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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라국 추정 유적 복원될까… 제주시 원도심에서 탐라시대 ‘칠성대’ 뒤늦게 발굴

    탐라국 추정 유적 복원될까… 제주시 원도심에서 탐라시대 ‘칠성대’ 뒤늦게 발굴

    제주시 원도심에 탐라국(耽羅國) 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성대’ 유적이 발굴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제주도내 3개 고고학 관련 연구소와 제주 도시재생센터는 지난 2018년~2022년 제주시 한짓골(제주시 이도1동 1491-1번지 일대) 3개구역을 분담 조사한 결과 탐라시대 칠성대 추정 유구 및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고 16일 밝혔다. 탐라 칠성대는 탐라개국 시기에 도성 안 7개소에 북두칠성의 형태로 축조한 유적으로 탐라의 건국이념과 신앙, 도성의 설계와 성주, 성주청(星主廳) 등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한짓골 제1구역에서는 칠성대로 추정되는 원형의 유구와 제실(祭室)터로 판단되는 팔각형의 유구, 제단석, 우물터 등이 발굴됐다. 특히 탐라시대(5세기)때 지어진 유적으로 추정되며 제물로 바친 것으로 추정되는 말, 사슴, 멧돼지 등 동물 뼈가 1000여점이 발굴됐다.30년간 이 칠성대 연구에 힘써 온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1926년에 순종임금이 승하했을 때 망곡제(1926년 5월 11일 자 ‘매일신보’ (현 서울신문)보도)를 지낸 유구로 추정되는 타원형 유적으로 윗부분은 건물을 지으면서 잘려 나가고, 밑부분 약 10m정도 남아 있었다”면서 “아쉽게도 현재 이 3개구역 중 제1구역에서 집중 출토됐으나 현재 제주시공영주차장 지하에 흙으로 덮어 보존 처리돼 버렸다”고 밝혔다. 강 소장은 “당시 제주시에 직접 요청해 발굴현장 앞에 칠성대(첫번째 별자리가 있는 유적지)라는 표석도 세웠다”면서 “공영주차장을 만들다가 발굴된 상황이지만 중요 유적임에도 고증절차도 거치지 않고 흙으로 덮어버린 점은 매우 안타깝다”고 전했다. 그는 “탐라의 핵심적인 유적으로 북두칠성을 모방해 도시를 세웠다는 점에서 안개처럼 덮여 있던 탐라사를 밝혀줄 유적이어서 의미가 깊다”면서 “당시엔 마치 목걸이가 생겼을 때는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있지만, 줄이 끊어져 흩어져 있다가 하나씩 나올 때는 어떤 의미인 줄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칠성대에 관한 기록은 ‘제주성내고적도’ 김석익의 ‘탐라기년’, 만농 홍정표의 ‘탐라사에 관한 기고’등의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2012년 이곳에 칠성대 표석이 세워졌고 주변 골목에는 북두칠성의 눈을 뜻하는 두목골, 제터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일각에선 민선 8기 제주도정의 역사문화공약의 일환으로 탐라문화권사업 추진을 내세운 상황에서 탐라국의 실체 확인을 통한 정체성의 확립과 제주의 자존감 확산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홍명환 도시재생센터장은 “탐라시대 주거지 등 대규모 유적이 발굴된 것으로 200여구가 발견된 국내 최대 규모 선사시대 유적지인 삼양동 유적과 필적할 만하다”면서 “1500년 넘게 이어졌던 탐라인의 결속과 번영을 기원했던 상징공간인 칠성대에 대해 더 적극적인 연구와 해석, 복원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현재 1구역을 제외한 2.3구역은 업무용 복합건물 및 숙박시설 예정지여서 언제든 파괴될 우려가 농후하다. 유적지에 포함된 인근 사유지는 건축으로 인한 파괴 우려가 높은 상황이어서 이들 부지를 매입하는 방안도 시급한 실정이다. 1500여년 만에 깨어났다가 잠든 유적이 복원을 거쳐 다시 햇빛을 볼 지 귀추가 주목된다.
  • 제주 흑우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

    제주 흑우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

    문화재청은 우리나라 토종 가축인 제주 흑우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로 7일 지정 예고했다. 제주 흑우는 ‘조선왕조실록’과 1702년(숙종 28년) 제작된 기록화인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918년 김석익이 저술한 ‘탐라기년’(耽羅紀年) 등 옛 문헌에 제주 지역에서 제향·진상품으로 공출되고 국가적으로 엄격히 사육·관리하던 가축으로 나온다. 흑우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안악 3호분)에도 등장한다. 문화재청은 이처럼 오랜 세월 지역민과 함께한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제주 흑우는 현재 제주 축산진흥원에서 13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털 색깔이 흑색이고 내륙 지역 한우와 달리 체구가 작고 가는 편이나 체질이 강건하고 지구력이 좋아 과거 제주지역에서는 밭농사에 널리 활용됐다. 문화재청은 유전자 분석 결과 제주 흑우는 한우와 칡소, 교잡우와는 다른 혈통의 고유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확인돼 토종가축으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보호할 필요성이 인정됐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한국의 토종] (17) 제주馬

    [한국의 토종] (17) 제주馬

    말(馬)은 오랜 역사속에 우리 민족과 더불어 생존해 온 친숙한 동물이다. 한반도에서 문명의 발전과 문화의 성숙을 선사한 말의 사육은 선사시대부터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에는 과하마(果下馬)라는 조랑말이 있는데 이것을 타고 산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과하마’란 몸집이 작아서 과수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말(馬)이라는 뜻으로 ‘제주마(濟州馬)’ 또는 ‘향마(鄕馬)’로 불리는 한국의 토종말(馬)이다. 일본서기에는 “661년 말린 말고기 등을 제주섬에서 수입했다.”고 적혀 있다.고려 문종 27년(1073년) 제주에서 명마를 진상했다는 탐라기년(耽羅紀年)의 기록으로 보아 이미 그 당시 말이 제주의 특산품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말해 주듯 제주도의 넓은 초원과 오름은 말의 목축지로서 천혜의 조건이다.제주마는 오랜 세월 제주의 기후에 적응해 지구력이 강하면서 온순하다.한때 사육 수가 1000여 마리로 줄었다가 1986년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보호되면서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다. 제주도 축산진흥원은 제주마의 유전자원 확보에 앞장서고 있다. 혈통을 정립하고 보존·관리하기 위해서다.제주마로 등록되기 위해서는 5가지 외모 심사기준을 통과하고,17가지 유전인자가 확인돼야 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최근 제주에서는 토종 제주마를 이용한,다양한 형태의 ‘말 산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경마는 레저산업,말고기는 축산업과 외식산업,재활 승마는 의료산업과 실버산업으로 각각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말기름은 피부보호제로 그 효과가 탁월합니다.”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제주출장소 이종언(41) 박사는 말기름에 피부보호 성분인 팔미톨레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음을 밝혀냈다.말고기도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박사는 “구제역과 광우병 위험이 없으며,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알맞다.”며 말고기 전용 품종의 육성을 강조했다. 제주마를 이용한 승마와 경주대회도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다.제주마는 특히 지구력을 요하는 크로스 컨트리 승마대회에서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연거푸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제주마는 또 수입말에 비해 체구는 작지만 열악한 환경과 질병 등에 강하다.수입 외래종에 지불하는 로열티가 없는 것도 장점이다. 토종은 오랜 세월 한 지역의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형질이 고정화된 동식물이다.우리 지형과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토종 ‘제주마’가 세계의 명마(名馬)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글 사진 제주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제주시 이도1동 돌하루방(한국인의 얼굴:70)

    ◎왕방울 눈·굳게 다문 입에 정감이…/훤칠한 키·비껴쓴 벙거지에 멋도 잔뜩 제주도의 돌하루방은 육지로 말하면 돌장승이다.옛날 기록에는 돌하루방을 일러 옹중석이라했다.돌하루방은 돌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제주도 사투리다.어린 아이들이 돌하루방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름으로 굳어버렸다.어딘가에 정감이 어린 이름이기도 하거니와 실제 돌하루방에서는 온화스럽고 푸근한 체취가 우러난다. 제주도에 돌하루방이 처름 등장한 시기를 확실히 밝힐 수는 없다.다만 김석익의 「탐라기년」을 보고 어렴풋 짐작할 뿐이다.영조30년(1754년) 김몽규가 성문밖에 세웠다는 기록이 그것이다.그는 당시 제주 방어사로 전해인 영조29년에 관덕정(보물 322호)을 중창한 인물이기도 하다.그러나 전에도 있었는 데 다시 세운 것인지,또 처음 새로 세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어떻든 「탐라기년」을 18세기 중엽 제주에 돌하루방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제주도내에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돌하루방은 현재 45기에 이른다.모두 제주도 민속자료2호로 지정 받았다.제주목과 대정현,정의현을 행정구역으로 한 조선시대 제주 삼현소재지에 집중 분포되었다.그래서 제주시내에 21기,대정면 인성·안성·보성리와 표선면 성읍리에 각각 12기씩이 남아있는 것이다. 옛 제주성 성문밖이 본래 제자리였던 제주시 돌하루방은 시내 여러 군데로 뿔뿔히 흩어졌다.제주시의 돌하루방은 대정면이나 표선면 성읍리 것들에 비해 우선 키가 크다.평균치가 1백80㎝를 넘는 훤칠한 키를 했다.그리고 대정면 돌하루방과는 달리 기단을 밟고 서 있다.제주도 돌하루방 하면 얼핏 그것이 그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지역 단위로 특성을 지닌터라 지역별로 비교하면 조금씩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제주시 이도1동을 지키고 있는 돌하루방은 아주 멋이 든 돌할아버지다.제주시 이도1동은 제주목의 제주성 옛 터전인지라 이 돌하루방이야 말로 적자격의 돌하루방이라 할 수 있다.제주도 섬 전체의 돌하루방이 그렇듯 벙거지를 썼으나 멋을 부려 비스듬이 머리에 걸쳤다.닷새장 저자거리에 나갔다가 거나하게 한잔을 하고 손자 주전부리를 사들고 오는 흐뭇한 할아버지 얼굴이다. 퉁방울눈은 이를데 없이컸다.눈이 하도 커서 눈을 만드느라 오목새김한 가장자리 선각이 자루병처럼 생긴 코와 아주 닿아버렸다.병자루 같이 생긴 코허리는 물론 코방울에까지 눈 가장자리가 맞물렸으니 크기는 큰 눈이다.역시 선각으로 표시한 큰 입을 굳게 다물었다.위엄을 갖춘 얼굴은 분명한데 무섭기 보다는 온화한 쪽에 비중을 더 실었다.그러니까 아주 인간화한 섬의 돌장승이 돌하루방일 것이다. 돌하루방을 성문밖에 세웠다는 기록과 본래의 자리 성문 앞길이 방어상 유리한 S자형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육지의 장승들처럼 돌하루방 또한 수호신 기능이 부여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황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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