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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동학혁명 유족수당

    [씨줄날줄] 동학혁명 유족수당

    전북특별자치도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유족 723명에게 1인당 연 120만원을 지급한다. 132년 전 사건에 세금을 쓴다니 느닷없어 보이지만, 동학의 독립유공 인정을 둘러싼 논의는 사실 반세기가 넘게 이어져 왔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반봉건·반외세를 내걸고 두 차례 봉기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됐다. 일제는 이 사건을 ‘동학당의 난’으로 불렀다. 그러다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하려는 흐름 속에서 ‘동학혁명’으로 명명됐고 갑오동학혁명기념탑(정읍, 1963), 위령탑(공주, 1973) 등 기념물이 전국에 세워졌다. 80년대엔 민중사학이 동학을 민중 저항의 원류로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공식 명칭이 확정됐다. 이 법에 따라 설치된 심의위원회가 제적등본·족보·옛 문헌·구술 등을 토대로 혁명 참여자를 약 3800명으로 정리했다. 이후 유족으로 등록된 사람은 약 1만명. 그럼에도 서훈의 문턱은 높았다. 항일 독립유공자 서훈의 기점이 1895년 을미의병인데, 동학은 이보다 1년 앞서기 때문이다. 혁명 지도자 전봉준·최시형은 1977년부터 서훈 심사에 올랐지만 “1894년을 국권침탈로 인정하면 대한제국의 자주적 개혁을 부정하게 된다”는 이유로 매번 보류됐다. 국가 보훈이 막힌 사이 정읍시가 2020년 기초지자체 최초로 월 10만원 지급을 시작했다. 전북도가 지난해 월 5만원으로 뒤따르다 올해 연 120만원으로 인상했다. 2004년 특별법 제정 20여 년 만에 광역지자체 최초로 유족수당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동학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개정안이 국회 정무위에서 심사 중인데, 통과되면 2차 봉기 참여자 481명의 후손이 1인당 월 170만~210만원의 보상금을 받는다. 국회예산정책처 추계 기준 5년간 550억원을 웃도는 규모다. “임진왜란 의병 후손들한테도 줘야 한다”는 시중 우스개가 소란스럽다.
  • AI시대, 다시 읽는 ‘동학’

    AI시대, 다시 읽는 ‘동학’

    지난 11일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올해는 1894년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내걸고 일어난 역사적 민주주의 운동인 동학농민혁명 132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동학이라고 하면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였고 나중에 천도교로 이름을 바꿨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현대철학분과에 속한 철학자 6명은 전통과 개화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한국 근현대의 사유와 실천의 관점으로 동학을 재해석한 ‘다시, 동학’(동녘)을 펴냈다. 동학은 19세기 중반 경북 경주 양반이었던 수운 최제우가 ‘내 안에 하늘을 모신다’는 시천주 사상에서 출발해 창시했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외부의 문명에 맞서 제도를 정립했다. 또 내부의 종교성과 공동체성을 재정렬하며 일제강점기를 지나 20세기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맞춰 스스로를 재구성해왔다. 6명의 필자는 “동학은 기존 세계가 붕괴하던 시대에 새로운 질서와 삶의 형식을 요청했던 사유와 실천의 결합”이라면서 “억압받던 민중의 삶과 공동체 윤리, 정치적 실천이 맞물린 역사적 시도”였다고 입을 모은다. 책은 1840년대 동아시아 격변기부터 동학이 시작된 1860년을 거쳐 1940년대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동학이 기존 시대의식과 만나 어떻게 적응하고 사상을 정립해갔는지 시대순에 따라 8편의 글로 구성됐다. 특히 처참한 민생에 공감하며 평등한 삶을 고민하던 최제우가 제안한 동학 공동체는 신분제 아래 불평등과 차별의 잣대를 지녔던 유교 공동체를 대체하는 대안이었고 평등의 이념을 실천하는 위계 없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동학 구성원들의 연대 의식은 조선의 기존 공동체와 달랐으며 더 끈끈했다. 동학농민운동이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문화운동으로 열망하는 근대적 문명 실현과 식민지 국권 회복’이란 글에서는 천도교 문화운동은 새로운 사상을 수용해 봉건성을 극복하려 한 반봉건 운동이고 식민 지배를 극복할 토대를 구축하고자 한 반식민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필자들은 “동학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해체, 민주주의의 위기, 분단 체제라는 한국의 현재 조건 속에서 새로운 공공성과 인간, 사회를 다시 상상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 “아이 때리는 건 곧 한울님 때리는 것”…천도교, 대전 초등생 사건에 애도 성명

    “아이 때리는 건 곧 한울님 때리는 것”…천도교, 대전 초등생 사건에 애도 성명

    “아이를 때리지 마라.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해월신사 최시형) 천도교가 대전 초등학생 피살사건과 관련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을 14일 냈다. 방정환어린이도서관,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천도교여성회본부, 천도교청년회, 동학소년회 등 천도교 관련 단체들은 연합 성명을 통해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피살사건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보호하는데 얼마나 부족한지를 다시 드러낸 비극”이라며 “천도교는 피해 아동의 성령출세(죽은 이의 성령이 후대의 성령 속에 다시 태어나는 것)를 심고(한울님께 마음으로 고하는 것) 한다. 정부와 관계 기관은 더 이상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즉시 마련하라”고 밝혔다. 천도교는 “지난 12일 정부가 밝힌 ‘정신질환 등으로 교직 수행이 곤란한 교원에게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직권휴직 등 필요한 조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은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며, 어린이 보호를 위한 ▲학교 및 지역 사회의 아동 보호망 강화 ▲위험 감지 및 즉각 대응 시스템 구축 ▲아동 대상 강력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교사 대상 전문 심리 상담 프로그램 강화 및 의무화 ▲각급 학교에 학생 생활 책임 교감 별도 임명 ▲아동 안전 전담 인력 배치 확대 등의 조치를 촉구했다. 올해는 천도교소년회가 세계 최초로 어린이 인권선언을 한 지 102년째, 어린이날을 만든지 103년째 되는 해다.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는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어린이 인권 향상에 앞장서 왔다.
  • “고교 교과서 ‘항일 투쟁’ 서술, 동학농민군 유공자 서훈해야”

    “고교 교과서 ‘항일 투쟁’ 서술, 동학농민군 유공자 서훈해야”

    60여년째 계속되는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 논란이 조속히 마무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동학 특별법이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무장투쟁이라고 정의하고 학교에서도 항일 구국 투쟁이라고 가르치는데 국가보훈부만 유공자 서훈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부만 유공자 서훈 보류 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봉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역사학계는 1990년부터 독립운동의 시작을 1894년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보고 있다. 2차 동학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해 시작된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것이다. 현재 9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도 모두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 구국 투쟁’으로 서술한다. ●전봉준 등 2차 혁명 참여자 서훈 못 받아 그러나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지난 3월 현재 1만 8018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 2722명이 서훈을 받았으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없다. 동학 단체 등이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손화중, 전봉준, 최시형 등에 대해 서훈을 신청했으나 모두 보류됐다. 이는 보훈부가 1962년 제정된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에 따라 항일독립운동의 기점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사변) 직후의 을미의병으로 보고 있어서다. 보훈부는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도 서훈 내규를 62년째 고수하고 있다. 유공자를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로 규정하는 독립유공자법 제4조 때문이다. 이에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동학 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돼 귀추가 주목된다. 윤준병(정읍·고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2대 국회 개원과 함께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법’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일제의 국권 침탈 전후’를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로 명확히 규정했다. 원동호 정읍시 주무관은 “윤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통과되면 독립운동 기점이 1년 이상 앞당겨져 경복궁 점령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갑오의병과 2차 동학혁명 참가자들이 서훈 대상에 들어가게 된다”며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 “동학혁명은 항일투쟁” 가르치는데… 유공자 서훈 보류 ‘엇박자’

    “동학혁명은 항일투쟁” 가르치는데… 유공자 서훈 보류 ‘엇박자’

    고교 한국사 교과서 9종 모두 서술동학혁명 특별법도 항일투쟁 규정전봉준 등 2차 참여자 서훈 못 받아“보훈부 62년째 고수 내규 바꿔야” “학교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항일 구국투쟁이라고 가르치고, 동학특별법도 항일 무장투쟁이라고 정의하는데 유독 국가보훈부만 유공자 서훈을 보류하고 있습니다.”(신병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관 운영부장)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놓고 60여년째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 속히 마무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된다. 15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현재 9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 구국 투쟁’으로 서술하고 있다. 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동학기념재단은 지난 1990년부터 역사학계가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1894년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차 동학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여 시작된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올해 3월 현재 1만 8018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 2722명이 서훈을 받았으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없다. 동학단체 등은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손화중, 전봉준, 최시형 등에 대해 서훈을 신청했으나 모두 보류됐다. 이는 보훈부가 1962년 제정된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에 따라 항일독립운동의 기점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직후의 을미의병으로 보고 있어서다. 보훈부는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훈 내규를 62년째 고수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 제4조는 유공자를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동학 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됐다.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정읍·고창)은 지난달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법’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를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로 명확히 규정했다. 신병구 재단 부장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독립운동 기간이 1년 이상 앞당겨져 경복궁 점령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갑오의병과 2차 동학혁명 참가자들이 서훈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며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 ‘항일 구국 투쟁’이라 가르치고 유공자 서훈은 모르쇠

    ‘항일 구국 투쟁’이라 가르치고 유공자 서훈은 모르쇠

    “학교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항일 구국투쟁이라고 가르치고, 동학특별법도 항일 무장투쟁이라고 정의하는데 유독 국가보훈부만 유공자 서훈을 보류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여부를 놓고 60여년째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 속히 마무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된다. 15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현재 9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 구국 투쟁’으로 서술하고 있다.2004년에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동학기념재단은 지난 1990년부터 역사학계가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1894년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2차 동학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여 시작된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올해 3월 현재 1만 8018명의 독립유공자 가운데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 2722명이 서훈을 받았으나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없다. 동학단체 등은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손화중, 전봉준, 최시형 등에 대해 서훈을 신청했으나 모두 보류됐다. 이는 보훈부가 1962년 제정된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에 따라 항일독립운동의 기점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직후의 을미의병으로 보고 있어서다. 보훈부는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훈 내규를 62년째 고수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 제4조는 유공자를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동학 농민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됐다.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정읍·고창)은 지난달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법’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를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로 명확히 규정했다. 신병구 재단 부장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독립운동 기간이 1년 이상 앞당겨져 경복궁 점령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갑오의병과 2차 동학혁명 참가자들이 서훈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며 법안 통과를 촉구했다.
  • [길섶에서] 닭도 못 먹는다고?

    [길섶에서] 닭도 못 먹는다고?

    “죄송한데 전 ‘프루테리언’(fruitarian)이에요.” 영화 ‘노팅힐’에서 남자 주인공의 소개팅녀가 육식 위주의 저녁상을 거부하며 내뱉은 말이다. 채식주의자를 넘어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 과일만 먹는다는 의미다. 식탁 위의 당근 요리도 “살해당했다”며 질색한다. 채소나 과일에도 감정을 느끼는데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살생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은 더 클 터다. 산골 소녀와 슈퍼 돼지의 우정을 그린 영화 ‘옥자’를 보면서 과몰입 금물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혹여 옥자 때문에 삼겹살 앞에서 주저하게 될까 봐서다. 개식용 금지에 탄력받은 동물단체가 복날을 맞아 닭도 먹지 말자는 캠페인을 들고 나왔다. 이러다 인간에게 허락된 식재료가 남아날까 싶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 개념을 제시했다. 천지만물이 모두 하늘이며 사람과 동식물이 서로를 먹고 사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사람이 땅에 묻히면 자연에 ‘먹히는 것’이니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해 죄책감 대신 존중감을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 81세 황석영의 다음 장은 여전히 설렌다

    81세 황석영의 다음 장은 여전히 설렌다

    황 “국내 독자들 속상해하실 거 같아”영국서 넘어져 지팡이 짚고 나타나“상 받으려나 봐” 농담에 박수갈채“앞으로 쓸 소설이 세 권이나 남아 노벨문학상도 받고 싶어” 계획 밝혀부커상 獨 에르펜베크의 ‘카이로스’ 숨죽여 기다렸지만 기대했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21일 밤(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시상식. 부커상 심사위원장인 캐나다 작가 엘리너 와크텔은 올해 최종 수상작으로 동독 출신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의 ‘카이로스’를 호명했다. 1980년대 동베를린을 배경으로 젊은 여성과 나이 든 남성 사이의 파괴적인 사랑을 다룬 소설이다. ‘철도원 삼대’(영문판 Mater 2-10)로 최종 후보에 올랐던 황석영(81)은 안타깝게 고배를 마셨다. 2016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한국에서는 최초로 이 상의 수상작이 됐고, 2018년엔 그의 다른 소설 ‘흰’도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22년 정보라 ‘저주토끼’, 2023년 천명관 ‘고래’도 최종 후보에 올랐다. ‘철도원 삼대’는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다섯 번째 한국 작품이다. 황석영은 시상식 직후 한국 취재진에게 “(국내 독자들이) 속상해하실 것 같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더 열심히 쓰겠다”고 담담히 말했다. ‘더 열심히 쓰겠다’는 황석영의 약속은 절대 빈말이 아니다. 여든을 넘긴 노작가는 일찍이 “앞으로 쓸 소설이 세 권이나 남았다”며 구체적인 집필 계획까지 밝힌 바 있다. 600년 된 나무 이야기를 다룬 ‘할매’와 노인이 된 독립운동가 홍범도의 삶 그리고 ‘최보따리’라고도 불렸던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행적을 따라간 소설까지 총 셋이다. 특히 ‘할매’로는 부커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노벨문학상을 받고 싶다는 솔직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의 도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유다. 지난 17일 영국 현지에서 열린 최종 후보 낭독회에서 황석영은 지팡이를 짚은 모습으로 등장해 좌중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며 다리를 다쳤다. 뼈에 금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석영은 오히려 “아마 상을 받으려나 보다. 나쁜 일이 있으면 상을 줘야 하거든”이라며 여유 넘치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현장에서는 낭독회 참석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고 한다. ‘철도원 삼대’는 황석영이 1989년 방북 당시 만났던 한 노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방북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등 질곡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작가가 끝끝내 품었던 이 이야기는 31년 만인 2020년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백만·이일철·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이백만의 증손자이자 발전소 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진오의 이야기다. 황석영은 출간 당시 작가의 말에서 “우리 근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몇몇 빠진 부분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은 드물었다”며 소설을 쓴 배경을 짚었다. 소설은 이처럼 한국 현대사 속 ‘잃어버린 고리’인 노동운동의 궤적을 오롯한 서사로 복원한 동시대의 고전이다. 분단이라는 민족의 비극 앞에서 ‘빨갱이’라는 말로 매도됐던 노동자들의 삶을 그리는 것은 “근대를 극복코자 했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다”던 황석영의 말과도 연결된다. 비록 수상은 불발됐지만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가 세계적인 보편에 가닿았다는 것은 한국 현대소설의 역사에서도 남다른 의미가 있다. 문학평론가인 우찬제 서강대 국문과 교수는 “앞서 여성적 시각에서 독특한 상상력을 펼쳤던 한강, 김혜순 등과 달리 정통적인 리얼리즘으로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복원한 황석영이 주목받은 것은 한국문학의 또 다른 면모를 세계에 알린 계기”라고 평가했다.
  • ‘팔순의 집념’ 황석영 “600년 나무 이야기로 노벨문학상 받고 싶다”

    ‘팔순의 집념’ 황석영 “600년 나무 이야기로 노벨문학상 받고 싶다”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자꾸 옆에서 이야기하니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상해. 이번엔 진짜 받으려나? 누가 그러더라고요. 욕망을 왜 자꾸 저어하냐고. 서슴지 말고 자기화하라고. 그것도 일리가 있겠다고 봤어요. 이번엔 받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국 문학계가 또다시 들썩이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황석영(81) 작가의 ‘철도원 삼대’(영문판 Mater 2-10)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려서다. 창비는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황 작가의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윗눈꺼풀이 자꾸 내려와서 눈을 찔러 갖고 이걸 찍 올렸어요. 난 이런 거 안 할 줄 알았더니…. 밀란 쿤데라가 자기 타이밍을 끝냈을 때 나도 끝난 줄 알았지. 그런데 요새 수명이 늘어서 제 타이밍도 연장되는 것 아닌가….” 가식을 젖혀 둔 노작가는 나이 듦에 따른 신체 변화를 재치 있게 전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분위기에 대한 은근한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1989년 방북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던 그는 1998년 석방 이후 20년 이상 활동하면서 전 세계 32개국에 98종 정도의 책이 소개된 것으로 기억했다. 그사이 국제 문학상 후보로도 80여차례 올랐다. “익산 미륵사 밑에서 만난 보살이 있어요. 그분이 그러는데 내가 21세기에 걸작 세 편을 쓴대. ‘철도원 삼대’ 하나는 썼고, 두 개 더 쓴다는 얘기인데…. 마침 더 쓰려는 생각이 있거든요.” 오에 겐자부로, 필립 로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이름을 불렀다. 여든쯤 절필을 선언했던 작가들인데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게 황 작가의 욕심이다. 그러면서 마치 약관의 작가가 미래를 그리듯 현재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었다. “군산에서 만난 600년짜리 잘생긴 나무에 얽힌 이야기. 제목은 ‘할매’, 영어로 번역하면 ‘그랜드마’겠지. 일단 ‘철도원 삼대’로는 부커상을 받고 이걸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싶어요. 그다음으로 (문성근씨) 당숙과 홍범도의 이야기, 마지막으로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35년간 떠돌아다니면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지. 그 사람의 행각을 쓸 겁니다. 그때까지만 하려고 해요.” 원고지 20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꿰뚫는 키워드는 ‘노동’이다. 이백만·이일철·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지금 이곳에서 아파트 16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이는 이백만의 증손자 이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이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현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로 작가가 30년을 바친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 소설이 훑고 있는 우리 근현대 시간은 족히 100년. 그렇게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오는 공장 굴뚝에 올라야 한다. 투쟁은 노동자의 숙명인 걸까. 기업 경영의 효율을 최고로 치는 시대, 걸핏하면 로봇과 인공지능(AI)을 들먹이며 노동의 실존을 겁박하는 시대에 황 작가의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절대 가볍지 않다. “전 세계가 근대를 다 거쳐 왔다고 하지만 왜곡된 거거든요. 동아시아는 더 심하죠. 일본은 예전에 포스트모던으로 들어섰다는데, 이 한마디 물어보면 바로 무너져요. ‘너네 천황 어떡할래?’ 중국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 저거 도대체 뭔가요? 동아시아 전체가 근대를 지나지 못한 거죠. 황석영이를 이미 근대를 주제로 해서, 근대의 극복과 수용을 자기의 일감이나 사명으로 생각하다가 죽은 작가로 규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부커상 최종후보 황석영 “근대 극복코자 했던 작가로 기억해주길”

    부커상 최종후보 황석영 “근대 극복코자 했던 작가로 기억해주길”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자꾸 옆에서 이야기하니까.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이상해. 이번엔 진짜 받으려나? 누가 그러더라고요. 욕망을 왜 자꾸 저어하냐고. 서슴지 말고 자기화하라고. 그것도 일리가 있겠다고 봤어요. 이번엔 받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한국 문학계가 또다시 들썩이고 있다. 지난 9일(현지시간) 황석영(81) 작가의 ‘철도원 삼대’(영문판 Mater 2-10)가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이름을 올려서다. 창비는 17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황 작가의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윗눈꺼풀이 자꾸 내려와서 눈을 찔러 갖고 이걸 찍 올렸어요. 난 이런 거 안 할 줄 알았더니…. 밀란 쿤데라가 자기 타이밍을 끝냈을 때 나도 끝난 줄 알았지. 그런데 요새 수명이 늘어서 제 타이밍도 연장되는 것 아닌가….” 가식을 젖혀둔 노작가는 나이듦에 따른 신체 변화를 재치 있게 전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분위기에 대한 은근한 설렘을 숨기지 않았다. 1989년 방북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던 그는 1998년 석방 이후 20년 이상 활동하면서 전 세계 32개국에 98종 정도의 책이 소개된 것으로 기억했다. 그 사이 국제문학상 후보로도 80여차례 올랐다. “익산 미륵사 밑에서 만난 보살이 있어요. 그분이 그러는데 내가 21세기에 걸작 세 편을 쓴대. ‘철도원 삼대’ 하나는 썼고, 두 개 더 쓴다는 얘기인데…. 마침 더 쓰려는 생각이 있거든요.” 오에 겐자부로, 필립 로스, 가브리엘 마르케스…. 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여든쯤 절필을 선언했던 작가들인데,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게 황 작가의 욕심이다. 그러면서 마치 약관의 작가가 미래를 그리듯 구상하고 있는 다음 작품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었다. “군산에서 만난 600년짜리 잘생긴 나무에 얽힌 이야기. 제목은 ‘할매’, 영어로 번역하면 ‘그랜드마’겠지. 일단 ‘철도원 삼대’로는 부커상을 받고 이걸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싶어요. 그다음으로 (문성근 씨) 당숙과 홍범도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35년간 떠돌아다니면서 ‘최보따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지. 그 사람의 행각을 쓸 겁니다. 그때까지만 하려고 해요.” 원고지 2000장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꿰뚫는 키워드는 ‘노동’이다. 이백만·이일철·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지금 이곳에서 아파트 16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는 이백만의 증손자 이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이다.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현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로 작가가 30년을 바친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했다. 소설이 훑고 있는 우리 근현대의 시간은 족히 100년. 그렇게나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오는 공장 굴뚝에 올라야 한다. 투쟁은 노동자의 숙명인 걸까. 기업 경영의 효율을 최고로 치는 시대, 걸핏하면 로봇과 인공지능(AI)을 들먹이며 노동의 실존을 겁박하는 시대에 황 작가의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절대 가볍지 않다. “전 세계가 근대를 다 거쳐왔다고 하지만 왜곡된 거거든요. 동아시아는 더 심하다. 일본은 예전에 포스트모던으로 들어섰다는데, 이 한마디 물어보면 바로 무너져요. ‘너네 천황 어떡할래?’ 중국은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 저거 도대체 뭔가요? 동아시아 전체가 근대를 지나지 못한 거죠. 황석영이를 이미 근대를 주제로 해서, 근대의 극복과 수용을 자기의 일감이나 사명으로 생각하다가 죽은 작가로 규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35년 전 구상한 동학혁명 만화, 웹툰으로 재탄생

    35년 전 구상한 동학혁명 만화, 웹툰으로 재탄생

    전북특별자치도·전주시가 공동 주최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관한 ‘2023년 동학농민혁명 웹툰 공모전’에서 이지현 작가(전주대 웹툰만화콘텐츠학과 교수)의 ‘향아설위’(向我設位)가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서울신문이 후원하는 이 공모전은 올해로 2회째다.27일 전북도 등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웹툰 공모전 시상식이 이날 정읍시 덕천면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렸다. 시상식에서는 대상인 ‘향아설위’에 이어 ‘집으로 가는 길’(작가 장윤서)이 최우수상,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윤희원)이 우수상을 받았다. ‘흰옷의 꿈’(김사언) 등 9개 작품에도 장려상이 수여됐다. 인스타툰 분야에서는 ‘남겨지다’(김한희) 1개 작품이 장려상을 받았다. 수상작에는 단편 웹툰으로는 이례적인 총 7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대상은 3000만원, 최우수상 2000만원, 우수상 1000만원, 장려상 100만원이다. 수상작은 1·2차 심사를 거쳐 선정됐다. 심사는 이종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전북대 명예교수), 문병학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시인), 이광재 소설가, 김지연 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교수, 김성재 인덕대 웹툰만화학과 교수, 박상기 레진코믹스 편집장이 맡았다. 공모전에는 완성도 높은 작화와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작품들이 다수 응모했다. 김성재 교수는 심사평을 통해 “3회의 짧은 편수 안에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녹여 내는 작업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작들이 나왔다”며 높이 평가했다. 김지연 교수도 “풍부한 아이디어와 관점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표현한 작품이 많았다”고 호평했다. 대상을 수상한 작품 ‘향아설위’는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몰입도를 보여 주면서 심사위원 전원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동학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 가며 마음속에 하늘을 기르는 ‘양천주’ 사상이 향아설위를 통해 발현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향아설위는 자신을 향해 위패를 두고 제사를 지내는 혁명적 제사 방식을 말한다. 저마다 자기 안의 하느님을 모시는 게 후천개벽의 요체라는 취지다. 이 작가는 각종 공모전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그는 “대입 원서를 쓰던 시기에 뜬금없이 동학농민혁명을 만화로 그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사학과에 진학했고 만화가가 됐다”며 “35년간 꾸역꾸역 걷다 보니 결국 맨 처음 목표한 곳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제가 가르칠 학생들과 함께 동학의 정신이 깊이 밴 전북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최우수상 ‘집으로 가는 길’은 작화와 연출 표현력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대학 2학년생인 장 작가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도전하게 된 공모전이었는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우수상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은 안정된 그림체와 캐릭터 구성이 돋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윤 작가는 “동학농민혁명을 겪은 당시 민중들의 개혁 의지를 담고자 웹툰을 그렸다”고 소감을 밝혔다.
  • [자치광장]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의 지름길/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자치광장]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의 지름길/유덕열 서울 동대문구청장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는 말이 있다. 동학의 뿌리인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이 강조하며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발전한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이르는 말이다. 평생 정치적인 지주로 삼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일생 동안 강조하신 말이기도 한 이 말을 목민관으로 봉직하는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다. 1995년 답십리 지역에서 서울시의원으로 출발해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구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친절하고 청렴한 구청, 행정서비스 최우수 자치단체라는 성과로 보답했다. 이런 성과는 2010년 8년 만에 다시 도전한 민선 5기 구청장에 압도적으로 선택을 받는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민선 2기 4년을 포함해 총 16년간 동대문구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어려운 과제를 해결했다는 뚜렷한 성과도 있었지만 지방자치의 한계로 인한 좌절도 많았다. 구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은 구민이 직접 뽑은 구청장에게 위임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직까지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만든 헌법을 적용해 40년 넘은 오늘날에까지 그대로 적용하다 보니 40살 넘은 성년에게 돌쟁이 옷을 입힌 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미완의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것이 1991년이니 벌써 31년의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록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분권의 문제는 완성도 높은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가예산의 재원배분 구조를 살펴보면 국민의 세금 중 중앙정부에서 76%, 서울시에서 11%, 25개 자치구가 12~13%를 나눠서 갖는다. 이런 실정에서 전체 국고보조사업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복지 예산 규모는 국고 보조율에 비해 더 가파르게 상승했고, 최근 3년 동안 지방비 지출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우리 구의 경우에도 전체 구 예산 7360억원 중 53.7%인 3958억원이 복지예산으로 편성돼 있어 지방재정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서울의 인구는 1000만명으로 한 나라의 규모이며, 25개 자치구별 실정은 제각각이다. 각각의 실정과 규모에 맞는 예산배정을 통한 지방재정 확충이 재정분권 실현의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다. 개헌을 통한 법령과 제도 정비로 재정분권을 실현하고 지자체의 특성에 맞게 예산을 집행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재정분권이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의 지름길이고,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행복지수를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타는 목마름으로’ 독재에 저항한 김지하 시인 영면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독재에 저항한 김지하 시인 영면하다

    1969년 등단… 이듬해 ‘오적’ 발표권력층 비리·부정부패 통렬히 풍자민청학련 사건 수감 6년 만에 석방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등 영예 1991년 운동권 연쇄분신 비판 칼럼‘죽음의 굿판을…’ 게재, 변절 논란도‘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의 작품으로 1970~80년대 독재 정권에 저항한 김지하 시인이 8일 별세했다. 81세. 김 시인이 최근 1년여 동안 전립선암 등으로 투병 생활을 한 끝에 이날 오후 4시쯤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토지문화재단이 전했다.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로 서울대 미학과 재학 시절인 1963년 ‘목포문학’에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저녁 이야기’를 발표했고, 1969년 ‘시인’ 지에 ‘황톳길’, ‘비’ 등 5편을 발표하며 정식 등단했다. 1964년에는 대일 굴욕외교 반대 투쟁으로 불리는 ‘6·3 항쟁’에 참가했다가 수감돼 4개월간 첫 옥고를 치렀다. 김 시인은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권력 상층부의 부정부패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담시(자유로운 형식의 짧은 서사시) ‘오적’을 발표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국내외 구명 운동에 힘입어 석방됐다.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주목받은 그는 같은 해 12월 목포를 모티브로 삼은 첫 시집 ‘황토’를 출간했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82년에는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1975)가 포함된 두 번째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내놨다. 김 시인이 옥중에서 쓴 ‘양심선언’은 우여곡절 끝에 1975년 일본에서 발표돼 화제가 됐다. 김 시인은 교도관과 조영래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작성한 뒤 교도소 밖으로 반출했다. ‘황토’나 ‘타는 목마름으로’ 등이 척박한 이 땅의 현실과 억압에 대한 울분, 저항 의식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면 담시인 ‘오적’, ‘비어’ 등은 판소리 가락을 도입하고 난해한 한문을 차용해 권력층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통렬히 풍자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73년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한 김 시인은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노벨문학상·노벨평화상 후보로도 거론됐다.197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격렬한 저항의 몸짓을 지녔던 그의 시는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대결 구조를 벗어나 순환 구조나 탐구의 정신을 표방해 왔다. 투쟁과 무기의 시로부터 통일과 사랑의 시를 향한 전환이자 서양적 세계관을 동양적 세계관으로 접수·고양하는 구도의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1984년 사면 복권된 뒤에는 최제우·최시형 등의 민중 사상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생명 사상’이라 이름 짓고 생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을 그린 시집 ‘애린’을 비롯해 최제우의 삶과 죽음을 담은 장시집 ‘이 가문 날에 비구름’, 서정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등을 펴냈다. 1980년대 말부터 그의 시는 절망과 죽음을 넘어선 새 삶과 새 생명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과 기다림을 담은 고요한 서정시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에는 고요하면서도 축약과 절제, 관조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 줬는데 ‘일산 시첩’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김 시인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시위 도중 숨진 것에 항의하는 분신 자살이 잇따르자 조선일보에 운동권을 비판하는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를 게재해 진보 진영에서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1년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명했으나, 2012년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공개 지지하고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독설을 퍼부어 다시 논란이 됐다. 김 시인은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군부 독재 시절 해외에서 탄원 운동을 할 만큼 세계적인 저항 시인으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참여 시인의 발원지가 된 분”이라며 “이후 전통 사상과 동학을 접목해 주창한 새로운 생명 운동은 앞으로 적절한 평가와 연구가 이뤄져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어 “1990년대 이후에는 안타까운 편견과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인의 역사적 위상에서는 비본질적인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빈소는 연세대 원주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앞서 부인인 김영주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2019년 타계해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작가, 차남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있다. 발인은 11일 오전 9시, 장지는 강원 원주시 흥업면 선영이다.
  • 저수지와 만난 경주 둘레길… 힐링·관광명소로 탈바꿈

    저수지와 만난 경주 둘레길… 힐링·관광명소로 탈바꿈

    전통적 농업기반 시설로 농업 용수 공급에 그치던 전국 곳곳의 저수지가 둘레길과 만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저수지의 고즈넉한 풍경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 코로나19 이후 힐링 명소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경북 경주시는 강동면 안계저수지 주변 11.5㎞ 구간에 62억원을 들여 둘레길과 데크, 전망대, 쉼터, 부교 등으로 구성되는 ‘안계댐 둘레길’을 조성한다고 24일 밝혔다. 안계저수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과 인접한 곳이다. 둘레길은 내년 3월 착공해 2023년 12월 완공 예정이다. 앞서 시는 2019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서면 ‘심곡지 둘레길’ 조성 사업에 들어갔다. 2023년까지 총 57억원을 들여 4.5㎞의 둘레길과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조성한다. 시는 사업이 완공되면 인근의 명소인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과 연계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포항시도 지난해 말 지역 12경(景)인 ‘오어지(池) 둘레길’을 개통한데 이어 용연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총 7㎞에 달하는 트레킹 로드인 오어지 둘레길에는 오어사 입구의 원효교와 관어정, 망운정, 메타세쿼이아 숲, 전망대(2곳) 등이, 용연지 둘레길 인근엔 포항의 명산으로 알려진 비학산과 냉수리 신라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의 거주터 등이 있어 역사와 다양한 볼거리를 감상할 수 있다. 시는 또 흥해읍 매산지, 연일읍의 조박지, 흥해읍 천마지 및 서림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완공 또는 추진 중이다. 충남 공주시는 올해 연말까지 5억원을 들여 국립공원 계룡산 인근의 계룡저수지에 둘레길을 조성하고, 전북 완주군은 동상·경천 저수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충북 증평군의 삼기저수지 둘레길(3㎞)은 언택트 시대 관광지로 인기몰이 중이다. 이 저수지 둘레길은 지난 4월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봄 시즌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에 선정됐다.
  • 저수지가 둘레길을 만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탄생

    저수지가 둘레길을 만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탄생

    전통적 농업기반 시설로 농업 용수 공급에 그치던 전국 곳곳의 저수지가 둘레길과 만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저수지의 고즈넉한 풍경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 코로나19 이후 힐링 명소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경북 경주시는 강동면 안계저수지 주변 11.5㎞ 구간에 62억원을 들여 둘레길과 데크, 전망대, 쉼터, 부교 등으로 구성되는 ‘안계댐 둘레길’을 조성한다고 24일 밝혔다. 안계저수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과 인접한 곳이다. 둘레길은 내년 3월 착공해 2023년 12월 완공 예정이다. 앞서 시는 2019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서면 ‘심곡지 둘레길’ 조성 사업에 들어갔다. 2023년까지 총 57억원을 들여 4.5㎞의 둘레길과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조성한다. 시는 사업이 완공되면 인근의 명소인 ‘도리마을 은행나무 숲’과 연계돼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포항시도 지난해 말 지역 12경(景)인 ‘오어지(池) 둘레길’을 개통한데 이어 용연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총 7㎞에 달하는 트레킹 로드인 오어지 둘레길에는 오어사 입구의 원효교와 관어정, 망운정, 메타세쿼이아 숲, 전망대(2곳) 등이, 용연지 둘레길 인근엔 포항의 명산으로 알려진 비학산과 냉수리 신라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의 거주터 등이 있어 역사와 다양한 볼거리를 감상할 수 있다. 시는 또 흥해읍 매산지, 연일읍의 조박지, 흥해읍 천마지 및 서림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완공 또는 추진 중이다. 충남 공주시는 올해 연말까지 5억원을 들여 국립공원 계룡산 인근의 계룡저수지에 둘레길을 조성하고, 전북 완주군은 동상·경천 저수지 둘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충북 증평군의 삼기저수지 둘레길(3㎞)은 언택트 시대 관광지로 인기몰이 중이다. 이 저수지 둘레길은 지난 4월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봄 시즌 비대면 안심관광지 25선’에 선정됐다.
  • 경북 영양서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 은거 추정지 발견

    경북 영양서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 은거 추정지 발견

    경북 영양에서 천도교(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이 은거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처음으로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영양군은 일월면 용화리 벌매리 뒷산 정상 부근에서 동학인 집단거주 터와 우물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 해발 약 1000m 지점에 자리 잡은 이곳은 은신처로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었고 일대에는 식수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샘물이 산재해 있다. 또 수령 150년쯤 된 살구나무도 있는 등 200명 넘게 집단생활을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고 영양군은 설명했다. 일월산 인근 주민 권모(63세)씨는 예전 외할머니로부터 외고조부가 이곳 은거지에서 동학당 일원으로 같이 은거생활을 했었다고 증언했다. 각종 문헌에 따르면 최시형은 1863년 동학 창시자인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로부터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해, 안동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된 후 최시형은 관군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으로 도피했다고 알려졌지만 이번에 은거지가 확인될 경우 태백산이 아니라 일월산으로 도피했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고 영양군은 설명했다. 군 관계자는 “더 많은 고증자료를 확보해 최시형 은거지를 복원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영양에서는 최시형 선생이 1865년에 영양으로 이사왔을 때 ‘사람이 만들지 아니한 자연이 내리신 불상이 있다’는 계시를 받고 찾아 다니다 수비면 송하리 매봉산에서 높이 15m의 석불바위를 발견한 이후 49일간의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 18년 5개월 수감 생활 최장기 복역수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고,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김구 ‘백범일지’) “어머니!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열악하다 못해 인격을 말살하는 감옥 생활은 그 자체로 고문의 수단이라고 할 만큼 혹독했다. 지옥 같은 감옥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유관순, 이육사, 윤동주, 김동삼, 오동진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런 감옥 생활을 18년 5개월이나 견뎌낸 독립운동가가 정이형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옥고를 치른 사람은 일왕 암살을 기도한 박열로 22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일본에서 재판을 받고 일본 감옥에서 복역했다. 정이형은 더 악명 높은 국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최장기 복역수다.“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 될까.”(선생의 회고록 중에서)●평북 의주 출신… 장성에서 ‘3·1운동’ 시위 선생은 1897년 9월 16일(음력) 평북 의주 월화면에서 태어났다. 김평식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는 복벽주의(復主義·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의 이념)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친형 정원익도 독립군에 군자금을 제공한 독립운동가였다. 형과 스승의 항일 정신을 이어받은 선생은 1919년 1월 독립운동가 김계순, 서상연을 만나 의기투합해 전남 장성으로 내려갔다. 이주 직후 3·1운동이 발발하고 장성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앞장섰다. 친형의 지원을 받아 1921년 장성 북하면에 4년제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 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감시 대상이 된 선생은 체포돼 취조를 받았고 다행히 풀려났지만, 장성에서 더 활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조직인 연통제에 참여해 의주 군감으로 활동하다가 1922년 11월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일경에 체포된 형 원익이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자 그 길로 떠난 것이다. 총을 들고 싸우고 싶었다. 선생은 관전현에 있던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오동진, 김창환을 만났다. 1923년 12월 대한통의부가 군사 체제로 개편되면서 선생은 의용군 사령관 신팔균의 부관을 거쳐 이듬해 가을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이 됐다. 첫 임무는 부하 10여명과 봉천성 환인현에서 반(反)통의부 분자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과 반목 속에 일어난 통합 운동으로 대한통의부는 그해 11월 10여개 독립운동 단체와 더불어 군정기관인 정의부로 확대 개편됐고 선생도 참여했다. ●조선인 밀정·친일파 처단 등 임무 수행 정의부는 정부 형태를 갖추고 서간도 한인 동포들을 통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 육사 출신인 이청천이 군사위원장, 만주의 광복군 총영장을 지낸 오동진이 사령장을 맡아 군사조직을 지휘했다. 선생과 양세봉·문학빈 등 주로 평안도 출신이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1925년 3월 18일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 등과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일제 경찰서 습격 계획을 세웠다. 그날 자정,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선생은 부하 6명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새벽 5시쯤. 목표로 삼은 벽동경찰서 여해경찰관출장소에 접근했다. 안에는 일경 5명이 있었다. 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니시카와 류키치와 임무, 신현택 등 순사 3명은 절명했고 일본인 순사 1명은 크게 다쳤다. 선생은 대원들과 출장소 건물을 불태우고 총기류 등 군수품을 노획했다. 1926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부하 병사 20여명과 지린성 한인 동포들을 상대로 군자금 모금 활동도 하면서 조선인 밀정과 친일파들을 처단했다. 선생은 독립군을 정탐하는 밀정 처단을 일제와 싸우는 일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미쓰야협정’(조선 총독과 중국 측이 독립군 탄압을 목적으로 맺은 협정)으로 군사 활동이 더 어려워지자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복벽주의도 수용하면서 진보주의를 표방한 좌우합작 정당인 고려혁명당이다. “이념 없는 혁명, 이데올로기 없는 독립투쟁은 오히려 무자비한 반동밖에는 초래하지 못한다.” 고려혁명당은 이런 기치를 내세웠다. 천도교 교주 최시형의 아들 최동희도 동참해 1926년 4월 지린성에서 고려혁명당이 출범했다. 만주를 중심으로 100여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10여곳에 세포조직을 만들며 세를 키워 나갔다. 그러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 이동락과 당원들이 일제에 체포돼 당의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선생은 하얼빈으로 이동해 조직 재건을 꾀했지만 1927년 3월 11일 동지 6명과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1차 공판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당당히 말하고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조금의 공포의 빛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서 있었다. 1928년 4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마포·대전형무소를 전전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최시형 아들 최동희 동참해 세 키워나가 “공부하는 이상은 글자만을 배우는 것 아니요. 자기 인격을 향상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니 절대로 악습관에 감염되지 말고 오풍속(汚風俗)에 타락하지 말기를 바란다.” 1941년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에 다니던 맏딸 문경씨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 선생은 이렇게 적었다. 여느 아버지와 다름없이 딸의 앞날을 걱정하고 올바른 품행을 당부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문경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선생과 같이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규창(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과 결혼했다. 광복 후 선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1947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법률조례 제정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돼 남다른 의지를 갖고 활동했다. 일제와의 투쟁과 친일파 엄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이었다.●맏딸 정문경씨 독립운동가 이규창과 결혼 “애국자들은 (조선인) 순사들에 의해 죽음에 가까운 고문과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남한 과도정부는 그런 왜놈 앞잡이와 매국노 편을 드는 듯합니다.” 선생은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친일파 중용을 비난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친일파 척결 조례를 폐기하며 무시했다. 좌우합작 운동과 남북협상에 참여한 것도 고려혁명당 때부터 지녀온 신념 때문이었다. 이 또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승만의 눈 밖에 난 선생은 감시 속에 서울 장교동 집에서 유폐와 같은 생활을 하다가 1956년 12월 10일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동학농민혁명 2차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받을까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자들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힘을 얻고 있다. 목포대 고석규 교수 등 동학농민혁명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8명은 최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9일 밝혔다. 2차 봉기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역사학자는 고 교수를 비롯해 신영우(충북대) 명예교수, 김봉곤(원광대), 김양식(청주대), 성주현(청암대), 신순철(원광대), 이상식(전남대), 홍성덕(전주대) 교수 등이다. 이들은 “2차 봉기 참여자는 독립군이나 의병과 마찬가지로 항일 활동을 벌였지만 상대적으로 예우가 미흡했다”며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역사적 행적에 걸맞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2차 봉기 참여자에 대한 서훈 문제는 수십 년째 미해결로 남아있다. 1977년 손화중 후손이 신청한 서훈은 부결됐고, 최근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봉기 참여자들에 대한 서훈은 현재 재심 중에 있다. 역사학자들은 “2차 봉기는 1894년 6월 21일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데 따른 반발로 일어났다”며 “2차 봉기 참여자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사실은 한국 역사학계가 이미 연구성과로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역사학자들은 관련제도와 법령도 2차 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입장이다.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은 2차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분을 ‘순국선열’로 정의하고,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도록 했다.
  • 동학 2차 봉기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될까

    동학 2차 봉기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될까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에 참여자들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목포대 고석규 교수 등 동학농민혁명사를 전공한 역사학자 8명은 최근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2차 봉기 참여자 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역사학자는 고 교수를 비롯해 신영우(충북대) 명예교수, 김봉곤(원광대), 김양식(청주대), 성주현(청암대), 신순철(원광대), 이상식(전남대), 홍성덕(전주대) 교수 등이다. 이들은 “2차 봉기 참여자는 독립군이나 의병과 마찬가지로 항일 활동을 벌였지만 상대적으로 예우가 미흡했다”며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역사적 행적에 걸맞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들은 “2차 봉기는 1894년 6월 21일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시킨데 따른 반발로 일어났다”며 “2차 봉기 참여자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사실은 한국 역사학계가 이미 연구성과로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또 “고등학교 한국사 9종 교과서도 2차 동학농민군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일제에 항거했다’고 모두 서술하고 있다”며 “2차 봉기 참여자들이 독립유공자 예우를 받을 충분한 근거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역사학자들은 관련제도와 법령도 2차 봉기 참여자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입장이다. 동학농민명예회복법은 2차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 참여자’로 규정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법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분을 ‘순국선열’로 정의하고,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예우하도록 했다. 한편, 2차 봉기 참여자에 대한 서훈문제는 수십 년째 미해결로 남아있다. 1977년 손화중 후손이 신청한 서훈은 부결됐고, 최근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봉기 참여자들에 대한 서훈은 현재 재심 중에 있다.
  • [황규관의 고동소리] 손을 씻는 시간

    [황규관의 고동소리] 손을 씻는 시간

    코로나19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이 연기 또는 취소됐다. 작년 가을에 낸 시집을 가지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는 어느 마을 모임도 그중에 포함된다. 대구에서 확진환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전 일이다. 나는 모이는 사람들이 꺼리지 않는다면 조심히 진행해도 무방하다는 마음이었다. 과학적 근거의 유무와는 별개로 조금 더 의연해지고 싶어서였다. 무슨 종교집단처럼 시가 모든 사태를 해결해 주는 전능을 가져서가 아니다. 시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해 주지 못한다. 또 미래의 질병을 예방해 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견디는 힘은 준다고 믿어 왔고 지금도 믿고 있다. 스승인 수운 최제우가 대구 감영에서 처형당한 뒤 무너진 교단을 재건해야 하는 중책이 주어진 해월 최시형은 첫 번째 교조신원 운동에서 무력을 택함으로써 다시 궤멸적인 상황을 맞아야 했다. 1871년 이필제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영해 교조신원운동이 그것이다. 이필제가 해월을 몇 달에 걸쳐 설득해 일어난 이 무장봉기는 해월을 ‘최보따리’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최보따리’는 평생을 도망자로 산 해월의 별명이다. 그 뒤로 해월은 무력을 통한 문제 해결에 지극히 신중하게 됐고 이 때문에 1894년에 전라도에서 일어난 동학농민봉기에 해월이 반대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해월이 경상도 북부지방과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역병이 퍼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동학도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해월의 신통력 때문에 그랬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상은 매우 단순하고 의외였다. 해월은 동학도들에게 손을 잘 씻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배설물을 꼭 땅에 묻으라고 했다. 이런 차분한 대응은 1894년 봉기 때 농민군의 규율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동학농민군의 비판자였던 매천 황현도 기록을 남겨둔 바 있다. 외형상 ‘질서’처럼 보이는 이런 모습은 단지 종교 지도자에 대한 순종 때문은 아니라는 여러 정황 증거가 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바람과 믿음에서 움튼 당시 동학도들의 의연함과 긍지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성의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들은 맹신과 맹목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는 것은 두려움이다. 맹신과 맹목은 두려움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난 줄기와 이파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성에 대한 오해 중 가장 커다란 것은 이성을 단순히 합리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것을 ‘도구적 이성’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지만, 이성이 상상력과 연결돼 있다는 점은 자주 빠뜨리는 것 같다. 이성은 단순히 계획하고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우리가 바라보는 ‘먼 곳’이 무엇인지 돌아볼 때 이성의 역할이 크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보는 ‘먼 곳’은 낭만적인 몽상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바로 볼 수 있는 능력 위에서 상상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이 역병처럼 우리의 내면을 파헤치는 오늘날, 시가 다시 호출돼야 한다면 해월의 가르침대로 지금 사는 자리에서 손을 자주 씻고 어쩔 수 없는 배설물은 스스로 책임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을 씻는 행위는 더러움을 닦아 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손 씻기 전의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을 상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또 우리는 배설을 통해 몸 안의 찌꺼기를 덜어 내는 동시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육체적으로 준비하기도 한다. 손을 씻는 행위가 공중 보건의 맥락을 넘어서는 것도 시적 상상력을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고 그 전제 조건은 이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으면 화이트헤드는 인간은 간헐적으로 이성적이라고 했으며 스피노자는 그것이 드물고 힘들다고 했을까. 모든 고귀함은 영속적으로 우리에게 머물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로지 가끔씩 도달할 수 있을 뿐인데 중요한 것은 그 빈도를 점차 늘리는 일임과 동시에 한번 찾아온 고귀함을 가능한 한 오래 머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성과 시적 상상력은 알려진 바와 같이 개인만의 능력이 아니다. 인간은 타자와 만나는 일을 통해서만 이성과 시적 상상력이 활발해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놓친다. 지금과 같은 재난의 복판에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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