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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우둔한 실수”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우둔한 실수”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3억 5800만원 수수 혐의 “깊이 반성…참회” 박기춘 의원 구속 분양 대행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은 박기춘 무소속 의원이 18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김도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박 의원에 대해 청구한 사전구속영장에 대해 “소명되는 주요 범죄혐의의 내용과 범행 후의 정황 등에 비추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밝히며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에 따르면 박 의원은 2011년부터 지난 2월까지 분양대행업체 I사 대표 김모(44·구속기소)씨에게서 명품 시계와 안마 의자, 현금 등 총 3억 5800만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는다. 또 김씨와의 뒷거래를 감추려고 경기도의원 출신 정모(50·구속기소)씨를 시켜 그동안 받은 금품을 김씨에게 돌려준 혐의도 있다. 박 의원은 소환 조사를 받기 전 검찰에 자수서를 제출하고 금품거래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박 의원에게 혐의를 둔 금품거래 규모가 구속영장 청구 기준인 2억원을 넘는 데다 증거를 감추려 한 정황까지 드러난 점을 고려해 지난 7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회는 지난 13일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을 가결했고, 이어 박 의원은 이날 오전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그는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면서 “제가 다시 생각해 봐도 우둔한 실수를 했다. 깊이 반성하면서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3억 5800만원 수수 혐의 시인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3억 5800만원 수수 혐의 시인

    박기춘 의원 구속, 불법 정치자금 3억 5800만원 수수 혐의 “깊이 반성…참회” 박기춘 의원 구속 분양 대행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은 박기춘 무소속 의원이 18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김도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날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 등으로 박 의원에 대해 청구한 사전구속영장에 대해 “소명되는 주요 범죄혐의의 내용과 범행 후의 정황 등에 비추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밝히며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에 따르면 박 의원은 2011년부터 지난 2월까지 분양대행업체 I사 대표 김모(44·구속기소)씨에게서 명품 시계와 안마 의자, 현금 등 총 3억 5800만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받는다. 또 김씨와의 뒷거래를 감추려고 경기도의원 출신 정모(50·구속기소)씨를 시켜 그동안 받은 금품을 김씨에게 돌려준 혐의도 있다. 박 의원은 소환 조사를 받기 전 검찰에 자수서를 제출하고 금품거래 사실을 시인했다. 하지만 검찰은 박 의원에게 혐의를 둔 금품거래 규모가 구속영장 청구 기준인 2억원을 넘는 데다 증거를 감추려 한 정황까지 드러난 점을 고려해 지난 7일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국회는 지난 13일 본회의에서 체포동의안을 가결했고, 이어 박 의원은 이날 오전 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았다. 그는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면서 “제가 다시 생각해 봐도 우둔한 실수를 했다. 깊이 반성하면서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신동빈 ‘롯데 원톱’ 굳혔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17일 열린 일본 롯데홀딩스 임시 주주총회에서 완승을 거뒀다. 한·일 롯데그룹 지주사인 롯데홀딩스의 주주들은 신 회장 중심의 안정적인 경영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이로써 지난달 27일부터 20여일 끌었던 롯데 경영권 분쟁은 일단락됐다.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과 형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을 제치고 유일한 일인자로 올라선 신 회장은 한·일 통합경영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롯데그룹에 따르면 이날 오전 일본 도쿄 지요다구 데이코쿠 호텔에서 열린 롯데홀딩스 주총에서 사외이사 선임과 준법경영 방침 확인 등 2건의 안건이 통과됐다. 검사와 국회의원(참의원)을 지낸 사사키 도모코 데이쿄대 법학부 교수가 롯데홀딩스 초대 사외이사로 취임했다. 주주들은 또 롯데그룹이 오너 가족과 외부의 힘에 흔들리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른 경영을 추진하는 것에 찬성했다. 롯데 관계자는 “참석 주주의 과반 찬성으로 두 안건이 모두 순조롭게 가결됐다”고 말했다. 다만 롯데홀딩스는 주주보호를 이유로 구체적인 참석 인원과 찬성비율은 공개하지 않았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주총에 참석했으나 신격호 총괄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동빈 회장의 주도로 열린 이번 주총은 25분 만에 마무리됐다. 애초 아버지를 등에 업은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이 치열한 표 대결을 벌일 것으로 예측됐지만 동생 신 회장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이사회 합의와 법적 절차를 통해 한·일 롯데를 장악한 신 회장에게 주주들이 전적인 신뢰를 보낸 것으로 풀이된다. 신 회장은 주총 결의 후 “경영과 가족의 문제를 혼동해선 안 된다”면서 “법과 원칙에 따라 회사를 운영하고 ‘열린 경영’을 지향하겠다”고 밝혔다. 롯데 ‘원톱’을 공식화한 신 회장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순환출자 정리, 호텔롯데 상장, 한국 롯데의 지주사 체제 전환 등 지배구조 개선을 적극 추진할 예정이다. 도쿄 황성기 특파원 marry04@seoul.co.kr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사설] 광복 70주년, 일류 국가를 향해 함께 뛰자

    이 아침엔 어깨를 펴고 한바탕 크게 웃어 보자. 일제의 질곡에서 벗어난 지 어언 칠십 성상(星霜). 광복 한국의 나이가 고희(古稀)가 됐다. ‘삼각산이 뒤집혀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것’이라며 애타게 기다리던 ‘그날’이 70년 전의 바로 오늘이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번영과 풍요를 누리기까지 광복 70년은 한 편의 서사시였다. 그토록 바랐던 해방의 희열도 잠시, 국권 피탈보다 고통스러운 동족 분열과 상잔(相殘)의 비극이 숙명처럼 들이닥쳤다. 금수강산은 두 동강이 났고 백성도 갈라졌다. 4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혹한 전쟁은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잿더미 속에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암흑 같은 삶,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 잃은 아이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집과 가족이 있다고 해도 먹을 것이 없었다. 기댈 곳은 우리 자신밖에 없었다. 극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긍정적 사고,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는 근면성, 굶주리면서도 불타올랐던 교육열, 위기 극복의 DNA를 품은 민족성으로 한국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국내총생산(GDP) 3만 1000배 증가, 1인당 국민총소득(GNI) 420배 상승, 최고의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콧대 높은 선진국에 수출하는 나라, 미래성장동력인 정보기술(IT) 선도국, 70년 만에 이뤄낸, 유례없는 성장의 열매다. 자부할 것을 다 열거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이제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으로서 명실공히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 짧은 기간에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 비결을 모든 나라가 배우고 싶어 하는 소강국이 됐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피땀으로 일궈 낸 자랑스러운 강토다. 하지만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대한민국은 중대한 고비를 만났다.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경제는 어느새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외형적 성장을 이뤄 냈어도 양극화라는 쉬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을 얻었다. 저출산 고령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돼 일할 능력이 있는 경제활동인구는 줄고 노인층은 점점 두터워져 ‘늙은 국가’가 돼 가고 있다. 복지 수요는 급증해 도움이 필요한 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 해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한다. 취업과 연애, 결혼과 같은 인생 중대사마저 포기할 지경에 놓인 젊은 세대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와 주변국의 상황은 더 엄준하다. 패전 70년 만에 일본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우경화로 치달으며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압제의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고 피해를 뒷받침할 물증이 버젓이 있는데도 사죄하기는커녕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있다. 구한말의 한반도처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한국 외교는 더 엄중한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은 변함없는 동맹국이지만 중국 또한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한국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자칫하면 양쪽에서 압박을 받아야 하는 샌드위치 신세다. 북한은 어떤가. ‘김정은 체제’의 북한은 고립돼 갈수록 망나니처럼 날뛴다. 제재 조치를 아랑곳하지 않고 핵 개발에 몰입하는 한편 육상과 해상을 가리지 않고 도발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는 이대로 주저앉지 않는다. 위기일수록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던 우리 민족 아니던가. 총탄 세례도 뚫고 나왔고 국가 부도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금 모으기를 하며 극복했다. 땀과 눈물로 나라를 일으킨 아버지, 어머니가 든든히 살아 있다. 다시 뛰면 된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흩어져선 안 된다. 하나로 뭉쳐야 한다. 불행히도 날 선 대립과 갈등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 좌와 우, 빈과 부, 동과 서, 노와 사로 분열, 대치하고 있다. 사회 통합을 이루지 않고는 위기를 극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말로만 통합을 외치고 뒤로는 발목 잡는 정치, 헐뜯는 정치는 발전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양보와 이해 없이는 통합은 어렵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한발씩 물러서는 배려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 타협을 이끌어 내야 한다. 4대 부문(노동·공공·교육·금융) 구조개혁은 한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노조든, 기업이든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나 혼자 잘살겠다는 이기심은 전체 국민의 불행을 부른다. 고도성장 덕에 생산직도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시대다. 저임금으로 핍박받던 1980년대의 노조가 아니다. 일자리 없는 젊은 세대와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는 비정규직을 위해 막무가내식 태도는 버려야 할 때다. 경영 환경은 악화일로다.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일등 기업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다. 우리 기업이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노동개혁은 그래서 절박한 과제다. 경제 회복은 정부와 기업,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야 달성을 앞당길 수 있다. 리더의 중요성은 더 강조할 필요도 없다. 현실을 바로 짚고 미래를 통찰하는 정책이 아쉽다. 기업의 생명은 시장을 선도하는 신제품 개발을 통해 간단없이 이어진다. 미래의 먹거리 발굴을 게을리하다간 약육강식의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도태되기 십상이다. 국제사회의 발언권은 경제력에서 우선적으로 나온다. 미국과 중국, 일본을 따라잡고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경제력을 보유하는 날, 외교 무대에서도 큰소리를 칠 수 있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는 확실히 응징하면서도 대화의 문은 열어 놓고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세계 13위권인 한국 경제의 장래는 밝지 않다. 신흥국의 부상으로 2050년에는 17위권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것은 예상일 뿐이다. 2차대전 종전 후 독립한 110여개국 중 한국은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국가다. 아무도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가 전쟁의 폐허에서 전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할 국가로 변모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은 깨지는 것이 더 많다. ‘잘살아 보자’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회가 왔다. 광복 70년의 성공 신화는 계속될 수 있다. 다시 새 출발의 큰 걸음을 내딛자. 그리하여 자유와 평화, 여유와 기쁨이 넘실대는 나라, 일류의 선진국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 [문화마당] 어느 ‘트랜스포머 극장’의 앞날/정재왈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문화마당] 어느 ‘트랜스포머 극장’의 앞날/정재왈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오늘날과 같은 실내극장에서 공연을 보기 시작했을까. 햇수로 치면 100년이 좀 넘었다. 1908년 이인직이 개설해 같은 해 11월 신극 ‘은세계’를 선보인 원각사(圓覺社)가 효시다. 지금의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와 금호아시아나빌딩 사이 골목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극학자들은 원각사를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본다. 외관이 선명한 사진 한 장과 극장 내부를 짐작할 수 있는 간략한 도면, 경험자들의 증언 등 객관적인 물증이 남아 있어 그런 평가가 가능했다. 극장은 글자 그대로 원통형의 몸통에 원뿔 지붕을 이고 있고 무대와 명확히 구분된 객석은 등급에 따라 입장료 차이를 두었다. 그런 객석이 500개 남짓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극장 수는 얼마나 될까.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실시하는 ‘공연예술실태조사’(2013년 기준)에 따르면 공연장 시설 수는 984개, 한 시설 내에 들어 있는 개별 극장들을 나눠서 합해 보니 극장 수는 1227개나 됐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역 극장 건립 붐이 일면서 공공극장 시대가 열리더니 근자에는 민간 극장이 늘어나는 추세다. 공공과 민간 극장 비율은 45대55로 민간이 약간 앞선다. 이와 같은 극장의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 덕분에 한국의 공연예술은 그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까지 이 ‘모세혈관’을 타고 공연예술이 확산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극장은 공연예술 유통의 중심이자 그것이 성립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한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바로 1000여개의 극장 가운데 300석 이하 소극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중·대형 극장의 거의 전부가 한 가지 형태의 극장이라는 점이다. 천편일률적이라는 말이 딱 맞다. 예술의전당이나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과 같은 ‘사진틀 무대 극장’이다. 마치 사진틀처럼 생긴 ‘프로시니엄 아치’로 무대와 객석이 엄격히 분리돼 관객은 그 틀 속의 사진을 감상하듯 공연을 본다. 이 때문에 이런 무대 극장에서는 공연이 행해지는 무대와 객석의 깊은 교감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무대의 공연 양식도 사실주의 외에 획기적인 것을 포용하기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편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극장이 애초에 그렇게 생긴 이상 그까짓 극장 하나를 맘대로 요리하지 못하냐고 연출가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는 9월 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 아시아예술극장이 문을 연다. 앞으로 전당 내 다섯 개 주요 공간 가운데 관객들과 수시로 만나야 하는 얼굴이다. 대극장에 해당하는 1120석의 ‘극장1’과 512석의 중극장 ‘극장2’로 구성됐다. 이 극장은 무대와 객석이 마치 트랜스포머처럼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한 ‘가변형 극장’이다. 예의 천편일률에 비춰 보면 신선한 파격이다. 미리 둘러본 사람들 사이에서 설계 부실 등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관습적인 극장 디자인을 탈피한 것은 잘한 일이다. 특히 오늘날 화두인 융복합 예술의 생산과 확산을 지향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극장은 마땅한 선택이다. 이 ‘트랜스포머 극장’을 좋은 연장으로 삼아 혁신적 예술을 만들어 내는 일은 이제 예술가와 관객의 몫이다.
  • 박기춘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가결…반대 89표

    박기춘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가결…반대 89표

    ‘국회 본회의 가결’ ‘박기춘 체포동의안’ 박기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무기명 투표로 실시된 이날 박기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 총 투표자 236명 가운데 찬성 137표, 반대 89표, 기권 5표, 무효 5표 등으로 집계돼 가결됐다. 체포동의안은 재적 의원(298명) 과반(150명)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외국 출장 중인 의원들이 다수인 데다 체포동의안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아 의결정족수 자체를 채우지 못해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있었지만 가결된 것이다. 여야 모두 ‘특권 지키기’, ‘제식구 감싸기’ 등 부결시 예상되는 여론의 비판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국민의 눈높이에 서서 뜻을 같이 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와 국회개혁을 위해 쇄신의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수현 원내대변인은 “국민이 바라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양심있게 판단한 결과”라고 논평했다. 박기춘 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불체포특권 뒤에 숨지 않겠다. 방탄막으로 감싸달라고 요청하지 않겠다”며 “일반국민들과 똑같이 영장실질심사에 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공직자의 도덕성이 기준이 아닌, 기본이 되는 시대에 저의 과오는 돌이킬 수 없는 결격 사유”라며 “법과 원칙에 따라 모든 처벌과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덧붙였다. 제19대 국회 들어 모두 10건의 체포동의안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4건이 가결되고 나머지 6건은 부결되거나 사실상 폐기 또는 철회됐다. 가장 최근에 가결된 체포동의안은 1년 11개월 전인 2013년 9월 4일 내란음모 혐의를 받은 옛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며, 2012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주선 의원, 새누리당 현영희 의원(이후 의원직 상실) 등도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체포동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박기춘 의원은 내주께 법원에 출석,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구속 수사 또는 불구속 수사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기춘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가결…반대 89표나?

    박기춘 체포동의안, 국회 본회의 가결…반대 89표나?

    ‘국회 본회의 가결’ ‘박기춘 체포동의안’ 박기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무기명 투표로 실시된 이날 박기춘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 총 투표자 236명 가운데 찬성 137표, 반대 89표, 기권 5표, 무효 5표 등으로 집계돼 가결됐다. 체포동의안은 재적 의원(298명) 과반(150명)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외국 출장 중인 의원들이 다수인 데다 체포동의안에 반대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아 의결정족수 자체를 채우지 못해 사실상 폐기 수순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있었지만 가결된 것이다. 여야 모두 ‘특권 지키기’, ‘제식구 감싸기’ 등 부결시 예상되는 여론의 비판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새누리당 김영우 수석대변인은 논평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국민의 눈높이에 서서 뜻을 같이 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와 국회개혁을 위해 쇄신의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수현 원내대변인은 “국민이 바라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양심있게 판단한 결과”라고 논평했다. 박기춘 의원은 신상발언을 통해 “불체포특권 뒤에 숨지 않겠다. 방탄막으로 감싸달라고 요청하지 않겠다”며 “일반국민들과 똑같이 영장실질심사에 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공직자의 도덕성이 기준이 아닌, 기본이 되는 시대에 저의 과오는 돌이킬 수 없는 결격 사유”라며 “법과 원칙에 따라 모든 처벌과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덧붙였다. 제19대 국회 들어 모두 10건의 체포동의안이 접수됐으며, 이 가운데 4건이 가결되고 나머지 6건은 부결되거나 사실상 폐기 또는 철회됐다. 가장 최근에 가결된 체포동의안은 1년 11개월 전인 2013년 9월 4일 내란음모 혐의를 받은 옛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며, 2012년 새정치민주연합 박주선 의원, 새누리당 현영희 의원(이후 의원직 상실) 등도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영장실질심사를 받았다. 체포동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박기춘 의원은 내주께 법원에 출석,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구속 수사 또는 불구속 수사 여부가 결정되게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대주택 활성화 ‘뉴스테이 3법’ 가결

    국회는 11일 8월 임시국회 첫 본회의를 열고 기업형 임대주택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골자로 하는 ‘임대주택법 개정안’(뉴스테이법), ‘공공주택 건설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개정안’ 등 뉴스테이 3법 등 12개 법안을 가결 처리했다. 임대주택법 개정안은 민간 사업자에게 공공택지를 우선 공급해 중산층의 주거 안정을 위한 뉴스테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됐다. 사업자들은 8년 임대의무 기간과 연 5%의 임대료 상승률 상한만 지키면 초기임대료 규제와 분양전환 의무 등을 피할 수 있다. 뉴스테이 촉진지구에 한해서만 용적률·건폐율을 법정 상한선까지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기업에 대한 과도한 특혜 논란을 피하고자 일부 조항은 수정됐다. 공공주택건설 특별법 개정안은 행복주택 건설 가능 국유지 범위를 현행 국토교통부 장관이 관리하는 행정재산에서 국유재산 등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뉴타운 출구 전략을 담은 도정법 개정안은 2012년 1월 31일 이전에 정비계획이 수립된 구역 가운데 추진위가 구성된 경우에는 법 시행일 이후 4년까지 조합 설립 신청이 없으면 구역을 해제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는 산업단지 개발사업 시행자인 기업이 분할, 합병, 구조조정 등 불가피한 이유가 있으면 직접 개발해 사용하는 용지를 처분제한기간에 상관없이 처분할 수 있도록 한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개정안도 처리했다. 국회는 또한 군 관련 8개 법안(군인사법 개정안, 군무원인사법 개정안, 군인연금법 개정안, 국군간호사관학교 설치법 개정안, 군보건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 군사기밀 보호법 개정안, 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 개정안, 방위사업법 개정안)도 일괄 처리했다. 특히 군인사법 개정안은 국방부가 군인의 사망 원인을 밝히도록 했으며, 사망 원인을 입증하지 못하면 모두 순직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사망한 군인에 대해 유족이 순직을 입증하도록 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2282배’… S&P 상장 기업 중 CEO-직원 연봉 최대 격차

    ‘2282배’… S&P 상장 기업 중 CEO-직원 연봉 최대 격차

    지난해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에 포함된 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연봉은 종업원 중간치보다 216배를 더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미국 USA투데이가 5일(현지시간) 전했다. 또 미디어기업 디스커버리 커뮤니케이션스의 CEO 데이비드 재슬러브는 1억 5600만 달러(약 1821억원)를 받아 종업원 평균(6만 8397달러·약 7986만원)보다 2282배 더 받아 임금 격차가 1위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어 치포틀 멕시칸의 스티븐 엘스는 종업원보다 1524배, 스타벅스의 하워드 슐츠는 994배, CBS의 레슬리 문베스는 817배, 월마트의 더글러스 맥밀런은 804배를 더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이 CEO와 직원 평균 연봉 격차의 조사는 연구기관 등이 개별 기업의 자료를 취합해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2017년 1월부터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상장기업의 CEO와 종업원의 평균 임금 격차 공개가 의무화됐기 때문이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이날 CEO의 임금이 종업원 임금 중간치의 몇 배인지를 공개하도록 하는 규정을 가결했다. 이에 경영인들과 일부 경제학자는 기업 활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지만 노동조합은 반겼다. 미국에서는 지난 6월 실업률이 5.3%까지 떨어졌으나 소비 등 체감경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고, 이런 현상의 주요 이유로 제자리를 맴도는 임금 상승률이 지목돼 왔다. 5년 전 종업원이 1달러를 받는다고 가정할 때 경영자는 20달러를 받았지만, 현재는 경영자가 300달러를 받을 정도로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SEC의 결정으로 기업은 임금 격차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직원들은 제대로 월급을 받고 있는지 묻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의정 포커스] 열심히 일한 시의회 1년

    [의정 포커스] 열심히 일한 시의회 1년

    서울시의회가 지난 1년 동안 ‘일하는 의회’로 변신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잡음이 있었지만, 시의회 스스로 자정노력 등으로 시의원 조례 발의와 가결 건수 등이 두드러진 증가세를 나타낸 것이다. 서울시의회는 지난해 7월 활동을 시작한 제9대 시의회가 정례회 2회와 임시회 6회에 걸쳐 조례안 421건, 예산·결산안 11건, 동의안 48건, 결의안 31건, 건의안 37건, 기타 의안 93건 등 총 641건의 의안을 접수하고 491건을 처리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6일 밝혔다. 이 가운데 시의원들의 의정활동상을 가늠할 수 있는 조례 발의(421건)는 제7대 대비 2.7배(156건), 제8대 대비 1.8배(230건)가 증가했다. 여기에 의원 발의 조례안(321건)도 7대 대비 6.8배(156건), 8대 대비 2.5배(230건)가 증가했다. 전체 조례 접수 건수 중 의원 발의 조례가 차지하는 비율도 7대 29.5%(156건 중 46건), 8대 55.2%(230건 중 127건)에서 74.1%(421건 중 312건)로 크게 늘었다. 이는 그만큼 의원들이 서울시민의 생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방증이다. 의원 발의 조례 건수와 비중이 많이 늘어났음에도 가결률이 높아 내용면에서도 충실했다는 평가다. 실제로 제9대 시의회 의원 발의 조례의 가결률은 83.7%로, 가결률이 높았던 제7대 81.8%, 제8대 88.6%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단순히 의원들의 실적 쌓기용 조례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지난 1년 동안 18건의 조례를 발의한 성백진(중랑) 의원이 서울시의원 105명 중 가장 열심히 의정 활동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2등은 16건의 김용석(서초) 의원이, 3등은 13건의 김희걸(양천) 의원이 차지했다. 서울시의회는 청렴하고 투명한 의정실현을 위해 의원의 공무 국외활동과 업무추진비 사용내역 등을 의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토록 하고, 세월호 참사와 싱크홀 불안을 계기로 만들어진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 조례 일부개정안’ 등도 알찬 성과로 평가된다. 성백진 의원은 “서울시 위탁사업 재계약의 허점을 보완하는 조례를 발의해 세금 낭비를 막는 등 불합리한 점들을 바로잡았다”면서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서울시 ‘메르스 추경’ 8081억원 통과…지방채 등 880억 삭감

    서울시 ‘메르스 추경’ 8081억원 통과…지방채 등 880억 삭감

    서울시가 중동호흡기 증후군(메르스)으로 침체된 민생경제를 살리고, 공공의료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편성한 추가경정예산안이 서울시의회에서 880억원 삭감돼 8081억원 규모로 통과됐다. 박양숙 서울시의원(새정치연합, 성동4)은 제안 설명에서 금번 추경은 서울시의 재정건전성 강화를 위해 지방채 발행액을 당초 제출안(1,000억원)보다 500억원 감액조정 하였으나 세출재원에 대한 조정을 통하여 메르스 피해 중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중소기업육성기금은 예정대로 전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자치구로 전출되는 조정교부금 645억원과 교육청으로 전출되는 지방교육세 1,649억원 등을 통하여 자치구 및 교육청의 재정난 완화를 위하여 노력했음을 강조했다. 박양숙 의원은 추경안을 심사하며 사업의 필요성은 충분하나 재원의 한정성을 고려하여 제출안중 일부를 감액하고, 사업시기를 조정하였으며, 공유재산심의, 투자심사 등 사전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업의 경우, 삭감함으로써 서울시가 제출한 당초 추경예산안(26조 4,687억원)보다 880억원을 감액한 것이고, 다만 상임위 예비심사 결과 삭감된 사업에 대하여 서울시의 의견을 다시한번 청취하고, 필요할 경우 소관 상임위의 의견을 반영하는 등 상임위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서울시의회가 8월 4일 의결한 추경예산은 당초 상임위원회 및 예결특위 심사과정에서 개별의원간 정당간 서울시 등과 의견차이로 원만한 합의점을 이끌어 내지 못하여 예결특위가 심사기간동안 심사를 마치지 못했고, 지난 7월 30일 본회의를 통하여 의사일정을 연장하고, ‘서울시의회 회의규칙’ 제21조에 따라 의장이 시장이 제출한 원안을 본회의에 부의하여 ‘서울시의회 회의규칙’ 제66조(예산안의 수정 동의)에 따라 박양숙 의원을 포함한 24명의 찬성으로 수정안이 발의되어 54명이 찬성하여 가결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임기 반환점… 노동개혁·경제활성화 초점

    임기 반환점… 노동개혁·경제활성화 초점

    박근혜(얼굴) 대통령이 휴가를 마치고 3일부터 공식 업무에 복귀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7~31일 청와대 관저에서만 머물렀다. 업무 복귀와 함께 박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구상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오는 25일 임기 반환점을 맞는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2일 “집권 후반기를 어떻게 힘 있게 시작할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박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이 있는 8월이 중요하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 대통령은 1차적으로 임박한 광복 70주년 준비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8·15 관련 일정을 소화하는 한편 대외적인 메시지도 내놓을 전망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준비하고 있는 ‘종전 70주년 담화’를 고려한 메시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내적으로는 ‘노동 개혁’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관측된다. “노동 개혁은 경제 활성화와 청년 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므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박 대통령의 인식”이라는 전언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휴가 전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노동 개혁은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라면서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세대 간 상생을 위한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앞서 7일 국무회의에서도 “노동 개혁은 우리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필수 생존 전략”이라고 말하는 등 노동 개혁을 강조해 왔다. 청와대는 공공, 금융, 교육 등 다른 4대 개혁 과제와 24개 국정 핵심 과제도 병행 추진할 계획이지만 결과적으로 8월에는 광복 70주년과 노동 개혁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라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8·15까지는 박 대통령이 언급한 광복절 특사 문제도 공론화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살리고 국가 발전과 국민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사면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었다. 한편 이달 말에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의 종식이 공식 선언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계기로 메르스 사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입장 표명이 있을 수 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교체를 포함한 인적, 제도적 후속 조치가 단행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홍은사거리 인근 우회 불편 끝

    홍은사거리 인근 우회 불편 끝

    서대문구가 4년여간 촉구해 온 홍은사거리 유턴이 허용됐다. 중앙버스 전용차로 안 유턴 허용은 서울시에서 처음이다. 서울에선 사고 위험 등 때문에 유턴을 위한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경우에만 유턴할 수 있다. 구는 지난 28일 열린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가결됐다고 29일 밝혔다. 이로써 이 일대 주민들은 1.3㎞를 더 우회해 통행해야 하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홍은사거리 유턴은 홍제고가차도가 철거되고 2011년 12월 중앙버스 전용차로가 개통되면서 금지됐다. 이에 따라 홍제동 330 일대 주민들은 집에 가기 위해 좌회전 신호를 받아 돌아가거나, 녹번역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이에 주민들은 구에 이를 시정해 달라는 민원을 줄기차게 제기해 왔다. 구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2년부터 관계기관에 알리고 도로 구조개선을 통한 유턴 허용을 촉구해 왔다. 기존 차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진상가 쪽 보도 축소를 통해 차로를 추가 확보하면 유턴이 가능하다는 게 구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서울시 교통운영과는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 시 중앙차로 전 구간에 대한 운영진단 용역이 진행 중이고, 안전사고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구는 주민과 관계기관 간담회를 거쳐 유턴 허용을 시에 거듭 촉구했다. 지난해에는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이 직접 박원순 시장을 찾아 건의했고, 지난해 말 서울경찰청과 합동 점검에도 나섰다. 아울러 구는 중앙버스 전용차로에서 유턴을 허용하는 경기 고양시 중앙로 6곳의 사례를 자체 분석, 관계기관에 제시하기도 했다. 구는 오는 9월 초 시와 함께 홍은사거리 차로 공사에 착수, 그달 중 유턴을 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구 관계자는 “4년 만에 주민 숙원사업이 이뤄진 만큼 인근 운전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면서 “꼬리물기를 근절하고 교통신호를 잘 준수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지역감정 조장 발언 당선 무효형 가능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28일 공직선거법심사소위원회를 열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할 경우 처벌하는 내용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서울신문 3월 23일자 1면> 개정안은 누구든지 정당을 비롯해 후보자와 후보자 가족(배우자, 직계존·비속, 형제자매)의 출신 지역이나 성별을 비하, 모욕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선고받을 경우 당선 무효가 된다. 개정안은 정개특위 전체회의와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다. 하지만 “위법하다”는 판단의 잣대가 다소 주관적, 상대적이기 때문에 향후 논란도 예상된다. 소위는 인터넷 언론사의 실명확인제를 폐지하는 개정안도 가결 처리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쌍용차,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기본급 5만원 인상, 생산 장려금 150만원”

    쌍용차,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기본급 5만원 인상, 생산 장려금 150만원”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쌍용차,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기본급 5만원 인상, 생산 장려금 150만원” 쌍용차는 지난 28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올해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이 통과돼 분규 없이 임협을 최종 마무리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로써 쌍용차는 2010년 이후 6년 연속 무분규 교섭의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임협 합의안은 ▲기본급 5만원 인상 ▲생산 장려금 150만원 ▲신차 출시 격려금 100만원 ▲고용안정협약 체결 ▲퇴직자 지원제도 운영 등이다. 노사는 지난 6월 상견례를 시작으로 16차 협상을 통해 한달여만에 이같은 합의안을 도출했다. 이 합의안은 전날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참여 조합원(3369명)의 62.4%(2103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번 임협에서 소형차 티볼리가 출시 이후 돌풍을 일으키며 판매성장세를 주도하고 있는 만큼 이를 새로운 성장 기회로 삼아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만들어 가자는데 노사가 뜻을 모은 것이 조기 타결의 원동력이 됐다고 쌍용차는 설명했다. 쌍용차 최종식 대표이사는 “노사 상생의 정신이 지금의 쌍용차를 만들었다”면서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기반으로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구축해 티볼리 등 글로벌 판매 물량을 한층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신차 출시 격려금 100만원”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신차 출시 격려금 100만원”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쌍용차, 6년 연속 무분규 임금협상 타결 “신차 출시 격려금 100만원” 쌍용차는 지난 28일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올해 임금협상 잠정합의안이 통과돼 분규 없이 임협을 최종 마무리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로써 쌍용차는 2010년 이후 6년 연속 무분규 교섭의 전통을 이어가게 됐다. 임협 합의안은 ▲기본급 5만원 인상 ▲생산 장려금 150만원 ▲신차 출시 격려금 100만원 ▲고용안정협약 체결 ▲퇴직자 지원제도 운영 등이다. 노사는 지난 6월 상견례를 시작으로 16차 협상을 통해 한달여만에 이같은 합의안을 도출했다. 이 합의안은 전날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참여 조합원(3369명)의 62.4%(2103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이번 임협에서 소형차 티볼리가 출시 이후 돌풍을 일으키며 판매성장세를 주도하고 있는 만큼 이를 새로운 성장 기회로 삼아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만들어 가자는데 노사가 뜻을 모은 것이 조기 타결의 원동력이 됐다고 쌍용차는 설명했다. 쌍용차 최종식 대표이사는 “노사 상생의 정신이 지금의 쌍용차를 만들었다”면서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기반으로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구축해 티볼리 등 글로벌 판매 물량을 한층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말로만 청년 일자리… 법안통과 3년간 1건

    정부가 청년 ‘고용 절벽’ 대책을 발표한 가운데 정작 여야가 청년 일자리 관련 법안을 처리한 사례는 19대 국회 들어 단 1건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야는 선거 때마다 청년들의 취업 지원을 약속했지만 실행에 옮기는 데는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서울신문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등을 통해 청년고용촉진 특별법 현황을 분석한 결과 19대 국회 들어 3년여 동안 총 22건이 발의됐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결된 법안은 2013년 4월 본회의를 통과한 ‘공공기관의 청년 미취업자 고용 의무화’ 법안이 유일했다. 이 개정안은 공공기관의 청년 미취업자 고용 비율을 정원의 3% 이상으로 의무화하고 특별법 적용 기간을 2018년 말까지로 연장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 처리 당시 고용노동부는 “매년 정원의 일정 비율씩 뽑도록 의무화하는 것은 공공기관의 방만을 불러올 수 있고, 청년의 공공기관 쏠림 현상 심화가 우려된다”며 반대 의견을 냈고 이러한 논란은 법제사법위원회까지 이어진 뒤 가까스로 국회 문턱을 넘은 바 있다. 하지만 나머지 고용 촉진 법안들은 사실상 해당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실정이다. 새정치민주연합 강동원 의원이 발의한 청년 일자리 사업 내실화 대책 법안, 새누리당 문대성 의원이 제출한 비수도권 지역 청년취업센터 설치·운영 의무화 법안, 새정치연합 김광진 의원이 제안한 청년고용특별위원회 인적 구성 다양화 법안 등이다. 정부의 청년 고용 절벽 해소 종합 대책에 포함된 청년 연령 기준 확대 방안은 이미 새정치연합 김관영 의원 발의로 관련 개정안이 계류 중인 상태다. 또 청년 인턴 처우 개선을 위해 송호창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인턴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도 주요 법안에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환노위 관계자는 “고용 관련 법안들은 대부분 최저임금법과 같은 쟁점 이슈 때문에 환경 관련 법안들에 비해 처리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다”면서 “특히 청년 고용 확대는 중장년층이나 장애인의 고용 감소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반대 논란에 부딪히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추경안 국회 통과] 보복운전 땐 500만원 이하 벌금·살인죄 시효 폐지

    [추경안 국회 통과] 보복운전 땐 500만원 이하 벌금·살인죄 시효 폐지

    국회는 24일 본회의를 열고 추가경정예산과 함께 뉴스테이3법을 비롯해 ‘태완이법’, 난폭운전 방지법 등 44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가장 눈에 띄는 법안은 형법상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태완이법)이다. 1999년 5월 20일 대구 동구 골목길에서 황산테러를 당해 숨진 김태완(당시 6세)군 사건이 공소시효 만료로 영구미제로 남게 되면서 억울한 죽음을 막자는 취지에서 2012년 발의돼 ‘태완이법’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개정안은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고 아직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도 적용토록 했다. 강간치사나 폭행치사, 상해치사, 존속살인 등은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제외됐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당초 15년이었지만 너무 짧다는 비판이 일어 2007년 25년으로 늘어난 바 있다. 난폭운전을 방지하기 위한 도로교통법 개정안도 본회의를 통과했다. 현행법에는 상대 차량을 위협하거나 사고를 유발하게 하는 난폭운전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다. 하지만 이 법에서는 난폭운전의 유형을 구체화하고 난폭 운전을 실시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기업형 임대주택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담은 임대주택법 개정안(뉴스테이법)도 가결됐다. 사업자들은 8년의 임대의무 기간과 연 5%의 임대료 상승률 상한만 지키면 초기임대료 규제와 분양전환 의무 등을 피할 수 있다. 뉴스테이 촉진지구에 한해 용적률·건폐율을 법정상한선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 또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해제 부지를 뉴스테이 부지로 이용할 경우 지구조성사업에 공공기관이 참여하도록 했다. 도시·주거환경정비법 일부 개정안(도정법)도 통과됐다. 개정안은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한 재개발·재건축 정비구역을 지자체 장이 직권으로 해제할 수 있는 규정과 해제된 구역의 매몰 비용을 지자체가 지원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다. 4월과 10월 연 2회 실시하던 재·보궐 선거를 1회로 줄인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재·보궐 선거일은 농번기와 국회 일정을 고려해 매년 4월 첫째 수요일에 실시키로 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수주 부진에 파업 가결… 현대重 암울

    수주 부진에 파업 가결… 현대重 암울

    세계 조선업계 1위로 한때 국내 증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 왔던 현대중공업에 깊은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2011년 4월 주당 55만원대를 달리던 주가는 현재 5분의1 수준도 못 되는 10만원대 초반까지 추락했다. 시장의 판단은 현대중공업이 최근 보여 준 성적표에 기인한다. 2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6분기 연속으로 이어진 영업이익 적자 행진은 7분기 연속 적자로 이어질 전망이다. 오는 29일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있지만 회사 내외부에서는 이미 흑자 반등은 물 건너갔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일부 증권사가 2분기 1000억원에 달하는 영업이익으로 흑자 전환을 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지난해 현대중공업은 충격적인 성적표를 냈다. 2013년 7300억원에 달하던 영업이익이 지난해는 1조 9200억원 손실로 급락했다. 당기순손실도 1조 7500억원대에 달한다. 향후 성적을 좌우할 수주도 문제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229억 5000만 달러(비조선 부문 포함)를 수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상반기 수주한 물량은 32.2% 수준인 73억 9400만 달러에 그쳤다. 유가 하락으로 세계 해양플랜트 발주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게 주원인이었다. 모두 57척을 수주했지만 고부가가치 상품인 해양플랜트 분야에서는 한 건의 수주 실적도 올리지 못하는 수모를 맛봐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조는 파업 수순을 밟고 있다. 이날 현대중공업 노조는 지난 21일부터 3일간 전체 조합원 1만 6749명을 대상으로 파업 찬반 투표를 진행한 결과 찬성표가 59.5%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파업 찬반 투표는 전체 조합원 대비 찬성이 절반을 넘으면 가결된다. 합법적으로 파업에 들어갈 수 있는 준비를 마친 셈이지만 노조 측은 당장 파업에 돌입하지 않고 일단 협상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노조는 올해 임협에서 임금 12만 7560원 인상, 직무환경수당 100% 인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 유영규 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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