터뷰하게 된다면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아무래도 북한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암시했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사악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싶어요. 북한 지도자들은 왜 그렇게 군사력을 증강하는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상을 보면서도 무슨 생각으로 현재의 방식대로 통치하는지가 무척 궁금하군요.” ●“고엽제는 어디서든 정당화될 수 없어” 그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연결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은 한 핏줄로 이어져 있잖습니까. 북한이 먼저 남한에 연결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남한이 먼저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화학물질 매몰에 대해서는 “화학물질은 물론 미군이 곳곳에 심어 놓은 지뢰에 대해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고엽제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부고] ‘부산 美문화원 방화 사건’ 주도 김은숙씨 하늘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했던 김은숙씨가 위암 투병 중 24일 오전 7시 40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숨졌다. 52세. 김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미국이 눈감고 있는 것에 분노해 82년 문부식·김현장씨 등 부산 지역 대학생들과 함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5년 8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지난달에는 임수경씨 등 지인들이 그녀의 쾌유를 비는 ‘작은 음악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김씨의 동생은 “어제 갑자기 하혈을 하고 의식을 잃으면서 상태가 나빠졌다.”면서 “숨지기 직전 산소호흡기를 뗀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사랑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김씨를 곁에서 후원해온 통일운동가 임수경씨는 이날 오전 트위터에 “김은숙님의 온가족이 밤새 병상을 지켰다.”면서 “주치의 선생님이 야간 당직이라 수시로 환자 상태를 봐 주셨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제발 힘을 내세요.”라고 쾌유를 비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러나 김씨는 2시간여 뒤 눈을 감았다. 김씨는 감옥에서 나온 뒤 소설과 번역서를 펴내며 두 딸과 생계를 이어 갔다. 지난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기 전까지 서울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자녀를 돌보는 ‘참 신나는 학교’를 운영했다. 김씨는 지난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사단법인 오월어머니집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어머니들에게 주는 ‘제5회 오월어머니상’을 받기도 했다. 김씨의 빈소는 녹색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6일 오전 9시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6)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6)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괴로워진다. 사람들의 법의학 지식을 마구 늘려 주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아는 게 많아지면 그들이 현장에 남기는 흔적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장에 아무것도 전혀 안 남길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남는다. 법의학에서는 이런 초미니 흔적들을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극미세 증거가 때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한 방으로 작용한다. 1. 처참하게 살해된 천안 모녀 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주택가. 유모(당시 70세)씨가 다급한 비명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집이었다. 앞마당에는 이집 딸(당시 20세)이, 안방에는 엄마(당시 48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두 명 모두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출혈성 쇼크사. 주검은 처참했다. 범인은 특히 이집 엄마에게 원한이 많은 듯했다. 목과 등에 20곳에 걸쳐 상처가 나 있었다. 딸은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을 베였다. 곳곳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족적이 있었다. 경찰은 일단 치정(痴情) 살인에 무게를 뒀다. 경찰은 150여점의 현장 혈흔을 포함해 200여개의 방대한 증거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증거가 많은 만큼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2. 증거품 200여개 중 단서 없어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원 유전자분석실. 증거는 많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용의선상에 올린 피해자 주변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현장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범인의 족적도 개수만 많았을 뿐 발 치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피 묻은 증거품이 많으면 단서가 될 만한 것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하면 피해자의 혈흔이 다른 증거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난관에 부딪친 국과원은 마지막으로 ‘최고로 구린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피해자의 집 뒤뜰에 똬리를 틀고 있던 대변이었다. 경찰은 대변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이 사건 현장의 혈흔 족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대변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이송됐다. 3. 대변에 섞여 있던 범인의 DNA 이제 해야 할 일은 대변 속에 담긴 ‘범인의 DNA’를 찾아내는 것.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 대변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DNA를 품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의 뱃속에서 다른 형태로 바뀐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대변에서 채취해야 하는 것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오는 동안 표면에 묻는 장(腸) 상피세포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꽁꽁 얼린 뒤 면봉으로 겉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대변의 속보다는 표면에 상피세포가 더 많이 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출한 세포를 원심분리기와 증폭기에서 돌렸다. 얼마 후 대변의 주인이자 DNA의 주인인 범인이 밝혀졌다. 이웃집 남성 천모(55)씨였다. 천씨는 살인에 썼던 도구를 몰래 버리는 모습까지 경찰에 발각되자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천씨는 “죽은 여인이 내가 과거 절도범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내 애인 등에게 떠벌리고 다녀 이를 따지러 갔다가 홧김에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 3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고도 했다. 4. 카펫 섬유·모발… 작아서 장점이자 단점 미세증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피해자를 말았던 카펫에서 나온 섬유,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모발, 범행도구에 묻은 페인트 등이 말하자면 모두 미세증거물이다. 대변은 미세증거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처럼 대부분 미세증거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눈에 안 띌 정도로 작다는 것은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장에서 증거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범죄자가 흔적으로 남겨 놓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덕에 현재 수사 당국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세한 물품에서도 증거를 가려낼 수 있다.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1g)만큼의 극미세 DNA도 검출해 주인을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오염도 쉽고 분해되는 일도 많은 DNA가 원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5. 에필로그:범인의 대변 긴장 탓? 미신 탓? 천씨는 왜 화단에 대변을 본 걸까.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본인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흉기를 품에 지니고 피해자 집에 간 점 등을 감안할 때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었다.”면서 “아무리 간 큰 범죄자도 범행 전엔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천씨의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절도범의 미신’ 때문으로 추측했다. 그는 “절도범들은 범행 현장에서 대변을 보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데, 과거 절도 경력이 있던 천씨가 그대로 따라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대변 속 100억분의 1g의 DNA를 찾아라. 미세증거물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괴로워진다. 사람들의 법의학 지식을 마구 늘려 주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아는 게 많아지면 그들이 현장에 남기는 흔적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장에 아무것도 전혀 안 남길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남는다. 법의학에서는 이런 초미니 흔적들을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극미세 증거가 때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한 방으로 작용한다.    1. 처참하게 살해된 천안 모녀  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주택가. 유모(당시 70세)씨가 다급한 비명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집이었다. 앞마당에는 이집 딸(당시 20세)이, 안방에는 엄마(당시 48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두 명 모두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출혈성 쇼크사. 주검은 처참했다. 범인은 특히 이집 엄마에게 원한이 많은 듯했다. 목과 등에 20곳에 걸쳐 상처가 나 있었다. 딸은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을 베였다. 곳곳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묻은 족적이 있었다. 경찰은 일단 치정(痴情) 살인에 무게를 뒀다. 경찰은 150여점의 현장 혈흔을 포함해 200여개의 방대한 증거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증거가 많은 만큼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2. 증거품은 많지만 단서는 없었다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원 유전자분석실. 증거는 많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용의선상에 올린 피해자 주변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현장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범인의 족적도 개수만 많았을 뿐 발 치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피 묻은 증거품이 많으면 단서가 될 만한 것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하면 피해자의 혈흔이 다른 증거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난관에 부딪친 국과원은 마지막으로 ‘최고로 구린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피해자의 집 뒤뜰에 똬리를 틀고 있던 대변이었다. 경찰은 대변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이 사건 현장의 혈흔 족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대변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이송됐다.    3. 대변에 섞여 있던 범인의 DNA  이제 해야 할 일은 대변 속에 담긴 ‘범인의 DNA’를 찾아내는 것.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 대변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DNA를 품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의 뱃속에서 다른 형태로 바뀐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대변에서 채취해야 하는 것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오는 동안 표면에 묻는 장(腸) 상피세포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꽁꽁 얼린 뒤 면봉으로 겉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대변의 속보다는 표면에 상피세포가 더 많이 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출한 세포를 원심분리기와 증폭기에서 돌렸다. 얼마 후 대변의 주인이자 DNA의 주인인 범인이 밝혀졌다.  이웃집 남성 천모(55)씨였다. 천씨는 살인에 썼던 도구를 몰래 버리는 모습까지 경찰에 발각되자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천씨는 “죽은 여인이 내가 과거 절도범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내 애인 등에게 떠벌리고 다녀 이를 따지러 갔다가 홧김에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 3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고도 했다.    4.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나 양날의 칼  미세증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피해자를 말았던 카펫에서 나온 섬유,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모발, 범행도구에 묻은 페인트 등이 말하자면 모두 미세증거물이다. 대변은 미세증거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처럼 대부분 미세증거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눈에 안 띌 정도로 작다는 것은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장에서 증거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범죄자가 흔적으로 남겨 놓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덕에 현재 수사 당국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세한 물품에서도 증거를 가려낼 수 있다.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1g)만큼의 극미세 DNA도 검출해 주인을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오염도 쉽고 분해되는 일도 많은 DNA가 원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5. 에필로그: 그는 왜 화단에서 대변을?  천씨는 왜 화단에 대변을 본 걸까.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본인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흉기를 품에 지니고 피해자 집에 간 점 등을 감안할 때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었다.”면서 “아무리 간 큰 범죄자도 범행 전엔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천씨의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절도범의 미신’ 때문으로 추측했다. 그는 “절도범들은 범행 현장에서 대변을 보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데, 과거 절도 경력이 있던 천씨가 그대로 따라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내 정치를 말한다] (3)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내 정치를 말한다] (3)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나의 정치 역정은 ‘내면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됐다. 긴급조치 시대에 학생운동을 시작한 나는 ‘독재 타도’를 꿈꿨으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감옥에서 맞이했다. 광주의 처참한 희생 위에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었기에 ‘절대로’ 평화적인 정권 교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민들이 해냈다. 투사의 힘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세상의 곡절을 안고 살아가던 시민의 힘으로 6·29 선언을 이끌어낸 것이다. ‘넥타이 부대’ 이야기나 시위대에 김밥을 건넨 노점상 이야기 등 창살 밖 세상의 변화는 나에게 낯설었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6월 민주항쟁은 나라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직된 나의 내면을 민주화시키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재야의 한 흐름이었던 민중당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이후 나는 허기진 마음으로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새롭게 찾자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정치 개혁 시민운동에 몸담기도 했다. 그리고 1997년 대선 직전 내가 속했던 ‘꼬마 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을 통해 탄생한 한나라당의 옷을 입게 됐다. 참 어색한 옷이었다. 그러나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나에겐 정치적 둥지이자 개혁 대상이었다. 한나라당에서 줄곧 쇄신파의 길을 걸어 온 것은 숙명과도 같았다. 내 지역구는 야당의 텃밭이자 진보적인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관악구갑이다. 보수가 건강하고 정의롭고 민주적이지 않으면 수구일 뿐이며, 민생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존재의 이유를 부정당한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두 번 낙선 끝에 2008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나는 홈페이지 대문에 ‘바르게 소신껏’이라는 슬로건을 걸어 놓았다. 권력에는 정의를, 시장에는 공정을, 국민에게는 기회의 사다리와 안전망을 줄 수 있는 21세기 정책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등원 이후 경제정책과 입법 중심의 의정 활동에 진력했는데, 해마다 ‘최우수 의원’으로 평가받는 보람을 얻기도 했다. 여당 의원이지만 무리한 감세에 반대했고, 경쟁력과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조화롭게 추진하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진정 국민 통합을 생각한다면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다시 부르게 하라고 대정부 질문에서 총리와 보훈처장을 질타하기도 했다. 뜻을 같이하는 초선의원들과 ‘민본21’을 만들어 정의롭고 절제된 권력의 사용과 진정한 친서민 정책을 주장했다. 감히 말해, 내가 정치를 하는 것은 정치의 질을 높여 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정치 개혁은 일거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스스로 현실 정치의 모순을 안고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거듭 체감하게 된다. 그래도 다짐한다. 늘 성찰하되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언젠가는 대한민국 정치에 희망의 신주류를 만들어 보리라. 건강한 보수를 추구하며 진보와도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정치 말이다. ■ 김성식 의원은 ▲1958년 부산 출생 ▲부산고·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민주화 시위로 1978년, 1986년 두 차례 투옥 ▲한국노총 전국화학노련 정책기획부장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나라정책연구원 정책기획실장 ▲CBS 시사자키 시사평론 ▲한나라당 제2정책조정위원장(경제·예산 담당) ▲경기도 정무부지사 ▲18대 국회의원 ▲초선모임 ‘민본21’ 대표 간사 ▲한나라당 정책위부의장(경제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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