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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복자들’ 치과의사 이수진, ‘SKY캐슬’ 실존인물? “3대째 의사 가문”

    ‘공복자들’ 치과의사 이수진, ‘SKY캐슬’ 실존인물? “3대째 의사 가문”

    ‘공복자들’ 치과의사 이수진이 복근을 위해 공복에 도전했다. 지난 15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램 ‘공복자들’에서는 완벽한 복근을 위해 공복에 도전한 이수진과 노홍철, 미쓰라 등이 ‘생활 공복’으로 놀라운 체중 변화로 시청자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드라마 ‘SKY캐슬’의 실존인물이라고 소개받은 이수진은 “할아버지가 한의사, 아버지가 외과의사, 내가 치과의사로 3대째 의사 가문”이라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이수진은 치과의사답게 “치아 하나당 가치는 3000만 원이다. 치아가 망가지면 세균이 혈관, 심장 질환까지 이어지게 한다. 그녀는 음식을 먹은 뒤에는 반드시 양치해야 한다”고 기승 전 양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이수진은 칫솔에 대해서는 “가느다란 칫솔이 좋다. 그래야 안쪽, 구석구석까지 들어간다. 칫솔 방향은 잇몸에서 치아 방향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하며 꿀팁을 전수했다. 이어진 이수진의 공복 도전기는 모두를 놀라게했다. 치과에서도 멈추지 않고 자기관리를 하던 그녀는 치아관리에 이어 몸매 관리에 대한 꿀팁을 SNS팔로워들과 라이브로 공유 하며 완벽한 동안 미모의 비법을 전수 했다. 이수진는 모든 일을 마치고 즐겨 찾는 헬스장으로 향했고, SNS를 통해 일주일만에 복근을 되찾기로 약속하면서 극한의 방법으로 ‘물 섭취 제한’을 하게 됐다. SNS소통을 자주하는 그녀는 실패 시 공약으로 ‘반나절 핸드폰 사용 금지’를 걸었다. 이수진이 복근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그녀의 딸이었다. 이수진의 딸은 공복을 하고 있는 엄마 앞에서 치킨을 먹는가 하면, 엄마가 공복에서 마실 수 있는 물까지 빼앗아 먹은 것이다. 딸의 방해 아닌 방해와 여러 어려움들이 겹친 가운데 이수진은 24시간 공복을 성공리에 무사히 마쳤다. 공복에 성공한 이수진은 눈 앞의 떡국은 안 먹고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이는 SNS에 올릴 복근 인증사진 촬영을 위한 것이었다. 물까지 500ml로 제한한 이수진의 배에는 확실한 복근이 새겨져 있었다. ‘공복 끝에 복근 온다’는 말처럼 그녀의 복근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를 확인한 이수진은 그동안 못 먹었던 친정엄마의 명절 음식들을 먹어 미소를 짓게했다.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데스크 시각] ‘SKY캐슬’의 병폐를 없애려면/조현석 산업부장

    [데스크 시각] ‘SKY캐슬’의 병폐를 없애려면/조현석 산업부장

    종영을 앞둔 인기 드라마 ‘SKY캐슬’은 자식을 명문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한 부유층들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명문대에 진학을 해야 ‘(계급사회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있다’거나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어야 한다’며 자녀를 몰아세우는 상류층 부모와 이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해 고액 과외를 부추기는 입시 코디네이터 등이 주요 등장 인물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병원에서는 라이벌 의사를 ‘지잡대’(지방대를 비하하는 말)라고 몰아세우며 승진을 위해 학벌과 학연, 지연을 내세는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SKY캐슬이 인기를 끈 이유는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명문대 진학이 곧 사회적 성공이라는 인식이 대한민국 1%의 상류층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악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다. 꼭짓점에는 학벌 위주 사회가 존재하고 있다.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로 불리는 대학을 나와야 드라마에서 말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SKY 진학을 위해 특목고와 자사고 진학에 매달리고, 초·중학교 때부터 학원을 전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학벌 위주의 사회가 아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사교육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학부모와 이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해 돈을 버는 학원들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최근 기업 경영성과 평가 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500대 기업의 현직 CEO(내정자 포함) 출신 대학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SKY 출신’이 전체의 40.4%를 차지했다. 2015년 47.6%보다 7.2% 포인트 낮아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200개에 가까운 4년제 대학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정부 최고위직도 마찬가지다. 역대 정부마다 ‘능력 중심 사회’를 외치며 교육·입시 정책을 수시로 바꾸고 있지만, 정부 각 분야 최고위직에서 고졸이나 비(非)수도권 대학 출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 언론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내각과 주요 위원회, 권력기관, 청와대의 차관급 이상 출신 대학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4.4%가 SKY 출신이고, 소위 ‘인 서울’(서울 소재 대학) 출신이 82.7%에 달했다. 최근 들어 기업들 사이에 블라인드 채용이 확산되고 있다. 출신 학교와 지역, 가족관계 등 차별적 요소를 가리고 직무 능력만으로 채용하는 제도다. 기업 중에는 KT와 CJ, SK그룹의 일부 계열사들이 서류와 면접 단계 등에서 블라인드 전형으로 선발하고,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두산중공업 등이 일부 직무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하고 있다. 직무 전문성 채용이 강화되면서 인공지능(AI)이 서류를 걸러 내는 시스템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좋은 대학을 보내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확실히 잠재우기 전까지는 SKY캐슬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선의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불법·고액 과외를 부르는 불필요한 경쟁은 아이들만 멍들게 할 뿐이다. 취업을 위해서는 ‘스펙’(학력·학점·토익 점수 등)보다는 직무 역량이, 학력보다는 실력이 우선된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더 명확히 던져야 한다. 아직도 상당수의 기업에서 신입사원 지원 자격을 대졸 출신으로 제한하고, 스펙 위주의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있다. 또 고졸 출신을 채용하더라도 대졸 출신의 임금과 직급에 과도한 차이를 두는 곳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많지만 기업들이 더 적극적으로 채용 방식의 다변화를 통해 ‘학벌 타파’에 나선다면 조금이나마 SKY캐슬의 병폐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hyun68@seoul.co.kr
  • 농촌 빈곤 목도한 늦깎이 목민관, ‘토지 공개념’ 제시하다

    농촌 빈곤 목도한 늦깎이 목민관, ‘토지 공개념’ 제시하다

    우리 형님 얼굴과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今日思兄何處見)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自將巾袂映溪行) 연암 박지원은 1787년(정조 11년)에 많은 사람을 잃었다. 새해가 되자마자 아내와 사별하고, 7월에 형님상을 당하고, 얼마 뒤에는 며느리까지 떠났다. 이별 가운데 가족과의 이별은 더욱 아프다. 떠나보내고서도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내 잃은 박지원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홀아비’로 살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 박지원은 아버지를 여의고서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형님의 얼굴을 봤다. 이제, 형도 죽고 없다. 형이 보고 싶을 때면?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그려볼 수밖에.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지내던 형님의 생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에서 형으로, 형에서 아우로 이어지는 혈육의 애잔함과 함께 단아하던 형님의 인품까지 단 스물여덟 자로 그려 내는 솜씨가 놀랍다. 조선 최고 문호로 불리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런 박지원은 1737년(영조 1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으로 부친 박사유의 2남 2녀 중 둘째였다. 그리고 열여섯에 농암 김창협의 학통을 계승한 이보천의 딸과 결혼했다. 명문가의 후예로서 당대 최고의 지성과 학맥을 댄 노론계 일원이었으니 그의 미래는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세 차례의 운명적 만남을 계기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삶은 굽이쳐 갔다. #첫 번째 만남, 미더운 벗들과의 학문적 우의 박지원도 여느 선비들처럼 한때 과거 공부에 몰두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벼슬길로 나아갈 것인지, 학문세계에서 자유롭게 노닐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북한산 암자에서 독서할 즈음 스물여섯의 박지원은 사도세자가 죽는 참극을 목도했다. 숙종·경종·영조로 이어지며 벌어지던 숱한 정치적 부침의 결정판이기도 했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박지원은 마침내 젊은 시절 꿈과 결별한다. 대신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금강산을 비롯하여 송도 평양 천마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을 함께 유람했다. 그러던 중 개성 부근의 ‘제비바위골’(燕巖)을 발견하고, 뒷날 은거를 다짐하며 자신의 호로 삼았다. 박지원이 현실 정치 진출을 포기한 데는 평생 벼슬하지 않고 포의로 지낸 부친과 장인의 영향도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인은 사위가 과거장에서 시험 답안도 제출하지 않고 나왔건만 내심 기뻐했다고 한다. 박지원 자신도 아들에게 “모름지기 수양을 잘해 마음이 넓고 뜻이 원대한 사람이 돼야지 과거 공부에 매달리는 쩨쩨한 선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다. 모두가 간절하게 소망하던 과거를 하찮게 치부했던 그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학문과 그 길을 함께하는 벗들이 벼슬보다 더욱 미더운 삶의 동반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옛날에 벗(朋友)을 말하는 사람들은 벗을 ‘제2의 나’(第二吾)라거나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컬었다. 이런 까닭에 한자를 만든 사람이 ‘날개 우’(羽) 자를 빌려 ‘벗 붕’(朋) 자를 만들었고, ‘손 수’(手) 자와 ‘또 우’(又) 자를 합쳐서 ‘벗 우’(友) 자를 만들었다. 벗이란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박지원,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시서화에 뛰어났던 청나라 문인 곽집환의 문집에 써준 서문의 첫 대목이다. 홍대용이 1776년 북경에서 그의 문집을 가지고 왔는데, 박지원이 읽고 서문을 지어줬다. 미지의 중국인에게 건넨 첫 번째 인사가 ‘벗이란 어떤 존재인가’였다. ‘제2의 나’라는 표현이 적실하게 와서 꽂힌다. 박지원만 그리 생각한 게 아니다. 이덕무도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라고 했고, 박제가도 “사람에게 하루라도 벗이 없으면 좌우 두 손 잃은 것 같다”고 했다. 그들에게 벗은 타인이 아니라 아내이자 형제와 같았다. 일찍이 마테오 리치가 ‘교우론’에서 갈파한 것처럼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나의 반쪽이요, 바로 제2의 나”(吾友非他, 卽我之半, 乃第二我也)였던 것이다. 실제로 담론과 음악을 함께 즐겼던 홍대용이 죽자 박지원은 그 이후 음악을 듣지 않고, 갖고 있던 악기들도 모두 남에게 줘버렸다고 한다. ‘지음’(知音)이란 이렇게 절절한 또 다른 자기였던 것이다.#두 번째 만남, 중국으로의 가슴 벅찬 여행 박지원은 많은 벗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많기도 했지만, 출신과 개성도 다양했다. 홍대용 유언호처럼 명문가문의 후예,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처럼 서자 출신, 정철조와 같은 과학과 그림의 달인, 백동수와 같은 창검술의 고수 등.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기르는 종이라도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나의 좋은 벗”(홍대용에게 보내는 편지 중)이라던 박지원의 우정관은 빈말이 아니었다. 박지원과 그의 벗들은 주로 종로 탑골공원 안의 원각사탑 근처에서 모임을 가져 일명 ‘백탑파’로 불렸다. 그곳에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북학의’ 서문)하며 떠들썩한 우정의 향연을 벌였던 것이다. 담론의 주제는 조선을 넘어 드넓은 중국으로 향해 있기 일쑤였다. 1766년(영조 42년)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은 자신의 견문을 연행록에 담아 과시했고, 1778년(정조 2년) 이덕무와 함께 중국을 보고 온 박제가도 ‘북학의’라는 저작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지적 호기심이 남달랐던 박지원은 무한 부러웠을 터.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홍국영을 피해 연암에 은거하고 있다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따라가게 된 것이다. 1780년(정조 4년)의 일이다. 압록강을 건너 말로만 듣던 중국 땅으로 들어섰다. 열흘을 걸어도 산이 보이지 않는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참으로 좋은 울음 터로다. 크게 한번 울어볼 만하다”(‘호곡장론’)라고 했던 감격 어린 발길은 마침내 만리장성 너머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무령산을 돌아 광형하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古北口)를 빠져나가는데, 때는 삼경이었다. 관문을 나와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길이나 되었다. 붓과 먹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벽을 어루만지면서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라고 썼다. 그리고는 곧 크게 웃으며 “나는 서생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박지원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夜出古北口記) 조선의 사신은 청나라 북경까지 다녀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마침 건륭제가 황제의 별궁이 있는 열하에 머물고 있어 거기까지 가야 했다. 허탈하고 고달프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북경에서 열하로 가기 위해 만리장성의 북쪽 관문인 고북구를 지나가는 경이로운 체험.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발걸음이었던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여느 연행록과 달리 ‘열하일기’라고 명명한 까닭이다. 그 순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물 대신 술로 먹을 갈아 자신의 자취를 장성에 써내려가는 문사의 풍류가 멋들어지게 보이지만, 이내 씁쓸한 헛웃음을 터뜨린다. 대장부로 태어나서 이제껏 좁은 조선 땅에 갇혀 살았다는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탓이다. 그때 박지원의 나이 마흔넷이었다. #세 번째 만남, 궁핍해져 가는 농촌 현실 대면 박지원은 중국에서의 견문을 기록해 둔 여행 메모를 고치고 다듬어 1783년(정조 7년) ‘열하일기’를 탈고했다. 그의 문명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하지만 문체가 정통 고문에서 벗어났다거나 오랑캐인 청나라 연호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호된 비난을 함께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정조의 질책과 함께 원고 전체가 불태워질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시비가 분분하던 즈음 박지원은 젊은 날 포기했던 벼슬길에 쉰 살이 되어 나서게 된다. 너무 궁핍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평생의 지기 유언호의 천거로 1878년(정조 10년)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지만, 별로 두드러진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1792년(정조 16년) 안의현감을 시작으로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 지방관으로 있은 10여년은 박지원의 삶을 재조명하게 하는 각별한 시기였다. 수차,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해 농민의 수고를 덜어주는 한편 왕성한 창작력으로 많은 작품을 짓기도 했다. 특히 1799년(정조 23년)에 지어 올린 ‘과농소초’(課農小抄)의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는 주목할 만하다.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해 부호들이 토지를 무한정 늘려 가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종의 토지공개념인 셈이다. 주나라의 정전제나 한나라 동중서의 논의를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지는 농촌 현실을 목도한 목민관으로서 제기한 혁신적 방안임이 분명했다. 그 책을 읽고 감탄한 정조도 ‘농서대전’의 편찬을 맡겨야겠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그의 꿈은 빛을 보지 못했다. 1805년(순조 5년) 69세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정출헌 한국고전번역원 밀양분원장·부산대 교수 ■ 문학·여행·농업 등 망라한 연암집 필사본으로 전승되다 20세기 들어서야 공간됐다. 김택영이 선집 형태로 1900년 6권 2책 ‘연암집’, 1901년 3권 1책 ‘연암속집’, 1917년 7권 3책 ‘중편 연암집’을 간행하고, 박영철이 1932년 17권 6책 ‘연암집 전집’을 간행했다. 제1~10권은 일반 시문, 제11~15권은 열하일기, 제16·17권은 과농소초이다. 연암집 번역본은 우전 신호열 선생과 김명호 교수가 공역으로 2007년 출간했다. 열하일기 번역본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연민 이가원 선생이 1968년 최초 완역하고서 김혈조 교수가 2017년 개정 신판을 출간했다.
  • ‘왕좌의 게임‘의 그 숲, 또 한 그루의 너도밤나무 스러지다

    ‘왕좌의 게임‘의 그 숲, 또 한 그루의 너도밤나무 스러지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소개돼 북아일랜드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들러보는 다크 헤지스(어두움의 울타리) 나무가 또 강풍에 뿌리채 뽑혔다. 북아일랜드 아르모이(Armoy) 근처 브레가 로드(Bregagh Road)에 있는 너도밤나무 터널은 왕좌의 게임에서 스타크 가문의 아이들이 여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뿔뿔이 친척 집 등으로 흩어질 때 이용하던 길로 등장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그런데 지난 26일(현지시간) 밤에 시속 90㎞의 강한 바람이 불어 한 그루가 뿌리채 뽑혀 벌러덩 넘어졌다. 지난해 6월에도 폭풍 헥터가 덮쳐 몇 그루가 심하게 망가졌다. 원래 이 너도밤나무들은 서기 1775년 스튜어트 가문이 그레이스힐 하우스 맨션으로 진입하는 길 가에 심은 것들이었다. 수십 년에 걸쳐 나뭇가지들이 자라나 저희끼리 몸을 휘감아 마치 영혼을 휘감는 어두운 안개처럼 멋진 풍광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150그루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제 많이 고사해 90그루 정도만 남았다. 우들랜드 트러스트 기금의 페디 크레그는 BBC 북아일랜드와의 인터뷰를 통해 너도밤나무의 수령으로 봤을 때 이제 이 숲은 “늘그막의 연금 생활자”가 됐다며 “보통 너도밤나무 수령은 250년 정도 되는데 이제 240년이 됐으니 삶의 종착역이 가까워졌다. 하나씩 하나씩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슬픈 일”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왕좌의 게임 시리즈가 종결되는 시즌 8은 오는 4월 시작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저울 하나로 지구 무게를 단 천재의 이야기

    [이광식의 천문학+] 저울 하나로 지구 무게를 단 천재의 이야기

    기괴한 성격의 천재 과학자 지구의 무게를 최초로 측정함으로써 과학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1731-1810)는 과학자로서는 아주 특이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우선 그는 역사상 어떤 과학자보다 부유했다. 데본셔 공작 가문 출신으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당시 영국 은행의 최대 예금주였다고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성격인데, 지독하게 수줍음을 타는 성격으로 상대와 눈을 맞추고 대화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모임에서도 늘 구석자리만 찾아다녔으며, 누가 질문이라도 하면 늘 허공을 본 채 몇 마디 중얼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수줍음은 특히 여성에 대해 더욱 심했다. 심지어 그는 집안의 하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가 테이블에 저녁식사 메뉴를 적은 쪽지를 올려놓으면 그것을 보고 저녁을 준비할 정도였으며, 특히 하녀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저택 내에 따로 전용 계단을 만들었을 정도다. 만약 하녀가 실수로 그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바로 해고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성격에 대한 현대의 설명은 자폐증의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을 의심하고 있다. 캐번디시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은 왕립학회 참여였는데, 여기서는 매주 모임 전에 회원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 캐번디시는 이 모임을 빠진 적이 거의 없으며, 동료 과학자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캐번디시는 비사교적인 성향으로 인해 종종 자신의 업적을 출판하는 것을 피했고,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동료 과학자들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았다. 많은 실험과 여러 논문을 남겼으나, 그 3/4은 미발표였다. 캐번디시의 선구적인 연구 업적은 약 1세기 후인 19세기 후반, 전자기파 이론을 확립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면서 밝혀졌다. 1785년에 발표된 쿨롱의 법칙을 1772∼1773년 사이에 발견했고, 옴이 1826년에 발견한 옴의 법칙을 옴보다 45년 먼저 앞선 1781년에 발견했다. 지구의 무게를 알아낸 캐번디시 실험 이 같은 선구적인 캐번디시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지구의 무게를 측정한 실험이다. 이미 2100년 전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크기를 알아냈지만, 그 질량은 근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캐번디시 실험으로 알려진 이 지구 밀도 측정 실험에서 캐번디시가 사용한 기구는 아주 단순한 장비로, 막대기 양쪽에 둥근 납공을 실로 매달아놓은 비틀림저울이었다. 이것은 저울은 영국 지질학자 존 미첼이 고안한 비틀림 저울을 약간 수정한 것이었다. 미첼 역시 이 저울로 지구 무게를 측정하려다가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 하는 바람에 저울은 캐번디시에게로 보내졌고, 캐번디시는 1797-1798년에 실험을 완료하고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실험에 사용된 장치는 막대의 양 끝에 매달린 2개의 큰 고정식 납공(159㎏)에 각각 2개의 작은 납공(0.7㎏)이 또 매달린 비틀림 저울이었다. 이 저울은 수평 방향으로만 회전한다. 막대의 관성 모멘트는 막대가 복원력에 의해 진동하는 주기를 측정하여 알아낼 수 있다. 막대의 한쪽 끝에 다른 공을 가까이 대면 중력에 의해 서로 끌어당기게 되고 막대가 미세하게 회전한 각도를 측정하여 이 힘을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을 이용해 중력상수를 구하려는 실험이었다. 질량을 갖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 뉴턴의 이론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크기는 물체의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중력이란 것이 큰 규모에서는 지구를 공전시키고 물체를 낙하시키는 강한 힘을 보이지만, 사실 자연계에 작용하는 힘 중에서도 가장 약한 것으로, 1m 떨어진 3톤짜리 두 트럭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모래알 하나를 움직일 정도라 한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은 두 물체의 질량의 곱을 그들 사이의 거리 제곱으로 나눈 값에 비례하며, 그 비례상수는 중력상수 G로 나타낸다. (만유)인력상수라고도 하며 단위거리만큼 떨어진 2개의 단위질량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값으로 만유인력법칙에서 비례상수 G를 말한다. 식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캐번디시는 작은 두 납공 사이의 중력적인 이끌림을 측정하려 했다. 그는 미첼의 장치가 온도차와 공기 흐름에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장치를 분리된 공간에 두고 시험시에는 외부 제어를 통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방식을 취했다. 캐번디시는 비틀림 저울의 진동주기에서 납공 사이의 인력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사용하여 지구 밀도를 계산했다. 그는 이 실험을 무려 29차례나 거듭하고 그 값들을 평균한 결과 지구의 평균 밀도는 물의 평균 밀도보다 5.48배 큰 것으로 나왔다. 캐번디시 실험의 특별한 점은 측정에 개입될 모든 오류 원인을 제거하고 납공 무게의 1 / 50,000,000에 불과한 놀랍도록 작은 인력을 측정해낸 정확성이다. 캐번디시가 구한 지구 밀도 값의 오류 범위는 현재 받아들여지는 수치의 1% 이내이다. 보다 정확한 중력상수 및 시간에 따른 중력상수의 변화를 측정하려는 실험이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캐번디시의 이 실험으로 인해 정확한 중력 상수(G)와 지구 질량이 결정되었다. 이 실험을 토대로 중력 상수 G는 6.754 × 10−11N-m2/kg2로 나타났고, 이는 실제 중력 상수 6.67428 × 10−11N-m2/kg2에 아주 근접한 값임이 밝혀졌다. 캐번디시가 자신의 저택 정원에 있는 별장에서 그 유명한 지구의 밀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이웃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그 건물을 가리켜 지구의 무게를 다는 곳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핵잼 사이언스] 10년 솔로 ‘로미오’ 개구리 공개구혼으로 줄리엣 찾다

    [핵잼 사이언스] 10년 솔로 ‘로미오’ 개구리 공개구혼으로 줄리엣 찾다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개구리´라는 별칭이 붙었던 개구리 한마리가 드디어 솔로 탈출의 기회를 잡았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 해외 언론은 볼리비아 코차밤바 자연사박물관에서 10년째 독수공방 중인 수컷 개구리의 짝이 야생에서 포획됐다고 보도했다. 11살로 추정되는 이 개구리의 이름은 로미오. 박물관 수족관에서 홀로 살고 있는 로미오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세후엔카스 물개구리´ 종(種)의 개구리다. 볼리비아 운무림의 고지대 개울가에서만 살고 있고 환경파괴로 멸종위기에 몰린 탓에 그간 전문가들은 야생에서 로미오의 동족을 찾지 못했다. 이에 볼리비아 생물학자들은 지난해 초 로미오의 짝을 찾기 위해 데이트사이트 ‘매치’와 제휴해 공개 구혼에 나서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걷힌 후원금을 바탕으로 현지 학자들은 본격적인 ‘줄리엣´ 찾기에 나서 이번에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탐사팀을 구성한 학자들은 지난 1년 동안 볼리비아 숲에서 세후엔카스 물개구리 가문에 속하는 총 3마리의 수컷과 2마리 암컷을 잡았다. 이 중 암컷 한마리를 줄리엣으로 낙점해 드디어 로미오의 짝을 찾아준 것. 볼리비아 코차밤바 자연사박물관 테레사 카마초 바다니 박사는 “로미오가 매우 조용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는 반면 줄리엣은 활달한 성격”이라면서 “향후 증식을 통해 개구리들을 원래 서식지에 보내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를 도운 ‘세계야생동물보호단체’(GWC) 소속 크리스 조던은 “환경오염, 서식지 감소, 기후변화 등으로 전 세계 양서류가 생태계의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면서 “로미오와 줄리엣뿐 아니라 멸종위기에 처한 비슷한 생물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조선의 화가로소이다 - 진도 운림산방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나는 조선의 화가로소이다 - 진도 운림산방

    “鳴一世(명일세) : 세상을 진동시키다” 낯설 수도 있다. 유럽의 중세 문화를 대표하던 회화처럼 조선 후기에도 그림이 한 세상을 흔든 시기가 '잠시'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원 장승업(1843-1897)이었다. 그는 1800년대 말 조선의 운명을 마름질하던 청나라 사신들의 조선인 역관들의 후원을 받아 조선 후기 사대부 문화에 장식용 그림을 본격적으로 집어넣은 인물이다. 오죽하였으면 고종의 어명(御命)을 받아 그림을 그리다가 도망을 쳐도 무사할 정도로 오원은 대접을 받았다. 이러한 장승업과 아울러 조선 회화의 맥을 굳건히 지켜 나갔던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9-1892)이 만든 화실인 진도의 운림산방으로 가 보자.조선 후기에 가장 유명하였다는 장승업 그림에도 근저에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화풍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바로 사대부들 회화 문화에 있어 남종화는 고매한 인격을 드러내는 수단이자 장식용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남종화풍의 회화 양식을 벗어나는 그림은 더이상 그림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사대부들이 즐겼던 회화 전통은 곧 남종화의 역사였다.여기서 남종화란 인격이 드높은 사대부(士大夫)가 수묵 담채로 담백하게 그린 맑은 정신세계의 연장선이며 눈앞의 사물을 뛰어넘는 유교의 정신 문화였다. 대표적인 조선 남종화 대가가 단지 서예가로만 우리에게 알려진 추사 김정희(1786-1856)였으며 그의 작품인 '세한도'는 조선 후기 남종화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서예성을 강조하고 주변의 군더더기들은 과감하게 지워버린 세한도는 조선 후기 사대부 회화의 최고봉으로 여전히 손 꼽힌다.바로 이런 남종화의 대가였던 추사 김정희의 제자가 허련이었다. 그는 더 이상 중국의 산수화 화풍을 답습하지 않고, 조선 회화만의 특성을 잘 살린 화가였다. 허련의 화풍은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이 독특하였는데 붓을 다루는 솜씨가 강직하였고, 구도 및 수묵의 농암 표현이 자유분방하였다. 따라서 허련 이후부터 조선 남종화가 중국 남종화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 남종화만의 특성를 지닌 스스로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이런 허련의 특성은 그의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내려왔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1908~1987)이다. 허건은 고답적인 조선의 회화 양식에서 벗어나 특유의 ‘신남화’(新南畵)라는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 내었다. 허건은 신남화에서 할아버지 허련의 ‘갈필법’(渴筆法)‘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고 발전시키는데. 갈필법이란 물기가 거의 말라버린 붓으로 먹을 조금만 묻혀 마른 붓질을 하는 양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이 갈필법으로 농촌의 풍경, 산과 들, 바닷가 등의 향통적 풍경을 그려 제23회 조선전람회(1944)에 출품한 ‘목포의 일우’로 최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허씨 가문이 이룩한 조선 수묵화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진도의 운림산방은 진도 첨찰산을 배경으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ㄷ’자 모양으로 만든 기와집인 운림산방은 초가로 된 살림채, 전시관, 연못과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인공 섬에는 배롱나무가 있다. 특히 기념관에는 남도 회화의 맥을 이어온 허씨 가문 출신 화가들의 수준높은 작품도 관람이 가능해서 서양 회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눈에 색다른 관람 기회를 주기도 한다. <진도 운림산방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진도에 들러 시간이 남는다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넓은 화실이다. 2. 누구와 함께? - 가족들. 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3. 가는 방법은? -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 군내 버스 이용(운림산방 앞) 4. 감탄하는 점은? - 잘 가꾸어진 정원. 조선 후기 남종화의 세밀하면서 웅장한 스케일.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늘상 조용한 편이다. 관람객이 많지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기념관 내의 작품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쌈밥정식 ‘가족회관’, 성게비빔밥 ‘신호등회관’, 한우 생고기 ‘묵은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jindo.go.kr/tour/sub.cs?m=10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신비의 바닷길, 진도타워, 진돗개 테마파크, 이충무공 전첩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조용한 곳이다. 진도에 들러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편안히 가 볼만한 곳. 특히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가 있는 장소.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안녕? 자연] ‘세계서 가장 외로운 개구리’ 로미오, 줄리엣 찾았다

    [안녕? 자연] ‘세계서 가장 외로운 개구리’ 로미오, 줄리엣 찾았다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개구리'라는 별칭이 붙었던 개구리 한 마리가 드디어 솔로 탈출의 기회를 잡았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영국 BBC 등 해외언론은 볼리비아 코차밤바 자연사박물관에서 지내고 있는 세후엔카스 물개구리(Sehuencas water frog)의 동족이 생물학자들에 의해 야생에서 포획됐다고 보도했다. 11살로 추정되는 이 개구리의 이름은 수컷인 로미오. 박물관 수족관에서 살고있는 로미오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세후엔카스 물개구리 가문의 개구리다. 그간 전문가들은 야생에서 로미오의 동족을 찾아왔으나 멸종위기에 몰린 탓에 발견하지 못해 수컷인 로미오의 솔로생활은 무려 10년이나 계속됐다. 이에 볼리비아 생물학자들은 로미오의 짝을 찾을 기회를 잡기 위해 지난해 초 데이트사이트 ‘매치’(Match)와 제휴해 공개구혼에 나서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서 걷어진 후원금을 바탕으로 현지 학자들은 본격적인 '줄리엣' 찾기에 나서 이번에 그 결실을 보게된 것이다.보도에 따르면 탐사팀을 구성한 학자들은 지난 1년 동안 볼리비아 숲에서 세후엔카스 물개구리를 찾아다니면서 총 3마리의 수컷과 2마리의 암컷을 잡았다. 이중 암컷 한마리를 줄리엣으로 낙점해 드디어 로미오의 짝을 찾아준 것. 볼리비아 코차밤바 자연사박물관 테레사 카마초 바다니 박사는 "로미오가 매우 조용하고 움직임이 거의 없는 반면 줄리엣은 매우 활달한 성격"이라면서 "로미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가 양서류 보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얻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를 도운 ‘세계 야생동물 보호단체’(GWC) 소속 크리스 조단은 "환경오염, 서식지 감소, 기후 변화 등으로 전세계 양서류가 생태의 심각한 위협을 받고있다"면서 "로미오와 줄리엣 뿐 아니라 멸종위기에 처한 비슷한 생물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이 영화 실화였어? 게다가 작품성까지 갖췄잖아!

    이 영화 실화였어? 게다가 작품성까지 갖췄잖아!

    새해 극장가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대거 포진해 눈길을 끈다. 실화를 소재로 했지만,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0일 개봉한 ‘리지’는 1892년 미국 매사추세츠 폴 리버에서 일어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이 소재다. 대부호 보든가의 둘째 딸 리지(클로에 세비니 분)가 도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으로, 당시 미국을 발칵 뒤집었다. ‘리지’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리지 보든과 보든 가문의 하녀인 브리지트 설리번(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과의 관계에 집중했다.‘말모이’는 주시경이 1911년부터 제작에 나섰으나 미완성으로 남은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가 소재다. 1945년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한 2만 6500여쪽의 국어사전 원고를 모티브로, 13년 동안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벌인 여러 노력들을 재구성했다. ‘택시운전사’ 각본을 쓴 엄유나 감독의 첫 영화로, 9일 개봉 이후 5일 만에 100만을 넘어서며 순항 중이다.9일 개봉한 ‘그린북’은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와 운전사이자 매니저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가 1962년 미국 남부로 콘서트 투어를 다니며 겪은 이야기가 바탕이다. 아프리카계 집배원인 빅터 휴고 그린이 펴낸 흑인 전용 여행 가이드북 ‘그린북’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흑인 여행객들만 이용 가능한 숙박시설, 레스토랑, 주유소 등 정보가 적힌 책이 있었을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할 때였다. 두 배우가 당시의 상황 속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우정을 키우는 이야기다. 최근 골든글로브 뮤지컬 코미디 부문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조연상, 각본상 3관왕을 받았다.다음달 14일 개봉하는 ‘그때 그들’은 섹스, 마약, 부패 스캔들에 연루된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이야기를 다룬 블랙 코미디다.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와의 결탁, 뇌물, 탈세, 여성편력, 망언 등 부정부패의 아이콘이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선 총리를 지냈다.16일 개봉하는 ‘쿠르스크’는 2000년 바렌츠 해에서 침몰한 쿠르스크함 사건을 영화화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국제사회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한 채 늦장 대응해 ‘생존자 0명’의 대참사를 빚었다. ‘더 헌트’로 칸 국제영화제 에큐메니컬 심사위원상을 받은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역사상 최악의 인재’를 그려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족보도서관 설립, 시장 바뀔 때마다 달라집니다…우리 핏줄의 역사 문제 아닙니까”

    65년 족보 인쇄 외길 회상사 박병호 대표가 말하는 ‘족보’“6층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 책이 한 3만~4만 권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필름으로도 그만큼 보관하고 있습니다. 웬만한 문중의 족보는 여기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족보 인쇄가 사양길에 접어들다 보니 이걸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관하는 족보는 개인 재산 차원을 넘어 한국인의 핏줄 역사가 담긴 문화재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 만들어 영구보관한다고 이야기 나온 게 십수년이 됐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입니다.” 6층 회상문보원 서가엔 900여가문 족보 빼곡히 꽂혀 65년째 족보 인쇄의 외길을 걷는 대전시 동구 중동 회상사(回想社)가 족보 보관에 애로를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 11일 박병호(73) 대표를 찾았다. 회상사 겉모습은 출판사라기보다는 창고와 같아 보였다. 건물 1층 사무실에 석유난로를 켜고 직원 몇 사람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기에 ‘박병호 대표를 만나러 왔다.’라고 했더니 한쪽 책상에 앉아있던 ‘내가 박병호입니다.’라며 일어나 기자를 맞았다. 1층 사무실을 둘러보니 벽에는 철제 캐비닛이 몇 개 서 있고, 책상만 몇 개 놓여 있었다. 박 대표는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석유난로를 옮겨왔다. 족보 책은 보이지 않았다. 족보 전문 출판사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족보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는 대답 대신 나가자고 했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갔다.6층엔 회상문보원(回想文譜院)이란 간판 아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서화 냄새가 어우러진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다. 그 안에는 금천 강씨(衿川 姜氏)부터 900여 가문의 족보가 가나다순으로 서가에 꽂혀 있었다. 한쪽 벽면엔 각종 문집과 향교지 등도 보관하고 있었다. “1991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족보도서관인 여기에 보관된 족보가 한 3만~4만 권쯤 될 겁니다. 2007년 제가 취임한 후로 대동보(大同譜) 500여종, 세보(世譜·일명 파보) 1500여종, 가승보(家乘譜) 900여종 등 모두 600만 부 이상 발간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휘호도…윤보선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납 활자본도 고스란히…희귀 벽자 700여개도 보관“하루 족보 35쪽 입력…족보 한권은 통상 800쪽”5층엔 선친 박홍구의 아호를 딴 춘전(春田)기념관이 있다. 여기에는 족보를 받은 문중에서 기념으로 선물한 고서화, 병풍 등이 가득했다. 197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 ‘화친(和親)’도 보였다. 1983년 윤보선 전 대통령의 해평윤씨 대동보 발간 기념 친필 휘호,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 백자 도자기, 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회상사 방문 및 친필 실사구시(實事求是) 휘호도 받아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들은 따로 연락이 없었다고 말한다. 4층엔 납으로 인쇄하던 시절의 활자본이 보관돼 있었다. “중국에서 넘어온 사람은 옥편에도 안 나오는 한자를 이름으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읽는 법은 당사자에게 물어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한자로 짜잡기해서 글자를 만든 벽자(僻字)도 700개 남짓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선 족보를 만들기 위한 인쇄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여성직원이 기존의 족보 책을 뜯어내 하나하나 컴퓨터로 입력하고 있었다. “몇십 년 전에 납 활자로 인쇄한 족보는 컴퓨터 데이터가 없어 이렇게 일일이 손으로 입력합니다. 하루 8시간 작업하면 35~40페이지 정도 입력합니다. 족보 만들 때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보통 족보 한 권이 800페이지 전후이니 수작업의 번거로움이 짐작된다. 창문 너머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곳엔 족보 필름이 책으로 환산하면 3만~4만 권이 보관돼 있지요.”그가 5층과 6층의 족보도서관과 기념관을 보여주고 나서 문을 자물쇠로 굳게 잠그고 나서 다시 확인했다. “도서관이라면서 왜 이렇게 잠그느냐”라고 물었다. “도둑이 들어서…. 과거엔 사람들이 와서 열람도 하고 했는데 이젠 인력이 부족해 관리가 소홀하니 족보도 훔쳐가고 고서화도 훔쳐가고 해서…. 도난당한 족보만 해도 수천 권에 이를 갑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아까 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도 도둑맞은 겁니다. 모사품을 새로 걸어둔 것이지요.” 그리고 보니 박 전 대통령의 휘호가 아무렇게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낙관도 어쩐지 흑백이더라. 체계적 보관과 관리가 시급해 보였다. “도난당한 족보 수천권…박정희 대통령 휘호도 도난당해체계적 관리, 영구보존 대책 시급…시장 박뀌면 백지화”“이렇게 관리상에 어려움이 많아도 이 자료들이 나름대로 귀중한 문화재 아닙니까. 소멸하면 혈족에 관한 국가적 문화재가 사라지는 것이니 출판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료를 빼고 모든 자료를 대전시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영구보존하려는 것이죠. 회상사가 설립된 1954년부터 출판한 450문중의 대동보와 14문중의 인터넷 족보, 600문중의 전자족보, 800여 권의 한문 서적 등을 기증하기로 한 것입니다.” 대전시가 족보도서관을 만든다고 이야기가 나온 지 십수년이 됐습니다만 확약서를 쓰지 않은 탓인지 여태까지 잘 안 되고 있단다. “우리 회상사가 대전시에 기증할 족보와 고서화 등의 자료를 보관할 장소가 500~600평 정도 필요하지만 대전시문화원이 제공하려는 공간은 260평 정도로 협소하고, 관리·보존이나 재원 마련 계획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장이 바뀌면 이런 계획마저도 백지화됩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요즘 일거리가 많은지 물었다. “1970~80년대 족보 만들기가 붐이었지요. 전쟁통에 불타거나 잃어버린 집안이 많아서…. 그때는 집성촌을 찾아가 남아있는 족보를 모아서 복원하곤 했지요. 족보 인쇄를 시작하면 문중에서 개판식(開版式)을 성대히 치렀습니다.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지요. 그런데 요즘엔 누가 족보 만들려고 하나요. 그래도 제대로 족보 만드는 기업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텐데….” 최근에 한글을 병기한 족보에 조상의 사진도 넣는다고 한다. 일부 문중은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를 운영한다고 귀띔했다. “한때는 디스크나 CD롬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요즘 컴퓨터엔 CD플레이어가 부착돼 있지 않으니 보려면 불편합니다. 첨단기술이라는 게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종이 족보는 보관만 잘하면 수백 년 흘러도 볼 수 있고 편리합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납 활자로 족보를 만드는 기업, 200년 역사의 회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부 문중 전자족보, 인터넷 족보 운영종이 족보 보관 잘하면 수백년 문제 없어”요즘 또 다른 고민은 가업인 족보 인쇄를 맡아갈 아들을 찾는 것이다. “사양 산업으로 돈벌이가 잘되지도 않으니, 아들들이 서로 맡지 않으려 합니다. 아들이 넷이 있는데 서로 상의하고 있겠지요.” 그도 1954년 설립된 회상사를 2007년에서야 맡았다. “선친이 장남인 제게 이 일을 물려줄 생각에 공고에 가라고 해서 대전공고에 들어갔죠. 그때만 해도 족보 만드는 일을 계승할까 했는데, 어느 날 경쟁업체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쳐들어와서 큰 싸움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걸 보고 오만 정이 다 떨어져, 선친의 뜻을 어기고 약대로 진학했습니다. 도립 충남홍성병원에서 약제과장을 지내다 약국 개업도 했지요. 그때도 선친이 회사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저는 뿌리치고 시의원과 초대 및 3대 대전 동구청장을 지내며 제 길을 갔습니다.” “구청장 임기 끝나고부터 회상사 일을 맡았습니다. 선친이 많이 편찮으셨거든요. 그때가 2007년 1월이었습니다. 직원들 퇴직금도 밀린 상태였죠.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창 때는 직원이 150명도 넘었는데 …. 이 일대가 한창때 우리가 일거리를 주면서 생겨난 업소들 거리였습니다. 이젠 어엿한 ‘인쇄 골목’이 됐지만.” 족보를 만들면서 봤거나 겪었던 특이하거나 재미난 성씨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박 대표는 “그 문중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며 한사코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어떤 문중에서는 족보가 발간되자마자 이를 받아들고 회상사 건물 앞 계단에서 조상님들께 고하는 고유제를 지냈습니다. 또 직원들 한명 한명 붙잡고 감사하다고도 인사했지요.” “한창 시절, 경쟁업체가 도끼 들고 쳐들어와만정 떨어져, 가업 계승 대신 구청장 길 걸어발간된 족보 들고 제사 지내는 문중도 있어”회상사엔 세가지 불문율이 있다. 먼저 족보 내용이 인쇄된 파지는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또 인쇄된 용지는 밟고 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족보는 ‘모신다.’라는 말을 쓴다는 것이다. 족보 유래는 중국 한나라 시대의 왕실의 제왕년표(帝王年表)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 의종 때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 시초다. 민간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나온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인데 기록만 전한다. “회상사에는 선친의 피눈물이 들어있습니다. 이를 가업으로 잘 넘겨주는 것이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선친은 충북 제천에서 ‘권학사’라는 서점을 운영하며 돈을 좀 만졌습니다. 6·25때 총부리를 겨누고 협박하는 인민군에게 돈을 빼앗겼고, 다시 방첩대는 인민군에게 돈 줬다고 선친을 불러다 엄청나게 때리고 재산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전쟁 이후 권력 기관에 의해 괴롭힘을 무척 많이 당했습니다. 선친이 한번은 어린 저를 붙잡고 치욕적이라며 부들부들 떨며 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곤 맨손으로 아무도 모르는 대전으로 나왔던 거죠. 인쇄소에 1년 남짓 다니시다가 족보를 인쇄할 생각을 하셨던 거죠. 그리곤 전국 최대의 족보 인쇄 회사를 일구셨습니다.” 가짜 족보 문제도 많다고 얘기를 꺼냈다. “우리는 족보를 출판하는 인쇄업자입니다. 족보 내용은 문중의 종친회장인 발행인의 승낙 없이는 손대지 못합니다. 문중의 어르신들이 와서 돋보기를 들고 하나하나 다 교정을 봅니다. 족보는 정확성입니다. 그것이 신뢰이고, 우리의 철칙입니다. 요즘 가짜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즉 조상 땅 싸움 때문에 발생합니다. 문중에서 법정 소송이 벌어지면 족보가 증거로 채택됩니다. 검찰에서 우리가 보관한 족보를 복사해 간 적이 몇번 있습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족보에 끼워달라는 부탁을 몇 차례나 받았습니다만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최근 가짜 족보 문제는 문중 재산 싸움 탓우린 출판업자, 발행인 승낙 없이 수정 못해족보는 과거 아닌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그에겐 족보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가업을 승계하는 차원을 넘었다. “고리타분한 핏줄, 즉 혈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족보는 그런 면에서 현재의 나와 조상을 이어주는 네트워크인 셈입니다.” 한편, 2015년 통계청 조사결과 한국인의 성씨는 모두 5582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5인 이상인 성씨는 530여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00년대의 270여개 성씨와 비교하면 급증한 것이다. 다문화의 영향으로 외래 성씨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삼국시대부터 일부 계층이 성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 모두 성을 갖게 된 것은 110년 전인 1909년 민적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대전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내일 새벽 토트넘-맨유 웸블리에서, 그런데 왜 노섬벌랜드란 이름이

    내일 새벽 토트넘-맨유 웸블리에서, 그런데 왜 노섬벌랜드란 이름이

    손흥민(토트넘)이 대표팀 합류 전 마지막 경기에서 시즌 13호 골맛을 볼까? 최근 일곱 경기에서 7골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잉글랜드 데뷔 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손흥민은 14일 새벽 1시 30분(이하 한국시간) 웸블리 스타디움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불러들여 치르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2라운드 출격을 준비한다. 토트넘은 손흥민의 활약을 앞세워 최근 10경기를 치르며 8승1무1패의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고 맨유 역시 올레 군나르 솔샤르 감독 부임 후 5연승을 달리며 기세가 좋다. 그런데 국내 포털 사이트 두 곳 모두 EPL 경기 일정 안내에 노섬벌랜드 디벨롭먼트 프로젝트란 곳에서 이 경기가 열린다고 소개돼 있다. 토트넘이 새로 짓고 있는 홈 구장 명칭인데 완공되면 ‘토트넘 홋스퍼(Hotspur) 스타디움’으로 불리게 된다. 공사가 지연돼 다음달까지 토트넘은 계속 웸블리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쓰게 된다. 일단 EPL 홈페이지에는 그렇게 소개돼 있다.그런데 왜 건축 중인 구장 이름에 노섬벌랜드란 낯선 이름을 노출시킨 것일까? EPL 구단으로는 유일하게 팀의 별칭으로 쓰는 훗스퍼에 힌트가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 가운데 용감무쌍한 기사로 등장하는 헨리 퍼시 경의 별명에서 따왔다. 훗날 헨리 5세가 되는 핼 왕자를 참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악역으로 쓰이는 인물이 헨리 퍼시였다. 나이도 같고 헨리란 이름을 쓰는 것도 같은 것으로 그려졌다. 홋스퍼는 최고의 기사로 국민의 흠모를 한몸에 받는 반면, 핼 왕자는 폴스타프 같은 파락호와 어울려 주색잡기에 빠져 지내 헨리 4세는 왕자를 꾸짖으며 ‘엄친아’로서 홋스퍼와 계속 비교됐다. 그런 헨리 퍼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와의 접경 지역 영주인 노섬벌랜드 백작이었는데 부자가 손잡고서였다. 당황한 부왕이 겁에 질려 있을 때 핼 왕자가 전면에 나서 반란을 진압했다. 홋스퍼와 일대일 격투 끝에 그의 목숨을 빼앗는 무공까지 과시했다. 헨리 퍼시는 1364~1403년에 실존한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켜 죽은 것도 맞다. 하지만 헨리 5세보다 스물셋 연상이었다. 헨리 5세와 맞대결을 하지도 않았고 투구를 잠시 벗었다 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즉사했다. 하지만 헨리 4세를 국왕으로 옹립하는 반란의 선봉장을 맡은 뒤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의 용맹함을 적인 스코틀랜드인들이 먼저 알아봤다.런던 북부 토트넘에 노섬벌랜드 가문의 영지가 있었기에 빠르고 용감무쌍하던 홋스퍼를 기려 팀 이름으로 삼았다. 클럽 모토인 라틴어 경구 ‘Audere est Facere(용감하다면 행동으로 증명하라)’는 셰익스피어가 희곡에서 홋스퍼에게 붙여준 것이다. 또 팀 문장을 옛날 축구공 위에 올라선, 박차가 달린 수평아리(cockerel)로 삼은 것도 홋스퍼가 싸움닭을 좋아했는데 자기 소유의 싸움닭 발목에는 특별히 박차(spur)를 채웠다는 설화를 토대로 했다. 한편 손흥민이 이날 시즌 13호 골을 터뜨리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C조 중국과의 3차전이 기다리는 아랍에미리트(UAE) 행 여객기에 몸을 실을지 주목된다. 중국과의 경기는 17일 밤 10시 30분 킥오프해 충분히 뛸 수 있지만 맨유전에서 얼마나 체력을 소진하느냐, 파울루 벤투 대표팀 감독이 중국과의 결전은 물론 16강 토너먼트 이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여기는 남미]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 손자 ‘호화판 세계여행’ 논란

    [여기는 남미] 쿠바 독재자 카스트로 손자 ‘호화판 세계여행’ 논란

    국가는 가난하지만 독재자 가문의 금고엔 현찰이 넘치는 모양이다. 토니 카스트로(20)가 호화스러운 여행을 즐기는 사진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다수 올렸다가 인터넷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토니 카스트로는 2016년 사망한 전 쿠바 평의회의장 피델 카스트로의 손자다. 따가운 시선이 집중되자 토니 카스트로는 사진들을 일부 삭제했지만 여전히 비판 여론은 들끓고 있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토니 카스트로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호화로운 여행을 즐기고 있다. 멕시코, 스페인, 파나마 등지의 주요 관광지와 유적에서 찍은 사진이 그의 인스타그램엔 다수 올랐다. 토니 카스트로는 방문한 곳에선 꼭 기념사진을 남긴다고 한다. 가장 최근에 올린 사진은 요트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진이다. 토니 카스트로는 한눈에 봐도 호화로운 요트에 앉아 수평선을 감상하고 있다. BMW에 올라 찍은 사진도 있다. 1950~60년대 차량이 아직 굴러다니는 쿠바에선 꿈꾸기 힘든 일이다. 중남미 언론은 "절대 독재자의 일가가 아니라면 쿠바에선 그 누구도 꿈꾸기 힘든 호화판 생활이자 여행"이라고 보도했다. 미국 등 해외에 거주하는 쿠바인들은 사진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한 여성은 "쿠바 국민은 지독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데 독재자의 손자는 백만장자처럼 세계를 누빈다"며 "누가 20살 청년의 호화판 여행 경비를 대주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또 다른 여성은 "토니 카스트로의 사진은 하나같이 호화롭다"며 "배고픈 노예처럼 살아가는 쿠바 국민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라고 꼬집었다. 쿠바 출신의 활동가 호세 라몬 폴로는 "카스트로 일가는 항상 이런 호화로운 생활을 해왔다"며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젠 뻔뻔하게도 호화생활을 공개하고 있다는 점뿐"이라고 말했다. 쿠바는 지난 2일로 혁명 6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혁명 이후 쿠바는 세계적인 빈국으로 전락했다. 쿠바 노동자의 평균 급여는 20달러, 우리돈 2만2400원 정도다. 식료품이 절대 부족하고 볼펜, 치약 등 생필품도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쿠바 출신의 한 청년 활동가는 "사회주의라는 건 한마디로 가난을 나눠주는 체제"라며 "카스트로 일가만 예외일 뿐 사회주의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가난하다"고 허탈하게 말했다. 사진=푸투로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뉴스 전에 책이 있었다] ‘귀족 대구’ 때문에 미국 독립혁명이 시작됐다고?

    지난해 말 강원 고성군 죽왕면 공현진 앞바다에 명태가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표본을 추출해 유전자 분석을 해 보니 모두 자연산이었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동해에서 명태가 사라졌고, 이를 되살리기 위해 2014년부터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어민들과 수산 전문가들은 그 계획의 성공을 예측했지만, 놀랍게도 2만 1000여 마리의 명태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40여 마리가 더 잡히고 다시 사라진 명태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간 것일까. 수산 전문가들은 명태의 회유 경로와 습성 등을 더 세밀하게 연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기후변화와 남획으로 사라진 명태의 속성을 좀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있다. 명태와 사촌쯤 되는 대구에 얽힌 역사와 조리 방법까지 서술한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가 그것이다. 일단 책에서 말하는 대구는 ‘대서양대구’로 몸집이 크고 개체수가 많으며 맛이 담백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종이었다. 얕은 물을 좋아해서 잡기 쉬웠다. 전 세계에서 상업적인 생선이 된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대구는 역사상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었다. 8세기에 바이킹은 말린 대구, 우리로 치면 북어를 주식으로 삼아 유럽을 주름잡았다. 17세기 초 종교 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순례자들은 종교도 종교지만,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 앞바다에는 그만큼 대구가 풍부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어민들 중에 명태 잡아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대구를 잡아 큰돈을 번 유럽인들은 제법 많다. 18세기 초 뉴잉글랜드는 대구 무역의 중심지였는데, 대구 어업으로 가문의 부를 쌓은 사람들을 일러 ‘대구 귀족’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국제적인 상업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소금에 절인 대구를 지중해 시장에 판매해 큰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 질이 떨어지는 대구는 서인도제도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팔았다. 설탕 플랜테이션 노예들은 이 물고기를 주식 삼아 하루 16시간의 중노동을 버텨야만 했다. 저자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소금에 절인 대구는 카리브해의 노예들을 먹여 살려 노예무역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저자는 대구 때문에 미국이 독립했다는, 듣기에 따라 황당한 주장도 펼친다. 역시 18세기 들어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대구를 잡아 부자가 될 꿈에 부푼 사람들이 이 조치에 반발해 미국 독립혁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782년 영국과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가장 큰 난제는 미국의 대구 잡이 권리에 대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예나 지금이나 남획이 문제다. 더 많은 대구를 잡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는데, 19세기 들어 어업 현대화가 이뤄지면서 대구 개체수는 급감했다. 어업의 현대화를 이룬 수단은 주낙이었다. 프랑스는 국가적으로 선단에 주낙을 설치하기도 했다. 낚싯줄에 낚싯바늘이 여러 개 달린 이 장비에 얼마나 많은 대구가 잡혔을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대구의 남획을 걱정하면서도 저자는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한 요리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대구 요리를 소개한다. 흥미롭지만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구’를 읽으며 자연산 명태도 돌아오고, 명태 살리기 프로젝트로 바다에 나간 치어들도 성장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식탁이 더 풍성해질 테니 말이다. 이 기대도 다소 생뚱맞은 것 아닌가 저어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아무도 모른다, 이 수수한 평화의 땅…나만 알고 싶은 풍경 한 점 와인 한 잔

    슬로베니아. 조금 낯선 나라다. 유럽 동남부에 자리한 나라인데 옛날에는 유고 연방에 속했다.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슬라브족들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슬로베니아에 관한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면 김이듬 시인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고 쓴 여행기 ‘디어 슬로베니아’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에 교환 교수로 머물며 틈틈이 여행한 슬로베니아를 시인 특유의 감수성 어린 문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슬로베니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힐링’ 혹은 ‘위로’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 그것이 지닌 가식적인 느낌을 싫어하는 다소 까칠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후로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치유받았다. 바쁘게 뛰어다니며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족과 평화를 길어 올렸다. 태생적 방랑자인 양 수없이 여행을 다니며 노마드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는 내가, 슬로베니아에서 고향에서조차 느낄 수 없었던 수수하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다.” 김이듬 시인의 이 감상이 가장 정확한 것임을 슬로베니아에 가보면 알게 되시리라.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나라. 뉴스를 따라가기조차 버거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느린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가 바로 슬로베니아다.슬로베니아는 발칸반도에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면적은 전라도와 비슷하다. 인구는 2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라가 워낙 작다 보니 동서를 횡단해 봐야 고작 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맨날 국경지대만 다니게 된다. 여기는 헝가리, 저기는 독일, 저기는 크로아티아와 국경이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독립했는데 이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더 많다. 파울루 코엘류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조국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쓴 기자에게 슬로베니아를 설명하는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탄식한다. “슬로베니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다”라는 황당한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슬로베니아를 찾는 여행자들은 수도 류블랴나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발음하기가 약간 까다로운 이 도시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하지만, 인구라고 해봐야 28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날 가이드와 함께 류블랴나 거리를 걷는데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오늘 따라 왜 이렇게 못 보던 사람들이 많지?”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 오늘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구나.” 그렇다. 류블랴나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인근 도시와 국가에서 많은 사람들이 류블랴나로 온 것이다. 그러니까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30년째 살고 있는 그녀는 류블랴나 사람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류블랴나는 그만큼 작다.류블랴나 가운데 자리한 프레셰렌 광장은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오는 기차들이 정차하는 중앙역과 가깝다. 그래서인지 언제나 여행자들과 현지인들로 붐빈다. 프레셰렌이라는 이름은 슬로베니아의 국민 시인인 프레셰렌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으며, 강렬한 문장으로 유명했던 시인이다. 그가 죽은 날인 2월 8일을 국경일로 정하고, 이날 전국적으로 그의 시를 읽는 낭송회와 콘서트, 연극 공연 등이 열린다고 하니 그에 대한 슬로베니아 국민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동상은 아득한 시선으로 어느 지점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닿는 지점에는 그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율리아 프리미츠의 집이 있다. 평생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함께할 수 없었던 그들을 위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이루라는 의미로 이렇게 동상을 배치했다고 한다.광장 옆으로는 류블랴니차강이 흐른다. 강 양옆으로는 바로크 양식과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대부분 레스토랑과 카페, 서점 등이다. 소란스럽지 않아 산책을 하듯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기 좋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트리플교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의 대표적인 건축가 요제 플레치니크가 설계한 것으로 류블랴나 엽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류블랴나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소는 류블랴나 성이다. 9세기에 처음 세워졌다가 1511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성에 오르면 장난감 도시 같은 류블랴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슬로베니아를 일컫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유럽의 미니어처’다. 이 작은 나라 안에 유럽의 모든 것이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블레드 호수에서 2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피란 지역. 또 다른 풍경을 보여 준다. 이탈리아와 면한 휴양도시인데 슬로베니아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가이드는 피란이 너무 좋다고 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을 꼽으라면 이곳일 거야.”●물 좋고 산 좋은 ‘유럽의 미니어처’ 유럽에서 유명한 온천지대 중 손꼽히는 곳이 슬로베니아다. 물이 좋기로 유명한 이 나라는 수로의 길이가 3만㎞에 달하고 수돗물은 그냥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하다. 또한 나라 곳곳에 흩어진 87곳의 샘에서 온천수와 광천수가 솟아난다. 마그네슘과 칼슘이 풍부한 온천 지대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다양한 질병에 효능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크로아티아, 독일, 이탈리아 등 주변국부터 멀리 대만에서까지 치유 목적으로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라스코 온천 마을은 EDEN(European Destination of ExcelleNce)이 뽑은 ‘2013 유럽 최고의 여행지’로 뽑히기도 했다. 라스코 지역은 중세 시대 로마인들에게 발견된 이래 선교사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곳으로 1854년 합스부르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공식적으로 온천 지역으로 명명했다. 알프스 풍경도 만날 수 있다. 알프스 하면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슬로베니아도 발을 걸치고 있다. 줄리안 알프스라고 부르는,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댄 북서부 산악지대다. 트리글라브 등 2000m 이상 고봉이 줄줄이 이어진다. 6월까지도 잔설이 남아 있을 정도다. 블레드 호수는 ‘줄리안 알프스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다. 둘레 6㎞의 작은 호수이지만 전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알프스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졌다. 호수가 보여 주는 풍경은 정말이지 그림 같다. 푸른 물비늘을 일으키며 햇살을 반사하는 호수와 그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 그리고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알프스 산맥은 방금 달력에서 오려낸 듯한 풍경을 보여 준다. 블레드 호수가 유명한 건 블레드 호수에 떠 있는 블레드섬 때문이다. 이 자그마한 섬은 슬로베니아에서 유일한 섬으로 전통 나룻배 ‘플레타나’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블레드 호수엔 플레타나가 23척뿐이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 때부터 그랬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블레드 호수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았고 딱 23척의 배만 노를 저을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숫자가 200년 넘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뱃사공 일은 가업으로만 전해지고 남자만 할 수 있다고 한다.●첫맛은 화이트·끝맛은 레드 ‘오렌지 와인 ’ 슬로베니아 와인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등 유럽 국가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 와인에 대한 찬란한 수식어를 붙이는데 슬로베니아 와인도 이 리스트에 한자리를 차지한다. 오렌지 와인이다. 많은 이들이 오렌지로 만든 와인이라고 오해하지만 당연히 포도로 만들었다. ‘제4의 와인’으로도 불린다. 몇 년 전 영국 와인저널 ‘디켄터’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머서가 자신의 칼럼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은 오렌지 와인일 것”이란 추측을 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화이트 와인 품종으로 레드 와인 양조 방식을 접목해 만들기 때문에 레드 와인의 풍부함과 화이트 와인의 상쾌함을 모두 갖고 있는 게 특징이다. 첫맛은 화이트, 끝맛은 레드다. ●400세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 기네스북 올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도 슬로베니아에 있다. 드라바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제2의 도시로, 생산되는 와인 중 90% 정도가 화이트 와인인, 그야말로 화이트 와인의 천국이다. 마리보르 사람들의 와인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한데, 그 자부심의 한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가 있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라 온 이 포도나무는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16세기에 지어진 올드 바인 하우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화내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가이드가 내게 슬로베니아식 치킨을 맛보여 주기 위해 웨이터에게 10분 동안 치킨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그는 시종일관 웃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메뉴판을 던져 놓고 나갔을 텐데 말이다. 김이듬 시인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최대한 자유롭고 게으르게,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삶이라는 여행을 누려 가야겠다.” 슬로베니아를 여행하다 보면 알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에 낙관과 사랑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열렬함과 치열함이 아니라, 한낮의 따스한 햇볕과 한 줌의 시원한 바람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아닐까 하는 사실을 말이다. 글 사진 최갑수(여행작가) ■여행수첩 슬로베니아로 가는 직항은 없다. 뮌헨, 터키 등을 거쳐 가야 한다. 블레드는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 등 인근 국가에서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제선 전용 기차역이 따로 있다. 자세한 정보는 유레일 홈페이지(www.eurail.com/kr)를 참조하면 된다.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를 잇는 주요 열차편도 류블랴나를 거쳐 간다. 시차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비자는 필요 없다. 통용되는 화폐는 유로화.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 슬로베니아 소시지로 크라니스카 크로바사가 있다. 다진 돼지고기에 마늘과 소금, 후추 등을 넣어 양념한다. 식감이 탄탄하고 간이 짭조름하다. 라스코와 유니온은 슬로베니아 맥주의 양대 산맥. 두 맥주 모두 풍미가 강한데 라스코는 쌉싸름한 맛이 강하고, 유니온은 부드러운 맛이 강하다. 포티차라는 음식도 있다. 호두나 허브, 양귀비씨, 치즈, 꿀을 넣은 것으로 롤케이크와 비슷하다. 결혼식이나 부활절, 성탄절과 같이 중요한 행사나 공휴일에 먹는 전통음식이다.
  • [안녕? 자연] 새해 첫날 멸종…세계 단 한마리 달팽이 세상 떠나다

    [안녕? 자연] 새해 첫날 멸종…세계 단 한마리 달팽이 세상 떠나다

    전세계인들이 새해 희망에 부풀어 있던 1일, 가문의 멸종을 고하고 사라진 달팽이가 있다. 최근 미국 하와이 토지 자연보호부(DNLR) 측은 그간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달팽이 조지가 1월 1일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14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조지에 얽힌 사연은 인류와 함께사는 수많은 생물종 보호에 대한 인식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조지는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학명·Achatinella apexfulva)종으로 놀랍게도 지구 상에 단 한마리 남아 가문을 이어왔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1997년 DNLR 측은 멸종위기에 놓인 고유 달팽이종을 보호하고자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 10마리를 포함한 여러 고유종들을 하와이 대학 실험시설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다. 당초에는 종을 번식시켜 개체수를 늘리려는 계산이었으나 태어난 새끼들은 다 죽고 조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 달팽이에 조지(George)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갈라파고스의 명물이자 생물 보존의 아이콘인 핀타 섬의 마지막 코끼리거북 ‘외로운 조지’에서 따온 것이다. 곧 하와이의 조지 역시 생물보존의 아이콘으로 관심과 보호를 받아왔으나 결과적으로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멸종됐다. 그렇다면 왜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는 멸종이라는 비극을 맞았을까? 대표적인 화산섬인 하와이는 원래 생물이 살지 않았으나 다양한 외래종이 새와 배 등 전달 통로를 통해 섬으로 유입됐다. 이후 외래종들은 하와이 특유의 자연환경 속에서 살면서 고유종으로 진화했다. 이중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가 대표적인 셈. 보도에 따르면 19세기만 해도 하와이 섬들에 사는 달팽이는 하루에 1만 마리를 잡을 수 있을만큼 흔하디 흔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유럽인들 사이에 야구카드를 수집하듯 '달팽이 모으기'가 인기를 끌면서 하와이 달팽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잡혀 이 과정에서 일부 종이 멸종됐다. 다행히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는 살아남았으나 이번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955년 또다른 외래종인 아프리칸 랜드 달팽이(Achatina fulica)를 없애기 위해 육식성 포식 달팽이인 늑대달팽이(Euglandina rosea)를 섬으로 들였는데 문제는 하와이안 나무 달팽이같은 토착종까지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은 것. 하와이 대학 생물학자 마이클 G 해드필드 박사는 "우리는 달팽이가 사라지고, 또 사라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봤다"면서 "늑대달팽이가 등장하면서 토착종의 3분의 1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쥐와 애완동물로 카멜레온이 들어오기 전까지 하와이는 달팽이의 보고였다"면서 "하와이의 여러 섬에 아직 남아있는 여러 달팽이종도 외래종과 기후변화 탓에 멸종위기에 직면해있다"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박기열 부의장, 김종호 서울지방병무청장과 ‘병역명문가 조례’ 제정 논의

    서울시의회 박기열 부의장(더불어민주당, 동작3)은 지난 7일 오후 2시 서울시의회 부의장실에서 김종호 서울지방병무청장과 만나 ‘병역명문가 예우에 관한 조례안’ 제정에 대해 논의했다. 병역명문가는 3대 가족 남자 모두가 현역복무를 명예롭게 마친 가문에 대해 병무청에서 인증하고 있다. 병무청은 건강한 병역 문화 정착을 위해 병역 의무를 성실히 마친 가문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병역명문가 선양사업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김종호 청장은 “박 부의장님께서 서울지방병무청의 정책자문위원으로 다 년간 활동하신 경험이 있어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인사를 나누며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에서 이미 제정돼 있는 해당 조례가 서울시 모든 자치구에서도 제정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밝혔다. 이 날 박기열 부의장은 김종호 청장에게 서울시 내 자치구 중 해당 조례가 제정되지 않은 14개 구에서 조례 제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조를 약속했다. 현재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병역명문가 예우에 관한 조례안’이 제정된 자치구는 총 11곳(강동, 강북, 구로, 동대문, 동작, 마포, 서대문, 송파, 양천, 영등포, 종로)으로 절반에 조금 미치지 못하고 있다. 김종호 청장은 “지난 해 동작구를 비롯해 강북, 구로, 동대문, 영등포 등 5개 기초 자치구에서 ‘병역명문가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될 수 있도록 힘써주셔서 감사드린다”며 “아직 조례가 제정되지 않은 자치구에서도 조례 제정을 통해 병역명문가 선양을 도울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이에 박기열 부의장은 “병역명문가로 선정된다는 것은 소정의 혜택도 혜택이지만 성실히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신 분들에게는 커다란 명예일 것”이라면서 “부의장으로서 발 벗고 나서 동료의원들과 힘을 모아 서울 모든 자치구의 병역명문가 여러분께서 똑같은 자부심을 느끼실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답하며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영호가 미국 망명신청한 ‘친구’ 조성길에 보낸 편지

    태영호가 미국 망명신청한 ‘친구’ 조성길에 보낸 편지

    2016년 여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공사가 ‘친구’ 조성길(44)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 대리를 향해 쓴 글을 공개했다. 태영호 전 공사는 5일 자신의 블로그에 ‘조성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는 “직접 연락할 방도가 없어 이같은 글을 올렸다”며 “친구의 미국 망명 타진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태영호는 “자네나 내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민족의 운명, 민족의 번영은 어느쪽에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봐야 한다. 한국은 지상천국이 아니지만 이루려던 바를 이룰 수 있는 곳”이라며 “애들도 ‘성길 아저씨네 가족이 서울로 오면 좋겠다’고 한다”고 설득했다. 그는 “북한 외교관으로서 남은 여생에 할 일이란 빨리 나라를 통일시켜 통일된 강토를 우리 자식들에게 넘겨주는 것”이라며 “서울에서 나와 함께 의기투합해 북한의 기득권층을 무너뜨리고 이 나라를 통일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태영호는 “한국으로 오면 신변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에 오면 정부에서 철저한 신변경호를 보장해 줄 것이며 직업도 바라는 곳으로 해결 될 것”이라며 “민족의 한 구성원이며 북한 외교관이였던 나나 자네에게 있어 한국으로 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거듭 강조했다.앞서 태영호는 3일 채널A ‘뉴스 TOP10’에 출연해 “조성길의 아버지도 외무성 대사였고, 장인도 외무성에서 대단히 알려진 대사”라며 “가문이 좋다”고 소개했다. 조 대사대리의 장인인 이도섭 전 태국주재 북한 대사는 북한 정상의 행사 의전 관리를 오래 했으며, 조 대사대리의 부인 역시 평양 의학대학을 졸업했다며 부부가 이탈리아에 나갈 때 자녀 1명도 데리고 나갔다고 전했다. 한편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는 외교소식통을 인용, 조성길이 미국 망명을 원하고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 정보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2000년 7월 이탈리아에서 대사관 운영을 시작했지만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 후 문정남 대사가 이탈리아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주이탈리아 북한 공관에는 3등 서기관 1명, 1등 서기관 2명, 참사관(농업 분야) 등 4명이 근무하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금요칼럼] 환관도 족보를 만든 나라, 조선/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금요칼럼] 환관도 족보를 만든 나라, 조선/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환관은 생식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궁녀가 많은 궐내에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을 마음 놓고 맡기려면 거세된 남성이 필요했다. 고대부터 동서양 각국에 환관이 존재한 이유였다.조선왕조의 법전 ‘경국대전’에는 환관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140명쯤이 있었다고 한다. 실지로는 그보다 더 많았다. 실학자 이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궁궐에는 환관이 335명, 궁녀가 684명이었다. 그들이 받는 녹봉을 모두 합치면 매년 쌀 1만 1430석이 든다고 하였다(성호사설, 제24권, ‘환관궁녀’). 조선의 환관들은 별로 큰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학식을 갖춰야 했다. 그들은 매달 유교경전에 관한 시험을 치렀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환관의 평균수명은 70세 정도였다. 노동에 종사한 평민보다는 무려 10여년이 길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결과이지만, 믿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질병으로 사망한 환관도 적지 않았던 데다가 항상 궁중의 사나운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참고로, 조선의 환관은 체격도 훌륭했고 목소리도 남자다웠다. 그들은 체력도 우수한 편이어서 궐내의 건물을 보수하는 등 육체노동을 너끈히 감당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환관이 가정을 이루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조선의 환관은 다들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다. 그들 또한 조상의 제례(祭禮)를 모시는 데 열심이었다. 환관들은 일찌감치 어린아이를 입양하여 환관으로 키웠다. 세력이 좀 있는 환관들은 슬하에 두세 명의 양자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환관 집안에서는 양부와 양자의 성이 서로 다르기 일쑤였다. 가령 명종 때의 상약(약을 담당하는 환관) 노익겸의 양부는 환관 박한종이었다(조선왕조실록 명종 14년(1559) 9월 25일자). 이처럼 성은 달랐어도 환관 부자간의 정은 두터웠다. 만일 아비(환관)가 죄를 짓고 귀양을 가게 되면 양아들(환관)은 아버지를 위해 구명 상소를 올렸다. 행여 아버지를 모욕하는 사대부라도 있다면, 아들은 목숨을 걸고 항의하였다. 1663년(현종 4), 사대부 이상익이 어린 환관들을 모아 놓고 환관 최대립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무엄하게도 사대부를 정면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그 소식을 듣고 환관 양달원이 거칠게 항의했다. 조정은 양달원의 무례를 문제 삼았다. 양달원은 다름아닌 최대립의 양자였다. 아버지를 비방하는 이상익의 언동을 보고 그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환관 최대립에게 그다지 큰 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경상감사 이상진에게 내시부 소속의 노비들에 관한 일로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상진이 환관의 요청이라는 이유로 무시해 버렸다. 최대립은 환관의 대표로서 이상진을 공적으로 비판하였다(조선왕조실록 현종 4년 6월 15일 기사). 환관들의 가문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었다. 18세기 정조 때는 환관 이윤목이 여러 환관 집안의 통합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를 발행했다. 환관들의 상호연대는 그 뒤 더더욱 공고해졌다. 이윤목의 7대손인 환관 문건호 등은 100년 뒤에 옛 족보를 개정하였다. 새 족보에는 1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환관 650명이 수록되었다. 조선의 환관들이 가문의 영속과 단결을 위해 족보까지 만들었다는 사실, 이것은 실로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희귀한 일이었다. 중국과 베트남 등에서는 ‘환관의 집안’ 자체가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환관들도 족보를 따졌다. 조상의 제사와 자손들의 친목은 환관 사회에서도 인간의 필수적인 도리였다. 조선은 누구에게든 핏줄이 소중한 나라였다.
  • 北 고위 외교관 망명길… “조성길 대사대리 부부 2개월째 잠적”

    이탈리아 보호설… 현지 언론은 부인 “前 태국대사 사위… 부인은 의대 졸업” 국가정보원은 3일 조성길(44) 주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 부부가 지난해 11월 초 공관을 이탈해 함께 잠적했다고 밝혔다. 북한 외교관의 이탈은 2016년 여름 한국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주영국 공사 이후 처음이다. 국회 정보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김민기 의원은 조 대사대리의 망명과 관련해 국정원으로부터 비공개 보고를 받은 뒤 “조 대사대리는 2018년 11월 말 임기 만료인데 11월 초 공관을 이탈했다”면서 “부부가 이탈을 함께해서 잠적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 의원은 “조 대사대리가 잠적한 2개월간 국정원과 연락을 취한 적은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정보위 위원들은 “조 대사대리에 대한 신변 보호를 하고 있다면 이탈리아 당국이 하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이탈리아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정원이 보고했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정보당국 채널로 조 대리대사의 동향을 계속 파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탈리아 최대 뉴스통신사인 ANSA는 이날 외교부 사정에 밝은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 관리로부터 망명 요청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탈리아 당국 보호설을 부인했다.  북한은 2000년 7월 이탈리아에서 대사관 운영을 시작했지만 지난해 9월 6차 핵실험 후 문정남 대사가 이탈리아 당국으로부터 추방당했다. 2015년 5월 3등 서기관으로 부임했던 조 대사대리는 이때 1등 서기관으로 승진하며 대사대리직을 맡았다. 다만, 이탈리아에서 아그레망(대사 부임 동의)이 나오지 않아 대사는 못 됐다. 주이탈리아 북한 공관에는 3등 서기관 1명, 1등 서기관 2명, 참사관(농업 분야) 등 4명이 근무하고 있다. 한편, 태 전 공사는 이날 채널A ‘뉴스 TOP10’에 출연해 “조성길의 아버지도 외무성 대사였고, 장인도 외무성에서 대단히 알려진 대사”라며 “가문이 좋다”고 말했다. 조 대사대리의 장인인 이도섭 전 태국주재 북한 대사는 북한 정상의 행사 의전 관리를 오래 했다고 소개했다. 조 대사대리의 부인 역시 평양 의학대학을 졸업했다며 “(부부가) 이탈리아에 나갈 때 자녀 1명도 데리고 나갔다”고 전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②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성장해 1880년대에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상업 도시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를 설치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외국인에게도 건국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보장해 한국인에게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태동했다.●“첫 번째 ‘임정 터’ 못 찾아…대한민국의 숙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지난달 중순 찾아간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일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넘쳐나고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건물마다 즐비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인 이곳이 정말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고층빌딩이 가득 찬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지역을 바라보며 “100년 전 이곳 어딘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이 작가는 “최근 중국인 학자가 첫 번째 임정 터를 찾았다고 간략히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고려인들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임정 수립을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달 26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 모였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과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도자들의 뜻을 들어 보고 정하자”는 반론이 맞섰다.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중국과 러시아에서 거물급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어 정부 수립을 더는 늦추기 어려웠다. 앞선 노령정부에다가 서울에 임정(한성정부)이 또 생기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4월 10일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여운형(1886~1947)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온 것이다. 여운형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상하이정부의 이름이 정해졌다. 다음날 이들은 국무총리에 이승만(1875~1965)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1878~1938), 재무 최재형(1860~1920) 등 6부 총장(장관)을 임명했다. 우리가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은 여기서 유래됐다.●왕 아닌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 첫 공식화 그렇다면 두 번째 임정은 왜 상하이에 세워졌을까.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년)를 보면 여기가 왜 임정의 적지인지 잘 묘사돼 있다. “중일전쟁(1937~1945) 전 상하이는 서양 문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조계지로 분할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가 시설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조선에서 온 이들이 다른 조계지에 숨으면 곧 붙들려 갔지만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안전했다. 설사 끌려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1946년 2월 21일) 상하이정부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령·한성정부와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하고 한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전까지 이어져 오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다만 상하이정부가 추구한 ‘외교독립론’은 훗날 임정이 끊임없이 갈등과 내분에 빠지는 단초가 됐다. 외교적 방법론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적 역량을 반영한 전략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기든 지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믿는 무장투쟁론자들을 설득하진 못했다.●쑨원의 부인 추모 능원에 신규식 등 만국공묘 상하이지하철 10호선 쑹위안루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아버지’ 쑨원(1866~1925)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불리는 쑹칭링(1893~1981)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원 한쪽에 외국인 묘지를 모아 놓은 ‘만국공묘’가 나타났다. 묘비를 하나씩 더듬다가 낯선 한국인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인정받는 신규식(1880~1922)이었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카이저 수염을 기른 외모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그가 초기 임정을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채호(1880~1936), 신석우와 함께 ‘산동삼재’(산동신씨 가문의 3대 수재)로 불렸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첫 번째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눈 시력을 잃었다. 지인들이 ‘애꾸눈’이라고 놀리자 신규식은 스스로를 ‘예관’(睨觀·한쪽 눈으로 흘겨봄)으로 불렀다.●신해혁명 경험삼아 민주공화정 개념 전파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집에서 독을 마셨다. 때마침 대종교 종사 나철(1863~1916)의 눈에 띄어 다시 한 번 구조됐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공화주의 노력을 한반도에 적용하겠다는 생각에 쑨원과 천두슈(1879~1942), 천치메이(1878~1916) 등 혁명가 그룹과 친분을 맺었다.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1905~1912·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고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1912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동제사’를 조직했다. 총재 박은식(1859~1925)을 비롯해 김규식(1881~1950), 신채호, 조소앙(1887~1958) 등 동제사 출신은 후일 임정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년 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번째 임정이 상하이에 자리잡은 건 신규식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가 바로 신규식의 조카”라며 “신규식은 자신의 신해혁명 경험을 독립지사들에게 소개해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정 개념을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웠다. 신규식은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쑨원은 혁명동지 신규식을 극진히 예우했다. 호법정부의 정치·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그의 부탁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정식 주권기구로 인정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임정이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다소나마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됐다. ●해외서 문전박대 뒤 임정 외교독립론 도마에 1922년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워싱턴회의에 갔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 당해 쫓겨났다. 임정의 외교독립론이 논란이 됐다. 신규식은 이런 임정의 처지를 비관해 25일간 단식하다가 같은 해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1921년 쑨원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만세’를 외친 것을 두고 사대적 자세를 지적한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신규식의 평소 성격에 비춰 볼 때 그런 굴욕을 참아내며 쑨원을 대한 건 오로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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