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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출 문화재(외언내언)

    일제하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유출되는것을 안타까워한 간송 전형필선생(1906∼1962)은 「문화적 항일」의 방법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일본인에게 빼앗겨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화재는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구입,전설적인 일화들을 남기기도 했는데 군수 월급이 70원이던 당시 거금 1만4천여원을 던져 일본인에게 경매되기 직전의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보물 241호)을 사들인것이 그 한 예.백석지기만 되어도 부자 소리를 듣던 때 황해도 일대의 방대한 토지와 종로의 상권을 장악했던 선대의 유산 10만석을 그는 고미술품 수집에 고스란히 바쳤다. 그렇게 수집된 우리 문화재가 소장돼 있는 곳이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이곳의 소장품중 「훈민정음」원본,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첩」등 20여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소장품에 대한 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아 모두 몇점의 문화재가 이곳에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 질에 있어서 국립박물관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간송의 선각자적인 안목과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많은 문화재가 일본에 유출됐다.해외 유출문화재의 약 60%가 일본에 있어 세계 15개국에 유출된 우리 문화재 5만4천6백55건 가운데 일본에 3만1천2백23건이 있는것이다(문화재관리국 집계).그러나 이는 박물관등 공개된 곳에 전시된 것만을 밝힌 공식집계일뿐 개인소장품등까지 합한다면 6만건도 넘을것으로 추정된다. 청와대의 한 당국자가 일본의 대중예술시장 개방과 관련,한국문화재 반환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일본대중예술과 한국문화재의 관계가 어떻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다시 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그리스 문화상 멜리나 메르쿠리처럼 문화재 반환을 위한 끈질긴 외교활동을 펴는 한편 민간차원에서도 간송의 대를 잇는 우리 문화재의 역수입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그를 위한 행정지원도 물론 있어야 한다.
  • 조선 서예 절정기 작품 한자리에/예술의 전당서

    ◎이황·한석봉 등 180명 명품 전시 중국에서 건너온 서예필법이 우리 고유의 예술로 발전,찬란한 절정을 이룬 조선중기의 서예작품들이 이달말 가을 정취 그윽한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일제히 나들이를 한다. 국내유일의 서예전문 전시관인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21일까지 계속하는 「조선중기 서예전」이 바로 화제의 행사. 예술의 전당 미술부가 작년 6월부터 1년5개월여에 걸친 준비끝에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는 퇴계 이황,고산 황기로,원교 이광사,한석봉등 당대의 명필 1백80여명의 작품2백여점이 소개된다. 이중 이황의 「퇴도선생필법」은 보물548호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재이며 율곡 이이의 「친필서간문」,황기로의 「초서시고액자」,한석봉의 「영낭호첩」등도 보물급에 준하는 희귀자료로 10여점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작가및 작품선정은 국내최고의 한학자 청명 임창순씨(전문화재위원장)와 최완수 간송미술관학예연구실장,한국서예사가 이완우씨(정신문화연구원)등 세명이 맡았다. 전시작은 국립중앙박물관,서울대박물관,성균관대박물관등 공공기관 소장품과 기타 70여명의 개인소장품들로 구성돼 있다. 역사학자들이 규정하고 있는 조선중기는 중종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로 건국주체세력인 관학파들이 4대사화를 통해 퇴진하고 향촌사회에서 서원과 향약을 근거로 활동하던 사림파가 정치·사회·문화전면으로 부상하던 시기. 따라서 서예도 초기의 조맹부체가 극복되고 한석봉에 의해 독자적인 석봉체로 개발돼 국서체로 발전한다. 또 17세기 중반에 들면서 옥동 이서­공제 윤두서­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동국진체가 완성돼 조선고유의 서법으로 자리를 잡는다. 주최측은 서예의 이같은 시대적 변화를 쉽게 파악하도록 ▲송설체의 조선화 ▲초서의 명가 ▲석봉체의 형성과 전개 ▲명인들의 시서와 간찰 ▲양송체와 전예의 전통 ▲다양한 서풍의 발전 ▲동국진체의 맥락이란 7개의 소주제로 작품을 분류했다.
  • 계유오덕/최완수 간송미술과 연구실장(굄돌)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틀어 닭 그림을 잘그리기로는 화재 변상벽을 단연 제일인자로 꼽아야 할 것이다.화재는 겸재와 거의 동시대를 산 화원화가로 특히 인물전신과 동물전신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 나서 초상화와 동물화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고양이와 닭 그리기를 좋아하여 많은 걸작품들을 남기었다.이에 사람들은 그를 변고양이라는 애칭으로 즐겨부르며 그의 동물 그림들을 지극히 애호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의 고양이 그림과 닭 그림이 지금까지 상당수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 간송미술관에는 희귀하게도 그의 자필 제사가 곁들여진 「자웅화명」이라는 병아리 딸린 닭의 한가족 그림이 비장되어 있다.그 제사의 첫머리 부분을 소개해보면 이렇다. 『새벽을 맡은 것은 천성이다.또 오덕을 채우고 한마리 암수가 화답하여 서로 꼬끼요 운다』 여기서 오덕이라는 것은 수탉이 갖춘 다섯가지 덕성이라는 것이다.한시외전에 의하면 전국시대 재나라의 전요가 재애공에게 한 말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가 관(벼슬)을 이고 있는 것은 문이고,밭이 며느리발톱으로 차는 것은 무이며,적이 앞에 있으면 용감하게 싸우는 것은 용이고,먹을 것을 얻으면 서로 알리는 것은 인이며,밤을 지켜 때를 잃지 않는 것은 신이다.닭은 이 오덕이 있다』 화재는 닭의 외형적 특성뿐만 아니라 그 습성과 심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 계유오덕의 고사까지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그래서 그 제사 벽두에 오덕을 채우고 있다 하였다.화가가 어떤 소재로 그림을 그리든지 간에 이렇게 그 소재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그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 좋은 본보기이다. 계유 흑계지년 벽두에 전도유망한 화가라면 한번 생각하고 지나야 할 줄 안다.수탉이 갖춘 오덕을 실천하며 산다면 그 더욱 좋을 것이다.
  • 화가와 화공/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일찍이 사숙재 강희맹은 그림을 논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대체 사람의 기예는 비록 같지만 마음을 쓰는 것은 다르다.군자가 예술을 하는 것은 뜻을 가탁할 뿐이지만 소인이 예술을 하는 것은 뜻을 머물러 두려한다.예술에 뜻을 머물러 둔다는 것은 공사와 예장과 같이 기술을 팔아 그 힘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하는 짓이고,예술에 뜻을 가탁한다는 것은 고인 아사와 같이 마음으로 묘이를 탐구하는 사람의 하는 짓이다.어찌 저에 뜻을 머물러 두어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있으랴!」 곧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공이고 묘리를 탐구하는 것 즉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창조해내는 것을 목표로 그리는 사람은 화가란 의미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화공은 천대했지만 화가는 몹시 우대하였다.이에 사대부들도 화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명성을 얻은 이도 적지 않았으니 인재 강희안,사숙재 강희맹 형제를 비롯하여 명종 선조 연간의 양송당 김제,탄은 이정및 인조,효종,현종 연간의 창강 조속,숙종 영조시대의 공재 윤두서,겸재 정선,관아재 조영석,현재 심사정,작암 강세황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그런데 이들이 평생 화업에 종사하면서 고심하였던 것은 어디까지가 화가의 길이고 어디로부터가 화공의 경계인지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려주고 응분의 윤필료를 폐백으로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 행위 자체만으로 화공의 경계를 넘어섰다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늘 당면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더구나 국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에 참여하는 문제가 대두되면 참여여부와 참여하면 어떤 자격으로 참여하고 그 논공행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하는 등의 문제에서 격심한 갈등과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각자가 그런 문제들을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고 있지만 이들 사대부화가의 공통점은 결코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자신의 그림을 애호하는 이들이 어떤 종류의 폐백으로든 윤필료를 대신하면 그것으로 만족해 했고 공감과 공명의 화답으로 대작을 자청하여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그림을 요구할 때는 비록 국왕의 어진을 그리라는 왕명일지라도 벼슬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걸고 정면으로 거부하였으니 숙종의 처남으로 인물화에 능하였던 죽천 김진규가 인현왕후 어진을 그리라는 숙종의 어명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나 관아제 조영석이 세조어진 모사에 참여하라는 영조의 어명을 정면 거절하며 벼슬을 버린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요즘이라고 화가와 화공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화가의 기개/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리는 이들을 존경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예수가 그런 사람이었고 정몽주나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그런이들이었다.이런 분들인들 어찌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다만 정의를 수호해야만 세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투철한 이념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인류사회는 사회를 지켜나갈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되고 그분들은 그 질서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며 살아남게 되었다.예술이 투철한 이념의 포상이라면 예술가인들 어찌 이런 현인의 범주에서 소외되겠는가.초당삼대가의 하나인 저수양이 선왕의 후궁이던 칙천무후의 왕후책봉을 한사코 반대하다 애주지사로 좌천되어 죽은 것이나 성당서예의 대표자인 안진경이 이희렬의 반란을 회유하러 갔다가 그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피살되는 것 들은 중국에 있었던 그런 실례 중의 한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시서화금기 오절로 꼬히던 풍류왕자 안평대군 이용이 세조의 왕취찬탈을 저지하려다 피살되고 낙성으로 추앙되던 난계 박연(1378∼1458)도 80고령으로 오히려 사육신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일에 동조하였다가 아들들을 모두 잃고 고향으로 쫓겨나 죽는 것을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화가로 불의에 목숨을 내걸고 대항하여 절의를 지킨 이를 꼽는다면 벽은 진재해(1671∼1769)를 들 수 있다.그는 숙종 39년(1713)에 약관 23세로 숙종 어진을 도사한 화원화가였다.32세 때인 경종2년(1722)에 노론사대사을 비롯한 노론대가들이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여 신임사화를 일으킨 목호용이란 자가 그 공으로 공신이 되어 6월30일 녹훈하는 자리에서 충훈부공신화상첩에 그려 넣을 화상을 그려달라고 하자 화원의 신분으로 당연히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결연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이 손은 이미 선대 왕의 어용을 그렸었는데 어찌 차마 다시 호룡을 그리겠는가』이는 죽음을 각오한 항변이었다.그랬었기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고 영조의 즉위로 정국이 일변되어 목호룡이 역적으로 능지처참되자,영조원년(1721) 4월21일에는 우의정 민진원이 경연에서 국왕께 그 입절하던 사실을 아뢰어 품계를 올리도록 하였다 하니 그 씩씩한 기개를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화가와 시인/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화가는 그림으로 아름다움을 묘사해내고 시인은 시어로 아름다움을 묘사해 낸다.그러니 다만 그 묘사 방법만 다를 뿐 아름다움을 표현해 낸다는 사실에서는 공통성을 가지게 된다.그래서 고래로 시정과 화의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왔다. 남종화의 시조로 추앙되는 왕유가 『당세의 잘못 된 시인,전신은 응당 화사였으리』라고 읊은 시구나,북송대의 대문호인 동파 소석이 왕유가 그린 「남전연우도」제발에서 「왕마힐의 시를 맛보면 시가운데 그림이 있고,왕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한 제사가 이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내용들이다. 이에 그림을 소리없는 시(무성시)라 하고 시를 형태없는 그림 (무형화)이라 하기도 하였다.따라서 명시인이 명화를 좋아하고 명화가가 명시에 탐닉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져 왔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로 꼽히는 대예술가들이 간간 출연하기도 하였다.그러나 화성이라고 추앙할만한 명화가와 시성이라고 추앙할만한 명시인이 동시대에 출현하여 서로의 시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극진히 아낀 예는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영조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진경문화기에서는 겸재 정선(1676∼1759)이라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와 차천 이병연(1671∼1751)이라는 진경시의 대가가 거의 동시에 출현하여 삼연 김창홉(1653∼1772)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고 백악산 밑 같은 동네에서 평생을 같이 살면서 서로의 그림과 시를 그렇게 잘 이해하며 아껴주었었다. 겸재가 65세,사천이 70세 되던 해에 겸재가 현재 강서구 가양동 읍치가 있던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해 가게 되자,그들은 노경에 접어든 나이도 잊은채 전별의 자리에서 시 한수 지어보내면 그 시제와 시의에 맞는 화정으로 그림 한 폭을 그려 보내기로 하자는 시화환상간,즉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하고 이를 잘 지켜 「경교명승첩」이라는 기념비적인 시화첩을 남기기도 한다.
  • 영조의 그림솜씨/박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역사를 통해서 보면 통치자의 성향이 그 문화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알렉산더나 칭기즈칸 같이 세계를 정복한 영웅들이나 아쇼카나 진시황 같이 제국을 통일한 무단적인 인물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는 상무호법정신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자연히 학문과 예술은 그에 종속되는 비운을 맞았었고 당태종이나 당현종 및 조선의 세종대왕이나 영조대왕 같이 학문과 예술을 숭상한 통치자가 다스릴 때는 문운이 크게 일어 획기적인 문화발전이 이루어 졌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그래서 이런 현군의 치세하에서는 학문과 예술분야에서 역사상 최고 업적을 남겨 서성이니 화성이니 시성이니 하는 칭호를 얻는 이들이 많이 배출되게 마련이다. 소위 초당삼대가라 불리는 구양순,우세남,저수양 같은 대서예가들은 당태종이 길러낸 이들이고 그림에서 남북종화의 시조로 추앙되는 왕유와 이사훈및 시선 이태백,시성 두보는 당현종 성세에 배출된 인물들이다.세종대왕 시대에도 시서화금기 오절로 꼽히던 안평대군 이용을 비롯하여 화원화풍의시조인 현동자 안견과 사대부화풍의 시조인 인재 강희안 등 허다한 예술가들을 배출한다. 이런 대예술가들을 배출하던 당시의 군주들은 그 자신이 학예를 숭상하는 천품을 타고나 이미 학문과 예술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어 그 기량이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 상례이다.당태종이 서예의 대가이었다든가 당현종이 시서에 능하였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우리 세종대왕이 송설체 글씨에 능하고 난죽을 잘쳤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그렇다면 조선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를 주도하여 시성으로 불러야 할 진경시의 대가 차천 이병연(1671∼1751)과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화성 겸재 정선(1676∼1759)을 길러낸 영조대왕(1694∼1776)도 필연 학예의 천품을 타고난 대예술가이었으리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과연 그렇다.이미 왕자시절에 그의 산수인물도는 부왕인 숙종대왕의 극찬을 받을 만큼 가경에 이르러 숙종어제의 제화시가 남아있을 정도이데 겸재의 동문 후배인 동포 김시민(1681∼1747)이 남긴 제사에서 보면 영조는 산수인물 뿐만 아니라 난초 국화 매화 등을즉석에서 휘호하여 도자기의 밑그림으로 쓰게할 만큼 대단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런 임금이었기에 시성 차천과 화성 겸재 및 풍속화의 시조 관아재 조영우(1686∼1761)등을 길러 내었을 터인데 사실 왕자시절에 이들과 같은 동네에 살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아 그 천품을 함양해 간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그 동네는 지금의 청와대 부근이니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해당한다.
  • 꽃과 화가들/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화가란 미를 표현해내는데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 그 일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따라서 이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미적 감각이 남보다 예민해야 하고 그 미감을 가시화하는 현상적 요령이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예부터 명화가들은 특히 꽃을 좋아하였으니 단원 김홍도(17 45∼18 15)가 하루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그림값으로 받는 삼천전중에서 2천전으로 매화분 하나를 사고 팔백전으로 술을 산 후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불러 매화음을 즐긴 다음 겨우 이백전으로 쌀과 나무를 샀다고 하는 얘기가 단적으로 이를 증명해 준다. 단원 뿐만 아니다.조선 초기 조선사대부화풍을 정립해 놓은 인재 강희안(14 18∼14 65)도 꽃을 지극히 좋아하여 왕의 친외척들을 관장하는 돈령부의 지돈령부사 자리에 있으면서 오직 꽃기르는 데만 정성을 쏟아 돈령부 정원에는 없는 꽃이 없었다 한다.세종대왕의 제질이기도 하였던 그는 집현전학자로 학문도 매우 깊었기 때문에 그 꽃기르는 법을 고금 양화보에서 두루 섭렵하고 그 자신이터득한 방법도 적지 않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꽃을 잘 길러 낸 결과이었다. 인재는 이렇게 꽃기르는 묘이에 통달하자 이를 뒷날 꽃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이 「양화소록」이다.이 「양화소록」의 서문에서 인재가 밝힌 양화요령은 단지 「전천순성」 넉자로 요약되는 바 천성을 온전하게 따라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미의 표출은 그런 요령을 터득하고 나서야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간명직절하게 지적한 김언이다. 그래서 그랬던지 이후 역대 명화가들도 꽃기르기를 좋아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니 겸재 정선(1676∼1759)은 그가 그린 자신의 생활모습에서 모란분을 감상하는 정경을 묘사하였고 관아재 조영우(1686∼1761)은 자신의 집을 소개한 「택기」에서 뜰안에 소나무 매화나무 오동나무 대나무와 모란 작약 구기자 국화 원추리 접시꽃등 오륙십종을 심었다 하였고 청장관 이덕무(1741∼1793)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을 지금의 영천인 길마재(안현) 밑의 그 댁으로 찾아갔을 때 뜰안에 기화요초가 가득한 데 스스로 물을 주어가꾸고 있었다 한다. 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다거나 자기집 뜰을 돈주고 남에게 가꾸게 하는 화가가 있다면 스스로 자신의 자질을 의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화성 겸재/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겸재 정선은 우리 회화사상에서 화성으로 떠받들어야 할 위대한 화가이다.삼천리 금수강산으로 불리는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데 거의 완벽에 가깝도록 성공한 분이기 때문이다. 겸재가 살던 시대는 조선왕조의 국시로 천명됐던 주자성이학이 이미 율곡 이이에 의해 이기일원론으로 심화 발전돼 조선성이학이라는 우리 고유사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던 때였다.이에 당시 지식층들은 이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 고유색을 현양해가고 있었으니 문학에서는 한글의 가사와 소설,시조가 출현하고 한문의 진경시문이 유행하며,글씨는 한석봉체와 동국진체라는 조선 고유색 짙은 서체가 창안돼 널리 유포되는 등이 그것이었다.이런 시대분위기 속에서 어떤 천재 화가가 나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과 그와 어울리는 고유의 우리생활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주기를 열망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그 당연한 열망에 부응하여 출현한 천재화가가 바로 겸재였다. 겸재는 현재 종로구 청운동 89번지 부근의 백악산(북악산)아래에서 탄생하여 오십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고 다시 옥인동 20번지 부근으로 이사하여 삼십여년을 살았다.따라서 그는 서울에서도 가장 경치가 빼어난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에서 평생 살다간 셈이다.그런데 이곳은 율곡을 비롯해서 오계 성혼,송강 정철,구봉 송익필등 율곡학파의 핵심인물들이 살던 곳으로 이후 대대로 율곡학파들이 터잡아 사는 곳이었다. 겸재가 태어날 당시에는 육창으로 불리는 김창집의 육형제가 중심이 돼 이곳에서 율곡학맥을 계승하며 조선고유책을 선도해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삼연 김창홉은 성리학은 물론이고 제반 학문과 예술에 박통한 일세통유로 조선 고유문화인 진경문화 창달에 솔선하던 분이었다.겸재는 그 삼연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선성리학의 근본 경전인 주역을 비롯한 칠서에 통달하고 역대 시문과 서화법을 익히고 나서 타고난 그림 솜씨로 우리 산천을 그려내는데 적합한 화법의 창안에 골몰하게 된다.그 결과 겸재는 그가 사는 동네의 빼어난 경치를 사생하고 역대 명화들을 임모하며 임천고치와 같은 고전적 화론들을 정독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북방산수화법의 근본인 필묘와 남방산수화법의 근본인 묵법을 주역의 음양조화 원리에 따라 이상적으로 종합해내면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화법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다.이것이 겸재 진경산수화법이다. 겸재는 특히 36세때 금강산을 여행하며 이 화법을 실험해 보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후 84세까지 사는 동안 그 화법의 완성을 위해 부단히 화법 수련을 거듭하여 65세를 전후한 시기에 확연히 일가를 이루어내고 80세 전후한 시기에는 묘상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니 이념산수 출현의 역사적인 전과정을 그의 일생동안에서 모두 보여주는 셈이다.
  • 미술의 이해/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사람은 소위 육근이라는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눈(안),귀(이),코(비),혀(설),몸(신),머리(의)가 그것이다.이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각기 여섯 종류의 경계를 감지하게 되니 빛깔(색)과 소리(성)과 향기(향)와 맛(미)과 접촉(촉)과 이치(법)가 그 육종 경계이다. 따라서 육근이 육경을 감지하는 작용을 우리는 육각이라 하니 시각과 청각,취각,미각,촉각,지각이 그것이다.이런 육각이 쾌감을 느낄 때 우리는 쾌적하고 안락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데 자연환경 속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 육각의 쾌감이 끝없이 지속되는 경우는 없다.그래서 그 순간적 쾌감을 지속시키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있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그중에서도 시각적 쾌감을 지속시키려는 인위적 행위를 미술이라 한다.따라서 미술은 인류에게 시각적 쾌감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준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하겠다.이에 아름다운 산천과 기이한 자연현상을 그리고,고운 꽃과 새를 그리며,미남미녀와 잘 생긴 동식물들을 그리기도 하고 새기기도하였다. 이것이 모두 있는 그대로를 본따 그리는 사생적인 방법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그러나 완벽한 사생을 위해 역대의 천재 미술가들이 무궁한 노력을 쏟아 부어가는 과정에서 실수와 오류가 뜻밖의 아름다움을 도출해 내기도 하고 광기와 무상이 파격의 아름다움을 우연히 얻어내기도 하여 우리에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해 주니 미술은 자연미의 재생이라는 사생적 범주를 벗어나 인위적 창조를 지향하게 된다.이는 고도의 문화수준을 유지해온 어떤 문화권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 인위적 창조는 자연의 조화법칙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어떤 방법이나 어떤 기준으로든지 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터득하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자연의 아름다움과 접촉하며 그 생성과 조락의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선배들이 그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표현해 내었던지를 세심히 독화하여 정밀하게 분석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고금의 명화가들은항상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 여행하고 아름다운 꽃과 새를 기르며 쾌적한 생활분위기를 만들어놓고 살면서 고전적 가치가 있는 명화들을 끊임없이 임모하는 것은 물론 화론을 읽고 시문과 경사에 탐닉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만인에게 시각적 쾌감을 제공해줄 수 있는 미술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미감을 자신이 먼저 실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미술의 의미를 알고난다면 우리에게 시각적 쾌감은 커녕 불쾌감을 강요하는 수준미달의 많은 전람회는 문화발전을 저해하는 한낱 반미술 행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 국민의식과 전통문화/이창갑 건양대총장(굄돌)

    현대인들 중에는 우리의 「옛것」이라면 그것을 무조건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것이라 단정하면서 이를 부정하려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그래서 그들은 우리 것을 배척하고 남의 것만을 신봉하면서 하루 속히 옛 잔재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옛것」이라하여 그것이 모두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옛것」은 옛 사람들의 삶을 이끌어온 삶의 지혜인 동시에 현대인들이 이룩해야 할 새로운 문화의 바탕이기도 하다.특히 선인들이 창출한 전통문화는 선인들의 생활을 가장 편하고 행복하게 이끌어준 정신적 지주인 동시에 현대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초석이기도 하다.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문화란 공장에서 물건을 제조하듯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오랜 경험을 통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얻어진 삶의 지혜요,방법이다.민족나름대로의 그러한 문화가 곧 전통문화이다.그러므로 전통문화에는 반드시 그 문화가 방생하게 된 원인과 배경이 있고 그것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오늘에이어질 수 있었던 까닭이 있는 것이다.원인없는 결과를 상상할 수 없듯이 원인없이 창조된 문화란 있을 수 없고 까닭없이 이어져 내려온 문화 또한 상상할 수 없다.다만 우리들의 학문이 그 문화가 발전하게 된 배경과 이어져 내려오게 된 원인을 미처 다 밝혀내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그래서 옛 것이 모두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하며 심하면 미신처럼 비춰지고 있다 하겠다.좀더 깊이 성찰하고 구명하면 전통문화 속에는 현대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오묘한 진리와 슬기가 담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를 부정하고 무조건 서구의 문화만을 추구하려는 것이 적지않은 현대인들의 공통된 심성이다.여기서 가치관의 혼미,주체성의 상실이 초래된다. 이러한 혼미와 상실은 결국 사회의 혼미,전통문화의 상실을 초래하였다.그 결과 신문의 사회면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회질서의 파괴,윤리의 붕괴상을 전달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이러한 상황은 이제 거의 위험수위에 다다른 느낌마저 든다. ▷필진이 바뀝니다◁ 12월∼93년1월의 필진이 김상복(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이창갑(건양대총장) 정복근(극작가) 최갑석(재향군인회 중앙이사) 최완수씨(간송미술관 연구실장)로 바뀝니다. 10∼11월에 집필해주신 김금지,김영수,김희수,차정미씨께 감사 드립니다.
  • 가을문턱 화제의 명작2전

    ◎김정희전/추사예술 연대순 전시/중국회화전/명·청대회화 80점 출품 한중수교에 때맞춰 열리는 수준높은 중국회화전과 예술의 전당이 특별히 마련한 한국근대미술의 대가 추사 김정희 명작전이 초가을화단을 장식한다. 중국미술의 대거 유입이 예상되는 가운데 서장을 장식할 중국회화전은 삼성 미술문화재단 호암미술관이 들여온 「북경 자금성의 보물­명·청 회화전」(9월1∼11월30일 호암갤러리). 호암미술관이 중국의 북경고궁박물원과 3년에 걸친 협의끝에 선보이는 이 특별전에는 고궁박물원 소장의 명·청대회화 80점이 출품된다.중국 역대 황제들이 모아놓은 진품들로 중국최고의 평가로 치는 1급(국보급)작품 8점을 포함한 중국의 전통회화들로서 우리 조선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요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된다. 중국회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명·청대 거장들의 대표작이면서 이 가운데 50여점은 해외에서는 처음 공개되는 고궁박물원의 비장품들로 알려지고 있다. 주요작가는 조선조회화에 큰 영향을 준 이재,절파학풍의 창시자 대진,명대문인화를 정립시킨 오파의 시조 심주,남북종 화론의 주창자 동기창,청대 정통문인화의 거장 사왕오등이 있다. 호암미술관은 이 전시를 시작으로 고궁박물원측과 앞으로 전시·인적교류를 추진할 방침인데 동양미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보는 전시회」를 마련키 위해 4억원정도의 경비를 들였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근대미술의 최고거장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 명작전(9월4∼10월11일 예술의 전당 서예관)은 추사의 예술세계를 편년체계로 처음 제시하는 뜻깊은 전시회다. 이른바 「추사체」를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정작 그것이 어떤 과정과 배경을 통해 형성됐는지 정확히 아는 이들이 드문 현실에서 예술의 전당측은 「추사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구체적인 시도로 이 전시회를 꾸민 것. 따라서 이 전시에서는 서체형성과 변모양상을 다양한 작품세계와 광범위한 학서과정을 추적하여 그 이론적 배경이나 양식적 특징을 편년체계로 밝혀낸다. 실제 전시작품은 70여점으로 임창순(문화재위원장)최완수(간송미술관 연구실장)권창륜씨(서예가)가 공동으로 선정한 개인소장가들의 진품으로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작품의 종류는 대련 횡액 종액 서첩류 간찰 난초 수묵산수 선면 탁본 완당인보 등으로 추사의 모든 예술세계가 망라되고 있다.
  • 원숭이형 고려청자연적등 3건 국보 지정(단신패트롤)

    ◎원균 공신교서등 10건은 보물 ◇문화부는 20일 원숭이모양 고려청자연적과 초조본고려대장경등 3건을 국보로,원균장군의 선무공신교서와 불경등 10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이번에 국보 제2백70호로 지정된 원숭이모양 고려청자연적 「청자모자원형연적」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명품이다.원숭이의 해에 걸맞게 지정된 이 연적은 고려청자의 아름다움과 고려사람들의 해학과 개성이 담긴 귀중한 문화재가 된다. 또 국보 제2백71호로 지정된 「초조본현양성교론 권제12」와 제2백72호로 지정된 「초조본유가사지론 권제32」등 초조본 고려대장경은 고려 현종때 간행된 것으로 몽고침략으로 거의 불타 없어진 가운데 몇점 안 남은 귀중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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