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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기 경기도의원,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 지명밟기 지도사 양성과정 수료식 참석

    김원기 경기도의원,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 지명밟기 지도사 양성과정 수료식 참석

    경기도의회 안전행정위원회 김원기(더불어민주당·의정부4) 의원은 30일 의정부시종합사회복지관 회의실에서 개최된 지명 밟기 지도사 양성과정 수료식에 참여하여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이날 행사는 2020년도 경기도 교육 플랫폼 ‘찾아가는 배움교실’ 공모 선정사업으로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이사장 최명숙) 주관으로 1주일간 소정의 교육을 마친 수료생들에게 지명 밟기 지도사 자격을 수여하는 행사로서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수료생 등 약 30여명만 참석했다. 한국청소년문화진흥협회는 일제강점기 때 창지개명으로 왜곡된 경기도지명을 바르게 알리는 지명 밟기 지도사를 양성하여 경기도 청소년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원기 의원은 이날 수료식 축사를 통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있을 수 없다”며, “지명 밟기 지도사들과 경기도민의 노력으로 반드시 일본의 창지개명으로 왜곡된 경기도 지명을 찾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기 “성남 서현동 등 지명 40%, 일제가 바꾼 것”

    경기 성남시 ‘서현동’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동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둔서촌, 양현리, 통로동 등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한 글자씩 따 서현동으로 변경했다. 이 같은 ‘합성 지명’은 서현동 말고도 경기도 내에 100곳이 넘는다. 15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 398개 읍면동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명칭 변경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40%인 160곳이 당시 고유의 명칭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는 ‘창씨개명’뿐만 아니라 ‘창지개명’도 했던 것이다. 도는 도내 시군을 대상으로 행정구역 명칭 변경 의사 여부를 수렴해 바로잡을 예정이다. 도는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914년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우리나라 지명을 변경했다”면서 “이 시기 전국 330여개 군이 220개 군으로 통합됐고 경기도는 36개에서 20개 군으로 축소됐다”고 밝혔다. 도내에서 일제에 의해 변경된 읍면동 지명의 유형을 보면 두 지명에서 한 자씩 선택해 합친 ‘합성 지명’이 121곳으로 가장 많았다. 성남 서현동 말고도 수원시 구운동, 성남시 분당동, 용인시 신갈동, 화성시 매송면 등이 두 곳 이상의 지명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일제가 식민 통치의 편리성을 위해 숫자 위치 등을 사용해 변경한 사례도 29곳이나 됐다. 광주시 중부면과 연천군 중면이 이에 해당된다. 부천시 심곡동 등 3곳은 일제가 기존 지명을 삭제한 후 한자화한 지명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경기도, 일본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잡는다

    경기도, 일본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잡는다

    경기 성남시 ‘서현동’이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동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둔서촌, 양현리, 통로동 등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한 글자씩 따 서현동으로 변경했다. 이같은 ‘합성지명’은 서현동 말고도 경기도내에 100곳이 넘는다. 15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내 398개 읍·면·동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명칭 변경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이중 40%인 160곳이 당시 고유의 명칭을 잃은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는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의식을 말살하고자 ‘창씨개명’ 뿐만 아니라 ‘창지개명’도 했던 것이다. 도는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식민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1914년 대대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우리나라 지명을 변경했다”면서 “이 시기 전국 330여개 군이 220개 군으로 통합됐고 경기도는 36개에서 20개 군으로 축소됐다”고 밝혔다. 도내에서 일제에 의해 변경된 읍·면·동 지명의 유형을 보면 두 지명에서 한 자씩 선택해 합친 ‘합성지명’이 121곳으로 가장 많았다. 성남 서현동 말고도 수원시 구운동, 성남시 분당동, 용인시 신갈동, 화성시 매송면 등이 두 곳 이상의 지명을 합성해 만든 지명이다. 일제가 식민 통치의 편리성을 위해 숫자나 방위, 위치 등을 사용해 변경한 사례도 29곳이나 됐다. 광주시 중부면과 연천군 중면이 해당된다. 광주시 중부면은 1914년 군내면과 세촌면을 통합하면서 방위에 따른 명칭인 중부면으로 개칭됐, 연천군 중면은 연천읍치의 북쪽이었던 북면을 ‘연천군의 중앙에 위치한다’해서 중면으로 개칭됐다. 일제가 기존 지명을 삭제한 후 한자화 한 지명은 3곳이었다. 부천시 심곡동이 대표적으로 일제는 고유지명인 먹적골, 벌말, 진말을 병합하면서, 심곡동(深谷洞)으로 변경했다. 심곡은 원래 토박이말로 ‘깊은 구지’라는 뜻이다. 지명을 변경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향토 정서가 왜곡된 사례도 있었다. 안성시 일죽면이 대표적인데, 일제는 1914년 죽산군을 폐지하며 남일면, 남이면, 북일면, 북이면, 제촌면을 안성군의 죽일면으로 만들었으나 듣기에 따라 욕으로 들릴수도 있어 이듬해 일죽면으로 변경됐다.곽윤석 경기도 홍보기획관은 “일제에 의해 고유 지명이 사라진 역사적 치욕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민족의 독립과 문화 창달의 과제가 여전히 남 아있음을 느끼게 된다”며 “해당 시·군과 긴밀히 협력해 사라지거나 왜곡된 우리의 고유 지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일제잔재 청산과 지역의 역사성·정체성 회복을 위해 현재 31개 시·군을 대상으로 행정구역 명칭 변경 의사 여부를 수렴중이며 향후 대상지가 확정되면 행정구역 명칭 변경을 통해 고유한 행정지명 복원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서울이 ‘수이’라고?

    [노주석의 서울살이] 서울이 ‘수이’라고?

    얼마 전 시내 대로변에서 ‘首?食堂’(수이식당)이라고 돋보이게 표기된 간판을 목격했다. ‘서울식당’이라는 한글 상호를 한자 상호와 병기하고 있었다. 유커를 주요 고객으로 하는 업주가 홍보 효과와 매출 신장을 노리고 일석이조의 아이디어를 낸 듯했다. 기우에 그치면 좋으련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호칭이 또 하나 생성되는 과정처럼 여겨졌다. 이 음식점 간판에 쓰인 ‘首?’는 ‘首爾’라는 한자의 약자(간체자)이고, 중국 사람은 이를 ‘셔우얼’이라고 읽는다. 관광 편의 제공 용도였다. 문제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일본, 타이완, 홍콩 등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한자문화권 사람은 이 간판을 보고 모두 ‘수이’라고 읽는다는 데 있다. 중국에서만 쓰이는 약자는 아예 알지도 못한다. ‘서울’식당을 ‘首?’식당이라고 옮긴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중국인의 서울 발음을 표기한 용어가 서울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대체 사용돼서다. 한자로는 쓸 수 없는 고유어 서울의 한자가 ‘首爾’ 혹은 ‘首?’라고 오해할 수 있고, 나아가 또 다른 지명으로 굳어질 우려마저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생각이 짧은’ 시장과 시청 공무원의 합작품이다. 서울이라는 깊고 오래된 도시의 지명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채 ‘억지춘향’식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중국에 앞으로 ‘서울’을 ‘수이’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서울시가 만든 이 용어는 서울의 공공 영역에 먼저 안착했다. 서울시내 도로 표지판이나 지하철역 안내판, 홍보자료에 버젓이 등장했다. 서울역은 ‘首?驛’, 서울교육대학교는 ‘首爾敎育大學校’식이다. 급기야 민간이 얼빠진 공공 영역을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국은 14세기부터 서울을 한성(漢城)이라고 쓰고, ‘한청’이라고 읽었다. 조선의 수도 명칭이 한성이어서다. 그러나 600년도 더 지나 갑자기 ‘한청’이 ‘서울’이라는 발음과 달라서 다른 도시처럼 여겨지고 불편하다며 신조어를 급조했다. 멋쩍은 일이다. 서울의 영문 표기 ‘SEOUL’을 읽지 못하는 유커가 얼마나 되며, ‘수이’라는 신조어가 정말 편의를 제공했는지 궁금하다. ‘수이’ 표기를 없애면 서울에 오지 않을 것인지도 알고 싶다. 덧붙이자면 뉴욕이나 런던, 파리, 도쿄에 중국어 전용 발음 표기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서울의 정체성을 파먹는 대차대조표를 따져 보자는 얘기다. 서울은 왜 서울인가. 사람에게 이름(姓名)이 역사이듯 땅에는 지명이 역사다. 서울은 한자로 대체할 수 없는 토박이 지명이다. 8세기 신라 경덕왕 때 우리말 땅이름을 모조리 한자 지명으로 바꾼 ‘창지개명’(創地改名)에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고유어 땅이름이다.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이 1896년 4월 7일자 창간호에서 발행처를 ‘서울, SEOUL’이라고 인쇄하면서 지명으로 굳어졌다. 본래 서울은 땅이름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였다.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이 왕조와 식민 잔재를 없애려고 무리해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서울을 한자로 표기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거친 서울은 지구촌에 ‘코리아=서울’의 이미지를 심었다. 서울은 대한민국 최고의 히트상품이자 브랜드다. 지명은 한 번 붙으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시대착오적이고 과유불급인 ‘首爾’ 혹은 ‘首?’는 쓰레기통으로 보내야 한다. 서울 곳곳 표지판과 안내판에 남은 얼룩과 흉터를 정화해 주기 바란다.
  •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기획]명동 등 서울 30% 일제 잔재… 日전함 딴 송도도 ‘치욕의 지명’

    ‘서울 명동(明洞)과 금호동(湖洞), 인천 송도(松島) 등 일제의 잔재가 서려 있는 지명을 바꿔야 한다.’ 14일 우리 역사와 문화계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왜곡하려고 만든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는 해방 이후 범정부적 차원의 체계적 노력 없이 지방자치단체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원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명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일제는 강점기 동안 우리의 국호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서울 ‘한성’을 ‘경성’으로, ‘순종황제’를 ‘이왕’으로 격하시켰다. 한반도의 허리인 ‘백두대간’을 ‘태백산맥’으로 바꿔 놓더니 산봉우리와 하천의 이름에서 ‘크다’는 의미가 담긴 ‘대’(大)자, ‘한’(韓)자가 들어가는 명칭은 모조리 없애거나 바꿨다. 여기에 1914년 10월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리 민족이 자자손손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의미 왜곡’ 파주 문산 한자 바로잡아 일제의 지명 변경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먼저 해당 지역의 지형이나 물, 산 등 특징이 담긴 지명을 일본식 한자로 아무렇게나 바꾼 사례가 가장 흔하다. 서울 금호동의 경우가 그렇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또는 ’무수막’으로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湖洞)으로 바뀌었다. ‘새마을’로 불리던 경기 파주 금촌(村)은 일본이 경의선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쇠마을’로 잘못 알아듣고 일본식 한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 온다. 파주 교하의 ‘새터마을’, ‘괸돌’ 등은 그 일대에 지석묘가 많은 점을 들어 한성과 가까운 쪽은 상지석리(上支石里), 먼 쪽 마을은 하지석리(下支石里)로 불렀다. 높은 산봉우리에 주로 붙던 ‘왕’(王)자에 일본을 뜻하는 ‘일’(日)자를 더해 ‘왕’(旺)으로 바꿨듯, 특정 한자에 부정적 의미의 부수를 더해 완전히 다른 뜻의 지명으로 왜곡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파주 문산이 대표적이다. 본래 지명은 ‘문산’(文山)이었으나 1910년 전후부터 ‘문산’(汶山)으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여기서 ‘문’(汶)자는 ‘더럽다’, ‘불결하다’라는 뜻이 있어 1990년대 심각한 홍수를 겪었던 문산 주민들이 삼수변이 없는 ‘문’(文)자로 바꾸자는 운동을 벌였다. 파주시는 2014년 6월 지명위원회 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문산읍과 문산리의 한자 표기를 ‘汶山’에서 ‘文山’으로 바로잡았다. 한글학회가 1966년 발간한 한국지명총람은 서울 편에서 원남동(苑南洞)을 “창경원 남쪽에 있으므로 원남동이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학설 및 주장도 있지만 ‘본래 순라동이었으나 1911년 순종황제가 머물던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바꾸고서, 창경궁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일제가 개명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졌다. 지금의 서울 옥인동, 인사동 등 성격이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마을 이름을 제멋대로 합성하는 경우도 많았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은 “청운동은 청풍계(창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차용해 만들었다. 또 옥인동도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 지명”이라면서 “일제가 4개 지명을 2개로 줄이면서 의미가 축소되고 고유 의미가 퇴색했다”고 지적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洞)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토박이 지명이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한 경우가 많다”면서 “원남동처럼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끊고 모욕을 주기 위해 개명했거나, 땅이름 속 우리의 얼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합성 지명화한 곳은 마땅히 본래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역별 특색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정적 이미지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지명 변경도 그중 하나다. 충남 홍성군은 ‘홍주(洪州) 지명 되찾기 범군민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1000년 가까이 사용해 오던 지명을 일제가 강제 개명한 만큼 주민들의 찬반 의견을 물어 2018년 시 승격을 앞두고 홍성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는 의지다. 반면 일제 잔재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명동(明洞)과 송도(松島) 등처럼 일부 지명은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고 그 자체가 상품성을 갖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또 일부 지역 주민들도 지명이 갖고 있는 ‘가치’ 때문에 반대하기도 한다.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인 명동은 조선 시대에 명례동(明禮洞)이나 명례방으로 불렸다. 그런데 일제가 1943년 6월 명치정(明治町·메이지초)으로 바꿨다. 서울의 한복판, 행정구역의 중심에 일본의 ‘메이지’(明治) 일왕을 기리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후 명치정에서 ‘치’(治) 한 글자만 빠진 채 사용되고 있는 이름이 지금의 명동이다. 또 인천을 대표하는 국제 신도시인 ‘송도’는 일본 전함 송도호, 일본명 마쓰시마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섬 이름이기도 하다. 일본에는 ‘송도’라는 이름의 섬이 100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원남동 역시 한때 지명 변경의 필요성이 제기됐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고, 악의적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전문가 “日 문화침탈 계속된다는 방증” 부산 동구 범일동에 ‘조방’(朝紡)이라는 지역이 있다. 1917년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군수공장(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조선방직은 1968년 사라졌으나 줄임말이 새로운 도로명과 각종 상호, 심지어 지자체가 지원하고 지역 경제단체가 추진하는 거리축제에도 버젓이 사용되고 있다. 독립운동가 이광우 선생의 아들 상국(56)씨가 “식민지 노동 약탈의 상징이었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호소하며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조방 앞 일원의 화려했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한 의도로 ‘조방 이끌리네 거리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 소장은 “지명은 지역의 특성, 자연의 이치, 역사적 사실 등 다양한 사연 및 유래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광복 70년이 넘었지만 아직 우리 주변엔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왜곡된 수많은 지명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일본의 문화 침탈이 계속되고 있다는 방증이며, 정부 주도의 전국적인 실태조사와 동시에 지명 회복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 원장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 전쟁’”이라면서 “하루빨리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지명(하) - 땅 이름, 無言의 역사

    땅이름(지명)은 가장 겸허한 모국어이자 무형문화재이다. 지명 속에는 그 지역의 내력이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명이란 무언(無言)의 역사이다. 지명에 몇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 기록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햇볕을 쬐면 역사요, 달빛에 물들면 야사’(野史)라는 말이 생겼다. 우리의 지명은 어떠한가. 한자와 이두(吏)와 우리글의 치열한 ‘3자 경쟁’에서 한자가 압승을 거뒀다. 순우리말 지명은 유일하게 서울이 살아남은 반면 소부리(부여), 한밭(대전), 솜리(이리)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은 땅속에 묻혔다.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 압축적으로 보여줘 지명은 지역의 내력과 곡절을 숨죽여 외친다. 삼국시대에는 오늘의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이라고 했다. 이두로 ‘제차’란 구멍, ‘파의’는 바위이므로 ‘구멍바위’이다. 이를 한자로 공암(孔岩)이라고 옮겼다. 옛 한강 공암진 나루요 양천 허(許)씨의 발상지로 알려진 허가바위의 유래가 깃들어 있다. 또 이 바위는 큰 홍수 때 이웃 광주땅에서 떠내려왔다고 하여 광주바위라고도 불렸다. 또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점인 노들나루가 있던 상도동에 전국 모든 장승의 우두머리 장승이 서 있다고 해서 장승백이(장승배기)라고 불렀지만, 지명으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지명은 해당 지역의 과거사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한 번의 잘못된 개명은 뜻을 일그러뜨리고, 사실을 비튼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땅이름은 우리말이었지만 기록에는 한자지명으로 남겼기에 우리말 지명이 홀대를 받은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는 부(部)-방(坊)-계(契)-동(洞) 4단계였다. ‘전국 방방곡곡’이란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자식 행정체계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크든 작든 모든 마을을 ‘고을’이라고 했고,고을의 수령은 높든 낮든 모두 ‘사또’라고 불렀다. 토박이 지명은 조선시대 한자 지명화됐다가 일본 강점기에는 유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엉뚱한 지명으로 변질됐다. 무쇠로 솥을 만드는 가마터와 대장간이 많이 있다고 하여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고 불리던 옛 수철리(水鐵里)는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금호동으로 개악됐다. 물 수(水)는 호수 호(湖)로, 무쇠 철(鐵)은 금 금()으로 멋대로 바꾼 것이다. 금호동이라는 지명에서 옛 대장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가. 없다면 잘못된 지명변경이다. 1914년 강제 행정개편 이후 불과 100년 사이에 잣골→백동→혜화동, 모래내→사천→남가좌동, 한내→한천→상계·중계·하계동, 배오개→이현→종로4가, 진고개→니현→충무로, 구리개→동현→을지로2가, 박석고개→박석현→갈현동 등으로 전혀 다른 엉뚱한 지명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정도는 덜하지만 붓골→필동, 삼개→마포, 두텁마위→후암, 물치→수색, 새내→신천, 노들→노량, 복삿골→도화동, 삼밭→삼전동, 미나릿골→미근동, 쇠귀바위→우이동, 서래→반포 등 순우리말 지명의 억지 한자화도 지역의 유래와 특색을 퇴색시키고 있다. ●무악이 안산, 아단산이 아차산으로 바뀐 까닭 지명은 시간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작품이기도 하다. 대개 안산(鞍山)이라고 불리는 무악은 서울 풍수의 알갱이를 이루는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 못잖게 중요한 산이었지만 지금은 존재감이 없다. 무악재라는 험한 고개에 도로가 놓이고 평평해지면서 안산이라는 평안한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 초기 풍수 중 ‘무악주산론’(毋岳主山論)이 있었다. 무악을 서울의 주산으로 정하고 오늘의 연세대와 이화여대 자리에 경복궁을 앉히자는 하륜의 주장이었다. 터가 좁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지만 ‘백악주산론’과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뤘다. 태종이 종묘에 나아가 길흉을 점친 결과 백악이 우세하자 태종은 “나는 무악에 도읍하지 아니하지만, 후세에 반드시 도읍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며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무악의 기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비록 성 밖으로 밀려났지만 연희궁이라는 이궁이 무악 아래 지어졌다. 정종과 태종, 세종이 차례로 거했다. 세조 때는 서잠실(西蠶室)이라고 하여 양잠을 했고 연산군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조선 최악의 내란이라고 일컫는 이괄의 난을 진압해 왕조가 이어진 장소가 바로 무악이기도 하다. 또 오늘날 연세대가 연희전문학교에서 출발했고 연희동에서 대통령이 두 명이나 나왔으니 태종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듯싶다. 서울의 외사산(삼각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 중 용마산 부분이 좀 헛갈린다. 어떤 이는 용마산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차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산은 다른 산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산이다. 서울의 외사산 중 좌청룡을 아차산으로 보고 아차산의 최고봉을 용마봉(348m)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고구려 유적지가 발굴되고 온달과 평강의 전설로 유명한 아차산의 지명 유래도 꽤 흥미롭다. 높을 아(峨)에 우뚝 솟을 차(嵯)를 써서 아차산이라고 하지만 높이가 285m밖에 되지 않으니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내가 잠시 빌려 쓴(我借)’의 뜻으로도 해석하는 등 설이 분분하다. 아차산의 원 지명은 아단산(阿旦山)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삼국사기에 ‘아침 해’(旦)를 의미하는 신성한 터, 아단산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이름(李旦)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비슷한 글자를 썼다는 풀이다. 이른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경북 대구(大邱)도 본디 대구(大丘)였지만 영조 때 공자의 이름(孔丘)과 같으므로 피휘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자 정조 때 바꾼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는 것이다. ●청운동·옥인동·인사동은 일제가 만든 합성 지명 서울역사 이천 년의 풍상보다 36년 일제 식민지배의 훼절이 더 엄혹했다. 한국땅이름학회에 따르면 서울 동 이름의 30%, 종로구 동명의 60%가 일제 잔재라지 않는가. 해방 후 창지개명(創地改名)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으면서 우리 지명의 대부분이 원상회복되지 못했다. 개발연대 이후 우리 손으로 행한 개악 사례도 적지 않다. 서울의 지명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합성지명이다.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청운동, 옥인동, 통인동, 인사동은 급조된 지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두 개의 지명을 합치면서 생겨난 정체불명의 이름이다. 일제는 행정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멀쩡한 두 개의 지명을 하나로 합쳤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뤄진 지명말살정책이었다. 지명 속에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얼과 문화를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무서운 음모였다. 청운동은 청풍계(청하동)와 백운동에서 한 글자씩을 따 만들었다. 옥인동은 옥동과 인왕동의 합성이다. 유서 깊은 청풍계와 옥동이라는 지명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백세청풍’과 ‘옥류동’이라는 글에서 비롯됐다. 청풍계천은 청계천의 발원지이며 청계천이란 이름의 연원이기도 하다. 인왕이라는 명칭은 인왕산에서 비롯됐다. 광해군 때의 기록에 따르면 인왕사라는 절 이름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 한양도성 안 최고의 경치 좋은 곳으로는 백악의 동쪽 삼청동천(삼청동)을 으뜸으로 쳤고 백악 서쪽 백운동천(청운동)과 인왕산 아래 옥류동천(옥인동) 그리고 낙산 서쪽 쌍계동천(동숭동), 남산 아래 청학동천(필동) 등 다섯 곳을 꼽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수려한 골짜기를 이른다. 내 천(川)을 쓰지 않고 하늘 천(天)자를 쓴 것은 사람만 모여 즐기는 곳이 아니라 신선도 더불어 노닌다는 뜻이다. 우리가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르는 부암동 백석동천이나 관악산 자하동천도 풍광에서 빠지지 않았다. 새로 만들어진 청운동과 옥인동이 지명으로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네 개를 둘로 줄이면서 사라진 것들이 아쉬울 뿐이다. ●흐리멍덩한 지명 회복 실패의 교훈 잊지 말아야 서울을 찾는 외국인관광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인사동이다. 한국적인 정취를 품고 있으며 인사동이라는 지명도 발음하기 쉽고 어감도 좋다. 그런데 인사동은 관인방의 인자와 대사동의 사자를 강제 결합시켜 지은 것이다. 한경지략에 따르면 “대사동은 곧 탑사동인데 옛날에 원각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석탑만 남아 있다”고 유래를 전한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때문에 탑동, 사동, 대사동, 탑사동, 탑골 등으로 불렸고 지금도 탑골공원이나 파고다공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백동(잣골)은 숭교방의 동쪽이라고 해서 동숭동이라고 바꿨고 괴동(회나무골)은 의금부가 있는 자리라고 해서 공평동, 옥방동(옥방골)은 인의예지에서 따와 예지동, 사동(탑골)은 낙원동, 원동(원골)은 원서동, 상사동(상삿골)은 원남동이라고 작명했다. 15개 동의 새 지명이 생겼다. 수진방과 송현을 합쳐 수송동이 되면서 송현(솔골)이 사라졌고 옥동과 인왕산동을 합쳐 옥인동을 만든다고 옥동(옥골), 운동(구름재)과 니동을 합쳐 운니동을 만들면서 니동(진골), 육상궁과 온정동을 합쳐 궁정동을 만들면서 온천수가 나오던 온정동이 각각 사라졌다. 서울이라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은 미군정청이 해방과 함께 일방적으로 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지명을 회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우리는 기존의 일본식 지명을 토박이 이름으로 되돌리지 않고 모조리 한자로 바꾸는 우를 범했다. 강제병합 이전의 지명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일본이 멋대로 변경하고 왜곡하고 합친 일본식 지명에서 정(町)을 동(洞)으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세종대왕, 이충무공, 을지문덕 장군, 원효대사, 이퇴계, 민충정공 등 6명의 선현의 시호를 채택해 세종로(광화문통), 충무로(본정통), 을지로(황금정통), 원효로(원통) 등으로 가로명을 변경하는 데 그쳤다. 사라진 숱한 지명의 원혼 앞에 어찌 이리 덤덤한가. 현재 진행 중인 독도와 동해 표기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지명전쟁이다. 독도냐 다케시마냐, 동해냐 일본해냐는 모두 지명선점 다툼이다. 해방 후 흐리멍덩한 지명회복 실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성명(姓名)이 역사이듯 땅에는 지명이 역사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창지개명은 단군 이래 최악의 민족정기 말살 사건 서울의 지명은 다중(多重)적이다. 대부분 지명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지명에는 그렇게 부르게 된 명명(命名) 동기가 있는 데 이를 지명의 유래라고 한다면 서울의 지명은 2000년 동안 성쇠와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생성과 소멸 과정을 거친 적자생존의 산물이다. 서울의 지명은 산이나 물, 고개, 풍수, 바위, 들, 땅 모양, 인물, 식물,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정겨운 토박이 이름이 주를 이뤘다. 훈민정음 창제(1446년) 이전까지 비록 우리 글이 없었지만 한자(漢字)를 빌려 이두(吏)로 적었기에 소리 체계는 살아 있었다. 더욱이 수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깊숙이 배어 있다. 예컨대 사간동, 내수동 같은 관아 지명이나 동소문동 같은 성문 지명을 비롯하여 왕십리나 답십리 같은 전설 지명, 압구정동 같은 누정 지명과 정릉동, 효창동 같은 능원 지명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신라 경덕왕(757년) 때 모든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로 바꾸면서 가해진 변형이 첫 번째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인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일제는 조선 사람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창씨개명), 땅이름도 제멋대로 바꿨다. 단군 이래 최악의 사건이라 할만하다. 서울의 지명에는 이 모든 영욕이 담겨 있다. 서울은 조선 개국 이후 한성부(한성)가 공식 명칭이었지만 한양 또는 서울이라는 지명이 더 널리 쓰였다. 뿐만 아니라 도성, 수선(首善), 도읍, 경조(京兆), 경도(京都), 사대문 안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다. 오늘의 서울을 있게 했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삼각산과 백악산은 북한산, 북악산이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남산과 청계천의 본명도 목멱산과 개천이지만 잊혀진 이름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는 옛 이름보다 오히려 정겨운 것이 사실이다. 인위적인 지명의 전이(轉移)가 아니어서 그렇다. 역사학자 안재홍은 목멱(木覓)은 남산의 우리말인 ‘마뫼’의 이두 표기라고 풀었다. 우리말 마뫼의 ‘마’는 앞이고 ‘뫼’는 산이므로 남산의 남(南)자는 ‘남녘 남’ 자가 아니라 ‘앞 남’자이며 결국 남산은 앞산이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산은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앞산이요, 왕이 사는 경복궁의 앞 산이었다. 지금은 서울이 확장되면서 강북과 강남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중앙산(中央山)이 됐지만…. 그러나 청계천 개명은 사정이 다르다. 옛 이름인 개천(開川)보다 청계천이 더 청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사성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청계천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였다. 개천의 발원지로 ‘청풍계천’(?風溪川)이 본명인데 청계천이라고 줄여 불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천의 상류가 청계천인 셈이다.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청계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청계천변 시찰’이라는 기사에서 “개천, 일명 청계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10년이 흐른 192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하천령’을 제정하면서 청계천이라고 바꿔 버렸다. 조선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명당수이자 하수구였던 개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처럼 조선 개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명명한 사대문의 정식 명칭을 두고 남대문, 동대문, 북대문, 서대문이라고 즐겨 불렀다.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또한 수구문(시구문), 동소문, 자하문(북소문), 서소문이라는 별칭을 주로 썼다. 인위적인 엄숙한 지명보다 방향이나 쓰임새 위주로 호칭하기를 즐겼다. 한강도 지금은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호, 경강, 노들강, 용산강, 서강, 조강 등 지역별로 세분해서 불렀다. 그중에서 3개의 강이 주를 이뤘다. 경강은 지금의 한남대교~노량진 구간, 용산강은 노량진~마포, 서강은 마포~양화진 구간을 각각 지칭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5강, 8강, 12강까지 세분했으니 우리 지명의 다중성은 일일이 예로 다 들 수 없을 정도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지명의 다중성은 어디에서 연유됐을까. 역사의 곡절 때문이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이 역사를 창조하기도 한다. 지명학(Toponymy)의 어원이 그리스어 토포스(Topos·장소)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를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다. 지명이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수록 역사 연구에서 지명 의존도는 높다. 지명이 복잡하다면 그만큼 역사가 고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이 여럿이라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고단함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성명학(姓名學)에 빗대 보면 사물에는 하나의 이름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명(名)이 있다. 성년이 되면 자(字)를 가지며 사람에 따라 호(號)를 가진다. 죽은 뒤 시호(諡號)를 받는 사람도 있다. 왕은 사후 묘호(廟號)와 능호(號)를 가진다. 성명학에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나 호를 부르도록 한 것은 이름을 귀히 여기는 존명 사상 때문이다.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국휘(國諱)라고 하고, 존속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했다. 자와 호가 없는 일반인들도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에 ‘안동댁’ 같은 택호(宅號)를 두어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이름이 여럿이듯 땅의 이름인 지명도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네 사고방식이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별칭이 따로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지명 왜곡은 차원이 다르다.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말살하고자 획책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하는 어마어마한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이루던 우리의 마을 방(坊)을 폐지했다. 서울은 186개의 동(洞)-정(町)-통(通)-정목(丁目)으로 정리했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북촌은 동으로, 일본인이 모여 살던 남촌은 정으로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번화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이 이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와서 머문 것을 기념한다면서 ‘황공하게도 다녀가셨다’는 의미의 어성정(御成町·남대문)이라는 지명을 붙였고, 술집과 찻집이 많던 다동을 일본식 다옥정(茶屋町·다동)이라고 개악했다. 일본군 육군대장의 이름을 따서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이라고 명명하거나,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대화’를 넣어 대화정(大和町·남산)이라고 하는 등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지기수로 붙였다. 22년간 지속된 동-정-통-정목 제도는 1936년 경기도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지역이 서울(경성)로 편입되면서 모조리 정-통으로 통일됐다. 서울의 면적은 4배가 늘었고 186개의 동-정-통이 259개의 정-통이 됐다.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마포구 등 8개 행정구가 생겼다. 원동이 원서정, 동세교리가 동교정, 아현북리가 북아현정, 홍제내리와 홍제외리가 홍제정, 한지면 신촌리가 응봉정, 수철리가 금호정, 두모리가 옥수정, 동막상리가 용강정, 동막하리가 대흥정, 여율리가 여의도정으로 각각 변경됐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우리 지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절정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남대문을 거쳐 원효로를 따라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천을 그들이 내세우는 ‘욱일승천기’에서 ‘해돋을 욱’(旭) 자를 따 욱천이라고 마음대로 바꿨고, 흑석동 일대에 고급 주택을 지어 분양한 일본인 업자가 붙인 주택단지 명수대를 지명화했으며, 노들섬을 중지도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표기된 단 두 개의 길 이름도 퇴출당했다. 육조대로(광화문광장)와 운종가(종로)라는 양대 지명의 소멸이다. 육조가는 의정부와 육조가 자리한 관청거리였고, 운종가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던 시장거리였었다. 일제는 유서 깊은 지명을 역사와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개천을 청계천으로 개명하거나, 인왕산(仁王山)의 한자를 엉뚱하게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친 것도 역사 말살의 속셈이었다. 해방 후 육조대로와 운종가를 왕조의 유물로 생각해 원상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후회막급이다. 삼각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정기가 깃든 아름다운 이름도 되돌리지 않았다. 태평로를 닦느라 고갯마루가 사라진 세종로 네거리 황토마루(황토현)의 이름도 청사에 남겼어야 했다. 우리의 조급함이 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북악인가 백악인가… 조선 초기부터 명실공히 백악산 경복궁 뒤에 피지 않은 한 떨기 모란 꽃송이처럼 솟구친 수려한 산의 이름은 둘이다. 백악(白岳)이기도 하고 북악(北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 산을 놓고 면악, 공극산 등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지만 결국 두 개의 이름만 살아남았다. 이 산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도록 결정지은 산이기 때문이다. 이 산이 있었기에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우리는 이런 중요한 산 이름을 별 생각 없이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백악인지 북악인지 헷갈린다면서 뭉뚱그려 북한산이라고도 부른다. 곡할 노릇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조가 중 무학(무학 대사)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삼각산)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개의 돌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온다)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도선(신라 도선국사)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경복궁)궁성 터를 정하였는데, 곧 고려 때 오얏(자두나무)을 심던 곳이었다”고 한양천도 당시 주산 백악과 명당 경복궁 택지에 얽힌 일화를 전한다. ‘오얏을 심던 곳’이라는 표현은 고려 중엽 때 비롯된 것이었다. 도선의 ‘도선비기’에 전해지는 ‘목자득국’(木字得國·이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얻어 한양에 도읍 하게 된다)의 도참설을 깨고자 삼각산 면악(백악) 남쪽에 오얏(李木)나무가 무성하자 윤관 장군 등 벌리사(伐李使)를 보내 싹둑 잘라 기를 누른 사례를 말한다. 이 마을을 ‘벌리’라고 불렀는데 ‘번리’(?里)를 거쳐 지금의 강북구 번동으로 변했다. 오패산 혹은 벽오산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북서울 꿈의 숲’ 공원이 조성됐다. 이렇듯 한양천도는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백악을 주산(主山)으로 정하고서 산 아래 명당 혈 자리에 남쪽을 향해 왕궁을 짓기로 하면서 현실화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이 산의 이름은 명실공히 백악이었다. 산꼭대기에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여신(女神)을 모신 백악신사(白岳神社)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남긴 ‘수선전도’나 ‘경조오부도’ 등 대표적 지도에도 백악이라고 기록돼 있다. 백두산이나 태백산이 그렇듯 산 이름에 ‘흰 백’(白)자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흰 백자를 ‘밝다’ 또는 ‘으뜸’이라는 의미로 썼다. ‘흰 머리를 인 으뜸가는 산’이라고 풀 수 있다. ‘북녘 북’(北)자는 꺼렸다.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지도, 눕지도 않았다. 북망산(北邙山)처럼 죽음을 나타낼 뿐 아니라 패하다, 등지다, 분리하다, 도망하다는 뜻이 들어 있어 금기시했을 법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북악산 또는 북악이 지배 지명이 됐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지도와 책에 이 지명이 자리 잡았다. 단서를 찾아보니 중종 때(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앞에는 남산이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다”라고 적었다. 이 산의 수호신이 한양의 풍수를 관장하는 북 현무(北 玄武)이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남산이나 한강의 북쪽에 자리 잡은 산이어서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후 나온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백악부아암도’ 등 그림이나 지도에서는 어김없이 백악이라고 썼다. ●삼각산이냐 북한산이냐… 일제에 의해 잊혀져간 삼각산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시도한 일제가 사전 정지작업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내세워 대대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꾀하면서 성스러운 산 이름에 분탕질했을 것으로 의심된다. 무엇보다 서울의 조상 산인 ‘세 개의 뿔’ 삼각산(백운대·인수봉·만경대)을 북한산이라고 의도적으로 바꿔 버린 명확한 증거가 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이마니시 류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는 삼각산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북한산이라는 지명을 보고서에 사용했다. 한양과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구려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불렸으며, 백제 개루왕 때 북한산성을 쌓았고, 조선 숙종 때 북한지(北漢誌)를 발간하는 등 북한산이라는 지명이 생경한 것은 아니지만, 삼각산이라는 민족정기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지명이 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83년까지 두 이름이 혼용됐지만, 정부가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삼각산은 힘을 잃었다. 일본인 학자만 책망할 일이 아니다. 역사의식 없는 행정 당국의 잘못이 더 크다.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가 경복궁 뒤 고려 이궁 터에 틈입했고, 경무대와 청와대가 이어받으면서 백악이라는 이름은 잊혀 갔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갈 수 없는 산이 돼 버렸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터널이 상류층의 드라이브 코스나 요정 가는 길로 인기를 끌면서 북악이라는 지명의 사용 빈도가 높아졌다. 2006년 폐쇄됐던 숙정문을 38년 만에 열고 난 뒤 문화재청은 백악신사가 있던 산마루에 ‘백악산 342m’라고 새긴 돌비석을 세웠다. 또 2009년 백악산을 국가지정 명승 제67호에 올렸다. 이 산의 명칭을 백악산이라고 공식 인정한 것이다. 더불어 삼각산도 명승 제10호로 제 이름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백악은 북악, 삼각산은 북한산이라고 부른다. 안내 표지판과 안내책자, 역사책에도 여전히 그렇게 적혀 있다. 이름을 찾은 건 다행이지만 제 이름으로 불러야 산의 영험함이 살아난다. ●백악산·삼각산 공식 인정… 국가 지정 명승지로 지명(地名)이란 땅 이름이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듯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인명이 사람의 뿌리라면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인 것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땅 이름도 사람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가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식과, 그 장소가 쓸모가 있어서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다는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지명의 존재성과 유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지명학(地名學)에서 지명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과 삼라만상의 이름’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를 둘러싼 향토 역사문화가 집대성된 기록인 셈이다. 사람을 둘러싼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유전자적 특성과 흔적이 지명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다. 우리말의 어휘 중 가장 숫자가 많고 사용 빈도가 높은 것도 지명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까지 말과 글이 달라 그 전까지 존재했던 우리말 자료가 거의 없다. 우리말 소리에 맞는 한자를 빌려 표기한 향가 25수를 제외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옛 지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 역사의 수수께끼 푸는 열쇠 지명은 한 번 붙여지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서울은 고대 부여의 도읍 소부리와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서 음운 변화된 유일한 우리 고유어 지명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이천 년 이상을 버틴 하나밖에 없는 우리말 지명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성’(漢城)이라고 적고 ‘한청’이라고 읽는 불편을 없애겠다면서 ‘수이’(首爾)라는 억지춘향식 한자 이름을 붙이고 ‘셔우얼’이라고 읽도록 했다. 얼빠진 발상이다. 우리는 이미 백두산정계비에 쓰인 ‘토문강’(土門江)이라는 두 개의 지명 탓에 드넓은 동간도를 중국에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도 독도 대 다케시마(죽도), 동해 대 니혼카이(일본해)라는 지명을 놓고 일본과 피 터지게 다투고 있다. 불명확한 지명 표기 탓에 겪은 숱한 불이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경복궁과 종묘·사직 그리고 한양도성 성곽을 축성했다. 궁 이름은 물론 근정전과 광화문 등 전각의 이름을 명명했다.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 등 사대문과 보신각, 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덕문 등 사소문의 이름이 그때 붙여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북 간 축선상에 육조거리(광화문광장)를, 동서 간 축선에 운종가(종로)를 두고 시전행랑을 들였다. 도읍건설을 완성한 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고 도성의 위용을 읊었다. 삼봉은 한양(한성부)을 5부 52개 방으로 행정구역을 나눴고 이름도 직접 지었다. 이때 지은 52개 지명 중 현존하는 지명은 적선, 서린, 가회, 안국 등 4개밖에 없다. 몇몇 지명은 길 이름이나 학교 이름 등에 남았지만 나머지 지명은 다른 지명과 합쳐지거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거나 멸실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가 수반됐지만 40년에 불과한 식민시대에 벌어진 지명 훼손과 왜곡은 뼈저렸다. 일제는 단군 이래 5000년 내려온 지명의 역사를 갈아엎었다. 지명에 담긴 사람과 자연의 역사를 짓밟았다. 한국땅이름학회 조사에 따르면 서울 중심 8개 구의 법정동 명칭 중 3분의1이 그때 일그러졌다. 종로구 지명의 3분의2가 난도질당했다. 광복 후 빼앗겼던 사람 이름은 되찾으면서 비틀린 땅이름은 바로잡지 못했다. 남은 지명은 유래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양양군 “한계령 아닌 오색령”

    ‘한계령이냐, 오색령이냐’ 강원 양양과 인제를 넘나드는 백두대간 고갯길 명칭을 놓고 양양군(오색령)과 인제군(한계령)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양양군의회는 19일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북면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고갯길 명칭을 한계령에서 오색령을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양양군의회 박정숙 의원은 전날 군정질문에서 “사료에 의하면 이전부터 지금의 한계령이 오색령으로 통용됨을 알 수 있다.”면서 “지명은 옛 문화를 간직한 인문학적 유산임을 감안할 때 일제 강점기 때 창지개명(創地改名)된 한계령을 우리 고유의 지명인 오색령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정상철 군수도 “2010년 양양군지 집필과정에서 현재 ‘한계령’으로 불리고 있는 국도 44호선 백두대간 통과구간이 과거 문헌에 ‘오색령’으로 기록돼 있는 자료가 다수 발견됐다.”며 “그동안 지명변경 추진과 관련해 많은 근거자료를 수집해 왔다.”고 소개했다. 특히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지명을 변경하는 게 타당한 만큼 오색령으로 지명을 변경하기 위해 군수를 위원장으로 지역 향토학자와 기관단체장이 참여하는 ‘양양군 지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지명변경을 군정의 우선과제로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인제군의 반발이 예상돼 자칫 인근 자치단체 간의 갈등으로 번지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양양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Zoom in 서울] 산은 하나인데…

    서울 강북구가 우리나라 대표 명산 ‘북한산’의 명칭을 ‘삼각산’으로 바꾸자며 강력하게 대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 국립공원과 인수봉 등 3개 주봉(主峰) 영역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는 “졸속 명칭변경은 안된다.”며 제동을 걸고 있다. ●강북구 지난 2003년 북한산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봉우리 일원 27만 3000㎡를 환경부에서 ‘삼각산 명승지’로 지정받고 산 명칭 변경을 추진해 왔다. 당시 강북구는 ‘서울 삼각산 명승지’ 지정을 희망했으나 “삼각산(북한산)이 왜 서울 산이냐.”는 고양시의 반발로 서울 명칭 삽입은 무산됐다. 강북구는 시민 서명운동과 함께 지난달 18일 북한산국립공원(78.45㎢)이 관내에 걸쳐 있는 경기도 양주·의정부·고양과 서울의 은평·종로·성북·강북·도봉 등 9개 자치단체가 참가한 포럼도 열었다. 이 포럼에서 강북구는 “북한산은 예부터 삼각산으로 불려왔다가 일제때 ‘창지개명’(創地改名)에 따라 북한산으로 바뀐 것”이라고 주장, 독도영유권 문제로 격앙된 국민정서를 업고 고양시장을 제외한 타 시·구 자치단체장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강북구가 이처럼 ‘삼각산’에 집착하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실제적인 이유가 배경이다. 북한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관광자원화해 지역개발에 활용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과 지역주민들의 입장료 징수 등 마찰을 이유로 공원관리권을 장기적으로 이관받으려는 포석이다. 여타 자치단체들도 공원관리권 이관에는 강북구와 의견이 일치한다. ●고양시 ‘북한산’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강북구 주장을 부인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도 삼국시대부터 삼각산과 북한산이 혼용돼 온 것으로 나타나고, 최근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이 서울대 규장각에서 찾아낸 조선조 숙종때의 ‘북한지’에도 북한산군(郡)이란 명칭이 나온다는 것이다. ‘북한지’는 백제 개로왕때인 서기 132년 최초로 축성된 북한산성을 1711년 재축성하고 이때 북한산과 관련한 문화·역사·지리를 상세하게 정리한 문헌이다. 정 위원은 “‘북한산’이 ‘삼각산’에 비해 산성(山城)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더 쓰인건 사실이지만 일제의 잔재는 분명 아니다.”고 말했다. 고양시는 또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중 고양시 땅이 가장 많고, 봉우리가 서로 삼각뿔 모양을 하고 있어 ‘삼각산’의 유래가 된 세 봉우리중 백운대·인수봉 정상이 고양땅이고 만경대는 강북구와 경계인 점을 들어 강북구의 일방적 명칭 변경을 반대한다. 삼각산 명승지 면적 27만 3000여㎡ 중 92%는 고양시에 속해 있다. 세 봉우리의 지번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1의 1’로 시의 자존심도 걸려 있다. 등산객들이 서울쪽에 입장료를 내고도 북한산 정상에 서면 고양쪽을 향해 “야호”를 외치고 쓰레기와 환경문제를 야기하면서 이름을 삼각산으로 하겠다는 건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산 기슭에는 서울쪽에도 주거지가 일부 있으나, 산속에서 사는 500여명은 모두 고양시 북한산동 주민들이다. 혼란을 야기할 북한산 명칭변경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양시는 강북구의 지명 변경 시도가 다시 재연돼도 강력히 반대의견을 낸다는 입장이어서 단위면적당 등산객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아 기네스북에 오른 우리나라 대표 명산의 이름을 둘러싼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앉으나 서나 삼각산

    앉으나 서나 삼각산

    서울 강북구가 일제의 잔재인 북한산을 버리고, 옛 이름인 삼각산을 되찾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삼각산 초등학교, 삼각산 중학교, 삼각산 소방서는 삼각산 찾기의 첫 걸음이다. ‘삼각산 초등학교, 삼각산 중학교, 삼각산 소방서….’ 강북구가 북한산의 옛 이름인 삼각산(三角山) 되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북한산이라는 지명은 일제 시대의 잔재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복원하기 위해 명칭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강북구는 관련 행사를 열어 삼각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는 중앙지명위원회 심의를 통해 이름을 바로잡을 방침이다. ●“북한산 지명은 일제 잔재” 강북구에 따르면 삼각산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나란히 솟아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 성종 무렵부터 약 1000년간 사용했던 지명이다.‘그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심훈의 그날이 오면).‘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김상헌의 시조) 등 시조와 시구에 등장하는 ‘삼각산’은 우리 민족과 나라를 상징하기도 한다. 북한산은 원래 한산(도성)의 북쪽을 가리켰던 명칭이다. 일제 시대 행정구역, 지명개편을 계기로 삼각산과 혼용되다가 1983년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공식명칭이 됐다. 실제로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이 지난 1월 발표한 ‘백두대간 우리 이름 바로 찾기’라는 보고서에서 북한산은 일제 시대 때 민족의 정체성·역사성을 깎아내리기 위한 ‘창지개명(創地改名)’으로 왜곡된 이름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1월 국토연구원이 발표한 새 산맥 지도에도 삼각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신설 학교·마라톤 등에 삼각산명칭 붙여 강북구는 일단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홍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학교·기관 등에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미 삼각산초등학교·중학교·소방파출소·보건소 분소가 생겼고 2007년 개교 예정인 고등학교 이름도 삼각산고등학교다. 인근 ‘미아 풍림아이원아파트’도 주민들의 투표를 거쳐 ‘삼각산아이원’으로 바뀌었다. 다음달 18일 강북구민회관에서 열리는 ‘2005 삼각산 국제포럼’에서는 경기도 고양·의정부시, 서울 도봉·성북구 등 삼각산에 접해 있는 자치단체장들이 모여 ‘삼각산을 잘 보존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한다. 또 ‘자연을 활용하여 경영수익을 올리는 자치단체 사례’라는 주제로 ▲호수 시드니의 블루 마운틴 개발 ▲경기도 양평군 명달리의 녹색관광 실험 ▲프랑스 그르노블의 산이 없는 산악도시 ▲충남 당진군의 두견주 개발 등을 토론한다. 이밖에 다음달 19일 ‘덕성여대∼국립 4·19묘지 입구∼우이령’ 코스에서 ‘제1회 삼각산 우이령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다. 현재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 등 각계인사도 참여한다.10월에는 단군제례, 천도제를 올리는 삼각산 축제와 산악등반, 민속놀이 등을 하는 ‘삼각산국제산악문화재’,‘삼각산 걷기대회’ 등의 행사도 열린다. ●연내 서울시 지명위에 재심의 요청 강북구는 궁극적으로 삼각산 명칭 복원 자료를 보완해서 올해 중으로 서울시 지명위원회에 재심의를 요청할 계획이다. 삼각산은 지난해 서울시지명위원회에서 논의됐으나 관련자료 연구·검토 정확한 고증보완 등을 이유로 보류됐었다. 지명이 바뀌기까지는 해당 시·군·구 지명위원회의 심의→시·도 지명위원회의 조정→국토지리정보원의 중앙지명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거쳐야 한다. 삼각산의 경우 서울시 6개 자치구와 경기도 3개시에 걸쳐 있어 해당 자치단체의 지명위원회의 심의가 일일이 통과되어야 한다. 때문에 명칭이 복원되기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씨줄날줄] 창지개명(創地改名)/이용원 논설위원

    우리나라 국보 제1호는 무엇인가? 정확히 말하면 ‘남대문’이 아니라 ‘서울 숭례문’이다. 보물 제1호도 ‘동대문’이 아닌 ‘서울 흥인지문’이다. 문화재위원회는 1996년 11월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작업’의 하나로 남대문·동대문의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까닭은, 남대문·동대문이 고유명칭이 아니라 단순히 방향을 나타내는 데 불과하며 일제가 처음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 따라서 조선시대에 원래 사용하던 이름을 되찾아 준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두 이름을 바꾸려면 행정 기록 200여 가지를 변경해야 하므로 전면 교체는 되지 않았다. 한반도 지형에서 꼬리 부분으로 꼽히는 경북 포항시 남구 대보면 대보리 일대는 일제강점기에는 장기갑(岬)으로,1995년부터는 장기곶으로 불리다가 2002년 들어 호미곶(虎尾串)으로 이름을 확정했다. 이 곶은 16세기 이래 남사고·김정호·최남선 등의 학자가 “한반도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상으로, 백두산이 코라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라 지목한 땅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호랑이 상이 아닌 토끼 모양으로 왜곡하면서 땅 이름도 장기갑으로 고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윗대는 성을 바꾸라는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창씨개명만 있었던 게 아니다. 남대문과 장기갑의 예에서 보듯 우리 산하와 역사유산을 깎아내리느라 땅·건물 이름도 바꾸는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했다. 이는 일제가 통치상 편의를 위해 행정구역을 멋대로 개편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 결과 맛깔스러운 토박이말 지명은 사라졌으며, 지금 사용하는 지명은 지역 유래와는 상관 없는 엉뚱한 것이 되어 버렸다. 녹색연합이 백두대간이 지나는 32개 시·군을 조사, 일본식으로 왜곡한 지명 22가지를 찾아내 어제 공개했다.‘임금 왕(王)’자를 제 나라 왕의 칭호인 ‘황(皇)’자로 바꾸거나,‘일(日)’과 왕(王)을 합한 ‘왕(旺)’자로 고치는 등 잔꾀가 그대로 드러나는 ‘창지개명’이다. 우리 윗대가 광복이 되자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본디 이름을 찾았듯이 땅이름도 우리 것을 되찾아야 한다. 다만 남대문·동대문의 예에서 보듯 급작스러운 지명 변경은 혼란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정부 차원의 대책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하겠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기고] 다시 그려야 할 산맥지도/김영표 국토연구원 GIS연구센터장

    ‘태백산맥, 낭림산맥, 강남산맥, 차령산맥‘ 학창시절 줄기차게 외웠던 산맥이름들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대로 나온다. 학생들이 산맥이름을 외우는데 진땀 흘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누구나 어릴 때 산맥이름을 외우면서 처음으로 우리 국토의 전체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산맥의 이름은 누가, 언제 붙인 것일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한반도 산맥체계는 1900년대 초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조사한 지질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현재의 산맥체계는 일제가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고토 분지로는 망아지 네 마리와 여섯 사람을 동원해 14개월 동안 한반도의 지질구조를 조사했다. 그리고 1903년 ‘조선산악론’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전래의 백두대간을 동강내고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을 한반도의 등뼈줄기로 삼아 산맥이름들을 붙였다. 이는 백두산 정기를 한겨레의 마음속에서 지우기 위한 문화말살정책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광복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창지개명(創地改名)’된 산맥이름과 땅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를 답사했던 백년 전의 기술여건으로는 기껏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고작 망아지 네 마리와 여섯 사람을 동원해 한반도 전역을 샅샅이 조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또 그는 땅 밑의 지질구조에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산맥체계를 스케치했기 때문에 땅 위의 산줄기체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지질학적으로도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산맥체계는 지난 백년간 뚜렷한 과학적 검증도 거치지 못한 채 고토 분지로의 이론적 틀 안에 갇혀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고토 분지로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큰 산줄기에 이름을 붙여 불렀던 적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산경표(山經表)를 보면, 선조들은 한반도 전역의 큰 산과 고개를 15개의 산줄기, 즉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으로 구분했다. 백두산에서 두류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큰 산줄기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 불렀다. 백두산을 한반도의 중심이자 출발점으로 인식한 ‘산경표’의 존재가 1980년대 초부터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산 인식체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다. 아울러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산맥체계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이 학계와 전문가 그리고 일반 국민 사이에 끊이지 않고 있다.2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 온 한반도 산맥체계에 대한 논쟁, 즉 ‘현행 교과서의 산맥체계’와 ‘산경표의 백두대간체계’사이의 과학적 증거가 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정확한 분석과 검증을 통해 현행 산맥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올바른 산맥체계를 재정립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이러한 연구에 필요한 기술은 충분히 발달돼 있다. 위성영상처리기술과 지리정보시스템(GIS)의 공간분석기법을 활용하면 짧은 기간에 넓은 지역의 지형과 지질현황을 정교하게 분석할 수 있다. 위성영상을 이용하면 현장답사가 불가능한 지역에 대해서도 지형과 지표현황에 관한 자료를 취득할 수 있으며, 수치표고자료를 이용하면 지표의 입체적 모형을 컴퓨터에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이 국토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핵심적 기준이 되는 산맥체계를 합리적으로 바로잡고 산맥의 명칭도 국민정서에 부합하도록 새롭게 붙이는데 당국과 학계 모두 관심을 가질 때이다. 김영표 국토연구원 GIS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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