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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분 먹고, 사창가 가서 맞아라” 엽기적 신앙훈련 강요한 목사·조교… 실형 확정

    “인분 먹고, 사창가 가서 맞아라” 엽기적 신앙훈련 강요한 목사·조교… 실형 확정

    신앙 훈련을 빙자해 교인에게 인분 섭취를 강요하는 등 가혹행위를 일삼은 서울 동대문구 소재 빛과진리교회 목사와 관계자들에게 실형이 확정됐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강요 방조와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김명진(65) 담임목사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지난달 29일 확정했다. 강요 혐의로 함께 기소된 교회 훈련 조교 최모(47)씨와 김모(50)씨에게도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10개월의 원심판결을 유지했다. 김 목사는 2017년 5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교회 신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 선발 교육 훈련을 고안하면서 위험성을 알면서도 최씨와 김씨가 참가자들에게 가혹행위를 하도록 방조한 혐의로 기소됐다. 최씨와 김씨는 2018년 5월 훈련 참가자에게 대변을 먹게 하고 같은 해 7월 훈련 태도가 좋지 않다며 엎드려뻗치기를 시키는 등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은 참가자에게 40㎞를 걷게 하고, 화상을 입을 때까지 불가마에서 버티게 했다. 또 음식물 쓰레기와 곰팡이가 핀 음식을 먹게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의 토사물을 얼굴에 바르게 했고, 하루에 1시간만 자게 하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항의하면 리더 선발 과정에서 불이익을 줄 것처럼 했다. 김 목사는 사도 바울의 고난을 체험하자며 가혹행위에 가까운 신앙 훈련을 고안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족보처럼 내려오는 세부 계획표에는 해당 훈련 예시표의 ‘매맞음’ 항목에 ▲사창가에서 복음 전하다 맞기 ▲나이트클럽에서 조폭에게 복음 전하고 맞기 등이 있었다. ‘오래참음’ 항목에는 ▲쓰레기·곰팡이 음식·변 먹기 ▲다른 사람이 토한 것 맨손으로 치우기·얼굴에 바르기 등 내용이 포함됐다. 피해자는 모두 4명으로 드러났다. 일부 피해자는 ‘자지 못함’ 항목의 가혹행위를 당하다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1급 장애인이 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사실은 2020년 5월 빛과진리교회 탈퇴 교인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폭로하면서 알려졌다. 김 목사는 2016년 3월부터 2020년 4월까지 교육감에게 등록하지 않고 학원을 설립 운영한 혐의(학원법 위반)도 받았다. 1심 법원은 세 사람의 혐의를 대부분 유죄로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김 목사 등이 불복했으나 2심 법원은 1심과 같은 형을 선고하고 이들을 법정에서 구속했다. 대법원 역시 “원심 판단에 강요죄 및 강요방조죄의 성립에 관한 법리 오해의 잘못이 없다”며 2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 [병자호란 다시 읽기] (99) 조선,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병자호란 다시 읽기] (99) 조선,혼돈 속 청의 번국 되다

     청군의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조정에서는 또 다른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그것은 전란을 불러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놓고 불거졌다.인조는 그 책임을 온전히 척화파들에게 돌렸다.‘그들이 명분만 앞세워 경거망동하는 바람에 임금과 종사(宗社)를 불측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인조는 척화파들을 조정에서 내쫓고 최명길을 비롯한 주화파 대신들을 중용했다.척화신들을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주화파 대신들 가운데도 척화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었는데,이제 와서 척화신들만 희생양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리였다.하지만 ‘책임 공방’에만 몰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혹했다.청측의 서슬은 여전히 시퍼랬고,감시의 눈길은 여기저기서 번뜩이고 있었다.조정은 결국 혼돈 속에서 점차 청에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논란  1637년 3월21일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이 나섰다.그는 조정에서 쫓겨난 윤황(尹煌)이나 조경(趙絅) 등의 이야기가 부당한 듯하지만,실제로는 국가의 대의(大義)를 지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선처하라고 촉구했다.사간 김세렴(世濂)은 ‘윤황 등이 죄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술렁거리고 있다.’며 그들을 복직시키라고 촉구했다.  인조도 물러서지 않았다.‘작년에 윤황 등이 헛된 명분에 매몰되어 실사(實事)를 도외시하는 부박(浮薄)한 행동을 저질렀다.’며 사면 요청을 받아들일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3월26일 부제학 윤지(尹?),교리 정치화(鄭致和),윤강(尹絳) 등이 다시 들고일어났다.그들은 ‘윤황 등이 망령된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어찌 유독 윤황 등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묘당(廟堂)의 책임입니다.’라고 비변사와 대신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인조는 다시 격앙되었다.‘작년 용골대 등이 왔을 때,그들이 우리에게 바로 표(表)를 받들고 칭신(稱臣)하라고 강요했다면 척화신들의 언동이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척화신들이 망령되이 들고일어나 용골대의 목을 치라고 주장했다.그 이후 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국가를 도모하기 위한 권도(權道·임시 방편)였는데 이들이 한갓 큰소리로 저지하여 나랏일을 혼미하게 만들었다.’고 일갈했다.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져 보지도 않고 ‘참수(斬首)’ 운운하면서 ‘오버’했던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신료들도 다시 반격에 나섰다.6월21일 유백증(兪伯曾)은 영의정 김류(?) 등 주화파 대신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작년 가을 이전에는 김류 또한 화친을 배척하여 ‘청국(淸國)’이란 말을 쓰지 말고 사신을 보내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그런데 전하께서 ‘적이 깊이 들어오면 체찰사는 그 죄를 면할 수 없다.’고 하자마자 주화(主和)로 돌아서 윤집(尹集) 등을 묶어 보내고 윤황 등의 죄를 다스리자고 했습니다.자신이 모든 책임을 맡아 임금이 성을 나가게 하고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유백증의 반박에 인조는 입을 다물었다. ●주화파 최명길,인조를 위로하다  병자호란 직후 김류는 분명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였다.전쟁 수행의 총책임자인 영의정이자 체찰사로서 김류가 보여준 난맥상이나 그의 아들 김경징의 과오를 생각하면 김류를 당장 내치는 것이 정상이었다.실제 삼사 신료들은 ‘종사를 망친 죄’를 들어 김류의 관작을 삭탈하고 조정에서 쫓아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에게 김류는 분명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일개 왕손에 지나지 않았던 인조를 보위(寶位)에 추대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원훈(元勳)이었다.김류가 없었다면 ‘국왕’ 인조도 있을 수 없었다.인조는 끝내 그를 버릴 수 없었다.더욱이 당시 인조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원죄 때문에 권위가 말이 아닌 상태였다.위기 상황이었다.위기 상황일수록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측근이 필요했다.인조는 결국 유백증 등의 탄핵을 무시하고 김류를 감싸주었다.  호란 직후 전란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에 조정의 대소사를 주도한 사람은 단연 최명길이었다.환도 직후 우의정으로 승진한 그는 시종일관 주화론을 견지한 데다,전란 초 적진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담판을 벌여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공로가 있었다.자연히 인조는 그를 신임했고,최명길은 전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5월15일 장문의 상소를 올려 인조를 다독이려고 시도했다.그는 상소에서 ‘지난번의 호란은 천지 개벽 이래 일찍이 없던 병란(兵亂)입니다.전하께서 융통성 없이 필부(匹夫)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셨다면 종묘사직은 멸망하고 백성들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다행히 전하께서 묘당의 의견을 받아들이시고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 종묘사직의 혈식(血食)을 연장하게 되고 생령이 어육(魚肉)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전하의 지극한 어짐과 큰 용맹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최명길은 인조가 순간의 굴욕을 참음으로써 종사가 유지되었으니 항복은 ‘치욕’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고 찬양했다.  최명길은 이어 ‘전하께서는 이 일로 속상해하지 마십시오.하늘의 운세는 돌고 돌아,흘러가면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否)가 극에 달하면 태(泰)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울해져 있는 인조를 격려하고,그를 움직여 전란 후의 난제들을 풀어가 보려는 충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인조,홍타이지에게 다시 책봉 받아  사실 당시 조선의 처지는 ‘책임 공방’에 몰두할 겨를이 없었다.당장 폭주하는 청의 압박과 이런 저런 요구 사항을 처리하는 데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병력을 뽑아 보내라.’ ‘대신들의 자제를 빨리 들여보내라.’ ‘도망친 포로들을 잡아 보내라.’ ‘처녀를 뽑아 바쳐라.’ 등등 요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 1637년 3월21일 의주부윤 임경업이 장계를 올렸다.내용은 청이 곧 용골대에게 어보(御寶)를 들려 조선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돈다는 것이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인조를 다시 책봉한다는 소식이었다. 용골대는 이제 ‘상국(上國)’의 책봉사(冊封使)로서 조선에 오는 것이었다.조정은 비상이 걸렸다.원접사(遠接使)와 관반(館伴)을 선발하고 각 지점에서 그를 접대하는 문제를 놓고 법석을 떨었다.바로 과거 명사(明使)들이 왔을 때 접대를 준비하던 방식이었다.  이윽고 11월20일 용골대가 홍타이지의 칙서를 갖고 서울로 들어왔다.인조는 서쪽 교외까지 거둥하여 용골대 일행을 맞았다.칙서의 핵심은 간단했다.‘왕이 전의 잘못을 뉘우쳤으니,이제부터는 네가 새로워지는 것을 아름답게 여길 것이다.이미 번봉(藩封)을 정하였으므로 전국(傳國)의 인(印)을 만들어 너를 조선 국왕으로 봉한다.이제 우리의 번병(藩屛)이 되었으니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닳도록 변하지 말라.’  ‘옥새를 내리나니 황하가 띠가 되고 태산이 숫돌이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이었다.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할 때,명으로부터 받은 옥새를 청측에 넘겨 주었었다.그리고 열 달이 지난 지금,청은 조선 국왕의 옥새를 새로 만들어 가져온 것이다.  인조는 ‘칙사’ 용골대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린 뒤 홍타이지의 칙서를 받았다.홍타이지는 인조를 다시 조선 국왕으로 책봉한 것이고,조선은 청의 번국(藩國)이 되기로 다시 맹세하는 순간이었다.청은 철저히 과거 명의 행태를 흉내내고 있었다.  이튿날 신료들은 인조에게 하례를 올리고,전국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황제의 칙서가 내린 것을 축하하는 조처였다. 하지만 조정의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침울했다.‘ 책봉’을 마친 용골대 일행은 다시 요구 조건들을 쏟아냈고,자괴감과 부담감 때문에 조선의 고민은 깊어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Local] 명품음식 발굴 요리경연 개최

    경남 진주지역의 명품 음식을 발굴하는 요리경연대회가 다음달 24∼25일 진주성 안의 광장에서 열린다.(재)한국음식문화재단이 함께한다.‘참진주 참음식 페스티벌’이란 부제가 붙은 대회에는 전국의 전업주부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지정 요리와 자유 요리 2개 종목으로 치러지며, 참가비는 받지 않는다. 으뜸상(농림수산식품장관상) 1명(상금 300만원) 등 10명을 선정해 시상한다. 참가자 전원에게는 조리용 칼을 기념품으로, 진주전통비빔밥을 점심으로 제공한다. 대회장에서는 한국음식 열두마당 기획전, 바이오식품산업관 운영, 진주 및 전국 우수 가공식품 전시회, 웰빙건강체험관 운영, 관람객 볼거리 이벤트, 관람객 체험 및 참여행사 등도 열린다. 진주시는 입선작 및 우수 창작 요리의 재료와 요리 방법 등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고, 전국 주부 요리순례 로드 맵을 개발해 관광상품화할 계획이다.진주 이정규기자 jeong@seoul.co.kr
  • “나무도 우리들 인생에 큰 스승이 될 수 있다”

    “나무도 우리들 인생에 큰 스승이 될 수 있다”

    설령 도회에서 자랐던들 나무에 얽힌 추억 한 둘 못 가진 사람이 있을까. 그것이 주린 배 속으로 허한 바람 일게 하던 들판의 미루나무든, 토담에 노구를 기댄 채 낱알을 툭툭 떨어뜨려 쌓던 밤나무든, 아니면 호랑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가시울 탱자나무든 나무는 모두에게 공유(共有)의 추억으로 남는다. 어느덧 문단의 중견이 된 작가 이순원이 장편 ‘나무’(문학에디션 뿔)를 출간했다. 온 가족이 함께 읽는 가족·성장소설이다. 작가는 이런 나무의 공유성에 눈길을 준다.‘열 두살의 네게는 무한한 질문의 나무, 스무 살의 그대에게는 엄마 몰래 숨겨놓고 싶은 비밀의 나무, 서른의 당신에게는 지혜로운 동반의 나무, 열매를 맺은 당신께는 나무 그 다음의 나무를 생각하는 나무’, 이런 식이다. 나무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한 물상도 흔치 않다. 뚜렷한 장소성 때문이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또 다른 아들로 나무는 사라지는 순간까지 수많은 사연들로 나이테를 만든다. 그 나무가 나누는 이야기들이 여름 원두막이나 겨울 화롯가 정담처럼 따뜻하다. 작은나무와 할아버지나무는 조곤조곤 귀엣말을 나눈다.“나무는 백 년도 살고, 천 년도 사는 몸들이란다. 오래 살며 열매를 맺자면 우선 제 몸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야겠지. 네 몸이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꽃보다는 줄기와 잎에 더 힘을 써야 하는 게야.” 작가는 나무에서 이런 주제 스물 일곱개를 뽑아 옴니버스식으로 엮었다. 그 가운데 ‘봄을 여는 매화의 기상’ 편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그러면 지금 눈 속에 핀 저 꽃들에서 열매가 달리는 건가요?” “그렇지. 눈과 추위가 나무를 단련시키고, 꽃을 단련시키는 거지. 매화나무가 언제 내릴지 모를 눈과 추위가 두려워 제때 꽃을 피우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법이란다. 네 말대로 꽃샘을 피하려고 늦게 피어난 매화꽃엔 아무 열매도 안 열리지.” 작가는 나무를 통해 삶을 말한다. 때로는 지혜를, 때로는 용기와 참음 그리고 자연의 섭리를 들려준다. 자칫 어른들에게는 밍밍한 얘기로 읽힐 수 있지만 곱씹을수록 ‘생각’의 뿌리를 넌출거리게 하는 글편들이다. 이 ‘나무’를 두고 작가는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태어난 시골집에 있던 커다란 밤나무, 백 년 전쯤 할아버지가 심은 그 나무와 할아버지는 내게 나무도 사람과 우정을 나눌 수 있으며, 우리 인생의 큰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런 나무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90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早春/박준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早春/박준영

    너무 간절한 사랑이 윤리라는 얼음을 뚫고 절제라는 찬 바람에 맞서 끝내 봄을 잉태하고 만다 그 온기로 마른 가지에 물이 오르고 싹이 트고 꽃대를 내민다 봄은 참음의 끝 사랑도 그렇다 참다 참다 못해 자유 독립 만세 불러 제치듯 만물이 사랑을 지지한다.
  • 국무총리의 골프(사설)

    이수성 국무총리가 김수한 국회의장과 김종필 자민련총재를 초청해 주말에 가진 골프회동이 화제가 되고있다.초점은 이것이 문민정부출범이후 불문율로 되다시피해온 공직자골프 금지 내지는 자제가 풀린 것이냐의 여부인 듯하다.결론부터 말하면 이 회동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일이지 공직자들이 골프채를 둘러메고 골프장으로 몰려가는 신호탄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지도층의 솔선수범과 고통분담의 상징으로서 골프 자제분위기는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특정한 기호나 운동자체를 불건전한 것으로 규정하여 그것을 즐길 기본권이라도 침해하는 것인양 골프자제를 시비하는 것은 본질에 대한 오해이며 논리의 비약이다.자기판단 아래 행동하면 될 것을 굳이 대통령의 재가를 통해 풀려는 것이라면 더욱 문제가 있다.사실 공무원들을 포함한 공직사회는 권리의 제한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발적인 동참을 통해 도덕적 규범과 내부규율을 적용받을 수있다.총리의 골프주최는 골프자제가 공직사회의 내부약속임을 말하는 것으로 정리한 뜻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주도한 원래의 골프자제 취지는 위화감조성,공직사회의 해이조장,비리의 토양이라는 지난날의 부정적인 국민인식위에 그것을 되도록 참음으로써 공직사회의 봉사기풍을 조성하고 기강을 다잡자는 대내적 호소요,설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그동안 공직자들의 자발적인 협력과 국민적 공감을 얻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공직자들과 지도층의 검소하고 질박한 체질과 분위기가 한 시대 사회전체의 바람직한 기풍으로 파급된다는 점에서 골프자제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흘려 일하는 긍정적 분위기 조성에 기여한바 컸다.대통령이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사회분위기를 관리해온 좋은 예로 평가될 수 있다. 지금은 대통령임기 후반에 일어날 수 있는 기강해이와 안보 및 경제의 어려움이 우려되는 시점이며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모두가 뛰어야할 시점이다.공직자들의 골프자제는 더욱 살려가야 한다.
  • 5쌍중 1쌍이 헤어졌다는 말에(박갑천 칼럼)

    지나간 왕조시대에는 이혼에 관한 법조문이 없었다.이렇네 저렇네 규정하는것 자체를 곰팡스럽다고 생각했던 듯하다.그래서 설사 칠거지악의 경우라도 벼슬하는 사람이 아내를 내치고자 할때는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성호사열」인사문·이혼). 가령 「조선왕조실록」(인조18년조)을 보자.재상이었던 장유의 부인 김씨가 그아들 선징의 이혼문제로 글월을 올리고 있다.선징의 아내가 병자호란때 오랑캐병사한테 잡혀갔다온 위에 성미까지 감때사납다는 데서였다.중신이 논의한 끝에 임금은 『공신집안 일이라 그 청을 들어준다』고 「결재」한다. 양반집안에서는 소박이 이혼이었다고 이능화의 「조선여속사」는 적고있다.아내가 지아비 마다하는 걸 안소박,지아비가 아내 돌보지않는 걸 밭소박이라 했다.상민의 경우 다음 두가지였다.그하나가 사정파의.부부가 마주앉아 서로 함께 살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헤어지는 일이다.다른 하나가 할급휴서.휴서란 이혼증빙문이다.나라법에 이혼조문이 없으므로 서류는 쓸데가 없다.그러므로 이혼하는 남녀가 서로 윗옷깃 한자락씩을 가위로 잘라주어 휴서로 삼았다.물론 어쩌다 있는 일일뿐 흔해빠진 일은 아니었다. 지난해 우리나라 이혼은 혼인신고 건수에 비겨 18.1%인 것으로 알려진다.5쌍중 한쌍이 헤어진 셈이다.75년의 6.0%에서 볼때 20년사이 3배가 늘었다.부정이 으뜸사유임은 여전하지만 「본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의 비중이 높아져가는 점에 주목해야겠다.참는게 미덕(인지위덕)이라는 옛말은 시대의 흐름앞에 빛이 바랜다. 신혼여행가는 비행기 속에서 갈라서기도 한다는 세상이다.권리의 신장에 따라 개성이 강조되면서 경제적으로도 매이지 않을수 있게된 시대상황이 이혼을 쉽게하는 요소로 되고있는 듯하다.그렇긴해도 오늘의 이혼은 예의·염치를 잃으면서 무람없어진 윤리관하며 참을줄 모르게 된 이기주의 시류와 떼어놓고 생각할수 없지않나싶다.더구나 자식이 딸린 경우는 그「죄」가 크겠건만 자기감정과 편익만 좇으면서 그게 몰고올 상하좌우의 파장을 의식않는 흐름이다. 삶의 길이 그하나더냐,까짓것 한번의 인생 기나 펴고 살아야지…한다치자.하지만그마음으로는 새길을 찾는다해서 하나같이 이상향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설사 또 겉보기에 행복하다 해도 평생을 두고 마음속에는 그림자가 어른거릴터.『인생이란 끊임없는 참음과 양보의 과정』이라는 옛말을 반드시 케케묵었다 할 일인가.〈칼럼니스트〉
  • 인내와 폭발의 질을 생각해 본다(박갑천칼럼)

    김기림 시인의 「공분」이라는 수필이 있다.50여년 전인 1940년에 쓴 글이다.이글은 『전차나 버스를 타면 저마다 성이 난것 같다』로 시작된다.차장도 성이 났고 승객도 성이 났고 거기다가 운전수마저 성이 났다고 쓰고 있다.그는『대체 이 인민이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질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면서 한탄한다. 정말 그랬을까.지금의 각박성에 비기자면 태평연월이었을 텐데.하여간 그 글은 요즘의 우리세태를 묘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어딜 가나 성나있는 사람들.「전차나 버스」뿐인가.택시도 술집도 가정도 그렇고 정치판에 시장바닥도 그렇다.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그렇게 곧잘 성을 내는 버릇이었던 것일까. 그렇다 해도 김시인 시대에는 성을 내봤자 한바탕 대거리하는 정도로 그만이었다.그런데 요즈음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남남끼리만이 아니다.어버이와 자식 사이에서도 돈문제로 혹은 음주문제로 죽이고 죽는다.요얼맛사이만 해도 아비 앞에서 계모를 찔러죽이는등 성난 뒤끝이 피로 물든 사례는 하나둘이 아니다.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의 욱하는 성질로 해서 불러들이는 파탄.그 「짧은 광증」은 살인까진 안가더라도 부부사이의 금을 갈라 놓는다.친구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고 다된 계약을 깬다.나라와 나라 사이의 싸움을 유발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참는 것으로써 덕을 삼는다(인지위덕)고 했던 까닭이 이런데 있었다.자장이 길을 떠나려면서 그 스승에게 수신의 요점을 물었을때 한 공자의 대답도 그것이었다.『백가지 행동의 근본은 참는 것이 으뜸이니라』.「칼날인량」자와 「마음심심」자로써 이루어진 「참을인인」자의 뜻은 깊다.참는다는건 마음속에 칼을 품는 어려움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떤 참음이건 모두 미덕이라 하기는 어려워진다.가령 김시양이 그의 「부계기문」에 소개해 놓은 당나라 누사덕(의 경우를 보자.그 아우 후덕이 『남이 자기낯에 침을 뱉으면 닦을 뿐이다』고 말하자 사덕은 그건 침뱉은 사람의 울화를 더 돋우는 일이라고 반론한다.저절로 마를 때까지 놔둬야 옳다는 「인내」의 철학이었다.그에 대한 김시양의 개탄을 나무랄 일이겠는가. 어떠한 인내이며 어떠한 분노의 폭발이냐가 문제다.참지 않아야 할일은 역시 터뜨려야 한다.다만 그 폭발이 단세포동물 같은 반사적·충동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겠다.옛 성현들이 경계했던 것이 이것이다.인내를 여과하여 나오는 「거룩한 폭발」은 태산보다 무겁게 울릴수 있다.참을줄 아는자의 분노를 올바로 받아들일수 있는 사회로 돼야겠다.
  • 대입시 날에/이창갑 건양대 총장(굄돌)

    오늘은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치러진다.오늘같은 날을 보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을 하던가? 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짧게는 고등학교 3년간,길게는 12년의 학창생활 전부를 오로지 한 목표,오늘 시험을 위한 것같은 생활의 끝을 마치고 후련해 할까 허탈한 마음일까? 대학인의 한 사람으로써 수십년동안 입시철이면 느껴야 했던 안쓰러움과 착잡함이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이리저리 갈피를 못잡게 바뀌어대는 입시제도,맹목적인 고학력 지향의 사회인식 등등이 어우러져 한바탕 요란스런 굿판을 치른 듯하다.그러나 이제는 돌아보기 보다는 앞을 보는 시간이어야 한다. 학교 공부가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른다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누구나가 고생하고 참으며 공부하고 있다.그 고생과 참음을 내던져서는 안된다.이제부터는 거기에 더하여 자기가 가지고 있는 취미를 마음껏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 요는 열심히 공부하고 잘 노는 것도 자기 길을 열어나가는데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소학에 보면 젊은이의 세가지 불행은 너무 일찍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부모의지위로 벼슬이 높아지는 것,재주를 믿고 독서를 적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대학을 가든 안가든,합격이 되건 안되건,누구에게나 분명한 건 이제는 더 이상 안온한 보살핌 속에만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앞날을 위해서 스스로가 계획하고 노력하며 책임져야 할 때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이 닥치고 만 것이다. 대학 입시날,해마다 매섭게 춥다는 입시의 날,이런 냉엄한 현실을 느끼게 하는 날씨인가? 그러나 미래는 무서워만 할 것은 아니다.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다.나는 무엇이 되겠다라는 목표를 세우자.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앞날을 기대하며 어떤 입장에서도 성실하게 산다면,정말 신나게 기대해 볼 것이 바로 「젊은이의 앞날」이 아니겠는가?
  • 윤이상씨에게 「당부」한다/송정숙 본사 논설위원(서울칼럼)

    「적기」가 태극기와 어울려,대한민국 정부청사가 즐비한 태평로 거리를 휘감고 펄럭이는 길을 따라 출근을 했다. 이게 서울이었나 하고 당황할 법한데 오히려 무심하게 지나왔다. 우리 스스로 많이도 변했음을 실감했다. 지난 10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열린 「통일음악회」를 관람했다. 북쪽 프로그램인 1부가 끝나자 그만 일어나고 싶었다. 그날 듣고 싶었던 것은 북쪽 음악이었으므로 늘 듣던 남쪽 것은 안들어도 그만일 것 같았다. 그러나 떨치고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통일음악회의 구성이 흡사 남북의 민속음악 경연대회처럼 꾸며져 있어서 한쪽만 보고 일어나는 것은 그쪽만을 지지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느낌은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전체를 다 보고 나니까 저절로 비교가 되어 개인적인 호오의 느낌이 확연히 드러났다. 간들어진 목소리로 애교를 피워가며 1930년대 악극단의 버라이어티쇼처럼 부르는 북쪽의 민요조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안든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음악문화의분위기가 우리와 다른데서 오는 이질감일 것 같다. 「신고산타령」의 큰애기 부분을 「바람나서 밤봇짐을 싸는」 것으로 부르는 대신 「큰애기들이 뜨락또르 모는소리」로 바꿔 부른다든가,「우리당의 음덕이로세」를 거듭하며 정치색나게 부르는 따위의 소소한 차이쯤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는데 이상하게 가식적인 그 분위기가 간지럽고 등줄기에 뭔가 기어다니는 벌레가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다. 악기 또한 「옥쟁반에 구슬구르는 소리같다」는 현이 많은 악기는 어쩐지 서양악기의 하프같아 우리 악기같지가 않고 단소소리 또한 원래의 소리와 좀 이질감이 들었다. 단소에다 작은 부품을 부착하여 플루트에 가까운 소리가 났다. 우리는 하프소리도 자유롭게 듣고 플루트연주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단소소리는 단소소리답게 플루트소리는 플루트소리로 듣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서로가 가진 남북의 차이일 것이다. 우리쪽의 「고전」을 가지고 평양에서 공연했을때,그쪽 평론가가 쓴 평문이 최근 국내의 주간지에 실렸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판소리 가수들에게 고유한 쐐ㄱ소리는 인위적인 목청으로 성대를 무리하게 쓴 결과 나타난 병적 현상이다. 그런 것을 지난날 양반놈들은 술놀이판에서 흥을 내는 제놈들의 더러운 기호와 취미에 맞는다고 해서 명창이니 국창이니 하고 장려해왔다.』 남쪽식의 이른바 정통 국악을 그들은 이토록 지독하게 혐오하는 것이다. 「통일음악회」를 보고 「한핏줄」에 「동질성」의 확인을 했다고 감동에 감동을 거듭하는 찬사가 많았다. 그러나 그 감상주의에 전폭적으로 동의해지지 않는 일면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느낌도 매우 소중하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조상의 후손임이 분명한데 남북에 왜 동질성이 없겠는가. 그것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정작 궁금한 것은 『얼마나 이질화했는가』였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어 우리 함께 살아야 할 남북이 얼마나 다른 감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통일음악회를 전후해서는 우리에게서 아주 미묘한 현상이 하나 있었다. 이런 이질감을 지적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통제당하는 느낌이었다. 그저 「뜨거운 감동」에 「참음악」임만을 예찬하도록 강요하는 듯한 이 기묘한 분위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음악회기간중 돌출한 윤이상씨의 편지도 이런 분위기 연출에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편지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내용일 뿐더러 언론기관에 배포해줄 것을 (윤씨가)특별히 당부한』 편지였는데 우리의 정부 공보관계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공표조차 안했음을 힐난받았던 바로 그 편지다. 당국이 언론에 전달했다면 우리의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들은 오히려 묵살해 버렸을지도 모를 이 편지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아주 잘 「전달」이 되었다. 그 내용의 핵심인즉 『…음악교류는 조금도,어떠한 형태로든지 그 질적 양식적 가치를 가지고 비평하지 않기를』 각 신문들에게 호소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뜻인지,언급은 하되 긍정적인 찬사만을 쓰라는 뜻인지 이 문맥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언론에 나타난 것은 모두 찬미 비슷한 것이었던 것을 보면 그의 말은 그런 방향으로 받아들여진 게 분명하다. 「통일음악회」는 처음부터 「윤씨의 작품」이었다. 비무장지대라고 하는 군사적 공간을 「음악회」로 묵살하자는 기발한 제안을 하여 마치 거절한 쪽에 통일의 의지가 없는 것 같은 효과적인 선전을 해서 공을 세운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남쪽 음악인을 「선정」해서 북에서의 「통일음악회」를 이루었다. 「통일음악회의 대부」같은 그가 북한에서 누리는 위치는 『제3인자 정도』의 막강한 것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걸 뒷받침하듯 음악인만이 아니라 「취재기자」를 선정하는 권한까지도 있어보이는 과정을 거쳐 「평양의 통일음악회」를 끝내고 그 화답행사인 서울서의 「송년 통일음악회」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그 사신에 「각 신문에」 보내는 「당부」가 있었던 것이다. 이 「당부」를 지키지 않는 신문이나 기자는 다음의 「통일음악회」같은 행사가 북에서 열릴 때에는 「선택받을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는뜻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지레 겁을 먹을」 남쪽 신문이나 기자는 없겠지만 그의 호소는 결과적으로 상당히 주효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서로 안다칠 수 있고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원수를 가지고 「물」이니 「바보」이니 흉도 보고 대로상에서 타도를 외치기도 하는 우리의 눈에는 「수령」의 지난날을 부정적으로 진술한 대목의 남쪽신문을 본 것만으로 『손이 떨려 말이 안나오는』 심경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붉은기가 휘날리는」 태평로거리를 유유히 지나 출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로움이다. 서로가 이만큼 다르다는 것을 윤이상씨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남쪽의 이럴 수 있음에 대해서 북쪽을 이해시키는 일을 우리는 윤씨에게 「당부」한다. 윤씨는 그걸 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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