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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스가, NHK에 방송중단 압력?...도쿄올림픽 특집 취소 명령

    日스가, NHK에 방송중단 압력?...도쿄올림픽 특집 취소 명령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 정권이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의혹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러한 관측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사례가 나타났다. 15일 일본 시사주간지 슈칸겐다이 등에 따르면 당초 지난달 24일 방송될 예정이었던 NHK의 간판 시사프로그램 ‘NHK스페셜’에 대해 상부로부터 ‘방송 중단’ 명령이 내려졌다. ‘NHK스페셜’은 매주 일요일 오후 9시부터 약 50분간 방송되는 주간기획이다. 이번에 방송이 불발된 것은 ‘레이와 미래회의: 어떻게 하나? 무엇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묻는다. 도쿄올림픽·패럴림픽’편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올 여름 도쿄올림픽의 개최가 극히 불투명한 가운데 개최의 타당성 등에 초점을 맞춘 기획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100명의 시청자가 원격으로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방송을 1주일 남짓 앞둔 15일 프로그램 제작진에 뚜렷한 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방송을 중단하라는 지시가 상부에서 내려왔다. 근시인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내용의 ‘우리의 눈이 위험하다’가 대체 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NHK 관계자는 “NHK스페셜과 같은 대형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전주에 통째로 바뀐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NHK스페셜의 프로그램의 교체는 이사진이라도 불가능하다. 마에다 데루노부 회장에게 정부의 의견이 전달됐든지, 마에다 회장이 스스로 알아서 긴 것인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NHK 홍보 담당자는 “프로그램 변경이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종합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외압설을 부인했다. NHK는 지난해 10월 TV 생방송에 출연한 스가 총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잇따라 던져 정권의 미움을 산 것으로 알려진 저녁 9시 뉴스 앵커 아리마 요시오를 오는 4월 교체하기로 결정하면서 정권 압력설이 제기된 바 있다. 아리마 앵커는 지난해 10월 26일 생방송 출연한 스가 총리에게 당시 정국을 요동치게 만들었던 일본학술회의 후보자 임명 거부와 관련해 “총리 자신이 좀 더 알기 쉬운 말로 직접 (임명 거부 이유를) 설명하실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비슷한 질문을 던져 정권의 눈밖에 났다. 당시 스가 총리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였다. 방송 다음날 내각 대변인인 야마다 마키코 홍보관이 NHK에 전화를 걸어 “총리가 크게 화가 나셨다. 그런 질문으로 총리를 압박하다니 사전에 합의했던 것과 다르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때 NHK 안팎에서는 이듬해 봄 프로그램 개편 때 아리마 앵커가 하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왔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주간기획W&W] 파인먼씨, 우주왕복선을 부탁해

    [주간기획W&W] 파인먼씨, 우주왕복선을 부탁해

     이달 28일 인류과학의 큰 별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미국의 우주왕복선 애틀랜티스호가 플로리다 케네디 우주센터를 박차고 올라 마지막 비행을 하고 나면 파란 하늘이 아닌 까만 우주를 날아다녔던 ‘스페이스 셔틀’은 박물관에서 관람객들과 여생을 보내게 된다.  1981년 4월 12일 컬럼비아호가 처음으로 하늘을 난 이후 챌린저, 디스커버리, 애틀랜티스, 엔데버 등 대항해시대 유명 탐험선들에서 이름을 따온 5형제가 비행한 횟수는 총 135회. 거리는 8억 5000만㎞에 이른다. 그러나 우주왕복선의 탄생이 사기극에 가까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69년 대통령에 오른 리처드 닉슨은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는 우주개발 계획을 탐탁지 않아 하며 항공우주국(나사)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나사는 한번 쏘면 재사용할 수 없는 로켓 대신 얼마든 재활용이 가능한 우주왕복선을 제작하겠다고 제안했고, 이에 솔깃한 닉슨은 이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나사는 1주일에 1회, 연간 50회씩 비행이 가능하다고 닉슨을 속였다.  하지만 우주왕복선은 ‘돈 먹는 괴물’이었다. 한번 사용한 부품은 대부분 교체해야 했다. 지금까지 미국이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에 투입한 돈은 1500억 달러(약 162조원)가 넘는다. 1986년에는 챌린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폭발하는 장면이 전 세계로 생중계됐고, 2003년에는 컬럼비아호가 귀환 중에 역시 폭발하면서 미국과 과학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가상 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 호 주인공은 퇴역하는 우주왕복선 3대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1918~1988)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파인먼은 ‘파인먼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 저서를 통해 대중과 호흡하는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1986년 챌린저호 폭발 사건의 조사위원회에 참여, 원인을 규명하기도 했다. 우주왕복선을 만난 파인먼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비행을 했는지 그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파인먼  이렇게 무사히 만나게 돼 반갑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애틀랜티스를 제외하고는 이제 편히 쉴 일들만 남았네. 엔데버 자네는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만들어졌는데, 나 같은 물리학자가 왜 우주왕복선의 모임에 나타났는지 궁금하지 않나?    ▲엔데버  제가 1992년에 태어났으니까 1988년에 돌아가신 선생님을 뵐 기회가 없었죠. 그래도 그 명성만큼은 익히 들었습니다. 1986년 챌린저 형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조사위원회인 로저스위원회(국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로저스가 당시 위원장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위원장의 이름을 따 위원회 이름을 부른다. 부위원장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닐 암스트롱이었다)에 참여하셨죠? 그때 얘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파인먼  사실 나한테도 우주왕복선은 TV로나 보던 존재였지. 그래서 처음에 나사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거부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사람(기네스 파인먼)이 “모두가 몰려다니면서 정치를 할 게 뻔한데, 제대로 조사를 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고, 난 멍청하게 우쭐해서 그 말을 받아들였지.    ▲디스커버리  그래도 사고 원인을 찾아내셨잖아요.    ▲파인먼  글쎄. 세상에는 내가 챌린저가 발사되던 날의 기온이 크게 낮았고, 그 때문에 연료통의 틈새를 메우는 고무 O링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연료가 유출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 하지만 그 문제를 처음 알아낸 것은 국방부의 커티나 장군이었어. 난 단지 그 문제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지.    ▲애틀랜티스  선생님이 다른 사람들이 회의를 하는 동안 얼음물을 달라고 해서 실제로 O링을 넣어 뒀다가 보여 줬던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공개회의였는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그러신 건가요?    ▲파인먼  아무도 나한테 O링을 주지 않았는데, 회의장의 모형에 O링이 있었고 그걸 실험할 수 있는 곳이 거기뿐이었거든. 사실 조사 과정에서 나사와 관련 회사들이 얼마나 일을 엉망으로 하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수많은 부분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어. 챌린저 폭발의 원인이 단순히 O링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디스커버리  이제 뭐 다 지난 일이고 정권도 여러 차례 바뀌었으니 구체적으로 좀 얘기를 해주시죠.    ▲파인먼  120일이 조금 넘는 조사기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은 얘기는 “거기에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랑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라는 말이었지. 누군가 자기들을 파헤치고 다니는 게 불편했던 것이지. 무엇보다 우주왕복선은 사람이 만들고 탄 물건 중에 가장 위험했거든. 너희들은 실제로는 폭탄이나 다름없지. 우주왕복선의 설계상 사고 확률은 100~450회 비행당 1건으로 돼 있어. 군용기가 2만 2000회 비행당 1회, 민간 여객기가 100만건당 1회로 계산되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말도 안 되게 높은 위험도지. 그런데 나사는 이걸 민간 여객기와 같은 100만분의1이라고 발표했거든.    ▲엔데버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왔죠?    ▲파인먼  “우주왕복선에는 사람이 타기 때문에 더 안전하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 때문이야. 숫자 조작을 한 거지. 실제로 우주공간에서의 임무를 제외하고, 비행과정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착륙할 때 바퀴를 꺼내는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밖에 없거든. 그 밖에도 부품들에 생기는 문제를 규정 변경을 통해 허용치로 바꾸거나 엔진 터빈에 생긴 균열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용 가능으로 판정하기도 했어. 조사 과정에서 보니까 엔진, 부품, 연료 등 많은 부분에서 현장 기술자들이 발사를 반대했는데 윗선에서 묵살했더라고.    ▲디스커버리  그런데 왜 무리해서 발사를 한 거죠?    ▲파인먼  챌린저가 폭발한 1986년 1월 28일은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가 예정돼 있었지. 영화배우 출신답게 쇼를 좋아했던 레이건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챌린저호의 우주인과 교신을 하려고 했던 게 무리한 발사의 원인이었다고 봐야지. 특히 챌린저에는 일반인이었던 과학교사 매컬리프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극적 효과로는 최고였겠지. 챌린저가 얼마나 무리한 발사를 하는지 알고도 탔을 만큼 매컬리프 부인이 용감했는지는 별개로 쳐야겠지만 말야.    ▲애틀랜티스  결국 그때 나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안을 하셨고, 실제로도 많은 개선이 이뤄졌잖아요. 그런데 2003년에 큰형님인 컬럼비아호가 또 불행한 사고를 당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파인먼  그건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여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우주왕복선이 워낙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 외부적으로는 발사 단계에 타일이 떨어져 나가면서 돌아올 때 열을 견디지 못해 폭발했다고 하던데. 일각에서는 나사가 1990년대 후반에 구조조정을 심하게 하면서 관리와 정비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하더구먼.  자, 사고 얘기는 이쯤에서 마치고, 이제 30년간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각자의 안식처(디스커버리는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 엔데버는 캘리포니아과학센터, 애틀랜티스는 플로리다 케네디우주센터)로 옮겨지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각자 일생에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을 되돌아볼까?    ▲디스커버리  전 ‘지구의 눈’으로 불리는 허블 우주망원경을 1990년 4월에 우주로 올려놨죠. 사람들이 총천연색 우주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 것은 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지금까지 우주왕복선 5대가 기록한 우주비행 135회 중 39회가 제 차지였습니다.    ▲애틀랜티스  저 역시 허블망원경의 수리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2003년 2월 컬럼비아 형님이 허블망원경을 수리하고 돌아오다가 사라진 이후 나사는 “국제우주정거장(ISS) 이외에는 우주왕복선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죠. 하지만 미국 과학자들은 물론 전 세계에서 허블망원경을 계속 보게 해 달라는 운동이 벌어졌고, 그 결과 제가 다시 허블망원경으로 향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전 가장 마지막으로 하늘을 난 우주왕복선으로 역사에 남을 겁니다. 이달 말 비행으로 말이죠.    ▲엔데버  하늘에 떠 있는 가장 큰 인공구조물인 ISS는 제가 주도한 작품입니다. ISS 내 우주인 투입이나 우주인들이 체류하는 데 필요한 물품 공급, 배터리 교체, 로봇 팔 설치 등이 모두 저를 통해 이뤄졌죠. 2007년에는 저를 타고 우주로 간 우주인들이 선생님이 돼 지구의 아이들에게 과학교실을 열기도 했죠. 이젠 모두 지나간 추억이 됐지만 말이에요. 언젠가 제 후배들이 태어난다면 이런 얘기들은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저희 형제들과 수백명의 우주인들이 만들어낸 도전의 역사는 영원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파인먼  우주를 날아서 비행기처럼 자유롭게 활주로에 착륙한다. 정말 공상과학 소설 같은 얘기를 현실에서 보여준 자네와 나사의 과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네. 물론 보이저(1977년 발사된 나사의 행성 탐사선. 목성과 토성을 찍었고 현재 태양계 끝에 도달해 있다)처럼 사람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태양계 밖 미지의 세상을 탐험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난 여전히 자네들이 여기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네. 위험한 비행을 하며 형님 둘(컬럼비아·챌린저)을 먼저 보내고 자네들은 살아남지 않았는가 말일세. 우주왕복선이 이뤄낸 수많은 업적보다 내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세상에 홍보용으로 전락한 과학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 줬다는 점이라고 말하겠네. 아직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그런 일이 계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일세. 오늘 즐거웠어. 각자의 자리에서 미래의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교훈을 주기 바라네.     도움말 주신 분 이주희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우주과학팀장 정홍철 스페이스스쿨 대표 이학명 과학칼럼니스트   참고문헌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리처드 파인먼·김희봉/ 사이언스북스) 남이야 뭐라 하건!(리처드 파인먼·홍승우/ 사이언스북스) 우리는 이제 우주로 간다(채연석/ 해나무)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MBC 가을개편 주말프로 강화

    MBC가 오는 21일 가을개편을 통해 주말 프로그램과 가족대상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한다. 신설되는 주말 프로그램으로는 꿈을 영상으로 재현한 후 전문가 분석을 시도하는 토크 프로그램 ‘꿈꾸는 TV 33.3’,유아들의 모습을 담은 ‘오!해피데이’외에도 ‘목표달성 토요일’의 인기코너 ‘천생연분’이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다. 또 주말여행계획에 도움을 줄 ‘토요일엔 떠나볼까’와 ‘출발!비디오 여행’을 요약한 ‘다이제스트 출발!비디오 여행’이 따로 마련된다.타이완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방영하는 ‘아시아 걸작 드라마’와‘주간기획-스포츠 매거진’,세계의 기상천외한 사건이나 특수한 능력을 지닌 사람을 소개하는 ‘믿거나 말거나2’등도 새로 시작된다.
  • 편집자에게/ 시의적절한 기획… 해법도 제시해야

    -새 주간기획 ‘남과 여’(9월19일자 22면)기사들을 읽고 대한매일이 새로 실은 ‘남과 여’면을 보는 순간 ‘오호!’하는 감탄사가 나왔다.급변하는 남녀의 성(性)의식과 가족제도의 변화 등을 ‘21세기 개인의 행복 추구’라는 관점에서 조명한다는 기획의도에 특히 찬성한다.남녀를 불문하고 현재 우리 모두는 성의식 변화에 당황하고 있다.남자들의 술자리,여성들의 만남에서 대화의 대부분을 애인·부부·가족문제가 차지하기 때문이다.현재 30∼40대는 10∼20대의 개방적인 성문화를 접하면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본능적인 거부감이라는 이질적인 감정 사이에서 방황한다.흔히말하는 ‘386세대’는 진보적인 사회의식으로 개인의 자유와 성적 개방을 원칙적으로 지지하지만,청교도적인 성문화와 순결주의라는 기본적인 성향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40대로 접어들면서는 ‘청춘이 사라진 내겐 기회도 없었는데….’라는 심리적인 저항감이 작용할지도 모르겠다.그 부산물이 급증하는 이혼율과 혼외정사의 소식들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주부를 겨냥해 ‘독자들의 비위 맞추기’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이제 여성만이 아닌,남녀가 함께 고민하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신문 여성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이러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첫번째 기획으로 ‘장·차남들의 속앓이’를 택한 것도 적절하다.너무나 개인적이고 시시콜콜한 듯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사는 우리 중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단지 아쉬운 것은 그처럼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는 지면이 너무 작다는 점이다.좀 더 심층적인 기획을 몇 차례 해 문제의 해법,특히 사회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기 바란다. 이정원/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기획홍보부장
  • 민간 전문가가 ‘뉴스 리포트’ 한다

    시청자의 방송 접근이 야금야금 늘어나더니 마지막 보루 쯤으로 여겨지던 뉴스 프로그램에 민간 전문가가 리포터로 나서는 ‘변혁’이 시작됐다.전문가의 뉴스 프로그램 출연은 흔한 일이지만 이처럼 직접 리포트를 맡은 것은 국내 방송사상 처음. 대구MBC는 10일 밤 9시 뉴스데스크 시간에 손희만 대구 지방환경관리청장을리포터로 출연시켜 대기와 수질오염 등 환경문제를 집중 점검하는 ‘오픈 뉴스 리포트’를 내보냈다.‘오픈 뉴스’란 대구MBC가 주간기획으로 설정한 뉴스 아이템을 민간 전문가가 기획,취재해 리포트하는 제도로 지난 해 말부터도입을 검토해오다 이번에 결행한 것. 매주 월요일에 환경단체 관계자,주부 및 교수 등을 리포터로 기용해 방송할계획이다. 대구MBC는 “전문기자 육성에 따르는 한계를 극복하고 뉴스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각계의 전문가를 직접 기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손청장이 방송경험이 없는 만큼 리포팅 기법을 훈련시키고 방송 메카니즘에 대해 이해시키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손청장은 앞으로 음식물 쓰레기와세제 과다사용,자동차 매연문제 등을 지적하면서 주부와 의사.기업체 관계자와의 인터뷰도 곁들여 리포트한다.이미 2분 분량의 리포트 4개분 촬영을 마친 상태. 손청장은 이날 리포트에서 “자동차 매연을 줄이는 길이 대구시의 공기를 깨끗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전제하고 대구시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사투리가 여전한 것이 문제로 지적됐지만 첫 리포트치곤 무난하게 소화했다는 평을 들었다. 대구MBC는 이밖에도 기자 전문화를 위해 팀제를 운영하고 뉴스와 관련된 인권침해 시비를 없애기 위해 ‘명예와 사생활 보호를 위한 보도기준’을 제정하는 등의 뉴스 쇄신책을 이날부터 시행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새 발굴 자료와 증언으로 다시쓰는 현대사(대한민국 50년:1)

    ◎바람속에 밝힌 등불/1948년 8월15일 감격의 새아침 열리다/유엔 총선감시단 평양행 좌절되고/좌·우 이념대립속 ‘5·10선거’ 실시/해방 3년만에 반공정권 탄생/미 군정 정책 혼선으로 우익진영은 분열되고 북은 빨치산까지 양성/정부 권력구조 싸고 이승만·한민당 또 갈등/끝내 ‘대통령중심제’로 올해 1998년은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다.그 반세기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파란만장한 당대사다.그럼에도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했던 여러 공화국의 정치상황 때문에 가려진 부분을 다 들추어내지는 못했다.또 전통주의의 수정주의에 입각한 학계의 양극화 현상은 현대사가 더러 왜곡 기술되는 오류도 드러냈다.그래서 서울신문은 새로 발굴한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으로 엮은 주간기획물 ‘대한민국 50년’을 연재키로 했다.이 시리즈는 우선 대한민국 50년 역사속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데 초점을 맞추었다.이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다가오는 21세기 미래사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작업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새해가 밝았다.세밑 그믐날 잔뜩 찌푸렸던 하늘도 활짝 개었다.수은주는 영하 11도7분까지 내려가 기온은 쌀쌀했지만,날씨만큼은 쾌청했다. 우리 민족에게 새해 원단은 늘 각별한 것이었다.해방을 맞고나서 세번째 돌아온 새해는 더욱 그러했다. 전해인 1947년 11월14일 유엔 총회가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채택해 두었던 터라 고무적일 수 밖에 없었다.유엔총회의 한국독립 계획안은 1948년 3월31일까지 남북한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국회 및 정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1947년 봄부터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구상했다.미국의 대외정책문서(FRUS)에 나타난 이같은 구상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시사하는 것이었다.미·소의 이해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한반도문제를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소련은 한반도문제의 유엔 이관을 처음부터 반대하고 나섰다.그 대신 1948년초까지 남북한 주둔 미·소병력을 동시에 철수,한국인들 스스로가 외부개입 없이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의를 내놓았다. 소련의 제의는 명분상 설득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당시 남북한 현실을 비교하면 남한쪽에는 위험한 것이었다.북한에는 이미 소련의 지원에 따라 사실상의 정부로 보아도 무방할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다.이와는 달리 남한에는 권한과 지지기반이 취약한 남조선 과도정부가 있기는 했다.그러나 미군정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우익 민족진영은 분열된 상태였고,북한의 조정을 받는 강한 공산세력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래서 1948년 새해 첫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큰 사건 하나를 딛고 넘어갔다.이날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을 서둘러 발표했다.그런 어수선한 판에 1월4일에는 38선을 경비하는 북한 보안대원들로부터 황해도 연백경찰서 장곡지서가 습격되었다.그리고 15일에는 개성경찰서 여현지서가 피습되는 가운데 남로당 출신으로 이루어진 야산대라는 이름의 빨치산이 전국에서 설쳤다.이들 야산대는 소규모 빨치산에 불과했다.그러나 북한은 대규모 게릴라전을 위해 이 해에 평남 강동학원을 차렸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유엔 감시아래 한반도 전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키로 한 유엔의 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이에따라 총선을 감시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한위·UNTCOK)이 1월8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는 영등포공업지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과 고용직 근로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지만,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이날 KPS메논 인도 대표와 오스트레일리아·시리아 등 3개국 대표가 먼저 도착한데 이어 캐나다·프랑스·필리핀·엘살바도르 대표가 29일까지 서울에 왔다.유엔한위 1진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 유엔한위가 북한에 한 발도 못 들여놓을 것이라는 김일성 발언이 나왔다.그 때만해도 의례히 해보는 상투어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미군정연락장교편에 평양으로 보낸 유엔한위의 입북신청은 소련군사령 참모장에 의해 거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거부로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다.유엔한위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단독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놓고 미군정과남한 정치지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속회담을 열었다.우파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환영했으나 우익중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반대했다.그리고 김규식을 주축으로 한 중도파도 통일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에 섰다.좌익도 물론 반대했다. 유엔한위는 남한 단독선거가 유엔 결의와 부합되는지를 놓고 고심했다.그러다 이 문제를 유엔 소총회에 넘겼다.소총회는 2월19일 유엔한위의 접촉이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 우선 총선을 실시하자는 미국의 안을 받아들였다.투표결과는 미국 입장에 대한 찬성 31,반대 2,기권 11로 나타났다.유엔 소총회가 남한 단독선거쪽으로 손을 들어주자 유엔한위는 곧 바로선거준비에 들어갔다.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미군정은 우익진영과 협조하여 선거준비에 들어가는 한편 3월1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발표했다.전통적인 민주선거원리에 입각한 이 선거법은 21살 이상의 남녀 모두를 유권자로 규정했다.이 선거법에 나타난 특이한 점은 일제에 빌붙어살았던 부일협력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 박탈이다.새 정부의 민족정통성 확립을 위한 것이었는데,일제 청산은 뒷날 이승만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선거일은 처음 5월9일로 정했으나 일요일 투표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다음날인 10일로 바꾸었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면서 남북협상에 운명을 걸고 평양으로 떠났던 김구와 김규식이 5월5일 서울로 돌아왔다.5·10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 의도에 말려들었을 뿐 남북협상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10선거 역시 예상했던 대로 평온하지 못한 분위기속에 진행되었다. 총선거에는 대한독립촉성회,한민당,대동청년단 말고도 45개 군소정당이 나왔다.특히 무소속이 많아 전체 당선자 198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85명이 무소속이었다.이어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한민당이 29명,대동청년단이 12명,다른 군소정당과 사회단체가 19명의 국회의원을 냈다.이들이 바로 제헌의원인데,국회는 5월31일에 개원되었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에,신익희와 김동원을 부의장에 선출했다. 제헌국회는 7월17일에 열렸다.이날 국회는 이승만의 주장대로 대통령중심제를 권력구조로한 헌법을 통과시켰다.그리고 7월20일에는 헌법에 따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7월24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헌법 골격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던 한민당과 또 격돌을 벌였다.이승만은 귀국 이후부터 자신을 추종하면서 대통령으로까지 밀어준 한민당을 각료 선임에서 소외시켰던 것이다.그래서 민국당에 이어 민주당으로 개편한 한민당의 뿌리는 1960년 4·19혁명기까지 이승만과 영원한 정적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은 8월15일 상오10시쯤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었다.미군사령관 J R 하지 중장은 미군정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해방을 맞은지 꼭 3년만에 독립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속에 이상주의적 민족주의자들과 군정의 갈등,공산주의 세력들과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하고 어렵사리 태어났다.그러나 제1공화국이라고도 말하는 내정체제하의 반공정권은 그 장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로부터 50년,꼭 반세기를 맞은오늘 험란한 민주화의 길을 걸어온 야당지도자가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새 정부가 막 돛을 올릴 참이다.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반세기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그 역사속에는 비민주적 요소가 다분한 여러 단계의 공화국이 기록되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아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새로운 각성(중앙아시아를 가다:1)

    ◎중국 능가했던 주체적 고구려문화/집안 오회분의 ‘달님­해님’ 그림 독창적 솜씨/중원에 업은 샅바싸움 강건한 기상의 무예 서울신문은 민족문화 원류를 탐사하는 새 주간기획물 ‘중앙아시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중국 동북지방에서 중원을 거쳐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사막을 찾은 서울대 윤이흠 교수(세계종교사)가 엮는 로망의 문화기행입니다.이 시리즈는 현지에서 확인한 고구려와 발해문화를 통해 고대 민족문화 루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그래서 낙양과 서안,돈황을 거쳐 천산산맥 남북 기슭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볐습니다.거기에는 우리 고대문화와 유사한 흔적을 간직한 옛 소련땅 독립국가들의 문화유산 모두가 포함되었습니다.민족문화를 역동적으로 끌어올린 고대문화 통로를 찾는데 물론 역점을 두었지만,중앙아시아에서 만난 동포들의 삶도 함께 다룰 예정입니다. 만주 벌판의 광활한 땅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에 이른다.그 웅비하는 산세를 접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여기가 우리 민족의발원지려니 하는 마음을 갖는다.7년전 100명의 제천단을 이끌고 처음 백두산을 올랐을때 감격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째서 여기를 민족의 기원지라 믿게 되는 것일까.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그래서 발길을 먼저 연변지역으로 돌렸다. 우리는 흔히 문화의 뿌리와 기원에 대한 질문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으려 한다.기원과 본질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혼돈스러운 것이다.이는 아주 오래된 인간의 사유습관으로 정착했다.그 오래된 습관이 민족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는 우리 문화와 중국문화의 관계에서 드러난다.그 관계를 컴퓨터용어를 빌려 설명하면,우리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중국문화가 우리의 고유문화를 덮어씌운 것이다. ○중국시각서 탈피할때 그래서 모든 고유 개념어들이 중국문화 내용으로 대체되었다.이를테면 삼재사상같은 것이 그런 경우다.천지인을 말하는 삼재사상은 주대에 시작해서 한대에 와서 완성되었다.따라서 그 이전 단군조선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럼에도 삼재사상이 한국문화의 뿌리이자 본질인 양 착각한다.이는 분명히 오래된 사유습관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중국 일변도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다. 그런데 북방에서 만난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오류에 대한 각성 그것이었다.집안 고구려 고분인 오회분 4,5호 묘에서 비는 달님 ‘여와’ 및 햇님 ‘복희’의 그림과 각저총의 격투기 및 씨름 그림은 중국문화에 예속하지 않은 고구려인의 솜씨다.두꺼비가 있는 달을 머리에 인 여와는 물론 중국 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다.그러나 7세기에 그린 이 그림은 흐트러지고 유연한 당시 중국의 비천과는 전혀 다른 강건한 기상을 담았다. 그러니까 고구려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문헌전통을 받아들였으되,미의 감각 만큼은 자신들의 것을 버리지 않았다.그들은 고구려의 정서라는 그릇에 중국의 문화를 담았던 것이다.이는 고구려문화에 나타난 일관된 현상이다.무예대결의 그림수박도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자기수련 전통이 배었다.또한 샅바를 맨 씨름은 중국에 없는 무예다.특히 고구려인과 대결중인 상대방 얼굴의 코는 유난히 높게 강조되었다.서역(서역)의 서양인이 분명했다.이는 고구려인들이 중국 밖에 사는 사막과 스텝의 민족들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림이다. 중국 대륙은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 전까지는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철저히 유린되었다.그 오합지졸의 상태였던 시기에 고구려는 대륙 동북방에서 강성한 제국을 이루었다.고구려는 당시 대륙에서 크게 봐야할 국가도 없었고,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었다.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녔던 고구려는 유교나 불교,도교와 같은 외래종교를 등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었다.그러나 고구려의 태도는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또 방대한 스텝지방에 자리한 돌궐제국의 칸들과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서역과 활발한 물물교류를 가졌다. ○외래종교 등거리서 조정 고구려가 망하면서 발해가 대신 나서 그 고토를 차지했다.고구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만주족을 끌어안고 나라를 세운 발해인들의 애환은 흔히 만주라 일컫는중국 동북지방 곳곳에 스며있다.그 많은 발해 무덤에서는 화려했던 문화의 흔적이 속속 드러났다.근·현대에 걸쳐 일어난 압록·두만강 건너로의 민족대이동은 어쩌면 귀소본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잡았다.항일독립전쟁에도 힘이 되어준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고구려 고토에 살고 있다. 북하의 중국쪽 두만강변 언덕에는 조선족 민족시인 이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다.그 시를 읊조려보며 내려다 본 강건너 무산시는 무척 적막했다.동양 제일이었다는 철광도시가 폐허로 변한 무산은 적막하다 못해 살벌했다.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지않은 땅 무산.그의 시가 구구절절 절실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 암울했던 시대에 더러는 일제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삼위로 들어갔다.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스탈린은 그들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고려인 삶도 조명 옛날 고구려인들이 칸들과 교류하던 바로 그 스텝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고구려인이 그들이다.그래서 중앙아시아 이방인들 틈새에서 외롭게 살아온 고구려인들도 만나기로 했다.우리 민족문화의 원초적 잔영이 어슴프레 보이는 땅으로까지 역류하여 들어간 고구려인의 이주는 우연이었을까.그러나 역사는 필연적일수 밖에 없다. 어떻든 이번 ‘민족 문화의 원류’를 탐사한 여행목적은 우선 고구려인이 서역과 문화를 교류하는데 뒤따랐던 두가지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중국 서안에서 돈황을 거치는 비단길과 그 밖의 북방통로를 살피는 것으로 압축된다.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 신라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짚어본다는 의도도 깔았다.그리고 비단길이 지나던 중국 오지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서 세계속의 한민족 위치를 발견코자 노력했다. □필자 약력 △1940년 서울생 △서울대 종교학과졸 △미 밴더빌트대 대학원석사 △미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철학박사(종교학) △정신문화연구원연구원 △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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