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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oul in] 수험생·학부모 위한 클래식 음악회

    영등포구(구청장 김형수) 7일 오후 2시 영등포구민회관 대강당에서 ‘수험생과 학부모를 위한 클래식 음악회’를 연다. 테마는 ‘세 여인의 3인 3색 사랑이야기’이며 갈라 콘서트 형식이다. 김자경오페라단이 오페라 ‘아이다’‘카르멘’‘라트라비아타’ 등을 해설과 함께 들려준다. 구는 주민의 정서함양을 위해 계절별로 문화마당을 개최한다. 문화체육과 2670-3142.
  • [사설] 대통령·여당 갈등, 막 가자는 건가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간 갈등 기류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정치에 전념한 일이 없다던 노 대통령은 여당을 향해 메가톤급 정치 발언을 연거푸 쏟아냈다. 이에 맞서 어제는 김근태 당의장이 노 대통령을 공개리에 비판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정치싸움에 몰두하는 모습이 볼썽사납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국무회의석상에서 임기와 탈당 문제를 거론했다. 대통령이 정치에만 관심을 두고 국정을 소홀히 한다는 지적이 일자 다음날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통령은 정치에 전념한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30일 “신당은 지역당을 만들자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당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여당내 다수가 추진해온 통합신당을 거부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정치보다는 국정을 우선하고 있다고 강조한 지 하루만에 다시 정쟁을 부를 언급을 했다. 노 대통령은 안해도 될 얘기를 함으로써 여권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북핵, 부동산,AI 등 대통령이 챙겨야 할 현안이 얼마나 많은가. 신당 문제는 당장 결론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다. 시간을 두고 내부토론에 맡기면 되었다. 대통령의 언급이 있자 “제2의 대연정 발언”이라고 되받아친 김 의장의 태도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당장 여당은 친노(親盧)·반노(反盧)로 나뉘어 백가쟁명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반노는 노 대통령을 노골적으로 공격하고, 친노는 김 의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양측 모두에서 “차라리 갈라서자.”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병완 실장은 “정체성을 유지하는 신당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김 의장에게 유감을 표시해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여당은 민심을 두려워해야 한다. 지지율이 낮으면 원인을 바로 알고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대를 헐뜯는 식으로 무엇을 얻겠다는 건가. 서로 감정을 자제하고 민생·안보 챙기기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 [Seoul in] ‘울퉁불퉁’ 고척동길 새단장

    구로구(구청장 양대웅) ‘울퉁불퉁’ 악명 높았던 구로구 고척동길이 꽃단장됐다. 고척동길은 남부순환로와 강서로를 연결하는 주요간선도로이지만 노면이 갈라지고 파인 곳이 많아 야간 사고의 위험이 제기돼 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척동 192(고척사거리)에서 개봉동 92-4(남부순환로)에 이르는 고척동길 차도와 개봉동 67-27(남부순환로)에서 오류동 6-42(경인로)에 이르는 보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했다. 이번에 정비된 차도는 폭 14.5m, 연장 1400m에 이르며 보도는 폭 2.5m, 연장 1050m에 이른다. 토목과 860-3130.
  • “혜화 ‘살인 고가차도’ 철거를”

    “혜화 ‘살인 고가차도’ 철거를”

    ‘혜화고가차도=살인 고가차도?’ 동대문구와 주민들의 요구로 신설동고가차도가 철거되는 데 이어 종로구에서도 혜화고가차도의 철거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일방통행에 버스전용차로가 사고불러 29일 종로구 주민자치위원회와 혜화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7월6일 새벽 동소문동∼명륜동으로 이어지는 혜화고가차도 남단에서 버스전용차로를 달리던 시내버스와 오토바이가 추돌해 오토바이 운전자가 사망했다. 혜화고가차도와 그 근처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올들어서만 6번째.2004년 고가차도에 버스전용차로가 생긴 뒤 모두 11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고가차도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곳을 ‘살인 고가차도’라고 호칭한다. 혜화고가차도는 1971년에 완공된 길이 240m, 높이 9.5m의 도심방향 일방통행 고가차도. 지은 지 30년이 지나면서 사고위험성을 감안해 수년 동안 승용차만 통행시키고 버스는 밑으로 다니도록 했다. 그러나 2년 전 고가차도에 버스전용차로가 생기면서 다시 고가차도 위로 버스가 다니고 혜화동로터리의 도심방향 버스정류장은 폐쇄됐다. 문제는 로터리 이전 삼선동 버스정류장부터 다음 정류장인 성균관대입구까지 거리가 1㎞를 넘는 점. 거리가 길고 전용차로도 있어서 노선 버스들은 무서운 속도로 고가차도 위를 질주하게 된다. 보통 버스정류장 사이의 거리는 300∼600m다. 전용차로를 달리는 버스는 탄력을 받아 차도를 가로지르는 무단횡단자 등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곤 한다. ●3개월 만에 이음새 갈라져 고가차도 주변의 교통사고 유형은 또 있다. 대학로에서 혜화동로터리로 진입, 삼선동으로 우회전하는 버스는 2,3차로로 운행하다 전용차로인 1차로로 들어가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리자마자 급히 왼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버스 운전자는 우회전하자마자 횡단보도를 만나는데, 시야가 고가차도의 교각에 가려 길을 건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곤 한다. 육중한 버스가 낡은 고가차도를 지나는 점도 문제다. 주민 윤영진(64)씨는 “버스전용차로가 생기고 3개월 만에 고가차도 상판의 이음새 8곳이 모두 벌어졌다.”면서 “또 상판을 떠받치는 교각의 받침대에 금이 가고 물이 새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고가차도 앞에는 ‘총중량 20t, 길이 16.7m’ 등 차량운행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시내버스보다 큰 화물차 등의 통행을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버스보다 무겁고 차체가 긴 ‘굴절 버스’는 버젓이 운행된다. 고가차도를 지나는 140번,161번 노선의 굴절 버스 중량은 31.2t, 길이는 18m나 된다. ●해마다 보수공사에 수억원 서울시는 낡은 고가차도를 고치기 위해 10여년 동안 23억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도 종로구의회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억 800만원을 들여 보수공사를 했다. 혜화동, 명륜동, 종로5·6가동 주민들은 “자꾸 예산을 들여 땜질 공사를 하지 말고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은 이밖에 버스가 전용차로를 질주하면서 소음이 이전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고 호소한다. 고가차도에서 내려오는 먼지도 심해졌고 어두침침한 고가차도 밑에는 늘 쓰레기가 뒹굴어 악취가 심하다는 것이다. 주민 이혜숙(58)씨는 “서울시가 시청 앞을 시민의 공간으로 꾸몄듯이 위험하고 흉물스러운 혜화고가차도를 철거해 달라.”고 주문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단세포적인 사고 길들이기

    [한승원 토굴살이] 단세포적인 사고 길들이기

    내 사전 속에는 컴퓨터와 논술이 ‘우리 아이들의 영혼과 사고 체계를 망쳐놓고 있는 것’이라 쓰여 있다. 컴퓨터는 돼지 지능 정도의 단세포적인 수직적 사고와 논리로 만들어진 기계이고, 논술은 수직적 사고를 통해 진리를 말하려는 진술 체계이다. 그 논술로써 학생들의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려 하는 교육당국은 인간에게 있어 수평 사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른다.1차원을 뛰어넘어 고차원의 생각을 하게 하는 수평사고는 5지선다형의 시험문제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광범위한 독서(정독)를 통해 함양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인재설(人才說)’에 이런 대목이 있다.‘모든 사람이 아이였을 적에는 대개 총명한데, 이름을 기록할 줄 알만 하면 아비와 스승이 ‘경전의 주석’과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들을 위하여 모아 놓은 어려운 어구 풀이’들만을 읽히어 그 아이를 미혹시키는 바람에, 종횡무진하고 끝없이 광대한 고인들의 글을 읽지 못하고 혼탁한 흙먼지를 퍼먹음으로써 다시는 그 머리가 맑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정희는 후세들의 영혼이 단세포화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는, 다섯 수레 이상의 책읽기와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개를 몽당붓 만든 부지런을 통해 얻은 신통과 향기로움의 결과로 아름다운 서체를 만들어낸 한 천재 선인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이십대 초에 중학교 준교사 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다. 당시 고교 졸업생이던 나는 한 고시 합격생의 수기를 읽고 그가 독파했다는 책들을 모두 사다가 밑줄을 쳐가면서 속속들이 읽었다.‘삼국유사’ ‘삼국사기’ ‘한글갈’ ‘우리말본’ ‘국문학사’ ‘고가(향가)연구’ ‘고려가요’ ‘시조정해’ ‘훈민정음발달사’ ‘고전문학강독’ ‘문학개론’ ‘시가사강’ ‘음운론’ 등. 우리 신화, 설화, 신라 향가, 고려가요, 시조, 고대 소설이나 우리 말 어원 밝혀내기가 한없이 재미있어 그것들을 줄줄 외다시피 하고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낙방하고 말았다. 나중에 경험자에게 들으니, 내 시험공부 방법이 틀렸다고 말했다. 출제 위원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하고, 깊이 파고들지 말아야 하고, 출제될 만한 것들만 골라(경향에 따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시험공부 방법을 수정하여 재도전하지 않았다. 출제위원들이 요구하는 정답을 알아맞히는 식의 공부가 짜증났던 것이다. 책 한 권을 집어 들면 끝까지 속속들이 읽어버리는 데에서 재미를 느끼는 나의 학습방법보다 더 큰 문제는 나의 사고 체계에 있었다. 나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문득 수평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말하곤 하는 미욱한 사람이다. 사고 체계가 나 같은 사람은 단세포적인 수직사고를 요구하는 정답을 명쾌하게 써내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수직적인 논리는 일차원적인 것이다. 수직적인 논리(사고)로 풀리지 않는 것을 우리는 수평적인 논리(사고)로 풀어야 한다. 사고 혹은 사유는 훈련에 의해서 체질화되는데, 수직적인 논리만 훈련 받은 사람들은 절벽처럼 막혀 있게 마련이다. 컴퓨터와 논술은 수직적인 논리를 도와줄 뿐 수평적인 사고를 배제시킨다. 수직 논리는 흑백의 이념을 만들고 그 이념은 세상을 네 편과 내 편으로 갈라 싸우게 한다. 수직 사고에 길들여진 사회와 역사는 시멘트 블록 담(절벽)처럼 견고해지고 그 견고함은 절망적인 잔혹을 불러들인다. 우리 사회가 흑백 논리로 치닫는 까닭은 논술로 인한 단세포적인 수직 사고의 훈련 때문이다. 수직적인 논리만 펴는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창조 능력이 신장되지 않는다. 창조 능력은 수직적인 사고만으로는 안 되고,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인 사고가 어우러져야 생긴다. 현대는 창조적인 사고를 가진 인재들이 필요한 세상이다. 이러한 때에 논술 시험을 고집하는 교육부 지도자들이야말로 컴퓨터적인 수직 사고에 얽매인 자들이다. 그들에게 인재 양성을 맡겨놓고 있는 우리 앞날은 참으로 한심하다. 소설가
  • 儒林(74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儒林(742)-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3)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 3월 20일. 마침내 나으리를 위한 백일기도가 끝난 후 두향은 마지막으로 궤연 앞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불렀다. “즐겁도다, 언덕에 숨어사는 삶은 큰 사람의 한가로운 마음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노래하니, 그 기쁨 이에서 지나침이 없으리.” 그러고 나서 두향은 퇴계의 신주와 거문고를 들고 강선대로 나아가 불을 질렀다. 어느덧 다사로운 봄이 찾아와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강물은 해빙이 되어 와랑와랑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두향은 나으리의 신주를 태우고 거문고마저 집어넣었다. 이제 이승에서는 다시 노래 부를 기회가 없었으므로 두향은 망설이지 않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거문고와 신주는 참따랗게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두향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장롱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세모꼴의 옷섶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두향이가 입고 다니던 갑사저고리에서 베어 잘라낸 깃이었다. 이십여 년 전. 헤어지기 전날 밤, 두향은 상원사의 동종을 얘기하면서 나으리께 할급휴서(割給休書)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안동호부의 남문루에 있던 동종이 세조의 명으로 왕가의 원찰이었던 상원사로 운반될 당시 죽령고개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았던 고사를 통해 두향은 자신을 그 동종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젖꼭지를 베어 달라고 나으리께 청원하지 않았던가. 500여명의 호송요원과 100필의 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령고개에 이르러 꼼짝도 하지 않던 동종.36개의 유( )로 불리는 유두에서 운종도감이 젖꼭지 하나를 베어내자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하였던 고사의 예를 들어 두향이도 나으리께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에 이어진 천겁의 인연을 끊기 위해서는 젖가슴 하나를 베어달라고 청하지 않았던가. 그때 나으리는 은장도로 두향이가 평소에 입고 다니던 갑사저고리의 깃을 베어내었다. 두향은 울면서 ‘나비’라고 불리던 세모꼴의 접어진 깃을 두 손으로 받으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으리께오서 저고리의 깃을 자르시면 이것으로 인연이 다된 것을 알겠나이다. 상원사 동종에서 잘라낸 젖꼭지를 남문루에 파묻고 제사지냈듯 소첩도 이 저고리 깃을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으오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이나이다.” 이제야말로 나으리께 약조하였던 내용을 지킬 때가 되었다.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그때가 다가온 것이다. 다북쑥 마을이 의미하는 대로 이 지상의 황촌(荒村)에서는 나으리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므로. 두향은 타오르는 불빛 속에 그 저고리 깃마저 집어넣었다.
  • 내가겪은 男과女 사이

    내가겪은 男과女 사이

    성전환(性轉換)의 미녀(美女) 「에이프릴·애슐리」(34)는 지난 2월 영국 최고재판소에서 정식으로 「남성」이라는 판결을 받았다. 아내의 좌(座)에서 자동적으로 쫓겨났고 결혼 14일만에 이혼한 그녀. 그녀는 『나는 「에이프릴·애슐리」, 여자다. 내 여성으로서의 신분(身分)을 이제 어쩌란 말이냐』고 외친다 여성으로서 밖엔 못살아 나는 같은 경우의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다. 내 친구들은 모두 내 편이 돼 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즉 여성이라는 것)를 인정해 주고있다. 이혼재판이 끝나고 집에 돌아 와 보니 내 방은 꽃다발과 편지로 가득했다. 친구들이 보내준 것이었다. 어느 편지에도 내가 『옛날과 다름없이 같은 「에이프릴」이야』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사실 틀림없이 옛날대로의 「에이프릴」인 것이다. 특별한 여자도 아니고 이상한 여자도 아니다. 나는 「에이프릴·애슐리」, 여자다. 10년전 「카사블랑카」에서 수술한 때부터 분명한 여성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성이외의 존재로서 살아 가는 도리를 알 수가 없다. 수술할 때에도 나는 남성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여성적이었다. 수술은 내 몸의 아주 작은 한부분을 몸 전체나 마음에 일치시키는 계기였던 것이다. 남성의 흔적 조금도 없고 다시 한번 조절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워낙 나는 정신적으로는 여성이었으니까. 수술은 나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아있는 남성의 것을 떼어 버리고 인공적인 여성의 기관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내가 발가숭이가 되더라도 사람들은 여성인 나를 볼뿐 남성을 보지는 못한다. 그리고 내가 일찌기 남성이었음을 암시하는 흔적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을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법률에 의하면 내가 만일 결혼하고 싶을 경우 색시가 아니라 신랑으로서 결혼식장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내 「보이·프렌드」들은 거의 모두 정상이고 건강하고 이성을 사랑하는 남성들이다. 동성애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보이·프렌드」같은 건 단 한명도 없다. 20대 초반까지 나를 괴롭힌 것은 남자를 안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로서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인고끝에 찾아낸 여성미 나는 내 자신을 찾아 헤매었고 여성으로서의 참된 자신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보그」 같은 잡지의 「모델」이 되어서 돈도 많이 버는 우아하고 「차밍」한 여인, 그런 여인으로서의 나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있다. 지금 판사의 말 한마디가 일껏 발견한 나의「신분」을 빼앗아버렸다. 나는 다시 한번 처음부터 「나」를 찾아 헤매야 된다는 얘기다. 나의 생활은 결코 평탄한것은 못되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남자애로서 살고 남자애들의 장난을 해야 했었다. 아버지는 내 형제들과 함께 「복싱」을 가르쳐 주마고 줄기차게 나를 졸라댔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노크·다운」당한 횟수를 세어보고 나서 「복싱」연습에서 해방시켜 주곤했다. 학교의 사내녀석들은 곧잘 나를 묶어서 방공호 속에 쳐박아 놓곤 했다. 아이들은 기묘한 생물이나 자기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잔인한 법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계집애 같았고 목소리는 또 높디 높은 「소프라노」였다. 어릴때부터 여자로 믿어 학교애들에게서 심한 구박을 받은 일, 그리고 자기는 계집애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이 두가지 때문에 나는 정신적으로 괴로워 했다. 그 결과 열여섯살 때 신경쇠약에 걸려 버렸다. 나흘 동안이나 말을 못했고 게다가 무서운 「쇼크」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져 버렸다. 나는 이 때 아직 사춘기에 달해 있지도 않았었다. 나는 아는 이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일념으로 상선대(商船隊)에 들어갔다. 물론 거기서도 즐거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결국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다. 배가 미국에 닿았을 때였다. 괴로와 자살 기도한 일도 다음에는 배가 「리버풀」에 돌아 왔을 때 물에 빠져 죽으려고 바다로 뛰어 들었다. 구조되고 나서 또 약을 먹었지만 양이 적어서 살아나고 말았다. 그럴 즈음 「그리스틴·조겐센」의 얘기를 들었다. 수술을 받고 성전환한 미국의 「지·아이」다. 『나같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 그런 것을 알자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내 집에서의 생활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남성이 못 된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해 주려고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과의사에게 다녀야 했고 남성 「호르몬」과 전기 「쇼크」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효과는 전혀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았다. 18살이 되자 나는 어머니와 헤어져 살게 되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 사건 이후로 어머니와 나는 화해를 하고 사이 좋게 지내고 있다. 감추려해도 커지는 가슴 나는 「저지」로 가서 「호텔」에 취직했다. 경영자측은 나를 쓸까 말까 약간 망설이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나 여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나의 가슴은 커지기 시작했다. 보통 여자의 젖가슴처럼 커져 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끼를 입고 가슴을 감추려 했다. 조끼가 작아서 나는 늘 가슴이 답답했다. 가슴은 자꾸 부풀어 오르기만 했다. 나는 지금 「유니·섹스」라고 불리는 옷을 입게되었다. 「유니·섹스」의 발명자는 바로 내가 아닌가 싶을때도 있을 지경이다. 나의 남성부분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영복을 입으면 나는 여자애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즈음 나는 한 청년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계집애라고 믿고 있었다. <계속> [선데이서울 70년 4월 5일호 제3권 14호 통권 제 79호]
  • [빚탈출 희망찾기-김관기 채무상담실] 남편이 파산하려 이혼하자는데…

    Q남편 사업이 망해서 신용불량 상태입니다. 남편 지원하느라 20년 경력 교사인 저도 제 명의 주택에 대해 담보대출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2년 전부터 다른 지방에서 혼자 살며 두어달에 100만원 정도씩 생활비만 보내왔습니다. 며칠 전 남편은 파산신청을 했습니다. 아내인 제가 직업도 있고 재산도 있어 법원에서 파산, 면책을 해주지 않을 것이니 이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누가 하더랍니다. 남편은 “형식상 잠시 이혼신고만 하자.”고 하는데, 파산을 위해 이혼까지 해야 하나요 - 한민주(45) A근대 민법은 재산에 있어서 개인주의를 지킵니다. 이는 부부 사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는 육체적·정신적 결합을 통해 가족이 될 뿐 재산 문제는 원칙적으로 별개입니다. 부부 일방이 가정의 유지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에 대해서는 물론 실제로 지출하지 않은 상대방이라도 책임이 있겠습니다. 파산법은 민법에 의해 인정되는 법률관계에 대해 최소한의 간섭만 합니다. 따라서 민법이 유지하는 개인주의는 파산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파산을 신청할 때 부인이 재산이 있고 소득이 있는 사정은 남편의 파산·면책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물론 남편이 빚을 지면서 그 돈을 부인에게 넘겨줘 부인이 이것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유지하는 경우에는 면책이 안될 수도 있습니다. 채무자를 속이는 행위에 관해 채무자를 제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민주씨가 거의 전적으로 남편이 빌려온 돈으로 집을 산게 아니라면 남편의 파산, 면책에 지장받을 일은 없습니다. ‘형식상’ 이혼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비록 영구히 갈라설 생각없이 잠시만 이혼을 한 것처럼 위장하겠다는 동기로 이혼신고를 해도 그 이혼은 유효하다는게 지금까지의 판례입니다. 대법원은 1993년6월 위장이혼 부부 사건과 관련,“협의이혼에 있어서 이혼의사는 법률상 부부관계를 해소하려는 의사를 말하므로 일시적으로나마 법률상 부부관계를 해소하려는 당사자간 합의 하에 협의이혼 신고가 된 이상 양자간 이혼의사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협의이혼은 무효로 되지 않는다.”고 판시했습니다. 외국 이민을 가기 위해, 또는 파산을 위해 필요하니 형식상 잠시 이혼을 하자고 속이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가진 남편들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혼에는 가짜 이혼이 없습니다. 이혼은 이혼입니다.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7) 성욕과 에로티시즘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7) 성욕과 에로티시즘

    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푸코는 역사에서 성욕의 영역이 어떻게 이성과 지식의 권력에 의하여 억압되어 왔는지 그의 저서 ‘성욕의 역사’ 3부작에서 분석했다. 한국에서 이 책을 ‘성의 역사’라고 옮겼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성(sex)과 성욕(sexuality)은 다르다. 전자는 중성적 의미를 띠고 있고, 후자는 성을 통한 인간 욕망의 분출을 뜻한다. 그는 성욕의 고고학적 계보를 추적하면서 서양이 추구해온 이성주의의 학문이 성욕을 광기와 유사한, 위험한 비이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해온 이성적 사회의 권력을 비판하면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리 이전의 인간의 진실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대 그리스가 그런 분리 이전의 인간이해를 이루었다고 평가하면서, 로고스(logos=이성)와 히브리스(hybris=몰이성)가 대립과 모순으로 나누어지기 이전의 원초적인 통합의 인간을 찾으려 하였다. 푸코의 이 요청은 철학적으로 중요한 아포리아(aporia=풀리지 않는 난제)를 던졌다. 사실상 의식의 표면에서 인간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것 같은데, 무의식의 심층에서 인간은 성욕의 용암을 폭발시키고 있고, 미칠 수 있는 광란의 가능성을 그의 몸 깊은 곳에 은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간은 저 이성적 훈련에 의한 억압보다 폭발하는 몰이성의 말에 의하여 더 거짓없는 진실을 토해낸다. 그러나 성욕의 말은 진실하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푸코가 남다른 혜안으로 성욕과 비이성의 숨은 지하세계를 구조적인 인식론으로 밝혀 냈지만, 그는 동성애에 의한 에이즈에 걸려 50대에 일찍 죽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이후로 20세기의 서양 철학자들은 대개 이 성욕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었다. 왜냐하면 20세기 후기 철학의 큰 화두는 몸과 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가장 심도있게 다룬 철학자가 프랑스의 메를로퐁티다. 인간의 의식이 타자의 의식과의 상호관계에서 구체화되듯이, 인간의 몸도 타자의 몸과의 관계에서 잠을 깬다. 잠을 깨는 순간이 바로 에로틱한 느낌을 갖는 순간이다. 에로틱한 느낌은 꼭 성인 남녀의 몸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아기의 몸에 대한 가족의 사랑에서도 일어난다.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발가락이나 뺨을 어루만지고 깨물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인간의 몸은 타인과 관계를 맺음에서 객관적 대상이 아니고 살(肉)로서 나타난다. 내 몸과 타자의 몸과의 사이에 주관도 아니고 객관도 아닌 그런 애매모호한 사이세계를 공유하고픈 욕망을 몸이 각각 느낀다. 이 사이세계가 ‘살’(flesh)이라고 메를로퐁티가 말했다(24회 글 참조). 이 성욕의 에로티시즘은 나의 몸이 타자의 몸과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의 발로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성욕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성욕을 제외하고 인간관계가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메를로퐁티가 그의 ‘지각의 현상학’에 든 보기를 취한다. 어떤 처녀가 애인과 사귀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금지당한 이후에, 그녀의 몸은 스스로 먹고 잠자기를 거부하고 외출도 마다하고 드디어 실성하여 말도 하지 못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욕의 금지는 모든 다른 일반적 관계마저 스스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성욕의 에로티시즘은 단지 좁은 의미의 성관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타자지향적 운동의 거부를 초래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적어도 성욕이 인간관계의 모든 성취감을 가능케 하는 가장 저변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견해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인간관계가 사라진 목석이나 얼음과 같다는 것이다. 몸의 성욕은 모든 것을 의미화한다. 그것이 없어지면, 인간에게 의미마저 사라진다고 메를로퐁티는 생각한다. 모든 종교와 도덕은 다 성욕의 억압을 요구해 왔다. 푸코는 특히 서양의 기독교 율법이 성욕의 억압을 정상상태의 척도로 세워놓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종교와 도덕은 에로티시즘의 적이었다. 어느 종교적 수행자가 성욕이 자꾸 발동되어서 마음이 에로틱한 생각으로 덮이기 때문에 성기를 잘라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자가 되려는 욕망도 차단되면서 오히려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욕은 성기를 잘라낸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관계의 무의식의 원동력으로서의 성욕은 성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성기는 그 성욕의 실현도구일 뿐이다. 성자나 현자는 이 성욕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욕은 물건처럼 어떤 창고에 가두어 둘 수 없고, 그것을 영원히 무화(無化)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성욕은 몸을 지닌 마음이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이겠다. 몸을 떠난 마음은 혹시 성욕을 갖고 있을까? 불교적으로 마음은 습관화된 업(業)으로 보기 때문에 탈육(脫肉)의 마음도 그 인습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업을 바꾸지 않으면, 윤회의 바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도가 아닌 메를로퐁티도 그 성욕이 우리 몸의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의식의 것도 아닌 어떤 알 수 없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지각의 현상학’에서 불교도처럼 짐작하기도 한다. 좌우간 성자와 현자도 성욕을 지우지 못하고, 그 성욕을 다른 방식으로 변용시켰을 뿐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성욕의 살을 철학적으로 언명하면서, 성욕은 몸이 타자의 몸과 일치하고픈 관여의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이 일치의 욕망이 소유론적인가, 존재론적인가? 그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그의 특유의 애매모호성(ambiguity)의 이론으로 성욕의 본질을 기술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였던 라캉은 성욕을 소유론적으로 해석했다. 아기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머니의 남근(Phallus)으로 존재한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아기가 이미 어머니의 자궁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존재했었는데, 부득이 세상에 나오면서 그 탯줄을 자르는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그와 동시에 아기는 자기 몸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져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치유 불가능한 정신병자는 자기 몸이 갈가리 찢겨져 있다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평생 괴로움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예컨대 15~16세기 벨기에의 프랑드르 지방의 화가인 보슈의 그림인 ‘성 안토니오의 유혹’은 지옥의 고통과 에로틱한 분위기가 뒤섞인 분위기인데, 거기에 사지가 절단된 광인들의 환상이 그려져 있다. 라캉은 이 그림이 인간의 원초적 괴로움의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정상적 아기는 거울을 통하여 자기 몸이 온전함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고 한다. 정신병자는 거울을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좌우간 정상적 아기는 자기가 그 어머니와 일치상태에 있게 하는 남근이라고 착각하면서 남근으로서 어머니를 소유하고픈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기에 대한 남녀의 구분은 여기서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착각을 깨는 것은 아기가 사회생활로 들어가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 착각을 깨고 아기의 사회생활의 입문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버지의 법’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무서운 상징적 법이 아기가 어머니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금지하기에, 아기는 직접적 소유를 포기하고 간접적인 우회의 길을 밟아 언어를 배우면서 상징적인 에로틱한 소유적 합일을 늘 꿈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기는 스스로 ‘이상적 자아’가 되기를 그치고, 아버지의 상징이 허용하는 ‘자아의 이상’을 찾아 자아실현의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커서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은 모두 원초적 어머니와의 소유를 먼 우회의 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루려는 욕망에 불과한 셈이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라캉의 소유론과 상징론은 이성의 노동으로서 일체의 모든 것을 의미와 지식으로 구성하려는 헤겔 철학과 유사한 데가 있다. 실제로 라캉은 철학적으로 헤겔을 좋아했다. 그러나 헤겔적인 일체의미와 그 논리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프랑스의 20세기 해체철학자로서 바타이유가 있다. 바타이유는 그의 저서 ‘에로티시즘’에서 심신의 모든 에로티시즘은 존재의 격리와 단절에 대하여 깊은 연속의 감정을 대체시키는 것으로 읽었다. 옷을 벗는 나체는 자기 폐쇄의 단절을 살아가는 인간이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교환의 상태라는 것이다. 인간의 성욕은 바다의 파도가 서로서로 주고받듯이 혼융의 새로움으로 합일하고자 하는 자기부정의 황홀과 같다는 것이다. 이 황홀감의 욕망은 곧 죽음에의 몰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에로티시즘은 죽음에게 문을 열어준다.” 여기서 말한 죽음은 자기 폐쇄적 고집의 소멸을 일컫는다. 성욕은 자기를 무화시키는 황홀과 직결된다. 자기 무화로서의 죽음은 곧 모든 분별력을 넘어 가려는 욕망을 말한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성욕을 황홀감의 종교적 신비주의와 비교한다. 다 같이 자기를 잊는 황홀감에서 성욕과 신학적 신비주의는 유사하나, 후자는 자기를 잃으면서 더 큰 것을 신으로부터 획득하려는 지배권(mastership)의 소유론을 버리지 못한 것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그는 이런 신학적 신비주의를 부정하면서, 에로티시즘과 자기의 비(非)신학적 신비주의(atheological mysticism)를 모든 지성의 파멸과 논리의 와해를 상징하는 무지(無知)와 무아(無我)와 비어 있는 하늘을 닮은 자유의 지상권(sovereignty)에 비유했다. 바깥에 대하여 ‘오직 모를 뿐’이라는 20세기 한국의 고승 숭산대사의 가르침은 곧 자아의 주체의식을 해체시키고, 이 해체가 자유로운 해탈의 지상권으로 마음을 이끈다는 바타이유의 사유와 일맥상통한 데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자는 육체의 성욕에서 일체 존재와 교환하는 마음의 황홀로 욕망의 자리를 단지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에로티시즘이 죽음으로 이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잘난 체하는 자아의 모든 분별적 지식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그가 ‘무(無)의 사유는 사유의 무’라고 말한 것은 결국 모든 지성적 사고의 포기를 유도하는 허심(虛心)이 ‘비신학적 황홀’(atheological ecstacy)이라는 말과 같겠다. 허심의 비신학적 황홀은 세상을 인간이 부과하는 의미로 채우려는 의지의 철학이 아니라, 놀이로서 자기를 잊고 만물과 교감하려는 자기 죽음의 사유와 동의어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박근혜·이명박 신경전 가열

    한나라당 유력 대선주자들의 경쟁이 조기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 진영은 연말 당 조직강화특별위원회 구성을 앞두고 물밑 경쟁을 벌이는데 이어 상대 후보의 외국 방문에 의원들이 함께 가는 것을 놓고도 신경전을 벌이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전 시장측은 박 전 대표가 오는 27일부터 4박5일간 중국공산당 초청으로 베이징·칭다오·옌타이 등지를 방문하는데 이경재·임인배·김재원·김정훈·김충환·이진구 의원 등 6명이 동행키로 한 것으로 알려지자 간접적으로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 전 시장과 가까운 한 의원은 “정기국회에 충실해야 할 의원들이 특정주자를 수행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의원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무시한 채 이런 식으로 편을 갈라서야 되겠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측에선 “이번 중국 방문은 중국공산당이 박 대표를 포함해 당 소속 의원 10여명을 공식 초청한 데 따른 것으로 의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며 “최근 이 전 시장의 일본 방문 때, 일본측의 초청을 받지 않은 의원들이 수행한 것은 어떻게 해명하려고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이 같은 양측의 막후 공방이 표면화할 조짐을 보이자 강재섭 대표가 진화에 나섰다. 강 대표는 22일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경선 열기가 조기에 과열되는 것은 오히려 정권교체의 독약이 될 수 있다.”며 “경선의 공정한 심판관으로서 경선관리를 할 것이며,(선의의 경쟁을) 해치는 행위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대선후보가 강의하고 외국에도 나가 당의 진로와 정책에 대해 식견을 내주는 것은 바람직하고, 그런 과정에서 의원들이 ‘호불호’를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선의의 경쟁을 넘어 경선 자체를 해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는 이어 공정 경선을 위해 ▲특정주자에 노골적으로 줄서거나 특정캠프에 가담하는 일 금지 ▲악성 루머 유포·비방 삼가 ▲대의원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대상으로 한 지지 호소 자제 ▲캠프별로 지역별 사조직 입회 강요 금지 ▲사무처 요원들의 줄서기 행위 금지 등 5개항을 제시했다.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儒林(73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儒林(739)-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20) 다음날. 두향은 안동을 향해 먼 길을 떠났다. 밤하늘에서 별이 치마폭으로 떨어지는 흉몽을 꾸고 또한 나으리께서 보내주신 정화수의 물이 핏빛으로 변한 흉사를 보고 그냥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으리의 신상에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 것일까. 다음날 아침 두향은 목욕재계를 한 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소복까지 준비해 가지고 안동을 향해 떠났다. 단양에서 안동까지는 200여리의 험난한 산길. 중도에는 반드시 죽령을 넘어야 했다. 죽령의 높이는 689m로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대재이자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의 가파른 고갯길. 아흔아홉 굽이의 고갯길은 각종 곡물과 상품을 수송하는 중요한 통로였으나 그 무렵 산적들이 들끓어 한낮에도 행인들을 괴롭히고 밤이면 맹수들이 사람을 해치는 험악한 태산준령이었다. 아녀자 혼자의 몸으로는 도저히 가고 올 수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생각 끝에 두향은 2년 전 자신의 부탁으로 나으리께 분매를 전해주었던 여삼과 동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여삼은 그 사이 한층 더 늙어 노쇠하였으나 두향으로부터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는 흔쾌히 이를 수락하였다.20여년 전 퇴계가 단양의 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 바로 곁에서 수발을 들었던 여삼이었으므로 나으리께서 돌아가셨다면 빈소에서 분향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안동까지의 먼 길을 함께 떠났다. 두향은 전모를 써 얼굴을 가리고 장옷을 입었다. 장옷은 부녀자들이 나들이를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머리에서부터 길게 내려 쓰던 두루마기 모양의 옷이었다. 쓰개치마를 써도 무방하였으나 때는 엄동설한의 동지섣달. 매서운 삭풍을 막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으로 누빈 장옷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두향이와 여삼은 나흘 만에 안동 고을을 거쳐 도산서당이 있는 토계리(土溪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토계리에 도착한 순간. 두향은 집집마다의 지붕 위에서 흰옷들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순간 두향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집마다의 지붕에 한결같이 흰옷을 널어 놓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의 혼령을 기꺼이 받아들여 달라고 저승사자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동리에 초상이 났음을 알리는 풍속. 집집마다의 지붕 위에 흰 옷을 널어놓는다는 것은 마을의 중요한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풍장(風葬) 행위였던 것이다. -돌아가셨다. 두향은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혀를 깨물며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는 분명히 연세하신 것이다.
  •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3월 17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변3로서 울린 3발의 총성은 죽은 정인숙(鄭仁淑)양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뜻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이 밝혀지지않은 3살짜리 어린애를 가진 처녀 엄마라고해서 이러쿵 저러쿵 파다한 후문을 일으킨 것. 타고 난 미모 하나로 밤의 요화로 군림, 각계 실력자들과 어지러운 관계를 가졌던 정인숙(鄭仁淑)양. 45구경 권총탄환 2개로 26세의 나이로 비명에 숨져야했던 그녀의 「짧고도 긴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은 가족 ·친구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정본(正本) 정인숙전(鄭仁淑)傳).」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년 2월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의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씨(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숙(仁淑)양의 아버지 정(鄭)씨는 12살 때 일가 중 후손이 없었던 정남수(鄭南洙)씨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해에 양부 정남수씨가 돌아가자 정(鄭)씨는 호주상속을 받아 바로 그해 11월 인숙양의 어머니인 전(全)씨(61)와 결혼했다. 당시 정씨가 살던 곳은 경북(慶北) 김천(金泉)군 (금릉군) 개영(開寧)면. 정(鄭)씨 일가는 해방되기 전 해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이 4형제 중 4남이 바로 인숙양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종욱(宗旭)씨다. 생전 인숙양이 주장하던 것처럼 「뼈대있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게 김천(金泉)일대 주민들의 말이다. 정씨는 행정관리로 출발, 대구(大邱)부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숙(仁淑)양의 출생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였다. 그래서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동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仁淑)양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仁淑)양이 대구(大邱)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인숙(仁淑)양에게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때, 밥먹을때 등 노상 인숙(仁淑)양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仁淑)의 성격은 더욱 오만해 졌다. 인숙(仁淑)양의 윗 오빠 네 사람은 이런 인숙(仁淑)양을 가리켜 『어머니가 너무 쟤만 위해 주니까 계집애가 버릇이 나빠진다』며 불평, 이따금 여동생 인숙(仁淑)에게 기합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인숙(仁淑)양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 때문에 인숙(仁淑)양의 성격을 끝내 뜯어 고치지 못했다는 둘째오빠 종구(宗九)씨의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대구(大邱) S여중에 진학했다. 이 때 아버지 정(鄭)씨는 경북(慶北)도청의 고급 관리로 집안형편이 넉넉할 때였다. 인숙(仁淑)양의 오만한 성격은 더욱 심해지고 이에 따라 오빠들과의 의는 점점 나빠졌다. 호랑이같은 오빠 4명이 인숙(仁淑)양이 조금만 늦게 귀가해도 때리고 꾸지람하기 일쑤. 이래서 정(鄭)씨집은 오만한 인숙(仁淑)양의 기를 꺾으려는 오빠 4명과 인숙(仁淑)을 편들어 주는 어머니 전(全)씨와 인숙의 두 패로 갈리게까지 되었다. 대구 S여고시절 인숙(仁淑)양의 학교성적은 중 이하.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대단해 이때부터 이미 외국손님이 오면 안내역을 맡곤 했다. 인숙(仁淑)양이 영어에 능하게 된 데는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현재 일본「도꾜」 의 「아까사끼」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고 있는 큰오빠 종원(宗源)씨나 H무역의 대표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모두 영어라면 귀신. 이런 오빠 밑에서 익힌 인숙(仁淑)양의 영어실력이 뒷날 요정 「선운각」 에서 외국인들에게 술을 따르며 쓰이게 될 줄이야. S여고에 남은 인숙(仁淑)양의 학적부를 들추어보면 『명랑하고 성실하나 안일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되어있다. 인숙(仁淑)양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鄭)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무터 인숙(仁淑)양의 집 살림은 어머니 전(全)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仁淑)양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仁淑)양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大邱) 남산(南山)동 집을 팔고 삼덕(三德)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 62년 S여고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E大 영문과에 진학하겠다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엔 인숙(仁淑)양의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S 무역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했던 E大 영문과 입시에서 인숙(仁淑)양은 깨끗이 낙방. 세째 오빠 종인(宗仁)씨가 주는 돈으로 M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등록금만 내고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직, E大 낙방 등의 겹친 불운은 콧대 센 아가씨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온 인숙(仁淑)양이 두차례에 겹친 좌절끝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곤 태어날 때부터의 타고난 미모뿐.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仁淑)양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것. 그래서 인숙(仁淑)양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張) 모씨. 당시 장(張)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仁淑)양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張씨 자신도 張씨가 인숙(仁淑)양의 첫 애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콧대꺾였던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은 유명작가를 애인으로 둠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듯 했다는게 그녀 친구들의 이야기다. 당시 인숙(仁淑)양은 친구를 만날 때마다 張씨를 자랑했다고. 인숙(仁淑)양은 1년남짓 장(張)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겐 『장(張)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했다. 장(張)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사치벽은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張)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張)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仁淑)양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그러면서 옛날 외동딸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상처입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알게 된 것이 지금 신촌(新村)모처에서 비밀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K「마담」. K 「마담」은 한때 배우 윤(尹)모씨와 동거, 「패션·모델」생활도 한적이 있는 멋장이 「마담」으로 인숙(仁淑)양은 K 「마담」의 소개로 「디자이너」조(趙)모씨를 통해 「패션·모델」로 몇차례 나서기도 했다. 인숙(仁淑)양과 K 「마담」의 관계는 그뒤 줄곧 계속되어 K 「마담」이 경영하는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에 인숙(仁淑)양은 1급 「호스테스」로 나갔었다. 인숙(仁淑)양은 몇차례 「패션·모델」로 나가는 한편 동거하던 장(張)씨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촌(新村), 수유리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인숙(仁淑)양과 장(張)씨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허영과 장(張)씨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동거 1년만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러나 장(張)씨가 인숙(仁淑)양으로선 첫 남자였던 만큼 장(張)씨를 향한 인숙(仁淑)양의 마음은 어지간히 강했었다. 피살되기 한달전 인숙(仁淑)양을 만난 한 친구는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못 살겠다』면서 『그래도 장(張)씨가 제일 잊혀지지 않고 그립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장(張)씨와 헤어진 인숙(仁淑)양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仙雲閣)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仙雲閣)에서 인숙(仁淑)양이 만난 사람이 바로 A씨.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仁淑)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仁淑)양의 관계는 석달남짓 계속되었다는게 당시 인숙(仁淑)양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仁淑)양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인숙(仁淑)양은 선운각(仙雲閣)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仁淑)양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仁淑)양은 낮이면 필동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仁淑)양 편이었던 어머니 전(全)씨는 남편 정(鄭)씨가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仁淑)양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필동에서 살때 인숙(仁淑)양은 아들(3)을 낳았다. 인숙(仁淑)양의 가족들은 그 아이가 인숙(仁淑)양의 아이가 아니고 인숙(仁淑) 양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①가족 주장대로 배다른 동생이며 대구(大邱)서 낳아 서울로 데려다 길렀다면 최소한 5살은 되었어야 하는데 3살이라는 점 ②배 다른 동생이라면 미국 갈때 굳이 인숙(仁淑) 양이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등을 보면 인숙(仁淑) 양의 아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仁淑) 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바 있다. 더우기 비밀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仁淑)양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仁淑)양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仁淑)양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일본에서 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갑(甲)씨, 을(乙)씨, 병(丙)씨등 알만한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숙(仁淑)양이 아이를 낳은 후부턴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 없다』혹은 『 서교동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세사람중 한사람일것이라는 소문. 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68년 8월엔 싯가 7백만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비밀요정 대신 「타워 · 호텔」, 「사보이 · 호텔」,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자주 나타났다. 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仁淑)양은 그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趙)모씨로 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이 때 부터 인숙(仁淑)양은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인 갑(甲)씨 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인숙(仁淑)양을 거쳐 갔다. 아마도 『 아이를 낳고 보니 무엇보다 돈 걱정이 앞섰던것 같다』는게 인숙(仁淑)양을 아는 친구와 「마담」족의 중론이다. 지난 69년 10월 10일 인숙(仁淑)양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행을 했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친구에게 밝히기론 『 잠시 골치아픈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다』는 것. 인숙(仁淑)양은 미국서 석달 있다가 되돌아 왔다. 1월21일 다시 돌아온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 『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 이젠 미국 안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6기통 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낙치 않은 인숙(仁淑)양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지않나 보기도 했다. 어쨌든 3월 17일밤 11시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정인숙(鄭仁淑)양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홀로 남겨 놓은채.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씨줄날줄] 해방전후사/이용원 수석논설위원

    지난 9월10일 종영한 KBS1-TV 주말드라마 ‘서울 1945’는 화려하게 각광받지는 못했지만 쉽게 잊히지 않을 드라마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말기에서 6·25전쟁까지를 다룬 이 드라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고 사랑하고자 몸부림친 인간 군상의 얽히고설킨 애증 관계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사회주의자로서 필연적으로 북쪽을 택한 인텔리 최운혁, 그와의 사랑을 이루고자 주저없이 이념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여인 김해경, 친일 부호의 아들이고 미국유학파이지만 이념보다는 사랑과 우정에 기울어지는 이동우,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집안의 외동딸로서 해방후 몰락한 가문을 부활시키려고 몸을 던지는 문석경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이 드라마는 새해 벽두에 시작해 71회로 막을 내리기까지 평균 13.4%, 최고 18.4%라는 평범한 시청률을 기록하지만 그 시청자들에게는 훌륭한 드라마로 기억됐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삶이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 또는 그 자신이 살아온 길임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주목을 받게 되자 보수 세력의 반발이 심해져 담당 PD와 작가가 지난달 말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허위 사실로 실존인물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그 후손들이 고소한 것이다. 드라마 ‘서울 1945’가 무대로 한 시대를 표현한 역사용어가 ‘해방전후사(解放前後史)’이다. 이 말은 1979년 나온 책 ‘解放前後史의 認識(인식)’에서 비롯됐다. 이 논문집의 서문은 ‘이민족의 오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었건만 남과 북으로 갈라진 민족은, 민족사상 유례가 전무한 대결유형을 보이는 분단시대에 날로 깊이 빠져든다.´라는 문제의식에서 책을 발간한다고 서술했다.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어, 출판사는 1989년까지 시리즈 5권을 추가 발간해 모두 6권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끝맺는다. 지난 2월 이 시리즈를 비판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두권이 출간된 데 이어 이번 주에는 ‘재인식’을 다시 비판하는 논문집 ‘한국 근현대사의 새로운 흐름’이 선보인다고 한다. 학술연구가 계속 축적되는 건 당연하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제 ‘해방전후사’도 이념의 족쇄에서 풀려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용원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산이좋아 산으로] 충북 보은 속리산

    [산이좋아 산으로] 충북 보은 속리산

    속리산(俗離山·1058m), 속세를 떠난다는 뜻의 산 이름은 신라인 고운 최치원의 시 한수와 인연이 깊다. 하지만 ‘산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山非俗離 俗離山)’라는 그의 말은 자연과 인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인스턴트처럼 변해가는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충북 보은과 괴산, 경북 상주에 걸쳐있는 속리산은 이 땅의 한가운데 심장처럼 솟아있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관통하며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간다. 속리산이 가르는 건 산자락뿐만이 아니다. 산정에 쏟아진 빗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른 물은 금강이 되며 북쪽으로 스며든 물은 한강이 된다. 보은을 들머리로 하면 속리산에 들어서기에 앞서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이 먼저 나그네를 반긴다.1464년 세조가 속리산에 다니러 왔을 때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번쩍 들려 벼슬이 내려졌다는 정이품송은 최근 자목(子木) 4그루를 분가시켰다.1980년 정이품송의 보전을 위해 솔방울에서 싹을 틔워 키운 것이 벌써 ‘청년나무’로 성장한 것이다. 법주사까지 가려면 집단시설지구를 지나야 한다. 가을 성수기라면 그 번잡함이 여느 도회지와 다를 바 없겠지만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진 지금은 찬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오리숲이다. 오리숲은 숲의 길이가 5리에 달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좌우로 수령 100년 이상 된 울창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참나무, 떡갈나무, 소나무 숲을 따라 비로소 세상과의 아름다운 단절을 시작하는 것이다. 보은의 얼굴로 불리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때 창건한 고찰이다.‘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대찰로 성장해 고려 공민왕이 들르기도 했고, 조선 태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법주사를 비롯한 속리산 일대에는 보은 지정문화제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는데, 법주사에는 국보만도 3점이 있으니 산행 시작 전이나 하산 길에라도 꼭 들러볼 만한 곳이다. 법주사에서 세심정 휴게소까지는 차량이 통제되기 때문에 걸어서 1시간이 걸린다. 휴게소 앞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이 문장대 방면이고 오른쪽은 정상인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산불 방지기간인 15일부터 12월15일까지는 문장대와 신선대쪽 등산로만 개방된다. 문장대 등산로는 정비가 잘되어 있어 하산로로 이용하면 좋다. 세심정 휴게소에서 이정표를 따라 10분여 오르면 비로산장이 나오고 이곳에서 신선대와 비로봉쪽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경업대까지는 금강골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하다. 경업대는 조선 인조때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 연마를 위한 수련도장으로 삼았던 곳이어서 그의 이름을 따라 불리고 있다. 신선대에 올라서면 비로소 백두대간의 등줄기가 굽이져 보인다. 백두대간을 이루고 있는 산 중 가장 바위미가 빼어나다는 속리산. 신선대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길은 시원스레 트여 조망이 좋다. 간간이 크고 작은 바위를 넘어서야 하지만 안전시설이 잘 되어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신선대에서 문장대까지는 30여분이 걸린다. 문장대의 높이는 1054m로, 불과 4m 차이로 주봉 천황봉에 정상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문장대는 속리산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니 서운할 필요는 없다. 문장대 휴게소를 거쳐 보현재를 지나 다시 세심정 휴게소에 이르는 하산길은 산길이라기보다 잘 정비된 산책코스 같다. 복천약수에서 목 한번 축이고 나면 하루의 산행은 끝난다. # 여행정보 법주사 앞 집단시설 지구에는 식당과 숙소가 넘친다. 평양식당(043-542-5252)은 인심이 넉넉하다. 버섯전골과 올갱이해장국이 맛있다. 숙소는 레이크힐스 속리산호텔(043-542-5281)을 이용해도 되고 집단시설 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수정초등학교쪽에 조용한 농가민박(043-543-0457)도 있다. 속리산 깊숙이 자리잡은 비로산장(043-543-4782)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그윽한 추억이 된다. 글 이영준 남영호(월간 MOUNTAIN 기자) www.emountain.co.kr
  • 값폭락에 속타는 농·어민

    농·어업인들의 가슴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타들어가고 있다. 15일 전남도와 시·군에 따르면 팔리지 않아 얼어죽을 위험에 놓인 전어와 새우를 비롯해 무·배추를 자치단체와 기업체에서 사주도록 운동을 펴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전남도와 신안군 공무원들은 4㎏들이 전어 432상자(664만원)를 상자당 2만원에 사줬다. 영암의 현대삼호중공업도 269상자(538만원)를 사들였다.그러나 양식장에는 전어 600여t(1200만마리)이 남아 있고 시중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아 동사가 우려된다. 새우는 ㎏당 2만원에 특산지인 신안·영광·무안군 등이 나서 자치단체와 기업체 등에 구매를 부탁했다. 양식장 667㏊에는 새우 520t이 들어 있다. 또한 전남도는 김장철 채소류 수급안정을 위해 농협 등과 함께 배추 667㏊, 무 123㏊ 등 790㏊를 지난 14일부터 해남·나주·영암 등 특산지에서 폐기하고 있다. 보상가는 10a(300평)에 무 40만 5000원, 배추 50만 5000원이다. 올해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무 7%, 배추가 29%가량 늘었다. 이들 채소류는 생산비 이하로 값이 폭락했고 거래마저 끊긴 상태다. 전남도에서는 소비를 늘리기 위해 자치단체와 함께 채소류 사주기와 함께 김장 1포기 더 담기 운동을 펴고 있다.무안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한세기 전 갱신·화해·일치운동 오늘날 부활 시키자”

    “한세기 전 갱신·화해·일치운동 오늘날 부활 시키자”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 이 땅이 일제치하에 있었던 20세기초 기독교 성장과 사회 변혁을 가져왔던 두 차례의 교회 부흥운동과 관련해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말이다. 실제로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에 이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불같이 일어난, 이른바 평양대부흥운동은 교회의 물적·영적 성장과 사회변화를 몰고온 ‘한국교회사적 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이 부흥운동의 취지와는 달리 대형화 일색의 한국 교회들은 지금 ‘빛과 소금’이라는 종교적 역할에서 한참 비켜나 있다는 지탄을 받는다. 내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평양대부흥회의 의미를 성서와 성경신학적 측면에서 되살려 갈라진 교회의 화합과 영적 부흥을 다시 찾자는 움직임이 개신교계에서 일고 있어 주목된다. 진보적 입장의 한국구약학회·한국신약학회와 보수측인 한국복음주의구약학회·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등 4대 성서해석학회가 내년 5월25·26일 사랑의교회에서 갖는 성서학 학술 심포지엄. 이 학회들엔 국내 800여명의 성서 해석 학자들이 거의 다 가입해 있는 만큼 이 심포지엄은 개신교 사상 보수·진보를 망라한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첫 성서 해석 모임이 되는 셈이다. 심포지엄의 핵심은 ‘교회와 신학으로부터의 개혁’.‘회개와 갱신: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경신학적 조명’이란 큰 주제가 보여주듯 철저하게 자기반성을 강조하고 있다. 심포지엄을 주도한 김정우(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 총신대신학대학원 교수는 “분열된 신학자들과 성서해석은 지난 시절 독재정권 체제와 맞물려 한국 교단 분열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온 측면마저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심포지엄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개인적으로는 회개와 갱신, 사회적으로는 화해와 일치, 민족적으로는 통합과 활력을 일구어낸 정신적 대각성이었다는 전제 아래 회개와 갱신, 말씀과 성령, 화해와 일치, 평양대각성운동의 성경해석 등 네 개 분과로 나누어 진행된다. 교권주의, 물량주의, 기복신앙, 목회자 세습 탓에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는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분열의 상처가 크고 그 저변에 바로 신학자들의 잘못이 있다는 반성을 해야하며 이를 토대로 화해와 소통의 해석학을 세우자는 것이다. 감리교신학대 왕대일(한국구약학회 회장) 교수는 “그동안 신학교는 목회현장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고 교회나 목회자들도 신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목회와 무관한 것으로 치부한 측면이 많다.”며 “이번 심포지엄은 이러한 신학교와 교회 사이의 단절과 거리감을 극복하려는 구체적인 시도”라고 평가했다. ■ 심포지엄 주요 참석자 및 강연 ▲이만열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의미’)▲정규남 광신대총장(‘구약성경의 부흥과 성경신학적 의미’)▲이달 한남대 신약학과 교수(‘신약성경의 부흥과 성경신학적 의미’)▲김정우 교수(‘평양대부흥운동의 성경해석’)▲앤서니 시스턴 영국 노팅엄대 명예교수(‘부흥과 화해’)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한게임배 마스터즈 서바이벌-2006 하이라이트(제9라운드)] 선수활용인 줄 알았는데…

    [한게임배 마스터즈 서바이벌-2006 하이라이트(제9라운드)] 선수활용인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들은 20세가 되면 군입대와 관련해서 고민하기 마련이다. 프로기사들도 마찬가지이다. 20대 초반은 프로기사로서 가장 기량이 무르익어서 성적이 좋을 때이다. 당연히 아쉬움도 크겠지만, 군에 다녀온 뒤에 정신 무장이 돼서 성적이 더 좋아진 경우도 제법 있다. 모두 자신이 하기 나름이다. 박승현 5단은 11월7일 입대했는데 이 바둑은 그 전날인 11월6일에 두어졌다. 낮에는 원익배 2회전 대국을 둬서 승리했고, 이 바둑은 저녁 5시에 두었다. 어차피 입대하면 잔여 대국은 기권처리될 것을 무엇 때문에 열심히 두느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승부사 본연의 자세라고 하겠다. 장면도(103∼107) 실리는 흑이 많지만 중앙 흑돌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수습이 승부이다. 원성진 7단이 그냥 수습하려 하지 않고 흑103으로 끊어서 하변 백돌을 공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습하려고 한 장면이다. 실전진행(108∼113) 백108로 흑 한점을 따낸 것은 지나는 길의 선수 활용이라고 생각한 것이지만 큰 실수이다. 흑113까지 중앙을 두텁게 지키며 살아버리자 흑의 우세가 확정됐다. (참고도) 백1로 갈라서 중앙 흑돌을 계속 공격하는 것이 정수, 이랬으면 서로 어려웠다. 233수 끝, 흑 불계승 유승엽 withbdk@naver.com
  • 儒林(73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儒林(734)-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5) 오직 이덕홍의 ‘간재문집’에만 기록되어 있는 퇴계의 마지막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그날은 하루종일 청명한 날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퇴계가 물었던 ‘내 머리맡에서 바람이 불고 비 소리가 들린다. 너도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라는 말은 생사가 갈라지는 순간에 남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대적 예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퇴계가 숨을 거둔 지 10여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의 전 국토는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격변이 일어나는 것이다. 혈풍혈우(血風血雨). 피의 바람과 피의 비가 쏟아지는 대란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퇴계의 이 말은 퇴계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조국에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였던 선지자의 묵시(默示)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덕홍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스승의 임종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였다. 이덕홍의 예감은 정확하였다. 유시(酉時)가 가까워오자 퇴계는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게도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정돈하도록 하였다. 유시는 12시 중에 10번째 시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오 5시에서 7시의 시간. 이때 청명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흰 구름이 집주위에 몰려들더니 갑자기 흰눈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상서로운 백설이었다. 어지러이 쏟아지는 눈발은 속세를 정화시키듯 순백의 세례로 온 산야를 흰빛으로 표백시켰다. 그때 퇴계는 좌우에 부탁하여 자신을 부축하여 일으키도록 몸짓하였다. 이덕홍과 조카 영이 계속 누워계시도록 만류하였으나 퇴계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부축하여 일어나 앉히자 퇴계는 방문을 열어주도록 손짓하였다. 몹시 추운 겨울날씨였으므로 조카 영은 멈칫거렸으나 스승의 임종을 직감한 이덕홍이 방문을 열도록 눈짓하였다. 방문을 열자 펄펄 내리는 눈발이 뒤덮인 도산서당의 뜰이 한눈에 드러났다.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은 퇴계는 물끄러미 그 뜰을 내려다보았다. 기록에 의하면 이때가 유시 초. 그러므로 퇴계가 숨을 거둔 것은 오후 5시에서 5시30분 사이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앉아있던 퇴계의 몸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덕홍이 다시 부축하려고 손을 내민 순간 이덕홍은 스승이 숨을 거둔 것을 깨달았다. 스승의 몸에서 아직 온기는 남아 있었으나 숨은 어느새 끊겨져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덕홍은 떨리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의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들은 눈이 내리는 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이덕홍의 입에서 부음을 알리는 기별이 전해지자 제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제히 눈을 맞으며 통곡을 하기 시작하였다.
  • [화제의 작가를 찾아서] 아라리오 전속작가 권오상

    [화제의 작가를 찾아서] 아라리오 전속작가 권오상

    “비판도 동조도, 뒤집기도 아닙니다. 단지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할 뿐이죠.” 권오상(32)의 이 말은 한편으로는 의아하게, 다른 한편으로는 신선하게 다가왔다.‘보기’보다 ‘읽기’ 내지는 ‘해독하기’가 요구되는 요즘 미술에서 비판과 뒤집기가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 하고 의아스러우면서도 기계적으로 남발되는 듯한 패러디와 뒤집기에 대한 부정이 오히려 새로웠다. ●‘데오도란트´ ‘플랫´ 연작으로 부상 권오상은 대학시절부터 ‘데오도란트’란 사진조각 연작으로 미술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이후 명품 브랜드의 화려한 이미지들을 차용한 ‘플랫’연작, 세계 초고가의 슈퍼카나 오토바이를 조각화한 ‘The Sculpture’ 연작 등 현대 자본주의의 고도 소비문화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지하철 2호선 충정로역 인근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엔 이같은 현대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각종 잡지에서 오린 사진 이미지들과 이를 바탕으로 이것저것 실험적으로 제작해보고 있는 조각 습작들. 홍익대 조소과 출신인 그가 이토록 사진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좋아하기 때문이죠. 고등학교(예고)때부터 조각을 전공하고, 성적도 제일 잘 나왔기 때문에 대학에서도 조각을 했지만, 실은 사진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이용한 조각을 하게 됐고요.” 트레이드 마크인 ‘데오도란트’는 그가 직접 찍은 인물 사진을 오리거나 찢어붙여 만든 인물 조각이다. 전통적 조각 재료인 청동이나 돌 등 둔중한 재료 대신 종이를 씀으로써 경쾌하고 산뜻한 현대적 감성을 담는다. 하지만 완성된 인물은 완벽한 사진 이미지와 달리 갈라지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같은 작품이 “완벽을 추구하고 가장하지만, 실은 불완전한 인간존재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플랫’ 시리즈는 오랜 기간 그가 한 명품 잡지에서 오린 화장품이나 시계, 보석 사진들을 철사 등을 이용해 세워놓고 이를 다시 촬영해낸 작품이다. 오린 사진을 이용한 정물화인 셈. 결과적으로 사진이지만, 작가는 오히려 조각으로 보아달라고 한다. 진짜 명품들을 촬영한 것 같지만 실은 오려진 광고사진이라는 사실에서 소비문화에 대한 비꼬기가 읽혀지기도 하는데, 작가는 이런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드러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내년 봄 中 베이징서 개인전 권오상은 공격적 작품 수집과 전시, 작가 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작가다. 파격적인 지원으로 화제를 불러모았던 아라리오 전속작가 중 첫번째 주자로 지난 3월 1개월간 천안 아라리오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내년 봄엔 중국 베이징 아라리오에서 개인전을 가질 예정. 요즘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데오도란트와 플랫 연작을 잠시 쉬면서 다양한 기법을 시도해보고 있다. 내년 베이징 전시를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본격화할 그가 어떤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5억년 신비’ 대금굴 베일 벗다

    7년간의 발굴작업 끝에 5억년 신비의 대금굴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강원도 삼척 주민들에겐 신기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물골계곡이 한 겨울에도 12도의 수온을 유지하면서 얼어붙지 않았다. 그 위엔 분명히 동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믿음이 1999년 삼척시를 움직여 동굴개발팀을 투입하게 했다.1·2차 발굴시도 실패. 굴착지점을 옮겨 9개월간에 걸친 3차 발굴 작업을 진행하던 중, 마침내 동굴은 시커먼 심연의 입구를 발굴팀에게 내보였다. 발굴팀은 그 뒤 7년여의 탐사작업 끝에 1.6㎞에 이르는 동굴의 전모를 밝혀냈다. 삼척시 심기면 대이리에 위치한 대금굴은 규모 면에서는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백두대간의 주능선인 덕항산에서 갈라진 산맥이 대협곡을 이루고 있는 삼척 지역은 동양 최대 석회암동굴로 꼽히는 환선굴을 비롯해 7개의 동굴을 품고 있다. 그러나 대금굴은 석순·동굴진주·곡석 등 희귀한 동굴 생성물이 풍부한데다 폭포와 호수까지 갖춘, 제대로 된 동굴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 때문에 삼척시는 올 연말 대금굴이 일반에게 공개되면, 연간 3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100억원대의 관광파급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동굴 보호를 위해 모노레일을 깔고 가이드를 배치한 뒤 하루 관람객을 700명으로 제한할 예정이다. KBS1TV가 15일 오후11시40분 방영하는 ‘대금굴 발굴,7년의 기록’은 바로 대금굴 발굴작업에서 겪게 된 갖가지 악전고투를 그린 다큐멘터리다.1·2·3차에 걸친 발굴작업에서 부딪혀야 했던 숱한 난관들과 이를 뚫고 나가기 위한 발굴팀의 노력을 담았다.각종 생태계가 확인되면서 대금굴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갈 즈음인 2004년, 발굴팀은 마침내 동굴의 ‘끝’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어디 숨어 있을지 모를 암초와 동굴치고는 풍부한 수량과 급류에도 불구하고, 경력 10년 이상의 다이버들이 호수와 폭포를 헤쳐나가는데….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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