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청나라
    2026-06-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45
  • 한국·프랑스 140년의 우정… 이야기 ‘선물’ 보따리 푼다

    한국·프랑스 140년의 우정… 이야기 ‘선물’ 보따리 푼다

    조불수호통상조약 문서 원본 외양국 정상 외교 선물·기록 공개 19세기 고래를 잡기 위해 북태평양까지 조업 범위를 넓히던 프랑스 선박 나르발호는 풍랑에 파손돼 1851년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 표류한다. 조선 정부가 선원들의 표류 경위를 파악한 뒤 음식 제공과 보호를 명하고 이들을 돌려보낼 준비를 하던 중 청나라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샤를 드 몽티니가 선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배를 이끌고 조선에 도착한다. 이때 몽티니 영사와 나주 목사 이정현이 만나게 되는데 이는 양국 정부 차원의 첫 대면 접촉으로 기록됐다. 당시 몽티니가 프랑스로 가져간 옹기주병부터 최초의 근대적 한국어-외국어 사전인 한불자전, 나무와 꽃을 금속 등으로 만든 반화까지 한국과 프랑스가 교환했던 선물과 기록들이 한 자리에서 펼쳐진다.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국립고궁박물관, 대통령기록관이 3일부터 8월 2일까지 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마련한 특별전 ‘선물과 기록, 한국-프랑스 우정의 140년’을 통해서다. 전시는 양국이 함께한 140년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특히 한국과 프랑스에 각각 소장된 조불수호통상조약(1886년) 문서 원본이 최초로 나란히 전시돼 눈길을 끈다. 이 조약으로 선교사들은 제한적으로나마 포교의 자유를 얻었고 조선천주교회는 명동성당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전시에는 블랑 주교가 쓴 ‘명동성당 건축을 위한 대지 매입 일지’, 부이수(한국명 손이섭) 신부의 여행권(호조) 등을 선보인다. 여행권을 가진 선교사는 조선 방방곡곡을 여행할 수 있었다. 조선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양국 정상이 주고받은 선물의 역사도 살필 수 있다. 1888년 사디 카르노 프랑스 대통령은 고종에게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에서 제작한 장식용 대형 화병인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을 선물한다. 전시장에는 이뿐 아니라 고종의 답례품인 12세기 고려청자 대접 2점, ‘원행을묘정리의궤’와 고려 역사서 ‘휘찬여사’, 연꽃잎 모양의 금속 화반 위에 소나무·측백나무·모란·난초 등 꽃과 나무를 금속과 나무, 보석으로 정교하게 장식한 공예품인 반화 복제품 한 쌍도 함께 전시됐다. 반화 원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기메아시아예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지만, 상태가 안 좋아 대여 불가 판정을 받았다. 복제품은 국가무형유산 옥장(玉匠) 보유자인 김영희 장인이 만들었다. 이밖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1821년 프랑스 혁명사 요약 세트 2쇄 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받은 19세기 조선의 모습이 담긴 동판사진 세트도 선보인다. 덕수궁 돈덕전에서는 3일부터 8월 30일까지 고종이 선물한 반화를 중심으로 조선 왕실의 길상 문화와 근대 외교 역사를 조명하는 전시 ‘반화: 상서로운 마음’ 특별전이 열린다. 돈덕전 1층에 있는 27ꏭ 길이 벽면에서 발광다이오드(LED) 기술을 활용해 반화 속 꽃과 나무, 각종 장식을 생생하게 구현한 디지털 영상을 만날 수 있다.
  • [씨줄날줄] 중국의 두만강 출해(出海)

    [씨줄날줄] 중국의 두만강 출해(出海)

    녹둔도는 이순신 장군의 역사가 어린 두만강 하구의 섬이다. 김종서 장군이 육진을 개척한 이후 조선의 고유 영토로 세종실록에 기록돼 있다. 조선은 여진족의 약탈이 잦자 녹둔도에 토성을 쌓고 농민을 보호했다. 1587년 여진족 니탕개 세력이 기습했을 때 조산보 만호 이순신은 병력을 이끌고 맞섰지만 피해는 작지 않았다. 장군의 첫 번째 백의종군으로 이어졌다. 녹둔도는 1800년대 모래가 쌓이면서 두만강 북쪽 기슭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1860년 연해주와 압록강 하구를 러시아에 넘겨 주는 베이징조약을 맺으면서 일대는 조·청·러의 국경 지대가 됐다. 러시아는 그동안 육지로 바뀐 녹둔도마저 영토에 편입시켰다. 조선은 러시아와 수교한 1884년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반응은 없었다. 베이징조약으로 우리는 녹둔도를 불법 점거당했지만 중국은 엄청난 영토와 함께 동해로 나가는 통로를 잃었다. 반대로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새로 획득한 영토에 세운 항구도시에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훈춘은 중국 지린성 조선족 자치주 동쪽 끝에 있는 국경도시다. 훈춘에서 동해까지는 15㎞에 불과하다. 중국인들은 “바다가 눈앞에 있어도 갈 수가 없다”고 한탄한다. 태평양을 넘어 세계로 나갈 수출 도시로 잠재력을 가진 훈춘이 러시아 명태·대게의 수입 창구에 머물고 있다. 중국 동북지방은 모두 비슷한 처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엊그제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조선(북한)과 함께 두만강 출해(出海) 문제에 관한 3자 협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는 데 합의했다고 한다. 시 주석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한다면 ‘두만강을 통한 동해 진출’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북·중·러의 ‘두만강 협력’이 우리 경제·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 오랑캐 떡이 국민 간식이 되기까지, 호떡의 여정 [한ZOOM]

    오랑캐 떡이 국민 간식이 되기까지, 호떡의 여정 [한ZOOM]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길거리 음식 중에서도 노릇하게 구워진 호떡 한 장은 손과 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소중한 서민 간식이다. 그런데 이 친근한 이름 뒤에는 뜻밖의 역사가 숨어 있다. ‘호떡’의 ‘호’는 오랑캐 호(胡) 자를 쓴다. 즉, 중화사상 입장에서 오랑캐라 불리던 서역 민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라는 의미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달콤한 디저트도 아니었다. 고기와 채소를 채워 화덕에 굽던 음식이 어쩌다가 흑설탕이 흘러내리는 국민 간식이 되었는지 그 역사를 따라가 본다.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은 중앙아시아와 아랍 인근 민족들을 ‘호인’(胡人)이라고 불렀다. 호떡은 바로 그 호인들이 만들어 먹던 음식에서 비롯됐다. 쌀보다 밀이 흔했던 중앙아시아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굽거나 기름에 튀겨 먹었다. 이 음식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처음 중국에 전해졌다. 이후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서는 황실과 귀족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고급 문화로 자리 잡았다. 『자치통감』 등의 기록을 보면,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길에 올랐던 당 현종과 양귀비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호떡을 구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양귀비 또한 즐겨 찾던 별미였다. 이어지는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호떡은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한다.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호떡은 귀족의 담장을 넘어 시장거리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당시의 번화한 풍경을 기록한 문헌들을 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기찬 시장거리 곳곳에서 호떡을 구워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음을 알 수 있다. ●임오군란이 데려온 호떡 호떡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전해진 계기는 1882년 임오군란이다. 군란 진압을 위해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 군대를 따라 수십 명의 상인이 함께 들어왔다. 이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상업 활동의 자유를 얻은 이들은 청나라 멸망 이후에도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생계를 위해 음식점을 열었다. 초기 호떡은 고기와 채소를 넣은 원조 방식 그대로였다. 하지만 기름진 고기 맛은 당시 조선인들의 입맛에 생소했다. 이때 화교 상인들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조청과 흑설탕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밀가루와 설탕은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에, 호떡 속에 담긴 달콤함은 단숨에 조선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고기 호떡이 달콤한 한국식 호떡으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인천 제물포에서 시작된 달콤한 호떡은 명동과 종로 거리 등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1920년대 신문에는 호떡집을 주제로 한 수필과 소설이 연재될 정도로 호떡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몹시 소란스럽고 분주한 상황을 두고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 시기다. 이는 실제 화재보다는, 낯선 언어와 달콤한 향기가 뒤섞여 북새통을 이루던 당시 호떡집의 폭발적인 인기를 생생하게 묘사한 시대의 증언이기도 하다. ●피난길에서 완성된 최종 변신 오늘날 우리가 먹는 호떡의 형태가 완성된 것은 한국전쟁 시기다. 전쟁 직후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와 설탕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피난민들도 이 재료들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이때 한국인들은 화교식 호떡의 복잡한 조리법을 단순화하여, 반죽을 기름에 튀기듯 굽고 누르개로 납작하게 누르는 지금의 방식을 정착시켰다. 한편,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은 부족한 설탕 대신 구하기 쉬웠던 곡물 씨앗을 넣어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 부산의 명물인 ‘씨앗호떡’의 시초가 됐다. 중앙아시아의 밀가루 빵이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오고, 임오군란의 상인들이 조선으로 들여와 일제강점기에 대중화됐으며, 한국전쟁의 피난민들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됐다. 이제 길거리에서 가볍게 집어 드는 호떡 한 장 속에는 척박한 땅을 견디고 국경을 넘나든 2000년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담겨 있다.
  • 조엘라이프, 원산지·학명 기준 ‘대라천 참 침향 오일 캡슐’ 출시

    조엘라이프, 원산지·학명 기준 ‘대라천 참 침향 오일 캡슐’ 출시

    침향 전문기업 조엘라이프가 원산지와 학명을 기준으로 선별한 침향 원료를 사용한 ‘대라천 ‘참’ 침향 오일 캡슐’을 NS홈쇼핑을 통해 선보인다고 밝혔다. 최근 침향(沈香) 시장은 단순히 제품명에 의존하기보다 산지와 품종 등 원료의 정통성을 확인하려는 소비자 트렌드가 확산하는 추세다. 조엘라이프 측에 따르면 이번 제품은 100% 베트남산 아갈로차(Aquilaria agallocha Roxburgh) 침향 오일을 기반으로 제조됐다. 특히 역사 문헌과 국내 식품의약품안전처 관련 자료에 기재된 학명을 기준으로 원료를 관리하는 점이 특징이다. 역사적으로 침향의 대표 산지는 베트남 지역이 꼽힌다. 중국 당나라부터 청나라 시대에 이르는 여러 문헌에는 임읍, 교지, 안남, 점성 등 현재의 베트남 지역이 주요 침향 산지로 기록돼 있다. 회사 측은 이러한 역사적 근거와 원료 관리 기준을 바탕으로 베트남산 침향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국내 식약처 고시 ‘대한약전외한약(생약)규격집’과 ‘식품공전’, 식약처 발간 ‘한약재 관능검사 해설서’, ‘원색 한약재감별도감’,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 등은 침향의 학명을 ‘아퀼라리아 아갈로차 록스버그(Aquilaria agallocha Roxburgh)’로 명시하고 있다. 제품 구성은 유기농 침향 오일 원액에 적송 오일, 오메가3, 비타민 E 등을 배합한 캡슐 형태다. 아갈로차 품종의 침향 오일만을 사용했으며 1회 분량당 3mg의 침향 오일을 함유했다. 조엘라이프 관계자는 “최근 소비자들은 단순 광고 문구보다 원산지와 학명, 품종, 인증 여부 등 객관적인 기준을 더욱 중요하게 보고 있다”며 “조엘라이프는 역사 문헌과 국내 공식 자료를 기반으로 확인된 침향 원료만을 사용해 제품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조엘라이프의 ‘대라천 ‘참’ 침향 오일 캡슐’은 오는 5월 20일 오후 8시 35분 NS홈쇼핑 방송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 시진핑이 트럼프에 경고한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시진핑이 트럼프에 경고한 ‘투키디데스 함정’이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14일 9년 만에 방중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양국 간 협력을 강조하며 중미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중미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극복하고 강대국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할 수 있을지는 역사의 질문이자 세계의 질문”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 주석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며 “일부 사람들은 내가 당신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시 주석이 언급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그레이엄 앨리슨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처음 언급한 개념으로 신흥 강국이 부상할 때 기존 강대국이 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전쟁으로 치닫기 쉽다는 의미다. 앨리슨 교수는 2012년 당시 급부상하던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상황을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기존 패권)와 아테네(신흥 강자)의 갈등에 비유하며 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장군이다. 그는 이어 지난 500년간 발생한 16차례의 패권 교체기 중 12번의 전쟁이 발생했다는 통계적 근거를 제시했다. 중국은 ‘투키디데스의 함정’ 개념을 미중 관계에서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분석을 받는다. 앨리슨 교수는 최근 자주 중국을 방문해 시 주석은 물론 왕이 외교부장, 중국 권력 서열 4위인 왕후닝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지도자들과 교류했다. 지난 3월 중국발전포럼(CDF)에 참석한 앨리슨 교수는 대만 문제의 민감성을 언급하면서 미중 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대화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중국은 미중 수교를 이끈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 이어 그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평가받는 앨리슨 교수를 자국 입장을 서방에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영향력 있는 미국인 지성’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에서도 키신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는데 양국 정상이 산책한 베이징의 명소 천단공원은 키신저의 비밀 애호 장소다. 천단공원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장소로, 중국 문명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미국 외교사의 전설적 인물인 키신저는 1972년 미중 수교를 끌어냈으며 중국에서는 ‘오래된 친구’로 통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키신저를 “미국의 국익을 위한 현실주의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생전 100차례 이상 중국을 방문하고 15차례 천단공원을 찾은 키신저는 공원 고목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렇게 위대한 과거를 가진 나라는 더 위대한 미래를 가질 것이다”라는 글을 방명록에 남기기도 했다.
  • 아픈 과거 품은 물길에… 다시, 치유가 차오른다[서울 로드]

    아픈 과거 품은 물길에… 다시, 치유가 차오른다[서울 로드]

    병자호란 ‘환향녀’ 슬픔이 서린 곳과거 씻는다는 의미로 몸 씻게 해50년간 버려졌던 유진상가 지하는빛의 예술길 ‘홍제유연’으로 재탄생커피와 함께 인공폭포서 ‘폭포멍’도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은 ‘도로고(道路考)’에 이렇게 썼다. 소설가 김훈은 ‘허송세월’에서 ’“길은 소통의 통로란 의미”라고 풀었다. 오래 전부터 길을 중심으로 사람과 재화, 서비스가 움직이고 건물이 들어섰다. 이처럼 길은 도시의 경쟁력이자 풍경이며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600여년 역사의 서울에는 많은 길이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쫓겨갔던 유배길부터 3·1 운동과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2002년 월드컵, 두 번의 탄핵 촛불까지, 역사의 변곡점마다 길이 있었다. ‘서울 로드’에서 길에 스며든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풀어보려 한다. “제 외아들의 처가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몸값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1638년 3월 11일 ‘인조실록’ 중 우의정 장유의 상소문) “제 딸이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있다가 몸값을 주고 귀국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들려 합니다. 원통해서 못 살겠습니다.”(같은 날 전 승지 한이겸의 상소문) 병자호란(1636~1637년) 때 청나라에 끌려간 이들은 50만~60만명. 다수가 여성이었다. 일부는 온갖 고초를 겪고 다시 고향 땅을 밟았지만, 정절을 강조하던 조선 사회는 이들을 죄인 취급했다. ‘환향녀’(還鄕女)란 주홍글씨를 덧씌웠고, 잡혀갔었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면서 ‘인조실록’에서처럼 사회적 논란이 됐다. 급기야 인조가 “홍제원(弘濟院)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 없었던 여성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왕의 큰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홍은동(弘恩洞)’이 됐다는 속설이 있다. 북한산에서 발원해 홍제동, 남가좌동, 성산동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홍제천에는 ‘살아서 돌아온 죄’를 짊어져야 했던 환향녀의 슬픔이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소거’되기를 강요받았지만, 살아내려 했던 여성 캐릭터를 다뤄 화제를 모은 드라마 ‘연인’과 연극 ‘나비’로 변주됐다. 홍제천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묵는 홍제원에서 유래했다. 의주를 거쳐 평양, 개성을 찍고 도착한 명, 청 사신이 무악재를 넘어 궁궐에 도착하기 전 의관을 정돈하는 숙소였다. 중국으로 출발하는 학자, 상인도 왕래하던 교통 요지다. 홍제원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3호선 홍제역 2번 출구 표지석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30~40년대 홍제천 일대는 경성이 확장되면서 도시 빈민이 몰려든 사대문 밖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글에 종종 등장하는 현저동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때 생활상을 짐작할 만하다. “막상 내가 도달한 어머니의 서울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한 것이었다. 반듯반듯한 기와집 동네를 다 그냥 지나쳐 꼬불꼬불한 길을 한없이 기어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우중충한 문간방이 어머니의 서울 살림집이었다.”(‘나 어릴 적에’) 조선시대 중요한 육상교통로 중 하나였던 의주로는 박정희 정권에서 ‘통일로(서울역~파주 통일대교)’라는 새 이름을 얻고, 서울 서북권역의 교통 요지로 계속 기능했다. 1968년은 1·21 사태(김신조 사건)와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 군사적 긴장이 한껏 고조된 시기다. 3선 개헌을 준비하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 불안감을 활용해 정치적 저항을 억누르는 전략을 취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호가 ‘싸우면서 건설하자’였다. 이 흐름 속에 세워진 건축물이 유진상가다. 홍제천을 덮은 시유지에 1970년 지어진 유진상가는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이자 랜드마크였다. 세대별 분양 면적이 최소 33평, 최고 68평에 달했다. 상가아파트임에도 고급 공동주택을 일컫던 ‘맨션’이란 명칭이 붙은 까닭이다. 유진상가는 서울 서북부가 뚫렸을 경우에 대비해 일반 건축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다. 당시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은 구파발이다. 북한군이 구파발 저지선을 뚫고 청와대나 세종로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홍은사거리를 거쳐야 했다. 구파발에서 6㎞ 남짓 떨어진 이곳에서 세검정길을 거쳐 청와대까지 5㎞, 정부중앙청사까지 4㎞ 거리였다. 유진상가 1층에 거대한 기둥(필로티)을 세우고 공간을 확보해 유사시 아군 전차의 엄폐 진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한 까닭이다. 하부 기둥을 부술 경우 아파트가 넘어지면서 거대한 대전차 장애물 역할도 하도록 지어졌다는 얘기도 있다. 유신 시대를 상징하는 유진상가 위로 1995년 내부순환도로가 개통했다. B동의 절반인 4, 5층이 뜯겨나가고 회색빛 그늘이 드리웠다. 낙후한 부도심인 데다, 지하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도 없고 소음과 분진이 심각했다. 점점 흉물 취급을 받았고, 2010년대부터 재건축 민원이 제기됐다. 서대문구청이 사업시행자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나섰고 지난 4월 최고 49층 규모의 주거복합시설로 바꾸는 정비계획이 확정됐다. 50년 동안 막혀 있던 유진상가 지하의 홍제천은 2019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군사 목적으로 폐쇄됐던 지하통로를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재생했다. 홍제천을 따라 흐르는 인연이란 의미로 ‘홍제유연(流緣)’이란 이름을 붙였다. 유진상가를 지탱하는 100여개 기둥 사이 물길을 따라 미디어아트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콘크리트는 캔버스가 되고 물이 스크린이 된 것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온기’의 작가(팀코워크)는 “조선시대 환향녀 이야기에 비춰진 홍제천은 억울하게 외면받던 여성들을 위한 치유의 장소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빛의 향연으로 평온한 정서를 재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유진상가에서 걸어서 홍제천 변 산책로를 40분쯤 거슬러 올라가면 물길이 좁아진다. 홍제천 상류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위해 찾던 장소다. 특히 비 온 뒤 폭포의 모습이 장관이라는 세검정(洗劍亭)이 으뜸이다. 요즘 말로 ‘물멍’ ‘폭포멍’을, 당시에는 관창(觀漲·비 온 뒤 폭포 구경)이라고 했다.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유세검정기’에서 ‘우두커니 앉아만 있어도 좋기에 / 시 다 짓고도 어서 가자 말하지 않노라’라고 묘사했다. 노년의 겸재 정선(1676~1759)은 이를 그림으로 남겼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이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칼날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정자 앞 너른 바위는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들이 비밀 유지를 위해 원고 종이를 씻어낸 세초(洗草) 작업의 현장이다. 현재 세검정은 1941년 화재로 불타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도 가까이에 있다. 홍제천 옆 옥천암 바위에는 마애보살좌상이 앉아 흐르는 물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면서 이곳에서 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다. 홍제천 상류의 지류인 백사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추사 김정희의 별장터(별서터)가 나온다. 홍제천의 또 다른 이름인 모래내는 1960년대 형성된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맑은 물에 모래가 많아 생긴 이름이다. 장마철이 돼야 물이 흐르는 ‘건천’이었던 홍제천은 요즘 사계절 물이 흐르는 산책로로 바뀌었다. 2008년부터 펌프로 한강에서 상류까지 물을 끌어올렸다. 봄에는 벚꽃, 개나리가, 가을이면 단풍이 흐드러진다. 천변을 따라 달리는 러닝 크루, 자전거 족도 적지 않다. 안산(鞍山) 자락의 홍제천 인공폭포는 커피와 함께 ‘폭포멍’을 즐길 수 있는 또다른 명소다.
  • 황금 없는 산에 핀 황금빛 꿈, 서산 황금산 [한ZOOM]

    황금 없는 산에 핀 황금빛 꿈, 서산 황금산 [한ZOOM]

    오랜만에 다시 찾은 ‘황금산’에는 여전히 서해 바다의 짠 냄새가 풍겼고, 파도에 밀려 이리저리 몸을 부딪치는 몽돌의 자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바닷물에 코를 박은 채 억겁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코끼리바위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발 156m에 불과한 이 작은 산에 어떻게 ‘황금’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게 된 것일까. 이 사소한 의문을 품고 이름의 안쪽을 들여다본다면, 그 속에는 번뜩이는 황금보다 더 깊고 진한 이야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황금빛 바다의 전설 오래전 서산의 대산(大山) 앞바다는 철마다 조기 떼가 파도를 뒤덮을 만큼 풍요로운 ‘황금빛 바다’였다고 한다. 이 풍요의 신화 중심에는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1594~1646) 장군이 있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에도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던 강직한 충신이었으나, 그 기개 때문에 도리어 반역 혐의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억울하게 희생된 그의 지조와 소신은 민초들에 의해 ‘바다의 구원자’로 부활했다. 서해안 일대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임 장군이 명나라로 가던 중 굶주림에 쓰러져가는 백성들을 위해 가시나무를 바다에 꽂자 줄줄이 조기가 매달려 나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로 그는 군인을 넘어 바다와 어획을 관장하는 ‘풍어신’(豊漁神)이자 ‘해신’(海神)으로 민간의 가슴속에 신격화됐다. ●화살 한 발에 사라진 전설 서산 일대에는 ‘박활량(朴活良)’이라는 명궁(名弓)의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그는 한 번 쏘면 반드시 맞히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궁술로 왜적과 도적을 물리친 영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로 나간 그는 황룡(黃龍)과 청룡(靑龍)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민간 설화에 따르면 박활량은 마을을 지키는 청룡을 돕기 위해 활을 들었으나, 실수로 청룡을 쏘아 죽이고 만다. 그러자 바다의 수호신을 잃은 조기 떼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산 앞바다를 떠나버렸다. ‘황금빛 바다’는 그렇게 엇갈린 화살 한 발과 함께 수평선 너머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항금’에서 ‘황금’으로 떠나간 조기 떼를 그리워하던 어민들은 다시금 황금빛 조기가 가득한 바다를 기원하며 임경업 장군의 영정을 이 산에 모셨다. 그리고 그곳을 ‘황금빛 바다를 기원하는 사당’이라는 의미에서 ‘황금산사’(黃金山祠)라 불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산의 이름은 ‘강하고 빛나는 기운을 지닌 산’이라는 뜻의 ‘항금산(亢金山)’이었다. 마을 선비들이 세속적인 ‘황금’(黃金)보다는 고귀한 ‘항금’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초들의 염원은 근대에 이르러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산에서 실제로 금맥이 발견된 것이었다. 1926년 발간된 『서산군지』에는 어느덧 ‘항금산’ 대신 ‘황금산’(黃金山)이라는 표기가 등장했다. 고귀한 정신을 뜻하던 ‘항금’이 돈이 되는 ‘황금’으로 바뀌어 굳어진 셈이다. 지금도 등산로 곳곳에는 금을 캐기 위해 산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던 인공 동굴이 서글픈 흉터처럼 남아 있다. ●이제는 위로의 공간으로 오늘날 황금산은 서해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몽돌 구르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코를 바다에 담근 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코끼리바위의 자태도 여전하다. 이제 서산 사람들에게 이 산은 상실의 현장도, 탐욕의 공간도 아니다. 평범한 일상을 나누고, 대산공단의 화려한 불빛과 푸른 바다를 동시에 내려다보며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위로의 공간이다. 땅속의 황금도, 바닷속 황금빛 조기 떼도 이제는 모두 전설이 됐지만, 노을이 지는 시간이면 황금산은 온몸으로 노란 빛을 받아내며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해낸다.
  • ‘신라 천재’ 최치원 당나라 뱃길 오른 곳…“덧없는 삶 서럽구나” 술잔 기울이던 곳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신라 천재’ 최치원 당나라 뱃길 오른 곳…“덧없는 삶 서럽구나” 술잔 기울이던 곳 [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백제→고구려→555년 신라 영토로당과 본격 교류로 삼국통일 출발점원효대사도 당 유학길에 올랐다가‘일체유심조’ 깨닫고 발걸음 되돌려테뫼식 산성·포곡식 산성 결합 형태조선시대도 서해안 방어 전진기지 경기 화성시의 동쪽은 동탄신도시 중심의 인구 밀집지역과 삼성전자가 대표하는 첨단 공업지역으로 개발된 모습이다. 반면 화성시 서쪽은 자연과 역사가 조화를 이루는 수도권의 대표 휴양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전곡항, 제부도, 궁평항, 화성호는 ‘서해안 관광벨트’를 이루어 휴일이면 교통체증이 빚어질 만큼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화성시청은 서해안 휴양지대와 인구 밀집지역의 중간지점이라고 해도 좋을 남양읍에 자리잡고 있다. 남양읍은 고려 및 조선 시대 남양도호부 관아가 있었으니 지역 행정 중심지로 유서 깊은 역사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양도호부 형장이 있던 남양성모성지에 최근 지어진 아름다운 성당은 문화공간으로도 각광받는다. 당성(唐城)은 서해가 바라보이는 구봉산에 자리잡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성은 신라의 대(對)중국 교류 전진기지였다. 한반도 동남쪽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비로소 당나라와 본격 교류할 수 있게 됐다. 당성의 존재 때문이다. 그러니 신라에 당성은 삼국통일의 출발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서해가 바라보이는 구봉산에 자리 당성은 일찍이 한성백제의 영역이었다. 이때 이름은 당항성(黨項城)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풍납토성을 빼앗긴 백제는 오늘날의 공주 웅진으로 천도한다. 고구려는 당항성 일대를 당성군(唐城那)이라 불렀다. 진흥왕이 555년 한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은 다시 신라 영토가 됐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는 759년 이 지역의 이름을 당은군(唐恩郡)으로 바꿨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나라가 도움을 준 것에 감사한다는 의미겠다. 그런데 새 이름은 신라 사회에서 인기가 없었다. 이 시기 각종 기록은 하나같이 당성이라고 썼다고 한다. 고려가 출범하며 당은군은 당성군으로 돌아갔다. 당성은 12세기 익주(益州)로 승격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남양도호부가 됐다. 종3품 부사가 다스렸으니 위계가 높은 고을이었다. 당성은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서해안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당성은 발굴 조사에서 해발 165m의 구봉산 정상을 중심으로 시대를 달리하는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결합된 형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테뫼식이 산 정상을 둘러쌓았다면 포곡식은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이다. 학계는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을 통일신라가 포곡식 산성으로 규모를 키운 것으로 본다. 지금 보이는 당성 성벽은 통일신라가 당은군 시절 확장한 이후 양상을 반영한다. 당성에 오르면 사방이 거칠 것 없이 트여 있는 정상부에 망해루(望海樓) 터가 있다. 삼국시대 군사적 목적의 장대를 고려시대 누각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고려는 당성을 지방행정의 중심지, 곧 치소로 활용했다. 그런데 당성의 해상교통 기능은 새로운 수도 송악에서 가까운 예성강 하구 벽란도로 넘겨주기 시작한다. 결국 당성의 치소 기능도 고려 중기 이전 오늘날의 남양읍으로 옮겨갔다. 팔각정을 비롯해 망해루 남쪽 평탄지에서 확인된 다양한 형태의 집터도 치소 시절의 흔적이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개척하고도 제2수도 충주에서 남한강 수로로 곧바로 이어지는 인천 언저리를 항구로 쓸 수는 없었다. 북쪽에 고구려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서 중국 동해안을 오가는 배는 조선시대에도 육지가 보이는 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라는 고구려 때문에 이 뱃길도 이용할 수 없었다. 결국 신라는 북쪽 고구려와 남쪽 백제 사이의 안전지대인 당성에서 서해를 건너는 직항로를 이용했다. 먼바다로 나가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와 당나라 수도 장안을 잇는 최단 거리 교통로였다. ●경주~장안 잇는 최단거리 교통로 당성이 신라시대 중국을 오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용하는 해양교통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857~?)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다가 귀국했으니 오가는 길 당성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던 진성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좌절하고 유랑하다 당성에 닿았다. 그는 이곳에서 우연히 경주의 궁궐에서 얼굴을 익혔던 악공을 만난다. 그 역시 효공왕이 즉위하면서 따돌림을 당하자 당나라로 가던 길이었다. 최치원은 악공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이란 성했다가도 쇠퇴하니 덧없는 삶이 참으로 서럽구나…. 선왕을 뵈올 수 없으니 이 몸도 그대와 눈물 흘리네’라는 시를 써서 건넸다. 원효대사(617~686)가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닫고 발걸음을 되돌린 곳도 당성 언저리일 것이다. 앞서 원효대사와 의상대사(625~702)는 한 차례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를 가로질러 요동으로 가다 변방 수라군에게 붙잡혀 신라로 추방됐다. 두 사람은 661년 다시 유학길에 나선다. 송나라 승려 찬녕(919~1001)이 엮은 ‘송고승전’에 이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나라로 가는 경계인 해문(海門)에서 큰 배를 구해 바다를 건너려 했다. 중도에서 폭우를 만났다. 길옆 토굴에 몸을 숨겨 회오리바람의 습기를 피했다. 날이 밝아 바라보니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궂은비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밤도 무덤에서 머물렀는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원효대사는 “전날은 땅굴이라 생각해 편안했는데, 오늘 무덤에 의탁하니 뒤숭숭하구나. 땅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구나.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어떤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따로 구하리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고 외치고는 바랑을 메고 돌아섰다. 깨달음을 얻고자 당나라에 가려고 했지만, 원효는 배에 오르기도 전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송고승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이야기가 없다. 원효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신 이야기는 북송의 연수(904~975)가 지은 ‘종경록’에 등장한다. ‘원효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는데, 마침 그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어딘지를 두고는 직산설과 평택설도 있다고 한다. 모두 경주에서 당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자리잡은 고장이다. 하지만 극적인 스토리가 힘을 발휘하려면 오도(悟道)의 현장은 당나라 가는 배에 막 오르기 직전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당성설이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듯하다. ●20세기 각종 간척사업에 멀어진 바다 지금 망해루 터에 서면 바다까지는 제법 멀어 보인다. 20세기 각종 간척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과거에는 당나라를 오가는 배가 정박하던 포구가 멀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의 당성에 대한 묘사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당성은 바닷가에 일산처럼 우뚝 솟아 / 개펄이 빙 둘러서 안팎으로 이루었다.’ 화려한 햇볕가리개, 곧 양산 같은 모양으로 당성이 바닷가에 솟아 있었다는 뜻이다. 망해루에선 화량진과 마산포도 바라보인다. 고려 말부터 주변에 왜구가 출몰한 것은 삼남에서 걷은 세곡을 도성으로 옮기는 조운선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청구도’에 고려 공민왕 때 왜구가 화량에 침입했음을 적어 놓았다. 조선은 경기수군을 좌도 수군과 우도 수군으로 나누었다. 우도 수군의 본영은 도성으로 이어지는 한강 하구의 교동도에 두었다. 좌도 수군의 본영이 바로 화량진이었다. 마산포는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로 끌려간 항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앞서 3000명 남짓한 청군은 군함 3척과 상선 2척에 나누어 타고 마산포에 상륙했다. 이렇듯 마산포는 개항기까지 서해안의 핵심 국제항 역할을 했다. 시화호 개발 사업 이전까지 마산포는 소래·사리와 함께 경기만의 3대 포구로도 각광받았다. 하지만 1987년 간척 공사가 마무리되자 어민이었던 마산포 주민들은 졸지에 농민이 돼야 했다. 당시 주민들이 생계를 유지하고자 포도를 심은 것이 지금은 송산포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화성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 청·일·미군 주둔한 이방인의 길… 이젠 세계인 찾는 ‘K감성의 길’[서울 로드]

    청·일·미군 주둔한 이방인의 길… 이젠 세계인 찾는 ‘K감성의 길’[서울 로드]

    접근성 좋아 침탈·수탈의 거점화강제징용 노동자상·효창공원 등이 땅이 견뎌온 역사 묻어나는 곳낡은 기찻길 뒤 높이 솟은 아파트복고적인 분위기에 관광객 ‘북적’골목마다 개성 넘치는 식당 가득 “장소의 의미를 둘러싼 싸움은 기억에 대한 투쟁이다. 억압된 기억은 긴 우회를 거쳐 언젠가 유령의 얼굴로 기억한다.”(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용산에서의 독백’) 한강으로의 접근성 때문에 용산은 오랜 세월 교통의 중심이었다. 한양도성 서쪽 안산 자락이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가 한강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용을 닮았다 해서 용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현재의 효창공원과 원효로 서쪽 일대 구릉지가 본래 용산이고, 미군기지와 삼각지, 이태원이 자리 잡은 일대는 신용산이라 불리다 ‘신’을 빼고 용산으로 굳어졌다. 조선시대 경강상인의 터전이자 개항 이후 근대 문물의 유입 통로였던 용산은 접근성 탓에 일본 군국주의 침탈과 수탈의 거점이 됐고 이후 미군과의 동거가 최근까지 이어졌다. 시작은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파병된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이곳에 주둔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용산기지를 본격 조성했다. 용산이 행정구역상 경성부(현재 서울)에 포함된 것도 이때다. 일본군을 내몰고 이 땅을 접수한 미군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거의 철수했지만, 한국전쟁으로 돌아온 뒤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 창설과 함께 본격적인 주둔을 시작했다. 2004년 용산기지 이전협정 타결로 100여년간 이어진 남의 땅 신세는 면했지만, 아직도 반환 절차가 진행 중이다. 미군장교숙소, 용산어린이정원 등은 일반에 개방됐지만 여의도 면적과 비슷한 총 243만㎡(74만평)의 대부분은 여전히 접근할 수 없다. 옛 지명인 둔지방이 유래한 둔지산도 기지 안에 있다. 용산 곳곳에는 이 땅이 견뎌온 오욕과 그에 대한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남아있다. 용산기지 바깥에 외국군 주둔 흔적은 ‘왜명강화지처비’나 후암동에 있던 ‘호국신사’ 터 앞 108계단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도시개발 과정에서 사라졌다. 다만 미군이 일본군의 건물을 재활용한 덕에 남아있는 용산기지 안에 1952년 이전에 지은 건물이 132동에 이른다. 2017년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상은 용산을 거쳐 일본 본토와 사할린, 남양군도, 쿠릴열도로 강제징용됐던 조선인들을 기리고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 김서경 작가가 제작했다. 2010년대 이후 용산은 서울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신사옥은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최근 완전체로 컴백한 방탄소년단(BTS)의 소속사인 하이브 신사옥은 글로벌 아미(BTS의 팬덤)들의 성지다.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과 삼각지역 사이 이면도로에는 최근 소셜미디어(SNS)에서 가장 뜨거운 ‘용리단길’이 있다. 새로운 분위기의 가게들이 하루가 멀 만큼 들어서고 있다. 용리단길은 재개발 구역의 느낌과 신축 건물들이 뒤섞인 레트로 감성을 뽐낸다. 일본 하라주쿠 뒷골목에 있을 법한 선술집과 정갈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세련된 분위기의 한우구이 식당, 왁자지껄한 디제잉이 곁들여진 바(bar) 문화가 뒤섞인 무국적 공간으로 유동인구의 연령대도 폭넓은 편이다. 조금만 더 걸어 왜고개 성지의 고요한 마당에서 명상을 해도 좋다.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모셔졌던 곳이다. 왜고개란 이름은 조선 시대 기와를 구워 공급하던 와서(瓦署)의 흔적이다. 명동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했다고 한다. 한강대로 서편 골목길은 은행나무길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철도기지화와 함께 신시가지로 개발된 적산가옥이 남아있고, 독특한 감성의 식당과 카페가 들어섰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나온 백빈건널목의 저녁노을 배경 인증사진은 명불허전이다. 1928년 지어진 용산철도병원은 이제 용산역사박물관으로 쓰인다. 길 건너 주상복합단지 한켠에는 2009년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용산참사’를 기리는 용산도시기억전시관이 있다. 백빈건널목의 철제 가림막 너머에는 일제강점기 철도정비창 부지를 재개발하는 용산국제업무지구가 있다. 이곳 철도정비창에서 일본인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운 조선인들이 광복 직후 ‘조선해방자호’ 열차를 만들었다. 1946년 7월 부산항에 도착한 독립운동가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유해가 이 열차에 실려 돌아왔고,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모셔졌다.
  • 미국 선교사의 19세기 ‘조선 기행’… 136년 만에 복원

    미국 선교사의 19세기 ‘조선 기행’… 136년 만에 복원

    136년 전인 1890년 미국에서 온 외국인 선교사가 쓴 조선의 생활상이 복원돼 최초로 공개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7일 제54주년 보건의 날을 맞아 양화진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두루마리 기행 편지’를 전면 복원해 공개한다고 6일 밝혔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국내 최초 여의사 교육기관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국내 첫 한글 점자 교재를 제작하는 등 한국 현대 의학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기행 편지는 로제타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으로 파견된 1890년 9월부터 1891년 1월까지의 활동을 고향 가족에게 전하려고 쓴 것이다. 영문 필기체로 낱장의 편지 94매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 형태의 이 편지는 가로 16.4㎝, 세로 31.8m에 이른다. 136년 전 외국인 선교사의 시선으로 본 조선의 의료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전통 한옥 진료소인 ‘보구녀관’의 모습과 가마와 전통 혼례, 고종이 청나라 사절단을 맞이하는 행렬 등 로제타가 직접 촬영한 희귀 사진 59점이 함께 부착돼 있어 당시 시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기록물은 당초 변색·부식·훼손돼 있던 상태였다. 국가기록원은 1년 6개월에 걸쳐 오염물질을 제거하고 탈락된 글씨를 복원용 한지로 보강했다. 복원된 ‘로제타 셔우드 홀의 두루마리 기행 편지’의 원문은 소장처인 양화진기록관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조선 후기 태평양 건너온 선교사의 ‘조선 기행’… 136년 만 복원

    조선 후기 태평양 건너온 선교사의 ‘조선 기행’… 136년 만 복원

    조선 후기인 1890년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온 선교사가 그린 생활상이 복원돼 일반에 공개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제54주년 보건의날을 맞아 양화진기록관이 소장하고 있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두루마리 기행편지’를 전면 복원해 7일부터 공개한다고 6일 밝혔다. 로제타 셔우드 홀 여사는 국내 최초의 여의사 교육기관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 한글 점자 교재를 제작하는 등 한국 현대 의학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이번에 공개되는 기행 편지는 로제타 여사가 1890년 9월 의료선교를 위해 미국을 떠날 때부터 조선에 도착한 직후인 1891년 1월까지의 활동이 적혔다. 94장을 이어붙인 32m의 대기록으로, 19세기 말 조선의 생활상이 담겼다. 특히 1890년 10월 14일 조선에 도착한 후 3개월 간의 기록은 외국인 선교사의 시선으로 본 당시 척박한 조선 의료 환경과 주민의 일상이 묘사돼 있다. 전통 한옥 진료소인 ‘보구녀관(普救女館)’의 모습, 가마와 전통 혼례, 고종이 청나라 사절단을 맞이하는 행렬 등 로제타 여사가 직접 촬영한 희귀 사진 59점도 편지에 부착돼 있다. 국가기록원은 약 18개월에 걸쳐 오염물질 제거와 탈락된 글씨 결실부를 복원용 한지로 보강했다. 또 열람과 연구, 전시 등에 활용할 복제본 제작을 위해 고해상도 스캐너를 이용, 디지털화했다. 복원된 기행편지는 양화진기록관 누리집과 국가기록원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용철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로제타 셔우드 홀의 두루마리 기행편지’가 복원돼 보건 의료 종사자를 기리기 위한 보건의 날에 국민들에게 공개되고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앞으로도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우수한 복원 기술로 소중한 기록유산들이 안전하게 영구 보존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삼전도 굴욕의 역사 메워낸 자리…시민이 심은 벚나무엔 봄이 핀다[서울 로드]

    삼전도 굴욕의 역사 메워낸 자리…시민이 심은 벚나무엔 봄이 핀다[서울 로드]

    인조가 청에 머리 조아린 나루터한강 물길 메워 잠실섬 강남 편입남은 흔적이 오늘날의 석촌호수롯데월드 들어서고 벚나무 식재주민 기증분 더해 ‘벚꽃터널’ 완성봄이면 800만여명 찾는 명소길로인근 송리단길·방이맛골 미식 유명‘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은 ‘도로고(道路考)’에 이렇게 썼다. 소설가 김훈은 ‘허송세월’에서 ’“길은 소통의 통로란 의미”라고 풀었다. 오래 전부터 길을 중심으로 사람과 재화, 서비스가 움직이고 건물이 들어섰다. 이처럼 길은 도시의 경쟁력이자 풍경이며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600여년 역사의 서울에는 많은 길이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쫓겨갔던 유배길부터 3·1 운동과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2002년 월드컵, 두 번의 탄핵 촛불까지, 역사의 변곡점마다 길이 있었다. ‘서울 로드’에서 길에 스며든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풀어보려 한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11월 훗날 ‘강남’으로 불리게 된 영동(永東) 지구 개발을 공식 발표했다. 과밀화하는 인구를 한강 이남으로 분산하고 서울의 균형 발전을 추진한다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가 땅 투기로 수백억원의 매매 차익을 남겨 대선 자금으로 썼다는 얘기도 나온다. 영동과 함께 잠실도 개발됐다. 잠실(蠶室)은 조선 시대에 왕실에서 지정한 누에치는 장소라는 의미다. 1520년 조선 중종 때 대홍수가 나면서 잠실 위쪽에 샛강이 생겼는데 지금의 신천(新川)이다. 이후 잠실은 한강 본류인 송파강과 지천인 신천 사이 섬이 됐다. 뽕나무가 사라진 지 오래인 척박한 섬인 잠실도 주민들은 밀이나 수수를 경작했고, 일부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 뚝섬 공장 지대로 출근했다. 서울시는 1971년 송파강 물막이 공사를 시작해 1978년 6월 매립을 끝냈다. 그렇게 남은 송파강의 일부가 석촌호수가 됐다. 잠실대교에서 석촌호수를 가로질러 성남시로 이어지는 왕복 8차선 송파대로도 이즈음 만들어졌다. 송파대로를 중심으로 강동구 쪽의 동호와 강남구 방면의 서호로 나뉘었다. 동호와 서호 사이 북쪽에는 김훈의 소설과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으로 변주된 병자호란(1636~1637), 오욕의 역사가 담긴 삼전도비가 있다.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삼전도는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한강 나루 중 하나로, 도성과 남한산성을 잇는 요충지였다. 조선 인조는 이곳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절을 하고 군신 관계를 맺는다. 이후 청의 요구로 세워진 비석이 삼전도비다. 이 비석은 청일 전쟁 이후 강물에 버려졌다가 다시 세워졌고, 해방 이후 주민들이 땅에 묻었다가 홍수로 드러나기도 했다. 1983년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에 세워졌다가 2010년 원 위치와 가까운 곳에 둬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석촌호수는 1978년 완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난간을 두고 멀리서 봐야 하는 호수였다. 밤이면 석촌호수 북측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포장마차 행렬이 늘어섰다. 1989년 서호 북측에 롯데월드 어드벤처, 이듬해 서호 가운데에 매직아일랜드가 문을 열면서 이 일대는 전환점을 맞았다. 방문객과 유동 인구가 급증하자 송파구도 석촌호수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벚꽃이 심어진 것도 이때다. 송파구는 석촌호수 공원을 조성하면서 2007년까지 왕벚나무 592그루, 수양벚나무와 산벚나무 320그루를 심었다. 지금처럼 빽빽한 벚꽃 터널을 이루게 된 것은 2007년 주민들로부터 벚꽃나무를 기증받으면서다. 당시 구는 수목 기증자를 모집해 한 그루당 11만~30만원을 모금 받아 총 300그루의 벚꽃나무를 더 심었다. 벚꽃이 석촌호수의 정체성을 바꿔놓았다. 지난해 석촌호수 벚꽃축제(2025년 4월 2~13일)를 다녀간 인원은 862만여명에 이른다. ‘전통의 강자’인 여의도 윤중로 봄꽃축제 방문객이 지난해 303만여명(4월 8~12일)이었다. 여의도 축제 기간이 7일 더 짧았던 점을 고려하더라도 석촌호수 벚꽃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석촌호수에는 2.5㎞ ‘벚꽃로드’ 외에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공간과 시설, 소셜미디어(SNS)에서 인기 있는 포토 스폿들이 있다. 지난해 4월 잠실 호수교 남측에 설치된 지름 7m 규모의 특수 곡면형 LED 디스플레이 ‘더 스피어’가 대표적이다. 2014년 10월부터 500만명의 관람객을 모았던 공공미술 프로젝트 ‘러버덕’의 인기를 이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달에는 잠실 호수교 아래 길이 33m의 대형 미디어파사드 ‘호수교 갤러리’도 문을 열었다. 롯데월드몰 뒤편 서호에는 문화실험 공간 호수, 동호 동쪽에는 더 갤러리 호수가 있다. 서호 남측의 서쪽 끝에는 음악과 연극 공연이 열리는 석촌호수 아틀리에도 있다. 벚꽃을 실컷 즐겼다면 배를 채울 차례다. 동호 남측에 줄지어 있는 카페거리의 카페 사이로 백제고분로까지 이어지는 ‘송리단길(송파+경리단길)’이 유명하다. 주택가에 드문드문 식당이 있던 송리단길은 2014년 동호 북측에 롯데월드타워와 롯데월드몰이 문을 열면서 상권이 팽창했다. 본격적으로 배를 채우고 싶다면 구청 건너편 먹자골목 ‘방이맛골’을 찾아도 된다. 방이동 먹자골목으로도 불리는 방이맛골은 구청이 문을 연 1990년대 초에 형성됐다. 구청 직원이나 근처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길인 만큼 MZ들이 몰리는 송리단길과는 느낌이 또 다르다.
  • 이란, 트럼프에 ‘전쟁 배상금’ 요구…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송현서의 디테일+]

    이란, 트럼프에 ‘전쟁 배상금’ 요구…얼마 받을 수 있을까? [송현서의 디테일+]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공에 대한 배상금 등 전쟁 종식을 위한 조건을 제시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11일 엑스에 “시온주의 정권과 미국이 촉발한 이 전쟁을 끝낼 유일한 방법은 이란의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급하며, 향후 침략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고한 국제적 보장을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블룸버그 통신도 이날 복수의 관계자를 인용해 “이란 측이 러시아와 파키스탄 등 중재국 측에 미국·이스라엘의 공습 재발 방지 확약을 휴전 조건으로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관계자들은 “이란은 전쟁이 끝난 뒤 이스라엘이 다시 공격에 나설 가능성을 우려한다”면서 “현재 유럽과 중동 국가들의 지원 아래 비공식 협상 채널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란의 휴전 협상 조건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동의할 의사가 있는지는 불분명하다”면서 “미국이 이란에 ‘불가침 보장’을 약속할 뜻이 있는지, 이스라엘에게도 이를 강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전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블룸버그에 “미국은 여전히 대이란 군사작전을 진행 중”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잠재적인’ 새 지도부가 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왔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전쟁 승리’ 선언한 트럼프, 이란 요구 받아줄까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켄터키주 히브런에서 연설을 통해 “우리가 이겼다. (전쟁) 시작 1시간 만에 끝났다”라고 거듭 강조하며 사실상 전쟁 승리를 선포한 상황에서 전쟁 배상금 등 이란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더불어 이란과 핵 협상에서 ‘제로 핵농축’을 요구했던 미국이 이란의 핵무기 보유를 허용하거나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의 차남인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이끄는 이란의 새 정권을 인정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란도 당장 물러설 기세가 아니다. 지난 9일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는 “전쟁의 끝을 결정하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라고 맞선 뒤 11~12일 호르무즈 해협 인근과 이라크·바레인 등에서 공세의 파고를 높였다. 지난 10일에는 이란이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가 보낸 휴전 제안을 두 차례 거부했다는 보도가 영국 가디언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지난 9일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조기 종료’ 발언과 배치되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이날 공식 행사에서 “우리의 염원은 이란 국민이 폭정의 멍에를 벗어던지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쟁 조기 종료와는 거리가 먼 장기전을 시사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의 핵무기 인정·침략 재발 방지 약속·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럼에도 만약 미국이 이란에 전쟁 배상금을 줘야 한다면 직접 피해, 경제적 손실, 환경·사회적 피해 등과 함께 이란의 GDP 규모 등을 고려한 배상금이 책정될 수 있다. 이 기준과 역사적 사례를 들어 봤을 때, 배상금 규모는 최소 수백억 달러에서 1조 달러 이상에 달할 수 있다. 전쟁 배상금 지급된 역사적 사례비록 미국이 이란에게 전쟁 배상금을 지급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역사적으로 전쟁이 끝난 뒤 패전국이 승전국에 배상금을 지급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871년 프랑스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연합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약 50억 프랑을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이후 독일군이 프랑스 일부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1890년대 중반과 1900년대 초반에 벌어진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서 패전국이 된 청나라는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2억 냥(당시 기준으로 3억~4억 상당)의 배상금을 건넸다. 일본은 이를 통해 군사·산업 확장의 자금을 확보했고 빠르게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이 된 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1320억 금마르크를 전쟁 배상금으로 내놓았다. 금마르크는 금의 양으로 화폐(마르크)의 가치를 정한 것으로, 당시 기준 1금마르크는 0.358g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약 4만 7000t의 금에 해당하는 돈을 배상금으로 쓴 셈이다. 이후 독일은 경제 붕괴와 초인플레이션, 사회 불안과 정치 극단화로 고통받았고 이러한 상황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
  • 생선으로 만든 콘돔?…중국 여성들의 ‘고약한’ 피임 방법 모아보니 [핫이슈]

    생선으로 만든 콘돔?…중국 여성들의 ‘고약한’ 피임 방법 모아보니 [핫이슈]

    수백~수천 년 전 중국 여성들의 다양한 피임 방법이 소개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10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피임법 중 하나는 ‘구룽’ 섭취다. 고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약초인 구룽의 잎은 난초처럼 생겼고 뿌리는 도라지와 비슷하다고 묘사돼 있다. 매우 쓴맛이 특징인데, 고대 기록에서 이 식물은 ‘꽃은 피지만 열매는 맺지 않는 식물’이라는 이유로 구룽을 먹으면 임신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피임 효과가 현대 과학에서 확인된 적은 없다. 물리적 피임법은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등장했다. 중국 후베이성 중부에 있는 한 무덤의 발굴 조사 당시 말린 생선의 부레로 만든 원통형 물체가 발견됐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고대 피임 기구(콘돔)로 여겨진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중국 여성들은 생선의 부레를 깨끗하게 씻어 말린 뒤 원시적인 형태의 피임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도구는 매우 불쾌한 냄새와 함께 사용이 불편하고 위생적이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다.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 시대에는 사향과 사슴뿔을 섞어 만든 환이 피임을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약은 피부를 매끄럽게 하고 매혹적인 향이 나게 했지만, 동시에 불임을 유발하기도 했다. 실제로 전통 중국 의학에서는 사향이 혈액 순환을 촉진하는 동시에 장기 사용하면 자궁 내막에 손상을 일으켜 불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사슴뿔의 경우 과도하게 섭취하면 호르몬 불균형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당나라 시대가 된 이후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 문명과 활발히 교류하며 다양한 피임법이 중국에 소개됐다. 그중 하나는 사향(사향노루의 향낭에서 얻는 향료·약재) 및 향신료이자 약재인 사프란을 섞어 만든 피임약이다. 중국 전통 의학에서 사프란은 월경을 촉진하고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으나, 피임 또는 낙태 목적으로 사용된 경우도 많았다. 사향과 사프란 등을 섞어 가루나 환 형태로 만든 피임약은 매우 비싸고 귀해서 구하기 어려웠다. 올챙이부터 수은까지…위험천만한 피임법효과가 좋거나 안전한 피임법은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탓에 보통 여성들은 올챙이를 먹거나 수은을 섭취하는 등 위험한 민간요법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챙이의 경우 오래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민간요법 중 하나로, 이를 먹으면 월경이 멈추고 임신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소량의 수은은 에스트로겐 생성을 방해한다고 믿었으나 모두 매우 위험한 방식이었다. 이와 함께 당나라 황제들의 일부 후궁들은 사향, 거머리, 등에 등을 섞어 약으로 만든 뒤 이를 마시기도 했는데, 이 약은 심한 복통과 함께 영구적인 불임으로 이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 밖에도 명나라 때에는 한 여성이 출산 후 회복 시기에 살아있는 강달팽이(민물달팽이) 두 마리를 먹으면 피임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따랐다가 말을 할 수 없는 부작용에 시달렸고 결국 26세에 세상을 떠난 사례가 있다. 청나라 시대에는 목화씨 기름을 남성 피임약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SCMP는 “오늘날 현대 의학의 발전과 성평등은 여성들에게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한다”면서 “여성의 만족도를 우선시하는 피임 제품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더 많은 남성들이 피임을 여성만의 부담이 아닌 공동의 책임으로 인식해 정관 수술을 선택한다”고 전했다.
  • [서울광장] ‘열하일기’와 천주교에 대한 고민

    [서울광장] ‘열하일기’와 천주교에 대한 고민

    연암 박지원은 두주불사의 술꾼이었던 것 같다. ‘열하일기’엔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지만 여행하며 술 마시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에서 술 마신 이야기는 압권이다. 호기롭게 술을 시키고는 큰 사발에 술을 가득 부어 자랑스럽게 석 잔을 들이켰다는 내용이다. 지켜보던 중국인들도 놀랐다니 독한 백주(白酒)였겠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연암과 어울리던 이들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행하던 와중에 한양의 술친구를 떠올리는 대목이 ‘열하일기’에 나온다. 연암은 친구 이주민을 가리켜 풍류를 아는 선비라고 했다. 술의 청탁과 잔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한꺼번에 털어넣는 인물이었다. 친구들은 술통을 뒤집는다는 의미로 복주(覆酒)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주민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이희영이다. 붉을 주(朱), 백성 민(民)은 대취해 얼굴이 붉어진 모습에 붙여진 또 하나의 별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 이희영은 화가였다. 예수상을 포함한 성화 3점을 백서 사건의 황사영에게 보냈고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연암의 시대, 천주교를 포함한 서학은 지식인 사회에서는 일종의 시대정신이었다. 연암과 주민에게 술이란 학문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엊그제 ‘열하일기’ 초고본이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됐다는 소식에 자연스럽게 연암과 주민을 떠올리게 된다. 보물에 오른 것은 연암 친필 ‘연행음청’과 ‘연행음청록·연행음청기’, ‘열하일기’, ‘열하피서록’ 등 4종 8책이다. 연암 특유의 서풍이 잘 나타나 있다는 것이 문화유산위원회 판단이다. 박규수, 성대중, 박제가, 이덕무 등 연암과 인연이 있는 문인들이 대거 흔적을 남긴 것도 책의 가치를 더하게 했다. ‘열하일기’ 초고본이 중요한 것은 천주교에 대한 연암의 인식 변화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행 당시에는 서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가감 없이 표출했던 연암이었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되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불가피했다. 더구나 후손들은 ‘열하일기’ 원본에 보이는 연암의 서학에 대한 호의로 인해 엉뚱한 불똥이 튈지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서학에 대한 연암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사학계에서도 주요한 관심사였다. 일찍이 연암은 서기(西器)를 수용하되 서도(西道)는 배격하는 제한적 수용론자라는 인식이 대세를 이루었다. 서기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이라면 서도는 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가리킨다. 연암은 베이징의 천주당을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성당 벽화의 사실주의 기법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천주교의 교리 자체는 ‘하늘과 사람을 모두 속이고 의리와 윤리를 손상시킨다’며 배격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초고본이 알려지면서 연암의 서학관(西學觀)에는 다른 평가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초고본에 담겼던 서학 관련 내용의 상당 부분이 훗날 삭제되거나 수정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연암이 천주교 교리와 지구자전설이 중국에 전래된 경위를 토론한 내용이 나중 책에선 보이지 않는다. ‘천주당’(天主堂)과 ‘천주당화’(天主堂畵)라는 제목도 ‘풍금’(風琴)과 ‘양화’(洋畵)로 바뀌었다고 한다. 연암은 1797년부터 3년 동안 충청도 면천군수를 지냈다. 면천은 어느 지역보다 천주교가 널리 퍼졌던 충청에서도 교세가 강했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에 대한 임금과 조정의 부정적 시각이 절정에 이른 시기이기도 했다. 서학에 대한 인식을 고수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벗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더하다’는 연암의 ‘친구에게’(與人)는 이희영에게 바치는 글이다. 천주교도로 처형됐으니 이름을 쓰지 못했다. 그러니 ‘이주민’도 이희영을 감추려 훗날 고쳐쓴 이름이 아닐까 싶다. 보물이 되지는 못했지만 국가유산위 심의에는 ‘정묘중정연암집’도 올랐다. ‘열하일기’ 중 ‘망양록’을 아들 박종채가 연암의 3년상 직후 필사한 것이다. 원본에 담긴 아버지의 서학을 보는 우호적 시선에 더더욱 압박을 느꼈을 아들의 불안이 어떤 양상으로 반영됐는지 궁금하다. 서동철 논설위원
  • [정정엽의 마음 처방] 새해 결심 ‘성취의 심리학’

    [정정엽의 마음 처방] 새해 결심 ‘성취의 심리학’

    1월이 되면 많은 이들이 결심을 한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해 보겠다’, ‘성공을 위해 공부하겠다’ 등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결심 말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해낼 수 없었다. 20여년 반복하다 보니 ‘나는 이런 것도 못 하는 사람이구나!’, 자책과 실망만 늘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리학의 기본 법칙 중 하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이로운 행동은 지속하고 해로운 행동은 멈춘다’는 것이다. ‘효과의 법칙’이다. 1905년 손다이크가 퍼즐 상자를 이용한 고양이 실험을 통해 이 법칙을 발표했다. 운동과 공부는 명백하게 이로운 행동이다. ‘그렇다면 이를 지속하지 못하는 나는 고양이보다 못한 존재인가?’ 19세기 중반 일어난 아편전쟁에는 묘한 현상이 숨어 있다. 영국인보다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 중독에 훨씬 더 많이 빠진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이유는 복용 방식의 차이였다. 영국인은 아편을 술에 녹인 로더넘이라는 형태로 마셨다. 반면 청나라에선 담배처럼 아편 연기를 흡입했다. 액체로 마신 경우 그 물질이 뇌로 전달되기까지 2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흡입한 경우에는 7~10초면 충분하다. 우리 뇌의 보상 회로는 속도에 민감하다. 보상이 ‘지금 당장’의 영역에 들어오면 뇌는 이성적인 판단을 멈추고 당장의 만족을 선택한다. 심리학의 또 다른 법칙 중 하나인 ‘보상의 즉각성’이다. 즉 우리 뇌는 나중에 돌아오는 보상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운동과 공부를 통한 ‘건강’이나 ‘성공’은 아득한 미래의 보상이다. 우리 뇌는 이런 것보다 ‘쇼츠’나 ‘달콤한 간식’ 같은 즉각적 보상에 반응하도록 설계돼 있다. 우리가 새해 결심을 이룰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고양이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이상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 또 자책은 멈추더라도 발걸음까지 멈추지는 말자. 다행히 인간의 뇌는 언어와 함께 진화해 왔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먼 미래의 보상을 ‘지금 당장’의 영역으로 끌어당길 수 있게 도와준다.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가치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운동을 하면서 환자에게 운동을 권할 때는 그러지 못할 때보다 설득력이 높다. 이 가치는 운동하기 싫어 ‘달콤한 휴식’이 나를 유혹할 때마다 힘찬 목소리로 환자를 설득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게끔 도와준다. 이는 먼 미래의 건강보다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지금 당장’의 강력한 보상이 되어 준다. 새해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올해의 결심이 또 무너지고 있다면, 자신을 비난하는 대신 잠시 멈춰 그 결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다시 찾아보자. 우리는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인 동시에 그 본능을 뛰어넘어 ‘의미와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뇌가 즉각적인 쾌락보다 더 달콤한 ‘성취의 가치’를 맛보는 한 해가 되기를 응원한다. 정정엽 광화문숲 수면센터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천국을 꿈꾼 반란… 지옥에 이르다

    천국을 꿈꾼 반란… 지옥에 이르다

    세계사로 바라본 ‘태평천국의 난’남녀평등·토지분배로 민중 지지영·프·미ꎬ 이익에 따라 분란 가중중국 근대화 늦어지는 결과 초래 ‘태평천국의 난’ (1851~1864)은 중국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이었다. 10년 넘는 아수라장 속에서 참혹한 전투와 전염병, 기근이 이어지며 최소 20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배고픔에 시달리다 사람 고기(인육)를 먹고, 심지어 인육을 시장에서 사고 파는 참상까지 벌어졌다. 시작은 이상주의를 공유하는 신흥종교집단이었다. 과거시험에 급제해 집안을 일으켜세울 인재로 기대를 모았던 홍수전은 거듭된 낙방으로 좌절해야 했다. 네번째 과거까지 떨어진 홍수전을 구원한 건 기독교였다. 자신이 예수의 동생이자 백성을 구원할 구세주라고 확신하게 된 홍수전은 ‘배상제회’(拜上帝會·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했고 교세를 급속히 키웠다. 이를 바탕으로 1851년 청나라 정부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 매사추세츠대 교수이자 중국사 연구자인 저자 스티븐 플랫은 평범한 ‘고시낭인’이 어떻게 신흥종교의 교주가 되어 태평천국이라는 국가 건설까지 선언하게 되는지, 청나라를 비롯해 영국과 프랑스 등 각국의 이합집산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드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증국번을 비롯해 천재적 지략가였던 이수성, 기독교적 평등사상을 세상에 구현하려 했던 홍인간 등 다채로운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대하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태평천국군은 반란 초기 양쯔강을 따라 전진을 거듭한 끝에 난징까지 점령하고 이 곳을 수도로 삼았다. 기독교를 중국적으로 해석해 남녀평등, 토지 분배, 조세 부담 경감을 실현하며 민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중국 남부 상당 지역을 지배했고 청나라 수도인 베이징 진격작전을 펼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반면 청나라는 태평천국군을 비롯해 밀려든 영국군, 프랑스군까지 상대하면서 몰락 직전까지 몰렸다. 위기에 처한 청 제국을 구한 영웅은 증국번이었다. 한족 출신 학자에서 군대 지휘관으로 변신한 증극번은 초기엔 패배를 거듭하며 좌절을 겪었지만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용인술로 버틴 끝에 승기를 잡았다. 결국 그의 군대는 1864년 난징을 함락시키며 내전을 끝낼 수 있었다. 책은 중국의 거대한 내전을 통해 인간의 이상과 욕망,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한 편의 대서사시로 펼쳐낸다. 특히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이 19세기에는 이미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는 통념을 뒤엎는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19세기에도 세계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고 폐쇄된 사회도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겉으로는 중립 정책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 청나라 군대와 태평천국군 사이를 교묘히 조종하며 분란을 부추겼다. 상하이에 주둔한 선교사 집단은 태평천국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협상했지만 식민지 외교관과 권력 있는 상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지위 유지를 위해 청나라를 지지했다. 특히 미국의 남북전쟁과 중국 내전에 모두 관여하던 영국은 기독교적 성향을 지닌 태평천국군 대신 부패하고 반근대적인 청나라를 지지했다. 기독교 형제들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기대했던 태평천국군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영국이 평화 협상 과정에서 극도로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점은 역사의 큰 아이러니”라면서 “‘태평천국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현대성의 싹들을 갖고 있었으나 서구 열강의 개입으로 중국의 근대화가 한발 늦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 자연산 수산물 중국 수출길 열려…간송 소장했던 ‘돌사자상’도 기증

    자연산 수산물 중국 수출길 열려…간송 소장했던 ‘돌사자상’도 기증

    한국과 중국이 5일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과학기술혁신, 환경 및 기후, 디지털 경제, 중소기업, 교통 등의 협력을 망라하는 양해각서(MOU) 14건을 체결했다. 산업통상부와 중국 상무부 장관이 참여하는 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해 공급망 협력의 틀을 제도화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대통령과 시 주석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양해각서 14건과 기증 증서 1건의 서명식에 참석했다. 양국은 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혁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 미세먼지에서 기후변화·순환경제 등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환경 및 기후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디지털 분야 전반을 포괄해 양국 간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디지털 기술 협력 양해각서’,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활용해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중소기업과 혁신 분야 협력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교통 분야 협력 양해각서’, ‘상무 협력 대화 신설에 관한 양해각서’를 통해 교통 관련 협의체를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한중 상무장관 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양국은 ‘야생 수산물 수출입 위생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해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자연산 수산물을 어획수산물 전 품목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품목별 허가를 받지 못해 중국으로 수출할 수 없었던 냉장 병어 등 수산물도 허가 없이 수출이 가능해졌다. ‘식품안전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통해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중국 해관총서에 한국 식품기업의 공장 등록을 일괄 추진해 한국 식품기업의 신속한 중국 진출을 지원키로 했다. 양국 관세당국이 수출입 물품에 대한 지식재산권 침해 적발 내용을 교환해 단속의 효율성을 높이는 ‘국경에서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상호 협력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이 밖에 양국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의 문화유산인 청나라 시대 제작 석사자상 한 쌍을 중국 국가문물국에 기증하는 증서에도 서명했다. 중국에서 석사자상은 액운을 막고 복을 부르는 상징으로 주택의 정문이나 분묘 앞에 배치됐다. 강유정 청와대 대변인은 서면브리핑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이 1930년대 일본에서 구입한 중국 유물”이라며 “4~5월 즈음에 중국 측에 전달될 예정”이라고 했다.
  • 자연산 수산물 중국 수출길 열려…간송 소유 ‘청나라 석사자상’ 기증

    자연산 수산물 중국 수출길 열려…간송 소유 ‘청나라 석사자상’ 기증

    한국과 중국이 5일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과학기술혁신, 환경 및 기후, 디지털 경제, 중소기업, 교통 등의 협력을 망라하는 양해각서(MOU) 14건을 체결했다. 한국의 자연산 수산물 수출 대상 확대, 한국 식품기업의 수출 절차 지원 등 민생과 직결된 MOU도 다수 체결됐다. 이 대통령과 시 주석은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양해각서 14건과 기증 증서 1건의 서명식에 참석했다. 양국 정상은 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혁신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 미세먼지에서 기후변화·순환경제 등으로 협력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환경 및 기후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디지털 분야 전반을 포괄해 양국 간 교류·협력을 확대하는 ‘디지털 기술 협력 양해각서’,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활용해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내용의 ‘중소기업과 혁신 분야 협력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교통 분야 협력 양해각서’, ‘상무 협력 대화 신설에 관한 양해각서’를 통해 교통 관련 협의체를 장관급으로 격상하고 한중 상무장관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아울러 양국은 ‘야생 수산물 수출입 위생 관련 양해각서’를 체결해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자연산 수산물을 어획수산물 전 품목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품목별 허가를 받지 못해 중국으로 수출할 수 없었던 냉장 병어 등 수산물도 허가 없이 수출이 가능해졌다. ‘식품안전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통해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중국 해관총서에 한국 식품기업의 공장 등록을 일괄 추진해 한국 식품기업의 신속한 중국 진출을 지원키로 했다. 양국 관세당국이 수출입 물품에 대한 지식재산권 침해 적발 내용을 교환해 단속의 효율성을 높이는 ‘국경에서의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한 상호 협력 양해각서’도 체결했다. 이 밖에 양국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중국의 문화유산인 청나라 시대 제작 석사자상 한 쌍을 중국 국가문물국에 기증하기로 하는 기증 증서에도 서명했다. 중국에서 석사자상은 액운을 막고 복을 부르는 상징으로 궁궐과 관청, 사찰, 저택 등에 세워지며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청와대는 “중국 문화유산을 본국에 기증해 한중 문화협력 확대·증진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세한도·열하일기·천주실의… 중국과 끊임없이 교류한 조선

    세한도·열하일기·천주실의… 중국과 끊임없이 교류한 조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는 예술 뿐 아니라 한·중 지식인들의 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도 한 획을 긋는 문화유산으로 손꼽힌다.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 시절이던 1844년에 제자 이상적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는데,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다음해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가져가 청나라 문인들에게 이 그림을 소개했다. 이 그림의 높은 예술성에 감탄한 청나라 문인 16명이 각자 적은 감상문이 더해지면서 세한도는 한중교류와 한중 우호친선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중 관계는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중국과의 관계는 시기별로 큰 변화를 겪었다. 개국 이후 조선은 당대 최강국인 명나라를 상대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추구할 전략으로 사대주의를 택했다. 명나라를 대체해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 역시 초기에는 조선과 심각한 갈등을 거쳤고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18세기 이후에는 우호친선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문화교류 역시 활발해졌다. 최근 권내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기획하고 고려시대사, 조선시대사, 명·청사, 미술사, 한문학,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국내 13명의 전문가가 필자로 참여해 조선-명나라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조선과 명나라의 사행 외교사’(푸른역사)가 출간돼 눈길을 끈다. 필자들은 명 사행의 시기별 변화, 사행 운영 양상과 노정, 접경 지역인 평안도와 요동의 사행 지원 상황은 물론 명의 조선 사행, 상호 인식과 이해, 사행 의례와 무역, 주변 지역인 여진, 일본, 여송(필리핀 루손섬)과의 관계를 살폈다. 또 명 사신과 조선 접반사 등이 시를 주고받는 ‘창화(倡和) 외교’가 조선 문단에 미친 영향 같은 문화적 의미도 짚었다. 조선 사신이 중국으로 파견되는 것을 의미하는 사행(使行)은 근대적 국제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대표적 외교 행위였다. 조선 사행은 중국 정세에 관한 정보 파악은 물론, 서책과 선진 문물 도입, 지식인 교유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소통의 기회로 삼았고 자아 성찰의 계기로도 삼았다. 이와 함께 길을 가는 동안 곳곳에서 열리는 역관 무역과 상인들의 사(私) 무역을 통해 경제적 성장도 꾀할 수 있었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홍대용 평전’(푸른역사)에서도 18세기 후반 한중 지식인 교류를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홍대용은 1765년 사신단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엄성(嚴誠)·반정균(潘廷均)·육비(陸飛) 세 사람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홍대용은 귀국한 이후에도 중국인 친우들과 편지를 통해 우정을 이어갔다. 홍대용이 물꼬를 튼 한중 지식인 교류는 조선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박제가와 박지원은 각각 1778년과 178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할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적극적으로 친분을 맺으려 노력했으며,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와 ‘열하일기’와 같은 사회개혁서를 저술했다. 유럽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지식인들을 위해 저술한 ‘천주실의’ 역시 사신들을 통해 조선으로 전파되면서 조선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가톨릭 신앙의 싹을 틔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