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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규모 ‘물탱크’ 사용한 1600년 전 백제인

    대규모 ‘물탱크’ 사용한 1600년 전 백제인

    1600년 전 백제의 수자원 관리 체계와 토목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최대 규모 목조 집수지가 확인됐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중원문화유산연구소는 1일 충북 충주시 장미산성 일원에서 발굴 조사 성과 공개회를 열고 백제가 충주 일대를 핵심 거점으로 관리했던 양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충주 장미산성은 한강을 따라 충주 분지로 진입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첨예하게 대립한 중원 역사문화권의 대표적인 산성으로 꼽힌다. 연구소는 2022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발굴 조사를 통해 기존 석축 성벽 아래에서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한성백제’ 시기(기원전 18년~475년)의 토성과 생활 공간, 대형 목조 집수지를 차례로 확인했다. 특히 성 안 북쪽 계곡부에서 확인한 목조 집수지는 최대 약 8만 3000ℓ에 이르는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규모로 추정된다. 집수지는 지표수나 지하수를 모아 저장하고 필요에 따라 관리하는 일종의 ‘물탱크’를 말한다. 연구소에 따르면 목조 집수지는 안쪽 한 변의 길이 약 6.7m, 깊이 약 1.8m의 정사각형 형태로, 길이 7m가 넘는 목재를 통째로 가공해 각 벽면에 사용하고 이를 아홉 단으로 맞물려 쌓았다. 연구소 관계자는 “최대 용량의 70% 정도를 실제로 사용한다고 보면 300명이 두 달 반 이상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설명했다. 현재의 석축 성벽 아래에서는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왕성(왕이 머물던 도읍)에서 주로 쓰이고 지방 산성에서는 흔히 발견되지 않던 판축 기법을 확인했다. 중원연구소 관계자는 “백제가 장미산성을 단순한 방어시설을 넘어 중원 지역의 핵심 거점으로 삼아 중앙의 기술과 조직력을 직접 투입했음을 보여주는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 조상의 지혜 ‘당진 면천지’, 하트 모양 벚꽃 명소로 인기

    조상의 지혜 ‘당진 면천지’, 하트 모양 벚꽃 명소로 인기

    연암 박지원이 만든 골정지 벚꽃 만개하트 모양에 담긴 ‘지혜’ 엿볼 수 있어 충남 당진의 전통 수리시설인 면천면의 ‘골정지’가 봄철 벚꽃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7일 당진시에 따르면 골정지는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재임할 때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버려진 연못을 준설해 제방을 쌓아 만든 수리시설이다. 4000평 면적의 이곳에는 40년 수령의 벚나무들이 제방을 따라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어 방문객들에게 꽃에 둘러싸인 듯한 경관을 선사한다. 시는 야간에 다양한 이색 조명으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연못 중간에는 당시 향교 유생들을 교육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한 ‘건곤일초정’ 정자가 있다. 골정지는 하늘에서 볼 때 하트 모양을 띠는 독특한 형태다. 이런 형태에는 조상들의 과학적인 비밀이 담겨 있다. 예로부터 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저수지는 많은 양의 돌을 옮겨올 수가 없어 흙으로만 쌓은 토축 제방이나 나뭇가지, 흙 등을 쌓는 판축형 제방으로 호안을 조성한 경우가 많았다. 폭우 시 직선으로 내려치는 수압으로부터 안전성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껴안는 형태(‿)의 제방을 쌓고 물이 닿는 면적을 크게 해 수압으로부터 제방을 보호했다. 하천의 물이 직접 제방에 부딪히지 않도록 가운데 섬(건곤일초정)을 둬 완충 역할을 하게 했으며, 섬에 부딪힌 유수를 분산시키고자 중간 지점에 곡부(⌒)를 뒀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골정지는 자연스럽게 하트 모양을 가진 저수지의 형태로 보이는 것이다. 시 관계자는 “당진 골정지의 아름다운 벚꽃과 하트 모양의 저수지를 감상하며,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운 제방 축조의 역사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아산 승계산성서 한성백제 흔적 확인…정치·군사 거점 가능성

    아산 승계산성서 한성백제 흔적 확인…정치·군사 거점 가능성

    긴급발굴조사, 성벽·북문지 등 유구 확인동진제 청자와 철제 초두 등 출토 충남 아산 승계산성에서 한성백제(BC 18년~475년) 시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과 당시 최상위 계층이 사용하던 유물이 확인됐다. 12일 아산시에 따르면 국가유산청 지원으로 최근 아산 승계산성에 대한 긴급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 조사에서는 흙을 층층이 다져 쌓는 판축(板築) 기법으로 축조된 토축 성벽을 확인했다. 북문지·건물지·수혈 유구 등 성곽 운영과 관련된 주요 유구도 함께 확인됐다. 이곳에서는 당시 최고 지배층이 사용하던 중국 동진제 청자와 철제 초두(鐵製鐎斗), 철복(鐵鍑), 시유 도기 등이 출토됐다. 시는 고고학적 단서를 토대로 승계산성이 단순한 지방 방어 시설이 아닌, 백제 중앙과 긴밀히 연결된 정치·군사적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조사단은 승계산성이 한성기에 남부 지역으로 진출을 위한 연해 거점이자 기항지 기능을 했고, 이후 웅진기에 고구려 방어를 위한 전략적 거점성으로의 활용 가능성을 추정했다. 백제의 아산 지역 활동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조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이 기록에는 대두성과 탕정성 축성과 이주 정책, 아산 일대에서 사냥 등 백제 초기 활동상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시 관계자는 “추가 정밀 발굴 조사를 추진하고, 국가유산 지정을 목표로 노력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 2000년 전 장인의 손길… 가야 최고급 ‘옻칠 제기’ 등 대거 출토

    2000년 전 장인의 손길… 가야 최고급 ‘옻칠 제기’ 등 대거 출토

    원통형 그릇 등 생활유물들도 발굴 ‘왕궁터 추정’ 김해 봉황동서 나와기원 전후부터 변한 주요 거점 방증물 모아 가두는 집수지도 최초 공개 “단일 생활유적에서 최고급 명품 제기가 최다량 출토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관계자) 2000년 전 장인의 손길이 담긴 최고급 의례용 옻칠 제기 등이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 일대에서 대거 출토됐다. 금관가야 왕궁터로 추정되는 이 지역이 그 이전인 기원 전후부터 중요 거점이었음을 방증하는 유물들이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는 24일 경남 창원의 연구소에서 ‘김해 봉황동 유적’ 언론 공개회를 열고 1~4세기에 제작된 최고급 옻칠 목기 등 출토 유물 300여점을 공개했다. 원삼국시대 변한(금관가야 전신)의 유물들은 대규모 취락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배수로 혹은 도랑으로 쓰인 공간(약 109㎡)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특히 ‘콩 두’(豆) 자를 닮았다고 해서 옻칠 두형 그릇(목이 긴 옻칠 굽다리 접시)이라고 이름이 붙은 의례용 유물 15점이 출토돼 눈길을 끈다. 기존 창원 다호리 등의 출토품과 달리 일체형으로 구성된 데다 목 부분 지름이 1㎝로 기존(3~4㎝)보다 훨씬 가늘고 정교하다. “국내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형태”라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유물 분석 결과 옻칠 그릇은 오리나무류의 목재로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오리나무류는 성장이 빠르고 나쁜 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바닥 부분에 녹로(물레)를 고정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뤄 그릇을 만들 때 돌려 가며 작업하는 ‘회전 깎기’ 기술이 변한 시기부터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부터 이어진 목공예 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 칼집형 칠기와 원통형 그릇, 뚜껑, 항아리와 새 모양 목제품 등 다양한 생활유물들도 함께 출토됐다. 점을 치는 용도로 쓰인 점뼈(복골) 등도 확인돼 변한 시기 의례 관련 일면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날 연구소는 함안 가야리 유적 1구역 현장의 집수지도 최초 공개했다. 아라가야의 왕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현장에서는 앞서 나무틀을 짜고 흙을 다져 성벽을 만드는 판축성벽, 배수로 등이 발굴된 바 있다. 성안의 물을 모아서 가두는 역할을 하는 집수지가 발견된 것은 이달 초다. 이날 조사 시점까지 지름 9.7m, 깊이 1.9m로 추정되는 집수지에 대해 연구소 측은 “가야의 ‘타임캡슐’이 열릴 것”이라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오춘영 연구소장은 “물, 빛, 진흙으로 밀폐되는 집수지 특성상 다양한 유물이 발굴될 수 있다”며 “특히 최초의 가야 목간(문자 기록을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무 조각) 발굴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국가유산청과 한국문화유산협회는 함안에 마련한 영남권역 예담고(庫)도 공개했다. 예담고는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보관·관리하고 활용하기 위해 폐터널이나 폐기숙사 같은 지역 유휴시설에 수장하고 전시나 체험, 교육을 진행하는 공간이다. 영남권역 예담고는 모곡터널을 재활용했다.
  •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왕도 몽촌토성 및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재개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왕도 몽촌토성 및 석촌동 고분군 발굴조사 재개

    한성백제박물관은 동절기 중단했던 백제 한성 왕도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재개한다고 24일 밝혔다. 한성백제박물관은 2013년부터 박물관 산하에 학술조사연구를 전담하는 ‘백제학연구소’를 두고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간의 발굴 조사를 통해 몽촌토성 북문지 일원에서 성 안팎을 잇는 도로와 집자리, 저장시설 등 다양한 시설물을 확인했다. 특히 집수지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 목제 쟁기 4점과 삼국시대 목간, 다양한 동물뼈와 식물씨앗 등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을 다수 발견했다. 올해는 2023년부터 재발굴을 시작한 몽촌토성 동북성벽 조사를 이어 나간다. 지난 조사를 통해 몽촌토성에 적용된 성벽 축조기술인 ‘판축기법’의 흔적이 확인됐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흙을 찧어 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의 실체를 규명하겠다는 목표다. 석촌동 고분군에서는 5호분 발굴 조사가 이어진다. 지난해 조사에서는 기존에 둥근 모양의 흙무지 무덤으로 알려졌던 5호분이 실제로는 네모꼴의 ‘연접식 돌무지 무덤’과 유사한 구조임이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김지연 서울시 한성백제박물관장은 “다양한 발굴조사와 연구를 체계적으로 이어 나가 백제 왕도의 실체를 밝히고, 이를 통해 우리의 찬란한 역사 문화유산을 시민들과 함께 공유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전쟁 한창인데 우크라이나 의원, 가족과 몰디브 휴가 다녀와 수사

    전쟁 한창인데 우크라이나 의원, 가족과 몰디브 휴가 다녀와 수사

    우크라이나 당국이 유리 아리스토프(48) 의원이 가족과 함께 몰디브로 휴가를 다녀왔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고 영국 BBC가 26일(현지시간) 전했다. 러시아와 전쟁이 한창이라 공직자들은 해외 휴가 여행이 금지돼 있으며, 18~60세의 징집 연령대 남성들은 출국하려면 특별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그런데 국가수사청(SBI)과 우크라이나 보안국은 아리스토프 의원이 당국에 허위 신청을 해 특별 허가를 받아낸 것으로 보고 공동 수사에 착수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으면 징역 3년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 SBI는 초기 수사 결과 아리스토프 의원이 이달 중순 몰디브 섬들 가운데 개인 소유 섬인 이타푸시(Ithaafushi) 섬에 부인, 자녀들과 함께 다녀온 것으로 파악됐으며 의회에는 병가 신청서를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인터넷 매체 뉴 보이스 오브 더 우크라이나는 SBI 요원들이 그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결과 몰디브의 입국 스탬프가 찍힌 여권들을 압수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또 그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생선과 씨푸드 사업을 함께 했던 사업가 출신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폴란드에 사흘 일정의 출장을 간다고 하고 지난달 5일 출국해 지난 22일 귀국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매체가 몰디브에서 촬영한 그의 사진을 입수해 보도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는 지난 10일 키이우의 개인 병원에서 뗀 진단서를 병가 신청 서류에 첨부해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가 기한은 원래 19일이 마지막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5일 국익을 배신하는 행위는 분노를 불러올 것이라고 공직자들에게 으름장을 놨던 뒤라 아리스토프 의원의 거짓 출국이 사실로 확인되면 엄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리 전사들, 우리 국민들은 승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일, 불가능한 일 모두를 해내 사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늘 보고 느껴왔는데 우크라이나의 국익 대신 어떤 내부 배신, 어떤 해변(휴가), 어떤 개인적 향락도 강렬한 분노를 끌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도 아리스토프 의원의 일탈을 인지하고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프 의원은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루슬란 스테판축 의회 의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렸다. 그의 사직 여부는 다음 회기에 논의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정부 각료 상당수를 물갈이하자 고위 관료들이 연초에 사임한 일이 있었다. 정부가 반부패 드라이브를 거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 ‘파주 육계토성’ 드디어 정체 밝혔다… 백제 초기 유적 확인

    ‘파주 육계토성’ 드디어 정체 밝혔다… 백제 초기 유적 확인

    삼국시대 유적으로 알려진 ‘파주 육계토성’이 백제 초기 유적인 것으로 파악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문화재청은 26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지난 3월부터 진행한 파주 육계토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해당 토성이 백제 초기에 축조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파주 육계토성은 조선시대 문헌 기록 및 일제강점기 지도를 통해 옛 성터라는 것이 알려지고 일부 지점의 발굴조사로 백제토기와 고구려토기가 확인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세력, 규모와 구조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올해 육계토성 동쪽 성벽 및 내측 지역에 대한 조사에서 육계토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가 백제 초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백제시대 토기 편도 출토됐고,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토성 축조의 중심 연대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인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한성은 백제의 수도였다. 이번 조사 과정에서 백제 초기 성곽의 독특한 축조 방법도 확인했다. 육계토성 동쪽 성벽의 일부 구간은 풍납토성과 유사하게 사각형의 틀을 짠 뒤 틀 안에 일정한 두께의 흙을 교대로 쌓아 올리는 식의 판축 기법이 쓰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기법은 동북 모서리에서 남쪽으로 약 150m 떨어진 ‘동문지’ 추정 지점에서부터 북쪽으로 18m가량 확인됐다. 흙을 돋우어 쌓는 성토 기법으로 축조한 부분도 파악됐다. 판축 구간에서 북쪽으로 약 32m가 조사된 이 구간에서는 바깥쪽으로 흙을 높게 쌓아 올린 후에 다시 안쪽으로 흙을 채워 만드는 방식이 활용됐다. 판축 기법을 사용한 것은 풍납토성과 유사하면서도 판축과 성토 기법을 함께 사용한 것은 풍납토성과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다. 27일 열리는 현장 설명회에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 삼표산업 반환 부지서 ‘풍납토성 서쪽 성벽’ 흔적 발견

    삼표산업 반환 부지서 ‘풍납토성 서쪽 성벽’ 흔적 발견

    서울 풍납토성 구역 삼표산업 풍납공장 부지 가운데 지난해 일부 반환된 땅에서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 흔적이 발견됐다.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와 송파구는 지난해 12월부터 삼표산업 반환 부지인 풍납동 305-14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풍납토성 서성벽의 잔존을 확인했다고 4일 밝혔다. 풍납토성은 백제 한성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왕성으로 확실시된다. 레미콘 업체인 삼표산업은 1978년부터 이곳에서 공장을 운영했는데, 대법원이 2019년 풍납토성 복원과 정비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공장 부지를 옮기도록 했다. 이에 삼표산업은 서울시·송파구와 소송을 거쳐 지난해 공장 면적의 30%인 6076㎡를 반환했다. 나머지 70% 부지에 대한 3건의 소송이 진행 중인데 이번 조사 결과로 이 역시 반환 가능성이 높아졌다. 연구소는 “길이나 높이 등 정확한 규모는 더 파악해야 하지만 성벽의 구조, 형태, 진행 방향, 축조 기법 등이 기존의 서성벽과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조사에서 서성벽 지구가 남성벽, 삼표산업 공장을 잇는 지점이라는 사실이 규명됐기 때문에 나머지 부지에도 서성벽이 잔존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서성벽은 중심 토루(흙을 다져 쌓은 시설물)에 다른 토루를 덧대어 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 목재 등으로 사각 틀을 짠 뒤 그 안에 일정한 두께의 흙을 쌓는 판축 기법을 사용하고, 성벽 안쪽은 강돌과 깬돌로 마무리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조사는 공장 부지 전체 반환을 대비한 예비 조사였는데, 공장 하부에 남은 서성벽 상태가 주변보다 더 좋은 듯하다”며 “조사를 확대하면 다양한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파구는 공장이 이전되는 대로 문화재 정밀발굴조사와 정비작업을 본격 실시할 계획이다. 박성수 송파구청장은 “500년 백제 왕도의 핵심 문화재 보존과 지역 주민의 정주성 향상을 위해 공장 전체 이전을 조속히 이뤄 내겠다”고 말했다.
  • 부소산성에 백제 성벽 서문 터 추정 시설이…

    부소산성에 백제 성벽 서문 터 추정 시설이…

    충남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 성벽과 서문 터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부여군과 백제고도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부여 부소산성(사적 제5호) 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백제 성벽과 서문 터 추정 시설, 통일신라부터 고려에 걸쳐 쌓은 성벽을 발견했다고 23일 밝혔다.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왕궁으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관북리 유적 북쪽에 있고, 왕실의 후원이자 유사시 도피처로 활용됐다.문화재청이 지난해부터 진행한 발굴조사에서 서성벽 성문 흔적과 백제 ‘포곡식 성’(계곡을 감싸도록 성벽을 쌓은 성)의 동선, 배수 및 출입 관련 시설이 확인됐다. 또 부소산 남동쪽 정상부를 중심으로 형성된 통일신라 ‘테뫼식 성’(정상부를 둘러 쌓은 성)의 축조 방식과 시기마다 달라지는 성벽의 변화 양상을 파악했다. 부소산성 백제 포곡식 성은 기본적으로 판축(흙을 켜켜이 다져 올리는 축조법)으로 축조됐다. 이외에 판축 외벽만 돌로 쌓은 양상, 두 겹 이상 판축한 모습, 내벽 경계에 석재를 이용해 배수로를 설치한 방식 등이 확인됐다. 서성벽 구간은 부소산성 성벽 가운데 중심 토루(흙을 다져 쌓아 올린 성벽)가 가장 견고하고 반듯한 상태로 확인됐다. 성벽의 판축층 너비는 약 4.8∼4.9m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최대 4.4m 정도다.추정 서문 터 지점은 부소산 남쪽 기슭의 추정 사비 왕궁지에서 백제 사찰 터인 서복사지를 거쳐 성 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해당한다. 문화재청은 “암거 상부구조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 주변으로 ‘문지공석’(성문 문짝 고정용 기둥을 끼우려고 구멍을 낸 돌), 원형 초석, 잘 다듬은 대형 가공석들이 산재해 출입 목적의 구조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백제와 통일신라 성벽이 연접한 지점에서는 백제 성벽 위로 통일신라 테뫼식 성벽이 축조됐다. 성의 외벽은 기존 백제 성벽을 고쳐 사용했지만, 내벽은 백제 성벽 위에 기단석축을 덧붙여 만들었다. 성벽 축성과정 중 유입된 ‘회창 7년’(會昌七年)이란 새겨진 명문 기와가 출토돼 성벽 조성 시기는 9세기 중반으로 추정됐다. 회창(會昌)은 당나라 무종 때 연호로, 회창 7년은 847년을 말한다. 문화재청은 “이번 서성벽과 추정 서문 터 확인을 통해 성벽의 실체와 축성 기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며 “이런 성과는 최근 한성기와 웅진기 왕성인 풍납토성, 몽촌토성, 공산성의 최근 발굴 성과와 함께 백제 중앙의 수준 높은 축성 기술과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굴 현장을 문화재청과 부여군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함안 가야리 유적서 ‘판축’ 토성 목조 구조물 첫 확인

    함안 가야리 유적서 ‘판축’ 토성 목조 구조물 첫 확인

    경남 함안 가야리 유적 조사에서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쌓는 건축방식인 ‘판축’ 토성을 축조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목조 구조물과 이를 사용한 축성기술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가야리 유적이 아라가야의 왕궁이었을 가능성도 한층 커졌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함안 가야리 유적(사적 제554호) 발굴 조사에서 5세기 말∼6세기 초 조성한 것으로 짐작하는 토성벽에서 지름 10∼15㎝, 길이 약 4.8m인 목재 8개가 60∼80㎝ 간격으로 설치된 사실을 파악했다고 30일 밝혔다. 성벽을 가로질러 놓은 이 횡장목은 길이가 약 6m에 이르는 중심 지지물인 토루의 약 60∼70㎝ 깊이에 있다. 토루 내외곽에 횡장목과 유사한 간격으로 열을 지어 박은 나무기둥인 영정주 흔적도 나왔다. 연구소는 또 중심 토루에서 성토방법이 확연하게 차이 나는 축조구분선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성벽을 구간별로 나눠 축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축조구분선 바로 서편에 점성이 높고 고운 점질토를 달고라는 기구로 두드려 다진 지름 8~10㎝ 흔적도 나왔다. 토성 규모는 현재 조사구역 내에 한정 지었을 때 전체 높이 약 8.5m, 폭 20m 내외다. 이 일대는 1587년 제작한 조선시대 읍지 ‘함주지’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했던 곳으로, 지금까지 실질적인 발굴 조사를 하지 않아 실체 확인이 어려웠다. 연구소 측은 “함안 가야리가 최근 사적으로 지정되고, 이번에 의미 있는 발굴 결과까지 나온 만큼 기초조사와 중장기 발굴조사 계획을 수립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가야유적 잇단 ‘국가사적’ 지정… 잠든 1600년 역사가 깨어난다

    가야유적 잇단 ‘국가사적’ 지정… 잠든 1600년 역사가 깨어난다

    경남 곳곳에 1600년 동안 묻혀 있던 가야유적이 경남도와 해당 시군, 연구기관 등의 적극적인 발굴·연구 조사에 힘입어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잇따라 지정되고 있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발굴·복원·관리비 70%가 국비로 지원돼 안정적으로 복원·관리할 수 있다. 현재 경남지역 가야유적 544곳 가운데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창녕군 계성 고분군 등 모두 29곳이다. 특히 국가사적 고분 가운데 가치가 높은 김해 대성동, 함안 말이산, 창녕 교동·송현동, 고성 송학동, 합천 옥전 고분군 등 5곳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한다. 도는 합천군 삼가 고분군과 성산 토성을 비롯해 김해시 원지리 고분군, 함안 남문외 고분군, 창녕 영산 고분군도 국가사적 지정을 추진한다.●함안 가야리 유적 국가사적 지정 예고 경남도와 함안군은 함안군 가야읍의 ‘함안 가야리 유적’이 지난달 26일 문화재청 심의를 통과했다고 9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30일간 예고를 거쳐 의견을 수렴한 뒤 다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해 사적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발굴조사, 가야시대 지배층 생활유적으로 확인됐다. 남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신음천과 광정천이 합류하는 일대 해발 45~54m 구릉에 있다. 그동안 5차례 지표조사로 토성 범위만 대략 확인됐다가 지난해 4월 경작지 조성 과정에서 토성벽 일부가 우연히 발견돼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했다. 조사 결과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한 토성과 목책(울타리), 14동의 건물지 등이 확인됐다. 건물지 안에서 쇠화살촉과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 등이 나와 군사 성격 시설임이 밝혀졌다. 구릉 북쪽 가장자리에서 토성과 고상건물(바닥을 땅 위나 물 위에 높게 지은 건물), 망루 등도 확인됐다. 아라가야 전성기인 5세기에 조성돼 6세기 멸망 때까지 사용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가야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판축토성(판자를 양쪽에 대고 흙을 다져 성을 쌓는 건축방식) 구조물이 확인돼 우리나라 고대토성 축조수법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됐다. 전문가들은 토성의 상태가 좋고 주변 가야 유적과 연계 경관도 잘 보존돼 아라가야 중심 왕도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유적이라고 평가한다. 이 유적은 조선시대 함안지리지인 함주지(1587년 편찬) 등 각종 고문헌에 ‘가야국의 옛 도읍터’ 또는 ‘옛 나라의 터’ 등으로 기록돼 있다. 지금도 주변에 남문외, 대문천 등 왕성이나 왕궁과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어 아라가야 왕궁지로 전해 내려온 곳이다. 토성 주변에 아라가야 최대 고분군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과 남문외 고분군(도 기념물 제226호), 가야 최대 규모 굴립주건물(기둥을 세워 만든 건물)인 ‘당산유적’ 등 주요 가야유적들이 있어 가야읍 일대가 아라가야 왕도였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발굴된 토성 구간은 왕궁을 보호하기 위한 성곽과 군사시설 일부다. 도와 군은 앞으로 발굴조사와 심화연구를 더 진행해 아라가야 사람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가야사 복원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창녕 계성 고총 고분군 국가사적 지정 앞서 문화재청은 창녕군 계성면에 있는 계성 고분군을 지난 2월 국가사적 제547호로 지정했다. 계성 고분군은 영축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사면부에 형성된 대규모 고총 고분군이다. 서북쪽으로 계성천이 흐르는 낮은 구릉에 봉분 261기가 분포해 있다. 이 고분군 축조집단은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을 조성한 세력 이전 시기인 비화가야 초기 중심세력으로 확인됐다. 무덤 구조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이다. 돌덧널 상부 덮개는 나무로 만들어 덧널무덤 단계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변해 가는 양상을 잘 보여 준다. 고분군에서 창녕양식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와 긴목항아리, 통모양그릇받침 등의 토기류, 금동관편, 금제 귀걸이와 은제 허리띠장식 등 장신구류, 말띠드리개(행엽) 및 발걸이(등자), 말안장 꾸미개(안교) 등 마구류, 무기류 등이 많이 출토됐다. 학계에 따르면 계성 고분군은 5~7세기에 걸쳐 장기간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5세기에 집중적으로 대형 고총 고분이 축조돼 창녕 비화가야 성립과 가야에서 신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합천 삼가 고분군·성산토성 국가사적 신청 도는 합천군 삼가면에 있는 도 기념물인 삼가 고분군과 합천군 쌍책면 성산토성도 지난 4월과 8월 문화재청에 사적 지정을 신청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7월 현지조사한 뒤 조사 및 자료 보완을 요청했다. 도와 합천군은 내년 2월쯤 추가 발굴 조사와 학술대회를 한 뒤 보완 자료를 제출할 예정이다. 삼가 고분군은 발굴 조사 결과 1~6세기 소가야권 가야집단이 조성한 고분군으로 대형 봉분 328기가 확인됐다. 아라가야 양식 철기류 등이 출토돼 당시 남강을 통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보여 준다. 무덤은 목관묘에서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로 구조 변화가 확인된다. 24-1호분 안에서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짧은목항아리 등 토기류와 각종 말갖춤새(마구), 쇠창과 쇠도끼를 비롯한 무기류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쌍책면 성산리에 있는 성산토성은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에서 가야시대 다라국의 왕성으로, 옥전고분군을 조성한 최고 지배층의 5~6세기 취락유적 중심지로 조사됐다. 토성과 석성으로 이뤄진 성곽과 건물지, 제사유구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됐다. 유적 훼손이 적어 가야왕성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국가사적 지정 심의를 위해 다음달 현지조사한다. 박정혜 경남도 가야사복원 주무관은 “함안 남문외 고분군은 빠르면 올해 안에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하고 김해 원지리 고분군과 창녕 영산 고분군 등 2개 도지정문화재는 내년 하반기에 국가사적 지정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함안 남문외 고분군은 말이산 고분군과 가야리 유적 사이에 위치한 아라가야 최고지배층 고분군으로 43기의 봉분 분포가 확인됐다. 길이 7m 대형 석실묘가 발굴되고 가야·신라·백제 계통 유물도 출토됐다. 도와 함안군은 사적 신청에 앞서 오는 11월까지 중소형 석곽묘 10기 등을 추가 발굴조사할 예정이다.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고분군은 후기 가야 김해지역 최대 고총 고분군으로 조사됐다. 금관가야 최고 지배층 고총 고분군으로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김해지역 최대 길이(7.3m) 가야석실묘와 각종 유물 265점이 발굴됐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증명하는 자라모양 토기병 2점이 나왔다. 도와 시는 이달부터 M5호분 발굴조사를 할 계획이다. 창녕군 영산면에 있는 영산고분군은 비화가야에서 신라로 넘어가는 사회상을 보여 주는 대표 유적으로 꼽힌다. 연말까지 발굴 조사한 뒤 내년 11월 국가사적 신청을 할 계획이다. 도는 학술 가치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묻힌 가야유적이 국가문화재로 승격될 수 있도록 발굴·조사·연구를 지원하는 사업을 계속 추진할 계획이다. 류명현 문화관광체육국장은 “발굴 조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도내 가야유적이 발굴 조사와 연구를 통해 국가사적으로 승격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남재우 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가야 각국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으로 편중됐던 발굴 조사가 평면적으로 확대돼야 하고 훼손이 심한 유적은 학술·발굴을 통해 성격을 규명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아라가야 중심지 ‘함안 가야리 유적’ 사적 지정예고

    아라가야 중심지 ‘함안 가야리 유적’ 사적 지정예고

    문화재청은 아라가야 중심지로 추정되는 경남 함안군 ‘함안 가야리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고 26일 밝혔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남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신음천과 광정천이 합류하는 지점 인근 구릉에 있다. 주변에 말이산 고분군, 남문외 고분군, 선왕 고분군과 길이 39m, 폭 15.9m에 이르는 가야 최대 규모 굴립주 건물터 ‘당산 유적’이 자리한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해발 45~54m 구릉부에 사면을 활용해 토성을 축조하고, 내부에 고상건물과 망루 등을 지었다. 고상건물은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 바닥을 만든 건물을 가리킨다. 함안 가야리 유적은 앞서 조선시대 읍지(邑誌)인 ‘함주지’(咸州誌)와 17세기 ‘동국여지지’ 등 고문헌과 일제강점기 고적조사 보고서에서 아라가야 중심지로 지목됐다. 문화재청은 2013년부터 지표조사를 거쳐 대략적인 범위를 파악하고, 이번 정부가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를 국정 과제로 선정한 다음해인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고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앞선 조사에서 토성과 울타리 시설, 대규모 고상건물을 비롯해 건물터 14동을 확인했다. 건물터 안에서는 무기인 쇠 화살촉과 작은 칼, 쇠도끼, 비늘갑옷이 출토됐다. 유적 조성 시기는 아라가야 전성기인 5∼6세기로 추정된다. 특히 올해 조사에서는 가야 문화권에서 최초로 흙을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아 올인 판축토성(板築土城) 구조물을 찾았다. 문화재청은 앞서 가야 유적인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창녕 계성 고분군을 사적으로 지정했고, 장수 동촌리 고분군은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공주 송산리 고분군 30년 만에 재조사 완료… 3단 석축시설 성격 규명 못해

    공주 송산리 고분군 30년 만에 재조사 완료… 3단 석축시설 성격 규명 못해

    백제 웅진도읍기 왕릉인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최정상부(D지구)의 계단식 석축 시설이 제사와 관련된 시설일 가능성이 커졌다. 1988년 시굴조사 이후 30년 만에 발굴조사를 시행했지만 시설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 문화재청은 공주시와 함께 백제 무령왕릉이 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석축 시설 2곳에 대해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5일 공개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지난 6월부터 능선 하단부 A지구와 고분군의 최정상부 D지구를 발굴조사했다. D지구에서는 폭 1단 15m, 2단 11.4m, 3단 6.92m, 전체 높이 3.92m의 3단 석축 시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30년 전에 밝혀졌다. 이에 대해 적석총(돌무지무덤)설, 석탑설 등이 제기됐다. 30년 만에 조사를 재개했지만 이번에도 시신을 두는 매장 주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남쪽에서 나무기둥을 세운 구멍이 발견돼 제사 관련 시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원 측은 밝혔다. 석축 하부는 흙을 켜켜이 다져 올리는 판축 기법을, 상부는 기반층을 깎아내고 그 위에 다시 흙을 쌓는 삭토 기법을 쓴 것으로 파악됐다. 연구원은 유구(건물의 자취) 주변에서 쇠못이 출토돼 적석총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한편 A지구에서는 20.5m 가량의 네모난 석축시설과 함께 그 중앙에서 가로 5.2m, 세로 2.1m, 깊이 3.1m의 거대한 구덩이를 확인했다. 석축 남쪽에서는 중앙부 구덩이보다 작은 구덩이가 발견됐다. 연구원 관계자는 “남쪽 구덩이를 폐기한 뒤 중앙부 구덩이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들 구덩이에는 신성 구역임을 표시하는 시설이 설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전남 장흥읍성 터에서 백제·고려시대 유물 발굴

    전남 장흥읍성 터에서 백제·고려시대 유물 발굴

    전남 장흥읍성 발굴조사에서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장흥읍성은 지난해 전라남도 매장문화재 발굴조사 지역으로 확정됐다. 발굴조사는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에서 지난 6월 18일부터 시작했다. 장흥읍 동동리 산 6-1번지에 위치한 조사구역은 사전지표조사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됐다. 판축 다짐층과 수혈유구, 주공 등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유물의 시대적 폭도 넓은 것으로 알려졌다. 발굴에 참여한 전문가는 “백제 고마미지현의 중심지가 이 일대로 판단된다”며 “백제 유적이 이 지역에서 확인돼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에 부합한 중요한 장소다”고 밝혔다.기와 조성기법(문승문, 포목문)은 전남 동부권인 순천시와 여수시·광양시에서 출토되는 백제시대 기와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시대 유적에서 보이는 승문제작방법과 공통된 제작기법을 보여 시기는 7세기 내외로 추정되고 있다. 장흥군은 지난 12일 장흥읍성 발굴조사 현장설명회를 열고 이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군 관계자는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주변 수목제거 등 유적 정비를 통해 문화재로 지정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장흥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러시아 연해주에서 서울 풍납토성처럼 축조한 옛 발해 성터 발견

    러시아 연해주에서 서울 풍납토성처럼 축조한 옛 발해 성터 발견

    러시아 연해주 남서부에 자리한 옛 발해 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인 서울 풍납토성과 같은 방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함께 지난 8~9월 연해주 남서부 라즈돌나야 강가에 자리한 스타로레첸스코예 발해 평지성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은 발해의 지방행정구역 15부 중 솔빈부(率濱府)의 옛 땅에 있는 평지성으로, 서쪽과 북쪽, 동쪽으로 라즈돌나야 강(옛 이름 솔빈강)이 흘러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역할을 하고 있으며 150m 길이의 남벽과 30m 길이의 짧은 서벽이 남아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스타로레첸스코예 유적 성벽의 전체 규모와 축조 방식을 확인했다. 성벽은 강자갈과 점토로 기초를 다진 후 중심부를 사다리꼴 모양으로 판축기법을 사용해 쌓고 다시 흙으로 덧쌓아 축조됐다. 중심부는 점토층과 모래층을 번갈아 가며 20겹 정도를 쌓았고, 판축한 점토층의 윗면에서는 목봉(木棒) 등으로 다진 흔적을 확인했다. 판축은 판자를 양쪽에 대고 그 사이에 흙을 단단하게 다져 쌓는 건축방식으로, 서울 풍납토성도 같은 방식으로 축조됐다. 강 때문에 훼손되고 있는 성 내부 서편에서는 강돌을 이용한 지상 구조물의 흔적과 함께 구덩이를 판 후 돌을 쌓아 벽을 축조한 지하식 저장고가 확인됐다. 저장고 내부에서는 발해 토기, 동물 뼈, 물고기 뼈와 비늘, 철제 손칼 등이 출토됐다. 특히 원통형인 다리 세 개가 흑회색 작은 항아리의 편평한 바닥에 부착된 삼족기(三足器)가 발견됐다. 삼족기는 발해 유물 중에서는 거의 출토되지 않는 유물로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시 인근)에서 2점이 출토된 적이 있다. 연구소 측은 “유적이 중국 동북지역에서 연해주로 흐르는 강가에 위치하고 다수의 저장용 구덩이가 성 내부에 있는 점, 삼족기와 원통형 기대 조각 등 고급 기종이 확인되는 점 등으로 볼 때 조사지역이 발해의 중심부에서 연해주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데 중요한 물류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아라가야 왕성 실체 첫 확인

    아라가야 왕성 실체 첫 확인

    금관가야·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중심세력을 형성했던 아라가야 왕성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 함안 가야리 289 일원에서 지난달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왕성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7일 밝혔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된 토성과 목책(木柵·울타리) 시설,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 5~6세기 각종 토기 조각들이 나왔다. 이 일대는 1587년에 제작된 조선시대 읍지인 ‘함주지’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됐던 곳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실질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번에 확인된 토성 유적은 가야권역에서 발견된 동 시기 유적들과 비교할 때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축조기법이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성의 전체 높이는 8.5m, 상부 폭은 20∼40m 내외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동 시기 가야 토성은 합천 성산리 토성, 양산 순지리 토성, 김해 봉황 토성 등 총 세 곳인데, 이 토성들의 높이가 대부분 4m 미만인 것으로 볼 때 이번에 확인된 토성은 확실히 큰 편”이라고 설명했다. 흙을 쌓는 과정에서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축조 공정마다 나무기둥을 설치하고 흙을 쌓아 올리는 정교한 판축 기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성벽 상부에는 2열의 나무 기둥이 확인되는데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추정된다. 특히 토성 안에서 발견된 구덩이가 이목을 끈다. 구덩이 내부에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고, 주로 고분을 비롯한 의례 공간에서 출토되는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와 손잡이가 달린 주발, 붉은색의 연질토기가 발견됐다. 강 연구관은 “이 구덩이는 가야 문화권에서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은 유적”이라면서 “거주 공간에서 제사용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이 공간이 의례와 관련한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번에 나온 토성은 아라가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향후 추가 조사를 통해 아라가야의 정치·경제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무왕·선화공주 무덤일까… 익산 쌍릉서 인골 나무상자 발견

    무왕·선화공주 무덤일까… 익산 쌍릉서 인골 나무상자 발견

    전북 익산에 위치한 백제 고분인 쌍릉(雙陵·사적 제87호) 대왕릉 내부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 상자가 나왔다. 쌍릉은 향가 ‘서동요’에 등장하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과 그의 부인인 선화공주가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무덤이다. 대왕릉과 소왕릉이 나란히 조성돼 있는데 각각 무왕과 선화공주의 것으로 알려졌다.2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청과 익산시가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8월부터 발굴 중인 쌍릉 대왕릉의 현실(시신을 넣은 관이 안치된 방)에서 인골이 있는 상자가 발견됐다. 이 상자는 1917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조사했을 당시 발견된 피장자의 인골을 수습해 봉안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직경 약 25m, 높이 5m 내외의 대왕릉은 백제 사비도읍기의 전형적인 굴식돌방무덤으로, 입구가 중앙에 있으며 현실 모양은 육각형으로 나타났다. 현실 크기는 길이 378㎝, 너비 176㎝, 높이 225㎝로, 이는 백제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현실이 가장 큰 무덤인 동하총보다 큰 것이다. 현실 조성 과정에서 대형 화강암을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 사용하고 사비도읍기 백제 왕릉급 무덤 중에는 처음으로 흙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판축 기법을 이용해 봉분을 만든 점도 밝혀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대왕릉은 그 규모나 구조 면에서 왕릉급 무덤이 확실하다”면서도 “무왕과 선화공주의 인골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남원 유곡·두락리 고분군 호남 가야유적 중 첫 사적

    호남 가야유적 중 첫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나왔다. 정부가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를 국정과제로 선정한 이후 처음이다. 문화재청은 전북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와 두락리 일원에 있는 봉토분 40여기를 묶은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42호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호남 지역에 분포한 가야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된 첫 사례다. 그간 정부와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해 사실상 방치돼 있었던 호남 가야 유적에 대한 이번 조치를 계기로 조사·연구도 활발해질 것으로 학계는 기대한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은 지리산의 한 줄기인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는 언덕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가야와 백제 무덤으로 이 중엔 지름 20m가 넘는 대형 무덤도 12기 포함돼 있다. 1989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가야계 수혈식 석곽묘(구덩식 돌덧널무덤)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 함께 확인됐다. 특히 32호분으로 명명된 타원형 무덤에서는 길이 7.3m, 너비 1.3m, 깊이 1.8m 크기의 대형 수혈식 석곽묘가 발견됐는데 과거 백제 왕릉급 무덤에서 나오는 청동 거울과 금동신발 조각 등 최고급 유물이 출토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봉분을 견고히 하기 위해 흙을 얇은 판 모양으로 번갈아 가며 켜켜이 다져 올리는 판축기법으로 쌓고, 석곽을 축조할 때 나무기둥을 이용하는 등 당시 무덤 축조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드러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5~6세기 전북 동부 지역의 고대사와 고대문화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350년 넘은 ‘허목’의 흔적… 그의 서체 닮은 ‘관동팔경’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350년 넘은 ‘허목’의 흔적… 그의 서체 닮은 ‘관동팔경’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라면 조선 후기의 사상과 문화를 이끌어 간 인물의 하나다. 정치적으로는 우암 송시열과 예학(禮學)을 놓고 논쟁했던 남인의 핵심이었다. 산림(山林)에 머물던 시절 중국 상고시대 문자를 바탕으로 특유의 전서체(篆書體) 글씨를 완성했다. 세상은 이를 미전(眉篆)이라 부른다.미수의 집안은 광해군 시절 정권을 잡았다가 인조반정으로 풍비박산이 나다시피한 북인이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의 뜻을 접은 그는 경기도 광주 자봉산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했던 미수가 퇴계와 율곡에서 비롯된 조선성리학으로 무장한 서인과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 우리 고유의 세계관과 정신세계의 가치를 인식한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역사서 ‘동사’(東事)를 편찬하면서 단군설화를 그대로 담아 서인들로부터 황탄비속(荒誕鄙俗)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미수가 처음 벼슬길에 나선 것은 56세가 된 1650년(효종 1)이었다. ‘박학능문(博學能文)하며 그 뜻이 고상하다’는 추천에 따라 정릉참봉에 제수됐다. 어머니가 “선인께서 아들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하자 관직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된 1659년에는 송시열이 주도한 북벌론을 두고 ‘실현불가능한 정책으로 백성의 고통만 가중시킨다며 군사를 일으키는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올렸다. 같은 해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놓고 이견이 대두됐는데 허목을 비롯한 남인은 1년으로 해야 한다는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에 맞서 3년설을 주장하다가 패배했다.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미수는 이 일로 이듬해 10월 강원도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중앙정치에서는 쓴잔을 들이켰지만 목민관(牧民官)으로 이상을 펴 볼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인 듯 하다. 미수는 삼척부사로 1662년 8월까지 재임했다. 당대 문인 동명 정두경은 ‘허목을 삼척에 보내며’(送許三陟)라는 시로 그를 위로했다. ‘대관령 동북에 이름난 고을 있으니 /삼척에 흐르는 물이 오십천이네 / 부사께서 세속을 벗어난 흥취가 많으신 것을 잘 아니 /밤이 되면 밝은 달이 죽서루 위에 뜨리라’ 경치 좋은 고을에서 풍광을 즐기며 때는 기다리라’는 덕담이었지만, 미수의 삼척 시절은 치열했다. 350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지만 삼척 곳곳에는 미수의 흔적이 남아있다. 미수는 경기도 연천이 고향으로 무덤도 그곳에 있다. 그럼에도 허목은 지금도 명실상부하게 ‘삼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삼척시립박물관에도 미수의 역사는 제1전시실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을 정도다.미수를 따라가는 삼척 기행은 죽서루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있다. 동명의 시에서 보듯 오십천과 죽서루는 삼척을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죽서루는 삼척부의 객사(客舍)였던 진주관(眞珠館)의 부속건물이었다. 진주는 삼척의 옛 이름이다. 객사란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리들의 숙소다. 객사의 부속 누각은 이들을 접대하는 연회장이었다. 주변에서는 발굴조사로 진주관과 수령의 업무공간인 동헌(東軒), 수령과 가족의 거처인 내아(內衙)를 비롯한 삼척도호부의 실체가 드러났다. 행정구역으로는 삼척시 성내동이다. 성(城) 내부라는 땅이름처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쌓은 판축토성과 조선시대 축조한 석성의 흔적도 확인됐다. 삼척시는 일대를 정비·복원해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죽서루는 오십천의 물길 방향에 맞게 지은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 집이다. 일찌감치 유적공원으로 조성된 입구로 들어서면 죽서루 동북면에 ‘竹西樓’(죽서루)와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고 새긴 현판이 보인다. 삼척부사를 지낸 정묵재 이성조가 1711년(숙종 37) 쓴 글씨다.내부를 들여다보면 ‘第一溪亭’(제일계정)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미수의 글씨다. 과하지 않게 흘려 쓰는 묘미가 있는 행초체다. 가만히 보면 정묵재의 현판 역시 허목의 필적을 닮아 있다. 선인(先人)을 존중하는 것은 물론 분위기의 일관성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니었을까. 두 사람 모두 삼척부사 시절 죽서루를 중수했기에 현판 글씨도 남길 수 있었다. 미수의 체취는 삼척항이 내려다보이는 육향산(六香山)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높이가 25m에 불과하지만 올라가는 길은 제법 가파르다. 삼척군지인 ‘진주지’(眞珠誌)는 “예전에는 죽관도(竹串島)라 했다”고 적었다. 과거에는 정라진 앞바다의 작은 섬으로 동해안 일대와 울릉도·독도를 관할하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산 위에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 육향정(六香亭)이 있다. 척주동해비는 미수가 조수(潮水)의 피해를 막고자 세웠다. 육향산 동쪽 만리도에 있었으나 풍랑으로 파손되자 1709년(숙종 35)에 삼척부사 홍만기가 다시 새겼고 이듬해 후임 박내정이 죽관도 기슭으로 옮겼다. 높이 170.5㎝의 척주동해비는 당당하다. 검은색 비신에 새겨진 전서체 글씨는 문외한의 눈에도 예사롭지 않다. 미수 글씨의 대표작이다. 바다가 심술을 부리지 않도록 동해를 예찬하는 노래를 지어 새겼다. 실제로 바다가 잠잠해졌는지는 알 수 없어도 바닷가 고을 백성을 위로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2자에 이르는 척주동해비의 동해송(東海頌)은 제문(祭文)을 닮았는데 동해신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고하는 일종의 축문이라고 한다. 한글로 해석한 것도 이해는 쉽지 않지만 신화의 한 장면인 양 신이(神異)한 표현으로 가득하다. 평수토찬비는 황하의 홍수를 다스려 대우치수(大禹治水)라는 전설을 남긴 중국 우제(禹帝)의 비석 글씨에서 미수가 48자를 골라 나무판에 새겼던 것을 1904년(고종 41) 다시 돌에 조각한 것이다. 치산치수(治山治水)의 의미라니 역할은 척주동해비와 다르지 않다. 보호각 현판이 ‘禹篆閣’(우전각)인 것은 우제의 전서 글씨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겠다.육향산의 동남쪽에는 미수사(眉叟祠)가 있다. 허목을 기리는 사당으로 근년에 지은 것이다 사당 앞 육향산을 감싸고 도는 도로 이름은 허목길이다. 육향산으로 오르는 동북쪽의 돌계단 한쪽에는 7개의 돌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척주동해비가 처음 죽관도로 옮겨졌을 당시 세워졌던 장소라고 한다. 동해비는 1969년 지금의 장소에 자리잡았다. 목민관을 기리는 수많은 선정비가 남아있지만, 그들이 모두 선정을 베푼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미수의 2년 남짓한 삼척부사 시절도 그야말로 애민(愛民)으로 점철됐는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고장에는 허목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설화가 전하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허목 설화’의 주제를 ‘세금 없는 고을을 만들다’, ‘민심을 안정시킨 척주동해비’, ‘원한을 풀어준 명판관’, ‘상속 문제를 바르게 처결하다’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적어도 삼척 사람들에게 허목이 ‘남다른 지방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미탄사지 삼층석탑 ‘보물’ 된다

    미탄사지 삼층석탑 ‘보물’ 된다

    문화재청은 10일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10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경주 황룡사지 남쪽 평야에 홀로 서 있는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오랫동안 일부 부재가 사라진 채 방치돼 있었으나 1980년에 복원 작업을 거쳐 다시 조립됐다. 석탑 기초부 조사를 통해 잡석과 진흙을 다지고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한 단씩 굳히면서 쌓아 나가는 판축 축조 방식이 사용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기단부의 적심(積心·초석 아래 돌로 쌓은 부분) 안에서는 땅속의 신을 위해 묻는 물건인 지진구(地鎭具)가 출토됐다. 신라 왕경 안에 있는 미탄사(味呑寺)는 고려시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의 집터가 “황룡사 남쪽의 미탄사 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13년 발굴조사에서 ‘미탄’(味呑)이라는 글자가 있는 기와가 나와 실체가 드러났고 금당을 비롯해 강당, 남문의 터가 확인됐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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