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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환적인 추상예술 속으로… 제주서 칸딘스키를 만난다

    몽환적인 추상예술 속으로… 제주서 칸딘스키를 만난다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한 칸딘스키, 파울 클레, 이왈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전시가 열린다. 국내 최초 몰입형 복합문화예술공간 ‘빛의 벙커’는 여섯 번째 전시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전이 오는 14일 개막한다고 3일 밝혔다.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전은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 ‘파울 클레’, ‘이왈종’의 작품 세계를 빛과 음악, 첨단 디지털 기술을 통해 각각의 전시로 선보인다. 시대의 흐름과 예술적 변화에 발맞춰 끊임없이 탐구하고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한 예술가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특히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는 색과 형태를 통한 추상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현대 미술의 흐름을 변화시킨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칸딘스키의 초기 구상 작품을 시작으로 대표작 ‘구성 8(Composition VIII)’과 ‘노랑-빨강-파랑(Yellow-Red-Blue)’을 통해 거장이 창조해낸 추상적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을 제공한다. 작품과 함께 흘러나오는 클래식, 재즈,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관람객들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며 몰입감을 더욱 극대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어지는 전시 ‘파울 클레, 음악을 그리다’에서는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 미술의 거장이자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인 ‘파울 클레’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직관적인 상상력과 기하학적 형태가 결합된 독특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인간 존재와 우주의 복잡성에 대한 탐구를 색채와 선을 통해 표현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전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 피리(Magic Flute)’의 선율과 함께 펼쳐져, 클레가 창조한 상상의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제주의 자연과 사람, 일상을 담아낸 ‘이왈종, 중도의 섬 제주’도 선보인다. ‘제주의 화가’라 불리는 이왈종의 자유로운 예술 세계를 공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몰입형 예술 전시다. 빛의 벙커를 운영하는 ㈜티모넷이 자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첫 콘텐츠이자 ‘빛의 시리즈’ 최초 국내 작가 작품을 주제로 한 기획전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과 삶의 이야기를 전한다. 한편 ‘칸딘스키, 추상 회화의 오디세이’ 전을 특별한 가격으로 만나볼 수 있는 얼리버드 티켓은 13일까지 정상가 대비 30% 할인된 가격으로 인터파크 티켓, 야놀자, 카카오톡 예약하기, 네이버 예약을 통해 구매 가능하다. 얼리버드 티켓은 개막일인 14일부터 4월 30일까지 사용 가능하며, 자세한 내용은 빛의 벙커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조재원의 에코 사이언스] 괴테의 식물학개론/울산과학기술원 도시환경공학과 교수

    [조재원의 에코 사이언스] 괴테의 식물학개론/울산과학기술원 도시환경공학과 교수

    빈 공간에 점이 찍힌다.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은 면으로 펼쳐져 공간을 채운 후 폭발하듯 점으로 사라진다. 괴테가 식물의 성장, 변형과 생명탄생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씨는 점, 줄기는 선, 잎은 면, 꽃과 열매는 공간 그리고 다시 점인 씨앗으로 돌아간다. 괴테의 ‘식물변형론’은 18개 장에 123개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고 중간중간 괴테가 직접 스케치한 삽화도 있어 도움이 된다. 책 전체를 통해 괴테는 관찰이 곧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책은 “식물 성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식물은 바로 옆 인접해 있는 부분의 모습을 닮아가듯 변형하면서 성장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그렇게까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꽃과 나무 그리고 무엇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를 경험하면서 자꾸 떠올랐다. 그는 식물을 통해 생명과 사회라는 세상을 얘기하고 있었다. 바로 옆 존재에 관심을 갖고 닮으려고 노력하고 또 닮아야 살 수 있다는 진리 말이다. 평범한 듯 심오한 생태법칙을 식물의 성장과 변형을 통해 설명하는 식물 관찰일지 같다. 책을 읽고 나면 길가의 잡초 하나, 꽃 하나도 그냥 지나치기 힘들도록 독자를 관찰에 능한 과학자가 되도록 도와준다.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던 꽃은 어느덧 우주공간에 함께하는 존재가 된다. 괴테는 식물 속 점을 찾는 버릇을 갖게 한다. 줄기를 보아도 갈래가 나누어지기 전에는 색이 진한 점이 반드시 있다. 에너지와 생명력을 집중해 진한 색을 가진 점을 이룬 후 그곳에서 두 갈래 줄기가 뻗어나고 잎도 돋아난다. 줄기 끝에서 다시 힘을 모아 점을 찍은 후 이번에는 꽃이 맺힌다. 예술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괴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괴테의 ‘식물변형론’을 읽고 ‘점, 선, 면’이란 책을 썼을 것이란 상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괴테는 생명과 사회에 이어 추상예술에까지 그의 식물이론을 통해 영향을 끼친 것이다. 괴테 식물학개론은 우주 생성까지 이어 간다. 점은 정체된 듯 죽은 모습을 띠지만 새 생명으로 탄생하려면 점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집약하고 수축시켜 하나의 점을 만들면 씨가 된다. 점에서 출발해 다시 점으로 돌아온 셈이다. 식물은 닮아가는 방향으로 성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죽음으로 사라지듯 점을 만들어 생명을 탄생시킨다. 우주 팽창과 수축 그리고 빅뱅을 이해할 수 있다. 닮음의 성장, 생명 탄생의 점으로 설명한 자연법칙이다. 바로 옆 동료에게 관심을 가져 닮으려 노력하고 함께 성장한 후에는 다시 결집해 점으로 목숨을 다해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사회법칙이기도 하다. 혼돈의 세계와 사회를 견딜 수 있게 도와주는 괴테의 식물 생태 과학코드이다.
  • 갤러리 같은 도시… 다 같이 돌자 ‘도슨트 투어’ 한 바퀴

    갤러리 같은 도시… 다 같이 돌자 ‘도슨트 투어’ 한 바퀴

    안양(安養). 불교에서 극락을 뜻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입니다. 멀리 서쪽에 있다는 이상향 극락안양정토(極樂安養淨土), 혹은 안양정토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이 1100년 전 실재했던 한 절집의 기와에 새겨져 있었으니 경기 안양이 사람들의 정주 공간으로 기능한 것도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는 셈입니다. 수도 서울의 위성도시쯤으로 여겼던 안양이 내공 깊은 불교 성지였다는 것도 뜻밖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옛 성지 안에 수많은 공공예술 작품들이 별처럼 흩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시 자체를 거대한 갤러리로 만들겠다는 계획 중 하나라고 하는데, 그 원대한 계획의 일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예술의 향기로 가득 차는 느낌이었습니다.●‘예술의 향기’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공예술작품 안양 여정의 중심지는 석수동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이란 지명의 기원이 된 1100년 전 안양사(安養寺) 절터에 조성된 공원이다. 삼성산과 관악산 사이 계곡 약 2㎞ 안에 박물관, 공공예술작품 등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다. 선인들의 흔적부터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가의 작품까지 엿볼 수 있다. 삼성산 계곡은 물이 맑고 수량도 풍성해 안양시민들이 자주 찾는 유원지다. ‘대가들의 예술 작품으로 치장된 계곡’에서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는 느낌은 어떨까.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는 안양시민들이 마냥 부럽다. 가장 먼저 김중업건축박물관부터 들른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작가를 떠나 버린다. 한 개인이 창조한 결과가 작가의 것만이 아닌 사회 속으로 객관화한다”는 말을 남긴 건축가 김중업(1922~1988)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59년 유유산업 공장 건물로 세워진 것을 안양시에서 매입해 박물관으로 꾸몄다. 옛 공장 건물을 설계한 이는 저 유명한 김중업 건축가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를 사사한 그는 이제 스스로가 한국 건축의 전설이 되어 가는 중이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보존해야 할 ‘박물’이 된 셈이다. 박물관은 외관부터 독특하다. 곤충의 다리를 닮은 구조물이 본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모양새다. 현지 학예사는 “건물 내의 보와 기둥을 제거하고 넓고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물을 건물 옆으로 뺐다”고 했다.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원칙 중 하나인 ‘자유로운 평면’이 여기에 구현된 셈이다. 건물 내부에선 추상예술 작품 같은 건축 도면을 비롯해 서강대 본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등 김중업이 남긴 각종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1995년 철거된 옛 제주대 본관 모형이 특히 애처롭다. 제주 바다의 생명력이 그대로 담긴 유려한 건축물을 부숴 버린 우리의 무지는 아마 후대에까지 두고두고 조롱거리로 남지 싶다.●김중업건축박물관·안양역사박물관… 도슨트 투어 강추 건축박물관 바로 앞은 안양역사박물관이다. 역시 김중업이 설계한 공장 건물을 재활용했다. 건물엔 필로티, 옥상 정원, 자유로운 평면, 수평창, 자유로운 파사드 등 이른바 ‘르코르뷔지에의 5원칙’이 충실하게 적용됐다. 지금부터 꼬박 60년 전에 이미 모더니즘의 정수가 국내 건축에 적용됐던 셈이다. 안양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는 ‘새겨진 아름다움-안양의 보물을 찾아서’전이 열리고 있다. ‘안양’이란 글씨를 새긴 안양사 기와, 선사시대 토기 등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던 관양동 선사유적 출토 유물 약 170점을 전시 중이다. 전시물은 모두 진품이다. 국내 유일의 석수동 마애종(도 유형문화재 92호) 탁본도 인상적이다. 이름 그대로 석수동 암벽에 새긴 타종 벽화를 탁본으로 떴다. 고려시대 장인의 솜씨를 실물보다 훨씬 섬세하게 엿볼 수 있다.도슨트 투어는 안양 여정의 정수다. “예술과 사람 사이의 낯가림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도슨트”라는 안내자의 말처럼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공원을 돌다 보면 작품과의 거리감은 좁혀지고 예술가가 말하 려는 것을 한결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출발지는 ‘안양파빌리온’이다. 안양예술공원의 랜드마크이자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의 허브다. 포르투갈의 건축가 알바로 시자 비에이라가 설계한 건축물로 전시공간 겸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 3년마다 열리는 안양 트리엔날레의 주무대도 바로 이곳이다. 올해는 10월 17일~12월 15일 열린다. 건물은 어느 각도에서도 같은 형태로 보이지 않은 득특한 구조로 설계됐다. 내부엔 ‘돌베개 정원’, ‘무문관’ 등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일상 공간처럼 책을 읽거나 앉아 쉴 수 있다. 밖으로 나서면 ‘거울미로’, ‘안양상자집-사라진 (탑)에 대한 헌정’, ‘먼 곳을 바라보는 남자(창학)/복사집 딸내미(성은)’, ‘용의 꼬리’, ‘전망대’ 등 각국 작가들의 작품이 줄줄이 이어진다. 작품 중 일부는 밤 10시까지 조명이 들어온다. ‘안양상자집’, ‘나무 위의 선으로 된 집’ 등의 야경이 빼어나다.●안양사·삼막사… 고색창연한 옛 절집도 들러볼 만 주변에 고색창연한 옛 절집도 많다. 안양사는 안양이란 도시 이름의 기원이 된 절집이다. 옛 절터 위에 새로 조성됐다. 고려시대 조성된 귀부(도 유형문화재 93호)와 부도 등이 남아 있다. 삼막사는 안양예술공원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바위를 깎아 ‘거북 귀’(龜) 자를 세 가지 다른 형태로 새긴 ‘삼귀자’,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석굴 등이 남아 있다. 삼막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남녀근석(안양8경 중 2경)과 마애삼존불(도 유형문화재 94호)이다. 나라 안에 남녀의 생식기를 닮은 바위가 한두 개는 아니지만, 이렇게 둘이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드물다. 마애삼존불은 남녀근석 바로 앞의 칠성각 안에 모셔져 있다. 칠성각은 조선 영조 40년(1764)에 조성됐다. 삼존불의 가운데, 그러니까 본존불은 ‘치성광여래’다. 자식을 갖고 싶어 하는 이들이 주로 믿었던 부처님으로, 다른 나라에는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다. 칠성각 창건 이전부터 남녀근석이 치성의 대상이었다고 하니, 치성광여래가 남녀근석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삼막사 인근에서 맞는 해넘이가 멋들어지다. 수많은 산과 건물의 숲을 지나 멀리 인천 앞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감상할 수 있다. 글 사진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 안양예술공원의 도슨트 투어 가운데 ‘한낮투어’는 3~11월 평일(오전 11시, 오후 2시), 주말(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4시)에 운영된다. 월요일은 휴무다. 출발 장소는 안양파빌리온이며 참가비는 1000원이다. 90분 소요. ‘달밤투어’는 3~11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7시(6~8월은 오후 8시)에 진행된다. 참가비 3000원. 80분 소요. 687-0548. → 특별전시관의 ‘새겨진 아름다움-안양의 보물을 찾아서´ 전시해설은 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0분, 3시 30분 등 하루 세 차례 진행된다. → 삼막사는 신도 버스를 타고 오르는 게 좋다. 하루 등산 코스와 맞먹는 거리여서 일반 관광객이 걸어 오르기에는 매우 부담스럽다. 삼막삼거리 한마음선원 맞은편에 정류장이 있다. 하루 일곱 번 왕복한다. → 봉암식당(471-7428)은 안양유원지의 터줏대감 정도로 인식되는 맛집이다. 흔한 유원지 식당과 달리 맛이 꽤 깊다.
  • 수없이 칠했어도 비워진 화폭…그는 예술가인가, 구도자인가

    수없이 칠했어도 비워진 화폭…그는 예술가인가, 구도자인가

    “여러분들이 들은 여러 가지 풍문에는 내가 뿔이 난 도깨비 같은 사람으로 묘사가 돼 있을 겁니다. 근데 아침에 뿔은 다 밀어내고 왔습니다. 하하.” 노(老)작가는 민머리를 연신 만지며 말했다. 오는 9월 1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여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88) 작가다. 지난 1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뇌경색 투병의 여파로 휠체어에 앉아서도 30여분 넘게 자신의 예술 철학을 강변했다. ‘도깨비’란 미술계에서 교육자이자 행정가, 평론가로 전방위적으로 활약하며 ‘홍익대 사단’을 공고히 한 패권주의자라는 평을 의식한 언급 같았다.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설명이 붙은 전시에서는 그의 70여년 화업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195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새로 내놓는 신작까지 160여점의 작품을 다섯 시기로 구분해 선보인다. 그의 작업은 시기별 특징이 두드러진다. 첫 번째는 ‘원형질’ 시기다. 1956년 김충선, 문우식 등과 함께 도전과 창조정신을 촉구하는 ‘반국전 선언’을 발표한 작가는 1957년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 ‘회화 No.1’을 선보인다. 앵포르멜이란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으로 서정적 측면을 강조해 색채에 중점을 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이다. 구체적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회화 No.1’에서 그는 대량 학살과 집단 폭력으로 인한 희생, 부조리 등 당대의 불안과 고독을 분출했다. 작가는 1960년대 후반 옵아트(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해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 팝아트를 수용한 ‘유전질’ 연작을, 1969년 인간의 달 착륙과 무중력 상태에 영감을 받은 ‘허상’ 연작을 그린다.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묘법’ 시리즈가 이어진다. 어린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착안, 캔버스에 유백색 물감을 칠하고 연필로 수없이 선을 그었다. 중기로 가면 1982년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해 한지의 물성을 극대화하면서 한지를 마르기 전에 문지르거나, 긁고 밀어 붙인 ‘지그재그 묘법’이 나타난다. 다섯 번째는 ‘후기 묘법’ 시기다. 1990년대 중반, 작가는 손의 흔적 대신 막대기나 자 등을 활용해 일정한 간격으로 고랑을 만드는 일에 골몰했다. ‘색채 묘법’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업에서는 깊고 풍성한 색감이 강조됐다. 전시장 입구에 내걸린 대형 작품 2점은 작가가 올해 완성한 신작이다. 대표작 ‘묘법’ 시리즈가 각각 핑크색, 하늘색 바탕에 얹혔다. “그림에 내 생각을 담아내는 게 아니라 나라는 걸 비워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와서 쉬어갈 수도 있다. 그림은 수신을 향한, 수행을 위한 도구 아닌가.”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70여년 쉬지 않고 현재 진행형인 작가의 분투가 느껴진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예술인가, 구도인가, 둘 다인가. 작가는 그 답을 알 것 같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현대미술 새로 쓴 뒤샹… ‘단색화 1세대’ 윤형근

    현대미술 새로 쓴 뒤샹… ‘단색화 1세대’ 윤형근

    시장에서 사온 남성용 소변기를 전시장에 내놓으며 현대미술을 새로 쓴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 우주를 화폭에 옮긴 한국 추상예술 대모 이성자(1918~2009). 세계에서 먼저 인정받은 단색화 1세대 윤형근(1928~2007).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 거장들이다.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1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올해 주요 전시 일정을 발표했다. 가장 관심이 쏠리는 전시는 국내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전이다. 오는 12월부터 내년 4월까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전시에서는 ‘샘’, ‘레디 메이드’ 등 미의 개념을 전복한 그의 주요 작품, 당대 작가들 관련 작품 등 110여점을 볼 수 있다.외국 거장뿐 아니라 국내 중견 및 거장 작가 개인전을 통해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짚어보고 우리 미술사를 되짚어 보는 계기도 마련한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맡은 이성자(3~7월, 과천관), 윤형근(8~12월, 서울관)뿐 아니라 2004년 요절한 박이소의 작품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7~12월, 과천관)와 세계적인 여류 사진작가 이정진 개인전(3~7월, 과천관)도 열린다. 1세대 건축가인 김중업(1922~1998) 작고 30주기를 맞아 그의 작품 200여점을 볼 수 있는 대규모 회고전이 오는 8월 과천관에서 진행된다. 소장품 연구를 재료로 한 기획 전시도 예정됐다. ?2015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외국인 관장으로 취임한 마리 관장의 임기는 다음달까지다. 마리 관장은 이날 연임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거듭 “예스”라고 답하며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제가 시작한 프로젝트들은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3년은 장기적으로 기획·운영해야 하는 미술관의 주기로 봤을 때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한국에서 첫걸음을 뗀 만큼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날 수 있게 두 번째 임기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중국인에 어렵지 않은 미술로 공략해야”

    “중국인에 어렵지 않은 미술로 공략해야”

    “현대미술이란 전통적인 예술과 전위적인 작업이 동시에 벌어지는,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입니다. 고전적이면서도 추상적, 관념적인 예술이 공존하는 한국 미술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 이번 전시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중국 베이징 진르미술관에서 지난 9일부터 열리고 있는 한국 작가 3인 초대전 ‘하나에서 셋으로’를 기획한 펑펑(彭鋒·49) 베이징대 예술학과 주임교수는 “백남준은 실험성이 강한 예술을 추구했던 세계적인 예술가이고, 이왈종은 현대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김현정은 동양 전통의 기법을 접목한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면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다양함을 보여주는 한국 미술을 중국에 소개하고자 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펑펑 교수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중국관 총감독과 올해 중국 신장비엔날레 총감독을 맡는 등 중국 미술계의 국제통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개막식에 앞서 8일 미술관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1990년대 한국에 머물면서 90% 이상이 추상예술이라는 점에 놀랐다. 하지만 한국 미술의 가능성은 다양성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왈종 작가와 김현정 작가의 작품은 고전적 예술에서 출발해 현대성을 띤 작품들이다. 특히 김현정의 작품은 당대 미술이 심리치료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전통을 바탕으로 관념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을 구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치유 기능을 하는 동양적 문화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본다”고 기대감을 표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중국 진출에 실패하고 돌아간 이유는 서양적 개념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국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현대와 전통을 결합하고, 중국인들이 보기에 어렵지 않도록 중국 문화를 접목시켜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작품인 듯 자연인 듯… 프랑스 미술계, 한국 작가와 썸 타다

    작품인 듯 자연인 듯… 프랑스 미술계, 한국 작가와 썸 타다

    올여름 프랑스 미술계가 한국 작가들에게 유난히 집중하고 있다. 한국과 프랑스,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추상예술의 대표 작가 이우환(78)이 파리 근교의 유서 깊은 베르사유 궁에서 17일부터 ‘이우환 베르사유’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갖고 있다. 베르사유궁에서는 몇 해 전부터 매년 여름 시즌에 현대미술의 거장들을 선정해 전시회를 열고 있다. 미니멀하고 명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이우환은 이번 베르사유 궁 전시에서는 자연석과 철판을 이용한 ‘관계항’(Relatum) 연작을 선보인다. 미술관 내부에 설치된 커튼타워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앙드레 르노트르가 설계한 정원에 작품을 설치했다. 자연 그대로의 물질인 돌과 가공된 물질인 철판 사이의 긴장과 균형을 통해 르노트르가 설계한 독창적인 디자인의 정원이 담고 있는 역사와 숱한 이야기들을 동양적 사유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우환 작가는 “돌은 자연을, 철판은 산업사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들 소재를 통해 문명을 얘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설치작품들은 베르사유 궁 건물 안에도 일부 전시되지만 대부분 궁전 앞 정원과 운하 주변 등 야외에 설치돼 있다. 연간 방문객 675만명에 이르는 베르사유 궁 미술관은 루이 14세 시절의 세계 예술 중심지로서 영화를 현대예술로 되살린다는 취지로 2008년 제프리 쿤스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유명 작가들을 차례로 초대해 왔다. 이우환은 아시아 작가로는 일본의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2010년)에 이어 두 번째다.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궁 박물관장은 “이우환의 작품은 조용하고 매혹적인 시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지금까지 실내 전시에는 1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으며 야외 설치 및 조각 작품 전시는 400만명이 관람했다. 이우환의 베르사유 전시는 오는 11월 2일까지 계속된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북서부 도시 피에트라산타에 거주하며 유럽을 무대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조각가 박은선(49)은 프랑스 서부 해안의 휴양도시 라볼에서 시 초청으로 야외 조각전을 갖는다. 박은선은 “라볼은 유럽 대륙뿐 아니라 바다 건너 영국인들도 즐겨 찾는 프랑스 서부 최고의 휴양지로 매년 유럽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한 명 선정해 여름 휴가기간 중 기획전시를 열고 있다”며 “지난해 룩셈부르크의 에스페랑주 시, 스위스 루가노 시에서 차례로 열린 야외 조각전이 좋은 평가를 받아 이번에 운 좋게 초청작가로 선정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리석 조각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국립아카데미 출신의 박은선은 색깔이 다른 대리석 혹은 화강석을 판으로 만든 뒤 깨뜨려서 번갈아 붙이고 형태를 다듬는 방식으로 ‘무한증식’, ‘연결성’, ‘공유’ 등 연작을 발표해 왔다. 18일 개막행사를 시작으로 오는 9월까지 넉 달 동안 열리는 야외 조각전에서는 대리석과 화강석을 이용한 그의 대표작 중 대형 모뉴멘트 작품 8점을 시내와 해변 산책로, 공원 등에 전시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추상조각가 美 사피로 개인전

    추상조각가 美 사피로 개인전

    미국 출신의 세계적 추상조각가 조엘 사피로(67)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사피로는 직육면체나 원통형의 오브제로 독창적인 조형물을 빚어내는 추상 작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국내 개인전에서는 소품에서부터 대형 야외 조각까지 근작 조형물을 비롯해 드로잉 작품 등 20여점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회를 앞두고 최근 방한한 사피로는 자신이 추상예술을 하는 이유를 “특정한 인종이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는 소구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전에 내놓은 작품의 다수는 인체의 정지된 동작을 표현한 듯한 모습들이다. 얼핏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있으나, 걷거나 뛰거나 춤추는 인체의 움직임을 포착한 작품들은 직육면체의 구성요소들과 합쳐져 운동감과 속도감을 동시에 뿜어내는 묘미가 있다. 작가는 “생동감 있는 형태를 추구하지만 미리 특정한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지 않고 작업과정에서 형태를 만들어 간다.”고 창작방식을 설명했다. 직육면체 오브제를 즐겨 활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떤 글을 좋아한다고 알파벳에 애착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하냐?”는 반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퐁피두 센터, 테이트 갤러리 등 세계적 미술관들에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서울 전시는 24일까지.28일부터 새달 30일까지는 부산 해운대 노보텔 호텔의 가나아트부산에서 이어진다.(02)720-1020.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문화마당] 삶의 시,발레/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시인

    일본의 영화감독 이와이 지가 연출한 ‘하나와 앨리스’를 보면 망외의 소득까지 얻을 수 있다.‘이와이 지는 여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녀의 감성을 잘 포착한 뛰어난 연출력을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면, 망외의 소득은 소녀들이 추는 발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발레 장면은 전편을 통해 몇 번에 걸쳐 나오는데, 각각의 장면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내 느낌으로는 실제의 발레 공연보다도 일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물론 거기에는 생동하는 인물의 삶의 모습과 생의 잔영이 춤의 전후에 잘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 내가 발레를 보러간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금년이 다하기 전에 꼭 발레를 보러 가리라 마음을 먹고 어두운 극장을 나왔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최근에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책을 보게 되었다.‘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하나와 앨리스’와 꼭 겹치는 것이었다. ‘하나와 앨리스’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잡지 표지모델 오디션을 보러간 여주인공 앨리스가 엉뚱하게도 장기를 선보이라는 말에 발레를 하는 장면이다. 소녀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으므로 발에 종이컵을 테이프로 두르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그대로 춤을 춘다. 소녀는 결국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고 마침내 하이틴 잡지의 표지 모델로 선정된다. 아, 발레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강수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발을 본 적이 있는가? 무슨 추상예술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토슈즈 안에서 가차없이 다루어져 뒤틀리고 휘어지고 뼈만 앙상한 발의 형체를 겨우 짐작케 한다. ‘하나와 앨리스’에 나온 소녀들이 춤을 추다 발을 삐고 넘어지고 또 새로운 도약을 배우고 하는 장면이 다시 떠오른 것은,‘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의 저자인 무용평론가 장광열씨가 발레리나인 그녀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를 물었을 때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다른 삶(발레리나가 아닌 삶)을 동경해본 일이 없어요.‘혹시’라도 가정해본 일도요. 나는 단지 ‘나’로 살 뿐이죠. 파격적이고 격정적인 사랑과 생활은 무대 위에서 경험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아니, 무대 위에서 완전히 몰입하려면 오히려 현실에선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지요.” 질문한 사람이 무색할 정도의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그 정도로 강수진은 발레를 사랑한다.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던진 것이다. 강수진이 춤추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동료들은 말한다.“수진은 꼭 붓다 같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동요 없이 자기의 일과 역할에 몰입하거든요. 그래서 그녀와 함께 춤을 출 때면 마치 수행을 하는 기분이 들지요.” 춤은 시요, 소설은 보행이라고 한다. 발레의 장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과연 발레는 시인 것이다. 시가 그렇듯이, 춤이 그렇듯이 문화를 향수한다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어려울수록 문화는 우리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정은숙 도서출판 ‘마음산책’ 대표·시인
  • 중국서예론 문선/곽노봉 엮어옮김(화제의 책)

    ◎서예의 이론과 기법·역사적 연원 등 정리 서예는 점과 선을 통해 작가의 정감을 표현하는 추상예술이다.때문에 전문적 안목,즉 서예에 관한 이론을 갖추지 않으면 옥석을 구분하기 힘들고 서예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현재 서예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개인서실과 문화센터,서예관,대학교의 서예과 등.그러나 이중 어느 곳도 서예이론을 중시해 가르치지 않는다.기껏해야 도제식 교육을 답습하는 정도다.「중국서예론…」은 바로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서예의 이론과 기법·역사적 연원·비첩고증·서예감상 및 서예가의 실제체험 등을 다룬 현대 중국의 서예관련 논문 21편을 싣고 있다.당나라의 유명한 서예가인 손과정과 안진경의 서예이론을 비롯,달중광이 지은 청나라의 서예이론서 서벌,운필법의 핵심인 질삽,서예감상법,서체연구의 자료가 되는 비각과 비첩,서예의 다섯가지 요점인 관·임·양·오·창에 관한 것 등 다양한 내용이 서예의 깊은 멋을 느끼게 한다.동문선 1만8천원.
  • 일 구마모토아트폴리스「신치주거단지」(세계의명소/걸작건축감상:23)

    ◎도시민 주거 특성·자긍심 높인 “집합 주택”/40대 건축가 5명,5개 구역 나눠 “개성 설계”/단지마다 독창적 공간 창출… 문화도시로/호소가와 전 총리 지사시절 「지자체 특색」 살린 작품 지난 8월15일 조선총독부에서 중앙청으로 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그 역할이 속절 없이 바뀌기를 거듭하던 한 건물의 첨두를 잘라 버리는 의식이 거행되었다.해방 5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의 잔재를 상징적으로나마 끊어버리자는 취지에서였다.그 전에도 옛 청와대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지은 적이 있고,현 서울시청사도 곧 새로 짓는다고 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임기간 중에 무언가 잊혀지지 않을 만한 업적을 남겨놓으려 한다.그런데 이런 업적이 무형의 것이기보다는 실제로 가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그래서 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들은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어놓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인도의 타지마할,중국의 자금성,영국의 트라팔가 광장 등이 옛날의 예라면,프랑스 파리의 퐁피두 센터,미국 애틀랜타의 카터 도서관 등이 오늘의 예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좋은 예보다는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전통건축양식을 본떠 지어졌으나 박대통령이 좋아하던 계란색으로 온통 뒤덮여 그 성격이 모호해져 버린 현충사 등의 기념건물이 있었다.전두환 대통령시대는 아직도 빗물이 몇십군데에서나 새고 있다는 천안 독립기념관이나 공사중단의 상태로 볼성 사납게 남아있는 평화의 댐을 남겨 놓았다.그리고 노태우 대통령 시대는 부실공사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주택 200만호 등의 대역사를 남겨놓았다.마지막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와의 차별화에 주력하는 때문인지 짓기보다는 헐기에 더욱 관심을 쏟는 듯하다. ○“양보다 질” 높이 평가 이웃나라 일본은 조금 다르다.몇년전 일본 총리를 지냈던 호소카와(세천호희)는 구마모토현(웅본현)지사로 재직 중이던 1988년,구마모토 아트 폴리스(ArtPolis)라는 도시설계 및 환경설계운동을 추진했다.이것의 근본 취지는 지방자치제의 특색을 살린 도시·건축문화를 추구하자는 것이었다.지역 내의 모든 개발행위가 궁극적으로는 그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되기 때문에 환경설계나 건축행위의 결과는 양보다는 질의 측면에서 평가받아야 하고,이를 통해 미래의 세대에게 자랑스런 문화적 도시환경을 물려주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자체 위주의 도시건축운동은 매우 독창적인 도시공간의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실제는 구마모토시가 국제적인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해가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대한주택공사의 연구원들이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와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구마모토 아트 폴리스의 작품으로 선정된 집합주택은 도시민 주거특질의 향상이라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목표의 달성뿐만 아니라 지역내 주민들의 자긍심 향상이라는 비가시적 정주성을 고양하는 사회정책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구마모토 아트 폴리스 작품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치(신지)주거단지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신치 단지는 전체 면적이 약4만여평으로 1960년대에 지어진 7백여 가구의 저소득층 주거단지를재개발하여 시영 영구임대 아파트를 건립한 것이다.1991년에 입주가 시작되어 1995년 현재 1천여가구 4천명의 입주가 거의 완료된 상태다. ○지형맞게 높낮이 살려 이 단지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것을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인 아라타이소자키(기기 신)가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면서 5개의 존으로 나누었으며 각각의 존을 일본의 40대 건축가 5명이 하나씩 나누어 나름대로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아파트 건물군을 설계하였다. 단지 서쪽 끝의 A단지는 2,3층 아파트 건물이 중정을 둘러싸고 서 있고 그 양쪽 외곽으로 5층 건물 2동이 길게 배치되어 있다.건물의 외벽은 어두운 색을 주조로 하여 차분한 느낌이 들게 했으며 외부공간은 단지 원래 지형에 맞추어 높낮이를 그대로 살려 넓은 계단을 놓고 그 사이에 잔디밭과 얕은 인공연못을 설치하였다.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우리네 시끌벅적한 아파트 단지와는 아주 대조적이다.게다가 과감하게 1층 부분을 빈 공간으로 처리하여 보행자의통로로서 또한 뜨거운 여름날 그늘진 휴식처로 쓸 수 있도록 한 점은 본받을만 하다. 두번째로 개발된 B단지는 1백50m가 넘는 긴 아파트 건물 2동이 넓은 보행자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다.이 건물 역시 어두운 색을 썼고 높이도 5층에 지나지 않는다.이 단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의 보행자 도로인데 아무런 조경시설물 없이 콘크리트 바닥에 가로등만이 있는 이른바 미니멀리즘(minimalism)에 입각한 설계다.나름대로 저소득층의 아파트 단지 관리비를 아끼자거나 혹은 건축가의 철학에 따라 자연과 대비되는 철저한 인공의 삶터를 창출하자는 의도에서 이렇게 해 놓았을 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네 정서로는 영 이해할 수가 없는 그런 장소가 되고 말았다.건축이 형태만을 위한 추상예술이냐 아니면 삶을 위한 도구인가를 따지는 건축계의 끊임 없는 논쟁은 바로 이런 곳에서 출발하는 것일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낙천적인 삶을 표현 건물 입구부분의 계단실은 건물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돌출되어 있는데 1층부의 콘크리트 상자와그 위의 철골구조는 마치 교도소의 입구 같은 느낌이 들어 이 B단지만큼은 실패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여기서 실제로 살고 있는 주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구마모토 아트 폴리스 작품에서 산다는 자긍심이 앞설지 혹은 이렇게 비인간적인 장소에서 사는 것을 불만족스러워 할지 한번쯤 제대로 연구해 볼 일이다. C단지의 아파트 역시 길게 들어서 있는 건물인데 밝은 색과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창문과 베란다를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은 입면을 가지고 있다.획일적인 입면에 비해 거기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제각기 다르며 또한 복잡다난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 흥미롭다. D단지의 아파트는 다분히 유희적이다.검정색과 밝은 원색을 자유분방하게 쓰고 옥외 계단은 제멋대로 갖다 붙여놓은 듯하다.여기서는 다양하고 낙천적인 삶의 모습이 느껴진다.저소득층을 위한 시영 영구임대 주택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려는 건축가의 노력이 돋보이기는 하나,너무나 유희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어 그의 의도가 반감되어 버리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단지의 아파트는 저소득층 중에서 최상위층을 대상으로 한 건물로서,1층 주호에는 독립된 정원을 가질 수 있는 배려를 해 놓았다.역시 밝은 색과 다양한 형태를 적절히 조합하여 낙천적이고도 고급스러운 삶의 모습을 담으려 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임대 아파트 개발에 일본 최고의 건축가들을 초청하여 밝고 낙천적인 이미지를 창출해내고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낸 구마모토현의 호소카와 지사는 결국 일본 총리까지 지내게 된다.무슨 기념관이다 무슨 박물관이다 하는 곳에 자신의 족적을 남기기 보다는 이렇듯 주민의 실제적 삶에 이바지하는 일을 남기는 것에 가치를 둔 한 정치가의 탁월한 견해가 부럽다.
  • 문신 그리고 마산(외언내언)

    『나는 아마 백제 석공의 후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던 조형예술의 거장 문신씨가 갔다.예술작업의 고통과 가난한 예술가의 타향살이의 고달픔 때문인지 늘 수척하고 쇠약해 보이던 그의 모습을 이제는 잊어야 하려나 보다. 아프리카 흑단으로 빚은 한마리 작은 생물체 같은 「의식하지 않은채」 빚은 그의 조각을 보고 사람들은 『개미가 연상된다』고 했다.그래서 그의 조각 「개미」는 탄생했다.그러나 그것은 개미는 아니었다.콩나물이 두쪽의 머리를 들고 똑같이 자라지만 햇빛의 방향이라든가 영양의 흡수에 따라 똑같지는 않듯이 「똑같은 것」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추상에 대한 개념이다.그런 그의 예술을 두고 프랑스 평론가 자크 도판은 『추상이란 말의 가장 절대적인 의미에서 추상예술』이라고 말했다. 작업이 너무 힘들어 오른 팔만 길어지고 오른쪽 귀가 「당해서」 잘 안들리는 통에 말씨도 어눌했던 그가 스스로를 「백제 석공의 후손」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가난한 만학의 미술학도로 생계를 위해 프랑스의고성수리를 할때 그 돌을 주무르는 일에서 깨달은 자신의 조형적 재능과 흥미 때문이었다. 고향 마산에 대한 애착이 유난해서 그곳에 미술관을 마련했고 그것이 억울한 일로 훼손되는 설움도 당했었다.그래도 미술관이 잘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영원의 길」을 떠나는 그를 잘 놓아주지 않았던 듯하다.「마산시민과 민족전체의 문화적 자산」인 미술관을 『남은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해 국제미술관으로 가꾸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온갖 고난의 길로 살다간 그의 숭고한 예술인생은 이제 소중한 우리의 자산으로 남았다.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미술관과 작품들을 그가 한만큼 사랑하며 가꾸는 일은 유언이 아니라도 남은 사람의 몫이다.특히 그로해서 더욱 향기가 높아진 고향 마산의 더 큰 몫이다.
  • 「예술 4만년전 시작」 설 문제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서 주장/고고학자가 일률 규정… 무의미/동굴벽화 2만2천년전 첫 발견 최근 프랑스 쇼베동굴벽화의 발견을 계기로 예술작품이 4만년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에 문제점이 있다는 지적이 높다.미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는 이런 의미에서 선사시대 예술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따라서 현대의 고고학자가 정해놓은 일률적인 기준에 선사시대의 예술을 맞추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편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지금부터 1만년이전)부터 지금까지의 예술작품은 앞으로 창조될 예술작품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약 4만년전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예술은 처음에는 빠르게 전파되었다.시작된지 5천년안에 온 대륙에 퍼진 것이다.고고학자들은 1만개이상의 조각과 음각화를 유럽전역과 남아프리카·북아시아·호주에서 발견했다.작품도 사실적인 것부터 추상까지,소재도 뼈·뿔·상아·나무·진흙등 현대의 예술가들이 쓰는 소재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현대인들의 미의식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기 시작한 벽화가 발견된 것은 2만2천년전의 동굴에서다.동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부터 반인반수의 모습,기하학적인 형태의 추상예술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이러한 추세는 1만전 빙하시대까지 이어진다.그러나 실상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프랑스의 저명한 고고학자 장 클로트박사는 『유고슬라비아 지역만해도 수많은 동굴이 있지만 벽화는 한군데서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럽과는 달리 호주 원주민들은 같은 자리에 시간을 두고 여러번 덮어씌워 그려 이점이 연대연구를 하기 힘든 부분이다.남아프리카의 경우는 이보다도 훨씬 연대측정이 힘들다.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고고학자들은 나미비아의 동굴에서 적어도 4만년이상은 된 조개껍질로 만든 장신구를 발견한 바 있으나 연대측정은 정확치않다.이외의 한국·일본·중국 등에서는 이러한 예술작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비추어 볼때 예술이 어느 한곳에서 발상돼 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선사시대의 예술이라는 개념을 정의하는 것조차 과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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