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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정동영 그는 누구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정동영 그는 누구

    평화시장을 오가는 언덕길은 가파랐다. 숨이 턱에 차고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어머니가 만든 아동복 바지를 팔러다니던 시절.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산다는 데 감사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었다. 그 가난이 싫어 ‘본격적으로 옷장사를 할까.’마음먹기도 했다. 이대로 잘하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도 같았다. 바느질한 천을 메고 청계천을 걸으며 청년은 상념에 빠지곤 했다. 옷장사가 천직이 될 뻔한 청년이 15일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어렵고 고단하던 시절이 머릿속을 스쳤다. 환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홀어머니와 세명의 동생 정동영 후보는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진철(1969년 타계)씨와 어머니 이형옥(2005년 타계)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 형만 넷이었다. 그러나 얼굴도 보지 못한 형들이다. 모두 정 후보가 나기도 전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누구에게나 가혹했던 시절이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일 무렵. 고단한 병치레를 계속했던 아버지가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충격이었다. 우상으로 여겨왔던 아버지다. 아프고 또 아픈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정 후보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기억을 그때로 꼽는다. 방황도 많이 했다. 뒤에 남겨진 건 홀어머니와 세 명의 동생, 그리고 가난이었다. 혹독한 현실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에겐 무거운 짐이다. 계속 방황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부터 정 후보는 가장으로서 삶을 살았다. ●서울대 재학중 시위·투옥·징집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가난한 시골 청년은 굴곡많은 현대사와 마주보게 됐다.72학번 동기들의 징역형을 합하면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 나오던 시절이다. 투옥과 수배가 반복됐다. 정 후보도 1973년 시위에 참가했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최초의 유신반대 학생시위로 기록된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시위다. 당연한 듯 구치소에 구금됐다. 다음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다. 또다시 3개월간의 구치소 생활. 이번에는 출감하자마자 강제 징집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향의 어머니가 눈에 선했지만 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다. ●18년 기자 생활… 80년 광주 취재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한 정 후보는 문화방송(MBC)보도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1996년까지 18년을 기자로 지냈다. 아직 신참티가 남아 있던 1980년 5월 그는 광주 도청 앞에 서있었다. 봉쇄된 광주에서 흘러 나오는 소식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도보로 직접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눈으로 지켜본 광주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총알이 빗발치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취재를 해야만 했다. 목숨을 내놓고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의 리포트는 보도되지 못했다. 당시 리포트는 올 5월 우연히 발견돼 27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1995년 정 후보는 정치인으로 변신을 결심한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정 후보는 1996년 4월 전주 덕진구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2000년에는 재선에 성공했다. ●우리당 탈당 ‘배신자´ 비난 듣기도 그리고 그해 12월 김 전 대통령 면전에서 당시 권력 최고실세 권노갑 최고위원의 2선 퇴진을 요구했다. 이른바 ‘정풍운동’이다. 결국 10일 후 권력의 정점에 있던 권 최고위원은 자진 사퇴한다. 정치인 ‘정동영’을 국민 뇌리에 각인시킨 사건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정치 실험에 돌입했다. 민주당을 나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모험이었다. 민주당 분당의 원흉으로 몰렸다. 그러나 정 후보는 열린우리당을 다시 탈당했다. 비난이 쏟아졌다.‘배신자’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들었다. 이제는 다시 민주당에 손 내미는 상황에 처했다. 아이러니다. 2002년 정 후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꼴찌를 밥먹듯했다.1승 15패. 참담했다. 고통이 극심했다. 그래도 끝까지 버텼다. 그러고는 승자 노무현 후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마치 자기 선거인 것처럼. 그런 정 후보가 이제 5년 만에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로 나선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선거다.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강유정의 영화in] 비커밍 제인

    [강유정의 영화in] 비커밍 제인

    로맨틱 코미디 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노팅힐’‘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등 말이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말은 결국 희극으로 끝나는 로맨스임을 그 이름에서 명명백백히 선언하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이뤄지지 않는 인연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식의 곤란을 겪는다 할지라도, 로맨틱 코미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들은 결혼을 하든, 연인이 되든 둘 중 하나의 상태에서 관객에게 결별을 고한다. 그 이후의 연애, 결혼 생활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라도 관객은 뿌듯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선다. 로맨틱 코미디의 원조격이라면 ‘어젯밤에 생긴일’ 등의 스크루볼 코미디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겠지만 내 생각에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한미한 집안의 딸들이 하나같이 명망있는 재산가의 상속남들과 결혼하는 ‘오만과 편견’이나 ‘센스 앤 센서빌러티’만 해도 그렇다. 실상,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에서는 노처녀들의 삶이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결혼하지 못한 여자들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없었기에 20대를 고스란히 부모의 짐이 되거나 형편없는 임금의 가정교사로서 일생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을 보면 대부분 낭만적 연애 끝에 결혼에 도달하지만, 당대 현실은 정반대였다. 결혼은 낭만보다 조건, 사랑보다 금전에 따라 결정되었고 연애는 그 이후의 문제였다. 낭만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19세기 영국의 결혼. 그런 의미에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타난 낭만적 연애 서사들은 현실이라기보다 환상이자 꿈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오만과 편견’‘센스 앤 더 센서빌러티’는 낭만적 연애 결혼의 꿈을 말랑말랑하게 직조해낸 격조있는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언 감독이 연출한 ‘센스 앤 더 센서빌러티’는 오스틴의 작품이 지닌 섬세한 매력을 싱그러운 사랑의 두근거림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격정적 사랑을 꿈꾸는 여동생과 봄날 오후의 때늦은 비처럼 감정을 다스리는 언니의 사랑, 대조적 인물들의 연애담은 섬세한 뉘앙스와 오묘한 표현으로 넘실댄다. 한편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인 워킹 타이틀사에서 만든 ‘오만과 편견’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리워하고, 의심하다, 결국 고백하고 마는 난해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집안을 모욕하는 “오만”과 남자의 주변에 떠도는 험담을 무조건 믿어버린 “편견”으로 인해 먼 우회로를 거쳐야 했던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결국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형편없는 재산과 단정치 못한 동생을 가진 엘리자베스이지만 그녀의 교양과 재치는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을 가능케 한다. 실제 가난하다는 이유로 결혼할 수 없었던 제인 오스틴에게 있어 낭만적 사랑은 신화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조건이나 재산을 무시한 순수한 결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러한 결말은 행복한 환상을 부추기기에 충분하다. 비록, 낭만적 사랑은 영화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어도 말이다. 영화평론가
  • [스포츠 라운지] 국내여자보디빌더 간판 미즈코리아 유미희씨

    [스포츠 라운지] 국내여자보디빌더 간판 미즈코리아 유미희씨

    에어로빅 강의를 막 마친 그에게선 근육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에어로빅 강사에서 보디빌더로 변신한 지 2년 만에 국내 여자 보디빌더의 간판으로 자리잡은 유미희(35·광명사회체육센터)씨.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로, 에어로빅 강사와 보디빌더로 1인4역을 해내고 있는 그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해 들어봤다. ●살빼려 시작해 국가대표까지 보디빌딩에 빠져든 계기가 재미있다. 큰 애를 가지면서 처녀때의 ‘한 몸매’가 80㎏으로 불었다. 스물둘 나이에 에어로빅학원을 차릴 정도로 과감했던 그에게 남편 유승호(41)씨가 웨이트트레이닝을 권했다.‘당연히 하는 건가 보다.’하고 따라한 운동량이 나중에 보니 남자들도 혀를 끌끌 찰 만큼 가혹한 수준이었다. 선수 입문한 지 한달 만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밑바탕이 됐다. 유산소운동과 병행하면서 무려 30㎏을 뺐다.“근육을 붙여야 살이 빠진다.”는 게 그의 지론. 멘토(정신적 스승)이자 후원자인 남편과는 미스터·미즈코리아 커플전에서 나란히 짝을 이뤄 연기하면서 1위를 차지,“참 부러운 부부”란 소리도 들었다. 가혹할 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겠지만 그는 재미있었다고 했다.“몸이 달라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몸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시합 날짜가 잡히면 석달 정도 감량에 들어간다. 지방을 빼는 데 집중하다 마지막 며칠은 근육의 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수분을 없애려 노력한다. 이틀 전부터는 아예 입에 물을 대지 않는다. 보디빌더들은 대중탕 출입도 삼간다. 충격에 완충작용을 하는 지방이 없기 때문에 옆사람과 부딪히기만 해도 멍이 든다. 더위와 추위에 유난히 쩔쩔 매는 것도 같은 이치. 단백질 섭취를 위해 닭가슴살을 주로 먹는데 수분을 없애기 위해 구운 뒤 말려 먹는다. 감자나 고구마도 이런 식으로 먹는다. 비시즌에도 식사는 아홉 차례에 걸쳐 나눠 먹는다. ●시합 3개월 전부터 감량 사람들은 보디빌더의 연기를 보고 징그럽다고만 반응하고 끝나지만 그는 “경기 당일 하루를 위해 준비한 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하루를 위해 시즌과 비시즌 완전히 달라지는 운동, 식습관 등을 알게 되면 그가 기울인 노력에 탄사를 보내게 된다.“징그럽다.”에서 “멋있다.”를 거쳐 “아름답다.”로 반응이 달라진다. 처음 무대 밑에 모신 어머니는 “자랑스럽지만 안쓰럽다.”며 눈물을 훔쳤다. ●살빼는 방법이지만 체계적 공부 필요 하지만 “안 해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열이 무대에서 찾아온다.”고 했다. 근육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기에 시간이 짧아 안타까울 정도라는 것. 몸짱 열풍으로 보디빌딩에 관심을 갖는 여성이 부쩍 늘었다.“살 빼는 좋은 방법인 것은 맞다. 그러나 결코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치밀하고도 혹독한 자기와의 싸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요체는 무얼까.“건강과 탄력, 균형이 삼위일체된 몸이 아닐까요.”라고 되물었다. 배울 게 없다고 판단해 대학을 그만 둘 정도로 과단성 있는 그는 요즘 대학들에 많이 설립되는 보디빌딩학과 입학 권유도 뿌리쳤다. 아직 남녀를 통틀어 국내에 한 명도 없는 “세계프로 자격증을 따내는 데 집중하겠다는 것”이었다. 광명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프로필 ▲출생 1973년 9월24일 서울생 ▲체격 157㎝,49㎏(시즌) 56㎏(비시즌) ▲가족 남편 유승호(41·헬스트레이너)씨와 1녀1남 ▲취미 여행 ▲학력 본동초-중앙대부속여중-안양예고-명지대 자퇴 ▲경력 봄철대회 1위, 타이완 동아시아대회 4위, 베트남 아시아대회 5위(이상 2006), 미스터·미즈코리아 일반부 -49㎏급 (대회 2연패)과 커플전 1위 및 그랑프리, 중국 아시아선수권 -49㎏급 은메달(이상 2007년), 광명시 홍보대사(7월 위촉)
  • ‘정삼근 간첩사건’ 진실규명 결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8일 “지난 18일 54차 전원위원회 전체회의에서 1985년 전북 군산에서 발생한 ‘정삼근 간첩조작의혹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며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정삼근 간첩조작의혹 사건’은 1969년 조업 중 납북된 후 귀환한 어민 정삼근을 수산업법 및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한 뒤 16년이 지난 1985년 5월 보안대가 정씨를 다시 장기구금과 고문을 통해 간첩으로 허위조작해 처벌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는 “전주보안대가 어민 정씨를 불법 연행한 뒤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52일 동안 가족과 변호인 접견을 차단한 채 지하실에 불법 감금하고 구타하는 등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받아 간첩으로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또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대가 정씨를 불법으로 수사한 뒤 이를 은폐하기 위해 안기부 수사관 명의로 서류를 작성, 사건을 송치한 사실도 조사결과 밝혀졌다.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보안대의 불법 사실을 알고도 자백에 의존한 형식적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해 정씨를 법원에 기소했고, 전주지법 군산지원과 광주고등법원도 가혹행위로 인한 허위자백이었다는 정씨의 호소를 무시하고 징역 7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조교폭력 대응 학생제적 부당”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는 28일 조교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제적된 정모(21)씨가 한국체육대학 총장을 상대로 낸 제적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대학의 처분이 너무 가혹하다.”면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정씨가 조교에게 다소 흥분된 어조로 불손하게 말을 한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조교가 먼저 욕설을 하고 뺨을 때리는 등 폭력을 행사한 것을 고려하면 대학이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교육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길러내야 할 책무를 쉽게 포기하고 제적한 것은 너무 가혹하다.”면서 “대학의 제적처분은 징계재량권을 넘어 위법하다.”고 밝혔다.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얼굴/정일성 지음

    ‘한’(恨). 우리 민족의 지배적 정서로 가장 널리 꼽혀 온 단어다. 감정적 차원을 일컫는 단어 ‘한’은 명확한 실체를 갖는 예술과 역사의 차원으로 영역을 넓히며 ‘한의 역사’ ‘한의 예술’ 등 부자연스런 조합의 신조어를 양산해냈고,‘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恨民族)의 동음이의어적 경계를 오가며 양자의 의미를 뒤섞었다.‘한’이란 지극한 ‘비애미’(悲哀美)는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을 만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란 언술과 맥을 같이 했고, 토끼 모양으로 형상화된 한반도 지도를 머릿속에 새기도록 만들었다. 딱히 증명할 근거도 없고, 때론 사실 관계와도 다른 이 같은 의미 확장의 배경엔 뜻밖에도 ‘한’을 심어준 나라 일본의 한 민예운동가이자 미술평론가의 역할이 지대했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한국식 이름 유종열로도 잘 알려진 사람. 야나기는 일제 식민지 시절 대표적인 친한파였다. 그는 조선시대 민화에 ‘민화’(民話)란 이름을 최초로 부여해 학술적 체계화를 시도했고,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해 광화문 철거가 논의되자 철거를 적극 반대하며 한국의 예술품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1924년엔 서울에 조선미술관을 설립했고,36년엔 일본 도쿄에서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했다. 그가 수집했던 일본 내 조선 민화 120여점이 2005년 9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됐고, 역시 그가 수집한 260여점의 자료가 지난해 11월부터 3달간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그리고 일본’이란 제목으로 일민미술관에서 공개됐다.84년 9월엔 전두환 정권이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보관문화훈장도 추서했다. 야나기는 누가 뭐래도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같지 않은 일본인’이었다. 야나기는 그렇게 알려져왔다. 그렇게 알려지며, 야나기는 침략국 일본의 야만성에서 분리돼 ‘은인’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서울신문 기자를 그만둔 뒤 한·일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온 정일성 씨가 최근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이란 책을 펴냈다. 야나기의 또 다른 얼굴을 가감없이 들춰낸 저자는 야나기를 민예운동가가 아닌 ‘문화정치 이데올로그’로 파악한다. 저자의 야나기 평가는 가혹하다.“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식민통치술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는 데 일조한 제국주의 공범”이자 “일제의 무력진압에 상처받은 한민족의 마음을 달래려 한 심리요법사, 식민지 조선통치 훈수꾼”이라고 규정짓는다. 저자가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근거는 야나기의 친한파적 기질을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자료로 평가돼온 글,1919년 5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발표된 ‘조선인을 생각한다’다.3·1운동 당시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며 썼다는 이 글은 이듬해 4월 동아일보에 번역 게재됐고, 게재 직후엔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이란 또 다른 글이 같은 신문에 실리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저자는 두 글이 “주의를 기울여 읽으면 조선 독립을 돕는 내용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며 몇 대목을 짚어낸다.“반항(독립만세운동)을 현명한 길이라거나 칭찬할 태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조선인을 생각한다’)”고 한 것이나 “우리가 총칼로 당신들을 해치게 하는 것이 죄악이듯이, 당신들도 유혈의 길을 택해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조선의 벗에게 드리는 글’)”고 강조한 점 등. 요컨대 야나기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이렇다.‘사이토 마코토 3대 총독의 문화통치 두뇌’. 이 책을 통해 70년대 거세게 일었던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다시 한번 활기를 띌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병역 거부자 ‘잔혹史’

    [종교·신념따른 대체복무 허용] 병역 거부자 ‘잔혹史’

    ‘20만 5801개월’. 지난 1950년부터 2006년 5월까지 종교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1만 2324명에게 선고된 형량이다.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신성한’ 국방 의무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던 만큼 ‘반국가사범’이란 낙인을 찍히고도 항변할 기회조차 없었다. 지난해 수형자 가족모임이 병역 거부로 수감됐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인 6328명이 수감생활 중 1만 8966건의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가혹 행위는 사망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1975년 논산훈련소에서 숨진 김종식씨,1976년 포항 해병대에서 사망한 정창복씨 등 5명의 유가족은 지난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죽음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진정을 낸 상태다. 2∼3년간 복역한 뒤 출소한 뒤엔 전과자라는 주홍글씨가 기다렸다. 공무원은 물론 변변한 기업체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1972년 유신이 선포된 뒤에는 특별조치법까지 제정돼 처벌이 강화됐다.‘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시절엔 형량이 35개월까지 늘기도 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일제 강제연행 한국인 사망자 자료집 펴낸 日 사학자

    일제 강제연행 한국인 사망자 자료집 펴낸 日 사학자

    |도쿄 박홍기특파원|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한국인 가운데 사망자 7750명의 이름과 노역 현장 1550곳을 확인, 수록한 자료집이 처음 나왔다. 근대 사학자인 다케우치 야스히토(50)는 후생성과 광산·탄광 관련 기업의 사망자 명부를 토대로 20년 동안 검증 작업을 거쳐 만든 ‘전시 조선인 강제노동조사 자료’를 고베학생청년센터를 통해 출판했다. ●7750명 이름·노역현장 확인 자료집은 일본 정부에 의한 관련 문헌이 아직 없는 상태인 만큼 한국인 희생자의 유골조사 등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한국에서 군인·군속 24만명을 강제 연행해 전쟁터로 내모는 한편 민간인 70만명도 끌고가 탄광과 공장 등 가혹한 노동현장에 투입시켰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후생성이 1946년 9만여명의 명부를 작성,1991년 한국 정부에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라며 제출했었다. 명부에는 성명 이외에 다른 자료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다케우치는 일부 지자체에 보존돼 있는 매장·화장 허가증과 홋카이도, 규슈의 탄광 기업의 종업원 명부,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발행한 자료 등을 일일이 대조, 사망자 이름과 노동 현장, 사망 당시 상황 등을 밝혀냈다. 사망자 내역은 광산·공장의 노무관계가 70%로 가장 많고, 군사기지 건설 등 군무관계가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노동 현장은 홋카이도 210개소, 후쿠오카현 140개소, 오키나와현 120개소, 효고현 90개소 등이다. ●한국인 희생자 유골조사에 큰 도움될 듯 다케우치는 전화통화에서 “대학에서 한국과 아시아를 전공한 것을 계기로 조선인들의 아픔에 관심을 가졌다.”면서 “자료집은 초보단계인 만큼 앞으로도 계속 진상규명 작업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고베학생청년센터장인 히다 유이치(57)는 “35년 동안 조선인들의 강제연행 등을 조사하면서 다케우치와 인연을 맺었다.”면서 “다케우치의 집념에 감사하며, 조선인들의 유골조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hk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36) 정묘호란 일어나다Ⅰ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오랫동안 후금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한 뒤 모문룡도 제압하라고 지시했다. 모문룡이 조선의 비호 속에 가도에 머물면서 후금을 탈출하는 반민(叛民)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의주·정주·안주성 차례로 함락 후금군은 1월13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후금군은 다국적군이었다. 만주족 병사들뿐 아니라 한족과 몽골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사령관은 아민이었고, 한족 출신의 이영방(李永芳), 조선 출신의 강홍립과 한윤(韓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다. 이영방은 1618년 누르하치가 무순을 공격했을 때 투항했고, 강홍립은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 참전했다가 투항했다. 한윤은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켰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었다. 후금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왔다.14일 새벽 후금군이 성을 포위하여 전투가 시작되자 한윤은 병기고에 불을 질렀다. 혼란한 와중에 후금군에 내응하는 자들이 성문을 열었고 후금군은 수월하게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李莞)은 사로잡혀 피살되었다. 의주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정주(定州)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은 일제히 조총을 쏘았지만 다시 탄환을 재기도 전에 돌격해 들어간 후금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선천부사 기협(奇協)이 전사하고, 정주목사 김진(金搢)과 곽산군수 박유건(朴惟建)은 포로가 되었다. 성 함락 후 후금군은 저항했던 군사들을 전부 살해했다.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힌 뒤 전부 머리를 깎였다. 머리를 깎은 것은 포로들이 이제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후금군은 1월21일 청천강을 건너 안주(安州)로 들이닥쳤다. 안주는 당시 청북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방어 거점으로 조선이 나름대로 오랫동안 방어태세를 점검해 왔던 곳이었다. 성 안의 군민도 3만 6000이나 되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흥(南以興)은 성 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결전을 준비했다. 적의 돌격이 시작되자 대포와 화살을 일시에 발사하여 저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삼남(三南)의 농민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조선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후금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후금군의 대병력이 순식간에 성을 넘어왔고, 조선군은 우왕좌왕했다.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의 함락이 임박하자 남이흥은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 더미 속으로 몸을 던졌다. 장렬한 순국이었다. 안주 함락 후 아민은 병사들에게 4일간 휴식 시간을 주었다. 그들은 느긋했다. 반면 안주성이 함락된 후, 숙천(肅川)과 평양의 조선 관민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졌다. 후금군의 승승장구였다. ●당황하는 조선 조정 후금군의 침략 소식이 서울의 조정으로 날아든 것은 1월17일이었다. 인조는 급히 신료들을 불러보았다. 인조는 신료들을 보자마자 “이들이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이냐? 아니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온 것이냐?”고 물었다.‘모문룡 문제’를 빼놓으면 후금과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장만(張晩)은 속히 하삼도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황주(黃州)와 평산(平山)에 별장(別將)을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자고 촉구했다. 이귀(李貴)는 황해도를 방어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강화도를 피란처로 정해 놓았다가 안주에서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 곧바로 강화도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치 패전을 이미 기정사실로 설정해놓고 대응하려는 자세 같았다. 최명길은 임진강을 방어할 계책을 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비변사 신료들도 무신 신경진(申景 )을 임진강으로 보내자고 했다. 하지만 인조의 마음은 이미 강화도로 들어가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 방어를 위해 삼남 지방에서 1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수사(水使)들을 시켜 수군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오게 하라고 지시했다. 인조의 우선 관심사는 자신의 호위(扈衛:궁궐을 지킴) 문제였다. 인조는 아마도 ‘이괄의 난’ 당시 권력을 잃어버릴 뻔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계획에 반대했다. 그들은 궁벽한 강화도로 들어가면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고, 조운(漕運)도 어렵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럼에도 굳이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分朝)를 설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가되, 왕세자를 삼남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흠(申欽)은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했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 ‘실정’에 대해 사과했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강화도 이외의 방어를 포기하다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했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인조는 거부했다. 호위에 충당할 어영군의 병력을 덜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비변사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 반정공신들 또한 극도로 몸을 사렸다. 강화도로 피란하기로 결정한 직후 논란이 된 것은 임진강을 방어하는 문제였다. 훈련도감과 어영군의 병력을 호위에만 투입하게 되자 임진강 방어에 충당할 병력을 차출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귀가 발끈했다. 이귀는 ‘군량이 궁핍한 상황에서 수원의 병력을 임진강으로 보내면 오직 죽음 뿐’이라고 반발했다. 이시백은 이귀의 아들이었다. 이귀는 수원의 병력도 인조를 호위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류는 반박했다.‘적병이 이미 깊숙이 들어왔는데 장강(長江)의 요새를 버리고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겠냐?’고 힐문했다. 인조는 결국 이귀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보다 못한 보덕(輔德) 윤지경(尹知敬)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적이 아직 천리 바깥에 있음에도 먼저 도성을 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고 통탄하고 인조에게 경솔히 파천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병력 500명만 주면 임진강을 사수하겠다고 다짐했다. 1월26일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기 위해 노량(露梁)으로 거둥했다. 하지만 배가 부족하여 강을 건너기가 여의치 않았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모래밭에 앉았다. 이괄의 반란군을 피해 한강변으로 나왔던 이래 두 번째 맞는 파천이었다. 다음날 인조는 김포를 경유하여 저녁에 통진(通津)에 도착했다. 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임진강을 포함한 다른 지역의 방어는 거의 방기되었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포함하여 한강 이북 지역의 백성들은 후금군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정권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켜야만 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집유·사회봉사는 ‘재벌 전유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에 대한 항소심 선고는 지난 6일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집행유예+사회봉사명령’과 비슷하다. 정 회장이 비자금 등과 관련된 경제사범이라면 김 회장의 혐의는 ‘단순 폭행범’으로, 범죄의 정도는 정 회장보다 약한 편이다. 하지만 조직폭력배를 동원하는 등 폭행 과정이 사회지도층 인사로서 적절치 못했다는 점에서 국민정서를 감안한 ‘괘씸죄´가 추가로 적용됐다. ●“단순 폭행범”… 괘씸죄 제외 하지만 법원은 항소심에서 “ 재벌 봐주기 아니냐.”는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1심 때와 달리 ‘괘씸죄´를 제외시켰다. 그동안 김 회장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고,40여일간의 구치소 생활을 통해 죗값을 일정부분 달게 받았다고 판단한 듯하다. 항소심 재판을 담당한 김득환 부장판사가 “1심 때도 이렇게 했으면 좀 좋아…”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도 1심 형량은 김 회장이 반성하지 않고 있는 데 따른 사법부의 엄한 질책성 형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조계 주변에서도 “김 회장이 많이 뉘우치고 저자세를 보이는 부분에 대한 법원의 만족감과 이제는 혼날 만큼 혼났다는 국민 정서 등도 고려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실무적으로 김 회장은 단순 폭력범에 불과하다.”면서 “일반 폭력사건의 경우 초범이고 피해자와 합의를 봤다면 장기간 구속은 드물다.”고 말했다. ●재벌들에 약한 법원 하지만 법원은 ‘재벌들에게는 약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집행유예는 재벌들의 전유물이며, 사회봉사명령은 집행유예에 쏟아지는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하기 위해 집어넣는 약방의 감초라는 부정적 시각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김 회장측은 정 회장에게 ‘8400억원 사회 환원’이라는 금전적인 사회봉사 명령이 내려졌다면 김 회장에게는 그야말로 ‘땀 봉사’를 선고한 점에서 차이가 크다고 말한다. 한 판사는 “김 회장의 범죄행위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재벌이라는 이유로 남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아서도 안 될 것이다.”면서 “김 회장이 사회봉사명령을 통해 땀의 의미와 이웃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각은 그들이 약속한 사회공헌과 함께 법원이 내린 사회봉사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 이행하는지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란 관측이다. 홍성규 오이석기자 cool@seoul.co.kr
  • 같은 술집 여종업원 2명 이틀새 목매고 익사하고

    같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여종업원 2명이 이틀새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9일 서울 강남경찰서와 대전 둔산경찰서에 따르면 대전의 A유흥주점에서 여종업원으로 함께 일하던 최모(29)씨는 4일 오후 9시쯤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빌라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이어 다음날 오전 11시30분쯤에는 이모(22)씨가 대전의 한 저수지에서 익사한 채 발견됐다. 불과 14시간 30분 차이였다. 최씨의 방에서는 ‘빚 문제로 고민이 많다.’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됐고, 이씨는 숨지기 전인 5일 새벽 친구들에게 ‘죽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과 함께 일했던 B씨도 경찰에서 “최씨와 이씨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 업주의 심한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택한 것 같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씨는 업소에서 일하며 진 빚 가운데 1000만원을 갚지 못해 심한 독촉을 받았고, 이씨는 동료 여성 3명이 여성단체가 운영하는 쉼터로 들어가 이들의 빚을 떠맡게 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이씨의 양쪽 손목에 자해한 흔적도 발견돼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경찰은 “숨진 이들이 업소에서 감금·가혹행위나 불법 채권 추심과 같은 강제행위를 당했는지 여부 등을 지속적으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서른잔치 드라마 ‘황금시대’

    왜 요즘 드라마들은 서른이라는 나이, 그것도 서른살 여성에 주목할까. 9일 종영한 MBC ‘9회말 2아웃’의 수애, 얼마전 시즌2를 선보인 tvN ‘막돼먹은 영애씨’의 김현숙, 그리고 재작년 인기리에 방영된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선아…. 이들은 모두 서른살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이들은 똑같이 30세라는 것 이외에도 싱글의 서러움을 겪는다는 점, 연하의 남자친구를 사귀는 점 등에서 공통분모를 지닌다. 싱글은 아니지만, 현재 한창 금요일밤을 달구고 있는 SBS ‘날아오르다’의 이진희(왕빛나)도 서른살이며 연하의 애인을 사귀게 된다. 먼저 이들 드라마는 서른살 싱글 여성을 대부분 결혼 중압감에 시달리는 ‘노처녀’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활발해진 요즘 30대 초반이란 나이는 이제 ‘결혼적령기’일 뿐이다. 얼마 전 결혼정보회사 ‘해피’가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결혼적령기를 묻는 질문에 여성의 52%가 “30∼33세”,34%가 “33∼35세”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추세와는 아랑곳없이 드라마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서른살 여성을 무조건 ‘노처녀 증후군’을 앓는다고 그리는 경향이 짙다. 이에 대해 “아직도 보수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현실을 잘 반영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트렌드를 선도해야 할 드라마들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자아실현과 관련한 혼란에 대해서는 “수긍이 간다.”는 의견이 많다. 서른 살은 20대라는 ‘준어른’에서 30대라는 ‘완숙한 어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므로, 이에 따른 성장통은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예로 ‘9회말 2아웃’의 홍난희(수애)가 작가라는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에 시청자들은 더없는 공감을 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직장 5∼7년차라는 시점과 서른이라는 나이가 맞물려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혼돈이라는 시각이 많다. 회사원 김모(30)씨는 “우리나라 남성들은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반면,20대 중반에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여성들은 서른살 무렵이 되면 다들 이직이나 전직 등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취업 시장에서도 30세라는 나이는 여성에게는 거의 `막차´이거나 바늘구멍과 같아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에서 더욱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서른에 대해 가수 김광석이 “또 하루 멀어져 간다.”라고 다소 관조적으로 읊었던 데 반해 최영미 시인은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일까. 하지만 이처럼 가혹한 여건은 역설적으로 서른살 여성이 더 빛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시론] 세정 혁신과 국가경쟁력/이만우 고려대 경영학 교수·한국회계학회 회장

    [시론] 세정 혁신과 국가경쟁력/이만우 고려대 경영학 교수·한국회계학회 회장

    올해 상반기 세수실적이 지난해 동기보다 15조원 이상 늘어나는 호조를 보이고 있어 연말까지는 전년대비 20조원, 금년 세입예산 대비 11조원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적자재정으로 국가부채가 확산되는 위기 상황에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는 세수추계가 잘못됐고 가혹한 세금을 부과한 결과라며 폄하하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과세포착률 제고와 성실납부 유도를 근간으로 하는 세정혁신의 결실임을 알 수 있다. 작년 12월31일이 공교롭게도 일요일이어서 납기인 세금에 대해 올해 1월2일까지 납부가 가능해 이월된 금액이 3조원 이상이다. 또 부동산 가격상승에 따라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도 4조원 이상 증가했는데 가격변동의 정확한 사전예측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세수증가분 중 6조원은 납세자의 성실신고에 따른 세정혁신의 열매인 것이다. 우리 세제의 고질적 병폐는 거래증빙 주고받기가 정착되지 않아 과세포착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증빙교부 없는 현금거래를 통해 사업자가 부가가치세 법인세 소득세로 연결되는 세금을 쉽게 포탈할 수 있어 소득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지갑 근로자와의 형평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세법체계도 너무 복잡해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유리하게 납세의무를 이행하기가 힘들었다. 국세청은 “국민이 공감하는 따뜻한 세정”이라는 구호아래 성실납세 환경을 조성하면서도 납세자에 대한 세정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국세청 홈페이지를 열면 각종 절세기법들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자는 배우자 사이에 명의를 분산해 세금을 줄일 수 있다는 고단위 절세기법을 보고 있으면 국세청 홈페이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과세대상을 빠짐없이 포착하려는 당국의 제도개선 노력의 성과가 나타나 신용카드 및 현금영수증에 대한 인센티브로 과세정보가 전산망을 통해 착실히 확보되고 있다. 또 고의적인 탈세에 대해서는 40%의 징벌적 가산세를 부과함으로써 탈세유혹을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세무조사도 건수는 줄이되 대상 선정의 효율을 높이고 조사역량을 집중함으로써 다른 사업자의 성실신고를 유도하는 조사방침도 정착되고 있다. 근로소득자의 가장 큰 불만은 고소득 자영업자에 비해 세금부담이 과중하다는 점이다. 이런 불만은 철저한 과세인프라 구축을 통해 국세청이 해결할 과제인데 근래에 와서 자영업자와 근로소득자 사이의 불균형이 많이 개선되고 있다. 금년 종합소득세 신고분에 있어서 자영업자는 전년대비 26.6%의 증가율을 보여 근로소득자의 8.7%보다 훨씬 높다. 정부는 세수초과분을 당초 예상됐던 적자국채 발행을 취소하고 공적자금과 국가부채 상환에 사용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성실납세가 정착돼 세수가 안정적으로 증가될 경우 세율인하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경제개방이 가속화돼 경제활동의 국경이 없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소득세와 법인세 세율을 경쟁국보다 높게 유지하는 것은 투자를 몰아내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국세청이 성실납세 환경을 조성하는 혁신을 지속해야 세율인하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과세포착률 제고로 세율을 낮춰 국가경쟁력을 확보해야 투자와 고용확대를 통한 안정성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세청 혁신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매우 크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 교수·한국회계학회 회장
  • [인도통신] 경찰, 절도범을 오토바이에 묶고 질주

    [인도통신] 경찰, 절도범을 오토바이에 묶고 질주

    인도 비하르주 바갈푸르지역의 경찰관 2명이 절도범 검거 후 엽기적인 처벌을 해 비판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사건은 동부 비하르주의 한 마을에서 20살의 한 남자가 인도 여성들이 팔에 차는 금팔찌나 목걸이등을 훔쳐 달아나다 주민들에 의해 붙잡히면서 발생했다. 이 남자는 주로 힌두사원을 찾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인 절도행각을 벌여왔고 이에 마을 사람들은 발길로 걷어 차고 돌을 던지는 등 전형적인 인도 시골사회의 처벌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지역 경찰관 2명이 범인을 인계 받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경찰관 2명은 윗옷이 벗겨진 이 남자를 오토바이에 묶고 무려 500야드 (약 460미터)를 질질 끌며 질주한 것. 이런 끔찍한 처벌의 배경에는 인도 경찰의 막강한 공권력이 자리한다. 인도에서는 경찰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릭샤(오토바이 택시) 운전수나 하층민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한다. 그러나 이날 사건은 TV카메라에 당시 상황이 생생히 녹화돼 인도전역에 방송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국민의 분노에 엽기적인 처벌행각을 벌인 두명의 경찰관은 모두 파면됐으나 불만을 품은 하층민 2000여명은 해당 경찰서 앞에서 폭력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번 사태는 인도사회에 만연해 있는 인권유린 실태와 공권력을 앞세운 경찰의 가혹행위가 인도에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한편 절도를 벌인 이 남자는 사생아로 태어나 그의 할머니에 의해 키워졌으며 14살의 여동생과 함께 어렵게 생활해왔던 것으로 이웃 주민들은 전했다. 사진=telegraphindia 나우뉴스 인도통신원 김대석 redarcas@gmail.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강유정의 영화 in] 관타나모로 가는 길

    가혹한 역사는 인간을 우연적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란 인간이 밟아온 인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때론 역사가 더 힘이 세다. 때로 역사는 마음대로 사람들을 끌고 가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는다. 잔혹하다. 우리를 관통하는 ‘역사의 힘’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 나약해진다. 그 지침을 다시 돌려 놓을 수 있는 것도 인간이지만 역사로 인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는 것도 인간이다. 마이클 위터바텀의 영화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지금, 이곳 지구상 가장 뜨거운 격전지인 아프가니스탄을 조감하고 있다. 영국에서 공부 중인 파키스탄 청년 네 명은 우연히 아프가니스탄에 가게 된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이 호기심으로 아프가니스탄행에 나서게 된 것이다. 시작은 호기심이었지만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세상은 그들은 그냥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인종적 유사성 하나만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추종하는 알카에다로 지목된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고 만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들은 영어가 희망이 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더욱더 신랄한 고문의 빌미로 전도된다. 자백을 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처럼 심문은 계속된다. 미군은 비디오 화면이나 사진에서 비슷한 얼굴을 찾아내 저 사람이 당신이 아니냐고 밀어붙인다. 아니라는 부정은 의미없는 비명으로 전락한다. 자신을 증명하려 아무리 애써봐도 소용이 없다. 미군에게 붙잡혀 하루 5분의 산책시간만을 허용받은 채 지낸 시간은 자그만치 2년이다.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천천히 소진되어 간다.‘인 디스 월드’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이클 윈터바텀은 격전지의 상황을 리얼하게 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형식을 선택했다. 아프간과 파키스탄, 이란 등지에서 촬영된 화면은 실제 장면과 섞여 긴장감을 높여 준다. 세미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그들을 보면 그 답답한 현실이 바로 전달되는 듯하다. 정말 갑갑한 것은 그들이 아무런 혐의 없이 잡혔던 2년이 영화적 설정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엄연한 현실로 여전히 ‘그들’이 거기에 존재한다. 이는 수용소를 벗어난 다른 아프가니스탄에도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곳은 그렇게 점차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그들의 삶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한때 우리의 과거도 역사로 인해 우연적 존재로 전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그랬고 광주항쟁이 그랬다. 우연히 1980년 5월18일 광주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화인이 남게 된다. 어쩌다 우연히 1987년 6월9일 신촌에 있었다면 지독한 최루가스와 함께 쓰러진 한 남자를 모른다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지독한 역사는 개인의 삶과 추억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전쟁 중인 이 세계, 암담한 현실을 목도하는 작품이 바로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다. 영화평론가
  • “내 재산은 재봉틀 하나뿐” 현대家의 어머니 떠나다

    “내 재산은 재봉틀 하나뿐” 현대家의 어머니 떠나다

    열다섯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살 연상의 고향 총각과 혼례식을 올렸다. 그리고 평생을 통바지(일명 몸뻬) 차림으로 여섯명의 시동생과 아홉명의 자식이 달린 ‘큰 집안살림’을 묵묵히 꾸렸다. 젊어서 남편이 사준 재봉틀 하나를 자신 소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겼던 ‘현대가(家)’의 대모(大母) 변중석 여사가 17일 눈을 감았다. 길고 지루했던 병상 생활을 끝내고, 남편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곁으로 가는 순간이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변 여사가 입원 중이던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 치료를 받다가 이날 오전 9시45분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86세. ●평생 통바지 차림… 한결같은 근검·후덕함 고인은 1921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다. 같은 통천 출신의 정 회장과 결혼한 것은 1936년 1월.8남1녀를 낳아 기르는 동안, 그는 한결같은 근검함과 후덕함으로 ‘현대가 여자’의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정 회장이 살아 생전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근검을 가르쳤다면, 고인은 새벽 3시30분부터 손아래 동서·며느리들과 아침 준비를 함께하면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라.”고 일렀다. 다섯째 며느리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회고다. “며느리들은 보통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새벽 4시반쯤 서울 청운동(정 회장이 생전에 살던 집)으로 갔는데 언제나 어머님은 이미 부엌에 나와 계셨다. 항상 검소하고 소박하셨다.” ●버스 타고 시장 가서 반찬거리 직접 사와 정 회장이 자가용을 사줬지만 걷거나 버스를 타고 시장에 가서 야채며 반찬거리를 직접 사들고 왔다. 그리고는 “(남들은 나를 재벌 사모님이라고 하지만) 내 재산은 재봉틀과 아끼는 장독대가 전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칭찬에 인색했던 정 회장조차도 훗날 회고록에 “(아내는)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고 고인이 무조건 ‘참고’ 지냈던 것만은 아니다. 가혹하리만치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정 회장이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며느리들을 보고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 시달려 봐야 나중에 자가용 샀을 때의 기쁨을 안다.”며 역정을 내자,“손주 녀석들 키우는 문제까지 시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거냐.”며 막아준 이가 바로 고인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차례로 가슴에 묻는 고통과 여자로서의 마음고생이 쌓이면서 ‘살아 있는 보살’도 탈이 났다. 협심증 등으로 1990년대 초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눈을 감을 때까지 10년여를 아산병원 특실에서 지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서울광장] 우리 안의 반달리즘/ 구본영 논설위원

    [서울광장] 우리 안의 반달리즘/ 구본영 논설위원

    유치환 시인이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이라고 표현했던가. 그 시구에 어울리는, 아프가니스탄의 뜨거운 모래 언덕에서 한국인이 두 명이나 희생됐다. 탈레반 세력도 무고한 이들에게 몹쓸 짓을 할 만큼 처음부터 ‘막가파’는 아니었다. 세계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왕따’였을 리도 없다. 탈레반이 1996년 아프간 수도 카불에 입성했을 때를 돌아보라. 소련의 침공과 내전으로 고통받던 아프간인들이 그들의 개혁 깃발 아래로 모여들지 않았던가. 이슬람권 여성들은 외출 때 종교적 전통에 따라 베일을 두른다. 머릿수건인 히잡과 눈만 내놓고 얼굴까지 감추는 니캅 등 복식마다 가리는 정도는 다르다. 아프간 여성들은 발끝까지 덮는 부르카를 착용한다. 탈레반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스며들 만한 토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탈레반 정권도 순식간에 민심과 국제적 지지를 함께 잃었다. 아니, 출발부터 자멸의 요인을 체화하고 있었다. 그 몰락의 DNA가 바로 반달리즘(vandalism)이었다. 문화재 파괴로 상징되는 반달리즘은 다른 문화와 섞이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말살하려는 게 본질이다. 그들은 2001년 로켓까지 동원해 아프간 내 불교 유적을 깡그리 파괴했다. 그해 9·11테러를 지휘한 알 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품고 있다가 미국의 침공을 받았다. 이 때 이슬람 국가들조차 탈레반을 동정하지 않았다. 탈레반은 율법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일삼았다. 여학교 폐쇄와 여성 사회참여 금지를 자행했다. 텔레비전 시청 등 유흥문화를 원천봉쇄, 원성을 샀다.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의 부활도 세속 문화를 뿌리뽑으려는 반달리즘이었다. 눈을 대선정국으로 돌려보자.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 두 유력주자 진영이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중”(김형준 명지대 교수)이란 지적을 받은 지 오래다. 이 후보 측이 “(대운하 비방 UCC 제작의혹과 관련)금품 게이트를 고백하라.”고 압박하면, 박 후보 측에선 “국정원과 내통, 추악한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맞받아친다.“후보 사퇴하라.”란 말이 예사이니,‘반달리즘 정치’라 해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여야가 격돌할 본선은 또 어떻겠는가. 상대 당의 노선을 단 한치도 인정하지 않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정치가 불 보듯 훤해 보인다.‘반(反)한나라당’ 이외엔 지향점이 다른 범여 주자들이 대통합을 부르짖고 있다. 그러니 재집권 의지보다 야당 집권 저지 의식만 두드러져 보인다. 이들의 지지도를 합해도 야권 빅2 후보의 그것에 못미치는 게 현 판세이다.“한방에 보낼 수 있다.”(이해찬 전 총리)는 호언에선 판세를 일거에 뒤집으려는 ‘비대칭 전략’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재래식 무기로 안 되면 ‘핵무기급’ 네거티브 공세로라도 야권을 초토화하려는 의지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선거에 지면 모든 것을 잃는 부박한 풍토 때문인가. 흑백논리와 결과에 대한 승복 거부가 한국정치의 속성처럼 됐다. 하지만 상대를 전면부정하는 반달리즘에서 벗어난, 통합의 정치가 시대정신임은 분명하다. 최근 각종 국민여론조사가 이를 말해준다. 이·박 간엔 권력분점의 대타협, 여야 간엔 어느 쪽이 이기든 정치보복을 않겠다는 선언 등 찾아보면 대안이 없지도 않을 듯싶다. 승자독식의 환상에 취한 주자들이 귀담아 듣기나 하랴마는….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염주영 칼럼] 농지제도 개혁 필요하다

    [염주영 칼럼] 농지제도 개혁 필요하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은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오랜 세월 우리 농업을 지배해온 이데올로기다. 지주의 가혹한 수탈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농민을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농업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지금에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우리 헌법은 경자유전을 농지제도의 기본원칙으로 선언하고 있다. 농지법은 그 헌법정신에 따라 농지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골자는 두가지다. 하나는 비농민의 농지 소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지의 전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것이다. 두가지 규제를 합치면 ‘농지는 농민만 소유하고, 농민은 농사만 지어라.’는 말이 된다.2005년 농지법 개정으로 규제가 일부 완화됐지만, 경자유전의 헌법 정신에 따라 본질적인 내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자유전이 지향하는 가치는 소중하다. 소유집중을 완화시키는 경제개혁이며, 부의 고른 분배를 통해 사회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농업도 여러 산업 가운데 하나이며, 산업인 이상 주변 여건이 달라지면 거기에 적응해 가야 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과거의 농업은 ‘수지 맞는 산업’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보호 받는 산업’이었다. 손해가 나더라도 정부가 보전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열심히 농사를 지어라고 했던 것이다. 정부의 농업 보호가 전제됐기에 ‘농지는 농민만 소유하고, 농민은 농사만 지어라.’는 정책이 가능했다. 그러나 전제가 달라지면 얘기는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서 농업은 ‘수지 맞추기 힘든 산업’일 뿐 아니라 ‘보호 못받는 산업’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손해가 나도 정부가 보전해 줄 수 없게 됐다. 그래도 ‘농지는 농민만 소유하고, 농민은 농사만 지어라.’고 할 수 있을까. 경자유전의 원칙이 지금도 농민의 이익과 합치된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농민을 농지에 붙들어 매는 것은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자유전의 원칙에 기반한 현행 농지제도는 대폭 개혁돼야 한다. 농지제도의 개혁은 농업의 존속 기반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추진돼야 할 것이다. 농업이 ‘보호 못받는 산업’으로 변했지만 농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농지를 가져야 하는가. 그 답은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농업경영인들이다. 그들에게 농지를 몰아 주어야 한다. 몰아주려면 내놓아야 한다.FTA 시대는 농업도 글로벌 경쟁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농지의 고른 소유보다는 집중과 선택이 유리하다. 농업도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규모화를 통해 대농을 키워야 한다. 새로운 농지제도는 단순한 ‘경자유전’이 아니라 ‘유능한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잠재력을 기대할 수 없는 농민에게는 퇴로를 열어 주어야 한다. 소유제한을 완화해 농지를 제값에 팔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특히 농지 전용을 폭넓게 허용해 농민이 자기 땅에서 도시의 선진자본·기술과 결합해 비농업 분야에서 소득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농지투기가 일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장치를 강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지제도가 FTA 시대에 맞게 시급히 개혁되기를 기대한다. 논설실장 yeomjs@seoul.co.kr
  • 이슬람권 평화활동가 시각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가 장기화되고 있다. 인터넷에선 ‘자업자득’이라며 피랍인들을 향한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 역할론과 책임론을 두고 ‘반미운동’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군사대응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가족들은 그때마다 피가 마른다. 이슬람권에서 평화활동을 해온 청년 운동가 두 명이 만났다. 안영민(36) ‘경계를넘어’ 활동가와 이동화(33)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두 사람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레바논 등 분쟁지역을 오가며 평화운동을 해왔다. 이동화씨는 최근 무슬림이 됐다. 피랍사태를 지켜본 두 사람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입말 그대로 옮겼다. ●“‘람보’ 기대하는 건 인질 죽으란 말” 이동화:“잘됐네”“이번 기회에 순교하면 되겠네”…. 피랍사실을 접한 많은 네티즌들 반응이 이랬잖아. 너무 놀랐어. 냉소를 넘어 거의 증오에 가까웠어. 안영민:국제평화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한국 기독교의 봉사활동을 두고 부정적인 평가가 많아. 타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 오직 ‘미전도 종족’이란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으니까. 이:내가 2005년 요르단에 머무를 때 정말 화났던 게 뭐였냐면 말야. 이라크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선교사들 중 일부는 한국 강남쯤 되는 곳에서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무슬림을 하찮게 보는데, 정말 기가 막히는 거야. 안:그렇다고 ‘너희가 선교하러 갔으니까 너희 책임이다.’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이:형 말이 맞아. 비판할 건 비판해야겠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잖아. 지금은 비판보다는 생명을 걱정하는 게 우선이니까. 안:더 심각한 건 군사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인데, 납치된 사람들이 미국인이나 프랑스인이었어도 그런 말이 나왔을까. 아닐 거야. 하지만 실제 군사작전 가능성이 있다는 게 문제야. 지금은 말뿐이지만, 상황이 장기화돼서 더 이상 기다려도 소용없다고 판단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밀고 들어갈 수도 있어. 이:미국은 그렇다 치고 한국 네티즌들이 군사작전 운운하는 게 더 놀랍지. 할리우드 인질구출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현실에서 람보를 기대하는 건 말 그대로 ‘인질 다 죽어라’잖아. 안: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미국 책임론’을 반미로 몰아가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지? 사실 아프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잖아. 사람 목숨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더 걱정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이:정부 협상력이 제대로 안 통하는 거 봐. 벌써 두 사람이 죽었어. 사람들이 미국을 거론하는 건 미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지금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인 데 말이야. ●“국내 무슬림 희생양 돼선 안돼” 안:언론에도 아쉬운 점이 있어.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한가로운 요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미국이 아프간에 들어간 이유가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때문이란 사실, 한국인은 두 명이 죽었지만 그간 미국과 나토군의 폭격으로 죽어간 아프간 국민이 수만명이었다는 사실 등도 한번쯤 보도해줬어야 하지 않을까? 이:속보도 중요하지만 아프간 정부-탈레반, 아프간 정부-미국, 탈레반-미국 간의 역사·정치적 배경을 함께 짚어줬다면 독자들이 피랍사태의 전후 맥락을 좀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안:얼마 전 부산에서 술 취한 사람이 이슬람사원 유리창 깨고 그랬다면서? 무슬림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이:내 무슬림 친구들이 정말 우려했던 게 바로 그거야. 왜 한국 사람들은 탈레반을 무슬림과 동일시하냐고 그래. 자기들도 탈레반이 싫고, 아랍권에선 탈레반을 무슬림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억울하다는 거야.‘우린 한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와서 깽판을 쳐도 한국 사람 전체를 욕하진 않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탈레반의 행태를 두고 이슬람 전체를 욕하냐’는 거지.9·11사태 이후 ‘무슬림=테러, 코란=칼’로 각인된 이미지 탓이 크다고 봐. 안:탈레반은 정말 나쁜 짓 많이 했지. 사람도 많이 죽였고, 여성 인권도 억압했고. 하지만 탈레반은 무슬림의 일부분일 뿐이야. 언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이슬람 극단주의자’‘원리주의자’‘근본주의자’란 표현인데, 자꾸 이 부분만 부각되니까 결국 이게 전부인 것처럼 되는 거야. 이:2003∼2004년 이라크 전쟁 때 현지에 있었는데, 더 이상 최악일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평안한 거야. 도대체 알 수 없는 평안의 정체가 뭘까 궁금했어. 결국 찾은 답이 무슬림이란 종교였어. 난 총도 안 쏘고 폭탄도 안 터지는 한국에서 늘 머리가 깨지는 듯 했는데…. 내가 무슬림이 될 수 있었던 건 내가 그들의 실제 삶을 봤기 때문이야. 안:아프간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를 한국에 많이 전해야겠다고 생각해. 이슬람제국 건설이 아닌 여성인권과 민주주의를 원하는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까 자꾸 오해가 생긴다고 봐. 그 오해를 없애는 게 우리 할 일이기도 하고. 정리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성윤석 시집 ‘공중묘지’

    성윤석 시집 ‘공중묘지’

    쇠뜨기, 바랭이, 쑥부쟁이가 무연묘(無緣墓)를 뒤덮었다. 비석도 상석(床石)도 없다. 활개도 축대(築臺)도 없다.10년이 지나도 찾는 이 없고, 묘적부에서도 지워졌다. 바람 불어 초록 풀씨 날리면 묘지는 수풀 속에서 형태마저 잃는다.‘더욱 버려져’ 마음 아린 무연묘에 시선을 주며 쓸쓸해하는 이, 성윤석(42) 뿐이다. 성윤석은 경기도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관리인 생활을 시작하고도 2년이 지나서야 놓았던 펜을 다시 들 수 있었다.25살 대학 4학년(1990년) 때 등단했고,31살(1996년) 때 첫 시집(‘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을 냈던 시인.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민음사)가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렸다. ‘공중묘지’는 죽음으로 꽉 차 있다. 썩은 시체 눈알이 굴러 떨어지고, 시즙(屍汁)이 뚝뚝 흐른다. 몸에서 막 빠져나간 영혼은 ‘사랑해서 생긴 약점’(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맘에 걸려 세상을 떠돈다. 시집에 내리 깔린 죽음의 이미지엔 시인이 보낸 가혹한 시간이 더해졌다. 11년 동안 그는 신문기자와 공무원을 거쳤고, 사업에 실패했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동생이 죽었고, 충격받은 어머니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몸의 평형기능을 상실하는 ‘양성발작성변환이석증’에 걸려 시인의 눈은 환상을 봤다. 지하철을 타면 두 다리가 공중에 붕붕 떴고, 눈 옆으로 꽃이 폈다. 밤마다 하얀 원피스 입은 소녀가 미간을 스쳐갔다. 묘지 앞에서 만난 시인은 “공포스러운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묘지에 와서야 공포를 떼어내다 시인은 그 공포를 무심한 언어로 옮겼다.“어머니는 기절했으며 / 조문객들은 낄낄대며 술추렴을 했다”(‘아우가 죽었다’)고 썼고,“미쳐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늦은 밤”에 “가끔 뒤로, 뒤로 / 정신의 불빛이 나가 버리곤 한다”(‘1과 8사이엔 무엇이 있나’)며 전정기관 망가진 자신을 관조했다. 공포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객관화할 수 있었던 건 살아 움직이는 것 없는 공중묘지, 온갖 버려진 것들의 집결지에 와서야 가능했다. “목매러 왔다 줄만 매달아 놓고 간 사람, 미혼모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아이 시체, 묘지를 떠도는 애꾸눈 애완견…. 묘지의 살아있음이 눈에 보이면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인 묘지에서 도리어 이야기는 살아나더군요.”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며, 묘지 인부들마저 침 뱉으며 멀리하고, 까마귀떼만 날아오르는 공중묘지가 이제 시인에겐 일상이자, 밥을 벌고, 삶을 구하는 터전이 됐다. 늙은 산역 작업부가 “자네 이제 묘지 관리인이 다 되었네”(‘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라고 할 만큼 ‘내공’ 쌓인 그는 죽음 가득한 행간에 생의 의지를 꼭꼭 숨겼다. 공중묘지는 죽어 떠도는 영혼이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안식처(‘공중묘지 6’)이자, 시체의 자양분을 찾아 산마가 무덤 밑으로 끝없이 뿌리 뻗는 곳(‘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이다. 생명이 부글거리는 공간(‘알박기’)이다.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그란 무덤 속 / 아버지의 살점을 자양분으로 / 살모사는 새끼를 낳자마자 죽고 낳자 죽고 / 두더쥐와 굼벵이와 들쥐와 구더기는 아버지의 / 평생 속고 속아 썩어 문드러진 가슴께에서 / 햇빛처럼 떨어지는 생을 향해 / 부글부글거리겠지.”(‘알박기’) 시인은 “이승의 끝인 공중묘지에서 삶을 긍정함으로써 신산한 인생들이 겪어온 아픔을 치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묘지 관리인으로 활동하며 창작 ‘공중묘지’에 실린 58편의 시적 밀도가 모두 균일한 건 아니다. 묘지 관리인으로 일하며 쓴 최근 시들(1부)의 압도적 정서에 비해, 과거 젊은 날에 쓴 시들(2∼3부)은 다소 성긴 게 사실이다. 그 간극의 차이를 시인은 “영화처럼 꿈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지금은 인생의 속살이 찬란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성윤석은 용미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도 공포가 아닌 평생 붙들고 씨름하고픈 화두가 됐다. 온갖 ‘아름다운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저 바깥 세상, 그곳이야말로 거대한 공중묘지임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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