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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가뭄 휩쓸고 간 케냐, 희망 꿈꾸는 작은 학교

    대가뭄 휩쓸고 간 케냐, 희망 꿈꾸는 작은 학교

    아프리카 동쪽에 자리한 케냐. 2011년 동아프리카에 닥친 대가뭄으로 1100만명이 집을 떠났고, 여전히 200만명이 넘는 아이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몸이 온전한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도맡았다. 소외된 세계의 아이들을 찾아가는 EBS ‘글로벌 프로젝트 나눔’은 16일 밤 8시 20분 ‘세상에서 가장 작은 학교 2부’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선생님과 아이들을 만난다. 대가뭄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비가 내려도 땅은 불과 2~3시간 만에 말라 버리고, 사람들의 삶도 점점 메마르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압디케일 가족의 삶도 가뭄으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2년 전, 병으로 아버지를 잃고 생활이 어려워진 가족. 세 아이와 살아야 하는 어머니는 막막하기만 하다. 압디케일은 교복은 입고 있으나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교 대신 엄마와 물을 뜨러 가는 게 일상이다. 학교는 문을 연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 제대로 된 교실조차 없다. 유일한 선생님인 후세인은 교무실을 겸한 숙소를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겨우 마련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자신마저 떠나 버리면 누가 이 아이들을 돌볼지 걱정이 됐다. 후세인은 가정방문을 하러 마을로 향했다. 한 아버지를 만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설득했지만, 기대하던 답변을 듣지 못한 채 돌아섰다. 1학기 종업식에서 만난 부모들에게 후세인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한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꿈을 이룰 희망의 빛은 언제쯤 드리울까.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충북지사] 윤진식 vs 이시종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충북지사] 윤진식 vs 이시종

    ■ 30년 공직 경제전문가 ‘총리 빼고 모든 경력 갖췄다’ 평가… “정치인은 한계 극복해야” 새누리당 충북지사 후보인 윤진식 의원은 30여년간 공직에 몸담으면서 ‘진돗개’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처럼 한번 맡은 임무는 끝장을 볼 때까지 악착같이 완수하는 책임감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윤 의원은 1946년 충북 충주시 성서동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나 초·중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보름 동안 거의 물만 먹다시피 하며 굶어 봤을 정도로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성장기에 잘 먹지 못하니 몸도 쇠약했다. 청주고 시절에는 집안 사정과 건강 문제로 졸업을 한 해 미뤄야 했다. 하지만 공부를 아주 잘했던 그는 장학금을 받고 고려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가난에 한이 맺혔던 윤 의원은 처음엔 대기업에 들어가 부를 쌓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고향인 충북에 내려올 때마다 낙후된 모습과 개선되지 않는 농민들의 삶을 보면서 배운 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됐고 정치와 정책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됐다고 한다. 결국 그는 공직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고 1972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재무부 행정사무관, 주뉴욕 총영사관 재무관, 대통령실 조세금융비서관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1997년 청와대 조세금융비서관 시절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보 사건’은 윤 의원의 인생에 변곡점이 됐다. 당시 윤 의원은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았으나 윗사람들이 감히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것을 보고 직접 대통령 면담을 요청해 위기의 실체를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고서야 김영삼 대통령은 응급조치를 지시했다. IMF 사태 이후 열린 국회 IMF조사특위에서 장재식 특위 위원장은 “윤 비서관과 같은 용기 있는 공무원이 몇 명만 더 있었으면 IMF 사태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일로 윤 의원의 이름은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공사, 관세청장, 재정경제부 차관, 산업자원부 장관 등으로 잇따라 중용됐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불어닥치자 윤 의원이 청와대 정책실장 겸 경제수석으로 전격 임명된 것도 IMF 때 그의 역할 덕분이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가 맞은 두번의 경제 위기에서 모두 해결사 역할을 한 유일한 인물이 됐다. 그는 이듬해 고향인 충주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총리 빼고 모든 경력을 갖췄다”는 평을 들었다. 윤 의원은 2008년 유동천 제일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는 고초를 겪었으나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은 바 있다. 대법원의 최종 선고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일단 명예회복을 했다고 보고 평소의 그처럼 일에 몰두하고 있다. 윤 의원은 서기관 시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일했을 만큼 ‘워커홀릭’(일 중독자)으로 정평이 나 있다. 30여년을 경제 분야에 몸담은 경제 전문가라는 점을 내세워 이번 선거에서도 ‘경제 도지사’를 표방하고 있다. “정치인이란 주어진 조건을 넘지 못하면 안 된다. 한계를 극복하고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게 정치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선거 불패의 사나이 민선 시장·의원·지사까지 6전 6승… ‘50년 단짝’과 또 대결 새정치민주연합 충북지사 후보인 이시종 현 충북지사에게는 ‘선거 불패’ 신화가 늘 따라다닌다. 1995년 민선 1~3기 충주시장, 17·18대 국회의원, 2010년 충북지사 선거까지 단 한번의 패배 없이 ‘6전 6승’을 기록 중이다. 이 지사는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6·4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지고 ‘7번째 승리’를 꿈꾸고 있다. 1947년 충북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 지사는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다. 충북의 수재들이 모인 청주고에 어렵게 진학했지만 1년간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직접 학비를 모아야 할 정도였다. 당시 아버지를 여의게 된 점도 이 지사의 어깨에 짐을 더했다. 충북 음성군 금광에서 광부 생활을 하고 참외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농부의 꿈을 갖게 된다. 이때 친구가 보낸 한통의 편지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편지 내용은 “공부를 한 뒤 대학에 진학하라”는 것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대학 준비를 한 그는 1967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에서도 학비 마련을 위해 광부, 지게꾼 일을 하는 등 고생했지만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그는 충북도 법무관, 강원도 기획담당관, 내무부 행정관리담당관, 관선 충주시장, 충북도 기획관리실장, 국무총리실 심의관 등 중앙과 지방 행정을 두루 섭렵했다. 이런 행정 경험은 1995년 7월 민선 1기 충주시장 당선의 밑바탕이 됐다. 첫 출마 당시 민주자유당(한나라당의 전신) 공천을 받았고 재선 때는 무소속, 3선 때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충주시장을 역임했다. 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하나 없었지만 20년간의 행정 경험은 연임의 든든한 기반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지사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당내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탈당한 전력 때문에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2004년 4·15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공천에 탈락하자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긴 게 대표적이다. 당시 한나라당 충주시지부는 이 지사를 “국민적 열망과 민주적 절차를 짓밟고 자신을 후보로 결정해 주지 않는다며 탈당했다”고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이 지사는 때마침 불어닥친 ‘대통령 탄핵 역풍’에 힘입어 17대 총선 충주 지역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8대 총선에서도 그는 민주당 소속으로 청주고 동창인 한나라당 윤진식 후보를 1581표 차이로 간신히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지사는 2010년 충북지사 선거에 도전해 당시 한나라당의 정우택 후보와 팽팽한 접전을 벌인 끝에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민주당 출신’ 첫 충북지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지사는 자신의 정치 철학에 대해 “서민의 눈높이에서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충북지사에 취임한 이후 해외 출장 때마다 그는 일반석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이 지사는 지난 12일 ‘안전한 충북, 행복한 도민, 기본이 바로 선 도정’을 주제로 정책 공약을 마련하고 7번째 선거 승리를 위한 잰걸음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선거 홍보물에 ‘시종일관 이시종’이라는 문구를 항상 쓰고 있다.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고 초심을 지키면서 시종일관 국민, 도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인천시장] 유정복 vs 송영길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인천시장] 유정복 vs 송영길

    ■유정복 후보는… 朴心 충만 ‘엘리트 리더’ 박대통령 그림자 수행 ‘행정의 달인’… “중앙 정부와의 소통 최대 강점” 새누리당 인천시장 후보인 유정복 전 안전행정부 장관은 친박근혜계 핵심으로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는 3선 정치인이다. 3선의 국회의원에 앞서 행정고시 출신으로 중앙부처와 지방 행정 관료 경험을 두루 쌓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2번의 장관직을 지냈다. 1957년 인천에서 태어난 유 전 장관은 인천 송림동 달동네와 간석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황해도에서 월남한 이산가족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TV에서 이산가족 상봉 얘기만 나오면 눈물을 펑펑 쏟았던 부모님 때문에 남북문제에 대해 남다른 의식을 갖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의 부모는 국경일 뿐 아니라 보통 날에도 늘 대문 앞에 태극기를 걸어놨다고 한다. 가난한 집의 7남매 중 여섯째인 그는 이런 집안 분위기 덕에 자연히 공직에 대한 꿈을 품고 자랐다. 선인중과 제물포고를 나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한 그는 22살 때인 1979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며 엘리트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강원도청과 내무부를 거쳐 1993년 경기도 기획담당관으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지방행정 경험을 쌓게 된다. 이듬해 제33대 김포군수로 최연소 기초자치단체장 기록을 세운 이후 1995년부터 제5대 인천서구청장, 초대 민선 김포군수, 1·2대 김포시장을 연이어 지내면서 전국 최연소 구청장·시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2004년 47세의 나이에 중앙정치 무대에 도전하며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탄핵정국의 17대 총선에서 그는 경기·인천 지역에서 초선으로는 한선교 의원과 함께 단둘이 당선되며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 대통령의 눈에 띄었고 이듬해인 2005년 당 대표 비서실장으로 박 대통령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박 대통령을 그림자 수행하며 명실상부한 ‘박근혜의 남자’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박근혜 후보 비서실장을 지냈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중국특사로 이 대통령과 박 후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2010년 친박계 몫으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할 때에도 박 대통령은 흔쾌히 수락했다. 2012년 대선 때는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직능총괄본부장으로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국민생활체육회 회장, 국회 생활체육과 국민행복 포럼 대표 등으로 전국 직능단체들을 관리해 온 경험을 발판 삼아 대선 때 다양한 직능단체들의 박 후보 지지선언을 이끌어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엔 초대 안전행정부 장관을 지냈다. 유 전 장관의 조직 관리는 철저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신중하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일 처리와 무거운 입을 가진 성향 때문에 그를 아는 이들은 ‘박 대통령의 복사판’이라고들 말한다. 한편에선 유 전 장관이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갖지 못하고 ‘박근혜의 남자’ 이미지에 기대는 것을 놓고 비판론도 나온다. “뼈를 묻겠다”던 경기도(지역구 김포)가 아니라 인천에서 출마한 데 대해 실망하는 경기 지역 유권자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유 전 장관은 “인천에서 나고 자라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지방·중앙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 정부와의 소통력도 뛰어나다”고 설명한다. “송영길 현 시장 체제에서 ‘부채, 부패, 부실로 얼룩진 인천’의 위기를 극복해 ‘대한민국 중심도시 인천’을 만들겠다”는 게 출마의 변이다. 특히 그는 “공항에서 서울로 가기 전 스쳐 지나가는 도시 인천이 아니라 경제활력 도시, 시민행복 도시를 반드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재난 대응 주무부처인 안전행정부의 전임 장관으로서 세월호 참사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점은 약점으로 꼽힌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송영길 후보는… 야심만만 ‘차세대 리더’ 야권내 입지 탄탄한 차기 대선주자…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 포부 밝혀 새정치민주연합 인천시장 후보인 송영길 현 인천시장은 야권 내 입지가 단단한 차세대 대선주자로 꼽힌다. 1963년 2월 26일 아버지 송영수씨와 어머니 김광순씨 사이 4남 2녀 중 넷째아들로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광주대동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떠꺼머리 촌놈’ 송영길은 대학에 들어가 급성장했다. 1984년 서울대 이정우, 고려대 김영춘 등과 함께 학도호국단 해체 운동을 주도한 뒤 초대 직선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한다. 1984년 12월에는 민정당사 점거농성사건으로 구속됐고, 제적됐다. 시대가 송 시장을 민주화운동 대열에 합류시킨 것이다. 투옥으로 군대는 면제됐다. 1985년 석방된 송영길은 인천 대우자동차 르망공장 건설현장에서 배관용접공 일을 시작하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에는 인천 부평에 노동자들의 인권탄압 ’관련 법률상담과 교육 등을 하는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열었다. 1987년부터는 운수노조 노보 상담실장을 하며 택시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사면 복권됐고, 대학교도 졸업했다. 1991년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택시·버스·화물자동차 운전기사 등 운수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한 활동들을 전개했다. 노동운동을 하던 1987년 대학 때부터 사귄 남영신씨와 결혼했다. 냉전시대의 종결은 송영길의 인생 항로를 틀게 했다. 1991년 동유럽으로 한 달간 배낭여행을 간 송영길은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들이 연쇄적으로 붕괴된 현장을 지켜봤다. 그리고 재야 노동운동보다 제도권에 들어가 개혁운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1992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2년간 신림동 고시촌에서 공부, 1994년 3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마친 1997년에는 다시 인천으로 내려가 인권변호사로서 지역 운동에 뛰어든다. 1998년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 인천시지부 정책실장 겸 고문변호사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는다. 1999년 6월 3일 국민회의 후보로 인천 계양구·강화군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6·3 보궐선거 출마 당시 연세대 선배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으로부터 영수증 처리 없이 후원금 1억원을 받은 일로 홍역도 치렀다. 송 시장은 2000년 16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첫 당선됐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적극 참여했고 2004년 17대 총선 뒤 당내 재선그룹의 선두주자가 됐다. 18대 총선에서 운동권 출신 의원들이 줄줄이 낙선했지만 그는 인천 계양을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그는 2007년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8년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1위를 차지, 차세대 주자로 입지를 다졌다. 2010년에는 인천시장직에 도전, 고전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당선돼 일약 대선주자 반열에 올라섰다. 정치인 송영길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려고 한다.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대선 도전 얘기가 나오지만 그는 “시장 재선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선 도전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때를 기다린다는 인상을 준다. 송 시장은 “정치는 힘든 일이다. 그리고 정치인들의 말로가 대부분 아름답지 못했다. 대통령 다수가 퇴임 뒤 홍역을 치렀고, 일반 국회의원들도 존경 속에 은퇴한 경우가 드물다”면서 조심한다. 그러나 “함께 꿈꾸면 꿈이 현실이 된다”는 그의 정치관(觀)은 예사롭지 않다. 그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는 말도 한다. 송영길은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민주정치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을 이루어, 대한민국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데 조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꾼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열린세상] 귀족에게 애국심은 없다/김정현 소설가

    [열린세상] 귀족에게 애국심은 없다/김정현 소설가

    대통령님, 여전히 관료와 군인을 믿으시나요? 예, 그 신뢰의 바탕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관료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으로 점철된 그 시절,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능력을 펼칠 무대는 한정됐습니다. 해외 진출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기업도 고만고만했으니, 개천의 용들이 승천을 꿈 꿀 무대로는 관료세계가 제격이었습니다. 또 그때는 해방과 전쟁을 겪은 뒤라서 저마다 애국심을 가슴에 품고 있기도 했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리라는 생각은 사실상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승천을 위해서는 대통령의 뜻을 읽고 최선을 다해야 했지요. 군인은 어떻습니까. 역시 해방과 전쟁에 따른 애국심이 깊었습니다. 더하여 유학의 특혜를 누린 군인들은 행정 등 국가운영에 관한 여러 선진제도를 가장 먼저 배워 왔습니다. 지금은 구태가 돼 버린 ‘브리핑 차트’조차 군에서 제일 먼저 실행하지 않았던가요. 그러니 선진제도를 정부와 사회에 전파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여러 곳에 중용돼야 했지요. 중용→충성→신뢰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이 형성된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어떤가요? 관료도, 군인도, 이제는 선진은커녕 세상 흐름을 뒤좇기에도 벅찹니다. 더구나 창조라니, 엄두조차 낼 수 없을 겁니다. 공연히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 온 조직의 한계 때문입니다. 60년 넘는 역사 속에 그들의 조직은 엄격한 위계체제로 고착됐습니다. 그 위계와 연공서열 속에서, 법의 이름으로 보호되는 인사체계에서,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윗사람입니다. 속된 말로 튀면 눈엣가시가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이제 대통령은 5년 뒤면 물러나는 세상입니다. 개중에는 감옥에 가기도 하고 비난받는 것도 일상이 돼버렸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인사권을 행사하는 사람도 5년 뒤를 생각하면 감히 조직을 거스를 생각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구조인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그래도 연잇는 여러 사고가 증명을 더해 이른바 ‘관피아’를 비롯한 그들 구조의 실상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관피아’는 바꾸어 말하면 ‘귀족’입니다. 젊은 한 시절 몇몇 시험과목에만 집중해 과거의 문을 통과하면, 그로써 귀족의 세상으로 편입돼 그들만의 리그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간혹 바른 정신의 사람이 있어 편입을 거부하면 ‘왕따’의 밑바닥을 걸어 타의 본보기가 되고요. 우리 역사에서 귀족의 행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신라와 고려의 귀족, 사대부라는 이름의 조선 귀족. 긍정의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나라를 버릴지언정 자신들의 기득권은 끝내 놓지 않았습니다. 그 악습의 고리를 끊지 않고는 창조도, 개혁도 공염불에 그칠 것입니다. 현대 귀족의 불씨는 ‘고시’(考試)제도입니다. 그것은 과거(科擧)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일제에 의해 도입된 제도입니다.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일생에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생을 누리기에는 이미 다른 세상입니다. 쉼 없이 새로운 세상을 공부해도 기껏 한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기도 어려운 세상이 아닙니까. 또한 관료를 꿈꾸지 않아서 그렇지 더 뛰어난 인재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 열린 생각, 선진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고 체험한 인재가 정부의 중추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의 기본은 7급 정도의 직에서 출발해도 충분합니다. 승진제도만 제대로 실행된다면 줄타기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이 그야말로 ‘창조’의 결실을 낼 것입니다. 실제 우리 정부부처 중에는 7급을 기본으로 하는 조직이 있고, 최소한 그들의 애국심만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바 아닙니까. ‘고시’라는 제도로 형성되는 기수의 연줄에, 학연과 지연까지 더해지며 편이 갈라지는 폐해는 뿌리를 끊지 않고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연줄의 선후배가 끌어주고 밀어주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의 검증으로 장관과 대통령이 발탁하는 구조여야 애국심의 충성이 가능합니다. 고위직의 경력은 귀족의 자격이 아니라 보람 있는 애국의 추억으로 영원한 훈장이 돼야 합니다. 여북했으면 관료보다 순수 정치인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까요. 스스로도 괴이쩍었습니다.
  •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서울시장] 정몽준 vs 박원순

    [광역단체장 유력후보 분석-서울시장] 정몽준 vs 박원순

    ■7선의 ‘새 꿈’ 의정 생활 26년 대부분 비주류… “공직은 봉사하는 자리”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정몽준 의원은 19대 국회의원 중 최다선인 7선으로 26년 정치 인생 대부분을 비주류로 보냈다. 정 의원은 1951년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8남 1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식사 시간에 늦으면 먹을 게 금방 없어질 정도로 식구가 많은 집안에서 단체 생활을 하듯 컸다고 정 의원은 회고한다. 그는 학창 시절 조용하고 튀지 않는 우등생이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재벌가 아들인지도 모를 정도로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스포츠를 좋아하고 열정적 기질을 지닌 소년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ROTC 13기로 병역을 마친 정 의원은 미국 컬럼비아대를 거쳐 매사추세츠 공과대(MIT)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80년 현대중공업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훗날 각각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이 된 이홍구·한승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를 딴 이후 국제적 안목을 키우게 된다.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정 의원은 현대중공업의 본산인 울산 동구에서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무소속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자진해서 선택한 비주류의 길에 대해 그는 ‘정치 노무자’란 단어로 대신 설명한다. “공직이란 말 그대로 공적인 서비스로, 여러 사람에게 봉사하는 정치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당구도의 한국 정치 현실에서 비주류로서의 정치인생은 녹록지 않았다. 정 의원과 축구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다. 1993년 1월 대한축구협회 제47대 회장에 취임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추진하기 시작했을 때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일본에 승산이 없어 보나 마나 안 된다”는 회의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 선거에 출마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한 줄기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정 의원은 1년 중 3분의1 이상을 외국을 돌며 월드컵 유치 강행군을 펼친다. 1996년 5월 31일 일본에 절대 열세라는 예상을 뒤엎고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 결정을 따낼 때까지 정 의원이 다닌 거리는 150만km, 지구를 37바퀴 도는 거리였다고 한다.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치솟은 대중적 인기를 발판 삼아 정 의원은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한다. 대선 막바지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뤘지만 선거 하루 전날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한 후 한동안 정치적 침체기를 겪었다. 이후 2007년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그해 대선 때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으로서 10년 만의 정권 교체를 이뤄 냈다. 이어 2009년 9월 한나라당 대표에 선출돼 정치적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2012년 대선 경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박근혜 대세론’에 밀려 일찌감치 하차했다. 정 의원은 자신을 소개할 때 “(7선 의원이 아닌) 서울 재선 정몽준”이라며 ‘서울시민’임을 강조한다. 국회에선 주로 한·미, 남북 관계 등 외교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 왔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시장의 ‘큰 꿈’ 1세대 시민운동가·인권 변호사 명성… 재선 뒤 새 도전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된 박원순 현 시장은 인권변호사를 거쳐 ‘1세대 시민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뒤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박 시장은 이번 6·4 지방선거에선 새정치연합 소속으로 시장직 재선에 도전하며 더 큰 꿈을 그리고 있다. 박 시장은 1956년 3월 경남 창녕에서 평범한 농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박 시장은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3개월이나 두문불출하며 공부할 만큼 어릴 적부터 노력가형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진학했지만 유신 체제에 저항해 학생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4개월 복역하고 제적당한다. 이듬해인 1976년 박 시장은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된다. 하지만 검사 생활은 그의 적성과 거리가 멀었다. 결국 검사 생활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인권 변호사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다 박 시장은 일생일대의 멘토인 조영래 변호사를 만나게 된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함께 인권 변호사들의 모임인 ‘정법회’를 결성했고, 이 모임은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으로 확대 개편됐다. 박 시장은 민변의 창립 멤버로도 활동했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함께 ‘권인숙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구로동맹파업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아 시국사건을 주도하며 명성을 떨쳤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가 1990년 별세한 뒤, “해외에서 넓은 문물을 접하라”던 조 변호사의 권유로 1991년부터 이듬해까지 영국 런던 정경대 국제법 대학원 1년 과정을 마쳤다. 런던 정경대 유학 시절과 하버드대 객원연구원 1년여 시절 동안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이 현재 샘솟는 아이디어의 원천이 됐다고 한다. 한국 상황에 맞는 새로운 시민사회의 모델을 고민하던 박 시장은 1994년 귀국,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며 시민운동가로 변신한다. 박 시장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절인 2000년 16대 국회를 앞두고 ‘국회의원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했고,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1인 시위’ 등 다양한 시민운동을 창안했다. 2000년에는 ‘1% 나눔운동을 위한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했고, 2006년에는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 등을 설립했다. 2009년에는 제3세계의 가난한 농부들을 돕는 공정무역 커피회사 ‘아름다운 커피’를 연이어 설립하는 등 각종 시민운동 경험이 서울시장 준비를 위한 밑거름이 됐다. 박 시장은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무산으로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확정되면서 후보 출마 의사를 밝혔다. 당초 5% 내외의 미미한 지지율이었지만,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과의 단일화 등으로 지지율이 50%대로 뛰었고 결국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박 시장은 2년 반의 재임 동안 ‘서울의 살림살이’를 개선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임 기간 서울시의 채무를 3조 2500억원 감축했고, 지하철 9호선을 재구조화하면서 3조 2000억원의 낭비를 막았다”고 주장한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글로벌 시대] 디엔비엔푸/배종하 주베트남FAO대표

    [글로벌 시대] 디엔비엔푸/배종하 주베트남FAO대표

    5월의 베트남 햇살은 따갑다. 바야흐로 폭염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수은주가 30도 후반을 오르내리고 거리를 조금만 걷노라면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다. 하지만 지난 두어 달 동안 유별나게 비가 많고 습기가 찼던 탓에 속옷이 칙칙하게 달라붙는 불쾌함에도 저녁 무렵이면 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시내 중심의 호안끼엠 호수는 산책 나온 시민들로 붐빈다. 지난 7일은 베트남 국민에게 특별한 날, 60년 전 베트남 북서쪽 라오스 국경 지역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다. 7일 디엔비엔푸에서는 대통령을 비롯, 각국의 사절, 외교단, 지역 주민들이 참석한 대대적인 승전기념식이 있었다. TV마다 당시 전투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 훈장을 주렁주렁 단 90세 노병들의 치열했던 전투 인터뷰, 시내 주요 거리에는 승전 문구를 담은 현수막, 나라 전체가 디엔비엔푸로 떠들썩하다. 당시 전설적인 승리를 지휘했던 보응우옌잡 장군은 작년 가을 10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46년 호찌민은 독립선언을 했으나 프랑스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 양측은 지루한 전쟁을 계속했다. 디엔비엔푸는 베트남과 라오스를 잇는 전략적인 요충으로 호찌민 군의 주요 작전지역이었다. 이에 프랑스 군은 디엔비엔푸를 장악하기 위해 1953년 여름부터 대규모 거점을 구축했다. 육로로 접근이 어려운 산악지역이라 비행장을 건설하고 어마어마한 병력과 물자를 공수했다. 호찌민 군은 디엔비엔푸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인 전투 준비를 했고 마침내 1954년 3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두 달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가 세계 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호찌민 군은 절대적으로 열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승리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군은 도로조차 없는 산악지역에 인력으로 야포 수백문을 험난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리고 눈에 띄지 않도록 철저하게 위장했다. 산꼭대기에서 포격이 날아올 줄 상상도 못했던 프랑스 군들은 허를 찔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군은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물자를 엄청나게 공급받았지만 최후엔 공중 공급마저 끊어지면서 고립된 상태에서 방어선이 무너져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의 전사가 3000명, 부상 5000명, 포로가 1만명이 넘었으니 그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이 전투가 인도차이나의 운명을 가르는 전환점이 됐다.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패전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났고 알제리에서마저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해외 식민지 기반을 완전히 잃었다.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했지만 20년 후 미국도 불명예스럽게 철수해 베트남은 통일을 이뤘다. 영국의 역사학자 마틴 윈드로는 디엔비엔푸 전투를 식민지 지배하에서 게릴라가 아닌 제대로 조직된 군대를 만들어 유럽의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친 최초의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전쟁은 승자의 논리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프랑스가 이겼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패배한 쪽은 고스란히 역사의 멍에를 뒤집어썼을 것이다. 그러나 호찌민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철저한 준비와 계산, 탁월한 지휘체계로 상대의 허를 찔러 역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디엔비엔푸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베트남 국민의 가슴 속에 뜨겁게 남아 있다. 비록 가난한 나라지만 베트남 사람들의 자존심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높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호안끼엠 호수를 거니는 노인네들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가득하지만 여유와 자신감이 흐른다.
  • “크림처럼 쉽게 러시아와 합병 못할 것”

    “크림처럼 쉽게 러시아와 합병 못할 것”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가 지난 3월 러시아로 합병됐다. 미국 등의 제재 속에서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림 합병을 승인했다. ‘신냉전시대’로 치닫던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은 크림을 러시아에 내주는 대신 우크라이나 본토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는 선에서 봉합되는 듯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동남부 친러 지역에서도 잇따라 독립시위가 벌어졌으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친러 민병대 간 유혈충돌이 이어졌다. 결국 11일 동부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에서는 분리독립을 묻는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동부는 ‘제2의 크림’이 될까. 우크라이나 사태의 궁금증을 정리했다. Q: 우크라 사태 촉매제는 A: EU와의 협력 백지화 탓 지난해 11월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 대통령이 유럽연합(EU)과 추진하던 포괄적 협력 협정을 백지화한 것이 촉매제가 됐다. 야누코비치는 친러 성향인 데다 극심한 경제위기 탓에 ‘천연가스 공급 30% 인하, 150억 달러 차관’이라는 러시아의 당근책을 받아들이며 EU를 등졌다. 이후 서유럽과 친밀한 야권이 3개월간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집회규제 강화법 등을 들고나온 정부의 강경책에 시위가 확산되며 정국 혼란이 이어졌다. Q: 시위는 어떻게 전개됐나 A: 최악유혈 뒤 크림 독립선언 지난 2월 20일 시위에서 100여명이 사망했다. 1991년 옛소련에서 우크라이나가 분리된 후 최악의 유혈 사태였다. 성난 시위대에 밀려 야누코비치는 러시아로 피신했고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언론은 이 변혁을 ‘유로마이단’(친유럽혁명)이라고 불렀다. 친유럽과 친러시아로 갈린 혼돈 속에서 주민 60% 이상이 러시아계인 크림은 주민투표를 통해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어 동남부 지역으로까지 독립 요구가 번졌다. 우크라이나 정부의 뒤에는 서방이, 분리주의자들의 뒤에는 러시아가 있었다. Q: 왜 가난한 우크라 노리나 A: 푸틴 ‘강한 러시아’ 밑그림 유라시아 중심에 있는 우크라이나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세계 패권의 승패가 갈릴 수 있다. 푸틴은 옛소련 국가들 간 협력 및 유대를 통해 ‘강한 러시아’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옛소련 중심 국가이자 러시아계가 많은 우크라이나를 놓칠 수 없다. 게다가 러시아의 주요 수입원인 천연가스 수출 50%가 우크라이나를 경유한다. 또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이미 가입한 서유럽 연합군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우크라이나마저 동참하면 러시아는 군사적으로 고립된다. Q: 제2의 크림반도 될까 A: 러시아계 40%뿐…어려워 전문가들은 크림 때와 달리 합병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한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소련 시절인 1954년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우크라이나에 우의의 상징으로 준 것이 크림반도다. 러시아계 인구가 많았고, 자치공화국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합병하기 쉬웠지만 동부 지역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동부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은 30~40%에 불과하고 역사적 배경도 크림과 다르다. 홍완석 한국외대 교수는 “국제사회가 크림 합병은 사실상 용인했지만 러시아가 국경을 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Q: 동부 향후 정국은 A: 독립 정당성 없어 혼란 지속 혼란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홍 교수는 “크림의 경우 주민들의 전폭적이고 자발적인 의사가 있었지만 동부 지역은 러시아가 시위 배후세력으로 지목될 만큼 정당성 문제도 있고 정부군의 반발이 강해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앞으로도 혼란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우크라이나 사태는 우크라이나만의 문제나 미국·러시아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닌 두 제국주의의 세력 싸움이라고 봐야 한다”면서 “그러나 러시아가 엄청나게 넓은 동부 지역까지 감당할 만큼 경제적·정치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백민경 기자 white@seoul.co.kr
  • [지구촌 책세상] ‘예쁘장한 에디로 살기’

    [지구촌 책세상] ‘예쁘장한 에디로 살기’

    “이거나 쳐먹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스물한 살의 에두아르 루이의 첫 소설 ‘예쁘장한 에디로 살기’는 이처럼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연약하고 계집아이처럼 행동하는 작은 체구의 에디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는 놀림감이었다.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에 부합하지 않는 그를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에 당황한 부모는 에디에게 축구를 시키거나 여자애들과의 데이트를 장려하면서 그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가 성장한 피카르디에서 남자들은 강해야 하며 남들 앞에서 주먹다짐과 공격성을 보이면서 남성성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남자들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설을 듣게 되었고, 에디에게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모욕적인 언사는 그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이후에 더욱 심해진다. 자선 급식 단체를 통해 끼니를 해결하는 가난한 노동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막내 여동생이 유아원에서 가져오곤 하는 그림들로 벽의 구멍을 막고, 곰팡이로 뒤덮인 집에 끼어 살면서도, 에디는 절대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묵묵히 견뎌낸다. 고등학교 입학 전날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과거의 굴욕을 내려놓은 후 가족들에게서 도망치기로 결심하는 순간까지. 현재 파리에 살면서 고등사범학교에 다니는 작가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사회계층 형성 구조 연구에 천착하고 있으며 첫 소설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증오나 그들로 인한 좌절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며, 알려지지 않은 서민 계급의 생활상을 조명하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던 용어와 말투를 그다지 비참하지 않은 듯 담담하게 재현하며 그가 직면해야 했던 극적인 상황들과 사회적 혹은 개인적인 무력감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거부감이나 스스로의 실패에 기인한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벼락 출세를 실감하고 있을 이 젊은 청년이 걸어온 길을 고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엄청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그의 소설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프랑스 서민계급에 관한 사회학적 증언으로서 오늘날 다시 한 번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설에 묘사된 사회적 불행은 과연 사실인가. 아니면 에두아르 루이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래티시아 파브로 (주한 프랑스문화원 출판진흥담당관)
  • [독자의 소리] 입양, 신중하게 판단하고 준비해야/방인호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5월 11일은 입양의 날이다. 입양의 날은 ‘한 가정(1)이 한 아동(1)을 입양해 새로운 가정(1+1)으로 거듭난다’는 의미로 건전한 입양문화 정착 및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해 제정됐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 때문에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는 입양정책이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는 고아수출국의 오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입양가정에 대한 가슴 훈훈한 사연들이 소개되면서 우리 사회도 입양에 대한 인식 변화와 관심이 증대됐다. 2012년 통계를 보면 전체 1880명의 입양아동 중 국내입양은 1125명, 해외입양은 755명으로 국내입양의 저변이 크게 확대됐다. 또한 입양 시 법원 허가를 의무화한 입양특례법이 시행되면서 양부모 자격요건과 입양절차 등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마련됐다. 입양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입양아동을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양육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춰야 하고 소정의 교육과정도 이수해야 한다. 입양절차도 까다로워져 가정방문 조사, 교육이수, 가정법원 허가 등을 받으려면 출산을 준비하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입양을 결심했다가 포기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한번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큼 신중한 판단과 준비가 필요하다. 입양은 함께 나누는 행복이며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편견 없는 시선 속에서 입양아동과 입양부모 모두가 입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한다. 방인호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 [문소영의 시시콜콜] 국가 개조가 아니라 리더십 개조다

    [문소영의 시시콜콜] 국가 개조가 아니라 리더십 개조다

    옛날에는 자녀가 많아도 “저 먹을 것은 타고 난다”며 태평했다. 1960년대에도 5~8남매를 어렵지 않게 봤다. 서울 중구 장교동의 50대 중반 치과의사는 “형제만 다섯인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경쟁하느라 힘들었다. 반찬이라고는 총각김치 하나 올라왔는데, 밥상에 앉자마자 총각 무 하나를 밥그릇 속에 묻어둔 뒤에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고 하며 낄낄댔다. 한창 자랄 나이에 먹을 게 충분하지 못해 밥상 앞에서 다투는 자식들을 보면서 주린 배를 하고도 부모들은 행복했던 게 아닌가 싶다. 옛 어른들의 낙관주의를 ‘못 배우고 무능한 사람들의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치부했던 정부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에서 더 나아가 “하나만 낳아도 지구는 만원”이란 산아제한 표어를 남발했다. 정관수술자에게는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이런 표어를 청소년기에 각인한 세대들이 30~50대들이다. 정부의 확신에 찬 캠페인 덕분에 그 세대들은 무자녀거나 한두 명만 겨우 낳았고, 한국은 세계 최저출생률을 자랑(?)하는 나라로 ‘개조’됐다. 그러나 이제 정부는 저출산 때문에 산업생산력이 저하되고 고령화가 사회적 문제라고 또 난리다. 저출산은 어찌 보면 20~3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국가정책을 신뢰하고 국민이 열심히 따라온 덕분이다. 그러니 대통령이나 정부가 또다시 어설픈 국가개조를 선언하고, ‘나만을 따르라’고 국민을 윽박지르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오히려 ‘리더십 개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터무니없는 낙관이라며 비웃던 “저 먹을 것은 타고난다”는 표현을 되돌아본다. 아기가 쌀 짐을 짊어지고 태어날 리는 만무하지만, 그 아기의 탄생과 성장을 한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의 일가친척과 이웃,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축복하고 보살펴 주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심봉사의 딸 심청이도 마을 아주머니의 동냥젖 덕분에 효심이 가득한 소녀로 자라지 않았는가 말이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내 새끼’만 잘 자라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자식도 잘 자라고 성장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는 공동체 의식이 살아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네 자식이었으면 그렇게 구조했겠느냐’는 반문은 그래서 뼈아프다. 단원고 학생을 자녀로 둔 팽목항의 유가족 중 한 분이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가정에 이제 가난만 남았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도 한 마을이, 더 나아가 제대로 된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요즘처럼 절실할 때가 없다. symun@seoul.co.kr
  • ‘노상방뇨’ 하는 사람들, 물대포 쏴 저지 화제

    ‘노상방뇨’ 하는 사람들, 물대포 쏴 저지 화제

    ‘노상방뇨’중인 사람들에게 물대포를 쏴 망신을 당하게 하는 영상이 공개돼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달 30일 유튜브에 올라온 ‘방뇨탱커’(The Pissing Tanker)란 제목의 1분 22초 영상에는 인도 뭄바이의 노상방뇨 세태를 보여준다. 가난해도 행복한 나라, 인도는 최근 태국이 ‘놀랄만한 태국’이라는 관광용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어 성공한 데 자극을 받아 ‘클린 인도’(Clean India) 만들기에 한창이다. 영상은 먼저 길거리에서 무차별 방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벽이나 나무, 쓰레기통 할 것 없이 노상방뇨를 하는 이들에게 노란색 ‘방뇨탱커’를 탄 익명의 활동가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물대포를 연신 쏘아댄다. 방뇨하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물세례에 당황해 도망치거나 거센 물줄기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행인들과 외국관광객들은 웃음을 터트린다. 물대포를 동원해 거리의 노상방뇨 꾼들을 제지하는 극단의 방법을 사용한 이들은 ‘클린 인도’를 주장하는 익명의 공공배뇨 활동가들로 알려졌다. 이 동영상은 현재 84만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사진·영상=유튜브 손진호 기자 nasturu@seoul.co.kr
  • 빈곤층 복지형 일자리 ‘취업 메뚜기’ 양산

    정부로부터 취업 지원을 받아 일자리를 얻은 취약계층의 상당수가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근로의욕 저하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일자리의 불안정성이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생계급여를 받는 대신 일하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소개받은 열악한 일자리에서 고용과 실업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희망리본사업’을 통해 취업 기회를 제공받은 취약계층 가운데 지난해 12월을 기준으로 6개월 이상 취업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근로자는 61.9%에 불과했다. 고용 형태도 대부분이 단순노무 종사자(26.9%), 서비스 종사자(23.5%) 등 대표적인 저임금 일자리였다. 비정규직 상용직(58.9%)이 대부분이었으나 상대적으로 고용이 더 불안정한 일용직(2.5%), 임시직(2.7%) 종사자도 적지 않았다. 일을 해도 심각한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나마 이 사업을 거쳐 간 취약계층의 고용 형태를 파악하고 있는 복지부는 나은 편이다. 비슷한 성격의 취업성공패키지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고용노동부는 취약계층이 이 사업을 통해 어떤 일자리에 고용됐는지조차 파악하지 않았다. 고용부 관계자는 “취약계층의 취업률이 중요한 것이지, 고용 형태의 문제는 사실상 노동시장 전반의 문제이기 때문에 따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지 고용률을 올리기에만 급급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근로빈곤층 취업 지원 사업은 기초생활수급자 가운데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 취업성공패키지, 희망리본 사업, 자활근로 등을 통해 일을 하게 하는 고용중심 복지정책이다. 만약 근로능력이 있는데도 자활 근로조차 거부하면 수급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자율적 노동이라기보다는 타율적 규제에 더 가깝다. 이런 제재로 인해 기초생활수급자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고는 있지만 정부의 관심이 고용률에 주로 쏠려 있다 보니 소위 괜찮은 일자리로 옮겨갈 확률은 낮다. 경력이 쌓이면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지만 단순노무나 서비스직은 그렇지 않다. 돈을 벌어 자립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생활은 불안정해질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포화 상태인 저임금 노동시장에 취약계층이 몰리면 가뜩이나 적은 임금을 더욱 낮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홍민기 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용중심적 복지정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라는 보고서에서 “고용중심적 복지정책은 결과적으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자리를 맡을 근로자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아베 “日, EU 통합 노려 과거사 청산한 獨과 달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은 나치의 과거를 통렬하게 반성해 온 독일과 달리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의 과오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왜 독일과 다른가? 그 이유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직접 밝혔다. 독일을 방문한 아베 총리는 30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의 인터뷰에서 ‘전쟁 책임을 다루는 문제에서 일본이 독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는 질문에 “유럽에서는 유럽 통합이라는 커다란 목표를 향한 공통의 노력이 있었고 독일도 여기에 동참해야 했다. 따라서 공동체 창설과 더불어 화해가 요구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아시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고 덧붙였다. 독일은 유럽 통합에 참여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과거사를 반성해야 했지만 유럽과 상황이 완전히 다른 아시아에서 일본은 독일의 길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다. 아베 총리는 특히 “일본은 주변 국가들과 타협해 평화협정을 맺고 그에 따라 배상 문제에 관한 진실한 기준을 세웠다”면서 “일본은 전후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을 개발 협력 형태로 지원했다”고 강조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의 긴장 해소 문제에 대해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면서 “이웃 국가들과 어려운 관계에 놓여 있지만 조건 없이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의 경제 발전 성과가 고삐 풀린 무장화로 소모돼서는 안 되며 법규에 기반을 둔 기존 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일방적인 압력으로 현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군비 확장을 비판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베 총리는 2011년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해서도 “독일의 원전 퇴출 결정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원자력을 포기하겠다고 간단하게 얘기할 수 없다. 일본은 원유와 가스 수입 비중이 거의 9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창구 기자 window2@seoul.co.kr
  • 조선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서 먹고살았지?

    조선직업실록/정명섭 지음/북로드/296쪽/1만4000원 먹고사는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오래전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은 무슨 일을 해서 먹고 살았을까. 밥벌이 풍경이 궁금해진다. 농민과 어민, 상인과 무역상, 물건을 지게에 짊어지고 장터를 떠도는 보부상과 왁자지껄 떠드는 주막에서 술을 파는 주모 등도 있겠다. 역사 속의 직업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사회와 생활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 ‘흥부가’를 보면 지지리도 가난한 흥부에게 관청의 이방이 매력적인 일거리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굶주림에 지친 흥부가 나라에서 환곡이나 받아볼까 하고 관아를 기웃거리자 이방이 환곡을 빌려주는 대신 매품팔이를 하라고 권유한다. 고을의 양반이 군영에 끌려가서 매를 맞아야 하는데 대신 맞아 줄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승낙하면 서른 냥에 선금으로 다섯 냥을 준다는 얘기에 흥부의 귀가 번쩍 뜨인다. 흥부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아내는 눈물로 만류한다. 굶어서 허약해진 몸으로 매를 맞다가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신간 ‘조선직업실록’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조선시대 일반백성들의 특이한 직업을 소개한다. 매 잡는 공무원 시파치, 상가에서 대신 울어주는 곡비 등 다양하다. 또한 일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명맥을 이어가는 소방수 멸화군, 신문 발행인 기인(其人), 변호사 외지부, 얼음판매상 장빙업자 등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문헌 속에서 발견한 21개 직업들의 탄생과 소멸, 우여곡절의 역사와 에피소드를 통해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조선은 500년이라는 긴 역사에 수백만명의 인구를 가진 큰 나라였다. 따라서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 주는 직업도 많았다. 이 책은 각각의 직업을 소개하면서 마치 소설의 한 부분과 같이 전개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직업을 소개한 뒤 그 직업과 관련된 옛 건물이나 고궁, 유적지, 박물관 등도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씨줄날줄] 집단 우울증/문소영 논설위원

    ‘세월호 침몰’ 뉴스를 일주일간 지켜본 시민들이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재난뉴스로 도배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카오톡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면서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구토와 탈진 등 신체적 증상과 함께 정신적 허탈감과 무기력증, 죄의식, 분노 등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16일 오전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생방송을 지켜본 사람들의 정신적 충격은 심각한 수준이다. 반드시 구조될 것이라고 믿고 지켜봤던 생방송은 결과적으로 어린 학생들이 수장되는 현장을 실시간으로 고스란히 목격한 참사였기 때문이다. TV 앞에 있었던 시청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스마트폰 사용자들이라면 실시간으로 그 상황을 지켜봤다. 게다가 사고 당일 탑승객 477명 중 단원고 학생들 대부분을 포함해 370여명이 구조됐다는 뉴스를 접한 뒤 안도했던 사람들은 한 시간 뒤쯤 구조자 숫자가 실종자 숫자로 뒤바뀌면서 ‘멘붕’에 빠졌다. 정부의 우왕좌왕과 무능력함을 지켜보는 일주일 동안 속이 새까맣게 탔다. 결국,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채 시신을 수습하는 쪽으로 반전되자 더 큰 무력감과 우울증이 찾아온 것이다. 생환한 안산 단원고 학생과 재학생·교사·학부모들이 받은 충격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국민이 받은 충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침몰하는 대한민국’이니 ‘이게 국가냐’라는 한탄은 그래서 나온다. ‘세월호 침몰’ 이전에도 한국의 집단적인 우울증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중 1위의 자살률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꼴찌 수준으로 행복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평가를 해왔다.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10대, 취업으로 고민하는 20대와 30대, 한창 일할 나이에 명예퇴직으로 집에 들어앉은 40대와 50대, 가난·질병에 시달리는 60대 이후까지 모든 연령에서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한다. 자살예방센터 실무자는 “한국 사회에 자살(自殺)이 어디 있습니까. 다 타살이지요” 라고 한다.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일상적인 구조조정의 시대가 됐다. 그 결과 우리는 더불어 사는 법을 잃어버렸고 좋은 일자리 확대라는 거짓말에 속아 기업의 비도덕적인 이윤 확대를 허용했다. 극소수만 행복하고 절대 다수는 불행하고 위험한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이다. 기업만 성장하고 국민은 어려우면 비정상이 아닌가. 높은 자살률과 집단 우울증, 참사의 재발을 막으려면 기업의 몰염치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걸고, 정치·관료·기업의 유착을 근절해야 한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시론] 오 캡틴, 마이 캡틴!/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시론] 오 캡틴, 마이 캡틴!/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오 캡틴, 마이 캡틴.” 모든 위험을 견디고 항해를 무사히 끝냈지만 캡틴은 죽어 있다. 그래서 휘트먼은 울부짖는다. “일어나라! 그대를 위한 깃발이 휘날리고 그대를 위한 나팔소리가 울리고 있나니.” 시인의 노래는 타이태닉의 침몰에서 현실이 됐다. 승객을 모두 대피시킨 뒤 캡틴은 선교에서 최후를 맞았다. 타이태닉을 노래한 엔첸스베르거는 그 침몰을 돈에 미친 서양문명의 멸망으로 노래했지만 그래도 승객을 구하고 장렬하게 죽은 캡틴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타이태닉에서는 승무원의 생존율이 24%였으나 세월호에서는 학생 승객의 생존율이 23%였다. 타이태닉의 1등실 승객은 76%, 2등실 승객은 40%가 살았지만 3등식 승객은 25%뿐이었다. 그래서 한배를 타도 가난한 자는 빨리 죽는다고 시인은 풍자했다. 그런데 가장 많이 죽은 마지막 3등실 승객의 생존율도 세월호 학생 승객의 경우보다는 높았다. 대신 세월호에서는 승무원의 생존율이 69%로 타이태닉 1등실 승객 생존율과 같았고, 선박직은 100%였다. 그러나 그 어떤 치사한 삶의 부끄러움도 선장의 뺑소니와는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시인은 우리의 멸망엔 어떤 희망도 없다고 노래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캡틴을 부를 수 없다. 승객을 구하고 죽기는커녕 승객을 죽이고 뻔뻔히 자기만 살았기 때문이다. 오, 뻔뻔, 마이 철면피, 아니 시인은 노래할 수도 없다. 그런 노래는 있을 수도 없다. 세월호 침몰 이전 내가 기억하는 대한민국은 신자유주의 규제완화라는 이름의 풍랑에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앞 정권에서 규제완화로 20년만 써야 했을 배가 30년간 쓸 수 있게 바뀌었고, 오로지 기업 이익을 위해 배의 구조가 안전을 위협할 정도로 변경됐으며, 실제 운항에서도 오로지 저비용으로 무리하게 운항됐고, 안전교육을 비롯한 모든 감독이 부재한 탓에 침몰한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한 악덕기업, 아니 살인기업의 돈벌이였다. 그 모든 것이 정부의 묵인하에, 보호하에 이뤄졌다. 게다가 세월호 침몰부터 지금까지 정부의 대응자세는 참으로 가관이다. 선박안전이나 항해재난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높은 관료들이 돌아다니거나 거들먹거리며 앉아서 헛소리만 해대니 제대로 구제가 이뤄질 수 없다. 그런 권위주의 리더십, 아니 리더십의 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 규제완화의 광풍이 밀어닥쳤다. 선장의 말은 딱 한 마디였다. “기다려라.” 대구 지하철 사고에서도 똑같았다. “기다려라.” 그러나 선장은 기다리지 않고 누구보다도 먼저 배에서 내렸다. 기다린 사람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죽었지만 권위주의는 역시 한 마디뿐이었다. “미안하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들은 항상 명령만 하다가 위기 시에는 먼저 도망친다. 그러니 희생된 학생들의 학부모가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하며 국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통곡하고 있을 뿐이어서 너무나 죄송하다. 그냥 부끄러울 뿐이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너무너무 미안하다. 그래서 기다린다. 너희를 죽인 괴물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이길 수 있는 진정한 우리의 캡틴을. 책임과 진실과 사랑의 캡틴을,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가짐과 최후의 한 사람까지 안전과 생명을 지킬 줄 아는 용기의 리더십을 갖춘 캡틴을, 언제나 경청하고 공감하며 치유하는 캡틴을, 섬김과 나눔의 리더십을 갖춘 캡틴을 학수고대한다. 그것은 카리스마로 군림하는 독재의 리더가 아니라 하인처럼 봉사하는 리더십이다. 너희가 살았더라면 그런 새로운 리더십의 풋풋한 캡틴이 되었을 텐데 너무나도 원통하구나. 그래도 살신성인한 사람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서 희망은 있으니 고이 잠들어라. 오 캡틴, 마이 캡틴!
  • [사설] 주검이 된 아이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참담한 아침이다. 솟구치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기 힘든 아침이다. 그래도 새파란 생명이니 저 거친 물살을 어떻게든 이겨내 줄 것이라 믿었던 온 국민의 실낱같은 희망과 애끓는 소망이 하나씩 하나씩 황망하게 무너지는 아침이다. 아이들이 주검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더디고 더딘 구조작업이 참사 발생 나흘째인 지난 주말부터 본격화됐으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진도 앞 검은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것은 좌절과 절망뿐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단 하나의 기적도 우린 낚아올리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첫날인 지난 16일 국민 모두의 눈앞에서 바닷속으로 잠겨 들어간 302명의 생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우린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지 못했다. 시간이 야속하고 바다가 야속하다. 우린 정녕 이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을, 가족들을 이토록 허망하고 속절없이 바다에 묻어야 하는가. ‘아빠 걱정하지마. 구명조끼 입고 애들 모두 뭉쳐 있으니까’라며 외려 가족을 걱정했던 그 의젓한 아이도, ‘어떡해. 엄마 안녕. 사랑해’라며 준비 못 한 이별 앞에서 떨었을 아이도, 참가비 30만원이 아빠에게 짐이 될까 싶어 한사코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 했던 속 깊은 아이도 그냥 이렇게 떠나 보내야 하는가. 이젠 정말 이들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이게 정녕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말인가. 하나 둘 검은 바닷속에서 건져 올려지는 어린 학생들의 주검이 이 아침, 우리에게 묻는다. 국가는 대체 무엇이냐고. 원칙은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잘못 했느냐고. 우린 지금 왜 죽는 것이냐고. 참담한 심정으로 이제 그 답을 준비해야 한다. 바닷속으로 잠기기 직전까지 ‘가만히 앉아 기다리라’는 방송을 믿고, 그렇게 하면 반드시 어른들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라 믿었을 아이들의 주검 앞에서 처절한 마음으로 반성문을 써야 한다. 아이들이 죽음으로 보여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 앞에서 기성세대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얽히고설킨 부조리와 나태와 무모함과 무책임과 무신경을 고백해야 한다. 젊은 초보 항해사에게 배를 맡기고는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나부터 살고 보자며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린 선장이 세월호 참사의 근인(近因)일 수는 있을 것이다. 탑승자 숫자는 물론 적재화물의 개수와 중량도 기록하지 않았을 만큼 허술하게 운영돼 온 연안여객 안전관리도 직접적 요인일 것이다. 엄청난 참사 앞에서 실종자 숫자조차 파악 못 하고 매일 바꿔 불러대며 허둥댄 정부의 무능한 대응도 화를 키운 요인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씩 하나씩 화근(禍根)의 줄기를 잡아 캐내 올라가다 보면 결국엔 ‘기본의 상실’이라는 만화(萬禍)의 뿌리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서로가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상응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기형적이고 불공정한 사회 구조가 적당주의를 낳고, 반칙을 낳고, 부실을 낳는 것이다. 사회 지도층의 책무를 비롯해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공공선의 공적 가치에 있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척박하고 가난한 나라인지를 지금 바닷속 아이들이 일깨워준다. 책임자 처벌과 희생자 보상, 관련 법령 정비라는 뻔한 수습책으로 이번 참사를 끝낼 수는 없다. 재난 대응, 그 너머를 생각해야 할 때다. 국가는 무엇이고, 그 구성원 각자의 책무는 무엇인지 모두가 무릎을 꿇고 그 답을 써야 한다.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조선시대 한양은 ‘경조 5부’ 행정구역으로 구분 오늘의 서울에도 강·남북이라는 지역 차가 실재하지만, 전통적으로 서울은 지독한 지역색이 작용하던 도시였다. 대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양태를 보였다. 조선 500년 내내 개천(청계천)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 두 개 구역으로 양분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산아래 본정통(충무로) 중심의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진화했다. 광복 이후 갈라진 좌우 이데올로기는 결국 국토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끊어놓았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 전개된 남·북한의 체제 안보경쟁이 강남개발을 촉발했다. 이때 서울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양분됐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두 개의 도시로 이뤄졌다. 서구개념으로 치면 강북은 구도심(Old Town)이요, 강남은 신도심(New Town)이다. 한강은 나루터와 나룻배가 사라진 대신 다리로 촘촘하게 이어졌지만 두 도시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격차도 심화된 느낌이다. ‘한강의 기적’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한강 이남의 초고속 성장사였다. 양극화는 한강을 사이에 둔 남과 북 양극에서 빚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만큼 문화적 이질성도 고착화하고 있다. 몇 년 전 조사에서 강남과 강북 아파트의 평균매매가 차이가 3.3㎡당 무려 1337만원이었다. 강남이란 ‘나’와 ‘남’이 다름을 보여주는 주거의 ‘차별 짓기’를 통해 몸값을 부풀린 아파트 왕국이다. 서울 강남·북을 뺨치는 지역색이 조선시대 한양에 존재했다. 도시학자들은 서울을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이중 도시’(Dual City)로 분석한다. 도시사학적 시각에서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눠 본다면 근대 이전 서울은 남촌과 북촌으로, 근대 이후는 강남과 강북으로 양립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서울시청)는 ‘경조 5부’(京兆 5部)라고 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 다스렸다. 오늘날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경기도 시흥·과천·용인·광주였다가 서울로 편입된 한강 이남 10개 구를 제외한 한강 이북 15개 구 가운데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종로·중구·서대문·동대문 등 4개 구가 옛 경조 5부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경복궁과 사대문을 축으로 나눠보면 북부는 경복궁~창덕궁 사이, 동부는 창덕궁~흥인지문 사이, 서부는 돈의문~숭례문 사이, 남부는 숭례문~흥인지문 사이쯤이다. 5부(部)가 곧 5촌(村)이다. ●사색당파, 제사·옷고름·갓끈 등으로 차별화 경조 5부 가운데 북부(가회동·계동·안국동·재동·경운동)와 동부(이화동·동숭동·혜화동·충신동)를 북촌체제로, 서부(정동·새문안)와 남부(필동, 묵동, 남산동·주자동, 인현동)를 남촌 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천을 경계선으로 긋는다면 북쪽은 권문세가와 현역 벼슬아치 그리고 그들을 돕는 아전(衙前) 및 겸인(?人)들의 주거지구였다. 개천부터 목멱산(남산)까지 남쪽에는 지체 낮은 관리나, 퇴락한 양반, 별 볼 일 없는 무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서울연구가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남촌 사람들은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속담은 두 구역 사람들의 기질이나 처지가 그만큼 달랐음을 일러준다”고 분석했다. 동·서·남·북촌이 양반이나 관료 그리고 그들을 떠받치는 아전들의 거주구역이라면 중촌(中村)은 중인(中人)들의 터전이었다. 의관, 역관, 율사, 화원, 도사 등 중인에다 상인, 군속들이 중부(다동·무교동·수표동, 입정동, 주교동, 관수동)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오늘의 을지로와 청계천변이라고 보면 된다. 중인이란 용어도 중부 혹은 중촌에 사는 사람에서 생겼다. 케케묵은 조선의 행정구역인 경조 5부를 들먹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인이 사는 중촌을 제외한 4개의 양반 촌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사색당파(四色黨派)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동인의 거두 김효원(1532~1590)이 낙산 아래 동촌에 산다고 하여 그 일파가 동인(東人)이 되었으며, 이에 맞선 심의겸(1535~1587)이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았다고 하여 서인(西人)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동인 중 남산 아래 진고개에 사는 일파가 남인(南人)이 되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거주하는 몇몇이 북인(北人)을 형성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됐다가 노론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년 이상 득세했다. 노론의 거주지가 이른바 북촌이었다. 풍수에서 한양의 최고 명당은 백악 아래 경복궁이었다. 다음이 응봉 아래 창덕궁과 종묘, 성균관 자리다. 백악과 인왕산 사이 장동·청류계·백운동·옥류동·인왕산동도 빠지지 않았고, 백악과 응봉 사이 지금의 율곡로 일대도 최고 길지의 하나였다. 남산을 바라보는 풍광이 좋고 터가 넓어 권문세가들이 큰 집을 짓고 교류했다. 이에 비해 남산골은 음지였으나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해 하급관리들이 살 만한 곳으로 쳤다. 고종 대인 1864년부터 1887년까지의 기록인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썼다. 조선 말기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주로 남촌에 어울려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붕당(朋黨)은 제사 모시는 법, 옷고름이나 갓끈 매는 법을 서로 달리 하면서 차별 짓기를 했다. 사화(士禍)가 이 같은 지역색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금의 강·남북 구별 짓기가 무색할 지경이다. ●서촌은 새문안·정동, 상촌이나 윗대로 불러야 서울의 지역색과 구역분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1924년 발행된 개벽 6월호 ‘경성중심세력의 유동’에서 소춘은 “경성은 오촌(五村), 양대, 자내(字內), 오강(五江)으로 나뉜다”라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들어 신분과 계층이 세분화되고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이 정해진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촌은 경조 5부의 지역공간과 겹친다. 양대는 윗대(웃대)와 아랫대로 나뉜다. 윗대는 상촌(上村)이라고도 했는데 경복궁 주변의 육조 관아가 있던 사직동·내자동·당주동·도렴동·체부동·순화동·통의동에 살던 아전이나 겸인, 내시의 거주지를 일렀다. 아전이란 ‘관아 앞에 사는 사람’이라는 조어였고, 겸인은 권문세가의 경호원 또는 비서격이었다. 이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궁을 드나들었다. 인사동을 중심으로 중촌에 살던 중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상촌인은 평민 중에서 각 부의 서리 및 공경가의 겸인이 되는 자인데, 그들은 평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정래교는 ‘임준원전’에서 “경성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얻어먹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때때로 의협 있는 무리가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윗대의 풍속을 평했다. 또 이가환은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이다. 그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한 이 적다”라고 윗대의 지역을 구분했다. 요즘 서촌이라고 부르는 경복궁 서쪽지역이 바로 윗대이다. 일제강점기 옛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강제로 합쳐 만든 새로운 동 이름인 옥인동 쪽으로 흐르는 옥계천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에 빗대 서촌이라고 불렀지만 애당초 잘못된 지명이다. 서촌이란 조선시대 경조 5부 중 돈의문 부근을 지칭하던 지명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경복궁의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고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북촌은 동촌이 돼야 할 판이다. 구태여 새로운 지명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윗대 혹은 상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아랫대(下村)는 중촌과 남촌 중간지대를 지칭하는데 지금의 오간수문~광희문 사이쯤이다.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어영청이나 훈련원 소속 군병들이 주민을 이뤘다. ‘개벽’(1924년 6월)에서 “우대(웃대)는 육조 이하 각사에 소속된 이배, 고직 족속이 살되 특히 다방, 상사동 등지에 상고 통칭 시정배가 살았고…아래대(아랫대)는 각종 군속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대전별간파들이 살고…”라고 구역특징을 설명했다. 황성신문(1900년 10월 9일자)은 “사대부의 말투는 극히 화미절이하며, 북촌 사람들의 말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며, 남촌 사람들의 말투는 빠르며, 상촌사람들의 말투는 공경스러우며, 중촌사람들의 말투는 기민하며, 하촌사람들의 말투는 상스러우며…”라면서 조선말 오촌, 양대사람의 인적특성을 총정리했다. 자내란 한양도성을 쌓거나 보수, 경비하고자 한성부가 담당구역을 정한 구역을 말한다. 천자문의 ‘천(天)자’이면 이 글자가 적힌 구간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했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계란이나 채소, 장작을 팔았고 분뇨를 퍼다가 가축을 키웠다. 오강은 한강과 용산, 서강 등 3강에 마포삼개와 망원을 합해 오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강주민들은 나루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루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공, 짐꾼이거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떼다 파는 기가 센 사람들이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최동호 새벽을 열며] 해맑은 소년의 미소 신경림 시인

    [최동호 새벽을 열며] 해맑은 소년의 미소 신경림 시인

    생의 마지막 시집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가지고 출간했다는 신경림 시인의 시집 ‘사진관집 이층’을 읽었다.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맑고 정갈한 마음이 절로 우러난다. 시력 60여년에 가까운 이 시인이 여든을 목전에 두고 펴낸 시집에서는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의연히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온 노시인의 담담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시심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흑백사진에는 팔이 없거나 귀가 없거나 도깨비처럼 새파란 처녀이거나 깡통을 든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는 ‘아득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다. 그들만이 아니다. 40년 전에 그가 살았던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번지에는 치매에 걸린 구십 할머니나 다리 저는 아버지, 그리고 남편을 미워하는 어머니와 가난한 아내가 지금도 살고 있다. 세 번이나 초상을 치러 흉가로 소문난 집에서 정릉으로 주거를 이전하면서도 그는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나 아내를 떠올리기도 한다. ‘늦도록 기다리다가/문을 따주던 아버지의 앙상한 손이 싫다/중풍으로 저는 다리가 싫고/죽은 아내의 체취가 밴 달빛이 싫다/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나이 마흔이 싫다’ 고 토로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시에서 이 모든 고통의 기억들이 노년의 그의 시를 추동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가난을 벗어나서 가난을 되풀이 얘기하는 것은 퇴행적 추억담이 되기 쉽다. 과거의 가난이 추억담을 넘어서려면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확고한 마음의 자세가 오늘을 비추는 힘을 가져야 한다. 과거가 없는 인간은 없다. 고통스럽고 가난한 과거, 그래서 추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거의 체험을 소상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드러내 시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그만의 체험이 아니라 지난 반세기 넘게 함께 살았던 우리 모두의 체험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승자의 편이기보다 패자의 편이었고 강자의 편이기보다는 약자의 편이었다. 그러나 과격하고 거친 목소리로 분노하기보다 중심을 지키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 게 그의 시편들이 지닌 생명력이었다. 그는 화려한 색깔로 다채롭게 노래하지 않는다. 지속적이며 일관되게 자신이 보고 느끼고 살았던 세상사를 담담히 진솔하게 펼쳐놓았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구호를 외치지 않고 강경한 이념을 남에게 강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단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구체적 삶에 뿌리 박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가 지닌 힘이다. 그는 ‘일흔이 훨씬 넘어/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네 좌판도 없어진/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동 시장까지 걸으면서,/마을도 산책로도 개울도 없어진/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메데진에서 디트로이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에프에서/내가 볼 수 없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 고 했다. 이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는 진술인 동시에 그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지난 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이 살았던 세상사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경림 시인의 기억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열 살 전후의 이야기가 불빛처럼 반짝인다. 광산을 해 잘나가던 시절 아버지가 흥성거리던 모습과 일가친척들이 함께 모인 잔칫날은 그에게 풍요로운 축제와 같은 유년의 체험으로 각인돼 그의 시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새파란 칸데라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흔들리던 유년으로부터 8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노래한 그의 시적 업적은 민중시의 시대를 넘어서 디지털 시대의 시에도 소중한 자산이다. 고난의 세월을 견딘 노시인의 시에서 흑백사진을 뚫고 나온 햇살처럼 맑은 소년의 미소를 본다는 것은 한국문학을 위해 커다란 축복이다.
  • 한반도의 호랑이 어떻게 사라졌나 일본인의 사냥기

    한반도의 호랑이 어떻게 사라졌나 일본인의 사냥기

    정호기(征虎記)/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 이은옥 옮김/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에이도스/216쪽/2만원 야생 호랑이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주요 이유로 해로운 맹수들을 퇴치해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이 지목된다. 조선총독부의 ‘조선휘보’에 따르면 1915~1924년(1917·1918년 통계 누락)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호랑이 89마리, 표범 521마리가 사살됐다. 통계에서 두 해가 누락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간에도 일제의 한국호랑이 소탕작전이 강도를 더했으면 더했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정호기’(征虎記)는 1차 세계대전 때 선박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 1917년 11월 20일 도쿄를 출발해 부산으로 입국해 한 달간 조선에 머물며 벌인 호랑이 사냥기록이다. 야마모토는 사냥에 동행했거나 후원한 사람들에게 기념선물로 나눠 주기 위해 사냥 기록과 일기를 엮어 비매품 한정판으로 책을 만들었다. 한국 호랑이의 자취를 추적해 온 한국범보전기금이 일본의 인터넷 고서점에서 가까스로 구했다. ‘정호기’에는 사냥기록을 순차적으로 담은 희귀한 사진 97장을 비롯해 사냥지역을 표시한 지도 2장, 사냥과정 기록, 야생동물의 서식 상황, 포획방법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호랑이 관련 자료가 전무한 국내 상황에서 귀중한 사료다. 야마모토는 강용근, 이윤회, 백운학 등 조선에서 이름을 날리던 포수들을 비롯해 몰이꾼 150여명을 동원했으며 모두 8개 반으로 조를 짜 함경도, 강원도, 금강산, 전라도 등지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일본과 조선의 언론사 기자들도 특파원 형식으로 초대돼 정호군의 활약을 즉각 알렸고, 사냥이 끝나고 경성의 조선호텔과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호랑이 고기 시식회에는 당시의 실력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야마모토가 조선반도에서 호랑이 사냥 이벤트를 벌인 이유에 대해 이항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등은 책 해제에서 “겉으로는 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과 같은 맥락이지만 실제로는 대자본가의 개인적 소영웅심의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 확산 등 복합적 의도가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가난한 인쇄공에서 대자본가로 출세해 조선 반도에 호랑이 덫을 놓았던 야마모토는 1차 대전 종전 후 찾아온 세계적 불황으로 몰락해 1927년 4월 5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도쿄 제국호텔에서 시식회를 연 뒤 10년 후의 일이었다. 한편 이 교수 등은 야마모토 사냥팀에 의해 함경도에서 잡힌 뒤 박제된 호랑이를 교토의 도시샤 고등학교 표본관에서 92년 만에 찾아냈다. 야마모토에 관한 인물정보를 수집하던 중 그가 사냥한 호랑이와 표범을 박제해 자기 모교에 기증했다는 내용을 파악하고 해당 고등학교를 방문, 표본을 찾아내 DNA 시료 채취에 성공했다. 현재 이 교수팀은 채취한 DNA 시료로 한반도 호랑이의 계통분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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