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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진안 가야와 운봉 가야/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진안 가야와 운봉 가야/서동철 논설위원

    가야라면 흔히 낙동강 하류의 연맹체 국가를 연상한다. 하지만 최근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고고학적 증거는 이런 상식과는 다르다. 전북 동부의 진안고원에서 가야의 존재가 처음 드러난 것은 1993년이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의 진안고원은 무주·진안·장수에 걸쳐 있다.이 지역에서는 300기 남짓한 가야계 고총(高塚)이 확인됐다. 특히 200기의 고총은 장수에 몰려 있다고 한다.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 잡은 직경 20m 안팎의 대형 무덤들이다. 이런 입지는 무덤 주인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다. 학계는 영남 지역의 가야묘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른바 ‘진안고원 가야’가 이 지역에서 상당 기간 가야문화를 유지하고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진안고원에는 80곳 남짓한 봉수가 장수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충남 금산과 전북 남원, 무주에서 시작된 여러 갈래의 봉수는 모두 장수에서 만난다고 한다. 장수는 도읍에 해당하는 정치적 중심지였다. 백두대간 산줄기의 서쪽에 해당하지만 진안고원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호남의 동부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는 운봉고원도 있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 전북 남원에 해당한다. 2010년 남원 운봉면 월산리의 가야계 M5호분에서는 중국계 청자인 계수호(鷄首壺)가 수습됐다. 닭의 머리 모양을 닮은 계수호는 백제왕이 지역 맹주들에게 내린 최상급의 위세품(威勢品)으로 알려진다. 그동안 익산 입점리, 공주 수촌리, 천안 용정리 등 백제 영역에서만 출토됐다. 여기에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나온 철제 자루 달린 솥도 수습됐다. 이른바 ‘운봉고원 가야’가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는 문물 교섭의 중요한 창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순천을 중심으로 하는 광양, 여수, 구례, 보성, 고흥 등 섬진강 서쪽 전남 동부는 그동안 마한과 백제의 영향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마한과 백제 사이 가야의 영향이 집중된 시기가 드러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아라가야, 금관가야, 소가야, 대가야의 문화가 확인된 것이다. 대가야의 가야금 명인 우륵이 지은 12곡 가운데 달기(達己)와 물혜(勿慧)가 전남 여수와 광양이라는 학계의 연구 결과도 있다. 가야 제국(諸國)은 한반도 남쪽 해안부터 중부 내륙 지역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었다. 그것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며 ‘가야사 복원’을 주창한 역사적 근거이기도 하다.
  • 文대통령 가야사연구 직접 챙긴 까닭은

    “약간 뜬금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도 넣어 주세요.” 문재인 대통령이 1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문 대통령 스스로 “뜬금없는 이야기”라고 말했을 정도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등 급박한 현안과 거리가 있는 언급에 참석자들은 “가야사…”라고 되뇌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야사 복원 지시는 대선 공약의 연장선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부산·경남(PK) 지역 공약의 하나로 ‘가야 문화권 개발과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 가야 문화 복원을 제시했었다. 경남 김해, 함안, 창녕 등지의 가야 유적을 발굴하고 가야의 왕도였던 김해를 경주나 부여에 버금가는 역사문화도시로 조성하겠다는 복안이다. 이날 언급에는 가야사 복원을 통해 영호남 화합을 이루길 바란다는 메시지까지 담겼다. 문 대통령은 “고대사가 삼국사 이후부터 다뤄지다 보니 연구가 제대로 안 된 측면이 있고 특히 가야사는 신라사에 덮여 그런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보통은 가야사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치는 역사로 생각들을 많이 하는데 광양만, 순천만,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은 아주 넓었던 역사”라면서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영남은 물론 충청과 호남에까지 세력을 떨친 가야사를 복원해 역사를 매개로 세 지역의 정서적 공동체 의식을 높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영호남 지역 통합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가야사 복원은 김대중 정부 때 시작돼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졌지만 예산 문제로 진척되지 못한 사업이다.문 대통령의 가야사 언급은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이란 분석도 나온다. PK는 문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만큼 지방 선거 결과가 향후 국정운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문 대통령 “국회가서 일자리 추경안 필요성 설득할 것”

    문 대통령 “국회가서 일자리 추경안 필요성 설득할 것”

    문재인 대통령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추경안의 국회 통과를 위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겠다고 밝혔다. 시정연설이란 정부가 예산 편성이나 정책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연설을 가리킨다.문 대통령은 1일 청와대 여민1관 소회의실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일자리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이후 적절한 시기에 국회에 가서 시정연설 형태로 의원들께 설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추경안 통과를 위해 국회를 방문해 시정연설을 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대선 때 ‘1번 공약’으로 내세운 ‘일자리 만들기’를 위해 새 정부가 온 힘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보로 해석된다. 문 대통령은 “국민께 일자리 추경이 왜 필요한지, 그 예산으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일자리 만드는데 어떤 효과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작업을 청와대가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면서 “일자리 추경안도 최대한 빠르게 국회에 제출해 달라. 국회의 협력을 구하는 노력을 우리가 열심히 해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문 대통령은 이낙연 국무총리가 임명된 이후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해 “일상적 국정과제는 총리가 해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총리실로 연결해주고,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 어젠다에 집중해 달라”고 강조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정리 중인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을 포함시켜 달라고도 주문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 국면에서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우리 고대사가 삼국사 중심으로 연구되다 보니 삼국사 이전 고대사 연구가 안 된 측면이 있고, 가야사는 신라사에 겹쳐서 제대로 연구가 안 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또 “가야사가 경남 중심으로 경북까지 미친 역사로 생각하는데 사실 더 넓다”면서 “섬진강 주변 광양만, 순천만 심지어 남원 일대까지 맞물리고 금강 상류 유역까지도 유적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넓은 역사이기 때문에 가야사 연구 복원은 영호남 공동사업으로 할 수 있고 영호남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좋은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백제 불교 중심서 ‘천자의 땅’으로… 내포 1500년史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백제 불교 중심서 ‘천자의 땅’으로… 내포 1500년史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의 보드가야로 가려면 13㎞ 남짓 떨어진 거점도시 가야를 경유하기 마련이다. 가야에는 정각(正覺) 이후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한 브라마주니 언덕이 있으니 보드가야에 버금가는 성지(聖地)다. 주변에는 팔리어(語)로 가야시사라는 산이 있어 부처 당시 초대형 사원이 지어졌다. 꼭대기가 코끼리 머리를 닮았다고 중국에서는 가야시사를 상두산(象頭山)으로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코끼리는 석가모니 부처를 상징한다.가야산(伽倻山)이라면 경남 합천의 해인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충남 내포(內浦)의 가야산 역시 합천의 가야산을 뛰어넘는 한국 불교 역사의 중심지였다. 합천 가야산 정상은 해발 1430m 상왕봉(象王峯)이다. 내포 가야산 줄기 북쪽에도 해발 310m의 상왕산(象王山)이 있다. 조선시대 사찰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상왕산 개심사는 가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합천 가야산과 내포 가야산의 작명 원리는 다르지 않다. 인도의 가야와 보드가야, 가야시사는 부처의 수행과 깨달음, 그리고 설법이 이루어진 곳이다. 인도에서 실크로드, 중국을 거쳐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도 같은 상징성을 가진 성지를 갖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내포는 가야산을 중심으로 주변의 10개 남짓한 살기 좋은 고을을 가리킨다. 삽교천을 따라 바닷길이 깊숙하게 내륙으로 들어왔다는 지형적 특징이 고유명사가 됐다. 가야산 서쪽 서산시 운산면에는 개심사와 함께 ‘백제의 미소’로 잘 알려진 서산 마애불과 백제 사찰 보원사의 옛터가 있다. 가야산 동쪽 예산군 덕산면에도 백제 거찰(巨刹)로 알려진 가야사가 있었다. 이름으로만 보면 가야사는 과거 보원사를 뛰어넘어 내포 가야산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을 수도 있다. 가야사 옛터에 흥선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올 길지(吉地)’라는 지관의 말에 헌종 10년(1844)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무덤을 옮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는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에 오른 이후 퍼진 말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황제가 불과 2대에 그치고 나라가 망했으니 흥선대원군이 ‘2대천자지지’를 제대로 해석했어야 했다는 씁쓸한 우스개도 있다. 어쨌든 남연군 무덤에 서면 풍수지리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과연 명당이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무덤을 썼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대원군은 훗날 아들 명복이 보위에 오르자 건너편 산기슭에 새 절을 짓고 부처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지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퍼졌다. 하지만 가야사는 이미 폐사(廢寺) 상태였던 듯하다. 다만 남아 있던 석탑과 석등 같은 석물의 일부 훼손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한말의 개화파 문인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도 ‘남연군묘를 가야사의 빈터에 썼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대원군은 단순히 불교에 호의를 가진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 후원한 인물이었다. 집권 이전에도 영종도 용궁사를 원찰로 삼은 것은 물론 쇠퇴한 흥천사, 화계사, 보광사를 중창했다. 대원군은 ‘불교를 즐겨 좇았다’거나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우리라’는 글귀가 새겨진 인장을 즐겨 썼다고 한다. 조선 후기를 대표한다고 해도 좋을 친(親)불교적 인사가 유서 깊은 대찰(大刹)에 불을 지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대원군이 불교를 잘 아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보덕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구니 수도도량이어서 일반인 출입을 막은 적도 있지만, 지금은 개방한다. 보덕사는 한마디로 남연군 무덤의 원찰이다. 대원군이 아버지의 극락왕생과 후손의 발복(發福)을 빌고자 지은 절이다. 이름처럼 자식을 왕으로 만들어 준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뜻이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부수적이었을 것이다. 큰법당은 무덤의 원찰이니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큰법당 앞에 바짝 붙여 지은 디귿자 모양의 대방(大房)은 충청도에서는 이례적이다. 폐쇄적인 구조의 대방은 내부에 다양한 용도의 공간을 두고 있다. 왕실 여인들의 출입을 전제로 한 공간이다. 대방은 서울 근교의 왕실 무덤을 수호하는 사찰에 주로 지어졌다. 보덕사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성껏 지었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비구니 사찰답게 아주 깔끔하게 관리하고 있어 절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절의 들머리에는 가야사 터에서 가지고 왔다는 화사석(火舍石)으로 다시 세운 석등이 있다. 가야사는 백제시대 겸익이 창건했다고 전하지만, 유물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2012년부터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 시대 기와가 쏟아져 나왔다. 머리 부분이 없는 소조 불상도 10점 남짓 출토됐다. 고려와 조선 시대 건물 유구도 찾아냈다고 한다. 가야사 역사의 본격 재구성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는 절의 흔적뿐 아니라 남연군묘의 제각(祭閣)이었던 명덕사(明德祠)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특히 ‘가량갑’(加良岬)이라고 새겨진 통일신라 시대 기와가 눈길을 끌었다. ‘가량’과 ‘가야’(伽倻)는 과거에는 같은 발음이었던 듯하다. 가야국과 관련된 역사 기록에서도 ‘가량’과 ‘가야’를 혼용한 사례가 보인다. 가야사라는 이름은 ‘고려사’에 처음 나온다. 창건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사이 어느 시점에 가야사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가야사와 ‘가야갑사’(加倻岬祠)의 기록이 함께 보인다. 그런데 발굴조사에서는 일정한 두께로 깎은 돌로 조성한 유구가 확인됐다. 절의 시설로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 삼국시대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명산(名山)에 제사 지내던 흔적일수도 있다는 뜻이다. 계룡산 산신에 제사 지내던 중악단(中岳壇) 역시 사찰인 신원사 곁에 두었다. 잘 알려진 대로 남연군 무덤은 대원군에게 통상을 요구하고자 오페르트가 저지른 도굴 사건의 현장이기도 하다.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1868년 행담도에 1000t급 차이나호를 정박시킨 뒤 작은 배로 삽교천을 거슬러 구만포에 상륙한다. 일당은 덕산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뒤 가야산으로 향했지만 남연군이 안장돼 있는 무덤의 회곽은 단단하기만 했고, 결국 간조 시간에 쫓겨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다. 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돼 있으니 역사적 의미는 각자 새기면 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연군 무덤을 방문한 길이라면 오페르트 일행이 상륙한 예산 고덕면의 구만포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삽교호 방조제에 물길이 가로막혀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삽교천 중류의 구만포는 내포의 중심 포구의 하나였다. 남연군 무덤에서는 자동차로도 20분 이상이 걸린다. 이 길을 걸어서 오갔을 오페르트 일당은 매우 조급했을 것이다. 구만포는 지금 한때 포구였다는 사실조차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황량하다. 그래도 내포의 역사를 더듬기에 구만포만 한 곳이 없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한글·문학·장군차박물관… ‘가야 왕도’ 김해, 역사·테마 도시로

    한글·문학·장군차박물관… ‘가야 왕도’ 김해, 역사·테마 도시로

    경남 김해시가 다양한 역사·테마 박물관 관광 도시로 거듭난다. 김해시는 경남 18개 시·군 가운데 통합 창원시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인구 53만명이다. 계속 성장하고 있는 김해는 가야문화 발상지로 역사가 깊은 도시다. 전기 가야연맹의 우두머리로 군림한 금관가야 본거지다. 수로왕이 태어난 황금알이 내려온 곳으로 전해지는 구지봉(가락국 건국신화 중심지)을 비롯해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릉, 대성동 고분군, 봉황동 유적 등 2000여년 세월을 지내온 갖가지 유적이 가야시대 번창했던 사회·문화를 말해 준다. 김해 지역을 비롯해 가야 문화권 지역에서 그동안 발굴·출토된 가야시대 유물·유적과 자료 등은 국립김해박물관(1998년 7월 개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2003년 8월 개관) 등 2곳에 보관·전시돼 있다. 김해시는 지금 있는 가야시대 전문 박물관 2곳만으로는 지역의 오랜 역사와 다양한 문화를 보여 주기에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고 김해를 대표하는 인물·문화 등을 테마로, 작은 박물관들의 건립을 추진한다.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 인물과 문화 등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고 문화도시로 품격을 높인다는 의도다. ‘테마 박물관 도시 조성’은 지난해 재보궐 지방선거 때 허성곤 김해시장의 공약이기도 하다. 허 시장은 “김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테마 박물관을 건립해 ‘김해’ 하면 ‘세계적인 박물관 도시’로 떠오르도록 도시 이미지에 박물관을 각인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올해부터 시작해 2020년까지 한글박물관(2층·연면적 273㎡), 만화·문학을 주제로 하는 김해문학관(1층·연면적 330㎡), 장군차박물관(2층·300㎡), 농업박물관(2층·865㎡), 김해시립박물관(3층·1100㎡), 가야불교박물관 등 6개 테마 박물관을 잇달아 건립할 예정이다. 오상진 김해시 문화예술과 박물관 담당은 “예산을 아끼려고 박물관 부지와 건물은 될 수 있으면 시유지를 활용하고 기존에 있는 관련 시설을 리모델링하거나 정 안 되면 소규모로 짓는다”고 설명했다. 올해 착공 예정인 한글박물관은 김해 출신 한글학자인 한뫼 이윤재(1988~1943)와 눈뫼 허웅(1918~2004)의 한글 사랑과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이다. 외동 나비공원 안 시유지에 20여억원을 들여 짓는다. 올해 안으로 기본 및 실시설계를 마치고 공사를 시작해 내년 말 문을 열 계획이다. 만화박물관을 겸한 김해문학관은 진영읍 출신으로 대표적인 분단문학 작가인 김원일(75)과 근대 만화 선구자인 ‘코주부 삼국지’ 작가 김용환(1912~1998)의 업적과 작품 세계 등을 조명하는 박물관이다. 진영문화센터 안 한빛도서관 부지 안에 8억원을 들여 짓는다. 올해 전시자료 수집과 벤치마킹 등을 거쳐 내년 실시설계를 해 착공할 계획이다. 김해는 ‘장군차’라고 부르는 차 군락지와 오래된 차나무가 많다. 인도 아유타국(阿踰?國)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 시조인 김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차 씨앗을 가져와 심은 뒤, 차 자생 군락지가 조성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충렬왕이 대마도 정벌을 가는 군사들을 격려하고자 김해에 들러 금강사 뜰 앞에 튼튼하게 잘 자란 차나무를 보고 ‘장군감’이라며 ‘장군차’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김해시는 가야 문화를 상징하는 특산품인 장군차를 널리 알리기 위해 8억원을 들여 장군차박물관도 건립한다. 건립 위치는 수로왕과 허왕후가 거닐었던 지역인 봉황동 수능원 공원 안 시유지로 정했다. 올해 안에 실시설계를 하고 내년 상반기 착공할 계획이다. 김해는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삼각주와 주변 평야로 이루어진 김해평야가 펼쳐져 있다. 시는 농경사회 역사와 사라져 가는 농경문화를 보존·전시하는 농업박물관을 만든다. 농업박물관은 수능원 안에 있는 기존 민속박물관을 활용해 리모델링(사업비 2억 2000여만원)할 계획이다. 빠르면 올해 말 착공한다. 김해에는 시립박물관이 없다. 이에 따라 시는 대성동 고분박물관 주차장 부지에 50억원(국비 20억원 예정)으로 시립박물관을 신축할 예정이다. 지방재정 투융자 심사를 거쳐 내년 착공한 뒤 2019년 10월 개관할 예정이다. 가야 역사자료 등에 따르면 김수로왕 7년(서기 48년)에 인도에서 허 왕후가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불탑인 파사석탑과 불경 등을 가지고 김해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가야 때라는 학설을 펴는 불교연구 학자도 있다. 삼국사기 등에 기록돼 있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들어왔다는 통설보다 324년 앞서고 최초 전래 지역도 김해가 되는 셈이다. 시는 오는 4월 가야사 학술회의에 이어 10월에는 왕후사지 시굴 조사를 해 불교 최초 전래설을 검증한다. 검증을 바탕으로 불교박물관 건립 근거를 마련한 뒤 국비 지원을 받아 빠르면 2019년 가야불교박물관을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허 시장은 “기존의 역사 박물관 2곳에 더해 여러 테마 박물관이 생기면 공연전시 시설인 문화의 전당, 건축·도자 전문 미술관인 클레이아크 등 다양한 역사·문화시설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문화·관광 도시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해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영호남 가야문화권 특별법 제정 본격 시동

    영호남 가야문화권 특별법 제정 본격 시동

    영호남 5개 시·도에 걸친 가야문화권 발전의 제도적 토대가 될 특별법 제정이 탄력을 받게 됐다. ‘가야문화권 지역개발을 위한 포럼’(대표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은 21일 오후 1시 30분부터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야문화권의 국회의원, 시장·군수, 주민 등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야문화권 개발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연다고 20일 밝혔다. 가야문화권 포럼은 5개 시·도(대구·경북·경남·전남·전북), 15개 시·군(고령·성주·달성·합천·거창·함양·남원·산청·의령·장수·창녕·하동·함안·광양·순천)의 국회의원 10명과 시장·군수 15명으로 구성됐다. 이날 공청회에서 대구한의대 관광레저학과 김세기 교수와 영남대 새마을국제개발학과 이성근 교수가 가야사 재조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지역 개발 방안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어 관련 전문가 등의 토론이 진행된다. 앞서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의장 곽용환 고령군수)는 특별법 법률안을 마련했으며 가야문화권 포럼은 이번 공청회에서 제시된 의견을 수렴해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법률안은 가야문화권 국회의원 10여명 명의로 발의되며 19대 국회 회기 내 통과가 목표다. 이 특별법은 관광 인프라 구축과 역사 재조명 등을 추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영호남 내륙의 경제·문화 거점 및 공동 발전을 위한 비전과 추진 전략 수립을 비롯해 신성장 동력 육성 및 지역별 특화 방안 마련, 가야문화권 상생 및 동반 성장을 위한 연계·협력 사업 등이 추진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곽용환 군수는 “가야문화는 영호남에 걸쳐 넓게 분포돼 있으나 그동안 국가발전정책에서 소외돼 낙후성을 면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면서 “특별법을 만들면 가야문화권 전체의 공동 번영과 발전에 그치지 않고 국가 균형 발전과 신성장 동력산업 육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남 김해와 함안 지역 가야 고분군과 경북 고령의 대가야 고분군은 2013년 말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대가야’ 고령, 2월 가볼 만한 곳

    경북 고령이 새해 들어 대가야 관광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고령군은 대가야박물관과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2월 가볼 만한 곳’에 선정됐다고 4일 밝혔다. 고령은 1600여년 전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4국 시대를 열었던 대가야의 도읍지로 500년 대가야의 역사·문화가 남아 있다. 대가야박물관은 전국에서 유일한 대가야사 박물관으로, 대가야왕릉전시관은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인 지산동 44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왕릉전시관 뒤쪽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산 중턱부터 꼭대기까지 704기의 크고 작은 고분을 볼 수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이다. 군은 또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의 ‘2017년 올해의 관광도시’로 최종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군립박물관의 ‘작은 반란’

    군립박물관의 ‘작은 반란’

    인구가 4만명도 안 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군립박물관이 관람객 300만명을 돌파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경북 고령군이 운영하는 국내 유일의 대가야사 전문 박물관인 대가야박물관이다. 고령군은 지난 23일까지 군립 대가야박물관을 찾은 전체 관람객이 우리나라 군립박물관 가운데 처음으로 300만명을 넘어섰다고 24일 밝혔다. 2000년 9월 개관 이후 13년 5개월 만이다. 연평균 22만여명이 다녀간 셈이다. 관람료(1인당 성인 2000원 등) 총징수액은 15억 5000만원이다. 더욱이 군립을 포함한 공립박물관 대부분이 관람객이 없어 텅 빈 채로 예산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가운데 이룬 성과라 눈길을 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립박물관은 312곳이다. 이 중 124곳(40%)은 하루 평균 관람객이 100명 미만이고 68곳(21%)은 50명 미만으로 나타났다. 대가야의 도읍지인 고령읍에 있는 대가야박물관은 지방 국립박물관보다 예산과 인력 규모도 훨씬 작지만 관람객은 오히려 많았다. 대가야박물관의 최근 3년(2011~2013년)간 관람객은 78만 6323명으로 연평균 26만 2107명이었다. 이는 같은 기간 국립춘천박물관 관람객 22만 9406명보다 4만여명이 많은 수치다. 국립청주박물관 26만 1131명보다도 약간 많았다. 대도시 지역인 국립대구박물관의 34만 9159명과는 큰 차이가 없다. 이들 국립박물관이 도심에 있고 관람료가 무료인 점을 감안하면 대가야박물관의 성공은 대단한 것이다. 특히 규모와 시설 면에서 대가야박물관과 비슷한 공립박물관을 보면 확실하게 차별화된다. 2011년 경북 청송군립민속박물관 연간 관람객 3179명보다는 82배, 2012년 경남 합천군립박물관 2만 3000명에 비해서는 11배 이상 많았다. 이처럼 대가야박물관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은 신라, 고구려, 백제 등 삼국시대의 박물관을 이미 관람한 관광객들이 최근 들어 새로운 관광 분야로 부상하는 대가야의 역사, 문화로 눈길을 돌리고 있어서다. 게다가 삼국의 유물과는 차별화된 금관, 장신구, 마구, 무기류 등 대가야 유물 2000여점을 전시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인근의 지산동 대가야 고분군이 지난해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것도 한몫한다. 관광객 임유리(44·여·대구시 수성구)씨는 “대가야박물관은 삼국에 가려진 ‘신비의 왕국’ 대가야의 찬란한 역사, 문화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대가야가 삼국과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독창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녔다는 점에 무척 놀랐다”고 말했다. 신종환(54) 박물관장은 “평일엔 초·중·고교생들의 현장학습과 수학여행, 대학생의 고적 답사가 이뤄지고 주말에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체험학습 관람객으로 붐빈다”고 설명했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충남 서산 백제의 미소길

    [명인·명물을 찾아서] 충남 서산 백제의 미소길

    ‘가야산 순환도로 착공→시민단체와 불교계 반발로 공사 중단→생태도로 건설로 변경 합의→재착공.’ 3년 가까이 자치단체와 주민들이 마찰을 빚은 뒤 들어선 충남 서산 가야산(해발 678m) 생태탐방로 ‘백제의 미소길’이 개통 반년을 넘겼다. 터널 등 멀쩡한 산을 훼손하고 조성하려던 순환도로를 둘러싼 갈등이 소통과 합의로 극복되고 생태도로로 바뀐 뒤 명품 숲길로 자리 잡고 있다. 지난 4일 찾은 백제의 미소길 초입 마을인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는 칼날 같은 추위에도 등산객이 눈에 띄었다. 주민 이용식(68)씨는 “지난해 7월 이 길이 개통된 뒤 이용객이 두 배는 늘었다. 봄가을 주말이면 하루 수천 명이 찾아온다”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고 주민들이 생산하는 농산물도 많이 팔린다”며 웃었다. 이 길은 상가리에서 대문동 쉼터~가야산 수목원~으름재 쉼터~백제의 미소공원~퉁퉁고개 쉼터~소나무 쉼터~보원사지를 거쳐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마애삼존불로 이어진다. 모두 6.5㎞다. 길에 맨발체험 황톳길, 소공원 7곳과 연못 2곳, 공연장과 가야산 자생식물원이 갖춰졌다. 곳곳에는 또 불교 및 백제문화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다. 가야산은 조선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내륙 깊숙한 하천을 이용해 보부상 등의 상거래와 문화 전파가 왕성했다고 한 내포(內浦) 지방의 중심지다. 상가리에 남연군묘가 있다.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다. 풍수가를 통해 이곳이 명당임을 간파한 대원군은 가야사라는 절을 불태우고 경기 연천의 아버지 묘를 옮겨 왔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1868년 4월 조선과의 통상 문제를 흥정하기 위해 이 묘를 도굴하려 했으나 워낙 단단해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크게 노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 강화했다. 서산 쪽에는 사적 316호 보원사지가 있다. 고려 초 전후에 창건돼 사라진 이 절터에는 보물 102호인 석조를 비롯해 103호 당간지주, 104호 오층석탑, 105호 법인국사탑 등 보물이 여럿 있다. 멀지 않은 고양이바위에 대한 전설도 내려온다. 이 바위와 개천 건너편 숲속의 쥐바위는 상극인데 둘 사이에 다리가 놓이면서 보원사 일대 모든 절이 망했다는 것이다. 가야산에서 사라진 사찰과 암자가 100개에 달했다고 하니 전설이 그럴듯하다. 이 길의 백미는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국보 84호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백제 불교미술의 정수다. 옛날 주민들 사이에 “좌우에 부인 둘을 거느린 바람둥이 부처상”이란 불경스러운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고 할 정도로 친근한 모습이다. 황종현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 문화재관리팀장은 “백제의 미소길은 자연생태와 백제 불교문화 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역사의 보고”라고 말했다. 당초 충남도는 이곳에 순환도로를 만들 계획이었다. 관광객 접근이 쉽도록 하자는 생각에서다. 노선은 현 생태탐방로와 같았다. 산허리에 왕복 2차선 차로를 내고 터널과 교량을 건설해야 했다. 도는 2006년 10월 말 착공에 돌입했다. 하지만 반발이 봇물처럼 터졌다. 대전충남녹색연합 등 시민단체가 반대에 나섰고, 보원사와 수덕사 등 주변 사찰 스님들이 가세했다. 주민들도 힘을 보탰다. 이들은 가야산지키기시민연대를 구성,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 수많은 집회와 성명서 발표 등이 잇따랐다. 이들은 “순환도로는 자연환경이 잘 보전된 가야산 도립공원을 두 동강 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산마애삼존불 인근에 굴을 뚫는 등 백제·불교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는 무모한 행위”라며 공사 중단을 촉구했다. 도는 이듬해 7월 공사를 중단하고 반대 측과 협의에 나섰다. 오랜 논의 끝에 순환도로 대신 ‘걷는 숲길’을 만들자는 데 뜻이 모였다. 이에 따라 공사는 중단 1년 만인 2008년 7월 재개됐다. 공사 중에도 문제가 발생하면 민관이 논의를 통해 풀었다. 모두 450억원이 들어갔고, 마애삼존불에서 이름을 땄다. 양 사무처장은 “이 길은 주변에 내포신도시, 덕산온천, 해미읍성 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모여 있어 명품 숲길로 손색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민관이 뜻을 같이해 만든 길인 만큼 더 활성화시킬 수 있는 대책도 함께 세운다면 의미는 더욱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산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금동제 허리띠 장식 4점 등 가야시대 보물급 유물 출토

    금동제 허리띠 장식 4점 등 가야시대 보물급 유물 출토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했던 도읍지인 경남 김해시 대성동 고분군에서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4세기대 금동제 허리띠 장식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굴됐다.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前燕)·후연(後燕)·남연(南燕) 등 이른바 삼연(三燕)에서 제작된 보물급의 4세기대 금동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곳이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10일 제7차 학술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대성동 고분군의 4세기대 대형 목곽묘인 91호 고분군에서 최근 화려한 용 문양이 새겨진 금동제 허리띠 장식 4점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허리띠 부분 가운데 교구(?具·버클)는 도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백제·신라 유적지와 일본 등에서 비슷한 허리띠 장식이 발굴된 적이 있으나 모두 5세기 이후의 것이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또 91호분 인근 88호분에서 고대 일본 유물로 방패에 붙이는 장식인 파형동기(波形銅器) 12점을 한꺼번에 발굴했다. 앞서 91호분에서는 삼연에서 제작된 말방울 5점과 용문양이 새겨진 금동제의 말 장식 2점, 마구로 추정되는 각종 유물 10여점 등 금동유물이 다량으로 나왔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측은 4세기대 대형 목곽묘인 88호, 91호 고분에서 용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금동제 유물이 대량 출토된 사실 등으로 미뤄 두 무덤이 가야의 왕 무덤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송원영 박물관 운영담당은 “대성동 고분군 발굴조사 결과 가야가 당시 중국과 일본의 교역 중심지로 독자적으로 중국으로부터 금동제를 받아들인 사실이 확인됐으며 금동제가 한반도 남부지역에 전파된 시기는 광개토대왕의 남정이 있은 5세기 이후였다는 지금까지 학설은 맞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은 가야사 실체규명을 위해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지난 6월 4일부터 대성동 고분군에 대한 7차 학술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박물관 측은 학술발굴조사를 오는 14일까지 모두 마치고 내년 8월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발굴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내포문화숲길’ 백제 느껴요

    ‘내포문화숲길’ 백제 느껴요

    백제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충남 서산 가야산 자락의 ‘내포문화 숲길’이 다음달 말 일반에 첫선을 보인다. 산림청은 10일 “지난해 10월 1억 6000여만원을 들여 서산 운산면 가야산 용현자연휴양림에 조성 중인 9.64㎞의 내포문화 숲길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내포문화 숲길은 전체 242㎞ 가운데 국유림 구간으로 자연휴양림관리소에서 출발해 수리암, 백암사터 등을 거쳐 가야사에 이른다. 수리암터 해설판을 비롯해 숲길 중간중간에 옹달샘, 명상의 쉼터 등이 만들어진다. 수리암~백암사터 구간은 자연친화적인 옛길로 복원된다. 백암사는 고려의 큰 사찰이던 보원사 소속 암자다. 근방에 99개 절이 있었는데 백암사가 100번째로 지어지자 모든 암자가 불타 사라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나머지 구간은 충남도와 해당 시·군이 국비 등 모두 69억원을 확보, 2012년 말까지 모두 마무리할 계획이다. 서산, 홍성, 예산, 당진 등 4개 내포지역을 지난다. ‘내포(內浦)’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들어온 가야산 앞뒤 10개 고을(서산, 예산, 당진, 홍주, 해미)을 일컫는 것으로 불교가 들어오고 각종 문화교류와 상거래가 활발했다. 지금의 내포문화권은 아산, 태안, 보령까지 아우른다. 충남도는 나머지 구간을 6개 테마 숲길로 만든다. ‘백제 노을길’은 용봉사~해미읍성~서산 마애삼존불~화전리 사면석불, ‘천주교 순례길’은 해미 천주교성지~한티고개~홍주성~배나드리~여사울~솔뫼성지로 이뤄진다. ‘동학혁명의길’은 승전곡~면천성~대흥관아~홍주성~덕산읍성~해미읍성, ‘보부상길’은 해미장~갈산장~덕산장~고덕장~홍성장~광천장~합덕장, ‘원효대사 깨달음의 길’은 수덕사~원효암터~보원사터~마애삼존불, ‘백제부흥의 길’은 광천~복신굴~주류성~임존성~예산성~백석포를 거친다. 내포문화 숲길은 지난해 산림청으로부터 ‘역사·문화 테마 숲길로 가장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충남도는 지난해 10월16일 수덕사 및 해당 시·군과 내포문화 숲길 조성 협약식을 가졌고, 지난 1월21일 옹산 수덕사 주지 스님을 위원장으로 한 사단법인 ‘내포문화 숲길’을 설립해 이 사업을 벌이고 있다. 권남옥 도 녹지조경계장은 “역사·문화 관련 숲길이 조성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등산문화가 탐방적인 성격으로 바뀌면서 노인과 청소년 등 비전문가들도 즐길 수 있는 숲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국 종교유산·사상 세계에 알린다

    한국 종교유산·사상 세계에 알린다

    ‘한국의 종교유산과 종교사상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한다.’ 한국의 문화·철학이 오롯이 담긴 불교유산과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아우르는 씨알사상을 세계에서 평가받고 알리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다.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주축으로 한 불교계는 2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한국자연ㆍ문화유산의 세계복합유산 등재를 위한 포럼’을 시작으로 내포(서산) 가야산권 유산의 유네스코 등재 운동에 돌입했다. 재단법인 씨알은 7월30일∼8월5일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를 계기로 동서양 문명을 주체적으로 융합한 유영모ㆍ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을 조망, 세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에 나선다. ●서산마애삼존불·수덕사 등 문화재 산재 우리의 자연환경과 문화재를 묶어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의 평가기준이 서양의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홀대받는 한국의 자연·종교 유산을 제대로 평가받자는 노력이다. 우선 반경 5㎞ 안에 사찰 터와 불교문화재가 집중되어 있는 내포(서산) 가야산권을 첫 대상지로 삼았다. 보원사터와 가야사터를 비롯해 100여개의 옛 절터가 모여 있고 예산 사면석불(보물 제794호),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같은 미륵불과 수덕사, 개심사, 문수사 불교문화재 사찰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조계종 중앙신도회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는 27일 포럼에서 내포 가야산권의 ▲세계복합유산으로서의 가치 ▲불교문화의 가치와 보존현황 ▲자연환경생태 ▲서양에서 바라보는 동양사상의 가치를 따진 뒤 세계복합유산 등재방안을 집중 논의했다. 포럼이 끝난 뒤 ‘내포 가야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준비위원회’도 공식 발족했다. 불교계는 준비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역사·문화·생태 유적 자료 조사를 벌이는 한편 지역 향토사학자와 학계, 종교계,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복합유산 등재 운동을 벌여나가기로 했다. 조계종 문화부장 수경 스님은 “한국불교는 기성문화와 충돌하기보다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보완, 순응하면서 민족정서를 원만하게 포용했다.”며 “이같은 역사를 온전하게 갖춘 내포 가야산권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불교 유산을 효율적으로 보전하고 세계에 알릴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7~8월 서울 세계 철학대회 계기 사상가이자 종교인, 민주화운동가였던 함석헌(1901-1989)과, 그의 스승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의 사상·철학을 세계속에 심자는 운동.7∼8월 서울 세계철학대회가 그 첫 계기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정신과 서구철학, 동아시아의 도(道)철학을 한국의 한(韓·큰 하나) 정신으로 융섭해 민주적 생활철학으로 닦아냈다.”고 평가받는 유영모ㆍ함석헌의 씨알사상을 먼저 해부하는 자리. 국내외 철학자 30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20여명이 사상, 종교, 생명, 교육 측면의 유영모ㆍ함석헌을 들여다본다. 박노자(오슬로대)·김상봉(전남대)·서유석(호원대)·김흡영(강남대)·이기상(한국외대)·김해암(코넬대) 교수가 씨알사상의 ‘생명·평화·공공성(公共性)’을 조명한다. 재단법인 씨알은 이에앞서 유영모·함석헌의 생일(3월 13일)에 생명평화문화제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5월 씨알사상포럼을 개최하고 7월에는 국내외 석학들을 초빙해 생명평화축제를 잇따라 연다. 재단법인 씨알은 “1950년대 후반부터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철학을 토대로 주체적인 사상과 철학의 형성을 주도했던 유영모·함석헌 선생은 동서 문명의 만남을 통해 국민의 자각과 민주정신을 일깨운 선구인데도 제대로 자리매김되지 못했다.”며 “세계철학대회를 시작으로 국내외 석학 연구모임과 일반인의 관심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산이 좋아 산으로] 충남 예산 가야산

    충남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는 가야산(677.6m)은 경남 합천 가야산(1430m)에 비해 높이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주변 열 고을을 거느리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 개심사·일락사·보원사지 등의 문화유산, 그리고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불리는 명당 남연군묘를 품고 있어 합천 가야산에 비해 무엇 하나 꿀릴 게 없는 명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을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열 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 하면서 비옥한 평야 중심에 가야산이 놓여 있다고 적고 있다. 내포란 지금의 예산·서산·홍성·당진 지방과 태안·아산 일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내포 지방이 배출한 인물에 주목했다. 최영 장군, 사육신 성삼문, 충무공 이순신, 추사 김정희, 의병장 최익현,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개화당 김옥균,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걸출한 이 모든 인물들이 놀랍게도 내포 출신이다. 저자는 그들이 충청도 특유의 느리고 온화한 성품이 아니라 소위 ‘깡’이 센 사람들로 가야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분석했다. 가야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바다가 가까워 일단 능선에 붙으면 내륙의 1000m 넘는 산이 부럽지 않고, 석문봉에서 바라보는 서산 간척지 너머 서해안 일몰이 특별한 장관을 이룬다. 봄철이면 진달래가 지천이고,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산행 후에는 덕산면의 온천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점도 큰 매력이다. 가야산 들머리는 크게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덕산 상가리를 들머리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 원점회귀 산행을 한다. 가야산의 최고봉인 가사봉 정상은 각종 중계기지가 들어차 출입금지 지역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산꾼들은 가야산의 실질적인 주봉인 석문봉에 올랐다가 가사봉에 들르지 않고 하산한다. 서산 운산면 용현계곡을 들머리로 하면 마애삼존불∼수정봉∼옥양봉∼석문봉∼상가리 혹은 보원사∼일락산∼석문봉∼상가리 종주산행을 즐길 수 있다. 상가리 가야산 주차장은 국립공원만큼 넓지만 주차비를 받지 않아 좋다. 이곳에 차를 세우면서 산행은 시작된다. 주말에는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주차장이 가득 찬다. 예전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난 가야산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등산객은 중·장년층이 많은데, 산행이 어렵지 않고 산행 후에는 뜨끈한 온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상가리∼옥양봉∼석문봉∼상가리에 이르는 약 7.5㎞ 코스는 3시간 30분이 걸리는 원점회귀 코스다. 가야산은 등산 시작 지점과 끝이 꼭 일치해 자가용을 이용해 접근할 경우 편리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석문봉은 가사봉에 비해 24.6m 낮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야산의 주봉 대접을 받고 있다. 예전에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남연군묘가 가사봉이 아닌 석문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었고, 지금은 가사봉이 출입통제 구역이라 역시 석문봉이 주봉이 되었다. 이영준 월간 MOUNTAIN기자 # 여행정보 운산면 용현계곡은 문화유산의 보고다. 국보 서산마애삼존불, 사적 보원사지 등이 대표적인데 예전에는 계곡 일대가 전부 보원사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당간지주,5층 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비가 남아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상가리 쪽에는 남연군묘를 빼놓을 수 없고, 주차장에서 오른쪽 길로 10분 걸리는 보덕사도 들러볼 만하다. 본래 남연군묘는 가야사의 자리였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 질러 스님들을 내쫓고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만들었다. 훗날 이 사건에 마음이 불편했던 대원군은 보덕사를 지어주었다. 비구니 사찰로 소담한 분위기가 좋다.
  • 최인호 장편 ‘제4의 제국’ 펴내

    작가 최인호(61)가 700년 가야사를 복원한 장편소설 ‘제4의 제국’(전 3권, 여백)을 출간했다. 소설은 우리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가야의 역사를 치밀한 자료조사에 기초해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파헤치고 있다. 가야사 추적의 단초는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다량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일본 왕들의 무덤에서 제한적으로 발굴되던 이 바람개비 모양의 유물이 왜 김해에서 발견됐을까, 작가는 이 의문의 실마리를 찾아 역사 수사관처럼 추적에 추적을 거듭해 파형동기의 원류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한·일 고대사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작가의 끈질긴 집념은 파형동기의 원형이 인도의 비슈누 여신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을 밝혀냄으로써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온 여인이라는 설화를 역사적 사실로 입증했다.‘잃어버린 왕국’(백제)‘제왕의 문’(고구려)‘해신’(신라) 등 삼국을 다룬 역사소설의 뒤를 잇는 이번 작품에 대해 작가는 “항상 뭔가 부족하고 미진한 감이 있었는데 이번 소설로 조상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았다.”면서 “이제 더 이상 역사소설은 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각권 95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경남 김해 신어산(630.4m)

    [조용섭의 산으路] 경남 김해 신어산(630.4m)

    가야사 복원, 제4제국, 만남의 땅, 최근 옛 가야국 500년 역사의 중심도시 경남 김해(金海)를 역동적인 분위기로 달구는 키워드들이다. 비록 가야가 멸망한 나라였지만, 그 역사와 문화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와 끊임없이 꿈틀대던 왕도로서의 자부심이 요즈음 더욱 탄력을 받은 느낌이다. 김해의 진산(鎭山) 신어산(630.4m)을 바라보면 그 잃어버린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산자락에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의 오빠 허보옥(장유화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고찰 은하사가 있고, 산 이름도 이 절에 있던 ‘신어(神魚)’문양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약 20년 전, 은하사 옆의 동림사를 중건한 화엄 큰스님(2001년 입적)의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직도 울림으로 남아 귓전에 맴돈다.‘우리나라 역사 다시 써야 해.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가 아니야. 그보다 300년 더 빠른 가락국 김수로왕 때야.’ 산길은 은하사∼천진암∼구름다리∼정상∼고개∼화인아파트로 이어지는 사찰답사를 겸한 가족산행으로 적당한 아주 편안한 코스로 잡았다. 주차장 약수터에서 식수를 채우고 동림사 입구를 지나면 은하사에 닿는다. 절집뒤편에 마치 병풍처럼 드리워진 신어산과 호위무사처럼 도열해 있는 바위군상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달마야 놀자’라는 영화 촬영지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이 곳은 끊임없이 중창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내를 둘러보고 다시 도로로 나와 오르면 천진암 입구 주차장에 닿고 가파른 계단길이 이어진다. 천진암에서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아름다운 바위지대와 아늑하게 자리잡은 동림사의 모습이 잘 보인다. 법당은 가건물로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을 달고 있는데 비해 산신각은 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암자 왼쪽을 가로지르며 길이 이어지고, 나무계단이 깔린 산길을 쉬엄쉬엄 오르면 이내 헬기장이 있는 신어산 주능선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50분 소요. 이 푸근하고 편안한 능선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이어지는 낙남정간마루금이기도 하다. 오른쪽 멀리로 평평한 신어산 정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쁘장한 구름다리와 능선 중간중간 자리하고 있는 바위지대, 터널을 이루는 숲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어느새 매점이 있는 너른 광장에 닿는다. 장유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영구암에서 올라오는 길이 나 있다. 이제 헬기장 너머 정상은 지척이다. 신어산 정상에서의 조망의 백미는 유장하게 흐르며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는 낙동강과 독수리의 머리를 닮은 금정산 고당봉의 모습이다. 정상에서 진행방향으로 내려다 보이는 능선의 모습은 참으로 여유롭다. 탁 트인 고개의 모습에 끌려 내려서면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두 갈래, 상동면 매리로 이어지는 낙남정간길과 선암다리, 즉 돛대산으로 이어지는 신어산종주 코스로 갈라진다. 오른쪽 선암다리 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약 30여분 내려서면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임도에 닿는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김해대학을 거쳐 화인아파트로 하산하게 되고, 계속 직진하여 나아가면 선암다리로 이어지는 종주코스를 걷게 된다. ■ 자가용 남해고속도∼동김해IC∼인제대 지나 갈림길∼은하사 ■ 대중교통 교통이 편리한 부산을 거치거나 김해로 직접 이동.(김해터미널 055-327-7880) 구포역 앞에서 김해행(인제대, 어방동, 삼방동) 버스 이용. 은하사로 바로 가는 대중교통수단이 없으므로 인제대 위 삼방버스 정류소에서 도보로 이동하거나(30분), 택시 이용(4000원 055-322-3333) ■ 숙박 부산이나 김해의 숙박시설 이용 ■ 산행소요시간 주차장-(30분)-천진암-(20분)-능선 헬기장-(30분)-정상-(10분)-고개-(30분)-갈림길-(40분)-화인아파트/총산행소요시간 2시간40분 ■ 참고 http://tour.gimhae.go.kr
  • [책꽂이]

    ●통(通)하고 싶은가(강미은 지음,매일경제신문사 펴냄) 로마 황제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병사들에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다.그가 만약에 “자,이제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자.”라고 했다면 무슨 감동을 줬을까.리더에겐 모름지기 시적 언어 혹은 레토릭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저자(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선 세상 일에 대해 늘 관심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비유와 은유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1만원. ●야생의 낙원(마토 바푸스 지음,이승은 옮김,북라인 펴냄) 독일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저자의 아프리카치타 관찰기.동부 아프리카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의 야생동물뿐 아니라 그곳 원주민의 신산한 현실도 소개한다.저자는 생태계 순환의 한 부분을 이루던 마사이족이 사라짐으로써 사자나 하이에나의 숫자에 대한 조절력이 급격히 약화됐고,이는 다시 치타의 생존을 위협하게 됐다고 주장한다.자연은 절대로 경영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담겼다.1만 4500원. ●가야인의 삶과 문화(권주현 지음,혜안 펴냄) ‘한국고대사의 변방’에 놓인 가야와 가야 사람들의 삶과 문화의 흔적들을 살폈다.가야사를 전공한 저자는 가야를 미완성의 고대국가로 보는 것은 상대주의적 혹은 결과론적 시각이며,가야는 나름대로 완벽한 체제를 갖춘 공동체였다고 주장한다.사람이 죽으면 애도의 표시로 치아를 뽑는 습속 등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가야인들의 관습에 대해서도 소개한다.1만 4000원.˝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2)대원위대감의 생각 (上)

    조선 제26대 국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 이하응(李昰應)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렀다. 그는 조선후기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쇠락한 왕권을 강화해 프랑스,독일,미국,일본,청나라,러시아등 19세기 세계 열강의 침략에 맞설 힘을 기르며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오늘은 그 대원위대감이 왜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결과는 어떻게 끝났는지,파란만장한 그의 생애 이면에 감춰진,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의 한 증거를 찾아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로 간다. 예산(禮山)은 유서깊은 고장이다.백제시대에는 오산현(五山縣)이라 불렀는데 신라에 정복당한 뒤 고산(高山)으로 바뀌었으며,예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2년의 일이었다. 왕건은 견훤이 다스리던 후백제를 정복한 뒤 이곳을 다스리려 했으나 민중은 왕건의 통치에 순응하지 않았다.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신라에 정복당한 뒤 100년이 넘도록 신라의 강권통치에 대를 물려 저항해왔던 백제유민들이기 때문에 백제가 망한 지 2세기가 지난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왕건에 대해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인들의 핏속에 흐르는 자긍심과 백제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정신의 힘때문이었다. 이 정신은 곧 현대사회에서도 충청·전라도 사람들의 기질,즉 겉은 부드럽지만 안은 강철처럼 단단하고,문학과 예술 그리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지향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정복자로서의 권위나 자신감이 아닌,존경과 화해의 마음으로 새로운 이름을 선물하고자 했다.충절과 예의의 고장임을 기리기 위해 예산이란 새 이름을 정하고 민중의 뜻을 물었다.이곳 사람들도 더는 거부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된 고려왕조에 동의해주었다. 그 후 대흥(大興)과 덕산(德山)을 합쳐 지금의 예산군이 된 것은 1914년부터다.오늘의 여행 목적지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상가리(象伽里)에는 대원위대감의 야망과,권력 장악을 위한 고뇌와 갈등,정치의 권모술수와 피할 수 없는 재앙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와 문화적 논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이 증거들을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싶을 것이다.그리고 역사를 향하여 그 사실들을 부정할 것이다.한국의 정치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 증후군으로 볼 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하지만 어쩌랴,누구도 자신의 죄를 제 손으로 지울 수는 없으니. ●‘명당’ 가야사 품은 옥양봉, 기도처로 이름나 덕산 들녘에서 서북 방향을 바라보면 예산군과 서산군 경계 쯤에 산맥이 걸쳐 있다.가야산(伽倻山)이다.들길을 지나 상가리 쪽으로 다가서면 맞은편에 잘 생긴 산 하나가 보이고,오른쪽으로도 얌전한 산봉우리 하나가 나타난다.맞은편 산은 옥양(玉陽)산이고,오른쪽 산은 서원(書院)산이다.두 산 모두 가야산이 거느리고 있는 줄기다. 해인사가 깃들어 있는 산도 가야산이라 부르는데,경상도와 충청도에 있는 가야산은 모두 같은 뜻을 지녔다.즉 가야(伽倻,迦倻)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gaya를 음역하여 표기한 것인데,흰코끼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곳을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 것과 맥이 통하는 상징어다.이 가야산에는 일찍이 6세기 후반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북쪽 자락 해발 200m 가량의 능선 암벽에 새겨져 있기도 해서 온 산이 불교신앙의 성지처럼 숭배되어 왔다. 가야산 남쪽 기슭이 되는 옥양봉 아래에 가야사(伽耶寺)라는 절이 있었다.이곳에는 금탑(金塔)으로 부르는 철첨석탑(鐵尖石塔)이 있었고 탑 사면에는 석감(石龕)이 있어 각각 석불이 봉안되었을 만큼 빼어난 작품이었는데 백제 불교 미술의 정교함과 깊은 신앙심이 깃든 걸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사에는 예부터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매우 흥미있는 풍수설이 전해져 왔다.가야사 대웅전 터에서 왕손(王孫)이 생겨나리라는 풍수지리설이었다.세간에서는 절을 허물어내고 그 자리에 묘를 쓰면 반드시 왕손을 낳게 된다는 풍수설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하지만 감히 누구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는 못하고,대신 훌륭한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기도처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옥양봉에 이르는 계곡은 펀펀하면서도 깊다.그래서 그런지 옥양봉 계곡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사찰들로 꽉 차서 절골이라고도 불렀을 만큼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범종소리,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일년 사철 끊이질 않았다.상가리(象伽里)라는 이름이 그래서 붙여졌던 것이다. ●구걸로 어린시절 연명한 ‘권력의 화신’ 이하응 이같은 솔깃하고 엄청난 비밀이 깃든 것처럼 느껴질수도 있는 풍수설을 은밀하게 새기면서 가야사 주변을 여러 해 동안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이하응이란 청년이었다.올때마다 동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름난 지관(地官)이었다.그는 옥양봉,서원산,가야산 정상 어느 한곳도 빼놓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고 돌아다녔다.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전혀 얼굴이 알려진 자도 아니었거니와 행색도 남루했고 늘 빈털터리였다. 이하응은 유아기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이다.이름은 구(球),사도세자의 서자로서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남연군(南延君)에 봉해졌다.1771년(영조 47년) 양부 은신군이 정적의 모함으로 작위를 삭탈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변사하자 남연군도 불우한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1821년 수릉관(守陵官)이란 말단직을 지내다가 쓸쓸하게 죽었다.이하응은 남연군이 죽던 해에 겨우 세 살짜리 어린 아이였었다. 이하응의 유년과 청년 시절은 지독하게 불우했다.이름뿐인 왕족으로서 구걸,비웃음과 온갖 능멸로 양식을 삼았다.수모,고뇌,방랑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암울하고 억울한 세월 속에서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권력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불태웠다.집념의 핵심은 목숨을 건 타협과 거래였다. 긴 방랑생활 중에 이하응은 가야사의 풍수설을 알게 되었다.딱히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심심풀이 삼아 가야사와 가야산 일대를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풍수설의 내용을 음미해보았다.왕손을 낳을 수만 있다면 가야사를 불태워버리는 일쯤은 얼마든지 감행할 자신이 있었다.수차례에 걸친 답사와 계획 끝에 결심을 굳혔다. 그의 나이 21세 때인 1840년(헌종 6년) 마침내 목숨을 건 모험에 돌입했다.부랑배들을 이용하여 가야사에 기거하는 승려들을 밖으로 유인해 낸 다음 절에다 불을 질렀다.목조 건물은 한밤 중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무렵 조선사회는 이하응의 행동과 같은 짓거리들이 크게 유행했다. ●남연군묘 이장뒤 얻은 둘째 명복이 훗날 고종 전국 곳곳의 사찰이 불타고,불탄 자리에 무덤을 짓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대표적인 예는 신라 선문9산의 하나인 경남 창원 봉림사,경기도 양주 회암사,전라도 흥덕 연기사,경남 산청 단속사를 비롯해 풍수지리설에서 명당자리로 알려진 사찰들이 유생들에 의하여 불탔다. 이같은 시대적 추세에 따라 이하응도 그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사 법당터에다 이장했다.누구도 이를 비난하거나 저지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해인 1841년 그는 흥선정(興宣正),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184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어 벼슬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남연군의 묘를 옮겨 쓴지 12년만인 1852년 이하응은 둘째아들을 보았고,그로부터 다시 11년 뒤인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조선 제 26대 국왕인 고종(高宗)이 되고,이하응은 마침내 대원위대감이 되어 모험에 찬 정치도박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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