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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보] 인천지법 “믿기 어려울 대담한 범죄”라면서 ‘선고’는 … .

    지적장애가 있는 또래 여고생을 모텔로 끌고가 옷을 벗긴 후 변기속 물을 머리에 뿌리는 등의 확대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10대 남녀 5명중 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인천지법 형사9단독 김진원 판사는 30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상 공동상해·공동감금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A(17)양과 B(17)양에게 각각 장기 2년∼단기 1년 8개월과 장기 1년∼단기 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또 공동상해 혐의로 기소된 C(16)군과 공동감금이나 공동상해 방조 혐의로 기소된 다른 10대 남녀 청소년 2명 등 3명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20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만 19세 미만 미성년자에게는 장기와 단기로 나눠 형기의 상·하한을 둔 부정기형을 선고할 수 있다. 김 판사는 “피고인들 중 일부는 1시간 35분동안 피해자를 감금했고 머리채를 잡거나 협박해 옷을 벗게 하는 등 소년들이 저지른 범죄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가학적이고 대담한 범행을 했다”면서 “피해자는 상당히 중한 상해와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B양은 피해자와 합의했으며, 피고인들 모두 범행을 자백하면서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나이가 어린 점 등을 고려해 양형했다”고 밝혔다.검찰은 A양 등 5명에게 장기와 단기로 나눠 징역 1∼5년을 각각 구형했었다. A양 등은 지난 6월 16일 오후 9시쯤 인천 부평구 한 모텔에서 지적장애 3급인 D(16)양을 폭행해 얼굴 등을 다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D양 머리를 변기에 내려찍고 침을 뱉었으며 담배꽁초 등이 담긴 재떨이를 비롯해 음료수·샴푸·심지어 변기통 속 오물을 D양 몸에 붓기도 했다. 당시 D양의 어머니는 딸과 연락이 닿지 않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해당 모텔로 찾아가 오물을 뒤집어쓴 채 알몸 상태인 딸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D양의 어머니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A양 등은 딸의 옷을 벗긴 채 때리며 린스·샴푸·바나나·재떨이·씹던 껌·변기통 물을 머리에 붓고 동영상까지 촬영했다”며 가해자들의 엄벌을 촉구했다. 가해자 중 일부는 경찰에서 “D양이 험담을 하고 다닌다고 생각해서 때렸다”고 진술했다.
  • ‘통혁당 사건’ 연루로 13년간 옥살이…한명숙 남편, 52년 만에 재심받는다

    박정희 정권 시절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13년간 복역했던 한명숙(77) 전 국무총리의 남편 박성준(81) 전 성공회대 교수가 52년 만에 다시 재판을 받게 됐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유영근)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산 박 전 교수 측이 낸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 소속 수사관은 박 전 교수를 1968년 8월 4일부터 7일까지 영장 없이 체포하고 감금했다”며 “수사관이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하였음이 증명된다”고 판단했다. 통혁당 사건은 1968년 중앙정보부가 남파 간첩이 지식인·대학생들을 포섭해 정당을 조직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하려 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사건에 연루돼 검거된 사람만 무려 158명에 달했다. 박 전 교수는 부인 한 전 총리와 고(故) 박경호씨 등을 포섭해 비밀조직을 꾸리고 공산주의를 찬양한 혐의로 1969년 대법원에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확정받았다. 이후 13년간 복역한 뒤 1981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박 전 교수는 이후 2018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17일 열린 재심 심문기일에서 박 전 교수는 “트라우마가 커 그간 재심을 거부해 왔다. 당시 고문을 많이 당했다”고 흐느꼈다.
  • ‘I Believe I Can Fly’ 알 켈리, 성착취범 추락

    ‘I Believe I Can Fly’ 알 켈리, 성착취범 추락

    미국의 유명 R&B 스타 알 켈리(54)가 미성년자 성매매와 아동 착취 영상 제작 등으로 유죄 평결을 받았다. 외신 등에 따르면 27일(현지시간) 뉴욕 브루클린 연방법원에서 열린 켈리 재판의 배심원단은 켈리의 성매매, 납치, 공갈 등 9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내렸다. 선고는 내년 5월 4일로 예정됐으며, 재판부가 배심 결정을 유지할 경우 수십년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 이날 피해자들은 법정에 직접 출석해 자신들이 켈리에게 당한 범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이들은 켈리와의 관계에 대한 비공개 서약서를 쓰도록 강요받았으며, 이를 어기면 폭행이나 협박을 당했다. 켈리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허락 없이 음식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지 못하게 했고, 무슨 옷을 입는지까지 통제했다. 일부는 켈리가 입막음 용도로 성관계 영상을 촬영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약물을 투약하고 감금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켈리가 27세이던 1994년 8월 당시 15세에 불과하던 가수 알리야와 결혼하기 위해 신분증을 위조한 혐의까지 드러나며 큰 충격을 줬다. 검찰은 켈리가 피해 여성들을 만나도록 알선하고, 피해자에게 지시를 따르도록 한 매니저 등 주변인도 범행에 조력한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 측은 평결에 대해 “켈리 사건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고 결국 정의가 지켜졌다”고 밝혔고, 피해자의 한 변호인은 “하비 와인스타인이나 제프리 엡스타인 등 여러 성범죄자의 사건을 다뤘지만, 켈리는 최악의 포식자였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켈리 변호인은 “모순투성이의 이번 사건을 기소한 것 자체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며 “고소인들은 성범죄 피해자라면서 계속 켈리와 관계를 유지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관계를 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켈리는 싱어송라이터로 1994년 마이클 잭슨의 ‘유 아 낫 얼론’(You Are Not Alone)을 작곡했으며, 1996년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I Believe I Can Fly)를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앞서 켈리는 시카고에서도 아동 포르노 혐의로 기소됐으나 2008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 귀갓길에 끌려간 10살 소년, 구타와 성폭행에 “평생 고통”[형제복지원 피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귀갓길에 끌려간 10살 소년, 구타와 성폭행에 “평생 고통”[형제복지원 피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 13명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초2 소년, 친구들과 바닷가서 놀다귀갓길에 느닷없이 형제원으로 끌려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놀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경찰의 손에 형제원에 끌려갔던 정동수(46)씨는 퇴소 후 34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정씨가 형제원에 끌려갔을 때의 나이는 불과 10세. 처음 끌려갔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정씨는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도망쳤을 거라고, 그곳에 단 한 순간도 남아있지 않았을 거라고 말했다. 어린 정씨는 형제원에서 시도때도 없이 구타를 당했다.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하도 맞아 지금도 귀에서 물이 나오고 귓가에선 환청이 들릴 정도다. 머리는 맞고 터지기를 반복한 탓에 군데군데 음푹 패여 있다. 추운 겨울에도 기합과 구타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 걸린 동상으로 인해 지금도 발톱 몇 개는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정씨는 형제원 내 성폭행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나금연이라는 이름의 소대장으로부터 수 차례 성폭행을 당했고, 그로 인해 신체적 후유증을 겪고 있다. 당시 형제원 내에서는 정씨 외에 다른 성폭행 피해자들도 여럿 있었다. 2년여간 끔찍한 일들을 겪은 정씨는 퇴소 후 소년의집에 입소하게 됐지만 그곳에서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소년의집을 떠난 정씨는 홀로 살아가기 위해 껌팔이와 신문배달, 중국집, 가라오케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했다. 그러나 형제원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과 사라지지 않는 그곳에서의 기억은 평생 정씨를 힘들게 하고 있다. 아래는 정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만 다듬어 그대로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진술내용: 1985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친구 2명과 해운대 바닷가에서 물놀이하고, 친구 한 명 집이 우동(해운대 바로 옆)이라는 동네인데 거기에 (친구를) 데려다 주고 나머지 친구 한 명과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경찰이) 경찰차에 태워서 (당시 우동 파출소로) 잡아갔습니다. 당시 날씨는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고 시간은 저녁 5시~7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경찰들이 강제로 데려가 철창에 넣었고, 집이 있다고 연락해달라고 사정해봐도 소용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구타였습니다. (곤봉으로 수 차례) 그리고 다음날 새벽쯤 포니(뒤에 천막으로 된) 한 대가 와서 저와 친구를 태워서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여기가 어디인지? 뭐하는 곳인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등을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더 분하고 화가 많이 납니다. 그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도망을 쳤을겁니다. 일상이 된 구타에 이어 성폭행까지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곳에서의 기억 초등학교 2학년짜리가 겪어야 할 고통인지를 생각조차하기 싫습니다. 다시는요. 하지만 조금의 아픈 기억을 되살려서 몇자 적어보겠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구타는 기본 일상이고 그 소대장(나금연)한테 성폭행은 수차례 당하였으며 저 말고도 밤마다 잘 때 옆에 와서 그 짓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후유증으로 혹 같은게 자주 밖으로 튀어나와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될것 같습니다. 곡괭이 자루로 빠따를 맞다가도 머리, 귀 등을 사정없이 맞아서 귀에서는 계속 환청이 들리고 물이 나오고 머리는 하도 맞아서 머리 두피 부분이 군데군데 움푹 들어갔습니다. 겨울에는 너무 추운데 운동장에서 기합을 받다가 발에 동상이 걸려서 일부 발톱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평생 정상으로 못 돌아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밥이라고 줬던 건 다 썩거나 쉬거나 한 것이었습니다.퇴소 후 옮겨 간 소년의 집에서도 폭행‘형제원 출신’ 딱지에 사회적응에도 어려움 1987년 퇴소 후 곧바로 ‘소년의집’ 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서울 소년의 집으로 입소하여 초등학교 4학년을 시작하여 졸업 후 부산 소년의집으로 이동 입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도 폭행 피해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학년이 높다는 이유? 규율을 잡는다는 이유? 등등으로 여러 장소에서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소년의집 중학교 2학년 재학 중 끝내 그 폭행을 이기지 못하고 (사회로) 나왔습니다. 사회 적응을 못하여 껌팔이, 신문배달, 중국집, 가라오케 웨이터 등(을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런 것뿐이었고 그런 직업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생활도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형제원 출신이라는 딱지가 항상 붙어다녔고 그곳에서의 트라우마가 계속 남아있어서 사회 적응에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도 학력이 안 되고 때로는 거짓으로 졸업했다고 (했다가) 입사 후 들통나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신체적 피해 트라우마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자다가도 벌떡 깨고 악몽을 꾸고 그때 그 일들을 잊고 싶어도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충격과 일상들은 계속 제 뇌리에 남아 있으며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약으로 잠을 청해 보기도 했습니다. 지금 현재는 가족들과 별거 중입니다. 어떻게 가정을 꾸려서 살아볼려고 했지만 제 생각들이 그때의 일상이 맴돌고 꾸리는 법을 몰라서 별거를 시작했습니다. 자주 자신감이 없어지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제복지원 퇴소 후 남은 신체적 후유증 ●머리 두피가 부분적으로 움푹 들어감.(머리박고,맞고,터지고 등)●귀(양쪽)에서 물(습함)이 나옴●코가 삐뚤어져 있음●성폭행으로 항문에서 피가 가끔 나오고 혹이 있음(튀어나옴)●앞니가 삐뚫어져 있음.(당시 소대장 한테 곡괭이 자루로 맞으면서 생니가 빠짐)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2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데이트폭력 5년간 하루 평균 26건…살인·살인미수 227건

    데이트폭력 5년간 하루 평균 26건…살인·살인미수 227건

    2016~2020년 데이트폭력 사건 총 4만 7755건, 매일 26건꼴데이트폭력 가해자 20대 34.8% 가장 많아 최근 5년동안 데이트폭력 사건이 하루 평균 26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5년 동안 데이트폭력이 살인이나 살인미수 혐의를 적용받은 사건도 227건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21일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최근 5년간 데이트폭력 유형별 신고 건수·입건·조치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6∼2020년 살인·살인미수,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성폭력 등 데이트폭력 사건은 총 4만 7755건으로 매일 26건꼴로 발생했다. 2016년 8367건, 2017년 1만 303건, 2018년 1만 245건, 2019년 9858, 2020년 898건이었다. 이 중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가 적용된 사례는 227건(2016년 52건, 2017년 67건, 2018년 42건, 2019년 35건, 2020년 31건)이었다. 2016∼2020년 데이트폭력으로 입건된 4만 7755명 중 구속된 인원은 2007명으로, 전체의 4.2%에 불과했다. 데이트폭력 가해자 연령대는 20대가 전체의 34.8%로 가장 많았고, 이어 30대(25.7%), 40대(19.3%), 50대(13.3%) 순이었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헤어진 여자친구 폭행·감금한 30대...“여행했을 뿐” 변명

    헤어진 여자친구 폭행·감금한 30대...“여행했을 뿐” 변명

    폭행 사건으로 헤어진 여자친구를 10일이 넘도록 감금하고는 “여행했을 뿐”이라고 말한 30대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21일 춘천지법 형사2부(진원두 부장판사)는 중감금치상 등 혐의로 기소된 A(36)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3월 27일 “개인금고를 넘겨주고, 사죄하고 싶다”며 이틀 전 폭행 사건으로 헤어진 여자친구 B(30)씨를 불러냈다. 이후 갖은 핑계를 대며 모텔을 전전하다가 4월 1일 집으로 돌아가려는 B씨의 휴대전화를 뺏고 감금했다. A씨는 “도망가면 죽여 버리겠다”라고 협박하며 같은 달 12일까지 대전과 강원 속초, 홍천, 춘천 모텔을 돌아다니며 B씨를 폭행했다. A씨는 B씨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숨을 못 쉬게 했으며, 머리채를 잡고 얼굴을 때리는 등 가혹행위도 했다. 재판에 넘겨진 A씨는 “연인관계로 함께 여행했을 뿐”이라며 감금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죄질이 매우 좋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며 “동종 범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누범 기간에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점 등을 종합해 형을 정했다”고 판시했다.
  • 데이트폭력 5년간 227명 죽거나 살해위협 받았다

    데이트폭력 5년간 227명 죽거나 살해위협 받았다

    최근 5년간 데이트폭력으로 227명이 목숨을 잃거나 살해 위협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인에게 폭행 등을 가해 4만 7000여명이 검거됐지만, 구속된 가해자는 4.2%에 그쳤다. 20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최근 5년간 데이트폭력 유형별 신고 건수, 입건, 조치 현황’에 따르면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입건된 데이트폭력 가해자는 227명으로 집계됐다. 2016년 52명, 2017년 67명, 2018년 42명, 2019년 35명, 2020년 31명이다. 한 해 평균 45명이 연인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위협을 당했다. 같은 기간 연인에게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성폭력 등을 가해 검거된 자는 4만 7528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구속된 가해자는 2007명(4.2%)에 그쳤다. 특히 이 기간 폭행·상해를 당했다는 신고는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6년 폭행·상해 신고는 6483건이었지만 2018년 1만 2212건이 접수됐고, 2019년 1만 2615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해 1만 2256건을 유지하고 있다. 이은주 의원은 “상대를 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때리지 않고선 구속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같은 끔찍한 범죄는 계속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죽음을 부르는 데이트폭력 범죄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다이어트한 북한 김정은, 혹시 대역? 도쿄신문, 의혹 제기

    다이어트한 북한 김정은, 혹시 대역? 도쿄신문, 의혹 제기

    지난 9일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9·9절) 행사 때 평소보다 살이 빠진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본인이 아니라 대역일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19일 도쿄신문은 급격하게 살이 빠진 모습의 김 위원장을 조명하는 19일 자 기사에서 작년 11월 체중이 140㎏대로 알려졌던 그가 날씬하게 변신했다며 다이어트를 한 것인지, ‘가게무샤’(影武者· 대역)를 내세운 것인지를 둘러싸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역 의혹의 근거로 도쿄신문은 작년 11월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당시 모습을 거론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이 논의된 이 회의에서 김 위원장은 철저한 국경봉쇄를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신문은 당시 김 위원장의 볼이 부풀어 올라 커진 얼굴로 목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며 한국 국가정보원은 김 위원장 체중이 140㎏대라는 분석 내용을 발표했고,사진상으로 판단해도 그 정도 체중으로 보였다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김 위원장이 최고지도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2년 8월 약 90㎏으로 알려졌던 체중이 8년 사이에 급속히 불어났다며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폭음폭식을 한 것이 원인일 것으로 정보당국 관계자가 추측한 바 있다고 전했다. 이어 아직 40세가 안 된 것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도 여러 번 부상했는데,한 사례로 2014년 ‘족근관증후군’에 따른 종양으로 걷기가 어렵게 되면서 지팡이를 짚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지난 9일 정권수립 기념일 열병식에 참석한 김 위원장은 볼살이 빠지고 피부 윤기도 젊음을 되찾은 모습이었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차림은 이미지 변신의 인상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도쿄신문은 올해 1월과 6월 보도된 김 위원장 사진을 보면 작년부터 올해에 걸쳐 조금씩 날씬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한국 국정원이 지난 7월 8일 10~12㎏ 감량했다는 분석 결과를 공개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너무나 급격하게 변한 외모 때문에 대역설이 나오고 있다며 한국 국방부에서 북한분석관으로 일했던 고영철 다쿠쇼쿠(拓殖)대학 주임연구원의 주장을 게재했다. 고 연구원은 최근 열병식에 등장한 김 위원장의 옆얼굴과 헤어스타일이 이전의 김 위원장과 다른 데다가 너무 젊은 모습인 점을 들어 10명 이상인 경호부대 소속 대역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는 또 김 위원장이 당과 군부 간의 물밑 주도권 다툼 속에서 감금된 상태라는 미확인 정보를 언급하면서 지난 9일 열병식 때 김 위원장이 연설하지 않은 것이 대역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정치학자인 난잔(南山)대학의 히라이와 준지(平岩俊司) 교수는 “(김 위원장) 본인 같은 느낌은 든다”라며 “2012년경 모습으로 되돌아간 인상을 풍긴다”고 고 연구원과는 다른 견해를 밝혔다.
  • [여기는 중국] 파렴치한 아동성폭행범 1년 만에 사형…속전속결 형 집행

    [여기는 중국] 파렴치한 아동성폭행범 1년 만에 사형…속전속결 형 집행

    4세 여아를 성폭행한 중국 남성의 사형이 집행됐다. 19일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18일 오전 압송된 피의자 유 모 씨(54세)의 사형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사건은 지난해 8월 2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 거주하는 유 씨가 같은 주택가에 거주하는 이웃 연 모 양(가명)을 유인, 거주지 인근의 하수구 입구에서 성폭행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유 씨는 피해 아동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이웃 주민으로 평소 일면식 있는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피해 아동의 가족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지냈던 유 씨가 유인하자, 피해자 연 양은 큰 경계심 없이 그를 따랐던 셈이다. 유 씨는 연 양을 인근 공터 외곽의 하수구 처리장 입구로 유인, 두 차례 성폭행한 뒤 이튿날이었던 8월 30일 집으로 돌려보낸 혐의가 인정됐다. 사건 당시 연 양의 가족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연 양을 관할 파출소에 실종 신고했고, 가족들과 파출소 직원들은 이튿날 오전까지 연 양을 찾았지만 가해자의 주택에 감금됐던 연 양을 찾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연 양 실종 수색이 본격화되자 자신의 범행이 발각될 것이 두려웠던 유 씨는 사건 이튿날이었던 30일 연 양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피해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당시 가족들은 곧장 인근 병원으로 이송, 응급 치료를 진행했다. 당시 집 안으로 걸어들어왔던 연 양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으며, 하혈로 바지는 핏자국이 낭자한 상태였다. 연 양의 진료를 담당했던 의료진들은 피해 아동의 하반신이 심하게 훼손, 얼굴과 등을 압박한 자국이 심각했었다고 당시 연 양의 진료 기록을 공개했다. 또, 유 씨는 연 양의 얼굴 전면을 폭행, 병원을 찾았을 당시 피해자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사건 직후였던 지난해 9월 1일, 하얼빈시 공안국은 인근에 거주 중인 피의자 유 씨는 아동 성폭행 혐의로 적발, 형사 구류했다고 밝혔다. 이후 유 씨에 대한 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공안에 붙잡혀 혐의 일체를 인정한 유 씨에 대해 하얼빈시 인민법원은 사형을 선고, 2심을 담당했던 중급인민법원은 지난해 12월쯤 1심을 확정판결했다. 법원 측은 유 씨의 행위에 대해 “공사장 서쪽 하수구 배수구 안에서 4세 여아를 간음한 행위는 그 범죄 행위가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할 수준이다”면서 “특히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 입은 상해 정도가 중증 장애 진단을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의자 유 씨는 앞서 두 차례 이상 성범죄를 저지른 성폭행 전과자라는 점에서 향후 추가 범죄를 저지를 위험성이 크다”면서 사형 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이후 유 씨는 공안에 붙잡힌 지 약 1년 무렵이었던 지난 18일, 최고인민법원으로 이송돼 사형 집행을 받았다. 그는 이날 오전 9시 무렵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소원을 묻는 법원의 질문에 대해 “가까운 친척들과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사형 집행을 담당했던 법원 측은 “범죄자 유 씨는 죽기 직전 가까운 친척들을 만나서 잠깐의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했다”면서 “사법 당국은 범죄자에 대한 사형 집행 전 그가 가진 법적 지위와 권리를 충분히 보장했다”고 설명했다.
  • 연인 감금해 체포된 30대...수갑 풀고 도주했다가 ‘징역 10개월’

    연인 감금해 체포된 30대...수갑 풀고 도주했다가 ‘징역 10개월’

    연인을 차량에 감금한 혐의로 체포된 30대가 수갑을 풀고 경찰서를 도주하는 행각을 벌여 항소심에서 1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 18일 춘천지법 형사1부(김청미 부장판사)는 감금 및 도주 혐의로 기소된 A(31)씨에게 원심(징역 6개월)을 깨고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4월 3일 오전 2시 37분쯤 원주시의 한 편의점 앞에서 연인 사이인 B(36·여)씨에게 차에 탈 것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머리채를 잡아끌어 당긴 채 강제로 차에 태워 감금했다. A씨는 이 상태로 인적이 드문 도로를 약 12㎞ 이동했다. 피해자 B씨는 A씨가 차에서 잠시 내린 틈에 직접 차량을 운전해 위험에서 벗어났다. B씨의 신고로 같은날 오전 8시 30분 A씨는 경찰에 긴급체포돼 경찰서에 인치됐다. 인치 중이던 A씨는 담당 경찰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갑을 푼 뒤 경찰서 담장을 넘어 달아났다. A씨는 도주한 이후에도 B씨의 집에 찾아가는 등 충동적인 행동을 일삼다가 다시 붙잡혀 감금 및 도주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집행유예 기간 중 재범으로 범정이 좋지 않지만, 피해자 B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을 고려해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의 형이 너무 가벼워 부당하다는 검사의 항소는 이유 있다”며 A씨에게 1심보다 무거운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감금 상태로 12㎞를 이동하면서 피해자가 겪었을 공포와 정신적 고통은 매우 컸을 뿐만 아니라 도주 후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 충동적인 행동을 한 점 등을 양형에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 가장 무더웠던 1983년 부산, 야외취침 나선 소년이 납치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가장 무더웠던 1983년 부산, 야외취침 나선 소년이 납치됐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들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 시민회관 앞에서 잠 자다 납치된 소년, 3년간 지옥 생활 1983년 8월 부산은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로 가장 무더웠다. 그해 열 살 소년이었던 김수길(48)씨는 “밖에서 잠을 자겠다”고 집을 나서 시민회관 앞으로 갔다. 열대야를 견디려 야외취침에 나선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상자를 깔고 잠을 청한 김씨가 눈을 떴을 땐 형제복지원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비극은 소년의 삶을 덮쳤다. 형제복지원에서 소년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체념’이었다. 잠결에 트럭에 태워져 납치된 김씨는 “집에 보내달라”고 호소했다가 호된 매질만 당했다. 복지원 선생님에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편지도 전달해봤지만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못했다. 소년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서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일하고, 때리는 대로 맞으며 3년을 보냈다. 그 와중에도 소년은 끊임없이 도망을 꿈꿨고, 시도했다. 하루는 형제원 담벼락을 뛰어 넘어 택시를 잡아탔지만 김씨가 입고 있던 수용복을 본 택시기사가 형제원으로 차를 몰았다. 또 다른 날은 운동장을 헤매다 경비에게 붙잡혔다.미국에서 ‘박사’가 온 날 김씨는 입양을 갈 뻔 했다. 형제복지원은 당시 돈벌이 목적으로 해외 입양을 대거 추진했다. 김씨는 낯선 땅에서 ‘마루타’가 될까 두려워 뒷산으로 도망을 갔지만 똥구덩이에 빠져 경비에게 발견되면서 다시 끌려왔다. 1986년 9월 마침내 김씨는 형제원을 벗어났다. 형제원이 세간에 알려지기 3개월 전이었다. 김씨의 집 연락처를 기억하고 있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뒤늦게 부모님과 연락이 닿았다. 3년 만에 마주한 소년과 부모는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35년이 지나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며 진술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진술서에는 빈 부분이 많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트라우마가 심해지자 ‘중도생략’을 했기 때문이다. 진술서에 담기지 못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형제원에서 구타 당하면서 김씨는 허리가 비틀렸고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가족을 건사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도, 때때로 괴로움과 불안, 분노가 치솟는다.아래는 김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 등은 다듬어 옮겼습니다.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김수길 진술내용: 저는 김수길입니다. 1983년경 부산 최고의 무더위가 찾아온 날이었습니다. 그당시 저희 집에는 아버지만 사용하는 선풍기 한 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고 시민회관 앞에서 잠을 잤니다. 그런데 눈을 뜨니 알수도 없는 곳에서 제가 일어난 겁니다. 학교를 가야하는데 아무도 말을 안 하고 있는 게 이상해 물어보니 “이곳은 형제복지원”이라고 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갔더니 의무실이었습니다. 그때 의사 선생님께 집에 보내달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저씨 한 분이 저를 신체검사실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무 말도 없이 때리기만 한 시간. 저는 더 이상 말도 못하고 하는 대로 적응을 하기로 했습니다. (중도생략) 27소대에 배정됐습니다. 저와 같은 또래 아이들이 당시 116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세 부류였습니다. 소대장에게 잘 보이는 애들, 중간쯤 되는 애들, 오줌싸개 애들. 저는 그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두 번째 애들과 어울리기로 했습니다. 단추와 자꾸(지퍼)를 엄청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그 애들과 도망을 갈 수 있는 다른 애들을 물색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저는 마음을 먹고 화장실 환풍기로 도주했는데 길을 몰라 운동장을 헤맸고 결국 경비 아저씨한테 잡혔습니다. 아침에 소대로 인계되면서 엄청 맞았습니다. 온몸에 문신을 한 중대장이 기억납니다. 27소대로 돌아갔다가 이틀 뒤 28소대로 전방을 갔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저에게는 지옥이었지요. 그때 당시 서무를 보던 백사 형님이 계셨는데 애들한테 정말 잘해주셨습니다. (중도생략) 미국서 온 박사, 강제 해외입양 싫어서 도망쳤지만··· 어느 날은 미국에서 박사가 온다고 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아이들을 입양보내려는 것이었지요. 저는 또 맞을 각오를 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산에 똥구덩이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곳에 빠져 2시간 가량 있다 보니 또 경비 아저씨한테 붙잡혔습니다. 몇 번의 도망이 실패한 뒤로 저는 아무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허리가 부서져 나갈 정도로 맞고 소대로 와서 기압과 매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그냥 애들과 지내고 시키는 대로 하면서 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대장이 수영장에 갈 사람을 집합시켜 수영장에 가기도 했고 매도 덜 맞게 됐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1986년 마지막 수영장에 가는 날 저는 수영장 담을 넘어 도망갈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지키고 있는 아저씨들이 많았습니다. 저희가 마지막 수영이었는데 오후 2시 30분쯤 소대장이 저를 불렀어요. “지금 집에 가자”고 하길래 얼떨떨했는데, 아버지가 저 멀리 울면서 서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1986년 9월 마지막 더위에 귀가했습니다. 글을 쓰면서 과거 기억에 트라우마가 올라와 더는 표현을 못하겠습니다.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추가 소송 제기를 이어가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후배 감금 후 ‘기절놀이’ 한다며 목 조른 20대 징역형

    후배 감금 후 ‘기절놀이’ 한다며 목 조른 20대 징역형

    나흘 동안 모텔에 후배를 감금하고 ‘기절 놀이’를 한다며 목을 졸라 의식을 잃게 한 20대 2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피고인 중 한 명은 “기절은 상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상해에 의식을 잃는 등 정신적 기능이 나빠지는 피해도 포함된다며 감금치상죄를 인정했다. 13일 인천지법 형사15부(이규훈 부장판사)는 감금치상 및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상 공동폭행 등 혐의로 기소된 A(23)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B(23)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2월 23일 오후 8시 40분쯤 인천시 중구의 한 공원에서 의자를 잡고 엎드리게 한 후배 C(20)씨를 야구방망이가 부러질 때까지 100차례 때린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B씨는 같은날 오후 7시쯤 서울시 영등포구 한 주유소 앞에서 C씨를 차량에 태운 뒤 A씨와 함께 10여 차례 주먹으로 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A씨와 B씨는 서울에서 범행을 한 뒤 C씨와 그의 지인을 승용차에 태우고 인천으로 이동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다음날 0시쯤 C씨와 피해자들을 인천의 한 모텔로 데려가 휴대전화를 빼앗은 뒤 “너희 집 주소와 부모님 연락처도 다 알고 있으니 도망치다가 잡히면 팔다리를 부러뜨린다”며 오후 5시까지 객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피해자들은 당일 또 다른 모텔로 끌려가 같은달 28일까지 4일 동안 감금됐다. A씨와 B씨는 C씨에게 이른바 ‘기절 놀이’를 한다며 양손으로 목 부분을 강하게 눌러 모두 4차례 기절시켰다. 기절한 C씨는 바닥에 쓰러지며 벽에 머리를 부딪혔고, 한번 기절했을 때 5∼10초 동안 의식을 잃고 몸을 떨었다. A씨와 B씨는 모텔에 감금된 가운데 잠든 C씨의 지인의 발가락에 휴지를 꽂아 불을 붙여 괴롭히기도 했다. 이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후배 C씨가 자신들의 돈을 빼돌려 썼다며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재판에서 “C씨가 기절 놀이를 하다가 실제로 기절했지만, 따로 치료가 필요하지 않았고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없었다”며 “상해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C씨는 장시간 (모텔에) 감금돼 겁을 먹은 상태에서 피고인들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기절 놀이를 했다”고 전제했다. 이어 “기절 놀이의 결과로 C씨의 몸에 어떤 상처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저산소증이 유발돼 여러 차례 기절한 이상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고 봐야 한다”며 “의식을 잃은 시간이 짧았더라도 상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피해자들을 폭행하고 감금한 뒤 기절 놀이를 강요해 죄질이 무겁다”며 “B씨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받은 징역형의 집행유예 기간에 다시 범행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온 힘 다해 탈레반 지지” 부르카 착용한 아프간 여대생 수백명 지지 집회

    “온 힘 다해 탈레반 지지” 부르카 착용한 아프간 여대생 수백명 지지 집회

    탈레반 무장대원들 여대생들 집회 경비“부르카 착용도 수용할 것”…前정부 비판“우린 만족, 아프간 떠난 女 우릴 대표 못해”집회 금지했던 탈레반 “신청해 허가했을 뿐”온라인선 ‘탈레반 지지 집회’ 비판 목소리女시장 출신 “여성 억압, 우리 문화 아냐”미국의 완전 철수로 아프가니스탄 재집권에 성공한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인권 유린 사례가 속속 보도되는 가운데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 등의 차림을 한 여대생 수백명이 오히려 탈레반을 지지한다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미군이 있을 때 오히려 외모지상주의로 여성 인권이 후퇴했다고 주장하며 탈레반 치하에서 부르카를 착용하는 것에 만족하고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탈레반 무장 조직원들은 여대생들의 집회 내내 총칼로 무장한 채 경비를 섰지만 집회의 배후에 이들이 관련돼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탈레반이 돌아와 역사가 바뀌었다”대부분 여대생들 니캅, 부르카 착용 12일 하아마 통신 등 아프간 언론과 외신에 따르면 수도 카불의 샤히드 라바니 교대 소속 여대생 수백명은 전날 강의실과 거리에서 팻말과 탈레반 깃발을 들고 탈레반 체제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날 연단에 오른 소마이야는 “탈레반이 돌아온 뒤 역사는 바뀌었다”면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우리의 (탈레반)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여성은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탈레반의 정책에 찬성한다는 입장도 밝혔다. 실제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여대생들은 대부분 니캅이나 부르카를 착용했다. 니캅은 눈만 내놓고 전신을 가리고, 부르카는 눈 부위마저 망사로 가려지는 이슬람 복장을 말한다. 탈레반 교육 당국은 지난 4일 새 규정을 토대로 아프간 사립 대학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니캅을 쓰도록 명령했다. 탈레반은 수업도 성별로 구분해 진행하도록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커튼을 쳐 남·여학생을 구분하도록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여대생들은 이런 탈레반의 조치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미군 있을 당시 정부가 여성 잘못 대해”“아름다움만으로 여성 뽑았다” 비난 한 여대생은 지난 정부가 여성을 잘못 대했다고 지적하며 “그들은 아름다움만을 기준으로 여성을 뽑았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탈레반의 태도와 행동에 대해 만족한다”, “아프간을 떠난 여성은 우리를 대표할 수 없다”고 적힌 팻말도 눈에 띄었다. 여대생들은 강의실 집회가 끝난 후 거리로 나가 행진하기도 했다. 시위대 옆에는 총을 든 탈레반 대원들 모습도 포착됐다. 이날 집회 개최에 대해 탈레반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탈레반 당국은 여성들이 집회를 조직하고 신청해 이를 허가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탈레반 과도정부는 지난 9일부터 내무부, 법무부 등 정부로부터 허가받지 않은 모든 시위는 금지한 상태다.여성 존중한다더니 부르카 안하자 사살탈레반 반대 집회 참여 여성들에 총격 온라인에서는 이날 집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탈레반 내부에서는 여성을 억압하는 탈레반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잇따라 열렸었다. 반탈레반 집회에서 여성들은 “여성이 교육 받을 권리, 사회에서 일할 권리,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하라”며 인간으로서 차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주장했다. 탈레반은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을 향해 매질과 총격을 가하며 탄압했다. 아프간 첫 여성 시장 출신으로 지금은 독일로 대피한 자리파 가파리는 트위터를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탈레반을 겨냥해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아니며 아프간 여성은 극단주의의 일부도 아니다”라며 그들을 야만적인 상태로 몰아가지 말라고 촉구했다. 탈레반은 과거 5년 통치(1996∼2001년) 시절 가혹하게 여성 인권을 탄압했다. 당시 여성들은 교육·취업 기회를 빼앗겼고, 부르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했으며 어린 소녀들에 대한 탈레반 대원과의 강제 결혼도 광범위하게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은 지난달 15일 재집권 후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고 유화적 메시지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과 달리 탈레반이 여성 시위대 등에 실탄과 채찍 등 폭력을 사용해 대응해 여러 명이 숨졌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고, 일부 언론인은 감금·폭행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고 외출을 했다는 이유로 여성을 거리에서 곧바로 총격 사살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反)탈레반 시위는 전파를 타지 못했다. 탈레반은 임신한 경찰관을 사살해 전 세계를 경악게 한 뉴스도 아프간에서 검열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다.탈레반, 언론인 최소 19명 감금·폭행여기자 퇴출 “아무도 잘못 물을 수 없다”“방송해도 되나 女목소리 나오면 안돼” 카불에서 여성들의 인권 시위를 취재하다 탈레반에 구금된 언론인은 최소 19명에 달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 2명은 경찰서에서 채찍, 곤봉, 전깃줄로 두들겨 맞았다. 이 소식은 해외로 알려지면서 국제적인 공분을 일으켰다. 아프간언론센터 측은 아프간 언론 기관의 절반 이상이 안전 문제, 불확실한 미래, 재정 문제 때문에 운영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신변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한 카불의 한 지역방송 앵커 네다는 “자유 미디어의 상황은 매우 위태롭다”면서 “아무도 탈레반에 그들의 과거 잘못과 잔혹행위에 감히 물어볼 수 없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한 12명 이상의 아프간 저널리스트, 미디어 종사자들은 지역방송, 신문, 뉴스 웹사이트들이 두려움과 협박, 자기검열 속에서 보도해왔다고 말했다. 탈레반은 미디어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지 않았지만, 아프간 언론사들이 이슬람 법과 국가 이익에 기초해 보도를 재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 기자들의 상황은 더욱 어렵다. 탈레반은 여성 언론인들이 국영 방송사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 지역 언론에서도 대부분의 여기자가 비슷한 처지가 됐다. 탈레반은 “방송은 허용하나 방송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국경없는기자회(RSF)는 최근 성명을 내고 여기자들이 탄압을 받지 않고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광복절에 삶의 빛 빼앗긴 13세 소년 “우린 그곳에서 죽어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광복절에 삶의 빛 빼앗긴 13세 소년 “우린 그곳에서 죽어갔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들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길 잃어 납치된 소년, 지옥 탈출 후 집마저 사라져 유동현(60)씨는 형제복지원을 ‘지옥’이라 했다. ‘깜상’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유씨의 고통은 선명했다. 낮에는 걸핏하면 맞고, 밤에는 성폭행을 당했다. 형제원에서 간신히 탈출하던 날 유씨는 앞만 보고 달리다 나무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다. 지옥을 탈출하고서도 마주한 건 죽음의 두려움이었다. 13살 중학생이던 유씨는 1974년 8월 15일 대전철도청에서 일하던 아버지 일터에서 목욕을 하려고 길을 나섰다. 아버지 일터는 그에게 익숙한 장소였다. 몸을 씻고 잠시 빈 열차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서울에서 대전 집에 다시 가려고 하행선을 탔으나 또 잠이 들어 부산에 도착했다. 유씨가 부산역에서 서성이자 성인 남자들이 강제로 그를 차에 태웠다. 다짜고짜 몽둥이로 때리고 형제원으로 끌고 갔다. 형제원의 삶은 굶주림과 매질의 연속이었다. 식사는 보리밥과 건더기 없는 된장국이 전부였다. 자정 넘어 일이 끝난 날엔 원생들에게 건빵 한 바가지를 뿌렸다. 땅에 흩뿌려진 건빵을 한 개라도 주워 먹겠다고 수십 명이 서로 밟고 밀쳤다. 정신교육이라는 핑계로 밤에는 기합을 받았다. 하루 12시간 넘게 바늘과 구슬을 꿰도 손이 느리다고 또 맞았다. 성폭행도 당했다. 형제원에서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유씨가 돌아갈 집은 없었다. 탈출하던 날 밤도 유씨는 늦게까지 일했다. 새벽에 씻으러 가는데 높지 않은 담 앞에 경비가 없었다. 유씨와 원생 10여명은 탈출을 시도했다.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렸다. 사방이 깜깜해 나무에 머리를 박고 기절했다가 벌레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깼다. 그제야 살았다고 느꼈다. 대전 집에 찾아갔으나 아버지가 있던 집은 영문도 모른 채 사라졌다. 유씨는 지옥을 함께 견딘 원생의 이름을 가물가물 읊었다. 수길이, 벙구, 백사, 사또, 짜리. 그는 소대장 이름은 ‘현수’, 분대장 별명은 ‘반달’이라는 것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러나 함께 생활한 수백명 원생들의 이름은 세월 속에 잊혔다. “내 인생을 짓밟은 정부와 원장을 원망하며, 얼마나 고통 속에 살았는지 그 지옥을 알릴 방법이 없기에 더욱 한스럽다.”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절, 13살 소년의 삶은 짓밟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아래는 유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 등은 다듬어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유동현 진술내용: 저는 대전 소제동에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대전철도청에 근무했고, 저는 가끔 아버지 근무처에 목욕하러 갔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아버지 근무처에서 목욕하고 열차 빈칸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열차가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서울에 가게 됐습니다. 겁이 많이 났습니다. 서울역에서 몰래 열차를 갈아타고 대전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열차에서 또 잠이 들어 부산까지 가게 됐습니다. 부산역에 내려 서성이다가 어떤 성인 남자들이 저를 강제로 차에 태웠습니다. 저는 놀라고 겁이 나서 “왜 이러냐”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다짜고짜 몽둥이로 저를 두들겨 팼습니다. 집 주소와 학교 말해도 돌아온 건 매질과 감금 한참 차가 이동하더니 갑자기 멈췄습니다. 뒷문이 열리면서 어떤 아저씨가 빨리 내리라며 소리 질렀습니다. 사무실에 끌려갔고, 제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집 주소를 말하고, 대전 동명중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했습니다. 이틀 후, 저를 다시 부르더니 “너 왜 거짓말했어!”라며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너는 집이 없어, 없으면서 있다고 거짓말한 거야, 알았어?!”라면서 마구 때렸습니다.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가, 맞지 않으려고 “네, 집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희망방’에 갇혔습니다. 희망방에서 정신교육이라는 핑계로 기합받고 매를 맞았습니다. 따귀를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귀에서 고름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는 ‘낚시방’에 배치됐습니다. 낚시방에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늘과 구슬을 꿰는 작업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밤 12시가 넘도록 일했고, 손이 느리다는 이유로 기합 받고 맞는 날도 허다했습니다. 낮에는 일하면서 맞고, 밤에는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낮과 밤 모두 지옥 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요? 몇 년이 흘러 저는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 있던 ‘3소대’로 배치됐습니다. 얼마 후에는 ‘11소대’로 배치됐습니다. 주례에 와서 처음에는 풍선 공장에서 일했고, 그 뒤에 구두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11소대에서 저는 ‘깜상’으로 불렸습니다. 소대장은 ‘현수’라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분대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별명이 ‘반달’이었습니다. 함께 생활한 수백 명의 원생 대부분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몇몇 원생들의 별명만 가물가물 떠오릅니다. 벙구(벙어리), 백사(얼굴이 흰색), 다른 소대에 있던 사또, 짜리(이름은 종일이). 수길이와 박남수, 김성동이란 원생의 이름도 기억납니다.탈출 후 사라진 집…남은 건 지옥의 기억 구두 공장에선 자정 넘어 일했습니다. 새벽에 씻고 소대에 들어가기 위해 목욕탕을 들어가는데 얕은 담 앞에 경비가 없었습니다. 저와 원생 10여 명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던 길을 앞만 보고 무조건 달렸습니다. 그러다 나무에 머리를 박고서는 그대로 기절했습니다. 깨어났을 때 저는 제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려 ‘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탈출에 성공해 대전 소재동에 있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매다 대전 안녕동에 있는 큰집을 찾아갔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저는 소름이 돋습니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일어난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짓밟은 정부와 원장을 원망하며 얼마나 고통 속에 살았는지 겪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지옥을 알릴 방법이 없기에 더욱 한스럽습니다. 원장은 저희에게 중노동을 시키며 인건비를 착취했고, 정부 지원금과 단체 후원금을 받아 돈을 많이 벌면서도 저희에겐 보리밥과 건더기 없는 된장국을 줬습니다. 우리는 빈혈과 영양 부족으로 죽어갔습니다. 낚시방에서 일할 때 납품할 제품이 너무 많아 새벽부터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일할 때가 있었습니다. 새벽에 끝나면 소대에 건빵 한 바가지를 뿌렸습니다. 건빵 한 개라도 주워 먹어 보겠다고 원생 수십 명이 서로 밟고 밀치면서 팔이 부러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글로 표현하기에 제 자신이 부족해 이만 줄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묻고 싶습니다. 내 자식과 부모, 형제가 저와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어찌하시겠습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 맞습니까, 이런 게 민주주의입니까? 무너진 내 인생을 배상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합니다.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추가 소송 제기를 이어가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돌고래 [김유민의 돋보기]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돌고래 [김유민의 돋보기]

    제주 마린파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돌고래 ‘화순이’가 최근 콘크리트 수조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곳에서는 지난해 8월 안덕이를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달콩이’, 지난 3월 ‘낙원이’가 숨을 거뒀다. 비좁은 수조에 갇힌 채 포획 트라우마와 감금 스트레스로 고통받던 돌고래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화순이 역시 잔인한 포획으로 악명 높은 일본 와카야마현 다이지 마을에서 잡혀 한국으로 수입됐고, 죽기 직전까지 돌고래 체험에 이용됐다.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본 화순이 역시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 심한 스트레스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수면 위에 멍하게 둥둥 떠 있거나 비슷한 동작을 반복했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마지막 남은 돌고래 화순이의 방류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끝내 화순이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했다. 좁은 수조에 갇혀 지내며 원치 않는 공연과 접촉에 동원되는 삶, 돌고래는 평균 수명의 3분의1도 살지 못하고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다. 올해 4월 기준 국내 고래류 감금 시설 7곳에 갇혀 있는 고래류는 총 26마리다. 여전히 많은 돌고래가 전시·공연·체험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하루 100㎞가량을 유영하는 돌고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조의 크기가 최소 직경 20∼30㎞ 정도는 돼야 하고, 반사 소음에 시달리지 않게 최첨단 재질로 만들어야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수족관을 갖춘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제주 지역 해양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는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되기 전에 제주도 내 2곳의 고래류 감금시설 돌고래 8마리를 포함해 전국에 감금된 돌고래와 벨루가를 바다로 돌려보내야 한다. 정부는 더이상 위기에 처한 해양동물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고래류 보호는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도 매우 좋은 정책이다. 고래 한 마리는 일생 동안 평균 33t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서 수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살아가는 동안 탄소를 축적하고, 자연사한 이후에도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수백 년간 대기로 방출하지 않는다. 바닷속 고래의 활동으로 식물성 플랑크톤이 1%만 증가해도 연간 2억t의 이산화탄소가 포집된다. 이는 20억개의 나무가 출현한 것과 같은 효과이며 과학자들이 고래 보호를 기후 위기의 최고 어젠다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안전한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도록 보호구역을 만들어 안식처를 만들어 줄 때다. 야생의 환경에 바다쉼터를 조성한 아이슬란드와 캐나다, 인도네시아가 그 예다. 해양보호구역 선정과 바다쉼터 조성이야말로 미래 세대가 바다에서 헤엄치는 돌고래를 만나고, 나아가 기후위기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체험이라는 구실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생태계를 위협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시간이 많지 않다.
  • 14살 인도 소녀 납치 및 감금…5일간 8명이 집단 성폭행

    14살 인도 소녀 납치 및 감금…5일간 8명이 집단 성폭행

    인도는 언제쯤 ‘강간 공화국’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하루가 멀다고 성범죄가 발생하는 인도에서 또다시 끔찍한 집단 성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6일 인디아투데이는 마하라슈트라주 푸네시에서 납치된 10대 소녀가 감금 및 성폭행을 당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31일, 푸네시 안와디경찰서에 실종 신고가 접수됐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딸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부모의 호소였다. 14살 소녀는 인근 기차역으로 친구 마중을 나갔다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소녀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소녀가 제 발로 집에 돌아와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놨다. 삼륜차 운전사에게 납치돼 감금 상태로 집단 성폭행을 당했는 게 소녀의 설명이었다. 안와디경찰서 선임 수사관 디팍 라가드는 “아직 실종사건을 조사 중이던 지난 5일, 소녀의 부모가 고소장을 접수했다. 딸이 그동안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더라”고 밝혔다. 진술에 따르면 소녀는 기차역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삼륜차 운전사를 따라갔다가 변을 당했다. 운전사는 “친구가 탄 기차는 내일이나 돼야 올 것”이라며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소녀를 유인했다. 그리곤 전혀 다른 장소로 소녀를 데려가 가둔 뒤, 5일 동안 동료 여러 명과 번갈아 성폭행했다.고소장 접수 후 체포 작전에 돌입한 경찰은 소녀 진술과 CCTV 자료를 대조해 가해자 8명을 체포했다. 그 중 6명은 삼륜차 운전사였으며, 2명은 철도공사 직원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삼륜차 운전사 한 명이 처음부터 일행 없이 혼자 있는 소녀를 노리고 접근한 것 같다”면서 “소녀가 범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를 추가로 밝힐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피해 소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다행히 상태는 비교적 안정적이라고도 말했다. 경찰은 아동성보호법(POCSO) 위반 혐의 등으로 가해자들을 기소할 방침이다. 인도국가범죄기록국(NCRB) 통계를 인용한 AFP통신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인도에서는 하루 평균 90건의 강간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2018년 경찰에 집계된 성폭행 사건만도 3만3977건에 달한다. 피해자 중 25%는 아동이다. 인도 정부가 2012년 ‘아동 성학대에 관한 성범죄 방지 법안’(POCSO)을 통과시키고 처벌을 강화했지만, 법 적용이 느슨한 탓에 관련 범죄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지난달 1일 수도 뉴델리에서는 힌두교 사제 등 남성 4명이 카스트 계급 최하층인 달리트(불가촉천민) 9살 소녀를 번갈아 성폭행하고 살해해 재판에 회부됐다. 가해자들은 범행 후 소녀의 어머니에게 감전사를 주장하는 뻔뻔함을 보인 것도 모자라, 경찰에 신고하면 부검의가 장기를 내다 팔 것이라고 협박해 시신을 화장시켰다.
  • 경찰이 데려간 두 번의 지옥···그곳에서 남매는 ‘개돼지’였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경찰이 데려간 두 번의 지옥···그곳에서 남매는 ‘개돼지’였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다시 그곳을 말하다]

    12년간 수용인원 총 3만 8000여명, 공식 사망자 513명. 1970~1980년대 국가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던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태는 1987년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4년이 지난 지금,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존자들은 지난 5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섰다. 법원에 낼 진술서를 쓰는 과정 또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반드시 쓰여져야 할 글이었다. 서울신문은 매주 1명씩 이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남긴다.도망쳐도 제자리로...7년 동안 계속된 지옥 생활 김현식(가명·52)씨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 두번 던져졌다. 끔찍했던 그곳에서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경찰에 다시 붙잡혀 형제원으로 보내졌다. 형제복지원에는 김씨처럼 2번 이상 재수용된 이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때리면 맞고 시키면 일하고 주면 먹었던 형제복지원 생활을 ‘개, 돼지와 같은 삶’으로 기억한다. 1981년 13살이던 김씨는 고모집으로 향하던 중 길을 잃어 근처 파출소에 갔다가 형제복지원에 보내졌다. ‘돈을 벌고 싶냐, 공부를 하고 싶냐’는 경찰의 질문에 ‘돈이 벌고 싶다’고 답해서였다. 그렇게 김씨는 아동소대에서 3년 동안 흙자루와 흙벽돌을 지고 나르는 노역을 했다. ‘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도 일은 멈출 수 없었다. 그랬다간 소대원 전체가 기합을 받았다. 새로 온 신입이 소대장, 서무, 조장에게 당하는 성폭력을 지켜보는 일은 또 다른 고역이었다. 김씨와 한 살 터울인 누나도 형제원에 수용됐다. 남매는 형제원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마음이 무너졌다. 김씨는 “어린 마음에 누나도 여기 있다는 게 창피해 모른 척 했다”고 했다. 소대장이 잠든 고요한 새벽, 김씨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담을 넘었다. 중학교 소대에서 철공소 반장이 휘두르는 ‘빠따’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형제원을 등지자마자 산비탈을 내달렸다. 갈 곳은 없어도 ‘그곳’이 아니었기에 안도했다. 정처없이 떠돌던 중 이유없이 해운대로 향했다. 그러나 실수였다. 해운대에 텐트를 치고 모르는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낸 지 한달쯤 되던 날, 경찰은 무리를 도둑으로 의심해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 꿈 같던 자유는 허무하게 끝이 났다. 악몽 같은 삶은 형제복지원이 폐쇄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1987년 4월, 김씨는 7년에 가까운 노예 생활을 마치고 귀가했다. 가능한 형제원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어 서울로 이사했지만,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 자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 무기력한 삶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도 했다. 그간 묵은 응어리들을 종종 거칠게 내뱉은 까닭에 대인 관계도 서툴렀다. 배우자를 만나 초등학생 자녀 둘을 키우고 있는 지금 순간에도,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다. 자신의 과거 흔적으로 인한 부족함 때문에 자녀들의 삶에도 지장이 생길까 걱정이 크다. 아래는 김씨의 진술서 전문. ※원문에서 일부 표현 등은 다듬어 옮겼습니다.[진 술 서] 제목: 형제복지원 피해자 진술서 성명: 김현식 진술 내용: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들어가게 된 상황부터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제가 13살이던 1981년 11월쯤 고모집에 가다가 길을 잃어 파출소에 갔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하니 경찰이 어디론가 데려가서 여자 공무원과 이야기를 하다가, ‘돈을 벌고 싶냐, 공부가 하고 싶냐’고 물었고, 저는 ‘돈이 벌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형제복지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신입소대에 있다가 이후 아동소대로 이동했습니다. 아동소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모나 친척이 찾아오지 않으면 형제복지원에서 나갈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늘 같이 높은 형제원 담벼락 안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말도 안되는 이유로 단체 기합과 매질이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아동이라고 해서 일하는 것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마대 자루에 흙을 담아서 목에 지고 수백 미터씩 날라야 했습니다. 목이 너무 아파 부러질 것 같은데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멈췄다가는 저는 물론이고 같은 소대원 전체가 구타를 당하고 기합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폭행과 기합은 언제나 너무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흙벽돌을 지게에 지고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 산을 깎아서 세워진 산꼭대기 교회에 옮기는 일은 13살 어린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동성 간 성폭행도 매일 일어나는 아주 흔한 일이었습니다. 복지원에서 오랫동안 지낸 사람은 나중에 소대장이나 조장, 서무로 뽑혀 임명됐습니다. 지옥에서 성장한 그 사람들은 간부급 원생이 되면 똑같은 성폭행을 스스럼없이 했습니다. 주로 새로 들어오는 애들이 타깃이었습니다. 소대장이 먼저 하다가 조장이나 서무도 하는 순서로 성폭행이 가해졌습니다. 새로운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 그 행위가 반복해서 이뤄지는 걸 봤습니다. 절망만이 가득한 삶...탈출 한 달 만에 다시 제자리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생활이 반복되는, 오로지 맞지 않으려고 사는 삶이 무슨 삶이었을까요. 가끔 그 지옥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언젠가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형제원에서 3년 정도 지냈을 무렵, 개금분교가 생겨 그곳에서 6학년을 다녔고 졸업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야간중학교 소대로 이동했습니다. 야간중학교를 다니던 중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을 했는데 철공소 반장은 화가 나면 쇠파이프로 ‘빠따’를 때렸습니다. 맞던 중 저도 모르게 손으로 막아서 팔이 퉁퉁 부어 일을 할 수 없게 됐고, 손이 나은 후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데 한 사람이 제게 와 소대의 열쇠를 복사했다고 해서 몇 명 더 같이 해서 탈출하기로 계획을 짰습니다. 소대장이 잠든 시간 우리는 자물쇠를 열고 소대 뒤로 돌아가 낮은 담을 타고 넘었습니다. 밤새 산을 달려 결국 도망치는데 성공했습니다.다 같이 며칠을 지내다 서로 헤어지게 됐습니다. 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해운대에 가고 싶어져서 물어 물어 해운대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모르는 아이들과 지내면서 친구가 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길들여져 시키는 일만 하고 살아와서, 스스로 무엇인가 하겠다고 꿈꿀 수 없는 사람이 돼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던 중에 친구랑 둘이 있을 때 금정경찰서 형사가 와서 “너희들 도둑질 했지”라고 물었습니다. “안 했다”고 했더니 “그럼 이 텐트는 뭐냐”고 하기에, “이건 우리 것이 아니고 원래 여기에 있어서 그냥 있는 것”이라고 하니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경찰서로 간 후 다시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약 한 달간의 꿈 같던 생활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습니다. 그때가 1985년 9월쯤이었습니다. 그렇게 형제복지원에 두 번째로 입소하게 됐습니다. ‘개·돼지 삶’ 끝났지만...생 놓으려 한 적도 무기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시키는 일만 하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듣고, 주면 먹는, 꿈이 없는 생활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그런 개돼지 같은 생활이 무한 반복돼 저의 영혼을 갉아 먹었습니다. 형제복지원에서 다시 나올 수 있게 된 건 울주군에서 사건이 생기면서였습니다. 울주군에 제2의 형제복지원을 만들겠다며 형제복지원에서 사람을 차출해 강제 노역을 시키던 중 ‘집단 탈출 사건’과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수사가 진행되던 중에 비리와 폭행, 살인 사건 등 셀 수 없이 많은 형제원의 범죄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상담을 통해 성인은 귀가조치 됐고, 아동은 고아원이나 유사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저도 상담을 하고 대기하다가, 먼저 형제복지원에서 나왔던 누나가 저를 찾아와 바로 귀가조치 됐습니다. 그때가 1987년 4월쯤입니다. 앞서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형제복지원이 복지가 잘 돼있어 부랑인들을 잘먹이며 기술을 가르쳐 귀가조치 하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에 더더욱 화가 납니다. 경찰과 시청, 구청, 공무원들도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형제복지원에 조력했습니다. 박인근 원장은 정말이지 철두철미한 악마였습니다. 그렇게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부산에서 조금 지내다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가능한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에 제대로 배운 것 없이 강제 노동과 억압 속에 살다가 사회에 홀로 서다보니, 수많은 부딪힘과 깨짐, 쓰러짐 등 힘든 일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는 것에 회의를 느껴 22살에 약물로 자살을 하려다 다시 깨어난 적도 있었습니다.형제복지원에서 있었던 일들로 인한 억울함은 풀 길이 없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울화가 치밀어 올라 성격 형성에도 나쁜 영향이 엄청나게 미쳤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러 사람과 어울려 지내는 것도 잘 할 수 없어 늘 외롭게 지내다가, 외국인 배우자를 만나 초등학생 자녀를 두 명 두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못 배운 것이 많아도 지나간 세월이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냅니다. 그러나 저의 무능과 가난으로 인한 영향이 제 자녀들에게도 미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제 자식들은 많이 배워 아빠보다는 훨씬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책임을 다하길 바랍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국가배상 청구소송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은 제 인생을 배상해 주세요. 형제복지원 사건 어디까지 왔나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고(故) 박인근 원장은 1989년 특수감금 혐의에 대해 무죄가 확정됐다. 2018년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무죄 판결을 취소해 달라며 비상상고를 신청했지만 지난 3월 대법원에서 기각됐다. 다만 재판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고 정부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가를 상대로 첫 손해배상 소송에 제기한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현재 추가 소송 제기를 이어가고 있다. 1차 소송에 참여한 13명은 모두 입·퇴소 증빙자료가 준비돼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러한 증거가 없어 피해사실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형제복지원 서울경기피해자협의회는 비용 부담 때문에 소송 참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다.
  • 50대 교사 32년만에 북침설 누명 벗었다

    50대 교사 32년만에 북침설 누명 벗었다

    수업시간에 한 발언 등으로 국가보안법 사건에 휘말려 해직과 함께 실형을 산 50대 교사가 재심에서 누명을 벗었다. 청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오창섭)는 강성호(59)교사가 청구한 재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고 2일 밝혔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 능력이 부족하고 수업시간에 한 강 교사 발언 가운데 일부는 개인적 의견을 표명한 것에 불과해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다. 강 교사가 억울함을 벗기까지는 무려 32년이 걸렸다. 1989년 3월 교사로 임용된 강교사는 그해 4월1일 제천의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도중 “6.25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 아니고 미군이 먼저 북한을 침범해 일어난 것”이라고 발언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한 2주 후 같은 장소에서 북한 자연경관, 평양시 모습, 김일성 동상 등의 사진 등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평화롭고 살기좋은 곳으로 북한을 찬양 고무한 혐의도 추가됐다. 강 교사 혐의에 대해 청주지법 제천지원은 그해 10월 7일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인 청주지법은 강 교사의 양형 부당 주장을 받아들여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강 교사 상고를 기각하면서 2심 선고는 그대로 확정됐다. 해직된 강 교사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1999년 교단에 다시 섰지만 ‘북침설 교사’라는 주홍글씨가 그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2019년 11월 반전이 일어났다. 강 교사를 조사한 수사관들 행위가 불법체포감금죄에 해당된다며 청주지법이 재심청구를 수용한 것이다. 재심을 진행한 청주지법은 강 교사 혐의를 모두 무죄로 봤다. 재판부는 “6.25관련 발언은 학생들이 착각해 진술했거나, 수사기관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과장해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며 “일부 학생들은 그런 말을 들은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등 신빙성이 떨어져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 이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당시 증언한 학생 6명 가운데 2명은 수업시간에 결석까지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북한 찬양 교육과 관련해서는 “개인 의견을 표명한 것에 불과하고, 이 행위가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고 볼수 없다”고 봤다. 무죄 선고 후 강 교사는 “노태우 정부가 전교조를 와해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며 “허위진술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제자들이 지금도 고통을 받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강 교사는 현재 청주 상당고에 재직중이다.
  • 끝내 반성 없던 ‘경비원 갑질’ 주민, 5년형 확정

    끝내 반성 없던 ‘경비원 갑질’ 주민, 5년형 확정

    아파트 경비원 고(故) 최희석씨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입주민 심모씨에게 징역 5년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심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심씨는 지난해 4∼5월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 강북구의 아파트 경비원이었던 최씨를 여러 차례 폭행·협박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주차해 둔 자신의 승용차를 손으로 밀어 옮겼다는 이유로 최씨를 폭행하고, 최씨가 이를 신고하자 다시 경비원 화장실에 가둔 뒤 12분가량 구타한 것으로 조사됐다. 심씨는 그 이후로도 지속해서 최씨를 협박하며 사직을 종용했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던 최씨는 결국 지난해 5월 심씨로부터 폭행과 협박을 당했다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으며 죄질이 아주 좋지 않아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권고 형량에 따르면 상해와 보복, 감금 등 심씨의 혐의는 징역 1년∼3년 8개월에 해당하지만, 재판부는 이보다 중형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법원에 수차례에 걸쳐 반성문을 제출했으나, 최씨와 언론 등을 원망하며 자기 합리화만 꾀하고 있다”며 1심 판결을 유지했다.
  • 경비원 화장실에 가둬 폭행한 아파트 주민, 징역 5년 확정

    경비원 화장실에 가둬 폭행한 아파트 주민, 징역 5년 확정

    아파트 경비원 고 최희석씨를 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입주민 심모씨에게 징역 5년이 확정됐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심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심씨는 지난해 4∼5월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었던 최씨를 여러 차례 폭행·협박한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심씨는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해둔 자신의 승용차를 손으로 밀어 옮겼다는 이유로 최씨를 폭행했다. 이에 최씨가 자신을 신고하자 경비원 화장실에 가둔 뒤 12분가량 구타하고, 이후 수시로 협박을 일삼으며 사직을 종용하기도 했다. 최씨는 심씨로부터 지속적인 폭행과 협박을 당해 심적 고통을 느꼈다는 취지의 유언을 남긴 뒤 지난해 5월 극단적 선택을 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진지하게 반성하지 않으며 죄질이 아주 좋지 않아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권고 형량에 따르면 상해와 보복, 감금 등 심씨의 혐의는 징역 1년∼3년 8개월에 해당하지만, 재판부는 이보다 중형을 선고했다. 항소심도 “심씨는 오로지 남 탓으로 책임을 돌리고 있다”며 “수차례 반성문을 냈지만 진심어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고 반성문에서도 자기합리화 자세를 보였다”며 기각했다. 대법원 역시 원심 판단이 옳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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