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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의 빛깔 따라 변한, 뉴욕의 세 가지 얼굴

    마음의 빛깔 따라 변한, 뉴욕의 세 가지 얼굴

    오치균(60)은 캔버스에 손가락으로 아크릴 물감을 두텁게 쌓아올리는 독특한 기법으로 이름을 알린 ‘잘나가는’ 화가다. 그것도 아주. 언제나 그랬을까? 30년 전 뉴욕의 브루클린대학원에서 수학하던 시절 그의 삶은 무척 고되고 퍽퍽했다. “뉴욕에 살았지만 센트럴파크도, 마천루도 모든 게 음산하게만 보였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지하철의 홈리스들, 죽은 쥐… 그런 것들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뉴욕을 다시 찾았을 때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어요.” 서울 종로구 삼청로의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오치균의 개인전 ‘뉴욕 1987~2016’은 작가가 1980년대 중반 미국 유학시기부터 현재까지 지속해온 ‘뉴욕 시리즈’를 통해 30년간의 작업과 인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총 7개 전시실에서는 뉴욕을 주제로 한 작품 100여점을 세 가지 시기로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시각적이고 정서적인 변화를 잡아내고 있다. 유학시기에 해당하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가 1기, 개인전 준비를 위해 1992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 잠시 정착했던 1995년까지가 2기, 그리고 2014년 가을 다시 뉴욕을 찾았을 때 받은 인상을 담은 것이 뉴욕 3기다. ‘홈리스’, ‘피규어’, ‘지하철’ 등 1기의 작품들은 어둡고 음산하다. 어두운 거리의 부랑자와 좁은 방안에서 기묘하게 일그러진 자세를 취한 인물들은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어둠에 갇혀 있던 가난한 이방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설경’ 연작과 ‘엠파이어 스테이트’로 대표되는 2기의 작품들은 경제적으로나 생활 면에서 안정됨에 따라 도시의 건물 외형이 주는 기하학적 조형미로 관심이 전환된다. 일상의 소소한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안정된 심리 상태를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뉴욕 3기에서 보여주는 ‘센트럴파크’, ‘브로드웨이’,‘1번가’는 이전보다 한층 밝고 경쾌해진 색감과 마티에르로 뉴욕의 풍경을 묘사했다. 같은 건물을 그린 그림이지만 20년 전에는 네모진 창문을 획일적으로 그렸지만 최근의 작품에선 노랗게 단풍 든 풍성한 나무가 건물 앞에 등장해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어둠의 장막이 거둬진 이유에 대해 “먹고 살만해져 마음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라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같은 공간이지만 머물렀던 당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껴졌고, 그런 정서가 그림에 표현된 것이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뉴욕’ 시리즈 외에 ‘서울’, ‘사북’, ‘산타페’, ‘감’ 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한 오치균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경매를 통해 가격이 올라가고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제는 자유롭게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고향의 정서를 보여주는 기존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 전시는 4월 10일까지. (02)720-5114.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서울광장] 지금 동주가 그리운 것은/황수정 논설위원

    [서울광장] 지금 동주가 그리운 것은/황수정 논설위원

    영화 ‘동주’를 며칠 전에야 봤다. 주말 심야의 극장 안은 한적했다. 뒷줄에 앉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 어깨너머에서 자주 소곤거렸다. 젊은 아버지는 시인 윤동주와 해방공간을 미리 공부하고 온 듯했다. 이해가 쉽지 않은 대목마다 딸에게 해설을 붙여 줬다. 나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부녀의 대화가 계속돼도 괜찮다는 작은 동조의 뜻으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에야 돌아봤다. 소녀는 중학생쯤이었다. 영화라도 있어 다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흐뭇했다. “동주, 동주”라고 사람들이 시인을 친구처럼 부르고 있다. 영화의 흥행 덕분이다. 멀리 잊힌 시인을 기억하려는 이 시간은 낯선 즐거움이다. 옛 시인들은 서점가에도 줄줄이 현재형으로 소환됐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백석의 ‘사슴’,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 초판본 시집들이 10만부 넘게 팔리고 있다. 20~30대 독자들의 인스타그램 인증 열풍은 진기하기까지 하다. 시인 정지용과 백석이 영화 속에서 호명되지 않았더라면 언감생심. 청년 세대가 무슨 수로 그들을 알아보고 있을까. 책꽂이 장식용으로 시집을 사고 있다 한들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해방공간을 배경으로 문학의 시대정신을 웅변한 영화가 ‘동주’다. 이 저예산 영화의 폭발력은 감독도 몰랐지 싶다. 영화는 자본의 논리에 가장 예민한 문화 영역이다. 관심권 바깥의 문학과 오래된 시인을 조명한 시도만으로도 ‘동주’의 파장은 신선하다. 힘있는 영화가 힘없는 문학을 챙겼다는 착시현상까지 일으킨다. 흑백 다큐멘터리 같은 소품의 조용한 흥행은 의미가 더 값지다. 국어책 귀퉁이에서 잊혔던 윤동주가 살아났으니, 우리 문학도 혼수 상태에서 벗어날 가망이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이 시대에 문학은 스스로 이목을 끌 힘이 없다. 느리고 가난한 문학한테는 빛의 속도로 진행되는 모든 유행들이 유해 환경이다. 힘과 속도를 갖춘 쪽의 물리적인 전방위 지원이 꼭 필요하다. 미국 문단은 그래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업어 줘도 모자란다. 독서광인 오바마는 미국 소설을 국제적으로 팔아 주는 초특급 실력자다. 그의 휴가철 도서 목록은 늘 핫이슈다. 그가 읽었다고 소문나지 않았다면 ‘퓨러티’(조너선 프랜즌), ‘더 화이츠’(리처드 프라이스) 같은 소설을 세상이 관심 갖기 어려웠다. 비평가들이나 주목하는 미국 작가 제임스 설터의 소설이 우리 서점에서 팔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소설, 그것도 핫트렌드의 소설을 읽는 대통령 ‘셀렙’은 국민에게 행복이다. 정치력과 별개로 오바마의 인간적 매력이 좀처럼 후퇴하지 않는 것은 그런 모습 덕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시장에 파장을 만들 줄도 아는 지도자가 우리한테도 있으면 좋겠다.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 이런 책 말고, 대통령의 감수성을 교감할 수 있는 소설과 시집이 소문만 나도 문학시장에는 생기가 전해질 것이다. 청와대 진돗개 이름을 공모했던 대통령의 트위터에서 “시인 김수영 전집을 교보문고에서도 구하기 어렵다는데” 한마디만 걱정해 줘도 문학판은 움직여질 수 있다. 사람들은 김수영이 궁금할 것이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시인들의 시인’의 작품집이 어째서 절판 위기인지 대책을 살필 것이다. 문학과 담쌓고 지내게 생긴 정치인들은 페이스북에서 즐거운 뒤통수를 좀 쳐 주면 안 되는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현역 시인의 최신작을 언급했다고 하자. 동대문시장에서 순대 접시를 들고 다니는 선거 이벤트보다 공감 효율은 몇 배 크고 근사해진다. 문학의 우회로로 데려가면 누구든 마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그 효용을 왜 알아보지 못하는지 안타깝다. 올해가 셰익스피어 타계 400주년이라고 영국은 온통 난리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연초에 국내 일간지에 특별기고까지 했다. 지난달 움베르토 에코가 영면했다고, 세상은 책의 앞날을 걱정한다. 우리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다. 박경리, 이문구를 당장 어떻게 해야 잊지 않을지 그 걱정부터 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걱정해야 한다. 지난해는 서정주, 박목월, 황순원, 강소천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힘없는 문단도, 힘있는 문체부도 아무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 기별도 없이 문득 우리 곁에 돌아온 윤동주가 더 애틋하고 그리운 이유다. sjh@seoul.co.kr
  • [고전으로 여는 아침] 소크라테스가 받은 최고의 선물

    [고전으로 여는 아침] 소크라테스가 받은 최고의 선물

    기원전 5세기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아테네에서는 시민 누구나 민회에서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천명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탁월한 언변과 용기가 필요했다. 자연스레 연설의 비법을 가르치는 소피스트가 최고의 인기 직업으로 부상했다. 프라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처럼 유명한 소피스트들은 연설 교습의 대가로 비싼 수업료를 받아 큰 부를 쌓았다. 소크라테스(BC 470~BC 399)는 소피스트들이 참다운 지혜가 아닌 말재간과 터무니없는 궤변을 가르친다고 비난했다. 그는 수업료를 받지 않고 청년들이 아름다운 영혼과 비판적 지혜를 갖추도록 가르쳤다. 이런 탓에 소크라테스는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아내 크산티페의 바가지 긁는 소리를 참고 견뎌야 했다. 로마의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BC 4?~65)의 저서 ‘베풂의 즐거움’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빈궁한 생활을 안쓰럽게 여기고 무상 교육의 은혜를 갚기 위해 자기 능력껏 여러 선물을 바쳤다. 특히 명문 가문의 부자였던 알키비아데스는 넉넉하게 선물을 했다. 그런데 아이스키네스(BC 390~BC 314)는 너무 가난해 아무것도 바칠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소크라테스에게 자신의 처지를 고백했다. “저는 가난해서 선생님께 드릴 변변한 물건은 없고, 바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저 자신뿐입니다. 선생님, 저라도 기꺼이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서운해 하기는커녕 최고의 선물을 받은 듯 격려했다. “너 자신보다 더 큰 선물이 또 있더냐. 설마 너 자신을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선물로 받은 너 자신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더 훌륭하게 만들어서 되돌려주마.” 아이스키네스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충실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소크라테스는 약속대로 아이스키네스를 아름다운 영혼과 지혜를 갖춘 청년으로 키웠다. 아이스키네스는 소크라테스가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민회의 사형 언도를 받고 독약을 마실 때 임종을 지켰다. 그 뒤로 소크라테스의 참모습을 전하는 저작을 많이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청년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고, 아이스키네스는 최고의 선물로 그 은혜에 보답했다. 선물은 선의를 표현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선물은 금전적 가치의 크기보다 주는 사람의 정성과 의도가 더 소중하지 않을까.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kipeceo@gmail.com
  • 오일머니 ‘펑펑’ 쓰던 카타르 국민들…요즘은 ‘헉헉’

    매달 신용카드는 한도초과에 은행대출금을 갚고 나면 빠듯한 생활. 요즘 우리네 얘기이기도 하지만 세계 최대복지혜택으로 부러움을 사는 카타르 국민들의 지갑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방대한 천연가스 매장량 덕에 30만 카타르 국민들은 넉넉한 정부 보조금과 무료 의료혜택 등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격이 곤두박질치면서 카타르 정부도 예전만큼 보조금을 베푸는 데 관대하지 못하게 됐다. 사정이 이러한데 최신 스마트폰부터 유명 디자이너의 웨딩드레스까지 개인의 수입을 넘어서는 소비를 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다. 로이터 통신은 일부 카타르 국민들이 은행으로부터 막대한 대출을 받아 분에 넘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카타르 대학의 연구결과를 인용해 최근 보도했다. 카타르 대학의 사회와 경제 설문조사기관은 “카타르 국민들이 운이 좋고 행복하다는 생각은 이제 잘못된 신념”이라며 “많은 카타르 국민들의 수입이 소비생활수준에 못 미친다”고 했다. 은행 대출규제가 느슨하고 사치 생활이 보편적인 걸프국가에선 개인부채가 흔한 일이고 아직 카타르의 전반적인 경제 체재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고 통신은 덧붙였다. 2014년 카타르 국가 발전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대개 6만8700달러(약 8300만원) 이상 부채를 갖고 있는 가계 75% 중 소수만이 체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카타르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리해고나 휘발유가격 상승 등을 고려하면 채무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것. 카타르는 에너지가격이 고공행진하던 2014년 중반까지 국가 경제붐이 일어났고 생활수준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한 시민은 “가난해 보이지 않으려면 최신 모델의 시계, 차, 휴대폰을 갖고 있어야 한다”며 “사람들은 사회의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돈을 가진척하게 된다”고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통신에 따르면 카타르 국민들은 사회적 압박에 따른 부채에 대해 사치 문화와 과시적 소비뿐만 아니라 흥청망청 살아도 친척들이나 온정주의적인 정부의 도움으로 구제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든 카타르의 ‘복지 신드롬’도 탓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카타르 국민들은 사실상 담보도 없이 연봉의 몇 배나 되는 돈도 은행에서 자유로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부채 문제를 개인의 검약하지 못한 소비습관이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결혼식 같은 행사에 쓰는 비용에 제한을 두고 이를 어길 시 벌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정부가 은행을 좀더 엄격하게 규제해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카타르 당국은 2013년 ‘부채는 불명예’라는 캠페인을 벌이며 부채로 인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들의 경각심을 드높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한편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카타르 등 걸프협력기구(GCC)의 작년 정부부채는 400억 달러에 달했다고 보고했으며 GCC의 올해 총 정부부채는 450억 달러로 작년보다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윤나래 중동 통신원 ekfzhawoddl@gmail.com
  • [알쏭달쏭+] 자존감, 여성보다 남성이 높다고?

    [알쏭달쏭+] 자존감, 여성보다 남성이 높다고?

    자존감은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자존심과 달리,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감정을 가리킨다. 이 감정은 학업 성적과 리더십, 위기 극복 능력, 대인 관계 등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쳐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존감의 남녀 성격차는 선진국이 후진국보다 훨씬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캠퍼스와 네덜란드 틸뷔르흐대 공동 연구진이 전 세계 48개국에서 16~45세 남녀 98만5000명 이상의 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존감이 생기며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자존감이 높은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존감에 관한 성별 격차는 서양의 산업 국가들이 현저하게 큰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 자료는 ‘고슬링-포터 인터넷 인격 프로젝트’(Gosling-Potter Internet Personality Project)라는 연구 데이터로 1999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수집한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사춘기부터 성인기까지 자존감은 나이에 따라 상승하는 경향이 있으며, 전 세계 모든 나이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자존감이 높은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국가별 결과에서는 흥미로운 결과가 일부 발견됐다. 연구를 이끈 빕게 블라이도른 박사는 “구체적으로, 더 큰 성 불평등을 가진 가난하고 집산주의(주요 생산수단을 공유화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보는 정치 이론)적이고 개발 도상국인 국가들보다 부유하고 개인주의적이며 평등주의적인 성 평등이 높은 선진국 쪽이 자존감에 더 큰 성별 격차가 있었다”면서 “이는 남녀에서 자존감의 발달을 유도하는 특정 문화의 영향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태국과 인도네시아, 인도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는 자존감에 관한 성별 격차가 적었지만, 영국과 네덜란드 등 국가에서는 상대적으로 컸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은 앞서 나온 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성별 격차가 컸지만 다른 선진국들보다 적은 편이었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나이에 따른 자존감 변화가 일정한 것으로 나타나 그 배경에 대한 국내 학계의 추가 연구 필요성을 제기했다. 블라이도른 박사는 “지난 20년간 나이와 성별에 따른 자존감 차이에 관한 많은 연구에선 남성이 여성보다 자존감이 높고 남녀 모두 나이에 따라 단계적으로 자존감이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런 확고한 연구결과는 나이나 성별에 따라 차이가 나는 자존감의 서로 다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실증적인 기초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 같은 결론을 약화할 수 있는 하나의 문제점은 이전 연구가 모두 서양의 교육 수준이 높은 산업화가 진행된, 풍부한 민주주의 경험을 가진 국가만을 검토해왔다는 것”이라면서 “우리 연구 목적은 성별과 나이가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을 가장 놀라게 한 점은 문화의 차이에도, 자존감의 성별과 나이 차이는 서양 특유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일반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서 관찰됐다는 것이다. 블라이도른 박사는 “이 현저한 자존감의 성별과 나이에 따른 차이점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작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호르몬 영향 등 보편적인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나 일반적인 남녀 역할 등 보편적인 문화적 메커니즘 중 하나일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보편적인 영향이 전부는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양한 국가에서 성별과 나이 차이에서 생기는 차이는 남녀의 자존감 발달에 미치는 문화 고유의 영향이 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말했다. 그동안 자존감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은 자존감의 성별 격차가 현저한 산업화한 서양 문화에 한정돼 있었으므로 이런 연구 결과는 중요하다고 블라이도른 박사는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번 연구는 문화적인 힘이 자존감 형성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는지에 관한 이해를 깊게 만든다. 더 자세한 연구를 진행하면 자존감을 촉진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자존감 이론과 설계 개입을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심리학회(APA)가 발행하는 심리학 전문 학술지 ‘성격 및 사회 심리학지’(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최신호에 실렸다. 사진=ⓒ포토리아(위), 성격 및 사회 심리학지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정호승 시인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겨울의 스산함은 사라졌지만, 새봄의 훈풍은 아직 깃들지 않은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정호승(66) 시인이 성당 앞 계단을 부지런히 내려왔다. 환갑보다는 고희에 더 가까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맑은 얼굴을 하고서였다. 신자들에게 강연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요즘 ‘주’(시)와 ‘객’(강연)이 바뀐 것 같아 강연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워낙 와달라는 요청이 많아 생각처럼 줄지는 않는군요.” 이날도 평생 그의 시를 관통해온 ‘사랑’에 대해 강연을 했다는 그는 성당 앞 카페에서 3시간 동안 시와 인생, 세월과 나눈 사랑 얘기를 들려주었다. -1963년의 어느 봄날. 까까머리 중2 교실에 짝짝짝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앞에 서 있던 나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친구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호승이는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거야.” 시(詩)라는 걸 난생처음 써봤던 그때, 국어 선생님은 내가 지은 시 ‘자갈밭에서’를 반에서 가장 잘된 작품으로 골라 낭독을 시키셨다. 그게 내가 시와 맺은 인연의 출발점이었다. -내가 다닌 대구 계성중학교는 박목월, 김동리 등 문단의 거목들을 많이 배출한 영남 지역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다. 당시 교사들 중에도 현역 문인들이 꽤 있었는데 국어를 가르쳤던 김진태 선생님도 등단한 수필가셨다. 시 낭송이 있고 얼마 후 담임 선생님이 조회시간에 “교내 백일장에 누가 나가면 좋겠느냐”고 물으셨다. 국어 수업의 기억이 또렷한 반 아이들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나를 지목했다. 솔직히 난 그때 백일장의 뜻도 몰랐다. ‘백일 동안 어딜 좀 다녀오는 건가?’ -학교 운동장 너머 솔숲에서 백일장이 열렸다. ‘불’을 주제로 시나 산문을 쓰라고 했다. 나는 ‘등불’이란 제목으로 시를 썼다. ‘스스로 발광체인 나’로 시작했는데, 발광체는 바로 며칠 전 물상 수업에서 배웠던 단어였다. 덜컥 장원이 됐다. 상으로 학교 매점에서 쓸 수 있는 1000원짜리 종이표를 주었다. 그 맛있던 30원짜리 삼립 단팥빵을 30개나 사고도 돈이 남았다. 친구들에게 크게 한턱을 내고 나니 어깨가 으쓱거려졌다. ‘이런 식으로 하면 공짜 빵을 계속 먹을 수가 있겠구나’ 매월 교내 문예원고 모집 때마다 시를 써 보냈고, 그때마다 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공책도 사고 체육복도 사면서 든 생각. “이걸 평생의 일로 삼을 수도 있겠구나.” -당시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다. 백일장 장원의 여세를 몰아 ‘석의 심정’이라는 제목의 산문을 보냈더니 우수작으로 뽑혔다. 이후 고교 시절까지 계속 글을 보냈고, 그때마다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박남수, 박목월, 박두진 등 쟁쟁한 시인들이 직접 나의 시에 대해 평을 해 주셨다. 그분들의 평을 보니 가슴이 뛰었다. 그런 식으로 시를 스스로 공부했다. -우리 집안의 뿌리는 대구다. 아버지는 대구농림전문학교를 나와 은행원이 되셨는데, 이 지방 저 지방 전근이 잦으셨다. 내가 6·25 전쟁이 터지기 몇 달 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것도 아버지께서 상업은행 하동지점에 근무하셨기 때문이다. 경기 평택 등지에서 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에 완전히 정착을 했다. 그때 명동 상업은행 본점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서울이 싫다며 고향으로 오셨다. 한참 후에 집안이 쫄딱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오게 됐는데, 만약에 그때 일찌감치 서울에 정착했더라면, 그래서 내가 계성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리고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해준 ‘가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내가 중3 때 사업을 하겠다며 은행을 나오셨다. 하지만 마음만 앞섰지, 경영에 대한 감이나 수완은 없으셨다. 이를테면 당신이 운전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 말을 듣고 택시회사를 차린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1년 만에 퇴직금을 전부 날리고 커다란 빚을 졌다. 난생처음 가난을 맛봤다. 부지런한 어머니 덕에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기마다 학비를 내는 게 벅찰 정도였다. -1967년 고3이 됐다. 대학엔 가고 싶은데, 앞이 안 보였다. 공부라도 잘해야 빚을 내서 대학 등록금 마련할 생각도 해볼 텐데, 내 성적은 딱 반에서 중간 정도였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경희대 문예장학생 제도였다. 경희대가 주최하는 백일장이나 전국고교생문예현상모집에 장원으로 당선되면 장학금을 받고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경희대 백일장에 나갔다. 하지만 나는 장원은커녕, 차상도 차하도 아닌 참방(參榜)에 머물고 말았다. 장려상쯤 되는 건데 그걸로는 문예장학생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후일에 내 스승이 되신 조병화 선생은 “상위권에 올리자니 문제가 있고, 떨어뜨리자니 아깝다”고 평하셨다. 대구로 내려오는데 기차 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아직 고교생문예현상모집이 남아 있었다. 시 부문을 포기하고 평론 부문으로 종목을 바꿨다. 원고지를 100장 이상을 써야 하는데 시간이 빠듯했다. 결국 어머니는 아들의 부탁을 받고 팔자에 없는 거짓말을 담임 선생님에게 해야 했다. “우리 호승이가 몸이 너무 아파서 1주일간 학교를 쉬어야겠네요.”(나중에 꾀병임을 알게 된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맞아야 했지만…) 집안에 틀어박혀 나의 첫 평론 ‘고교 문예의 성찰: 고교시를 중심으로’를 완성했다. 그게 최우수작이 됐고, 1968년 3월 나는 당당히 경희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입학 장학금의 유효기간은 단 1년이었다. 장학금 규정상 2학년 이후에도 계속 받으려면 신춘문예 등을 통해 등단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신나게 놀 때 나는 학업을 유지하기 위해 자취방에서 도서관에서 시를 썼다. 그러나 당선의 문턱에서 계속 미끄러졌다. 한 해 휴학까지 했는데도 등단이 안 됐다. 친구들보다 군 입대를 일찍 했던 것도 등록금이란 화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군에서도 신춘문예에 계속 투고를 했다. 제대하기 직전인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로 당선이 됐다. “이제는 학비 걱정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겠구나.” -사람들에겐 막연한 선입견 같은 게 있다. ‘시인은 가난과 가깝고, 일상을 방기하곤 한다’는 인식이다. 난 그게 싫었다. “시인이라도 열심히 일하면 가난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40대 초반까지 잡지사 기자 생활을 열심히 했다.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야 시 창작을 위한 시간도 더 내고 공부도 더 많이 하면서 결과적으로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시인’은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이 안 된다. 아주 잘 팔리는 시집을 1년에 한 권씩 내더라도 생활이 안 된다. 나만 해도 시집 판매량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 텐데도, 그것만으로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수준까지 벌지 못했다. 그래서 잡지사 생활 때 열심히 저축을 했고 그걸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 술도 자제했고, 밥은 회사 식당에서 먹었다. 운전도 못하고, 골프는 채도 한번 잡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굶기지는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고, 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서울에서 50명을 뽑는데 8등을 했다. 뒤늦게나마 내가 공부에 잠재력이 없진 않았구나 생각해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교사는 내 적성이 아니었다. 3년 정도 가르치다 잡지사 기자로 전환했다. ‘주부생활’, ‘샘터’, ‘여성동아’, ‘월간조선’ 등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에 치여 1987년까지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가 1982년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에 써 놨던 작품들을 책으로 엮어내기만 한 것이었다. -1991년 월간조선에 사표를 냈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기자로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소설가에 대한 욕망이 한층 커져 갔다. 이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위령제’라는 단편소설로 당선된 적도 있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상태여서 우리 아들 이름으로 냈지만. 그때 가진 생각이 “10년 뒤에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에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서울대 근처의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런데,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문장에 물기가 없었다. 변변한 수입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니 생계도 어려워졌다. ‘내 문학적 기질은 소설이 아닌 시’라는 걸 깨닫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잘못하면 시도 못 쓰겠다” 싶은 두려움에 1996년 나는 소설을 떠나보냈다. 소설에 파묻힌 5년 동안 틈틈이 적어놨던 메모를 바탕으로 5개월 동안 시를 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6개월 만에 10만부 이상이 팔렸다. 마음에 편해졌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나는 스스로 미당 서정주 선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미당을 통해 한국 시의 전통적인 문학성과 가락성 등을 배웠다. 군 복무 시절 친구로부터 서정주 시선을 빌렸다. 춘천 시내에 가서 좋은 노트를 산 뒤 시집의 맨 앞표지부터 맨 뒤 판권 기록까지 그대로 베꼈다. 그리고 필사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 필사본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시인은 평생을 바쳐야 시 한 편이 살아남는다. 시는 당대의 고통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초월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은 짧을 수밖에 없다. 초월성은 서정(抒情)을 통해 나타난다. 1970~80년대라는 겨울을 지나면서도 서정이라는 함박눈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참혹할까 싶었다. 시대상황의 반영과 서정성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시를 쓰겠다고 마음먹고 내놓은 작품들이 ‘슬픔이 기쁨에게’, ‘맹인부부가수’,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이다. 이 시들은 지금도 대중 속에서 살아있다. 20대에 목표로 삼았던 미당과 김수영의 결합이 어느 정도 성공하지 않았나 싶어 다행이라 여긴다. -내 시는 노래 가사로도 많이 쓰였다. 대중가요와 가곡 등 합쳐 60여곡 정도가 노래로 만들어졌다. 가수 안치환씨와는 몇 해 전부터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콘서트를 한 달에 한 번꼴로 열고 있다. 가장 처음 노래로 나온 건 이동원씨가 부른 ‘이별노래’다.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그 곡에 가장 애착이 간다. 안치환씨가 불렀던 ‘풍경 달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도 좋아한다. 김광석씨가 불렀던 ‘부치지 않은 편지’, ‘수선화에게’ 등도 기억에 남는다. -‘시는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감각의 산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 시는 철저히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시를 쓰면서 100번이고 200번이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는 건 그래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 인간의 삶 등을 접하고 그 이면을 보려면 자신만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라는 산은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야 한다. 내가 시라는 산을 찾아야 산에 있는 나무를 껴안을 수 있고, 산길도 걸을 수 있다. 칠레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가 나에게 찾아왔다”고 말했지만 난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다. -신의 도움이 있다면 10년 뒤에도 열심히 시를 쓰고 싶다. 지금 가슴 속에 시상(詩想)이 많다. 생의 마지막에 ‘이걸 다 쓰지 못하고 죽어서 아쉽다’는 생각은 안 하고 싶다. ‘전(前) 시장’이나 ‘전 국회의원’은 있어도 ‘전 시인’은 없다. 시인은 언제나 현직이다. 항상 시를 써야 시인이다. 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두걸 기자 douzirl@seoul.co.kr 정호승 시인은 김소월, 서정주 등을 잇는 한국 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초·중·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20여편 실려 있고,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판에도 지금까지 세 편의 시가 걸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대와 현실의 목마른 척박함에 발을 대고 서 있지만 위로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김승희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자세를 꿋꿋이 유지하면서 김수영의 참여 정신을 서정의 틀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별들은 따뜻하다’ 등의 따뜻한 시로 힘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손길을 건넸다. 대표 시선(詩選)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다. ▲대구 계성중·대륜고 ▲경희대 국문학 학사·석사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1973년) ▲소월시 문학상(1989년) ▲정지용 문학상(2000년) ▲한국가톨릭문학상(2001) ▲상화시인상(2006) ▲공초문학상(2008년)
  • [美 경선 슈퍼화요일] 트럼프 열풍 뒤 ‘중하층 백인의 분노’

    “유색·여성·소수자 배려 오바마 싫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바른’ 정치인은 아니지만 여느 후보처럼 허언을 일삼지 않고 여과 없이 우리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테리 브래드먼·37) ‘괴물’ 도널드 트럼프를 키운 건, ‘메인 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백인 중하층 지지자들이다. 똑똑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그는 과격하지만 솔직한 화법으로 이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경기 침체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유색인종 이민정책 완화와 맞물려 트럼프 열풍에 가속을 붙인 또 다른 이유다. 뉴욕타임스(NYT)와 가디언 등 외신들은 1일(현지시간)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압승한 트럼프의 인기 비결을 이같이 분석했다. 트럼프는 출마 선언 직후 규제완화와 자유무역, 부자를 위한 감세 등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자산가를 위한 정책을 배제하며 백인 자영업자와 노동자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해 왔다. 틈새 공략은 먹혀들었다.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민주당은 지지하지 않는 백인 자영업자와 노동자의 표심이 움직였다. 이어 다양한 연령층에 걸친 넓은 스펙트럼으로 확산됐다. 전통적인 공화당 정책에서 소외됐던 이들은 공화당 주도의 금권정치(슈퍼팩)와 대외 전쟁(이라크전), 이민개혁안에 싫증 내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트럼프 현상’은 공화당 내에서도 골칫거리다. 트럼프를 솎아 내기 위한 공화당 주류층의 중재 전당대회 개최 논의가 벌써부터 불거졌다. 반면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려는 이민 완화책에 거부감을 느껴 온 중하층 당원들은 트럼프 지지로 속속 돌아서며 계층간 골을 키우고 있다. 이들은 유색인종과 여성 등을 배려하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게도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다. 다양성 확충은 이들에게 일자리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NYT와 CBS의 최근 여론조사에선 백인 공화당원의 40%가량이 비슷한 이유로 현실 정치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백인의 분노’를 등에 업은 트럼프의 지지층 10명 가운데 8명은 고졸 이하이며, 4명꼴로 연소득 5만 달러 밑이었다. 이들은 “돈으로 매수할 수 없는 트럼프만이 누구보다 어그러진 정치 시스템을 바로잡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다. 트럼프 열풍의 다른 한 축은 경제 위기다.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도 존재했던 계층 이동의 희망이 사라지면서 억눌린 불만이 폭발했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놈 촘스키 MIT 교수는 최근 “신자유주의로 현대 사회가 붕괴되면서 나타난 두려움에서 (트럼프 열풍이) 비롯됐다”며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끼며 잘못된 권력의 희생자라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아랍 S다이어리] 사우디에는 ‘백만장자 거지’가 있다?

    [아랍 S다이어리] 사우디에는 ‘백만장자 거지’가 있다?

    “사우디에는 거지가 없나요?”일명 검은 황금을 가진 부자나라다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에 구걸하는 사람이 있는 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우디에 거지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다’고 답할 수도, ‘아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우디에서도 물론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구걸해서 버는 돈이 적지 않은 금액이다 보니 거지라고 불러야 할 지 모호하다. 한 마디로 ‘돈 많은 거지’들인 셈이다. 우리나라 전철에서 구걸하는 장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땐 고급승용차를 끌고 간다더라 하는 우스갯말이 사우디에서는 농담이 아니다. 2년 전 이맘때 사우디의 한 백만장자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화제가 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서가 아니라 이 백만장자가 거지였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반 백 년 동안 구걸을 하며 모은 재산 중엔 건물까지 있었다. 이 정도면 구걸은 노동이고 거지는 직업이다. 이 거지 아닌 거지는 어떻게 이렇게 큰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을까? 무슬림인 투르키(30)는 “무슬림은 거지들에게 돈이나 음식을 주는데 특히 라마단(이슬람교에서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금식하는 기간) 동안에 음식의 1/3을 거지들에게 줘야 한다고 배운다”고 말했다. 무슬림은 자카(Zakat〮자선)를 삶의 행동지침으로 삼고 있다. 과부나 고아 같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의무적으로 여긴다 손을 벌리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분위기이다 보니 길바닥에서 하루 500리얄(약 15만 원)도 벌 수 있을 정도로 수입이 짭짤하다. 이렇듯 쉽게 돈을 모을 수 있으니 거지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사우디 사회부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거지들의 수가 늘어나 2015년 그 수가 2만1000명에 달했다. 거지들의 존재는 이제 당장 빼버려야 할 ‘앓는 이’가 됐다. 정치분석가 주하이르 알-하르시 박사는 사우디 정부가 국민들의 수준 있는 삶을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음에도 문제가 계속되는 것은 정부와 기관들의 정책 실패를 드러낸 것이라고 꼬집으며 상아탑에서 내려와 구걸과 가난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고 일갈했다. 지난해 킹 사우드 대학의 사회과학교수가 자국내 ‘구걸하는 현상’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거지들이 가장 많은 도시는 제다였으며 메카, 리야드, 매디나 순이었다. 거지들의 나이는 16~25세가 가장 많이 차지했고, 26~45세가 뒤를 이었다. 노동이 가능한 젊은 나이에 직업이 아닌 구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교수는 구걸을 하며 법을 위반하는 자들은 처벌받아야 하나 이들이 취직할 기회가 마련돼야 하며, 또한 구걸하는 행위로 인한 사회의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왕실자문위원회(Shoura Council)는 일부 거지들이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범죄 조직을 구성하거나 인간 밀매 등 다른 범죄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특히 거지들 중에 외국인들이 많은데 국경을 몰래 넘어왔거나 성지순례를 수행하기 위해 입국했다가 불법으로 체류하면서 구걸로 연명을 하는 것이다. 올 초 왕실자문위원회에 속한 가족, 사회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위원회에 의해 ‘구걸금지법(anti-begging law)’이 입안됐다. 어린이나 장애인을 구걸하는 일에 이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징역 2년에 최대 3만 리얄(약 1000만원)의 벌금을 받도록 하는 내용이다. 위원회는 사우디인들의 동정심을 이용해 구걸하여 돈을 버는 불법체류자들의 수가 늘어났는데 거지들을 통제하는 범죄 조직이 생겨나고 있다는 차원에서 이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수도 리야드에 지난달 13일 구걸금지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생겼다. 이 기관은 3개월 동안 어린이 92명을 포함 373명의 거지들을 붙잡았다고 밝혔다. 어쩐지 요새 마트 앞이나 도로에서 차가 신호에 걸렸을 때 자주 볼 수 있던 거지들이 눈에 잘 안 띈다 했다. 어떻게 보면 매정하게 느껴지는 구걸금지법은 단순히 거지들을 잡아 넣기 위함은 아니다. 붙잡힌 이들 중 24명은 자선기구에 보내졌고, 71명은 인적자원개발기금으로부터 직업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후원을 받게 됐다. 기관장인 오마르 이드는 “재활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까지 50여 명이 구걸을 관두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분명 잘 된 일인 것 같긴 하나 ‘돈 많은 거지’에서 ‘돈 없는 노동자’가 되었다고나 할까. 글·사진 윤나래 중동통신원 ekfzhawoddl@gmail.com
  • 3000통의 편지, 제자들 삶을 다시 쓰다

    3000통의 편지, 제자들 삶을 다시 쓰다

    글로 꿈 심어주며 소통… 책으로 펴내 가난한 학생에겐 대학 등록금 주기도 40여년간 충남과 대전 지역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2011년 퇴직한 박종천(66)씨는 졸업하는 제자에게 편지로 “고뇌하라, 그리고 헌신하라”라는 문구를 써주었다. 이 문구는 박씨가 제자에게 새기고자 했던 평생의 가르침이자 스스로의 실천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제 간의 정을 나눈 편지가 3000통에 이른다. 이 편지들을 모아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박씨는 제자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먼저 안부를 챙기고 곁을 지켜주었다. 가난으로 학업을 포기하려던 제자에게 대학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교육부는 1일 박씨를 ‘3월의 스승’으로 선정했다. 그는 “올바른 가치와 덕목을 심어 주는 멘토, 미래의 꿈과 희망을 북돋워 주는 리더, 학생의 발전과 성취를 돕는 촉진자로 그 역할을 열심히 하는 선생님이 참된 스승”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배 교사들에게 “어려운 교육 환경이지만 세상은 아름답고 인생은 가치 있다는 긍정의 자세로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코호트 리포트]① 꼬박 70년 세계 최장 사회복지 연구…세상을 바꾸다

    [코호트 리포트]① 꼬박 70년 세계 최장 사회복지 연구…세상을 바꾸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6년 3월 영국에서는 ‘더 라이프 프로젝트’(The Life Project)라는 이름의 장기간 추적조사가 시작됐다. 관련 연구진은 당시 1주간 태어난 아이 수천 명의 출생부터 이후 지금껏 살아온 과정을 관찰·기록했다. 이 조사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후 1958년, 1970년, 1990년 등에도 같은 조사를 반복, 현재 조사 대상자는 5세대에 걸쳐 7만여 명으로 확대된 세계 최장 기간의 ‘코호트 연구’(추적조사 연구)라는 점이다. 사실 조사내용은 대부분 기밀이지만, 5년 전부터 이 조사에 참여 중인 헬렌 피어슨 박사(유전학)는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그 일부를 공개하고 ‘무엇이 어떤 사람을 행복하고 건강하며 성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게 하는지’ 그 실마리를 밝혔다. 이 조사는 대상자 자신은 물론 대상자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와의 인터뷰 등 청취 조사를 통해 인간 삶의 모든 사항을 추적 조사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6000건이 넘는 논문과 책이 발표되고 있으며, 태아의 성장부터 사람의 만성 질환, 노화에 관한 사람들의 이해를 깊게 했다. 또한 임신과 출산, 교육 등 영국의 다양한 정책에도 영향을 끼쳤고 현대 사회에 불평등과 비만 등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밝혀내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1946년 3월 초 1주간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등을 시작했다. ‘아이에게 모유를 충분히 먹이고 있는가?’, ‘아기용품에 얼마를 쓰고 있으며, 자신에게는 얼마를 투자하고 있는가?’ 등 매우 세세한 질문에 따른 답변을 분석했다. 그 결과, 최하층에 속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최상층에 속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보다 사망률이 70%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 정부는 이런 결과에 충격을 받아 1948년에 의료비의 자기 부담금을 거의 없애거나 무료로 하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시작했다. 또한 임신과 출산에 관한 사항을 전부 무료화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 결과는 출산과 육아 휴가, 가족이 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충실화하는데도 관련됐다. 그다음 이 조사가 영향을 준 부분은 교육이었다. 영국의 중등교육은 1944년부터 시험 결과로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고전중등학교(secondary grammar school)와 기술중학교(secondary technical school), 근대중등학교(secondary modern school)라는 세 학교로 나눠 교육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는 시험 결과를 중시해 명목상 출신이나 계급에 좌우 없이 성적이 뛰어난 아이가 좋은 학교에 갈 수 있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노동자 계급층의 자녀는 중산층이나 상류층 자녀보다 시험 성적이 나쁜 것이 이 조사로 밝혀져 가난한 아이들의 재능이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따라 1965년 영국 노동당은 성적 순위에 따라 학교를 가리지 않게 하기 위한 않는 종합중등학교(comprehensive school)의 확대를 내세웠다. 사실 지금도 중등교육은 성적별로 나눠야 하는지 종합 교육을 해야 좋은지에 대한 찬반양론이 갈리고 있지만, 이 조사 연구 프로젝트는 영국의 교육제도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것 만큼은 분명하다. 사진=더 라이프 프로젝트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최문순 강원 화천군수

    [자치단체장 25시] 최문순 강원 화천군수

    “산천어축제로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접경지역 화천 군민들이 이제는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해 나가겠습니다.”지난달 16일 기자와 함께한 최문순(61) 강원 화천군수는 휴전선을 지척에 둔 인구 2만 7000명 안팎의 산골마을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혼신의 열정을 쏟고 있었다. 산천어축제가 끝난 화천천을 찾아 청정 생태하천 복원과 안전을 챙기고 인재교육의 산실이 될 어린이도서관 공사 현장을 찾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최 군수 자신이 군 지역경제과장으로 일할 당시 기획하고 시작했던 ‘산천어축제’가 대박을 터뜨리고 자치행정과장 시절 시작한 다양한 ‘인재육성 프로그램’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큰 자신감이 생겼다. 폐장한 축제장에서 녹아내리는 얼음조각을 돌아보며 안전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꼼꼼함이 묻어났다. 최 군수는 화천 토박이로 하남면 원천리 산골마을의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살림 탓에 고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근면함으로 화천군 4H 연합회장을 맡는 등 리더십을 키워 나갔다. 24세 때 군 9급 농업직으로 공무원에 입문한 뒤 행정직으로 옮겼고 기획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면장과 주민생활지원과, 기획감사실장을 두루 거쳤으며 강원도인재개발원 교육연구실장과 화천 부군수직을 끝내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 화천군수로 당선됐다. 평소엔 실무자에게 업무를 맡겨 성과를 지켜보는 성격이지만 자수성가한 탓에 ‘될 성싶은 사업이다’ 판단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꼼꼼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별명도 ‘탱크’다. 산천어축제의 시작부터 성공까지 관여했던 산증인으로 이 축제만큼은 군수가 직접 챙기며 독려한다. 2003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산천어축제가 승승장구하는 이유다. 비슷한 겨울축제를 펼치는 인근의 다른 자치단체들이 화천군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하우의 대부분은 최 군수가 직접 챙기고 지시하며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이날 얼곰이성 등 축제가 끝난 현장을 찾은 최 군수는 “23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폐막한 ‘2016 산천어축제’도 역대 최고의 축제로 기록됐다”면서 “지난해보다 4만명이나 많은 154만여명이 축제장을 찾았고 이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만 7만 5000여명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외국인 관광객 방문은 집계를 시작한 2006년 1000여명이 찾은 이후 10년 새 70배 이상 늘어났다.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잡았다는 방증이다. 여기에는 산천어축제가 갖는 남다른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함께 간 오경택 예산계장은 “흐르는 물은 웬만한 추위로는 얼지 않지만 산천어축제가 열리는 화천천은 흐르는 물의 수위를 조절해 얼음을 얼리는 노하우로 20㎝ 이상 안전한 얼음 얼리기에 성공하고 있다”면서 “수년간 축제를 이어 오면서 터득한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최 군수는 “이상고온과 최강 한파라는 최악의 기상 조건에다 남북 긴장으로 군 장병의 외출·외박이 통제됐지만 많이 찾아준 관광객과 헌신적인 노력을 해 준 주민들께 감사한다”면서 “축제 기간 미흡했던 부분을 개선해 내년부터 본격 체류형 축제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관광객들이 머물 수 있도록 야간 얼음낚시와 야시장 등을 처음으로 연 것도 대박에 일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안전과 환경을 최우선으로 축제를 펼쳤고 마무리작업까지 완벽하게 하고 있다. 축제 기간 UDT·특전사 출신 안전요원 22명이 산소통을 메고 수시로 축제장 얼음 속을 점검했다. ‘이상고온으로 혹 얼음 상태가 나빠질까’ 안전에 올인했다. 축제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안전점검팀은 여전히 현장에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혹시나 녹아내린 얼음조각들이 행인들을 덮치지 않을까, 축제장으로 쓰던 화천천에 행인들이 빠지지 않을까, 밤낮 경비를 서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반종철 안전점검팀장은 “안전은 기본이고 그물과 대형 자석까지 동원해 강물에 남아 있는 산천어와 쓰레기, 낚시 등을 건져 내는 일도 함께 하며 화천천의 청정 환경 유지에도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축제 성공의 자신감으로 지역경제 살리기와 복지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화천읍, 간동면, 하남면, 상서면, 사내면 등 5개 읍·면을 대상으로 권역별 특별경제활성화 계획을 마련했다. 낙후된 산골마을이지만 성공 축제를 기반으로 지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겠다는 복안이다. 화천읍과 사창리에는 이미 100~150석 규모의 작은 영화관들이 들어섰다. 산양리에도 오는 9월쯤 작은 영화관이 개관한다. 간동면과 상서면 다목리 일대에는 야구장 등 생활체육공원이, 하남면 일대에는 교량 등을 활용한 호수변 힐링관광산업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공무원 현장도우미제도’는 취약계층과의 소통의 끈이 되면서 현장 복지의 표본이 되고 있다. 군수와 실·과장, 복지담당이 수시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구를 찾아 희망의 불씨를 심어 주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방문한 가구만 1000곳이 넘는다. 최 군수는 “화천은 농산촌 주민들과 군 장병들이 많아 그동안 안정된 생활이 어려웠다”면서 “세계적인 산천어축제 성공을 발판으로 관광객들이 머물며 즐기고 힐링할 수 있도록 하고 군 장병들이 외출, 외박 때 화천에 머물며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해 결국 지역경제 활성화와 주민 복지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행복한 마음, 신나는 삶, 밝은 화천’이란 군정 슬로건만큼 최 군수의 얼굴도 신나고 밝았다. 글 사진 화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詩, 그녀와 나란히 걷겠노라

    詩, 그녀와 나란히 걷겠노라

    ‘무언가에 쫓겨 늘 바지런히 앞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면 거기 시(詩)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시가 안쓰러워 떨쳐내지 못하고 조강지처인 양 여직 품어 다니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그새 주름이 자글자글 그녀(시)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다. 이제 걸음의 속도를 늦춰 늘 숨차 하는 그녀와 나란히 보폭을 함께하리라.’ (183쪽) 이재무(58) 시인에게 시는 지리멸렬한 생의 구원이었다. 자신의 시가 거리로 나가 누군가를 위무할 때 행복과 자부를 느껴 온 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가 불쑥 그를 찾아온 건 불우한 환경 때문이었다. 가난과 가족의 외면이 빚어낸 병마로 스러진 어머니를 묻고 온 날 밤, 부의록을 끌어다 놓고 울음처럼 토해 낸 게 그의 첫 시였다. 문학인생 35년에 접어든 시인은 그간 그림자처럼 자신을 쫓아온 시와 이제 보폭을 맞춰 걷겠노라 다짐해 본다. 7년 만에 낸 세 번째 산문집 ‘집착으로부터의 도피’(천년의시작)에서다. 이번 책은 시인이 지난해부터 대표직을 맡아 온 출판사 천년의시작에서 낸 첫 산문집이다. “재정적인 이유로 산문집을 기획했다”는 그의 말을 미리 넘겨짚기라도 한 듯, 김남조 시인은 지난해 10월 문득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당부했다고 한다. “시인이 출판 일을 맡아 하다 시업(詩業)에 소홀한 경우를 더러 보았는데 그러지 말라. 그러려면 매 순간 시에 대한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대선배의 조언을 뼈에 새기듯 시인은 산문집에서 시를 처음 토해 낸 계기,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 시의 부활을 위한 제언, 시인으로서 꿈꾸는 세상 등 시를 둘러싼 충정 어린 사념들을 글편으로 엮어 냈다. ‘시인으로서 시인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어진 불모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에 주의하고 주목하자는 것이다. (중략)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지진아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계몽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180~181쪽)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곡진한 기억은 시인과 시대를 같이해 온 베이비부머 세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무능하고 고지식해 평생 육체만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던 아버지, 말년에는 형편없이 무너지는 그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던 시인은 회한에 젖은 인사를 글로 대신 전한다. ‘당신이 주신 빈곤과 무능과 열정을 오브제로 삼아 문단 말석에 시인이라는 알량하나마 명패를 등재하게 됐다.’(220쪽)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진선미 의원 마무리 발언 눈길… “끈질기게 매달려 민주주의 수호하겠다”

    진선미 의원 마무리 발언 눈길… “끈질기게 매달려 민주주의 수호하겠다”

     야당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엿새째 이어진 가운데 18번째 주자로 나섰던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마무리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진 의원은 지난 27일 정청래 의원의 뒤를 이어 단상에 섰고, 오후 4시 21분부터 다음날 오전 1시 37분까지 총 9시간 16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진 의원은 토론 말미에 “국가의 의심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면서 “의심은 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소외된 사람을 향해서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보도연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유우성 간첩 조작사건 등을 요약하며 거론했다. 그는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이라면서 “의심은 늘 정권의 반대편에 선 사람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철저히 합리적이어야 하고, 정보 관리는 반드시 통제돼야만 한다. 비(非) 합리적인 의심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는 권력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칼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심은 합리적이고 평등해야 한다. 정보를 관리하는 행정부는 국민에게 통제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것이 결코 물러날 수 없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이라고도 말했다. 진 의원은 또 “테러는 정보를 독점하는 비밀스러운 조직에 의해 예방되지 않는다. 테러는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삶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국민들의 힘으로 예방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해 대한민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국민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움직일 때 막을 수 있다”면서 “그 동력은 국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사랑하게 하고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며 거듭 테러방지법이 테러 예방의 본질이 되지 못함을 역설했다.   진 의원은 특히 9시간여 동안의 발언을 마무리 지으며 “가장 무서운 상대는 힘이 센 상대가 아니라 끈질긴 상대”라면서 “거듭된 횡포로 우리가 무기력해지길 바라고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끈질기게 매달려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강한 야당이 되겠다. 끝까지 지켜봐 주시고 응원 부탁드린다. 국민들의 뜨거운 응원과 지지가 우리들의 유일한 힘이자 희망”이라고 호소했다.   진 의원은 한편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국정원 직원 댓글사건을 언급하며 “박 대통령은 (테러방지법이 통과되지 않는다고) 책상을 열 번 쳤다고 한다. 저는 제 가슴을 열 번 치고 싶다”고 말하며 실제로 주먹으로 가슴을 열 번 치기도 했다. 아래는 진 의원의 토론 마무리 발언 전문. “제가 19대 국회에서 가장 애쓴 것 중 하나가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입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법>을 발의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직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제가 어떻게든 끝끝내 해결하고 싶은 문제입니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부랑인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납치해 가둔 사건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강제노역, 폭력, 성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공식적인 사망자들만 513명에 이릅니다. 여러분,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왜 형제복지원에 끌려가게 되었을까요? 바로 ‘의심스러워서’입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부랑인으로 의심돼서, 만에 하나라도 사회질서를 해칠까 의심스러워서 형제복지원에 갇힌 겁니다. 그들은 그냥 집 앞에서 놀고 있는 아이였거나, 도시에 왔다 길을 잃은 지방인이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역전을 맴돌던 실업자 빈민이었고, 하루에 피로를 술로 풀고 귀가하던 노동자였습니다. 국가의 의심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의심은 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는 가난한 사람을 의심하고, 약한 사람들을 의심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서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의심받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의 극심한 가난과 혼란 속에서 그저 쌀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은 북한군에 합류할 의심이 든다고 학살당했습니다. 국민보도연맹 이야기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편이 아니라,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고 의심되어 사법살인을 당합니다. 인민혁명당 사건 이야기입니다. 권위주의 정권의 수탈로 농사를 포기하고 일자리를 얻으러 온 사람들은, 잠재적인 불안요소라며 아무런 잘못 없이 시설에 감금되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이야기입니다.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탈북한 유우성 씨는 간첩을 의심받아야만 했습니다. 최근의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이야기입니다.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입니다. 의심은 늘 정권의 반대편에 선 사람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은 철저히 합리적이어야만 하고, 정보 관리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합니다. 비합리적인 의심과 통제되지 않는 정보는 권력자가 약자에게 휘두르는 칼이 됩니다. 의심은 합리적이고 평등해야 합니다. 정보를 관리하는 행정부는 국민에게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물러날 수 없는 법치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테러는 정보를 독점하는 비밀스런 조직에 의해 예방되지 않습니다. 테러는 소중하게 지키고픈 삶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국민들의 힘으로 예방됩니다. 세계평화를 위해 대한민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우리나라와 세계의 빈곤과 갈등을 줄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국민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움직일 때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동력은 국민들이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하고,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박근혜 정부는 테러 예방이라는 미명 하에 오히려 국제 관계에서의 적을 늘리고 있고, 국민들에게 더더욱 살기 싫은 사회, 떠나기 싶은 나라를 만들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정말 국민을 테러로부터 보호하고 싶다면 국정방향부터 다시 세워야 합니다. 이미 여러 번 학습한 새누리당의 횡포에 ‘이렇게 해봤자 통과 될텐데’ 라는 생각을 가진 분도 계실 겁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가장 무서운 상대는 힘이 센 상대가 아니라 끈질긴 상대입니다. 거듭된 횡포로 우리가 무기력해지길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악바리처럼 끈질기게 매달려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강한 야당이 되겠습니다. 끝까지 지켜봐주십시오.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국민들의 뜨거운 응원과 지지가 저의 유일한 힘이자 희망입니다. 국민이 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더불어 민주당과 진선미가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가난에 지치고 차별에 눌리고… 美 아이들도 ‘수저론’에 운다

    가난에 지치고 차별에 눌리고… 美 아이들도 ‘수저론’에 운다

    우리 아이들/로버트 D 퍼트넘 지음/정태식 옮김/페이퍼로드/488쪽/2만 2000원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우리 사회에 수저론이 강력한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부의 대물림이란 함축적 의미를 갖는 이 유행어는 계층의 고착화가 단절에 얹힌 희망과 기대의 상실이란 암울한 미래 투영이란 점에서 더 우울하게 들린다. 그 단절의 고착화와 희망 상실은 어떻게 비롯됐을까, 개선의 여지는 없는 것일까. ‘양면 게임 이론’(국가 간 통상이나 외교협상에서 협상 당사국 사이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국내 관련 집단도 고려해야 한다는 이론)의 주창자이자 저서 ‘나홀로 볼링’으로 유명한 미국 정치학자가 펴낸 ‘우리 아이들’은 지난 반세기 미국에서 진행된 변화를 추적, 아메리칸 드림의 실종을 고발한 ‘미국판 수저론’ 해설서로 읽힌다. 책에서 저자는 지금 사회 변화의 추이를 ‘또 다른 형태의 귀족주의 사회로의 반동적 회귀’로 보고 있다. 미국의 계급적 차이가 단순한 경제력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 차원에서의 차별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50년 전 미국 사회에선 조건의 평등이 유효했지만 현재의 미국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자주 회자되는 금수저와 흙수저처럼 기회 격차의 간극이 이미 현실에 스며든 상태로, 더이상 기회의 땅으로서의 모습을 지니지 않고 있다고 못박는다. 책은 저자 자신의 고향 포트클린턴에서 지난 반세기에 걸쳐 진행된 실상의 비교에서부터 시작한다. “1950년대의 포트클린턴에서 사회경제적 계급은 백인이나 흑인 어느 인종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든, 21세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렇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 아니었다. 비교해 보면 1959년도 졸업반 구성원의 자녀들은 평균계으로 그들 부모를 넘어서는 교육적 진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1959년 졸업반 구성원 대부분을 상층부로 이끌었던 에스컬레이터는 그들의 아이들이 탑승할 차례가 되자 돌연 멈춰 섰던 것이다.” 미국의 동서부를 넘나들며 훑어낸 현장 실태와 인터뷰를 통해 저자가 정리한 부의 고착과 희망 상실은 이렇게 압축된다.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작용했던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졌으며 그런 현상이 가족과 양육, 학교 교육, 공동체에서 심각하게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아이와 부자 아이는 그저 출발선상이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공적인 사업가 부모를 둔 아이는 많은 선택권을 손에 쥐고 미래를 자신 있게 바라본다. 그런 반면 매일 힘겹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인생이 계속 내리막길을 타면서 모든 것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커다란 차이는 아이들의 성격,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교육, 소득, 사회적 계급으로 정해진 것이며 빈부 격차의 확대는 부유층 가정과 빈곤층 가정을 주거나 생활, 교육 등 모든 공간에서 분리시켰다고 말한다. 심지어 빈부에 따른 격차가 아이들의 뇌 성장과 발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까지 설명하고 있다. 책의 특장은 그 불평등과 상실의 고발에 멈추지 않고 개선의 방편들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실천의 이유로 “미국의 가난한 아이들의 운명은 우리의 경제,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의 가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들고 있다. 그래서 즉각 취할 수 있는 일로 유료 과외활동 종식을 비롯해 특별 지원금 지급이나 멘토링 프로그램 같은 방법들을 강력하게 제안하고 있다. “지난 50년을 거치면서 미국인들이 상실한 가장 소중한 가치는 ‘우리 아이들’에 대해 지녔던 인식과 의미”라고 갈파한 저자는 이제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란 인식이 우선 돼야 한다고 쓰고 있다. 옮긴 이가 후기에 적었듯이 “우리 아이들이라는 잃어버린 의식이 회복될 때 나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위해 더 많은 세금도 기꺼이 낼 수 있을 것이기에 모든 아이들이 우리 미래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이웃을 돌봐야 한다는 깊은 도덕적 의무를 상기시킨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을 이렇게 인용한다. “우리는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울어주지 못하고, 그들을 도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의 책임인 것처럼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정말로 우리 인류의 미래입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꽃은 많을수록 좋다(김중미 지음, 창비 펴냄) 인천 만석동 빈민지역인 괭이부리말에서 30년째 공부방 ‘기찻길옆작은학교’를 운영하며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저자가 그 세월을 에세이로 엮었다. 저자는 스물넷의 나이에 동네에 들어가 공부방을 차리고 정착했다. 10여년 뒤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썼고,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더욱 피폐해진 가난한 내 이웃들에 대한 변호 의식을 담담히 소개한다. 돈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임을 일찌감치 깨우친 아이들을 아프게 이야기하며 교육 현실을 고민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상황을 개선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를 비판한다. 384쪽. 1만 4500원.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 후기 초상화(이태호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조선 시대는 초상화의 르네상스기였다. 이 시기에는 한국 미술사 사상 가장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고, 예술성 높은 명작들이 쏟아졌다. 왕의 얼굴을 기록한 어진부터 공신과 문인의 영정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은 시대의 얼굴을 손으로 기록했고, 초상화를 통해 인물들의 정신을 발현했다. 저자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인식 아래 치밀하게 그려진 조선 시대 후기의 초상화들을 통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시대상과 초상화의 변화, 한국적 리얼리즘을 전하고 있다. 424쪽. 2만 3000원. 덩샤오핑 제국 30년(롼밍 지음, 이용빈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덩샤오핑(鄧小平)의 이면을 다뤘다. 미국, 대만 등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저자는 덩샤오핑이 중국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반대로 민주와 자유를 두려워한 독재자였다고 말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단지 경제 영역에만 한정됐을 뿐, 정치를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보수파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데, 그중에서 특히 덩샤오핑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은 여전히 100% ‘덩샤오핑 제국’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480쪽. 4만 5000원. 예술 판독기(반이정 지음, 미메시스 펴냄) 미술 평론가인 저자가 문화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정치적 소재와 주제를 문화의 범주로 끌어들여 예술을 비평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자 차별점이다. 책 제목은 무언가를 예술로 만드는 조건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예술 정의의 불가능성에 ‘힘입어’ 판독 대상을 예술보다 언론보도, 영화, 광고, 상품 등에서 찾았고 이들로부터 예술됨을 읽으려 했다고 적었다. 예술이 어려운 이유는 예술과 현실을 구분 지어 사유하려는 집단 체면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서구에서 고안한 미적 유행을 흉내내어 자국에서 독점적 명성을 얻은 사례 등 예술 권력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360쪽. 2만 2000원. 몇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가와타 후미코 지음,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재일 1세대 할머니 29인의 삶을 담은 기록이다. 일본 언론인으로 빈곤과 성노예제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아내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낸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지의 참상은 한 줄의 사건으로 접하지만 이 책은 남성들이 말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문제의식과 특히 일본인이야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로 이들의 삶을 기억하자고 되뇌고 있다. 344쪽. 1만 5000원.
  • 조선은 도덕 내세워 계급정치 유지한 위선의 나라

    조선은 도덕 내세워 계급정치 유지한 위선의 나라

    두 얼굴의 조선사/조윤민 지음/글항아리/368쪽/1만 6000원 조선 500년을 착취계층과 피착취계층의 관점에서 접근, 지배계층의 착취가 수백년간 어떻게 지속할 수 있었는지를 파헤쳤다. 조선 지배층의 근본적 성립·유지 조건, 조선의 각종 제도 운영 실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심화된 이념과 규제들 저변에 깔린 본래 의도 등을 차례로 짚었다. 저자는 “조선의 지배층은 어떤 지배 전략으로 어떤 통치 방식을 활용해 500여년 동안 조선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나름의 풀이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라고 소개했다. 착취-피착취 관점에서 조선을 고찰한 만큼 지배층의 초상이 지금껏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과는 다르다. 기개와 청렴의 화신인 선비가 아닌, 민생을 돌보는 꼬장꼬장한 경세가도 아닌, 군주를 보필하며 왕도를 드높이려는 사림 관료도 아닌,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충실한 지배자로서의 얼굴이 부각됐다. 부패와 뇌물이 일상화된 관료 사회, 관직 진출과 부를 독점하고 군역·요역 같은 각종 의무에서 면제를 받은 양반, 수탈과 참혹한 가난에 허덕이는 농민들과 군역을 피해 차라리 노비가 되기를 택하는 양민들 등 조선의 어두운 면모들도 조선왕조실록 등 여러 문헌을 통해 조명했다. 저자는 “조선은 도덕정치로 위장한 철저한 계급정치가 관철되는 위선의 나라였다. 지배층의 이익 확보와 욕망 추구를 이(理)와 도(道) 같은 사상 개념으로 포장해 정당화하고 신분 질서와 사회 위계 구조를 영속시키고자 했다. 조선 지배층의 근본적인 통치 방책은 계급정치 유지를 위해 도덕정치 이념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검은 대륙의 ‘하얀 흑인’… 알비노人의 인권

    검은 대륙의 ‘하얀 흑인’… 알비노人의 인권

    온 몸이 백지장처럼 하얀 알비노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최근 영국매체 데일리메일은 이탈리아 출신의 사진작가 클라우디오 시문노(35)가 촬영한 알비노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지난해 11월 촬영된 이 사진들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제루제루라는 마을의 알비노들과 풍경을 담고있다. 간혹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알비노는 멜라닌 합성이 결핍돼 생기는 선천성 유전질환으로 온 몸의 색깔이 하얀 것이 특징이다. 전세계 알비노인들의 숫자는 대략 2만명으로 특히 탄자니아에서만 1400명이 거주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다. 문제는 온통 흑인인 아프리카 대륙에서 알비노들이 참혹한 현실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알비노들이 많은 탄자니아에서는 이들의 신체 일부를 가지고 있으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미신이 존재한다. 또한 알비노들의 신체 일부를 주술 도구로 활용하거나 성관계를 가지면 AIDS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다. 이에 선거철만 되면 당선에 욕심내는 일부 정치인들이 알비노들의 신체를 갖기 위해 찾아 나선다. 때문에 알비노들은 외출도 자제한 채 두려움에 떨며 선거가 끝나길 기다려야 한다. 20일 간 현지 마을에 머문 시문노는 "마치 유령처럼 존재하는 알비노들의 현실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면서 "현지인들의 알비노에 대한 무지와 가난이 인권유린을 낳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일부 지역에서는 알비노들이 신의 처벌을 받았다거나 악의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알비노들의 신체 일부가 약이나 부적으로 사용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알비노에 대한 인권 유린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UN은 탄자니아 정부를 상대로 인권 및 환경 개선을 촉구한 바 있으나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는 않고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현재는 탄자니아를 떠난 한 알비노 남성은 “삶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매우 기초적인 것이지만 이조차 거부당하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라며 도움을 호소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나‘답게’ 가정·직장서 충실하면 모든 문제 해결돼”

    “나‘답게’ 가정·직장서 충실하면 모든 문제 해결돼”

    ‘답게 운동’ 발의… 평신도가 교회 구심점 “주교·사제들 소외 이웃 돕기 실전 고민, 교황 방한 때 평신도 배려… 홀대 없어” 한국천주교는 스스로 신앙 공동체를 일군 자생 종교이다. 특이한 태동 역사를 갖는 한국천주교는 1만~2만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그래서 한국을 찾았던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을 ‘순교자의 땅’으로 불렀다. 순교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신도들은 한국 교회를 떠받치는 바탕이다. 16개 교구 평신도 사도직단체협의회와 26개 단체로 구성된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한국평협)는 한국 평신도들의 구심체. 최근 연임된 권길중(76) 한국평협 회장을 지난 24일 서울 중구 가톨릭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연임 소감은. -2년 임기를 채우고 사퇴하려 했는데 회장단, 고문단 연석회의에서 재임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인 줄 잘 알고 있지만 하느님이 부르신 노릇으로 받아들여 편안한 마음으로 봉사하겠다. →지금 평신도들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교회에서 평신도는 가정,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삶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사제는 예수님이 맡겨 주신 미사와 7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교로부터 위임받은 사람이다. 평신도는 사제처럼 특별한 권한을 받진 못했지만 가장 밑에서 순명으로 봉사하는 사제들의 희생과 미사를 통해 예수님 사랑과 일치를 체험하고 봉사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에서 평신도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는데. -사제와 평신도의 소임, 역할에 대한 이해 부족 탓이라고 본다. 일부 군림하려 드는 사제들이 물의를 빚지만 대부분 공동체에서 큰 무리 없이 원활한 신행과 성사가 진행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평신도들만 별도로 만난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교황 방한에 대한 감사차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주교들에게 평신도들을 잘 대우하라고 특별 당부한 것만 보더라도 세간의 한국 평신도 홀대 지적은 지나친 관측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한국 천주교에 어떤 변화의 흐름이 있는가. -많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우선 신자 수가 많이 늘어났다. 서울대교구에선 교리반 신청자가 늘어 교실이 모자랄 정도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라’는 교황의 당부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지난해 주교회의에서 ‘우리도 가난하게 살자’고 결의한 주교들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 사례들이 흔하다. 평신도들도 도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다. 당장 4월 초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바자회를 열어 어려운 이웃돕기에 나설 것이다. →종교계에 들불처럼 번지는 ‘답게 살겠습니다’ 운동을 처음 발의해 확산시킨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 어떤 운동인가. -교황 방한 직전 평신도들과 만남의 자리가 있을 것이란 연락을 받았다. 교황에게 어떤 말씀을 드릴까 고민하면서 한국사회의 분열, 혼란의 원인이 뭔지를 깊이 생각해 봤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또 뭘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는 정체성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정과 직장에서 각자의 위치와 본분에 충실한다면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 7대 종단 지도자들과 일일이 만나 공동운동을 건의했는데 주저 없이 동의해 범종교계로 확산됐다. ‘답게 운동’을 중점적으로 실천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행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리는 등 사회생활에서도 급속히 번지고 있다. →종교 지도자들과 신도들에게 당부할 말씀이 있다면. -많은 종교인들이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 삶은 허위인 경우가 많다. 한국사회가 아무리 분열되고 혼란스럽더라도 이웃사랑을 먼저 깨닫고 되돌려 준다면 훨씬 좋아질 것이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저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예수님의 유언 같은 마지막 기도를 평생 신조로 삼아 살고 있다. 이제 종교인들이 그 말씀을 몸으로 구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자 김재철 동원 회장 평전 출간

    한국 원양어업의 개척자 김재철 동원 회장 평전 출간

    동원그룹은 한국 원양어업 개척자로 불린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평전 ‘김재철 평전, 파도를 헤쳐온 삶과 사업 이야기’(공병호 지음, 21세기 북스)가 발간됐다고 24일 밝혔다. 김 회장은 동원그룹과 한국투자금융지주의 창업자다. 그는 가난한 농촌에서 11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김 회장은 23세였던 1958년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실습 항해사로 참치잡이를 시작해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직접 선장과 선단장으로 활동하며 ‘캡틴 김’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그는 1969년 동원산업을 창업했다. 평전은 이런 김 회장의 일대기는 물론 그의 기업가 정신과 생활 원칙, 경영 철학 등을 담았다. 특히 평전은 경제경영 전문가인 공병호 박사가 집필을 맡아 김 회장을 1년여간 밀착 취재해 만들어졌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깡촌 소작농의 아들 누나의 희생으로 진학 철도원으로 살다가 다시 주경야독육사에 붙고도 결핵으로 불합격그래도 내 결론은 도전박운상 선생님 덕에 물리학에 눈떠4년 만에 석·박사 탄소나노튜브 실험과 응용 연구나는 콧수염 학자 애벌레처럼 살 거야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콧수염의 역사를 묻자 이영희(61) 교수는 “사람들이 전공인 탄소나노튜브보다 이 털들을 더 궁금해하니 큰일”이라며 껄껄 웃었다. 경기 수원에 있는 연구실(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물리학과)로 그를 만나러 간 지난 15일은 전국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 단장을 겸하고 있는 이 교수는 7명의 교수, 30명의 박사후연구원 및 연구교수, 80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 등 120명에 이르는 대식구와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학생들 논문 지도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다”며 약속 시간에 30분 늦은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1974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다. 기차를 타고 출근하며 메마른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10년 뒤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철도고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인천 부평에서 누나 집에 얹혀살며 매일 근무지인 서울역으로 통근을 했다. 갑작스럽게 든 생각처럼 결론도 갑작스럽게 났다. ‘그래, 다시 공부를 하는 거야. 공부를 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겠지.’ 그때 고민만 하고 끝났다면 지금쯤 난 한적한 시골역의 역장이 돼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렇게 산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 전북 김제의 깡촌에서 자랐다. 논이 동네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못사는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우리 집을 가리켰을 것이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머슴에 가까웠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초등학생 때 가진 꿈은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큰 농장을 갖는 것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어린 사람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동네 형들하고도 주먹질을 할 정도로 괄괄한 ‘이씨네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원래 집안 사정이 안 좋기는 했지만 애들이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어려워진 것은 ‘딸깍발이’ 할아버지 탓이 컸다. 일제가 쳐들어와 양반들이 몰락하자 “왜놈들 세상에선 아무것도 안 한다”며 평생 돈벌이라곤 하지 않으셨다. 집 안에 먹을 게 다 떨어져 자식들이 굶고 있는데도 할아버지는 소신만 지키셨던 것 같다. 평생 힘들게 사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서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은 이게 뭐냐”고 대들다가 아버지나 삼촌들한테 맞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난한 집에 먹는 입은 많다고, 나는 3남 2녀 중 장남이었다. 바로 위 누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누나는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된 것도 그렇지만 여동생과 남동생이 초등학교 교사와 공무원을 하고 있는 것도 누나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부모님은 “우리 장남 영희는 중학교까지는 나와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뒤집어 보면 중학교 졸업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남의 집 머슴일을 하면서 틈틈이 중학교 등록금을 모아 놓으셨는데, 어느 날 그 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중학교에 못 가게 될 상황이 된 거였다. 그때 이웃집 할머니께서 “사내놈이 중학교까지는 나와야 하지 않겠나”라며 여기저기 수소문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셨다. 그게 나에겐 약이 됐다. 중학교 들어가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 한 초등학교 친구가 “영희가 미쳤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꿈은 없었다. 그냥 공부를 잘하는 걸로 만족이었다. -대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등학교는 마치고 싶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계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나라에서 세운 철도고에 들어가면 학비 대주고, 나중에 취업까지 시켜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딱 내 학교였다. 그렇게 철도고에 들어갔는데 철도원으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다 보니 별달리 꿈이란 게 생길 턱이 없었다. 머리건 몸이건 좀 더 써 보고 싶은데, 내 몸의 혈액과 호르몬들은 나에게 한계 상황까지 가 보라고 다그치는데 현실은 그저 ‘등교-수업-하교’가 전부였다. 그러다 유도를 시작했다. 먹고 자는 시간과 수업받는 시간을 빼고는 그것만 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멋지게 업어치고 메칠 수 있을까, 관심은 그것뿐이었다. -1974년 1월 5일 토요일에 졸업식을 하고 7일 월요일 서울역으로 첫 출근을 했다. 통신전자과 출신인 나에게는 통신기지국과 열차 간 송수신기에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열차 자동 정지장치를 수리하는 일이 부여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달을 지내고 난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었던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시작됐다. 딱히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가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에 공부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고나 할까. 실업계 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히 대학 입시 기초가 약했다. 서울 종로2가에 있는 종로YMCA에서 대학입시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난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국문학과가 어울릴까? 수학 문제를 풀 때가 제일 신나는데, 그리로 가 볼까?’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학원에서 ‘분석물리’ 과목을 가르치던 박운상 선생님 덕이다. 입시 학원이었음에도 문제 풀이 요령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간단한 실험도구를 갖고 물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리학도 문학만큼이나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구나.”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1975년 초 기관차 수리 공장이 있는 수색역으로 발령났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곳이라 공부하기엔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체력은 바닥나고 업무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아 대입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결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중한 병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해 번듯한 직장까지 얻었으면서 몸까지 상해 가면서 대학을 가려고 하느냐.” 아버지는 나를 꾸짖다가 “다 내가 못나서 널 제때 공부를 못 시켜 준 탓”이라며 통곡을 하셨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공짜로 공부시켜 주는 곳.’ 내가 가야 할 대학의 최우선 조건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필기·실기시험에 모두 합격했지만 결핵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때의 상실감은 아주 컸다. 회사에 2개월 휴직계를 냈다. 머리까지 박박 밀고 고향집에서 2주 동안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부모님께서는 ‘얘가 죽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셨단다. 방 안에 틀어박혀셔 ‘과연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일단 시작한 것, 원 없이 한번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2개월 휴직 기간이 끝나니 김제에서 가까운 익산역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직장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전북대 물리학과였다. 입학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76학번으로 입학했다. 함께 일하는 직장 선배가 눈감아줘 근무 시간에 전공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그러기를 1년. 공부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회사에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냈다.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장학금 받기 위해서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뤄진 공부가 쌓이자 내 평생의 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지도교수님께서 미국 켄트대를 추천해 주셨다. 입학 지원서를 냈는데 놀랍게도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1982년 8월 졸업이 예정돼 있었는데 가을 입학을 하라는 통보를 받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학 후 첫 학기를 끝낸 1월 갑자기 온몸이 아파 왔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학교 보건소 의사는 타이레놀 한 알을 주더니 “푹 자라”고 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유학에서 비롯된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좋아하는 공부를 장학금 받고 해서 그랬을까. 석·박사 과정을 4년 만에 초고속으로 마쳤다. 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고 모교인 전북대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마침 우리 학교에 교수 자리가 하나 났으니 지원하라”고 하셨다. 덜컥 합격했는데 그게 1986년 여름이었다. 7월 켄트대 학위수여식을 한 달 앞두고 모교에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 때까지 희한하게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외려 그것 때문에 나는 졸업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그 흔한 학위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없다. 아들내미와 딸내미가 아빠 학력 위조한 거 아니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반도체 물리학이 전공이었지만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1991년 탄소나노튜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 논문들을 읽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본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기초연구이면서도 실험과 응용연구가 가능했다. 대단한 매력이었다. 물리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이론과 실험 두 분야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공고 출신이라는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직장에서 열차 무전기를 고쳤던 경험 등 현장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실험과 응용연구에 두려움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내 연구 분야는 아주 생소하다. 이름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탄소는 뭐고, 나노는 뭐고, 거기에 튜브는 뭐란 말인가. 탄소나노튜브 연구가 잘 이뤄지면 요즘 많은 사람이 관심 갖는 전기자동차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탄소나노튜브를 응용하면 고성능 에너지 저장장치를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전기차의 생명인 배터리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전자 소재로 응용될 경우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초고속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각국의 연구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책과 논문을 파고 실험을 하는 것이다. 탄소나노튜브의 기초이론을 보강하고 응용연구로 연결시키는 과정은 앞으로도 지난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후배들과 함께 가야 할 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주 막다른 길에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은 물론 연구원들에게도 나는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다. ‘애벌레가 화려한 나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최종 목표’를 묻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다. “내 최종 목표는 이거다”라고 정해 버리면 그것을 성취하고 난 다음에는 무슨 재미로 삶을 살겠나. 나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내 인생 최종 목표를 향해 이제 제대로 한 걸음 뗄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나라보다 해외 학계에서 더 유명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장을 함께 맡고 있는 그는 전 세계 대학 연구실과 산업 현장에 ‘탄소나노튜브’ 열풍을 일으킨 한국의 대표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차세대 신소재로 각광받는 단층 탄소나노튜브의 대량 합성과 성장 메커니즘 규명이 그의 성과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론’과 ‘실험’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자기 주력 분야를 정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탄소나노튜브 이론뿐 아니라 수소 저장, 투명전극, 복합체 연구 등 산업화 기술도 함께 개발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누가 “기초과학은 투자 대비 성과가 적다”, “기초과학은 돈이 안 된다” 같은 말을 하면 질색을 한다. ‘기초과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게 그가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87년 전북대 물리학과 교수 ▲1989년 미국 에임스국립연구소 방문연구원 ▲1993년 IBM 취리히연구소 방문연구원 ▲2001년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2006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수상 ▲2006년 국가석학 선정 ▲2014년 수당상 기초과학분야 수상. 【탄소나노튜브 Carbon nanotube】 탄소 6개로 이뤄진 육각형 모양이 서로 연결돼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을 이루고 있는 신소재. 1991년 일본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처음 발견한 이 물질은 튜브의 지름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1에 불과한 나노(10억분의1)급 크기여서 탄소나노튜브로 불린다. 탄소나노튜브는 구리보다 전기 전도율이나 열 전달률이 우수하고 강도도 강철보다 100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배터리, 초강력 섬유, 생체 센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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