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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떤 꽃은 차라리 짐승이고 또 어떤 벌레는 차라리 꽃에 가깝다/송재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떤 꽃은 차라리 짐승이고 또 어떤 벌레는 차라리 꽃에 가깝다/송재학

    송재학/어떤 꽃은 차라리 짐승이고 또 어떤 벌레는 차라리 꽃에 가깝다 노란 꽃잎 중간에 검은 점 박힌 천인국은 국도 변에서 화등잔만 한 눈 부릅뜨려고 까치발 세운다 목 위로 눈만 불쑥 솟아 있다 한때 내 것이었던 충혈된 저 눈, 한두 송이도 아니고 줄지어 서서 도깨비풀같이 달라붙는 낯선 꽃의 핥는 듯한 눈초리 때문에 차가 커브에서 아래로 굴렀다 여우에 홀려 가시덤불로 걸어들어간 옛이야기와 무어 다르냐 천인국 위로 하늘거리는 나비떼만큼은 그 외래종의 입김이라고 부르자
  • [U-20 여자월드컵] 황무지 소녀들 ‘황금세대’ 되다

    [U-20 여자월드컵] 황무지 소녀들 ‘황금세대’ 되다

    관심도 없었고, 기대도 안했다. 조별리그 1차전에서 스위스를 4-0으로 꺾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땐 모두가 이변이라고 받아들였다. 가나와 만난 2차전 선제골을 내주면서 끌려갈 땐 ‘이게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동점골을 넣었지만 다시 두 번째 골을 내줬다. 이기기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불굴의 투지와 기막힌 패스, 환상적인 개인기로 내리 세 골을 몰아치며 기적같은 역전 명승부를 연출했다. 그때부터 ‘찬밥신세’였던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다. ‘디펜딩 챔피언’ 미국에 0-1로 패했지만 준준결승에서 만난 멕시코를 3-1로 꺾으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비록 30일 새벽 홈팀인 세계최강 독일에 1-5로 패하며 우승을 향한 행진을 멈췄지만, 한국의 20세 이하(U-20) 여자 축구대표팀은 두 번째 참가한 국제축구연맹(FIFA) U-20 여자월드컵에서 ‘사상 첫 4강진출’이라는 튼실한 열매를 맺었다. 2002한·월드컵 이후 다른 종목을 거치지 않고 축구를 시작해 체계적으로 기본기를 익힌 지소연, 정혜인, 이현영, 김나래 등 이른바 ‘황금세대’의 등장과 이들을 이끈 ‘연구하는 지도자’ 최인철(38) 대표팀 감독의 열정과 부단한 노력이 한국 여자축구를 독일, 미국 등 세계최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한 것이다. 경기 내용으로 볼 때도 오로지 투지로만 악착같은 승부를 벌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 여자축구의 이번 성과는 더욱 위대하다.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정확한 패스를 이어가고, 창조적인 움직임으로 빈틈을 파고드는, 지혜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축구는 패스를 주무기로 속도전을 펼치는 현대축구의 흐름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직은 ‘미완의 대기’인 ‘태극소녀’들이 이번 대회를 계기로 미국이나 독일에 진출, 선진축구의 기술을 익힌 뒤 성인 대표팀으로 다시 뭉칠 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마냥 기대에 부풀 수 없는 이유는 이번 대회의 쾌거가 사실상 ‘돌연변이’이기 때문이다. 공식 등록선수 1404명, 실업팀 7개가 전부인 한국 여자축구 환경은 공식등록선수 105만 301명에 5341개의 성인팀이 뛰고있는 독일에 비하면 가시덤불로 뒤덮인 황무지에 가깝다. 선수들을 키워내는 팀도 초등학교 18개, 중학교 17개, 고등학교 16개, 대학교 6개, 유소년 1개 등에 불과해 축구 발전을 위한 뿌리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어린 선수들도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 경남 합천에서 열렸던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초등학교 팀은 고작 15개였다. 대회가 열려도 선수가 없어 나오지 못하는 팀이 수두룩하다는 게 일선 지도자들의 설명이다. 한·일월드컵 이후 초·중·고·대학팀에 연간 수 천만원씩 주어지던 정부 지원금은 2년 전부터 끊겼고, 그 뒤로 각급 여자 축구팀들이 줄지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번 U-20 여자월드컵에서 거둔 4강 진출의 기적이 한국 여자축구 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됐다. 대한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높아진 국민적 관심을 바탕으로 향후 여자대표팀에 더 적극적인 지원을 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시론] 동심에 상처는 이제 그만/임나라 동화작가

    [시론] 동심에 상처는 이제 그만/임나라 동화작가

    최근에 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주인공 여자에 대한 표현이 너무 어두워 중간에 읽기를 포기해 버릴까 하다가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 인내심을 갖고 계속 읽어 나갔다.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여자가 어린 시절에 성폭행 당한 어두운 기억의 소유자라는 걸 알았다. 나는 성급하게 판단해 버린 데 대해 주인공에게 연민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하, 그랬구나! 현재를 살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향해 불신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불신은 너무도 당연한 당위성으로 우리의 삶을 온통 지배해 가고 있는 듯하다. TV를 통해 히말라야 오지의 한 마을에서 유기농 커피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려 열심히 커피농사를 짓는데, 그중 이십대의 젊은 부인은 네 명의 자녀와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다큐 프로를 보면서 내용의 취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엉뚱한 불안에 내내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방문도 제대로 여닫히지 않는 작고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젊은 부인과 천진스럽기 짝이 없는 어린 딸들이 혹여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싶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커피농사가 잘되어 남녀노소 마을사람들이 커피자루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진 채 판매소를 향해 다같이 희희낙락 산비탈길을 내려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들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이역만리에 살고 있는 내가 감사한 생각까지 갖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어둠이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때 묻지 않은 밝은 그들의 모습에서 피안의 딴 세상을 보는 듯했기 때문일 것이며, 한편으론 아직 그 어디에라도 희망을 두고 싶은 간절한 염원 때문일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사이코패스(Psychopath)라 부른다고 한다. 이들은 전두엽 기능이 일반 정상인들의 15%밖에 되지 않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하거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성범죄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전에 심리 상담 치료를 하는 몇 개의 그룹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해 발표하는 기본과정이 있었다. 놀라웠다. 그들 중 절반 이상이 어린 나이에 겪은 성폭행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의 밑바닥을 허우적이고 있었던 것이다. 몸만 걸어 다닐 뿐이지 영혼을 그릴 수 있거나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면, 그들의 내면이 온통 가시덤불로 덮여 있는 처참한 광경을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자유가 수많은 피해자를 낳고 있다. 아동 성범죄 처벌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의 처벌 수위가 매우 경미하다는 통계가 84%나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회는 큰 생각으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다양한 대책이 시급하다. 학교나 여러 단체에서 방어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미래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을 불특정 대상 아동들을 위한 올바른 인지교육도 반드시 병행해야 할 것이다. 인격 장애는 성인이 된 다음엔 치료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부모의 부재, 환경의 열악함, 대화가 단절된 결손 아이들에겐 정부가 앞장서서 인성을 치유할 수 있는 예술 문화의 전문단체와 종교계 등을 통해서 그들의 고통을 따뜻이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랑의 체험교육이 지속적인 정책실현으로서 뿌리를 내렸으면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부모와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면 자기만의 폐쇄적인 사고의 사슬에서 풀려나 좀더 힘차게 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어느 수도자들과 함께 사는 결손가정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10여년 동안 보아 오고 있다. 이 땅에 그런 곳이 여기저기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즐겁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힘겹지만, 언젠가는 물장구 치고 가재 잡으며 티 없이 환하게 뛰노는 어린 시절의 낙원이 올 것을 꿈꾸어 본다.
  • [서울광장] 부끄러운 막말공화국/이순녀 논설위원

    [서울광장] 부끄러운 막말공화국/이순녀 논설위원

    조용하던 지하철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저씨가 실수했잖아요.” “내가 왜 아저씨야. 말조심해 당신!” “아니, 누구보고 당신이래요?” 70대로 보이는 노인과 50대쯤으로 가늠되는 아주머니가 서로 언성을 높였다. 들어보니 노인은 호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확인하려고 여러 차례 손을 넣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이를 스킨십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노인은 기어이 “별 볼 것도 없는 당신한테 내가 뭣땜에…”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험악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 때마침 목적지에 도착해서였는지 아주머니가 서둘러 내리는 바람에 말다툼은 거기서 끝났지만 씁쓸한 풍경이었다. 중국 당나라 말기의 재상 풍도(馮道)는 사람의 혀를 칼에 비유했다. ‘설시(舌詩)’라는 작품에서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口是禍之門)/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다(安身處處)’고 했다. 입조심하라는 의미의 ‘구화지문’이란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비롯됐다. 칼에 찔린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말에 찔린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잘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말의 품위인 언품(言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요즘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들은 너무 거칠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도 명색이 사회 지도층이라는 법조인, 교사의 입에서 시정잡배에게나 어울릴 법한 막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39세 판사가 아버지뻘인 69세 원고에게 “버릇없다.”고 면박을 주고, 검사는 조사 대상자에게 “이 XX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검사 앞에서 훈계하려 들어?”라며 모욕을 준다. 교사는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생들에게 “인간쓰레기들, 바퀴벌레처럼 콱 밟아 죽여버리겠다.”고 폭언을 한다. 인격침해 행위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실제 사례들이다. 막말하기로는 고위 공직자, 정치인도 더하면 더했지 이에 못지않다. 학자 출신의 정운찬 국무총리는 지난 4일 “정치인들이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계파 보스의 입장을 국민 뜻을 대변하는 의원의 본분보다 앞세우기 때문에 정쟁 문제가 됐다.”는 이른바 ‘계파 보스’ 발언으로 막말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세종시로 행정부처가 오면 나라가 거덜날지도 모른다.”는 격한 표현을 써 물의를 빚었다. 새해 첫날부터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의원이 서로 삿대질을 해가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고함을 치고, ‘청와대 용역깡패’ ‘사기꾼’이란 폭언이 횡행하는 웃지 못할 광경도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예능프로그램의 막말 방송을 규제하고, 장삼이사들의 인터넷 언어를 정화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명심보감 언어편은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은 따뜻하기가 솜과 같고 남을 상하게 하는 말은 날카롭기가 가시덤불과 같다.’고 했다. 막말이 난무하는 건 그만큼 사회가 독해졌다는 얘기다.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노력 대신 자극적 언사로 일단 상대를 먼저 찌르고 본다. 방어와 공격을 거듭하며 강도를 높이다 보면 웬만해선 자극으로 느끼지도 않는다. 너나없이 막말을 하는 막말공화국의 오명을 뒤집어쓸 일만 남는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방송사만 ‘막말 삼진아웃제’를 적용할 게 아니다. 지도층부터 보다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법관 스스로의 인성 고양 노력이 우선돼야겠지만 대한변호사협회의 주장처럼 재판 과정과 판결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판사의 막말을 줄이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학생을 벌레 취급하는 교사는 교단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국회에서 상습적으로 막말과 폭언을 일삼는 정치인도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시트콤에서 ‘빵꾸똥꾸’ 대사를 못 쓰도록 권고조치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체면이 그나마 설 것이다. coral@seoul.co.kr
  • [도시와 산] (36) 담양 산성산

    [도시와 산] (36) 담양 산성산

    전남 담양군 금성면 산성산(山城山·603m)은 추풍령에서 소백산맥과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의 한 자락이다. 노령산맥은 전남에 이르러 두 갈래로 나뉘는데 남쪽으로는 산성산을 비롯, 추월산·병풍산을 이룬다. 다른 하나는 백암산·입암산·불갑산 등 서해 쪽으로 뻗어나간다. 산성산은 담양과 전북 순창의 경계를 이루며 강천산·회문산 등과 맞닿아 있다. 산성산은 그 이름처럼 옛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성의 총 길이는 7.3㎞에 이른다. 산성의 이름이 ‘금성산성’이라서 외지 사람들에게는 ‘금성산’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 산을 에두르고 있는 금성산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적 제353호로 지정된 이 산성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 침입에 대비해 개축됐다는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처음 등장한다. 임진왜란 이후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린다. ●전란의 보루, 금성산성 조선조 중기에는 성내에 130여가구가 살았으며, 이웃한 담양·순창 등지에서 거둬들인 군량미가 1만 2000~2만여석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호남지역의 군사 요충지로 자리 잡으면서 숱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정유재란 때는 왜군과의 공방전으로 남문 앞 ‘이천골(二千骨)’이란 협곡에 아군과 적군의 시체 2000여구가 쌓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골짜기는 ‘골 곡(谷)자’ 대신 ‘뼈 골(骨)자’를 쓴다. 1894년 갑오 농민전쟁 당시 동학군이 이곳을 한때 점령했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은 금성산성과 북쪽으로 이웃한 순창군 쌍치면 피노마을에서 체포되기 이전까지 이곳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농민전쟁 당시 성내의 민가와 관아·대장청 등 모든 시설이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때는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의 은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산성산이 이처럼 전투의 거점으로 자리한 것은 봉우리와 협곡으로 이뤄진 산세 때문이다. 금성산성은 외곽이 30m가 넘는 수직 바위로 둘러싸여 전략적 요충지로 손색이 없는 지형이다. 주변에는 성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높은 산이 없어 천연적인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항아리형 분지로서, 전체 면적은 120여만㎡(36만여평)이다. 외성의 둘레는 6486m, 내성은 859m이다. 이곳에는 외성·내성·옹성·성문·망대 등을 비롯해 관아·사찰·민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외적의 침입 등으로부터 장기 농성(城)과 방어가 쉬운 입지 조건을 갖췄다. 담양문화원 고재종(53) 사무국장은 “금성산성은 예부터 이 고을을 외적으로부터 지켜낸 역사적 현장”이라며 “선조의 피땀이 배어 있는 이곳 일대를 ‘호국 안보’의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성에 오르면 비길 데 없는 풍광 산성산은 광주광역시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 담양읍으로부터는 북쪽으로 6㎞쯤 떨어져 있다. 도시민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산행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코스도 쉽다. 그래서 주말이면 가벼운 복장 차림의 등산객들로 늘 붐빈다. 금성면 원율리 담양온천지구에서 가파른 산길을 따라 2㎞쯤 오르면 외남문(보국문)이 우뚝 솟아 있다. 외남문에서 좌우에 있는 봉우리를 따라 정상 일대 분지를 감싸는 포곡형 산성이다. 외남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우진각 지붕(전통 한옥의 한 형태로 4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을 얹은 누각이다. 이곳으로부터 50m쯤 더 오르면 내남문(충용문)이 나타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형태를 띤다. 성문 오른쪽은 전란 등으로 죽어간 민초들의 원혼이 잠든 이천골이 아스라이 내려다 보인다. 담양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과 무등산도 지척이다. 왼쪽으론 담양호가 초겨울 반짝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한다. 드넓은 호수 뒤로는 추월산이 서남쪽으로 줄기를 뻗어가면서 ‘죽향’ 담양골을 감싸 안는다. 산성산과 담양호를 사이에 둔 추월산(秋月山)은 가을밤 보름달이 산꼭대기에 걸려 좀체 기울어지지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늦가을 산성산과 추월산의 단풍 그림자가 담양호에 드리워지면서 원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절경을 연출한다. 등산코스는 남문~동문~북문~서문으로 이어지는 성 전체를 둘러보더라도 4시간쯤이면 족하다. 산성은 남문~시루봉~동문~운대봉~북문~서문~철마봉~노적봉~남문이 일주 코스다. 노약자를 동반할 경우 남문∼보국사터∼서문∼철마봉∼남문에 이르는 1시간 남짓한 구간을 걷는 것도 좋다. 산성에서 만난 이성숙(45·전북 정읍시)씨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금성산성을 처음 접하고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올랐다.”며 “등산 거리도 짧고 많은 역사 유적과 발 아래 내려다 보이는 호수, 들판 등이 너무 멋있다.”고 말했다. 남문에서 담양호 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에 위치한 서문은 옹성(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쌓은 겹성)으로 축성됐다. 평석으로 쌓은 옹성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유적이기도 하다. 담양에 오면 조선조 시가문화권을 놓치면 안 된다. 담양읍에서 남면 광주호 쪽으로 이어진 국도변에 한국가사문학관이 있다. 주변엔 소쇄원, 환벽당, 식영정, 송강정 등 조선조 가사문학 유적지가 산재한다. 읍내에는 한국대나무박물관도 있다. 담양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금성산성 복원 어디까지 1994년 착수… 내년까지 100억 투입 성곽 7㎞ 달해… 장기사업으로 추진 금성산성의 발견과 복원은 전남 담양의 향토문화연구회 이해섭(80) 회장의 노력이 컸다. 그는 20여년 전 마을 어른들로부터 “산성산 정상에 성곽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답사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산성산은 지금처럼 등산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상에 접근하려면 잡목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바위절벽을 기어올라야만 했다. 어렵게 도착한 산성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다. 곳곳에 우물터와 절터 등이 있고, 맷돌 등 가재도구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는 담양산악회를 만들고 회원들과 공동 답사에 나섰다. 1년에 수차례 가파른 꼭대기를 오르는 등 현장을 샅샅이 뒤졌다. 산성의 내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사학자를 찾아다녔다. 인근 장성의 입암산성과 진주산성 등도 둘러봤다. 등산객과 산악회 등을 상대로 산성산의 존재를 알리는 유인물도 만들어 나눠줬다. 그는 관련 자료와 성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내 담양군에 복원을 건의했다. 또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2000년 초에 ‘금성산성’이란 책자도 발간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전남도와 담양군 등은 1994년부터 성곽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내년까지 100여억원을 들여 성문과 문루 등을 복원한다. 현재까지 복원된 시설물은 외남문·내남문·서문·동문 등 주요 관문이다. 군은 7㎞가 넘는 성곽 전체를 복원하기엔 예산이 너무 많이 들고 작업도 어려워 장기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담양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정제된 시어… 풋풋한 손그림…

    정제된 시어… 풋풋한 손그림…

    꼬박 일흔이 된 시인의 손은 가늘고 길다. 세월의 켜가 쌓이기는커녕 제대로 옹이지지도 않았다. 그 손이 가시덤불처럼 복잡한 철학의 가치를 몇 줄의 시어로 말끔하게 정리해 낸다. 여전히 지극한 아름다움에 더해 풋풋한 그림까지 함께 담아서. 노시인 정현종이 시선집 ‘섬’(열림원 펴냄)을 냈다. ‘시인의 그림이 있는 시선집’이라는 기획출판 시리즈의 첫 번째다. 시집 자체가 스타일리스트들의 예술 작품이다. 하드커버에는 네덜란드산 클로스(책의 장정에 쓰는 헝겊)를 썼고, 본문 곳곳에는 니체가 쓰던 원고지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왔고, 시인의 만년필 육필 원고가 함께 곁들여졌다. 여기에 시인이 직접 그린 파블로 네루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니체 등의 초상화와 서툴지만 공들인 여러 그림이 펼쳐진다. 심미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시뿐 아니라 책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음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섬’ 전문)를 비롯해 ‘환합니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등 정현종 시어의 고졸하면서도 간결한 아름다움이야 이미 정평이 나있는 것이지만 정현종의 그림이라니. 책장 맨 처음에 나오는 손 그림(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왼손을 펴들고 연신 치어다보며 스케치북 위에 진땀을 뻘뻘 흘렸을 시인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허나 맨 마지막에 있는 파랑새는 꽤 정교하게 그려졌으며, 이후 깃을 쳐 날아오른 뒤 책의 나머지 페이지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들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스타일리스트들의 작품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준다. 1990년대 초반에 썼지만 전혀 군더더기 없이 미학적 완결성이 뛰어난 ‘좋은 풍경’과 같은 정현종 시의 정수 33편을 한꺼번에 보는 즐거움도 물론이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서울대 불문과)교수는 발문에서 “그는 자유를 추구하는 시인”이라면서 “시를 읽으면서 자유의 숨결을 호흡할 수 있고 날아오를 수 있는 비상의 의지를 느끼는 독자는 행복하다.”고 평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15일 TV 하이라이트]

    ●창사특집 SBS 스페셜(SBS 오후 11시20분) 유전학의 혁명이라 불리는 후성유전학 및 시스템 생물학을 근거로 우리의 밥상이 재앙을 부르는 화학 식단이 될 수도 있고, 비극을 치유하는 생명의 식탁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전 세계 20여개국 취재를 통해 석학들과 실천가들의 활동 현장과 성취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들어본다. ●영상앨범 산(KBS1 오전 7시) 애팔래치안 산맥을 따라 14개 주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애팔래치안 트레일 코스는 총길이 2175마일(약 3500㎞)로, 미국에서 가장 긴 산책로로 알려져 있다. ‘애팔래치안 트레일’ 중 1년 사계절 안개에 덮여 있을 때가 많아 이름까지 ‘스모키’라 불리는 ‘그레이트 스모키 마운틴 트레일’을 담는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비슷한 생김새의 청자 2점. 고려시대의 대표 문양인 물가의 갯버들과 오리들이 동양화처럼 펼쳐진 ‘포류수금문’부터 바닥에 쓰인 글씨 문양까지 흡사한 작품이다. 이 의뢰품들의 진가는 어떤지를 밝힌다. 은빛의 둥근 몸통에 수려한 문양의 손잡이, 손쉽게 옮길 수 있는 크기의 백동화로도 만나 본다. ●일요일 밤으로(KBS2 오후 11시35분) 신종플루보다 무서운 신종플루 괴담이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괴담은 어디서 생겨났고 어떻게 퍼지는 것일까? 그리고 괴담이 사람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또 신종플루 검사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와 타미플루를 먹었던 실제 환자들을 만나 타미플루의 속내를 들어본다. ●늘푸른 인생(MBC 오전 6시10분) 충북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탄방마을 어르신들과 함께한다. 젊어서는 착하고 순했던 남편이 귀가 어두워지고 나서 갑자기 까다롭게 변해 골치가 아프다는 김종덕, 박정임씨 부부 이야기. 술만 마시면 길가에 드러눕는 남편이 얄미워 가시덤불에 내동댕이친 강봉순씨의 이야기도 듣는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MBC 오후 5시20분) ‘내조의 여왕의 유산의 유혹’ 3부 ‘여왕과 프린스’. 내조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아내 천지애를 배신하고 보쌈회사 상속녀 서영과 결혼한 달수. 그러나 결혼생활은 금세 위기에 처하고, 달수는 사탕키스를 시도하며 관계개선을 꾀해 보지만 서영의 목에 사탕이 걸리는 바람에 파국을 앞당기게 된다. ●연예매거진(OBS 오후 8시50분) 한 주간의 연예계 소식을 모아서 알찬 정보를 제공한다. 이번 주는 대한민국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장동건 고소영 열애 소식을 비롯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펼쳐진 연예인들의 화려한 레드카펫 등이 소개된다. 또 영화 킬미, 펜트하우스 코끼리와 관련된 시사회 소식 등 한주간의 연예계 소식을 전한다.
  • 은행장들 눈길 끄는 신년화두

    은행장들 눈길 끄는 신년화두

    정부가 ‘비상경제정부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구조조정 주역’인 은행장들의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다.2일 이들이 내놓은 신년화두에는 이같은 부담감과 각오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비단 해당은행 임직원들에게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경제주체 모두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익숙한 오솔길을 버리라.”고 주문했다.전례없는 경제위기의 비상경보가 울린 만큼 낡은 사고방식과 관행을 전면적으로 바꾸라는 의미다.민 행장은 “개척자의 불굴의 의지로 앞에 놓여진 가시덤불을 헤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자.”고 강조했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긍정의 힘’을 앞세웠다.업계 1위 은행을 이끌고 있는 강 행장은 “아무리 어려워도,아무리 큰 시험에 들어도,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정상까지 올라간 사람은 희망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면서 “같은 상황도 대처 방식에 따라 위험이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되기도 하는 만큼 결코 주저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비슷한 시간,신상훈 신한은행장도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얘기를 했다.신 행장은 시무식에서 “비관론자는 기회 속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찾아낸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인용한 뒤 “반전의 기회는 가슴시린 바닥의 어려움을 눈물로 견뎌내고 힘을 기른 자들에게만 허락됨을 잊지 말자.”고 호소했다. 김승유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다시 생각하자.”고 해 눈길을 끌었다. 김 회장은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앞서가던 메사바호로부터 온 빙산 경보를 무시하지만 않았어도 막을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당시 타이타닉호의 전신 담당자는 승객과 육지를 오가는 엄청난 전보더미에 묻혀 정작 중요한 빙산 경보는 책상 위에 처박아 둬 대형 참사의 단초를 제공하게 됐다.”고 상기시켰다.타성에 젖은 생각과 행동이 엄청난 대가를 야기했다는 얘기다.김 회장은 “모든 사고에는 전조 현상이 있게 마련”이라면서 “리스크(위험) 촉수를 바짝 세우자.”고 촉구했다. 긴축을 통해 힘을 비축하자는 주문도 잇따랐다.이종휘 우리은행장은 “풍년 쌀은 모자라도 흉년 쌀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면서 “사람 부족,시간 부족을 탓하지 말고 불필요한 일은 과감히 잘라내라.”고 당부했다.줄일 것은 줄이고 합칠 것은 합쳐 고비용 저효율을 저비용 고효율로 바꿔야만 살아남는다는 고강도 주문이다.“제값 주고 제값 받는 영업을 통해 수익성을 높이라.”고도 주문해 엄격한 기업 선별 지원도 예고했다. 윤용로 기업은행장은 ‘히든(숨겨진) 챔피언’에서 위기 탈출의 해법을 찾았다.윤 행장은 “세계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미국,일본,중국이 아니라 바로 독일”이라면서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업이 별로 없는 독일이 수출 1위를 차지하게 된 원동력은 숨겨진 챔피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히든 챔피언은 휴대전화 칩 접착제를 만드는 독일 델로(Delo)처럼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계시장에서 선두를 달리는 매출액 40억달러 이하의 기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래의 히든 챔피언인 유망 중소기업들을 적극 지원해 경제 활력을 되살리겠다는 의지다. 진동수 수출입은행장은 “녹색성장 산업이 신(新) 수출동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신속한 지원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밝혀 대통령의 ‘녹색화두’를 뒷받침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조계종 종정 하안거 결제 법어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불기 2552년 하안거 결제(19일)를 맞아 전국의 수행납자들을 격려하는 법어를 15일 발표했다. 법전 스님은 법어에서 백장(百丈) 선사와 제자들의 문답을 제시하면서 “백장을 비롯한 모든 종사들은 가시덤불 같은 선문답으로 사람을 시험하였다.”며 “납자들은 활구(活句)를 참구할 뿐이지 절대로 사구(死句)로 헤아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운주사 화재피해 줄였다

    운주사 화재피해 줄였다

    공공근로 숲 가꾸기사업이 전남 화순 운주사를 산불로부터 지켜냈다. 지난 6일 오후 2시쯤 운주사 옆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1시간에 주변 산을 모두 태웠다. 산불이 강한 바람을 타고 요사채 건물 지붕을 넘어 왼쪽에서 오른쪽 산으로 옮겨 붙었다. 석불과 석탑 주변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나 불길 한 가운데 놓인 대웅전 등 건물(9동)은 모두 온전했다. 무엇보다 소방대원과 스님, 신도들이 5곳의 소화전 호스로 건물에 물을 뿌려댄 게 주효했다. 하지만 사찰 주변 숲 정리도 피해를 줄이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다. 화재 현장에서 만난 이양형 전남도 소방본부장은 “운주사 주변에 소나무나 가시덤불, 낙엽, 잡목 등이 우거졌더라면 불길이 거세져 사찰 건물에 피해가 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용기 방호계장은 “운주사 주변은 임도나 내화림 등 방화선이 없지만 잡목과 낙엽 등이 잘 제거돼 화재 피해를 줄였다.”고 강조했다. 정행(46) 운주사 주지는 “화순군에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 초에도 절 주변에서 소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잡목과 덤불을 제거해준 덕에 엄청난 불길 속에서도 절을 지켜낸 것 같다.”고 말했다. 화순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월25∼3월20일까지 운주사 주변 산에서 불에 탈 만한 잡목과 굽은 소나무, 솔가지 등을 치웠다. 화재현장에 나온 전완준 화순군수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운주사 주변에서 큰 소나무를 빼고는 불에 탈 만한 것을 모조리 베어낸 덕을 봤다.”고 강조했다. 화순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Local] 경주엑스포공원 상시 개장

    경주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는 5일 경북 경주엑스포공원이 4월1일부터 상시 개장한다. 지난해 행사에서 호응을 얻은 프로그램을 수정, 보완하는 등 대표 콘텐츠 10개를 엄선했다. 입체영화제에서는 신라의 도제기마인물상을 소재로 한 ‘토우대장 차차’를 비롯 신라의 문화유적을 가상현실 기법으로 재현한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 신라의 설화와 화랑의 애국심을 다룬 ‘천마의 꿈’, 캄보디아의 황제 자야바르만 7세의 이야기를 그린 ‘위대한 황제’가 매일 2회씩 상영된다.CT체험관은 궁궐, 중간계, 가시덤불, 마왕성, 지옥 등 5개의 주제로 나눠 ‘토우대장 차차’의 가상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다. 공원은 연중 무휴로 개방되며 평일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오후 8시까지 개장 시간이 2시간 연장된다.경주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내가 바로 공무원] 성동구청 공원녹지과 박순직씨

    [내가 바로 공무원] 성동구청 공원녹지과 박순직씨

    자전거를 타고 중랑천변 둔치 성동구 구간을 지나다보면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화려한 꽃길과 만난다. 먼발치의 들풀과 어우러진 꽃길을 보노라면 누군가 정성을 많이 들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동구청 공원녹지과에 근무 중인 박순직(기능직 9급·56)씨가 주인공이다. 청계천과 중랑천 합류지점인 장안철교 아래에서 군자교까지 이어지는 자전거길과 나란한 2㎞의 꽃길 어디에나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직접 꽃씨 얻어다 심어 이 곳은 2003년까지는 가시덤불로 우거진 황무지였다. 반면, 다른 구청이 관리하는 곳은 이미 꽃길이 조성돼 있었다. 성동구도 뒤늦게 꽃길 조성에 나섰고 박씨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처음엔 막막했어요. 잡초만 무성한데 어떻게 꽃길을 내나 고민하다가 당시 박영민(남산관리사업소 근무)계장과 우선 칸나를 심었어요.” 일단 칸나를 심어서 꽃길의 흉내를 냈지만 너무 단순한 모습이 못마땅했다. 지방에 가서 ‘붉은 코스모스’의 씨를 받아와 심었다. 같은 코스모스라도 붉은 코스모스는 개화 기간이 길고, 잘 자라기 때문이다. 재미(?)를 본 그는 칸나, 코스모스에 이어 해바라기와 맨드라미까지 가져다 심어 꽃길을 완성했다. 박씨는 “늦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가장 앞섰다.”고 자랑했다. 전주농고를 졸업,1978년 임시직으로 성동구청과 인연을 맺었다. 기능직 9급으로 정식 채용된 것은 20년이 흐른 1997년이다. 농고를 나온 그에게 꽃길 조성은 적성에 맞았다. 게다가 학교(농과) 다닐 때 어깨너머로 원예과 공부를 한 것이 보탬이 됐다. ●해바라기 이모작도 성공 하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화훼업자들에게 매달렸다. 과거의 지식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새로운 지식이 쌓이면서 그만의 노하우도 쌓여갔다. 대표적인 것이 해바라기. 처음 중랑천에 해바라기를 심을 때는 1000원에 한 포기씩 구입했다. 궁리 끝에 직접 해바라기의 씨를 받아서 파종한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4월과 8월 해바라기를 두 번 파종하는 이모작으로 1년에 두 차례씩 해바라기 꽃을 피우는 방법을 체득했다. 맨드라미는 처음엔 50판을 사서 심었다가 꽃이 피자 직접 씨를 받아서 무려 1만개의 포트를 만들어서 꽃길에 심어 예산을 절감했다. 박씨는 또 장안철교 밑에 억새군락을 만들었다. 이 곳은 자생 버드나무가 물길을 막아 침수되던 곳이었다. 그는 치수과의 협조를 얻어 버드나무를 베어내고 억새를 심었다. 홍수도 사라지고 억새밭이 조성돼 지금은 명소가 됐다.1억 4700만원의 예산을 절감하는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들었다. 박씨는 지난 2000년에는 자치구 가운데 처음으로 거주자 우선주차구역제를 도입한 공로로,2004년엔 꽃길 조성 등으로 성동구청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禪수행 50년 지리산 황매암 일장 스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禪수행 50년 지리산 황매암 일장 스님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 쑹산(嵩山)의 소림사 토굴에서 9년 면벽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40대 승려가 찾아와 무릎 꿇고 뵙기를 간곡히 청했다. “바다와 같은 자비심으로 제게 불법을 깨우쳐 주십시오.” “법을 구하려면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야 한다. 부질없는 소리 말고 돌아가거라.” 승려는 갑자기 품고 있던 칼을 뽑아 왼팔을 댕강 잘랐다. 달마대사가 다시 물었다. “네가 구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을 내게 가지고 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미소를 지으며 “네가 찾았다 해도 어찌 그것이 너의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었느니라. 하하하.” 그 말 한마디에 승려는 평생의 불안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이어 “마음이라, 형상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을 붙잡고 왜 그리도 스스로를 할퀴었던가.”라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승려는 달마대사에게 넙죽 엎드렸다. 달마대사에서 시작한 선불교가 중국에 비로소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이 승려가 바로 중국 선불교의 제2대 조사인 혜가(慧可·487∼593)스님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서산대사 또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통해 부처의 마음을 선(禪), 그 말씀을 교(敎)라고 설파했다. 말없음으로 말없는 데 이른 것은 ‘선’이요, 말로써 말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라고 하면서 선과 교의 독특한 차이점을 밝혔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새삼 ‘마음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표를 던져본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내 마음’은 과연 어디쯤 가고 있을까. 불안한 마음, 두려운 마음, 노여운 마음은 자꾸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반가운 마음, 푸근한 마음은 점점 멀어진다는 생각이 문득 찾아든다. 지난 14일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며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은 한 암자를 향해 떠났다. 차로 4시간 남짓, 남원시 인월면 사거리에 도착했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위치를 물었더니 “암자의 그 스님은 참 훌륭하신 분”이라는 설명과 함께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지리산 실상사 방향으로 30분쯤 오르다 해발 600m 지점에 이르러 외길 숲 사이로 ‘황매암(黃梅庵)’이 나타났다. 출가한 지 50년째 선수행(禪修行) 중인 일장(日藏)스님, 한라산 자락 토굴산방 ‘목부원’에서 15년 동안 수행안거하다가 2004년 이곳에 ‘황매암’을 창건, 조용히 참선 정진 중이다. 성철스님의 스승이기도 한 동산 큰스님의 막내상좌로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가장 귀감으로 삼는다. 그래서 2005년 ‘선가귀감’의 언해본을 쉽게 한글로 번역·출간해 그 뜻을 폈다. 또 1999년에는 생전의 성철스님한테 받은 ‘만선동귀집’을 편역했다. 이 두권은 불교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특히 스님은 선서화(禪書畵)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의 불사전(佛事展)과 장학모금전에 참여하면서 이같은 존칭을 얻었다. 스님은 속세와 담을 쌓고 토굴수행을 하기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의하지 않는다. 까닭에 별도의 약속도 없이 무작정 황매암을 찾아 합장했다. 지리산 중턱을 감아도는 맑고 고운 바람과 풍경(風磬)소리를 배경으로 차방에서 스님과 마주 앉았다. 주위에는 온통 5월의 푸르름으로 가득했다. “어제는 백초(百草)를 캤지요. 취나물, 다래넝쿨, 오미자, 감잎 등 새잎이 돋아나니까 그걸 캐서 몇 단지 만들어 발효를 시켜 둡니다. 여름에 냉수 타서 마시면 속이 깨끗해요.” 스님은 출가 후 얼마 있다가 심장병이 악화돼 참선방에서 나와 일찍부터 토굴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고독과 절망을 이기는 것이 간단치 않았다. 하루는 성철스님한테 찾아갔다. 순 한문으로 된 ‘만선동귀집’을 건네받았다. 그날로부터 옥편을 옆에 끼고 공부에 몰입했다. 출가 초기에는 한 성당에서 호주 출신 신부와 1년 동안 지내며 교리공부를 했다. 이해되는 대로 몇줄씩 써서 벽에 붙였다. 이것을 볼 때마다 마음의 고향을 느꼈다고 했다. “스님,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형체도 없는 것을 사람들은 닫아 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진실해지면 표현도 진실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식과 위선이 많아집니다. 매일 있는 오늘이지만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시간, 이 환경은 두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바로 처음의 모습을 (마음에)담는 것입니다. 매순간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또 여한 없이 밝은, 닫힘이 없이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 속이 내 속이고, 그 사람의 삶이 없이 결국 내 삶도 없지요.” “스님이 그리는 ‘선서화’도 그런 맥락인가요?” “달마스님의 9년 면벽이 천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살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어느날 말이 곧 허구라는 걸 깨달았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붓으로 써서 절방 여기저기에 붙여 놨습니다. 나중에는 ‘웃는 기왓장’도 넣었고, 색칠도 해봤더니 그림쟁이라고 하더군요. 본업이야 중노릇인데, 지나가는 누구나 그걸 보면서 잠시 마음의 고향을 느끼면 그만이지요.” 스님은 20년 전 내원사에 있을 때 잘 아는 지인이 암에 걸려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고 병문안을 갔다. 이때 촛불이 그려진 연하장 크기의 선서화를 선물했다. 환자는 세상의 빛을 본 것처럼 좋아하며 머리맡에 붙였다. 얼마 후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적처럼 살아나 주위를 놀라게 했다. 화제를 돌렸다. 첩첩 산중의 암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해졌다. 갈등과 분열, 대립과 양극화, 도덕성 상실 등등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스님은 지체없이 “그건 다 우리의 거울이지요.”라고 말했다. 남을 탓할 필요 없이 각자 자신의 거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또 어떤 캠페인으로 고쳐질 것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 사회의 성장과정이 너무 쉬워요. 그러다 보니 우여곡절도 있고 혼란한 모습을 보이지만 나아집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유한이 아니라 무한입니다. 오늘의 발전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살아봄직하지요. 산은 무질서합니다. 수많은 가시덤불과 높고 낮은 언덕이 있거든요.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온갖 개성들이 함께 모여사는 사회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운명은 우리 각자가 하나씩 풀면서 꾸려나가야 합니다. 빈그릇을 보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가득차 있으면 유한한 법입니다. 때를 닦아내려면 걸레가 깨끗해야 합니다.” “스님,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더는 어떠해야 합니까?” “능한 사람이 아닌 스스로 나의 허물을 돌아보고 고칠 줄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어두운 알 속을 깨고 나오는 것이지요. 어둡다는 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으면 전체를 못봅니다. 전체를 밝게 봐야지요. 촛불이 방안에 하나 있는 것보다 10개 있으면 더욱 환해집니다.” 그러면서 그림 하나를 꺼낸다. 촛불 하나가 힘차게 그려져 있고 일휘등명(一 燈明), 보공시방(普供十方)이라는 글씨가 휘갈겨 있었다. 스님은 “밝은 등불(꿈, 희망, 용기) 하나, 이웃들에게 공양합니다.”고 풀이했다. “종교는 주변이 행복해져야 자신도 행복해진다는 바탕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나 1년에 천끼 넘게 먹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먹습니다. 다만 라면을 만날지, 아니면 진수성찬을 만날지는 지나온 밥그릇의 바탕에 따라 정해지겠지요. 생활습관이 바로 ‘업’입니다.” ■ 그가 걸어온 길 ▲경남 울산 출생(속성 천씨). ▲1958년 13세때 출가, 범어사 ‘동산스님’의 막내 상좌(上佐). 이후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1980년 제주 한라산 자락에 ‘목부원’을 창건하고 수선.10여년간 경전 강독.‘청화스님’이 입적 직전 목부원(현 자성원)에 머물면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한 곳으로도 알려짐. ▲2004년∼현재 전남 남원의 지리산 산중에 ‘황매암(黃梅庵)’을 세우고 참선정진 중. ▲주요 저서 편역으로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1991년 불광출판)과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2005년 불광출판)이 있다. ▲그외 숙생의 화업(畵業)으로 여러 차례 불사전(佛事展)과 장학모금전에 참여, 현존 선서화의 대가로 유명함. 실상사의 연관스님과는 절친한 도반. 성철스님을 사형(師兄)으로 모심(성철스님은 1936년 ‘동산스님’한테 사미계를 받았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한껏 부드러워진 김신용의 詩세계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苦行像처럼/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폐가 앞에서’ 가운데) 지난 2월 시인, 평론가, 문예지 편집인 등은 시인 김신용(62)씨의 연작시 ‘도장골 시편’을 ‘2006년 가장 좋은 시’로 꼽았다. 이전까지 김씨의 시는 생활고에서 비롯된 치열한 실존적 고통을 그려냈지만 ‘도장골 시편’에서는 부드럽게 연마된 장인의 이미지가 느껴진다.2005년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충북 충주의 산골인 도장골로 내려가 1년여간 자연을 벗삼으며 지냈던 시인은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자연적인 시적 언어들을 터득한 듯하다. 시인은 그때 쓴 시 50여편을 묶어 ‘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펴냄)을 냈다. “산비탈 가시덤불 속에 찔레 열매가 빨갛게 익어 있다/잡풀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맺혀 있어서일까?/빛깔은 더 붉고 핏방울 돋듯 선명해 보인다/…”(‘營實’ 가운데).1988년 무크지 ‘현대시사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에서 네번째 시집 ‘환상통’에 이르기까지 시장 바닥에 버려진 뼈다귀 같은 소외계층의 실존적 고통을 ‘사신(捨身)공양’하듯 그려내왔다. 빈약한 학력과 가난 등 자신의 밑바닥 체험과 처절한 생활고는 그의 시의 바탕이 됐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의장직 물러난 김근태 소회

    의장직 물러난 김근태 소회

    “먼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민주주의의 생일이다.” 14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장에서 고별인사를 하는 김근태 전 의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난해 5·31지방선거 참패 이후 8개월 만에 열린우리당의 ‘최장수’ 의장직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이날 김 의장은 환갑을 맞았지만, 위기에 처한 당의 현실 앞에서 축하인사를 받을 여유는 없었다. 불과 1년전 전당대회 경선에서만 해도 정동영 당시 의장에게 6%포인트 뒤졌지만 “대통합을 이루겠다.”며 호언장담했었다. 그 후 지방선거 참패와 노무현 대통령과의 냉전,‘뉴딜정책’에 쏟아지는 냉소,10월 재보선 참패…. 결정이 필요했던 순간마다 김 전 의장의 리더십에는 물음표가 붙었다. 최근에는 동료의원들의 탈당 사태까지 겪었다. 김 전 의장은 고별연설에서 “지난밤 오금이 저렸다. 서울 잠실체육관이 텅텅 비어 있는 꿈을 몇번이나 꿨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불길을 헤치고 물 속을 헤엄치고 가시덤불 지나 여기까지 왔다.”며 전당대회를 성사시킨 당원들을 군사독재 시절을 이겨냈던 노래 구절에 빗대 표현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儒林(736)-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7)

    儒林(736)-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7)

    제6부 理氣互發說 제3장 君子有終(17) 똑같은 꿈이 다시 시작되는군,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여전히 캄캄한 밤이었다. 먹물을 부어내린 것 같은 어둠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달도 없고 별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두향은 그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어서 두향은 그 풍경 속에 던져진 순간 또다시 같은 꿈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꿈이란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현실감은 한층 더 생생하였다. 악몽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두향은 깨어나려는 의식도 없이 꿈속에 자신을 떠맡기고 있었다. 늘 그러하듯이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캄캄한 어둠이었으므로 이따금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찔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고통이었으나 가위에 눌린 꿈은 깨어지지 않았다. 두향은 계속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막상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그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지만 두향은 서둘러 어둠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늘 그러하듯 어둠 속에서 폭죽이 터지듯 갑자기 눈부신 별이 떠올랐다. 그 별빛이 너무나 강렬하여서 두향은 그 별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강렬한 별빛으로 대낮처럼 드러난 풍경은 여전히 중유를 헤매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밤하늘에 떠올랐던 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두향은 그별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내쳐 달렸다. 그러나 가도가도 제자리에 맴돌고 있었을 뿐 그 떨어지는 별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안 돼요. 두향은 울부짖었다. -별이 떨어져서는 안 돼요. 그 별을 내가 받아야만 해요. 그래야만 별을 살릴 수가 있을 거예요. 안 돼요, 안 돼요. 거기까지였다. 두향은 꿈속에서 생각했다. 내 꿈은 항상 거기에서 끝나고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그 별빛이 자신에게 점점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한번도 없었는데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항상 꿈속에서는 떨어지는 별을 받으려고 달려가다가 가위에 눌려 기진맥진하여 깨어나곤 하였었는데 어째서 나는 지금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뿐인가. 한번도 받지 못한 그 별이 오히려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향은 한가득 두 손을 벌렸다. 눈부신 별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손을 벌려 받기엔 너무나 큰 별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두향은 치마폭을 펼쳤다. 그 순간 유성은 정확히 두향의 치마폭에 떨어졌다. 행여 별이 떨어질세라 두향은 감싸 쥐고 어둠 속을 뒹굴었다. 그 순간. 두향은 꿈에서 깨어났다. 언제나 그러하듯 온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하였고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 [이사람] 제주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이사람] 제주 ‘생각하는 정원’ 성범영 원장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등 전현직 중국 국가주석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도 감동시킨 ‘농부 외교관’. 제주도 북제주군 현경면 저지리에 ‘생각하는 정원’이라는 분재예술원을 운영하는 성범영(67) 원장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행복한 농부다. ●세계 정상을 감동시킨 ‘농부 외교관´ 정원을 다녀간 세계 지도자들은 수없이 많다. 최근 10년 동안 각국의 정상, 공무원, 군인, 언론인 등이 다녀갔다. 이들이 남긴 감탄의 글과 그림만도 300여점에 이른다. 성 원장은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한국적인 정원을 소개하면서 민간 외교관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가 민간 외교관 역할을 맡게 된 계기는 1995년 11월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의 방문이다. 예정 관람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정원을 샅샅이 돌아본 장 주석은 귀국한 뒤 “한국 제주도에 있는 분재예술원은 일개 농민이 정부의 지원 없이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가서 보고 개척정신을 배우라.”고 간부들에게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생각하는 정원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후진타오 당시 국가 부주석이 찾았다. 이후 중국 당과 정부, 지방 정부, 군인 등 엘리트 공무원들이 성 원장의 정원 조성·운영 노하우와 철학을 배우기 위해 찾는 필수 관광코스가 됐다. 제임스 레이니·버시바우 전현직 주한 미국대사, 장 폴레오 전 주한 프랑스 대사도 다녀갔다. 뉴욕타임스 편집국장, 중국 인민일보 총편집인 등도 찾았다.CNN에 정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간 뒤 미국·캐나다 등에서도 관광객들이 줄을 잇는다. 성 원장은 “오직 분재원을 보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브라질에서 20시간을 걸려 찾아온 관광객도 있으며, 독일의 한 관광객은 무려 열 번이나 찾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미국 관광 전문기자 15명이 3시간 동안 분재원을 취재하고 돌아갔다. ●“두루외! 낭이 밥멕여주나” 성 원장의 거친 손에는 늘 전지 가위가 들려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무에 물을 주고 돌을 쌓는 억척스러운 농민이다. 세계적인 관광농원을 조성한 성 원장은 그러나 관광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제주 토박이도 아니다. 그저 나무가 좋아서, 제주도 돌이 소중해서 분재원을 가꾼 농민이다.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중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 2학년 때 군에 입대했다. 그가 척박하기로 소문난 제주도에 발길을 내디딘 것은 1963년 말. 군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목포에서 연락선을 탔다.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타고 겨우 찾아온 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나지막한 가시덤불 언덕이었다. 초겨울인 데도 파릇파릇 자라는 채소와 열대 과일,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돌이 신기해 막연하게 농사를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고 돌아갔다. 성 원장은 서울에 올라와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 모두 제주 돌밭을 구입하는 데 투자했다. 전국을 돌면서 나무를 사들였다. 분재 정원에 관한 전문지식을 별도로 배운 적도 없고 정원 조성 설계도도 그리지 않았다. 다만 가장 한국적이고 제주도의 자연에 맞추겠다는 생각으로 농장을 가꾸고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루외! 낭이 밥멕여주나(미친 놈, 나무가 밥먹여주나).”며 손가락질을 했다. 그는 제주 돌을 아낄 줄 안다. 돌에 미친 ‘돌챙이’(돌담 쌓는 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다. 정원은 나무와 돌담으로 어우러진 자연 그대로다. ●분재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사랑으로 완성 성 원장의 분재관은 남다르다. 분재야말로 살아 있는 나무를 소재로 삼아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사랑으로 완성하는 ‘생명예술’로 본다. 오랜 세월을 바쳐 완성하고,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시간예술’이기도 하다. 기르는 사람이나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름답게 완성하는 ‘인격예술’로 정의한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기술과 정성을 더하여 자연보다 더 아름답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땔감에 불과한 나무(우리만 갖고 있는 자연이란다)도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분재가 된다. 성 원장은 “분재는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라 교정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무를 사랑하다보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고, 순리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를 깨닫는다.”며 정원 조성과 그의 철학이 담긴 책 ‘생각하는 정원’을 내놓았다. 이 책은 중국어·영어로 번역됐고, 일본어·독일어판도 나올 계획이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儒林(63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1)

    儒林(63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21) 캄캄한 밤이었다. 먹물을 부어내린 것 같은 어둠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 있는가 하늘을 보아도 달도 보이지 않았고, 별이 있는가 헤아려 보아도 별빛조차 없었다. 두향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캄캄한 어둠이었으므로 이따금 돌부리에 차이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찔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고통이었으나 두향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모른 채 두향은 계속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고 두향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빨리 가야 한다고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그러나 두향은 막상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계속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었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두향은 이를 악물고 바람 속을 뚫고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을 밝히며 밤하늘의 별이 떠올랐다. 너무나 그 빛이 강렬하여서 두향은 그 별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순간 온 벌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그 모습은 살풍경하였다. 마치 죽은 사람이 헤매는 황천의 풍경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죽었는가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죽어 중음(中陰)을 헤매고 있는가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죽어서는 안 되는데, 아직 죽을 때는 안 되었는데, 하고 두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살아남아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고 두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밤하늘에 떠있던 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두향은 별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내쳐 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도가도 아득하기만 하였다. 밤하늘에서 큰 획을 그으며 별이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가도가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안돼요, 하고 두향은 울부짖었다. 별이 떨어져서는 안 돼요. 별을 내가 받아내야만 해요. 그래야만 별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안돼 안돼요― 자신이 울부짖은 소리에 두향은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다.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기진맥진하였는지 온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하였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벌써 며칠째 꾸는 흉몽이었을까, 몇 날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꿈만 꾸고 있다. 꿈으로써 길흉을 점치는 몽복에 의지하여 본 적은 없지만 몇 날 며칠을 계속해서 꿈을 꾸는 유성(流星)은 길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다. 옛말에도 있지 아니한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면 지상에서는 큰 인물이 숨을 거둔다는. 그렇다면 그 떨어지는 별은 누구를 가리킴인가, 바로 나으리가 아닐 것인가. 그렇다면 나으리께서 벌써 연세(捐世)라도 하신 것일까. 꿈에 보던 그 별은 크기도 하려니와 그 광채 역시 온 누리를 찬연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나으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런 큰 별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인가.
  • 잠자는 미녀/ 로버트 쿠버 지음

    물렛가락에 찔려 100년간 잠에 빠진 아름다운 공주는 항변한다.“왜 하필 나지요? 왜 내가 그런 존재여야 하지요? 이건 불공평해요.” 가시덤불을 헤치고, 성벽을 기어올라 공주에게 입맞춤하는 사명이 주어진 왕자 또한 끊임없이 자문한다.“이제 나는 내 이름을 남긴 건가? 그렇다면 그게 과연 뭐란 말인가? 혹시 내가 딴 성에 온 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는 동화의 해피엔딩에 속는 건 현실감각 없는 어릴 때뿐이다. 조금만 일상적으로 생각해보라.100년간 쌓인 먼지하며, 한번도 씻지 않은 공주의 더러운 얼굴, 오며가며 공주를 범한 여러 남자들, 그로 인해 생긴 아기들…. 아름다운 마법의 성이 공포의 폐허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미국 작가 로버트 쿠버의 ‘잠자는 미녀’(이성원 옮김, 열림원 펴냄)는 그림형제가 유포시킨 낭만과 환상을 철저하게 깨부순 뒤 그 이면에 숨은 의미들을 파헤치는 묘미를 선사하는 책이다. 지난 5월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청됐던 로버트 쿠버는 21세기 새로운 소설양식으로 떠오른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의 선두 주자.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다양한 서사 구조를 담는 ‘하이퍼 픽션’은 디지털 시대의 문학이 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독자와 공동으로 만들어가는 쌍방향 교류임을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잠자는 미녀’는 공주, 왕자, 노파 요정 등 세 인물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이중 노파 요정의 역할은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동화 ‘잠자는 미녀’의 플롯에서 상상 가능한 다양한 버전들을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다. 공주를 깨운 이가 실은 술 취한 농군이었다거나 왕자는 맞는데 유부남이었고, 공주는 질투에 눈먼 왕비에게 살해됐다는 등의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지적 게임이고, 놀이의 장’이라는 작가의 문학관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작.1997년 ‘숲속의 미녀 잠깨다’로 국내에 한차례 소개됐던 것을 이번에 재출간했다.9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0)서산대사와 ‘정감록’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사에 관한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기억은 그런 것이다. 대사는 절간에 몸을 매어두고 있었지만 국란을 당하자 창칼을 들고 일어나 왜적을 무찔렀다. 그래서 국왕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의 고관)에 이르렀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무엇보다도 도술에 능했다. 그는 바람과 비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신승(神僧)이었다.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실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기억이 사실 그 자체는 아니다. 기억은 무척이나 선택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특히 민중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승돼 온 기억은 더욱 그렇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숨쉬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기억은 역사에 대한 민중의 바람이라고 해야 옳다.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민중이 기억하는 서산대사는 모르는 것, 못 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그는 당연히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했다. 서산대사에 대한 민중의 기대는 ‘서산대사비결’이란 책자를 낳았다. 비슷한 이유에서 민중은 신라 고승 원효가 지었다는 ‘원효비결’이란 예언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원효비결’은 20세기 후반에야 등장했다. 그와 달리 ‘서산대사비결’은 조선 후기에 출현해 정감록의 일부가 되었다. 서산대사는 왜 서산대사로 불리는가? 그는 오랫동안 관서지방의 묘향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속성은 최씨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멀지 않은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이었다. ●서산대사는 호국불교의 상징 타고난 운명이 기구했던지 대사는 어린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사춘기엔 방랑을 떠나 멀리 남부지방까지 떠돌았다. 그는 지리산에 매료돼 숭인장로(崇仁長老)란 고승의 문하에 들어갔고, 선승(禪僧)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중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이 사건에 연루돼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결백이 입증돼 국왕의 특명으로 석방된다. 평소 대사는 즐겨 시문을 지었다. 옥사 사건 때 조정 대신들은 그 글들을 세밀히 검토하게 되었다. 대신들은 서산대사의 글이 단아한데다 그 대부분이 국왕을 위한 기도로 가득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다. 국왕 선조 역시 대사의 충성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친필로 시를 써주었다. 아울러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점을 주어 대사의 마음을 위로했다(실록, 선수 23년4월1일 임신).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의주까지 밀려났다. 국운이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수년 전 서산대사를 깊이 신뢰하게 된 국왕은 대사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서산대사는 전국 각지의 사찰에 연락해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조직한다.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은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 탈환에 참여한다. 작전은 성공했고 덕분에 국왕은 서울로 환도한다. 서산대사는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승군의 지휘를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간다. 서산대사는 사명당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정을 왜군 진영에 보내 정전회담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공식적인 역사기록에 따르면, 서산대사의 승군은 전쟁터에서 직접적인 공적을 별로 쌓지 못했다 한다. 살생을 금기로 삼고 있는 승려들인 만큼 접전(接戰)엔 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승군은 성실해서 요새의 경비에 뛰어났다. 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축성하는 데도 그만이었다. 승군의 이런 장점은 널리 인정을 받게 돼,“각 도가 모두 승군에 의지하였다”(선수 25년7월1일 무오). 왜란 중 서산대사의 처신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그는 자신의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행궁(行宮) 어문(御門) 밖에서까지 말을 타고 횡행(橫行)하였다. 심지어는 대궐 출입까지 허락받기도 했다.”(선조26년7월19일 신미) 평소 불교계를 배척해온 유학자들로서는 서산대사가 궁궐출입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방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미 나이가 80에 가까워 도보로 먼 거리를 출입하기란 불가능했다. 왕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 대사에게 말을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허락했다고 봐야 옳다. 선조가 자신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자 서산대사는 그 기회에 불교를 중흥할 꿈을 키웠다. 대사는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삼아 분열된 교단을 통합하려 했고, 이를 위해 몇 권의 책자를 저술했다.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선종의 입장에서 모범이 될 만한 가르침을 모은 것이다.‘선교석’(禪敎釋)과 ‘선교결’(禪敎訣)은 선종과 교종을 비교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참선수도에 필요한 주문을 모아 ‘운수단’(雲水壇)을 짓기도 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산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중흥되지는 못했다. 대사는 결국 금강산에서 입적했는데, 자신의 의발(衣鉢 승려의 유품)을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두라고 유언했다. 제자들은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은 대흥사 경내에 표충사(表忠祠)를 세워 대사의 은덕을 추모했다. 뒷날 정조는 표충사라는 현판을 사액했다(정조12년7월5일 을축). 대사가 오래 주석했던 묘향산(妙香山)에도 수충사(酬忠祠)라는 사당이 봉헌됐다(정조 18년3월16일 계묘). 정리하면, 서산대사는 고대부터 이어진 호국불교의 전통을 따른 고승이었다. ●서산대사는 만능의 도사 국가가 편찬한 역사기록은 믿을 만한가? 역사상 있었던 구체적인 사실에 관한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사실이 다 기록되지는 못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역사책에 기록될 사실은 어차피 선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의 선택은 이미 역사적 사건에 관한 주관적 해석이다. 심지어는 왜곡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산대사가 호국불교의 화신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은 간단하지 않다. 그걸 확인하는 방편으로 조선시대 민중이 서산대사를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알아볼 수도 있다. 민중의 견해는 민간설화로 남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설화에서 보이는 서산대사의 모습은 도술의 대가였다. 물론 대사가 정말 도술에 능했을 리는 없다. 다만 민중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대사의 모습에서 참된 영웅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대사는 그런 영웅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마음대로 도술을 부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서산대사의 도술 이야기는 임진왜란에 관한 것이 많다. 한 번은 서산대사가 제자 사명당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부적(符籍) 하나를 건네줬다고 한다. 이 부적 덕택으로 사명당은 일본의 왕성에 있던 병풍에 적힌 시구를 모두 알아 맞힌다. 일본인들은 사명당을 무쇠 방에 집어넣고 불을 때 태워 죽이려 했지만 사명당은 방안에 고드름이 맺히게 해 그들을 놀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병이 오게 된 것도 서산대사 덕분이라 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중국의 큰 부자에게 살아 움직이는 금강산도(金剛山圖)를 그려 주었다. 그림 값으로 수표 한 장을 받았는데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나중에 그 집 딸이 큰 부잣집에 시집가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에 원병을 보내게 한다. 명나라 장수로 조선에 파견돼 온 이여송이 생떼를 부리자 이를 무마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여송은 용의 간과 소상강 반죽을 내놓으라며 억지를 부렸는데 대사가 개입해 백마의 간과 백두산의 대나무로 대신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주성에서 기생 논개가 왜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게 된 것도 실은 서산대사의 지도로 된 일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설화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사명당의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서산대사의 부적 때문에 공을 세웠다곤 볼 수 없다. 명나라가 조선에 이여송을 파견한 것, 이여송이 방자하게 굴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서산대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논개의 죽음을 서산대사와 연결시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도술시합 민중은 영웅인 서산대사와 그 제자 사명당의 도술 시합도 창안해 냈다. 사제관계였던 두 명의 고승이 도술시합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를 점쳤던 것이다. 어느 날 사명당이 서산대사를 찾아 금강산 장안사로 갔다. 절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법당문이 열리며 서산대사가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었다. 사명당은 대사에게 말싸움을 건다. 사명당은 마침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대사에게 묻는다. “지금 제 손아귀에 들어 있는 이 참새가 죽을까요, 살까요?” 사명대사는 이렇게 응수한다.“내 한 쪽 발이 법당 안에 있고, 또 한 발은 법당 밖에 나가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겠느냐,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그야 밖으로 나오시겠지요. 애초 나오실 생각이 없으셨다면 문은 왜 열며, 벌써 한 발은 왜 밖으로 딛으셨겠습니까?” “맞다. 네가 손에 쥔 참새도 마찬가지다. 불승이 어찌 살생을 하겠느냐?” 얼핏 막상막하로 뵈지만 서산대사의 판정승이다. 사명당은 고작해야 발의 동작에 주목했다. 하지만 서산대사는 일시적인 몸동작이 아닌 승려 본연의 자세를 논했기 때문이다. 사명당은 등에 졌던 봇짐을 내려 놓는다. 그 안엔 바늘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다. 사명당은 잠시 그 바늘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러자 바늘이 먹음직한 국수로 변한다. 사명당은 국수를 맛있게 먹으면서 서산대사에게도 함께 먹기를 청한다. 두 사람은 맛있게 바늘국수를 먹는다. 잠시 후 서산대사의 입에선 바늘이 줄줄 흘러나온다. 사명당은 얼른 패배를 인정하기가 싫다. 이 번엔 백 개의 계란을 꺼내어 땅바닥에서부터 한 줄로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신기에 가깝다. 서산대사는 그 모양을 보고 빙긋 웃더니 계란을 공중에서부터 거꾸로 쌓아 내려온다. 마지막 용기를 내어 사명당은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자 여태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모인다. 금방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번개가 친다. 밧줄처럼 굵은 빗줄기가 한참동안 쏟아져 내린다. 서산대사는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소낙비를 멎게 한다. 뿐만 아니라 땅바닥을 적신 빗방울까지 몽땅 하늘로 거둬 버린다. 사명당은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 그 순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깍듯이 스승으로 모신다. 조선시대 민중은 스승과 제자의 서열을 뒤집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당도 서산대사 못지않게 뛰어난 고승이었건만 민중의 공론은 명백했다. 감히 제자가 스승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예언가 서산대사의 비결(訣) 절세의 영웅 서산대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떤 여인이 광주리에 달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팔팔 휘저으며 걸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 본 대사는 광주리 안의 달걀이 64개임을 대번에 알아 맞혔다.“팔팔(八八)” 걸었기 때문이란다. 물론 이것은 민중이 지어낸 익살이다. 그러나 장난끼어린 익살 속에도 서산대사의 투시력에 대한 민중의 기대가 숨어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는 한두 가지 예언을 남겼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한다. 그는 임종시 유품(遺品)을 해남 대흥사에 두게 했다. 제자들은 왜 하필 그렇게 멀고 구석진 곳이냐고 물었다. 대사는 그곳이 “천년 병화(兵火)가 미치지 않아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불교의 법통이 돌아갈 곳”이라 말했다. 과연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게 되자 이 절은 크게 융성했다. 이 절엔 서산대사의 금란가, 옥발, 수저, 신발, 염주, 교지 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음은 물론, 초의대사(草衣大師)를 비롯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됐다. 조선 후기가 되어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예언서를 찾게 되었다. 만일 서산대사 같은 분이 살아 계신다면 앞일을 무어라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산대사비결’이란 신종 예언서가 탄생했다. 실상 서산대사와는 무관한 예언서였다. 생전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친 대사의 이름을 빌려 그 왕실의 패망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사의 이름을 빌린 이 예언서의 내용은 대개 이렇다.1. 조선 말년에 당목 넷이 지나면 지혜 있는 선비는 반드시 떠나갈 것이다.2. 만일 성스러운 해를 만나면 천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하리라.3.10년 동안 들에서 밥을 먹으니 집 생각하는 마음이 무궁하고, 천리에 곡식을 운반하니 편안하고 한가할 날이 기약이 없다.4. 코가 검은 장군이 여진에서 나와서 오얏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덤불을 벤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는 실상 오얏나무를 베는 도끼다. 첫째는 난을 피해 길지로 숨을 시기를 예언한 것이고, 둘째는 진인이 이끄는 천척의 배가 쳐들어올 시기를 말한 것이다. 셋째는 혼란기에 벌어질 전쟁이 10년 동안이나 지속된다고 본 것, 넷째는 이씨 왕조(‘오얏나무’)를 뒤엎을 세력이 북쪽에서 나온다는 예언이다. 이런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별로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감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넷째 번은 좀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전에 살핀 대로 ‘토정비결’에선 요동에서 곽 장군이 나와 진인왕을 돕는다고 했다.‘서산대사비결’에선 바로 그 곽 장군을 ‘코가 검은 장군’으로 바꿔 썼다. 게다가 그 곽 장군이 진인왕을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실의 편을 드는 척하다 결국 왕조를 뒤엎어 버린다고 예언한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예언서들이 자꾸 만들어진 이유는 뭘까?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곧 조선왕조는 망한다. 그 다음엔 진인왕이 새 나라를 세운다. 그러나 왕조교체의 과도기엔 오래 혼란이 지속된다. 그 때 사람들은 길지로 피란가는 것이 상책이다.” 이것이 ‘정감록’의 핵심이다. 조선 후기의 술사들은 민중이 기억하는 역사상의 대 예언가들의 이름을 빌려 이런 메시지를 기정사실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테면 부조(浮彫) 수법이었다. 때론 다른 이유도 작용했다.‘정감록’에 담긴 메시지를 수정하거나 보충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언은 미래를 겨냥한 것이고 따라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던지는 점괘는 늘 달리 풀이될 수 있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대안이 늘 필요했다. 엄밀한 의미로 ‘서산대사비결’은 ‘정감록’의 개정판이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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