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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시각] 그들도 5년 전엔 그랬다/김태균 사회부 차장

    [데스크 시각] 그들도 5년 전엔 그랬다/김태균 사회부 차장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막판에 큰일 하나를 추가했다. 지난 5년간 안 하는 편이 나은 일도 있었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도 있었지만 이번엔 명백히 후자에 속하는 일이다. 자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감옥에서 풀어줬다. 국민은 물론이고 후임자인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입장도 철저하게 무시됐다. 아름다운 퇴장에 대한 최소한의 미련만큼은 대통령이 갖고 있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실망했다. 새 대통령 취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물러나는 대통령의 5년 전 취임사가 궁금해졌다. 200자 원고지로 50장이 넘는 2008년 2월 25일 이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의 부름을 받고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한없이 자랑스러운 나라, 한없이 위대한 국민 앞에 엄숙한 마음으로 경의를 표하며 제게 주어진 역사적·시대적 사명에 신명을 바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은 구집권세력의 여망을 한몸에 받은 새 대통령의 희열과 각오가 읽혀진다. 이 대통령은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던 시골 소년이 노점상, 고학생, 일용노동자, 샐러리맨을 두루 거쳐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과 서울특별시장을 지내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면서 “땀 흘려 노력한 국민이면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를 열고 정부 혁신과 경제구조 혁신을 통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가 풀어낸 대한민국의 청사진은 화려했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대기업과 협력하고 경쟁하도록 하겠다.’, ‘능동적·예방적 복지로 낙오자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정부가 보육의 짐을 덜어 저출산 문제 및 삶의 질을 개선하겠다.’, ‘교육복지를 달성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 ‘실용의 잣대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겠다.’ 5년이 흐른 지금 이 대통령의 희망과 포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제정의, 교육혁신, 남북관계, 선진복지 등 이슈는 사라지고 불통과 갈등, 불신이 남루한 잔해로 사방에 널려 있다. 정부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4대강’ 논란은 이를 압축한 하이라이트다. 이 대통령의 취임사는 ‘한반도의 새로운 신화를 향해 우리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 저, 이명박이 앞장서겠습니다. 국민이 합심하여 떨치고 나서면 해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로 끝을 맺고 있다. 박 당선인의 취임사도 이 대통령의 취임사와 크게 다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가 그리는 큰 틀의 미래 비전은 방법론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전임자의 취임사에 고스란히 들어 있던 것들이다. 하지만 당선 이후 40여일간 보여준 모습대로라면 박 당선인이 앞으로 25일 후에 낭독하게 될 취임사가 전임자의 그것처럼 ‘실패한 계획서’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도 향후 5년의 비전을 알리고 희망을 심어줘도 시원찮을 판에 ‘불통’ 논란이 커지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차기 대통령의 첫 국무총리 후보가 개인문제로 낙마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경제, 복지, 노동에 대한 건전한 이슈 논쟁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불필요한 논란과 가십이 대신하고 있다. 전임자의 ‘실패’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 같아 걱정이다. windsea@seoul.co.kr
  • 전과 10범 탈북자에 ‘꿈’ 선물한 검·경

    북한의 이른바 ‘꽃제비’ 출신인 김모(28)씨는 2007년 한국 땅을 밟으며 기대에 부풀었다. 초중등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탈북자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 다니며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탈북 과정에서 다친 코, 눈, 머리뼈 등을 수술하면서 빌렸던 400만원이 발목을 잡았다. 편의점과 식당을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가난은 숨막히게 조여 왔다. 결국 2010년 살고 있던 임대아파트 보증금 750만원을 대부업체에 압류당하고, 이듬해 노숙자로 전락했다. 김씨는 2011년 10월 서울 양천구의 PC방에서 요금을 내지 못해 경찰에 체포됐다. 지난 14일에는 서울 성동구 PC방에서 27시간 이용료 2만 4800원 낼 돈이 없어 다시 수갑을 찼다. 이미 같은 전과가 10개나 더 있던 탓에 구속됐다. 그는 “PC방이 따뜻해서 오래 머물렀다”면서도 “남한테 피해를 끼치기 싫어 음식은 시켜먹지 않았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경찰조사 결과 김씨는 새터민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구직 글을 올리고 며칠 뒤 PC방에서 답글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딱한 사연을 접한 성동경찰서 수사과·보안과는 사방에 수소문해 숙식이 가능한 관내 의류업체에 일자리를 구해줬다. 서울 동부지검 형사4부의 담당검사와 수사관은 수배 해제를 위해 벌금 450만원을 대신 내줬다. 한명관 동부지검장도 사비로 30만원을 내놨다. 동부지검은 31일 검찰심의위원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김씨의 구속을 취소하고 기소유예처분하기로 결정했다. PC방 주인은 조건 없이 합의서와 탄원서를 썼다. 김씨는 석방됐다. 그는 “한국에서 이런 삶을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기회를 준다면 창피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벅찬 눈물을 쏟았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비스트’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비스트’

    이기적인 북쪽 사람들은 남극의 빙하가 녹은 물이 밀려들까 봐 제방을 쌓았다. 제방 바깥의 남쪽 사람들은 ‘욕조 섬’에 모여 무정부적인 가치를 누리며 살아간다. 거대한 폭풍우가 휘몰아친 후 남쪽 땅은 수면 아래에 잠긴다. 흑인 소녀 허쉬파피의 아빠 윙크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모아 욕조 섬 재건에 나선다. 하지만 물에 빠진 생명은 하나씩 죽어 가고 건강이 나빠진 윙크에게 죽음이 성큼 다가온다. 급기야 남극의 얼음에 갇혔던 전설의 맹수 ‘오록스’가 깨어나 허쉬파피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한다. ‘비스트’의 감독 벤 제틀린은 미국 뉴올리언스와 물의 문화에 매료된 뉴요커다. 지인들과 ‘코트 13’이라는 독립 제작사를 꾸린 그는 단편영화 ‘바다의 영광’(2008)에서 태풍 카트리나의 피해를 당한 루이지애나 주를 그린 바 있다. 참상을 비극으로 그리는 대신 림보와 환상의 세계를 불러내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친구의 희곡을 각색한 제틀린의 첫 장편 ‘비스트’는 ‘바다의 영광’의 확장 버전에 해당한다. 29살 감독은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2012년 신인 감독에 등극했고 만장일치의 호평을 얻어낸 ‘비스트’는 올해 아카데미 주요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프레스턴 스터지스(1898~1959)의 ‘설리번의 여행’(1941)은 할리우드가 빈곤층을 다루는 방식의 전형이다. 민중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나 극 중 영광의 몫은 가난한 자들과 우연히 만난 타자에게로 돌아간다. 반면 할리우드와 멀리 떨어진 제틀린의 작업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나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같은 그림과 연결된다. 돈을 제공하는 귀족의 허상에서 눈을 돌려 역사의 장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민중을 응시한 두 화가처럼 제틀린은 처참하리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정직하게 진입한다. 남부의 진창을 보는 건 편하지 않다. 달콤한 영화에 길들여진 필자의 육체와 정신이 스크린 앞에서 고통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다. 세르비아 감독인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향을 받았다는 제틀린은 자연스레 극사실적인 이미지와 마법의 이야기를 뒤섞는다. ‘비스트’는 실제로 일어난 자연재해 보고서를 한 편의 신화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미시시피 삼각주는 익명의 남쪽 지방으로 탈바꿈하고 여섯살 소녀는 운명적으로 전설의 괴물과 맞닥뜨린다. 허쉬파피는 야생의 소녀다. 소녀는 자연의 심장 소리를 듣고 죽는 것들을 보면서 존재의 가치를 깨달으며 먼 바다에 있는 망자의 천국까지 오간다. 마침내 괴물과 마주한 소녀는 자연이 투쟁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생존해야 할 터전임을 깨닫는다. ‘비스트’의 도입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곁에서 힘겹게 버티고 선 집을 비춘다. 그곳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허쉬파피가 영웅으로 거듭 태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며 소녀와 민중이 물결치는 제방을 의연하게 걷는 결말에서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것이 아빠가 평소에 허쉬파피를 ‘두목’이라 부른 이유다. 소수 미국 감독만이 버림받은 자들과 동거하는 지금, 그들의 존엄성을 되살린 제틀린은 선배 하모니 코린에 비견될 만하다. 미국 서부의 건조한 신화로부터 남부의 끈끈한 신화를 창조한 ‘비스트’는 필견의 작품이며 당분간 이 낯선 작가의 행보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7일 개봉. 영화평론가
  • 끈질기게 살아남은 저 노인이 바로 우리야

    가난한 촌락에서 먹을 입을 덜고자 노인을 버렸다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옛 전설은 우리네 ‘고려장’과 흡사하다. 일본 문단의 ‘새로운 별’로 불리는 사토 유야가 쓴 소설 ‘덴데라’(학고재 펴냄)도 한겨울 눈 덮인 산에 노인을 갖다 버리는 ‘산맞이’ 행사를 소재로 삼았다. 70세가 된 노파 사이토 가유가 마을의 법도에 따라 극락왕생할 것이라 굳게 믿으며 아들의 등에 업혀 산에 버려지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이토 가유는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려던 순간 앞서 버려진 노파들의 손에 이끌려 목숨을 건진다. 노파들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덴데라’라는 이름의 산골 마을에 기거하며 살고자 발버둥 친다. 버려질 때 입고 온 흰 소복에 흙과 땟국을 묻힌 채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하루 종일 숲을 헤매는 노파들 앞에서 사이토 가유는 수치심을 느낀다. 부득부득 살아남은 자들의 일원이 돼 불명예스러운 삶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덴데라’의 노파들은 굶주린 곰인 ‘붉은 등’, 정체 모를 전염병과 차례로 맞닥뜨린다. 또 자신들을 버린 마을을 공격해 복수하자는 ‘습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나뉘어 충돌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50명의 노파가 곰과 싸우다 하나둘씩 죽어 가는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다. 소설은 헨리 빈터펠트의 동화 ‘아이들만의 도시’나 월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에 나오는 주인공을 아이에서 노파로만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일본 문단에선 소설 ‘덴데라’가 버블경제가 무너진 1990년대 초반 이후 사회에 쏟아진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삶을 압축했다고 평가했다. 소설 속 노파들의 삶에 대한 집착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끈질기게 생존한 노파들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일본 사회, 나아가 비슷한 장기 침체의 터널을 걷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DB를 열다] 1967년 94명 희생된 침몰 한일호 인양

    [DB를 열다] 1967년 94명 희생된 침몰 한일호 인양

    1967년 1월 14일 밤 부산과 여수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한일호와 동해 경비를 마치고 진해항으로 돌아가던 해군 구축함 충남 73함이 부산 가덕도 서북방 해상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한일호에 타고 있던 승객과 선원 106명 가운데 12명만 살아남고 9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한일호는 겨우 140t급 목선이었고 구축함은 2600t급 철선이었다. 한일호는 뱃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10분 만에 침몰했다. 영하 7도의 강추위 속에서 세 시간 반 동안 헤엄을 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4명의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녀였다. 사진은 사고 닷새 후인 1월 19일 해군이 수색대와 크레인선을 동원해 한일호를 인양하는 모습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어서 이들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울렸다. ‘차가운 북동풍이 몰아치는 밤 목멘 고함소리 울지도 못하고 그 순간 앗아갔네 수많은 생명’이라는 가사의 ‘비운의 한일호’라는 대중가요도 이 사고 후에 나왔다. 세계 역사상 최대의 침몰 사고는 1945년 1월 30일 독일 여객선 구스틀로프호가 피란민과 부상병을 태우고 폴란드에서 탈출하다 소련의 잠수함에 격침돼 9343명이 사망한 사고다. 1517명이 희생된 타이타닉호의 6배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 1월 9일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침몰해 362명이 숨진 창경호 사고가 최대의 해상사고로 기록돼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케리 “北 수용소 인권도 美 외교현안”

    미국 국무장관 내정자인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이 24일(현지시간) 전쟁반대론자이자 대화파의 면모를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케리 내정자는 이날 상원 인준청문회에 출석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무인정찰기(드론)나 파병만으로 정의될 수 없다”며 “지원과 식량안보, 질병·가난·억압과의 싸움이자 목소리가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란 핵문제와 관련, “오바마 대통령은 여러 차례 외교적 해결책을 선호한다고 밝혔고, 나도 민주적인 노력을 시도할 것”이라면서 “우리의 정책은 봉쇄가 아닌 억제”라고 말했다. 이어 “이란 경제에 타격을 주는 경제적 제재와 함께 대화에도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핵 위협을 해소하려는 이런 노력을 (이란이) 잘못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경고’로 균형을 잡았다. 그는 “비확산을 위해 이란은 핵사찰을 수용하는 등 핵프로그램을 둘러싼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케리 내정자는 청문회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국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중국은 북한과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중국을 통한 대북 압박 구상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경쟁관계이나 적대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인권 문제를 미 외교정책의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케리 내정자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수많은 이들을 위한 투쟁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서 “북한의 강제수용소 수감자들과 수많은 피란민, 추방자, 인신매매 희생자들을 대변하는 것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날 청문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동료 의원들의 칭찬 속에서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따라서 케리 내정자는 다음 주 상원 인준을 받고 무난하게 국무장관에 공식 취임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커버스토리] 증세, 결국은 부가세 vs 부유세

    [커버스토리] 증세, 결국은 부가세 vs 부유세

    대다수의 사람에게 세금을 더 걷을 것인가, 부자 등 특정 계층에게만 세금을 더 걷을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135조원 규모의 복지 공약을 내걸면서 증세는 우리 사회의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 워낙 파장이 큰 사안이라 정치권도 쉽사리 공론화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증세 불가피성을 얘기하는 목소리가 크다. 논쟁은 부가가치세율 인상 등 보편적 증세와, 부유세 신설 등 부자 증세로 나뉜다. 25일 각 진영의 대표주자에게서 논리를 들어보았다. ■‘부가세 인상론자’ 강봉균 건전재정포럼 대표 “부가세 2%P 올리면 세수 15조↑ 국민 공감대 마련 보편적 증세를”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봉균 건전재정포럼 대표는 국내의 대표적인 보편적 증세론자이다. 여러 세미나 등을 통해 부가가치세율 인상 등 지속 가능한 보편적 증세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부가세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에 붙기 때문에 세율이 올라가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획일적으로 부담이 늘어난다. 강 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부가세율이 18.5%”라며 “우리나라만큼 낮은 부가세율(10%)을 적용하는 선진국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부가세율을 2% 포인트만 올려도 연간 세수가 15조원 늘어난다고 덧붙였다. 그가 부가세 인상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잠재성장률(물가 상승 등의 부작용을 유발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성장 최고치)에 못 미치는 저성장 기조에 따라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이 깔려 있다. 강 대표는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3%를 밑돌면 연간 15조원의 적자 국채 발행 요인이 발생한다”면서 “여기에 새 정부의 공약 이행을 위해 10조원의 적자 국채가 추가로 발행되면 총 규모가 25조원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보편적 증세 없이는 순식간에 재정 건전성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부가세를 높이면 물가가 올라간다’는 일부의 우려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강 대표는 “일본도 5%인 부가세율을 2015년에 10%로 인상하기로 결정했고, 장기 경기 침체 우려 때문에 물가상승률을 0% 수준에서 2%까지 끌어올리기로 했다”면서 “경기 불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부가세율을 인상한다고 기업이 쉽사리 물건값을 올리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강 대표는 “새 정부가 증세 없이 조세부담률을 2% 포인트 가까이 높이려면 세무조사를 강화하는 등의 무리수가 나올 수 있다”면서 “그렇다고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보편적 증세를 성급하게 밀어붙이면 극심한 조세 저항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존 재원 대책으로는 복지공약 실천에 한계가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고부담 고복지로 갈 것인지, 아니면 저부담 저복지를 선택할 것인지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 대표는 “적자 국채를 어느 정도 발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국회 차원의 논의가 이뤄진 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증세밖에 도리가 없다’는 당선인 측의 솔직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올해 예산은 이명박 정부가 짰으니 내년 예산 편성 때 자연스럽게 복지 공약 이행에 대한 논의가 재정부와 국회 등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면서 “여러 전제들이 충족된 조건 하에서 내년부터 부가세율 인상 등 보편적 증세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 ‘부유세 신설론자’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교수 “부자·대기업이 세금 더 내야 부유세, 지하경제 양성화 도움” “그동안 많은 혜택을 누려온 부자들이 세금을 좀 더 내도록 하는 것이 새 정부가 사회를 통합해 나가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복지 공약 재원 135조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부유세는 도입돼야 한다”며 부자 증세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통계청 등에 따르면 소득 상하위 20%간의 자산 격차는 2006년 4.5배에서 2011년 5.7배로 해마다 벌어지고 있다. 이런 부(富)의 극심한 양극화에 복지 확대 요구까지 커지면서 2000년대 들어 선거 때마다 ‘부유세 신설’이 여론의 관심사로 등장했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김무성 새누리당 전 선대위 총괄본부장이 부유세 신설 필요성을 거론했다가 하루 만에 부랴부랴 거둬들이기도 했다. 부유세는 개인이나 가구의 순자산(부채를 뺀 자산) 초과분에 대해 일정 세율로 부과하는 세금을 말한다. 부의 재분배 기능이 크다. 과세 대상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통상 순자산 10억원 이상을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 10일 발표한 ‘2011년 세계노동보고서’에 따르면 자산규모 상위 10%의 우리나라 부자들에게 3% 세율의 부유세를 매길 경우 연간 64조원의 세수 확보가 가능하다. 유 교수는 “앞으로 더 많은 국민에게 좀 더 투명한 과세 부담을 지우려면 부자나 대기업들이 지금 더 부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면서 “부유세를 도입하면 박 당선인이 약속한 지하경제 투명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7월 영국 시민단체인 조세정의네트워크는 1970년부터 40년간 한국에서 해외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이 7790억 달러(약 833조원)라고 주장했다.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규모라는 것이다. 실제 관세청에 적발된 해외 자산도피 규모는 2007년 166억원에서 2010년 1528억원으로 3년새 9배 이상 급증했다. 유 교수는 “부유세가 도입되면 국세청 등 세정당국이 좀 더 정밀한 세정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단독주택이나 상업용 수익건물의 부속토지는 가격이 실제보다 낮게 책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가의 미술품이나 골동품은 시가 파악이 어렵다는 점 등도 부자 증세를 실행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다. 부유세를 도입하면 부의 해외 이전 내지 자산 도피를 부추길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에 대해 유 교수는 “운전자들이 신호 규정을 잘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신호등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내국인의 해외 부동산 및 금융자산 소유 현황과 분기별 외환송금정보, 환치기(외국에서 빌려쓴 외화를 국내에서 한화로 갚는 것) 사례 등을 좀 더 면밀히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종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씨줄날줄] 기부의 진화/진경호 논설위원

    지구촌 70억 인구가 대·소변에 사용하는 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참고할 사례는 있다. 미국 환경보호국(EPA) 조사 결과 미국 전체 가정이 용변에 쓰고 버리는 물이 연간 1조 6000억ℓ로 파악됐다.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 마이애미 3개 도시의 1년치 물 소비량과 맞먹는다고 한다. 여기에 오물 정화 비용까지 따지면 실로 엄청난 돈이 미국인의 ‘배설비용’으로 줄줄 새고 있는 셈이다. ‘똥값’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선 똥이 돈이다. 성인 1명의 하루 배설량은 대략 1메가줄의 에너지를 지닌다. 1t짜리 승용차가 시속 160㎞로 달리다 벽에 부딪혔을 때의 에너지다. 열량으론 269㎉다. 200㎖짜리 우유 2팩을 웃돈다. 유기비료나 재처리 연료로 사용할 수 있지만 빈민국들에서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지면 온갖 질병의 온상이 된다. 쓰임에 따라 돈이 되기도, 돈이 들기도 한다. 2011년 빌 게이츠가 26억 달러를 쾌척한 ‘21세기형 화장실 프로젝트’는 이런 배설비용의 역설에서 출발했다. 변변한 하수구나 오물처리시설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가정에 빵 대신 대·소변 재처리가 가능한 변기를 보급하기로 한 것이다. 태양광 발전 등 첨단기술이 필요해 언뜻 무모해 보이지만 미래학자들은 실현 가능한 일로 본다. 이미 미국 내 8개 대학이 관련 연구에 나섰다. 기부가 진화하고 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의 굶주림을 덜어주는 시혜적 자선은 옛일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 돈에다 첨단기술과 전문인력을 함께 투입해 질병·재앙 그리고 사회 부조리 등 지구촌 인류를 위협하는 도전에 조직적으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게이츠가 엊그제 18억 달러를 내놓은 소아마비 퇴치운동과 말라리아 백신 개발 운동도 이런 지속가능한 인류를 위한 투자들이다. 사회적 기업 지원에 나선 이베이 초대사장 제프 스콜, 개발도상국의 교육·의료서비스 혁신사업을 벌이고 있는 인포스페이스 설립자 나빈 자인 등 숱한 젊은 기업가들도 이미 이 대열에 서 있다. 수단의 이동통신업계 거물 모 이브라힘은 아프리카의 민주화를 위해 임기를 마치고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아프리카 지도자에게 500만 달러와 평생 1년에 20만 달러씩 지급하는 ‘아프리카 리더십상’을 내걸었다. 정보기술(IT) 혁명이 만들어낸 ‘테크노 기부’의 대표적 유형들이다. 광화문 ‘사랑의 온도계’가 100도를 훌쩍 넘어섰다. 한껏 박수를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IT기술의 첨병이라는 우리는 언제쯤 ‘테크노 기부’의 사례를 꼽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이름을 자랑스레 칼럼에 담을 수 있을까.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범죄자 딸이래”…예비 범죄자 낙인에 멍드는 수감자 자녀 7만명

    [주말 인사이드] “범죄자 딸이래”…예비 범죄자 낙인에 멍드는 수감자 자녀 7만명

    “배가 너무 아파요. 콕콕 쑤시고 조이고….” 6년 전 A(11)양은 유치원 차에서 내리다가 경찰에 잡혀 가는 아빠를 목격했다. 강도살인 혐의였다. 다섯살이던 A양은 그날 이후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유치원도 그만둬야 했다. 범죄자의 딸과 함께 내 아이를 공부시킬 수 없다는 다른 부모들의 민원 때문이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빠가 체포되던 그날만 오면 A양은 심한 복통을 호소한다. 부모의 범죄로 인해 원치 않은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가는 수감자 자녀. 정부는 부모의 수감으로 가난과 심리적 고통을 떠안아야 하는 아이들을 약 7만명으로 추정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다. 법무부는 매년 200만건 이상의 범죄가 발생하며 이들 가운데 전국 50개 교정시설에 매년 10만명 정도가 새로 입소한다고 본다. 이들 절반 정도가 기혼으로 파악되며 기혼 수형자의 70%가량이 최소 1명 이상의 미성년 자녀를 둔다고 추정한다. 장기 수용자 자녀에 새로 입소하는 자녀들까지 더하면 수감자 자녀들은 나날이 증가하는 추세다. 7만명이면 미성년 인구 100명당 0.5명으로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문제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 아이들이 속수무책으로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방치되는 배경엔 사회의 편견도 한몫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교도소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비 범죄자’, ‘나쁜 종자’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범죄자의 딸’이래요. 내가 교도소 갈 짓한 것도 아닌데…왜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해요?” B(16)양은 지난해 아빠가 교도소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삐딱선을 탔다. 사춘기 소녀는 세상의 편견도, 아빠에 대한 원망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엇나가는 삶’이었다. 싸움박질도 했고 일진들과 어울리며 학교에서 도둑질도 했다. 같은 잘못을 해도 손가락질은 B양에게 쏠렸다. “애들이랑 다같이 지갑 한번 훔친 건데 걔네 엄마들이 제가 애들을 물들였다고 몰잖아요. 진짜 짜증났어요.” B양은 지난해 학교를 그만뒀다. 학자들은 부모에게서 받는 충격과 배신감에 사회적 편견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범죄가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신연희 성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는 가족성원들을 단위로 보는 공동체 문화가 강한 까닭에 수감자의 범죄와 가족을 분리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면서 “이런 문화적 배경에서 가족들은 주위의 낙인을 피하려 숨어 버리려고만 한다”고 말했다. 수감자 자녀들도 죄를 진 부모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다. 신 교수는 “상담 결과 아이들이 ‘나는 범죄자 자식인데 뭘 할 수 있을까’ 등 병에 가까운 심리적 고통을 앓는다”면서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정서적 문제, 학교 부적응은 결과적으로 가출과 탈선, 비행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고 했다. 부모가 수감됐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아이들은 저마다 큰 충격을 받고 있었다. 기혼 남녀수용자 56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수용자 가족방문 실태 및 그 효과· 2009)에 따르면 ‘아이가 말이 없어짐’, ‘매사에 의욕이 없고 기가 죽었다’는 응답이 각각 40%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양육환경도 매우 불안정해진다. 수감자 자녀 중 30%는 부모의 입소 뒤 2번 이상 보호자가 바뀌었다. 보호자가 없어 아이 혼자 살고 있는 경우도 20%가 넘었다. 자연스럽게 공부와도 담을 쌓게 된다. 부모의 입소 후 공부에 관심이 없고 성적이 떨어졌다는 대답은 25%, 학교를 결석하거나 무단 이탈을 하는 아이도 11%를 차지했다. 학교를 중퇴해 버리는 아이도 7%에 달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닐 것 같아요. 오빠는 가출했고 엄마는 매일 울어요.” 부도로 인해 아버지가 수감된 뒤 C(17)양의 가정은 붕괴됐다. 어머니 역시 건강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자 가세는 형편없이 기울었다. 한살 터울인 오빠는 옷가지만 챙겨 집을 나갔다. C양은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뒀다. 수감자 자녀 대부분은 절대 빈곤 상태에 놓인다. 한쪽 부모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가계소득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여기에 재판에 따른 비용, 수용생활 지원 등으로 인한 비용손실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직결된다. 한 수감자(50·무기징역)는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지원을 받았으면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도, 주려는 곳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많다. 법을 잘 준수하고 사는 사람들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큰데 세금으로 범죄자 자녀까지 도울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이다. 비슷한 이유로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수감자 자녀의 경제 지원 등은 민간단체가 맡는 일이 많다. 교정위원인 노병란 목사는 “부모의 죄값을 그 자녀까지 치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서 “아이들만 생각하는 인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의 관심도는 낮은 편이다. 지금껏 수감자 자녀 수조차 공식적으로 헤아려 본 적이 없다. 보고서도 2007년 ‘수형자 가족관계 건강성 실태조사 및 향상방안 연구’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단 1건이 전부다. 당연히 별도 예산도 없다. 수감자 자녀 지원 프로젝트인 ‘가족사랑캠프’는 소요 비용이 1일 기준으로 150만원 안팎이지만 별도 예산은 없다. 박선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법무부 등에서 2011년 10월부터 위기가족 지원 등을 한다지만 수감자 자녀 대상으로 실질적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면서 “지금 위기청소년 지원 예산 안에 포함된 것만으로는 수감자 자녀 지원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가장 필요한 일은 수감자 자녀 통계를 잡는 것”이라면서 “수감자 자녀를 교정통계의 주요 항목으로 포함시켜 정기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정책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감자 자녀들을 보듬어 줄 시설도 많지 않다. 서울시의 한 관계자는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을 친인척이나 일반 가정에 위탁해 신체적 보호를 해주는 가정위탁 제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수감자 자녀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 위탁이 보편화돼 있지 않아 대부분 양육시설로 보내지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박영숙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 법무부는 수감자 교정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서 “복지 마인드를 가진 사회복지사를 많이 늘리고 수감자 자녀와 수감자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미술·심리치료 등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D(30)씨는 가정폭력이 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인사 불성이 돼 주먹을 휘둘렀다. 참다 못한 어머니는 잠자던 아버지의 목을 졸라 죽였고 7년형을 선고받았고 D씨는 홀로 됐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는 D씨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인근 교회로 보냈고, 그곳에서 D씨는 원로목사의 지속적인 사랑 속에 자랐다. 그는 현재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문가들은 수감자 자녀를 위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D씨와 같은 사례가 많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김혜란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범죄자의 자녀가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식의 논의들이 이뤄지는 걸 많이 보는데 이조차 낙인이 될 수 있다”면서 “수감자 자녀 지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는 “사람들은 위기와 시련의 상황에서 이를 극복해 내는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스스로 일어서기 힘든 수감자 자녀에게도 사회가 사랑의 손을 내밀어 이들이 건강한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커버스토리] 세계는 부자증세

    [커버스토리] 세계는 부자증세

    미국 의회는 2013년 1월 1일 연소득 40만 달러(약 4억 2700만원, 부부 합산 45만 달러) 이상 고소득층의 소득세 최고세율을 35%에서 39.6%로 올렸다. 미국의 ‘부자 증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 공약한 것으로, 1993년 빌 클린턴 정부 이후 20년 만이다. 정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을 추월하는 바람에 국고가 바닥난 데다 각종 감세 혜택 종료와 정부지출 삭감 등으로 경기가 급락하는 ‘재정절벽’을 회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이런 부자 증세 도입 움직임은 유럽에서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먼저 포문을 연 나라는 프랑스. 연소득 100만 유로(약 14억 5000만원) 이상 고소득층에게 최고 75%의 소득세율을 부과하는 공약 덕분에 대선에서 승리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일사천리로 증세 정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지난 연말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제동이 걸렸다. 최고 소득세율의 기준을 부부 합산 소득 대신 개인 소득으로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프랑스 정부는 법안을 수정해서라도 올해 안에 75% 소득세율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프랑스의 이 같은 조바심에는 연간 재정 적자를 GDP 대비 3% 이하로 유지하라는 유럽연합(EU)의 ‘신 재정협약’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위기의 진원지인 남유럽 국가들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맞추기 위한 해결책으로 부유세 정책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그리스 의회는 지난 11일 야당의 반발에도 증세를 골자로 하는 세제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혁안에는 2만 6000 유로 이상 고소득자에게 최고 45%의 소득세율을 적용하는 것을 포함해 부동산 보유세와 법인세 인상, 모든 과세 대상자의 소득신고 의무화 등도 포함돼 있다. 서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인 포르투갈도 ‘정부가 무장 강도’라는 국민의 비난을 무릅쓰고 새해 들어 평균 소득세를 35%나 올리는 가혹한 긴축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최고 소득세율은 46.5%에서 48%로 높아지고, 여기에 적용하는 과세 기준은 연소득 15만 3500유로에서 8만 유로로 대폭 낮췄다. 유럽에서 가장 튼튼한 경제를 가진 독일에서도 200만 유로 이상의 재산을 가진 부자들에게 재산의 1%를 세금으로 내도록 하는 ‘임시세’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야당에서 제기됐다. EU와의 지위 재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오는 2017년 EU 탈퇴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주장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정부도 올 들어 고소득층 자녀에 대한 육아수당 삭감 정책을 포함해 부유세 부과 방침을 추진 중이다. 부유세 바람은 아시아 지역의 일본에서도 불고 있다. 보수를 기치로 내걸고 복귀한 아베 신조 정권은 연간 소득 1800만엔(약 2억 2000만원)의 고소득자에 대해 적용하는 40%의 최고세율을 45%까지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일본은 경제 호황기의 절정인 1980년대 70%에 달했던 소득세 최고세율을 1990년대 거품경제 붕괴 후 지속적으로 낮춰왔지만, 최근 GDP의 2배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 적자 문제를 풀기 위해 다시 ‘증세 카드’를 빼든 것이다. 부자 증세에 대한 반발도 만만찮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12년 지구촌 부자 4위에 오른 프랑스 최고 갑부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뷔통 회장은 지난해 9월 벨기에 국적을 신청한 데 이어 86억 6300만 달러(약 9조 31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벨기에로 빼돌렸다고 25일 영국 데일리 메일 인터넷 판이 보도했다. 아르노 회장은 ‘가족에 대한 상속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사회당 정부가 추진 중인 부자 증세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는 게 프랑스 언론의 지적이다. 프랑스 ‘국민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도 아르노 회장을 따라 벨기에로 가려다 “단순히 세금을 피하기 위한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벨기에 정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지난 5일 러시아로 귀화해 정식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벨기에는 프랑스와 달리 부자를 겨냥한 세금이 없고, 상속세도 3%로 프랑스(11%)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프랑스 일간 르 몽드에 따르면 지난해 올랑드 대통령의 ‘부자 증세’ 방침에 반발해 벨기에 국적을 신청한 프랑스인이 지난 2011년보다 2배나 늘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부자증세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은 ‘성장 지상주의’를 내세우며 2004년 이후 지속적인 감세를 추진했으며,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깎아주면서 국가 재정이 크게 악화된 탓이다. 미 의회의 싱크탱크인 의회조사국(CRS)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율과 경제성장의 상관관계를 추적한 결과 부자 감세가 경제에 미친 영향이 미미했다”고 밝혔다. 보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낙수 효과’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빈부격차만 늘렸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유럽발 재정위기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부채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미국과 유럽의 증세 드라이브는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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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신(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유명 발레단을 이끌고 있는 보리스(안톤 월브룩)는 우연히 초대받은 파티에서 젊고 아름다운 비키(모이라 시어러)를 만난다. 아마추어는 질색이라던 보리스는 춤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비키를 대하자 생각이 바뀐다. 수석 발레리나가 결혼 때문에 춤을 포기하는 것을 보며, 재능 있는 무용수가 사랑 때문에 예술을 버리는 것은 낭비라고 말하는 보리스. 그는 공연에서 비키의 재능을 발견하고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한편 천부적인 작곡 실력으로 발탁돼 오케스트라를 맡게 된 줄리안(마리우스 고링)에게 동화 분홍신을 각색한 발레 음악의 작곡을 맡긴다. 보리스가 악의를 품고 줄리안을 혹평하자 그는 발레단을 나와 버린다. 보리스는 태연한 척하면서도 줄리안과 함께 있으면 위대한 무용수가 될 수 없을 거라고 경고하지만 비키는 줄리안과의 결혼을 택한다. ■독립영화관(KBS1 토요일 밤 12시 35분) 공부 잘하는 박진주는 전교 1등을 밥 먹듯이 하는 모범생이지만 이름만 같은 마진주는 전교 꼴등을 도맡아 하는 귀여운 말썽꾸러기이다. 어느 날 열심히 공부하던 박진주는 글자와 숫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방안을 가득 채우는 환영을 보게 되고 병원에 입원한다. 그곳에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은 마진주를 만나게 된다(진주는 공부 중). 갈대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둑길을 차은이가 달리고 자전거를 탄 영찬이가 뒤따른다. 달리는 걸 좋아하는 차은이는 육상부인데 육상부가 없어지고 육상부 아이들은 도시로 전학을 간다고 한다. 차은이도 아빠에게 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아빠는 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달리는 차은). ■라스트 프로포즈(OBS 일요일 밤 11시 15분) 명석한 두뇌에 뛰어난 외모의 샘(유덕화)은 홍콩 최고의 백만장자 사업가다. 모든 것을 가진 그이지만, 세 번의 이혼이 말해주듯 사랑만큼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한편 샘은 사업차 방문한 마카오에서 가난하지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당차고 매력적인 클럽 댄서 밀란(서기)을 만나 첫눈에 반한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달콤한 사랑을 키워가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이들의 교제 사실이 알려지자 홍콩 사교계는 발칵 뒤집힌다. 이로 인해 밀란이 상류층 여자로서의 덕목을 배우는 동안, 샘 주변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결국 샘은 주위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혼전 계약서를 내밀고 상처받은 밀란은 샘을 떠난다.
  • [시론] 기본에 충실한 대입제도의 개혁을 바라며/정끝별 명지대 교수·시인

    [시론] 기본에 충실한 대입제도의 개혁을 바라며/정끝별 명지대 교수·시인

    “교과서는 왜 그리 많고 전형은 또 왜 그리 많은 건데? 우리 땐 교과서 하나에, 학력고사 하나면 됐잖아. ‘그것만 하면 된다’고 확신하는 순간 공부할 놈들은 공부하게 되는 거 아냐? 가난하거나 놀았던 놈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고.” “그러게. 그렇게 ‘다양하게’ 뽑아서 대학에서 가르치는 건 뭔데? 대학 나와 취직할 때 입사기준은 또 뭔데? 결국은 출신학교와 영어점수 아냐?” “어떻게 해도 똑같아, 서연고-서성한이-중경외시, 이렇게 대학서열을 외워야 하는 한 학연이 ‘빽’이고 학벌이 모든 척도가 될 수밖에 없어.” 2013년 대입전형이 끝나가는 이즈음 고3 학부모들의 안부(!)를 물으며 동병상련했던 얘기들이다. 뭐든 하나만 잘하면 대학에 간다? 3000개가 넘는 대입전형들이 내세우는 명분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간다. 3년간의 학생부(내신), 수능, 구술면접, 논술/적성평가, 자기소개서(자소서) 및 추천서와 그에 부합하는 스펙들 중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수시 6회, 정시 3회나 응시할 수 있는데 특정 전형에 ‘몰빵’하는 것은 도박과도 같다. 입시를 ‘선도’하는 서울대의 경우 정원의 80%를 입학사정관제에 의한 수시로 뽑겠다고 한다. 학생부, 자소서 및 추천서와 그를 입증하는 증빙자료들을 제출하고 수능최저등급이 있으니 그것들을 죄다 반영한다는 것일 테고 그것들의 반영비율이나 기준 또한 안갯속이다. 설상가상 수능성적 발표 후 구술면접을 실시하다 보니 수능점수까지 본다는 괴담이 도는 실정이다. 다양한 전형과 여러 번의 응시 기회를 통해 대학에 간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많은 전형들 중 자신의 조건에 적합한 전형을 찾을 수 있는 정보자료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좋은’ 대학에 가려면 입시컨설팅 ‘전문가’의 상담은 물론이고 전형에 맞는 사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입시에 ‘정보’ ‘전략’ ‘첩보’ 등의 꼬리표가 붙고 있으니 걸음걸음이, 단계단계가, 전형전형이 죄다 돈싸움이다. 여기서 밀리면 자칫 맞는지 안 맞는지, 붙을지 떨어질지 암중모색인 채로 선택하기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수험생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당락 결과를 납득하기 어려워하다 보니 애꿎은 재수생들만 양산하게 된다. 기회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입시는 찐 고구마나 삶은 호박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저기 찔러 보다 떨어지면 정보 부족의 탓으로 돌리게 되는 ‘입시로또’, ‘입시도박’이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시의 전형 수, 선발비율, 응시 횟수 및 기간 등을 대폭 줄여야 하며 평가기준 또한 선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무엇보다 교과과정을 넘어서는 논술/적성, 다기다종의 스펙들이 평가기준이 되는 전형들은 전면 재고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전형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이 수능최저등급을 두거나, 수능성적 발표 후 전형을 실시하거나 합격자를 발표하는 걸 보면 결국은 수능을 중시한다는 방증이다. 이럴 바에야 메인 입시는 정시가 되어야 하고, 그 기준은 수능성적이 되어야 한다. 수능성적이야말로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객관적인 평가기준이자 선택기준이 아니겠는가. 너무 많은 대학, 너무 많은 대입전형과 기준, 너무 많은 응시 기회가 오히려 독이다. 피로한 미로 같고 어디로 튈지 모를 럭비공 같다. 대학이 그렇게 많으니 나만 못 가면 낙오자고, 전형과 응시 기회가 그렇게 많으니 나만 떨어지면 전략 실패거나 불운이다. 대학과 사교육 시장의 배만 불리는 이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운 대입제도가 개혁되지 않고는 세계 출산율 최하위, 학교폭력, 청소년문제, 부동산 거품, 지역발전의 불균형과 같은 고질적 문제들 역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바라건대 백년대계는 차치하고 십년대계로라도 기본과 근본에 충실한 대입개혁정책이 모색되기를 희망해 본다.
  • 그땐 개천서 용 났지… 개혁이란 이름으로 시험제도 없애면 안돼

    그땐 개천서 용 났지… 개혁이란 이름으로 시험제도 없애면 안돼

    “태조에서 명종까지 조선 전기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개방적인 사회였다. 또 과거제도는 실력을 중요하게 평가했지만 사회통합을 위해 지역안배에도 철저했다.” 평생 조선 역사를 연구해 온 원로 국사학자 한영우(74)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지난 23일 이화여대 학술원장실에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태조~선조’(지식산업사)를 펴내고 이 책을 관통하는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한 교수는 태조에서 고종까지 조선 500여년에 걸쳐 배출된 문과급제자 1만 4615명 전원의 신분을 조사해 급제자 수와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 인구 대비 급제자 비중, 지역별 통계 등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았다. 평민 등 신분이 낮은 급제자가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태종(50%), 세종(33.47%), 문종~단종(34.63%), 세조(30.42%), 예종~성종(22.17%), 연산군(17.13%), 중종(20.88%), 명종(19.78%), 선조(16.72%) 등으로 조사됐다. 1392년부터 1800년(태조~정조)까지를 모두 계산하면 40.40%가 나온다고 했다. 한 교수는 “조선 중기인 16세기 중엽부터 비로소 문벌이 나오고 권력의 독점현상이 나타나 18세기 실학자들이 비판한다. 그런데 실학자의 비판을 조선 전 시대로 확대하는 것은 오류다. 또한 문벌조차도 법적으로 지위를 보장한 것이 아니라 사회 관습적이었는데, 그것은 과거제도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벼슬에 올랐다고 과거에 통과하지 못한 아들이 벼슬을 할 수는 없었다. 조선이 개국하고서 150년 정도 지난 뒤 나라의 틀이 잡히니까 기존 벼슬아치들이 유리했지만, 과거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관직을 받을 때 프리미엄이 있었다. 문벌이 생겼다고 해도 평민이 과거시험을 치지 못하거나 급제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인 ‘방목’과 족보인 ‘대동보’, 왕조의 공식기록인 ‘조선실록’ 등 자료를 꼼꼼히 조사하고 서로 비교해 집필하느라 5년의 세월을 쏟아부었다. 조선 시대 양반의 신분과 특권은 세습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한미한 집안 출신도 대거 과거에 합격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의 과거급제자는 광해군 시대에 가장 낮은 수치를 찍고 숙종 대는 30%, 정조 이후에는 50% 안팎에 이르다가 고종 대에 58%까지 올라갔다. 고종 대에 58%는 부정부패로 과거제도가 이미 허물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신분제도가 다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 주는 통계다. 과거제도가 타락한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고종 시대 때 이미 개방된 사회가 됐다. 흔히 조선의 신분제도를 1894년 갑오개혁 때, 일 제국주의가 무력으로 무너뜨렸다고 하는데 이미 그전에 무너졌다는 것을 통계가 보여 주고 있다. 요즘 한국에 ‘뉴라이트’라는 학자들이 대한민국의 근대화가 일제 덕분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역사인식이 형편없고, 한국의 역사를 허무주의적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역량은 이번 과거 급제자 통계에서 나타나듯이 우리 사회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힘에서 나왔다. 황무지에서 조선이 근대화한 것은 아니다.” 과거 급제자들의 지역적 통계도 내놓았다. 영·정조시대에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사색탕평만이 아니라 지역, 계층, 사상, 문화탕평을 시도했다. 범죄인과 노비만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지 첩의 자식인 서얼, 지역의 이방 등 향리 출신 과거 급제자도 나왔다. 당시 조선사회는 과거에 합격만 해도 엄청나게 신분이 상승했다. “조선후기에 평안도 출신 급제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경상도가 1등이고 평안도가 2등인데, 급제자 수는 평안도 출신이 1등이다. 특히 평안도 정주 출신들이 많은데 개화기에 오산학교가 있던 곳이다.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산업화시기의 민주화 운동가 중에 정주출신이면서 오산학교 출신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이순훈이나 함석헌 등이다. 반면 홍경래의 난도 정주에서 일어났다. 반란도 일어나고, 과거급제자도 많았는데 왜 그랬는지는 앞으로 연구해 봐야 할 일이다.” 한 교수는 “과거제도의 정기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로 구성되는데 초시 때는 지역별·인구별 안배를 철저히 해서 270명을 뽑고 나중에 33명의 급제자를 뽑을 때는 지역안배보다 능력을 봤다”면서 “지역안배는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270명을 뽑는 초시에 합격만 해도 지역에서는 ‘박 초시’ ‘이 초시’하면서 살 수 있었다. 최근 사법시험제도의 폐해를 없앤다며 로스쿨제도를 도입한 것과 관련해 “시험은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시험이 아니라면 개천의 미꾸라지들은 승천할 수가 없다. 가진 사람들이 더 특혜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교육비가 엄청 들어가는 로스쿨에 집안 좋은 애들이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같으면 나도 서울대에 못 갔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지으면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덧붙였다. 한 교수는 “선비정신, 양반정신의 키워드는 공익정신이다. 오늘날은 이런 것도 무너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패밀리 이기주의’로 가고 독식하려고 한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스템을 ‘개혁’이란 이름으로 없애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레이시아-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말라카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평일 낮, 말라카 거리는 왁자지껄한 아이들 무리로 활기에 차 있다. 우리가 경주에 가서 역사를 배우듯,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말라카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는다. 물론 수학여행 온 아이들에게는 수백년 전의 역사유적도 그저 오래된 놀이터일 뿐이지만 말이다. 말라카 강변에 펼쳐진 책 한 권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달리면 말라카에 도착한다. 지도상에서 이 도시는 말레이반도 왼편에서 인도양을 향하고 있다. 거대한 함선과 포탄을 앞세운 14세기 정복자들도 말라카를 거쳐,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섬 사이 좁은 물길을 지나야만 더 깊숙한 동쪽에 닿을 수 있었다. 말라카는 그들이 처음 발을 디딘 동양의 땅이었고 동양과 서양, 거대하고 상이한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과거 수백년간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무역항이었다. 무역량으로 따지면 수에즈 운하에 비견됐을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수심이 너무 낮아져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여행객들도 간척개발이 한창인 해변보다 오래된 가옥이 늘어선 말라카 강변의 분위기를 더 선호한다. 말라카강 리버크루즈는 40여 분 동안 9km에 이르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잘 꾸민 액세서리 상점, 한적한 노천 카페들 사이사이 중국풍 홍등을 매단 집들이 보이고 화려한 원색의 벽화가 펼쳐진다. 먹음직스런 열대 과일과 음식부터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인도, 중국, 아랍계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까지, 움직이는 배 안에서 보면 그 자체가 한 권의 그림책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건 나무로 지은 붉은 지붕의 전통가옥촌 ‘캄풍모텐Kampung Morten’이다. 우리나라 한옥에 해당하는 것이 캄풍인데 바닥이 지상에서 1~2m 높이에 있고, 천장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비가 많이 와도 물에 잠기지 않고, 통풍이 잘돼 위생적이라고 한다. 1922년 지은 빌라 센토사Villa Sentosa는 그중 가장 오래된 집인데 말레이시아 국기를 내걸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인 가옥이지만 집주인이 평생 동안 공들여 모은 골동품과 개인 소장품을 전시해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저녁에는 불을 밝힌 노천 카페에서 분위기에 취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한차례 소나기 후, 불어난 강물이 일렁이는 모습도 여기선 한없이 매력적이다. 강변에는 맹그로브 나무가 울창하다. 운이 좋은 날에는 반딧불이나 월광욕을 하고 있는 도마뱀도 볼 수 있다. 강변의 카페와 연결되는 존커 스트리트Jonker Street와 히런 스트리트Heeren Street는 꼭 들러 보길 권한다. 존커 스트리트에는 골동품점과 작은 미술관, 특색 있는 식당들이 많다. 매주 금토일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는 벼룩시장도 열린다. 존커 워크 스트리트 바로 옆 골목이 히런 스트리트다. 저렴한 호텔과 예쁜 네덜란드풍 건물이 많다. 네덜란드어로 ‘존커’는 하인을, ‘히런’은 주인을 뜻한다. 존커 거리는 히런 거리의 부자들을 위해 일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 보는 말라카 해협의 모습. 시가지와 항구가 한눈에 보인다 2 존커 워크 스트리트는 골동품점, 기념품점, 카페와 술집이 늘어선 전형적인 여행자들의 거리다 3 말라카 리버크루즈 는 9km에 이르는 말라카 강줄기를 따라간다. 노천카페와 전통가옥, 벽화가 말라카의 분위기를 전한다 4 비오는 늦은 밤, 조명을 밝힌 말라카 강은 한없이 매력적이다 5 재즈가 흘러나오는 존커 워크 스트리트의 라이브 카 ▶travie info 말라카 리버크루즈Melaka River Cruise 매일 오전 9시부터 저녁 11시30분까지 운항한다. 어른 기준 15RM으로 저렴한 편이며, 왕복 40분 정도 소요된다. 크루즈 선상 공연이 포함된 티켓(Bot VIP/ 매주 일요일 오후 8시~오후 1시/어른 기준 30RM), 하루 동안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는 프리패스 티켓(Ho-Ho Service/ 오전 9시~밤 11시30분/어른 기준 30RM)도 판매한다. 해양박물관 앞에서 승선하면 된다. www.ppspm.gov.my 메나라 타밍 사리Menara Taming Sari 전망대 80m 높이까지 올라가는 메나라 타밍 사리 전망대에서는 말라카 시가지와 항구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360도 회전식이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사방의 정경을 볼 수 있다. 푸른 말라카강과 붉은 지붕 가옥, 세인트 폴 언덕의 옛 유적지들로 대표되는 육지 모습과 달리 바닷가는 부산하게 변화 중이다. 연륙도에는 마리나 리조트가 들어섰고, 갯벌에는 간척공사가 한창이다. 낮은 곳에선 볼 수 없던 말라카의 현재진행형 모습이다. 개장시간 오전 10시~밤 10시 입장료 어른 기준 RM20 홈페이지 www.menaratamingsari.com 1 15세기 말라카 왕궁의 모습. 바닥이 지면에서 1~2m 떨어져 있고, 나무로만 지어진 점이 전통적인 말레이시아 건축 구조를 보여 준다 2 도시 이름의 어원이 된 말라카 나무 3 네덜란드 통치 시기 공관으로 쓰였던 스태이더스 빌딩은 현재 말라카 민족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4, 5 포르투갈의 흔적은 볼 수 있는 세인트 폴 성당. 벽채만 남은 모습에서 역사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6 말라카는 한때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동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교역량은 수에즈 운하와 비견됐을 정도다 7 말라카에서 꼭 경험해 봐야 할 인력거 ‘트라이쇼’. 화려한 꽃과 음악으로 장식하는 게 특징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가 있는 언덕 말라카는 아시아에서 가톨릭의 세례를 받은 첫번째 도시이며, 400년간의 식민 지배 속에서도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 생명력의 땅이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는 최초의 왕조가 탄생한 곳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말라카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건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부터다. 말레이,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흔적이 한 덩어리를 이룬 도시는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여기에 이주 중국인들이 말레이 사람들과 결혼해 낳은 ‘페라나칸’의 문화까지 더해져 이색적이다. 본격적인 말라카 시간 여행은 독립기념관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수마트라섬 스리비자야 왕국에서 건너온 파라메시바라Paramesvara왕자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곳이 바로 이 나무 아래 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궁지에 몰린 아기 사슴이 자신의 사냥개를 물리치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작은 힘으로도 용맹하게 맞서면 큰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것. 나무의 이름을 딴 말라카왕국이 건국된 것이 1402년인데,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말레이시아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독립기념관 앞 말라카 나무 주변에는 포르투갈의 요새와 15세기 말라카왕궁The Melaka Sultanate Palace이 있어 여러모로 역사 여행의 시작점이라 할 만하다. 파라메시바라 왕의 바람대로 작은 왕국 말라카는 전세계의 큰 도시들을 상대하며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말라카 사람들은 해상 교역 활동에 관련된 ‘말라카법’을 만들어 교역 기반을 다졌으며, 앞다퉈 이슬람교로 개종해 멀리서 온 아랍 상인들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말라카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국 백여 년 만인 1511년 포르투갈에 의해 멸망했고 뒤이어 1641년 네덜란드, 1795년부터는 말라카를 포함한 말레이시아 전역이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포르투갈은 당시 황금보다 더 귀했던 향료를 독점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왔는데,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발견한 지 겨우 9년 만의 일이다. 그들은 말라카를 시작으로 아시아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 말라카를 점령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은 안전한 거주지 겸 요새 ‘에이 파모사A’Famosa’를 짓는 것이었다. 원주민 노예를 동원해 술탄의 왕궁과 왕릉, 모스크를 철거하고, 성벽 두께가 3m나 되는 요새와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형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뒤이은 네덜란드와 영국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것은 성문Porta de Santiago과 성당St.PaulChruch 한 채뿐이다. 성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언덕 위로 벽채만 남은 세인트폴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은 가톨릭을 처음 포교한 성 자비에르와 관련된 일화로 유명하다. 자비에르는 말레이반도와 일본, 중국을 오가며 가톨릭을 알리는 데 힘쓰다 1552년 중국 광저우에서 사망했다. 시신은 말라카에서 6개월간 안치된 후 그의 첫 해외 포교지였던 인도 고아로 가게 됐는데, 관을 열어 보니 전혀 썩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자비에르가 바다에 십자가를 던지자 사나운 풍랑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는 일화도 있다. 얼마 후 어부가 같은 자리에서 게를 건져올렸는데 신기하게도 자비에르의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말라카에서는 등에 십자 모양의 무늬가 있는 게는 성스럽게 여겨 잡지 않는다. 에이파모사 요새는 전체적으로 붉고, 거칠게 풍화된 듯 보인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녹이 슨 듯 보이는데, 철성분이 함유된 홍토 벽돌로 만들어서 그렇다. 이 벽돌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쓰인 것과 같은 종류로 수백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요새 아래쪽에는 멀리서도 붉은 벽이 눈에 띄는 스태이더스The Stadthuys 빌딩이 있다. 원래 네덜란드 총독의 공관이었는데, 현재는 말라카 민족박물관이자 랜드마크로 사랑받고 있다. 말라카 이전부터 식민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유물과 옷차림을 전시하고 있다. 네덜란드식 거실과 당시 사용했던 생활용품들도 볼 수 있다. 베이커리에서는 갈색빵을 파는데 네덜란드 점령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탄 빵을 나눠주었던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주말에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다양한 군복 코스프레도 볼 수 있다. 스태이더스와 맞붙어 있는 크라이스트 처치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8세기에 세워졌다. 거대한 대들보와 시계탑에서 네덜란드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다. ▶travie info 트라이쇼Trishaw 스태이더스 앞에는 말레이시아와 페낭에서만 볼 수 있는 인력거 ‘트라이쇼’가 줄지어 서 있다. 평범한 인력거가 아니다. 오디오에서는 ‘강남스타일’을 비롯해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지붕이며 좌석을 각종 꽃과 인형, 깃발로 치장하고 있다. 잘나가는 트라이쇼는 광고판까지 달고 성업 중이다. 트라이쇼를 타고 말라카의 골목골목을 돌아보다 보면, 아직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보석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트라이쇼┃이용요금 시간당 40RM(30분 25RM), 어른 2인까지 탑승 가능 에이파모사┃입장료 무료 말라카왕궁┃개장시간 오전 9시~오후 5시30분 입장료 어른 기준 2RM 스태이더스┃개장시간 오전 9시~ 오후 3시30분(금~일요일은 오후 9시까지) 입장료 어른 기준 5RM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이 나라가 사는 법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레이시아에서 진한 친근감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나라에선 한국인의 영어가 유독 잘 통한다. 우리나라 콩글리시 버금가는 게 바로 말레이시아의 ‘맹글리쉬’.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말레이시아에서는 한 가지 언어로 이뤄지는 완벽한 의사소통보다 다양한 언어로 이뤄지는 유연한 의사소통이 더 일반적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한 가지를 고집하기보다 여러가지를 포용한다. 가장 전통적인 것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재구성하고, 감추고 싶은 역사를 가장 매력적인 역사로 소개한다. 에펠탑, 자유의 여신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타워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을 본떴고, 쇼핑몰을 활보하는 여자들은 검정색 대신 온갖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치장한 차도르를 둘렀다. 이곳에서 이슬람 전통은 속박의 족쇄가 아니라, 가장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된다.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이나 광장 이름에서 독립을 뜻하는 ‘메르데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는데 매년 8월31일 독립기념일에 성대한 축제를 치를 정도로 독립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반면 쿠알라룸푸르와 말라카 곳곳에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통치 유적들이 버젓이 관광상품화 돼 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부러 이런 곳들을 찾기도 한다. 식민 역사에 대해 예민한 우리로서는 이런 모습이 양면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 모습이 너무 양면적이지 않은지 묻자 나이 지긋한 관광가이드 노마가 적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용서에 관대한 편이예요. 아마 종교의 영향도 크겠죠. 무엇보다 우리는 이제 식민시대에 아무런 악감정도 없어요. 역사 그대로의 과거에 얽매어 있기보다 새롭게 보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거지요.” 오랫동안 하나의 영토를 다양한 무리의 사람들과 공유하며 살아온 역사 속에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포용을 배웠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종교와 다른 피부색, 다른 언어, 다른 가치관을 인정하는 데 가장 뛰어난 국민이다. 그리고 그런 관용적인 태도 속에는 다양한 삶의 어떤 형태든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강인함이 있다. “나는 10년 동안 트라이쇼 운전을 해왔어요. 운전 기술로 치면 말라카에서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거 알아요? 말라카 최고의 직업이 바로 트라이쇼 운전사라는 거. 난 매일 ‘이녀석’과 함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새로운 곳에 대해 알아 가죠. 난 정말 이 일이 좋아요.” 적도 부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매일 12시간씩 인력거 운전을 하는 만MAN 씨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말라카에서 트라이쇼를 타며 만씨와 함께한 시간은 유쾌함으로 가득했다. 처음 만나는 말라카의 신선한 풍경 때문이기도 했고, 비온 뒤 씻은 듯 갠 하늘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 많은 자전거 운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룩한 그의 배와 넉넉한 웃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화려하게 뽐낸 ‘이녀석’의 아늑한 품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전거와 만씨 자신의 이름에서 따온 ‘베크만BECHMAN’. 그것은 어느새 만씨 자신이 돼 버린 녀석에게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에디터 트래비 글 Travie writer 도선미 사진 Travie photographer 지성진 취재협조 말레이시아관광청 www.mtpb.co.kr ★MALAY FOOD & SWEET DESERT MALAY FOOD 말라카의 음식 계보는 복잡 다단하다. 인도,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의 조리법이 말레이시아 특유의 향신료와 만나 새로운 퓨전 요리로 탄생했다. 달콤한 ‘자연주의’ 디저트도 말라카에선 꼭 맛봐야 한다. 단맛을 내는 데 코코넛 우유와 팜나무 수액으로 만든 흑설탕 ‘굴라Gula’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인공적이지 않고 몸에 좋다. 입 안에 감도는 두 가지 맛 ‘뇨냐푸드NONYA FOOD’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결혼해서 낳은 2세를 남자는 바바, 여자는 뇨냐라고 한다. 뇨냐음식은 말레이시아와 중국음식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데, 아마 혼혈 가정 내 다양한 입맛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으리라. 주로 중국 조미료에 코코넛 우유, 말레이 향료를 함께 넣어 조리한다. 태생이 가정식 요리기 때문에 겉보기에 매우 단출하다. 레스토랑에서 먹더라도 휴대용 찬합에 담겨 나온다. 튀김요리인 바이띠Baidee, 중국식 야채볶음인 찹차이Chap Chye, 커리잎을 넣어 구운 치킨IncheKabin 등이 대표적이다. 뇨냐 음식은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말라카와 페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데, 말라카식은 코코넛 우유를 많이 사용해 달달한 반면, 페낭식은 태국의 영향으로 매운 고추가 사용되는 점이 다르다. 뇨냐 식당은 존커 스트리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향에서 맛보는 원조 ‘아쌈페다스ASAM PEDAS’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아쌈페다스의 고향이다. 아쌈은 타마린드 열매즙을, 페다스는 ‘매운’을 뜻한다. 파인애플, 스타프루트 등 열대과일, 아쌈, 토마토, 절인 갓으로 만든 소스에 생선과 채소를 넣고 조리하는데, 겉보기엔 생선찌개에 가깝다. 맛은 전혀 비리지 않고 깔끔해 카레처럼 국물을 밥에 얹어 먹으면 맛있다. 아쌈페다스를 맛보고 싶다면 카페 루마말라카KafeRumah Melaka를 추천한다. 다양한 말레이, 말라카 전통 음식으로 유명하며, 20년 된 캄풍의 풍취도 느낄 수 있다. 영업시간 오전 8시~오후 7시, 일요일 제외(영업시간 이후는 사전 예약 필수) 홈페이지 www.keferumahmelaka.com SWEET DESERT 코코넛밀크의 감미로운 맛 ‘사고Sago’ 바바 뇨냐들이 어렸을 때부터 즐겨먹는 간식이다. 사고팜 나무에서 나오는 전분을 하루동안 물에 담그면 젤리처럼 되는데, 이걸 동그랗게 뭉쳐서 은단만한 알갱이로 만들고, 코코넛 우유에 넣어 먹는다. 여기에 과일과 팜나무 설탕인 ‘굴라Gula’를 넣으면 매우 고소하고 달콤하다. 굴라는 메이플 시럽과 같은 방법으로 팜나무에서 추출한 설탕으로, 디저트에 주로 사용된다. 말레이시아식 팥빙수 ‘첸돌Cendol’ 첸돌은 말라카의 대표적인 디저트다. 얼음에 팥을 올리는 것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팥빙수와 흡사하다. 다른 점은 연유 대신 코코넛 밀크를, 시럽 대신 굴라를 사용한 자연식이라는 것. 특히 향료의 하나인 판단잎 즙으로 만든 녹색 젤리를 짧게 채썰어서 넣는 게 특징이다. 이 젤리는 해독 성분이 있어 몸에도 좋다. 독특한 향을 지닌 두리안을 좋아하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첸돌에 두리안을 토핑해서 먹기도 한다. 존커 스트리트 입구에 있는 ‘산슈공San Shu Gong’의 첸돌이 유명하다. ▶travie info 말라카 가는 방법 인천에서 말레이시아항공, 에어아시아항공, 싱가포르항공 등을 이용해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까지 이동한 후 현지에서 버스, 기차를 타면 편하다. 1 쿠알라룸푸르 버스터미널 TBSTerminal Bersepadu Selatan에서 말라카행 버스 이용. 1시간45분 소요되며 매일 7:00~23:00 사이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12.3RM. www.tbsbts.com.my 2 쿠알라룸푸르 기차역KL Central에서 싱가포르 우드랜드Woodland행 열차South Line를 이용하면 된다. 반대도 가능하다. 하지만 하루에 1대만 운행하기 때문에 다소 불편하다. 쿠알라룸푸르발 말라카행은 오전 9시 출발, 2시간 30분 소요, 23RM. 싱가포르발 말라카행은 오후 1시45분 출발, 4시간 소요, 38RM. www.ktmb.com.my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김문이 만난사람] 연극 데뷔 50주년 맞는 이 시대의 어머니 손숙

    한 시대의 어머니였다.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한 채 참으로 모진 ‘여자의 일생’을 살았다. 글 공부는 근처에도 못 갔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억지 결혼을 했다. 남편의 바람기와 혹독한 시집살이, 게다가 자식의 죽음까지 가슴이 찢어지듯 처절하게 감내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손녀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배우고 죽은 남편을 따라 저승으로 가면서 유리창에 자신의 이름을 쓴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현대사를 눈물로 겪은 어머니였다. 연극 ‘어머니’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연극은 1999년 2월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매년 공연되고 있다. 그래서 연극 ‘어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초연 당시 어머니 역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고 그해 5월 러시아 타캉가극장에 초청돼 ‘마마’라는 환호 속에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공연 때 한국 기업가한테 격려금을 받았다는 구설수로 32일 만에 환경부 장관직을 그만두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손숙(69)이다. 흔히 배우들은 타인의 삶을 산다고 한다.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의 역할을 주로 맡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대에서 살아온 지 50년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손씨는 다음 달 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하용부, 윤정섭, 김미숙, 김철영 등과 함께 오른다. 이 연극이 끝나면 오는 4월 임영웅 연출가와 함께 극단 산울림에서 치매 노인을 다룬 신작 ‘나의 황홀한 실종기’에 출연한다. 또 7월에는 예술의전당에서 손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공연한다. 10월쯤에는 극단 신시와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손씨는 연극 공연에 항상 남다른 의욕을 보이지만 올해만큼은 더욱 바쁘고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 같아 지난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카페에서 잠시 만났다. 단발머리에 편한 티셔츠 차림, 그리고 소탈한 웃음이 인상적이다. 50주년을 맞는 소감부터 물었더니 “글쎄 바쁘게 살다 보니 인생의 반은 다른 인생으로 산 것 같다”고 웃으면서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연극으로 견딜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서게 됐다. 고스란히 내 인생만 살았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관객들의 박수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특히 ‘어머니’는 연극 인생 중 자신에게 각별한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어머니’ 덕분에 자신의 고향인 밀양에서 매년 연극제가 열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10여년 동안 늘 밀양연극제 폐막작으로 무대에 오르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이를 보려는 지역 주민들이 객석을 꽉꽉 채운다. 자연스럽게 고향 시절 얘기가 먼저 나왔다. “밀양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6·25가 발발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쫓겨나고 대신 육군병원으로 바뀌었지요. 그러는 바람에 입학식만 본교에서 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강변 솔나무나 들판 돌멩이 위에 칠판 올려놓고 공부하고 겨울에는 창고를 빌려서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전쟁과 가난이라는 환경 속에서 우유 가루와 학용품 등 구호물자를 실은 미군 트럭이 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말 그대로 춥고 배고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것이 큰 축복으로 남는다고 술회한다. 또한 밀려오는 피란민들을 보면서 전쟁의 참상이 어떠한지 생생하게 목격하게 됐다.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녔다. 그러다가 부산여중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서울로 왔다. 잠시 어머니를 회고한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대단했습니다. ‘여자도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여자의 일생이 힘들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요. 어머니는 16살에 결혼했지만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버리고 시집살이를 혼자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자식들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저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오게 됐습니다.” 서울로 온 손씨는 돈암동에 살면서 시골 아이 취급을 받아 처음엔 적응이 힘들었다. 하지만 풍문여고에 진학하면서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 나갔다.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기도 했다. 문예반장을 맡아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황석영·조해일 등 여러 학생들과 문학의 밤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손숙 학생은 작가가 되려고 했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와 폴 발레리 등에 심취했다. 종로2가에 있는 음악홀에서 국내외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얘기하는 것이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게 느껴졌다. 매년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신춘문예’에도 몇 차례 도전할 만큼 작가 지망에 대한 열의를 가졌다. 그는 살아오면서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의 책을 썼는데 이 또한 그의 문학적 바탕에서 이루어졌다. 그 문학소녀는 고3 어느 날 서울 남산드라마센터에서 유진 오닐의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접하게 됐다. 이해랑 선생이 연출하고 황정순·장민호·여운계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문학소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다. 갑자기 찾아온 연극의 전율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고려대 사학과 재학생이던 그는 1963년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스페인 작가 알라르콘 이 아리사의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돼 꿈에 그리던 남산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랐다. 남자 주인공은 당시 고대극회 선배인 김성옥(77·목포시립극단 예술감독)씨가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사랑이 시작돼 2년 뒤 결혼하게 된다. 1968년에는 극단 동인극장에 들어가 유진 오닐의 ‘상복을 입은 엘렉트라’에서 주인공 엘렉트라 역을 맡아 직업 배우로 연극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극단 산울림 창단(1969년)에 참여해 평생 스승으로 모시는 임영웅(77) 연출가와 인연을 맺었다. 또한 2년 뒤에는 국립극단에 들어가 이해랑(1989년 작고) 선생을 만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연극 인생을 회고하면서 “산울림과 국립극단에서 청춘을 다 바쳤다”고 말했다. 잊지 못할 작품으로는 산울림 시절의 ‘그 여자에게 옷을 입혀라’, ‘홍당무’, ‘바다의 침묵’ 등을, 국립극단 시절의 ‘파우스트’, ‘간계와 사랑’, ‘천사여 고향을 보라’ 등을 꼽았다. 그는 “15년 동안 지낸 국립극단 시절에는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나름대로 좋은 면도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제약과 작품의 한계도 많았다”면서 “이런 분위기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맞지 않아 자꾸 반발했더니 미운털이 박히고 나중에는 싸움닭이 되더라”며 웃었다. 다시 현재 진행형인 ‘어머니’로 화제를 돌렸다. 환경부 장관과 맞바꾼 연극이기 때문이다. 하여 당시 상황을 물었다. “러시아 공연 1주일 전에 장관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체결된 국가 간 약속을 도저히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공연을 강행했지요. 평생 잊지 못할 무대였습니다. 관객들이 15분 동안 ‘마마’를 외치며 기립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무대에 올라온 기업인들로부터 액수도 모른 채 격려금을 받았지요. 단원들에게 나눠 주고 지방 공연을 하지 못해 위약금으로 썼는데 그게 뇌물이라고 하더군요. 장관직 사퇴 후 너무 억울해서 열흘 동안 잠도 못 자고 울었습니다.” 마음을 달래기 위해 미국 그랜드캐니언으로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녔다. 얼마 후 귀국한 그는 임영웅 선생한테 위로의 전화를 받고 다시 연극무대로 돌아오게 된다. 돌이켜 보면 ‘어머니’로 시련을 겪었지만 오히려 ‘어머니’로 빨리 제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동료 배우들이 TV드라마로 넘어갈 때에도 오로지 연극무대를 지켰다. 하지만 먹고살기는 여전히 빡빡했다. 게다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한 후 많은 빚을 졌다. 때마침 라디오 진행 섭외가 들어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989년부터 MBC ‘여성시대’를 진행하게 됐다. 이때 다양한 청취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다. 여성과 환경문제 등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뱉어 냈다. “연극은 관객과 같이 호흡하는 현장 예술입니다. 배우와 관객이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호흡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또 스크린이나 TV드라마와 달리 관객으로부터 치유받을 때도 많지요. 연극이 열악한 환경이긴 하지만 그걸 다 초월해 연극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연극 인생을 다시 회고하면서 ‘담배 피는 여자’, ‘그 여자’, ‘셜리 발렌타인’ 등 모노드라마를 잊지 못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선 지금 자신의 인생 모노드라마를 잠시 떠올리는 것 같다. 앞으로의 인생 모노드라마는 어떻게 이어 나갈까.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연극을 하지 않겠느냐. 연극을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관객을 만나는 일이 매우 즐겁다”고 말하고, 웃으면서 그런 관객을 위해 연습하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연극인 손숙은 19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여중 시절 서울로 왔다. 풍문여중과 풍문여고를 졸업했다. 고려대 사학과 1학년 때 개교 60주년 기념 연극 ‘삼각모자’의 주인공으로 데뷔했다. 1969년 극단 산울림 창단 멤버로 참여했고 1971년 국립극단에 입단, 고 이해랑 선생 등 당대 최고의 연출가들과 작품을 함께 했다. 1989년 MBC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20여년 동안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199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맡았고 환경부 장관을 지냈다. 이 밖에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2002)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활화산’(1975), ‘객사’(1979), ‘어머니’(1999)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연기상을 세 차례 수상했다. 이 밖에 대한민국연극제 여우주연상(1986), 이해랑연극상(1997), 은관문화훈장(2012)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울며 웃으며 함께 살기’, ‘손숙이 만난 사람’, ‘여성수첩’, ‘섬마을 소년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있다.
  • [열린세상] 포니 1호차는 어디에?/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 부원장

    [열린세상] 포니 1호차는 어디에?/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 부원장

    외환위기로 나라 경제가 휘청대던 1998년 3월 독일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전자박람회 ‘CEBIT’에서 한국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MP3 플레이어(MP3P) ‘엠피맨’이 최우수 멀티미디어로 선정됐다. 이후 한국은 MP3P 종주국으로 군림했고, 빌 게이츠 회장은 미국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 기조 연설에서 아이리버의 MP3P를 ‘디지털 라이프를 바꿀 제품’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스마트폰의 ‘원조’ 격인 PDA폰 ‘포즈’(POZ)가 대한민국 히트 상품으로 선정된 바 있다. 애플이 2007년에 아이폰으로 대중적 스마트폰의 지평을 열기 몇 년 전부터 우리는 이미 ‘원조 스마트폰’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나라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을 제패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MP3, 카메라, 무선통신,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그동안 진화를 거듭해 온 우리 산업기술이 총체적으로 집약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대기아차는 세계 시장점유율 9%를 넘기며 글로벌 5위로 올라섰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고철로 조립 자동차를 만들고, 1976년에야 자체 고유 모델인 포니를 생산했던 우리가 이제는 차세대 첨단 엔진도 자체 개발하고, 자동차 생산용 로봇기술도 수출하는 나라로 변모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철강제련 기술, ‘산업의 쌀’ 반도체 기술, ‘상상을 현실로 보여 주는’ 디스플레이 기술 등은 세계적인 유례가 없는, 우리만이 갖는 스토리 그 자체다. 그런데 이 자랑스러운 기술 유산을 어디에서 만나 볼 수 있을까. 엠피맨, 포즈 등 근래에 개발된 소형 첨단 제품들은 개인 마니아나 관련 기업들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1981년에 개발된 국내 최초 PC인 삼보컴퓨터의 ‘SE-8001’은 소장자가 분명치 않고, 국내 최초의 조립 자동차 ‘시발’(始發)은 몇몇 박물관에 원형과 비슷하게 복원된 재현품만이 전시되고 있으며 오리지널 모델은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포니 1호차는 울산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거나 기업들이 보존·전시해 소장처가 확실한 제품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하지만 이들 제품의 소장처를 알고 있다고 해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기업 전시관, 관련 박물관, 개인 소장자들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등 전통적인 기술 선진국들은 산업기술 발전 역사를 한 곳에 모아 산업기술의 긍지와 자부심을 자랑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의 기술공예박물관(1794년), 영국 런던의 과학기술박물관(1857년), 독일 뮌헨의 독일박물관(1925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독일박물관은 1903년에 설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된 이후 세계대전의 패전과 최악의 인플레이션이라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며 세워졌다. 결국 이는 독일이 다시 한번 세계적인 기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8위의 교역국가로 급성장한 대한민국. 세계가 알고 싶어 하는 한강 기적의 스토리, 그 기반이 됐던 산업기술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기술문화공간이 마련된다면 산업과 기술이 어떻게 진화해 왔고, 산업기술인의 노력이 우리 생활을 얼마나 많이 변화시켰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초로 아폴로 11호를 달에 보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독일박물관에서 세계 최초의 엔진 비행기를 보면서 우주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처럼 산업기술문화공간은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미래 주역인 청소년들이 우리의 자랑스러운 산업기술을 보고 자신의 꿈과 비전을 발견하고 다짐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2조 달러 무역, 4만 달러 개인소득’을 향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지금 우리의 청소년들이 우리 산업기술의 발전 궤적을 한눈에 보고, 기술 강국의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산업기술문화박물관은 그 어떤 국정 과제보다 중요한 어젠다임이 틀림없다. 우리의 소중한 산업기술 유산이 사라지기 전에, 그리고 이를 창조하기 위한 위대한 도전기를 생생하게 말해 줄 기술인들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만의 산업기술문화박물관이 조속히 건립되기를 기대해 본다.
  • 엄마는 옷장에 숨었다고 공안에 순순히 말했다 그 길로 북에 끌려간 엄마… 열에 여덟, 공포의 생이별

    엄마는 옷장에 숨었다고 공안에 순순히 말했다 그 길로 북에 끌려간 엄마… 열에 여덟, 공포의 생이별

    북한과 맞닿은 중국 동북3성 지역에 사는 A(13)군은 8년 전 겪은 악몽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 다섯살 되던 그해 어느 날, 중국 공안이 A군의 집에 들이닥쳤고 탈북자였던 어머니는 옷장 안에 숨었다. 공안들이 “엄마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상황을 파악 못 한 A군은 “옷장에 숨었는데요”라고 순순히 답했다. 공안은 어머니를 잡아 강제 북송했고 A군은 그날 이후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굶주림 등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은 북한 여성이 중국에서 낳은 ‘탈북 2세 아동’(19세 미만)이 2만~3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탈북 여성 대부분은 중국 남성과 결혼해 정착하지만 불안한 신분 탓에 예고 없이 자녀와 생이별하는 일이 많다. 어머니가 공안에 잡혀 강제 북송되거나 가출해 중국에 남겨진 A군 같은 아동들은 정신적 상처를 안고 외롭게 살아간다. 국제사회와 정부의 지원이 절실해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용역 연구팀이 지난해 7~9월 동북3성 등 중국 4개 성 14개 지역에서 탈북 2세 100명의 가정에 대해 심층 면접 조사를 한 결과 아이들 중 96.0%가 9~15세인 성장기에 있었다. 북한에 대규모 식량난이 덮쳐 대량 탈북이 발생한 1998~2000년과 출생 시기가 일치한다. 당시 탈북했던 여성 상당수가 반강제적으로 중국 남성과 매매혼을 해 아이를 낳은 결과로 보인다. 중국 내 탈북 2세 아동 10명 중 8명가량은 어머니와 이별한 채 살아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어머니가 강제 북송돼 가정이 해체된 경우가 많다. 중국에 사는 탈북 2세 B(14)군의 어머니는 7년 전 강제 북송됐다. 원래 정신질환이 있었던 아버지는 탈북자 어머니를 만난 뒤 안정을 되찾았지만 아내가 끌려가자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탈북자 어머니가 불안정한 신분을 떨쳐 내려 한국행을 택해 홀로 남은 아동도 적지 않다. 탈북 2세 C(13)군은 2007년 이후 어머니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당시 공안이 탈북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자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한국으로 가자”고 했지만 동의를 얻지 못했다. 이후 어머니는 가출했는데 2년 뒤 전화를 해 “한국행에 성공했다”고 알려 왔다. 어머니의 부재,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성장기 탈북 2세 아동들은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매매혼 등을 통해 탈북 여성과 결혼한 중국인 아버지는 가난하거나 몸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탈북 2세 가정의 경제적 수준을 조사해 보니 58.6%가 ‘못사는 편’인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 2세 D군이 이런 경우다. 아버지는 한쪽 팔이 없는 상태로 쉬는 날 없이 농사일을 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른 팔마저 아파 일하기가 어려워지자 하루하루를 술로 보낸다고 한다. E(11)군은 용접일을 하는 아버지와 조부모를 모시고 단칸 셋방에 산다. 어머니는 2008년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떠났다. 중풍을 앓는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생활은 E군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그는 어머니를 무척 그리워했다. E군처럼 어머니와 떨어져 사는 아동 중 76.3%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답했다. 하지만 헤어진 친모와 연락이 되는 아동은 23.0%에 불과했다. 어머니와 헤어진 뒤 아버지나 친척의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고아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상태이거나 산골에서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는 등 자녀를 챙기기 어려운 경우다. 고아가 된 탈북 2세들은 주로 교회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탈북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3성 지역에는 탈북자 아동을 돌보기 위해 현지 기독교 시설이 집중돼 있다. 교회는 홀아버지 등과 사는 탈북 2세들에게 양육비 지원도 한다. 탈북 2세 가정 중 23.0%는 교회로부터 양육비를 지원받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탈북 고아 중 교회 시설이 아닌 중국 고아원에 살거나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면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탈북 2세 아동 중 심각한 폭행, 성폭력 등에 시달리는 아동은 극히 드문 것으로 조사 결과 나타났다. 또 중국의 호구(한국의 주민등록)를 취득한 아동 비율도 95.8%나 됐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아동 보호자 등을 대상으로 설문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탈북 2세를 대상으로 한 심각한 인권 유린이 실제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호구를 얻기 위해 뇌물을 건넸다고 응답한 비율도 61.8%나 됐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세계 연구중심대학을 가다] 독일 자브뤼켄 잘란트 주립대 산학 클러스터

    [세계 연구중심대학을 가다] 독일 자브뤼켄 잘란트 주립대 산학 클러스터

    독일 서부에 위치한 잘란트주는 독일에서 가장 작은 주다. 주 전체 인구가 10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 1960~70년대 석탄·철강산업의 전성기에는 호황도 누렸지만, 그 후로는 ‘가난하고 척박한 동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강원랜드조차 없는 강원도의 산골 폐광촌을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잘란트는 지식산업을 기반으로 한 부흥에 가슴이 설레는 곳이 됐다. 그 중심에 잘란트의 주도인 자브뤼켄의 잘란트 주립대학이 있다. 한때 프랑스 낭시대학 분교였던 잘란트대는 대학 자체로는 별다른 경쟁력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독일 4대 연구회’와 함께 구성한 ‘산학 클러스터’ 덕분에 훌륭한 시너지효과를 거두고 있다. 아헨공대나 에콜 폴리테크니크처럼 우수한 인력을 처음부터 유치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떻게 연구중심 대학의 장점을 취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좋은 사례다. 잘란트대 일대에는 막스플랑크, 프라운호퍼, 헬름홀츠, 라이프니치 등 독일 연구회 산하 연구소들과 한국 정부 출연연구소의 유럽진출 교두보인 한국과학기술원(KIST) 유럽연구소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독일 4대 연구회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과학강국을 자부하는 독일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기초과학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막스플랑크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정부는)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탓에 연구에 대한 자율성이 높아 전 세계 과학자들이 선망하는 연구회로 유명하다. 막스플랑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설립된 후 지금까지 20여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1911년 설립된 전신인 카이저빌헬름협회의 16명을 포함하면 미국 하버드대,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손색이 없다. ‘노벨상 사관학교’라는 말이 허언이 아닌 셈이다. 한해 1만 5000여건에 달하는 연구 결과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독일 전체 연간 우수 논문의 40%에 해당한다. 막스플랑크는 3개 분야 80여개의 연구소를 독일 전역에 갖고 있다. 자브뤼켄에 위치한 막스플랑크 정보학연구소(MPII) 역시 이 같은 구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베트람 소미에스키 박사는 “무엇이 될지 생각하지 않고 연구를 시작하고 진행하는 것이 막스플랑크의 가장 큰 특징”이라며 “막스플랑크는 최소 20~30년 후를 내다보는 연구를 맡는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같은 연구소의 특성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배출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막스플랑크는 각 연구소가 위치한 지역의 대학들과 학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 때문에 막스플랑크의 영년직 연구원 중 상당수는 ‘대학교수’ 직함도 갖고 있다. 이 같은 구도는 주변 대학의 우수한 학생들이 막스플랑크에서 연구하면서 실력과 아이디어를 키우는 원동력이다. 선순환 구조가 구축된 것이다. 소미에스키 박사는 “연구원은 논문으로만 평가받고, 상당 시간을 학생들의 교육에 할애하는 역할을 동시에 부여받는다”면서 “80여개의 막스플랑크 연구소 간에 중첩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여럿이 연구하면 다양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역시 장점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막스플랑크의 대척점에 프라운호퍼가 위치해 있다. ‘프라운호퍼 라인’을 발견한 과학자이자 발명가, 사업가였던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의 이름을 딴 연구소답게 철저하게 실용적인 연구를 중시한다. 1949년 설립된 이후 일관되게 유지해온 기조다. 60개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각 분야별로 정보기술, 광학, 제품, 방위산업 등 7개 그룹으로 나뉜다. 이 예산 중 프라운호퍼 재단은 평균 30%만 부담한다. 나머지는 산업체나 지역사회 등에서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소들은 끊임없이 협력 프로그램을 모색한다. 프라운호퍼 연구소들은 지역 대학 및 중소기업과의 공동연구에 전체 연구 비중의 40% 이상을 할애한다. 그 결과, 독일에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40%가 넘는 강소기업들이 1300여개나 된다. 막스플랑크가 논문으로 평가받는다면 프라운호퍼는 ‘특허’가 핵심이다. 얼마나 산업에 기여하는지를 보기 위한 핵심 지표다. 잘란트대 인근에 위치한 프라운호퍼 비파괴시험연구소(IzFP) 역시 특허와 기업 서비스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건축물이나 교량, 원자력발전소, 철로 등에 손상을 주지 않고 외부에서 강도와 내구성 등을 측정하는 장비와 소프트웨어가 중점적으로 제작된다. 1972년에 설립돼 드레스덴 분원을 포함해 모두 377명의 박사급 인력이 근무하고 있다. 프라운호퍼 IzFP의 주요 연구원들 역시 잘란트대 교수직을 갖고 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기초과학을 발전시켜 나가는 기술이 어떻게 산업과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실제 연구소 운영을 통해 보여준다. 지그프라이드 크라우스 부소장은 “40년 전 자브뤼켄에 IzFP가 처음 설립된 이후 다른 연구소들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는 지역 활성화의 중요한 시발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막스플랑크나 프라운호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라이프니치 연구회 역시 독일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다. 라이프니치 연구회의 구조는 거대과학을 담당하는 헬름홀츠를 포함한 나머지 3대 연구회와는 구조가 크게 다르다. 다른 연구회들이 재단본부의 판단에 따라 설립과 폐쇄가 결정되는 데 반해 라이프니치 연구회는 ‘가입된 기관들의 연합’ 형태로 구성된다. 라이프니치 연구회 소속 86개 기관 중에는 연구소뿐 아니라 뮌헨의 ‘독일 박물관’이나 자연사박물관도 포함돼 있다. 나머지 연구소들 중 상당수도 민간이나 주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들이 많다. 연구회의 까다로운 가입 심사 평가를 통과하면 개별 연구소들은 라이프니치 연구회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다. 매 5~7년마다 연구회의 중간 평가를 실시해 역량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판단되면 연구회 이름을 환수한다. 대신 이름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연간 14억 유로의 예산을 골고루 분배해 사용하게 하는 특전을 누릴 수 있다. 잘란트대 인근 라이프니치 신소재연구소(INM)는 태생적으로 잘란트 주정부가 잘란트대 클러스터를 키우기 위해 25년 전에 유치한 연구소다. 전체 예산의 51%를 잘란트대에서 지원받고, 연구성과 역시 대학과 공유한다. 이에 맞춰 INM은 지역특화적인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롤란드 롤스 소장은 “재단은 기초와 응용 어느 쪽에도 치중하지 않는 구조를 원한다”면서 “두 가지 부분을 균형 있게 조정하는 것이 각 연구소에 부여된 임무”라고 밝혔다. 연구소가 응용을 전담한다면, 기초연구는 주로 잘란트대와의 산학협력을 통해 이뤄진다. 라이프니치 INM은 100명 규모에 불과하지만 2010년부터 2011년 사이에 800편 이상의 국제논문을 출간할 정도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잘란트대 학생들을 연구에 참여시키면서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공급받기 때문이다. INM 연구원인 이주석 박사는 “용액에서 파우더를 만들어내는 기술, 태양전지의 반사를 줄이는 코팅 기술, 자동차를 균일하게 도장하는 기술 등이 이곳 연구소에서 개발돼 상용화로 이어졌고, 지역사회에 기술기반 기업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면서 “아직까지 잘란트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근로자 임금이 10~15% 낮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빈곤하지만, 클러스터 덕분에 점차 개선되고 있다”고 전했다. 글 사진 자브뤼켄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글로벌 시대]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이명신 월드비전 동해종합사회복지관장

    [글로벌 시대]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이명신 월드비전 동해종합사회복지관장

    언제부턴가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 ‘대한민국’. 분명 어릴 적에는 “왜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에 태어나 고생하는가”라며 불평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구호·개발 NGO(비정부기구) 사업을 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닐 때 제일 먼저 일본인이냐, 아니라고 하면 중국인이냐 묻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한국인이라고 하면 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과 10년 전쯤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곳을 가든지 한국인이라고 하면 친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국제사회에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체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세계 경제력 규모가 10위 안팎,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3000달러를 넘어섰고 2011년 인간개발지수(HDI)는 15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도 2010년에 가입했다.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입장이 전환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일제하에서 해방된 지 68년, 6·25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나라가 초토화된 지 63년이 지났다. 그리고 세계지도에서 찾기도 쉽지 않은 작은 대한민국은 아직 반으로 나뉘어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초고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대한민국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스스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지금도 전 세계에는 나라를 잃었거나, 분쟁 등으로 생활의 터전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난민들이 아시아를 비롯 6개 대륙에 3392만명(2011년 기준)이나 된다. 이 중에서 아예 나라가 없는 무국적자는 340만명에 이르고 있다. 저개발국가에서 구호·개발사업을 하다 보면 가장 비참한 것이 난민들이다. 왜냐하면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100여년 전 우리나라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끔찍한 고통을 당했는가? 아직도 일제 치하 고통의 흔적이 우리 안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 지진이나 전쟁, 기근이나 한파, 쓰나미 등으로 폐허가 되어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 당장은 많은 어려움이 직면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국가가 나서고, 세계가 나서서 고통을 분담하기 때문이다. 참 다행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 이름만 불러보아도 가슴이 벅차온다. 대한민국이 나의 조국이라는 것,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주변 많은 나라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부모 세대와 선배 세대의 험난한 과정을 헤쳐 오는 지혜와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만의 힘으로 이곳까지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사랑의 빚을 갚자. 고마움을 아는 나라,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나라 대한민국. 많은 저개발국가가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있다.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잿더미에서 일어난 유일한 나라니까. 이제 우리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꿈과 소망을 나누고 전해야 할 때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니까.
  • [기고] 새해 소망/김용희 서울사이버대 부동산학과 교수

    [기고] 새해 소망/김용희 서울사이버대 부동산학과 교수

    중년의 남자 셋이 한겨울 홍천 성당에서 만났습니다. 전 스포츠 선수(박찬호)와 탤런트(차인표)와 스님(혜민)입니다. 눈 덮인 산장 난롯가에서 인생사 이야기로 하룻밤을 보냅니다, 화덕에는 군고구마와 떡가래를 올려놓고 세상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스님이 눈물을 흘립니다. 선수도 웁니다. 트위트하는 스님은 올라온 글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새벽 3시에 메신저를 올리는 힘겨운 이, 취업전선에서 불합격 통지에 이젠 무감각해져 가는 자신이 싫어지는 젊은이, 희망의 출구를 잃어가는 그런 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얕은 위로밖에 없다면서 웁니다. 속세를 떠나올 때 노부모가 생일 밥상을 차려준 이야기를 할 때는 울지 않던 스님이, 힘겨운 이웃들 때문에 웁니다. 선수는 단칸방에서 자기를 키워주신, 단벌 운동복을 한밤중에 세탁해 줄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찌든 가난과 한없이 내어주는 부모님의 사랑을 추억하면서 웁니다. 눈물의 내용이 좀 다릅니다. 한 분은 자기를 위해 울고, 다른 한 분은 타인을 위해 웁니다. 우리 세속인들이야 모두 자기를 위해 웁니다. 지난 시절의 아픈 추억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현실이 퍼다 붓는 희망과 절망 때문에 웁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울어주는 타인이 있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새 정부는 할 일이 많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울어내야 할 맡은 바 소명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상가 건물주는 매년 월세를 올립니다. 세입자들은 열심히 수고해서 주인 통장에 입금하기 바쁩니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있지만 해마다 9%씩 월세를 올리면 5년이면 50%가 넘습니다. 주택임차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상률 법정상한선 운운하는 세입자는 2년 만기 후 내보내면 됩니다. 주택은 부족한 데 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젊은 기간제교사가 있습니다. 휴일과 연장근무는 기간제의 몫입니다. 기간제는 재계약을 위해 묵언수행해야 하지만, 정교사는 그런 힘든 것 하지 않아도 신분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기간제 교사의 보수는 정교사의 절반도 안 됩니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직업을 가진 것은 행운아입니다. 이명박(MB) 정권의 반값등록금 공약은 학자금 대출로 미봉되었습니다. 덕분에 학교재단은 수업료를 쉽게 받았습니다만 정작 학생 본인은 큰 빚과 이자를 안고 사회에 나섰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그날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을 온 힘을 다해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의무요 역할이라 합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합니다. 이제 희망의 등불을 내겁니다. 만해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차마 떨치고 갈 수 없어서…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올해 세모에는 스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번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에 우리 모두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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