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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선 횡단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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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년간 ‘38선 횡단’ 부부의 마지막 도전

    32년간 ‘38선 횡단’ 부부의 마지막 도전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 평화의 봄날이 오기를 온 국민과 함께 바랍니다.” 32년간 한반도 38선을 횡단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 온 유대지(76)·이순필(76)씨 부부가 6·25 전쟁 발발 76주년을 맞아 비무장지대 동서 횡단에 나선다. 1994년 시작된 38선 횡단의 93번째 도전이자 마지막 여정이다. 이 부부는 24일 경기 성남 자택을 출발해 25일 강원 양양 하광정휴게소에서 ‘마지막 38선 횡단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뒤 임진각까지 약 400㎞ 구간을 차량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두 사람은 북한의 ‘서울 불바다’ 위협 발언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던 1994년 강원 고성에서 백령도까지 휴전선을 따라 약 250㎞를 도보 이동하며 핵무기 반대와 평화를 호소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92차례 38선을 횡단했다. 2000년에는 6·25 전쟁 50주년을 맞아 미국 북위 38도선을 따라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약 4000㎞를 자동차로 횡단하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의미를 해외에도 알렸다.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 2013년에는 경기도로부터 ‘38선 최다 횡단 경기도민’ 인증을 받았다. 유씨의 부친인 고 유귀용 경위는 1949년 경북 경주경찰서 안강지서장으로 재직 중 공비와 교전하다 27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유복자인 유씨는 어린 시절 어머니마저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내 이씨 역시 친오빠가 6·25 전쟁 참전 중 왼팔에 장애를 얻는 아픔을 겪었다. 유씨는 “100번째 횡단까지 이어 가고 싶었지만 고령으로 더이상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며 “아버지를 잃은 고통은 세월이 흘러 용서할 수 있게 됐지만 전쟁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땅에서 다시는 총성이 울리지 않고 또 다른 유복자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소망을 밝혔다.
  • [우리 이웃 접경지역 : 규제 해소 통한 발전 방안] 토지 3694㎢ 이중삼중 규제… 민통선 이남 ‘틀’ 깨고 조정 필요

    [우리 이웃 접경지역 : 규제 해소 통한 발전 방안] 토지 3694㎢ 이중삼중 규제… 민통선 이남 ‘틀’ 깨고 조정 필요

    DMZ는 전쟁이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물이다. DMZ의 설치로 국토의 허리가 잘리면서 한때 서울에서 원산까지, 더 크게는 북방 대륙까지 주 이동로로 기능했던 지역은 ‘접경’이라는 이름의 국토의 막다른 길이 되었다. 국토 방위의 최일선이자 군사대치의 현장이 되었다. 경기도의 연천군, 강원도의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은 모두 해방 이후에는 38선 이북의 지역으로, 분단되면서 수복된 지역이다.2011년 현재 전국에 지정되어 있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의 면적은 8819.7㎢이다. 이 중 49.2%를 차지하는 4382.1㎢의 면적은 군사분계선과 잇닿아 있는 인천시의 강화군, 옹진군, 경기도의 김포시, 파주시, 연천군, 강원도의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고성군 등 10개 접경지역 시·군에 지정되어 있다. 접경지역의 군사시설보호구역은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을 기준으로 통제보호구역과 제한보호구역으로 나뉜다. 즉 남방한계선에서 민통선까지의 8㎞ 지역은 통제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민통선을 기준으로 그 이남의 15㎞까지는 제한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반해 후방지역, 즉 제한보호구역 이남의 군사시설보호구역은 군사기지(방공기지 포함)를 중심으로 시설의 종류에 따라 반경 0.3㎞에서 5㎞까지를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문제는 접경지역에는 군사시설보호구역 외에도 여타의 다른 목적을 배경으로 한 이중삼중의 토지이용 규제가 가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 접경지역시장군수협의회의 발표에 따르면 접경지역 10개 시·군 행정구역 면적의 171.2%인 1만 1940.4㎢가 규제지역이고, 이 중 3694.1㎢가 중복규제지역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행정구역 면적의 53.0%, 규제면적의 30.9%가 중복규제지역인 셈이다. 중복규제가 심한 이유는 이 지역에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이 지나고 북한강, 임진강, 한탄강 등이 흐르며, 한강하구와 철원평야 등 한반도 중부의 대표적 곡창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보전산지 등 산지와 관련한 규제는 5513.2㎢로 10개 시·군 행정구역 면적의 79.0%를 차지하고, 상수원보호구역 등 환경 관련 규제는 13.5%, 농업진흥구역 등 농지 관련 규제는 8.6%를 점하고 있다. 시·군별로도 대부분 군사시설보호구역, 보전산지, 농업진흥구역의 지정은 공통사항으로 되어 있다. DMZ가 남북한 간 군사적 완충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듯이 접경지역은 통일 전 남북교류협력의 전진기지 역할과 통일 후 북에서 남으로 이주하는 인구이동의 완충 공간 역할이 큰 지역이다. 정부 계획에서도 파주시와 철원군, 고성군은 특화발전지구로 지정되어 교류협력의 전진기지 역할이 주어져 있고, 고성군은 금강산 육로관광의 플랫폼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고성군의 경우 금강산 육로관광의 효과가 지역 발전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지난 9년간 약 2조 3030억원의 경제적 피해를 겪고 있다. 군사분계선과 잇닿아 있는 접경지역 10개 시·군은 지역발전 수준이 전국 평균 이하의 낙후 지역이다. 접경지역의 낙후는 지역의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고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국가와의 교류가 없다는 일반론에 더하여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군사지역으로서 경제와 산업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특수성에 기인한 결과다. 즉 접경지역의 낙후는 분단의 결과다. 전쟁의 폐허에도 우리는 지난 60여년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성과는 분명히 온 국민의 단합된 노력의 결과이지만, 우리는 자주 지난 60여년간 국방의 최일선으로 지역발전의 기회를 감내해 온 접경지역 주민의 희생을 간과하고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서 이제는 후방의 국민이 전방의 접경지역 주민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와 같이 분단된 독일은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접경지역에 대한 지원을 범정부적으로 추진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접경지역의 낙후가 분단에서 왔다는 점을 온 국민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 위에 접경지역의 발전과 주민 지원은 다른 정책에 우선하여 추진되었고, 분단에 따른 발전지체분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우리 정부도 행정안전부를 중심으로 접경지역에 대한 지원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2003년부터는 접경지역지원사업을 법정계획에 의해 추진했으며, 2011년에는 접경지역지원법을 접경지역지원특별법으로 격상하여 접경지역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특수상황지역사업을 통해 접경지역을 지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추진에 필요한 재원의 부족과 접경지역지원특별법이 타 법에 우선하지 못하는 법체계상의 구조적 문제로 사업의 추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장기간의 남북 관계 경색으로 접경지역에 대한 관심이 점점 적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핵 실험으로 전례 없이 강한 유엔의 대북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로 최근 북·미·관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긴장관계가 커지면 커질수록 대화를 통해 이를 풀려고 하는 노력도 커질 것으로 보고, 지금이 남북 관계의 재개에 대비해야 하는 적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남북 관계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큰 접경지역이 앞으로 전개될 남북 대화와 교류협력에 대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접경지역의 미래 발전에 필요한 제도적 기반을 선도적으로 구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통일시대 접경지역의 역할과 기능을 고려하여 사전에 각종 제도적 장애요인을 해결하고,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지원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먼저 접경지역이 받고 있는 불합리하고 과도한 규제를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낙후된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 남북 통일을 대비한 접경지역의 개발 수요를 계획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획일적이며 일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은 그 틀을 벗고 군사규제가 필요한 구역과 이로부터 좀더 자유로운 구역을 구분해 합리화하는 방안이 바람직해 보인다. 남방한계선 이남 8㎞의 통제보호구역은 현행 틀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민통선 이남의 제한보호구역에는 변화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일부 진행되고 있지만 군사시설보호구역 내 일부 지역에 대해 군 협의 업무를 지자체에 위탁하는 ‘협의위탁’을 확대하는 방안과 제한보호구역 이남의 지역처럼 군사시설을 중심으로 반경 0.3㎞에서 5.0㎞까지를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문제도 심도 있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통제보호구역은 과거에도 5㎞씩 두 차례 조정된 사례가 있다. 1997년에는 군사분계선 이남 20㎞ 지점에서 15㎞ 지점으로 북상했으며, 2007년에는 군사분계선 이남 15㎞ 지점에서 10㎞ 지점까지 북상한 바 있다. 2025년이면 서울과 속초를 잇는 동서고속화철도가 건설을 마치고 접경지역을 횡단하는 역사적 운행을 시작한다. 인력 중심의 전방 군 배치가 기계화부대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은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고, 저출산 현상으로 계획보다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군 주둔 지역에서의 민군관 협력은 이제 국방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를 요구하고 기대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고령 인구의 증가 등 인구구조의 변화로 탈도시 현상이 점점 늘어날 전망이며, 생태환경에 대한 국민적 수요도 점점 커질 것이다. 군사지역과 낙후지역 그리고 국토의 막다른 장소로 멀게만 느껴졌던 접경지역이 일반 국민에게 가까운 장소로 다가오는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대에 맞는 합리적 규제의 변화를 통한 접경지역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김범수 강원연구원 통일북방연구센터장 ▲ 미 남가주대 도시계획학 박사 ▲ 접경지역 초광역개발계획 자문위원 ▲ DMZ연구센터장
  • [러일전쟁 100주년]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본지 기고 (상)

    8일은 러일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일본은 이 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겨 사실상 대한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최근 일제 식민시대의 서막을 연 러일전쟁의 발발지가 중국 뤼순(旅順)항이 아니라 제물포 팔미도(八尾島)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박종효 전 국립모스크바대 교수가 러시아국립 해군함대 문서보관소 자료에서 확인한 것이다.박 전 교수가 서울신문에 보내온 ‘러일전쟁의 서막,러시아 바략함과 카레예츠함의 제물포해전’이라는 글을 2회에 걸쳐 요약한다. 러일전쟁으로 대한제국은 위태롭게 유지하던 독립을 일본에 약탈당하게 되었다.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남한은 패전국 일본 대신 전승국 미국이,북한은 공교롭게도 제정 러시아의 후신인 구 소련이 점령하여 각각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1896년 야마기다 원수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사절로 보냈다.야마기다는 러시아 외무장관 로바노프 로스토프스키에게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하여 각각 러·일의 영향권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을 했다.러시아는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한반도 분할문제는 이때부터 러·일 사이에 잠정적인 논의 대상이 됐다.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소련에 제의한 38선 분할안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은 1945년 8월13일부터 청진과 원산 등으로 상륙한 소련군의 남하를 시급히 차단해야 했다.이에 제정 러시아 시대에 이미 일본이 제안한 38선을 상기했다.우리의 비극적 근·현대사의 기원과 원인 제공은 열강의 침투와 러일전쟁에서 비롯되었다. ●러 국립 문서보관소 자료에서 확인 제정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문서에 따르면 러일전쟁의 첫 포성은 중국 뤼순항이라고 한국학계가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제물포 팔미도 앞바다에서 울렸다.일본 함대는 1904년 2월9일 새벽 뤼순항에 앞서 2월8일 우리 영해에서 러시아 포함 카레예츠함과 처음 교전했다.고려인이라는 뜻의 ‘카레예츠’는 마산포 개항을 기념하여 러시아 해군이 붙인 이름이다.이날 밤 제물포에 상륙한 3000여명의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2만여명과 청룡1호 해군훈련함이 있었지만,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서울을 점령했다. 앞서 1903년 말 한반도에는 동학교도가 일본인을 내쫓기 위해 다시 봉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일본군이 이를 진압하려 상륙하면 대한제국군은 동학교도들에 가담하여 폭동을 일으키고,독립을 위협하는 영일조약 당사자인 일본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놀란 영국은 12월 말 공사관 보호를 위해 순양함 시리어스함에 28명의 해병대원을 승선시켜 제물포로 파견하고,곧 이어 탈보트함에 도착했다.다른 열강도 제각기 함대를 급파했다.미국을 빅스버그,프랑스는 파스칼,이탈리아는 엘바,독일은 한사,일본은 지오다,러시아는 바략함을 보내 제물포는 마치 열강 해군의 집합소처럼 변모했다. 일본군은 전신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 800명,원산에 400명,부산에 400명을 주둔시키고 있었다.그런데 1904년 2월 초부터는 마산포에 1만 2000명을 상륙시키고,군수품과 식량을 수송해 왔다.원산에도 민간인 복장을 한 예비군과 군인 및 군마를 비롯한 군수품과 탄약 등을 수송했다.일본은 이처럼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하면서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일협상은 계속 진행하고 있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총본부는 1904년 2월2일부터 4일까지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아무르 군관구 사령부로부터 극동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귀국하고 있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일본인 귀국여객선이 대기하고 있었다.긴박감을 느낀 극동총독은 니콜라이 2세에게 총동원령과 함대 배치 칙령을 요청했으나,황제는 일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한반도 남쪽이나 동해안 원산 이남에 상륙할 경우 러시아가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서해안에 일본의 상륙군을 수송하는 군함이 나타나거나,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 군함이 있으면 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선제 공격하라고 덧붙였다.이처럼 러·일 양국은 이미 묵시적으로 각각 한반도 남북의 영향권을 인정하고 있었던 셈이다. 러시아는 제물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뤼순항의 배후 항으로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과 멀지 않은 제물포에 1903년 3척의 순양함을 파견했다.1904년 1월18일 두 척의 순양함이 뤼순으로 귀항하자,제물포에는 바략함과 소형 포함 카레예츠함,여객선 순가리(송화강)호만 남았다.일본은 1903년 말에 러시아가 아직 미완성이었던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통하여 유럽지역으로부터 일부 군대를 연해주 군관구로 이동시켰다는 첩보를 받고 크게 놀랐다.대한제국 협상에서 러시아가 시간을 끄는 것도 일본에 불안감을 가중시켰다.일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러시아에 유리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태평양함대와 극동 주둔 육군이 일본에 열세였으므로 협상을 통하여 철도를 완성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면서 어떻게든 대한제국 문제를 카드로 만주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원하지 않았다.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면서 직접적으로 국경선을 접한 만주의 이권을 보호하고 만주개방을 요구하는 일본과의 완충지대로 한반도를 고려하고 있었다.극동 현상유지 정책으로 대한제국이 독립국가로 있는 것이 러시아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여,특히 고종에게 정치적의 호의를 보이면서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2월4일 청나라 주재 일본영사가 뤼순항의 러시아군함이 모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 출항했다는 급보를 도쿄에 보냈다.그러나 28척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해상훈련을 나간 것이었다. ●日, 러 공사관·군함 통신망 봉쇄 일본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4일 밤 일왕 특별 어전회의를 열어 대 러시아전쟁을 결의했다.일본이 외교단절을 선언했지만 제물포의 러시아 함대와 서울의 러시아 공사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일본은 한반도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으면서,전략적으로 서울 러시아 공사관이 외부와 통신연락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했다. 5일 한 미국인이 중국의 상하이에서 제물포에 도착하면서 러·일 사이에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6일 아침 일본 해군중장 도고는 사세보(佐世保)로 함장들을 소집했다.전 함대는 황해로 발진하여 제물포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는 러시아 함대를 습격하라고 명령했다.일본 연합함대는 6척의 전함,14척의 순양함,35척 이상의 어뢰정으로 구성됐다. 7일 제4전투함대사령관 우리우 소장은 5척의 순양함과 8척의 어뢰정,3척의 대형 상륙군 수송선으로 제물포로 향했다.제물포에 정박중이던 순양함 지오다함은 8일 새벽 출항하여 러시아 함대 동향을 보고한 뒤 일본함대에 합세했다.우리우는 러시아의 바략함과 카레예츠함은 제물포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방해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던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는 바략함장 루든예프에게 공사관의 비밀 보고문서를 카레예프함으로 직접 뤼순항으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이 긴급문서 가운데는 고종 황제가 은밀히 전한 문서도 있었다.일본 함대가 압록강 하구로 항해하고 있으며,제물포에 일본군이 상륙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카레예츠함은 8일 오후 3시40분 제물포를 출항하여 15분 만에 멀리서 2열종대로 다가오는 일본 순양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마침내 제물포 남방 13.5㎞ 지점에 있는 작은 섬 팔미도 근해에서 일본함대와 조우했다.카레예츠함장 벨야예프 해군중령은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단절을 모르는 상태였다.일본함대가 진로를 가로막고 공격태세를 취하자 카레예츠함은 제물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척의 일본 어뢰정 가운데 한 척이 어뢰로 첫 공격을 했을 때 벨야예프도 전투경보를 내렸다.오후 4시35분이었다.제2,제3의 어뢰정이 잇따라 어뢰를 발사했다.벨야예프도 두 번째 어뢰공격을 받자 발포명령을 내렸다. 일본측의 ‘해전기록(海戰記錄)’은 카레예츠함이 일본의 어뢰정을 보자 갑자기 오른쪽으로 피하면서 어뢰정에 포를 발사했고,수송선에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만 되어 있다.일본함대가 응사하여 교전이 이루어졌다는 대목은 없다.그러나 대형 함대에 소형 포함 한 척이 먼저 포를 발사했다는 일본측 주장은 신뢰할 수 없다. ●러 바략함 수장, 카레예츠함 폭파 이렇게 러일전쟁은 뤼순항이 아니라 2월8일 오후 4시40분쯤 제물포 팔미도에서 일본측이 먼저 발포하여 시작됐다.그러나 통신이 두절된 제물포의 러시아군은 본국에 보고할 수 없었고,다음날 새벽 뤼순의 태평양함대가 기습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페테르부르크에 먼저 전달되면서 전쟁 발발 날짜가 2월9일로 기정사실화된 것이다.한편 제물포의 일본함대는 9일 낮 바략함 및 카레예츠함과 다시 본격적인 교전을 벌였고,전함수 14대2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러시아군은 결국 바략함을 수장시키고,카레예츠함은 폭파시켰다.러시아는 제물포해전을 패전이 아닌 러시아 해군 사상 가장 영웅적인 전투로 평가하면서,전설적인 신화처럼 한 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 [김삼웅 칼럼] 뉘라 ‘역사의 가정’을 부질없다는가

    ‘마침내’ 미국의 아프간공습이 개시되었다.지난달 11일무역센터와 펜타곤이 테러공격을 당한 지 28일만에 미국과영국이 아프간공습에 나선 것이다.테러사건과 보복전의 세계적인 전란에도 한반도가 안전지대로 자리잡은 것은 6·15정상회담의 성과라는 평가다. 그동안 소강국면에서 북한상선의 침범과 ‘평축행사’해프닝 등 불상사도 따랐지만 남북정상회담의 큰 틀이 유지되고한반도가 세계적 위기상태에서 한발 비켜선 것은 다행이다. 국제냉전종식 이후에도 이데올로기대립·문명충돌·종교전쟁·영토싸움·자원쟁탈전 등 지구촌의 폭력가능성은 상존한다.여기에 21세기형 ‘추악한 전쟁’으로 불리는 국제테러단의 도발까지 끼어든다.한반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외생(外生)변수들이다. 국제정세가 불안할수록 남북한은 대화와 협력관계에 성실한 자세가 요구된다.국방부는 지난 6일 경의선 관련 군당국간 합의서의 서명·발효를 위해 남북군사실무회담수석대표접촉을 제의했다.경의선철도 연결 및 도로개설 공사를 더이상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철도담당 고위 인사가 평양을 다녀가는 등 러시아의 횡단철도와 한반도의 종단철도 연결에 국제적 관심사가 높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남북한과 중국·러시아·일본·몽골 등 동북아 심장부를 관통하는 대륙철도 연결은 우리 물류비용 절감은 물론 북한에도 많은 이익이 따르고 남북평화체제 구축에 기반이 된다. 그런데 우리 내부에는 여전히 쌀이 남아 처치곤란해도 나눠줘선 안되고,대통령의 말꼬리나 잡아 색깔론을 펴고,화해협력을 흠집내는 냉전세력이 여론을 좌우한다.맹자는 식자(識者)중 ‘하지하(下之下)’는 “터럭을 불어 흠집을 찾는(취모멱자:吹毛覓疵)무리”라 했다.세계사의 큰 흐름,분단사의 아픔을 외면하는 소인배들을 일컫는 말이겠다. 역사상 남북분열 시대에 남북은 세차례의 중요한 회담을가졌다.과거 두차례 회담은 실패하여 민족사에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고,최근의 회담은 진행형이라 아직 속단은 이르다. 제1화:서기 642년 이맘때,신라의 강자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내락을 받고 단신으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방문했다.당시 신라는백제의 침공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김춘추는 연개소문과 만나 ‘양국의 오랜 상쟁 중단’을 제안하고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이에 연개소문은 90년째 점령중인 구고구려 영토인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주겠다고 딴죽을 걸었다. 결국 ‘제1차 남북회담’은 결렬되고,구금됐다가 귀환한 김춘추는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7세기 중엽 남북의 두 강자가 대륙정세를 꿰뚫고 협력체제를 구축했다면 고구려·신라의 운명은 물론 한국고대사는 크게 달랐을 것이다. 제2화:1949년 4월 백범 김구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해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면서 38선을넘어 북한에 갔다.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김일성,김두봉과 만나 분단으로 찢어지는 민족을 다시 묶으려 노력했지만성공하지 못했다.얼마후 백범은 암살되고 남북은 6·25전쟁에 이어 반세기 넘는 분단사를 겪고있다. 제3화:2000년 6월13일 김대중대통령은 국적기를 타고평양으로 날아가 6·15남북정상회담을 갖고 5개항에 합의했다.적대관계의 두 정상이 평화와 협력문제를 논의한 것 그 자체가 큰 변화이고 획기적인 일이다. 김춘추와 연개소문,김구와 김일성의 회담이 성공했다면 한국사의 흐름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를 잃지 않았을지 모르고,6·25동족상잔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뉘라 ‘역사의 가정(假定)’을 부질없다 하는가.역사는 부단히 다시 해석하고 가정하고 교훈을 도출해야 한다.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 하지않던가. 남북회담은 진전돼야 한다.민족문제만큼은 정파를 뛰어넘어야 한다.과거 ‘남북회담’의 실패나 이번 미국 테러와보복전의 교훈이라면 남북한이 점점 벌어지는 의식과 사고,이에 따른 문화와 행동양식이 또다른 ‘문명’의 길로 갈라서기 전에 협력과 공존체제를 만드는 일이다. 김삼웅 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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