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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보고’ 제주 곶자왈 살린다

    ‘제주의 아마존 정글’ ‘제주섬의 허파’라 일컬어지는 제주의 ‘곶자왈’ 지대가 특별관리에 들어간다.(서울신문 1월17일자 1면 보도) 제주도는 지하수 함양지대이면서 생태적 보전가치가 높은 곶자왈지대에서의 수목굴취 및 용암석 도채행위 등을 막기 위해 곶자왈지대를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등 특별관리대책을 마련, 추진할 계획이라고 15일 밝혔다. 제주도는 이달 중 환경단체와 환경·산림 담당부서, 수목시험소, 한라산연구소, 민속자연사박물관 등과 공동으로 ‘민관합동 곶자왈 실태조사 감시단’을 구성해 오는 10월까지 도내 곶자왈지대를 일제히 조사, 멸종위기 동·식물 지역의 경우 야생동·식물보호법 규정에 의한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해 토석채취, 토지 형질변경 등 행위를 철저히 규제할 방침이다. 또 세부 실천계획을 수립, 월2회 정기단속을 실시하고, 곶자왈 인근 마을회와 청년회 소속 자연보호명예지도원 등으로 ‘민간 환경감시단’을 구성, 일상적인 감시활동을 펴도록 하며 내년 예산에 보상금 예산을 확보, 곶자왈내 위반행위를 신고할 경우 보상금을 지급키로 했다. 이와 함께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특별법 시행 조례를 개정해 곶자왈내 특산 식물을 보존자원으로 지정, 관리하고 지정된 보존자원에 대해서는 도외반출 및 매매 등에 따른 구체적인 관리방법을 고시하는 등 곶자왈 서식 야생 특산식물을 적극 보호할 방침이다. 제주도는 특히 2006년 지하수·생태계 관리보전지역 재조 사시 용암·지질·경관·생태 등에 대한 종합조사를 실시해 곶자왈 기준과 분포 범위를 구체화하고 자연림 등 생태적으로 우수한 지역은 지리정보시스템(GIS)등급을 상향조정키로 했다. 이외에 개발이 진행 중인 곶자왈지역 사업장에 대해서는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책임감리제를 실시하고 환경영향 평가에 따른 사후관리 감시를 강화하는 등 친환경적 개발이 이뤄지도록 할 방침이다. 곶자왈은 한라산 화산활동으로 반액체 상태의 용암물질인 마그마가 흘러내린 곳을 따라 나무, 덩굴, 가시덤불 따위가 무성하게 자라 밀림을 이룬 곳을 일컫는 제주말로, 천량금·검정비늘고사리 등 다양한 식물군이 숲을 이루고, 지하수를 생성하기도 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나 최근 도로·골프장·리조트단지 등 각종 개발이 이뤄지면서 급격히 파괴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개발광풍에 파헤쳐지는 ‘생태계 寶庫’

    개발광풍에 파헤쳐지는 ‘생태계 寶庫’

    중남미에 ‘아마존 정글’이 있다면 제주에는 ‘곶자왈’이 있다. 아마존 열대밀림이 지구의 허파라면 곶자왈은 제주섬의 허파다. 용암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돌무더기 위에 다양한 식물군들이 자라나 숲을 이루고, 나무나 돌에 붙어사는 희귀한 착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곶자왈은 지하수를 생성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寶庫)다. 법정 보호종인 천량금과 개가시나무를 비롯해 방울꽃, 큰톱지네고사리, 쇠고사리, 제주고사리삼, 큰우단일엽, 나도은조롱, 검정비늘고사리, 숫돌담고사리, 개톱날고사리 등 무수한 희귀식물군이 이곳에서 자란다. 우리나라 양치식물의 80%가 곶자왈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곶자왈 생태계’가 무분별한 도로개설과 골프장 및 리조트 건설로 인해 제모습을 잃고 있다. 위기속의 제주도 곶자왈 실태와 곶자왈 지킴이들의 활동상 등 곶자왈 생태계를 점검해 본다. ●한라산만의 독특한 숲생태계 유지 제주의 곶자왈은 대부분 해발 200∼600m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라산 중턱을 동서로 연결하는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크게 한경·안덕곶자왈, 애월곶자왈, 조천·함덕곶자왈, 구좌·성산곶자왈 등 4개의 주요 곶자왈로 구분된다. 다시 북제주군 선흘곶자왈, 교래·함덕곶자왈, 조천·대흘곶자왈, 애월곶자왈, 종달·한동곶자왈, 수산곶자왈, 상도·하도곶자왈, 세화곶자왈, 남제주군 월림·신평곶자왈, 상창·화순곶자왈 등 10개 본류로 나뉘고 이것들은 다시 무릉·고산·저지·와산·산양곶자왈 등 수십개 지류로 갈라진다. 이들은 지리적으로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니면서 한반도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라산만의 독특한 숲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부의 구좌·성산곶자왈은 후박나무 등 녹나무과 식물의 점유도가 월등히 높고 북부의 선흘곶자왈은 한반도 최대의 상록활엽수림지, 조천·함덕곶자왈은 붓순나무와 식나무군락지, 남부의 한경·안덕곶자왈은 국내 최대의 개가시나무 자생지로 꼽힌다. 곶자왈의 자랑은 뭐니뭐니 해도 ‘넘치는 생명력’이다.‘곶자왈사람들’송시태 대표는 “제주에만 있는 곶자왈은 크기 1m 이상 되는 블록형 암괴들이 얼기설기 얽혀 있고 이 암괴들이 식물성장에 필요한 보온·보습의 역할을 해 양치식물의 왕국을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제주 생태계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천연난대림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암반 사이로 10도 안팎의 지열 올라와 암반과 암반사이로 사시사철 뿜어 나오는 영상 10도 안팎의 지열, 이것이 한겨울에도 푸른 숲을 유지해 주는 에너지인 셈이다. 제주의 생명수인 지하수의 원천도 바로 ‘곶자왈’이다. 암석과 암석사이의 틈을 통해 빗물이 80% 이상 무한정 유입됨으로써 지하수 공급원이 되고 있다. 제주대 현해남(환경생명공학과)교수는 “곶자왈 지역의 투수성은 일반 지형에 비해 1000∼1만배 이상 빨라 시간당 50㎜를 소화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곶자왈은 이밖에 노루, 오소리, 다람쥐, 족제비, 등줄쥐, 비단털쥐, 뱀 등 야생동물이나 집게벌레, 딱정벌레, 하늘소 사슴벌레 등 곤충들의 주요 이동 통로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라산과 취락지 해안을 연결하는 생태벨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곶자왈 밀림’ 대부분은 수백년 동안 벌채돼 엄밀하게는 2차림에 속하지만 ‘빨리 자라는’속성으로 인해 원시림에 비견할 만한 생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제주지역에서도 거의 유일한 상록활엽수림지대를 비롯해 낙엽활엽수림지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화한 지역인 서귀포시 섶섬이나 천지연 등 난대림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천량금, 검정비늘고사리 등 남방계식물군부터 최북단 두만강이나 압록강변에 분포하는 골고사리, 진퍼리 등 북방계식물군까지 두루 자생하는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자연자원이다. ●용암석·희귀식물 불법 채취도 빈번 이러한 ‘곶자왈’이 도로, 골프장, 리조트단지 등 갖가지 관광개발 광풍속에 훼손돼 위기를 맞고 있다. 본류 ‘곶자왈’가운데 세화곶자왈은 온천지구를 만든다며 이미 대부분 파헤쳐져 흔적만 남은 상태이며 월림·신평곶자왈도 리조트공사와 골재채취 등으로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애월곶자왈도 도로개설 등 각종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대의 상록활엽수림인 동백동산을 낀 선흘곶자왈 역시 묘산봉관광지구개발계획에 따라 파괴될 날이 머지 않았다. 군소 곶자왈들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곶자왈지대에는 또 수석인들 사이에 ‘바가지석(용암구)’‘신비석(용암수형)’‘부챗살(용암튜브 또는 용암수형)’‘뽀빠이(용암구 내부구조)’ 등으로 불리는 특이한 용암형상석들이 많아 전문 도채꾼들에 의해 잘리고 파헤쳐지는 수난마저 따르고 있다. 수석이나 화분·어항 등으로 사용하기에 그만이어서 어떤 것은 개당 수천만원까지 호가해 도채꾼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 북제주군 고산곶자왈지대에서 천리향·백양금·춘란 등 자생식물 수백그루를 불법채취한 조경업자가 해경에 검거됐다. 이에 앞서 11월에는 남제주군 무릉곶자왈지대 4만여평에서 4.5t트럭 200대분의 자연석을 무단 채취한 조경업자가 구속됐고 10월에는 곶자왈지대에서 불법채취한 것으로 보이는 자연석 250여점을 목포행 카페리편으로 반출하려던 도채업자가 붙잡혔다. 이 모두 곶자왈을 앓게 하는 일들이다. ●조례제정 등 보호장치 마련을 제주도는 뒤늦게나마 곶자왈지대에 다량 산재하는 용암석 등 화산암류를 포함한 화산분출물, 퇴적암, 퇴적층, 자연석 등을 보존자원으로 지정 보호하기 위해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 시행조례를 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대부분의 곶자왈이 개발에 지장이 없는 생태계보전지구 2∼3등급임에 따라 생태적으로 우수한 곳을 골라 오는 2007년 GIS등급 재조정시 1등급으로 올려 무절제한 개발을 막기로 했다. 그러나 환경단체들은 이 정도의 보호계획은 턱도 없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곶자왈지대에서 희귀식물이 발견된다 해도 보호종으로 지정되려면 최소 2∼3년이 걸려 그동안은 무방비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보호종 지정은 국가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이어서 실제 보호종으로 지정되는 식물이라고 해야 한정될 수밖에 없어 특단의 조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소중한 식물자원이 국내외로 반출되거나 훼손될 일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강은정 제주YWCA 사회개발위원장은 “제주도 등 자치단체가 곶자왈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조례제정 등을 통해 희귀식물 보호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이며, 지하수 유입이 쉬운 만큼 취약한 지하수 오염을 막기 위해서도 2등급인 지하수 등급을 조속히 1등급으로 상향 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교수·교사등 50여명 ‘곶자왈 지킴이’ 앞장 제주도내 환경단체 회원과 교수·교사, 언론인 등 50여명은 ‘곶자왈사람들’이라는 환경NGO를 만들어 ‘곶자왈 지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들은 지난 8일 제주도문예회관에서 창립행사를 갖고 앞으로 일체의 곶자왈 파괴 행위를 거부하고 보존에 앞장설 것을 결의했다.‘곶자왈 선언문’에서 이들은 “곶자왈을 통해 인간의 공존과 상생, 순환의 원리를 터득하고 미래 제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성장 만능주의를 경계하며 평화와 평등, 공존의 정신이 살아 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환경 파괴적인 소비생활을 거부하는 친환경적 삶을 실천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동안 음지에서 알게 모르게 곶자왈 보전을 위해 노력하던 이들이 무분별한 관광지 개발로 인해 생명의 터전인 곶자왈 파괴가 가속화돼 미온적인 보전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 사수를 공식 천명한 것이다. 이들이 창립을 서두른 것은 지난해 9월 승마장 사업자가 남제주군을 상대로 제기한 ‘승마장 사업승인 불허가처분 취소소송’에서 법원이 내린 판결이 계기가 됐다. 제주지법은 “남제주군이 곶자왈임을 이유로 사업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며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곶자왈에 대한 연구 조사 및 자료화 사업, 세미나 및 출판사업, 교육 및 홍보사업, 보존을 위한 각종 사업, 환경보전을 위한 각종 단체와의 연대사업 등을 펴나갈 계획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곶자왈이란 무엇인가 ‘곶자왈’이란 한라산의 화산활동으로 반액체 상태의 용암물질인 마그마가 기생화산인 오름을 생성하면서 흘러내린 곳을 따라 나무, 덩굴, 가시덤불 따위가 무성하게 자란 곳을 말한다. 골프장이나 승마장, 리조트호텔 등으로 적합한 해발 100∼600m지역에 분포돼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라산의 화산활동 당시 스코리아류 등에 의해 운반된 자갈과 화구로부터 방출된 화산탄 및 화산자갈이 뒤섞여 쌓인 ‘암괴상 용암류(岩塊狀 熔岩流)’위에 양치식물 등이 자라면서 숲을 이룬 곳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을 제외하고는 자연림 형태로 보존가치가 매우 뛰어나지만 그동안 벌채, 약초캐기, 표고버섯 재배장 등으로만 이용됐을 뿐 ‘버려진 땅’으로 천대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환경론자들에 의해 생태계의 보고로 부각되면서 언론계와 학계, 해외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 생태적 가치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일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 儒林(22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공자의 질문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 큽니다. 그래서 천하가 선생님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도를 약간 정도 낮추어 절충하지 않으십니까.” 자공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역시 실망하여 말을 이었다. “사(賜)야, 훌륭한 농부는 씨를 잘 뿌릴 줄은 아나 반드시 수확을 잘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 또 훌륭한 공인은 물건을 기묘하게 만들 줄은 아나 반드시 사람들 맘에 드는 것만을 만든다고는 할 수가 없다. 군자는 그 도를 닦고 기강을 세우고 이것을 통제하고 정리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용납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자기의 도는 닦지도 않고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 똑같은 스승의 질문에 대해 자로와 자공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무인 기질이 뛰어나고 용감한 자로의 대답은 외뿔소도 호랑이도 아니면서 거친 광야를 헤매는 것은 아예 우리 자신이 어질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발로였고,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은 일단 스승의 도가 위대함은 인정을 하면서도 어찌하여 약간 낮춰서 절충하고 타협하지 않는가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자기반성과 전혀 다르다. 자신을 부정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존엄성이 상실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자학이 시작되며, 자신의 파괴가 시작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가 가치관을 앗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반성은 인간성을 회복시키나, 철저한 자기부정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로의 자기부정은 얼핏 보면 겸손해 보이지만 결국 전부 아니면 무라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의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는 니힐리즘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자공의 타협안은 일부부정이다. 도의 위대함은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그것을 약간 낮추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느냐의 외교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 공자는 자신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씨앗이 어떻게 수확되는가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 예수도 자신을 똑같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음이 성경 곳곳에 나오고 있는데, 이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져 큰 수확을 맺고 못 맺음은 받아들이는 땅에 있지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다 타버려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강조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 역시 자로에게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하고 탄식하였던 것은 그토록 함께 있으면서도 공자의 말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자로에게 실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4)18년만의 시화호 외출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4)18년만의 시화호 외출

    최후를 목격하는 일처럼 불행한 경우가 있을까. 낡은 사진첩과 답사노트를 뒤지면서 시계바늘을 18년 전으로 되돌려본다. 시화호가 망가지기 직전을 목격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시에 찍었던 사진을 사회적으로 공개할 의무감을 느낀다.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틈만 나면 시화호에 가서 살았다. 당시에는 시화호란 명칭도 없었고 그저 화성이나 안산 앞바다로 일명 ‘반월만’이었다. 물론 갯벌을 둘러싼 환경운동이나 갯벌환경에 관한 인식조차 공론화되지 않던 시절.1987년 6월10일, 역사적인 시화호 방조제공사가 시작되었다. 엄습해오는 예감이라고나 할까. 시화호 내의 음도나 형도, 어도, 아니면 화성의 송산면이나 서신면, 우정면 등의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민중생활사의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흔적없이 사라진 계명산 봉화대 저울섬이라 불렀던 형도는 물이 썰면 송산면 독지리 쪽에서 30여분만에 쉽게 걸어들어갈 수 있었다. 독지리 사람들은 봄에는 가무락·동죽·대합·피조개·소라·낙지를 잡고, 여름에는 맛, 가을에는 낙지·쭈꾸미 등을 채취하였다. 물고기는 숭어·농어·민어·새우·꽃게·전어를 잡았다.1988년, 독지리 사람들은 보상 문제에 골몰하였다. 오래 살아온 1등급은 호당 900여만원, 분가한 이들은 2등급으로 호당 850만원, 심지어 최저 100만원 정도를 받는 이도 있었다. 배 보상도 이루어져 작은 배는 서신면의 용두리, 궁평리 쪽으로 팔려나갔으며, 큰 배는 소래포구로 팔렸다. 형도에는 30여가구 120여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낙지와 바지락·굴·피조개·숭어, 새우, 농어 등을 잡았다. 본디 어부들의 살막만 있던 무인도였는데 기미년(1919) 만세운동으로 쫓겨온 이들이 정착하여 어업에 종사하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피란민이 밀려들어와 마을이 커졌다. 형도 복판의 계명산을 허물어 바지선으로 돌을 실어날라 방조제를 막았다. 그래서 형도 동쪽 해변에는 중동에서 퇴직한 중장비들이 대체 일감을 찾아 빼꼭하게 들어차 있었다. 계명산 정상을 올라가니 봉화를 올리던 석축봉화대가 완형으로 보존되어 있었다. 계명산을 신성한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며, 봉화대 밑에는 바위가 겹쳐진 동굴이 있어 이 역시 신성시되었다. 마고할매가 쌓은 봉화대라고 했다. 동굴은 비단실 열꾸러미를 넣어도 바닥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고 했다. 호기심이 동하여 동전을 던져보았더니 실제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관해기’를 쓰기 위하여 다시 찾았을 때, 동굴도 없어졌으며 봉화대도 사라졌다. 쉽게 말하여, 문화유산을 깔아뭉갠 것. 음도는 형도와 달라 지명유래처럼 소가 누워 있듯 나지막한 섬이다. 파평 윤씨가 사화 때 역적으로 몰려서 낙향하여 개척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밀도가 높아서 160여명이 살고 있었으며 어업이 주종이었다. 섬 북쪽 선착장에서 뱃길로 안산시 사리포구쪽으로 빠지거나 화성의 독지리와 고정리 사이에 위치한 목섬을 거쳐서 걸어들어갔다. 형도 가는 길과 달리 음도는 멀어서 무려 한 시간여를 걸었다. 물 때를 잘못 맞추면 걸어가다가 조류에 휩쓸려 죽는 이도 많았던 섬이다. 갯벌을 걸어가면서 굴따는 ‘자세’로 지천으로 널린 굴을 까먹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음도 사람들은 섬 정상의 숲속에 소당이라 부르는 신당을 모셨다. 조기잡이의 신인 임경업 장군, 각시, 소댕애기씨, 말구중 등 무속신을 모시고 있었다. 선착장 갯가에는 당나무가 서있고 바위가 쌓인 곳은 군웅당이라고 했다. 고정리 쪽 갯가의 돌출바위는 각시당(일명 나락부리당)이라 불렀다. 밀물 때는 보이지 않고 썰물에만 모양이 나타나는 각시당은 갯벌 복판에 서있어 갯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지켜준다고 하였다.18년 뒤의 음도에도 여전히 신당 건물은 숲속에 남아 있다. 우거진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시금 신당문을 여니 그림들은 간곳이 없다. 찾아온 길손에게 낙지를 거저 주면서 연신 술잔을 권하던 어민들도 사라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옛사람들이 일부 살기는 하지만 예전의 떠들썩함은 찾을 길이 없다. 초등학교를 찾아가니 아직도 건물은 의연한데 주인 잃은 그네는 줄이 끊어진 채로 시간이 멈춰섰다. 마산포에서 걸어들어가던 어도는 음도나 형도와 달리 당시에도 시멘트 포장이었다. 마산포구에는 횟집이 번성하고 있었고 물이 나면 쉽게 어도로 들어갔다. 포도밭을 지나 언덕배기를 내려가면 어도 가는 길목의 해변 초입에 해안초소가 있고 터주가리처럼 생긴 신당이 바위 위에 모셔져 있었다. 고포리의 마산포는 반월만의 어업전진기지로서 형도·어도·선감도·탄도·불도와 연계되었다.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인천 가는 연락선이 대부도와 영흥도를 거쳐서 다녔다. 따라서 대부도 사람들은 마산포를 거쳐서 사강장을 보았으며, 이곳의 생활권도 뱃길로 인천과 서울로 이어졌다. 이제 대부도와 영흥도는 시화호로 연결되어 4차선 도로로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고포리 어촌계는 당시에 224호에 도합 1000여명에 달하는 조합원을 거느리는 대단위 조직이었다. 고포리의 굴은 알이 작은 대신에 맛이 뛰어났다. 갯벌에서는 맛이 지천으로 잡히고 있었고, 봄·가을에는 숭어, 여름에는 농어, 그 외에 꽃게와 게장용 박하지가 많이 잡혔다. 오랜만에 찾아가본 시화호는 정말이지 예전이 아니었다. 상전벽해는 이를두고 말함이렷다.‘남양인천’으로 불릴 정도로 큰 외항이었던 비봉면 유포리(일명 버들무지)는 예전에는 남양관아로 연결되던 중요한 포구였다.1960년대까지는 조기잡이 중선배가 있어 연근해어업을 다녔다. 가리맛의 주생산지였으나 건너편에 반월공단이 들어서면서 어업은 일찍이 막을 내렸다. 우정면 호곡리를 들어서니 예전에 없던 어시장이 들어섰다. 호곡리는 범아지라 불렀으며 바닷가를 백년거지라 했다.‘백년을 거처할 수 있는 좋은 곳’이라는 뜻. 범아지의 바닷가로 돌출한 산에는 당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백년거지는커녕 화옹호에 가려졌다. 수산물이 어획되지 않는 동네에 웬 어시장일까. 거개가 수입산이나 외지에서 들여온다는 솔직한 답변이다. ●물고기 쫓겨난 시화호는 사막일 뿐 물새가 노닐던 해변이 갈대밭으로 덮이면서 아예 ‘우음도 갈대축제, 갈대보러 오세요’ 그런 글이 인터넷에 떠있다. 해초 대신에 갈대라! 문전옥답인 바다밭은 갈대밭으로 변하고, 아직도 죽은 조개껍질들이 하얗게 뒤덮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갯벌에 관한 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지난 20여년간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시화호 출신 해양생태학자로서 국회로 진출한 제종길 의원은,“갯벌문제는 간단히 보면 해양생태 보존과 개발론의 싸움이지만, 지역감정은 물론이고 지역정치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총체적 문제점들이 모조리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새만금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시화호도 끝나지 않았다. 시화호가 미완의 장인데 바로 코밑에서 화옹호를 기어이 막았다. 세인들은 간척의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갯벌문제만 나오면 이제는 지겨워한다.‘듣기 좋은 노래도 자주 들으면 지겹다.’(歌曲雖艶 恒廳斯厭)는데 불길한 예언만 쏟아져나오니 아무리 취지가 좋은들 약발이 덜 먹힌다. 간척론자들은 호재를 부른다. 결코 사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자원공사를 비롯한 간척주도집단의 ‘밥벌이’를 위해서 간척이 계속되고 있다는 주장은 대단히 설득력 있다. 문제점 투성이인지라 종합성적이 낙제점 이하인데도 책임을 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잘못한 이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불감증사회’답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나름대로 생태계가 되살아나고 물고기도 돌아오고 심지어 돌고래까지 돌아오고 있다는 밑도끝도 없는 낭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한다. 시화호에서 돌아오기 전, 예전에 늘 드나들던 송산면 옛바닷가로 나갔다. 갯벌로 가던 언덕배기를 넘자 한가로운 오솔길 대신에 신작로가 나타났고 조개를 캐던 갯벌터에 농구골대도 들어섰다. 배는 사라지고 연습용 경비행기들이 마중한다. 물고기가 부려지던 선착장은 흉물스럽게 콘크리트더미만을 남기고 있고 죽어버린 따개비만이 ‘여기가 예전에는 잘나가던 포구였소.’라는 무언의 항거를 하는 듯하다. 물고기가 쫓겨난 시화호는 사막일 뿐이다. 해수유통이 되면서 한결 나아졌고, 온갖 철새들이 몰려오고, 옛갯벌은 갈대밭이 되어 야생동물의 보고로 변하고 있으며, 공룡알들이 발견되었다고 아우성이지만 어찌 이토록 무정하게 ‘무단가출’했던 오염된 바다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으랴. 해결책은? ‘무식과격’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동안 투자한 그 모든 것이 아깝더라도 눈 딱감고 방조제를 허무는 길 뿐이다. ●새만금 운명도 시화호의 전철 못벗어날듯 오랜만의 시화호 외출에서 느낀 소감이 이러하니, 현재 진행되는 새만금의 운명 역시 시화호의 전철에서 한치도 못 벗어날 것 같다. 과거를 거울 삼아 오늘의 현실에 살리자는 감고계금(鑑古戒金)의 전범이 시화호일진대, 새만금은 시화호에서 충분히 배웠음에도 아직도 수업료가 부족한 것일까. 성호 이익은 ‘관가에 일이 없으면 촌동네도 조용하다.’(公府無事 村巷方安)고 하였다. 관청에서 불필요한 간척 같은 일을 벌이지 않으면 살 만하다는 뜻이거니와,‘지도가 바뀐다.’‘5000만평 땅을 건지다.’ 등등으로 국민을 현혹하면서 8000억원 이상의 돈을 들이고도 건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국민대사기극’, 시화호에 해당되는 말이 아닌가싶다.
  • “참여정부 잘 사는 것보다 정치에 더 몰두”

    “참여정부 잘 사는 것보다 정치에 더 몰두”

    “현 정부 들어 관치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김태동 금융통화위원)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좌파정책이 아니라 리더십 부재가 낳은 갈지자 정책이다.”(경희대 권영준 교수) 17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정책과제’(한국경제의 분석패널·한국금융연구원 공동주최) 학술토론회에서 정부 정책방향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과 최광 국회 예산정책처장 등이 주제발표자로 나선 이날 토론회에서는 참여정부의 정책기조에 대체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까지 정책 일관성과 시장원리 보호의지 등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최 예산정책처장은 주제발표에서 “현 정부는 겉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한다면서도 실제로는 반(反)시장주의 정책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했다.패널로 참석한 김광두 서강대 교수는 “참여정부는 집권 1년7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비전(Vision) 타령만 하고 있다.”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비전이 돼야 하는데도 경제보다는 정치에 더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금통위원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위기를 겪고 있는 LG카드를 다른 경쟁사더러 도와주라고 한 것은 관치”라고 못박고 “현 정부 들어 관치의 힘이 김대중 정부 때보다 더욱 세졌다.”고 지적했다. 나성린 한양대 교수는 “정부는 시장논리를 따른다고 하지만 비(非)경제부문에서 반시장적,분배 위주로 흘러 국정운용의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크다.”면서 “청와대·여당·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성장잠재력을 확충할 수 있는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정책기획위원장은 “참여정부는 오랫동안 선반 위에 얹혀 먼지만 수북이 쌓인 개혁과제들을 하나하나 꺼내 먼지를 털고 씨름을 하고 있다.”면서 “지금의 무조건적인 반대와 비방은 합리성의 수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맞받았다. 한편 이날 최 처장의 발언과 관련,열린우리당 전병헌 원내부대표는 “최 처장의 직분을 망각한 발언에 대해 국회에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균 김미경기자 windsea@seoul.co.kr ■ 참여정부 경제과제 토론회 17일 ‘한국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정책과제’ 토론회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최고위 경제전문가들이 정면으로 충돌했다.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은 시대적 요구인 개혁과제의 완수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고,최광 국회 예산정책처장은 집권세력이 반(反)시장주의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고 비난했다.특히 이 위원장은 “참여정부 1년반은 도처에 지뢰밭과 가시덤불이었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그동안 일어온 외부 비난에 강한 톤으로 반박해 나갔다. ■ 이정우 위원장 이정우 위원장은 ‘참여정부의 비전과 정책과제’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개혁은 비난받기 쉬우며 그 열매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열리는 법”이라면서 “개혁의 방법이나 수단이 잘못됐다면 얼마든지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해도 좋지만 지금의 무조건적인 반대와 비방은 합리성의 수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특히 “참여정부 정책의 대부분이 중도적 정책인데 이를 좌파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스스로 극우파임을 실토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제기된 각종 우려와 비판을 ▲일본형 장기불황 가능성 ▲남미형 경제침체 가능성 ▲제조업 공동화 ▲분배 우선의 평등주의·사회주의 성향 ▲반시장주의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 ▲국가경쟁력 약화 등 7가지로 정리하고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일본형 장기불황이나 남미형 경기침체는 현재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비교대상들과 달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제조업 공동화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이전 규모가 대단한 수준이 아니며 일본 중소기업 등 한국으로 들어오는 외국회사들도 많다.”고 설명했다.분배·평등 논란과 관련해서는 “문명사회에서 당연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조차 확보돼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복지·재분배 정책을 더 이상 쓰면 큰일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최소한의 양식도 없는 것”이라고 받아쳤다. 이 위원장은 “참여정부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하는 일부 주장 때문에 논란이 일어나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라며 “그런 뿌리없는 주장을 언론뿐 아니라 일부 학자들도 제기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학계의 (낮은)깊이를 말해주는 것 같다.”고 맹비난했다. ■ 최광 국회예산처장 최광 예산정책처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한국의 경험’이라는 주제문을 통해 “우리 경제는 번창의 길보다 쇠퇴의 길로 방향타가 맞추어져 있고,신뢰와 지도력 부족으로 불확실성의 먹구름에 덮여 있다.”고 말했다.자본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하려는 데서 각종 문제가 비롯되고 있다고도 했다.특히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주의(정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경제)라는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강조했다. 최 처장은 “1987년 이전에는 보수세력의 일방적인 득세가 있었던 반면 이후에는 진보세력의 목소리가 급속하게 커졌다.”면서 “이는 국민의 정부 들어 각종 반시장적 정책이 시행되는 이유가 됐다.”고 주장했다.그는 ▲기업·은행의 강제적 퇴출조치 ▲빅딜(대규모 사업맞교환)정책 ▲일률적인 부채비율 하향조정 압력 및 기업지배구조 적용 ▲은행의 실질적 국유화 ▲노동시장 경직화 ▲집단주의적 노사정위원회 설치 ▲노조의 경영참여 요구 허용 등을 예로 들었다. 최 처장은 “이런 흐름은 참여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면서 ▲아파트 원가공개 ▲수요공급 원리를 무시한 부동산 정책 ▲국토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국토균형개발정책 ▲노조편향적 노사정책 ▲출자총액제한제도 존치 ▲재벌계열 금융기관에 대한 의결권 제한 ▲소비자주권 공급자 자율을 무시하는 교육정책 ▲사학의 사회공영정책 ▲언론시장에 가해지는 각종 제한정책 등을 반시장 정책의 사례로 설명했다. 그는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살겠다고 국민들이 합의하면 정부가 좌파적인 정책을 해도 상관이 없지만 2만∼3만달러를 목표로 한다면 시장친화적인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We 동화] 별꼴 사슴 뿔

    “늑대다!” 누군가의 고함소리에,여름 숲속은 도망치는 발소리들로 어지러웠지.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늑대는 가장 느린 어린 꽃사슴을 물고 천천히 사라져 버렸어. “휴,이번에도 겨우겨우 살아 남았군!” 늑대가 자취를 감추자,검은꼬리사슴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자신의 앞발로 감싸안으며 숨을 몰아쉬었지.그때 토끼가 불쑥 나섰어. “그런데…너희는 왜 도망가니?”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맞닥뜨린 토끼의 물음에 사슴들은 얼굴을 마주보았어. “왜 도망가느냐고?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왜 도망가느냐니?” “야,내 말은 말이야,그러니까….” 토끼는 답답하다는 듯 앞발을 마주 비벼댔지. “아,물론 당연히 도망을 가야지.우리같이 아무것도 없는 동물들은.그렇지만….” 토끼는 부러운 듯 사슴의 뿔을 바라보았어. “너희는 뿔이 있잖아! 아주 크고 멋진 그 뿔! 그런데 어째서 도망만 다니느냐고?” 사슴들은 또다시 얼굴을 마주보았어.그러고는 천천히 합창하듯 말했지. “우린 말야,이 뿔을 남을 해치는 데는 쓰지 않아.” “뭐라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토끼가 물었지. “그렇지만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도?” 토끼는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 “내가 알기에 너희처럼 매년 새 뿔이 돋아나는 경우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것 같은데.그러니 뿔이 상할 것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도 아닐 테고….” 대답 없는 사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토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길을 돌렸지. “참 이상하구나,너희들은.다른 동물들처럼,약하고 어린 사슴들을 가운데에 모아 놓고,뿔이 튼튼한 사슴들이 빙 둘러서서 맞선다면,웬만한 동물들은 덤벼들지 못할 텐데.그럼 조금 아까 같은 희생도 줄어들 테고….” 토끼는 자신의 굴을 향해 뛰어가면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지. “정말 이상해! 그런 뿔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정말 알 수 없다니까.” 가을이 되었어.숲은 누렇게,더러는 붉게 단풍이 들기 시작했지.어디선가 들국화 향기가 바람에 슬쩍 얹혀 오기도 했고. “탁!” “탁!” 이른 아침부터 뭔가 단단한 것들이 세게 부딪치는 소리에 숲 속 동물들은 아침잠을 설치고 밖으로 나왔어. “아,저쪽 덤불 뒤에서 나는 소린데?” “조심해! 조용조용히.어쩌면 위험한 일이 생겼는지도 몰라.” 청설모는 꼬리를 달싹이며 살금살금 가시덤불을 향해 앞장을 섰어. “아니,저게 누구야?” 가시덤불을 헤치던 청설모가 외마디 소리를 냈어. “뭔데? 누군데 그래?” 청설모를 밀어내다시피 하고,토끼가 가시덤불 틈에 눈을 바짝 갖다 댔지.그랬더니…사슴 여러 마리가 있었어.그런데,사슴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 싸움을 하고 있었어.그것도 사슴,자기들끼리. 가장 몸집이 큰 사슴 한 마리와 약간 작은 사슴 한 마리가 서로 뿔을 맞대고 끙끙거리고 있었지.한참 동안 힘을 겨루다가 꽝,소리를 내며 뿔을 부딪치고 또다시 부딪치고….금세 작은 꽃사슴의 오른쪽 뿔의 가지 끝이 부러져 버렸지. 토끼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어. “저 친구들은 남을 해치는 데는 뿔을 휘두르지 않는다던데….” “그래,물론 그렇지.” 굴 속에서 고개를 내민 들쥐가,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어. “하지만 저 친구들이 지금 남과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잖아.남을,다른 동물들을 해치는 게 아니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토끼와 청설모는 거의 동시에 소리쳤어.그들은 들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 아,아직도 몰라? 이 잘난 사슴 족속들은 정말 필요할 때,위기에 처했을 때는 냅다 도망쳐요.그리고….” 들쥐의 말을 토끼가 잘랐어. “그리고 그 대단한 뿔을 자기들끼리 싸울 때,그때 사용한다는 말이야,지금?” “그래.그렇다니까.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군.” 들쥐가 고개를 끄덕였지. 부러움과 안타까움 등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섞여서,지독하게 입안이 썼지.토끼는 씹어 뱉듯 말했어. “쓸개빠진 녀석들! 자기들끼리 엉겨붙어 싸울 때만 뿔을 쓴다고,다른 땐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치고?” ●작가의 말 사슴은 정말 쓸개가 없답니다.그리고 뿔은 자기 방어용이라기보다는 다른 용도,예를 들자면 짝짓기를 위한 결투용 같은 경우에 더 많이 쓰인다고 합니다.사슴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지요? 우리 인간들만큼이나 말이에요.˝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6)백제인의 사랑 질표율사(하)

    삼국시대 후반 백제는 신라와의 지루한 전쟁으로 몹시 불우한 시대를 이어갔다. 신라는 백제를 넘어서 당나라와의 보다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국력을 키우고 싶어했고,그러자면 백제는 신라에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이 되었다.두 나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였다.신라의 집요한 침략전쟁 속에서 백제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 미륵신앙을 껴안았다.단순한 전쟁 회피나 불안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서가 아니라 신라의 군사 공격을 꺾어 응징하는 힘과 근원적으로 죽고 죽이는 살상전이 없는 세계에 태어나 살고 싶다는 구원을 향한 절절한 신앙이었다. 미륵신앙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백제인들은 백제 땅이 미륵부처가 강림하실 약속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면서 미륵사를 크게 짓고 미륵부처가 오시기를 기다렸다.미륵사가 삼국시대를 통하여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은 백제인들의 그같은 소망이 투영된 백제인의 마음으로 이룩한 신앙의 결정체였다. 미륵신앙은 100년이 넘도록 뜨겁게 달아올랐다.온 나라가 미륵신앙의 성지였다. 이같은백제의 미륵신앙을 유심히 살펴보던 신라가 뒤늦게야 슬며시 미륵사상을 배워가더니 백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미륵신앙을 현실화시키기 시작했다. ●신라에 정복 뒤 좌절빠진 백제 유민 화랑도와 미륵사상을 연결시켜 현실적인 국력으로 바꿔낸 것이다.미륵신앙을 표방하는 사찰을 짓기도 했지만 미륵사상이 현실화된 화랑도를 통하여 군사력을 극대화시킨 신라는 그 힘을 바탕으로 삼아 백제를 정복해버렸다. 어이없게도 신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진 백제는 그들의 염원으로 이룩한 미륵성지들과 함께 소망의 땅에서 절망의 땅으로 쫓겨난 셈이 되고 말았다. 좌절감은 크고 깊었다.이제 백제인들은 백제 유민이란 말로 바뀌는 가혹한 운명에 놓였다.그 때부터 처절한 저항의 날들이 시작되고,원한 또한 깊어졌지만 한번 뒤바뀐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신라는 아주 천천히 백제 땅과 사람을 신라의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갔다.먼저 백제의 역사를 신라기년(新羅紀年)으로 고쳐 신라기(新羅紀)에 삽입시켰다.백제를 정복한 지 100년이 가까워진 757년(경덕왕 16) 진표가 태어나 자란 고향의 땅 이름을 원래 지명인 두내산현에서 만경(萬頃)으로 바꾸었다.이는 정복지 백제에 대한 신라의 완전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진표는 이제 만경들판에서도 그치지 않는 백제유민들의 원한과 저주의 나날들이 미륵신앙의 힘으로 해원되어 신라와의 상생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이같은 격변속에서 진표는 아버지와 진지한 의논 끝에 금산사(金山寺)의 숭제(崇濟)법사를 의지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했다. ●유민들 고난 해결위해 ‘망신참회법’ 수행 숭제법사 또한 백제 유민으로서 일찍 당나라 정토종을 이끌던 선도(善導·613∼681)화상 법맥을 이어온 스님이었다.이제 진표는 스님이 되어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숭제법사는 진표스님께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주면서 각별한 수행을 권했다.점찰경이라고 부르는 이 경전은 말법시대(末法時代)가 되면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이 많은 어려움과 장애에 부닥쳐 수행에 곤경을 겪게 되고,산란한 마음때문에 갈피를 잡지못할 경우가 많게 된다고 했다.이때 숙세의 선악업보가 현재의 고락길흉을 점찰하여 참회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의 안락을 얻도록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숭제법사는 진표스님에게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보살에게 참회하여 직접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할 것을 당부했다. 진표스님은 백제 유민들이 100년 가까이 겪고 있는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과 능력을 구하기 위해 17년 간의 긴 고행에 돌입했다.육신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수행법의 하나인 망신참회법(亡身懺悔法)을 선택했다.육신을 버리지 않고는 깨달아지지 않는 수행법이었다.백제 유민들이 한 세기토록 겪은 육신의 고통을 자신의 한 몸으로 다 받아내겠다는 각오였다. 참회의 참(懺)은 산스크리트 Ksama의 음역으로 용서를 비는 것,뉘우치는 것을 뜻한다.내가 범한 죄를 부처 앞에서 고백하는 것,회개한다는 것인데,원시불교에서 비구는 자기가 범한 죄를 석가세존 또는 장로비구에게 고백하여 심판받도록 되어 있었다.비구는 보름마다 모여서 우포자타(uposatha·포살·布薩)라는 의식을 행하고,계율의 조목을 읽힐 때 마다 죄가 있을 때는 스스로 말하고 일어서야 했다.이렇듯 대승불교에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한 자는 모든 부처 앞에 참회하고,온몸을 던져 진리에 귀의하는 맹세를 하며,부처의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의 잘못을 거두어주는 은혜를 입음으로써 죄의 공포에서 해방된다고 했다. 이같은 의식의 궁극 목표는 죄의식이 전혀없어진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 하였다. 진표스님이 이같은 망신참회법을 선택한 것은 직접 자신이 진리를 체험하여 확신하기 위해서였다.그런 뒤 백제 유민들에게 참회의 필요성을 말하고,참회를 통하여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 자유를 숨쉬고 사는 삶을 권하려는 것이었다.육신의 고통을 극복하는 참회법은 일찍이 석가모니 시대부터 있어왔다.하루에 한 끼,이틀에 한 끼,사흘에 한 끼를 먹거나,나무 열매나 꽃으로 요기를 하거나,한 다리를 들고서 있거나,진흙 먼지 속에 누워있거나,가시덤불 위에 누워있거나,물과 불 위에 누워있거나,어깨쭉지의 살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끈을 밀어 넣어 나무가지에다 묶어놓고 피를 흘리며 매달려 있는등의 육신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어 그 고통을 잊어버림으로써 위대한 정신을 깨달으려는 수행법이었다. 진표스님의 망신참회법은 이들 전통적 수행법보다 훨씬 더 처절했다. 760년(경덕왕 19) 쌀 20말을 쪄서 말린 것을 가지고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면서 백제 유민의 고통을 구원할 수 있는 깨달음을 구하지 않고는 살아서 그 방문을 걸어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했다. 미륵부처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다.대부분의 출가승려들이 해온 전통적 수행법에 따른 정진이었다.그러나 3년이 넘도록 미륵불은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그때 진표스님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경전에 쓰여있는 수행법에 따라 참회하는 것만으로 백제 유민들의 그 오래고 참혹한 고난이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신라가 백제를 정복한 것은 땅 위에 백제 한 나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할 때는 피할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 일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우주 모든 것의 상관성 깨달아 진표스님이 망신참회법 수행을 결심한 것은 신라의 백제 침공을 꾸짖고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그보다는 백제인들이 한 세기가 넘도록 미륵신앙을 지니고 혼신껏 기도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이 신라의 지배 아래서 굴욕적인 삶을 살도록 한 것이라면,왜 그래야 했는지를 알고 싶었으며,장차 백제유민들은 어떻게 살아야 원한과 저주의 불길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진표스님은 자신의 고통이 모든 백제유민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그 끈은 모든 신라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주에서 홀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없고,태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있다는 깨달음이 진표스님의 확신으로 차올랐다.백제인들의 고통이 소멸되지 않고는 자신이 결코 안락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이제 남은 문제는 백제인들의 고통을 없애줄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었다.그 방법은 수행자 자신의 죄의식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참회법으로는 불가능한 차원에 닿아야만 깨달을 수 있음을 알고는 육신을 버리기로 했다.온 우주는 마음의 문제이지 육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장한 결심으로 21일 동안 육신을 던져넣는 참회수행을 단행했다.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진표스님을 안아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사라졌다.다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수행을 강행했다.3일째 되자 팔과 다리가 부러져 일어서 걸을 수도,물건을 쥐기도 어려웠다.이제는 온몸을 굴려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참회수행을 계속했다.오직 마음으로 미륵을 불러 대답을 원했다.차츰 고통을 잊는 상태로 몰입했다.이제 온전한 것은 머리 뿐이었다.머리 마저 깨뜨려버림으로써 살고죽는 불편함마저 초월하고 싶었다.7일째 되던 날 밤 지장보살이 나타나 팔과 다리를 고쳐주고,가사와 발우를 전했다.수기(授記)가 내려진 것이다.그때부터 새로운 수행을 시작했다.21일을 다 채웠을 때 그토록 갈망했던 고통을 치유시키는 지혜가 터득되었다.금산사로 다시 돌아온 것은 29세 때였다.금산사에다 청동으로 빚은 미륵장육상을 모시고 그 아래서 외치기 시작했다.사자후(獅子吼)를 토한 것이다. ●신라 지도자들에도 참회 설파 만경들에서 농사짓던 이들이 미륵불을 기다렸지만 미륵불이 오지 않는 까닭을 말하면서 진정한 미륵을 만날 수 있는 비법을 설파했다.백제인의 마음속에는 신라를 향한 증오와 저주로 꽉 차있기 때문에 미륵의 소식이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이미 미륵은 와 있는데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고 했다.증오와 원한과 저주로 피흘리고 죽이는 일이 그치지 않는 한 미륵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설득했다.신라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백제인들뿐이며,백제인의 용서를 통해서만 신라가 나라다울 수 있고,신라가 나라다워야만 백제인의 마음에서 증오와 저주가 사라질 수 있으며,그래야만 공존과 상생을 이룰 수 있다고 절규했다. 신라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외쳤다.백제인을 능멸하고,빼앗고,죽이는 통치법으로는 신라도 끝없는 고난속으로 빠져들 뿐이며,오만과 편견과 무력으로 이룬 한 때의 번영이 더 큰 재앙으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면 참회하는 길뿐임을 설파했다. 신라인의 참회가 있어야만 백제인과 공존할 수 있음을 타일렀다.마침내 신라의 왕과 귀족,지도자들이 진표스님의 법문에 무릎을 꿇었다.진정한 통일신라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진표스님의 온 몸을 던진 백제 사랑은 한 시대의 고난과 불행을 극복해 내는 위대한 지도자의 참모습이었다.
  • [저자와의 대화] ‘책읽는 소리’ 정민 한양대교수

    “한문학이야말로 콘텐츠의 보고입니다.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가시덤불 속에서 빛을 못 보고 있을 뿐이죠.” 한문학이 고리타분하다고? 가시덤불로 막힌 옛 글의 숲에서 성큼 걸어나와 현대인에게 친숙하게 말을 거는 책을 써온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鄭珉·42)교수.그는 최근 옛 사람의 내면 풍경을 오롯이 되살린 ‘책읽는 소리’(마음산책)를 펴냈다. 한문학을 현대인의 감성에 맞춰 번역하고 현대를 읽는 거울로 해석하는 김 교수의 작업은 벌써 6년째.“그동안 한문학은 딱딱하다는 오해로 일반인과 거리가 있었죠.하지만 혼자 읽기에 아까운 글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의 연구실에는 파일들이 빼곡히 꽂혀있다.‘유언’‘천태만상 인물열전’등 주제별로 옛 글들을 복사해 모아둔것.이번 책에서는 ‘글읽기’에 관한 글과 18세기 선비들의 서늘한 기개,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린 글들이 담겨있다.느림의 여유,자식에 대한 사랑 등 옛 조상들의 숨결을 조심스럽게 보듬어 세상 사는 지혜를 끄집어 냈다. 김 교수는 연암 박지원의 글을 최고의 문장으로 꼽는다.“생각의 깊이나 방법,문장 표현력 등 모두 뛰어납니다.아직까지 완역이 못돼 후손으로서 부끄러울 뿐입니다.”‘책 읽는 소리’도 시작과 끝이 모두 연암의 글이다. 최근엔 새에 관심이 많다.밀화부리,피죽새,갈가마귀 등한시와 옛 그림에 나온 30∼40여종의 새를 분류해 10년동안 모았다.이를 바탕으로 쓴 글을 야생조류동호회 홈페이지에 올려 전문가들의 도움도 받았다.“조류연구,고전문학,고미술계 등 여러 영역에 물꼬를 터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돌 위에 새긴 생각’‘와당의 표정’등 전각,와당(瓦當) 관련 저서도 같은 맥락에서 쓰여졌다.글자와 획은 그 분야 전문가들이 되살릴 수 있지만,맥락을 읽어내 현대와 연결하는 것은 고문학자만의 몫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문학 속 도교를 다룬 ‘초월의 상상’이 이달안에 또 출간된다.선비들의 상상력을 통해 한국적 판타지의 전통을 복원하는 야심찬 책이다.‘해리포터’등 판타지 문학이 유행하지만 우리의 판타지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다. 고전 문장이론을 정리해 한국적 ‘글쓰기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은 그의 40대를 건 또다른 도전이다. “한 번 다룬 소재로는 다시 글을 안 쓸겁니다.고전의 바다에서 건져내야 할 다른 구슬들도 많으니까요.”할 일이너무 많아 시간이 아깝다는 김교수는 옛 선비처럼 올곧게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9000원. 김소연기자 purple@
  • 더한 어려움도 이겨낸 겨레거니(박갑천 칼럼)

    여우가 산비탈을 올라가다가 미끄러져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가시덤불을 붙잡아 위기를 넘긴다.하지만 그때 가시에 찔리고 할퀴여 피가 나면서 몹시 아팠다.여우가 가시덤불한테 게정피운다.“너한테 도움받고자 기댄 나를 이꼴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냐.”가시덤불은 욱지른다.“무슨 소리야.본디 다른 것에 달라붙는 성미가 있는 나에게 매달린 네가 잘못이지.” 이솝우화.급하다고 물불안가리고 아무데나 도움을 청하는 어리석음을 비꼰얘기지만 오늘의 우리나라꼴을 생각해보게도 한다.발등에 불이 떨어져 IMF에대고 굽실거릴수 밖에 없었던 우리처지를. 돈이란 때로는 [베니스의 상인]의 안토니오같이 제살점 1파운드를 담보로해서라도 빌려야할 만큼 다급한때가 있지 않던가.그결과 더러는 고려가요 [예성강곡]에 나오는 사람같이 제 아내를 뺏기고 눈물짓는일이 생기기도 하고. 돈빌리려면서 어느정도 각오한 일이긴 하나 우리의 얼굴하며 몸뚱이에 가시덤불 자국이 핏발서있음을 느낀다.보도되는 뒷소식들에는 “이런때 잡아놔야지…”하는 강자논리가 번뜩이지 않은가.부차가 겪은 와신의 아픔,구천이 맛본 상담(상담)의 치욕이 무엇인가를 되씹어보게 하는 요구조건들.쓰리고 아리고 창피하다. 그래.이꼴로 된자신을 탓해야지 뇌꼴스럽다고 가시덤불 탓해야겠나. 세상에는 빚지고도 큰소리치는 경우가 있긴하다.독일 극작가 F 베데킨트같이.꽤 많은 돈을 빌려준 빚쟁이가 언제 갚을거냐고 종주먹대자 베데킨트는오히려 조용하게 그를 위로한다.“내가 언제 빚을 갚을지 모르는 편이 좋을거요.그래야 잠을 잘자고 또 건강도 좋아질거고….”뺨맞을 소리였다고 하겠는데 이건 역시 개인대 개인의 일화일 뿐이다. 오죽하면 “빚진죄인”이라 했겠는가.그래서 성경(구약:잠언22:7)도 말한다.“부자는 가난한자를 주관하고 빚진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빚의 상판이 그러하기에 국치네 경제신탁통치네…하는 말들이 튀어나온다.IMF총재 전화 하나에 각의도 유보돼버리지 않았던가.이게 바로 ‘가난한 자를 주관하는’모습.하건만 앞으로 얼마나 더 아니꼬운 꼴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다. 이 어둠의 굴속을 어서어서 벗어나야 한다.그러기위한 노력들이 각계로 번져나는 현실은 어려움속에서도 내일의 불빛이 되고 있다.그렇지.더한 어려움도 이겨낸 겨레이거니.
  • 포드사/기아지원조사단 주내 파견

    ◎김선홍 회장 “할일 빨리 마무리한뒤 사퇴”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은 9일 기아자동차의 해외 최대주주인 포드사가 기아자동차 지원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지원조사단을 이번주 안에 한국에 파견키로 했다고 밝혔다.김회장은 또 “시기는 못박을수 없지만 할 일을 빠른 시일내 마무리한 뒤 경영권을 젊은 후진들에게 넘겨 주겠다”고 말했다. 김회장은 이날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전시장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히고 “기아자동차의 해외판매를 일부 맡고 있는 일본의 이토추상사와 스미토모상사도 우여곡절은 있지만 기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기아 관계자는 “이토추상사는 김회장이 퇴진하지 않는 조건으로 선급금 1억3천7백만달러를,스미토모상사는 1억달러를 주기로 했으나 최근 김회장 퇴진이 거론되자 이토추상사는 우선 추석 이후에 2천7백만달러를 지불하되 1억1천만달러 지급은 추후 재론키로 했으며 스미토모상사는 새달 1일 지불여부를 최종 결정키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회장은 “우리 나름대로 자구책은 마련한상태이나 현재는 공개하기가 어렵다”며 “기아의 자율에 맡겨두면 빠른 시일내 경영정상화가 될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현재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있는 기아를 끌어주고 당겨줄 시기”라고 말해 자구노력 성과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물러날 뜻임을 시사했다. 김회장은 또 GM사의 협력제의 여부에 대해 “그런 적이 없으며 GM이 정부에 직접 제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초여름 문단/중견작가들 신작발표 러시

    ◎김양호­등단 18년만의 첫 창작집 「북극성으로 가는 문」/이성부­바위타기·화강암 등 산소재 시집 「야간산행」/김용락­장애인·환경문제 등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간 「술과 글은 익을수록 제격」초고속으로 쏟아내는 다산성 작가들 틈바구니에서 중견작가들이 오랜 발효를 거친 신작을 내놔 눈길을 끌고 있다. 작가 김양호씨(43)가 등단 18년만에 첫창작집 「북극성으로 가는 문」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것을 비롯,이성부 시인(54)이 7년만의 신작시집 「야간산행」을,김용락 시인(37)이 9년만의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를 각각 창작과 비평사에서 발간한다.절로 익어 터지기를 기다린 진득함이 돋보이는 이 책들은 가볍고 빠른 글에 익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글쓰기의 괴로움」을 새삼 일깨워준다. 지난 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김양호씨는 86년 장편소설 「일부변경선」을 낸뒤 10년 산고끝에 첫 작품집을 묶었다.10편이 실린 책은 가족에게서 버려지고 일상에서 고립돼 소외감에 시달리는 이들의 황폐해진 정신을 주조음으로 깔고있다. 단편 「북극성으로 가는 문 1」의 주인공은 단칸세방에 유폐돼 몽롱한 의식세계를 떠돈다.얇은 벽을 통해 옆집 부부생활의 소음이 고스란히 건네오는 밀폐된 공간에서 살인과 에이즈와 종말교를 전하는 TV를 세계와의 유일한 통로로 삼은 그는 휘청거리는 자신의 의식세계를 꿈과 현실을 오가는 내러티브로 털어놓는다.세속적 성공을 척도로 삼는 아버지에게서의 탈출을 꾀하는 「북극성으로 가는 문 2」,광신도인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 미쳐버리는 「형」 등의 인물들은 스스로 부적응함으로써 아무렇지 않은듯한 일상의 공기가 얼마나 숨막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탄탄한 시적 기반으로 지난 80년대 참여시의 좋은 모범을 보였던 이성부 시인은 여섯번째인 이번 시집에서 산의 웅혼한 품으로 돌아왔다.바위타기,바위벼랑,화강암 등 꿋꿋한 산식구들의 호방한 기개에서 시인은 지친 삶을 추스릴 원동력을 얻는다.원시적이고 호연한 인간의 심층욕망을 탐구하고 있는 이 시집은 발문을 붙인 오세영 시인의 말처럼 「50대 중반이 되어서 되찾아온 시인의 시적고향」인지도 모른다.〈큰 산에서 돌아와/책상머리에 앉으면/문득 솔바람소리 함께 따라와서/내 종이 위를 굴러떨어진다…/근심걱정 오가는 구름처럼/언제나 우리 마음에 떠 있어도/부질없다 부질없다 가르치던 밤 산/백지 위에 넘치는 이 살찐 그리움!〉(「야간산행」중에서) 이에 견줘 30대 김용락 시인의 시집은 눈에 쓰린 현실의 여러 아픔들을 더 직접적으로 끌어안고 있다.장애인·서민·노동자 등 가난한 이웃들을 애정으로 감싸는 일과 환경·교육·노동문제를 날카롭게 꼬집는 일은 그에게 둘이 아니다.그의 세계는 점차 짧고 가벼워지면서 당장 먹기에 달콤한 감상으로 빠져드는 요즘 시에 대한 은근한 경계로 비친다.김씨 시의 힘은 만난을 뚫고 생명을 틔우는 자연의 순리앞에서 새삼 깨우치는 삶의 이치를 담은 몇몇 시편들에서 가장 두드러진다.〈퍼붓는 진눈깨비 속에서/산수유나무가 등 같은 노란 꽃을 달았다/그것도 가시덤불 틈바구니에서/사람이 헛된 집착에 매달리면/눈이 멀어지는가보다/나는 피투성이 짐승처럼 꽃 주위를 서성인다〉(「꽃」전문)〈손정숙 기자〉
  • 작가 박경리(이세기의 인물탐구:88)

    ◎삶과 문학에 당당히 맞선 “대지의 어머니”/암수술·사위구속 시련속 25년만에 「토지」 완간/인기영합 두려워 80년 원주 정착,은둔생활/「일본론」 집필 구상… 체험 바탕의 문학강의 큰 인기 「글을 쓸 때는 살아 있다/바느질할 때 살아 있다/풀을 뽑고 씨앗뿌릴 때/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서쪽에서/빛살이 들어오는 주방/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88년 「산더미 같은 「토지」에 파묻혀」 다른 잡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 작가 박경리는 자신을 추스르고 위로받기 위해 시집 「못떠나는 배」를 낸 적이 있다. 그때까지 「토지」3부가 「열가닥의 씨올로 짠 피륙」이라면 4부의 무대는 「인간이 소모품으로 파괴되고 영혼과 육체가 참살되는 가공할 전쟁의 광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나락같이 깊은 내용과 엄청난 양감」으로 인해 어디서부터 소설을 허물어나가야 할지 망연자실하던 시기였다.그만큼 「토지」는 그를 비웃는 태산이었으나 내면의 아우성과 전진과 기록의 난무속에서」 그는 스스로 황폐해가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천형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사마천)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과도 이별하며 살아간다」(매)는 무명 같은 시들을 남기게 되었다. 평소 「작품을 쓰는 일은 자기속에 있는 악과의 싸움」이며 「쓰기 때문에 살아 있고 살아 있으면 써야 한다」는 그는 「진실을 위해 생명을 버림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성서의 잠언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사잊고 창작 몰두 이른바 한번 쓰기 시작하면 세사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몇년이고 칩거하여 창작에만 몰입하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그는 본래 투명하도록 맑고 연약한 인상이지만 「운명적으로 맡겨진 역할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똑바로 해내는 동안 「못 하나 박는 일」도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이 되었다.또 어떤 탁류에도 휩쓸리지 않으면서 만약 작은 상처를 입더라도 이를 창조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줄 아는 섬광의 혜지를 타고났다.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외롭고 참담한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견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선 끈질긴 여인의 일면이나 풍상에 시달린 마모의 기색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신기하다.오히려 작가로서 준열한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여 「독자에게 영합하려는 붓을 깊이 경계하고」 약자에게가 아니라 강자를 향해 안으로 도도하고 마음속으로 굽히지 않는다.그런 그를 시인 정현종은 「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독한 사람에 틀림없는 것은 한 작품에 25년간이나 매달린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파악된다.남들은 5년에 한번 쓸까말까한 장편을 58년 첫장편 「애가」와 59년 현대문학에 「표류도」 연재를 필두로 「내마음은 호수」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등 어느때는 1년에 두편이상을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처럼 끊임없이 집필하고 있었고 문학지에 발표해온 중단편이 그때마다 평자들의 호평에 오른 것은 작가가 정교하게 책임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토지」1부를 쓸 때는 암으로 오른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고 2부때는 사위인 김지하시인의 구속사태로 가족이 온통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던 외손자 원보(군입대중)를 등에 업고 구치소 면회를 다니던 정릉시절이 눈에 선연하다. 「어찌하여 빙벽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가중되는 망상의 무게 때문에 내 등은 이토록 휘어들어야 하는가.나는 주술에 걸린 죄인인가」 그러나 「그것이 죽음보다 더한 가시덤불의 길일지라도」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거나 도망치지 않고 밀착되어 떨어질 줄 모르는 삶과 문학에 그는 언제나 정면대결로 마주서 있다.그리고 구약의 욥이 가산도 자식도 다 잃고 악창에 시달려 환부에 흐르는 고름을 사금파리로 긁어내면서도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고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내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면서 악마의 시련을 신앙으로 극복한 의인의 발아래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싶어했다.이 자세는 고통과 의지의 절대세계라고 할만한 작가의 구도적 혈흔이 선명히 와닿는 육성으로 그의 문학을 논할 때마다 인용되어지는명문이다. 그는 사람이 행불행을 수월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때론 노여움을,때론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것이 비겁」하기 때문이다.또한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것과도 나와는 별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외면해버린다. ○7백여평에 농사 지어 그의 주장은 작가의 선민의식을 시속기로 천시하여 「작가는 철저한 에고이스트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그래서 「토지」3부를 끝내고 「인기라는 물결로부터 자기가 썩고 있는 일에 빗장을 지르기 위해」 80년 아무런 연고지도 아닌 원주시 단구동에 정착,정릉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흙을 주무르고 나무를 가꾸고 온갖 새와 동물을 거두어 그의 7백여평의 드넓은 뜨락을 「억조창생」이 머무는 생명의 근원지로 만들어나갔다.그의 생명에 대한 겸손은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나 배추 한포기라도 갓난아기를 안듯이 정성껏 보듬고 나무를 꺾으면 나무에 깃든 생명이 피를 흘리며 슬퍼한다는 것을아는 심심상인의 경지다.철이 되면 고추를 따서 햇볕에 말리고 날씨가 궂을 듯하면 다시 방에다 군불을 때어 바짝 마른 고추를 하나하나 헝겁으로 닦아내는 그의 정성은 한시도 쉬지 않는 또 다른 창작의 일면인 것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겉보기엔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는 것도 같고 인고를 타고난 것이나 아닌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의 노동은 수확의 기쁨을 아는 농부의 그것일 뿐 그에게 있어 일이란 삶의 확인이자 생명의 신비와 경이에 대한 외경의 표현이다. 이제 그는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의 자신과의 언약에서 결국 「도전함으로써 비약」했다. 따라서 「토지」는 그의 대명사이자 분신 이전에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찬란한 광망」을 그었으나 「진실은 내 심장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고 그는 심상한 의미를 예감시키고 있다. 「토지」 이후 그는 연세대 강의 외에 일간지에 시론을 쓰고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정리한 일본론을 구상중이다.특히 그의 문학강의는 어디선가 읽은 듯하거나들은 듯하거나 한번 들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말마다에 살아 있어 대학생 사이에서 명강의로 소문나 있다. ○내년 봄 매지리로 이사 요즘은 단구동일대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는 바람에 그가 살던 집이 헐릴 위기에 있었으나 토지개발공사의 배려로 「박경리기념관」으로 남게 되었고 그는 이른 봄쯤 연세대 원주캠퍼스가 있는 승업면 매지리로 이사할 예정이다.아마 그때도 그는 농부가 될 것이다. 글 한줄도 쓰지 않으면서 「작가」를 자처하는 사람은 많다.글 한줄도 쓰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쓰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문단의 수많은 모임에서 사교적인 활동만으로 문인을 빙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모든 허세는 작가 박경리 앞에서 무색하다.작품의 질이나 분량에서 이미 남에게 비교될 수 없는 그를 두고 「모든 찬사는 미흡하다」는 문단의 평은 옳다.그의 손은 농사 외에도 바느질과 그림과 나무를 조각하고 돌담을 쌓느라고 거북등처럼 갈라졌으나 그의 미소는 작가의 웃음이며 그의 글은 단한번도독자를 배반하지 않는다.범접할 수 없는 결곡한 기상,금과 옥을 품은 거대한 푸른 산 같은 그 앞에 서면 왠지 작아지고 부끄러워진다는 최일남의 말은 한치의 과장 없이 모든 사람의 공감을 산다. □연보 ▲26년 경남 충무 출생 ▲45년 진주여고 졸업 ▲55년 단편 「계산」 「흑흑백백」 김동리 추천(현대문학)데 뷔 ▲58년부터 장편연재 「애가」(민주신보) 「표류도」(59년 현대문학) 「내마음은 호수」(60년 조선일보) 「노을진 들녘」(경향신문) 「가을에 온 여인」(62년 한국일보) 「파시」(64년 동아일보) 「타인들」(67년 주부생활) 「겨울비」(여성동아),69년부터 대하소설 「토지」1부(현대문학) 연재시작,「죄인들의 숙제」(경향신문) 「창」(70년 조선일보) 「단층」(74년 동아일보) ▲80년 원주시 단구동 정착 ▲84년 한국전후문학 30년 「최대의 문제작」으로 「토지」 선정 ▲86년 북경 연길 백두산여행 ▲90년 프랑스어판 「토지」(파리 벨퐁출판사)출간,중국기행 ▲91년 연세대원주캠퍼스 객원교수 ▲94년 민족사에 길이 남을 걸작 「토지」전5부 16권 완간(도서출판 솔),이대 명예문학박사 「김약국의 딸들」(62년 을유문화사) 「내마음은 호수」(63년 신태양사),단편집 「불신시대」(63년 동민문화사) 「시장과 전장」(64년 현암사),수필집 「거리의 악사」(77년 민음사) 「Q씨에게」(79년 풀빛사) 「박경리문학전집」전34권(79년 지식산업사) 「토지」사전(93년 도서출판 솔),시집 「못떠나는 배」(88년 지식산업사) 「자유」(94년 도서출판 솔)등 60여권 현대문학상(57년) 내성문학상(61년) 한국여류문학상(65년) 월탄문학상(72년) 인촌문학상(90년)
  • 마천마을 희생정신/겸양으로 더 빛나다

    ◎“할일 했을 뿐인데”… 찬사 “사절”/김대통령의 평가에 오히려 감사/흥분 가라앉히고 다시 논·밭일 열중 『사람으로서 할일을 했을 뿐인데…』 지난 26일 해남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현장에 온몸으로 뛰어들어 생존자를 구조했던 해남 마천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는 것을 오히려 계면쩍어 했다. 「사랑의 실천」이니,「국민정신의 덕목」이니 하는 갖가지 화려한 찬사가 마천마을에 쏟아지고 있으나 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논에서 김을 매던 주민 천용진씨(45)는 『대통령의 이처럼 아름다운 희생정신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감사의 뜻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라며 『이번 사고로 부서진 마을식수원을 대신해 정수장을 마련해주고 마을 길을 포장해준다니 뭔가 빚을 지게된것만 같다』고 심정을 털어놓았다. 44명의 생존자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1백53명의 사람들이 살고있는 마천 마을은 봄이면 복숭아꽃 살구꽃피고 한여름이면 매미가 울어대는 평범한 산골마을이다. 10년전만 하더라도 마을 집이 1백호 가까이 되었지만 지금은 이농현상으로 47가구로 줄었고 빈집만도 10여채나 된다. 사고 4일째인 29일의 마천마을은 여느 산골마을처럼 차라리 적막하기까지 했다.마을 사람들은 태고적부터 해온대로 이날도 바로 66명의 목숨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린 여객기가 떨어진 운거산과 마을사이에 널려진 논·밭에서 논두렁 풀을 깎고 담뱃잎 수확으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김영삼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는 흥분도,사고소식을 듣고 생존자를 한사람이라도 더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실낱같은 길조차 없는 1㎞의 산길을 단숨에 내달았던 그날의 격렬함따위는 벌써 오래전일인듯 했다. 평화스런 산골마을에 끔찍한 참사가 있었다는 흔적은 임시 영안실이 설치됐던 마을 저편의 화원동국민학교에서 마지막 환경정리작업을 하는 군·경찰과 공무원 몇몇의 바쁜 발길에서나 애써 찾아 볼 수있을 뿐이었다. 이 마을 주민들이 사고이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고 당일 현장에 달려갔던 어린이들이 밤이 되면 무서움을 전보다 더 탄다는 점. 추은숙씨(32·여)는 『아이들이 자면서 깜짝깜짝 놀라고 잘때는 예전과 달리 꼭 엄마·아빠와 함께 자려한다』고 귀띔해 준다. 동네 어른들이 『비행기가 떨어졌으니 사람들을 살리러 가자』고 나설때 멋모르고 앞서 달려나갔던 어린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참상의 잔영을 씻어내지 못하고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날 맨먼저 참사현장에 도착해 생존자를 업고나온 것은 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마을 꼬마들이었다. 마천동네에서는 옛날 여객기 추락지점에 절터가 있다해서 절골로 통하는 사고현장은 이 동네의 식수원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철저히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길이 전혀 없었다. 어른들은 낫과 삽으로 나무와 가시덤불을 치고 새롭게 길을 만들며 가느라 늦었지만 야산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던 어린이들은 다람쥐처럼 숲속을 빠져 나갔다. 어른들이 현장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어른들을 앞질러 내달았던 꼬마들은 벌써 자기 또래의 꼬마를 떠메고 내려오고 있었다고 부모들은 어린이들의 활약상을 무용담처럼 들려줬다. 그러나 막상 생존자들을 구할때는 멋모르고 용감했던 어린이들도 날이 어두워지며 밤이 되면 엄마·아빠품을 파고 들더라는 것. 이날 사고 첫 신고자 김현식씨(21)로부터 사고소식을 처음 듣고 뒷수습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이 마을 이장 김진석씨(60)는 『우리마을 사람들의 순박함은 그저 타고난 대로 이지만 부상자 운반을 위해 이웃들이 입었던 옷을 찢어 임시들것을 만들때는 「이장을 더 오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주민들의 희생정신을 고마워했다.
  • 아시아나기 추락현장의 장재·이광석·나광문·이우삼씨

    ◎44명 구명에 인술4인 있었다/“참사” 급보… 2백리 달려 응급치료/중상자 들것에 싣고 산비탈 왕복/해남 종합병원·보건소 근무… 조대동문 의사 해남 운거산에 떨어져 박살난 아시아나 여객기에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바로 현장에 급히 달려간 의료진들의 헌신적인 구호활동이 생존의 생명줄이 됐다. 이날 처참한 사고현장에 맨먼저 도착한 의료진은 해남종합병원의 전공의 장재(30),이광석(32),나광문씨(31) 그리고 해남보건소 전임의 이우삼씨(31)등 4명.장재씨,이광석씨,이우삼씨등은 조선대의대 동기,나광문씨는 1년 선배이고 또 전공도 같은 가정의학이었다.이들은 몸에 밴 팀웍을 발휘,중상자에 대한 응급처치가 신속히 이뤄질 수 있었다. 추락사고 소식이 해남종합병원과 군보건소에 긴급 타전된 시각은 사고당일 하오 5시40분.하루 진료를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막 퇴근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급한대로 링게르 10병,심폐소생기구,상비약과 주사기,들것 그리고 골절응급처치기구인 토마스 스프린터등을닥치는 대로 챙긴 이들은 군 보건소 앰뷸런스를 앞세운 2백리길을 폭풍처럼 차를 몰았다.마천마을을 거쳐 실낱같은 산길을 따라 가시덤불을 정신없이 헤치며 사고현장에 도착한 것은 하오 6시40분쯤이었다. 의료진을 따라 나섰던 간호사,간호 조무사등 7명은 여자들이었지만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사고현장으로 가는 산길을 남자들과 똑같이 정신없이 올랐다. 사고현장은,평소 인명을 다뤄온 전문의사들이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당황할만큼 처참했다.먼저 사고현장에 도착한 마천마을 주민들이 옷가지를 찢어 임시로 들것을 만들어 경상자들을 헬기장이나 산아래로 옮기고 있었지만 중상자들은 살려달라고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의료진들은 마치 짜여졌던 드라마를 연출하기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두팀으로 나뉘어 부상자들을 닥치는 대로 응급처치를 해나갔다.위급환자순으로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 의료진으로서는 가장 난처한 것이 응급처치의 순서를 매기는 일이었다. 추락시 충격으로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고 가쁜 숨만 몰아쉬는 상황에서,누가 역할을 정한 것도 아닌데 해남종합병원 장재씨가 종합병원에서 중견이고 해남보건소 전임의 이우남씨와 동기라는 점에서 자연스례 「야전지휘관」이 됐다. 장재씨의 판단에 따라 화급한 환자에겐 미리 준비해간 기관지 삽입투구를 이용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고 좀 나은 환자는 링게르병을 나뭇가지에 걸고 아무렇게나 땅에 눕힌채 주사를 놓아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했다. 그래도 부상정도가 약한 생존자는 군및 경찰의 헬기에 태웠고 헬기 수송이 불가능한 환자는 들것에 태워 산아래 앰뷸런스로 실어 날랐다.의사들은 돌에 채고 산비탈에 미끄러지며 벗겨진 신발을 찾아 신을 겨를도 없이 맨발로 뛰어 마을에 내려와서야 신을 잃어버린줄을 알았다. 『어떻게 응급처치를 했는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장재씨의 술회처럼 이들이 정신없이 응급처치를 해나가기 1시간이 지나서야 또다른 의료진이 속속 도착,생존자들에 대한 응급처치는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또 군 보건소의 이우남씨는 『직접 응급처치한 부상자 2명이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한채 그자리에서 숨지기도 했다』며 『그날밤 집에 돌아와 학창시절 암송했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새삼스레 다시 외어봤다』고 여운을 남겼다.
  • “빨치산식 보투”… 2억6천만원 확보/“자급원칙” 자금조달 수법

    ◎가족·인맥 집중공략… 포장마차등 수익사업도 「사노맹」은 『혁명자금을 많이 확보할수록 「승리의 시기」를 앞당길수 있다』는 인식아래 조직원들에게 자금조달을 독려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노맹」은 레닌의 「플로레타리아 재정사상」,남노당·빨치산의 「자급자족원칙」등을 모범으로 내세워 「혁명자금 확보투쟁」 「보급투쟁」을 결행할 것을 전조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이에따라 조직원들은 「상부」에서 시기 별로 제시한 「보급투쟁지침」에 입각,▲신혼비작전 ▲박노해건강치료 기금모금작전 ▲호랑이 사냥작전 ▲지각변동등의 암호명이 붙은 「혁명자금확보투쟁」을 벌여 지난 4월까지 2억6천만원의 자금을 확보한것으로 수사결과 밝혀졌다. 특히 지난91년12월 중앙위원명의로 「지각변동을 위한 전조직적 투쟁을 호소한다」는 「보급투쟁지침서」를 지하조직에 전달,「사회주의 혁명전위당」건설에 필요한자금 9억원을 확보할것을 독려해왔다. 「사로맹」은 모금성과를 극대화하기위해 『비록 우리앞에 가시덤불과 지뢰밭이 놓여있고 적들의칼끝이 우리를 노리는 악조건속에서도 재정투쟁을 기필코 승리해야한다』는 등의 선동으로 조직원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면서 보급투쟁 5대원칙과 10개항의 전술을 제시했다. 보급투쟁의 5대원칙은 ▲가족·학연등 인맥을 파악 협조가능정도를 전수로 환산,우선순위에 따라 관리할것 ▲「예약전선」에서 지레 겁을 먹고 액수를 낮추어 요청하는 우를 범하지 말것 ▲「수금전선」에서 어떻게되겠지하는 등의 해이된 마음을 경계할 것 등을 담고있다. 또 구체적인 10가지 보급투쟁전술에서는 연구소설치계획등을 제시,자금확보의 긴박성을 역설할것.회사내 노조원등을 상대로 꿀이나 약재를 팔아 자금을 조달할것.노동현장에서 급전계를 조직하거나 신용협동조합의 대출을 적극활용할 것등을 제시하고 있다. 박기평의 수사와함께 자금을 지원해준 인사들의 명단이 노출되고 보급투쟁전술등이 폭로돼 「외부지원」이 어렵게 되자 91년9월부터는 학원경영·포장마차운영등 자체수익사업을 「개별보투」와 병행했다.서울 시내 일대에 미술학원,속셈학원 포장마차등을 운영해왔고 최근에는 청소년층을 대상으로하는 액세서리·카세트테이프 노점상등을 경영할것을 구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 남원 국립종축장 목부 김춘석씨의 “신미년 소망”

    ◎“새해엔 양같이 화목한 삶을”/다툼없는 「무리생활」 본받을만/선보다 악이 판치는 사회 안타까워/서로 돕고 양보하는 미덕 되살릴때 새해 새아침이 밝았다. 양띠해인 신미년의 주인공 양떼들의 지상낙원인 전북 남원군 운봉면 국립종축원 남원지원 양목장에 떠오른 새아침 붉은 태양은 유난히도 커보였다. 지리산 준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해발 1천1백60m의 덕두산 삿갓봉. 1천3백여마리의 양떼들도 목부 김춘석씨(49)의 낯익은 발자욱소리에 일제히 깨어나 『메에헤 메에헤』 소리치며 반갑게 새해 인사를 했다. 『그래 너희들도 새해 복많이 받고 건강하게 자라거라』 스스로도 양띠인 김씨는 주위에 몰려드는 양떼에게 덕담을 하면서 행여 밤사이 병든 놈이 없는지를 살피며 양을 쓰다듬었다. 김씨가 양치기노릇을 한지는 이곳 목장이 문을 연 지난 71년부터여서 올해로 꼭 20년. 논밭을 합쳐 겨우 다섯마지기(약 1천5백평)를 부치는 이웃 운봉면 동천리의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뒤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김씨는 손바닥만한 농토를 일구어 노부모와 아내,아들 딸 등 일가족 8명을 부양하기에는 너무 힘이 들어 양을 치는 목부가 됐다. 가축이라곤 토끼 한마리 길러 본 적이 없는 김씨여서 처음엔 양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한 밤중에도 몇번씩 일어나 혹시 앓는 놈이 없는지 점검해야 했다. 또 해마다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동안 가족과 완전히 떨어져 해발 5백m 이상의 덕두산 기슭 2백만평의 초지에서 방목을 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하루종일 양떼한테서 눈을 떼지않고 감시하는데도 어린 양들이 바위나 돌부리에 걸려 다치기 일쑤였고 무리를 벗어나 멋대로 돌아다니는 양들을 찾아 온 산을 헤매기도 했다. 양떼를 잘 몰기로 이름난 호주산 캘피종 양치기 개인 「로」가 조수노릇을 하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녀도 장난꾸러기 양은 틈만 나면 벼랑이나 계곡,가시덤불 속으로 내달아 애를 태웠다. 그럴때마다 김씨는 어렸을 때 그토록 부러워했던,송아지 고삐를 잡고 소먹이러 다니던 이웃 친구들의 생각이 떠올라 양들을 더욱 정성껏 돌보아주었고 저도모르게 정이 들어갔다. 양떼를 마치 친자식처럼 여기는 김씨에게 가장 가슴아픈 일은 전국의 각 병원과 연구실에서 의학실험용으로 쓸 양을 자기 손으로 골라 보낼때. 김씨는 『양은 성격이 온순하여 무리끼리 다투거나 싸우는 일이 없을뿐만 아니라 인내심이 무척 강해 잘 참고 견디며 사람을 좋아하고 따른다』면서 『요즈음같이 각종 흉악한 범죄가 판을 치고 남을 해치는 일이 많은 세상일수록 양의 착한 심성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정년퇴직을 하게되는 김씨는 『남은 소망이라면 세상사람들이 부디 양처럼 어질고 선량하게 살아 누구나 안심하고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라며서 축사 앞마당에서 뛰노는 양떼들에게로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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