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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한국 개최 세계유산위 폐막…‘한국의 갯벌’ 확대 등재 성과

    첫 한국 개최 세계유산위 폐막…‘한국의 갯벌’ 확대 등재 성과

    한국에서 처음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11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지난 19일 부산 벡스코에서 개막한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는 29일 결정문 보고서 채택을 끝으로 폐막했다. 1988년 세계유산협약 가입 이후 한국이 의장국을 맡아 국내에서 연 첫 회의로, 신규 등재부터 보존 상태 점검, 국제 지원과 제도 개선까지 협약 이행의 주요 현안이 두루 논의됐다. 위원회는 33건을 심사해 신규 25건(문화 19건, 자연 5건, 복합 1건)과 확대 등재 2건, 기준 변경 1건 등 모두 28건의 등재를 승인했다. 이로써 세계유산은 173개국 1273건으로 늘었다. 한국은 2021년 등재된 ‘한국의 갯벌’에 충남 서산과 전남 여수·고흥·무안 갯벌을 더해 구성요소 6곳의 연속유산으로 확대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자문기구가 보류나 반려를 권고했던 4건도 당사국의 설득과 위원국 간 논의 끝에 등재됐다. 아시아·태평양에서는 9건이 새로 이름을 올렸다. 일본의 ‘아스카·후지와라 고대 수도’, 중국의 ‘징더전 수공예 도자 산업 유적’, 몽골의 ‘흉노 지배층 무덤군’ 등이다. 정부는 아스카·후지와라의 한반도 교류 가치가 현장에 더 충실히 반영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고, 일본 근대산업시설 관련 권고의 성실한 이행도 촉구했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해변들’과 이번 회의 유일한 복합유산인 그리스의 ‘올림포스산 광역지역’도 목록에 올랐다. 코모로·남수단·상투메프린시페는 첫 세계유산을 배출했고, 아잘리 아수마니 코모로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 회의장을 찾았다. 보존 상태 148건을 점검한 결과 레바논 ‘티레’, 수리남 ‘파라마리보 역사 도심’ 등 6건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추가돼 모두 58건이 됐다. 반면 오스트리아 ‘빈 역사지구’는 긴 논의 끝에 해제됐으나 비판이 뒤따랐다. 아프리카와 군소개발도서국(SIDS)을 위한 유산 전략, 서구 중심의 평가를 넘어서려는 진정성 논의도 함께 다뤄졌다. 유산 해석을 주제로 한 국제 부대행사도 열렸다. 제49차 회의는 2027년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다. 튀르키예는 2016년 제40차 회의를 열었으나 군부 쿠데타로 일정이 중단된 전례가 있다. 한국은 ‘한양의 수도성곽’으로 18번째 등재에 도전한다. 이병현 의장은 관점의 차이에도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는 하나로 모여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며 각국 대표단에 감사를 전했다.
  • 韓 30년 파고든 몽골 유적, 세계유산 등재

    韓 30년 파고든 몽골 유적, 세계유산 등재

    국립중앙박물관이 30년 넘게 발굴조사에 참여한 몽골의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국 국립박물관이 해외에서 직접 수행한 학술조사 성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몽골에 있는 고대 흉노 제국 귀족들의 무덤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가운데 몽골 헨티 아이막에 위치한 도르릭 나르스 유적은 약 300기의 무덤이 밀집한 몽골 동북부 최대 규모의 무덤군이다. 도르릭 나르스 유적에서는 로마의 유리잔·그리스 신을 새긴 은장식·중국 한나라 칠기 등이 함께 출토됐다.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제작된 유물이 한 무덤에서 확인되면서 약 2000년 전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의 거대한 교류망으로 연결돼 있었음을 입증하는 핵심 학술 자료로 평가받는다. 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및 몽골 국립박물관과 1997년 한·몽 공동학술조사단을 구성한 뒤 2006년부터 13차례 현지 발굴을 실시하며 등재의 결정적 근거를 마련했다. 조사단은 2006년 1호부터 5호 무덤 조사를 시작으로 2018년부터 전체 길이 88m, 깊이 18m 최대급 규모의 160호 무덤을 발굴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유물 보존처리를 비롯해 항공촬영과 인골 DNA 및 동물유체 분석 등 정밀한 과학적 연구 기법이 동원됐다. 2019년 배장묘 6기의 조사를 마친 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현지 조사는 2023년 재개돼 오는 9월 18일까지 매장주체부 발굴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박물관은 흉노의 청동솥·마구·동물 모양 장식이 초원에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서부를 거쳐 남부까지 이어지는 분포를 보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등재를 계기로 흉노·고조선·부여·고구려·삼한으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 무대 위에서 다시 읽는 작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아울러 도르릭 나르스를 비롯한 무덤군을 국제 학술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한·몽 공동학술조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30년 집념…해외 직접 발굴 성과 첫 유네스코 등재

    국립중앙박물관 30년 집념…해외 직접 발굴 성과 첫 유네스코 등재

    국립중앙박물관이 30년 넘게 발굴조사에 참여한 몽골의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한국 국립박물관이 해외에서 직접 수행한 학술조사 성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몽골에 있는 고대 흉노 제국 귀족들의 무덤군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가운데 몽골 헨티 아이막에 위치한 도르릭 나르스 유적은 약 300기의 무덤이 밀집한 몽골 북동부 최대 규모의 무덤군이다. 도르릭 나르스 유적에서는 로마의 유리잔·그리스 신을 새긴 은장식·중국 한나라 칠기 등이 함께 출토됐다. 서로 다른 문명권에서 제작된 유물이 한 무덤에서 확인되면서 약 2000년 전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의 거대한 교류망으로 연결돼 있었음을 입증하는 핵심 학술 자료로 평가받는다. 박물관은 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및 몽골 국립박물관과 1997년 한·몽 공동학술조사단을 구성한 뒤 2006년부터 13차례 현지 발굴을 실시하며 등재의 결정적 근거를 마련했다. 조사단은 2006년 1호부터 5호 무덤 조사를 시작으로 2018년부터 전체 길이 88m, 깊이 18m 최대급 규모의 160호 무덤을 발굴해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의 유물 보존처리를 비롯해 항공촬영과 인골 DNA 및 동물유체 분석 등 정밀한 과학적 연구 기법이 동원됐다. 2019년 배장묘 6기의 조사를 마친 뒤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현지 조사는 2023년 재개돼 오는 9월 18일까지 매장주체부 발굴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박물관은 흉노의 청동솥·마구·동물 모양 장식이 초원에서 중국 동북 지역과 한반도 서부를 거쳐 남부까지 이어지는 분포를 보이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번 등재를 계기로 흉노·고조선·부여·고구려·삼한으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를 동아시아와 유라시아 무대 위에서 다시 읽는 작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아울러 도르릭 나르스를 비롯한 무덤군을 국제 학술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한·몽 공동학술조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 김혜경 여사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이해…그 나라 국민 이해 첫걸음”

    김혜경 여사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이해…그 나라 국민 이해 첫걸음”

    김혜경 여사는 9일(현지시간) 몽골 울란바타르에 있는 칭기즈칸 국립박물관을 찾아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그 나라 국민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몽골을 국빈 방문 중인 김 여사는 이날 오흐나 후렐수흐 몽골 대통령 부인 롭상도르지 벌러르체첵 여사와 함께 칭기즈칸 황금 동상을 함께 관람한 뒤 “한국과 몽골이 오랜 역사와 문화 교류를 바탕으로 국민 간 우정을 더욱 깊게 이어가기를 기대한다”며 이처럼 밝혔다. 칭기즈칸 국립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다양한 협력을 이어오고 있으며, 우리 정부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을 통해 전시, 교육, 운영 역량 강화를 지원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칭기즈칸 국립박물관은 양국 문화협력의 성과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안귀령 청와대 부대변인이 설명했다. 두 여사는 박물관장의 안내를 받으며 몽골의 역사와 시대상을 담은 다양한 유물과 사진, 영상 등을 함께 관람했다. 박물관장이 흉노시대 관련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오는 19일부터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소개하자, 김 여사는 “부산에 오시나요”라며 반가움을 드러냈다. 두 여사는 한국과 몽골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몽 공동 고고학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 발굴된 흉노시대 유물도 함께 관람했다. 김 여사는 “양국 연구진이 함께 밝혀낸 역사적 성과가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라며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양국 간 협력이 앞으로도 국민들을 더욱 가깝게 이어주는 든든한 다리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두 여사는 5층 몽골제국 전시관에서 초상화와 말안장, 장신구 등 몽골제국의 유물을 둘러봤다. 당시 여성들이 사용했던 빗을 살펴본 김 여사는 “한국의 참빗과 닮았다”며 양국 문화의 공통점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김 여사는 이번 일정에 대해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살펴보니 두 나라가 오랜 기간 형제처럼 가까운 관계를 이어온 이유를 더욱 잘 알게 된 것 같다”며 “기회가 된다면 한국을 방문하셔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중한 문화유산도 함께 둘러보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벌러르체첵 여사는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아름답고 귀중한 유물이 많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꼭 방문해보고 싶다”고 화답했다.
  • 65만원에 드라마 한편 뚝딱? 중국 AI드라마 화제

    65만원에 드라마 한편 뚝딱? 중국 AI드라마 화제

    65만원으로 드라마 한 편을 만들었다. 그것도 사람 배우가 아닌 인공지능(AI)만으로 제작했다. 중국에서 제작된 AI 드라마가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16일 중국 매체 콰이커지에 따르면 제작자 3명, 제작 시간 48시간, 제작비 3000위안으로 만든 AI 드라마 ‘곽거병’(霍去病)이 공개되자마자 큰 관심을 끌었다. 누적 조회수는 5억회에 달하며 현지에서는 “AI 제작 혁명의 사례”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 작품은 최근 중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만극’(漫剧) 형식으로 제작됐다. 만화를 기반으로 드라마 형식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숏폼 영상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중국 전한 시대의 명장 곽거병이다. 그는 위청과 함께 한무제 시기 활약한 장군으로, 한 왕조를 오랫동안 위협하던 흉노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AI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완성도가 예상보다 높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대규모 전쟁 장면과 전투 연출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에서는 “마치 한나라의 전성기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라는 반응도 이어졌다. 논란이 된 제작비 3000위안에 대해 연출을 맡은 양한한(杨涵涵) 감독도 직접 설명에 나섰다. 이 금액은 인건비가 아닌 순수한 연산 비용만 계산한 것이며 제작 시간 48시간 역시 실제 작업 시간이 아니라 순수 제작 시간 기준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는 나흘 동안 하루 약 12시간씩 작업해 완성했다고 밝혔다. 제작에는 총 3명이 참여했다. 감독이 각본과 연출, 스토리보드를 총괄했고 다른 한 명은 AI 영상 생성, 또 다른 한 명은 오리지널 사운드를 담당했다. 모든 제작 과정은 ‘나노 만극 생산라인’이라는 플랫폼에서 진행됐다. 이 플랫폼은 중국의 여러 대형 AI 모델을 한데 모아둔 창작 플랫폼으로 제작자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델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양 감독의 회사는 약 20명 규모로 대부분 1990년대~2000년대생 젊은 창작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광고와 홍보 영상 제작을 맡으며 경험을 쌓았고 여러 창작 대회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이번 ‘곽거병’ 작품이 뜻밖의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양 감독이 영화나 영상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전혀 다른 전공을 했지만 창작에 대한 열정을 따라 콘텐츠 제작 분야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AI 시대 콘텐츠 제작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기술 장벽이 낮아지면서 비전공자도 히트작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분석이다. 다만 AI 드라마에서도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콘텐츠의 창의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으로 이 분야의 가장 큰 병목은 기술보다 인재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사고력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갖춘 창작자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와 함께 중국 대학에서 ‘AI 연출’이나 ‘AI 작가’ 같은 실무 중심 전공이 등장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AI가 콘텐츠 산업의 제작 방식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65만원에 드라마 한편 뚝딱? 중국 AI드라마 화제 [여기는 중국]

    65만원에 드라마 한편 뚝딱? 중국 AI드라마 화제 [여기는 중국]

    65만원으로 드라마 한 편을 만들었다. 그것도 사람 배우가 아닌 인공지능(AI)만으로 제작했다. 중국에서 제작된 AI 드라마가 온라인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16일 중국 매체 콰이커지에 따르면 제작자 3명, 제작 시간 48시간, 제작비 3000위안으로 만든 AI 드라마 ‘곽거병’(霍去病)이 공개되자마자 큰 관심을 끌었다. 누적 조회수는 5억회에 달하며 현지에서는 “AI 제작 혁명의 사례”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이 작품은 최근 중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만극’(漫剧) 형식으로 제작됐다. 만화를 기반으로 드라마 형식의 스토리를 풀어가는 숏폼 영상이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중국 전한 시대의 명장 곽거병이다. 그는 위청과 함께 한무제 시기 활약한 장군으로, 한 왕조를 오랫동안 위협하던 흉노를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AI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완성도가 예상보다 높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대규모 전쟁 장면과 전투 연출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에서는 “마치 한나라의 전성기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라는 반응도 이어졌다. 논란이 된 제작비 3000위안에 대해 연출을 맡은 양한한(杨涵涵) 감독도 직접 설명에 나섰다. 이 금액은 인건비가 아닌 순수한 연산 비용만 계산한 것이며 제작 시간 48시간 역시 실제 작업 시간이 아니라 순수 제작 시간 기준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는 나흘 동안 하루 약 12시간씩 작업해 완성했다고 밝혔다. 제작에는 총 3명이 참여했다. 감독이 각본과 연출, 스토리보드를 총괄했고 다른 한 명은 AI 영상 생성, 또 다른 한 명은 오리지널 사운드를 담당했다. 모든 제작 과정은 ‘나노 만극 생산라인’이라는 플랫폼에서 진행됐다. 이 플랫폼은 중국의 여러 대형 AI 모델을 한데 모아둔 창작 플랫폼으로 제작자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델을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양 감독의 회사는 약 20명 규모로 대부분 1990년대~2000년대생 젊은 창작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광고와 홍보 영상 제작을 맡으며 경험을 쌓았고 여러 창작 대회에서도 수상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이번 ‘곽거병’ 작품이 뜻밖의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양 감독이 영화나 영상 전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전혀 다른 전공을 했지만 창작에 대한 열정을 따라 콘텐츠 제작 분야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AI 시대 콘텐츠 제작 환경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기술 장벽이 낮아지면서 비전공자도 히트작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는 분석이다. 다만 AI 드라마에서도 결국 승부를 가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콘텐츠의 창의성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으로 이 분야의 가장 큰 병목은 기술보다 인재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사고력과 미적 감각을 동시에 갖춘 창작자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와 함께 중국 대학에서 ‘AI 연출’이나 ‘AI 작가’ 같은 실무 중심 전공이 등장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AI가 콘텐츠 산업의 제작 방식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훈족, 알고 보니…[사이언스 브런치]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훈족, 알고 보니…[사이언스 브런치]

    세계사 수업 시간에 배운 4~6세기 게르만족 대이동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유럽 문화권을 형성한 대사건이다. 게르만족 대이동은 4세기 후반 훈족이 등장해 게르만 일족인 동고트족을 밀어내자, 동고트족이 서진하면서 연쇄 반응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5세기 훈족의 왕 아틸라는 ‘신의 채찍’이라고 불리며, 몽골의 칭기즈칸 이전에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첫 번째 인물이다. 이렇듯 훈족의 침입과 아틸라의 존재는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고, 유럽의 재편을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훈’족이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경 멸망할 때까지 중국 북부와 서부 국경을 위협했던 유목민 집단인 ‘흉노’에서 유래됐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만 과연 훈족과 흉노족이 같은 민족이었는지, 중앙아시아 지역을 활보했던 흉노족이 어떻게 로마 국경까지 이동할 수 있었는지 고고학적 증거는 불분명했다. 더군다나, 흉노와 훈족의 무덤 양식은 비슷하지 않았고, 흉노가 역사에서 사라진 기원후 100년부터 훈족이 유럽에 나타나기까지는 300년 정도의 공백이 존재하는 등의 문제로 학계에서는 훈족이 흉노에게서 유래했는지에 대해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독일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고유전학과 연구진을 중심으로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한국, 미국, 카자흐스탄 7개국 24개 연구 기관과 대학으로 구성된 국제 공동 연구팀은 고(古) DNA를 분석한 결과, 훈족은 흉노와 관련이 없다고 27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유전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생물학자 등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모인 다학제 연구팀이 수행했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 국립과학원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PNAS’ 2월 24일 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약 800년 동안 몽골 초원, 중앙아시아, 중유럽 카르파티아 분지를 포함하는 지역에서 발굴한 370명의 DNA를 분석했다. 특히 카자흐스탄 지역 3~4세기 유적지와 카르파티아 분지의 5~6세기 유적지 등에서 찾아낸 35개의 새로운 게놈 서열을 조사했다. 분석 결과, 훈족이 발흥할 때 카르파티아 분지에 아시아 초원 출신의 대규모 공동체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동방형 매장지에서는 소수이지만 뚜렷한 집단이 확인됐는데, 이들은 아시아 지역의 유전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유럽의 훈족 중 일부에 몽골 초원에서 활동했던 흉노족이 포함돼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훈족 전체에 유전적 영향은 미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흉노의 엘리트 전사들 직계 후손이거나 가까운 친척의 직계 후손이 훈족에 유입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연구팀에 따르면 훈족은 중부 유럽에서 기원한 것으로 분석되며, 인구 구성은 중부 유럽인 혈토을 중심으로 아시아 계통도 섞여 있었으며, 이들의 혼혈들도 많아 다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를 이끈 주자나 호프마나노바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교수(고유전학)는 “이번 연구는 훈족 내부에 흉노족 엘리트 전사들 일부 직계 후손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훈족이 흉노에서 유래되지는 않았음을 알려준다”며 “동시에 훈족 인구가 유전적으로 매우 이질적이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호프마나노바 교수는 “최첨단 유전 연구가 과거 인구 구성과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역사학적 논쟁을 해결해 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 [책꽂이]

    [책꽂이]

    한 번쯤, 뮤지엄(박소영 지음, 산하)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예술시장은 미국이다.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탄생한 미국의 예술 컬렉션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건축가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들이 설계한 미국의 뮤지엄 26곳과 그곳에서 만나는 현대미술 이야기를 담았다. 316쪽. 2만 3000원. 역사가 묻고 미생물이 답하다(고관수 지음, 지상의책) 인류와 미생물이 ‘공생하고 공격하며 공진화해 온 흐름’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호모사피엔스의 진화에 이바지한 ‘효모’ 이야기부터 ‘산업혁명’, ‘세계대전’ 등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 미생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암약했는지 파고든다. 미생물 연구의 현주소도 살핀다. 264쪽. 1만 8500원. 좋은 정부, 정치인, 관료(칼 달스트룀, 빅터 라푸엔테 지음, 신현기 옮김, 한울아카데미) 왜 어떤 정부는 유능하고 어떤 정부는 부패할까. 국가의 행정 역량을 담보하는 관료제의 형성 과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이를 비교·분석한 결과를 실증적으로 검증해 유능하고 공정한 정부를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밝힌다. 296쪽. 3만 9000원.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840(정재훈 지음, 사계절) 8세기 중반 돌궐을 대체한 위구르가 거대한 유목제국으로 성장한 과정을 담았다. 100년이 못 되는 짧은 역사에도, 위구르의 유산은 동아시아의 재편과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돌궐 유목제국사’, ‘흉노 유목제국사’에 이은 ‘고대 유목제국사 3부작’ 마지막 편. 416쪽. 3만원.
  • [지방시대] 춘래불사춘… ‘광주의 봄’은 오려나

    [지방시대] 춘래불사춘… ‘광주의 봄’은 오려나

    결국 봄은 우리 곁에 왔다. 여기저기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의 입김이 와닿는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란 시에서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이라고 그렸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왔다 한들 봄 같지 않구나.” 전한시대에 흉노족 왕의 아내로 선발돼 끌려간 왕소군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봄 날씨를 말하고 있지만 안타까운 현실을 담아낸 것이다. 광주의 건설경기도 마찬가지다. 봄이 왔지만 아직 봄이 아니다. 기업하는 이들에게는 아직 엄동설한이다. 건설경기가 침체되고 금리가 올라 자금 압박이 심해지면서 광주 건설시장에는 지금도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다.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광주연구원이 최근에 펴낸 ‘광주 정책 포커스’는 현실을 냉혹하게 진단했다. 광주에서 건설 투자가 현 상태에서 1% 이상 감소할 경우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은 0.54% 포인트 이상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광주 건설투자가 495억∼1187억원 감소할 경우를 가정하면 생산액은 606억∼1455억원, 부가가치액은 242억∼581억원, 취업 인원은 558∼1339명 감소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2022년 기준 광주 건설업 종사자 수는 모든 산업의 10.9%(광역시 평균 7.3%), 생산액은 GRDP의 4.7%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사업체는 각각 1만 6000개(9.4%)·9000개(5.4%), 종사자는 7만 3000명(10.9%)·2만 5000명(3.7%), GRDP는 2조 1000억원(4.7%)·3조 9000억원(8.7%)이었다. 문제는 공사비가 오르고 주택 구매심리가 위축된 데다 건설수요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저성장과 고금리 국면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건설이 살아야 지역 경기가 산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맞다. 건설경기 침체의 후폭풍은 심각하다. 우선 실업자가 늘어난다. 가구, 전자제품 등 다른 소비산업이 위축된다. 그래서 건설경기가 침체되면 내수경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의 고통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주택을 비롯한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만큼 서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은 없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 중장기적으로 주택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시는 올해 예산을 상반기에 60% 이상 집행한다고 했다. 지역경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중앙정부도 나서야 한다. 건설기업의 자금난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번지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역경기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이 절실하다. 불황은 가장 먼저 서민들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지금이 그렇다. 봄이 왔어도 온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희망을 가져 보자. 그 힘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이겨 내지 않았던가. 광주에 진정한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 서미애 전국부 기자
  • [지방시대] 춘래불사춘 ‘광주의 봄’은 오려나?

    [지방시대] 춘래불사춘 ‘광주의 봄’은 오려나?

    결국 봄은 우리 곁에 왔다. 여기저기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봄의 입김이 와 닿는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 ‘소군원’이란 시에서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호지무화초 춘래불사춘)이라고 그렸다.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왔다 한들 봄 같지가 않구나” 전한시대에 흉노족 왕의 아내로 선발돼 끌려간 왕소군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봄 날씨를 말하고 있지만 안타까운 현실을 담아낸 것이다. 광주의 건설경기도 마찬가지다. 봄이 왔지만 아직 봄이 아니다. 기업하는 이들에게는 아직 엄동설한이다. 건설경기가 침체되고 금리가 올라 자금 압박이 심해지면서 광주 건설시장에는 지금도 매서운 찬바람이 불고 있다.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광주연구원이 최근에 펴낸 ‘광주 정책 포커스’는 현실을 냉혹하게 진단했다. 광주에서 건설 투자가 현 상태에서 1% 이상 감소할 경우 지역내총생산(GRDP) 성장률은 0.54%P 이상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광주 건설투자가 495억∼1187억원 감소할 경우를 가정하면 생산액은 606억∼1455억원, 부가가치액은 242억∼581억원, 취업 인원은 558∼1339명 감소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2022년 기준 광주 건설업 종사자 수는 모든 산업의 10.9%(광역시 평균 7.3%), 생산액은 GRDP의 4.7%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컸다. 건설업과 부동산업 사업체는 각각 1만6000개(9.4%)·9000개(5.4%), 종사자 는 7만3000명(10.9%)·2만5000명(3.7%), GRDP는 2조1000억원(4.7%)·3조9000억원(8.7%)이다. 문제는 공사비가 오르고 주택 구매심리가 위축된 점, 건설수요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의 상황을 만든 저성장과 고금리 국면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건설이 살아야 지역 경기가 산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맞다. 건설경기 침체가 가져오는 후폭풍은 심각하다. 우선 실업자가 늘어난다. 가구, 전자제품 등 다른 소비산업이 위축된다. 뿐 아니라 도배, 인테리어 등 소상공인까지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건설경기가 침체되면 내수경기에 치명적이다. 서민들의 고통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주택을 비롯한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만큼 서민에 도움이 되는 정책은 없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 공급확대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주택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광주광역시는 올해 예산을 상반기에 60% 이상 집행한다고 했다. 지역경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중앙정부도 나서야 한다. 건설기업의 자금난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번지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기업의 자구 노력을 지원하고 주택경기 회복을 위해 규제를 풀어야 한다. 건설기업이 일거리를 가질 수 있게 공공공사를 서둘러 발주해야 한다. 공공부문 생활형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수요를 확대하고 대·중소 건설업체들이 동반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역경기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이 절실하다. 불황은 가장 먼저 서민들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지금도 그렇다. 봄이 왔어도 온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희망을 가져보자. 그 힘든 IMF도 이겨내지 않았던가. 광주에 진정한 봄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
  • 혹시 우리도 칭기즈칸의 후예일까?…닮은 점이 많은 한국과 몽골 [한ZOOM]

    혹시 우리도 칭기즈칸의 후예일까?…닮은 점이 많은 한국과 몽골 [한ZOOM]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기원전 259~ 210)은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산시성(陝西省)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에 있는 진시황릉은 약 70만명이 약 38년 동안 만든 것이다. 무려 211만㎡(약 70만평)에 이르는 대단한 규모다. 1974년 진시황릉에서 약 1㎞ 떨어진 곳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병사와 말을 본뜬 도기인형들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병마용갱(兵馬俑坑·병사와 말 인형이 묻힌 땅꿀)이다. 약 8000명이 넘는 병사인형 모두 서로 다른 얼굴과 표정을 하고 있다. 반면 화려한 진시황릉에 비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제국을 완성한 칭기즈칸(Chingiz Khan·1162~1227)의 경우 무덤은 물론 기념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칭기즈칸의 시신을 비밀리에 땅에 묻은 후 기마병 800명이 그 위로 말을 달려 땅을 평평하게 만들어 흔적을 지웠다고 한다. 무덤 위치를 발설하지 못하도록 800명의 기마병들은 다른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병사들 역시 다른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무덤의 위치는 지금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약 50㎞를 가면 칭기즈칸 기마상을 만날 수 있다. 약 40m 높이의 기마상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었으며, 칭기즈칸의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韓國)’은 ‘칸의 나라’로 해석 칭기즈칸의 본명은 테무친이다. 칭기즈칸은 몽골부족을 통일한 테무친의 왕호(王號, 왕의 이름)이다. 칭기즈칸의 ‘칸’은 영어식 표기 ‘Genghis Khan’ 때문에 ‘칸’으로 발음되지만, 몽골어로는 ‘한’이 정확한 발음이다. 조금 더 설명하면 짧은 발음 ‘한’은 부족장, 긴 발음 ‘한:’은 왕을 뜻하기 때문에 ‘칭기즈 한:’으로 발음해야 한다. 우리말에도 짧은 발음 ‘말’은 동물, 긴 발음 ‘말:’은 언어처럼 길이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칸’의 몽골식 발음 ‘한’의 한자표기는 한(韓) 또는 한(汗)이다. 몽골은 한자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에 한(韓) 또는 한(汗)은 몽골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몽골식 발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중국대륙의 원(元)나라와 남러시아 ‘킵차크 한국’, 서아시아 ‘일 한국’, 중앙아시아 ‘차가타이 한국’, 서북 몽골 ‘오고타이 한국’의 4한국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한국’의 ‘한’은 ‘Khan’을, ‘한국’은 ‘칸의 나라’를 의미한다. 한자로는 한국(韓國) 또는 한국(汗國)으로 표기한다.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 역시 한국(韓國)과 한국(汗國)을 같은 '칸의 나라'로 해석한 바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한국(韓國)과 ‘칸의 나라’ 한국(韓國)은 왜 한자 표기가 같은 것일까? 이야기는 다시 우리나라 고조선으로 거슬러 간다.  고조선 건국과 한국(韓國)의 유래 초나라 항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한나라 유방은 공신 노관에게 연(燕)나라를 떼어 준다. 그러나 유방이 죽고 유방의 부인이 공신들을 숙청하자 연(燕)나라 왕(王) 노관은 흉노로 망명해 버린다. 왕의 망명으로 사실상 연(燕)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기원전 195년 노관의 신하 위만은 약 1000명의 무리를 데리고 고조선으로 망명한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받아들이고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위만은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무리들로 세력을 만들어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고조선의 왕이 된다. 나라를 빼앗긴 준왕은 고조선 유민들을 이끌고 한반도 아래로 내려간다. 시간이 흘러 위만의 손자 우거왕이 고조선의 왕이 된다.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고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을 것이 두려워진 한(漢)나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한다. 고조선은 최선을 다해 버텼지만 기원전 108년 결국 멸망한다. 그리고 고조선 유민들은 한반도 아래로 내려간다.  준왕은 지금의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가 마한(馬韓)을 세웠으며, 마한은 훗날 백제가 된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지금의 경상도 지역을 내려간 유민들은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진한은 훗날 신라가 된다. 그리고 마한과 진한의 사람들이 지금의 경상남도로 내려가 변한(弁韓)을 세웠으며, 변한은 훗날 가야가 된다. 마한, 진한, 변한을 우리 역사는 삼한(三韓)이라 부른다. 삼한의 한(韓)은 당시 북방지역에서 ‘한’으로 소리나는 ‘Khan’(칸)을 의미하며, 삼한(三韓)은 칸이 다스리는 세 나라를 의미한다.  시간이 흘러 한국사에 한(韓)이 다시 등장한다. 삼국통일을 다르게 부르는 말, 바로 ‘삼한일통’(三韓一統)이다. 여기서 한(韓)은 마한, 진한, 변한의 한(韓)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을 의미한다.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건국될 때도 삼한일통이 강조된 바 있다. 종합해보면 고조선부터 사용한 한(韓)은 영어식 표기 Khan의 정통발음 ‘한’의 한자식 표기이며, 당시 한국(韓國)은 몽골제국 4한국의 한자식 표현 한국(韓國·汗國)과 같은 ‘칸의 나라’라는 의미다. 인종과 언어, 문화에서 유사점이 많은 두 나라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와 ‘테를지 국립공원’을 다녀왔다. 테를지 국립공원은 낮에는 동물들이 초원을 뛰어놀고 밤에는 게르(Ger·몽골 전통가옥) 위로 별빛이 내리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 곳에서 만난 몽골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인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가장 가까운 나라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몽골 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그 모습이 너무 닮았다. 우리 역사가 시작된 고조선의 위치와 몽골이 근접해 있었고, 지금은 반론이 많지만 우리 언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하고, 칸(Khan)과 한(韓)이 같은 ‘왕’의 의미인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와 몽골은 조상이 같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몽골 테를지 국립공원에는 수많은 바위가 여러가지 형상을 하고 있다. 게르는 유목민족이었던 몽골 사람들이 초원을 옮겨 다니기 위해 개발한 전통가옥이다. 2020년 통계조사에 따르면 몽골 가구의 약 40%가 아직도 게르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273년 몽골에 대항하는 삼별초의 항쟁이 끝나고 몽골은 삼별초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세운다. 그리고 일본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제주도를 군사용 말 사육의 기지로 삼는다. 물론 1274년부터 시작된 두 차례의 여몽연합군 일본정벌은 폭풍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몽골이 남긴 말들은 제주도에 남아 품종개량을 거듭하며 지금의 제주말이 된다. 한국과 몽골은 역사, 문화, 인종 심지어 동물까지 연결되는 부분이 제법 많은 것 같다. 우리에게는 몽골의 지배를 받은 약 100년의 아픈 역사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지배, 피지배에 묶여 있지 않은 더 넓은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질 때이다.
  • 야만족으로 기록된 흉노족의 진짜 모습…중화사상에 갇힌 세계관 [한ZOOM]

    야만족으로 기록된 흉노족의 진짜 모습…중화사상에 갇힌 세계관 [한ZOOM]

     역사의 사전적 정의는 인류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을 의미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 H. Carr)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바 있다. 역사에 대한 정의가 다양한 만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세계사는 그리스, 로마에서 시작해서 유럽, 미국 그리고 중국이 전부였다. 그렇게 시험을 봐야 했고, 그 결과 닫힌 세계관을 가져왔다. K-컬처가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거의 대한민국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열린 세계사관이 필요하다.    한나라의 굴욕…흉노에 대한 두려움이 만든 만리장성 기원전 202년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마지막 전쟁이 벌어졌다. 항우를 포위한 한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노래를 불렀다. 사실 이들은 초나라 군사 출신들이었다. 항우의 폭정을 이기지 못하고 한나라로 넘어갔던 것이다. 항우는 패배를 직감하고 사랑하는 여인 우희를 죽인 후 치열하게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불린다는 고사성어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漢)는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秦)에 이어 중국대륙을 두 번째로 통일한 국가가 되었다. 한나라는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한족(漢族)이라 부르고, 자신들의 문자를 한자(漢子)라고 부를 만큼 눈부신 문화적 성장과 국력을 자랑했던 나라였다. 그런 한나라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있었다. 바로 북쪽에 있는 흉노였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흉노 때문이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전쟁을 하는 동안 흉노는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유방은 흉노를 전멸시켜 완벽한 중국 대륙의 통일을 달성하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32만의 군사를 이끌고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흉노는 오합지졸의 유목민족이 아니었다. 유방은 백등산에서 포위를 당했고, 겨우 버티다가 흉노 부족장 부인에게 뇌물을 써서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한나라는 한무제(漢武帝)가 등장하기 전까지 흉노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야만족으로 기억된 흉노는 중국인들이 남긴 편견 흉노(匈奴)는 오랑캐 흉(匈)과 노비 노(奴)를 합친 말이다. 이름 그대로 보면 ‘오랑캐+노비’로 풀이된다. 이것은 흉노를 두려워하고,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는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만든 표현이다. 흉노의 어원에 대해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흉노 스스로가 자신들을 Hun[흉]으로 불렀으며, 중국인들이 흉(匈)이라는 글자를 붙였다는 것이 유력하다. Hun은 흉노의 언어인 퉁구스어로는 그냥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여기에 멸시하는 의미인 노(奴)까지 붙인 것이다. 불행히도 흉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흉노는 문자기록이 없다. 흉노에 대한 기록은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등에 많이 남아있지만 모두 흉노를 싫어하는 중국인들이 남긴 편견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역사를 배운 우리들에게 있어 흉노는 중국을 괴롭힌, 북방 야만족이다. 그러나 흉노는 북방 유라시아 최초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민족이었다. 이후 돌궐로 이어져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오스만투르크를 지나 지금의 튀르키예(터키)가 되었다. 애석하게도 중국의 역사를 배우는 동안 흉노는 잠시 야만인으로 등장할 뿐이다.   편견이 만들어낸 닫힌 세계사관의 위험 중화(中華)란 중국인들이 스스로 중국대륙을 이르는 말이다. 중국은 역사서술에 있어 자신을 중심에 두고 화(華)라고 불렀다. 그리고 중국대륙 바깥쪽에 있는 오랑캐를 각각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이 중에 익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동이(東夷)다. 고대사에서 중국은 우리민족을 동이족으로 불렀다. 고구려, 발해 등 중국대륙과 팽팽하게 경쟁했던 역사를 가진 우리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흉노와 같은 오랑캐에 불과했다. 우리를 오랑캐로 보는 역사관을 가진 민족의 역사를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유비, 관우, 장비가 나오는 삼국시대를 비롯해서,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 등 년도와 순서까지 달달 외웠다. 그러면서 중국의 역사를 가운데 두고 주변을 이해하는 갇힌 세계사관을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문화적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중국을 전부로 보는 세계사관은 다른 민족과 역사를 무시하는 갇힌 세계관을 가지게 될 수 있다. 강대국 중심의 세계관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더불어, 한국문화가 전세계를 열광시키는 지금 우리도 닫힌 세계사관을 버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고구려 시대부터 이어진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 튀르키예는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와 튀르키예는 3·4위전에서 만났다. 대한민국은 태극기와 똑같은 크기의 튀르키예 국기를 만들어 ‘우리는 형제의 나라’임을 보여주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튀르키예 선수들에게도 응원과 박수를 보내면서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튀르키예와 대한민국은 왜 형제의 나라가 되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는 약 2만명이 넘는 군인을 파병했다. 다른 참전국들과 달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재건을 위해 1971년까지 계속해서 군대를 파견했던 고마운 나라였다. 그러나 파병만으로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튀르키예와의 인연은 고구려 시대부터 시작된다. 당시 중국 수나라는 고구려를 포함한 주변 오랑캐 나라들을 정복하려 했다. 그러나, 흉노의 후예인 돌궐과 고구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구려와 돌궐 역시 수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돈독한 동맹을 유지했다. 이 돌궐(突厥)이 바로 투르크, 터키 그리고 지금의 튀르키예로 이어진다.
  • 케이팝·한식·국악 다양한 강좌… K문화 전파기지 역할 ‘톡톡히’

    케이팝·한식·국악 다양한 강좌… K문화 전파기지 역할 ‘톡톡히’

    튀르키예(터키)는 ‘형제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튀르키예의 조상인 흉노족은 고조선과 동맹 관계였고, 흉노족이 세운 돌궐은 고구려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3·4위를 결정한 한국-터키전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튀르키예 남부를 뒤덮은 대규모 산불로 피해가 커지자 한국에서 묘목 기부 행렬이 이어지기도 했다. 지난 28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앙카라의 사드레틴 알판 공연장에서 열린 ‘케이팝 커버댄스 페스티벌 인 튀르키예’에서도 양국 교류의 역사를 보여 주는 영상이 샌드아트(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것) 형식으로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현재 튀르키예에서 한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는 가운데 주튀르키예 한국문화원은 양국 간 문화 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튀르키예 한국문화원은 페스티벌 개최에 앞서 케이팝 전문 강사들이 현지에 파견돼 학생들의 보컬·댄스 교육을 담당하는 ‘케이팝 아카데미’를 진행했다. 27일 찾은 문화원에서는 유지영 안무가가 학생들에게 걸그룹 아이브의 ‘러브 다이브’(LOVE DIVE)의 안무를 알려 주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들은 페스티벌의 축하 공연 무대에 올라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뽐냈다. 유 안무가는 “워낙 케이팝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가 높아 안무 습득 속도가 빨랐다”고 전했다. 주튀르키예 한국문화원 곳곳에는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전통 의상과 악기 등이 전시돼 있다. 입구에서는 한류 스타인 배우 이종석의 입간판이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문화원은 케이팝뿐 아니라 한국어, 한식, 태권도, 한복, 서예, 국악 등 다양한 한국 문화 관련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식경연대회, 붓으로 쓰는 한글 서예 전시회, 특별 한국어 회화 강좌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박기홍 주튀르키예 한국문화원 원장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매개로 한국과 튀르키예 간의 문화적 협력과 교류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문화원이 소통과 공감의 공간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참여를 바란다”고 말했다.
  • 충무공 전승 도운 척후장… 왜군 포로 됐다가 탈출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충무공 전승 도운 척후장… 왜군 포로 됐다가 탈출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의 5개 수군진 가운데 사도진과 방답진은 종3품의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거진(巨鎭), 곧 핵심 수군기지였다. 오늘날의 여수 돌산도에 있었던 방답진이 좌수영을 방어하는 역할이라면 사도진은 여도진·발포진·녹도진을 거느리고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흥반도를 지켰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선수군의 첫 번째 승전인 옥포해전부터 척후장으로 출전해 왜적의 위치와 선단의 규모를 기선(旗船)에 알리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이순신 수군이 전승을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완은 훗날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포로가 돼 일본에 끌려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사도진의 옛터는 이제 한적한 시골 어항(漁港)이 됐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이다.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고기잡이배들만 한가롭다. 전라좌수영의 대표적 수군기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진성(鎭城)도 있었다지만 자취는 간데없다. 마을 보건지소 앞에 있는 첨절제사 선정비가 유일한 흔적인데 이것조차 비바람에 깎여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 다만 금사리(錦蛇里)라는 마을 이름이 사도진(蛇渡鎭)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최근 ‘사도진해안길’이라는 길 이름이 붙여지면서 사도진 터를 찾아가기가 쉬워졌고 역사도 조금은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전라좌수영 대표 기지·진성 흔적 없어 그런 만큼 옛 사도진의 복원 작업에 시동이 걸린다면 새로운 역사관광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리호 발사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나로우주센터가 가깝고, 총길이 3462m에 이르는 해창만방조제는 바로 금사리에서 시작한다. 방조제 둑에는 오토캠핑장, 야외 공연장, 산책로로 이루어진 해창만간척지공원이 조성됐으니 나로우주센터와 짝을 이루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간척지 둑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바다, 뒤로는 담수호가 펼쳐져 있어 낚시인들도 즐겨 찾는다. 사도첨사 김완(金浣·1546~1607)은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1554~1611)과 품계는 같고 나이는 8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사도첨사 김완이 아닌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좌수영 5개 수군진의 선임을 맡겼다. 충무공이 좌수사에 부임하고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사도첨사 김완을 그리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진년 2월 충무공의 관내 순시는 휘하 지휘관의 전쟁 준비 태세를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충무공은 25일자 ‘난중일기’에 ‘여러 가지 전쟁 준비와 관련해 (사도진에) 결함이 많이 보여 군관과 관리들에게 벌을 주었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고 적었다. 교수(敎授)는 향교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지방관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사도진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못하건만 관찰사가 표창하는 공문서를 올렸기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3월 20일자 일기에도 김완에 대한 불신은 이어졌다. 충무공은 관내를 돌아보라는 명령을 제 기한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천부 책임자들을 벌주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사도첨사 김완은 혼자서 수색했다면서 반나절 동안 나로도 안팎과 대평도 및 소평도를 모두 수색하고 그날로 포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엉뚱한 거짓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흥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문의하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적었다. 그리고 ‘몸이 몹시 안 좋아 일찍 들어왔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광(1541~1607)이다. 왜란 개전 이후 4만의 전라도 군사를 근왕병으로 이끌고 북상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소수 왜적의 기습을 받고 패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1589년 전라도관찰사에 한번 올랐다가 파직되고 159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됐다. 1589년이라면 김완이 사도진첨절제사에 임명된 시기이기도 하다. 김완과 이광 사이에는 기록에 남지 않은 무언가 끈끈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 할 일을 태만히 하는 부하를 가장 싫어하는 충무공이다. 게다가 태만의 배경에 상급자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도첨사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김완 쪽에서 봐도 충무공은 적극적으로 모시기에는 떨떠름한 상관이 아닐 수 없었다. 김완이 종3품 사도첨사에 제수된 그해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이었다. 충무공은 일찌감치 1580~1582년 전라좌수영에서 18개월 동안 종4품 발포만호를 지냈으니 10년 가까이 지난 이후 전라좌수사에 오른 것을 ‘벼락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김완이 느꼈을 갈등은 오늘날에도 흔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공은 ‘난중일기’ 앞쪽에서는 좀처럼 김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년 9월 이후가 되면 권준이나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에 버금가게 김완과 활을 쏘거나 술을 마셨다는 언급이 잦아진다. 1594년(갑인년) 어느 날 일기에는 ‘경수(景受·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발포만호 황정록, 사도첨사 김완과 함께 사인암에 올라 하루 종일 취해서 이야기하다 돌아왔다’는 내용도 보인다. 충무공과 깊이 교감하는 참모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다.●1595년 충무공 장계, 조방장으로 승진 김완은 전쟁 준비 기간 신뢰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전장(戰場)에서 바꿀 수 있었다. 충무공과의 관계 개선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순신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뒤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 이런 대목이 있다. ‘5월 7일 새벽 출정해 천성, 가덕으로 가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이 났음을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덤벙대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라”고 엄하게 명령하고는 대열을 갖추어 일제히 나아갔습니다.’ 이어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의 공로를 나열하면서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했다’고 했다. 김완이 척후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선을 공격해 작지 않은 전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당파(撞破)는 포격을 가해 적선을 분쇄한 것을 뜻한다. 김완은 이어진 한산도대첩과 부산포해전을 비롯해 이순신의 주요 해전에서 척후장으로 활약했고 159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로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했다. 조방장이란 통제사나 절도사를 보좌해 적의 침입을 막아 내는 역할을 하는 장수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7년에는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伏兵都將)을 맡아 도장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하기도 했다. 복병도장은 적이 지나는 길목에 포진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해상 게릴라부대 총대장을 뜻하는 듯하다. 거제도와 북쪽 칠천도 사이에서 벌어진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15일에 벌어졌다. 선조실록은 ‘원균을 비롯해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라는 기사에서 ‘칠천량해전의 수군 장수들은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이라면서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뿐’이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발언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 김완이 분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김완은 왜적과 싸우며 수세에 몰리자 자결하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포로가 됐다. 김완은 전후의 이야기를 ‘용사일록’(龍蛇日錄)이라는 일기체 회고담에 담았는데,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日岐島), 낭고야(浪古也)를 거쳐 곡고라(曲高羅)의 감시인 집에 감금됐다고 했다. 낭고야와 곡고라는 나고야(名護屋)와 고쿠라(小倉)의 음차 표기다. 그는 1598년 1월 일본에서 탈출한 뒤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고,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해 군수 박응창이 순찰사에게 보고하니 선조에게 상세한 내용의 장계가 올라갔다. 선조는 ‘동방의 소무’라는 뜻으로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쓴 어필과 함안군수 벼슬을 내렸다. 소무(蘇武)는 중국 전한시대 흉노에 붙잡혀 복속을 강요당했으나 굴하지 않아 바이칼호 주변에 19년 동안 유폐됐다 돌아온 인물이라고 한다. ‘용사일록’의 내용은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도 담겼다. 무덤은 고향인 경북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 있다.
  • 칠천량해전 홀로 분전, 포로되어 끌려간 일본에서 탈출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칠천량해전 홀로 분전, 포로되어 끌려간 일본에서 탈출하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의 5개 수군진 가운데 사도진과 방답진은 종3품의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거진(巨鎭), 곧 핵심 수군기지였다. 오늘날의 여수 돌산도에 있었던 방답진이 좌수영을 방어하는 역할이라면 사도진은 여도진·발포진·녹도진을 거느리고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흥반도를 지켰다. 사도첨사 김완은 조선수군이 첫번째 승전인 옥포해전부터 척후장으로 출전해 왜적의 위치와 선단의 규모를 기선(旗船)에 알리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이순신 수군이 전승을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완은 훗날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사도진의 옛터는 이제 한적한 시골 어항(漁港)이 됐다. 전남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사도마을이다. 전선(戰船) 정박지였을 마을 앞바다에는 작은 고기잡이배들만 한가롭다. 전라좌수영의 대표적 수군기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진성(鎭城)도 있었다지만 자취는 간데 없다. 마을 보건지소 앞에 있는 첨절제사 선정비가 유일한 흔적인데 이것조차 비바람에 깎여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 다만 금사리(錦蛇里)라는 마을이름이 사도진(蛇渡鎭)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최근 ‘사도진해안길’이라는 길이름이 붙여지면서 사도진 터를 찾아가기가 쉬워졌고 역사도 조금은 살아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만큼 옛 사도진의 복원 작업에 시동이 걸린다면 새로운 역사관광 자원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리호 발사로 크게 각광받고 있는 나로우주센터가 가깝고, 총길이 3462m에 이르는 해창만방조제는 바로 금사리에서 시작한다. 방조제 둑에는 오토캠핑장, 야외 공연장, 산책로로 이루어진 해창만간척지공원이 조성됐으니 나로우주센터와 짝을 이루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간척지 둑을 사이에 두고 앞에는 바다, 뒤로는 담수호가 펼쳐져 있어 낚시인들도 즐겨 찾는다.  사도첨사 김완(金浣·1546~1607)은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1554~1611)과 품계는 같고 나이는 8살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사도첨사 김완이 아닌 방답첨사 이순신에게 좌수영 5개 수군진의 선임을 맡겼다. 충무공이 좌수사에 부임하고 전란을 대비하는 과정에서 사도첨사 김완을 그리 미덥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은 ‘난중일기’를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임진년 2월 충무공의 관내 순시는 휘하 지휘관의 전쟁 준비 태세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한다. 충무공은 25일자 ‘난중일기’에 ‘여러가지 전쟁 준비와 관련해 (사도진에) 결함이 많이 보여 군관과 관리들에게 벌을 주었고,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고 적었다. 교수(敎授)는 향교에서 생도를 가르치는 지방관의 보좌관이다. 충무공은 ‘사도진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 가장 못하건만 관찰사가 표창하는 공문서를 올렸기에 죄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노릇’이라고 덧붙였다. 3월 20일자 일기에도 김완에 대한 불신은 이어졌다. 충무공은 관내를 돌아보라는 명령을 제 기한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천부 책임자들을 벌주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사도첨사 김완은 혼자서 수색했다면서 반나절동안 나로도 안팎과 대평도 및 소평도를 모두 수색하고 그날로 포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엉뚱한 거짓말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흥양현감과 사도첨사에게 문의하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몸이 몹시 안좋아 일찍 들어왔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광(1541~1607)이다. 왜란 개전 이후 4만의 전라도 군사를 근왕병으로 이끌고 북상하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소수 왜적의 기습을 받고 패퇴한 인물이다. 그의 이력을 보면 1589년 전라도관찰사에 한번 올랐다가 파직되고 1591년 다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됐다. 1589년이라면 김완이 사도진첨절제사에 임명된 시기이기도 하다. 김완과 이광 사이에는 기록에 남지 않은 무언가 끈끈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제 할 일을 태만히 하는 부하를 가장 싫어하는 충무공이다. 게다가 태만의 배경에 상급자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사도첨사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김완 쪽에서 봐도 충무공은 적극적으로 모시기에는 떨떠름한 상관이 아닐 수 없었다. 김완이 종3품 사도첨사에 제수된 그해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이었다. 충무공은 일찌감치 1580~1582년 전라좌수영에서 18개월동안 종4품 발포만호를 지냈으니 10년 가까이 지난 이후 전라좌수사에 오른 것을 ‘벼락출세’라고 할 수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김완이 느꼈을 갈등은 오늘날에도 흔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충무공은 ‘난중일기’ 앞쪽에서는 좀처럼 김완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년 9월 이후가 되면 권준이나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에 버금가게 김완과 활을 쏘거니 술을 마셨다는 언급이 잦아진다. 1594년(갑인년) 어느 날 일기에는 ‘경수(景受·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이순신, 순천부사 권준, 발포만호 황정록, 사도첨사 김완과 함께 사인암에 올라 하루 종일 취해서 이야기하다 돌아왔다’는 내용도 보인다. 충무공과 깊이 교감하는 참모로 탈바꿈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완은 전쟁 준비기간 신뢰를 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미지를 전장(戰場)에서 바꿀 수 있었다. 충무공과 관계 개선도 급속히 이루어졌다. 이순신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뒤 조정에 올린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 이런 대목이 있다. ‘5월 7일 새벽 출정해 천성, 가덕으로 가다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니,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여도권관 김인영이 신기전을 쏘아 사변이 났음을 보고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덤벙대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라”하고 엄하게 명령하고는 대열을 갖추어 일제히 나아갔습니다.’ 이어 충무공은 휘하 장수들의 공로를 나열하면서 ‘사도첨사 김완은 왜대선 1척을, 여도권관 김인영은 왜중선 1척을 각각 당파했다’고 했다. 김완이 척후 역할에 그치지 않고 적선을 공격해 작지 않은 전공을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당파(撞破)는 포격을 가해 적선을 분쇄한 것을 뜻한다. 김완은 이어진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을 비롯해 이순신의 주요 해전에서 척후장으로 활약했고, 1595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장계로 조방장으로 승진했다. 조방장(助防將)이란 통제사나 절도사를 보좌해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장수다.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1597년에는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을 맡아 도장포와 다대포의 왜적을 격파하기도 했다. 복병도장(伏兵都將)은 적이 지나는 길목에 포진하고 있다가 기습하는 해상 게릴라부대 총대장을 뜻하는 듯하다.  거제도와 북쪽 칠천도 사이에서 벌어진 칠천량해전은 1597년 7월 15일에 벌어졌다. 선조실록은 ‘원균을 비롯해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하다’는 기사에서 ‘칠천량패전의 수군 장수들은 힘을 겨루며 싸우다가 패멸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은 자나 죽은 자나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던 사람들’이라면서 ‘중론을 참고해 보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전사한 자는 조방장 김완 뿐’이라는 도체찰사 이원익의 발언 내용이 실려있다. 당시 김완이 분전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김완은 왜적과 싸우며 수세에 몰리자 자결하고자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포로가 됐다. 김완은 전후의 이야기를 ‘용사일록’(龍蛇日錄)이라는 일기체 회고담에 담았는데,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日岐島), 낭고야(浪古也)를 거쳐 곡고라(曲高羅)의 감시인 집에 감금됐다고 했다. 낭고야와 곡고라는 나고야(名護屋)와 고쿠라(小倉)의 음차 표기다. 그는 1598년 1월 일본에서 탈출한 뒤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고,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해 군수 박응창이 순찰사에게 보고하니 선조에게 상세한 내용의 장계가 올라갔다. 선조는 ‘동방의 소무’라는 뜻으로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쓴 어필과 함안군수 벼슬을 내렸다. 소무(蘇武)는 중국 전한시대 흉노에 붙잡혀 복속을 강요당했으나 굴하지 않아 바이칼호 주변에 19년동안 유폐됐다 돌아온 인물이라고 한다. ‘용사일록’의 내용은 김완의 후손들이 1918년 간행한 해소실기(海蘇實紀)에도 담겼다. 무덤은 고향인 경북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에 있다.
  • [길섶에서] 춘래불사춘/박록삼 논설위원

    [길섶에서] 춘래불사춘/박록삼 논설위원

    최근 SNS 단체방에 쌩뚱맞게 꽃봉오리 머금은 목련꽃 사진, 움 터오는 버드나무 가지 사진 등속을 연신 올리는 친구가 있다. 추운 겨울을 헤치고 새 계절이 왔음을 함께 나누려는 뜻인가 싶지만 그것도 아니다. 생명의 기운이 불끈거리는 자연과 달리 세상사 허망함을 언뜻언뜻 내뱉는다. 모처럼 단비가 흩뿌려 해갈한 주말 또 다른 단체방에서는 대체 단비는 언제 오냐며 탄식 아닌 탄식을 터뜨리는 이도 있다. 고대 중국 4대 미인 중 하나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은 흉노로 끌려가며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이 아닌 듯하다’고 했다. 봄 언저리에 쌀쌀한 날씨가 체감될 때 흔히들 쓰곤 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기후위기 속 짧아진 봄만을 말하지는 않을 테다. 2022년 봄 역병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고, 많은 이들의 한껏 부풀었던 꿈은 사그라졌다. 그래도 봄은 희망이다. 희망을 놔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이해영의 쿠이 보노] 식민지배는 ‘합법’이다?/한신대 교수

    [이해영의 쿠이 보노] 식민지배는 ‘합법’이다?/한신대 교수

    지난 6월, 16개 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배소 각하 선고가 있었다. 재판부의 판단에 뒤늦게 논평을 추가할 생각은 없다. 단지 나는 그 법적 판단의 중심 논변을 짚고자 한다. 판결문에 의하면 “일본국을 포함한 어느 나라도 자신들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였다는 자료가 없고 국제법적으로도 그 불법성이 인정된 바가 있다는 자료가 없다.…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이 조약 형식을 가장한 강점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식민지배 금지’라는 국제사회의 관행이나 법적 확신을 보여 주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국제법적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식민지배, 구체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말일까. 그래서 당시 조선을 실효적으로 지배한 ‘합법적’ 국가권력 일본국에 항거하는 모든 행위, 즉 독립운동은 모두 ‘불법’행위가 되는 것일까. 식민지 시대 국제법 현실을 대변할 유일하고 권위 있는 국제기관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1차 세계대전 후 창설된 국제연맹 정도를 언급할 만하다. 국제연맹 규약 제22조를 보자. “지난 전쟁의 결과 과거 자신들을 통치하던 국가의 주권에서 벗어났지만, … 여전히 자립 능력이 없는 인민들의 식민지와 영토에 대해서는 아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인민들의 안녕과 발전이 문명의 신성한 신뢰를 형성하고 이 신뢰 수행을 위한 안전이 본 규약에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 원칙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최선의 방법은 자원, 경험 또는 지리적 위치로 보아 이 책임을 가장 잘 수행하고 또 그럴 용의가 있는 선진국에 이 인민들에 대한 후견을 위임하여 국제연맹 대신 선진국에 의한 위임통치를 집행하는 것이다.” 1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일본은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이었고, 또 국제적으로 승인된 아시아의 강대국이자 ‘문명국’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잘해야 반(半)문명국으로 선진국 일본의 ‘위임통치’가 당연하다는 것이 적어도 국제연맹 규약으로 확인되는 게 당대의 국제법적 현실이다. 로마법학자 가이우스는 “노예제는 만민법(jus gentium)에 따라 승인된 상태”라고 정의했다. 만민법은 현대국제법과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당대의 국제 관습법이라 할 만하다. 로마 건국 이래 노예제는 성장과 확장의 동력이었다. 한때 노예 인구가 제국 전체 인구의 40%까지 차지한 적도 있을 정도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체제라 할 만한 로마 공화정 역시 노예제 농경경제에 기초해 있었다. 하지만 로마공화국의 지배 정당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 바로 노예반란, 곧 노예전쟁이었다. 그중 제3차 노예전쟁, 곧 스파르타쿠스 전쟁(BC 73~71)은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그것도 로마 본토에서 로마 생산력을 담당하던 계급이 기존의 낡은 소유 관계에 도전한 것이었다. 노예는 인격이 아니라 사유 재산이었기 때문에 로마 지배계급에게 노예전쟁은 살아 있는 사유 재산의 반란이었다. 이들에게 스파르타쿠스는 흉노(凶奴)의 대명사이자 천하의 범법자였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이라고 평가한 이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 볼테르였다. 이 불법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는 로마의 어떤 정치인이 노예제의 ‘불법성’을 인정했다거나 혹은 이를 금지했다는 당대 국제 관습법에 대한 기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때가 1863년이니 스파르타쿠스 반란이 일어난 지 약 2000년 뒤다. 현대 국제법에서 노예무역은 완전히 금지된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국제법상 강행규범(jus cogens)으로 정착되는 것은 1970년대다. 폭력적 방식으로 식민지배를 창설, 유지하는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이것이 현대 국제법의 현실이다. 노예제도 식민지배도 당대 현실에서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노예제, 식민지배라는 ‘사실’에서 정당성이 도출되지 않는다. 합법성은 정당성의 한 형태일 뿐이다. 법이 (역사) 정의로부터 분리돼 사법관료적 기능으로서의 합법성에 매몰될 때 법은 존재 이유를 추궁당한다. 또한 국제정치의 속성상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주의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은 혁명 정부가 아닌 다음에야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보편 규범이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의 범죄적 결과에 따른 책임 때문이다. 국제법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근거로 국내법적 판단을 하는 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는 행위는 그 자체로 정당하다.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연지곤지와 가락지의 유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연지곤지와 가락지의 유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보통 혼인 증표로 신랑 신부가 반지를 주고받는다. 혼례를 치르는 신부는 이마와 볼에 붉은 점으로 화장을 하는데, 이를 연지곤지라 한다. 연지는 붉은 물감으로 여자들이 입술과 뺨, 미간 등에 바르거나 찍는 것이고, 곤지는 이마 가운데에 연지로 찍는 붉은 점이다. 이런 연지곤지의 유래가 사뭇 재미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후세 부인들은 모두 얼굴에는 붉은 연지(丹注)를 찍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다. 연지라는 것은 옛날 천자의 여러 첩이 월경이 있을 때 월경이 있다는 것을 표시해 임금을 모시지 않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 했다. 월경을 하면 모시기가 어렵고, 이를 스스로 말하기도 어려워 얼굴에 붉은색으로 점을 찍어 표시한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정희가 월경을 하므로 임금 모시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희는 한나라 경제의 네 번째 부인으로, 월경이 있어 황제나 제후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정희의 이름을 따 ‘정희의 병’이라 했다. 당나라 때는 얼굴에 연지를 찍은 모습이 예쁘게 보여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또 중국 오나라의 손화라는 부인 뺨의 상처 치료에 흰 수달피 가루에 옥가루와 호박가루를 섞어 발랐는데 흉터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부인들이 모방했다고도 한다. 우리 전통 혼례 때 신부 화장의 대명사인 연지곤지는 그 역사가 오래됐다. 신라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연지 화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5~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평안남도 강서구역 수산리 고구려 무용총 벽화 여인상과 쌍영총 벽화의 ‘차마행렬도’에서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른 여인들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흉노의 고유 습속이 중국에 전래됐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이라 했고, 육당 최남선은 몽고족의 습속이 고려 시대에 전래된 것이라고 했다. 또 붉은색은 잡귀와 부정을 쫓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하여 새 신부의 연지곤지 풍속이 생겨났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단옷날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거나, 일부 산간 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 예방 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색 종이를 오려 붙이는 행위도 이를 잘 말해 준다. 후궁이 임금의 사랑을 받아 동침한 것을 승은이라 한다. 한나라 위광이 서한(西漢)의 전례를 기록한 ‘한관구의’에 의하면 궁녀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면 은반지를 하사해 당번되는 달을 따지도록 했다. 또 ‘시경’ 정녀(靜女ㆍ얌전한 아가씨) 모형전(毛亨傳)에는 “옛날 후비와 후궁들이 예법에 따라 임금의 처소에 나아갈 때 여사가 그 달과 그 날짜를 적고 반지를 주어서 나아가게도 하고 물러가게도 했다. 그리고 임신을 하면 금반지를 주어 물러가도록 하고 마땅히 모시게 된 자에게는 은반지를 주어 나아가도록 했다”고 돼 있다. 중국의 호속전(胡俗傳)에서도 “남녀가 처음 혼인 때 서로 한평생을 굳게 약속한다는 뜻으로 금으로 만든 반지를 주었다”고 했다. 그럼 반지는 어느 손에 끼어야 할까. 승은을 입기 위해 나아갈 때는 반드시 왼손에 끼고, 왕과 동침하고 나면 오른손에 낀다. 왜일까. ‘오경요의’(五經要義)에 따르면 음양으로 볼 때 “왼손은 양(陽)인 까닭에 여자가 남자에게 나아갈 때 반지를 왼손에 끼게 되고, 오른손은 음(陰)이기 때문에 이미 모신 후에는 바꿔 오른손에 끼게 된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궁녀가 왕의 승은을 입으면 아침에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와 은혜를 표시했다. 이에 대해 조재삼은 1885년 쓴 ‘송남잡지’에서 왕의 잠자리를 모시고 나서 은가락지를 오른손에 낀 것과 같은 뜻이라 했다. 한편 이익은 새 신부의 연지곤지와 가락지를 끼는 풍속에 대해 그 유래가 아름답지 못한 것이라며 혁파를 펴기도 했다.
  • 우위 지키려는 美, 발판 포기 않는 中… ‘패권 전쟁터’ 된 신장

    우위 지키려는 美, 발판 포기 않는 中… ‘패권 전쟁터’ 된 신장

    지난달 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국 공산당의 위구르족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아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와 손잡고 ‘동시다발 제재’를 단행해 ‘동맹을 통한 중국 압박’을 본격화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겨냥한 ‘바이든식 외교 전략’은 이제 시작이어서 신장 지역을 둘러싼 양국의 충돌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위구르족 인권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두 나라는 왜 이제서야 사생결단에 나선 것일까. 미중 갈등의 새 축이 된 신장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아시아·이슬람 연결 ‘교량’… 18세기에 中 편입 중국 북서부에 위치한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역사적으로 실크로드(비단길)를 통해 동아시아와 이슬람 세계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중국 고전 ‘서유기’를 보면 당나라 고승 현장(602~664)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려고 서역을 지나다 갖가지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데, 소설 속 서역이 바로 신장이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궐(투르크)에서 찾는다. 돌궐은 중국 역사에서 ‘흉노’로 불리던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몽골과 만주 지역 등에 퍼져 살았다. 전성기에는 고구려와 손잡고 중국 대륙을 위협했다. ‘돌궐의 후예’를 자처하는 터키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돌궐은 중국의 압박으로 영토를 잃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가 중앙아시아 지역에 정착해 위구르족이 됐다고 믿는다. 1759년 청나라 건륭제(1711~1799)가 이곳을 중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새로운 강토’라는 뜻의 신장(新疆)이라는 이름도 이때 지어졌다. 19세기 미국이 멕시코 땅이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네바다 등을 빼앗아 국토 면적을 두 배 가까이 늘린 것과 비슷하다. 중국의 신장 병합은 약소 민족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패권국 팽창 경쟁의 결과물이다. 20세기 들어 청이 멸망하고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공하자 위구르인들은 ‘힘의 공백’을 깨닫고 1944년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1949년 신장을 다시 침공했고, 1955년 이 지역을 자치구로 만들었다. 그간 신장은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았음에도 유혈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는 위구르인들의 뿌리 깊은 반중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5일 설명했다. 위구르족은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유목 민족의 후예다. 중국의 주류인 한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다. 1949년 인민해방군이 신장으로 갈 때만 해도 이 지역의 위구르족 비율은 80%에 달했다. 하지만 지금은 50% 밑으로 떨어졌다. 베이징 당국이 의도적으로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지역의 고유성을 말살한다는 것이 위구르인들의 주장이다. 현재 ‘동투르키스탄 망명정부’와 ‘동투르키스탄 이슬람당’ 등 50여개 단체가 분리·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다. ●구소련 해체 뒤 위구르인도 독립 열망 커져 전문가들은 위구르인들이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들이 생겨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도 나라를 세우자’는 열망이 커졌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1997년 신장에서는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SCMP는 “2013년 베이징 톈안먼광장 위구르 차량 돌진 사고와 2014년 중국 윈난성 쿤밍역 테러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중국 지도부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해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를 반영하듯 2017년쯤부터 신장에서 위구르인들이 하나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극적으로 탈출해 국경을 넘어 도망친 이들의 증언과 위성사진으로 확인된 콘크리트 건물들, 내부자가 몰래 제공한 수용소 관련 공식 문서가 외부로 알려졌다. 중국 당국은 강제수용소 논란에 대해 “위구르인들의 직업 교육을 위한 재교육 시설”이라고 반박한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이 지역 위구르인 1100만명 가운데 100만명 정도가 이 시설에 수감된 적이 있다고 추산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위구르족 강경책을 고수할까. 구소련 같은 ‘분리독립 도미노’가 절대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위구르족이 독립하면 54개의 다른 소수민족도 이를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어서다. 만에 하나 위구르족을 독립시킨다고 해도 새 나라는 중국과 ‘앙숙’으로 지낼 가능성이 크다. 신장의 ‘전략적 가치’도 한몫한다. 이곳은 중국에서 석유·천연가스 매장량이 가장 많다. 18세기에 편입된 신장과 시짱(티베트)은 중국 전체 면적의 3분의1이나 된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전했다.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이 신장을 포기할 리 없다.●“美, 中에 나쁜 이미지 심어 추격 막으려 해” 여기에 더해 중국은 ‘서구 세계가 숨은 의도를 갖고 있다’고 여긴다. 겉으로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위구르족 독립운동을 은밀히 지원한다는 판단이다. 중국이 내부 분열로 치명상을 입게 해 ‘대서양 동맹(미국과 유럽)이 이끄는 국제질서’에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다고 본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의 수교 이후 양국 관계를 해칠 정도로 신장 문제에 적극적이진 않았다. 심지어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에 따르면 9·11 테러 직후인 2002년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위구르 독립단체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전 세계 테러 의심자들을 초법적으로 가둔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던 신장 분리주의자들을 중국의 심문관이 만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2010년에는 노르웨이가 중국을 대신해 위구르 독립단체 조직원을 체포했다. 최소한 10년 전까지는 서구 세계가 신장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와 궤를 같이했음을 알 수 있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휩쓸던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에 맞서 중국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안정을 지키길 원했기에 위구르족 인권 문제에 눈감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공조는 ‘비정치인 출신’으로 ‘반중’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깨졌다. 그간의 국제질서 맥락을 알리 없던 그가 신장 문제를 그냥 넘어갈 리 없었던 것 같다. 공교롭게도 위구르족 수용소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때는 트럼프가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2017년이다. ●“나토 등 IS와의 전쟁에 위구르족 병사 이용” 일각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신장 인권 문제로 압박에 나선 것을 두고 ‘미국의 턱밑까지 추격한 중국을 패권 경쟁에서 낙오시키려는 전략’으로 해석한다. 과거 미국이 구소련에 대해 그랬듯 중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를 최대한 나쁘게 만들어 전 세계에 ‘힘이 커지면 안 될 나라’로 각인시키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캐나다 진보성향 매체 ‘글로벌리서치’는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터키 등이 IS 궤멸을 위해 위구르족 수천명을 테러 조직에 잠입시켰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했다. 위구르인들이 영화 ‘무간도’나 ‘신세계’에서처럼 신분을 숨기고 범죄 집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매체는 “세계 주류 언론사나 미국의 정치인들은 (서구 세계가 위구르인을 은밀히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레바논 언론 ‘볼테르 네트워크’도 시리아 매체들을 인용해 “‘IS와의 전쟁’ 임무를 수행한 위구르족 병사 1만 8000여명이 2013년부터 몰래 신장으로 돌아가 여러 형태의 테러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이는 중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나토 비밀 계획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superryu@seoul.co.kr
  • [길섶에서] 춘래불사춘/오일만 논설위원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는 의미로 자주 쓰이는 말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그 의미가 더욱 실감 나곤 했다. ‘춘래불사춘’은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 때문에 유래됐다고 한다.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는데 흉노와의 화친 정책에 의해 흉노왕에게 바쳐진 비운의 여성이다. 원제는 수많은 후궁의 초상화 가운데 가장 흉한 인물을 골랐는데 하필 그녀가 왕소군이었다. 뇌물을 받지 못한 화상이 앙갚음으로 그녀를 추녀로 둔갑시킨 것이다. 황제와의 이별연에서 왕소군을 처음 본 원제는 그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화상의 목을 쳤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소군원(昭君怨)이란 시로 풀어냈다. 흉노 땅에 봄이 왔지만 고향 땅의 봄 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왕소군의 애절한 심정이 담겨 있다. 남녘에서 전해 온 벚꽃 소식이 서울까지 북상한 요즘, 아파트 내 벚꽃들이 하루 새 기지개를 켜는 봄날이다. 매년 이맘때쯤 벚꽃놀이 인파가 꼬리를 물었던 여의도 윤중로에 올해는 인적이 끊겼다. 봄은 왔지만 온전한 봄의 정취를 느낄 여유조차도 없다. 황량한 흉노의 봄을 맞는 왕소군의 마음이 어렴풋이 전해진다. oilm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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