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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교육자의 태극기사랑/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국기를 바라보며…조국은 잃었으나,너만은 잃지 않고 광복의 앞날을 위하여 나의 애국지성을 바치겠다고 되새겨 다짐하였다’. 어느 저명한 교육자가 약관일때 국권이 피탈되자 태극기를 땅속에 묻을 생각을 굳히고 이러한 애국적 의지를 표했다.그는 ‘나는 남몰래 널빤지와 못을 얻어 손수 만든 조그마한 나무상자에 고이고이 접어서 넣은 국기를 장롱속에 깊숙이 간직하였다.기회있을 때마다 장롱속을 엿보던 나의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조국애의 그리움이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30대 초반으로 손수 설립한 동원(동덕)여학교의 교장이었다.사회저명인사가 된 그 분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 장롱속에 숨겨둔 국기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장독대 밑을 파고 국기상자를 달밤에 은닉하였다.얼마뒤 묻어 둔 국기상자를 파내 보니 나무상자는 퇴색하고 뒤틀려서 국기만 꺼내 다시 정성스레 함 속에 보관하였다. ○국기만 지닌채 피난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함 속의 국기를 꺼냈다.햇빛을 못본 국기는 좀이 먹어구멍이 뚫렸으나 형체는 그대로였다.‘나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국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엎드렸다’고 그는 소감을 피력하였다.그리하여 곧 학교로 달려가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고 독립만세를 서울이 떠나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남북분단 속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서울이 남침 3일만에 붉은 군대에 짓밟히자,그는 다시 국기를 숨겨야 했다.국기를 옷속에 넣어 꿰맨 후 괴나리봇짐 속에 넣어 생명같이 모시고 어루만지며 9·28 수복을 기다렸다.1·4후퇴(1951)때는 가재도구 속에 국기만 넣어 부산으로 피난갔다. 이 태극기는 1908년 춘강 조동식(1887∼1969)이란 교육자가 손수 제작해서 눈물겨운 정성을 쏟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금년 그 국기의 나이는 90인 것이다.약 1세기 가까운 긴 세월 속에 천도 낡고 좀먹은 구멍도 있는 그 국기는 헝겊으로 꿰매져서 지금은 동덕여대 박물관에 액자로 모셔져 있다. 이 국기야말로 고난·역경과 애국의 상징으로,춘강이 서거한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요즘도 위용과 광채를 발하고있다.이 태극기는 가로 174㎝,세로 160㎝ 규모의 견직으로 제작되었는데,국권피탈 이전(1908)에 제작되어 국가 상징물로서,그리고 한 애국인사의 지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사랑 강인한 집념 마침 소장자쪽에서 그 국기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검토해줄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요청하여 문화재전문위원인 필자가 그 곳을 방문,조사한 일이 있었다.그 국기를 보고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춘강의 태극기는 태극이 청색이 아니고 검정색이며 건곤감리의 순서도 지금의 표준형과는 다른 양상이다.그렇지만 교육자 춘강의 숨은 애국의지,독립정신,나라사랑의 강한 집념을 읽어볼 수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춘강의 국기는 국가상징물로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겠다.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의 아름다운 나라사랑의 삽화인 것이다.
  • 印尼 韓人 ‘엑서더스’/어제 331명 귀국

    ◎항공사 운항 대폭 늘려 인도네시아 교민들이 폭동사태를 피해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17일 상오 7시 인도네시아 교민 331명과 외국인을 포함,승객 358명이 자카르타발 대한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8일 430명,19일 403명이 귀국 항공편에 예약했으며,주 자카르타 한국대사관과 여행사 등에도 귀국 예약문의가 폭주하고 있다. 교민들은 “인도네시아 사태가 수그러들고 있으나 오는 20일 ‘민중봉기의 날’ 행사가 예정돼 있어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면서 “교민들은 대부분 가재도구를 그대로 둔 채 몸만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는 현재 1만5천여명의 교민이 남아있으며 생필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카르타∼서울간 여객기를 주 4회 운항하고 있는 대한항공은 이 날부터 운항횟수를 7회로 늘렸다.
  • 세금징수 노려 ‘장마당’ 활성화

    북한은 최근 세금징수를 목적으로 ‘장마당’으로 불리는 농민시장을 활성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시 군등 지역별로 1개 지역을 지정하고 장마당을 열어 일정수의 판매대를 설치한 후 모든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있으며 특히 국경지역 장마당에서는 조선족 등 외국상인들에 대해서만 세금을 걷고 있다고 내외통신이 보도했다.장마당의 거래 품목은 원칙적으로 농산물에 한하도록 돼있으나 90년대 들어 술 의류 신발 가재도구 등 거래상품이 확대되기 시작해 최근에는 전문적인 장사꾼까지 등장,돈이 될만한 물건은 무엇이든지 내다팔고 있다는 것.평양시내의 대표적인 장마당인 송신농민시장은 주체사상탑에서 약 1㎞ 정도 떨어진 송신입체교차로 아래 교각 주위에서 개장되고 있는데 2∼3년전부터는 매일장으로 바뀌어 열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앤드류 잭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4)

    ◎미 영토 확장 크게 기여한 전쟁영웅/개척농민 유복자로 변호사·의원·대법판사도/귀족정치서 대중정치시대 연 첫 서민대통령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미국의 7대 대통령(1829­1837) 앤드류 잭슨은 미합중국 정치문화에 ‘대중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이른바 ‘잭소니안시대’을 전개시킨 대통령으로 전 미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6명의 전직 대통령이 버지니아,매사추세츠 등 동부 출신의 대농장주 후손으로 좋은 정규교육을 받은 ‘신흥귀족’ 출신이었던데 반해,그는 가난한 개척농민의 유복자로 통나무집(log cabin)에서 태어났으며 정규학교라고는 문턱도 밟아본적이 없었다.그 때문에 첫 ‘서민대통령’으로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되어 대통령에 오른 잭슨은 대통령직 자체를 ‘최고의 지위’라기 보다는 ‘일할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그는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으며 미국 정치사에서 현대적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시킨 대통령으로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강인함 또는 단단함의 상징인 히커리나무에 비유되어 ‘올드히커리’(Old Hickery)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올드 히커리’ 애칭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67년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노스 캐롤라이나의 시골에서 태어난 잭슨은 태어나기 직전 아버지의 병사로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됐다.성질이 급하고 거친 그는 싸움질을 일삼아 아들을 목사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할 정도 였다. 장로교 목사로부터 가까스로 글을 깨친 그는 14세때 독립군 민병대에 가담,소년병으로 영국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잭슨은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이듬해 영국군에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그러나 적개심에 불타던 그는 구두를 닦으라는 영국군 장교의 명령에 불복,그로부터 칼로 머리를 맞아 깊은 상처를 얻게 됐다.그는 평생동안 그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다녔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온 그는 솔리스베리의 한 변호사 밑에서 법률공부를 시작,20세때인 178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며 이후 테네시주 내슈빌로 옮겨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96년에는 새로 주로 승격된 테네시주의 연방하원의원에 선출됐으며 이어 상원의원,테네시 대법원 판사를 역임했다. 그의 호전적인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1812년 미합중국의 선전포고로 영국과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였다.4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병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한 잭슨은 인디안과의 전투에서 연승,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군 중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서남부 전체 미군의 지휘권을 얻게 됐다. 잭슨은 플로리다 펜사콜라 전투에서 승리,플로리다를 장악했으며 15년 겨울,뉴올리언스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영국군과 미군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전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사령관을 포함한 2천600명의 사망자를 낸 반면,미군은 단지 8명의 사망자만 냈을 뿐이었다. ○영군과 전투서 대승 세계 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방적 승리로 기록된 뉴올리언스의 승전은 영국민에게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다.그동안 군사력 열세에서 유럽 강대국들에 소극적 대응을 해오던 미국은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국제사회에 독립국가로서의 위력을 과시하게 됐던 것이다.지금도 뉴올리언스 시가지 한복판에는 포효하는 말에 탄 그의 동상이 높이 서있다. 이같은 그의 업적은 그를 자연스레 1824년 새로 태어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부상시켰다.잭슨은 1차투표에서 승리했으나 과반수에 미달했고,2차투표에서 정치적 흥정에 의해 존 퀸시 아담스에게 고배를 들고 말았다.그러나 잭슨은 4년후 다시 도전,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됐다. ○첫 암살대상자 기록도 잭슨은 작은 정부를 강조하면서 정부와 국민이 어떻게 하면 가까와질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율의 관세제도를 개혁,관세율을 낮추었으며 예산절감을 통해 연방예산의 잉여분을 주정부에 골고루 이월할 것을 제안했다.따라서 그는 연방정부가 공공복지사업이나 건설사업 등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반대했다.정부의 지나친 부채는 국민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까지 주장했다.이같은 국민편에 선 통치는 그의 재선을 무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잭슨은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많은 시행착오도 일으켰다.친구들을 요직에 등용,‘주방내각’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보인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특히 그는 이혼녀인 부인 레이첼을 따라다니는 악의적 소문에 대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그 문제로 대통령이 되기전까지 많은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곤 했다.그는 또 1935년 실패로 돌아갔지만 암살기도가 발생,역대 미대통령 가운데 처음 암살대상이 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의 주요 업적으로는 ▲영토의 확장 ▲귀족정치에서 대중정치로의 전환 ▲연방정부의 부채청산으로 건전재정 확립 ▲부패한 연방은행의 규제제도 확립 등이 꼽히고 있다.대중정치의 확립은 라이딩스의 미대통령 랭킹에서 잭슨은 42명 가운데 비교적 높은 8위에 랭크되고 있다.그는 69세 대통령을 퇴임하여 자신의 농장인 내슈빌 교외의 허미티지에서 78세로 숨을 거둘때까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잭슨 유적지 ‘허미티지’/평생 가꿔온 사저… 테네시주 내슈빌 위치/55만평에 정원·교회·농장·후손들의 집도 【내슈빌(미테네시주)=나윤도 특파원】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유적지로 지정된 ‘허미티지(Hermitage)’는 잭슨이 평생을 가꿔온 사저로 컨트리뮤직으로 유명한 테네시주의 주도,내슈빌에 위치해 있다. 외딴집이라는 의미의 허미티지는 55만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에 잭슨과 그 가족이 기거하던 맨션을 중심으로 부인 레이첼을 위해 만든 정원과 교회,후손들의 집 등 각종 부속건물과 농장으로 돼있다.비지터센터 뒤에 위치한 맨션에는 잭슨 생존 당시의 실내장식과 함께 가재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18세기말∼19세기 중반에 이르는 당시 미국 상류사회의 생활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터는 잭슨이 내슈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1804년부터 조금씩 구입해 모은 것으로 오늘날의 형태가 갖춰진 것은 대통령 재임중인 1833년 무렵이며 37년 대통령 퇴임후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허미티지는 워싱턴 교외에 위치한 조지 워싱턴 사저인 마운트버논과 함께 미국내 대통령문화 보존의 한 본보기로 유명하다.1889년 애미 잭슨에 의해 창립된 허미티지부인회에 의해 보존되고 운영되고 있으며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이 부인회는 내년 2월 창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다. 애미 잭슨은 자식이 없던 잭슨 대통령 양아들의 아들인 잭슨3세의 부인이다.그녀는 45년 잭슨 사망후,수십년 동안 역사적 장소가 일부는 팔려나가고 퇴락해가는데 안타까움을 느낀 끝에 허미티지부인회를 결성,유적지키기에 나섰던 것이다. 30년 앞서 결성된 마운트버논부인회와 함께 허미티지부인회는 남자들이 남북전쟁의 와중에서 전쟁에 휩쓸려 있는 동안 부인들의 힘으로 문화유적을 지켜낸 훌륭한 본보기로 남아 있다.
  • 인니 군 시위대에 발포/자바섬 로사리시

    ◎4명 부상… 물가폭동 새 국면 【자카르타 AP AFP 연합】 인도네시아 도시 곳곳에서 13일 생필품 가격 폭등에 항의하는 소요사태가 발생,상점이 파괴되고 물품들이 불태워졌으며 일부 도시에선 치안군의 발포로 시민들이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200㎞ 떨어진 자바섬의 로사리와 게방 두 도시에선 이날 수천명의 시위대가 물가폭등에 항의,중국인 가게에 돌을 던지고 상품에 불을 질렀으며 일부 군중들은 중국인 주택의 가재도구를 끌어내 거리에서 불태우기도 했다. 특히 3천여명이 운집해 최대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로사리시에선 치안군이 시위대에 발포,4명이 총상을 입었다고 주민들이 전했다. 주민들은 치안군이 3시간 동안 계속된 시위를 해산하기 위해 발포했으며 최소한 4명이 총상을 입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고 말했다. 파마누칸시에선 서자바주의 군과 경찰병력이 투입돼 시위가 진압될 때까지 1천여명이 10시간 넘게 시위를 계속했다.
  • 설악산 백담사/눈꽃 만발한 산사엔 만해의 체취(테마 탐방)

    ◎계곡 곳곳엔 작은연못·기암괴석 즐비/폭설잦은 2월이후가 설경 즐기기에 제격/대청봉까지 영산담·황장폭포 등 절경 연속 【백담사=임태순 기자】 아무리 심산유곡의 산사라도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전세계에 기상이변을 일으키고 있는 엘리뇨는 설악에서 가장춥다는 백담계곡에도 찾아왔다. 예년 같으면 낮에는 영하 7∼8도,밤에는 영하 12∼13도까지 떨어지던 수은주가 올해는 낮기온이 영하 2∼3도,밤기온이 영하 7∼8도로 누그러졌다. 여전히 영하권이지만 살을 에는 추위와는 거리가 있다. 그 때문인지 신년 연휴인 지난 1,2일 조용하던 산사는 갑자기 붐볐다. 정초를 맞아 설악을 찾은 나들이객들이 자녀 또는 연인들의 손을 잡고 백담계곡을 찾았기 때문이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수렴동 계곡을 지나 대청봉에 이르는 백담계곡은 설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짜기다. 그래서 가을이면 단풍에 취하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백담은 설악계곡 가운데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야영장,가계가 없는데다 여름에 계곡에 뛰어들면 벌금을 물릴 정도로 철저히보호 되고 있기 때문이다. IMF의 한파는 백담사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방은 한기가 느낄 정도로 썰렁하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도 내방객의 요청이 있으면 문을 열어 주지만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 있다.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서다. 백담사 큰스님은 “나라에 돈이 없다는데 우리라고 호광스럽게 지낼수 있어”라며 “어째 나라가 이 지경까지 됐어”하며 혀를 찬다. 백담계곡은 봄,여름,가을,겨울 사시사철이 다 좋다. 제격으로 치면 불타는 단풍이 울창한 수림과 철철 넘쳐나는 계곡,기암절벽과 어울리는 가을이 으뜸이다.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요란스럽게 물이 흘러 가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것을 알리는 봄,무성함으로 무더위를 느낄수 없게 하는 여름의 청량감도 빼놓을수 없다. 그러나 봄부터 가을의 영광을 뒤로 하고 알몸으로 다가오는 겨울의 스산한 정경도 만만치 않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까지는 7㎞의 완만한 산길. 왕복 3시간 거리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중턱까지 마을버스가 운행되지만 겨울에는 쉰다. 마을버스로는 응달진 곳의 빙판길을 다닐수 없기 때문이다. 계곡으로 들어서면 온 산을 빽빽히 채워주던 수목들은 모두 옷을 벗었다. 나목의 골짜기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할퀴고 지나간다. 계곡 곳곳에는 흰 눈사이로 듬성듬성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다. 못(지)이 100개나 된다는 이름그대로 계곡을 끼고 두태소,거북바위,청룡담,은선도 등 조그만 소와 기암괴석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타난다. 가쁜 숨을 고르고 나면 수심교를 배경으로 백담사가 보인다. 만해가 입산한 곳이다. 좌우측에 만해 기념관과 교육관이 서 있다. 여름이면 교육관에서는 만해 시학교가 열린다. 그 사이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 화엄실이라는 간판으로 서 있다. 조선시대의 시인 김시습이 시를 써서 흘려보냈다는 관음암 앞에는 선원이 들어섰다. 바로 무금선원이다. 말 그대로 현재가 없으니 과거가 있을리 없다. 봄이 되면 정식으로 문을 열 예정인데 입방하면 6년간 나올수 없다고 한다. 물론 득도를 하면 더 빨리 나올수 있고 반대로 깨닫지 못하면 늦게 나올수도 있다. 백담계곡을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백담사까지만 둘러본뒤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계곡의 진수는 바로 백담사부터다. 백담사 큰스님은 대청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은 백담까지는 반석위로 흐르지만 백담사를 지나면 바위 밑으로 흐른다고 말한다. 하류로 갈수록 자갈이 흘러내려 쌓이기 때문이다. 백담에서 대청으로 향하면 영산담,황장폭포,구융소,사미소,옥녀봉 등이 줄지어 늘어선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목과 바위 등은 묘한 흡인력으로 사람을 끈다. 대청으로 가까와지면 바람도 얼어붙어 나무에는 눈꽃이 핀다. 백담에서 설경을 즐기려면 2월 이후가 안성마춤이다. 먼 남쪽에서 봄이 기지개를 켜는 2월∼3월에 며칠씩 폭설이 내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 백담은울기 시작한다고 한다. 계곡의 얼음장이 쩍쩍 갈라지고 바람도 심해진다. 겨울백담은 이렇게 봄을 맞는다. ◎탐방포인트/수심교아래 돌탑 새명물로 각광/연인·친구끼리 찾아와 사랑·우정 확인/계곡물 불어 무너져도 금세 다시 쌓여 백담사로 통하는 수심교아래 개울에는항상 돌탑이 서 있다. 백담사를 찾은 사람들이 하나,둘 쌓아 놓은 것들이다. 돌탑을 영상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찾아올 정도다. 연인 또는 친구와 한장 한장 쌓아 올린 돌탑이 절이라는 분위기와 어울려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곳 스님들은 여름철 장마비가 퍼부어 냇물이 불어나면 돌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돌탑은 곧 또다시 생겨난다고 말한다. 뒤에 오는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한장 한장 정성들여 돌탑을 쌓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성황당에 돌을 얹어 놓았다. 뒤따르던 사람들도 돌을 얹어 성황당 주변에는 항상 돌탑이 서 있게 됐다. 성황당에 돌을 얹는 것은 앞서 간 사람과 뒤에 올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이정표라고 할수 있다. 서로 얼굴을 모르지만 두사람은 돌을 하나 얹으면서 따뜻한 정을 나눈다. 이러한 풍습은 백담사의 돌탑으로 이어졌다. 백담사의 돌탑은 마음의 정을쌓고 싶은 현대인의 소외,고독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백담사의 돌탑은 오늘 무너져도 내일 또다시 쌓아진다는 것이다. ◎전두환씨 부부 머물던곳/이불·촛대 등 당시 가재도구 보본/호기심 많은 관광객 눈길 끌기도 백담사는 만해와의 인연을 강조하지만 이 곳을 찾은 일반인들은 전두환 전대통령부부가 생활했던 만해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최근 전,노태우 두전직 대통령이 수감생활을 하다 풀려난 것을 감안하면 전직 대통령의 ‘정치적 유배’는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두사람이 생활했던 조그만 방은항상 붐빈다. 아마 호기심과 현장확인 욕구 때문일 것이다. 즉 한때 절대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생활을 했고 그 현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일 것이다. 두사람이 2년1개월 동안 지냈던 방은 잘 보존돼 있다. 이불,촛대,빛 바랜 서랍장 등 가재도구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마루에는 백담사에서 지낼 때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로 나뉜다. 과거에 비해서는 적어졌지만 침을 뱉거나 벌을 더 받아야 한다는 등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부류가 있다. 전직 대통령이 저런 곳에서 생활했구나 하며 무더덤하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의 풍화작용 때문인지 후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고 한다. 백담사측은 잘못된 것도 역사이기 때문에 현장을 보존,공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 대구 40대 소비자파산 선고/두번째

    ◎“고엽제 후유증으로 노동력 상실” 대구지법 민사30부(재판장 박태호 수석부장판사)는 10일 신용카드거래대금과 은행대출금 등으로 3천5백만원의 빚을 지자 소비자파산을 신청한 박모씨(41·대구시 중구 봉산동)와 동거녀 곽모씨(39)에 대해 “이유가 있다”며 파산선고를 내렸다. 소비자파산 선고는 지난 5월 서울지법서 K대 이모 교수의 부인 현모씨(40)에게 내려진 이후 두번째로 앞으로 소비자파산신청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채무자들은 재산이라곤 임차주택 보증금 5백만원과 가재도구,25만원의 전화가입권만 있을 뿐이고 지방세를 납부한 실적도 없다”며 “특히 채무자 박씨는 월남전 참전 이후 고엽제 후유증으로 일하기 어려워 빚을 갚을수 없는 상태”라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 한밤 가정집에 불/일가족 3명 숨져

    1일 상오 4시 30분쯤 전북 익산시 황등면 차상리 차하마을 신현옥씨(32·석공) 집에서 불이 나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잠자던 신씨의 아내 안영진씨(33)와 아들 호철군(6),딸 호연양(2)등 일가족 3명이 불에 타 숨졌다. 불은 한옥 건물 내부 15평과 가재도구 등을 태운뒤 50여분만에 진화됐다.
  • 남산골 공원/도심속에 재현된 600년전 서울

    ◎2만4천평 규모의 시민공원 조성/타임캡슐광장­생활문물 600점 매장… 2394년 공개/전통정원 조성­향토수중 식재… 옛남산 정취가 물씬/한옥마을 복원­민속적 가치 높은 한옥 5채 재건립 서울은 도읍지가 된지 600년이 넘었지만 ‘역사속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경복궁,비원 등 일부 고궁과 남대문,동대문 등의 유적이있지만 전체적으로 유구한 역사에 비해서는 빈약한 감이 없지 않다.보존보다는 허물고 새로 짓는데 길들여진 탓이다. 내년 봄이 되면 서울 남산에 서울의 과거,현재,미래를 볼수 있는 곳이 들어선다. 중구 필동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 2만4천여평에 조성되고 있는 남산골 공원이 바로 그 곳.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한옥마을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공원은 타임캡슐광장,전통정원은 이미 조성이 끝났고 한옥마을은 거의 마무리단계에 와있다. 남산골 공원의 상층부에 위치한 타임캡슐광장은 서울의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서울 시민들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문물 600점이 지하 15m에 매장돼 있다.서울 정도 600주년인 지난 94년 11월29일의 일로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타임캡슐은 정도 천년이 되는 2천394년에 공개될 예정이다.그래서 분화구모양으로 된 광장의 회랑을 거닐면 600년전과 400년뒤가 함께 느껴져 상념에젖게 한다. 타임캡슐광장에서 내려오면 전통정원과 마주친다. 남산의 산세를 살리기 위해 구릉지와 계곡을 완만하게 조성한 이 정원에는 소나무 등 향토수종이 주로 배치돼 있으며 느티나무,수양버들 등이 뒤를 바치고 있다.옛 남산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 골짜기도 인공적으로 조성해 놓았다.하류의 연못에서 물을 끌어올려 계곡으로 방류하는데 내년 봄부터 가동될 예정이다.골짜기 중턱에는 수필집을 통해 청렴,결백으로 상징되는 남산골선비의 모습을 일깨워준 일석 이희승 선생의 추모비가 서 있다. 또 구불구불한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면 꿩과 까치가 양지바른 곳 잔디밭에서는 한가롭게 뛰노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곳곳에 정자가 있어 발걸음을 쉬게 한다.전체적으로 번잡하지 않고 고즈넉한 분위기여서 도심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곳이 전통한옥 복원지역.2천400여평에 형태가 독특하고 원형을 잃지 않아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정규엽가옥 등 5채가 복원되고 있는데 11월1일 현재 92%의 진척도를 보이고 있다.올 연말까지면 벽지,천정,장판,창호지 마감작업 및 마을 공동광장 마사토 포장이 모두 끝나게 된다. 이와 함께 내년 3월까지 가옥 내부에 장롱,문갑,뒤주 등 전문가의 고증을거쳐 제작한 가재도구를 배치할 예정인데 현재 75%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한옥촌이 문을 열면 침선,공예,민화교실과 서당 등 다양한 취미강좌가 개설돼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게 된다. 한편 한옥촌 초입에 있는 공예전시관은 이미 공사가 끝났다. 이곳에서는 나전칠기 전통매듭 등을 만드는 방법이재현되고 각종 공예품도 판매된다. 공예전시관 앞 빈터는 소극장으로 활용될 예정이다.소극장은 누각과 연못을 마주보고 있어 널뛰기 그네뛰기,윷놀이 등 민속놀이와 전통혼례식을 개최하기에 적격이다. ◎남산골 공원지역 유래/조선시대 벌칭 청학동… 시인 묵객 많이 살아/1730년경 군대첫 주둔… 이후 군사용 활용 남산골 공원이 조성되는 곳은 옛부터 시인 묵객이 많이 살아 조선시대에는 청학동이라고 불려져 왔던 곳이다. 도교에서 청학은 영생하는 학을 말하는데 경치가 절경인 곳에서 산다.이곳이 청학동이라고 불린 것은 청학이살만큼 산수가 좋았기 때문이다. 빼어난 산수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을 끌어 모운다. 조선조 초기 좌의정을 지낸 용재 이행은 이곳에 천우각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여름철 더위를 피했다.그는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면 찾았을 정도로 시에 능했다.또 그의 증손자인 이안눌도 시문에 뛰어났다. 남산은 수도 서울의 중앙에 있는 산이다.시민들의 쉼터도 될수 있지만 군사목적으로 이용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조선초 태조가 인왕산,남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축조한 것이라거나 봉수대로 활용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남산골 공원이 군사용으로 활용된 것은 한참뒤의 일이다.영조때인 1천730년대 조정은 이곳에 139칸의 집을 짓고 수도 서울을 지키는 남별영이라는 군대를 주둔시켰다.얼마전까지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묘한 인연이다. 일제시대에는 헌병대사령부가,해방후에는 수경사가 들어서 지난 94년까지 주둔했다. 남산골 공원에 가는 방법은 지하철 4호선 충무로 역에서 내려 ‘한국의 집’쪽으로 가면 된다.공원내에 주차장이 없기 때문이다.전통 한옥촌은 공사가 한창이지만 이미 완공된 타임캡슐광장과 전통정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여유있게 구경할 수 있다. ◎복원예정 한옥 5채의 특징/정규업 가옥­순종때 지은 왕제사 행차용 집/이진승 가옥­철종때 부마 박영효의 개인집/서용택 가옥­정문 계단 난간석은 미의 극치/김홍기 가옥­안채∼사랑채 연결한 사대부집/조흥은 가옥­유리문 등 개량한옥 양식 도입 서울시내에 산재해 있다 남산골로 이전 복원되는 5채의 한옥은 모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동대문구 제기동 정규업 가옥은 조선 순종의 처삼촌인 윤덕영이 왕의 제사행차때 편의를 돕기 위해 지은 제사가옥이다.위에서 내려봤을때 사당을 정점으로 가옥구조가 으뜸 원꼴을 하고 있으며 목재는 경운궁을 헐면서 나온 홍송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경인미술관에 있던 이진승가옥은 조선말 철종때 영혜공주의 사위 박영효의 집으로 서울 8대가 중의 하나다.부엌과 안방이 일자로 남향하고 있으며 서울에서 보기 힘든 개성지방의 주택양식이다. 종로구 옥인동 서용택 가옥은 조선말 순종 윤비의 저택이었다고 전해진다.이 가옥은 정문 계단 양쪽의 난간석이 매우 아름다운 구한말 최상류층의 가옥이다. 종로구 삼청동 김홍기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전체적으로 연결돼 있다.사대부의 가옥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조선말기 서민주택의 양식을 볼수 있다. 중구 삼각동 조흥은행 관리가옥은 전통적인 안채와 별당채를 갖추면서도 유리문 등 개량한옥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지붕의 한쪽이 길고 한쪽은 짧은 특이한 양식을 띠고 있다. 서울시는 당초 이들 한옥을 뜯어 남산으로 옮겨 복원하려 했으나 70% 정도는 새 것으로 교체했다.대부분 지은지 100∼200년이 지나 목재의 상당부분이 썩거나 안전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그러나 외국산 소나무를 전혀쓰지 않고 강원도 강릉과 설악산에서 소나무를 벌채,6개월간 건조시켜 사용했다.
  • 촛불기도하다 집 전소/박아름양 돕기 줄이어

    지난 28일 ”어려운 환경을 이기게 해달라”며 촛불기도를 하다 불이 나 집을 잃은 소녀가장 박아름양(14·광주 금호중1년)을 돕기 위한 성금과 문의전화가 답지하고 있다.〈서울신문 29일자 23면보도〉 송언종 광주시장과 이정일 광주서구청장은 29일 박양집을 방문,격려하고 위로금 1백만원과 50만원씩을 각각 전달했다.광주 서구청 사회과에는 독지과로부터 “박양을 돕고 싶으니 은행계좌를 알려달라”는 전화문의가 잇따랐다. 박양은 교통사고로 왼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어 1급 지체장애자가 된 아버지(40),오빠(16)와 구청에서 지급하는 생계보조비로 12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아오다 화재로 집과 가재도구를 모두 잃었다.
  • 혜산의 농민시장(김정일의 북한:11)

    ◎대부분 열흘장… 80년대부터 허용/장세내면 누구나 참여… 농산물로 품목 제한/밀가루에 석회분 섞고 저울눈 속여 팔기도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장백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 양강도 혜산시 북쪽의 한 골목길.300여m쯤 돼 보이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상오 8시쯤부터 짐을 실은 손수레를 끌거나,보따리를 머리에 인 북한 주민들이 한두사람씩 모여들었다.30분쯤 지나자 주민들이 100여명으로 불어나며,자신의 좌판위에 각종 물건을 벌여놓기 시작했다.북한 주민들의 생존기반인 장마당(농민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간이 이발소까지 등장 장마당 한켠에서는 머리를 깎아주는 간이 이발소까지 등장했다.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흥정을 벌이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구경만하다가 발길을 돌릴뿐,거래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북한의 사회주의식 국가통제 경제체제는 이미 무너진 것처럼 보였다.북한당국은 주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과 생활필수품마저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공장도 원자재와 전력을 제대로공급받지 못해 가동률이 30∼40% 선으로 떨어져 거의 빈사상태이다.사회주의 체제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나,중앙배급제를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북한에서 국가를 대신해 식량과 각종 생필품을 제공해주는 ‘시장’이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시장은 당국이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장마당과 당국의 눈을 피해 조그마한 골목에 몰래 서는 암시장(북한에서는 소시장이라고 부름)이 있다.장마당은 지난 80년대부터 개설되기 시작했다.일정한 장세를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10일마다 열리는 열흘장이 원칙이다.장백 전망대에서 만난 조선족 무역일꾼 곽모씨(44·여)는 “공식적으로는 1·11·21일에 장이 서는 것으로 돼 있다”며 “거래품목은 주로 자신의 텃밭에서 키운 채소·양식 등 농산물로 한정돼 있다”고 전한다. ○대도시선 1일장 형태 장마당은 현재 시는 물론 군지역까지 확대 개설되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군 소재지 등 사람이 모일만한 곳에는 100명 이상 모여들어 장터를 형성하고 있다.식량배급이 끊기고 국영상점이 제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등 북한의 공식적인 유통체계가 작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단동에서 만난 조선족 정모씨(33)는 “2∼3년전만 해도 장사꾼 10∼20명이 모여 농산품을 주로 팔았으나,요즘은 100∼200명의 장사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시장규모도 커졌다”고 말한다.평양 송신시장의 경우 1천명 이상 몰려들어 시장밖까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열흘장의 틀도 깨지고 거의 매일 들어서는 1일장 형태로 바뀌고 있는 것같다.북한 회령의 천척집을 자주 방문하는 조선족 배모씨(43)는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은 그나마 장마당에 나가야 한끼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매일 시장통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전한다.그는 평양·청진 등 대도시 주변의 장마당은 거의 매일 들어서고 있다고 덧붙인다. ○안전부요원 뇌물 강요 장마당은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생명줄’인 동시에 인심을 피폐하게 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다.연속적인 천재로 식량난이 더욱 악화되면서 장마당에는 당국의 단속 눈길을 피해 사발 등 온갖생활용품을 불법 거래하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도문 전망대에서 만난 조선족 김모씨(26)는 “당장의 한끼가 급한 북한에서는 끼니를 때우기 위해 혼수품으로 장만해온 이불·그릇 등 가재도구까지 내다팔고 있다”고 말한다. ○배고픔에 도둑질도 그는 “장마당 관리를 맡은 사회안전부는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힘을 이용,공공연히 뇌물을 강요해 주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고 귀띔한다. 조금이라도 이문을 더 챙기기 위해 각종 범죄도 난무하고 있다.강냉이가루나 밀가루에 석회분 등을 섞어 파는 사람,저울 고리에다 핀을 끼워 저울자를 고정시켜 저울눈을 속여 파는 사람….특히 배고픔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도둑질마저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먹을 것이 없어 떠도는 어린들이나 청년들이 몰려가 좌판을 빼앗아 달아난다.장사꾼들은 물건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좌판 위에다 그물을 치거나,물건을 끈으로 묶는 ‘기현상’도 보이고 있다고 한다.
  • 가정폭력 사회적 대책을(사설)

    매맞는 아내가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18년동안 함께 산 남편을 살해한 사건은 가정폭력이 날이 갈수록 난폭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오늘의 우리가정을 되새겨보고 그 대책을 착실히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다. 가정이란 남편과 아내가 자녀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하면서 오순도순 생활을 꾸리는 단란한 터전이다.가정은 우리에게 안락과 휴식을 줄 뿐만 아니라 책임감과 보람을 안겨준다.그런 집안에서 어른들이 흉기를 휘두르며 싸우고 때린다면 그것은 이미 가정일수 없으며 그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폭력 무감각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밤마다 술취해서 집에 돌아온 남편이 때리고 심지어 칼로 위협한다면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노이로제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더이상 견딜수 없는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면 폭력의 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주부의 40%가 매를 맞고 있으며 전체의 10%는 구타당하는 강도가 심각할 정도라는 것이다.지난 5년간 살인으로 이어진 경우는 27건이나 된다. 때리고화해하는 정도를 넘어서 살인으로 이어진 가정폭력이라면 이제 남의 가정문제로 돌려 그대로 방치할수 없게 됐다.가재도구 하나만 깨뜨려도 경찰차가 달려오는 서구에 비해 우리는 지난해 10월,여성계가 입법청원한 가정폭력방지법이 아직 심의조차 받지못한 상태다.물론 법의 개입으로 가정문제가 더욱 어렵게 될 우려도 있다.그러나 미국과 캐나다·영국 등에선 벌써 80년대 가정폭력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가정폭력을 인권유린으로 다스리고 있다.가정과 인륜파괴를 방지한다는 차원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접근금지나 퇴거 격리등 구나 동단위라도 이를 감시하고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우리 가정을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 착실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시급히 장치할 때다.
  • 날림공사… 완공 2년만에 “폭삭”/돈암동 「한진」 축대붕괴

    ◎며칠전 주민 안전진단 거의 묵살/“멋대로 설계변경” 준공검사 못받아/무리한 증축·호우에 하중 못견딘듯 서울 돈암2동 한진아파트 축대 붕괴 사고도 부실공사 및 사후 안전관리 미흡때문에 일어났다. 한진건설과 한신공영 등 이름난 건설회사가 지은지 2년밖에 안 된 아파트의 축대가 3일동안 내린 비에 주저앉았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이미 예고됐었다는게 주민들의 주장이다.입주 당시부터 내·외부 벽면과 복도 등에 균열이 생기는 등 부실의 냄새가 짙었다는 것이다. 지상 20층짜리로 지어진 이 아파트는 완공 직후인 95년 6월부터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준공검사는 물론 가사용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관할 성북구청은 건설사가 계단 등을 설계도와 달리 시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준공검사를 내주지 않았다.하지만 시정조치도 없이 입주를 시키자 해당 건설회사와 재개발 조합을 고발해둔 상태다. 이 아파트는 「동소문재개발조합」에 의해 91년에 착공됐다. 하지만 무너진 축대 바로 앞 209동은 시공사인 한진건설이 당초 「­」자 설계와 달리 「ㄴ」자형으로 구조를 변경,60가구 규모의 건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증축,문제가 되기도 했다. 주민 지모씨(38·가정주부)는 『무너진 축대는 이번 비가 내리기 전에도 벽면이 약간 기우는 등 이상징후를 보여 건설회사와 아파트 관리회사,구청측에 여러차례 진정했으나 이를 무시해 사고를 불렀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두차례나 안전진단이 실시됐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 내려져 당국의 사후관리도 허점을 드러냈다. ◎축대붕괴 이모저모/“아파트도 붕괴될까” 공포감 확산/유가족 “어떻게 지었길래…” 통곡 휴일 낮 아파트단지에서 발생한 축대붕괴 사고는 주민들을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폭격을 맞은 듯한 엄청난 굉음에 주민들은 가재도구도 챙기지 못한채 긴급대피했다. ○…붕괴 지점은 209동에서 불과 1m밖에 안되 아파트는 마치 낭떠러지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 숨진 김미성씨(27·여)는 과외를 하러왔다가 전화부스에서 전화를 걸다가 변을 당했으며 공중전화 부스는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부서져 있었으며 축대 아래에 있던 상가는 뒷부분이 완파됐다. ○…한편 숨진 김미성씨의 아버지 김영호씨(62)와 남편 채완석씨(29) 등 유가족들은 이날 하오 사고현장에 달려와 『도대체 아파트를 어떻게 지었길래 축대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느냐』며 통곡. 남편 채씨는 결혼 1년6개월째인 아내가 중학생 과외수업을 다녀오다 참변을 당한데 대해 『열심히 살아보려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면서 사고현장에서 찾아낸 아내의 흙묻은 갈색 가방을 껴안은 채 울먹였다. ○…축대 붕괴 직후 우촌·돈암초등학교 등으로 긴급대피했던 209동 428세대 주민 1천5백여명 가운데 붕괴 지점과 가까운 곳에 사는 100여세대를 제외하고는 저녁이 되면서 대부분 귀가.그러나 귀가하지 못한 주민 250명은 아파트 단지내 노인정과 유치원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조순 서울시장은 사고 발생 1시간여뒤인 하오 3시20분쯤 현장에 도착,우촌초등학교에 대피해 있던 주민대표를 만날 것을 희망했으나 주민들은 『조시장이직접 우리 쪽으로 오라』고 요구하는 등 평소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당국에 대해 분노를 표출.
  • 심슨 재산압류 개시

    【로스앤젤레스 연합】 전처 니콜 브라운과 애인 론 골드먼 살해혐의로 민사재판에서 유죄평결을 받아 유족에게 3천3백50만달러의 배상금을 물게 된 미국 풋볼스타 O.J.심슨이 27일 법원으로부터 1차로 가재도구와 보석,자동차,기념품 등 50만달러 상당의 재산 압류명령을 받았다.
  • 김 대통령 가재도구 불/상도동자택 개축위해 컨테이너 위탁보관중

    지난 22일 하오5시6분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수성낚시터 인근 컨테이너야적장에서 불이 나 이 곳에 보관중이던 김영삼 대통령의 서울 상도동 자택의 가재도구 일부를 태우고 출동한 소방대에 의해 20여분만에 진화됐다. 불이 붙은 컨테이너는 최근 김대통령의 서울 상도동 자택을 개축하면서 가재도구 등을 임시보관된 4개중 1개로 소파와 의자 등 11점이 탔다. 소방서측은 이날 불이 『인근 고물상에서 버린 담뱃불이 짐을 싼 스티로폼 등에 옮겨붙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 북한의 식량난(흔들리는 동토 북한:2)

    ◎94년 배급사정 악화… 작년부터 “감감”/풀·산나물 끼니 연명… 무뿌리 건지면 “행운”/가축 밀도살 성행… 먹을 것 찾아 유랑 일쑤 『북한에서 아무 생각없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에 훔칠 것이 없나,집어갈 것은 없나,주워갈 것은 없나를 연구합니다.하다못해 자기것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이라도 하지요』 김경호씨의 셋째 사위 박수철씨(40)는 북한의 식량난과 이로인해 피폐해진 사회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80년대까지는 무난 북한의 식량사정은 80년대까지는 괜찮았다.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루 700g,직장 없는 사람은 300g씩 보름마다 배급이 나왔다.비축미,도정미 등 명목으로 일부를 떼이더라도 각각 560g,250g씩은 됐다. 그러나 지난 92년부터 배급이 며칠씩 늦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때만해도 나중에 그동안 밀린 배급분을 다 받을 수 있었다.파탄지경에 이른 것은 94년도부터였다.점차 밀린 배급을 주지않더니 지난해 1월부터는 배급 자체가 완전히 끊겼다. 주민들은 쌀이 없어 옥수수죽이나 풀죽,산나물 등으로 끼니를 대신할 때가 많다.옥수수를 그냥 쪄서 먹으면 금방 동이 나기 때문에 옥수수 알갱이를 떼내 물과 함께 솥에 붓고 끓여 먹는다.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지만 양은 풍족하기 때문이다. 풀죽은 먹기도 어렵지만 소화도 되지 않아 영양실조·위염 등 갖가지 부작용을 낳는다.김씨 가족은 『굶어죽은 사람은 본 적 없으나 결핵,간염,영양실조 등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생긴 질병으로 죽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고 말했다. 집단농장에서는 옥수수나 벼가 여물기도 전에 주민들이 몰래 뜯어다 먹기 때문에 수확기가 돼도 쭉정이밖에 남지 않는다.회령시의 한 농장에서는 1정보당 강냉이가 평균 280㎏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논·밭을 지나가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일단 손으로 땅을 이곳저곳 파본다.어쩌다 캐지 않은 무뿌리 하나라도 발견하면 큰 행운이다. 육류섭취를 위해 산간이나 농촌 등지에서는 가축 밀도살이 성행한다.돼지고기 1㎏에 노동자 평균월급의 3배가량인 150원이나 된다.식량사정이 그리 나쁘지않았던 김씨가족도 1년에 잘해야 2번 정도 먹을수 있었다. ○비렁뱅이 가족 흔해 식량난 때문에 집을 팔고 유랑민이 되는 주민들도 크게 늘고 있다.처음에는 당국에서도 국가소유인 집을 팔지 못하게 통제를 했지만 지금은 묵인하고 있다.상황이 너무 안 좋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시가지에 번듯한 집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가재도구를 하나둘씩 팔아치우다가 결국은 집까지 내놓고 집값이 싼 농촌으로 간다.거기서도 먹을 것이 없어지면 모든 것을 다 내놓은 뒤 유랑생활에 나선다.역 대합실이나 강변 등지에는 비렁뱅이 생활을 하는 일가족들을 쉽게 만날수 있다. 최현실씨는 『다른 도시보다 비교적 생활수준이 나은 회령에서도 풀죽조차 먹지 못한 채 강기슭에 비닐천막을 치고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족을 6가구나 봤다』며 『식량걱정을 안하고 사는 가구는 30%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풀죽,산나물 등으로 연명하거나 시장에 가재도구를 내다팔아서 끼니를 이어간다』고 전했다. ○양잿물로 비누 사용 강원도 원산에 사는 큰 딸 명희씨(40)가같이 오지 못한 것도 집을 팔고 유랑생활을 하고 있어 연락을 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은 식량만이 아니다.비누는 생선기름이나 양잿물로 만들고,치약은 소금으로 대신한다. 석유나 땔감나무가 부족하기 때문에 전기히터 코일이 큰 인기다.전기가 통하면 붉게 발열하는 철선만을 사다가 진흙과 반죽해서 「사제난로」를 만들어 난방과 취사에 쓴다.전력난에 허덕이는 당국은 전력소모가 많은 전기코일을 단속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많은 주민들은 장사밖에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한다.일반 서민들은 쌀이나 옥수수로 떡이나 술을 빚어 장마당에 내다 팔고 장사밑천이 두둑한 사람들은 외지에서 물건을 사들여와 되판다.이들 중에는 극소수이긴 하지만 하루 100∼200원을 버는 사람도 있다.장마당에는 도둑이 많다.그래서 물건을 한쪽은 내놓고 한쪽은 천 등으로 가리고 판다. 중국과의 밀무역도 극성이다.조선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지로 유명했던 회령의 밀무역 규모는 북한에서도 몇 손가락안에 꼽힌다.중국으로 나가는 물품은 주로 청자 백자 고서화병풍 등 골동품,아편,금 은 동,분말로 만든 뱀독(사독),송이버섯,금강석 분말 등 특수광물이다.때로는 중앙국가창고에서 나오는 기계장비도 있다.
  • “집팔아 식량산다” 북 부랑가족 급증

    ◎탈북 김경호씨 일가 기자회견서 밝혀 지난해 10월 북한을 탈출,귀순한 김경호씨(61) 일가족은 20일 『현재 북한에는 집과 가재도구 등을 팔아버리고 식량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부랑아가족이 크게 늘어나는 등 사회해체상태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김씨의 부인 최현실씨(57)는 이날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강원도 원산에 사는 맏딸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은 맏딸가족이 식량난으로 떠돌이신세가 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씨는 『회령에만도 강기슭에서 풀죽도 먹지 못한 채 비닐천막을 치고 떠돌이생활을 하는 가족을 여섯이나 봤다』면서 『주변에서도 집을 팔아치우고 농촌으로 내려가 차익금으로 식량을 사 생활하는 가족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 치매 시어머니 감금사/경찰,50대 며느리 수사

    50대 며느리가 치매를 앓고 있는 팔순 시어머니를 감금해 숨지게 했다는 진정서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4일 부산금정경찰서에 따르면 금정구 손모씨등 주민 70여명이 이웃 이모씨(56·여)가 지난 1일 치매를 앓고있는 시어머니 배모할머니(84)를 연탄창고에 감금,숨지게 했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이에대해 『배할머니가 치매가 심해 가재도구를 부수고 가끔 흉기로 가족들을 위협해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창고로 옮겼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 가정집 실화추정 불/어린이 1명 질식사

    13일 하오 7시42분쯤 서울 성북구 정릉2동 508의 46 심순섭씨(40) 집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2층에 세들어 사는 이호선씨(34·여)의 아들 연우군(6)이 연기에 질식돼 숨졌다. 불은 가재도구 등 건물 내부 25평을 태워 1천5백여만원의 재산피해를 낸 뒤 10여분만에 꺼졌다. 경찰은 이씨가 집을 비워 연우군만 있었고,건물 2층만 탄 점 등으로 미뤄 불장난을 하다 불이 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정확한 화재원인을 조사 중이다.
  • 가정집 또 가스폭발/1명 화상·집내부 전소

    【구리=박성수 기자】 20일 하오9시2분쯤 구리시 수택동 276의 135 화신빌라 101호 김창규씨(44)의 집에서 LP가스가 폭발,김씨의 둘째아들 종민군(15)이 얼굴과 목 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또 폭발사고로 불이 나 집 내부에 있던 가재도구를 모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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