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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2 반란’ 맞선 김오랑 중령에 충무무공훈장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총격으로 숨진 김오랑 중령에 대한 충무무공훈장 추서가 의결됐다. 당시 ‘순직’으로 분류됐던 김 중령은 이번 의결을 통해 최고 수준의 예우를 받게 됐다. 정부는 23일 국무회의에서 행정안전부가 상정한 영예수여안을 의결했다. 영예수여안에는 김 중령과 정선엽 하사 추서를 비롯해 7284명에게 훈포장을 수여하는 내용이 담겼다. 두 사람에게 추서된 무공훈장은 전시 등에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되는 최고 수준의 예우다. 충무무공훈장은 5개 등급의 무공훈장 중 3등급에 해당한다. 김 중령은 12·12 군사반란 당시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반란군의 불법적 특전사령관 체포 시도에 저항하다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신군부는 김 중령이 먼저 사격했다고 주장하며 순직으로 분류했으나 2022년 전사로 변경됐다. 지난 3월 기존 보국훈장을 취소했고, 전사 사망에 걸맞는 충무무공훈장 추서를 추진한 것이다. 정 하사는 당시 국방부 지하 벙커 초소에 근무하던 중 반란군의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하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지난해 8월 하사로 추서진급 된 정 하사에 대해서도 전사에 맞는 서훈 추진 필요성이 제기돼 왔다. 국방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반드시 그에 맞는 합당한 예우를 다한다는 원칙을 실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日에서 되찾으려 했던… 이 길 밟지 못하고 의병장은 떠났다[서울 로드]

    日에서 되찾으려 했던… 이 길 밟지 못하고 의병장은 떠났다[서울 로드]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 왕산 허위서울 탈환 꿈꿨던 길, 의병장 호 붙여 왕이 제 올리고 직접 밭 갈던 선농단‘케데헌’에 관광 명소 된 약령시장 고종시절부터 교통허브인 청량리 수많은 차량·사람으로 활력 넘치는 투박한 풍경에 다양한 의미 담긴 곳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 같은 기상이 있었더라면 오늘 같은 굴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1910년 뤼순 법정에서 선 안중근 의사는 구한말 의병대장 왕산(旺山) 허위(1855~1908)를 이렇게 평가했다. 허위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붓 대신 무기를 들었다가 고종의 뜻에 따라 해산했다. 40대 중반 뒤늦게 관직에 나선 그는 성균관 박사·중추원 의관·평리원 수반판사(대법원장) 등 요직을 맡았지만, 일제에 맞서다가 구금된 뒤 낙향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의병에 합류했다. 전국 의병을 하나로 모은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내란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서대문형무소 1호로 순국했다. 허위가 안타깝게 멈춰 섰던 그 길은 신설동역에서 시작해 제기동, 청량리를 지나 시조사삼거리까지 이어지는 3.17㎞ 길이의 왕산로가 됐다. 1962년 정부에서 최고 서훈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면서다. 일제의 박해를 피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졌던 후손 중 손자인 허 블라디슬라브(키르기스스탄)는 지난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동대문구 초청으로 방한해 “허위의 손자로 불리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전했다. 왕산로는 본래 왁자지껄했다. 1969년 신설동역 로터리에 고가차도가 지어지면서 발길이 끊기기도 했지만, 2007년 고가가 철거되면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길을 따라 제기동에 이르면 선농단(先農壇)이 있다. 태조 이래 조선 임금들은 춘분과 추분에 풍년을 기원했고,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 제를 올린 뒤 왕이 직접 밭을 갈아 농사의 중함을 알리는 친경(親耕) 행사를 했다. 설렁탕의 기원이 선농단 제례 후 왕이 백성과 나누던 국밥에서 유래했다는 얘기도 있다. 선농단을 지나 동쪽으로 가면 분위기는 바뀐다. 쌉싸름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는 서울 약령시장은 국내 한약 물량의 70%가 유통되는 한방의 메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의 글로벌 흥행 이후 작품에 나온 서울한방진흥센터를 찾는 젊은 세대와 외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청량리에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활기를 더한다. 한국전쟁 이후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농산물, 임산물이 청량리역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경동시장이 형성됐다. 서울 전통시장 중 최대 규모인 이곳은 오랜 세월 서민들의 주방이자 생계의 버팀목이었다.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은 원래 하나였지만, 약령시가 특화 시장으로 분리됐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닯음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0년대 모던한 서울을 묘사한 박태원의 소설처럼 전차는 왕산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899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도쿄 시내보다 4년 앞서 경성에서 전차 운행이 시작됐다. 근대 교통수단 도입 목적은 물론, 고종의 홍릉(명성황후 묘) 참배 편의를 위해서였다. 돈의문(서대문)에서 출발한 전차는 종로와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청량리, 홍릉까지 다녔다. 1960년대 전차 운행이 중단되고 선로가 철거된 길에는 자동차가, 땅 밑에는 1호선이 달린다. 왕산로 중심에 있는 청량리역은 여전히 동북권 교통 허브다. 버스환승센터와 4개 지하철 노선(1호선, 경의·중앙선, 수인분당선, 경춘선), KTX가 교차하는 이곳에 이르면 풍경이 극적으로 변한다. 시장 골목 옆 65층 주거단지가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다. 낡고 음습했던 청량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길의 끝자락에 ‘떡전교’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전농동에서 청량리로 넘어가던 다리 주변에 떡집이 많아 생긴 이름이다. 함경도나 강원도에서 한양으로 오던 길손이 떡으로 허기를 달래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 길에서 힘을 얻었다. 시조사삼거리를 끝으로 회기, 이문, 전농동 대학가로 이어진다. 경희대, 한국외대, 서울시립대가 밀집해 청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왕산로는 말끔한 도심의 대로는 아니다. 하루종일 차량이 넘쳐나고 시장통은 복잡하며 골목은 투박하다. 켜켜이 쌓인 기억을 품고 수많은 이들이 들고나는 도시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 ‘크루즈컨트롤’ 믿고 시속 128㎞ 졸음운전해 경찰관 사망케 한 운전자 ‘집유’

    ‘크루즈컨트롤’ 믿고 시속 128㎞ 졸음운전해 경찰관 사망케 한 운전자 ‘집유’

    고속도로에서 차량 크루즈컨트롤(지능형 주행 제어장치)을 켜놓고 졸음운전을 하다가 경찰관과 견인차 기사를 치어 숨지게 한 30대 운전자가 금고형의 집행유예를 받아 징역형을 면했다. 30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주지법 정읍지원 형사1단독 정성화 부장판사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치사) 혐의로 기소된 A(39)씨에게 금고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1월 4일 오전 1시 51분쯤 전북 고창군 고수면을 지나는 서해안고속도로 서울 방면 75㎞ 지점 고창 분기점 인근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몰다 사고를 냈다. 그의 차량이 덮친 곳은 앞서 경미한 교통사고가 발생한 현장으로, 당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경찰과 소방대원, 견인차 기사 등이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A씨는 차량 스마트 크루즈컨트롤 기능을 켜놓고 시속 128.7㎞로 졸음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 수습 현장을 제때 발견하지 못한 채 그대로 현장에 있던 인원을 들이받았다. 스마트 크루즈컨트롤은 차량 전방에 설치된 레이더를 통해 앞차와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해 주지만 제동거리가 레이더 범위를 넘어서는 속도에서는 추돌을 피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자율주행과는 다르게 운전을 보조만 할 수 있는 수단이며 운전자의 개입이 꼭 필요한 장비다. 게다가 서해안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시속 110㎞다. A씨는 과속 주행에 졸음운전까지 했던 것이다. 이 사고로 견인차 기사 B(36)씨와 전북경찰청 고속도로순찰대 12지구대 소속 이승철 경정(54·당시 경감)이 숨졌다. 행정안전부는 이 경감을 경정으로 1계급 특진하고 녹조근정훈장을 선(先) 추서했다. 정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으로 피해자들에게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야기했으므로 죄책이 무겁다”면서도 “피고인이 범행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합의했으며 장기간 구금 생활로 자숙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 “아버지는 나의 영웅… 엄마·동생 지킬게요”

    “아버지는 나의 영웅… 엄마·동생 지킬게요”

    李대통령 “투철한 사명·헌신 기억”박승원·노태영 대전 현충원 안장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자 정말 멋진 남자였습니다.” 전남 완도 냉동창고 화재 진압 과정에서 순직한 박승원 소방경과 노태영 소방교의 영결식이 14일 완도군 농어민문화체육센터에서 전남도청장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해 1계급 특진·훈장 추서, 이재명 대통령 조전 낭독, 영결사·추도사 낭독, 헌화·분향 순으로 이어졌다. 두 순직 소방관의 운구 행렬은 이날 오전 9시쯤 유족과 동료 소방관들의 울먹임으로 가득 찬 영결식장에 도착했다. 유족과 동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 영결식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유족 대표로 나선 박 소방경의 고등학생 아들은 “앞으로 못 볼 것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하고 가슴이 아린다”며 “아버지가 말한 멋진 가장이자 무슨 일이든 해내는 가장이 되겠다. 엄마와 두 동생은 내가 잘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박 소방경의 완도소방서 동료인 임동현 소방장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고인은 자신의 위험을 뒤로한 채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며 “결국 우리는 그를 다시 부를 수 없게 됐다”고 애도했다. 노 소방교의 해남소방서 동료인 임준혁 소방사는 “결혼을 앞두고 신혼여행지를 고민하며 웃던 형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며 울먹였다. 김승룡 소방청장이 대독한 조전을 통해 이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뜨거운 불길로 뛰어든 고인의 투철한 사명감과 헌신이 오늘도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겠다”고 전했다. 박 소방경과 노 소방교는 지난 12일 완도군 군외면 한 수산물 가공업체 냉동창고 화재 현장에 투입됐다가 순직했다. 44세의 박 소방경은 슬하에 1남 2녀를 둔 다복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30세의 노 소방교는 오는 10월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었다. 두 순직 소방관은 이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 ‘완도 화재’ 두 소방관에게 훈장 추서

    ‘완도 화재’ 두 소방관에게 훈장 추서

    김민석 국무총리가 13일 전남 완도군 완도읍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태영 소방사의 빈소를 찾아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고 있다. 노 소방사는 전날 완도군 군외면 한 수산물 가공업체 냉동창고에서 난 화재 진압 도중 박승원 소방위와 함께 실종된 뒤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김 총리는 두 소방관에게 훈장을 추서했으며 전남도는 14일 오전 9시 완도군농어민문화체육센터에서 영결식을 연다. 완도 뉴스1
  • 예비 신랑·3남매 아빠… 창고 유증기 폭발로 또 소방관 잃었다

    예비 신랑·3남매 아빠… 창고 유증기 폭발로 또 소방관 잃었다

    토치로 바닥 페인트 제거 중 발화 인명 구조 뒤 2차 진입 때 내부 고립 노태영 소방사, 10월에 결혼 앞둬 박승원 소방위, 19년차 현장 베테랑李대통령 “용기와 헌신에 경의를” 전남 완도의 한 냉동창고 화재 현장에서 소방관 2명이 고립됐다가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12일 전남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 25분쯤 완도군 군외면 소재 수산물 가공업체 냉동창고(3693㎡)에서 불이 났다가 3시간 만에 진화됐다. 하지만 진화 과정에서 완도소방서 소속 박승원 소방위와 해남소방서 소속 노태영 소방사가 유증기 폭발로 인해 급속도로 확산한 불길에 참변을 당했다. 현장에 선착한 소방대원 중 7명이 1차 진입을 통해 업체 관계자를 구조해 밖으로 나온 뒤 다시 연기가 보이자 진화를 마무리하기 위한 2차 진입이 이뤄졌다. 이후 불길이 거세지고 다량의 검은 연기가 발생하자 소방당국은 무전을 통해 3~4차례 대피 명령을 전파했다. 하지만 당국은 9시 2분쯤 박 소방위와 노 소방사가 탈출하지 못하고 고립된 사실을 파악했다. 위치 추적으로 이들이 창고 내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당국은 10시 2분쯤 박 소방위를, 11시 23분쯤 노 소방사를 수습했다. 노 소방사는 임용된 지 3년 남짓한 30세의 젊은 소방관으로 오는 10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19년간 전남 지역 재난 현장을 누빈 44세의 박 소방위는고등학생·중학생·초등학생 등 세 남매를 둔 가장으로 전해졌다. 소방당국은 밀폐된 창고 내에 쌓여 있던 유증기가 폭발해 피해를 키운 것으로 보고 있다. 당국은 장비 39대와 대원 115명을 투입해 11시 26분쯤 진화를 마무리했다. 연기를 들이마신 업체 관계자 1명이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준공된 창고에서는 화재 발생 직전 울퉁불퉁한 바닥을 평탄화하고 재포장하는 작업이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페인트를 제거하기 위해 토치를 사용하다가 불이 났다고 업체 관계자가 진술했다. 당국은 불에 취약한 에폭시가 바닥에 포장돼 불이 확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당 건축물은 샌드위치 패널 등이 일부 포함돼 화재 진압 등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소방청과 전남도는 두 소방관에 대해 옥조근정훈장 추서·국립현충원 안장을 추진하기로 했다. 영결식은 14일 열린다. 이재명 대통령은 두 소방관의 순직과 관련해 X(옛 트위터)에 “그 용기와 헌신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며 “정부는 이번 사고를 엄중히 받아들이며 모든 현장 인력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적었다.
  • 후지산 북쪽엔 한일 경계인의 서사가 흐른다

    후지산 북쪽엔 한일 경계인의 서사가 흐른다

    후지산 절경에 숨어 있는재일교포 이양지 문학비경계인의 흔적 되짚어 봐‘인증샷 핫플’ 혼마치 거리 낮은 건물 늘어선 골목 끝후지산은 마치 액자 같아‘후지고코’ 5개 호수 명소주변에 관광 인프라 가득후지큐 하이랜드도 아찔후지산을 처음 본 건 오래전 신칸센 차창 너머였다. 일본 도쿄에서 서쪽 방향으로 달리던 열차가 도심을 벗어날 무렵, 느닷없이 차창 밖으로 거대한 흰 봉우리가 들이닥쳤다. 정상에 눈을 이고 있는 후지산이었다. 그 박력 넘치는 등장에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탄성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야마나시는 바로 그 후지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현이다. 야마나시현은 한국인에게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 전하려는 건 조선과 한국을 사랑했던, 후지산 북쪽 기슭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이 거닐었던 풍경에 관한 이야기다. 야마나시현은 도쿄에서 특급열차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다. 주말이면 어지간한 관광지 주차장은 도쿄 지역 번호판을 단 차들로 북새통이다. 그만큼 도쿄 사람들에게 야마나시는 근교 여행지로 인식되고 있다. 야마나시현은 내륙의 분지다. 전체적으로 고도가 높다. 편차는 있지만 대체로 강원 평창군의 700m 보다 높은 800~900m 정도의 고지대에 대부분의 도시가 형성돼 있다. 한국인에겐 마음 불편한 벚꽃길 먼저 후지요시다시의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부터 간다. 야마나시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특히 벚꽃이 피는 봄철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산인해다. 과장 좀 보태 100개 나라 언어를 한꺼번에 듣는 느낌이다. 해마다 벚꽃 필 무렵에 주민 축제가 열렸지만 올해는 취소됐다. ‘오버 투어리즘’ 때문이다. 공원뿐 아니라 도시에 산재한 명소들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일본 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곳곳에서 주민 불만이 터져 나오는 형국이다.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을 먼저 소개하는 건 야마나시를 대표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불편할 수 있는 여행지라는 걸 무엇보다 앞서 말하고 싶어서다.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은 가장 일본적인 풍경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후지산과 벚꽃, 붉은색 오층 건물이 완벽한 구도로 어우러져 있다. 일본을 소개하는 관광 포스터에서 수없이 봤던 바로 그 풍경이다. 문제는 추레이토(충령탑)라 불리는 붉은 오층탑이다. 야마나시 출신 전사자의 위패가 이 탑에 합사돼 있다. 한데 이들이 어느 지역 전투에서 사망했는지가 불분명하다. 한반도에서 빚어진 양국 간 전쟁에 투입됐다가 전사한 군인의 위패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유명한 공원에서 기필코 마주해야 할 건 재일교포 이양지 문학비일런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비는 찾기가 쉽지 않다. 야마나시 최고의 풍경을 굽어보는 ‘명당’ 인근에 옹색하게 숨어 있어서다. 이양지(1955~1992)는 재일교포 소설가다. 일본 이름은 다나카 요시에. 한국계로는 두 번째로 1989년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제주도 출신 부모를 둔 이양지가 나고 성장한 곳이 바로 후지요시다이다. 도쿄의 명문 와세다대학을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한국말로 떠드는 관광객을 만났다. 당시 재일교포 사이에서 신분을 노출할 수 있는 한국어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런데도 ‘2류 국가’에서 온 한국인은 거리낌이 없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된 그는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1982년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조국과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탐색했다. 그 경험이 소설 속 인물들의 언어가 됐다. 그는 재일 한국인 유학생의 좌절과 환멸을 다룬 소설 ‘유희’(由熙)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을 놀라게 했다. 그가 정한 제목 ‘유희’는 ‘밝음에 이르지 못한 존재’를 뜻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경계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한국무용을 공부하던 그는 1992년 일본으로 돌아가 장편소설 ‘돌의 소리’를 집필하던 중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서른일곱 안타까운 나이에 숨을 거뒀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던 작가가 어린 시절 매일 올려다보던 하늘, 후지산이 보이는 이 공간에 문학비가 세워진 건 그런 까닭일 것이다. 센겐 공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시모요시다 혼마치도리가 있다. 편의점인 로손 가와구치코마에점에 견줄 만큼 소셜미디어 핫플로 떠오른 곳이다.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옛 상점가로, 낮게 깔린 건물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그 골목 끝에 후지산이 액자처럼 걸렸다. 맑은 날이면 거리를 걷는 내내 후지산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골목을 천천히 걸으면 오래된 시계점, 된장 가게,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온다. 전통 양식의 건물들도 곳곳에 남아 있다. 관광지인데도 지나치게 꾸미지 않아 일상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고소한 튀김 냄새를 따라가면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소박한 식당이 나온다. 후지요시다 명물인 요시다 우동을 파는 곳이다. 얼요기 정도로 먹는 건 나쁘지 않지만, 한 끼 식사로 생각하지는 마시길. 아직 야마나시 현민들의 소울 푸드, 호토 국수가 남아 있다. 복사꽃 산골서 만난 가네코의 삶야마나시를 대표하는 건 물론 벚꽃이다. 하지만 복사꽃의 위세도 만만하지 않다. 4월이면 야마나시 분지 전체가 복사꽃 연분홍으로 물든다. 복사꽃 향기를 따라 야마나시시 마키오카초의 산골 마을로 들어서면 ‘문제적 여자’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시비와 만난다. 가네코의 동지였던 구리하라 가즈오 등이 1974년 그의 삶과 행적을 기려 세운 시비다. 가네코는 ‘불량스러운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지사 박열(1902~1974)의 아내였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추서한 일본인 독립유공자다. 그가 태어난 곳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지만 성장한 곳은 야마나시다. 시비가 건립된 곳은 가네코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유년 시절을 야마나시에서 보낸 그는 아홉 살 때 충북 청주시 부강면(현 세종시)의 고모 집으로 건너가 7년을 살았다. 후지산을 빼닮은 부강면의 부용산이 그가 절망 속에서 찾아가던 위안의 산이었다. 부강에서 3·1 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야마나시로 돌아와 혁명의 길로 들어선 그는, 도쿄에서 만난 박열과 함께 일왕 폭살을 계획하다 체포돼 스물세 살에 교도소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야마나시에 남은 그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키오카초의 시비, 그의 가장 가까운 혈육인 가네코 타카시 가족이 2017년까지 살았던 집 정도가 고작이다. 다행히 2003년부터 짝수 해마다 경북 문경시 박열의사기념관과 일본 가네코 후미코 연구회가 공동으로 시비 앞에서 추도식을 연다. 조선의 美 사랑한 아사카와 형제 야마나시현 동북쪽에 가네코가 있다면 서북쪽 호쿠토시엔 아사카와 형제가 있다. 형인 노리타카는 ‘조선 도자기의 신’이라 불린다. 1913년 경성(현 서울)의 소학교에 미술교사로 온 그는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33년 동안 조선 도자 연구에 몰두했다. 1914년엔 그의 권유로 동생 다쿠미도 조선에 온다. 다쿠미는 황무지 같았던 한반도의 녹화운동에 헌신했다. 현 한국 인공림의 37% 정도가 그의 공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쿠미는 급성 폐렴으로 40세에 요절하면서 “조선의 옷을 입혀 조선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조선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그의 관을 매겠다며 나선 조선인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동생을 먼저 보낸 노리타카는 이후 반평생 모았던 공예품과 도자기 등을 신생 한국에 기증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1964년에 세상을 떴다. 아사카와 형제의 고향인 호쿠토시에 일본 내 3대 ‘장수 벚꽃’으로 꼽히는 ‘야마타카진다이 자쿠라’가 있다. 믿기 어렵긴 한데, 공식적으로 수령이 2000년에 이른다고 한다. 이웃한 니라사키시엔 와니쓰카 벚꽃이 있다. 들녘에 핀 ‘홀로 벚꽃’으로, 후지산 등 주변 풍경과 기막히게 어울린다. 벚꽃이 피는 시기엔 경관 조명을 한다. 이 장면 하나 보기 위해 수많은 여행객과 사진작가들이 몰린다. 야마나시현과 시즈오카현 사이에 솟은 후지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한데 자연유산이 아니라 문화유산이다. ‘신앙의 대상’과 ‘예술의 원천’이 등재 이유다. 후지산과 주변 신사, 호수 등 25곳의 구성 자산이 포함됐다. 후지산 관찰에는 새벽부터 이른 오전 시간대가 좋다. 말간 공기 덕에 선명한 후지산을 보기에 유리하다. 치맛자락처럼 뻗은 후지산 아래로 여행 명소들이 별처럼 박혔다. 다섯 개 호수를 이르는 이른바 ‘후지고코’(富士五湖)가 대표적이다. 모토스코, 쇼지코, 사이코, 가와구치코, 야마나카코 등이 후지고코다. 1707년 후지산 대분화로 형성됐다. 오감이 만족하는 후지산 기슭가장 유명한 건 가와구치코다. 후지산이 물 위에 거꾸로 비친 모습, 이른바 사카사후지(逆富士)로 이름났다. 그러니까 데칼코마니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건데, 사실 맑고 바람 없는 날엔 다섯 호수 모두 이 같은 풍경을 펼쳐낸다. 다만 일본인 시각에서 그 장면이 가장 빼어난 곳이 가와구치코인 거다. 명성에 걸맞게 주요 명소를 도는 ‘레드 라인’ 버스, 텐조산 정상까지 오르는 케이블카, 호수 북쪽의 오이시 공원 등 다양한 관광시설이 조성돼 있다. 호수 북쪽의 가와구치 아사마 신사는 인증샷 성지다. 특히 신사 뒤 요배소(遥拝所)가 인기다. 붉은 도리이 사이로 후지산이 담기는 사진 한 장을 위해 일본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다. 다른 호수들도 저마다 한 가지 ‘캐릭터’는 갖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 붙어 있으니, 렌터카를 가져갔다면 천천히 다섯 호수 전체를 돌아보길 권한다. 가와구치코와 후지요시다 사이에 후지큐 하이랜드가 있다. 이른바 일본 내 ‘4대 절규 머신 성지’ 중 하나다. 하늘 위로 사람들을 ‘내던지는’ 놀이기구들이 득시글댄다. 후지산을 보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재미가 각별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향토 음식 먹고 온천으로 마무리 속이 출출할 때는 호토가 딱이다. ‘며느리라면 호토를 잘 끓여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마나시현민들의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음식이다. 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이튿날 아침으로 먹는 것이 현지 가정집의 오랜 방식이라고도 한다. 우리 수제비와 비슷한데, 꽤 맛있다. 과자 ‘쫀디기’를 닮은 길고 끈적한 면과 단호박, 감자, 표고버섯 등의 채소가 걸쭉한 국물과 어우러진다. 가와구치코 인근에 호토만 내는 집들이 몇 곳 있다. ‘오픈런’을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의 식당에서 한 시간 남짓 대기해야 한다. 이 지역 별미인 말고기 육회를 곁들여 먹길 권한다. 값이 비싸 지갑은 홀쭉해지겠지만. 후지큐 하이랜드 바로 앞에 후지야마 온천이 있다. 이 온천의 자랑은 일본 최대 규모의 순수 목조 욕탕이다. 천장 높이가 12m를 넘고 100평(약 330㎡)이 넘는 대욕장은 전통 건축 방식인 못을 사용하지 않는 이음새 공법으로 지었다. 온천수엔 혈당 수치를 조절하는 효과가 있다는 바나듐이 풍부하게 함유됐다고 한다. 3층에 다다미 전망 라운지가 있다. 누워서 후지산을 볼 수 있다.
  • 서천군 “월남 이상재 선생 서훈 상향해야”…연구용역

    서천군 “월남 이상재 선생 서훈 상향해야”…연구용역

    충남 서천군이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건국훈장 서훈 등급 상향 추진에 나섰다. 2일 군에 따르면 최근 ‘월남 이상재 선생 독립운동 공적 재조명 및 서훈 상향 추진 용역’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번 용역은 독립운동 관련 사료와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조사·분석해 서훈 상향 추진에 필요한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추진됐다. 선생은 1896년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회장과 조선교육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일제에 맞서 민족교육운동을 펼쳤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하여 민족 지도자로 활동했다.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독립운동과 민족계몽,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과 위상에 비해 서훈 등급이 낮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군은 선생의 서훈을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격상하기 위해 ‘월남 이상재 선생 서훈 상향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범국민 서명운동도 전개했다. 군 관계자는 “이상재 선생의 정신과 가치를 군민과 공유하고 미래 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선양사업도 지속해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12·12 항거’ 故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한다

    ‘12·12 항거’ 故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한다

    정부가 12·12 쿠데타 당시 신군부에 맞서다 총격으로 숨진 김오랑 중령에게 무공훈장을 추서한다. 정부는 31일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기존에 추서된 보국훈장을 취소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무공훈장 추서 안건은 추후 별도 상정해 의결할 계획이다. 무공훈장은 전시 등에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되는 최고 수준의 예우다. 김 중령은 1979년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반란군의 정 사령관 체포 시도를 막으려 총격전을 벌이다 가슴과 배에 총탄 6발을 맞고 사망했다. 1980년 2월 국립묘지에 안장된 지 10년 만인 1990년 2월 중령으로 추서 진급됐다. 앞서 신군부는 김 중령이 먼저 사격했다고 주장하며 ‘순직’으로 분류했다. 이후 2012년 국회에서 ‘고 김오랑 중령 훈장 추서 결의안’이 발의됐고 순직 분류를 고려해 2014년 보국훈장이 추서된 바 있다.
  • 독립운동가 김탁원 후손, 고려대의료원에 4억 기부

    독립운동가 김탁원 후손, 고려대의료원에 4억 기부

    고려대의료원은 독립운동가 김탁원·길정희 선생의 후손인 고(故) 김상덕씨가 의료원에 30만 달러(약 4억 5000만원)를 기부했다고 9일 밝혔다. 고려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를 지낸 김상덕씨는 평소 나라와 의료를 위해 헌신한 부모의 뜻을 이어 모교에 기여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이번에 전달된 기부금은 의학 인재 양성을 위한 ‘김상덕 장학금’ 조성에 쓰일 예정이다. 김씨의 장남 딘 백(Dean Paik)은 “교육이 중요하다고 늘 강조하셨던 어머니의 뜻처럼 기부금이 미래 의료계를 이끌 학생들에게 의미 있게 쓰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윤을식 고려대 의무부총장은 “이번 기부가 미래 인재 양성과 의학교육 발전 등에 활용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탁원 선생은 일제강점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3·1 운동에 참여해 학생 시위를 이끌었고, 신간회·조선물산장려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정부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해 김 선생에게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민주주의 역사’ 눈물로 배웅한 李대통령

    ‘민주주의 역사’ 눈물로 배웅한 李대통령

    李대통령 부부, 국회 영결식 참석추모 영상 보며 여러번 눈물 닦아김 총리 “대한민국, 고인에 빚졌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영결식이 지난달 31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는 이 전 총리의 유족을 비롯해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 우원식 국회의장, 김민석 총리 및 여야 의원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검은 정장을 입고 근조 리본을 가슴에 단 이 대통령 부부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인의 영정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후 유족과 나란히 맨 앞줄에 앉아 조정식 대통령 정무특보가 낭독하는 고인의 약력을 들었다. 조 특보는 이 자리에서 이 전 총리를 “한평생 철저한 공인의 자세로 일관하며 진실한 마음, 성실한 자세, 절실한 심정으로 책임을 다한 정치인”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김 총리의 조사와 우 의장·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추도사가 이어졌다. 김 총리는 “민주주의도 대한민국도 고인에게 빚졌다. 고문과 투옥에도 민주주의를 지켰고 민주 세력의 유능함을 보여 후배들 정치 진출에 길을 냈다”면서 “여쭤볼 게 아직 많은데, 판단할 게 너무 많은데, 흔들림도 여전한데 이제 누구에게 여쭤보고 누구에게 판단을 구하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나”라며 울먹였다. 이 대통령은 김 총리의 조사를 들으면서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이어 우 의장은 “이해찬이라는 이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 그 자체였다”며 “늘 불의 앞에 준엄했고 시대의 변화에 치열했고 국민 앞에선 따뜻했다. 언제나 공적인 일에는 몸을 살피지 않고 앞장서며 ‘선공후사’를 실천하던 일생에서 우리는 공직자의 소명 의식과 책임감이 뭔지 깊이 깨달았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이 전 총리님의 일생은 모든 발걸음이 전부 대한민국을 위한 것이었다”며 고인을 “탁월한 지도자”, “민주당의 정신적 지주”, “당내 최고의 전략가”라고 평가했다. 영결식은 고인의 일생이 담긴 추모 영상 상영에 이어 헌화를 끝으로 종료됐다. 이 대통령 부부는 이 전 총리와 함께한 모습을 담은 추모 영상이 상영될 때는 이를 보던 도중 손수건으로 여러 차례 눈물을 닦기도 했다. 이 전 총리의 유해는 영결식 후 서초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안장됐다. 이 전 총리는 지난달 25일 베트남 출장을 나선 도중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27일 서울 종로구 장례식장으로 옮겨져 장례는 닷새 동안 기관·사회장으로 엄수됐으며 이 대통령은 첫날 저녁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한 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 이해찬 영정 앞에서 눈물 훔친 李…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이해찬 영정 앞에서 눈물 훔친 李…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빈소가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지자 이재명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 인사들과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정식 대통령 정무특보는 사실상 상주 역할을 맡아 조문객을 직접 맞았다. 이날 오전 차려진 빈소에는 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 김민석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 정 대표 등의 명의로 보내진 화환이 들어서 있었다. 유가족의 분향을 시작으로 우 의장과 김 총리, 정 대표가 나란히 서서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들은 환하게 웃는 고인의 영정 사진 앞에서 비통한 표정으로 두 차례 절을 올린 뒤 한 차례 허리를 숙이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우 의장은 눈물을 흘리며 영정 사진을 지긋이 바라봤고 김 총리도 흐느껴 울었다. 정 대표도 눈시울을 붉혔다. 이 대통령은 오후 6시 6분쯤 김혜경 여사와 함께 빈소를 찾았다. 이 대통령은 영정 앞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분향했다. 대통령 부부는 영정을 향해 묵념했고 김 여사는 울먹이며 눈가를 훔쳤다. 이어 이 대통령은 영정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이 대통령은 유족과 악수하며 위로하는 과정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김 여사는 유족을 끌어안으며 위로했다. 조문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접견실로 이동해서 이 수석부의장의 부인 김정옥 여사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며 약 40분 동안 자리를 지켰다. 이 자리에는 김 총리와 정 대표,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 등이 함께 했다. 앞서 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도 빈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다.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은 조 특보는 “평소 퍼블릭 마인드를 중시한 이 수석부의장은 이번을 본인의 마지막 공직으로 여겼고 마지막까지 공무수행을 위해 몸을 불사르시다가 순직하셨다”고 했다. 앞서 베트남 출장 중 별세한 이 수석부의장의 시신은 이날 오전 7시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우 의장과 김 총리, 정동영 통일부 장관, 또 정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공항을 찾아 고인을 영접했다. ‘이해찬계’로 통하는 조 특보,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 김현·이해식 의원 등도 모두 자리했다. 태극기가 덮인 관이 도착하자 참석자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수석부의장과 오랜 인연이 있는 정 장관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공항에서 약식 추모식이 진행된 이후 이 수석부의장의 관을 실은 운구차는 오전 9시 10분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도열한 채 이 수석부의장을 기다리던 30여명의 민주당 의원들은 운구차가 도착하자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이 수석부의장의 장례는 오는 31일까지 닷새간 민주평통과 민주당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기관·사회장으로 엄수된다.
  • 李대통령, 故이해찬 전 총리 빈소서 눈물…무궁화장 추서

    李대통령, 故이해찬 전 총리 빈소서 눈물…무궁화장 추서

    이재명 대통령은 27일 오후 고(故)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부인인 김혜경 여사와 함께 검정색 옷을 착용하고 이 전 총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 대통령은 김 여사와 함께 영정 앞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고 분향했다. 대통령 부부는 영정을 향해 묵념했고 김 여사는 울먹이며 눈가를 훔쳤다. 이후 이 대통령은 관계자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전달받아 이 전 총리에게 추서했다. 이 대통령은 유족 한 사람씩 악수를 하면서 손등에 손을 올리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김 여사도 유족을 포옹하며 위로하고 조의를 전했다. 이 대통령은 상주 자리에 함께 선 김민석 국무총리,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등과도 인사한 뒤 별도로 마련된 접견실로 이동했다. 이날 추서한 국민훈장은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무궁화장은 5등급으로 구분되는 국민훈장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1등급 훈장에 해당한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25일 이 전 총리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페이스북에 남긴 글에서 “민주주의 역사의 큰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의 뜻을 밝힌 바 있다.
  • 故 박진경 대령 서훈 논란에… 육지로 가는 ‘4·3버스’

    故 박진경 대령 서훈 논란에… 육지로 가는 ‘4·3버스’

    제주4·3 당시 강경 진압을 지휘한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지정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제주4·3의 진실을 알리고 국가 폭력의 책임 문제를 되짚기 위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제주를 넘어 육지로 향한다. 제주4·3범국민위원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제주지부는 오는 14~15일 1박 2일 일정으로 ‘육지로 가는 4·3 버스’ 답사 행사를 진행한다고 11일 밝혔다. 제주4·3과 여순사건 등 한국 현대사의 국가폭력 현장을 직접 찾아 ‘가해자가 영웅으로 둔갑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포석이다. 이번 행사는 역사단체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마련됐으며, 40여명이 참가한다. 답사단은 여순 10·19 역사관, 경남 남해 박진경 대령 동상,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지, 충남 천안 조병옥 생가터, 서울 국립현충원 등을 차례로 방문한다. 이들 장소는 국가 폭력의 가해자 평가와 기념 방식 등을 둘러싸고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이어져 온 곳이다. 특히 답사단은 4·3 당시 강경 진압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는 박진경 대령에 대한 국가유공자 서훈 취소를 공식 요구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남해 지역 민족문제연구소, 촛불단체 등 시민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주최 측은 “전쟁 공적이 아닌 4·3 진압 과정이 사실상 훈장 근거가 됐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라며 “잘못된 서훈을 바로잡는 것이 4·3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밝혔다. 최근 박진경 대령 국가유공자 지정과 관련 조속히 취소 기자회견을 했던 제주4·3범국민위원회의 백경진 이사장은 11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앞으로도 박진경 대령과 비슷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서 “제주4·3관련 단체들과 의논한 끝에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지역을 방문해 문제들을 환기시키자는 취지로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민주권정부(이재명 정부)에서 서훈은 당연히 취소될 거라 기대한다”면서도 “그럼에도 이 문제를 마뜩잖아 여기는 사람들의 저항이 꽤 있을 거라 예상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4·3 진압을 공적으로 해서 받은 서훈을 취소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는 절차”라고 강조했다. 박 대령은 1948년 제주에 주둔한 9연대장으로 강경 진압 작전을 지휘하다 같은 해 6월 부하에 의해 피살됐다. 이후 1950년 전몰군경으로 분류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박 대령의 서훈 취소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보훈부는 관련 법령과 절차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달 중 결론을 낼 예정이다. 한편 지난 9일 도는 4·3을 ‘공산 폭동’으로 규정한 정당 현수막을 강제 철거됐다. 도는 해당 현수막이 4·3특별법에 따른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훼손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청소년 보호·선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 “아파트 관리실 직원들에게 호텔 식사 대접…” 故 안성기 생전 미담에 ‘뭉클’

    “아파트 관리실 직원들에게 호텔 식사 대접…” 故 안성기 생전 미담에 ‘뭉클’

    지난 5일 향년 74세로 별세한 ‘국민배우’ 고(故) 안성기가 생전 거주하던 아파트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극진히 챙겼다는 미담이 전해져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지난 7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고 안성기 배우님 인품’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네티즌 A씨는 “한남더힐에 거주할 당시, 1년에 한 번씩 힐튼호텔로 관리사무소 직원 모두를 초청하셔서 식사를 대접하셨다고 한다”며 “안성기 배우는 정장을, 배우자 분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직원 한 명 한 명과 사진 촬영까지 해주셨다고 한다”고 적었다. A씨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며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으로 추측된다. 작성자는 “유명 인사가 팁을 준 이야기, 선물 세트를 준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이렇게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챙겨 준 사연은 처음 듣는다”며 “고 안성기 배우님, 좋은 곳으로 가셔서 더 많은 사랑을 받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네티즌 B씨는 해당 게시물에 댓글을 달아 생전 안성기를 만났던 일화를 전했다. B씨는 “오래전 부산국제영화제 초기에 해운대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는데, 안성기 배우님이 타고 계셨다”면서 평범한 정장 차림에 가방 하나 들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B씨는 “다른 배우들은 고급 밴에 매니저를 대동하고 다니던데, 정말 비교가 되더라”면서 “하늘나라에서도 좋은 배우로 활동하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이야기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안성기의 소속사는 안성기에 대해 “배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책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라며 고인을 추모했다. 안성기는 5일 오전 9시 서울 순천향대병원에서 별세했다. 고인은 지난해 12월 30일 심정지 상태로 서울 순천향대병원 응급실에 이송돼 중환자실에서 치료받아왔다. 고인의 장례는 (재)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사)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은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재발해 투병 중이었다. 투병 소식은 지난 2022년 한 행사에 그가 이전과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뒤 알려졌다. 1952년 1월 1일생인 고인은 1957년 영화 ‘황혼열차’를 통해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하녀’ ‘바람불어 좋은 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만다라’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어우동’ ‘황진이’ ‘남부군’ ‘하얀전쟁’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미술관 옆 동물원’ ‘취화선’ ‘실미도’ ‘한반도’ ‘라디오스타’ ‘화려한 휴가’ ‘부러진 화살’ ‘한산: 용의 출현’ ‘노량: 죽음의 바다’ 등 수많은 대표작을 통해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정부는 고인에게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 교통사고 처리 중 순직…故 이승철 경정 영결식

    교통사고 처리 중 순직…故 이승철 경정 영결식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듬직한 경찰관,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끝까지 기억하겠습니다” 교통사고 처리 중 졸음운전 차에 치여 순직한 故 이승철 경정 영결식을 전북경찰청장 장으로 엄수됐다. 전북경찰청 온고을홀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유족과 김철문 전북경찰청장 등 동료 경찰관, 김관영 전북지사, 문승우 전북도의회 의장, 이연주 전북자치경찰위원장, 이오숙 전북소방본부장 등 333명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이날 장송 행진곡과 함께 고인의 운구가 영결식장 입구에 들어서자 유족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고인과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도 정복 안에 얼굴을 파묻고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약력보고를 맡은 황성근 12지구대장은 “고인은 직장에서는 사랑받고 신뢰받는 듬직한 경찰관이었고, 가정에서는 훌륭한 가장이자 효자였다”며 “오늘 비록 우리 곁을 떠나지만,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끝까지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김 청장은 “故 이승철 경정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도, 거센 차량의 흐름 속에서도 고인의 눈과 마음은 오직 국민을 향해 있었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국민을 살폈다”며 “대한민국 경찰의 자랑이자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라고 애도를 바쳤다. 영결식이 끝나고 태극기에 싸인 이 경정의 유해는 영구차에 실려 전주의 한 화장장으로 향했다.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단 동료들은 운구차 양옆에서 거수경례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승철 경정은 지난 4일 오전 1시 23분쯤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 고창 분기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수습하다 졸음운전 차량에 치여 순직했다. 정부는 고인을 경정으로 1계급 특진 추서하고 녹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고인은 임실호국원에 안장된다.
  • ‘천의 얼굴’ 안성기, 시네마 천국으로 떠나다

    ‘천의 얼굴’ 안성기, 시네마 천국으로 떠나다

    1957년 ‘황혼열차’ 아역으로 데뷔‘바람불어 좋은날’로 존재감 알려거지부터 대통령까지 170편 열연1980년~2010년대 40여차례 수상李대통령 “품격 보여준 삶에 경의”영화산업 기여 금관문화훈장 추서 노숙인부터 대통령까지. 능글맞은 형사부터 고뇌에 찬 군인까지. 영화배우 안성기의 얼굴은 한국인의 ‘페르소나’ 그 자체였다. 지난 69년간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안성기는 ‘국민배우’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다. 인생 대부분을 영화인으로 살며 한국 영화사를 관통했던 안성기가 생을 마쳤다. 74세. 병마와 싸우면서도 은막으로 돌아오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던 안성기는 이제 하늘의 영화관에서 관객과 만나야 한다. 안성기는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30일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지 6일 만이다. 안성기는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곧 재발해 투병 생활을 해 왔다. 회복에 전념하면서도 조만간 배우로 활동을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안성기의 연기 인생은 한국 영화사의 격동과 궤를 같이한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곧 한국 영화사의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주연상을 받은 유일한 배우인 안성기는 국내 각종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연기상을 40여 차례 수상했다.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부친 안화영씨가 영화감독 김기영과 친구였는데, 이 인연으로 ‘황혼열차’(1957)에 아역으로 출연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70여편의 영화에서 아역으로 활약했다. 김기영의 1959년작 ‘10대의 반항’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특별상을 받았다. 학업에 전념하고자 중학교 3학년 때 찍은 ‘젊은 느티나무’(1968)를 끝으로 연기를 그만뒀다. 동성고를 졸업한 뒤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진학했다. 전공인 베트남어를 살려 취업하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고 한다. 안성기는 연기를 그만둔 지 10년 만에 영화계로 다시 눈을 돌리게 됐다. 김 감독의 1978년작 ‘병사와 아가씨들’에 출연했다. 아역의 이미지를 벗고 어엿한 영화인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날’(1980)이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지방에서 상경해 말을 더듬는 중국집 배달부 덕배를 연기했는데 무기력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청춘을 대변했다. 그를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오르게 한 것은 과장되거나 인위적이지 않은 절제되고 담백한 연기 덕분이었다. 또한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였다. 승려(‘만다라’), 거지(‘고래사냥’), 일용직 노동자(‘칠수와 만수’), 뇌성마비 청년(‘안녕하세요 하나님’), 빨치산(‘남부군’), 베트남전 참전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소설가(‘하얀전쟁’), 소심한 샐러리맨(‘남자는 괴로워’), 대통령(‘피아노 치는 대통령’), 개그맨(‘개그맨’), 고려시대 무사(‘무사’), 육군 장교(‘실미도’), 매니저(‘라디오 스타’)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캐릭터를 연기했다. 장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과 한국영화배우협회 주관으로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원로배우 신영균이 명예위원장, 이갑성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배창호 감독·신언식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 직무대행·양윤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아 국민배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다. 운구는 배우 이병헌·이정재·정우성·박철민 등이 맡고, 조사는 배창호 감독과 정우성이 낭독한다.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은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이 대통령은 “‘영화를 꿈으로, 연기를 인생으로 살아왔다’는 말씀처럼 선생님께 연기는 곧 삶이었고, 그 삶은 수많은 이들의 위로와 기쁨 그리고 성찰의 시간이 돼 줬다”며 “화려함보다 겸손을, 경쟁보다 품격을 보여 주신 선생님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날 한국 영화 성장과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기려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영원히 기억할 것” 故 안성기에 금관문화훈장…정우성·이정재 직접 조문객 맞아

    “영원히 기억할 것” 故 안성기에 금관문화훈장…정우성·이정재 직접 조문객 맞아

    정부가 5일 별세한 배우 안성기에게 한국 영화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대중문화예술 분야의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오후 6시 50분쯤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을 방문해 훈장을 전달했다. 최 장관은 훈장 전달과 조문을 마친 뒤 “한국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배우 안성기 선생님께서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나신 데 대해 깊은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며 “언제나 늘 낮은 곳부터 챙겨주셨던 우리들의 국민 배우 안성기 선생님을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영화 ‘칠수와 만수’부터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우리 마음 속에 이렇게 기억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하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문체부는 “고인은 세대를 아우르는 연기를 보여주며 한국영화와 생애를 함께해 온 ‘국민배우’로 평가받아 왔다”며 “1990∼2000년대 한국영화의 대중적 도약과 산업적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한국영화의 사회적·문화적 외연 확장에 기여했다”고 추서 배경을 설명했다. 고인은 2013년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 굿 다운로더 캠페인 위원장, 문화융성위원회 위원 등의 활동을 하며 사회봉사와 문화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 바 있다.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한 고인은 ‘고래사냥’, ‘투캅스’, ‘실미도’ 등 69년간 170편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국민배우’라는 칭호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완치했지만, 암이 재발해 투병해왔다.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다가 이날 오전 별세했다. 안성기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영정은 구본창 사진작가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 촬영 당시 찍은 사진으로, 안성기의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인 것으로 전해졌다. 60년지기인 ‘가왕’ 조용필을 비롯해 40년 연기 파트너 박중훈,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박정자, 태진아, 최수종, 이정재, 정우성, 박상원, 이기영, 권상우, 신현준, 송승헌, 김동현, 거룡, 이준익 감독, 임진모 평론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 등이 빈소를 직접 찾았다. 특히 안성기와 같은 소속사 아티스트컴퍼니에서 가족처럼 함께해 온 이정재와 정우성은 이날 빈소를 찾은 조문객을 맞고 조문을 마친 이들을 배웅하며 상주와 다름 없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용필은 “지난번에 완쾌됐다고 전화가 와서 너무 좋았는데 또 이렇게 입원했다고 하니 심각하단 생각을 했다”며 “그땐 ‘용필아, 나 다 나았어’ 그랬다”고 되돌아봤다. 이어 고인을 향해 “너무 아쉬움 갖지 말고 저 위에 가서라도 남은 연기 생활할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잘 가라고, 가서 편안히 쉬라고 얘기하고 싶다. 성기야, 또 만나자”고 전했다. 박중훈은 “40년 동안 선배님하고 같이 영화를 찍고 했다는 것도 행운이지만, 배우로서 그런 인격자분과 함께 있으면서 좋은 영향을 받은 것도 너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슬픈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며 “선배님이 영화계에 끼친 영향 또 선배, 후배, 동료들에게 주신 사랑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김동호 전 위원장은 “안타깝고 슬프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부산국제영화제 1회 때부터 제가 한 1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참석해줘서 신세를 많이 졌던 배우”라고 회상했다. 이어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스크린쿼터 등 때도 앞장서서 영화계를 위해 왔고, 신영균재단 이사장으로서 영화 영재를 키우는 데 힘을 보탰다”며 “하늘나라에서도 한국 영화를 보살펴 주면 좋겠다”고 전했다. 임권택 감독은 “많이 아쉽고, 또 아쉽고 그렇다”며 “영정 보니 ‘내가 곧 따라갈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수만 프로듀서, 배우 이병헌, 전도연, 임하룡 등은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이영애, 김혜수, 황신혜, 고현정, 배철수, 윤종신, 정보석, 고경표, 이시언, 변기수, 한지일 등은 “고인의 명복을 기원한다”며 애도를 표했다.
  • 사고 처리 중 순직한 경찰관, 녹조근정훈장 추서

    사고 처리 중 순직한 경찰관, 녹조근정훈장 추서

    4일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수습하다 순직한 고 이승철 경정에게 녹조근정훈장이 추서된다. 행정안전부는 윤호중 장관이 5일 전주시민장례문화원을 찾아 고인을 조문하고 녹조근정훈장을 선(先)추서할 예정이라고 4일 밝혔다. 선추서는 장례 일정에 맞춰 유족에게 훈장을 먼저 전달하고, 국무회의 의결 등 공식 추서 절차는 사후에 진행하는 방식이다. 앞서 경찰청은 이 경감을 경정으로 1계급 특진 추서했다. 고인은 이날 오전 1시 23분쯤 서해안고속도로 상행선 고창분기점 인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조사하던 중 현장을 덮친 졸음운전 차량에 치여 순직했다. 고인은 1997년 경찰에 입직했으며, 전북경찰청 생활질서계와 홍보담당관실, 청문감사인권담당관실, 감사계 등을 거쳐 지난해 경감으로 승진한 이후 고속도로순찰대로 자리를 옮겼다. 전북경찰청은 오는 6일 청사에서 전북경찰청장 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 마지막 말은 “보고싶다 사랑한다”…故 김지미에 ‘금관문화훈장’

    마지막 말은 “보고싶다 사랑한다”…故 김지미에 ‘금관문화훈장’

    정부가 지난 7일 미국에서 별세한 고(故) 김지미 배우에게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했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14일 오후 2시 김지미의 추모 공간이 마련된 서울 충무로 서울영화센터를 찾아 고인에게 추서된 금관문화훈장을 유족 대표에게 전달했다. 고인의 딸 최영숙씨는 현지에서 장례 절차 등을 밟고 있어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최씨는 고인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보고 싶다. 사랑한다”였다고 한국영화인협회를 통해 전했다. 문체부는 “고인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한 시대의 영화 문화를 상징하는 배우였다”며 “한국 영화 제작 기반 확충과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한국 영화 생태계 보호와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도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양윤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은 “김지미 배우는 우리 영화계 후배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과감한 잔다르크였다”며 “한류라는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 한국 영화 산업의 토대를 만들어낸 선배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제작자, 아티스트였다”고 회고했다. 김지미는 지난 2016년 10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은 바 있다. 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과 국민 문화 향유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별세한 고(故) 이순재 배우에게도 사후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외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은 배우로는 2021년 윤여정, 2022년 이정재가 있다. 김지미는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1957)로 데뷔해 700여편의 작품을 남긴 한국 영화계 대표 스타 배우다. ‘토지’(1974), ‘길소뜸’(1985) 등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한국영화의 성장기를 이끌었다. 그는 멜로·사회극·문학 작품 영화화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여성 중심 서사가 제한적이던 시기에도 그는 폭넓은 역할을 소화하며 스크린 속 여성 인물상의 지평을 넓혔다.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 국내 주요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경력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인정받은 배우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연기 활동을 넘어 제작 현장에서도 활동 반경을 넓혔다. 김지미는 ㈜지미필름을 설립해 제작자로 나서 한국영화 제작 기반을 넓히는 데 힘을 보탰다. 작품 선택과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며 배우와 제작자가 함께하는 모델을 보여줬고, 한국영화가 산업으로 자리를 잡는 과정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단체 활동과 제도 개선을 향한 역할도 이어졌다. 그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아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스크린쿼터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참여해 자국 영화 보호 장치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아울러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며 정책 논의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영화 생태계 보호와 제도적 기반 강화에 실질적인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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