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임응식(이세기의 인물탐구:84)
◎“셔터 외곬 인생”… 한국 사진예술의 선각자/“비예술성” 홀대속 국전 사진부문 신설 앞장/“인간의 살아있는 순간을 포착… 영원을 간직”/입학 선물 카메라가 첫 인연… 8순 넘은 지금도 활동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멈출 수 없지만 카메라는 파인더를 통한 순간포착으로 영원을 담아낸다」
불모지 한국사단의 개척자이자 사진예술의 선각자로 불리는 임응식 원로의 사진예술관이다.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사진과 관련된 일관된 자세를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에 비유하기를 주저치 않는다.「그의 눈은 과학자가 자연을 분석하고 연구하듯이 생의 본질을 잡기 위해 인간세상의 구석구석을 경건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인위적으로 생산된 사진,연출된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브레송의 말대로 「그들의 사진예술의 공통점은 기록성이 확대되어 역사성으로 이어지고 한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력과 정성의 불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베레모·검은 안경 차림
사진가는 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숙명을 쫓아 8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베레모에 검은 안경,간단한 촬영기재를 챙겨들고 아침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명동으로 나간다.명동은 「서울의 변화」이자 「한국의 문화사적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며 그가 지나온 흔적이고 희망찬 미래이기 때문이다.20여년전까지만해도 전봇대위에 올라가 명동거리를 찍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 서서 살아움직이는 명동의 표리를 응시하고 사유한다.
「나의 일생은 마라토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골인지점 하나만을 똑바로 보고 혼자서 싸우며 앞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성취감이 특별히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사진계에서 이룩한 수많은 그의 업적중에서도 57년 뉴욕근대미술관 25주년기념행사였던 「인간가족전」유치를 빼놓을 수 없다.작품을 운반하는 데만 대형트럭 70대,관람객 30만명을 동원하는 가 하면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68개국의 쟁쟁한 현역들이 참가한 「인간종합 전시의 파노라마를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또 「사진쟁이가어떻게 문화인이며 예술인이냐」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온갖 수모를 딛고 문총(예총전신)에 사진을 가입시킨 일이며 12년에 걸친 완강한 고투끝에 국전에 사진부문을 설치한 것은 그만의 끈질긴 고집과 자존심,강직함의 승리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국전 사진부 설치과정에서 조각가 윤효중씨와의 극도의 갈등은 한국사진사와 국전의 자취를 정리할 때마다 언제나 거론되는 사건의 하나다. 단지 사진이 한국미협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미협을 대표하는 윤효중씨는 국전의 사진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는 「한국미협에서 탈퇴한다면 당장 국전 사진부문 설치는 물론 홍대에도 사진과를 신설하겠다」고 회유했다.「아무리 목적달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자세로 이를 묵살했으나 그가 60년도 서울시문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자리에서 당사자인 윤효중씨가 「감언이설 따위에 미동도 하지않는 도도한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예술인의 자세」로 칭송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디어 64년 국전에 사진부가 탄생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 국무총리상등 최고상에서 사진을 제외시키는 바람에 굴욕을 느낀 그는 국전심사위원직을 사퇴,국전의 차별성과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주무당국에 시정을 촉구하는 건의서와 각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그 때의 비참했던 심경을 그는 「렌즈에 담은 소명」이란 글에서 「우리는 비굴할 정도로 참아냈다」고 표현하고 있다.
○6·25때는 종군작가 활동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세는 원리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는 비타협주의로 응집되어있다.그리고 그것은 한 작가의 명예와 성문때문이 아니라 사진의 위상을 지키려는 사단의 자존심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초기에는 정물과 풍경,인물과 누드를 소재로한 인상파적 표현기법에 천착하여 「사진미학의 완성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접근한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30,40년대 「침몰」같은 작품은 카메라를 쓰지 않고 인화지위에 직접 물체를 두고 빛을 쬐어 빛과 그림자만의 그라데이션으로 영상을 처리한 포토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가 현실에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 USIS가 파견한 인천상륙작전 종군작가로 일하면서부터다.그와 친밀했던 「라이프」지의 기자 핸크워커가 「시체의 행렬」을 카메라로 끝 없이 쫓는 것을 보고 그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기록」에 눈떠갔다.전후 폐허가 된 음습한 명동의 풀빵가게앞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슬픈 부녀와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청년의 「구직」은 인간존엄의 상실과 살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을 「사진은 사진」이라는 차원에서 그려낸 새로운 시각의 작품들이다.「인간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살점이 썩어가는 마당에 회화적 아름다움이니 관념적 자연미 추구는 한낱 한가로운 「음풍농월」이었고 그는 스스로 자책하여 싱싱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는 대학에서 최초로 사진을 강의하는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예빙되어 사진가로선 처음으로 고희기념전을 개최,하셀블라드 같은 고급 카메라를 쓴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 4백20여점은 미술관에 영구보존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그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위대한 인물묘사도 한장의 사진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을 가차없이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해 마지않는다.
○미술관에 420점 보존
그는 부산에서 한말 관리였던 임춘화씨와 김복덕 여사의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소년시절엔 바이올리니스트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도쿄 와세다중학 입학기념으로 둘째형(응구씨 재일화가)이 사다준 박스형 카메라 한대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던 엉뚱하게도 일본 풍도체신학교 졸업후 강릉우체국에 근무한 것까지도 결국 「사진」에 도달하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다.사진에만 몰두하여 집안살림은 여유가 없었으나 신교육을 받은 부인 박갑득 여사가 3남 4녀를 훌륭히 키워냈고 장남인 범택(한양대 교수)씨가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여야일록」.화가 석도륜씨가 카메라를 메고 명동을 도는 그의 모습을 「들판의 한마리 외로운 사슴」에 비유한 휘호다.그러나 순간을 멈추고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그의 도정은 「도심을 꿰뚫는 혁혁한 형안」이란 표현이 한층 어울릴지 모른다.
이제 그에게서 쾌심작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린 작가」만의 「삶의 지혜와 인생을 체관한 시각」은 그를 능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명동을 겨냥하는 그의 셔터소리는 시간을 정지하는 소리며 그의 카메라는 낭만과 전쟁과 역사의 비풍참우,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담긴,한국 제일의 보물상자에 틀림없을 것같다.
□연보
▲1912년 부산 출생
▲31∼34년 부산사진 여광 구락부 가입,일본 와세다(조도전)중학 및 일본 풍도통신학교졸업,일본「사진살롱」지에 「초자정물」발표
▲35∼37년 강릉우체국근무
▲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발족
▲50년 인천상륙작전 종군,「경인전선 보도사진 개인전」
▲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에 「병아리」입선,한국사진가협회결성
▲53∼73년 서울대를 필두로 이후 이대 홍대 건대 덕성여대 서울여대 숙대 서라벌예대출강
▲55년 미국 사진연감 「포토그라피 애뉴얼」에「나목」수록
▲57년 「인간가족사진전」유치(경복궁미술관)
▲64∼82년 국전초대작가
▲69∼71년 월간「공간」지 주간
▲72년 임응식회고전(서울,부산)
▲73년 한국사진협회 이사장
▲74∼78년 국전운영위원,한국사진교육연구회창립 대표
▲74∼90년 중앙대교수
▲82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 회고전
▲83년 미국LA한국공보원초대전
▲89년 주불한국문화원초청「임응식 사진전」(파리)
▲95년 삼성 포토스페이스 개관 임응식회고전
서울시 문화상(6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71년) 문공부현대사진문화상(78) 은관문화훈장(89)
「한국의 고건축」(5집)「임응식 사진집」(79)「풍모」(82)「임응식 작품집」(95)외 「사진표현과 작가」「사진사상」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