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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맙습니다… 제주가 된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주가 된 신부님

    제주도와 제주도민을 너무나 사랑해 평생을 헌신했던 ‘돼지 신부님’의 죽음에 제주도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24일 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의 빈소가 마련된 제주 한림성당에는 하루 종일 제주도민들의 애도 행렬이 이어졌다. 맥그린치 신부는 전날 90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도민들은 “누구보다 제주와 제주도민을 사랑하고 한평생을 바쳤던 신부님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맥그린치 신부는 60여년 전 ‘4·3 사건’의 소용돌이와 한국전쟁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제주에 들어와 목축업 기반을 다지고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는 등 제주 근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1954년 4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 제주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가 제주에 도착했을 당시 도민들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가난을 벗어나지 않으면 하느님께 다가설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그는 인천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해 한림까지 가져왔다. 이 돼지는 훗날 연간 3만 마리를 생산하는 동양 최대 양돈목장의 기초이자 제주 근대 목축업의 기반이 됐고, 맥그린치 신부는 ‘돼지 신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 4-H 클럽을 조직하고 가축은행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축산업을 시작했고, 1961년 축산업 교육을 목적으로 성이시돌 목장을 세웠다. 목초를 개발해 소도 기르기 시작했고 농민들에게 사료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사료공장도 만들었다. 한림수직이란 봉제공장도 만들어 1300여명의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한림에 은행이 없어서 농민들이 계를 들었다가 돈을 떼이거나 높은 사채 이자에 허덕이는 것을 지켜보던 그는 1962년 제주도 최초이자 국내 농촌 지역 1호인 한림신용협동조합도 만들었다. 또 목장사업으로 생긴 수익금으로 병원·양로원·요양원·유치원·노인대학·청소년수련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을 속속 설립했다. 제주도민이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선 이후엔 호스피스 사업에 집중했다. 2002년 3월 성이시돌 병원을 호스피스 중심의 성이시돌 복지의원으로 재개원했다. 성이시돌 복지의원은 후원 회원들의 도움과 이시돌농촌사업개발협회 지원 덕에 전액 무료로 운영되고 있다. 맥그린치 신부는 지난해 2월 그의 업적을 기록한 평전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도민들이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고 한국의 축산업을 선도하는 기적이 가능했다”고 도민들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예수는 신부님께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에 ‘저는 누구를 가르치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답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아프고 고통받고 가난한 사람의 편에 늘 함께 하셨던 맥그린치 신부의 사랑과 나눔은 오래도록 제주도민의 가슴에 온기로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전에서 “파란 눈의 아일랜드 신부님은 그렇게 제주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하며 우리 국민의 가슴속에 하느님의 사랑과 평안을 깊이 새겨 주셨다”면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27일 오전 10시 성이시돌목장 삼위일체대성당에서 열리는 장례미사를 거쳐 이시돌 글라라 수녀원 묘지에, 즉 제주도에 영원히 묻힌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월드피플+] 30년 째 같은 옷입는 폐품팔이 할아버지, 알고보니 기부왕

    [월드피플+] 30년 째 같은 옷입는 폐품팔이 할아버지, 알고보니 기부왕

    허름한 옷을 30년째 입으면서도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100만 위안(1억7000만원)을 기부해 온 노인의 사연이 감동을 주고 있다. 충칭만보는 24일 중국 충칭시 통량구(铜梁区)에 사는 88살 우딩푸(吴定富) 할아버지의 사연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지난 24년 동안 매일 10km 이상을 왕복하며 폐품을 주워오고 있다. 식사비를 아끼기 위해 폐품을 주우러 아무리 먼 곳까지 가더라도 반드시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해결한다. 교통비 1위안(170원)을 아끼기 위해 버스를 타지 않고 반드시 걸어 다닌다. 실밥이 뜯겨 나간 낡은 중산복(中山服:중국 인민복)을 30년 동안 입어왔다. 이처럼 빈곤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사실 가난한 삶을 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과거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지금까지 매달 4000위안의 퇴직연금이 나온다. 여기에 연말 각종 수당 1만7000여 위안까지 합치면 일 년 수입이 6만5000위안(1100만원)이 넘는다. 노인 혼자 살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은 액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이처럼 빈곤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들을 돕기 위해서다. 할아버지는 현지의 한 초등학교에 매년 3000위안씩 6년간 기부해 오고 있고, 3명의 대학생에게 1인당 학기별 5000위안을 기부해왔다. 또한 원촨(汶川) 지진 복구를 위한 기부금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할아버지가 퇴임 후 35년간 기부한 퇴직연금과 각종 수당을 합치면 100만 위안이 넘는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날마다 폐품을 주우러 다니지만,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진정한 부자’라고 부른다. 진정한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진=충칭만보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기고] 8월 8일 ‘섬의 날’이 갖는 의미와 가치/이재영 전라남도 행정부지사

    [기고] 8월 8일 ‘섬의 날’이 갖는 의미와 가치/이재영 전라남도 행정부지사

    섬을 영어로 ‘Island’라고 하는데 여기서 ‘Is’는 바다, ‘land’는 땅을 가리킨다. 즉 ‘바다와 땅’이다. 섬을 육지와 동떨어진 곳으로 멀찌감치 인식하기보다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해양 영토의 확장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섬은 드넓은 해양 영토의 거점이자 해상교통의 중심지다. 독도 문제를 보면서 여타 한국의 섬들도 지정학적, 생태적, 자원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가치를 공고히 해야 할 때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섬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3355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섬의 날’이 제정돼 선포됐다. 8월 8일이다. 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날은 불볕더위에 지쳐 섬과 바다가 한없이 그리운 한여름이고, 8자를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 의미로 넓은 대양의 의미를 살렸다. 또한 국토의 끝을 꿋꿋이 지키고 살아 낸 섬의 숲과 새들과 뭇 생명들, 나아가 태풍과 바람, 가난과 역경 속에서 섬을 지켜 낸 섬 주민들의 삶을 경외심으로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국회를 통과한 섬의 날 첫 기념식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이유다. 국민들의 인식 속에 섬이라는 곳은 ‘가기 힘든 먼 곳’ 으로 교통 여건 역시 여전히 불편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동안 국가와 각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탈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 왔고 실제로 많은 환경적 변화를 가져왔다. 밖으로는 연륙·연도교를 개통해 외부의 접근이 쉽도록 하고, 안으로는 도서민의 여객선 운임비를 지원하고 있다. 선착장과 방파제 시설 등 섬 주민들의 기반시설 안정화에도 애써 왔다. 전남도에서는 전국 최초로 섬 주민들의 생필품 물류비를 지원해 육지와 도서 간의 물가차액을 최소화하는 등 열악한 정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이번 대한민국 ‘섬의 날’ 제정이 갖는 의미는 대한민국 영토 확장의 개념도 있지만, 섬 주민들과 섬의 문화, 그리고 이 독특한 공간이 갖는 고유한 생태계 보전의 필요성도 함께 강조된다. 섬은 그 속에 깃들어 사는 인간을 포함해 지구상 마지막 남은 소중한 비오톱(생태서식공간)이다. 육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섭과 훼손, 오염이 덜하기 때문에 연구하고 보존할 가치가 차고 넘친다. 아직도 우리는 섬에 대해 잘 모른다. 섬에 대한 개발이나 섬에 대한 접근 방식은 대단히 신중하고 지속 가능성을 담보해야 하는 이유다. 육지에만 한정됐던 관심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섬으로 향해야 한다. 섬은 국토의 주변 머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해양 영토의 주권을 쥐고 있는 중심 공간이기 때문이다. 전남도는 전국 섬의 65%인 2165개를 갖고 있는 섬 왕국이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가고 싶은 섬’ 정책을 통해 주민과 여행자들이 공존하는 생태여행지로, 무엇보다 섬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섬 재생사업이 푸른 바다 위에서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 ‘섬의 날’ 제정은 육지부에 국한됐던 국민적 시각을 드넓은 해양 영토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우선 그 의미가 크다. 나아가 섬의 가치를 재발견해 국가 균형발전을 촉진할 중요한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섬들에게 희망을!
  • ‘성이시돌 목장’ 제주 축산업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선종

    ‘성이시돌 목장’ 제주 축산업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선종

    제주 성이시돌 목장을 설립하는 한편 한국에서 60년 넘게 선교와 사회사업을 이어 온 패트릭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23일 오후 선종했다. 90세.아일랜드 출신인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에 처음 발을 들였다. 당시 제주는 한국전쟁과 4·3 사건을 거치면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제주의 어려운 상황을 본 맥그린치 신부는 제주의 가난을 타개할 대책으로 성이시돌 목장을 설립하고 척박한 한라산 중턱의 산간을 경작하며 새로운 농업 기술을 전파했다. 이때부터 ‘푸른 눈의 돼지 신부님’이란 애칭을 얻었다. 60여년 봉사활동을 한 공로로 2014년 아일랜드 대통령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한 맥그린치 신부는 지난 9일 심근경색과 심부전증 등 허혈성 심질환으로 제주한라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빈소는 제주시 한림성당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성이시돌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오는 27일 오전 10시 진행된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가난·사기·암투병 딛고… 역경은 역전의 기회”

    “가난·사기·암투병 딛고… 역경은 역전의 기회”

    “역경을 만나면 역전을 노려라!”가난과 암, 경영난을 잇따라 극복하고 최근 국세청으로부터 ‘2018년 아름다운 납세자’로 선정된 정미섭(46) 오산컨벤션 웨딩홀 대표는 23일 “부모님을 원망하고 사회에 불만도 많았지만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이 성장의 계기가 됐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지금이야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사업가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정 대표는 “어렸을 때 발 뻗고 자는 게 소원이었다”면서 “보증을 잘못 선 아버지 때문에 밤마다 단칸방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쳐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살았다”고 털어놨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중학교 졸업 후 바로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친구들은 학교에 가는데 저만 공장에서 일하니까 서러워서 눈물을 많이 쏟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고 야간대학까지 마쳤다. 20대 초반 웨딩숍 일을 배우기 시작해 몇 년 뒤 인천 공장 지대에 웨딩숍을 마련했다. 새벽부터 공장 앞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등 발품을 팔았다. 사업을 차츰차츰 키워 10년 전 경기 오산으로 옮겨 큰 웨딩홀을 열었다. 하지만 곧 사기를 당해 폐업 위기에 놓였다. 정 대표는 “신장암까지 찾아와 2009년 큰 수술을 받았다”면서 “그때는 세상이 다 싫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암과 경영난을 이겨냈다. 원동력으로 직원들을 꼽았다. 정 대표는 “직원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사업을 그만두면 직원들이 갈 곳이 없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했다”고 전했다. 계속된 경기 침체에도 도시락과 구내식당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더 많은 직원을 고용했다. 정 대표는 나눔 활동도 계속해 왔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교에 갈 돈이 없었는데 선생님께서 장학금을 주셨다”면서 “꼭 성공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갚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형편이 어려운 웨딩홀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그는 “학생들로 대신해 배움의 한을 풀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면서 “학생들이 나중에 다른 아이들에게 갚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세금도 잘 낸다. 경영 위기 때도 매출에서 세금부터 떼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세금을 제때 내는 게 국민의 의무”라면서 “세금을 안 내면 당장은 내 돈 같지만 그런 돈은 편하게 쓸 수 없다. 세금을 잘 내면 사업도 술술 잘 풀린다”며 환하게 웃었다.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AS는 의사와 같아… 기술 개발만큼 기업 살리죠”

    “AS는 의사와 같아… 기술 개발만큼 기업 살리죠”

    산업용 자동화장비 수리업체 ㈜엠이티의 김영삼(50) 대표는 기기 수리(AS)를 ‘의사의 일’과 비교한다. 의사가 사람을 살린다면 AS는 공장을, 기업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AS는 기기 개발보다 깊이가 낮은 것으로 인식되지만 촉박한 시간 속에서 적은 인원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고도의 작업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실제로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 2월 발간한 ‘4차 산업혁명 미래 일자리 전망’를 보면 ‘설비 유지·보수’ 업무는 판검사와 함께 고숙련 직종으로 분류돼 있다.김 대표는 고용노동부가 선정하는 4월 ‘기능한국인’에 지난 20일 선정됐다. 어려서 매우 가난했다는 김 대표는 16살 어린 나이에 고향인 전라도 광주를 떠나 경북 구미 금오공고에 입학했다. 전자기기를 다루는 일에 흥미도 있었다. 기숙사가 제공됐고 학용품과 생필품은 물론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는 점이 좋아서였다. 그 당시 금오공고는 중학교 성적이 상위 20% 안에 든 사람만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는 명문고에 속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해 한 학년에 두 명을 선발하는 동력배선 직종 선수로 뽑혔다. 1986년 출전한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도 따 상금 500만원을 고향집에 보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대표는 기술부사관으로 5년간 복무한 뒤 1992년 전역과 동시에 전자기기 업체에 취직했다. 약 10년간 전자기기 수리와 의료기기·산업설비 유지·보수 경험을 쌓았다. 35살이 되던 2002년 9월 엠이티의 모태가 되는 ㈜메트를 설립했다. 23㎡ 남짓한 사무실에 직원은 김 대표 한 명이었다. 지금의 엠이티는 상시근로자 50명에 매출액 36억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관행적으로 적당히 매겨지던 수리 단가를 엔지니어의 숙련도와 작업시간 등 체계적 근거에 따라 제시했고, 기존 수리 업무 외에도 엔지니어링 교육과 스페어(여분) 장비 납품 등 사업 다각화를 시도한 덕이다. 김 대표는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투자가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김 대표는 모교인 금오공고 등 많은 고교와 협력 관계를 맺고 직접 채용도 한다. 그는 “똑똑하고 다재다능한 친구들이 착실히 자기 미래를 그려 나가는 모습이 대견해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서방 vs 러 대리전 격전지… “8년째 시리아인 삶만 무너졌다”

    [글로벌 인사이트] 서방 vs 러 대리전 격전지… “8년째 시리아인 삶만 무너졌다”

    지난 14일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전격적으로 시리아에 토마호크 등 미사일 105발을 쏟아부으면서 시리아 내전이 서방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불붙고 있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이란 등 중동 국가들까지 끼어들면서 8년째 접어든 내전의 출구는 여전히 안갯속이다.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미국 등 서방 3국의 공습에도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의기양양하하다. 친시리아인 러시아는 시리아 정부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의혹이 영국 정보기관의 ‘가짜’, ‘조작’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미국 등의 공습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실효성 없는 서방 3국의 공습으로 시리아의 독재 정권에 반발의 빌미만 주고 시리아 국민의 삶을 더욱 고달프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NYT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시리아 공습 이후, 시리아인들은 다음엔 뭔가라며 궁금해한다’는 기사에서 “미국 등 서방 3국의 공습이 대부분 시리아인의 삶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오히려 알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의혹이 일었던 동(東)구타 두마에서는 수천명이 피란길에 올랐다. NYT는 “이는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의 참상이 서방의 일회적인 공습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등 서방이 알아사드 정권에 책임을 물어 황폐해진 시리아의 재건을 지원하는 등 도움을 줄 경우, 시리아인들의 삶은 더욱 악화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조슈아 랜디스 오클라호마대 중동학센터 소장은 “(이번 미국의 공습은) 알아사드 정권에 벌을 내리는 게 아니라 가난한 시리아 국민을 징벌하는 것”이라면서 “미국의 목표가 대테러리즘과 안정화, 난민 귀환이라면 이것들은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구타 두마 출신의 반정부 활동가 오사마 쇼가리도 “미국 공습은 시리아인들의 어떤 것도,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단정했다.●美·이스라엘·사우디 VS 러·이란·터키 시리아 내전의 본질은 중동의 패권 경쟁이라고 전쟁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미국·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대 러시아·이란의 전통적인 중동 패권 경쟁이 시리아에서 첨예하게 부딪히고 있다는 분석이다. 미국은 2014년 시리아 내 극단주의 테러세력인 이슬람국가(IS)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시리아에 군 병력을 파견했다. 알아사드 정권의 반대편인 반정부군을 지원하며 시리아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차지했다. 이에 소련 시절인 1979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실패 이후 좀처럼 중동 지역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러시아가 IS 격퇴전과 시리아 내전을 빌미로 다시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 찾기에 나섰다. 러시아는 2015년 시리아에 군 병력을 파견하기로 전격 결정한다. 이후 미국과 달리 알아사드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시리아 내전 초반만 해도 알아사드 정권의 정부군은 미국과 유럽연합(EU) 및 터키, 수니파 국가 연합군이 지원하던 반군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2015년 9월 대테러전 명목으로 이란과 함께 알아사드 정권을 도우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파죽지세로 반군을 제압해 나갔고,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의 마지막 반군 거점인 동구타까지 사실상 탈환했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7월 시리아 흐메이민 공군기지를 앞으로 49년간 더 쓰기로 시리아 정부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초에는 타르투스 해군기지에 전함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2배로 늘리기로 했다. EU 국가와 언제든 맞서 싸울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마련한 셈이다. 또 미국의 방치 속에 이슬람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이 시리아에서 러시아와 손잡고 영향력을 키워 나가자, 시아파의 반대인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가 다급해졌다. 이에 사우디는 미국을 사이에 두고 어색한 동거를 했던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고 경제협력을 모색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오만 등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하고, 이집트의 경제 지원에 나서는 등 ‘세’를 불리고 있다. 반면 터키는 쿠르드 민병대(YPG)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이란과 부쩍 가까워졌다. 터키는 미국이 지원하는 YPG가 대테러전에서 성과를 내며 시리아 북부 일대에 세력권을 형성하자 뒤늦게 시리아 내전을 해결할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터키가 반대편으로 건너가면서 러시아·이란·터키라는 새로운 삼각축이 생겼다. 이는 기존 미국·사우디·이스라엘 삼각축과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美, 시리아서 영향력 되찾기 어려울 듯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IS 격퇴전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수개월 내로 철군하겠다’고 말했다. 알아사드 정권이 퇴진한 이후 새로 수립될 민주정부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등 시리아 내전에서 발을 뺄 것이란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와 EU는 시리아를 발판으로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이 점점 막강해지는 러시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따라서 이번 미·영·프의 공습은 미국과 EU가 지난 2~3년간 급속도로 약화된 중동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되찾고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본격적인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그렇지만 이번 공습에도 미국이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되찾지 못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의 ‘친러’ 행보 때문이다. 지난 15일 CBS에서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시리아의 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책임으로 러시아를 독자 제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헤일리 대사의 발언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되지 않은 러시아 제재가 공식화됐다’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백악관은 러시아 제재를 검토하고 있으나 아직 시기를 결정하지 못했다며 뒤로 물러섰다. 또 ‘이란보다 러시아가 더 위협’이라며 강하게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한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도 지난 3월 22일 전격 경질됐다. 워싱턴의 한 외교관은 “백악관 보좌진들의 우려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대한 ‘러브콜’을 거두지 않고 있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시리아에서의 영향력 되찾기나 러시아 견제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라고 전망했다. 35만명이 목숨을 잃은 시리아 내전은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아 2011년 3월 15일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시작됐다. 아랍의 봄은 2010년 튀니지에서 시작돼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진행된 민주화 시위를 말한다. 197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전 대통령과 2000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40년 넘게 시리아를 억압적으로 다스렸다. 시리아인들은 이들의 독재와 세습 행위에 반발해 ‘바샤르는 대통령에서 물러나라’며 2011년 3월 15일 대규모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알아사드 대통령은 퇴진을 거부한 뒤 시위대를 난폭하게 진압했다. 국민은 분노했고,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제사회가 금지한 화학무기를 자국민에게 서슴지 않고 사용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졌다.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와 유엔 등에 따르면 2011년부터 현재까지 시리아 내전에서 260건 이상의 화학무기 공격이 발생했다. 알아사드 정부는 2013년 8월 수도 다마스쿠스의 동부 외곽 지역인 동구타와 자말카 아인 타르마 마을을 화학무기로 공격했다. 당시 유엔 조사단은 사린가스가 사용됐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그해 9월 시리아의 화학무기를 폐기하기로 합의했으나, 시리아 정부는 이듬해인 2014년 4월 또다시 독가스 공격을 개시했다. 시리아 정부는 2015년 5월에도 반군이 장악한 사르민 마을에 화학무기 폭탄을 투하했고, 2016년 9월에도 염소가스가 담긴 폭탄으로 공격했다. 지난해 4월에는 시리아 반군이 장악한 칸 셰이쿤 지역에서 사린가스를 이용한 공격으로 어린이를 포함해 지역 주민 80명 이상이 숨졌다. 이때도 유엔은 배후로 시리아 정부군을 지목했다. 유엔의 한 관계자는 “국제사회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시리아의 국민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안 된다”면서 “하루빨리 독재정권인 알아사드 정권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시리아가 정상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란, 신용불량자 된 사연 “노래 대박났지만 10만원도 못 냈다”

    란, 신용불량자 된 사연 “노래 대박났지만 10만원도 못 냈다”

    란이 ‘어쩌다가’ 곡 히트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자가 된 사연을 고백했다. 지난 22일 방송된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2’에서는 란 전초아가 출연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란은 자신의 히트곡 ‘어쩌다가’의 인기에 대해 “당시 싸이월드에 BGM 명예의 전당이 있었는데 한 곡으로 금, 은, 동메달 3관왕을 했다”고 설명했다. 란은 이러한 큰 인기에도 불구하고 사라졌다. 란은 “그때 신용불량자였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당시 음원 수익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 란은 “계약서에 음원 관련 내용이 없었다. 앨범과 행사 비용에 대한 건 있었지만, 음원 수익 자체가 계약서에 써 있지 않았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란은 “빚이 10만 원, 20만 원이 모여서 500만 원이 됐는데 활동을 하면서 신용 회복 센터에 가서 회복 절차를 밟아야 할 정도로 힘들었다”며 “잘 돼서 좋겠다고 했지만 현실과 괴리감이 컸다. 10만 원을 못 낼 정도로 가난한데, 내 노래가 강남에서 울려퍼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다고도 고백한 그는 “당시엔 솔직히 죽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서 가수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다가’는 제게 애증의 곡”이라고 말했다. 사진=JTBC ‘슈가맨2’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퍼블릭 詩 IN] 전당포

    [퍼블릭 詩 IN] 전당포

    갚아야 할 죄 값 빚 때문에 영혼의 반을 팔았다. 오른팔을 올리면 교회 탑 뾰족한 지붕이 서고 왼쪽 눈을 뜨면 私娼街 울음을 핥아내는 입술이 열렸다. 나는 젊음을 담보로 삶을 팔며 술로 살았다. 하나 둘 늘어나는 빈병의 공간 속에 정신적 치유를 위한 고뇌를 담으나 깊어가는 상실은 막을 길 없고… 살기 위해 살찌우는 빚 덤이, 짙은 화장으로 잠이 든 아내, 들락거리는 푼돈은 아내의 취기에 가난만 입힐 뿐 오른쪽 어깨의 통증엔 아무런 보탬이 없다. 뜰 때마다 쌓이는 눈꼽에 가려지던 나날이 무디어지고 낮아지는 십자가의 높이와는 아랑 곳 없이 육신을 쪼고 있는 典當鋪의 팻말은 지금도 부엉이 눈처럼 껌뻑거린다.이희복(대구경북지방병무청 동원관리과 계장)
  •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헌신과 희생의 삶… 행복한 ‘은하 철도’가 달린다

    [김응교 교수 작가의 탄생] 헌신과 희생의 삶… 행복한 ‘은하 철도’가 달린다

    씨앗 하나가 가장 연약한 잎새를 올리며 딱딱하게 굳은 언 땅을 허물곤 한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들어버린 영혼의 잎새에 글이라는 생명의 물을 부어 주는 존재들이다. 세상이 점점 팍팍해져서일까. 유튜브를 보면 세계 각국 언어로 꾸준히 낭송되는 시 한 편이 있다. 이웃 섬나라 까마득한 시골에서 태어나 땅과 평화를 열렬히 사랑했던 시인이자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1896~1933)의 작품이다. 37년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미야자와는 동화작가 권정생, 소설가 김연수 등 문인들도 사랑하는 작가다. 그의 유고시 ‘비에도 지지 않고’는 투병 중이던 1931년 11월 3일 수첩에 쓴 것이다.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욕심도 없이 결코 화내지 아니하며 늘 조용히 웃으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나물을 먹고 모든 일에 제 잇속을 따지지 않고 잘 보고 듣고 깨달아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숲속 그늘 아래 초가지붕을 새로 이은 작은 초가집에서 살며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돌봐주고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가 계시면 가서 볏단을 날라주고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 가뭄 들면 눈물을 흘리고 냉해 닥친 여름엔 허둥대고 모두에게 멍청이란 소리 들으며 칭찬도 듣지 않지만 걱정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드라마와 영화에 많이 나오고, 노래로도 많이 불렸다. “비에도 지지 않고/바람에도 지지 않고/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지지 않겠다”는 당찬 다짐으로 시작한다. 비에도, 바람에도, 눈에도, 눈보라와 여름 땡볕에도, 모두 날씨와 관계 있다. 농민들과 함께 살았던 그는 매일 날씨를 걱정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단가(短歌)를 지을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했던 미야자와는 농민들을 착취하는 아버지가 미워 가출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고향 이와테현 하마나키는 휴전선처럼 북위 38도선 근방이지만, 여름날 땡볕 날씨에 오호츠크해의 냉습한 동북풍이 불어오면 갑자기 냉해가 닥쳐 “추위 닥친 여름엔 허둥대”야 했다. 모리오카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그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늘 조용히 웃으며 이겨 나가야 한다며 농촌 청년들과 악단과 극단을 만들기도 했다.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하는 돈 많은 부모를 떠나 초가집에서 살며 농사를 짓고 농업학교 교사로 일했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된장과 나물을 먹으며”에는 채식주의자였던 미야자와의 식습관이 보인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육식보다 채식을 해야 한다며 농민들에게 채식주의를 권했다. 일일현미사홉(一日玄米四合)에 만족하며 전쟁에 반대했던 미야자와와 달리, 태평양전쟁 때 일본 군부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하루에 이홉(二合)만 먹을 것을 국민에게 강요했다.1926년 그는 농촌 지역 향상을 위해 라스지인협회(羅須地人協會)를 설립하고 농작과 비료 연구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동쪽에 병든 아이”, “서쪽에 고단한 어머니”, “남쪽에 다 죽어가는 사람”,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으로 상황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동서남북으로 어려운 농민들 곁으로 분주하게 다가갔던 미야자와의 일상 그 자체다. 일본어 원문을 보면 몇 개의 명사를 한자로 쓰고 나머지는 가타카나로만 썼다. 가타카나 표기는 곱씹으며 읽어야 한다. 마치 기억하며 읽으라는 시인의 기호 같다. “그런 사람이/나는 되고 싶다”라는 표현에 구도자로서 아직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안타까움이 스며 있다. 시에 이어 “남무”(귀의합니다), “묘법연화경(법화경)”이 쓰여 있는데, 이는 “법화경으로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법화경’을 탐독하고 1921년부터 대승불교를 포교했던 미야자와의 손길이 보인다.안타깝게도 농민들은 미야자와의 정성을 간섭으로 여기고 불편해했다. 장마와 냉해 때문에 모든 실험이 실패로 돌아가자, 농민들은 부잣집 도련님의 철없는 행동이라며 배척하기까지 했다. 농민들에게도 따돌림을 받았지만, 그는 어떡하면 농민들에게 즐거움을 줄까 생각했다. “농민들의 삶을 위로해 줄 글을 쓰자.” 그는 동화집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자비로 출판했다. 야만의 군국주의 시대에 그의 책을 산 구매자는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죽고 남아 있는 수많은 메모 중에서 친구들은 한 편의 동화를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동화 ‘은하철도의 밤’이었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구구구”라는 후렴을 듣기만 해도 영상이 떠오르는 세대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1980년대에 방송된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말이다. 원작 만화를 그린 만화가 마쓰모토 레이지가 미야자와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은하철도의 밤’에서는 몇 가지 신화적 요소를 볼 수 있다.이야기는 교실에서 선생님이 은하수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수줍은 성격 탓에 아이들에게 왕따당하는 주인공 조반니에게는 곁을 지켜주는 친구 캄파넬라가 있었다. ‘은하 축제의 날’에 놀 일을 생각하는 친구들과 달리 가난한 조반니는 인쇄소에서 일해야 했다. 몇 푼 번 돈으로 빵과 설탕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병든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릴 뿐이다. 조반니가 엄마를 위해 우유를 사던 그날은 ‘은하 축제의 날’이었다. 이날엔 하눌타리 열매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등불을 넣어 강에 띄우는 놀이를 한다. 왕따당한 조반니가 외로이 언덕에 올라 밤하늘을 바라보는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덕 풀밭에 쓰러져 잠시 쉬고 있는데, 뒤쪽에서 “은하정거장, 은하정거장”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수억 마리의 반딧불이가 날아오듯 밝아졌다가, 정신을 차리니 조반니는 어느새 기차 안에 있다. 기차 안에서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새까만 윗도리를 입은 친구 캄파넬라를 발견한다. 캄파넬라의 모습은 이미 죽은 자의 모습이다. 캄파넬라의 얼굴은 어딘가 좋지 않은 듯 창백했습니다. 그러자 조반니도 어디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묘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습니다. (미야자와 겐지 전집 1/너머·2012·246쪽) “젖은 듯한 검은 옷”은 물에 빠져 죽은 캄파넬라의 모습이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는 ‘고사기’(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한 책)에 나오는 창세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미 죽어 저세상에 있는 이자나미를 만나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자나기가 저세상에 가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본 신화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이다. 캄파넬라는 은하철도 안에서 계속 엄마를 걱정한다. “엄마가 날 용서해 주실까?” 캄파넬라는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힘겹게 참고 있는 듯했습니다. “난 모르겠어. 하지만 누구라도 정말로 좋은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한 거지. 그러니까 엄마는 나를 용서해 줄 것으로 생각해.”(위의 책, 249쪽) 이 대화 부분이 무슨 뜻인지, 왜 캄파넬라는 엄마에게 미안해하는지, 왜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지,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끝까지 읽고 나면 캄파넬라가 강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죽은 뒤, 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동화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몇 번이고 묻는다. 미야자와의 작품에서 보이는 신화는 허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조반니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반니의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웠고 볼에는 차가운 눈물이 흘렀다. 마을에 내려왔을 때 친구 캄파넬라가 축제 때 강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듣는다. 꿈속에서 만난 캄파넬라는 이미 죽은 존재였던 것이다. 캄파넬라는 죽어 지금 저 은하 끝 하늘나라로 사라졌고, 자신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차표 덕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을 깨닫는다. 캄파넬라가 친구 자네리를 구하고 죽은 희생정신은 바로 미야자와가 평생 지켜오던 헌신적인 삶이었다. 남을 위해 사는 삶 자체가 그에게는 행복이었다. 진정한 행복에 대한 답으로 미야자와는 타인의 행복을 위한 숭고한 자기희생을 제시했다. 결핵으로 37세에 요절한 그는 평가받지 못하다가 이후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열도는 식지 않는 ‘겐지 붐’에 휩싸여 있다고 할 만큼 일본엔 열광적인 독자군이 형성돼 있다. 2000년에 아사히신문에서 발표한 1000년간 일본인이 좋아하는 문인 순위를 보면 1위는 나쓰메 소세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는 시바 료타로, 4위는 멍청이라고 조롱받던 미야자와 겐지가 올라 있다. 필자가 일본에 유학 갔던 1996년은 미야자와 겐지 탄생 100주년의 해였기에 영화도 나오고,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특집과 드라마가 방영됐다. 대형 서점뿐만 아니라 동네 책방에도 입구까지 1년 내내 그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마구 출판되던 한국어판 전집은 도서출판 너머에서 잘 정리돼 5권짜리 전집으로 출판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오랫동안 수록됐고, 환멸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자연과 우주의 교감을 이루고 있는 그의 작품은 진정한 행복을 제시하는 바로 그 지점, 절망의 동토(凍土)를 뚫고 고개 드는 연둣빛 잎새처럼 부드럽다. 시인·숙명여대 교수
  •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총리 축출 요구하는 시위대와 접촉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총리 축출 요구하는 시위대와 접촉

    현직 대통령이 축출된 뒤에도 총리로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는 전직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는 시위 대열 속에 걸어 들어가 부추기는 발언을 했다. 아르멘 사르그시얀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21일(이하 현지시간) 수도 예레반에서 아흐레째 이어진 세르즈 사르그시얀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는 시위대를 이끄는 야당 지도자들과 악수하고 가볍게 얘기를 나눈 뒤 공식 회담을 제안했다. 대통령은 넥타이를 풀어 공식 행사가 아님을 드러내며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야당 지도자 니콜 파시냔과 10분 대화를 나눴다. 이어 근처 호텔로 옮겨 공식 회담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파시냔은 이를 거절하고 시위대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달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다시 승용차에 올라 퍼블릭 광장을 떠났는데 군중들은 “한발 내딛자, 축출 세르즈” 구호를 연호했다. 카푸카스 산맥에 은거한 310만명 인구의 이 작은 나라는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뀌어 실질적인 권한은 총리가 더 많이 쥐고 있는데 세르즈 사르그시얀은 대통령에서 물러나 총리에 취임해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은 이 나라가 진정으로 변하길 바라고 있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그대로여서 자신들의 기회가 박탈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는 많이 회복됐지만 계절 노동자 수출이 주 수입원이어서 유럽연합(EU) 다음의 무역 파트너인 러시아 경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파시냔은 22일 아침 호텔에서 대통령을 면담하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회담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그는 이번 시위를 ‘벨벳 혁명’이라고 부르자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1989년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 체코슬로바키아의 평화 시위를 일컫는다. 2008년에도 사르그시얀에 반대하는 무력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수감됐다. 군중 연설을 통해 “권력이 인민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모든 국가 시스템을 마비시켜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세르즈는 5년의 두 번째 임기를 마칠 즈음 총리가 될 생각이 없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했지만 지난 10일 의회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2008년 처음 대통령에 선출됐을 때도 부정 선거 시비가 일어나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바람에 8명이 희생됐다. 그의 지지자들은 아제르바이잔과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영웅이 국가 안보를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고 하지만 아제르바이잔, 터키 등과의 긴장이 지속돼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그의 재임 기간 가난이 만연돼 있고 러시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도 비판받고 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30년 넘게 이웃집 중증장애인 돌본 60대 미망인

    [월드피플+] 30년 넘게 이웃집 중증장애인 돌본 60대 미망인

    장애가 있는 이웃을 수 십년 동안 곁에 두고 보살핀 여성의 사연이 감동을 주고있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그 누구보다 ‘베품’의 의미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었다. 20일(현지시간) 펑미엔신원(封面新闻) 보도에 따르면, 중국 쓰촨성 출신의 미망인 우 위샤(60)는 심각한 장애가 있는 이웃 남성 류 쓰치앙(56)을 30년 넘게 밤낮으로 돌봐왔다. 류씨의 딱한 사연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류씨는 6살 때 어머니를, 10살 때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냈고, 이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력과 청력을 모두 잃었다. 대가족인 집안에서 자랐지만 큰 형이 숨지고 세 명의 누나도 결혼해 멀리 떠나면서 류씨는 혼자 남겨졌다. 그를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씨는 그때부터 류씨의 손발이 되었다. 그녀는 “30년 전 류씨의 집은 진흙 방이나 다름없었다. 약 20년 동안 류씨 집에서 그를 돌보다 10년 전 그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집 옆에 방 하나를 증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우씨의 사정도 녹록치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남편이 사망한 뒤 그녀는 세 아이와 조부모를 모두 돌봐야하는 부담을 떠안았다. 그녀는 잡부로 일하면서도 자신의 가족과 류씨의 생계를 책임졌다. 특히 매일 새벽 2시와 5시에 일어나 류씨가 화장실 가는 것을 돕고 그에게 물을 주고있다. 이 때문에 우씨는 수년 동안 하룻밤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으며 친척집도 가보지 못했다. 다행히도 지난해 관계 당국이 우씨의 노고를 인정하고 보조금을 지불하기로 하면서 그녀는 류씨를 돌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마을 시장 딩 루이잔은 “언젠가 우씨가 그를 돌볼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정부가 나서서 대신할 사람을 찾을 것"이라면서 "아무리 많은 지원을 받는다 해도 지난 30년 동안 정성을 쏟은 그녀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qq닷컴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우주와 생사의 이치를 깨닫다… 자연 닮은 삶을 살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우주와 생사의 이치를 깨닫다… 자연 닮은 삶을 살다

    삶과 죽음은 누구나가 겪는 일이지만, 모두가 삶과 죽음이란 본원적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또 고민을 한다 해서 모두가 다 그에 대한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데, 그중 우주의 본원에 대한 의문을 푸는 데 몰두해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은 이들도 있다.#가난한 집 꼬마, 생각에 잠기다 조선 성종에서 명종 사이에 살았던 성리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1489~1546) 선생은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위대한 철학자가 태어날 때에는 신이한 태몽이 있는 법. 화담의 어머니는 임신 전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태어난 아이는 과연 영특하였고, 조금 자라 독서를 하면서는 글을 보기만 하면 다 욀 정도로 총명했다 한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봄날, 화담의 부모는 그에게 ‘밭에서 나물을 캐오라’고 했다. 그런데 밭에 갔다 돌아온 화담은 매일 같이 늦게 오면서도 광주리에는 나물이 다 차 있지 않았다.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묻자 화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물을 캘 때 새가 나는 것을 보았는데 첫날에는 땅에서 한 치 정도 떨어졌다가 다음날엔 땅에서 두 치 정도 떨어졌어요. 또 그 다음날에는 세 치 정도 떨어졌다가 점차 위를 향해 날아올랐어요. 저는 이 새가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치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매일 늦게 돌아오면서도 나물도 못 채운 거예요.”(화담집 권3 유사(遺事) 중에서) 무엇이든 골똘히 생각하기를 좋아했던 화담은 대학(大學)을 읽으면서부터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일삼았다.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완전하게 함을 말한다. 화담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못한다면 독서를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라며, 벽에 천지만물의 명칭을 써 붙여 놓고 날마다 그 글자의 본질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풀리지 않을 때는 밥 먹는 것도 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 채 방에 꼿꼿이 앉아 의심이 풀릴 때까지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병이 났는데, 수년을 이렇게 한 뒤에 이치가 환해졌다 한다. 그가 이런 공부 방법을 택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다. 그는 늘 “나는 스승을 만나지 못해 지나치게 힘을 들였지만 후인들이 내 말을 따르면 나처럼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며, 지난날 자신이 그런 식으로 공부한 것을 후회했다. 만약 화담이 명문가에서 태어나 훌륭한 스승 밑에서 글을 배웠다면 과정을 밟아 가며 차근차근 학문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벼슬보다 산수(山水)가 좋아라 화담은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보낸다. 31세에 당시 조정에서 베푼 천거과(薦擧科)에 응시해 장원했고, 43세에 모친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56세에는 모재 김안국 및 성균관 유생들의 추천으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낳은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는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에 응시할 것을 명한 것을 보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영특한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입신양명해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지만 화담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산수를 유람하기를 즐기고 더러 경치가 좋은 곳을 만나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러 날 밥을 짓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늘 편안한 모습이었고 애써 빈천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한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이웃을 대해 이웃들도 그의 덕을 존경했고 이웃 간 갈등이 있으면 관아에 가지 않고 먼저 그에게 와서 물었다. 그는 벼슬살이 대신 자신의 삶을 자신에게 맞는 일들로 채워 나갔다. 자연을 즐기는 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 웃는 얼굴로 이웃을 만나는 일이 그가 벼슬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일들이었다. 그의 가난했던 생활, 그리고 그런 중에도 벼슬에 나서지 않으려 했던 뜻이 담긴 두 편의 시 작품을 감상해 보자. 이른 아침 우는 새 도마질 하라 권하는데 도마질 소리는 요리하는 부엌에서나 나야지. 근년 들어 상 위에 소금 없어진 지도 오래니 초가집을 향해서 괴로이 울지 마라. -화담집 권1 문고도(聞鼓刀) 이 시는 산에서 우는 딱따구리 소리에서 도마질을 연상하면서도 먹을 것이 없어 도마질할 수 없는 가난한 신세를 돌아본 작품이다. 맑은 세상에 숨어 사는 사람된 것 스스로 기뻐하고 명함 내밀어 임금 뵙는 일 도리어 꺼린다네. 풍토에 맞춰 나라를 바로잡을 재주 없어 흰 구름 베고 누우며 산에서 살기로 기약했네. 세상의 공명을 얻지는 못했지만 도리와 관계된 것은 그래도 분간할 줄 안다네. 졸다 일어나 뜻밖에 좋은 시구 받고서 선생께서 다시 문(文)을 숭상하심에 감사드리네. -화담집 권1 유수심상국언경운(次留守沈相國彦慶韻) 이 시는 개성 유수 심언경이 보낸 시에서 운자를 따서 지은 것인데, 벼슬살이는 자신과 맞지 않아 하지 않지만, 도리를 분별하는 일만큼은 잘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내용이다.#사상의 정수(精髓)를 세상에 남기다 화담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그리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자 화담은 마음이 바빠진다. ‘화담집’ 권2에 실린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에서 그는 “정자, 장자, 주자의 설이 생사와 귀신의 정상을 다 논하였지만 그래도 아직 그렇게 된 소이연의 극치를 설파하지는 못했다”고 하면서 하나만 알지 둘은 모르고, 대강만 알지 아주 정밀한 것은 알지 못하게 된 후학들이 의심을 풀 수 있도록 이 작품을 짓는다고 밝혔다. 이때 이 작품 외에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등 화담 사상의 정수가 담긴 3편의 저술을 함께 남겼다. 이밖에 화담집에는 소옹의 ‘황극경세서’에 수록된 성음도(聲音圖)를 풀이한 성음해, 그리고 ‘황극경세서’, ‘관물외편’에 실린 원회운세의 수리 철학을 해설한 황극경세수해, 복희의 ‘육십사괘방위도’(六十四卦方位圖)를 해설한 육십사괘방원지도해, 주희의 ‘역학계몽’(易學啓蒙) 중 괘변도를 풀이한 괘변해 등 화담 사상의 연원과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철학 작품들이 실려 있다. 후학에게 천고의 귀한 선물을 남긴 화담은 임종 전에 곁에서 모시던 자에게 못에 데려가 달라고 해 목욕을 한다. 그리고 돌아와 한 식경쯤 지나고서 “생사의 이치를 오래전에 알았기에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졸(卒)하였다.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본원에 대해 탐구했던 대학자 화담, 그는 학문을 통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답을 얻었고 자신이 얻은 답을 후학들에게 알려준 뒤 편안한 마음으로 그가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가 지은 ‘유물’(有物)이라는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존재가 오고 또 와도 다함이 없어다 왔는가 싶은 때에 어디선가 또 오네.시작도 없이 오고 또 오거늘그대는 아는가, 애초에 어디서 오는지를 존재가 돌아가고 또 돌아가도 다 돌아감이 없어다 돌아갔나 싶은 때에도 돌아간 적이 없네.끝도 없이 돌아가고 또 돌아가거늘그대는 아는가, 어디로 가는지를 하승현 한국고전번역원 고전문헌번역실 책임연구원■화담집 해제 제자 박민헌·허엽이 간행…5간본까지 모두 5개 판본 조선 시대 화담 서경덕의 문집이다. 저자의 문집은 문인 박민헌, 허엽이 수집·편차해 명종, 선조 연간에 10행 20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을 시작으로, 1786년에 조유선, 마지광이 개성에서 4권 2책 목활자로 간행한 5간본까지 모두 5개 판본이 있다. 5간본은 본집 2권과 부록 2권 합 2책이다. 본집 권1에는 부(賦) 1편과 시(詩) 100여수가 실려 있다. 권2에는 소(疏), 서(書). 잡저(雜著), 서(序), 명(銘)이 실려 있다. 부록에는 문인록이 들어 있다.
  • [여기는 남미] 공군헬기·소방대 출동…400kg 비만 청년의 귀향길

    [여기는 남미] 공군헬기·소방대 출동…400kg 비만 청년의 귀향길

    너무 뚱뚱해서 걷지도 못하는 청년이 비만치료를 받다가 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 너무 그리워서다. 청년의 귀갓길은 공군 헬기까지 동원되는 등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콜롬비아 모스케라에 살던 청년 디디에르 실바(22)가 한 재단의 도움으로 칼리에서 비만치료를 받기 시작한 약 4개월 전. 당시 실바의 몸무게는 400kg 정도였다. 병적 비만이 심각해지면서 20대 초반의 나이지만 실바는 당뇨와 고혈압 등에도 시달리게 됐다. 불어난 몸무게 때문에 12살 이후로는 걸어보질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극단적으로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이다. 85세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집에는 변변한 욕실조차 갖춰져 있지 않다. 할머니는 거동하지 못하는 손자를 길에서 목욕시키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실바가 비만치료를 받게 된 건 사정을 알게 된 재단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다. 실바는 칼리에 있는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됐다. 의사들은 한때 비만대사수술을 고려했지만 실바의 상태를 점검한 뒤 포기했다. 위험이 너무 크다는 판단에서다. 그래서 시작한 게 식이조절이다. 식습관을 바꾸어 감량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덕분에 실바는 4개월 만에 50kg 감량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면서 실바는 마음고생이 심해졌다. 안타까워하던 의사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일단 실바를 귀가시키기로 했다. 17일(현지시간) 실바는 모스케라의 집으로 돌아갔다. 소방대와 군이 투입됐고, 기중기와 헬기가 동원됐다. 헬기에 실려 고향에 도착한 뒤에는 실바를 이웃들은 뜨겁게 환영했다. 이웃들은 실바를 나무로 만든 수레에 싣고 집까지 데려갔다. 재단 관계자는 "4개월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감량에 성공했지만 실바가 너무 집을 그리워해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그렇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실바를 돌봐 걸을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에페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서울광장] ‘지상의 방 한 칸’이 사치인 청춘들/이순녀 논설위원

    [서울광장] ‘지상의 방 한 칸’이 사치인 청춘들/이순녀 논설위원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밖에는 바람 소리 사정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잠이 오지 않는다.” 시인 김사인이 1987년에 발표한 시 ‘지상의 방 한 칸’이다. 이사 갈 걱정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가난한 가장의 깊은 고뇌가 서늘하게 다가온다. 같은 해 먼저 나온 소설가 박영한의 동명 단편도 부동산 투기의 미친 바람이 전국을 휩쓸던 그 시절 방 한 칸을 찾아 떠도는 고단한 여정을 담고 있다.그로부터 30년,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최근 개봉한 영화 ‘소공녀’를 보면서 착잡하고 암울했다. 집 얻기의 무거운 짐이 40~50대 가장에서 20~30대 청년들에게로 대물림된 서글픈 현실과 직면했기 때문이다. 일당 4만 5000원의 가사도우미가 직업인 미소는 월세 30만원짜리 방에서 산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지만 담배와 위스키, 남자친구가 있어 행복하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하지만 월세 5만원 인상이 그의 삶에 균열을 일으킨다. 빚 안 지는 게 인생 목표이고, 취향이자 기호품인 담배와 위스키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는 집을 포기하기로 한다. 제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지고, 하룻밤 잠자리를 찾아 지인 집을 순례하던 그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은 고층 빌딩이 바라다보이는 한강 둔치의 작은 텐트다. 영화의 영어 제목 ‘마이크로해비탯’(microhabitat)은 미생물이나 곤충 같은 미소(微小)생물의 서식지를 뜻한다. 주인공 미소가 ‘지상의 방 한 칸’을 얻지 못하고 내몰린 최후의 서식지가 텐트라는 사실이 가슴 시리다. 안다. 이건 픽션에 불과하다는 걸. 현실에선 담배와 위스키를 줄이거나 빚을 내서라도 오른 월세를 감당할 것이다. 텐트가 임시 거처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집이 될 순 없다. 그리고 사람은 집 없이 살 수 없다. 결혼도, 출산도 집이 없으면 어렵다. 공장에 다니며 웹툰 작가를 꿈꾸던 남자친구는 돈 벌어서 전셋집 구하면 그때 결혼하자며 사우디아라비아 근무를 자원해 떠난다. 1970년대 ‘내 집 장만’을 목표로 중동으로 향했던 부모 세대를 연상케 하는 청춘의 열악한 현실이 마치 지독한 풍자극 같다.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기준 20세 이상 39세 이하 청년 1인 가구는 187만 가구(전체 가구의 11.3%)다. 이 가운데 63%가 월세살이다. 평균적으로 매달 30만~40만원의 월세를 지출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토연구원이 지난해 서울·수도권과 부산에 거주하는 1인 주거 청년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선 월세가 87%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평균 보증금은 2066만원, 월 임대료는 35만원, 총생활비는 90만원이었다. 이들은 주거비의 70% 정도를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면 영화 속 미소와 같은 막다른 처지에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청년들의 주거비 부담을 줄이는 일은 사회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가뜩이나 취업대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그들인데 삶의 터전마저 불안정한 상태로 방치한다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각박하다. 도심 역세권에 주변 시세보다 임대료가 싼 민간 임대주택을 지어 19~39세의 사회 초년생, 대학생, 신혼부부 등에게 공급하는 청년임대주택이 해당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곳곳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 “집값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은 “5평짜리 빈민 아파트”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래도 청년임대주택을 혐오시설로 보는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원룸 임대료 비싸게 받으려고 기숙사 신축을 막는 대학 인근 주민들의 이기주의도 안타깝다. 집값이든, 임대료든 재산권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하지만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주거 환경은 생존이 걸린 일이다. ‘지상의 방 한 칸’을 사치로 여기는 청춘들이 많은 사회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해선 안 되는 이유다. coral@seoul.co.kr
  • [서울플러스 칼럼] 최저임금, 무엇이 문제인가/황종성 경제 칼럼니스트

    [서울플러스 칼럼] 최저임금, 무엇이 문제인가/황종성 경제 칼럼니스트

    ●대기업은 5만불, 중소기업은 1.5만불 시대 대기업 유보금에 분노한 화살이 경제적 하위 그룹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날아오고 말았다. 100대 기업의 순이익이 60%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88%의 고용을 책임지고 있는 중소기업에 최저임금을 강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며 중소기업인의 어깨의 힘이 축 늘어지게 하는 결정인 것이다. 5만불 시대에 살고 있는 대기업은 최저임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안전지대에 살고 있는 그룹으로서 최저임금을 주고 있는 기업은 이미 중국상품에 경쟁력을 잃었거나 탄생한 지 얼마 안 된 신생기업이고 뿌리의 활착이 약한 기업이다. 대선 당시 후보 전원이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공약했지만 당선되고 보니 원전 시공 중단 사태처럼 대국민 의견수렴으로 간다면 공약이행 안 했다고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최저임금 16.4%의 눈칫밥이 배부를 수 있는가 정부에서 저소득층을 위하여 포퓰리즘 공약을 이행하려 하지만 노사가 합의되지 않은 대선공약으로 결정된 임금은 노동자들조차도 달갑지도 않고 떳떳하지도 않은 노사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현 정부는 최저임금을 받는 저소득층에게 공약이행으로 높은 인기를 유지 하고 싶지만 먹이사슬의 분배가 실패한 한국 경제에서 대기업에 편중된 이익이 낙수 되지 않아서 가난한 하위그룹끼리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경제적 가뭄을 겪고 있는 유보금이 없는 중소기업 또한 경제적 약자인데 중소기업에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소수가 불행해도 된다는 생각으로 노사 모두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결정이다. 한국의 정치구조는 여야가 격렬하게 싸우는 구조로서 집권 시 여야가 협력하여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임기 5년마다 대한민국 경제호를 이끌어갈 경제 컨트롤 타워의 변경으로 경제기술을 축적할 수 없는 경제기술이 빈약한 정치구조인 것이다. ●내년에도 16.4%를 또 올릴 것인가 이전 정권의 잘못된 정치가 분배구조를 박살 내놓고 서민 기업의 최저임금이 분노의 대상인가? 분노의 방향을 알고 분노하면 애국열사가 되지만 분노의 방향을 모르고 분노하는 멧돼지는 실탄을 맞는다, 정부 돈 퍼주기도 모자라 가난한 기업도 퍼주라는 포퓰리즘은 영혼 없는 땜질 처방의 극치이다. 현 정부는 최저임금에 대한 분노의 칼날을 거두고 더 높이 올라가서 더 넓게 보고 한국에 주어진 파이를 어떻게 서민에게 분배할지를 냉철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년에도 16.4%를 올린다면 서민경제의 하부구조가 붕괴를 가져오며 촛불의 역풍을 생각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난제는 반드시 해법이 존재한다, 다만 당사자의 눈에 보이지 않고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뿐이다. 중소기업이 잘 되는 환경이면 대기업처럼 연봉 1억원은 안 주고 싶겠는가. 중소기업은 최저임금 주는 게 창피하다. 더 번창시켜서 더 많이 주고 존경받고 싶다. 한국경제가 피라미드 구조로 활성화되려면 첫째, 파이를 나눌 수 있는 대기업에 대한 경제민주화가 단행되어야 하고 둘째, 중소기업인들이 존경받고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경제융성의 시대가 가능한 것이다. ●경제 민주화로 최저임금 해소해야 경제 민주화의 성공은 최저임금의 확실한 성공이다. 모든 기업에 포트폴리오로 3개 이상의 법인을 가질 수 없도록 제한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다. 금산분리와 순환출자에 의한 방만하고도 탐욕스러운 계열사 보유를 막아야 무수한 중견기업들이 강건해질 수 있으며 대기업의 계열사가 없어졌으니 제값을 받을 수 있으며, 기술탈취가 필요 없으며, 독점거래, 불공정이 사라질 것이다. 중소기업의 제품 가치가 인정되고 제값 받으니까 중소기업의 고용 낙수가 최저임금을 해소시키고 한국경제의 선순환에 시발점이 될 것이다. 대기업의 지네 발에서 잘려나간 중견기업들은 민간에서 성공한 기업가들이 인수해서 독자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하고 더 많은 고용으로 청년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순간, 미래의 한국경제의 기대감으로 최저임금에 대한 저항이 약화되고 불확실한 경제 구조가 정상 궤도에 연착륙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수용하고 기다려 줄 것이다. 경제 칼럼니스트
  • 누구나 아는 이름, 아무도 모르는 그의 젊은 날…‘청년 마르크스’ 예고편

    누구나 아는 이름, 아무도 모르는 그의 젊은 날…‘청년 마르크스’ 예고편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카를 마르크스’의 젊은 날을 담은 영화 ‘청년 마르크스’ 티저 예고편이 공개됐다. ‘청년 마르크스’는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기 전, 젊은 날 그의 사랑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우정, 뜨거운 꿈과 이상을 그린 영화다. ‘자본론’의 저자이자 사상가로 딱딱하게만 느껴졌을 카를 마르크스의 젊은 날을 조명해, 그의 기존 이미지와는 색다른 모습을 선보이는 영화다. 공개된 예고편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만남부터 이들이 의기투합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당신은 우리 시대 최고의 유물론자예요”, “노동계에 대한 당신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라며 서로를 인정한 두 사람의 만남이 이후 변화를 궁금케 한다. 이렇게 “엥겔스 평생의 동반자이자 친구”가 된 카를 마르크스와 “마르크스가 인정한 유일한 친구”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저서를 집필하는 모습은 열악했던 당시 공장의 환경 속 노동자들의 모습과 병치되며 새로운 세상을 열망한 그들의 꿈을 주목케 한다. 또한 “가장 가난한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상류사회를 다 알다니…”라고 감탄하는 엥겔스에게 “솔직히 말해도 돼요? 한마디로… 어마어마해요”라고 답하는 마르크스의 모습은, 공장주의 아들이었던 엥겔스와 오만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자신감 넘쳤던 마르크스의 캐릭터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 X 엥겔스, 둘의 만남이 세상을 바꾸다!”라는 카피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두 친구의 가슴 뜨거운 여정을 예고한다. 영화는 젊은 시절의 카를 마르크스를 다뤄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스페셜 갈라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5월 개봉. 15세 관람가. 118분.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최준식의 거듭나기] 한국 문화는 중앙박물관에서

    [최준식의 거듭나기] 한국 문화는 중앙박물관에서

    나는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에 대해 책을 쓰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있다. 가끔 내게 강연 부탁이 오는데 그때 당사자는 종종 ‘우리가 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내용으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한국 문화에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또 긍지 타령인가? 왜 한국인들은 이렇게 자신의 문화에 자신감이 없을까? 한국이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이 된 것도 그렇고, 세계 최고의 문자를 쓰고 있는 것도 그렇고 자랑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도 한국인들은 자국 문화에 긍지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에게 문화적인 자긍심을 심어 줄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주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용산에 있는 중앙박물관을 심층적으로 보는 것이다. 어느 나라건 중앙박물관은 그 나라 문화의 최고 상징이다. 그 나라 문화의 최고만 모여 있는 곳이 그곳이다. 우리 중앙박물관에는 세계적인 명품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다. 일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자원봉사 일을 했던 아들아이와 함께 중앙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관람객이 얼마 없는 것을 보고 아들아이가 깜짝 놀라면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항상 사람이 많은데 여기는 왜 이리 한산하냐고 되물었다. 실제로 우리 박물관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주말에는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과외로 한국 역사 공부하러 오는 어린이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다. 사설 학원의 강사가 일군의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 어린이들이 없는 주중에 가면 아주 한가하게 그 명품들을 감상해서 좋은데 너무 관람객이 없어 공연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나는 박물관 갈 때마다 내 눈을 의심한다.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이 이리도 가까운 데에 있으니 말이다. 지하철을 타고 이촌역에 내려 잠깐만 걸어가면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명품들을 수두룩하게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입장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들을 볼 때마다 황송하다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 예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지만 3층 독방에 전시돼 있는 ‘미륵반가사유상’만 보자. 이 불상은 일본 교토 광륭사에 있는 목조미륵반가유상과 자매 같은 것으로 두 불상 모두 세계적인 조각품이다. 일본 것에 대해서는 20세기 서양의 최고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야스퍼스가 극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유럽에서 본 어떤 성상(聖像)보다 이 불상이 뛰어나다고 칭송했다. 우리 것도 그런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런데 주중에 가서 보면 그 방에 사람들이 별로 없다. 그래서 관람하기에는 아주 좋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인류의 걸작을 내가 혼자만 보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아무 때나 지하철 타고 와서 공짜로 봐도 되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나는 가 보지 못했지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 그림은 사람들이 항상 많이 있어 제대로 못 본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명품 앞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신라 금관 앞에도 없고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앞에도 사람들이 없다. 왜 한국인들은 중앙박물관에 잘 가지 않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자국 문화에 대한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일 게다. 또 하나는 박물관에 가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적절한 안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중앙박물관에 있는 명품들만 골라 아주 쉬운 소개서를 쓰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도 단 2시간 안에 볼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1층 선사실부터 3층 백자실까지 훑으면 한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가지지 말라고 해도 자동으로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박물관에 사람들이 넘쳐나길 바랄 뿐이다.
  • 1년에 수천마리씩 꿀꺽~ 조선의 ‘소고기 사랑’

    1년에 수천마리씩 꿀꺽~ 조선의 ‘소고기 사랑’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김동진 지음/위즈덤하우스/264쪽/1만 5000원 새삼스럽게 보면 식탁 위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 도대체 누가 처음 작은 씨앗을 쪼개어 그 속에 먹을 만한 것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밥그릇에 담을 궁리를 했을까? 도대체 누가 처음 미끄덩거리고 이상해 보이는 괴물체를 맛있게 먹고 ‘굴’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도대체 누가 풀떼기를 짠물에 담가 숨을 죽이고 묵히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을까? 도대체 누가 순하게 눈을 끔벅이는 이로운 동물인 소를 신성시하면서도 동시에 맛있게 먹어 치울 염을 냈을까?조선 시대, 소고기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소의 존재 자체가 그러했다. 백성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는 상황에서 소는 거의 절대적이다시피 했다. 저자는 말한다. “소는 농사의 성패를 가를 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소 한 마리가 가는 논과 밭을 사람이 대신하려면 적어도 여덟아홉명에서 십여명까지 달라붙어야 했다. 더구나 소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논밭을 갈 수 있지만 사람은 한나절 만에 탈이 나기 일쑤다.” 더군다나 질척한 논은 푸슬푸슬한 밭과 달리 소의 노동력이 꼭 필요했다. 조선 시대에 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조선 시대는 소를 탐식한 시대이기도 하다. 소고기는 특별한 음식이면서 동시에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임금은 반드시 소고기를 먹었다. 임금이 되려 하거나 대리하는 자도 소고기를 먹음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다. 당연히 나라의 허락 없이 소고기를 먹으려 드는 것은 왕위 찬탈을 도모하는 역적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한편, 소고기의 풍부한 영양은 나라의 인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일상적으로 소고기를 제공받았다. 서울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소를 잡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곳이 성균관이었다. 그렇다면 가난한 백성은 소고기 맛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말하듯 백성들도 명절마다 소를 잡아 ‘이밥에 괴기국’을 먹었다. 이 책은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소고기의 흔적을 샅샅이 찾아 들려준다. 각종 행정기록을 참고하여 당시 소의 사육 환경과 소의 숫자를 헤아려 보는가 하면, 소고기를 보관하고 요리하는 법, 소고기를 약으로 쓰는 법, 염소와 돼지와 사슴고기와의 관계까지 가늠해 본다. 먹을 것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가 보인다. 흔연한 식탁이 예사롭지 않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 아빠, 가난한 나도 꿈꿀 수 있을까요

    아빠, 가난한 나도 꿈꿀 수 있을까요

    자녀 양육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한국 아빠 4총사(강상규·심재원·허민·우명훈씨)가 컴패션과 함께 5박 6일 일정으로 필리핀을 찾았다.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자녀 양육에 힘쓰는 현지 엄마, 아빠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들은 마닐라와 팜팡가의 여러 가정과 어린이센터 등을 돌며 컴패션의 양육 철학과 가치를 직접 체험했다. 컴패션은 6·25전쟁 때 한국에 온 미국 출신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는 한국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국제어린이양육기구다. 지난 66년간 태아영아생존, 1대1 어린이양육, 양육 보완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빈곤에 놓인 전 세계 어린이를 어엿한 성인으로 키워내는 데 앞장섰다.양팔을 뻗으면 양쪽 벽에 손이 닿을 정도로 좁은 공간. 발을 움직일 때마다 얇은 바닥이 무너질 듯 삐걱대는 방 두 칸짜리 집이 셀레스트 카초(31·여) 부부와 네 아이의 보금자리다.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 위로 나무판자를 덧대 엉성하게 지은 이곳에서 그는 태어나고 자랐다. 작은 가게에서 일할 때 남편을 만났다. 함께 산 지 9년이 지났지만 돈이 없어 결혼식은 못 올렸다. 생후 3개월 된 막내 마리아는 엄마 품에 꼭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타지에서 일하느라 주말에만 집에 오는 남편 대신 홀로 아이들을 키워 오던 그에게 얼마 전 웃을 일이 생겼다. 임신 중이던 그에게 이웃 주민이 컴패션의 양육 지원 프로그램을 소개해 준 것이다. 덕분에 마리아는 태어난 뒤 예방접종을 받았고 매주 식재료도 지원받고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늘 밝게 웃는 셀레스트는 “비록 가난하지만 네 아이를 모두 공부시키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힘을 내겠다”고 말했다.셀레스트 가족은 마닐라 외곽에 위치한 크리스천가스펠교회 어린이센터의 지원을 받고 있다. 아빠 4총사의 여행 둘째 날, 센터는 현지 엄마 20여명과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엄마들은 센터 직원을 따라 바느질로 베갯잇을 만들었다. 센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베갯잇, 목걸이 등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재료도 무상으로 준다. 필리핀컴패션은 전국 355개 어린이센터를 통해 8만 1366명의 어린이를 지원하고 있다.4총사는 전날 저녁 이곳에서 현지 아이들의 아빠들을 만났다. 한때 술과 마약, 도박 등에 빠져 있던 이들은 아이를 통해 컴패션을 알게 됐다. 부인과 함께 세 자녀를 키우는 잭슨 하레스(37)는 한 달 전부터 매주 아버지 모임에 나오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 당했고 마약에 빠져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이를 잘 키워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이웃의 말에 오게 됐는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여행 나흘째 4총사는 팜팡가주 앙헬레스에 위치한 주디 두케사(19·여)의 집을 방문했다. 주디는 세 살 때부터 캐나다 후원자로부터 1대1 양육지원을 받고 있다. 후원자를 만나 본 적은 없다는 주디는 “대신 편지를 보여 주겠다”며 방으로 안내했다. 주디는 후원자가 보내온 가족 사진과 편지 수십통을 보여 주며 “아이들을 30명이나 후원하면서도 중간에 끊지 않고 17년간 후원해 준 너무 고마운 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선물도 보내주는데 아홉 살 때 받은 첫 번째 드레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수줍게 웃었다.4총사는 이날 주디와 가족들을 위해 한국식 짜장라면 파티를 열었다. 라면 20개를 뜯어 면과 짜장수프, 건더기수프를 따로 모았다. 냄비에는 6ℓ 물 한 통을 붓고 면을 모두 넣었다. 잘 익은 라면을 조금씩 덜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눠 주자 60그릇이 나왔다. 짜장라면 파티는 금세 마을 잔치가 됐다. 오는 길에 코리아마트에서 사 온 버너와 큰 냄비는 주디 가족의 세간살이가 됐다. 4총사는 주디의 아버지 레이난테(45)에게 버너 사용법을 알려 줬다. 레이난테는 “얼마 전 버너가 고장 났는데 돈이 없어 못 사고 있었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주디 가족은 기찻길 옆에서 살다 7년 전 이곳으로 이사했다. 원래 살던 집을 정부가 철거해 새 터전을 구해야 했다. 친척집 마당 한구석에 나무판자로 지은 집이지만 여덟 식구에게는 소중한 터전이 됐다. 주디는 두 오빠, 부모와 큰방을 함께 썼다. 하지만 2년 전 엄마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지금은 네 명이 쓰고 있다. 주디는 방이 좁아 다섯 식구가 몸을 꼭 붙이고 자야 했던 예전이 그립다. 레이난테는 “마약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서 살고 있지만 컴패션의 후원 덕에 주디와 아들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었다”며 “대가 없이 후원해 줘 너무도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같은 날 저녁 4총사는 컴패션 졸업생 일곱 명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컴패션의 1대1 양육 프로그램을 마친 학생 중 성적이 우수하고 진로계획이 뚜렷한 소수에게 주어지는 1대1 리더십 결연 프로그램까지 수료하고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디딘 이들이다. 이 중 아이리 리싱(22·여)은 한국 후원자로부터 3년간 지원을 받았다. 후원자의 이름만 알 뿐 얼굴도 성별도 몰랐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동생들의 학비를 댈 수 있게 된 것 모두 후원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업 전 한국에 가 보려고 돈을 모았지만 재산이 일정 규모 이상 되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어 갈 수 없었다”며 “한국에 가면 후원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날 한국컴패션에서 준비한 깜짝 영상편지에 후원자가 등장하자마자 아이리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친구들도 각자 자신의 후원자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 여행 마지막 날 만난 에드가르도 하비에르(50)는 트라이시클(자전거 삼륜 택시) 운전사다. 태풍으로 집을 잃은 뒤 가족과 함께 교회에 얹혀 산다. 하루 종일 일해도 200페소(약 4000원)씩 트라이시클 판매상에게 내야 하는 할부 원금과 이자를 빼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그러나 컴패션 후원 덕에 셋째와 넷째를 공부시킬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한다. 에드가르도는 꿈을 묻는 질문에 “자식들이 졸업 후 원하는 직장을 갖고 받은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답했다. 마닐라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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